법과 원칙은 사회와 조직이 질서를 갖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도구이다. 갈수록 사람들 간의 다툼, 조직간의 다툼이나 이견에 법과 원칙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그것으로 질서가 잡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은 곪고 있을 지 모른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신뢰에 더 많이 의존하고 법에 덜 의존할수록,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은 더 잘 작동하는 법이다. ... 타인에 대한 믿음을 입증하느라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들일 필요가 없어진다면, 세상은 정말 훨씬 더 살기 편할 것이다."는 말을 되새기며 실천해야 한다.
[본문발췌]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어리석은 자는 마구 넘겨 버리지만, 현명한 자는 열심히 읽는다. 인생은 단 한 번만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장 파울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인생을 최대치로 활용한다는 것은 곧 인생에서 현명하고 훌륭한 선택을 최대한 많이 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선택에 대하여, 그리고 내 선택이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이해하는 것이 바로 경제학의 본질이다.
우리가 고기와 술, 빵을 먹으며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업자, 빵집 주인이 관용을 베풀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이익을 중시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거래할 때 그들의 인간애가 아닌 자기애에 호소한다. 또한 우리가 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유리한 점을 말한다.
우리가 신성한 미덕을 실행하는 것은 이웃과 인류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인류애보다 더 큰 사랑, 더 강력한 애정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롭고 고상한 것에 대한 사랑, 존엄과 위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탁월한 인격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남의 말은 잘 안 듣고 자기 혼자만 얘기하는 사람을 가끔 본다. 그런데 실은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일 수 있다. 사람들이 좀처럼 알아채기 힘든 부분이다. 사람이란 본래 자기 자신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자기 의견을 입증하기도 좋아한다. 각자 하나같이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대화를 할 때 내 얘기를 하기 위해 상대의 말을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대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인 적이 얼마나 있는가? 상상속의 공정한 관찰자는 당신의 대화 스타일을 어떻게 평가할까? 공정한 관찰자를 상상하면, 대화라는 행위가 상대의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내 얘기를 쏟아내는 힘겨운 운동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추는 춤으로 바뀌게 된다. 서로 경쟁하듯 내뱉는 독백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진정한 대화로 거듭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명예나 재산을 추구하는 삶에 열광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스미스가 쓴 '사랑받다'는 말이, 오늘날 연애나 가족 간의 사랑을 뜻하는 '사랑받다'와 같은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 훨씬 넓고 완전한 의미를 품고 있다. 사람들이 누구에게나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요약하여 표현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이 표현을 썼다.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고, 소중하게 여기길 바란다. .... '행복이란 감정은 사랑받는다는 느낌으로부터 생겨난다.' ....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반대로 내가 미움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깊은 불행을 느낀다.
자기기만은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인간이 살면서 겪는 혼란의 절반은 바로 이 자기기만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볼 줄 알기만 해도 자기기만이란 맹점에 빠지지 않는다. 자기기만을 계속 방치한다면 결국 우리는 거짓된 자기 모습을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다. 조물주는 자기기만이라는 인간의 약점을 방치하지 않았다. 또한 인간이 완전한 착각 속에 빠져 살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다행히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스스로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깨닫게 만들었다. 반대로 우리는 타인의 옳은 행동을 인정할 줄 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 역시 그 행도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걸 듣는다. 그 행동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을 표하고 보답을 하려 한다. 그 행동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강력하게 갈망하는 모든 감정들, 즉 사랑, 감사,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지켜보면서 우리 역시 그 행동을 모방하려고 한다.
세상은 복잡한 곳이다. 어제의 주가가 왜 올랐는지, 혹은 내렸는지는 세상 모든 사람이 잘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내일의 주가가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이야기 짓기 오류'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이야기 짓기 오류' ... 나심 탈레브, 복잡한 상황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이야기를 통해 받아들이는 것.
이성의 한계에 대한 자각은 인간이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일깨워주는 경고다. 인간에겐 분명 결점이 존재한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지혜의 시작이다.
파인만의 지적을 기억하라. 세상에서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은 절대로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았다면서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바다는 계속 들어갈수록 깊어진다.' 나심 탈레브가 2012년에 출간한 책 <안티프래질>에서 인용한 베니스의 속담이다. 많은 것을 알아갈수록, 앞으로 알아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더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척할 필요가 없다. 무지를 인정하면 더없이 행복할 수 있으므로. 스미스는 인간의 본성에 결점이 있음을 알려준다.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욕구는 반대 의견을 아예 묵살해버릴 정도의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여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 정작 진짜로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지는 않는다. 또한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사랑 받으려는 인간의 욕구 자체가 위험하다는 스미스의 말은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건강하고, 빚이 없으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의 행복에 무엇을 더하겠는가?
