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뇌의 작동원리는 작고 단순하지만 뉴런의 집적도와 복잡한 연결성이 우리 생각의 한계를 예측할 수 없게 한다.

 

 

[본문발췌]

 

 

포유류의 뇌, 특히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집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계층적' 사고를 할 수 있고, 다양한 요소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만들어내는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배열을 기호로 재현할 수 있고, 그렇게 만든 기호를 훨씬 복잡한 배열 속에 하나의 요소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신피질'이라고 하는 뇌구조가 수행한다. 인간의 신피질은 발전을 거듭한 결과, '생각' - 다시 말해,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능력 - 을 할 수 있는 '진화의 문턱'을 넘어섰다. 이 문턱을 넘어선 순간 호모사피엔스는 끝없는 순환프로세스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훨씬 복잡한 생각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순환적으로 연결된 생각이 집적된 거대한 배열을 우리는 '지식'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쌓아온 지식기반은 다시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이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지식은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뇌는 추상성의 또 다른 수준을 넘어섰다. 뇌의 지능은 우리 눈앞에서 조작할 수 있는 부속물 - 엄지손가락 - 을 사용하여 환경을 조작함으로써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로써 신경학은 '기술'을 낳았다. 우리가 만들어낸 도구는 진화가 새로운 방식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인간의 지식기반이 지금까지 무한하게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도구(기술) 때문이다. 인간이 처음 발명해낸 도구는 '말'이다. 말이란 '구별되는 발화'로서 생각을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다. 뒤 이어 발명해낸 '글'은 '구별되는 기호'로 생각을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다. 글을 모아놓은 도서관은, 순환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생각의 지식기반을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도서관은 우리 뇌의 능력을 크게 확장시켜준다.

 

 

지적인 바보는 어떤 것이든 더 크고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작고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 아인슈타인

 

 

[패턴인식 마음 이론]

  • 신피질의 계층구조 : 신피질은 약 50만 개의 피질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질 기둥에는 대략 600개의 패턴인식기가 담겨 있고, 패턴인식기에는 각각 100여 개의 뉴런이 담겨있다. 신피질 전체를 따졌을 때 패턴인식기는 총 3억 개, 뉴런은 총 300억 개 존재한다. 신피질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패턴인식기다. 말 그대로 정보를 패턴으로 인식한다. 논리적 사고에 최적화된 구조가 아니다. 인간은 왜곡되거나 변형된 패턴을 인식하는 데에는 컴퓨터를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뛰어나지만 논리적 사고를 수행하는 데에는 매우 미숙하다.

  • 패턴인식기의 구조

    • 패턴인식기는 뉴런 100개 정도가 집적되어 있는 신피질의 기본적인 정보처리모듈이다. 기본적인 정보처리과정은 뉴런과 동일하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입력부(수상돌기)는 하위레벨에 위치하는 패턴인식기의 축삭(출력부)에 연결된다. 하위레벨의 패턴인식기 밑에는 또다시 무수한 하위레벨의 패턴인식기가 존재한다. 이처럼 모든 패턴인식기는 다른 패턴인식기와 계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입력신호들의 세기가 일정한 수준(인식의 문턱)을 넘으면 축삭이 활성화된다. 즉 개개의 모듈이 담당한 패턴을 인식했다고 외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입력이 유효할 필요는 없다. 모듈은 자신이 담당하는 패턴이 인식될 가능성을 '가중치'와 '크기' 파라미터를 고려하여 계산하기 때문이다.

