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우동제, 청림제로 넘어가는 길은 한적하니 시원한 바람에 꼬불꼬불 숲길을 달리다 보면 새만금 방조제 입구 대항이 나온다. 여기서 부터는 해안도로, 소나무숲을 배경으로 캠핑장이 늘어선 고사포 해수욕장, 물 빠지면 바닷길 열리는 하섬 옆으로는 변산 마실길을 걷는 도보여행객들과 갯벌 조개 캐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채석강, 격포, 궁항, 모항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내변산의 바위산과 너른 갯벌을 양쪽으로 끼고 내소사, 곰소에 이르는 드라이브 길.
같은 뿌리에서 같은 지향점을 다른 길로 가는 세 종교 이야기. 그들 모두 배려와 관용의 미덕을 가르치지만 자신들만이 신을 독점하기 위해 갈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문발췌]
역사를 보면 정치든 사상이든 관용성을 보이며 상대를 포용하면 융성했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면 어김없이 쇠퇴를 불러왔다.
높은 산을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하느님께 가는 길도 이와 같지 않을까? 틀린 길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길이다. 각 종교마다 올바르게 사는 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유대교에서는 '율법', 기독교에서는 '복음', 이슬람교에서는 '코란', 불교에서는 '다르마', 힌두교에서는 '요가', 도교에서는 '도'라 부른다.
무신론자인 이탈리아 <라 레푸블리카> 신문 설립자가 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신을 믿지 않거나 믿음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신이 용서할지'를 물었다. 그때 교황은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으며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고 답변했다. 교황조차 하느님의 자비는 무신론자에게도 베풀어진다고 답한 것이다.
유대인은 영원한 유목민으로 방랑과 이산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떠돌이 민족은 척박한 환경에서 고난을 극복해야만 살아 갈 수 있다. 정주민족은 절대로 이들을 이길 수 없다. 정착사회에서 편하게 자란 민족이 사막과 황야의 시련에 단련되고 생존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유목민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유대인의 공동체 복지제도,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으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한다.'
"망각은 포로 상태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 - 유대인 속담.
유대의 훌륭한 랍비로 추앙 받고 있는 힐렐은 유대 율법의 모체인 <모세오경> 즉 <토라>가 무엇인지 짤막하게 이야기해 달라는 질문에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너의 이웃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토라>의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부연 설명이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유대교는 '율법에 의한 구원'을, 기독교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이슬람교는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세 종교의 같은점은 유일신, 세 종교의 뿌리 <구약성경>, 부활과 최후의 심판. 다른점은 예수에 대한 관점(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선지자로 봄), 구원에 대한 견해, 안식일 차이(이슬람 금, 유대교 토, 기독교 일), 사제의 유무 등....
이슬람교의 의미 자체가 평화를 뜻하는 순종이다. 무슬림들의 일상의 인사말 "앗 쌀라 알라이쿰(평화가 당신에게 있기를)"도 평화를 나타낸다. 평화는 이슬람교의 본질이요, 목적이다.
사람을 해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근심, 말다툼, 그리고 빈 지갑이다. 몸의 모든 부분은 마음에 의존하고 마음은 돈 지갑에 의존한다. 돈은 사람을 축복해 주는 것이다. 부는 요새이고 가난은 폐허다. - 유대교 경전 <탈무드>가 가르치는 돈의 중요성에 대한 유대인 속담.
모든 교조주의의 특징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틀림으로 몰아 죽음으로 징계하려 한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종교적 원리주의가 발흥하면 그 역사는 틀림없이 망하거나 쇠퇴했다.
우주 속에는 필연적이고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가 딱 한 분이 계시다.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 간의 갈등이나 논쟁은 저마다 신을 독점하려는 데 있으며 자신들만이 필연적이고 영원하고 무한하다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 파스칼, <팡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