20대에는 의지, 30대에는 기지, 40대에는 판단이 지배한다. 오래 살기를 바라기보다 잘 살기를 바라라. - 벤자민 프랭클린
그런데 시계를 고를 때는 그토록 까다로운 사람이, 약속 시간은 왜 정확하게 지키지 못할까? 또 지금이 정확히 몇 시인지 확인하지도 않는 걸까? 그는 시간이라는 정보를 얻기 위해 새 시계를 산 게 아니다. 그저 시계의 그럴듯한 겉모습에 끌려 구입한 것뿐이다.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별로 유용하지 않은 하찮은 것들에 돈을 써버리고 스스로를 파산시키고 있는가? 장난감 애호가들은 장난감의 효용이 아니라 장난감의 효용을 높이는 기계의 성능을 좋아할뿐이다. 그들의 주머니는 작고 편리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이런 물건들을 더 많이 가지고 다니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옷에서는 찾기 힘든 새로운 주머니들까지 고안해낸다.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 무언가를 격렬하게 바라는 상황들 중 비교적 바람직한 상황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신중의 원칙, 정의의 원칙을 위반하면서까지 격정적인 욕망을 가질 만한 상황은 없다.
우선, 우리에게 가장 유용한 자질은 뛰어난 '이성'과 '지적 사고력'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모든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로인한 이익과 손해가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자제력'이다. 자제력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참을 수 있으며, 미래의 더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 오늘의 고통을 견딜 수 있다. 그리고 이성과 지적 사고력, 자제력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미덕이 바로 '신중'이다. 신중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유용한 자질이다. ...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혜와 미덕이 존경의 유일한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부도덕하고 어리석은 행위가 경멸의 유일한 대상도 아니라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 도덕적인 사람보다는 부자와 권세가들에게 존경심 가득한 눈길을 던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지 않은가. ...권세가들의 거실과 궁전에서는, 총명하고 박식한 동료들의 존경으로 성공과 승진이 결정되지 않는다. 무지하고 주제넘고 오만한 윗사람들의 별나고 어리석은 편애로 결정된다. 이처럼 권세가들의 거실과 궁전은 공적과 능력보다 아첨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곳이다. ...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가 자연스럽게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부로 누릴 수 있는 유쾌한 것들에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두둑한 주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는 생각에 그는 가습이 벅차오르는 드하다. 부유함으로 얻을 수 있는 다른 어떤 이익보다, 바로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어 그는 부자가 되려고 한다. ... 지위와 명성이 높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의 재산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환희를 대리만족하고 싶어 한다. 결국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대중의 관심사가 된다.
세인의 관심으로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자유를 상실하는 일이 뒤따르더라도, 사람들은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이를 통해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생과 근심, 굴욕을 충분히 보상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사실은, 이런 관심을 얻는 순간 모든 자유와 편안함, 근심 걱정 없는 안전함은 영원히 잃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운명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부자다. 스미스는 인생의 만족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돈과 명예 말고도 우리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 재산이나 명예, 권력을 통해 세인의 관심을 추구하는 대신, 지혜롭고 선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부자, 유명인, 권세가가 되어 타인에게 사랑받는 방법 외에 현명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도 타인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인간 표본이 제시된다.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성격과 행동을 만들어간다. 그중 하나는 천박하고 화려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반면, 다른 하나는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윤곽이 선명하고 우아하며 또 아름답다. 전자가 목적 없이 헤매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당긴다면, 후자는 열심히 배우고 신중하게 관찰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스미스가 제시하는 행복 처방전은 단순하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면 된다. 이는 곧 존경받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칭찬받고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이 실제의 나와 같으면 된다. 한 마디로, 정직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존중을 받으면 된다. 사랑을 받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명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스미스는 그중 두 번째 방법, 즉 지혜와 미덕의 길을 선택하라고 충고했다. 그렇다면 미덕이란 무엇일까?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이 질문에 대한 스미스의 첫 번째 답은 '적절성'이라 부르는 최소한의 기준을 지키는 것이다.
슬픔과 기쁨에는 차이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쁨은 작을수록, 슬픔은 클수록 쉽게 공감하는 경향이 있다. ... 슬픔보다 기쁨에 더 많이 공감하는 인간의 성향 때문에, 우리는 부를 과시하고 가난을 감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통스러운 우리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다. 가난한 우리의 처지가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우리가 겪는 고통의 반만큼도 연민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크나큰 비애다. 인간의 이런 본능 때문에 우리는 부를 추구하고 가난을 피하는 것이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더 훌륭한 방법으로, 스미스는 미덕을 갖춘 삶을 권했다. 미덕, 이 애매한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스미스가 생각하는 미덕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중 그가 가장 강조한 세 가지가 있으니, 바로 신중, 정의, 선행이다. 이를 갖춘 인간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게 된다. 즉, 이 세 가지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자격요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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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 = 자기 자신을 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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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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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 = 다른 사람을 선한 마음으로 대한다.