    • 수상돌기는 기본적으로 모듈 안으로 신호를 받아들이는 기능을 하지만 때로는 신호를 모듈 밖으로도 내보내기도 한다. 수상돌기를 통해 들어온 하위레벨 패턴들이 일정 비율 이상 확인되면, 이 패턴 인식기는 거꾸로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하위레벨 패턴을 처리하는 패턴인식기에 신호를 내려 보내, 그 패턴이 곧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면 신호를 받은 하위레벨의 패턴인식기는 인식의 문턱을 나춘다. 이로써 입력 중 일부가 빠지거나 불분명해도 축삭이 활성화될 (패턴을 인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하위레벨의 패턴인식기에서 올라오는 신호는 패턴을 인식할 가능성을 낮추기도 한다 (억제신호). 이 패턴인식기가 담당하는 패턴과 일치하지 않는 하위레벨 패턴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예컨대, 콧수염을 인식했다면, 그 사람이 '아내'일 가능성은 낮아진다.) 축삭은 상위레벨에 위치한 여러 패턴인식기의 수상돌기로 연결된다. 이로써 출력은 다시 입력이 되어 올라간다. 이 신호는 파라미터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개념적인 계층구조에서 상위레벨에 있는 패턴인식기들이 이 정보를 인식을 결정하는 요소로 고려한다. 상위레벨 패턴인식기에서 내려오는 신호 역시 패턴을 인식할 가능성을 낮추기도 한다(억제신호). 이 패틴인식기가 담당하는 패턴과 일치하지 않는 상위레벨 패턴(맥락)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 모든 입력에는 가중치, 예상되는 크기, 예상크기의 가변성이라는 파라미터가 저장되어있다. 패턴인식모듈은 이러한 파라미터와 더불어 입력되는 신호의 세기를 고려하여 패턴이 나타날 전체적인 가능성을 계산한다. 패턴인식의 가능성을 수학적으로 가장 적절하게 계산해내는 방법은 HMM(은닉마르코프모형)이라는 기법이다. 이러한 모형을 (신피질이든 신피질을 모방한 인공지능이든) 계층구조에 맞게 조직한 HHMM(계층적 은닉마르코프모형)이라고 한다.

  • 패턴의 특성

    •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정보는 최소 2차원 이상의 데이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각정보들은 신피질의 패턴인식기로 입력되는 과정에서 1차원 데이터로 변환된다. 우리 뇌에 입력된 데이터는 이로써 여러 계층에 걸친 패턴의 나열로 저장된다. 어떤 패턴이든 '리스트' 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면 그것을 촉발한 또다른 패턴이 활성화되었다는 뜻이다. 패턴인식기의 계층은 물리적인 계층이 아니라 개념적인 계층이다. 맨 아래에는 감각데이터를 처리하는 패턴인식기들이 있고 맨 위에는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패턴을 처리하는 패턴인식기들이 있다. 이것은 언어의 계층적 구조와 같다. 물론 생각이 곧 언어는 아니지만, 언어와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우리 생각이 본래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만, 언어 역시 신피질에서 패턴의 계층구조로 존재하기 때문에 언어에 기반하여 생각을 하는 것이 대개의 경우 자연스럽다.

    • 패턴의 계층적 리스트는 또다른 리스트 속에 하나의 항목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데, 이것을 '순환'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러한 순환과정을 무한하게 반복할 수 있다. 인간만이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신피질에 활성화된 패턴을 모조리 탐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 활성화된 패턴의 위아래 레벨에 있는 패턴을 모두 파악하지 못하면 - 다시말해, 전체 계층구조에 접근하지 못하면 - 활성화된 패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신피질을 속속들이 꿰고 있어야 한다. 하물며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물론 다른 사람의 신피질에 접근할 수 있는 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나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사람들의 의사소통능력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서로 오해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신피질의 놀라운 패턴인식능력.

    • 인간은 왜곡되어 있는 패턴도 쉽게 인식할 수 있는데, 이는 아직 컴퓨터가 따라잡지 못하는 인간의 능력 중 하나다. 이처럼 뛰어난 패턴인식이 가능한 것은 자동연상과 불변이성이라는 기능이 패턴인식과정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 자동연상. 패턴의 일부만 보고도 패턴 전체를 떠올리는 능력으로, 이는 패턴인식과정에서 '가중치'가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불변이성. 패턴에 변이가 발생한 경우에도 그것을 일관되게 인식해내는 능력으로, 이는 다음 네 가지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로 여겨진다.

      • 데이터변형. 감각데이터는 신피질에 입력되는 과정에서 포괄적으로 변형된다.

      • 리던던시(Redundancy). 수많은 변이를 이미 저장하고 있다.

