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의 기술은 일단 하나의 간단한 기술, 즉 형태심리학이 간략한 지침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한 기술처럼 보인다. 목표 대상 - 그것이 지각 행위이건, 학습이건, 심리 체계이건, 혹은 지금 우리가 다루는 나무 퍼즐이건 간에 - 은 우선 분리하고 분석해야 할 단순한 요소들의 합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 즉 하나의 형태이자 구조이다. 요소는 전체에 앞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소는 전체보다 더 즉각적인 것도, 더 오래된 것도 아니다. 나아가 전체를 결정짓는 것은 요소가 아니지만, 요소를 결정짓는 것은 전체다. 전체와 그 규칙에 대한 지식, 집합과 그 구조에 대한 지식은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에 대한 개별적 지식에서 추론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퍼즐 한 조각을 사흘 동안 쳐다볼 경우, 그것의 외형과 색깔에 대해 완벽하게 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퍼즐 조립이 좀더 진척된 상태의 모습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퍼즐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하나의 퍼즐 조각을 다른 조각에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며, 이 점에서 퍼즐의 기술과 바둑의 기술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조각들은 오직 함께 짜맞추어졌을 때만 파악 가능한 어떤 형태와 의미를 얻게 된다. 따로 떼어 관찰하면 퍼즐 조각 하나하나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나의 조각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자 불투명한 도전일 뿐이다. 하지만 몇 분 동안의 실험과 실패 끝에 또는 약 30초 만에 비범한 영감을 받아 이 조각을 이웃하는 다른 조각 하나와 연결시키는 데 성공하면 그 조각은 곧바로 사라지면서 조각으로서의 존재를 멈추게 된다. 영어로 '퍼즐puzzle' - 수수께끼 - 이라는 말이 아주 잘 나타내듯, 이 조각들을 맞추는 데 수반된 강도 높은 어려움 역시 더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럴 이유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나타난다. 기적적으로 연결된 두 조각은 이제 하나의 조각 역할을 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실수, 망설임, 혼란, 예상의 출발점이 된다. .... 퍼즐의 해법은 단지 가능성 있는 모든 결합을 차례로 실험해보는 데 있게 된다. ... 퍼즐이 지니는 외적인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퍼즐은 혼자 하는 놀이가 아니다. 퍼즐을 맞추는 이가 수행하는 각각의 행위는 퍼즐을 제작한 이가 이미 행한 행위다. 그가 몇 번이고 손에 쥐어보면서 검토하고 어루만지는 각각의 조각, 그가 시험하고 또 시험하는 각각의 조합, 각각의 모색, 각각의 직관, 각각의 희망, 각각의 절망은 타인에 의해 이미 결정되고 계산되고 연구되었던 것들이다. - 머리말
분재된 수목은 지나치게 성장이 억제되고 둔화되고 변이되어 실제로는 자라지 않으면서도 성장의 표지들을 내보이고 노화를 보여주는 종으로, 그것을 가꾸는 사람들은 식물의 성장이 물질적 배려보다는 주인이 바치는 정신적 몰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저는 신체적인 고통에 대해 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극심한 고통은, 자신의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느끼는 것임을....
어떤 일이든 전문이 아닌 쪽에 손을 대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일단 달가운 얼굴은 하지 않습니다. 백혈구가 체내의 이물질을 배제학려고 하듯이 접근을 거부하려고 듭니다. 그래도 위축되지 않고 끈질기게 하다 보면 나중에는 차츰 '에이, 어쩔 수 없지'라는 식으로 묵인하고 동석을 허락해주는 모양이지만, 적어도 처음에는 상당히 반발이 심합니다. '그 분야'가 좁을수록, 전문적일수록, 그리고 권위적일수록 사람들의 자부심이나 배타성도 강하고 거기서 날아오는 저항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 소설을 쓴다는 - 혹은 스토리를 풀어간다는 - 것은 상당히 저속의 기어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실감으로 말하자면, 걷는 것보다는 약간 빠를지도 모르지만 자전거로 가는 것보다는 느리다, 라는 정도의 속도입니다. 의식의 기본적인 작동이 그런 느린 속도에 적합한 사람도 있고 적합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소설가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스토리'라는 형태로 치환해서 표현하려고 합니다. 원래 있었던 형태와 거기서 생겨난 새로운 형태 사이의 '낙차'를 통해서, 그 낙차의 다이너미즘을 사다리처럼 이용해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상당히 멀리 에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입니다.
