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입생 시절 MT대신 답사여행을 떠나는 친구가 알려줬던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 유산 답사기 1권 '남도답사 일번지', 20여년이 흐르고 국내편에 이어 일본편, 중국편 등 우리 문화와 연관이 있는 주변 국가들까지 확장판이 나왔다.

 

어딘가 여행을 떠날 때,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에 포함된 지역이라면 가기전에 읽고, 가서 읽고, 갔다와서 읽어보길 권한다.

 

 

[본문발췌]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나는 옛 시인이 '인간도처유청산'이라고 한 것을 살짝 바꾸어 생각지도 못했던 상수를 만나거나 신기한 것만 보면 '인생도처재상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지곡서당에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가 신입생이 재학생을 불계로 이기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인생도처재상수'라고 말했더니 돌아가신 청명 임창순 선생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면서 "자네는 한문공부를 좀더 해야겠어"라며 '재(在)'는 be동사이고 '유(有)'는 have 동사이니 제대로 말하려면 '인생도처유상수'라고 하라고 하셨다.

 

 

'누각을 일으켜 새로 세우는 것은 나라를 경륜함과 비슷함이 있으니 기운 것은 바르게 하고 위태로운 것은 편안하게 하고 ... 흙은 쌓되 단단히하고 땅을 깊이 파서 습기를 없애는 것은 그 큰 기업을 튼튼히하는 것입니다. 들보와 마룻대와 기둥과 주춧돌을 웅장하게함은 무것운 것을 지탱하는 것이 약해서는 안되는 까닭이요, 대공과 지도리와 문설주가 모두 제각기 갖춤이 있는 것은 작은 제목은 큰 소임을 맡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추녀 끝을 시원하게 트이게 함은 사방으로 보고 들어 총명하자는 것이요, 밑을 내려다보면 반드시 두려우니 이는 경외를 갖자는 것이요, 멀리 보아 빠뜨리지 않으니 그것은 포용함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제비들이 와서 서로를 하례함은 인민들이 기뻐함이요, 파리가 붙지 못함은 간사하고 참소하는 무리가 물러감이요, 그림이 사치스럽지 않음은 제도문물이 중도를 얻음입니다. 이때를 맞추어 여기에서 노는 것은 문무의 긴장에 이완이 알맞게 따른 것이니 오르고 내릴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정치를 행한다면 이 누각의 유익함은 진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 하륜, 경회루 기문.

 

 

배를 건조하고 싶으면 사람들에게 나무를 모아오고 연장을 준비하라고 하는 대신 그들에게 끝없는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켜라. - 쌩떽쥐뻬리

 

 

모든 나라의 왕궁 앞에는 그 나라를 상징하는 광장이 있다. 광장은 근대 시민사회의 상징적 공간이며 왕궁 앞 광장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왕조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 그것은 고궁 앞 광장이거나 유서깊은 거리다.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과장,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광장과 샹젤리제거리, 영국 런던의 버킹엄궁과 트라팔가광장,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이 있는 보리수 아랫길에 다녀오지 않고 중국, 프랑스, 영국, 독일에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없다. 광장은 도시의 심장이고, 거리는 동맥이며, 골목길은 실핏줄이다. 이것이 살아숨쉬는 도시공간의 구조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 김수근 선생의 건축수상집

 

 

선암사는 1년 365일 꽃이 없는 날이 없다. 춘삼월 생강나무, 산수유의 노란 꽃이 새봄을 알리기 시작하면 매화 살구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 자두 배 사과 영산홍 자산홍 철쭉이 시차를 두고 연이어 피어난다. 그것도 여느 곳에서는 볼수 없는 늠름한 고목에서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예쁘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선암사는 열흘마다 몸단장을 달리한 것처럼 우리를 새롭게 맞이한다. 봄의 빛깔이란 어제와 오늘은 비슷해도 열흘을 두고 보면 확인히 다르다.