      • 다른 리스트의 응용. 이미 학습한 리스트를 새로운 정보를 해석하는 데 적용한다.

      • 크기 파라미터 활용. 패턴의 가변성을 패턴 자체에 표시한다.

  • 신피질 기능의 열쇠 : 학습, 학습은 곧 세상을 인식하는 작업이며, 인식한 패턴을 기억으로 저장하는 작업이다. 학습 없이는 신피질은 아무런 기능도 발휘하지 못한다. 인간의 경우, 수정 후 한 달쯤 지나면 파충류의 뇌가 완성되고, 26주가 되었을 때 신피질이 완성된다. 태어나기 전부터 본격적인 학습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억은 새롭게 입력되는 자극을 해석하는 이데아 역할을 한다. 실제 개를 볼 때 이전에 개를 인식하여 학습한 기억은 그것이 개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결국 모든 학습은 - 기억은 - 더 정확한 인식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 생각의 방향성

    • 생각의 작동방식 측면에서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방향성 없는 생각으로, 논리와 무관한 생각을 촉발하는 것이다. 낙엽을 쓸거나 거리를 걷다가 몇 년 전 기억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라고 해도, 그것은 아무 관련성 없이 떠오른 것이 아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모든 패턴은 언제나 순서대로 촉박되며, 기억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쳐 떠오른다. 따라서 과거의 어떤 장면이 눈앞에 갑자기 떠올랐다고 해도, 그 기억을 떠올리기 전부터 그 기억을 암시하는 어떤 '힌트'로부터 출발하여 그 장면이 떠오를 때까지 우리 마음속에는 무수한 패턴의 촉발이 일어난 것이다. 기억을 촉발한 계기가 명확하게 인지될 수도 있지만 어렴풋할 수도 있고, 전혀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인지한다고 해도 연관성이 떨어지는 비선형적인 연상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장면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연상되는 여러 기억을 종합하여 좀더 생생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뇌는 그림이나 소리를 그대로 저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 두 번째는 방향성 있는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체계적인 반응을 형성하고자 할 때 우리가 의도적으로 촉발하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예행연습을 할 수 있으며, (진짜 종이 위에 글을 쓰든, 마음 속 공간에 글을 쓰든) 어떤 문장을 쓸 것인지 마음속으로 구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을 곰곰이 분석해보면, 우리가 원래부터 그러한 과업을 계층적인 구조로 쪼개어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책을 쓰는 것은 장을 쓰느 것으로 이루어지고, 장은 단락으로 이루어지고, 단락은 문단으로 이루어지고, 문단은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문장은 아이디어로 이루어진다. 아이디어는 여러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며, 요소와 요소들의 관계가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아이디어는 성립한다. 동시에 신피질은 그러한 과업을 수행하면서 따라야 하는 규칙을 학습한다. 글쓰기 과업의 경우, 불필요한 내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써야 한다. 문법과 문체에 관한 규칙도 따라야 한다. 또한 글을 쓸 때 마음속에 가상의 독자를 세워놓아야 하는데, 그러한 심상 또한 계층구조로 이루어진다.

    • 방향성 있는 생각을 할 때는 신피질 안에 존재하는 리스트를 하나씩 거쳐야 하는데, 그 리스트에는 제각각 고려사항마다 하위리스트가 달려 있어 복잡한 계층구조로 확장된다. 더욱이 신피질 패턴에 있는 리스트에는 조건문이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다음에 나타날 생각과 행동은 처리과정에서 형성되는 평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더 나아가, 방향성 있는 생각은 제각각 방향성 없는 생각의 계층구조를 촉발한다. 감각경험은 물론 방향성 있는 생각을 하는 중에도 우리를 깊은 생각 속으로 빨아들이는 강렬한 폭풍이 끝없이 휘몰아친다. 우리의 정신적 경험은 실제로 매우 복잡하고 산만하다. 1초 사이에도 수백 번씩 무수한 패턴들이 번쩍이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신피질의 정보처리방식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뇌의 가소성이다. 가소성plasticity은 학습을 통해 뇌의 연결망이 달라지거나 어느 한 영역의 역할을 다른 영역이 대신할 수 있는 특성으로, 이는 신피질 전체의 공통된 알고리즘이 작동한다는 뜻이다.

