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사회에서 돈이 숭배받는 자본주의 가운데 발생하는 양극화, 승자독식! 빈곤이 무엇에서 발생하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해결방법을 찾기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평등속의 어울림'

 

 

[본문발췌]

 

 

현대의 진보가 이룩하는 모든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사치를 조장하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진보라 할 수 없고 또 이러한 진보는 오래 가지도 못한다.

 

 

철학을 추구하는 자는 마음이 자유로워야 한다. - 프톨레마이오스

 

 

빈곤의 진정한 원인은 과거나 현재나 인간의 탐욕이지 자연의 인색함이 아니다.

 

 

문명 수준이 일정할 때 많은 인구는 적은 인구보다 물자를 더 많이 마련할 수 있다. 빈곤과 비참함의 원인은 - 현재의 이론은 인구증가 때문이라고 한다 - 자연의 인색이 아니라 사회의 부정의에 있다. 인구 증가로 생겨나는 새로운 입은 과거의 입보다 더 많은 식품을 소비하지 않지만 새로운 손은, 자연스러운 질서 속에서, 더 많은 물자를 생산해 낸다.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 부의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진다면 인구가 많을수록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더 많아진다. 평등이 보장되는 상태에서 인구의 자연증가는 개인을 가난하게 하기는커녕 언제나 부유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기성 지역의 부가 우위에 있는 것은 생산력의 우위 때문이 아니라 부의 축적 때문이며, 신생 지역에서는 시간이 없어 부를 축적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축적된 부라는 개념에 대해 잠시 검토해 보는 것이 좋겠다. 사실 부가 축적될 수 있는 양은 아주 조금밖에 안 되며, 사회도 대부분의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산다. 몇 가지 사소한 형태를 제외하면 부의 축적이 많이 이루질 수가 없다. 우주의 물질은 노동에 의해 원하는 형태로 변했다가 끊임없이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어떤 형태의 부는 몇 시간, 어떤 것은 며칠, 어떤 것은 몇 달, 어떤 것은 몇 년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형태의 부는 드물다. 매우 유용하고 수명이 긴 형태, 예를 들어 선박, 가옥, 철도, 기계류 등의 부를 보더라도, 노동을 통해 계속 보수하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못 쓰게 된다. 어느 사회에 노동이 중단되면 마치 분수로 흘러가는 물을 잠그는 것처럼 부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노동이 다시 시작되면 부는 금방 되살아난다.

 

 

노동자는 미개인보다 더 장시간 더 힘들게 일을 하지만 미개인이 얻는 단순한 생활필수품 이상을 얻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미개인이 누리는 독립성을 잃고 산다. 자신의 힘으로 욕구를 직접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이 동시에 일해 주지 않으면 간접적으로 충족시키지도 못한다. 이 노동자는 생산자와 소비자로 구성된 거대한 체인의 한 연결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다. 사회속의 지위가  낮을수록 사회에 더 의존적이 되고, 무엇이든 혼자 힘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극히 줄어든다.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노동을 행하는 힘조차 자신의 통제 밖에 놓인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또는 자신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 마치 태양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듯이 - 어떤 일반적인 원인에 의해서 이 힘이 박탈되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원초적 저주를 은혜처럼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단순한 육체노동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 선인 듯이, 그리고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주장하고, 법제화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는 인간성의 본질적인 요소, 즉 신처럼 환경을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능력을 잃고 만다. 노동자는 노예나 기계나 상품이 되어 버리고, 어떤 점에서는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인류 문명 발달의 불평등을 설명해 주는 원리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관한 원리가 아니며, 인구가 생존물자에 압력을 가한다는 원리도 아니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에 있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 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커다른 기본 요인이다. 이점은 틀림이 없다. 토지는 인간의 삶터이고, 인간이 필요한 물자를 꺼내 쓰는 창고이며, 욕구를 충족시킬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노동을 투입하는 대상이 되는 원료이다. 토지 또는 토지 생산물이 없다면 해산물도 취할 수 없고, 태양열도 이용할 수 없고, 그 밖의 어떠한 자연력도 이용할 수 없다. 우리는 토지에서 태어나 토지로부터 물자를 얻어 살다가 토지로 돌아간다. 인간은 들의 풀이나 꽃과 마찬가지로 흙의 자녀이다. 사람에게서 토지에 속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사람은 육체 없는 영혼에 불과할 것이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에서 부를 생산하는 힘을 보태줄 뿐이다. 따라서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고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가치를 올리고 토지 소유의 힘을 강하게 해 줄 뿐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토지소유는 귀족층의 근거이자 거대한 재산의 기초이고 권력의 원천이다. 인도의 최상 계층은 브라만이 오래 전에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시대건 토지를 소유하는 자에게 토지의 열매가 귀속된다. 하얀 일산과 거드름 피우는 코끼리는 토지 소유의 꽃이다."

