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못한 외부의 충격에 대응하고 극복할 수 있는 지혜!

 

 

[본문발췌]

 

 

검은 백조 현상에 노출될 기회를 최대한 늘리면 기대 밖의 (유리한) 결과를 뜻밖에 얻는 행운도 늘어난다. '사회과학'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대부분의 발견이나 발명은 의식적으로 계획하거나 설계하지 않은 상태에서 얻어진다. 따라서 탐사나 경영은 하향식 계획에 의존하는 대신 기회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최대한 이것 저것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는 아는 것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장애가 있다. 나무는 보지만 숲은 보지 못하는 격이랄까?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의 구조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실, 오직 사실만을 머리에 우겨 넣는다. 이 '메타원리'(인간은 원리를 습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원리)를 쉽게 습득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우리는 추상적인 것을 얕잡아 본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왜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풀려면 상투적인 지식을 전복시켜서, 이런 지식이 복잡다기하며 회귀적인 속성이 갈수록 강해지는 현대사회의 상황에 들어맞지 않음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역사와 삼중의 불투명성

1) 이해의 망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꿰고 있다고 저마다 생각하지만, 세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다(아니 무작위적이다).

2) 사후왜곡. 마치 자동차의 후면경을 들여다보듯이, 우리는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야 관련 사건들을 돌아보게 된다(역사책에 기술된 역사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보다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보인다).

3) 사실 및 정보에 대한 과대평가와 권위 있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겪는 장래오 인한 것들. 특히 그들이 '범주'를 만들어 낼 때, 즉 '플라톤적 사고를 펴칠 때' 일어난다.

 

 

희귀하지만 예상할 수 있는 사건들, 만델브로 무작위.

이것은 흔히 규모가변성, 지수 법칙, 척도 불변, 레비 안정성, 파레토-지프 법칙, 율의 법칙, 파레토 안정과정, 프랙털 법칙 등으로 불리는 현상을 생성시키는 무작위성을 포괄하는 범주다.

 

 

우리가 과거로 부터 배운 것은 최선의 경우에 쓸모없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파국을 낳는다.

1000일 동안 산 칠면조의 결말(추수감사절), 과거 때문에 아무런 준비 없이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만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하고 나면 사람들은 자신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돌발 사건이 발생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또 다른 돌발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을 예견하려고 한다.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가능성은 보지 못한다.

 

 

검은 백조를 도외시함으로써 발생하는 부수적인 문제점들

1) 보이는 것들 중에서 보고 싶은 부분에만 집중하며, 그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일반화시킨다. --> 확인 편향의 오류

2) 인간은 명확한 패턴을 좇는 플라톤주의적 갈증에 부합되는 이야기로 스스로를 속인다. --> 이야기 짓기의 오류

3) 검은 백조가 존재하는 않는 듯이 행동한다. --> 인간은 검은 백조에 대비해 프로그램되지 않았다.

4) 우리가 보는 것이 거기에 있는 전부는 아니다. 역사는 검은 백조들을 우리 눈에서 가려 버리며, 그리하여 이러한 사건들의 확률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게 만든다. --> 이것은 말 없는 증거에 의한 왜곡이다.

5) '땅굴 파기'에 몰입한다. --> (얼른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검은 백조들은 포기한 채) 잘 정의된 몇몇 불확실성의 원천들, 즉 지나치게 명확한 검은 백조 리스트에만 집중한다.

 

 

지식의 문제의 핵심은 '확증 증거'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칼 포퍼', '찰스 샌더스 피어스' : 피어스-포퍼 접근법, 준회의주의

체스 고수들은 자신의 수의 약점에 집중한다. 하수는 자신의 수를 부정하는 사례들보다 긍정하는 사례들을 찾는다. 조지 소로스는 투자를 할 때 끊임없이 자신이 세운 최초의 가설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사례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야말고 진정한 자기 확신이며, 구태여 자신의 에고를 북돋는 신호를 찾으려는 욕구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이다.

 

 

심각한 심리적 질병들은 주변 환경에 대한 통제력-주변 환경에 대한 '이해' 능력-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동반한다. 예술과 달리 과학의 목적은 조직된 느낌을 얻거나 기분을 전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는데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식을 심리 치료 요법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인 지식에는 기억이란 컴퓨터 디스켓처럼 자료를 차례차례 이어서 기록하는 장치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 기억은 마치 같은 종이 위에 글을 계속 쓰는 것과 같아서(혹은 처음의 글을 새로 고쳐 쓰는 것과 같아서) - 정적인 것이 아니라 - 역동적이다. 이는 그만큼 과거의 정보가 강력한 힘을 발휘해 주기 때문이다. 기억은 역동적이되 단순히 스스로 새롭게 보충해 나가는 자동기계는 아니다.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이 최신 사건을 기억하면서 이전의 기억에 이를 덧붙여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자기도 모르게 발휘하지 않는가? (19세기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인간의 기억을 팰림프세스트'palimpsest', 즉 이전에 쓴 글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글을 쓴 양피지에 비유한바 있다)

우리는 인과관계의 사슬 속에서 기억을 끄집어내고, 무의식적으로 이를 수정해 나간다. 우리는 새로 발생한 사건까지 감안하여 논리적으로 들어맞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 짓기를 되풀이한다.

