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속한 공간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기본 요소다. 

 

 

[본문발췌]

 

 

<행복의 건축>에서 알랭 드 보통이 말한 것처럼, "장소가 달라지면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사람도 달라진다." 건축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을 축조하는 과정'이기에, 행복한 삶을 설계하는 건축가들에게 '우리는 어디에서 가장 행복한가'에 대한 신경과학적 이해는 필수다. ... 내 공간을 둘러보고 내 삶의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나의 공간이 얼마나 적절한가?

 

 

심리지리학은 건축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나는 어떤 공간에서 행복하고 창의적이며 안식을 얻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역세권이나 학군, 투자가치만으로 집과 건물을 바라보지 말고, 공간 속에 놓인 내 안을 들여다보라고 말이다.

 

 

인간은 건축물을 지어서 지각을 바꾸고 사고와 감정에 영향을 끼치며, 이런 식으로 인간 행동을 조직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또 많은 경우에 돈을 벌어들인다.

 

 

설계에 의해서든 우연에 의해서든 건축물은 아이의 행복한 미소를 보고 따라 웃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과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를 행동하고 느끼게 만들어준다. 이런 연결은 원래 우리가 경험을 서로 나누고 자연의 위험과 기회에 적절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된 신경회로의 작용으로, 우리의 신경계에 깊이 새겨져 있다.

 

 

수천 년 동안 전통적인 벽은 건축 설계로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벽은 사람들의 이동을 막고 시야를 가린다. 벽은 사생활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한다. ... 벽은 사회적 관습과 문화적 규준을 강화하거나 새로 만든다.

 

 

제이 애플턴Jay Appleton은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의 진화적 연속선을 주장하면서 '조망prospect'과 '피신refuge'이라는 두 가지 기본 원리로 인간이 심미적으로 특정 자연경관을 선호하는 성향을 설명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애플턴은 동물이 서식지를 선택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보는 것이지 보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독일의 생태학자 니코틴버겐의 주장에 주목했다. ... 애플턴의 조망과 피신 이론은 미학부터 조경과 실내 설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특정 장면을 선호하는 생물학적, 진화적 기초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애플턴의 연구를 시작으로 수백 편의 연구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싶어하고 어디에 머물고 싶어하는지를 결정하는 데 이런 공간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프랜시스 쿠오와 윌리엄 설리번이 풀과 나무의 양이 각기 다른 도심의 거주구역 연구를 시작으로 쏟아져나온 여러 연구에서는 풀과 나무가 많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통제가 잘된 몇몇 현장 연구에서도 초목이 많은 동네에서는 반문화행위와 범죄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초목이 많은 환경에 사는 주민들은 서로를 알고 지내고 대화를 많이 나누며 사회적 결속력도 높아서, 특정 정신병리에 시달리지 않을뿐더러 경범죄 피해도 덜 입는다. 이상의 모든 연구에서는 자연에 대한 원초적인 반응이 현대의 거주지 선택에 필요하지 않은 진화적 요인과 관계되지만, 여전히 도시환경의 범죄율과 거주적합성, 행복을 비롯해 심리적으로는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프랙털 차원과 비슷한 범위 내에 있는 이미지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이미지의 프랙털 속성과 우리의 선호도가 일치하는 현상과, 나아가 이런 이미지에 대한 생리적 반응(자연풍경에 반응해서 나타나는 회복탄력성과 같은 반응)을 기반으로 우리의 뇌가 자연을 인지하는 방식은 수학적 속성의 도움을 받는다는 개념이 나왔다. 우리가 자연에 끌리는 성향을 프랙털 수학 개념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특히 매력적이다. 

 

 

자연의 심리적 혜택을 얻는 데 굳이 자연이 필요하지 않다면, 자연을 아예 없앤 뒤 건물 전면에 폭포 소리와 새소리를 삽입한 대형 컬러화면을 부착해 도시를 건설하면 되지 않을까? ... 다른 대안이 없는 환경에서는 자연을 시뮬레이션한 장치만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실제 창문으로 자연을 내다볼 수 있는 환경에서는 화면 속의 자연이 주는 효과가 미미하다.

 

 

자연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증거가 쏟아져나온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업무에 중점을 두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활동에 고도로 집중하는 능력을 최고로 여긴다. 중간에 자연공간에서 보내는 상쾌한 시간은 생산과 소비 중심의 '실제 생활'에서 잠시 벗어난 휴식 정도로 여긴다. 정신이 유연하게 변화하는 초등학교를 비롯한 교육제도에서는 정규교육의 목표를 교실에 가만히 앉아 한가지 활동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으로 삼는다. 이런 활동을 힘들어하는 아이들은 따로 분류하거나, 환자로 취급당하거나, 약물로 뇌 기능을 변형해서 고도의 선택적 집중을 강화하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 유치원부터 대학교 강의실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실이야말로 부자연스럽고 유도된 집중력을 강화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집중력은 금방 떨어진다.

