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후세대를 위해서 적게 쓰고, 조금 소유하는 것! 작은 것이 아름답다.

 

 

[본문발췌]

 

 

동기는 제각기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작은 집에 살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나아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치 않은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무엇이 행복에 가깝고 무엇이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한 뒤에 인생을 꾸려가고자 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집이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  Jay Shafer

  • 집에 들여놓는 물건은 적을수록 좋으며 쓸데없는 공간을 관리하는 일은 소모적일 뿐이다.

  • 생활을 간편하게 꾸려가고자 할 때 가장 어려운 건, 무엇이 자신의 행복과 연결되는가를 깊이 따져보고 그 이외의 불필요한 것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적당히 기울어진 지붕과 그늘을 만들어주는 차양을 좋아했어요. 그것이 바로 내 행복을 이어가게 해주는 것이었죠.

  • 너무 큰 집은 집이라기보다 채무자의 감옥입니다.

  • 작은 집에 사는 주된 이유가 지구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돈을 절약하겠다는 실천적인 면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나는 그저 큰 집에 쓸 시간과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을 뿐이지요.

 

 

"공허한 욕망들을 내려놓는다." -  Gregory Johnson

  • 소유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필요치 않은 물건을 배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그 어떤 물건보다도 우위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 소유한 물건만큼 그에 상응하는 자금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 물건들이 우리 곁에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물건이 인간의 행동양식을 지배하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 소유하는 공간 자체를 줄이고 쓸데없는 물건을 상대할 시간은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없으면 생활에 지장을 줄 만한 최소한의 물건과 진심으로 나와 함께하고 싶은 물건만이 마지막까지 남게 될 자신의 친구다. 이것이 바로 심플 라이프의 법칙이다.

  • 입지 조건과 건물 구조를 연구하여 태양과 바람, 기온 등의 변화를 이용해 기계를 쓰지 않고 자연의 힘을 활용하는 방식을 보통 '자연 에너지의 수동적인 이용'이라고 말한다. 한편 기계를 이용하는 경우는 '자연 에너지의 능동적인 이용'이라고 하는데, 태양광 발전이나 풍력발전이 그 대표적인 예다.

  • 물건과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환경자원에 대한 배려와 지역 사회에 대한 공헌이 가능하다.

  • 수입이 바닥나도록 생활하는 게 아니라, 수입의 절반 정도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국에서 좋은 급료를 받으면서 개발도상국에서 생활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수입의 105퍼센트에 해당하는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 bobos. 부유층(bourgeois)이면서 보헤미안(bohemian)적인 예술 감각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문화와 소비를 주도하는 엘리트층인 보보스는, 미국 신경제의 활황이 낳은 새로운 계층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반물질주의적인 태도와 창의성, 높은 교육 수준 등을 갖고 있지 않으면 보보스라고 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성공(사회적 신분이나 수입)에 만족하지 않고 색다른 취미나 독특한 생활 형태를 즐기는 부류. 자연식에 흥미를 보이고 스포츠를 즐기며 모험적인 여행을 좋아한다. 자연이나 예술에 친숙하고 환경운동에도 관심이 있다. 집과 자동차 등 물질적 풍요에 매달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정신적 만족 추구에 무게를 둔다.

  • 생활에 필요한 설비를 복수의 사람이 공유하는 건 그 방식과 관계없이 작은 집을 통해 생활을 간소하게 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보통의 주택이 오늘날처럼 비대해진 것은, 옛날 같으면 각 지역에서 공용하던 하루에 한 번밖에 쓰지 않는 설비를 '한 집에 한 대씩' 가정에 들여놓고 나아가 각 기능을 위한 전용 방까지 만들기 시작한 것이 원인일 것이다. 스몰하우스가 모여살 수 있는 공동체. 주방, 세탁기, 화장실, 샤워 시설을 공유....

  • 공부도 그렇고 직업도 그렇고 눈앞의 성과만을 위해 마감에 쫓기듯 일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압박에서 해방되어 무언가에 차분히 몰두함으로써 얻어지는 결실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사용하는 시간과 돈이 늘었고, 자원봉사 등에 참여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충실히 마쳤음을 확신하면서 잠자리에 드는 날이 많아지면서, 나날이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집은 아무것도 해치지 않는다." - Dee Williams

  • 환경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작은 집에서 소박하게 사는 것이 그 어떤 방법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있게 합니다.

  • 건축 현장을 돌며 폐자재를 주워 그것들을 건축자재로 적극 활용, 버려진 청바지를 잘게 찢어 내벽과 외벽 사이의 단열재로 이용.

  • '더 크게, 더 많이, 더 빠르게'라는 의미에서 인류의 성장은 조만간 정체될지도 모른다. 자연의 순환 원리와 태양광이라는 외부 요소로부터 공급되는 '느린 에너지'를 통해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작고 단순하며 소박한 생활이 더 좋다느 생각은 갈수록 많은 사람에게 공통의 가치체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냥 살아가기만 하는 건 싫다, 생활을 위한 생활로 끝내고 싶지는 않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나는 바로 이 점이 스몰하우스 운동이 퍼져 나가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본다. 평온한 생활을 하고 싶은 욕구,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바람, 이 모두가 일차적으론 자기 자신의 문제다. 자기 마음을 향해 묻고 옳다고 생각하는 답을 찾아 그대로 사는 것, 이것을 자기중심적이라 부른다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 환경문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진 이유를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미덕으로 간주해온 선진국들의 경제지상주의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 개인정신주의와 생태환경의 조화. ... 개인정신주의는 개인의 마음속이 평온하고 자유로운 것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너무 적지도 않고 너무 많지도 않게 균형이 잡힌 부(富)라는 것은, 그 상태를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개인의 내적 균형이 지구 전체의 균형으로 이어져야 한다.