 

 

공포는 미신의 주요원인이자, 잔인함의 주요원인이다. 공포를 정복하는 데에서 지혜는 시작된다. - 버트란드 러셀

 

 

문제는 어떻게 새롭고 혁신적인 생각을 떠올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낡은 생각을 떨쳐내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머릿속은 낡은 가구로 가득 찬 건물과도 같다. 머리 한 구석을 비우는 순간 창조성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 디 호크

 

 

창조성의 핵심요소는 위대한 은유, 즉 다른 것을 재현하는 상징을 찾는 과정이다.

 

 

공포는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사랑은 위험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개인적 행동에서조차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믿으며, 매 순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후천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전혀 자유롭지 않으며, 필연성에 종속되어있으며, 어떠한 결심과 성찰에도 행동이 바뀌지 않으며,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이 저주하는 바로 그 인성을 지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괴로워한다. ... 우리는 앞으로 할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어느 시점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체적인 단 하나뿐이다. 그 하나를 뺀 나머지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 쇼펜하우어

 

 

진화과정에서 뇌가 발생한 1차적인 이유는 미래를 예측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우리 선조 중 한 명이 수천년 전 사바나를 걸어가다 어떤 동물이 다가오는 모습을 봤다고 하자. 자신이 가던 데로 계속 간다면 그 동물과 마주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러한 예측에 따라 방향을 바꿨고, 그러한 선견지명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처럼 미래를 예측하는 우리의 능력은 신피질의 선형적 구상에서 나오는 자질이다.

 

 

발명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갖춰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감각은 타이밍이다. 수많은 발명과 발명가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대개 발명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타이밍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발명품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기도 전에 먼저 만들어내거나, 기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놓치고 너무 늦게 만들어내 실패하는 것이다.

 

 

한 철학자가 꿈을 꾸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나타났다.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말했다. “당신의 철학을 15분 안에 모두 요약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정말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엄청난 양의 철학을 단 15분으로 압축해서 훌륭하게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 철학자가 어떤 반박하는 말을 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다 사라져버렸다. 그 다음 플라톤이 나타났다.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졌고,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했던 말을 플라톤에게도 똑같이 했다. 플라톤 역시 대답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렇게 역사상 유명한 철학자들이 하나씩 나타났지만, 우리의 철학자는 단 한 마디 말로 그들을 모두 물리쳐버렸다. 마지막 철학자가 사라지고난 뒤 우리의 철학자는 혼잣말을 했다. “나는 지금 잠을 자고 있으며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나는 지금 어떠한 철학체계도 대답하지 못하는 보편적인 반박을 찾아냈어!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잊어버릴지도 몰라. 이 대단한 발견을 놓친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야!” 불굴의 의지로 이 철학자는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가서 자신이 발견한 보편적인 반박을 종이에 썼다. 그러고는 안도의 숨을 쉬며 다시 이불 속으로 뛰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책상으로 가서 자신이 무엇을 써놓았는지 보았다. “그건 ‘네’ 생각일 뿐이고.” –레이먼드 스멀리언Raymond Smullyan, 데이비드 차머스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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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고자 하면 먼저 비워야 한다. 집착,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 삶의 짐을 내려놓는 것! 앎을 버림으로써만 깨닫게 되는 것!

 

 

[본문발췌]

 

 

사미를 괴롭혔던 것은 여인이라는 물체가 아니라, 여인에 대한 사미의 의식이었고, 그 의식의 집중을 일으킨 집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려놓아도 될,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짐이었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걸어가면 될 텐데 계속 짐을 지고 가는 것이지요.

 

 

삼(사)법인

    • 제행무상(諸行無常 · Anicca), 움직이는 모든 현상은 향상됨이 없다. 인과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

    • 일체개고(一切皆苦 · Dukkha), 모든 것이 고苦다!

