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옳고 바른 '말'도 간혹 다른 사람의 마음과 삶을 헤치는 무기가 되고, 때론 부메랑이 되어 나를 다치게도 한다. 사람과의 공감에 무엇보다 중요한 건 더 묻고, 더 많이 듣는 것이다. 

 

 

[본문발췌]

 

 

거의 모든 심리적 어려움의 원인을 뇌에서 찾는 이 시대에 나는 공 모양의 물통처럼 소박하지만 강력한 위력을 지닌 심리적 힘을 말하고자 한다. 그 힘은 즉시 작동한다. 약물치료보다 더 빠르게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삶의 고통에 실질적으로 대처하는 실용적인 힘이다. 그 힘의 중심이 공감이다. 내가 말하는 공감은 '경계'를 인식하는 공감이다. '경계'를 품은 공감, 그 입체적인 공감은 집밥 같은 치유, 적정심리학의 핵이다. 잘 모르고 보면 "어, 저걸 가지고 뭘 할 수 있단 말이야"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공감의 위력은 어떤 힘보다 강하다.

 

 

스타가 아니더라도 부모나 배우자의 강력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 자체를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들, 주어진 역할에 헌신하는 것이 자기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스타들이 겪는 공황장애 삶의 원리와 매우 닮아 있다.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삶의 풍경이다. 자기성(自己性)이 소거된 채 부모의 기대나 사회적 역할, 가치 등에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던 사람은 절대적 의존 대상이던 그 부모나 배우자와 이별하거나 절대적인 내 역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이 없어지거나 그 가치가 빛을 잃을 때 공황발작을 경험할 수 있다. 

 

 

공황발작은 곧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지만 절대 멎지 않으며, 죽을 것 같은 느낌이 생생하지만 물리적으론 절대 죽지 않는 병이다. 공황발작 자체로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자기 소멸의 끝에서 탈진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을 거둬들이는 경우는 꽤 있다. 심장이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워가며 살던 삶의 끝자락에서 더없이 기진맥진해져서 생 전체에서 마침내 손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해진다.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예외 없이 변하게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자기'다. 사람은 자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 사람은 본래 그런 존재다. ... 젊든 늙든 우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이젠 알 것 같다.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은 이후부터가 제대로 된 내 삶의 시작이다. 거기서부터 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노인도 그렇고 청년이나 아이들도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저 사람은 지금 내가 산소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키는 인증 작업일 뿐이다. 호흡이 가빠 산소 호흡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양념치킨을 시켜준다면 고마운 일도 아니고 도움이 될 리도 없다.

 

 

'네가 옳다'는 확인을 받으면 "집을 나가겠다, 죽겠다, 죽이겠다"는 따위의 말들은 이내 아침 이슬이 된다. '당신이 옳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으면 아침 이슬과 멱살잡이하는 허무한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옳다." 온 체중을 실은 그 짧은 문장만큼 누군가를 강력하게 변화시키는 말은 세상에 또 없다.

 

 

한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스펙이 감정이다. 감정은 존재의 핵심이다.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향, 취향 등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구성 요소들이지만 그것들은 존재의 주변을 둘러싼 외곽 요소들에 불과하다. 핵심은 감정이다. 내 가치관이나 신념, 견해라는 것은 알고보면 내 부모의 가치관이나 책에서 본 신념, 내 스승의 견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오로지 '나'다. 그래서 감정이 소거된 존재는 나가 아니다. 희로애락이 차단된 삶이란 이미 나에게서 많이 멀어진 삶이다.

 

 

존재 자체를 몸에 비유한다면 외모, 권력, 재력, 재능, 학벌 등은 몸을 감싼 여러 겹의 옷들이다. 넘치는 관심과 주목을 받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 아니라 그가 걸치고 있는 옷에 대한 주목이나 찬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직장이나 학위, 직업이 '나'가 아니듯 내 돈, 권력, 외모나 재능도 당연히 '나'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 가진 사람도 자기 존재가 주목을 받지 못하면 심한 결핍이 생긴다. 오히려 더 배를 곯는다. 외형적으론 가진게 많으니 존재 자체의 결핍으로 인한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말도 안 되는 투정, 배부른 투정 같은 것으로 치부해서다. 나중에 심리적으로 더 큰 곤경에 빠지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만약 그의 대답이 없어도 그가 대답을 피하거나 못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존재에 주목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말이 아니라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 자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 사람은 지옥에서 빠져나올 힘을 얻는다.

