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신념, 철학.... 관점에 따라 말하는 것이 다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 뛰어나다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본문발췌]
'사기', 「태사공자서·논육가요지」 무릇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는 모두 통치에 힘썼지만, 단지 관점에 따라 말한 것이 달랐기 때문에 살핀 것과 살피지 않는 것이 있을 따름이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음양가는 징조를 중시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서 사람들을 압박하여 두려운 것이 많게 했다. 그렇지만 음양가가 사계절의 커다란 순서를 규정한 것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유가의 학설은 넓지만 요점이 적고 수고스럽지만 효과는 적다. 그러므로 유가의 일은 모두 따르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유가가 군신과 부자의 예라고 규정하는 것, 그리고 부부와 장유의 구별을 분명히 한 것은 바뀔 수 없는 것이다.
묵가의 학설은 검약하여 따르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묵가의 일을 모두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농사를 강화하고 비용을 절약하라는 묵가의 주장은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법가의 학설은 엄격하여 자애로움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법가가 군신과 상하 관계의 직분을 바로잡은 것은 고처서는 안된다.
명가의 학설은 엄밀한 논리를 강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진실함을 잃게 한다. 그렇지만 명가가 이름과 실제를 바로잡은 것은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도가의 학설은 사람의 정신을 전일하게 하고 보이지 않는 도에 부합하도록 행동하게 하고 만물을 풍족하게 만든다. 도가의 학술은 음양가가 말한 사계절 순서에 근거하고 유가와 묵가의 장점을 모으며 명가와 법가의 핵심을 취한다. 그래서 도가는 때와 사태에 따라 변화하여 풍속을 진작시키고 일을 시행하여, 어느 경우든 합당하지 않은 적이 없다. 도가의 학설은 간단하여 적용하기 쉽고, 일은 적지만 효과는 크다
'묵자' - 「비유 하」 유가들은 "군자는 옛것을 따르지 새로운 것을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에 답하겠다. 옛날 예는 활을 만들었고 여는 갑옷을 만들었고 해중은 수레를 만들었으며 교수는 배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가죽 공인, 갑옷 공인, 수레와 배 공인은 모두 군자이고 예, 여, 해중, 교수는 모두 소인이라는 것인가? 게다가 유가들이 따르는 것은 사람들 중 누군가 반드시 만든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유가들이 따르는 것은 모두 소인의 도가 된다.
'순자', 「해폐」 묵자는 실용에 사로잡혀 문화의 가치를 몰랐고, 송견은 욕망에 사로잡혀서 욕망 충족의 중요성을 몰랐고, 신도는 법에 사로잡혀 사람의 능력이 가진 중요성을 몰랐고, 신불해는 권세에 사로잡혀서 사람의 지혜를 몰랐고, 혜시는 문장에 사로잡혀서 사물의 실정을 몰랐고, 장자는 자연에 사로잡혀 인위를 알지 못했다.
'순자', 「천론」 신도는 사후적인 대응만을 보고 사전적인 예측을 보지 못했고 노자는 소극적인 태도만을 보았지 적극적인 태도는 보지 못했고 묵자는 평등만을 보았지 차등을 보지 못했고 송견은 욕망의 적음만을 보았지 욕망의 많음을 보지 못했다.
순자에 따르면 장자가 인위적인 노력보다는 자연적인 숙명이 가진 힘을 숙고한 철학자였다면, 반면 노자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는 소극적이고 겸손한 태도로 삶을 영위하려는 인생 철학자였다.
'회남자', 「범론훈」 돌아가며 인사하고 양보하는 것으로 예를 닦고, 두텁게 장례를 치르고 오랫동안 상례를 치름으로써 죽은 자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공자가 정립했던 것인데, 묵자는 이것을 비판했다. 서로를 차별 없이 사랑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숭상하고, 귀신을 돕고 숙명론에 반대하는 것이 바로 묵자가 정립한 것인다, 양주는 이것을 비판했다. 생명을 온전하게 하고 참된 것을 보존하고, 외적인 것들로 자기 몸을 얽어매지 않는 것은 양주가 정립했던 것인데, 맹자는 이것을 비판했다.