 

 

검은 백조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 하는 일은 흔히 일어난다.

'손실이 적을 사고에 대비하는 보험 선호 경향' 가능성이 적되 충격은 더 큰 사고에 대비하는 일을 포기하는 경향 -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실제보다 확률을 높여 대답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비행기 사고의 확률이 매우 낮다고 생각하고 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남.

추상적인 것을 꺼리는 경향 --> 사전 정보가 없을 경우(스스로 확률을 조정해 보도록 함) 확률이 희박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실제보다 낮게 평가한다. 하지만 사전 정보가 주어지면 확률을 실제보다 높게 예측한다.

우리는 반복을 통하여 학습하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대비하지 못하는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는 두 번 일어나지 않는 사건은 무시하다가, 일단 그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한동안) 이번에는 이를 과대평가한다.

 

 

시스템1(경험적 사고)

우리가 알아치리지 못하는 사이에 의식적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빠르게, 병렬처리로 작동되며, 그 자체에는 오류가 없다. (직관이라 일컫는) - 휴리스틱이라는 지름길로 빠르고 효율적인 작동 (but 경험에 의존하는 편향)

 

시스템2(인지적 사고)

생각하기(thinking)라고 부르는 것. 느리고, 논리적이며, 생각에 생각을 잇고, 계속 발전시켜야 하며, 자기의식적이다. 경험적 사고 시스템에서 보다는 훨씬 오류가 적게 발생하며, 생각의 결과로 얻어진 것들이 어떤 과정을 밟았는지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사고도 가능하고, 다른 방식으로 응용할 수도 있다.

 

 

세계는 비선형적이다. 비선형적 관계는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작용한다. 선형적 관계가 오히려 예외적이다. 선형적 관계를 주목하는 것은 학교와 교과서에서뿐이다. 그 이유는 선형적 관계가 이해하기에 쉽기 때문이다.

 

 

과학을 산출하려면 의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너무 일찍 의심에서 벗어나는 것도 피해야 한다는 점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심의 중요성을 알지도 못한 채로 거기서 벗어나 버리는 것이 사실이다. - 시몽 푸셰 '진리탐구비판Dissertation on the Search for Truth'

 

확인 편향 오류에 빠지면 우리는 확률 이론이 성공적으로 적용된 계임을 예로 들어 이것을 일반화시키려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삶에서 행운이 차지하는 역할은 일반적으로 과소평가하지만, 확률 게임에서는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한 가지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하다 보면 거기에 빠져 버린다. 여러 가지 방면으로 사고를 전개하다 보면 이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원리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생기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에코의 서재에서 우리 눈에 띄지 않는 부분은 무시되는 속성이 있다. 말 없는 증거 역시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미 출현한 검은 백조에 대해서는 계속 근심하면서도, 과거에 일어난 일은 없지만 미래에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검은 백조 사태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익숙해진 잘 짜여진 도식과 지식을 선호하는 플라톤적 태도에 물든 나머지 실제 세계에 대해서는 장님이 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귀납법의 함정에 빠지는 것도, 확인 편향의 오류에 빠지는 것도 이 때문이며, 우등생이 학교 밖에서 루딕 오류를 범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잘 짜여진 이야기를 선호한다. 우린 인류는 아직까지 추상적인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진화하지 못했으니, 우리는 언제나 전후 맥락을 들어야 이해를 할 수 있다. 무작위와 불확실성은 추상적인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이미 발생한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일어날 수 있었을지 모르는 일은 무시한다. 요컨대 우리의 천성은 피상적이고 표피적일 뿐 아니라, 그러한 천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이것은 심리학적 문제가 아니라 정보의 기본적 속성에서 오는 문제다.

 

동물보다 좀 더 고상한 삶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이야기 짓기의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 텔레비젼을 끄고, 신문 읽는 시간을 줄이고, 인터넷을 무시하라. 결정을 내리는 이성적 능력을 훈련하라. 감각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구분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해악에서 벗어나면 보답을 얻게 될 것이니, 삶이 그만큼 풍요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지난 일을 이야기로 꾸미는 데 능숙하다. 과거의 일이 쉽게 이해되도록 새로운 이야기까지 만들어 낸다.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이란 판단의 척도가 아니라 확신을 만들어 내는 능력의 원천이다. 여기서도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상자 속의 것'을 열어 보지 않고도 예견하는 플라톤적 사고, 즉(사리에 맞지 않는) 법칙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미래는 과거와 다르다" - 요기 베라

 

 

인식론적 오만의 두가지 효과

1) 알고 있는 것을 과대평가하게 한다.