 

 

심리적 CPR이란 결국 그의 '나'가 위치한 바로 그곳을 정확히 찾아서 그 위에 장대비처럼 '공감'을 퍼붓는 일이다. 사람을 구하는 힘의 근원은 '정확한 공감'이다.

 

 

자세히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은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 마음을 구석구석, 찬찬히, 환하게 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는 어떤 상태다. 사람의 내면을 한 조각, 한 조각 보다가 점차로 그 마음의 전체 모습이 보이면서 도달하는 깊은 이해의 단계가 공감이다. 상황을,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면 알수록 상대를 더 이해하게 되고 더 만히 이해할수록 공감은 깊어진다. 그래서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내 걸음으로 한발한발 내딛으며 얻게 되는 무엇이다.

 

잘 모르면 우선 찬찬히 물어야 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시작되는 과정이 공감이다.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이쓸 때까지 조심스럽게 물어야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가장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파악인 동시에 상대에 대한 이해이고 앎이다.

 

 

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직급,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인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인정받고 보상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살 수 있게 된다. 공감은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만큼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힘은 그가 고요하게 가만히 있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는 차돌 같은 안정감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공감의 힘은 그렇게 입체적이다.

 

 

문이 존재 자체라면 문고리는 존재의 '감정이나 느낌'이다. 공감 과녁의 마지막 동그라미는 존재가 느끼는 감정이나 느낌이다. 존재의 감정이나 느낌에 정확하게 눈을 포개고 공감할 때 사람의 속마음은 결정적으로 열린다. 공감은 그 문고리를 돌리는 힘이다.

 

 

사람 마음은 외부에서 이식된 답으로는 절대 정돈되지 않는다. 답은 밖에서 오지 않고 언제나 내 안에서 발견돼야 내게 스미고 적용된다. 자기가 처한 상황의 실체, 자기 마음의 실체를 하나하나 또렷이 보고 느끼면서 자기 상황에 대한 심리적 조망권을 확보해야만 마음이 정돈되기 시작한다. 온몸, 온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진짜 아는 일이며 그렇게 알아야만 혼돈에서 벗어날 길이 보인다.

 

 

어떤 이의 생각, 판단, 행동이 아무리 잘못됐어도 그의 마음에 대해 누군가 묻고 궁금해한다면 복잡하게 꼬인 상황이 놀랄 만큼 쉽게 풀린다. 자기 마음이 공감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이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기꺼이 진다. 자기 마음이 온전히 수용되었다는 느낌 때문이다. 억울함이 풀려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다'는 명제는 언제나 옳다.

 

 

사람 사이의 경계를 지킬 수 있으려면 경계를 인식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공감을 주고 받는 일에서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부터가 '너'인지 경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너를 공감해야 할 순간인지 내가 먼저 공감을 받아야 하는 건지 알아야 너와 나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공감을 할 수 있다. 경계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공감에 대한 정확성이 높아진다.

 

 

공감은 본래 상호적이고 동시적인 것이다. 지구가 자전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공전을 멈추거나 공전을 하느라 힘이 빠져서 자전을 쉬면 자연의 모든 이치가 깨지듯 공감도 마찬가지다. 상호성과 동시성을 잃으면 공감도 없다.

공감은 상대를 공감 '해주는' 일이 아니다. 내 상처가 공감받는 것에 예민하지 못하면 누군가를 공감하는 일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어렵다. 나와 너, 양방을 공감하지 못하면 어느 일방의 공감도 불가능한 것이 공감의 오묘한 팩트다. 그래서 공감은 너도 살리고 나도 구한다. 그래서 공감은 치유의 온전한 결정체다. 이 온전함의 토대는 오로지 자기 보호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되고 유지되면 자기 보호는 자기 경계에 대한 민감성에서 시작된다.