춘추시대 사상사는 세 가지 특이점으로 구성된다. 패자를 지향했던 관중의 정치철학, 주례를 복원하려고 했던 공자의 유학, 그리고 공자의 보수성을 공격하면서 등장했던 묵자의 실천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전국시대의 사상사는 춘추시대의 사상사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첫째, 유가와 묵가는 춘추시대를 넘어서 전국시대에까지 사상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하지만 묵가는 전국시대가 끝나자 마자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중국 사상계에서 사라진다.
둘째, 제나라의 직하학사가 갖는 사상적 중요성이다. 직하학사는 거의 1000여 명의 사상가가 제나라의 경제적 후원을 등에 업고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을 만끽했던 장소다. 사상가들이 모여 사상적 헤게모니를 놓고 다른 사상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펼치게 된다. 이런 논쟁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철학의 한계와 가능성을 자각하고, 반대로 상대방의 철학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자신이 가진 철학적 통찰력을 더 세련되고 논리적인 형시으로 체계화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논쟁의 힘이었던 셈이다. 이런 치열한 논쟁이 제자백가로 하여금 정당화의 논리나 설득의 수사학을 모색하도로고 강제했다는 점이다. 또한 직하학사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철저하게 보장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양주와 송견처럼 반전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아나키스트들도 직하학사에서는 속내를 거침없이 토로할 수 있었다.
셋째, '사기'나 '한서'에서 도가로 분류되는 노자와 장자의 철학이 전국시대 중기 직하학사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다.
넷째, 전국시대 중기부터 천하 통일 직전까지 직하학사에서 정치 철학자로 각광을 받았던 신도와 신불해의 사상이 한비자의 정치철학, 다시 말해 전제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정치철학으로 종합된다.
사회, 경제, 정치체계와 플랫폼 기업의 서비스는 사람들에게 풍요와 편익을 제공하며 부지불식간에 시스템의 노예로 만든다.
[본문발췌]
내가 사랑한 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분별없는 끌림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의 우행(愚行)이 사랑' 이라면 결혼은 '장기간에 걸친 우행' 이라는 니체의 말을 나는 결혼 전부터 언제나 숭상했다.
서울은 이른바 문화의 드높은 '중심'이고 소비자본의 아름다운 '첨단'이나, 동시에 갈 길 모르는 망명자들의 감미로운 '피난처'이기도 했다. 나도 한때 그 분위기에 끼이고자 나의 고절한 시간들을 견딘 적이 있었다. 갈 길 모르던 망명자 시절의 이야기였다. '젊었을 때 우리는 배우고 늙었을 때 우리는 이해한다'는 잠언은 틀린 말이었다. 젊은이들이 화려한 문화의 중심에서 만 원씩 하는 커피를 마실 때, 늙은 아버지들은 첨단을 등진 변두리 어두컴컴한 작업장 뒤편에서 인스턴트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있는게 우리네 풍경이었다. 문제의 잠언은 '젊을 때 소비하고 늙을 때는 밀려난다'고 바꿔야 마땅했다.
어머니는 일종의 자본가였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세 자매의 몸종이나 청지기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금 나와라 뚝딱, 하면 어머니를 통해 금이 나왔고 은나와라 뚝딱, 하면 어머니를 통해 또 은이 나왔다. 그녀와 언니들이 자연히 어머니를 중심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머니를 사랑해서라기보다 어머니가 분배해주는 달콤한 과실에 철저히 굴종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분배해줄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들은 어머니에게마저 그런 존경과 신뢰를 바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소금은, 모든 맛을 다 갖고 있다네. 단맛, 신만, 쓴맛, 짠맛. 단것, 신것에 소금을 치면 더 달고 더 시어져. 뿐인가. 염도가 적당할 때 거둔 소금은 부드러운 짠맛이 나지만 32도가 넘으면 쓴맛이 강해. 세상의 모든 소금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맛이 달라. 소금에 포함된 미네랄이나 아미노산 같은 것이 만들어내는 조화야. 사람들은 닷맛에서 일반적으로 위로와 사랑을 느껴. 가볍지. 그에 비해 신맛은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고, 짠맛은 뭐라고 할까, 옹골찬 균형이 떠올라. 내 느낌이 그렇다는 거야. 쓴맛은 그럼 뭐냐. 쓴맛은, 어둠이라 할 수 있겠지...."