2) 실현될 수 있는 불확실한 상황이 분포할 범위를 줄임으로써(즉 알지 못하는 것의 범위를 축소시킴으로써) 불확실성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실제로 아는 바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

 

 

방법을 아는 것(knw-how) vs 어떤 것을 아는 것(know what)

변화하지 않는 분야(전문가로 입증되는 전문가들이 있다)와 변화하는 분야(전문가로 입증되지 않는 전문가들이 있다)

변화하는 분야는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이면서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시야가 협소하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돌발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한다. 또한 계획 속에 있는 문제에만 골몰하기 때문에 계획 바깥의 불확실성, 즉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것,' 다시 말해 '아직 읽지 않은 책 속의 내용'은 염두에 두지 못하다.

 

헛똑똑이 효과 : 분석틀 바깥의 위험을 머릿속에서 제거해 버리거나 자신이 아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때 일어난다. 자기틀 안에서만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빗나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예측의 오류 (불확실성의 본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1) 중요한 것은 가변성이다. 정확성은 도외시한 채 예측치를 내놓은 것 자체를 중요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정책을 결정할 때에는 그 정책의 최종 예상 목표가 아니라 추정 가능한 결과의 폭을 더 고려해야 한다.

2) 프로젝트가 연장되면 당초 예측이 설명력을 잃어 간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데서 생겨나는 오류

    예측의 설명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떨어지는 것

3) 예측 대상이 되는 변수가 무작위적 특성을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류

 

 

검은 백조 현상의 세가지 속성 : 예견 불가능성, 파급의 막대함, 사후 합리화

 

 

인간의 두 가지 성향

1) '땅굴 파기'와 '협소하게' 생각하기(지적 오만)

2) 예측 성적을 엄청나게 과대평가한다는 점, 즉 우리의 예견 능력을 실제보다 크게 평가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사회과학이나 경제 예측 따위를 진심으로 믿기 어렵다. 하지만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합리적 존재일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의 행동이 예상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동에 그런 일관성은 없다. 일관성이 없으면 일반화 하기 어렵고, 그러면 예측하기도 어려워 진다.

 

 

녹은 물에서 얼음의 형상을 추측하기

1) 전진 과정 : 얼음 덩어리에서 물로 변하는 과정에 대한 사고 방향 (물리학, 공학적 사고 방향)

2) 후진 과정 : 고여 있는 물을 보면서 그 이전의 얼음 덩어리를 마음의 눈으로 떠올려 보는 것(물은 어디서 왔는가), 반복과 실험이 불가능한 분야, 즉 역사적 접근에서 채택되는 사고 방향

 

 

예견에 대한 교훈

1) 적재적소에서 바보가 되다.  작은 일에 바보가 되어도 좋지만 큰 일에는 금물이다.

2) 언제나 준비되어 있을 것 (예측 보다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대비)

사소한 것에 대한 예측은 진통과 치료 효과 정도로 그칠 수 있다. 하지만 거창한 예측치는 판단을 마비시키니 주의해야 한다.

 

 

거듭되는 작은 실패는 오히려 삶에 도움이 된다. 실패를 장려하는 문화에서 혁신이 탄생한다.

 

 

바벨 전략 : 85~90%는 극히 안정적 대상에 투자, 10~15%는 가장 투기적인 곳에 투입(벤처케피털)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것에서 쓸모있는(획기적인) 부산물을 찾는 요령

1) 긍정적 우연과 부정적 우연의 차이를 구분

    긍정적 검은 백조의 예) 영화, 출판, 과학연구, 벤처 자본... 손실은 적되 성공의 보상은 크다

2) 지엽적 정확성을 추구하지 마라. 시야를 넓혀라

3) 기회를 놓지지 말라. 혹은 기회로 보이는 것을 놓치지 말라.

4) 정부가 내놓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라. (정부가 하는 일의 부작용에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5) 일기예보관들, 애널니스트들, 경제학자들, 사회과학자들과는 농담을 주고받을 지언정 그들의 주장과 싸우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거대한 비대칭성  : 현재와 미래의 비대칭성

어떤 사건의 (알 수 없는) 확률을 계산하는 것보다는 (알아낼 수 있는) 그 결과에 집중함으로써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이 불확실성에 대한 중심적인 개념이다.

인간은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믿지만, 궁극적으로 역사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

1) 인식론적 오만과 그에 따르는 미래에 대한 맹목

2) 플라톤식의 범주 관련.

3) 추론에 사용하는 허점 투성이의 도구들

 

 

만델브로 <자연의 프랙털 기하학 The Fractal Geometry of Nature>

프랙털 기하학의 핵심은 규모의 변화와 무관하게 (어느정도) 보존되는 대수적 혹은 통계적 측정값을 갖는 것이 프랙털의 속성이다. (가우스 수학과 다른 것은 비율이 동일하다는 점)

 

 

자료를 다루면서도 그 자료로 의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똑같은 죄, 즉 이야기 짓기의 오류를 다양한 형태로 범하고 있다. 정보의 불투명성과 불완전성, 세계 작동 원리의 파악 불가능성. 역사는 그 속내를 우리 앞에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추측만을 할 뿐이다.