 

 

자기 보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끝내 타인을 공감하는 일을 감당한다.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에게도 무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기적인 것도 아니고, 타인을 도울 자격이 없는 사람의 비겁한 행위도 아니다. 자기 보호를 잘하는 사람이야말로 누군가를 도울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관계에서의 상처는 경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얘는 딱 자기 아빠야, 얘는 딱 어릴 적 나야, 얘는 나랑 정반대야"와 같은 말들은 내 아이를 부모와의 연결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내가 아닌 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다. 자식을 바라보는 게으른 시선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이런 게으른 시각은 큰 둑의 작은 구멍이다. 결국 둑 전체를 무너뜨린다.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기쁨과 즐거움이거나 배움과 성숙, 성찰의 기회일 때다. 그것이 관계의 본질이다. 끊임없는 자기학대와 자기혐오로 채워진 관계에서 배움과 성숙은 불가능하다. 자기 학대와 자기혐오가 커질 수밖에 없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끊어야 한다.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면 끊어야만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관계들이 의외로 많다. 관계를 끊으면 그때서야 상대방도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그런 계기로 삼지 못해서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되어도 그건 그의 몫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누구나 한결같이 공감받고 공감하며 살길 원하면서도 막상 그렇게 살기 힘든 건 공감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라서 일 수도 있지만 공감까지 가는 길목에서 여러 허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 허들을 잘 넘어야 마침내 공감에 도달할 수 있다. 그토록 원하는 공감받고 공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허들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대표적인 허들이 가정에 대한 통념이다.  내 마음을 말하는 걸 유치하게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감정을 미성숙함의 표현이며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감정 통제를 잘해야 어른이고, 그래야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은 이성으로 얼마든지 통제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다. 마음에 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잘못이라고 위험한 통념이다. 그런 인식 때문에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른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비용을, 얼마나 치르고 사는 걸까.

 

불안할 때 안정제로 불안을 없애버리고 그 신호의 근원을 외면하면 계속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불안 신호를 따라 '나'를 점검해봐야 한다. 불안을 따라가다 보면 근원이 나오고 그러면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모든 감정은 옳다. 모든 감정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표피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감정을 긍정적, 부정적으로 가르는 시각은 한 존재의 핵심에 다가가는 일, 누군가에게 깊이 공감하는 일을 막는 큰 걸림돌이 된다. 감정은 판단과 평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내 존재의 상태에 대한 자연스러운 신호다. 좋은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내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은 자기가 안전하다고 느껴야 자신이 놓은 상황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공감에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사람은 믿어도 되는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일한 역할이 그것이다. 온 체중을 다 실어 아이를 믿어주면 그게 어떤 일이든 본인이 오히려 '내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는 건 아닌가' 열심히 고민한다. 안전하면 입체적이고 온전한 성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면 외로워져, 안돼." "당당하게 살아야 해" "자기가 선택한 것은 끝까지 책임을 져야해." ....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일방적인 계몽과 교훈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듣는 이에게 강박 관념으로 남거나 상처만 주고 튕겨 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겉보기에 좋은 말일 뿐이다. 사람이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

 

 

공감이란 제대로 된 관계와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공감이란 한 존재의 개별성에 깊이 눈을 포개는 일, 상대방의 마음, 느낌의 차원까지 들어가 그를 만나고 내 마음을 포개는 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도 내마음, 내 느낌을 꺼내서 그와 함께 나누고 소통하는 일이다. 그렇게 서로의 개별성까지 닿지 않으면서 함께 사는 부부는 서로의 역할에 충실한 기능적 관계이기 쉽다.

 

기능적 역할에 충실한 관계라면 부부보다는 조직원이나 동료에 가까운 관계다. 사랑해서 만났어도 서로의 개별성에 다다르는 과정을 생략하다 보면 기능적 역할에 충실한 관계에 머물게 된다. 역할에 충실한 관계란 '모름지기 주부란, 아내란, 엄마란, 며느리란 이러이러해야 한다. 모름지기 가장이란, 빠란, 아들이란, 사위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집단 사고에 충실한 삶이다. 역할 놀이 중인 삶이다. 이런 삶, 이런 관계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내 심리적 S라인이 드러나지 않는 삶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면서 한 번도 그의 속살을 본 적이 없는 삶이다. 평생을 살아도 그가 누구인지 모를 수밖에 없는 삶이다.