 

 

인간이 벽돌, 모르타르, 회반죽, 창문을 배치하기 시작한 시대부터 세상을 보는 효과적인 인공 창문의 역할을 하는 전자화면의 발명에 이르기까지, 환경 설계의 역사는 우리가 세계를 보고 세계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에 대한 체계적인 도전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우리의 타고난 집중 습관과 힘든 일상에서 잠시 숨 돌릴 틈을 찾는 습관 대신에 고도로 집중하고 선택적으로 주목하는 지각 상태가 자리잡았다. 두 가지 모두 우리의 욕구를 끌어내고 충족시키는데 도움이 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를 정신적으로 고갈시킨다. 집중력을 끌어내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자연의 질서에 융합된 칼라하리 부시맨의 삶처럼 기술 이전의 사회에서 누리던 생활양식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적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되도록 단련된 신경장치가 되었다. 사실 우리가 인류를 존재하게 해준 원시적인 야생 환경을 (나날이 복잡해지는 물질적 욕구를 만들어내고 만족시키는) 소비지상주의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 탈출 밸브로 여기는 것은 역설적이다. 현대인으로 산다는 의미가 이렇게 급격히 달라진 점을 감안할 때 초기 인류의 흔적이 현재의 감정, 현재의 기호, 현재의 행동에 여전히 영향을 끼친다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나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건축 환경이 주는 안락을 거친 야생의 생활과 바꾸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우리가 여전히 수천 년전에 떠나온,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던 환경과 자연의 기하학을 갈망하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자연을 선호하는 성향은 우리가 어디에서 걷고 어디에 앉을지 선택하는 것부터 무엇을 보고 싶어하고 어떻게 생활하고 싶어하는지에 이르기까지 행동이 거의 모든 측면에서 집중력을 끌어내는 기술로 나타나기도 하고 (실제 자연이든 시뮬레이션 자연이든) 자연 장면의 회복탄력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연을 향한 우리의 갈망은 가장 중요한 심리지리학적 구조의 토대가 된다.

 

 

지루한 경험에 잠깐만 노출되어도 뇌와 신체의 화학반응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식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건축 환경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권태를 유발하는 요인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 개성 없고 단조로운 환경이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뇌에도 눈에 띄게 영향을 끼친다.

 

 

장소는 우리를 감정에 휩싸이게 하고 우리의 움직임을 지시하고 우리의 의견과 결정을 바꾸며, 때로는 우리를 숭고하고 종교적인 체험으로 이끌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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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고 자신만의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 질문이 적절한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본문발췌]

 

 

인간이 스스로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할경우, 자유는 성가신 부담이 된다. ... 우리는 개인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젊은 나치의 말 그대로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대중운동에 가담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극악한 행위에 대해 나치의 말단 병사들이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명령에 따른 책임을 져야 했을 그들은 자신들은 속았고 무죄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나치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할 근거가 약할수록 자신의 국가나 종교, 인종의 우월성을 내세우게 된다.

 

 

교육의 주요 역할은 배우려는 의욕과 능력을 몸에 심어 주는 데 있다. '배운 인간'이 아닌 계속 배워 나가는 인간을 배출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란 조부모도, 부모도, 아이도 모두 배우는 사회이다.

 

 

도서관 출입과 저녁 식사를 위해 거리를 걸을 때 나의 감각은 시야에 있는 것은 무엇이건 건드려 보고 냄새를 맡아 보는 즐거운 강아지와 같았다. 나의 귀는 거대한 도시가 뿜어내는 생명의 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내 몸의 모든 체모에는 번잡한 보도의 긴장감이 감지되었다.

 

 

자기기만이 없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이 분출할 때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만, 그것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전쟁을 이기고, 대륙을 제압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망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Hope, 절망과 고통은 정태적인 요소이다. 상승의 동력은 희망과 긍지에서 나온다. 인간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구이다.

 

 

Language, 언어는 질문을 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대답은 투덜대거나 제스처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반드시 말로 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던 때부터였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

 

 

Happiness. 이런저런 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오염된 자아에 있다는 인식을 억누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이 된다.