어렸을 때 어떤 책에서 후지 산을 구경하러 간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그때까지 후지 산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산기슭에 서서 몇 가지 각도로 바라보고 '아, 후지 산이란 이런 곳이구나. 그래, 역시 이러이러한 점이 멋있어'라고 납득하고 돌아갔습니다. 매우 효율성이 뛰어나지요. 얘기가 빨라요. 그런데 머리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쉽게는 후지 산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혼자 남아서 실제로 자기 발로 정상까지 올라갑니다. 그러자니 시간도 걸리고 힘도 듭니다. 체력을 소모해 녹초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끝에야 겨우 '아, 그렇구나, 이게 후지 산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한다고 할까, 일단 몸으로 납득합니다. 소설가라는 종족은(적어도 그 대부분은) 어느 쪽인가 하면 후자,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머리가 그리 좋지 않은 사람 쪽에 속합니다. 실제로 내 발로 정상까지 올라가보지 않고서는 후지 산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몇 번을 올라가도 아직 잘 모르겠다, 혹은 올라가 볼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다, 라는 게 소설가의 천성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건 뭐, 효율성을 논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문제지요. 아무튼 머리 좋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알지 못할 일입니다.
아무리 거기에 올바른 슬로건이 있고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어도 그 올바름이나 아름다움을 뒷받침해줄 만한 영혼의 힘, 모럴의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 때 몸으로 배운 것은, 그리고 지금도 확신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말에는 확실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올바른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공정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말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제멋대로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전에 <뉴욕 타임스> (2014/2/2)를 읽노라니 데뷔 당시의 비틀스에 대해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They produced a sound that was fresh, energetic and unmistakably their own. (그들이 창조해낸 사운드는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들 자신의 것이었다.) 아주 심플한 표현이지만 이것이 오리지낼리티의 정의로서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것인 어떤 것.' 오리지낼리티란 무엇인가, 그것을 말로 정의하기는 몸시 어렵지만 그것이 몰고 오는 심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나는 가능하다면 소설을 쓰는 일로 그러한 '심적인 상태'를 내 안에서 다시 일으켜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멋진 기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날 속에 또 다른 새로운 날이 생겨난 것 같은, 그런 상쾌한 기분입니다. 그리고 만일 가능하다면 내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그것과 똑같은 기분을 맛보게 하고 싶다. 사람들의 마음의 벽에 새로운 창을 내고 그곳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고 싶다. 그것이 소설을 쓰면서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이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론 따위는 빼고, 그냥 단순하게.
소설가가 되려면 어떤 훈련이나 습관이 필요할까? 책을 많이 읽는것, 자신이 보는 사물이나 사상을 아무튼 세세하게 관찰하는 습관(명쾌한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그 일의 원래 모습을 소재로서 최대한 현상에 가까운 형태로 머릿속에 생생하게 담아두는 것)...