 

 

공감은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감정적 교류다. 공감은 둘 다 자유로워지고 홀가분해지는 황금분할 지점을 찾는 과정이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공감이다.

 

 

안전하다는 느낌만 있으면 상처받은 사람은 어떤 얘기보다도 그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자기 얘기를 잘 들어줄 것 같은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낯선 상황이나 낯선 사람이라도 어떤 식으로든 그 말을 꺼내는 경우가 많다.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어서다. 공감을 받고 털어내야만 머릿속에서 자기 상처가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아픈 기억의 습격' 속의 삶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껴서다.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듣고,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듣다 보면 사람도 상황도 스스로 전모를 드러낸다. 그랬구나. 그런데 그건 어떤 마음에서 그런 건데. 네 마음은 어땠는데? 핑퐁게임 하듯 주고받는 동안 둘의 마음이 서서히 주파수가 맞아간다. 소리가 정확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공감 혹은 공명이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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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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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지만, 그것을 피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 오로지 정면으로 맞서 이겨낼 수 밖에는....

 

 

[본문발췌]

 

 

경제학자나 정치철학자의 이념은 그것이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실제로 이 세계가 그러한 이념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떠한 지적 영향과도 무관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경험 많은 사람들도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인간은 자기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지키거나, 갖고 싶은 것을 정당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로 인해 그러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사상을 옳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사상이 기득권을 초월하지만, 그 반대로 사상이 기득권의 소산인 경우도 대단히 많다.

 

권력은 지배자로부터 지주로, 지주로부터 농업 노동자에게로 흘러내려 갔다. 권력이 위로부터 아래로 흘러내려 온 것과 반대로, 권력으로 얻어진 소득은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것은 명심해 둬야 할 원칙이다. 소득은 항상 권력과 같은 축을 따라서 흘러가지만 방향은 정반대인 것이다.

 

 

토스타인 배블런의 <유한계급의 이론>은 재산으로 부자가 누리게 되는 뿌리 깊은 우월감을 중심 문제로 다룬다. 우월감을 즐기기 위해서는 이 우월감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부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중히 숙고하여 재산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 현시적 여가와 현시적 소비 두 가지이다. 특히 현시적 소비는 배블런이 미국의 언어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한 것이다. 현시적 여가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 일 이외의 것에는 마음과 몸을 쓸 겨를이 없는 세계에 빠졌을 때 얻게 되는 것이다. 부자라고 몸소 일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내나 딸의 한가로움을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함으로써 커다란 우월감을 얻는다. 현시적 소비란 소비에 드는 비용의 크기를 사람들에게, 오로지 인상 깊게 하는 것만을 노린 소비이다. 그들의 취향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유한계급의 이론>이 출판되고 나서부터는 부자가 허세, 방종, 향락에 돈을 사용하면 누군가가 저것은 현시적 소비라고 비웃게 되었다.

 

 

구조 변화와 발전의 유기적인 과정은 이윽고 마르크스의 사상의 핵심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 변화의 원동력은 사회계급 간의 투쟁이다. 이것에 의해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일단 사회 구조가 외관상 안정된 상태로 발전하고 나면, 그 속에서 그 구조에 도전하고 파괴하려는 적대적인 힘이 자라난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사회구조가 출현하고, 투쟁과 파괴의 과정이 새로이 시작되는 것이다.

 

 

혁명에는 세 가지 조건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선 먼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얻게 되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인물은 드물다. 혁명은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다음으로, 지도자 밑에는 명령만 내리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움직여 주는 잘 훈련된 부하가 있어야 한다. 이것 또한 좀처럼 바랄 수 없는 일이다. 혁명가에게는 끝까지 혼자서 생각하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고 하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공론만 떠벌리는 무리들을 끌어들이거나 그들에게 말려들 우려도 없지 않다. 그러한 무리들은 끌여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무리들은 끝도 없이 논쟁만 하며 그 동안에 스스로 파멸되게 퇼테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혁명의 상대가 약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성공한 혁명은 모두 썩어서 무너질 듯한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혁명의 폭력이란, 말하자면 진공 상태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사람들의 폭려고가 마찬가지이다. 프랑스 혁명이 그러했고,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그러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중국 혁명도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1848년의 혁명은 그렇지 않았다.