 

 

로크의 미치광이 :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정확하게 추론을 하겠다는 사람

철학 바깥에 있는 문제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철학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철학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철학 유파들이 후퇴하고 있다. 진정한 철학은 언제나 철학 외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가 부패하면 철학도 죽는다. 비철학적 문제의 압력에 의하여 철학에 이끌리는 대신 철학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은 이 뿌리를 쉽게 망각한다.

 

 

놓친 기차가 아쉽게 느껴지지 않을 때

운명을 무시하라. 시간표에 맞춰 살겠다고 달음박질하지 않으려 하는 삶.

떠나는 기차를 쫓아가지 않게 되면 우아하고 미학적인 행동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자기의 시간표와 시간, 자기 인생의 주인됨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놓친 기차가 아쉬운 것은 애써 좇아가려 했기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남들의 생각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할 수만 있다면, 경쟁의 질서 바깥이 아니라 그 위에 서도록 하라.

자신이 설계한 게임에서는 쉽게 패배자가 되지 않는 법이다. 내가 하는 일을 장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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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건너는 것은 길이 없는 곳을 걷는 것이다. 

정해진 길도 없고 누구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살아가는 인생길, 사막을 건너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다.

 

 

 

[본문발췌]

 

 

인생을 산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는 생각때문에 우리는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아서, 건너편 저쪽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좌절감을 맛본다. 목표를 추구하고 성취하는 데 중점을 두고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문제점을 정의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실행하는 것을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산악인의 정신이다.

 

하지만 목표가 애매모호하거나 또는 최종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일종의 과정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바로 사막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1. 지도를 따라가지 말고 나침반을 따라가라.

방황을 통해 진정한 방향 감각을 얻을 수 있다. 내면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알 수 있다면, 길을 잃었을 때에도, 지도가 없는 곳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지도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는 여행의 출발이 된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사막을 건널 때 혹은 변화의 사막을 건널 때, 나침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역할을 한다.

 1)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찾아 준다.

 2) 우리를 더 깊은 사막으로 이끌어 준다.

 3) 우리가 목적지보다 여정 자체에 중점을 둘 수 있게 해준다.

 

 

산을 타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상에 다다르기 직전 마지막 날 또는 그 마지막 시간이다. 목표 달성에만 매달려 인생을 살아간다면 도착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린다. 우리 안에 있는 나침반은 우리가 여행을 하는 매순간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도록 이끌어 준다.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은 '그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이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였을 때 나침반 바늘은 대개 깨어 있는 시간을 가리켰을 것이다. 이 시간은 의식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냥 적절하고 당연한 방향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바로 지금 여러분이 따라야 할 방향이 바로 이쪽이 아닐까?

이러한 방향 지침에는 '하라' 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에게 진실하라, 인내하라, 그 순간에 몰입하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가져라, 긍정적인 마음 자세를 가져라, 하느님을 믿어라 등과 같이 말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단순하지만 강력한 방향 지침으로서 인생과 변화의 사막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안내 해 준다.

 

 

내면의 나침반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기법

 

1) 목적지에서 해방되는 것(목적지는 저 멀리 흘려 버려라)

  • 인생의 사막에서도 목표는 존재한다. 사막에도 산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산은 우리가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이정표나 길잡이가 되어 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방향 감각이다. 먼저 자신을 안내해 줄 내부의 나침반부터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분명하게 보일 때까지는 목표나 도착지는 염두해 두지 않아야 할 것이다.
  • 산의 정상에 너무 중점을 두다 보면 산 자체를 놓칠 수 있다. 인생의 사막에서도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여행 그 자체처럼.
  • 바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기 위해 누군가 죽는 그런 일이 닥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2) 눈높이 낮추기

  • 일단 목적지를 접어두고 나면, 바로 눈앞에 있는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나침반 바늘은 우리가 여행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그리고 여행에 집중하면 우리 안의 나침반도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 방황을 통해 진정한 방향 감각을 얻을 수 있다면 사막에서는 방황이 효과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문화에서는 방황이 일종의 성년 의례로, 젊은이는 혼자서 사막을 헤매고 다니며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성격과 장점을 깨닫는 과정을 거친다. 이것은 자기 인생에서 나침반 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 우리는 방황하다가 길을 잃기도 하고 신기루를 좇기도 한다. 목적지를 접어두면 길을 잃은 느김을 받게 마련이다. 애매모호한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막에 어떤 구조와 계획, 목표를 강요하고자 하는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 불확실성을 참아낼 수만 있다면 방향 감각이라고 하는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목적 의식을 가지고 방황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불확실성의 개운치 않은 느낌을 잘 다룰 수 있다.