 

 

임금의 상승 및 지대를 걷어 공공목적에 씀으로써 생기는 새로운 고용 기회의 창출은, 낭비를 막고 엄청난 사회적 손실을 없애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힘이 노동에 더해질 것이다. 임금이 가장 높은 곳의 노동이 가장 생산적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은 비능률적인 노동이다. ... 노동의 능률은 언제나 일반적인 임금과 같이 상승한다. 임금이 오르면 자존심, 지적 능력, 희망, 활력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다. 기계나 동물은 정해진 능력이 있으면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생산의 큰 원동력은 근육이 아니라 마음이다. 인간의 신체가 낼 수 있는 힘은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능력에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물결이 흐르고 인간의 의지 앞에 물질은 찰흙처럼 유연하게 된다. 대중의 안락과 여가와 독립을 증대시키면 지적 능력도 증대된다. 그리하여 두뇌가 손을 도우며, 극미한 생물을 측정하고, 별의 궤도를 추적할 수 있는 자질이 평범한 일상에서도 발휘된다. 부의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도록 하는 사회제도는 부를 생산하는 노동의 능력을 무한정 끌어오릴 수 있을지 모른다. 현재와 같은 생산 과정에서도 그 이익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높아지면 그만큼 생산 과정의 개선이나 기계류의 발명과 활용도 빠르고 쉽게 진행된다.

 

 

문명에 고통을 주는 원인이자 문명이 사망하는 원인은 불평등한 분배이다!

 

 