 

 

"자유를 얻는데 돈이 들진 않는다." - Lamar Alexander

  • 규모가 작다는 점은 일반인이 손을 대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다. 규모가 커질수록 혹은 대량으로 생산할수록 분업 체제의 효율이 높아진다. 자본을 집약하고 대대적인 설비를 갖추어 역할을 분담하여 사람들을 동원해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대규모 공업이다. 전문 건설업자의 주택이 그 전형이다. 자체적으로 설비를 갖춘 공장에서 똑같은 형태의 재료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전국 각지의 현장으로 반입하여 조립한다. 이런 방식은 부자를 더욱 부자가 되게 하고, 공정의 각 부문을 맡는 단순 작업은 노동자를 더욱 지루하게 만든다. 결국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실업, 과로, 노동조건 악화, 저소득, 빈부격차의 확대 등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이다.

  • 미디어에 의한 세뇌를 거부하고, '큰 집에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에 노출된 환경을 끊어야 합니다.

  • 수요와 공급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르는 이러한 경제는 차라리 '쳇바퀴'라고 표현하는 편이 어울린다. 풍요로워졌다, GDP가 늘었다, 돈이 늘었다고 하면 듣기야 좋겠지만 실제로 증폭하는 건 욕망과 시기심 그리고 지루하고 가혹한 장시간의 노동뿐이다. 쳇바퀴 경제는 일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욕망이나 시기심에 떠밀린 노동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도 없다. 이러한 모든 것을 '경제효과'니 '소비 향상'이니 하며 좋은 것으로 취급하는 형태가 바로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을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마구잡이 소비를 향상시키는 일이 아닐 것이다. 소비예찬론이 무조건 이야기의 결말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는 무엇에 의해 무엇을 목적으로 경제가 돌고 있는지가 중요해지는 시대다.

 

 

"누구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로컬 유토피아" - David Bell

  • 빚을 내서 물건을 하는 행위는 미래의 시간까지 구속하는 일이므로 아무리 호화스러운 것을 산다 해도 그걸 자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편 적은 돈으로 생활해나갈 궁리를 함으로써 자유를 획득하는 방식은 좀 더 현실성이 있다. 이런 경우는 과소비를 부추기는 요즘의 풍조에 쓸데없이 말려들지 않고 거리를 둔다는 의미에서 '경제로부터의 자유'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 '경제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돈 같은 건 많이 필요치 않다. 정작 필요한 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기존 경제에 현혹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 그리고 그 이상의 짐이 되는 일을 자신의 생활 영역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정신력뿐이다.

  • 자본주의 사회를 적절히 이용하여 이미 확립된 풍요로부터 어느 정도 혜택을 받으면서 한편으로 자신의 소비를 억제하고 가능한 한 자유롭게 사는 편이 더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다. 스몰하우스에 사는 사람 대부분은 많든 적든 이처럼 어깨에 힘을 뺀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연간 수입 1백만엔 이하로 알아서 살아가겠다는 사람의 선택을 금지하는 국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도 국소적이고 개인적인 유토피아를 만들어갈 수는 있다. 결국 각 개인의 '로컬 유토피아(여기서 '로컬'은 '자기 주변'이라는 의미일 뿐 '지역적인'이라는 뜻은 아니다)'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다. 과도하게 일을 하지 않아도 평화롭고 건강한 생활이 가능한,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자유가 확보되어 있는 상태를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옛사람들이 남겨준 지혜의 축적을 통해 현대 사회의 모든 곳까지 적용된다면 더욱 훌륭한 유토피아가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지속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생각도 다른 스몰하우스 주민들과 비슷하다. 경제적 자유(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빚이 없고 매월 나가는 고정비가 적다는 의미에서)와 시간적 자유(오프그리드에서 생활하기 위해 다소의 관리는 필요하지만 내킬 때 하면 된다는 점에서)를 바탕으로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돌아봤을 때 자신만이 아니라 지구환경에도 유익한 집과 생활이 완성되어 있는 삶을 추구한다. ... 벨은 공구점에서 간단히 살 수 있는 자재 범위 안에서 몇천만엔씩 들이지 않고도 하이테크 주택에 필적하는 순환형 생활을 완성해가고 있다. 자연광을 끌어들이고 환기구를 설치하여 수동적으로 공기 순환을 촉진한다. 빗물을 모으고 전기를 만들고 배수는 텃밭으로 돌려보낸다.

  • 청경우독의 삶. '책은 자신의 내부에 얼어 있던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 - 카프카

  • 잘 다니던 직업을 그만두고 임대 아파트를 뛰쳐나와 스몰하우스를 짓고 산 결과, 벨은 무엇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까지 해서 경제적 자유와 시간적 자유를 찾으려는 이유가 뭘가. 그는 그것이 물건과 정보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기 이전이 것, 즉 사람의 마음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파괴되어 가는 지구환경과 더불어 '쳇바퀴 경제'가 희생해온 하나의 측면이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주어진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면 될지, 전달된 물건에 무엇을 추가해서 어디로 갖고 가면 될지, 던져진 말에 어떻게 대답하면 될지 등의 규칙을 익히기 이전이 사람 마음, 기계화되기 이전의 사람 마음, 봐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멋대로 선별하기 이전이, 사람 마음, 바로 그런 마음에 그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 비행선의 곤돌라 안이나 지붕이 딸린 배 위, 호숫가 오두막 같은 공간에서 자기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만을 가지고 들어가 자신의 우주를 만들어 살고 싶다고(적어도 어린 시절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그런 상상 속에서는 작은 공간이나 얼마 안되는 물건들과 더불어 활짝 열린 자신의 의식을 인식하면서 내가 이 세상의 주역이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는 인간이 틀림없이 하나의 온전한 존재이고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이며 계속 변화하면서 나아가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 평온함으로 내 안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마주친 모든 것에 대해, 나와 마주쳤다는 단지 그 이유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기쁨으로 내 마음은 꽉 채워질 것이다.