 

 

사람들이 방황하면서 저지르기 쉬운 실수

  • 목적지에 중점을 두는 것. 목적 의식을 가지고 방황한다는 것은 우리를 이끌어 줄 방향을 추구하고 걸어갈 길을 찾는 것이지 문제를 그 자리에서 해결해 줄 마술과 같은 치료약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 사막 가장자리를 배회하고 본격적인 여행길에 오르는 것을 회피하는 것
  • 무의식적으로 배회하는 것. 즉, 가고 있는 방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행로에서 벗어나 헤매는 것

 

 

2.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어가라.

이 일을 마치면, 이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면, 시간이 날 거라고 생각하며 오아시스를 지나친다. 그러나 사막은 한없이 계속된다.

 

 

오아시스에 멈추어 쉬어야 할 이유

  • 쉬면서 기력을 회복, 멈추어 쉬고 활력을 되찾으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더 많이 쉴수록 더 멀리 갈 수 있다.
  • 여정을 되돌아보고 정정해야 할 것은 정정(생각할 시간),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
  • 오아시스에서는 같은 여행길에 오른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다른 여행자들과 교류)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오아시스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고,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발견된다. 우연히 오아시스를 마주쳤을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오아시스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인생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계획하고 일정을 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우연히 찾아오는 원기 회복, 사색 혹은 교감의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3. 모래에 갇히면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라. 

지나친 자의식 때문에 춤추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도 어리숙해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림 수업, 시 쓰기, 외국어 배우기, 노래 배우기... 자아에서 공기를 조금만 빼면 수많은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인생의 사막에서는 어느 순간 미래를 향해 쭉 뻗은 일차선 고속도로(포장도로)가 끊기고 변화의 모래에 휩싸이는 순간이 있다. 변화의 모래에 갇히는 것은 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인생의 깊은 부분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한 번도 갇혀 본 경험이 없다면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다. 갇히게 되면 여러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막히게 되었을 때 그 사실을 잘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뭔가를 시도해 보고 싶지만 두려움이나 실리적인 생각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정체 상태에 빠지면 좌절감을 느끼거나 화가 난다.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는 여행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운송 수단을 찾기 전에 우선 옛날 방식부터 버려야 한다.

밀어붙이기를 멈추고 더 이상 머리를 벽에 부딪치지 않는다면 그 정체된 장소에서 서성거려야 한다.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대안에 선뜻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냥 그 정체된 상태에서 한동안 머문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 같은 첫 번째 아이디어를 좇게 된어 있다. 하지만 이 불편한 상황은 아주 새로운 곳이며 중간적인 공간이다. 상황이 꼬인 원인에 대해서 찬찬히 파악하면서, 아직 헤어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 그 공간에서 한동안 멈춰서 숨을 고를 필요가 있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성공으로 덮여 있지 않다. 때로는 전혀 포장되어 있지 않은 도로도 달려야 한다. 성공적인 삶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사막에 잡힌 발목을 풀기 위해서는 자아가 한 번쯤은 패배를 겪도록 놓아 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으며,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또는 약점을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공기를 빼고 나면 자아는 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리더로서의 책임을 맡기 전에 먼저 겸허해져야 한다. 겸허해 진다는 것은 자존심을 무너뜨린다거나, 스스로에게 엄해진다거나, 완전한 패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겸험해진다 함음 그저 자기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작은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약점까지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겸허함이며 이를 통해 더 높이 일어설 수 있다. 우리가 사막에서 겪는 변화는 종종 우리 자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4. 혼자서, 함께 여행하기.

인생의 사막을 건너는 것은 고독과 외로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 사이에서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우리 스스로 방향을 찾아야 하고 전진하고, 스스로를 돌보고, 자아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혼자일 수는 없다. 우리는 정신적인 지원, 친구들, 길잡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는 도중에 어느 순간이든 다른 사람의 어깨가 필요할 때가 있고, 혼자 헤쳐 나가야 하는 순간도 있다. 또는 이 두가지가 동시에 필요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개발해야 할 기술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언제 필요한지를 뚜렷하게 인식하는 능력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가끔 혼자가 되어 볼 필요가 있다. 혼자가 되는 동안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일인가 발생하고 무언가가 변해서 방향을 찾거나 활력을 되찾고, 또는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거나 놓아 줄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현실로 돌아온다.

 

 

 

5. 캠프파이어에서 한 걸음 멀어지기.

안전하고 따뜻한 캠프파이어가 비추는 것은 진짜 세상의 일부분에 불과하며, 때로 정말 중요한 것을 알기 위해 사막의 깜깜한 어둠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캠프파이어 : 가족, 친구, 집, 그리고 직장. 가치관, 일상, 인간 관계 그리고 의식처럼,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바로 캠프파이어이다.

