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업 : 자본수익률(ROC) = 영업이익(EBIT, 세전영업이익) / 투입유형자본 (순운전자본+순고정자산)
저렴한 가격 : 이익수익률 = 영업이익( EBIT) / 기업가치(시가총액+순이자부담부채)
인내심은 모든 투자에서 성공으로 가는 관문이다. 주식시장에서 '투자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는 격언이 나온 이유다. 마법공식이 아무리 훌륭하고 빼어난 투자방법이고 당신의 돈을 불려줄 기가 막힌 전략이라 하더라도, 당신이 기다리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돌아올 것은 손실뿐이다.
벤자민 그레이엄은 우리에게 큰 폭의 안전마진magin of safety을 마련해두는 것이 투자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가르쳤다. 다시 말해 당신이 사들이는 것의 가치를 파악한 후 그보다 훨씬 밑도는 수준의 가격으로 지급하라는 얘기다. 어떤 회사의 가치와 우리가 지급하는 가격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어야 큰 폭의 안전마진이 형성되고, 그래야 장기적인 성공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는 법이다.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아니라, 그럴 리 없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다." - 아티머스 워드
대부분의 고객 및 투자자는 해당 전략이 시장이나 경쟁자들에 비해 몇 년 동안 저조한 실적을 내면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린다! 바로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전략을 고수하기란 힘든 것이다. 자산운용 전문가는 다른 사람들이 잘하고 있을 때 잘하지 못하면, 모든 고객과 심지어 자신의 일자리까지 잃을지 모르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많은 자산운용가들은 이 리스크를 회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대다수의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투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이것은 가장 인기 있는 회사, 대개 다음 몇 분기 또는 앞으로 1, 2년 동안 가장 유망해 보이는 기업의 주식을 매입한다는 의미이다.
평균 이상의 기업을 평균 이하로 사다. ... 마법공식은 등수를 매기는 체계를 통해 회사를 고른다. 마법공식은 높은 자본수익률과 높은 이익수익률을 동시에 가진 회사들에 최고 등수를 매긴다. 간단히 말해서 공식은 우리가 체계적으로 평균 이상의 기업을 평균 이하의 가격으로 살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는 높은 자본수익률을 낼 수 있는 기업에 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첫째, 높은 자본수익률을 낼 수 있는 기업은 또한 그 수익을 매우 높은 수익률로 투자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기업들은 돈을 겨우 평균적인 수익률로만 투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기회는 매우 특별하다. 둘째, 우리가 방금 배웠듯이 높은 자본수익률을 낼 수 있는 능력은 또한 높은 수익 성장률을 내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높은 자본수익률을 내는 기업들은 어떤 종류의 특별한 우위를 확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특별한 우위, 즉 경쟁 우위가 있기 때문에 경쟁사들이 생겨도 평균 이상의 수익을 내는 능력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특별한 점(신제품, 향상된 제품, 유명 브랜드, 경쟁있는 위치)이 없는 기업들은 평균적인 또는 평균 이하의 자본수익률을 올릴 가능성이 높다. 어떤 회사의 사업에 특별한 점이 없다면, 아무나 뛰어들어 그 사업을 시작하기가 쉽다. 약 어떤 사업이 높은 자본수익률을 올리고 있고 경쟁하기도 쉽다면, 결국 누군가는 경쟁사를 차릴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본수익률이 평균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지 계속 경쟁할 것이다.
리스크에 대해서 고려해 봐야 할 때에는 일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투자 전략에 대한 다음의 두 가지 요점만 알아 두길 바란다.
해당 전략을 장기간 따랐을 때 돈을 잃을 위험, 즉 리스크는 얼마인가?
당신이 선택한 전략이 장기적으로 다른 전략들보다 더 저조한 실적을 낼 리스크는 얼마인가?
탁월한 투자 전략들은 대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만약 어떤 투자 전략이 정말 이치에 맞는다면, 장기간 투자하면 투자할수록 궁극적인 성공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투자 기간에 대한 시야는 5년 또는 10년, 20년으로 잡는 것이 이상적이다.
미스터 마켓은 단기적으로는 감정에 기초하여 주가를 매길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회사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단기적으로 미스터 마켓은 주식을 적정가 이하 또는 이상으로 팔거나 사는 매우 감정적인 사람처럼 행동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진다. 그는 전혀 딴판이 되어 적정 가격을 매긴다.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도 알지 못한 채 개별 기업의 주식을 고르는 것은 불붙은 성냥을 가지고 다이너마이트 공장 안을 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무모한 짓이다.
여행이나 공간의 변화를 통해 마음의 복잡함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다른 삶을 간접 경험도 한다.
누군가는 내면의 성찰과 명상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하고, 여행에서 돌아와 집 담장안에 핀 꽃, 반겨주는 강아지, 고양이, 새장의 새들에게 더 위안을 받기도 한다.