  • 그런데 현실 사회는 어떤가. 물건과 정보의 유통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에 장악되어 우리의 삶조차 조종되고 바꿔치기되며 그런 것들 없이는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다시 말해 '경제 속에서의 자유'에 의해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지배당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지배에 피동적으로 참가하지 않으면 월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쳇바퀴 경제'의 실상이다. 시간이 없다거나 돈이 없다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쳇바퀴 경제의 진짜 죄목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교묘하게 지배하여 돈벌이나 소비에 관한 절대적인 예찬의 윤리를 만들어내는다는 점이다. 시기심에 불타 소비 행동으로 치닫거나, 물건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톱니바퀴가 되거나, 그렇게 하여 손에 넣은 큰 차를 타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이런 것이 이 사회의 진짜 문제가 아닐까. 아직은 그러한 경제지상주의의 대행진에서 자기 자신을 이탈 시키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탈을 위한 구체적은 구조가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주류'라는 막연한 안도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주류의 축이 되어 있는 것이 흔히 말하는 '내 집'이라면, 이탈을 위한 구체적인 수단 중 하나는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그것이 스몰하우스다.

 

 

"나를 설레게 하는 집" - Diana Lorence

  • 그녀는 미디어라는 소통의 도구가 산탄총처럼 쏟아내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는 정보를 끌어안고 뭘 하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내몰리는 일들과는 거의 인연이 없이 지낸다.

  • 가장 사치스러운 생활은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과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 소박한 삶과 고도의 사색.

  • '나는 어릴 때부터 내적인 의식세계와 외적인 현실세계의 틈에서 줄곧 침묵하며 지내왔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외적인 세계의 의미를 공유하지도 못했지만,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만들어나갈 힘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당혹감은 어쩌면 이런 것이었으리라. 우리는 세상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감정과 신체감각, 과학적 지식, 경제의 흐름, 정치적 이데올로기, 가치관, 신앙 등을 통해 다양한 의미들을 외부 세계에서 나름대로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고 각자의 내면에 그 세계의 모습과 문맥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연결해주는 '의미'를 공유해야 비로소 타인과 관계를 맺고 소통할 수 있다.

  • 다이애나는 '생활을 단순하게 하기 위한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내게 있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지워나가고 필요한 것만을 남기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이성이 이루어내는 업이지요.(의도적인 것). 또 하나는 내가 정말 좋하는 것으로 생활을 채우고 그 외의 것들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기를 기다리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이루어낸 업입니다. (자연적인 것).

  • 야나기 무네요시, '자연적인 것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사람의 의도가 끼어든 것은 그게 무엇이든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공예가는 몇 년 동안 '의도'를 불어넣어 더 좋은 공예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숙련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그 의도가 모두 사라지고 난 뒤 그 손에서 자연스럽게 작품이 만들어질 때다. 비로소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에 영혼이 깃들고, '살아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무네요시는 그것을 '도(道)'라고 부른다.

  • 우리는 대체 왜 그렇게 생활을 단순하게 하고 싶어 하는 걸까. 무엇보다 단순하지 않은 생활은 피곤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일가. 생활이 단순해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오케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머릿속에 돈에 대한 생각밖에 없어서 모든 것을 경제적 관점에서만 판단하고 무엇이 돈벌이로 이어질까만을 생각하며 사는 생활,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함'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돈벌이로 이어지지 않는 물건이나 인간관계는 처음부터 배제하고 생활의 모든 측면을 '돈을 번다'는 목적 아래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뭔가 이상하다. 우리 인간은 많든 적든 그저 '살아가는' 일을 넘어 진실을, 다시 말해 세계, 자연, 사회, 인간 등의 객관적이고 올바른 모습이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하는 존재다. 이 말을 좀 더 수사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에게는 '세계를 단순하게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여전히 많고, 나와는 전혀 다른 것을 믿는 사람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다시 말해, 한 인간에게 있어 세상 자체는 아직 단순하지 않다.

  •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게 더 단순한 삶인지 모르지만, 인류의 그토록 긴 역사 속의 극히 부분적인 이데올로기 안에서 미련하게 춤추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속삭임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고 사는 게 더 단순할지 모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건 가짜의 삶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말고도 이슬람교가 있다는 걸 알아버린 그리스도교도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만을 무조건 유일하게 믿으며 인생의 지침을 거기서만 찾아내기 힘들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범주의 지식을 넘어서 내가 보는 세상, 다시 말해 자신의 시야와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준별해나가는 과정은 사람의 성장 과정과 병행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이 태어나 자란 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사람은 다른 집에서 마치 그곳이 우주의 중심인 양 자란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집을 그렇게 보듯이 그들은 나의 집을 지극히 익명적인 다수의 집 가운데 하나로 본다. 그렇게 깨달은 것은 이윽고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로, 나라로, 지구로 넓어지면서 동시에 자신을 중심으로 한 주관적 삶에 대한 믿음은 약해진다.

  • 생활을 단순하게 하는 하나의 목적은, 단순히 '생활한다'는 것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세계의 객관적인 모습과 그 세계 안에서 지금이라는 시대와 나라는 존재의 위치를 다시금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바라는 '단순한 생활'은 이 세계를 단순하다고 믿어버리고서 거만한 얼굴로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하지 않은 복잡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서 세계를 가능한 한 단순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삶이 아닐까. ... 숲 속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는 다이애나지만, 그녀의 생활신조는 '어렵게 생각하기를 멈추고 무조건 편안하게 살자'는 이완적인 인생철학과는 다르다. 그녀의 집에는 시간이 정지하고 있다고 한다. 정신을 연마하고 시간으로부터 초월한 곳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는 그러한 장소가 바로 그녀의 스몰하우스인 것이다. 물론 '대화'라는 것도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예술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과학이나 책에서 그것을 찾을지도 모르며, 좀 더 소박하게 자연과 친수해지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방법이 어떻든간에, 그녀처럼 자신의 상태와 지식을 돌이켜본 뒤 더욱 넓은 시야로 그것을 바라보기 위한 조용한 시간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275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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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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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행복을 위한 삶의 지혜! 