 

 

캠프파이어 곁을 떠나려는 우리에게 필요한 신조는 '항상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지내기' 이다. 인생의 사막에서 대비해서 완벽하게 준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캠프파이어에서 멀어지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

1) 캠프파이어의 정체를 밝힌다. 내가 손을 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2) 변화라고 하는 사막의 어두운 밤으로 가기 전에 준비하고 싶은 모든 것과 계획을 써본다.

3) 현실적으로 그러한 계획을 모두 실행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자문해 본다.

4) 2단계의 준비를 마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갈 수 있을지 자문해 본다.

세번째, 네 번째 질문에 대해서 '아니'라고 답을 했다면 준비하지 않기라고 하는 개념을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그러면 지도도 없이 아무 보장도 없이 모험을 할 준비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6. 허상의 국경에서 멈추지 말라. 

사막은 끝이 없지만, 종종 진정한 휴식을 안겨주는 경계선이 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이 일 년 만에 처음으로 웃었을 때, 새 직업에 적응하고 비로소 휴가를 가게 되었을 때,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 집을 떠나 독립할 때, 진정한 경계선을 건너고 나면 또 다시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마음속 보초가 당신은 열정을 따라 하고 싶은대로 하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허상의 국경선에 멈춰 버리면 열정도 죽는다.

허상의 국경선은 항상 두려움을 낳는다. 이 두려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믿음과 연관되어 있고, 이 잘못된 믿음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그에 저항할 용기나 통찰력이 없다면, 그 둘이 합세하여 우리를 사막 한가운데에 가두어 버릴 수도 있다.

허상의 국경선은 허상처럼 보이지 않고, 진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 국경선을 건너면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그 국경선을 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너무 나이가 많은 것이 아닌가 걱정한다. 사실은 '꿈을 버리기에는 너무 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변화의 시점에 현재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에 이곳에 머물면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라는 진짜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생이라고 하는 이 여행이 종국에는 끝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여행을 할 때는 도착했음을 느낄 줄도 알아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그것이 다음 도착지를 향해 내딛는 것임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안에는 여행과 목적지가 공존한다.

 

 

인생은 우리가 예측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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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경제적 가치, 시장논리로 세상이 모두 설명되거나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남들이 규정해 놓은 가치와 꿈을 쫒아 사회가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에 갖혀 개인의 삶의 가치와 꿈을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이는 가난, 질병, 그리고 환경적 이유 탓에 삶의 가치와 꿈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어떤 이는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는 착각에 포장된 삶의 가치와 꿈으로 위안을 삼기도 한다.

 

무엇이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가?
내 인생에 어떤 삶의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

 

 

[본문발췌]

 

 

시장논리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공공생활에서 도덕적 논쟁을 결여시킨다.

시장이 지닌 매력 중 하나는 스스로 만족하는 선택에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장을 포용하면서 도덕적/정신적 논쟁을 꺼리는 태도 때문에 우리는 무거운 대가를 치르고 있다.

 

 

Gary Becker "인간행동의 경제학적 접근, The Economic Approach to Human Behavior"에서 경제학이 물적 재화의 분배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구식 개념을 거부하고, 인간행동에 경제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의 핵심으로 "사람들은 어떤 활동을 하든지 자기 행복을 극대화할 목적으로 행동한다"는 경제학이 단순히 물적 재화의 생산과 소비를 파악하는 통찰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인간행동을 설명하는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벌금과 요금의 차이는 무엇일까?

벌금은 도덕적으로 승인 받지 못하는 행동에 대한 비용이고 요금은 도덕적 판단이 배제된 단순한 가격이다.

벌금과 요금, 기타 금전적 인센티브가 규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고 상황마다 다르다. 요점은 시장이 특정 규범, 즉 거래 재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을 반영하고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재화를 상품화할지 말지 결정할 때는 효율성과 분배 정의 이상의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또한 시장 규범이 비시장 규범을 밀어낼 것인지 물어봐야 하고,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이 우려할 만한 상실인지도 판단해야 한다.

시장과 시장지향적 사고가 건강, 교육, 출산, 난민정책, 환경보호 등 전통적으로 비시장 규범의 지배를 받았던 삶의 영역으로 영향력을 뻗어가면서 이러한 딜레마가 더욱 자주 발생한다.

 

 

도덕적 논리가 없이는 시장논리도 불완전하다.

 

 

시장논리가 물질 재화의 영역을 넘어서는 경우에, 사람들의 선호에 담긴 도덕적 가치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채, 사회적 효용을 맹목적으로 극대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거래'해야 한다.