尋春(심춘) -작자 미상-
盡日尋春不見春(진일심춘불견춘)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맸건만 봄은 보지 못하고
芒鞋遍踏壟頭雲(망혜편답롱두운) 짚신이 다 헤지도록 언덕 위 구름만 따라 다녔네
歸來笑撚梅花臭(귀래소연매화취) 지쳐서 돌아와 뜰 안에서 웃고 있는 매화향기 맡으니
春在枝頭已十分(춘재지두이십분) 봄은 여기 매화가지 위에 이미 무르익어 있는 것을
[본문발췌]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찾아 또다시 떠나고 싶어지면 나는 다른 어디도 아닌 뒷마당을 돌아볼 거에요. 그곳에 없다면 애초에 잃어버린 적도 없을 테니까요. - <오즈의 마법사>의 도러시
'아무데도 가지 않기'의 개념은 두말할 필요 없이 단순하다. 내면이 들여다보일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니 말이다. 가령 당신이 차에 흠집이 났을 때, 굳이 그 부분을 새로 칠할 방법을 찾아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의 문제는 (게다가 그 해결책, 즉 마음의 평화는) 내면에 있다. 자신의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이슬람의 우화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인물과 똑 닮았다. 우화 속 남자는 자신의 집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는데 거리가 더 환하다며 거리로 나가 열쇠를 찾으러 다닌다. 2000년도 더 전에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다시피, 우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다. 허리케인이 들이닥쳐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을 때, 어떤 사람은 비로소 과거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기회로 보는 것이다. 반면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 사이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어나 한 사람에게만 일생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항상 좋거나 항상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네. 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햄릿의 2막2장에서, 햄릿이 로젠크란츠에게 하는 말)
삶의 상당 부분은 우리 머릿속에서 벌어진다. 기억이나 상상, 추측이나 해석 같은 것들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바꾸기만 해도 내 삶을 훌륭하게 바꿀 수 있을 것만 같다.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최고의 무기는 마음을 바꿔 다른 관점을 볼 줄 아는 능력이다. - 윌리엄 제임스
실리콘밸리에는 매주 '온라인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안식일을 맞아 균형감각과 방향감각을 되찾으려고 금요일 밤에 거의 모든 전자기기를 껏다가 월요일에 다시 온라인 상태로 돌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여력이 있다면 시골에 집을 얻거나 세컨드 하우스를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늘 세컨드 하우스에서와 같은 시간을 주중에 만드는 편이 더 간단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는 특히 고가의 부동산을 구입할 형편이 안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이동과 연결과 공간의 시대가 되었지만, 정작 우리의 일상은 시간에 잡아먹혀버렸다. 물론 마르크스가 이 말을 한 맥락은 지금과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느 곳에나 연결될 수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지리적인 제한이 사라지자마자 시간이 점점 더 우리에게 횡포를 부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이 어울릴수록 나 자신과 소통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일본의 뒷골목에서 살기 위해 뉴욕을 떠날 때만 해도 나는 가진 돈은 물론 즐거움과 친목생활, 여러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 거라 각오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더욱 풍요로워졌다. 바로 시간이다.
속도의 시대에, 느리게 가는 것보다 더 활기찬 일은 없으리라. 산만함의 시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보다 더 호화로운 기분이 드는 일도 없을리라.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시대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으리라.
불안은 감정의 혼돈과 균형을 무너뜨려 마음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한다. 세상의 지위, 권력, 부에 대한 기준이 달라진다면 불안에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 존 러스킨
[본문발췌]
지위(status)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
좁은 의미에서 이 말은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을 가리킨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가리키며, 이 책에서는 이 의미가 더 중요하다.
높은 지위는 즐거운 결과를 낳는다. 이 결과에는 자원, 자유, 공간, 안락, 시간이 포함되며, 남들에게 먼저 배려받고 귀중학 여겨진다는 느낌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런 느낌은 다른 사람들의 초대, 아첨, 웃음, 경의, 관심을 통해 당사자에게 전달된다.