토지가치에 모든 조세를 부과한다면 거대한 재산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부자를 무일푼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 이 조치는 재산이 줄어도 별 타격을 입지 않을 계층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지금보다 더 빈곤하게 만들지 않는다. 거대한 재산을 줄일 뿐 누구도 빈곤에 빠뜨리지 않는다. 부의 총량이 엄청나게 증가할 뿐만 아니라 평등하게 분배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양의 부를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각자의 힘과 욕구가 서로 다른 경우에 평등한 분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부가 각자 근면, 기술, 지식, 절제를 통해 공동의 부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분배된다는 뜻이다. 생산하는 사람에게서 생산하지 않는 소수의 수중으로 부를 집중시키는 큰 원인이 사라질 것이다. 불평등이 계속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불평등일 뿐, 자연법을 부정함으로써 생기는 불평등은 아니다. 비생산자가 사치 속에서 빈둥거리고 생산자가 동물적인 생존에 필요한 물자만을 겨우 얻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토지 독점이 사라지면 엄청난 부자가 생길 염려도 없다. 부자의 재산은 문자 그대로 노동 생산물인 부로 구성될 것이고, 부는 계속해서 소모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 토지사유제를 철폐하면 국가 부채의 원인이 사라지므로 국가 부채도 오래지 않아 소멸할 것이다. 각자 자기 노력으로 정당하게 번 것을 가지는 동시에 그 이상은 가질 수 없다면 거대한 재산이 형성될까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도대체 백만 달러를 자기 노력으로 정당하게 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며 인간에게 저주스러운 것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대가가 생기지 않는 노동과 결과가 나오지 않는 노력을 혐오할 뿐이다. 매일 매일 힘들여 일해서 겨우 연명한다면 이는 정말로 고된 노동이다. 이것은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펌프질을 계속하거나, 깔려 죽지 않기 위해 바퀴를 계속 밟는 지옥 같은 형벌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미한 일에서 해방된다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더 열심히, 더 훌륭히 일하게 되며, 그럴  때 자신을 위해 또는 타인을 위해 무언가 일다운 일을 하게 된다. ... 인류의 생활을 개선하는 일, 예를 들면 지식을 확대하고 힘을 증가시키고 문예를 풍부하게 하고 사상을 고양시키는 일은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은 채찍질이나 동물적 욕구에 의해 강제되는 노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할 뿐, 더 많이 먹고 마시고 입고 과시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사회에서 궁핍이 사라지면 이러한 종류의 일이 대폭 증가할 것이다.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면 개인의 모든 힘이 생존 유지에 다 소요된다. 정신력은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릴 때에만 자유롭게 되어 고차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 어울림으로 인해 분업이 가능해지고 다수인의 협력에 의해 생기는 경제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어울림은(association) 진보의 첫째 요소이다. 개선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어울릴 때 이루어지며, 어울림이 넓고 긴밀할수록 개선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리고 인간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도덕법칙이 무시되느냐 존중되느냐에 따라 정신력이 대립 속에 낭비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므로, 평등 또는 정의(equality of justice)는 진보의 둘째 요소이다. 이렇듯 평등 속의 어울림(association of equality)이 진보의 법칙이다. 어울림은 정신력을 자유롭게 하여 개선에 바칠 수 있도록 해주며 평등, 정의, 자유는 - 이 세 용어는 도덕법칙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 정신력이 쓸데없는 싸움에 소모되는 것을 막아 준다. 이제 모든 다양성, 모든 전진, 모든 정체, 모든 퇴보를 설명할 수 있는 진보의 법칙이 나왔다. 인간은 같이 모임으로써 진보하며, 서로 협조함으로써 개선에 바칠 수 있는 정신력을 증대시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갈등이 발생하거나 어울림이 조건과 힘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진보 경향은 약화되고 결국에는 반전된다.

 

 

진화에 대한 허버트 스펜서의 정의를 사용한다면, 사회의 발전은 그 구성원과 관련하여 볼 때 불확실하고 비체계적인 동질성에서부터 확실하고 체계적인 다양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발전 단계가 낮은 사회는 장기도 팔다리도 없는 하등동물과 비슷하여 신체의 일부를 잘라도 살 수 있다. 발전 단계가 높은 사회는 기능과 힘이 전문화된 고등생물과 같아서 각 부분은 다른 부분에 극히 의존적이다.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한 원인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 경향이었다. 이런 경향이 현재의 우리 문명에 강도를 더하여 나타나고 있다. 임금과 이자는 계속 하락하고 지대가 상승한다.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빈자는 힘도 희망도 잃고 있으며, 중산층은 사라지고 있다.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 덕, 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정치는 부패한 독재정치보다 그 자체로 더 나쁘지는 않지만 국민성에는 더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부랑자, 극빈자 등 노동의 기회가 극히 제한된 계층이나 구걸하지 않으면 훔치거나 굶어야 하는 계층이 선거권을 갖게되면 파괴적인 결과가 발생한다. 가난으로 고통받고 타락한 계층의 손에 정치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마치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 옥수수 밭에 풀어 놓는 것과 같으며, 삼손의 눈을 빼고 국민 생활이라는 기둥에 팔을 비끄러매는 것과 같다. 권력의 승계가 세습이나 추첨 - 고대 공화국에는 이런 제도가 있어다 - 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현명하고 정의로운 권력자가 더러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부패한 민주정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는 더 악한 자에 의해서만 쫓겨날 수 있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

 

 

