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후세대를 위해서 적게 쓰고, 조금 소유하는 것! 작은 것이 아름답다.
[본문발췌]
동기는 제각기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작은 집에 살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나아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치 않은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무엇이 행복에 가깝고 무엇이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한 뒤에 인생을 꾸려가고자 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집이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 Jay Sha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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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여놓는 물건은 적을수록 좋으며 쓸데없는 공간을 관리하는 일은 소모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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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간편하게 꾸려가고자 할 때 가장 어려운 건, 무엇이 자신의 행복과 연결되는가를 깊이 따져보고 그 이외의 불필요한 것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적당히 기울어진 지붕과 그늘을 만들어주는 차양을 좋아했어요. 그것이 바로 내 행복을 이어가게 해주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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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큰 집은 집이라기보다 채무자의 감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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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집에 사는 주된 이유가 지구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돈을 절약하겠다는 실천적인 면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나는 그저 큰 집에 쓸 시간과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을 뿐이지요.
"공허한 욕망들을 내려놓는다." - Gregory Joh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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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필요치 않은 물건을 배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그 어떤 물건보다도 우위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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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한 물건만큼 그에 상응하는 자금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 물건들이 우리 곁에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물건이 인간의 행동양식을 지배하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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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는 공간 자체를 줄이고 쓸데없는 물건을 상대할 시간은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없으면 생활에 지장을 줄 만한 최소한의 물건과 진심으로 나와 함께하고 싶은 물건만이 마지막까지 남게 될 자신의 친구다. 이것이 바로 심플 라이프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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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지 조건과 건물 구조를 연구하여 태양과 바람, 기온 등의 변화를 이용해 기계를 쓰지 않고 자연의 힘을 활용하는 방식을 보통 '자연 에너지의 수동적인 이용'이라고 말한다. 한편 기계를 이용하는 경우는 '자연 에너지의 능동적인 이용'이라고 하는데, 태양광 발전이나 풍력발전이 그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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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과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환경자원에 대한 배려와 지역 사회에 대한 공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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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이 바닥나도록 생활하는 게 아니라, 수입의 절반 정도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국에서 좋은 급료를 받으면서 개발도상국에서 생활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수입의 105퍼센트에 해당하는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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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os. 부유층(bourgeois)이면서 보헤미안(bohemian)적인 예술 감각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문화와 소비를 주도하는 엘리트층인 보보스는, 미국 신경제의 활황이 낳은 새로운 계층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반물질주의적인 태도와 창의성, 높은 교육 수준 등을 갖고 있지 않으면 보보스라고 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성공(사회적 신분이나 수입)에 만족하지 않고 색다른 취미나 독특한 생활 형태를 즐기는 부류. 자연식에 흥미를 보이고 스포츠를 즐기며 모험적인 여행을 좋아한다. 자연이나 예술에 친숙하고 환경운동에도 관심이 있다. 집과 자동차 등 물질적 풍요에 매달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정신적 만족 추구에 무게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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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 필요한 설비를 복수의 사람이 공유하는 건 그 방식과 관계없이 작은 집을 통해 생활을 간소하게 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보통의 주택이 오늘날처럼 비대해진 것은, 옛날 같으면 각 지역에서 공용하던 하루에 한 번밖에 쓰지 않는 설비를 '한 집에 한 대씩' 가정에 들여놓고 나아가 각 기능을 위한 전용 방까지 만들기 시작한 것이 원인일 것이다. 스몰하우스가 모여살 수 있는 공동체. 주방, 세탁기, 화장실, 샤워 시설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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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 그렇고 직업도 그렇고 눈앞의 성과만을 위해 마감에 쫓기듯 일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압박에서 해방되어 무언가에 차분히 몰두함으로써 얻어지는 결실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사용하는 시간과 돈이 늘었고, 자원봉사 등에 참여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충실히 마쳤음을 확신하면서 잠자리에 드는 날이 많아지면서, 나날이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집은 아무것도 해치지 않는다." - Dee Willi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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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작은 집에서 소박하게 사는 것이 그 어떤 방법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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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현장을 돌며 폐자재를 주워 그것들을 건축자재로 적극 활용, 버려진 청바지를 잘게 찢어 내벽과 외벽 사이의 단열재로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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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크게, 더 많이, 더 빠르게'라는 의미에서 인류의 성장은 조만간 정체될지도 모른다. 자연의 순환 원리와 태양광이라는 외부 요소로부터 공급되는 '느린 에너지'를 통해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작고 단순하며 소박한 생활이 더 좋다느 생각은 갈수록 많은 사람에게 공통의 가치체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냥 살아가기만 하는 건 싫다, 생활을 위한 생활로 끝내고 싶지는 않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나는 바로 이 점이 스몰하우스 운동이 퍼져 나가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본다. 평온한 생활을 하고 싶은 욕구,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바람, 이 모두가 일차적으론 자기 자신의 문제다. 자기 마음을 향해 묻고 옳다고 생각하는 답을 찾아 그대로 사는 것, 이것을 자기중심적이라 부른다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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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진 이유를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미덕으로 간주해온 선진국들의 경제지상주의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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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정신주의와 생태환경의 조화. ... 개인정신주의는 개인의 마음속이 평온하고 자유로운 것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너무 적지도 않고 너무 많지도 않게 균형이 잡힌 부(富)라는 것은, 그 상태를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개인의 내적 균형이 지구 전체의 균형으로 이어져야 한다.