 

 

화폐는 역사의 전 과정을 통해서 다음 두 가지 중의 어느 한 가지 방법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괴롭혀 왔다. 즉 풍부하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거나, 아니면 믿을 수는 있지만 극히 부족하거나 두 가지 중에 하나였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제3의 고통이 있었으니 그것은 화폐가 부족한 동시에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이 방면에서 가장 오래된 상투적인 문구 하나로 말하자면, 가능성의 예술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최고로 발전한 단계에서, 정치란 중요한 것과 말초적인 것을 구분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에 전력을 기울이는 예술이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문제도 미소 간의 무기 경쟁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또한 불확실성의 원천으로서 이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이 경쟁은 이제 두 나라가 서로를 보복적으로 파멸시키고, 세계의 나머지 부분까지도 몇 시간 내로 끌어들이는 수단까지 개발시키고 있다. 거대한 기술 자원이 파멸에 필요한 시간을 분 단위로 축소시키기 위한 노력에 쓰여지고 있다. ... 앞에서 지적한 경쟁은 두 갈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것과 연관되어 있는 두 가지 모두 아주 불길한 것인다. 첫 번째, 본래적으로 적대적인 경제, 정치, 사회 체제 간의 충돌 -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대립 - 이라는 개념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전제주의적 규제와 개인의 자유, 무신론과 종교적 신앙 등 어느 것 사이에도 화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두 번째, 군비 확대 경쟁이 우리들의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힘의 결과이며, 미국에서나 소련에서나 군부 체제 및 무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갖는 공적 권력의 표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중의 유착 관계가 엿보인다. 미국에서는 거대한 무기 회사가 군부에 그들이 요구하는 무기를 공급한다. 공군, 해군, 그리고 육군은 그 답례로 회사에 이익과 고용을 주도록 주문하고, 이것으로 회사는 기능하고 번영한다. 회사와 군부는 연구와 개발을 공동으로 하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무기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무기를 필요로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유착 관계다. 두 번째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과정이 이 두 나라 사이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들 양대국은 각각 혁신과 무기 축적을 추진해서 상대국이 동일한 또는 그 이상의 일을 할 필요성과 동기를 만들어 낸다. 이런 식으로 양국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자기 영속적인 것임을 확신하게 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자유와 권위, 진보와 반동, 마르크스와 그리스도 간의 차이가 인용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의례적인 인용이지 진정한 것은 아니다. 어떠한 신앙도 무기 경쟁을 지지하지 않는다. 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충돌이 생겨나면 어느 체제도 존속될 수 없다는 점에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양국은 모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있어서 법인 기업은 그 불확실성의 주요한 원천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어떠한 목적으로 지배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 채 그 대답을 주지 않는다. 이 불확실성에 대한 하나의 응답은 분명한 것이다. 그것은 신화를 꿰뚫어 보고 현대의 법인 기업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기업의 경영자는 쫓기는 사람이다. 다른 시대나 다른 세계에서 온 철학자는 그들의 인생관에 놀랄 것이다. 어째서 그들은 이와 같이 시간과 건강을 희생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 철학자는 그들의 호기심을 끄는 보수라는 개념 - 부하에게는 하찮은 복종을 요구하고, 자신은 막상 쓸 시간도 없는 돈에 집착하는 - 에 의아해할 것이며, 어째서 그들이 이처럼 열심히 일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철학자는 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어리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악한 회사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능한 회사이다. 잘못된 결정과 마찬가지로 나쁜 것은 시기를 놓치고 마는 결정이다.

 

 

빈곤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원칙적으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다 많은 토지를 공급하거나 물이나 비료의 형태로 토지의 공급을 대신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주어야 한다. ...그것에 착수하기에 충분한 최소한의 토지를 경작자가 소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두 번째의 가능성은 농민이 생산한 생산물로 그들의 노력이 보상될 수 있도록 토지 소유제를 변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또한 충분한 토지가 있어야만 한다. 세 번째의 답은 아이를 조금만 낳는 것이다. 네 번째로는 주인이 아예 그곳을 떠나는 것이다(이주). 만약 토지가 정말로 충분하지 못하다면 이 마지막의 두 가지 답만이 도움이 될 것이다.