 

 

[본문발췌]

 

 

오늘은 좋은 날이다. 매일 매일을 위한 생각 모음집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무작위로 생각들을 모아놓지 않고 논리적 체계를 갖추었다. 인생의 손님들인 사랑, 행복, 영혼, 신, 믿음, 삶, 죽음, 말, 행동, 진리, 거짓, 노동, 고통, 학문, 분노, 오만 등의 주제들이 반복되도록 했고, 하루의 생각이 앞선 생각과 관련해 의미를 가지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하루하루가 서로 연결된다. 또한 우리 행동의 지침이 되는 총체적인 철학으로 완결성을 가지도록 했다. ... - 1908-1910, 톨스토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걸을 수 있는데도 걷지 않는다면 다리가 약해진다. 부와 사치에만 익숙해지면 소박한 삶을 잊게 되고 내면적인 즐거움과 평화,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육체를 보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자들은 한결같이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좋다고 말한다. (가진 것이 적은 사람)

 

 

언제 어떻게 말하는지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떻게 침묵해야 하는가다. 잘못 말한 것을 후회하는 일은 많다. 하지만 침묵한 것을 후회하는 경우는 없다. 더 많이 말하고 싶어 할수록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릴 위험은 커진다. ...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는 두 가지 행동이 있다.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 그리고 침묵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이다.

 

 

일하기 위해 시간을 내라. 그것은 성공의 대가이다. 생각하기 위해 시간을 내라. 그것은 능력의 근원이다. 운동하기 위해 시간을 내라. 그것은 끊임없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독서하기 위해 시간을 내라. 그것은 지혜의 원천이다. 친절하기 위해 시간을 내라. 그것은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꿈을 꾸기 위해 시간을 내라. 그것은 대망을 품는 일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시간을 내라. 그것은 구원받은 자의 특권이다. 주위를 살펴보는데 시간을 내라. 이기적으로 살기에는 하루가 너무 짧다. 웃기 위해 시간을 내라.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다.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내라. 그것은 인생의 영원한 투자이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삶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리라. 30분 후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 생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것은 죽음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행동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러니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현명하고자 한다면 현명하게 질문하는 방법, 주의 깊게 듣는 태도, 그리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 침묵하는 방법을 알아야만 한다.

 

 

작은 선행이 우리의 모습을 결정한다. 따라서 진정으로 사소한 일이란 없다. 인생은 작고 사소한, 눈에 뜨이지조차 않는 일들로 이루어진다. 좋은 말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사랑이라는 커다란 나무가 자라날 것이다. 확신하지 못한다면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 이는 아주 중요한 원칙이다. 무언가 성취하려면 노력해야 한다. 가장 힘들고도 중요한 노력은 떠들어대지 않는 것이다. 귀 기울여 들으라. 그리고 아주 조금만 말하라.

 

 

물이 산꼭대기에 머물지 않듯 겸손은 오만과 함께 머물지 못한다. 물과 겸손은 모두 낮은 곳을 향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는 것만큼 스스로를 개선시켜주는 일은 없다. 겸손을 배우려면 혼자 있는 시간에 자신의 오만한 생각과 싸워야 한다.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 많을수록 더 큰 속박을 당하게 된다. 크게 바랄수록 자유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일하는가를 기준으로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 게으르고 부유한 이들이 존경받는 반면, 농부나 기술자처럼 노동하는 이들은 존경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일상적 노동을 무시하고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노동, 특히 흙을 다루는 노동은 몸과 영혼 모두에 유익하다. 마음에 안식을 줄 뿐만 아니라 자연에 가깝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손을 써서 일하지 않는 사람은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일하지 않으면서 호화롭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이 노동한 대가를 빼앗는 것이다. 부자들은 이런 노동을 무시하지만 순수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비는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동은 영혼의 양식이 된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부나 화려함같이 없어도 될 것을 찾지 말고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라. 육체의 욕구를 들어주면 줄수록 영혼의 힘은 약해진다. 현자와 성인들이 일생을 금욕적으로 살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현명한 대답이다. 손보다 혀가 더 많이 휴식하게끔 하라. 침묵은 무지하고 무례한 이에 대한 최고의 대답이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해 후회스러운 일이 백 가지 중 하나라면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해버려 후회스러운 일은 백 가지 중 아흔아홉이다.

 

 

인간의 운명은 그 생각의 흐름을 따른다. 인간은 생각으로 자기 삶을 내다보고 또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생각은 우리를 지옥으로도 천국으로도 보낼 수 있다. 이는 천국이나 지옥이 아닌, 현재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진리를 추구할 때 비로소 삶이 시작된다. 진리 추구를 중단할 때 삶은 끝난다. 우리의 삶과 생각은 서로 같다. 삶은 마음에서 시작되어 생각으로 형태 지워진다. 좋은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기쁨은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라다닌다.

 

 

우리는 영원한 삶과 현재를 동시에 살아야 한다. 일할 때는 영원히 살 것처럼 하고 남을 대할 때에는 오늘밤에 죽을 것처럼 하라. 인생의 모든 것은 단순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을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죽음을 단순하고 분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영적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커다란 배에 올라탄 승객과 같다. 선장은 승객 중 누가 언제 배를 떠나게 될 것인지가 기록된 비밀 명단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인생의 법을 지키며 평화와 사랑, 모든 친구들과의 화합 속에서 흘러가도록 하라.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단순한 언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

 

 

전투에서 수천 명을 상대로 수천 번 승리한 것과 자기 자신을 상대로 한 번 승리한 것을 비교하면 후자가 훨씬 더 가치 있다. 살면 살수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지혜를 알게 된다. 인간의 진정한 힘은 난폭함이 아니라 고요함에 있다. 서두를수록 할 수 있는 일은 적어진다.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이미 모두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우리들 가슴에 있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 이는 마치 늘 품고 다니는 어린 양을 두리번거리며 찾는 격이다. 첫째가는 지혜는 자신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둘째가는 미덕은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는 것인데 이것 또한 어렵다.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 남들을 위해 살라. 그러면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불행한 이여, 어디서 방황하는가? 더 나은 삶을 찾아 헤매는가? 당신은 도망치고 있다. 행복은 정작 당신 안에 있는데 말이다. 자기 안에 없는 행복은 다른 어디에도 없다. 행복은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다.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삶의 목표는 기쁨이다. 하늘, 태양, 별, 풀, 나무, 동물,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기쁨을 느껴야 한다. 어린아이처럼 늘 즐거워하도록 하라.