사실상 돈을 많이 가진 어떤 자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경우, 인구와 사업이 번창한 큰 중심지에 가서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고 자수하면 백중 구십구는 일시적인 구금을 당하는 정도 이상의 큰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고, 다만 일부는 자기 재산에 비례하여 또 일부는 피살자의 재산과 지위에 비례하여 얼마간의 손실을 입을 뿐이다. 게다가 살인자의 돈은 보호자를 잃은 피살자의 가족이나, 시민을 잃은 국가에 돌아가지 않는다. 소송을 지연하고 증인을 세워 배심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방법을 아는 변호사에게 돌아간다. 그리하여 도둑질을 크게 하는 자는, 훔친 것의 일부를 잃는 정도의 처벌밖에 받지 않게 된다고 확신할 것이다. 또 도둑질을 크게 하여 처벌을 받더라도 한 밑천 남길 수 있는 자는, 마치 바이킹이 항해를 성공리에 마쳤을 때처럼 동료들의 환영을 받게 된다. 자기를 믿어준 사람의 재산을 털거나 과부와 고아의 재산을 털더라도 많이만 털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부를 안전하게 자랑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점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경향은 부의 분배가 가장 불평등한 곳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며, 불평등이 심할수록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야만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이와 같이 정의가 파괴되는 예는 모든 분야에서 사법제도가 무력해지고 있는 현상의 하나에 불과하다. 차라리 법을 폐기하고 제일원리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치안위원회 같은 기구를 조직하여 스스로 사법제도를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인간은 남에게 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받는다. 이 권리에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가 포함된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면 이들 권리도 부정된다. 토지는 사람이 생활하는 터전이자 유일한 터전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하사물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면서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는 사회에서 정치적 자유는, 인구가 증가하고 발명이 계속되면 굶주림을 겨우 면할 정도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자유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이 진리를 무시해 왔다. 그리하여 거지가 생겨 거리를 배회한다. 빈곤은 우리가 정치적 주권자라고 더 받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결핍에서 생기는 무지는 학교에서 고칠 수 없다. 국민은 상전이 시키는대로 투표를 한다. 정치가의 역할을 선동꾼이 차지한다. 정의의 저울에 달린 추의 무게는 돈으로 결정된다. 시민적 덕목을 중시하지 않는 자가, 심지어 위선으로라도 그 덕목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튼튼하다고 생각했던 공화국의 기둥은 무거운 하중을 견디지 못해 이미 굽어 있다. ... 자유! 이는 신비한 힘을 가진 단어이다. 공허하게 귀를 어지럽히는 단어가 아니다. 자유는 정의이고, 정의는 자연법이며, 건강과 조화와 힘과 동지애와 협동의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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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겠지만 옛날 조상들이 살던 세상과 비교해 우리 삶은 더 편리하고 풍요롭게 좋아졌다. 반면, 필요한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버리고 주변의 사소한 일들에 무디어져 가고 있지 않나요?

 

박노해 시인의 글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삶에 대한 맷집을 더 키울 수 있다.

 

 

[본문발췌]

 

 

어떤 일이든 시작 전에는 예상을 하고 짐작을 하고 기대를 하게 된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으니 그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긴 하다. 그러나 예상, 짐작, 기대가 현실과 100퍼센트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상, 짐작, 기대가 현실과 일치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이 맞는 정도?

그러니까 제주에서 살면 어떨까. 덥고 습해서 힘들까? 그곳 사람들은 어떨까? 돈벌이는 어떨까? 많은 예측과 상상과 추측이 나래를 펴고 때로는 그 생각들 때문에 두렵기도 기쁘기도 하겠지만 어느 것도 현실은 아니라는 점. 일단은 저지르고 부닥쳐 보면 알리라는 것, 답은 그뿐인 듯....

 

 

가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자기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다면 쉬어보라고. 내가 이 세상의 '리얼'을 경험한 때는 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쉴 때였다. 맨발로 해변을 걸을 때, 오토바이를 타고 라오스와 중국의 국경을 넘을 때, 아이의 손을 잡고 집 앞 공원을 산책할 때 어쨌든 나는, 나는, 쉬고 놀 때, 세계를 보고 만졌다. 그리고 내가 '쉬는 시간'에 세계는 실재하고 있었다. - <우리는 사랑아니면 여행이겠지>, 최갑수

 

 

환경의 변화는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다. 나는 그 기회가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형태이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변화 앞에선 모든 일이 좋을 수많은 없는 것이다.