"자유를 얻는데 돈이 들진 않는다." - Lamar Alex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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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작다는 점은 일반인이 손을 대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다. 규모가 커질수록 혹은 대량으로 생산할수록 분업 체제의 효율이 높아진다. 자본을 집약하고 대대적인 설비를 갖추어 역할을 분담하여 사람들을 동원해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대규모 공업이다. 전문 건설업자의 주택이 그 전형이다. 자체적으로 설비를 갖춘 공장에서 똑같은 형태의 재료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전국 각지의 현장으로 반입하여 조립한다. 이런 방식은 부자를 더욱 부자가 되게 하고, 공정의 각 부문을 맡는 단순 작업은 노동자를 더욱 지루하게 만든다. 결국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실업, 과로, 노동조건 악화, 저소득, 빈부격차의 확대 등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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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에 의한 세뇌를 거부하고, '큰 집에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에 노출된 환경을 끊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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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와 공급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르는 이러한 경제는 차라리 '쳇바퀴'라고 표현하는 편이 어울린다. 풍요로워졌다, GDP가 늘었다, 돈이 늘었다고 하면 듣기야 좋겠지만 실제로 증폭하는 건 욕망과 시기심 그리고 지루하고 가혹한 장시간의 노동뿐이다. 쳇바퀴 경제는 일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욕망이나 시기심에 떠밀린 노동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도 없다. 이러한 모든 것을 '경제효과'니 '소비 향상'이니 하며 좋은 것으로 취급하는 형태가 바로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을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마구잡이 소비를 향상시키는 일이 아닐 것이다. 소비예찬론이 무조건 이야기의 결말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는 무엇에 의해 무엇을 목적으로 경제가 돌고 있는지가 중요해지는 시대다.
"누구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로컬 유토피아" - David B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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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내서 물건을 하는 행위는 미래의 시간까지 구속하는 일이므로 아무리 호화스러운 것을 산다 해도 그걸 자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편 적은 돈으로 생활해나갈 궁리를 함으로써 자유를 획득하는 방식은 좀 더 현실성이 있다. 이런 경우는 과소비를 부추기는 요즘의 풍조에 쓸데없이 말려들지 않고 거리를 둔다는 의미에서 '경제로부터의 자유'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 '경제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돈 같은 건 많이 필요치 않다. 정작 필요한 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기존 경제에 현혹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 그리고 그 이상의 짐이 되는 일을 자신의 생활 영역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정신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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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를 적절히 이용하여 이미 확립된 풍요로부터 어느 정도 혜택을 받으면서 한편으로 자신의 소비를 억제하고 가능한 한 자유롭게 사는 편이 더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다. 스몰하우스에 사는 사람 대부분은 많든 적든 이처럼 어깨에 힘을 뺀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연간 수입 1백만엔 이하로 알아서 살아가겠다는 사람의 선택을 금지하는 국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도 국소적이고 개인적인 유토피아를 만들어갈 수는 있다. 결국 각 개인의 '로컬 유토피아(여기서 '로컬'은 '자기 주변'이라는 의미일 뿐 '지역적인'이라는 뜻은 아니다)'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다. 과도하게 일을 하지 않아도 평화롭고 건강한 생활이 가능한,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자유가 확보되어 있는 상태를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옛사람들이 남겨준 지혜의 축적을 통해 현대 사회의 모든 곳까지 적용된다면 더욱 훌륭한 유토피아가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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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생각도 다른 스몰하우스 주민들과 비슷하다. 