 

 

복잡한 이유를 들어 정당화하는 행동은 나쁜 행동이다. 양심의 결정은 언제나 단순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다. 배고픈 이를 먹이고 헐벗은 이를 입히고 병든 이를 찾아가 위로하는 것은 모두 선행이다. 우리가 자신의 편견과 잘못, 인생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선행이 그것이다.

 

 

자기 자신만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오만하게 된다. 오만은 자신만을 위한 사랑이다. 모든 인간의 평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정한 사랑은 없다.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을 심판한다. 누구는 착하고 누구는 악하며 누구는 멍청하고 누구는 똑똑하다는 식으로. 사람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존재여서 매일 그 모습이 다르다. 멍청한 이가 똑똑해지고 악한 이가 선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심판은 과거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는데 현재의 그 사람은 이미 달라져 있게 마련이다. 오만한 이는 제아무리 많은 미덕을 가졌어도 사랑받지 못한다. 큰 바다에 있는 물과 산속 계곡에 있는 물을 보고 배우라. 얕은 계곡물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만 깊은 바닷물은 고요하고 움직임도 거의 없다. 타인이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혹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다. 그럴 때에는 모두에게 같은 영혼이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하라.

 

 

시간이 흘러간다고들 말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다. 인생은 너무 짧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안겨주지도 못할 만큼 짧다. 그러니 어서 서둘러 친절한 행동을 하라. ... 인생은 공간이나 시간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 바깥에, 영혼 속에 존재한다.

 

 

삶이 곧 끝나버린다고 생각하며 살라. 그러면 남은 시간이 선물로 느껴질 것이다. 현재의 삶은 최고의 축복이다. 우리는 다른 때, 다른 곳에서 더 큰 축복을 얻게 되리라 기대하며 현재의 기쁨을 무시하고는 한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좋은 때는 없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복을 바란다. 하지만 복은 이미 주어졌다. 타인을 사랑한다면 쉽게 복을 얻을 수 있다. 행복해지려면 한 가지만 하면 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그러면 끝없는 축복과 행복을 얻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사랑 속에서 살게 되면 고통과 고난의 삶이 순식간에 행복과 축복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 축복은 사랑으로 가득 찬 심장 안에 있다.

 

 

해서 안 되는 일들은 하지 말라. 그러다보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욕망에 자신을 맡기고 즐거움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욕망이 점점 커져 결국에는 우리 자신을 옭아매고 만다. ... "모두가 더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요 없는 일은 하지 말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들의 대부분 그렇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현재라는 아주 짧은 순간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 전체를 집약해 준다. 현재에 행하는 일만 생각하라. 과거의 일은 생각하면 후회스러워진다. 미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공상일 뿐이다. 현재에 집중하라. 그것이 진정한 삶이다. 사랑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랑할 수는 없다. 오직 현재, 지금 이 순간에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성스러움의 발현이다. 성스러움에는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발현되는 것이다.

 

 

악으로 악을 물리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 우리는 타인의 죄는 그 얼굴에 묻은 검댕처럼 잘 찾지만 자기 자신은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보지 않는다. 이 거울을 좀 더 자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면 타인의 죄를 비난하는 일이 줄어들고 더 순수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한 대 얻어맞아도 되 때리지 않을 때, 누군가로부터 험한 소리를 들어도 대응하지 않을 때 선을 향해 진보할 수 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모두 쉽게 얻을 수 있다. 필요치 않은 것들은 힘들게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다.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음식물, 빵, 과일, 야채, 물은 쉽게 구할 수 있고 값도 싸다. 간단한 식사를 하는 가난한 자가 위장을 혹사하는 부자를 부러워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가난한 자의 건강이 허약한 부자의 부러움을 받아야 마땅하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싶다면 욕망을 꺾어라.

 

 

대가를 바라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핵심은 주위 모두에게 무조건 축복을 베푸는 데 있다. 인간은 생각이 아닌, 사랑을 통해서만 살아간다. 복을 바라는가? 모두의 복을 바란다면 자신의 복도 얻게 된다. 세상에는 많은 선행이 있지만 진정한 선행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 그 하나뿐이다. 이유를 가진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만이 영원하다. 이런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기는 커녕 점점 커진다.

 

 

조금 가졌다고 가난한 것은 아니다.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원하는 이가 가난한 자이다.

 

 

우리 몸의 심장이 있는 게 보이지 않는다고 심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혼도 마찬가지다.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영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진정으로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자신이라 여기는 존재는 사실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인간은 육체가 아닌, 영혼으로 살기 때문이다. 육체가 아닌 영혼을 위해 살 때에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 삶은 위험에 가득 차 있으므로 인간은 언제든 죽을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삶이 자유로워지고 타인을 사랑하면서 영혼을 살찌우는 데 힘을 쏟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영혼을 위해 육체를 희생해야 한다. 삶에서 가장 기쁘고 진실한 일이 영혼을 살찌우는 것이다.

 

 

그 입장이 되어보기 전까지는 이웃을 비난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삶을 통제하고 행동을 지시하는 일이 쉬운 까닭은 무엇인가? 혹시 잘못된 결정을 내렸더라도 자신이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타인에게 떠드는 이에게는 정작 자기 삶을 살 시간이 없다. 타인에게 자기가 시키는 대로 살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은 이를 위해 동원된 폭력을 정당화한다. 사람들은 관계의 겉모습, 의례, 행동 방법에 정신이 팔리곤 한다.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진정한 삶은 사람들과 맺은 관계, 그 자체에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누구는 마음이 착하고 누구는 멍청함 누구는 사악하고 누구는 총명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란 흐르는 강물 같아 하루하루가 다르고 새롭다. 어리석었던 사람이 현명하게 되기도 하고 악했던 사람이 진실로 착하게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그 사람을 책망하는 순간 그 사람은 다르게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의 현명한 생각

  •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없다.

  • 나 자신의 삶은 물론 다른 사람의 삶을 삶답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 부란 분뇨와 같아서 그것이 축적되면 악취를 내고, 뿌려지게 되면 땅을 비옥하게 한다.