 

 

인생에서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그 기회가 긍정적인 사건의 형태로 오기를 생각하고 기대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시나 모욕감 등과 같은 고통이 오히려 그 자신의 본질을 찾고 알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의 사건이든 그때 경험하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 프리츠 펄스

 

 

동화작가 정채봉님은 '오늘 내가 나 자신을 슬프게 한 일들이 뭐가 있을까?' 하면 이런 게 떠올랐다고 해요. 꽃밭을 그냥 지나쳐버린것, 새소리에 무심하게 응대하지 않은 것, 밤하늘의 별들을 새어보지 않은것, 좋은 데도 체면 때문에 환호하지 않은 것.... 어른이 되면서 사소한 일들에 점점 무디어져 갔죠. 좋은 일이 있어도 크게 기뻐하지 못하고, 슬픈 일이 있어도 목 놓아 엉엉 울지 못하고, 재미난 일에도 박장대소 웃지 못하면서요. 일부러 시크한 척 노력했던 걸 거예요. 그래야 마음이 덜 다치는 줄로만 믿었으니까요. 제주에 지내면서 알아차린 게 있네요. 내 삶에 언제부터 이렇게 감탄사가 사라져 있었지? 였어요. 더 이상 새롭지도, 신기하지도 않고, 고맙지도 않고, 의례 그러려니 하는 감동 없는 일상. 어른스럽게 굴자. 느끼지 마, 소리 내지마, 자신을 억누르면서 마음 속 작은 소리, 누군가의 외로운 몸짓 같은, 작지만 중요한 것들을 알아채는 감각도 함께 무뎌졌더군요. 생채기를 덮어둔 채 다 나았다 믿고 있었죠. 세상에서 수없이 반짝이고 있는데 미처 주의를 주지 못한 것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고 음미하는 일. 좋은 건 좋다 말하고, 신나는 일에는 환호성을 지르고, 슬픈 일에는 펑펑 우는 일. 이렇게 평범하지만 어려운 일을 조금씩 연습하는 중이에요. 원한 적도 없는 '나이'라는 선물은 매년 배달이 되네요. 삶이 주는 그 선물을 싫다고 하기보다 아이들처럼 잘 갖고 놀아 볼래요.

 

 

사람 사이에서는 준만큼 돌려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더 빼앗기는 경우도 왕왕 있는데 자연에서만큼은 늘 준 것 이상으로 돌려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위대한 갯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박스 속 작은 귤 하나에도 1년의 비와 바람과 햇살과 새의 그림자, 벌레의 흔적, 사람의 손길과 그 모든 이야기들이 담긴다. 반짝거리는 결과물 이면에는 사람들이 미처 주목하지 않는 고된 과정이 있을 것임을, 나는 이제야 알겠다.

 

 

통조림을 먹고 싶은 데 깡통 따개가 없고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졌는데 충전할 곳이 없고 버스와 지하철은 파업 중인데 자가용은 수리센터에 들어가 있고 폭설이 사흘이나 계속 내려 슈퍼에 몇몇 상품의 재고가 바닥나는 날이면... 이런 경험을 할 때면 우리는 필요한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나는 오늘도 걷는다>, 미쉘 퓌에슈

 

 