옛사람들은 화무십일홍이라고 했지만, 선암사는 열흘마다 다른 꽃을 선보이며 꽃이 지지 않는 절이 되었다. 신록의 계절에는 온 산이 파스텔톤의 연둣빛으로 물드는 것이 꽃보다 아름다운데, 백당나무, 불두화는 주먹만한 하얀 꽃을 불쑥 내민다. 이때 계곡 한쪽에서는 산딸나무 층층나무의 새하얀 꽃이 청순한 자태를 조용히 드러낸다. 절마당에서는 태산목이 연꽃봉오리 같은 탐스러운 하얀 꽃을 오늘은 이 가지, 내일은 저 가지에서 한달 내내 피웠다 떨어뜨린다. 이처럼 신록의 계절에는 나무꽃이 하얗게 피어난다.

그러다 여름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오동나무는 보랏빛 꽃대를 높이 세우고, 자귀나무 빨간 꽃은 뼘을 재듯 가지마다 옆에서 뻗어나온다. 여름이 깊어지면 배롱나무꽃이 피기 시작해 장장 석달 열흘을 위부터 아래까지 온몸을 붉게 물들인다. 그때가 되면 선암사 한쪽 구석에는 모감주나무의 노란 꽃, 치자나무의 하얀 꽃, 석류나무의 빨간 꽃이 부끄럼을 빛내며 우리에게 눈길을 보낸다. 봄이 나무꽃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풀꽃의 세상이다. 선암사 뒤안길 돌담 밑에는 봉숭아 채송화 달리아가 돌보는 이 없이도 해마다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도 잘도 피고 진다. 그러자 절집의 꽃으로는 역시 가녀린 꽃대에 분홍빛으로 청순하게 피어나는 상사화가 제격이고, 여름이 짙어가면 삼인당 섬동산 빨간 꽃술의 꽃무릇으로 환상적으로 뒤덮인다.

가을은 은행잎이 떨어져 절마당을 노란 카펫으로 장식하고 청단풍이 새빨갛게 물들어갈 때가 절정이다. 가을이 깊어가면 밤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가 온 산을 마치 캔버스에 바탕색 칠하듯 차분한 갈색을 뒤덮으며 들국화 구절초 쑥부쟁이 코스모스 감국이 여름꽃의 바통을 이어받아 선암사 화단을 장식하며서 호젓하고 스산한 정취를 자아낸다. 가을을 심하게 타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계절 선암사에 오면 누구나 여린 감상에 물들게 된다. 사람들은 곧잘 겨울은 삭막하다고 말한다. 겨울나무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다며 꽃 피고 잎 돋던 그때와 비교하며 깊은 정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선암사의 겨울은 그렇지 않다. 소나무 전나무 같은 늘푸른바늘잎나무야 우리 산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선암사는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 남해바다 가까이 있어 늘푸른넓은잎나무의 난대성 식물이 잘 자란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녹나무 태산목 팔손나무 붉가시나무 종가시나무 호랑가시나무가 여전히 절마당 곳곳에서 초록을 빛내고 있다. 남들이 요란을 떨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화려한 단풍으로 자태를 뽐낼 때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묵묵히 자기를 키워온 이들 늘푸른 넓은잎 나무가 윤기나고 두터운 사철 푸른 잎을 자랑하며 나무 전체가 꽃이라는듯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직도 남아 있는 산수유나무 마가목 먼나무 호랑가시나무의 빨갛고 탐스러운 열매가 빛바랜 계절의 꽃어럼 행세하고 있을 때 벌써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빠알간 동백꽃이 겨울은 결코 무채색의 계절만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때 풀꽃이 사라진 쓸쓸한 화단 곳곳에서는 키작은 남천의 빨간 잎, 빨간 열매가 빛의 조건에 따라 짙고 옅음을 달리하며 가녀린 맵시를 다소곳이 내보인다. 남쪽이어서 눈이 드물 것 같지만 선암사에는 눈도 많이 내린다. 눈 덮인 선암사 진입로 산자락을 뒤덮은 산죽밭의 모습은 환상의 겨울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초록과 흰색의 향연이다. 