경제적 자유(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빚이 없고 매월 나가는 고정비가 적다는 의미에서)와 시간적 자유(오프그리드에서 생활하기 위해 다소의 관리는 필요하지만 내킬 때 하면 된다는 점에서)를 바탕으로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돌아봤을 때 자신만이 아니라 지구환경에도 유익한 집과 생활이 완성되어 있는 삶을 추구한다. ... 벨은 공구점에서 간단히 살 수 있는 자재 범위 안에서 몇천만엔씩 들이지 않고도 하이테크 주택에 필적하는 순환형 생활을 완성해가고 있다. 자연광을 끌어들이고 환기구를 설치하여 수동적으로 공기 순환을 촉진한다. 빗물을 모으고 전기를 만들고 배수는 텃밭으로 돌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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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경우독의 삶. '책은 자신의 내부에 얼어 있던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 -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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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니던 직업을 그만두고 임대 아파트를 뛰쳐나와 스몰하우스를 짓고 산 결과, 벨은 무엇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까지 해서 경제적 자유와 시간적 자유를 찾으려는 이유가 뭘가. 그는 그것이 물건과 정보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기 이전이 것, 즉 사람의 마음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파괴되어 가는 지구환경과 더불어 '쳇바퀴 경제'가 희생해온 하나의 측면이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주어진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면 될지, 전달된 물건에 무엇을 추가해서 어디로 갖고 가면 될지, 던져진 말에 어떻게 대답하면 될지 등의 규칙을 익히기 이전이 사람 마음, 기계화되기 이전의 사람 마음, 봐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멋대로 선별하기 이전이, 사람 마음, 바로 그런 마음에 그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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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선의 곤돌라 안이나 지붕이 딸린 배 위, 호숫가 오두막 같은 공간에서 자기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만을 가지고 들어가 자신의 우주를 만들어 살고 싶다고(적어도 어린 시절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그런 상상 속에서는 작은 공간이나 얼마 안되는 물건들과 더불어 활짝 열린 자신의 의식을 인식하면서 내가 이 세상의 주역이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는 인간이 틀림없이 하나의 온전한 존재이고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이며 계속 변화하면서 나아가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 평온함으로 내 안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마주친 모든 것에 대해, 나와 마주쳤다는 단지 그 이유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기쁨으로 내 마음은 꽉 채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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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실 사회는 어떤가. 물건과 정보의 유통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에 장악되어 우리의 삶조차 조종되고 바꿔치기되며 그런 것들 없이는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다시 말해 '경제 속에서의 자유'에 의해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지배당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지배에 피동적으로 참가하지 않으면 월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쳇바퀴 경제'의 실상이다. 시간이 없다거나 돈이 없다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쳇바퀴 경제의 진짜 죄목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교묘하게 지배하여 돈벌이나 소비에 관한 절대적인 예찬의 윤리를 만들어내는다는 점이다. 시기심에 불타 소비 행동으로 치닫거나, 물건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톱니바퀴가 되거나, 그렇게 하여 손에 넣은 큰 차를 타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이런 것이 이 사회의 진짜 문제가 아닐까. 아직은 그러한 경제지상주의의 대행진에서 자기 자신을 이탈 시키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탈을 위한 구체적은 구조가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주류'라는 막연한 안도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주류의 축이 되어 있는 것이 흔히 말하는 '내 집'이라면, 이탈을 위한 구체적인 수단 중 하나는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그것이 스몰하우스다.