시장의 팽창으로 시장논리와 도덕논리, 세상을 설명하는 논리와 세상을 향상시키는 논리를 구별하기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또 있다. 경제학의 중심 원리 중 하나는 가격 효과다. 가격이 올라가면 사람들은 재화의 구입량을 줄이고, 가격이 내려가면 재화 구입량을 늘린다. 이러한 원칙은 일반적인 상품 시장에 대해 논할 때에는 신뢰할 만하다. 하지만 어린이집에 맡겨놓은 아이를 제시간에 데리러 오는 사례처럼 비시장 규범의 지배를 받는 사회적 관행에 가격 효과 원칙이 적용될 때에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벌금이 없다가 아이를 늦게 찾으러 올 때의 가격이 올라가자, 오히려 어린이집에 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결과는 일반적인 가격 효과를 거스른다. 하지만 재화를 상품화하면 그 의미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해할 만하다. 아이를 늦게 찾으러 오는 행위에 가격을 부과하니 규범이 바뀌었다. 제 시간에 어린이집에 도착하는 것이 교사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기 위한 도덕적 의무로 여겨졌지만, 이제 부모들은 이를 시장논리로 이해해서 어린이집에 늦게 도착해도 아이를 좀 오랫동안 맡길 수 있는 서비스에 대한 비용을 교사에게 지불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센티브의 의도가 역풍을 맞은 것이다.

 

 

시장논리를 출산, 육아, 교육, 건강, 범죄처벌, 이민정책, 환경보호 같은 문제에 적용하면, 모든 사람의 선호가 똑같이 가치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처럼 도덕적 책임이 따르는 영역에서는 재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어떤 방식이 다른 방식보다 더 수준 높고 더 적절할 수 있다.

 

 

상품화 효과(commercialization effect), 시장의 비시장 규범에 대한 잠식효과를 강조 (프레드 허시)

상품화 효과는 비공식적 교환, 상호 의무, 이타주의나 사랑, 봉사정신이나 의무감 같은 기준보다는 대부분 상업적 조건에만 의존해서 제품의 성질이나 제품의 공급활동에 미치는 영향이다. 시장 인센티브와 메커니즘을 도입하면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고 비시장가치가 밀려날 가능성이 있다.

 

 

어떤 일을 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으면, 특히 요청 받은 일이 좋은 일일 경우에는, 차라리 무료로 해달라고 요청받을 때보다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다. -   행동주의 경제학자 댄 에리얼리(Dan Ariely)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절제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 진다" - 아리스토텔레스

 

이타주의, 관용, 결속, 시민 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

 

시장 지향 사회의 결함 중 하나는 이러한 미덕이 쇠약해지게 방치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공 삶을 회복하려면 좀 더 부지런히 미덕을 행사해야 한다.

 

 

학교에 범람하는 상업화는 두 가지 면에서 부패했다. 

1) 기업의 후원으로 제작된 교육 자료는 편견과 왜곡, 피상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2) 기업이 객과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해도 상업적 광고는 학교의 목적에 어긋나기 때문에 여전히 유해하다.

 

광고는 사람들에 무언가를 원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교육은 자신의 욕구를 비판적으로 돌아본 후에 욕구를 자제하거나 향상시키라고 가르친다. 광고의 목적은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것인 반면. 공립학교의 목적은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다.

 

 

가정생활, 우정, 성, 출산 , 건강, 교육, 자연, 예술, 시민정신, 스포츠 등 시장이 침입해온 많은 영역에 어떤 규범이 합당한지를 놓고 서로 의견이 다르다. 그러나 시장과 상업이 재화의 성질을 바꾸는 상황을 목격했다면 시장에 속한 영역은 무엇이고 시장에 속하지 않은 영역은 무엇인지 의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화의 의미와 목적, 재화를 지배해야 하는 가치를 놓고 깊이 사고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좋은 삶에 상충되는 개념에 관해 깊이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는 우리가 가끔은 발을 들여놓기를 두려워하는 영역이다. 우리는 반대에 부딪힐까봐 두려워서 자신의 도덕적, 정신적 확신을 공공의 장에 내보이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맞서지 않고 뒷걸음질 친다고 해서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시장이 우리 대신 결정을 내리도록 허용하게 되는 셈이다. 시장지상주의 시대는 공공 담론에 도덕적, 정신적 실체가 상당히 부족했던 시대와 일치한다. 시장을 제자리에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 관행과 재화의 의미에 관해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숙고하는 것이다.

 

 

 

<해제>, 김선욱

 

샌델 사상의 철학적 배경 : 정의 중심의 정치철학과 행복 중심의 정치철학의 종합

 

행복 중심의 정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 헤겔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 찰스 테일러'로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고 생각했고, 행복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가 윤리와 정치의 목표라고 주장. 이때 말하는 행복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심리적 만족감과는 다르다. 그리스어 '유다이모니아(eudamonia)'는 인간의 삶이 가진 내적인 목표를 충실히 실현한 경지로 행복이란 만개한 꽃과 같이 충실하고 온전한 삶의 모습을 일컫는 객관적 성격의 개념이다.