 

 

어느 나라 건축인들 자연과 건축이 교감하지 않으리오만 우리 전통건축에서 자연과 인공이 어울리는 방식은 아주 특별하다. 같은 문화권이지만 중국과 일본의 저택들은 모두 울타리 안에서만 건축이 이루어진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섬세하고 치밀한 인공의 손길이 강조되고, 중국은 높은 담장 속에 장대한 공간을 연출하는 데 힘쓴다. 비록 중국 전통건축에도 차경이라는 개념이 있어 자연풍광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처럼 자연과 인공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전통건축물은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연이고 또 하나의 풍경이다. 중국의 건축물은 장대하지만 마치 벽처럼 느껴지고, 일본의 전통건축물은 정교하지만 나약해 보여 건축물이 아닌 가구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에 비해 한국의 건축은 주변 경관을 깍고 다져서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자연 위에 그냥 얹혀 있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전통건축은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 프랑스 건축하협회장 로랑 쌀로몽

 

 

전국 돌담길. 고성 학동마을, 제주 하가리마을, 담양 삼지천마을, 강진 병영성마을, 산청 남사마을, 영암 죽정마을, 여수 추도마을, 대구 옻골마을, 예천 금당실, 부여 반교마을

 

 

나물은 기본적으로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음나무순 두릅나무순 같은 나무의 새순이다. 음나무순은 두릅나무보다 맛이 더 싱그러운데 이름은 개두릅이다. 이외에도 오갈피나무 가죽나무 고추순나무 빛새나무 노린재나무 산초나무 왕초피나무 삿갓나무 참빗살나무(화살나무) 우산대나무 다래넝쿨의 새순은 다 나물이 된다. 또 하나는 다년초, 즉 풀의 새잎이다. 쑥을 비롯해 달래 냉이 씀바귀는 나물의 고전이고, '취'는 나물의 대종으로 취자가 붙은 풀은 다 나물로 먹는다. 곰취 참취 미역취 단풍취 바위취(범의 귀) 전대취 각시취 분취 수리취. 이외에도 많다. 고사리 고비 개발자국 백지 장녹(자리공)순 미남지싹 얼레지 비비추 엉겅퀴 민들레 쇠비름 콩고투리 청침 부지깽이나물 꿩나물 복주머니나물 벌통나물 기름나물 비름나물 멸구나물 산마늘 는쟁이나물(명아주) 으아리(위령선). 당귀 잔대 창출 머위 둥굴레 돌나물, 참나물 곤드레 고들빼기 돌나물....

 

 

하늘은 이불,  땅은 요, 산은 베개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독

크게 취해 거연히 춤을 추고 싶어지는데

장삼자락이 곤륜산(히말라야)에 걸릴까 걱정이 되네.

- 진묵대사의 무량사 우화궁 건물 주련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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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인 작가의 여행과 독서에 대한 또 다른 책!

 

 

[본문발췌]

 

 

(1권) 책을 읽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다

 

 

그렇더라도 나는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어지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물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진짜 양서良書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한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 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준다. - 법정  스님 <무소유 중에서>

 

 

천가지 욕망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냐, 한 가지 욕망을 이겨내는 것이 중요하냐. - 영화 <삼사라> 중에서.

천가지 채울 수 있는 욕망보다 이겨내기 어려운 한 가지 욕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일까?.....

 

 

지쳐버린 많은 살람들은 그동안 자기 자신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일을 잠시 멈추고 자신들의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지 않은 것이다. 자신에게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모든 일을 잠시 내려놓고, 그동안 무시했던 그대의 영혼이 다시 그대를 만나게 하라. 그것은 그대의 잊혀진 신비와 다시 가까워지는 멋진 일이다. - 켈트인의 속담 중

 

 

진정한 여행은 어느 정도 삶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 삶에 작은 변화라도 없었다면 당신은 진정한 여행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의 삶은 누군가에겐 풍경이 된다"

 

 

진정한 걷기 애호가는 구경거리를 찾아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기분을 찾아서 여행한다. 우리들의 발에는 뿌리가 없다. 발은 움직이라고 생긴 것이다. -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예찬>

 

 

"자, 내 운명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세",

"운명아, 너 가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

"여행아, 너 가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 - 오이디푸스

 

 

"우리 중에 떠돌아 다니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양치기밖에 없어."