"나를 설레게 하는 집" - Diana Lo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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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미디어라는 소통의 도구가 산탄총처럼 쏟아내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는 정보를 끌어안고 뭘 하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내몰리는 일들과는 거의 인연이 없이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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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치스러운 생활은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과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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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과 고도의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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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내적인 의식세계와 외적인 현실세계의 틈에서 줄곧 침묵하며 지내왔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외적인 세계의 의미를 공유하지도 못했지만,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만들어나갈 힘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당혹감은 어쩌면 이런 것이었으리라. 우리는 세상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감정과 신체감각, 과학적 지식, 경제의 흐름, 정치적 이데올로기, 가치관, 신앙 등을 통해 다양한 의미들을 외부 세계에서 나름대로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고 각자의 내면에 그 세계의 모습과 문맥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연결해주는 '의미'를 공유해야 비로소 타인과 관계를 맺고 소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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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는 '생활을 단순하게 하기 위한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내게 있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지워나가고 필요한 것만을 남기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이성이 이루어내는 업이지요.(의도적인 것). 또 하나는 내가 정말 좋하는 것으로 생활을 채우고 그 외의 것들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기를 기다리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이루어낸 업입니다. (자연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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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 '자연적인 것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사람의 의도가 끼어든 것은 그게 무엇이든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공예가는 몇 년 동안 '의도'를 불어넣어 더 좋은 공예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숙련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그 의도가 모두 사라지고 난 뒤 그 손에서 자연스럽게 작품이 만들어질 때다. 비로소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에 영혼이 깃들고, '살아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무네요시는 그것을 '도(道)'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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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체 왜 그렇게 생활을 단순하게 하고 싶어 하는 걸까. 무엇보다 단순하지 않은 생활은 피곤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일가. 생활이 단순해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오케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머릿속에 돈에 대한 생각밖에 없어서 모든 것을 경제적 관점에서만 판단하고 무엇이 돈벌이로 이어질까만을 생각하며 사는 생활,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함'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돈벌이로 이어지지 않는 물건이나 인간관계는 처음부터 배제하고 생활의 모든 측면을 '돈을 번다'는 목적 아래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뭔가 이상하다. 우리 인간은 많든 적든 그저 '살아가는' 일을 넘어 진실을, 다시 말해 세계, 자연, 사회, 인간 등의 객관적이고 올바른 모습이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하는 존재다. 이 말을 좀 더 수사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에게는 '세계를 단순하게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여전히 많고, 나와는 전혀 다른 것을 믿는 사람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다시 말해, 한 인간에게 있어 세상 자체는 아직 단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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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게 더 단순한 삶인지 모르지만, 인류의 그토록 긴 역사 속의 극히 부분적인 이데올로기 안에서 미련하게 춤추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속삭임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고 사는 게 더 단순할지 모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건 가짜의 삶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말고도 이슬람교가 있다는 걸 알아버린 그리스도교도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만을 무조건 유일하게 믿으며 인생의 지침을 거기서만 찾아내기 힘들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범주의 지식을 넘어서 내가 보는 세상, 다시 말해 자신의 시야와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준별해나가는 과정은 사람의 성장 과정과 병행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이 태어나 자란 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사람은 다른 집에서 마치 그곳이 우주의 중심인 양 자란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집을 그렇게 보듯이 그들은 나의 집을 지극히 익명적인 다수의 집 가운데 하나로 본다. 그렇게 깨달은 것은 이윽고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로, 나라로, 지구로 넓어지면서 동시에 자신을 중심으로 한 주관적 삶에 대한 믿음은 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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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단순하게 하는 하나의 목적은, 단순히 '생활한다'는 것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세계의 객관적인 모습과 그 세계 안에서 지금이라는 시대와 나라는 존재의 위치를 다시금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바라는 '단순한 생활'은 이 세계를 단순하다고 믿어버리고서 거만한 얼굴로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하지 않은 복잡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서 세계를 가능한 한 단순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삶이 아닐까. ... 숲 속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는 다이애나지만, 그녀의 생활신조는 '어렵게 생각하기를 멈추고 무조건 편안하게 살자'는 이완적인 인생철학과는 다르다. 그녀의 집에는 시간이 정지하고 있다고 한다. 정신을 연마하고 시간으로부터 초월한 곳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는 그러한 장소가 바로 그녀의 스몰하우스인 것이다. 물론 '대화'라는 것도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예술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과학이나 책에서 그것을 찾을지도 모르며, 좀 더 소박하게 자연과 친수해지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방법이 어떻든간에, 그녀처럼 자신의 상태와 지식을 돌이켜본 뒤 더욱 넓은 시야로 그것을 바라보기 위한 조용한 시간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4.읽고쓰기(reading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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