 

 

지상은 인간들로 넘쳐 난다. 마을에서도, 들판에서도, 길에서도 사람들을 보게 되지만 당신은 그들을 주목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다 당신의 눈이 한 얼굴과 마주치고 경탄하게 된다. 갑자기 당신은 지상의 어떤 거소가도 다른 인간의 숭고한 유일무이성을 의식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이미지로 자신을 만든다. 그런 만남에는 쓸쓸함이 있고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은 어떤 것이 있다.

 

 

Religion. 종교는 신이나 교회, 성스러운 동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적 몰입의 근원은 자아에,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자아의 거부에 있다. 헌신은 자아 거부의 앞면이다. 종교적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왜냐하면 몽테뉴도 지적했듯이 '자기를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에서는 볼 수 없는 인간에 국한된 병'이기 때문이다.

 

 

양들은 주변에 익숙하지 못하다. 양에게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기괴하고 전에 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리석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양에게는 인간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다. 양들의 그러한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자아낸다. 양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생에 대한 두려움과 이 세상에서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느낌 때문에 종족이나 민족으로 무리를 짓는 것이리라. 

 

 

Hatred. 증오가 정당한 불평보다는 자기 경멸에서 솟아난다는 것은 증오와 죄의식의 밀접한 관계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40대의 인간은 새로운 시작이 불가능한 완성품이라는 터무니없는 가정을 배척해야 한다. 40대가 청소년보다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거나 쉽게 잊는다는 증거는 없다. 중년은 보다 감각이 예민하고, 인생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며, 관찰과 행동에 있어 끈기가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안정적 수입원을 확보하는 데 인생의 절반을 필수적으로 소비하도록 하고 있다.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이제 남은 나머지 절반은 상부 구조의 건설에 바쳐져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손대는 사람은 100만 명 가운데 한 명도 없다. 우리에게 은퇴란 희화이고 잔인한 농담이다. 우리의 쇠락하는 여생이 권태와 실망으로 찌들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적 생활 양식은 단죄되어야 한다. 노년은 감미롭고 향기로운 인생의 열매여야 한다.

 

 

유사성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차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차이를 만들어 낸 사람의 이름을 알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런 사람들은 묘비도 없고 찾는 이도 없는 무덤 속에 묻혀 있다. 역사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보기에 의해 만들어진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들이 역사에 해결의 빛을 비춰 준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나는 몹시 기뻤다. 아마 우리의 기록된 역사와 관련한 문제는 역사가들이 과거에 대한 통찰을 현재에 대한 연구에서가 아니라 고대 유물과 기록에 대한 연구에서 끌어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역사가도 다른 우회로가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해명해 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Money.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상투어를 만들어 낸 사람은 악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며, 인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다.

 

 

친숙한 것을 새로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창조적인 예술가의 힘이다. ... 친숙성은 생의 날카로은 날을 무디게 한다. 아마 예술가의 본모습은 이 세상에서의 영원한 이방인이거나 다른 별에서 온 방문객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방도가 될 수 있다. 내가 불만 품는 걸 내키지 않아 하는 것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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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속 톱니바퀴의 삶을 살고 있지만 안정을 위해 애써 모른체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가 말하는 성공한 린치핀의 삶을 동경하는 것 아니지만 어렵지만 현 상태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통찰, 창조성, 대담함을 지닌 예술가로서 변화와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삶은 공감한다.

 

 

[본문발췌]

 

 

안타깝게도 학교, 직장, 정부, 가족을 비롯한 우리 사회가 우리의 천재다운 특성을 계속 깔아뭉개고 쫓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문화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은 것처럼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안정을 주는 대신 우리의 천재성과 예술적 기교를 앗아간다.

 

 

시스템의 효율보다 개인의 차이가 중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변화해야 하는 시기를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조직에 끝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다. 많은 보수를 챙겨가는 고지식한 관료, 지시받은 일만 하는 사람,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 규율을 꼼꼼히 따지는 사람, 주말만 기대하는 사람, 안전한 선택만 추구하는 사람, 회사에서 잘리지 않을까 늘 걱정하는 사람들이 조직을 지키고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무리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자신만의 생각을 가진 사람, 세상을 뒤집을 만한 사람,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조직을 이끌 수 있는 기획자,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 판매자, 꼭 필요한 일이라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기끼어 감수해내는 열정적인 혁신가가 필요하다. 어떤 조직이든 이러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사람, 남다른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바로 린치핀이다. 물론 아직까지 린치핀이라는 존재의 의미와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 조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성공으로 한걸음 다가가기 위해서는 일을 하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천재성을 갖춘 '예술가'가 필요하다.

 

 

진정한 창조성이란 게임의 틀을 바꾸는 것, 상호작용 방식을 바꾸는 것, 더 나아가 질문을 바꾸는 것이다.

 

 

시장이 보상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 통찰, 가치를 창조하는 용기다.