"그렇다면 전 양치기가 되겠어요."

산티아고의 당돌함이 멋지다 생각할 즈음 그의 아버지는 금화 세 개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으로 양들을 사거라.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 맘껏 돌아다녀. 우리의 성이 가장 가치 있고, 우리 마을 여자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걸 배울 때까지 말이다." - <연금술사> 중에서

 

 

대지는 우리에게 온갖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장애물과 스스로 겨눌 때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 <인간의 대지> 중에서

 

 

산티아고에게도 길을 떠나던 날부터 읽으려 했던 책이 한 권 있었다. 그러나 대상 행렬을 바라보거나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그는 자신의 낙타를 더 잘 알고 싶었고, 낙타와 친해지기 시작하자 책을 던져버렸다. 책은 이젠 그에게 그저 무게만 나가는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 <연금술사> 중에서

 

 

사막은 사람에게 행동하라 가르친다. 그 행동이란 의도된 철학적, 존재론적 행위가 아니다. 생존을 위한 안간힘일 뿐이다. 사막 같은 극한의 땅위에 서면 누구나 일상을 뛰어넘는 사색과 결단을 하게 되고 마침내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사막은 책 따윈 버리고 대신 땅을 읽으라 한다.

 

 

"단단하고 높은 벽이 있어 그곳에 하나의 달걀이 부딪쳐 깨질 때, 아무리 그 벽이 옳다고 해도 아무리 달걀이 잘못했다고 해도 나는 달걀 편에 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개개인은 하나의 달걀과 같으며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깨지기 쉬운 껍질에 쌓여 있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싸우는 것은 높은 벽이며 그 벽은 곧 제도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

 

 

가장 멋진 여행은 아직 떠나지 않은 여행이며, 가장 훌륭한 책은 아직 쓰이지 않은 책이다.

 

 

이상 사회, 유토피아는 경제 지표나 통계 등 숫자로 가늠되는 나라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 얼굴에 담긴 표정, 그들이 보이는 씀씀이나 여유에서 드러날 것이다.

 

 

여행은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꿈을 하나 둘 잃어가는 것에 더 가깝다. 가슴 속에 고이 간직했던 땅들이 마침내 눈과 코, 발바닥 앞에 벗겨질 때 그 만큼의 감격과 함께 꼭 그 만큼의 상실감이 따라온다. 꿈꾸던 곳을 디딘 순간, 꿈이 하나둘 가슴팍 어딘가에서 허무하게 빠져나간다. 처음부터 꿈 따위는 갖고 가지 않는 것이 현명한 여행자일지도 모른다. 

 

 

이 땅의 주인인 인디오들은 여전히 자신의 땅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고, 식민지를 수탈했던 유럽의 후손들은 여전히 땅의 주인인 양 여행을 한다. 슬픈 역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소명이 영원히 세계 곳곳을 방랑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항상 호기심을 갖고,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들여다 보고, 세상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그리고 항상 어떤 곳에도 뿌리내리지 않고, 적어도 사물의 근저에 무엇이 있는지 깨달을 만큼 오래 머무르지 않는.... 우리는 표면적인 것만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 <체 게바라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중에서

 

 

여행을 떠날 때는 따로 책을 들고 갈 필요가 없었다. 세상이 곧 책이었다. 기차 안이 소설책이고, 버스 지붕과 들판과 외딴 마을은 시집이었다. 그책을 나는 읽었다. 책장을 넘기면 언제나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 류시화 <지구별 여행자> 중에서

 

 

"그들은 모든 꽃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 파블로 네루다

 

 

결국, 인간은 얼마나 사는 걸까?