  • 참으로 실패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 사람은 사랑함으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이 시작되며 다른 사람과 신을 사랑하는 순간부터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 혼자 생활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생활을 하거나 단 한 가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곧 인생을 가치 있게 살고자 원한다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돈이 없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남아 도는 것은 그 두 배나 슬픈 일이다.

  •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라. 그러나 마음이 정리되지 않으면 기도하지 말라. 왜냐하면 기도는 단순히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독약은 냄새부터 좋지 않은 데 반해, 정신적인 독약은 안타까우리만큼 매혹적으로 보인다.

  • 착하고 올바르게 사는데 따른 보상이 무엇인가? 그렇게 사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것이 그 보상이다.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을 바란다면 기쁜 마음이 없어지는 법이다.

  • 얼나마 여러 번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은 알코올 중독 환자가 몇 번 술을 거절하면 되냐고 묻는 것과 다름없다. 술 마시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몇 번이든 상관없이 거절해야 한다. 용서에도 그런 일관된 태도가 필요하다.

  • 다른 사람을 헐뜯지도, 칭찬하지도 말라. 헐뜯다 보면 좋은 점을 보지 못한다. 또 칭찬만 하다 보면 기대가 너무 높아진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라.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존중해줄 것이다.

  • 분노는 한때의 광기이다. 그러므로 이 감정을 억제하지 않으면 당신은 분노에 사로잡힐 것이다.

  • 사람의 인품은 그 사람의 장점을 통해서 판단해서는 안 되며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장점을 어떻게 운용하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 다른 사람들과 무리지어 있을 때는 홀로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홀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 그것들은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기에 영원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실로 거룩한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 원하건 원치 않건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연관을 맺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생업 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지식과 예술 작품을 나누면서 연결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도덕적 의무로 연결되어 있다.

  • 두 사람이 격렬하게 논쟁하는 경우, 그 논쟁의 책임은 한 사람에게만 있지 않고 양자에게 있다. 따라서 적어도 한 사람이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하면 논쟁은 곧바로 그치게 된다.

  • 최상의 행복은 일 년을 마무리할 때에 연초 때의 자신보다 더 나아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 돈 속에, 돈 자체 속에, 그리고 돈을 취득하고 소유한다는 그 속에 무엇인가 비도덕적인 점이 있다.

  • 독불장군이 되면 될수록 그만큼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는 법이며, 자신을 낮게 하면 할수록 위치는 견고하게 되는 법이다.

  • 세상에는 배울 것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인생의 의미와 사회에 유익이 없으면 모든 학문과 예술은 쓸모없게 될 뿐만 아니라 인생에 해만 끼치는 오락거리로 전락하게 된다.

  •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영혼에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누구에게나 신의 속성이 들어 있으며 어느 누구든 신의 속성을 파괴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 살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삶을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 유익하든지 아니면 해가 되든지 예술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을 빋게 하는데 강력한 수단은 없다. 따라서 예술을 어떻게 사용할까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 성적 욕망처럼 강한 욕망은 없다. 이것은 결코 만족되는 법이 없다. 만족하면 할수록 더욱 욕망이 커지기 때문이다.

  • 남을 정면으로 비난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를 망신시키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난하는 것은 불성실하다. 덕을 기만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이제껏 나에게 최대의 손실을 준 것은 공연한 참견이다.

  • 사랑! 그것은 신의 본질의 발현이다. 사랑에는 시간이 없다. 사랑은 오직 현재, 바로 지금, 시시각각으로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 육체가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육체란 결국 남의 것이고, 영혼만이 자기의 것이다.

  • 육체에 꼭 맞는 옷을 입기보다는 양심에 꼭 맞는 옷을 입는 것이 좋다.

  • 행복은 인간을 이기주의자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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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깨끗한 공기, 목재, 연료, 먹거리까지 나무가 사람에게 제공하는 실질적 이로움 뿐 아니라 천천히 단단하게 자라는 나무의 생장을 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 느린 삶에대한 깨달음도 얻는다.

 

 

[본문발췌]

 

 

 

정해지지 않음에서 정해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나무가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무도 사람도 그것을 몰랐을 것이다. 나무가 잘려 판재가 되어도 아직 나무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과정은 또한 나무가 사람의 손에 쓰일 것임이 정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가구를 만드는 과정은 그저 몸을 움직이는 일이 아니다. 어떤 가구를 만들지는 상상력의 영역이다. 현재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지 못한다. 공구를 얼마나 잘 이용하느냐는 내게 주어진 인생의 도구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와 다르지 않다. 때로는 몸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나무에 상처를 입힌다. 상처 입고 상처 입히며 사는 것이 또 인생이지 않나. 그 속에서 깨지고 배우기를 반복하며 후회하고 반성하고 또 조금씩 나아간다.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으면 완성을 해야 하듯 한 번 시작한 인생은 어디로든지 나아가야 한다. 가구를 만들고 실수를 반복하여 그것으로 도 내 삶을 반추한다. 그때 여기를 보강했으면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가구가 만들어지듯 나는 삶을 살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가구를 만들며 인생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고 있다. 조금씩 나은 가구를 만드는 것이다. 조금씩 나은 가구를 만들며 삶에 적용을 해본다. 머릿속에만 남아 있던 지식이 활력을 얻는다. 그건 마치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것과 같았다. 생각의 힘이 세지니 삶도 조금씩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겨울을 견뎌낸 추재의 나이테가 더 짙은 색과 깊은 밀도를 가지듯 고난의 순간을 충실히 보내야 나를 영글게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지문이 있듯 나무에게도 자신만의 결이 있다. 18밀리 두께를 사이에 두고 나무는 서로 다른 결을 보여준다. 나무의 결은 나무가 건네는 인생 이야기다. 예전엔 한 해를 일컬을 때 '춘추'라는 말을 사용했다. 봄과 가을이 한 해를 상징했던 것이다. 나무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나무의 춘추를 알아야 한다. 단단히 빨리 자라는 나무는 없다.