내가 생각하기에 재능이란(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 - <뭐라도 되겠지>, 김중혁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 의미 있게. 그 순간을 가장 어여쁘고 가장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만들면 돼. 평생을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는 없어. 그러나 10분은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 있다. 그래, 그 10분들이 바로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첫 번째 걸음이고 그것이 수억 개 모인 것이 인생이야. - <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광고인 박웅현의 <여덟 단어>라는 책에 "인생에 정석과 같은 교과서는 없습니다. 열심히 살다 보면 인생에 어떤 점들이 뿌려질 것이고, 의미 없어 보이던 그 점들이 어느 순간 연결돼서 별이 되는 거예요." 라는 글귀가 나오는데 나는 이 비유가 참 좋다. 우리의 인생을 잘 들여다보면 사방에 무작위로 찍힌 점 같지만 나중에 이 점들이 모여 특정한 선 모양을 그린다는 의미다. 지금 당장 찍는 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행착오라고 여겼던 것들이 하나의 일관된 방향으로 선을 그려가고 있었음을 알 거라고.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949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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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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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침 없이 세상을 보고 듣고, 받아들이고, 외부가 아니라 내 안에서 행복을 찾으며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는 삶....

 

 

[본문발췌]

 

 

사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말은 돈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돈이 얼마나 있으면 행복하느냐는 관점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관점으로 바꿔야 맞는 질문이다.

 

 

부는 우리에게 많은 재화를 소비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지만, 동시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감소시킨다. - 조르디 쿼드바흐

 

 

돈으로 무엇을 사고 싶다면 상품이나 물건보다 경험이나 지식을 사라.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면 행복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언제나 '공짜'다. 공기, 시간, 삶.....

 

 

행복은 현재 우리의 상황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돈은 이것을 보완할 뿐이다. 돈이 행복을 주진 않지만 돈이 행복을 도울 수는 있다. 내가 돈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돈이 나를 주인으로 모시게 만든다면 돈은 얼마든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내일부터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그 결심을 이루기 위해 도전한다면 결과는 두 가지뿐이다.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것이다. 성공하면 그 길로 계속 가면 된다. 만약 실패해도 좀 더 현명한 사람이 되어 다시 도전하면 된다.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공했거나 더 현명해졌을 분이다. 단지 행동하지 않을 때만 손해가 있을뿐이다. 지금 즉시 목표를 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바란다. 오늘 하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90퍼센트다. 즉시 해야 한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가 말했듯 걱정의 40퍼센트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고, 걱정의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22퍼센트는 안 해도 그만인 사소한 것이고, 걱정의 4퍼센트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 4퍼센트는우리 힘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거리다. 불과 4퍼센트 때문에 나머지 96퍼센트까지 걱정을 더 하며 사는 것이다.

 

 

나는 줄기차게 그 사람의 크기는 그 사람의 생각의 크기라고 말해왔다.그런데 이 크기를 실제로 현실에서 만들어내는 도구는 끈기와 기개다.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생각을 현실화할 수 없다. 평범한 사람도 끈기가 있으면 비범해지고 비범한 사람도 끈기가 없으면 평범한 사람이 된다. 끈기는 모든 것을 이겨낸다. 세상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보상한다. 기회는 항상 다시 돌아오는데 끈기가 없으면 돌아오는 것을 보기 전에 그만두게 된다. 이외수의 존버 정신은 존중받을 만한다. 어떤 분야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성공과 가장 큰 상관관계가 있는 개인적 품성이라면 나는 당연히 끈기를 첫 번째로 본다.

 

 

위험이란 칼과 같아서 날을 잡으면 다치지만 손잡이를 잡으면 멋진 도구가 된다. 하지만 위험하다고 피하기만 하면 상처가 날 수밖에 없다. 인생에 두려운 것도 없고 배신도 없었고 모욕을 당하거나 굴욕적인 날들도 없었다면 그는 한 번도 위험을 감수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위험을 감수하거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위험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단 한 개도 찾을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주위의 모든 것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생명이 있는 것이든 생명이 없는 것이든, 나와 상관이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사물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모두 한 하늘 아래 있고 한 공간 안에 있다. 가까운 것은 가까운 이유로 더 많은 영향을 주고받을 것이고 멀면 먼대로 다른 영향을 줄 것이다. 이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다른 상황에서 존중을 만든다. 이런 상호 공감의 확장이 나를 성장시키고 공동체 전체를 안전하게 하며 전체가 성장하는 틀을 만든다. 남을 지게 만든다고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상식이야말로 최고의 지성이다.