천 년? 단 하루?

일주일? 수 세기?

인간은 얼마나 오랫동안 죽는 걸까?

'영원히'라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 파블로 네루다의 시, <영혼의 집> 중에서

 

 

당신이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면, 언젠가 사람들이 길이라고 부르겠지. - 이철수 판화 <길>

 

 

 

(2권) 길을 안다는 것, 길을 간다는 것

 

 

아직 읽지 않은 책, 아직 가지 않은 여행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 때,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러산의 대불은 정말 컸고, 청두 문수원의 스님들은 한가로웠으며 주자이거우의 물빛은 세상의 빛깔이 아니었다.

확인하러 가는 것도, 감탄하고 오는 것도 모두 여행이다. 실망하러 가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감동하는 능력, 작고 사소한 것에도 감탄하는 능력인지 모른다. 언제부터 우리가 쿨한 것, 감정을 억제하거나 표현하지 않는 것, 쉽게 만족하지 않는 것을 세련되고 고상한 것으로 여기는 세상에 살았던가. 그래서 우리는 더 행복하고 세련되었는가. 감동이 드문 사람의 삶은 얼마나 무미건조한 것인가. 반대로 쉽게 감동할 줄 아는 자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집단은 어차피 집단이라고.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집단이 되면 모두 똑같아.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못 지켜서 안달이지! 개인 단위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과 자유를 손에 넣는 거얏!" - <남쪽으로 튀어>에서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타인의 고통에서>

 

 

"왜 살아야 하는 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니체의 말,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를 죽이지 못한 시련은 나를 한층 강하게 만들 뿐'이라던 니체의 말은 용기와 객기 사이에 갈 곳을 마련하는 여행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트래블'에 '트러블'은 때로 필요악이다'라던 후지와라 신야의 말도 그러하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 <여행의 기술>에서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 <여행의 기술>, <팡세>에서 인용....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나라란 대체 어디일가? 이런저런 잣대를 들이대면 대관절 위험하지 않은 나라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까? 위험하지 않은 나라란 어디에도 없다. 처음부터 위험한 나라란 존재하지 않았듯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의 산물이 처하게 되는 이러한 상황은 예술작품의 존속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어쨌든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을 '아우라(Aura, 독특한 분위기)'라는 개념 속에 요약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중에서

 

TV나 사진, 책 등에서 무수히 넘쳐나는 여행의 이미지와 정보들을 통해 우리 시대 여행은 설렘과 기대로 넘쳐나는 '아우라'를 상실한 지 오래다. 비용과 시간만 넉넉하다면 아주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여행일뿐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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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가는 지혜, 진리는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단순화시키며, 치우침없이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본문발췌]

 

 

몽상가는, "인생은 한바탕 꿈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현실주의자는, "옮은 말이다. 그렇다면 이 꿈을 되도록 아름답게 살아보자"고 대답한다.

 

 

결국 인생의 지혜란, 불필요한 것의 제거와 여러가지 철학문제를 몇 개의 것 - 가정의 즐거움(남편과 아내와 자식과의 관계), 살아가는 즐거움, 자연의 즐거움, 인류문화에 접촉하는 즐거움 - 으로 감소시키는 것과 다른 모든 적절치 않은 과학적 훈련이나 무익한 지식 추구 따위를 몰아내 버리는 것이다.

 

 

"어릴 때는 싸움을 경계하고, 청년 때에는 색을 경계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재물을 경계하라." - 공자

 

 

하늘 즉 신 그 자체는 중용적인 존재이니, 인간은 자기가 최선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중용적 노선을 지키면서 살아가면 무서울 거라곤 아무것도 없고, 이에 최대의 선물로 오는 것이 양심의 평화이며, 맑은 양심의 소유자는 망령까지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합리적인 것과 불합리한 것을 둘 다 주관하는 중용적인 신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만사는 다 제대로 되어가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널려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린 인물이 모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그는 지상 만물의 섭리에 대해서 아는 체하는 일이 별로 없다. 세익스피어는 대자연 그 자체와 같았다. 이 말이야말로 우리들이 세상의 문인이나 사상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이다. 그는 그저 살았고, 인생을 보았고, 그리고 죽어간 것이다.