"염전의 바닥을 까뒤집어 고르게 하면 증발이 잘되니까 생산량이 물론 높아지지.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일세. 내가 지금 판을 까뒤집는 건 단지 생산량 때문이 아닐세. 갯벌 아래, 그러니까 저기 눌린 어둠속에 미생물이 더 많아서 까뒤집는 거야. 그것들이 많이 포함돼야 모든 맛이 균형 있게 녹아들어 하나로 합쳐지니까. 나는 짜기만 한 소금은 싫어. 이제 세계인의 지상명령어가 돼 자네 같은 시인도 무심코 내게 들이대는 말, 그 생산량이란 말만 해도 그렇잖아. 예컨대 공업적으로 불순물을 제거한 정제염은 염화나트륨 성분이 거의 전부야. 거기엔 오로지 짠맛밖에 없어요. 생산량이란 말도 바로 그렇지. 다른 게 끼어들 틈이 없는 말이거든. 생산량의 증가를 가로막는 다른 것은 모두 불순물이라고 불러. 단연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생산량이란 관점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람에게 해로울 뿐이지. 젊은 사람이 애할지는 모르겠지만, 소금은, 인생의 맛일세!"
모든 문제는 잉여 재산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잉여는 소비를 부르고, 소비는 더 큰 욕망과 더 큰 잉여를 부르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다.
"이걸로 돈을 벌어 많이 모아야 한다면 상관이 있겠지만, 우리 가족 먹고사는 거야 그래도 충분하니까 된 거지. 생산성이란 말, 나는 증오하네. 잉여 재산을 쌓으려고 생산성 타령을 하는 것이겠지. 지구인들을 노예로 만드는 낱말이 바로 그거야, 생산성! 재물 쌓아서 뭐하겠나. 애들 물려주려고? 핏줄 배불리려고? 돈을 물려주는 것보다, 저 혼자서 굶주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기르면 되는 거지. 난 우리 애들, 생산성의 노예로 살게 할 마음 없어. 포악한 말이야." 생산성의 폭압적인 가치를 버리는 대신 자연주의적 정성의 집결체로서 사람을 살리는 소금이 토판염이라 했다. 좋은 소금은 만물을 살린다고 그는 말했다.
가출 전의 그는 빨대 하나 들고 세상의 구조에 충직하게 복무했다. 만족은 오지 않았다. 불가사리 같은 자본 중심의 체제에 기생해 그 역시 빨대를 꽂고 죽어라 빨았으나, 넷이나 되는 처자식이 그의 몸뚱이에 빨대를 또한 꽂고 있었으므로 그가 빨아올리는 꿀은 늘 턱없이 모자랐다. 모자라면 더욱 몸이 달았다. 그 체제는 그에게 약간의 꿀을 제공하는 대신, 그를 계속 노예 상태로 두고 부려먹기 위해 그의 후방에 있는 처자식을 끊임없이 부추겨 그가 빨아 오는 꿀을 더 재빨리 소모시키도록 획책했다. 회사의 매출이 10으로 늘어나면 '단맛'에 길들여진 가족들의 소비 욕구는 어느새 100이 되었다. 회사와 회사를 거느린 체제가, 그에게 10을 주고 뒷구멍에서는 그의 가족들이 100의 욕구를 갖도록 끊임없이 획책했다는 것을, 그는 가출하기 전엔 몰랐다. 그가 죽어라 빨대를 꽂아 빤 10의 꿀은 빚까지 보태 가족들에게 100으로 빨렸고, 그 100은 다시 고스란히 회사와 회사를 거느린 체제 안으로 되돌아가는 방식이었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아주 효율적인 구조였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연봉이 올라도 계속 방어 불능 상태에 남게 되는 잔인한 구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구조 안에 들면 부모 자식, 부부 관계되 안전하게 영위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자식들은 커가면서 아비의 말보다 저들에게 더 다급하게 영향받는 욕마의 '괴물'로 시시각각 변해갔다. 가족끼리 둘러앉아서도 더, 더, 더라고 말하면서 소비의 단맛을 쫓아가도록 만드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은 얼마든 널려 있었다. 동료에게든 친구에게든, 비인간적인 빨대를 꽂아 욕망을 채우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들도 다 그 범위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