    • 제법무아(諸法無我 · Anatta), 모든 다르마는 아我가 없다. 주체가 없다! 자기동일성의 지속이 없다!

    • 열반적정(涅槃寂靜), 번뇌의 불길을 끄자! 그러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삼학, 가장 기본적인 불교 교리이며, 일체의 법문(法門)은 모두 삼학으로 귀결된다. 삼학은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의 세 가지이며, 증상계학(增上戒學)·증상심학(增上心學)·증상혜학(增上慧學)이라고도 한다.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정사유(正思惟) · 정사(正思): 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정정진(正精進) · 정근(正勤): 바르게 정진하기, 정념(正念): 바르게 깨어 있기, 정정(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정견은 나머지 일곱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리고 팔정도는 여덟 가지 항목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성도를 이루는 각 부분이며, 여덟 가지는 일체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별개의 것이 아니다. 또한 팔정도를 계(戒)·정(定)·혜(慧) 삼학과 관계지어 보면 정견과 정사유는 혜이며, 정어·정업·정명은 계이며, 정정진은 삼학에 공통되고, 정념·정정은 정과 관계지을 수 있다.

 

 

인생은 고통스럽고, 그 고통에는 집적된 원인이 있고, 그 집착을 없애면 열반적정에 든다. 그런데 그 멸집에 8가지 방법이 있다. 그 8가지 방법을 요약하면, 계, 정, 혜 삼학이다!

 

 

"바라밀다"("건너간다"라는 뜻이 있다)를 전제로 해서 말한다면 차안(此岸(이쪽 강둑)에서 피안彼岸(저쪽 강둑)으로 가는 배가 큰 것은 대승이고 작은 것은 소승일 텐데, 건너간다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큰 수레나 작은 수레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버스와 자가용을 생각한다면 버스는 아무나 탈 수 있지만 자가용은 그 주인과 아는 사람만이 탈 수 있습니다. 버스는 개방적인 데 반해 자가용 세단은 폐쇄적이죠. 버스는 대중이 "더불어" 갈 수 있는 수단이고 자가용은 "선택된" 소수만이 갈수 있는 수단입니다.

 

 

수행자들의 성격에 따라 그들이 타는 수레와 관련하여 쓰는 삼승(三乘)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3종류의 수레라는 뜻이지요.

    • 그 첫째가 성문승, 그 둘째가 독각승(혹은 연각승), 그 세째가 보살승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3승은 실제로 기나긴 초기불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문승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싯달타가 말하는 소리(聲)를 실제로 들은(聞) 사라믈이니까 가섭, 수보리, 가전연, 목건련 같은 불제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싯달타의 자가용에 자연스럽게 올라탈 수 있는 선택된 소수들이겠지요. 그 다음에 독각승이라는 것은 홀로(獨) 깨닫는(覺) 사람, 즉 선생이 없이 홀로 토굴에서 수행하여 깨닫는 사람들, 12인연因緣을 관觀하여 깨닫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연각승이라고도 합니다. 분명 이 독각, 연각이야말로 성문 다음 단계에 오는 수행자들이었겠죠.

    • 그 다음이 보살이라는 개념인데 보살이라는 것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입니다. "보리"는 지혜, 깨달음의 뜻이 있죠. "살타" 즉 "사트바"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외연이 넓은 말입니다. "본질", "실체", "마음", "결의", "태아", "용기". 그리고 "유정"(정감이 있는 존재라는 뜻)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보리살타라는 것은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 "그 본질이 깨달음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부류의 사람 중에서 성문과 독각은 물론 작은 수레의 인간들이겠죠. 그렇다면 셋째 번의 보살이야말로, 보살이 타는 보살승이야말로 큰 수레가 될 것입니다.