행복한 삶이란 각자가 가진 탁월성을 이룰 때 가능해진다. 개인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숙고는 그의 개인적 역량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각각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적절하고 올바른 판단, 그리고 그가 속하게 되는 공동체의 가치관 등과 밀접히 ㅇ녀결된다. 이 모든 것은 덕을 행하는 인격 형성의 문제로 나아간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구조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개념이 '좋음(the good)'이라는 개념이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개인과 공동체에 좋은 것이 무엇인가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의  내용을 가름하는 잣대가 된다.

 

헤겔은 개인과 공동체가 가진 특수성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전개'의 철학을 통해 다소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설명한다. 발전과 진보를 숭상했던 시대정신에 부합하여 헤겔은 변증법이라는 방법을 통해 진보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었는데, 그 진보의 출발점은 가장 구체적인 것이고 최종점은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해석학을 통해 헤겔의 철학은 언어철학적인 옷을 입었고 찰스 테일러는 이들의 철학적 영향력 하에서 문화들 간의 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었다.

 

이들 모두는 구체적인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서로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성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연구해온 학자들.

 

한편 정의에 대한 고민은 좋음의 문제가 아니라 옳음(the right)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좋지만 옳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옳음을 통해서만 보편적인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칸트에 따르면 옳음의 근거는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앎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며, 이성을 근거로 옳다고 승인될 수 있는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확인된다. 그리고 그 원리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 흔히 정언명법으로 알려진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입법에 타당하도록 행동하라"라는 것이 그 기준이 된다. 준칙이라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 하는 특정 행위를 일반화한 원리를 말한다.

 

롤스는 칸트의 의무론적 도덕철학의 정신을 정의론으로 확대한다. 모든 개별적인 원칙들을 적용하여 정의로운지의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의의 원리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의 정의론의 기본적인 통찰력은 파이를 공정하게 나누는 방법과 같은 것이다. 배고픈 두 사람이 서로 많은 양의 파이를 먹고 싶어 하는데, 이들이 모두 만족할 만한 공정한 분배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한 사람이 파이를 나눈 뒤 다른 사람이 선택하게 한다면, 나눈 사람은 자신에게 손해가 가지 않게 최선을 다해 공정히 나눌 것이고 결국 다른 사람이 남은 것을 취하더라도 손해 볼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이런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하고 그 상태에서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정의의 원칙들을 발견하려 한다고 가정해보자고 롤스는 제안한다.

롤스의 두개 정의의 원칙, 1) 자유와 관련한 원칙으로 자유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 2) 불평등이 인정될 수 있는 조건과 관련한 원칙으로, 일단 공정한 기회가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어져야 하며 사회에서 최하층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의 편익이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샌델의 입장은 개인과 공동체의 특수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좋음을 강조하는 전통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와 인권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공동체적 가치가 개인의 동의와 무관하게 강요될 수 있으며 개인적 자유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옳음을 강조하는 전통에 닿아 있다. 달리 말하면 샌델은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동의하지만 자유주의자들, 특히 롤스가 말하는 가치 추구 방식에는 의문을 갖는다. 그들 방식으로 가치를 추구할 경우 과연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파이의 예에서, 대상이 엄마와 아들의 경우 모성애로 한쪽을 더 크게 자를 수 있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는 자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입장에 있고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 공정성의 원칙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은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이처럼 개인의 처지와 상대와의 관계,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가치 있게 여겨온 원칙들, 종교적 신념에 따른 가치 등에 비추어 공정성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면 우리는 단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 공정성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더 이상 견지할 수 없게 된다. 나아가 공저성을 실현하려면 적절한 방식으로 개인과 공동체가 추구해온 가치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센델의 입장은 한마디로 '옳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말은 정의를 지향하는 옳음의 관점을 무시하고 좋음의 관점에서만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옳음의 이념을 완성하려면 좋음의 관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정의를 추구할 때 행복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품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말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한 자기본성, 덕의 실현에 따른 것이며 단순한 만족감 같은 의미에서의 행복은 아니다.

 

 

"특정 재화가 시장의 대상이 되면 그 재화 속에 내재된 본래적 선이 변질된다"

돈과 시장이 개입되면 발생하는 가치 변동. 각각의 좋은 것들이 지닌 선합이 돈때문에 변질되는 현상.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돈으로 사려 해서는 안 되는 것들', '돈으로 사게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묻는다. 돈 때문에 우리의 무엇이 변했고 또 지금 변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돈으로 사서는 안되는 것들에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 본래적 선이 내재해 있다. 그 과정에 사람이 개입되면 본질적인 윤리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샌델은 우리가 시장의 무한한 확장에 속절없이 당할 것이 아니라 이런 사안들이 공적 담론과 토론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그것을 허용할 것인지를 공적 검토를 통해 깊이 고민하고 서로 대화하고 합의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것은 곧 정치의 문제다. 참된 정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삶의 구조를 다루는 것이며, 경제는 그러한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경제를 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개체는 윤리다. 이 책은 경제에 윤리적 관점이 본래적으로 개입되어 있음을 분석해 보고, 시장이 개입함으로써 변질시키는 인간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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