 

 

마음과 영혼이 담겨 있지 않더라도 맞춤법만 틀리지 않도록 답안을 작성해 제출하면, 고리타분한 선생은 분명히 A를 줄 것이다. 기본적으로 교육대학에서는 억지로라도 자신을 끼워 맞출 수 있는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선생들은 학생들이 받침을 맞게 썼는지 띄어쓰기를 제대로 했는지 체크할 것이다. 짧은 글이 감동을 주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방식으로 학교는 통찰과 창조성을 획일적으로 찍어낸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 시스템은 '시키는 만큼만 하면 돈을 버는' 자본주의적 아이디어와 더불어 감동을 전하고 베푸는 '선물 경제(gift economy)'가 작동하는 하이브리드 경제다. 

 

 

예술가는 현 상태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통찰, 창조성, 대담함을 지닌 사람들이다. 예술가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인다.

 

"예술이란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위한 선물이다." 예술가란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더 많은 사람을 바꿀수록, 사람들을 더 많이 바꿀수록, 더욱 훌륭한 예술가다. 예술은 기술과 무관하다. 물론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는 한도 안에서만 기술은 의미가 있다. 기술과 기교는 예술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술은 꾸밀 필요가 없다. 그것을 활용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유용하다. 그림, 조각, 작곡이라고 해서 무조건 예술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예술이 아니다.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다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예술은 인간을 대변한다. 기계는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될 확률이 훨씬 높다. 

 

 

디지털 시대가 될수록 모든 일을 수량화하고 기계화하고 인터넷으로 즉각 공유한다. 모든 일을 스프레드시트 네모 칸에 집어넣을 수 있다. 문제는 경쟁자도 모두 똑같은 스프레드시트를 쓴다는 것이다. 결국 비슷비슷한 사업 모델을 만들어 경쟁자들과 함께 시장을 나눠먹을 수밖에 없고,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꿈도 꾸지 못한다. "수량화하기 쉬울수록 그 가치는 작다."

 

 

대량생산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순간 예술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예술가는 모든 것을 흔들어놓는다. 손길이 닿는 대로 모든 것을 새롭게 발명한다. 쏟아지는 정보를 받아들여 놀랍고도 새로운 결과물을 창조해낸다. 예술가들은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고 어디로 튈지 모르고 측정하기도 어렵다. ... 소비자들은 예술가를 좋아한다. 투자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곧 현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현 상태를 싸구려 만들지 않는다. 예술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공동체는 모두를 위한 가치를 만들어낸다. 아일랜드의 록밴드 U2가 순회공연을 할 때 이들에게 순회공연은 매일 밤 새로운 예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돈을 벌기위해 진부한 틀에 맞춰 순회공연을 하는 순간,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한낱 기념품을 만드는 공장이 될 것이다. 자신의 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리면 즉석에서 앤디 워홀 스타일의 실크스크린 그림처럼 바꿔주는 서비스도 있다. 이것은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예술은 아니다. 'OOO 스타일'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기를 포기하고 대량생산의 일부가 된다는 뜻이다. 

 

 

호혜주의에서 벗어나라. ... 선물 시스템이 마술인 이유는 선물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주는 것일 뿐 계약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물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며 둘을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준다. 계약은 개개인을 고립시킨다. 돈이라는 매개로 잠시 연결시켜줄 뿐이다. 하지만 선물은 사람을 하나로 묶어준다.

 

 

거래가 만드는 가치는 한계가 있다. 돈거래를 할 때 우리는 '조건'에 집중한다. "그것을 주면 이것을 주겠다"라고 계산한다. 최초에 교환이 발생하려면 받는 사람이 그에 대한 값을 치르겠다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약속 없이는 어떤 교환도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선물을 줄 때는 그러한 조건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것을 주면 상대방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을 줄 것이라 생각할 뿐이다. 선물을 줄 때 기대하는 것은 상대방의 기분을 바꾸는 것이다. 거래와 선물의 양이 늘어날수록 그 힘은 상당히 달라진다. 거래는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고 해도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특별한 가치를 덧붙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물은 퍼져나갈수록 더 많은 가치를 계속 만들어낸다.

 

 

메트칼프의 법칙, 네트워크의 가치는 네트워크에 연결된 노드의 수를 제곱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팩스기계를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팩스기계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는 뜻이다(혼자 팩스를 가지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인터넷은 더 훌륭한 도구가 된다. 트위터를 사용하는 친구가 많을수록 트위터는 내게 훨씬 유용한 도구가 된다. 연결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낮추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는 곧 선물이다.