 

 

초식동물적 인간은 자기가 할 일을 생각하면서 일생을 보내지만, 육식동물적 인간은 남의 생활에 간섭함으로써 자기의 생계를 세운다. 세상 사람의 절반은 자기 일을 하는 데 시간을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남에게 자기 일을 시키기 위해서 또는 남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살고 있다.

 

 

유리피데스는 노예를 정의하기를, 사상 또는 의견의 자유를 상실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단순성이라는 것은 사상이 깊다는 외적 증거이며 동시에 그 상징이다. 학문이나 저작에서 이와 같은 단순성에 도달한다는 것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사상을 명석하게 나타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구나 사상이 명석해질 때에만 단순성은 가능한 것이다. ...전문에서 단순으로 이르는 과정, 전문가에서 상식가로 가는 과정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말해 지식 소화의 과정으로, 단연 신체의 신진대사 작용에 비할 만한 것이다. 아무리 학식이 많은 학자라 할지라도 그 지식을 스스로 소화하여 자기의 인생관과 관련시키기 전에는 그 전문적 지식을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부딪치는 문제는 앞으로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평균 5,60년간의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한 대답이 인생 최대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인생을 만들어 가야만 하겠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말을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우주의 섭리 속에서 인생의 신비한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등의 형이상학적인 명제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문제다. ...제 2의 문제에 관한 논점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냐'하는 것이지 '무엇이어야 하는가'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실제의 문제이지 형이상학적 문제는 아니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되고 보면 누구나 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 판단을 끄집어 낼 수가 있다. 이 문제를 갖고 우리들이 늘 논쟁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며, 가치 판단이 사람에 따라서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목적이나 의의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월트 휘트먼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생을 즐긴다는 것 외에 인생에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인간 최고의 품격은 자연에 순응해서 생활함으로써 마침내 천지와 동등한 최고점에 도달하였을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계의 생물은 모두가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이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일을 한다. 왜냐하면, 문명의 진보에 따라서 의무나 책임이나 공포나 구속이나 야심 따위에 사로잡혀서, 인생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이런 것들은 자연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생겨난 것이다.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데에 돈은 필요없다. 전혀 필요없다. 한적한 생활의 참된 즐거움은 부유 계급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것은 부귀를 가장 냉소하는 사람들에게만 찾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고, 돈 버는 일에 얼마나 싫증난 사람들의 마음의 함축에서 오는 것이어야만 한다. 생활을 즐기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즐길 수 있는 생활이 언제 어디서든지 발견된다. 만일 이 지상의 생활을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인생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평범한 그날그날의 생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년기에 책을 읽는 것은 벌어진 틈을 통해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중년에 책을 읽는 것은 자기 집 뜰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노경에 이르러 책을 읽는 것은 창공 아래 정자에 올라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독서의 깊이는 체험의 깊이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독서술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물이 변하여 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수, 바둑, 술도 책이 될 수 있고, 달, 꽃도 또한 책이 될 수 있다. 현명한 여행자는 가는 곳마다 풍경이 있는 것을 안다.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술도 시도 풍경이다. 달도 꽃도 또한 풍경이다.

 

 

옛날 어느 문인은 말하였다. 10년을 독서에 바치고, 10년을 여행에 바치고, 10년을 그 보존과 정리에 바치고 싶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보존에 10년을 바칠 것까지는 없고 2,3년으로 족하다고. 독서와 여행이 내 욕심을 만족시키려면 두 배나 다섯배라도 아직 부족하다. 욕심대로 하자면, 황구언이 말한 것처럼 인간 3백 세의 수명을 보존할수밖에 없다.