 

싯달타의 "4문출유四門出遊"라 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의 고뇌의 테마는 노老(늙음), 병病(병듦), 사死(죽음)의 3자입니다. 노, 병, 사가 고苦로서 자각되었다는 것은 인간 모두가 평소에 젊음에 대한 오만과 건강에 대한 오만과 살아있음에 대한 오만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죠. 젊음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인간의 늙어감에 대한 비통이 생겨나고, 건강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병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게 되고, 삶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나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노, 병, 사를 고苦로서 자각할 수 있었던 아주 예민한 감성의 젊은이가 싯달타였기에 그의 고뇌는 모든 인간에게 공감이 되는 보편성이 있는 것입니다. 노, 병, 사를 자각할 때,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의 파며를 의미하는 것이죠. 이 자기파멸의 과정을 어떻게 자기완성의 길로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고뇌 속에서 무명無明(인간의 본질적 무지)을 발견하고, 사성제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금강경"은 실제로 "벼락경" "벽력경"으로 번역되어야 했습니다. 벽력처럼 내려치는 지혜!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는 멸집의 지혜입니다.

 

 

"앎도 없고 얻음도 없다!" 여기 "지智"는 반야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냥 "안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도 뭘 모르는 자들이 그렇게 "안다고" 떠들어대는 데 있습니다. 반야는 앎을 버림으로써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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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공감, 사랑, 그리고 현재를 즐기는 것!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이다.

 

 

[본문발췌]

 

 

삶에서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매일매일이 단조로워 주위 세계가 무채색으로 보일 때,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아 심장이 무너질 때, 혹은 정신이 고갈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렸을 때, 그때가 바로 자신의 퀘렌시아를 찾아야 할 때이다. 그곳에서 누구로부터도, 어떤 계산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 자유 영혼의 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자아를 회복하는 길이다. 나의 퀘렌시아는 어디인가? 가장 나 자신답고 온전히 나 자신일 수 있는 곳은?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나의 퀘렌시아를 갖는 일이 곧 나를 지키고 삶을 사랑하는 길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것보다 더 높은 성품은 없다고 붓다는 말했다. 영성은 내가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일이며, 나 자신 못지않게 다른 존재들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일이다. 타인에게 문제가 있으면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세상이 아프면 나도 아플 수밖에 없다.

 

 

갈등의 10퍼센트는 의견 차이에서 오며, 나머지 90퍼센트는 적절치 못한 목소리와 억양에서 온다는 심리학의 통계가 있다. 목소리의 크기가 옳음의 척도는 아니다. 소리를 지르는 관계는 가슴이 멀어진 관계이다. 그래서 자기 말이 들리게 하려고 더 크게 소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슴은 더욱 멀어진다. 소리친 다음의 침묵은 가슴이 죽어버렸음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는 행동이나 말이 그 사람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은 그 느낌을 간직하고 떠나게 된다.

 

 

동일한 무게의 배낭을 지고 동일한 길을 걸었으나 두 사람이 느끼는 짐의 무게와 고난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목표 지점과 원하는 결과를 향해 가느라 삶이 그 여정에서 선물하는 것들을 지나치기 일쑤이다. 삶은 그 여정들로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말이다. 한 사람은 도중의 난관들을 피해 서둘러 목저지에 도착하느라 마음이 급하지만, 또 한 사람은 과정에서 발견하는 신비와 뜻밖의 경험들에서 순수한 기쁨을 얻는다. 그에게 삶은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며, 목적지는 오히려 그 과정들을 경험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설정한 지점에 불과하다. 목적지에 이르면 또 다른 목적지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과정과 순간순간이 목적지'라는 말은 트레킹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진리이다. 사실 전 세계의 산과 정글 속에서 행해지는 트레킹의 진정한 의미는 목표 지점에 서둘러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정의 매 순간을 즐기고 감동했는가'에 있다. 그 즐거움과 감동이 고난을 불사른다. 순간순간을 즐기면 발거음도 가볍고 자연스럽게 목적지로 나아간다. 그 기쁨이 신비하게도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때 나아가는 길이 더 명확해진다. 모든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여행의 내용이다. 어느 지점에 도달 했는가보다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가, 얼마나 많이 그 순간에 존재했는가가 여행의 질을 결정한다. 우리는 여행자이면서 동시에 여행 그 자체이다. ...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있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 ... 삶의 향기는 언제 목적지에 도착하는가의 여부와 관게없이, 우리가 걸어가는 길 중간중간에 피어 있는 들꽃 같은 얼굴들과 매 순간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담벼락에 핀 꽃을 보는 마음의 여유와 관심, 그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쉬어 감이 그 여정을 풍요롭게 만든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다. 공간의 이동만이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로의 이동,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도 길이다.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라고 하는데 '떠도는 사람', '길 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방황하며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찾는 존재를 가리킨다. 호모 비아토르는 길 위에 있을 때 아름답다. 꿈을 포기하고 한곳에 안주하는 사람은 비루하다. 집을 떠나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진 사람만이 성장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인생에서 많은 것을 놓쳤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놓친 것은 '지금 이 순간들'이다. 삶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언제든 줄 준비가 되어 있다.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지치만 매 순간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계산과 두려움 때문에 뒤로 미룬 모든 날들이 우리가 놓친 길일들이다.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지금이다. 행동하는 날, 그날이 바로 길일이다.