 

 

지도자는 타협을 할 수 있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곤란을 회피한다고 여겨져서는 안 된다. ... 지도자는 그 시대의 불안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문제가 변화함에 따라 자기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교육에는 두 가지 필요한 조건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 교육은 반드시 필요한 공동체 의식의 배양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그정한 이익은 비록 그것이 개인의 이익이라 하더라도, 일반의 이익에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 그리고 전체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당사자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의식이 그것이다. 동시에 일반의 이익에 저항하는 인물은 그 인물 자체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법인 기업이나 동업조합, 군인이나 관료, 노동조합이나 변호사, 의사나 교수들이 공공의 이익보다 자기들의 금전적 또는 관료주의적 이익을 우선시키려고 하는 경우에 국민은 이것을 깨닫고 반응하며,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 교육이란 이런 인식과 이런 책임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로, 교육은 사람들에게 당면한 과제에 의심 없이 명확한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그렇게 하는 사람과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게 하여 개인적 안정감을 심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현대의 방관자 같은 정치의 나쁜 점은, 시대의 불안에 대한 대책을 공약하면서도, 이에 필요한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신을 선출해도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고 교묘히 설득하는 정치가를 추어올린다는 점에 있다. 이를테면 "나는 평화에는 찬성하지만 군사력의 약화는 원치 않는다."라든가, "빈곤은 없어져야 하지만 납세자에게 새로운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라든가 "소득의 보다 적절한 분배에는 찬성하지만 개인기업의 보수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정치가가 그것이다. ... 우리는 이들 학생들이 민주주의에서 그들이 주권자라는 것, 즉 스스로 결정을 내릴 권리와 책임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들은 또한 지도자를 양성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타인을 위해 결정을 내리고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만한 지식과 자존심을 구비한 남녀의 양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도력이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지도력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전해야 하는 추종자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모순은 원칙적으로는 양립하지 않는 것이지만 실제 문제로서는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결단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논의해 왔던 문제를 총체적으로 전망한다는 것을 뜻한다. 해결이 곤란한 문제는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물다. 곤란이 있다면 그것은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알고 있지만, 무기력과 금전상의 이해와 감정 또는 무지 때문에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문제는 현재의 부 또는 적어도 잠재적인 부의 재분배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 해결책을 공약으로 내거는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을 뿐이다. 또한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사람들이 이동해야 한다는 가장 오래된 해결책에 이르면 이것을 제안하는 사람은 더욱 적어진다. 가난한 나라에서의 잔인한 인구 증가는 산아제한이라는 방법 이외로는 억제할 수 없다. 중국인과 점점 늘어만 가는 인도인은 산아제한이 강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두 나라 이외에 이 냉혹한 진리와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나라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행정면에서의 인적자원도 부족하다. 다만 예부터 조직 능력이 풍부한 중국인의 경우는 예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고도로 조직화된 노력에 의존하는 것이 가난한 나라의 경우 한층 곤란한데, 사회주의가 그 극단적인 예이다. 빈곤의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가난한 나라는 일반적으로 애덤 스미스나 카를 마르크스가 경제 발전의 초기에서는 불가결한 것이라고 믿었던 개인 에너지의 해방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한 나라 중에서 이처럼 외관상으로도 대단히 보수적인 진리에 정면으로 대결하려 하는 나라는 결코 많지 않은 것이다. 

 

 