 

 

하늘의 도는 활을 매는 것과 같다. 높은 곳은 밀어 내리고 낮은 곳을 들어 올리며, 남는 곳은 덜어내고 부족한 곳은 보충한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데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으니 부족한 것을 덜어 남는 사람에게 바치는구나 - 도덕경 77장.

 

 

'함께'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자연은 그렇게 산다. 나무가 봄과 여름에는 빨리 자라고 가을과 겨울에는 더디 자라는 것처럼 자연은 변화에 맞추어 합당한 자신의 길을 찾는다. 그것이 하늘의 도이자 자연의 순리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적게 가진 자는 더 적게 가진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 모두가 욕심이다. 욕심은 타인을 해치고 사회를 망친다. 때로는 그 욕심이 자신을 향하게 된다.

 

 

발끝으로 서는 자는 오래 설 수 없고, 황새처럼 가랑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나타내는 자는 나타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칭찬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 도덕경 24장

 

 

준비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면 깊어질 수 없으며 체력을 키우지 않으면 오래갈 수 없다. 조금 더 높아 보이기 위해 발끝으로 선 까치발은 금방 가라않는다. 자신의 페이스를 넘어 욕심을 부리면 잠시 동안은 빨라 보일지 몰라도 점차 속도와 밀도가 떨어지고 말 것이다. 빨리 단단히 자라기 바라지만 결과는 반대다. 늦고 무르게 성장하여 급기야는 스스로 무너지는 결과를 낳는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절망도 영광도 영원하지 않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주역>에 '물극필반'이라는 말이 있다. 사물이 궁극에 다라르면 다시 그전 상태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현명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한다.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더 많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문을 열어야 한다. 문을 닫으면 암것도 만날 수 없다. 어디로든 갈 수 없다. 우리가 문을 걸어 닫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자물쇠를 채우고 경첩에 좀이 나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의 경첩은 좀먹지 않는다. - <여씨춘추>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하지만 흐르는 물은 그 움직임으로 인해 맑음을 유지한다. 경첩이 좀먹지 않는 것은 항상 움직이기 때문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정체되어 있지 않음이다. 경첩이 움직이는 반경은 짧다. 아무리 커다란 문일지라도 경첩의 크기는 한정되고 경첩은 그 크기가 허락한 공간만을 움직인다. 그러나 반경이 짧다고 그 의미까지 좁아지는 것은 아니다.

 

 

쓰지 않으려 하니 버려졌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이다.

하나의 사물을 보는 다른 눈. 자투리 나무도 버려지면 그저 땔감이나 쓰레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투리 나무의 쓰임을 찾으면 내 책상을 빛내는 소품이 된다. ... 준비하고 생각하고, 그래서 맥락을 파악해야 자투리를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다. 단지 자투리 나무만이 아니라 나 자신, 내가 가진 전력, 나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도 자투리를 잘 이용해야 한다. 그렇다. 자투리는 나무만이 아니다. 내게는 또 시간의 자투리가 있다.

 

 

겨울은 한 해가 남겨 놓은 여분의 시간이다. 밤은 낮이 남겨놓은 여분의 시간이다. 비 오는 날은 맑은 날이 남겨놓은 여분의 시간이다. - <삼국지>, 위서... '동우'라는 사람이 이야기한 독서하기 좋은 세 가지 여분의 시간, '삼여지설'

동우에 의하면 삼여지설의 첫 번째는 겨울, 두 번째는 밤, 마지막은 비 오는 날이다. 동우는 이 시간이 마음으로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한 해의 농사가 마무리되었기에 겨울은 한가로웠을 것이다. 지금처럼 전기가 온밤을 비춰주는 세상이 아니었기에 당시는 밤이 한가로웠을 것이다. 비가 오면 쉬는 일이 많았기에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한가로움을 채우는 것은 독서다.

 

 

변화의 시작은 일상을 일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천 조각이 조각보가 되고 자투리 나무가 명함꽂이가 된 것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자투리에서 자투리 아님이 되는 것은 같은 것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본 것에 정성을 들이는 것 아니겠나.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고 들리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보이고 들리는 것은 현상일 뿐이다. 그 현상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힘이 통찰력이다.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아야 한다. 말이 행동과 일치되는지 준엄히 살펴야 한다. 그것이 이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공자가 말했다. "바탕이 꾸밈을 이기면 거칠어지고, 꾸밈이 바탕을 이기면 화려해진다. 꾸밈과 바탕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 - <논어>, 옹야

 

 

맹자가 고자에게 일러 말했다. "산속의 작은 길도 많이 다니면 큰길이 되지만 잠시 다니지 않으면 곧 띠(풀)가 우거져 막혀버리는 법이거늘, 이제 그 띠가 자네 마음을 막아버렸구나." - <맹자>, 진심장구 하

걷지 않으면, 길은 없어진다. 금방 띠가 우거져 길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문제는 마음의 길도 그렇다는 데 있다. 마음에도 길이 있고 생각에도 길이 있다. 그 길도 가지 않으면 띠가 우거지듯 막히고 굳어버린다. 굳은 마음, 막힌 생각은 더 이상 새로움을 품지 못한다. 굳어버린 마음으로 사물과 세상을 대하면 참혹한 일상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죽나무는 그 모습으로 인해 살아남는다. 굵고 곧은 나무들은 목재를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찍히고 베어진다. 하지만 가죽나무는 장인에게 쓸모없음으로 인해 살아남았다. 장인에게 쓸모없음이 가죽나무에게는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장님에게는 아름다운 무늬를 보일 필요가 없고 귀머거리에게는 음악소리가 필요 없다. 어찌 육체적으로만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겠나. 정신면에서도 그런 것이 있다. - <장자>, '소요유'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무늬는 무의미하다.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음악이 필요치 않다. 그것은 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보고 통찰하고 듣고 이해하는 생각과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생각의 장님이며 마음의 귀머거리일 것이다. 생각의 눈을 뜨고 마음의 귀를 열지 않으면 그려진 선을 따라 색을 채우는 일밖에 할 수 없다.