인생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경향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인간은 늦건 빠르건 반드시 다른 한쪽에서 날아오는 보복(혹은 반동)을 받게 됩니다. 한쪽 편으로 기울어진 저울은 필연적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육체적인physical 힘과 정신적인spiritual 힘은 말하자면 자동차의 양쪽 두 개의 바퀴입니다. 그것이 번갈아 균형을 잡으며 제 기능을 다할 때, 가장 올바른 방향성과 가장 효과적인 힘이 생겨납니다.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정비하고 유지할 것 - 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위로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원자력발전은 자원이 부족한 일본으로서는 아무래도 꼭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원칙적으로 원자력발전에는 반대 입장이지만, 만일 신뢰할 수 있는 관리자에 의해 주의 깊게 관리되고 합당한 제삼의 기관이 엄격하게 운영을 감시하고 모든 정보가 정확히 공개된다면 그 때는 어느 정도 협상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처럼 치명적인 피해를 몰고 올 가능성이 있는 설비를, 한 국가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품은 시스템을, '수치 중시' '효율 우선'의 체질을 가진 영리기업에서 운영할 때,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공감이 결락된 '기계적 암기' '상의하달'의 관료 조직이 그것을 '지도' 하고 '감시'할 때, 거기에서는 소름끼칠 정도의 리스크가 생겨납니다. 그것은 국토를 오염시키고 자연을 뒤틀고 국민의 신체를 손상시키고 국가의 신용을 실추시키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고유의 생활환경을 앗아 가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어떤 시대에나 어떤 세상에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입니다. 수만명에 달하는 후쿠시마 사람들을 고향 땅에서 몰아낸 것도 애초의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그 '효율'입니다. '원자력발전은 효율성이 높은 에너지고 따라서 선이다'라는 발상이, 그런 발상에서부터 결과적으로 날조되어진 '안전 신화'라는 허구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회복하기 어려운 참사를, 이 나라에 몰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패배, 라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효율'이라는 성급하고 위험한 가치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발상의 축을 개개인 속에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축을 공동체=커뮤니티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소설가는 소설을 창작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에 의해 스스로 어떤 부분에서는 창작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때그때 주어진 구두를 신고 거기에 내 발사이즈를 맞춰 행동에 들어갑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발 사이즈에 구두를 맞추는 게 아니라 구두 사이즈에 발을 맞추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일단 안 될 일이지만 소설가로 오래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그건 가공의 일이니까. 그리고 가공의 일이란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똑같은 것이니까. 꿈이란 - 그것이 자면서 꾸는 꿈이건 깨어서 꾸는 꿈이건 -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요. 나는 기본적으로 그 흐름에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따르는 한, 온갖 '안 될 일'이 자유롭게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소설 쓰는 일의 큰 기쁨입니다.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면 나 혼자 즐기는 수밖에 없지. 리키 넬슨 <가든파티>
이야기=스토리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과 사람을 근간에서부터 서로 이어줍니다.
태어날 때 부모의 환영과 보살핌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 전 가족의 보살핌과 배웅을 받아 왔는데, 요즘은 생의 마지막길을 홀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
[본문발췌]
나이든 사람들은 항상 머릿속에 생각이 많은 법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 하밀 할아버지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다.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한다.
법이란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로자 아줌마가 개였다면, 진작에 사람들이 안락사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사람에게보다 개에게 더 친절한 탓에 사람이 고통 없이 죽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바캉스 장소를 산과 바다 중에서 선택하듯이 사람들도 그렇게 선택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관심을 끌지 못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 사람들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듯이,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나치나 베트남 전쟁같은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을 선택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층에 사는, 과거에 너무 고통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유태인 노파 같은 건 누구의 관심사도 될 수 없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몇백만 이상의 돈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돈이 적게 드는 일일수록 그만큼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까...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
무서워하는 데는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너뿐.
[슬픈 결말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 조경란(소설가)
로자 아줌마가 이제 천천히 죽어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모모는 열다섯 살 때의 아주머니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건 지금의 늙은 로자 아줌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진 속의 처녀는 앞날이 충만하고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이제 모모는 생은 그러한 것들로만 채워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파괴해가는 것은 다름아닌 生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했다. 로자 아줌마가 의식을 잃기 시작했을 때 모모는 아주머니를 아주머니가 평소에 사랑했던 방, 혼자만의 방, 무서운 것이 있을 땐 혼자 숨어들곤 했던 지하실의 방으로 데리고 간다. 로자 아줌마는 거기서 죽었고 그녀가 죽은 지 삼 주 후, 진동하는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사람들이 지하실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까지 모모는 거기서 아주머니와 자고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모모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새롭게 살아갈 낯선 땅을 찾아가던 길에 모모는 문득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 들기 전에 해주었던 말을 떠올린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는 그 말을. 그리고 모모는 깨닫는다. 손에 쥔 달걀 하나,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 로자 아줌마를 죽인 것은 생이지만 그녀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도 바로 그 신비롭고 경이로운 生이라는 사실 또한. 그건 모모의 깨달음이자 곧 그 책을 읽는 우리들의 깨달음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