지위로 인한 불안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걱정. 이런 걱정은 매우 독성이 강해 생활의 광범위한 영역의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사람들(소크라테스나 예수)은 다르겠지만, 세상이 자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면 스스로도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실패에서 굴욕감이 생긴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우리의 가치를 납득시키지 못했고, 따라서 성공한 사람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할 처지에 놓였다는 괴로운 인식에서 나온다.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다.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자극하며, 남들보다 나아지도록 고무하며, 남에게 해를 주는 괴팍한 행동을 못하게 억제하며, 공동의 가치 체계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결합한다. 그러나 모든 욕구가 그렇듯이, 이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이런 상황을 대처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동기 때문에 높은 지위를 구하려고 달려드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일반적인 가정이 있는데, 이 가운데 돈, 명성, 영향력에 대한 갈망이 주로 손에 꼽힌다. 아니, 정치적 이론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요약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랑. 먹을 것과 잘 곳이 확보된 뒤에도 사회적 위계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은 그곳에서 물질이나 권력보다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돈,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징으로서 - 그리고 사랑을 얻는 수단으로서 - 더 중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을 하고 부산을 떠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활필수품을 얻으려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노동자의 최저 임금으로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의 개선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하는 것은 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한다. 가난 때문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가장 열렬한 욕구의 충족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은 들락거려도 아무도 주의하지 않는다. 군중 속에 있어도 자신의 오두막 안에 처박혀 있을 때나 다름없이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 지위와 이름이 있는 사람은 온 세상이 주목한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관심을 가진다.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제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자존심 = 이룬것 / 내세운것", 윌리엄 제임스의 방정식은 우리의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무엇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 이 방정식은 우리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도 암시한다. 하나는 더 많은 성취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는 거이고, 또 하나는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비꼬는 듯한 어조로 근대 사회가 이루어낸,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생산성과 원시적인 사냥과 채집 사회의 형편없는 자원을 비교했다. ... "(근대 사회에서는) 아무리 지위가 낮고 가난한 노동자라 해도 근면하게 일하고 절약을 하기만 하면, 과거의 어떤 야만인이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많은 생활필수품을 손에 넣고 편리한 생활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스미스보다 22년 전에 장-자크 루소는 날카롭고 기묘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놀랍게도 야만인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 가운데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고용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
프로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농담을 통해 장애 때문에 공개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적의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활용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계속해서 농담을 통하여 위험한 메시지가 "농담의 형태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않을 사람의 귀에도 들어가게 할 수 있다. ...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농담을 특별히 애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우리는 정당화할 수 없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조롱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왕, 능력이 권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왕은 조롱한다. 인간적 본성을 잊고 특권을 남용하는 높은 지위의 권력자들은 조롱한다. 우리는 조롱을 하고, 웃음을 통하여 불의와 과잉을 비판한다. 따라서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어지면 도덕적 목적을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의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고,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이 풍자는 "악이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만화가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면 당황하거나 창피할 수 있는 상황이나 감정에서 웃음을 끌어낸다. 그들은 환한 대낮에는 차마 살펴볼 수 없는 약한 부분을 짚어낸다. 또 우리가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주 어색한 측면들을 드러낸다. 걱정이 은밀하고 강렬할수록 웃음의 가능성도 커지며, 이때 웃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꼬챙이에 꿰어내는 솜씨에 바치는 찬사가 된다. 따라서 많은 유머가 지위에 대한 불안에 이름을 붙이고, 그럼으로써 억제하려는 시도라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유머를 보고 들으면서 세상에는 나만큼이나 질투심 많고 사회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처럼 돈문제 때문에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처럼 멀쩡한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약간 맛이 간 상태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또 나처럼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마음이 상냥한 만화가들은 지위로 인한 우리의 근심을 보고 우리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놀린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를 비판한다. 그드릐 교묘한 솜씨 덕분에 우리는 마음을 열고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 자신에 대한 씁쓸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만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를 비난했다면, 우리는 분노하거나 상처를 입고 움츠러들었을지도 모른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에 대한 공격의 핵심은 이것이 우선순위를 엄청나게 왜곡하여, 물질적 축적 과정을 가장 높은 수준의 성취로 치켜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상을 진실되고 폭넓게 규정한다면, 물질적 축적은 우리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사전에 따르면 부는 단지 많은 액수의 돈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이 일차적인 의미도 아니었다. 부란 나비에서부터 책이나 미소에 이르기까지 뭐든지 풍부한 상태를 의미한다. 러스킨은 부에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부에 강박감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염두에 두었던 부는 특별한 종류였다. 그는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 - 그는 이런 일군의 특징을 단순하게 "삶"이라고 불렀다 - 에서 부유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이 최후의 사람에게>에서 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적 관심을 버리고 "삶"에 기초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이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러스킨은 말한다.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 보통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 그들의 금고 자물쇠만큼이나 부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부유할 수가 없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에세이 <자립Self-Reliance>에서도 비슷한 외침이 울려 퍼진다.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 에머슨의 말에 따르면, 어떻게 살고, 옷을 입고, 먹고, 쓰느냐 하는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념에 맞추다 보면 얼굴에 서서히 "우둔한 표정"이 나타나게 된다. 모든 고귀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금언을 따라야 한다. "나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하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에머슨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제 순응이니 조화니 하는 이야기는 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그런 말들을 관보에 실어 조롱하도록 하자. ... 이제 결코 고객을 숙이고 사과하지 말자. ... 이 시대의 매끈한 평범함과 비열한 만족을 모욕하고 질책하자."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 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야심을 품고, 어떤 결과들을 선호하고,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 밖에 없는 대가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