 

 

인간은 가치와 명분에 따라 움직인다. 그 일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조직 내에서 한 부품 같은 구성원으로 추락하며 동기도 의욕도 욕구도 사멸된다. 이럴 때 이런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급여와 더 많은 급여뿐이다. 하지만 <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들어가는 순간 이 조직은 위대한 조직이 된다. ... <무엇은> 단순한 정보다. 듣고 기억하면 그만이다. <어떻게>는 기능이다. 손과 몸의 훈련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왜>는 우리가 감정을 다스릴 열쇠다. 충성, 믿음, 정직 등 인간 본연의 가치를 갖게 하며 인간의 행동과 의사결정을 유도하고 이끈다. 우리는 안다고 행동하지 않는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일 뿐이다.

 

 

인간이 바뀌는 두 가지 계기는 새로운 곳에 살게 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이 두 가지가 한 번에 바뀌는 경우가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이직할 때다. 이런 경우라면 누구든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환경이 바뀌거나 최근에 만난 사람이 나를 바꾸고 성장시키며 삶을 윤택하게 혹은 거칠게 만든다.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는 이렇게 한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상대가 말을 하고 내가 듣는 것이 대화다. 상대가 말을 하고 내가 그것을 이해하려 하면 그것이 교류다. 상대가 말을 하고 내가 공감하는 순간, 한 인간이 내게 들어오는 것이다. 귀를 열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지속적인 행복은 기대와 더불어 이기적인 집착을 기꺼이 포기했을 때 찾아온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이 없고 상실의 고통을 느낄 이유도 없다. 모든 것은 언젠가 당신을 떠나게 된다.

 

 

"그릇은 진흙으로 만들지만, 쓰이는 것은 그릇 속에 담긴 비움이다." - <도덕경>

 

 

세상이 힘든 이유는 욕심과 부러움 때문이다. 만족은 내가 가진 것이 많아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력이 있어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있다. ... 만족하지 못하면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높아도 행복할 수 없다. 나보다 부자는 여전히 많고, 나보다 현명한 사람 또한 많으며, 나보다 건강하거나 젊은 사람은 계속 늘기 때문이다. 부러워만 하면 자존감도 없어진다. 자신을 자책하기 바쁠 뿐이다. 비교를 중단하고 욕심을 버리는 순간, 만족과 행복이 손을 잡고 들어온다.

 

 

가진 것과 갖고 싶은 것의 차이를 크게 느끼면 불행을 느끼기 마련이다. 꿈은 그를 행복하게 하지만 꿈에 이끌려 가면 꿈도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지나친 바람이나 걱정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을 사라지게 만든다. 행복은 스스로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니 결코 외부의 조건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지 않기 바란다. 내가 지금 충분히 행복을 만끽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내가 가진 것이 행복의 근원이 아니라는 지각을 얻고 난 후에 생긴 자유 덕분이다.

 

 

결국 행복과 건강, 기쁨은 외적인 소유가 아니라 내적인 자각의 결과다. 내가 생각을 옳게 쓰면 나는 생각을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이고, 내가 생각을 옳지 못하게 쓰면 생각이 나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선인이 되거나 악인이 되는 것도 모두 이 생각의 쓰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성공하면 추억이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경험이 될 뿐이다. 사람은 능력이 없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 실패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다스릴 줄 알면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 자신감이 가득하고 걸음이 꼿꼿하며 생각과 말에 힘이 생긴다. 두려움이 다시 몰려오더라도 사랑의 힘을 믿고 당당하면 언제든 두려움과 공포를 발아래 둘 수 있다. 매일매일 성실함과 열정적인 노력을 통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사랑과 용기는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열쇠다.

 

 

마음을 자극하는 가장 유혹적인 감정은 진심에서 나오는 친절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언제나 그것에 굴복한다. 당신이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방법은 친절, 배려, 관용으로 선한 사람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갖는 것이다. 나는 분명 이것으로 여러분의 평생 행복을 보장한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길 원한다면 노을을 보기 위해 이미 해가 진 서쪽으로 달려나가서라도 바라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내 안의 거인은 나만 깨울 수 있다. 그 아무리 위대한 선생도 내 안에 거인이 있음을 알려줄 뿐, 그를 깨어낼 수 없다. 돈키호테는 말했다.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저 하늘의 별을 잡자.' 그렇다. 돈키호테를 따르라. 그것이 거인을 불러내는 최고의 방법이다.