 

 

"시는 시인이 가난이나 불행에 빠진 뒤에야 비로소 좋아진다." (시는 슬픔을 통해서만 참으로 깊은 맛이 난다고 하는 생각이다.)고 옛 사람들은 말하였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할 이야기가 많고 따라서 자기를 유리하게 발표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영달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에 대한 한탄도 없고 불운에 대한 불평도 없이 늘 바람과 구름과 달과 이슬의 시만을 짓고 있다고 하면 좋은 시가 나올 리 만무하다. 이런 사람들에 있어 시를 짓는 유일한 방법은 여행을 떠나 눈에 띄는 모든 것 - 산이나 들이나 풍속이나 사람 사는 꼴, 때로는 전쟁이나 기근에 시달리는 민중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낱낱이 자기 시의 소재로 삼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노래와 탄식을 위하여 남의 비애를 빌어온다면, 구태여 가난뱅이가 되고 불항하게 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도에 이르면 물에 들어가도 젖는 일이 없고 불에 들어가도 타는 일이 없으며, 허(虛)한 것처럼 실(實) 위를 걷고 실한 것처럼 허 위를 걷는다. 그 거하는 곳을 집으로 할 수 있고, 어느 곳에 거하더라도 그 홀로임을 잃지 않는다. 도를 깨달은 선비라고 하면 모두가 다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고 다만 도를 사랑하는 사람일뿐이다. 도에 이른 사람은 자신의 지배자가 되며, 우주는 그의 앞에서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이런 사람은 소란함과 더러움 속에 던져저도 진흙탕 속의 연꽃처럼 몸에 진흙이 묻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구태여 좇아야 할 도를 택할 필요가 없나. 그러나 나는 아직 그 경지에 미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와도 같기 때문이다 - 바람이 잠잠하면 나도 잠잠하고, 바람이 움직이면 나도 움직인다. 나는 물속의 모래 - 물이 맑으면 나도 맑고, 물이 탁하면 나도 탁하다.

 

 

공자 가로되, "도는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 떠나야 할 것은 도가 아니라 그 도를 지키는 사람이니라" ... "사람이 도를 닦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닦는 것이 아니다."

 

 

논리와 대조를 이루는 것에 상식이 있다. 상식이라기보다 정리(情理)라고 하는 편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정리를 존중하는 것은 인간문화에 있어 가장 건전한 최고 이상이며, 정리를 아는 사람은 최고의 문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정리를 아는 국민은 평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정리를 알고 있는 부부는 행복스럽게 살 수 있다.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는 완전한 부부란 상상할 수도 없다. 다만 알맞게 싸우고 또 알맞게 화해를 할 수 있는 정리를 깨닫고 있는 부부를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정리가 있는 인간세계에서만 우리는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서양에 있어서는 한 가지 명제가 논리적으로 완전하면 대개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중국인에 있어서는 명제가 논리적으로 정확하다는 그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것과 동시에 인간성에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에 있어 이 '인간성에 일치한다'는 것, 즉 진정(盡情, 인간적인 것)은 논리적인 것보다 중요한 문제다. 영어의 reasonableness에 해당하는 중국어는 정리인데, 이것은 정(人情, 인간성), 즉 인간성과 이(天理, 변함없는 도리)라는 두 가지 요소로 성립된 것이다. 정이 신축성 있는 인간적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는 우주불변의 법칙을 나타내는 것이다.

 

교양 있는 사람이라 함은 인간의 심정과 자연의 법칙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인간의 심정과 대자연의 운행에 조화된 생활을 영위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유학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인이란 주로 그 평명한 상식과 그 자연스러운 인간성, 즉 인간미 때문에 경모를 받고 있는 공자처럼 정리를 깨닫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미가 있는 사고 방법이란 정리를 깨닫는 사고 방법이라는 말이다. 논리적인 인간은 항상 자기를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적인 맛이 없다. 그러므로 잘못이다. 그러나 정리를 깨닫고 있는 인간은 어쩌면 자기가 잘못일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하는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옳은 것이다.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객관적 진리보다는 오히려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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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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