부유한 나라에서도 빈곤의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는 마찬가지 어려움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주는 이상으로 효과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이다. 식량, 주택, 의료 서비스, 교육 또는 현금,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간에 소득은 빈곤에 대한 최선의 구제책이다. 그러나 이처럼 명백한 진리이면서도 이만큼 교묘한 핑계를 낳게 한 예는 없다. 우리는 우리 주위를 둘러싼 대기나 물, 풍경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리들의 환경을 보호한다. 이것도 어려움을 수반하는 진리이다. 왜냐하면 에너지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든지, 고용 확보를 위해서라든지, '나의 자동차를 위해서'라는 이유에서 예외 취급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자원을 장기간 지속시키기 위해 그 이용을 절약해야 한다는 것도 역시 곤란을 수반하는 진리이다. 정치가로서 실업이나 인플레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소득과 가격에 대한 어떤 통제 없이 높은 고용 수준과 가격 안정을 동시에 달성하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한 통제 없이는 더욱더 소비를 늘리려는 투쟁, 그리고 그 소비를 지탱하기 위해 소득을 향상시키려는 투쟁 - 그것은 현대의 법인 기업, 현대의 노동조합 및 현대의 민주주의가 한결같이 촉진하고 장려하는 경쟁이다 - 은 물가를 상승시키게 될 것이다. 그때는 심각한 실업을 발생시키는 것 이외에는 이 가격 상승의 압력을 완화시킬 방도가 없다. 현대의 경제는 오로지 인플레이션이냐 실업이냐 아니면 통제냐 하는 선택밖에 주어지지 않는데, 이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욕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거대 도시 지역의 문제는 결코 복잡하지 않다. 그것은 대부분 돈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웃해서 또는 아래 위로 겹쳐서 살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비용이 든다.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생활을 하려면 우리들은 그 비용을 부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도시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비용 부담을 면할 수가 있다면, 약간의 또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빠져나갈 것이다. 그럴 경우 도시의 경제적 기반은 침식될 것이고 돈 문제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즉 보다 효율적인 시정, 낭비적 지출의 억제, 교직원이나 경관이나 청소 관계 조합에 대한 강경한 태도 등을 약속하는 연설을 하는 편이 나은 것이다. 핑계가 가장 잘 통할 때는 문제가 복잡할 경우이다. 문제의 해결이 곤란해 보이면, 우리는 해결을 뒤로 미루고 타협하며, 정치적 편의주의에 굴복해 버리고 만다. 우리들이 복잡함을 어떻게 핑계 삼고 있는가를 알려면 때때로 문제의 회피가 불가능할 만큼 사태가 명백한 도시나 시골에 찾아가 보는 것이 좋다.

 

 

최초의 (핵)미사일을 서로 발사한 뒤에는 흐루쇼프가 세계에 대해 경고했던 것과 같이 공산주의의 재와 자본주의의 재를 구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광적인 이데올로기론자라 하더라도, 그도 또한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차이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불확실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진리에 우리들이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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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국가와 계급 집단간의 갈등..... 드라마틱하고 리얼한 역사 이야기!

 

 