 

 

보고, 인식하고, 깨달아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지도를 만들 수 있다. 가고자 하는 곳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하기 전에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세상을 투명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개인적인 관점을 통해 세상을 본다. 자신의 편견과 경험과 기대를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물들인다. ... 관리자와 투자자는 통찰력 있는 직원,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을 가진 지원을 찾는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지혜를 쁘라냐라고 한다. 집착과 억압이 없는 삶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자유, 보는 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한다. 이러한 자질을 갖는다면 어느 조직에서든 스스로 훌륭한 자산이 될 것이다.

 

 

자기의 세계관을 폐기하고 다른 사람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려는 노력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첫 걸음이다.

 

 

화를 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우연하게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별다른 흔들림 없이 대응할 수 있다. 일은 이미 일어났다. 새가 울어대거나 천둥이 친다고 해서 화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휴대전화가 울린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화가 난다. 그렇게 화를 내면 그런 감정이 자신에게 전화를 건 사람에게 전해진다고, 또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린치핀은 소리나지 않는 마이크에 화를 낸다고 해서 마이크가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관리직원에게 잔소리를 한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도 않고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안다.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사람은 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저마다 내놓는 사람들의 독창성을 저주하기보다 포용함으로써 더 큰 축복과 생산적인 결과를 누리며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 또한 훨씬 멋진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반응이 반발로 바뀔 때, 또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 때 우리는 진다. 가르친다고 바뀔 사람은 없다. 또 가르치는 행동이 내 기분을 더 낫게 만들지도 못하고 내 일을 더 훌륭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남을 가르치려는 순간 우리는 진다.

 

 

결과에 집착하는 것은 변화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미래를 억지로 만들어내고자 하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미래를 억지로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열정과 집착의 축에 따른 네 종류의 사람

 

 

 

 

예술가는 자신이 다루는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세계관에 집착하는 순간, 현재 일어나는 상황과 예술가가 맺는 관계는 달라진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 상호작용하는 것을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다룰 수 있고 변형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지 못한다. 똑똑한 협상가는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정직하게 이해함으로써 예술을 만들어낸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만 모든 사람에게 작동하는 협상전략을 빚어낼 수 있다. 자신이 일하는 조직, 투자한 회사,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 기억, 기대에 집착을 갖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한 집착과 그 집착에 대한 반응은 우리가 진심으로 기대하는 하는 것과 다른 결과를 바라도록 만든다.

 

 

과학은 지도를 만드는 일이다. 실험 조수는 지시받은 일을 한다. 과학자들은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궁리한다. 과학자가 놀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해도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탐험하고, 직감을 따르고, 풍경을 조망하고, 새로운 계획을 짜는 일이 과학자가 하는 일이다. 스스로 놀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의식적인 선택이다. 과학자들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확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논증이 나타나고 미스터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안다. 결국 지도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 게놈을 처음으로 해석한 크레이그 벤터는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느 것이야말로 바로 린치핀이 필요한 이유다.

 

 

예술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 방법을 정확하게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도가 있다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지도 없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평가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무의식적인 최소한의 기억조차, 결코 실현되지 않는 꿈에 대한 부조리한 연상이라고... 부질없는 행동이라고... 떨쳐버린다. 나는 간신히 떠올린 처음 생각을 속삭인다(속삭이기 때문에 정령은 듣지 못한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 그래도 나는 할 거야." 바로 그 순간, 그 높은 공간은 '내 공간'이 된다. 거리에 서서 올려다 보는 순간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불가능해,, 그래. 그래서 도전하는 거지.' - 영화 <맨 온 와이어> 중에서

 

 

'오늘은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다. 자신의 관점을 바꿀 것인가,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마음의 불을 켤 것인가, 불안과 의심에 주눅 들어 지낼 것인가. 자신의 일을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일에 끌려다닐 것인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볼 것인가, 나쁜 점을 끄집어낼 것인가. 의욕에 불타는 레이저광선이 될 것인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분산광선이 될 것인가.' - 이시타 굽타(Ishta Gupta)

 

 

창조는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에, 모든 창조가 똑같을 수 없으며,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이 바로 진정한 삶의 전환점이다. 일생에 단 한번 올까 말까 하는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정해진 길을 따라 내려가는 선택을 하고 싶어 한다. 그들이 늘 선택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길은 노동자로서, 시민으로서 우리 잠재성을 실현시켜준다. 바로 이것이 시장이 원하는 선택이다. 장기적으로 시스템에 순응하는 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안정적인 길을 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미래에 대한 강력한 비전을 만들어내고 실제로 그것을 일궈내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 새로운 성공의 길은 순응이 아니라 비전과 참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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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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