 

 

여행이 내게 준 선물은 삶과 세상에 대한 예찬, 그것이다. 광부는 수많은 돌들에 불평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광부의 눈은 보석을 발견할 뿐이다. 예찬하는 마음 역시 모든 돌들을 보석으로 만든다. 부자는 누구인가? 많이 감동하는 사람이다.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

 

 

<지상의 양식>에서 앙드레 지드는 말한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한 송이 꽃의 기적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바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혼자 걷는 길은 없다. 당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여행을 하든 과거에 그 길을 걸었던 모든 사람, 현재 걷고 있는 모든 사람이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당신과 함께한다. 당신은 그 모두와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같은 파동끼리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주 안에서는 어떤 에너지도 사라짐 없이 보존된다. ... 자신이 분리된 존재라고 믿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의 고정된 생각과 관념, 제한적인 지각 작용이 만들어 내는 환상일 뿐이다. 그것이 존재 대한 가장 큰 오해이다. 우리가 우리의 큰 의식과 접촉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개인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그때 우리는 시공간을 넘어 동일한 파동을 지닌 존재들과 연결된다.

 

 

때로는 우회로가 지름길이다. 삶이 우리를 우회로로 데려가고, 그 우회로가 뜻밖의 선물과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안겨 준다. 먼길을 돌아 '곧바로' 목적지로 가는 것, 그것이 여행의 신비이고 삶의 이야기이다. 방황하지 않고 직선으로 가는 길은 과정의 즐거움과 이야기를 놓친다. 많은 길을 돌고 때로는 불필요하게 우회하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헤매는 것 같아 보여도 목적지에 도달해서 보면 그 길이 지름길이자 유일한 길이다. 길들이 자세히 표시된 지도를 가끔은 접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길을 잘못 접어들어 들르게 된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줄 수도 있는 것처럼. 신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기 위해 때로는 길을 잃게 한다.

 

 

여행은 얼마나 '좋은 곳'을 갔는가가 아니라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고 얼마나 자주 그 장소에 가슴을 갖다 대었는가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하며, 그것에는 시간이 걸린다. 세상의 모든 장소들은 사리와 숄로 얼굴을 가린 여인과 같다. 낯선 자가 다가오면 더 가릴 것이다. 그리고 그 색색의 천 뒤에서 검은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세상에는 시간을 쏟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가고, 또 가고, 또다시 가라. 그러면 장소가 비로소 속살을 보여 줄 것이다. 짐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일정은 계획한 것보다 더 오래 잡으라. 인생은 관광tour이 아니라 여행travel이다. 그리고 여행은 고난travail과 어원이 같다. 장소뿐만 아니라 삶도 쉽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면 삶 역시 우리에게 사랑을 돌려준다. 사랑하면 비로소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공감은 '나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관심을 갖겠다는 선택'이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에서 나 자신이 해방되는 일이다. - 칼루 린포체

 

 