 

 

행복의 비결은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을 언제 포기해야 하는지 아는 데서 출발한다. 욕심과 욕망을 줄이는 순간, 행복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행복을 잡으러 다니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그 행복이 눈 앞에 보이게 된다. 우리가 태어나서 벌어놓은 모든 것은 소멸된다. 소멸되는 것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다. 행복은 영속적인 것을 찾아 인간과 우주에 대한 사랑을 실현함으로써 가능하다.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부를 가져도 행복할 수 없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것은 이미 명백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내가 더 열심히 살 이유를 찾게 된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결핍을 느끼게 되지만, 냉소적이거나 부정적인 사람이 아닌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 된다. 남들보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이나, 외모가 부족하거나 재능이 없어도 이 문제로 부모를 탓하거나 남을 탓하기를 그치게 된다. 이 불평등에 순응하는 순간 불평등은 '도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공도 없다'는 진리를 확인해줄 뿐이다. 그러나 불평등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면 누구든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된다. 지금 주어진 환경이나 태어난 여건은 내가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만, 앞으로의 환경과 여건은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갈 수 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시절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축복이라고 생각되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오히려 사소한 역경이나 시련 앞에서 무너질 때가 많다. 인생이란 험한 세상에서 단 한 번의 예방주사조차 맞지 않아서 인생의 고난에 저항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흔히 우리가 말하는 축복받은 환경이나 재능이 오히려 단점일 수 있다는 뜻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떤 행위를 오래 지속하면 서서히 힘이 쌓여 어느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의 초기는 지루할만큼 천천히 움직이지만 어느 순간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는 변곡점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노력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변곡점에 서기 전에 포기한다. 때로 변곡점은 나를 이겨내는 시점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남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는 순간을 폭발하듯 맛보게 된다. ... 인생의 변곡점 역시 마찬가지다. 변곡점은 자신이 어디 있다고 알려주지 못한다. 다만 그렇게 쌓이고 모인 힘은 한낱 눈송이 하나, 물방울 하나에 부서지는 눈사태와 댐처럼 우리를 가로막았던 모든 상황을 한순간에 해결해버리는 것이다. 결국 믿는 만큼 성취하는 것이며 나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사업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선수다. 사업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고수다. 하지만 선수나 고수도 사업하는 때를 아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 의미로 사업가는 중용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용이란 가운데, 양극단의 중간이 아니다. 중용은 위치상 가운데가 아니라 시간이 포함된 개념이다. ... 중용은 때를 알고 알맞게 행동함을 뜻한다.

 

 

정치적으로 보수든, 진보든 인간 존중과 공생의 의미를 실천하는 쪽에 서겠다는 기준이 중용이다. 그렇게 시대에 따라 사안에 따라 보수도 진보도 될 수 있는 게 중용이다. 모든 일마다 언제나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이라면 옳지 않은 일도 지지하게 된다. ... 중용을 제대로 이해하면 이렇게 양극단을 자유롭게 오가도 마음에 걸릴게 없다. 위대한 지도자는 이러한 중용적 태도를 깊게 이해해야 한다. 중용을 지킨다는 건 들어갈 때와 나올 때를 이해하며 안다는 말과 동일하다. 중용을 이해하면 칭찬이나 비난이 같은 곳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그러니 기뻐하고 들뜨거나 해치려 하거나 분노를 표현할 때가 아님을 안다. ... 결국 중용이란 평범한 일상에 대한 평범한 선택이다. 즉 상식으로 돌아간다는 뜻과 같다. 이때야 비로소 모든 일에 무리수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거나 주는 일 없이 순리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순리를 따라 움직이게 되는 일이야말로 경영자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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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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