 

 

삶이란 모자란 부분을 채워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대부분 모자라다. 그래서 또 함께할 수 있다.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때, 그때서야 아픔은 덜어지고 기쁨은 더해진다.

 

 

재료를 갖추고 세상에 나가는 순간 방황은 시작된다. 톱질과 대패질로 목재가 가구로 바뀌듯이 인고의 시간을 거치지 않으면 삶도 바뀌지 않는다.

 

 

삶은 과정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한 번 정한 좌표를 최종의 목적지로 여긴다. 나는 그것이 의문이다. 우리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목적지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끝일까? 그다음 목적지는 어디일까?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목적지가 아닐 수도 있다. 목적지라고 알았던 그곳이 단지 중간에 거쳐 가야 하는 곳일 수도 있다. 좌표는 끝이 아니다. 우리 삶에는 수없이 많은 점이 있고, 그 점이 서로 이어져 삶의 길을 이룬다.

 

 

격물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밝힌다는 것이고, 치지란 그로써 사물의 이치를 알게 됨을 의미한다. 사물에 부딪혀 이치를 파악한 후에야 뜻은 정성스러워진다. 정성스럽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에 마음을 쏟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뜻을 두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다. 정성스러워지면 마음이 바르게 된다. 이렇게 자신을 닦아가야 천하를 화평케 하는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

 

 

군자는 때에 맞게 처신한다. 이는 즉, 중中을 잡는 것을 이른다. 천년이 흘러도 부절이 꼭 들어맞는 것처럼 그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 <중용장구>

관리의 신표, 그것이 부절이다. 옛날, 특히 중국의 사신은 부절을 가지고 있었다. 부절은 온전한 하나의 형체가 아니었다. 옥이나 대나무로 만든 신표에 증인을 찍고 이를 둘로 갈랐다. 하나는 자신이 가지고 다른 하나는 조정에 보관했다. 하나에서 나와 둘이 되었으니 그 둘은 꼭 맞았다. 부절이 꼭 들어맞는 것처럼 세상에는 들어맞아야 할 것이 있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들어맞아야 한다.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한다. 일은 때에 들어맞아야 하고 나와 나의 사명이 들어맞아야 한다. 문제는 들어맞지 않을 때 생긴다. 그 들어맞음이 중용이다.

공자는 사람의 관계에서 어떻게 중용을 지키는지 보여준다. 그 사람에 맞게, 그 상황에 맞게, 그 일에 맞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맞아야 한다. 

 

 

사람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워할 것 없음을 부끄러이 여긴다면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다. - <맹자> 진심, 상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하고 부끄러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진정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을 알면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게 된다. 최소한 고치려는 노력은 할 수 있다.

잘못을 덮으면 잠시는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잘못은 눈덩이처럼 불어 더 큰 재앙을 일으킨다. 마치 하인리히법칙처럼 말이다. 잘못을 저지르면 그 잘못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린 지금 제각각의 직각자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들이대는 직각자, 타인에게 들이대는 직각자, 직장과 사회와 제도, 그리고 국가에 들이대는 직각자가 다르다. 내 이익에 부합할 때는 소리를 높이지만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자를 들이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부끄러움인 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직각만이 옳다 믿으며 자신의 잣대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재단하려 한다. 나는 직각을 맞추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아무리 직각으로 맞춘다 하지만 조금씩 각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선을 긋고 그 선을 맞추어 나무를 연결해도 조금씩 달라질 때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직각을 맞추려는 노력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알을 깨지 않으면 다른 세계에 진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저 지금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이 일상이 계속되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또 꿈을 꾼다. 다른 세계를 동경한다. 알 속에서 웅크리며, 그래서 현실과 이상에 괴리가 생기고 괴로움에 찌든다. 알을 깨려고 하지 않으면서 알 밖의 세상을 그리기에 알 속의 현실은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 때에 굳어 있어 매미가 얼음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의 지식에 묶여 편벽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선비처럼 다른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샌딩과 오일로 마감을 하면 가구는 완성이 되지만 삶에 완성이란 없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겪어야 할 일은 겪어야 지나간다.

 

 

상대를 이해하면 상대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더 넓게 끌어안는 것이다. 군자는 그렇게 사람을 포용한다. 소인은 반대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서 나와 함께하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 이해를 구할 수도, 대화를 나누기도 힘들다.

 

 

미니멀니즘은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존재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일까? 모든 것을 버리고 발가벗은 육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이는 장식과 같은 허세를 버리고 담백하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자신의 것을 최소화하고 조화를 이루어나가야 함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확대된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이상만을 추구하는 병세를 '파랑새증후군'이라 한다.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이상은 이루저질 수 없다. 우리는 이상을 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 기대지 않은 이상은 망상이 된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 이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이상이 현실을 바꾸어나가는 힘이 된다.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는 능히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달리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모진 것을 이긴다는 이치를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건만, 이것을 능히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형체가 없는 물은 형체가 있는 바위에 구멍을 낸다. 칼을 휘둘러도 물은 잠시 갈라질 뿐 곧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무엇으로도 벨 수 있는 것 같지만 어느 무엇으로도 벨 수 없는 게 또한 물이다. 이 부드러운 물은 또 무엇이든 뚫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물은 부드럽지만 강하고 또 강하지만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로 바로 갈 수는 없다. 그 과정이 쉽다면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치기에 결과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지도 모른다. 가구도 그렇다.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가구는 완성되지 않는다.

 

 

산을 만드는 것과 평지를 메우는 것은 모두 같다.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부어야 산이 될 수 있는데 붓지 않는다면 그것은 산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한 삼태기의 흙이라도 부었다면 이미 시작한 것이다. 시작하는 거도 어렵고 마치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시작에는 끝이 있고 끝이 있은 후에야 또 시작할 수 있다.

무엇이든 시작이 중요하다. 시작이 있기에 끝이 있을 수 있다. 시작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도 없다. 실패도, 꼴찌도 시작한 사람, 무언가를 시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이다. 그러나 시작했으면 힘을 다해 끝까지 가야 한다. 힘을 다했을 때, 기회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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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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