수 세기에 걸쳐 인간은 다른 사람의 삶을 추종하고 모방해 왔다. 종교와 수행도 그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혹시 누군가가 도중에 '기쁨'을 '심각함'으로 잘못 베끼고, '웃음'을 '근엄함'으로 틀리게 적고, '즐거움'을 '죄'로 혼동하지는 않았을까? '예찬'을 '무덤덤함'으로, '행복'을 '소유'로 옮겨 적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 역시 잘못된 필사본을 후대에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경전과 철학서들은 여행 서적과 같다. 세상에는 떠나지 않고도 장소에 대한 매력을 갖게 하는 책들이 많다. 그러나 정말로 떠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여행서들이 가진 오류를 누가 발견할 것인가? 즐겁고,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교리들은 잘못 베낀 것일 가능성이 높다. 모든 정의와 도그마를 넘어 두려움 없이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면 언제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경전이다. 인생은 필사본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써 나가는 책이다. 우리는 예술가이며 예술 그 자체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면 삶이 그만큼 더 소중해진다. 자신이 간발의 차이로 살아남은 행운아임을 안다면 무의미한 고민이나 일들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주어진 날들이 선물처럼 다가온다. 더 절실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 가장 아까운 것이 '매 순간을 살지 않은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시작해야 하는 가장 창조적인 행위는 삶의 매 순간을 붙잡는 일이다.

 

대재앙이 일어나리라는 걸 알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가를 묻는 프랑스 일간지의 질문에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 삶이 갑자기 멋있어 보인다. 삶이 얼마나 많은 계획, 여행, 사랑, 배워야 할 것들을 숨겨 놓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의 게으름으로 인해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 끊임없이 미루고 있는 그것들을. 하지만 그것들이 영원히 불가능해질 위기에 처하면 그것들은 다시 아름더워진다. 아, 대재앙이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면 많은 것을 하리라! 새로운 화랑들을 구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던지고, 인도로 여행 갈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 하지만 대재앙은 일어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 일들 중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으름이 절실함을 무력화시키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늘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대재앙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죽음이 오늘 밤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영적인 깨어남이란 새로운 각도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삶을 원하고 새로운 장소를 갈구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새로운 눈이다. 관념은 우리를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많은 것을, 무엇보다 경이로움을 빼앗는다. 눈앞의 사람과 사물을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게 도고, 놀라워하지 않고 감동하지 않게 된다. 합리적인 머리만 작동할 뿐 직관적인 가슴이 기능을 멈춘다. 어느 순간 세상이 빛을 잃었다면 시인의 눈으로 바라볼 일이다. 인생의 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얼마나 많이 느끼고 감동하며 살았는가'이다. 시인은 평범한 자두 열매에도 감동할 줄 알는 사람이라고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말했다. 풀벌레 하나, 꽃 한 송이, 저녁노을, 사소한 기쁨과 성취에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이다. 감동을 느낄 때 우리는 정화되고, 행복해지고, 신성해진다. 그리고 감동받아야 감동을 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불을 전하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이 불타야 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내면의 불이 꺼진 사람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뒤돌아보는 새는 죽은 새다. 모든 과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날개에 매단 돌과 같아서 지금 이 순간에 여행을 방해한다. 마음이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분노를 느낄수록 현재를 사랑하기가 더 어렵다. 마음의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과거의 일을 계속 곱씹으면서, 그것에 의해 왜곡된 인식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내려놓고 현재를 붙잡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오래전에 놓아 버렸어야만 하는 것들을 놓아 버려야 한다. 그다음에 오는 자유는 무한한 비상이다. 자유는 과거와의 결별에서 온다.

 

 

내려놓을수록 자유롭고, 자유로울수록 더 높이 날고, 높이 날수록 더 많이 본다. 가는 실에라도 묶인 새는 날지 못한다. 새는 자유를 위해 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 자체가 자유이다. 다시 오지 않을 현재의 순간을 사랑하고, 과거 분류하기를 멈추는 것. 그것이 바람을 가르며 나는 새의 모습이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한 바람이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새는 날갯깃에 닿는 그 바람을 좋아한다.

 

 

외부의 힘에 의해 깨진 알은 생명이 끝나지만, 내부의 힘에 의해 깨진 알은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위대한 일은 언제나 내부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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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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