신중한 사람은 언제나 진지하고 열심히 연구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지식을 매개로 다른 사람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때문에 비록 그의 재능이 늘 훌륭한 것은 아닐지라도 언제나 진실한 것만은 틀림없다. 신중한 사람은 교활한 사기꾼의 교묘한 계략으로 당신을 속이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오만한 현학자의 건방진 태도로, 혹은 천박하고 경솔하게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처럼 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떠벌리지도 않는다. 그의 대화는 간결하고 겸손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대중의 관심과 명성을 얻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엉터리 홍보 기술들을 끔찍이 싫어한다.
신중한 사람은 진실하다. 그는 자신의 재주와 성공에 늘 겸손하다. 신중한 사람이 되기 위한 스미스의 조언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적게 말하고 많이 행동하라.'일 것이다.
단순히 내 행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행복을 해친다면, 절대로 공정한 관찰자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나에게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남에게서 정말 유용한 것을 빼앗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남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자신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이런 본성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공정한 관찰자의 공감을 절대 얻지 못한다.
신은 우리에게 두 손을 주었다. 하나는 받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주기 위함이다. - 빌리 그레이엄
거의 모든 미덕의 원칙들, 즉 신중, 자선, 관대, 감사, 우정이란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 이 원칙에 대해서는 예외의 경우가 많고, 수정이 필요한 경우도 대단히 많다. 때문에 이들을 온전히 지키면서 행동을 조절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정의의 원칙은 문법의 규칙에 비교할 수 있다. 반면 그 외의 다른 미덕에 관한 원칙들은 비평가들이 고상하고 격조 높은 문장을 쓰는데 필요하다고 얘기한 규칙과도 같다. 전자는 정밀하고 정확하고 필수불가결하다. 그에 비해 후자는 모호하고 명확하지 못하다. 또한 후자는 우리가 완벽을 추구할 때 필요한 정확한 지침을 주지 못한다. 단지 완벽함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을 제시해줄 뿐이다.
전지전능한 조물주는 인간에게 형제들의 감정과 판단을 존중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형제들이 자신의 행동을 인정해주면 기쁨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에 반대하면 마음에 상처를 받도록 가르쳤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조물주는 인간에게 인류의 심판관이라는 역할을 부여했다. 형제들은 조물주가 부여한 인간의 권한과 심판권을 인정한다. 따라서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질책 받을 때는 수치심과 굴욕을 느끼고, 반대로 칭찬을 받으면 의기양양해진다.
신뢰에 더 많이 의존하고 법에 덜 의존할수록,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은 더 잘 작동하는 법이다. ... 타인에 대한 믿음을 입증하느라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들일 필요가 없어진다면, 세상은 정말 훨씬 더 살기 편할 것이다.
<도덕감정론>에서도 밝혔지만 스미스가 가장 경멸한 사람은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었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란, 특정 설계나 비전에 따라 사회를 세우려 하는 지도자들을 뜻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기 위한 비전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그것이 이상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자신이 만든 비전에 파묻힌 그들은, 그로인해 자칫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이나 계획의 실행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 역시 보지 못한다. 시스템에 갇힌 몽상가는 그 일에 몰두해버린 채,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뿐만 아니라 그 계획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힘이 도사린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은 이 거대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자기 멋대로 쉽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체스판의 말들을 손으로 배열하는 것처럼 말이다. 체스판의 말들은 오직 사람의 손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체스판에서는 모든 말 하나하나가 자율성을 갖고 있다. 즉 입법 기관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율성과 외부적 힘, 그 두가지가 서로 일치하고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면, 인간 사회라는 게임은 편안하고 조화롭게 진행될 것이다. 게임의 결과 또한 행복하고 성공적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두 가지가 서로 반대되거나 다르다면, 인간 사회라는 게임은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 사회는 최악의 무질서 상태에 처할 것이다.
세상은 복잡한 곳이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억지로 애쓰지 말자. 내가 손잡이를 힘껏 돌린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문이 다 열리는 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 지주들이 주민들에게 땅을 똑같이 나눠준것처럼, 생필품도 똑같이 분배한다. 이런 식으로 지주들은 무의식중에, 부지불식중에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인류가 살아갈 수단을 제공해준다. 하늘의 섭리는 소수의 위풍당당한 지배자들에게 땅을 나눠줄 때, 땅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잊은 것도, 내버린 것도 아니다. 그 사람들은 땅을 받지 못한 대신, 땅에서 나오는 수확물을 받는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구성하는 요인을 생각했을 때, 그들의 행복은 지배자들의 행복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렇듯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안락하고 정신적으로 평화로운 삶의 수준을 거의 동일하게 누린다. 큰길가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거지조차도 안정을 맘껏 누린다. 이 거지들이 누리는 안정은 왕들이 전투를 해서라도 얻으려는 안정과 다를 바 없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이 시간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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