[본문발췌]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지금가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계급투쟁이야말로 사회이며, 역사다"라고 말합니다. 사회의 본질을 이만큼 꿰뚫은 테제(These, 명제)는 없을 겁니다. 인간이 모여 이루는 사회가 존재하는 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르크스의 테제는 딱 들어맞습니다. 인간은 세 명 이상 모이면 반드시 파벌(동맹)을 만듭니다. 그 경우, 힘의 관계를 가늠하면서 약한 두 명이 동맹해서 강한 한 명에게 대항하거나, 강한 두 명이 약한 한 명을 공동으로 제압하는 등, 힘의 관계에 따른 합종연횡이 전개됩니다. 힘에는 무력, 지력, 매력을 포함해 국력, 개인력, 씨족력 등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그러한 힘 속에서 인간이 파벌이나 세력을 형성할 때 가장 중요하면서 보편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경제력입니다. 경제적인 빈부 차이가 계급을 형성하면서 그 계급은 흔들림이 없는 파벌이자 세력의 결속을 나타내는 지표가 됩니다. 풍요롭게 사는 사람과 가난하게 사는 사람. 이 구분이 다른 구분보다 우선시되어 인간이 이루는 사회의 숙명적인 테제로서 존재합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부를 바랍니다. 부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어떤 시대든 세상에 존재하는 부의 용량은 한계가 있기에 필연적으로 부를 둘러싼 다툼과 경쟁이 일어납니다. '돈이야말로 전부'라는 인간사회의 실태를 누구도 부정할수는 없겠지요. 문화, 예술 분야 혹은 윤리, 종교 분야에서는 부가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지만, 정치, 경제 분야에서는 부야말로 모든 것이며, 그에 따른 제반 문제나 현상은 원인도 해결책도 결국 부, 돈에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사회문제를 파고들 때, 돈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 실체가 보이게 되고, 그 실체를 둘러싼 인간의 행동양식이야말로 역사라는 현상 그 자체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 마르크스의 이 말에서 하부구조는 경제적인 것이고, 상부구조는 정치적, 문화적인 것을 지칭합니다. 경제적인 요인이 근본 요인이고, 그에 따라 상부구조인 정치가 움직인다는 의미입니다. ... 하부구조라는 것은 경제적 이해득실 관계이며, 부에 대한 인간의 욕망 그 자체입니다. 역사적 현상의 배후에는 인간의 욕망에 따른 거대한 구조가 필연적으로 존재하기에, 그것만 따로 떼어두고 단독으로 존재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 거대한 구조를 알아두어야 비로소 역사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 역사상에 누적된 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명확히 밝히고, 주로 경제적 측면의 문제를 살핌으로써 역사와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파벌, 세력은 행동양식(패턴)이 거의 동일할뿐더러 되풀이 됩니다. 이미 부를 획득한 풍요로운 세력은 그 부를 지키려고, 현재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보수파가 됩니다. 반면 가난한 세력은 부의 확득에 실패했기에 현재의 사회 시스템을 부정하고, 새롭게 부를 분배받을 기회를 노리는 혁신파가 됩니다. 보수파는 우파, 혁신파는 좌파라고 말하지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시대에 의회가 열릴 때, 의장석에서 바라보면 오른편에 보수파 부유층이 앉았고, 왼쪽에 혁신파 빈곤층이 앉았기에 이런 명칭이 붙었습니다. ... 근현대사에서 우파는 자본주의/자유주의, 좌파는 공산주의/사회주의라는 속성도 띱니다. 우파의 엘리트 부유층은 자유경쟁을 원하면서 더욱 사회적 강자가 되려 합니다. 즉, 자본주의를 지향합니다. 이에 비해 좌파인 빈곤층 약자가 사회적 격차를 인정하지 않고, 높은 곳에 군림하는 강자를 끌어내려 평등한 세상을 이루려는 것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겠지요. 따라서 좌파는 공산주의를 지향합니다. 하지만 우파와 좌파의 대립은 실로 복잡한 정치적인 측면이 얽혀 있기에 혼재된 양상을 띱니다. 우파적인 경제성향을 가진 사람 중에서도 그 정치적인 사상은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 지역, 마을 같은 공동체(커뮤니티)를 중시하고 전통, 관습을 따라 사회적 운영을 지향하는 그룹은 진정 보수라고 부릅니다. 좌파 중에서도 개인 인권을 중시하고 자유경쟁과 개방사회를 지향하는 그룹은 리버테리어니즘(libertarianism, 자유시장주의)이라고 불리지만 진정보수와는 거리를 둡니다. 좌파와 마찬가지로 커뮤니티, 규칙을 중시하는 그룹은 통제형 사회주의라고 불리는데, 개인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리버럴(liberal, 자유주의) 타이브이 사회민주주의와는 색깔이 다릅니다.

 

 

드디어 인류가 농경 기술을 갖추고 농촌을 형성했습니다. 사회가 생기면 그것을 다스리는 권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 권력은 곧 국가가 되고, 머지 않아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리스헬레니즘 세력은 어디까지나 군사 집단이었기에 법률, 제도를 통해 상업 활동을 활성화시킨 로마의 현명한 비전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사회라는 것을 형성할 때도 언어가 출발점이 되었고, 구심점이 되었으며, 언어로 인해 발전했습니다. 인간사회와 언어와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선으로 보는 덕치주의, 악으로 간주하는 법치주의... 정치는 사람의 선의에만 의존할 수 없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람의 욕망뿐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고, 속이고, 죽이는 등의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러한 욕망을 억제시키기 위한 강제력 있는 장치가 사회에는 필수불가결한데, 그것이 바로 '법'입니다. 자비와 덕만으로는 욕망을 억제시키기 어렵기에 사람들은 보기 흉할 만큼 싸웁니다. 법은 욕망의 폭주를 벌합니다. 반면 일정한 수준에서 욕망 추구를 인정하고, 그것이 타인의 욕망과 부딪치지 않도록 욕망의 타협점, 즉 권리의 범위를 정해줍니다.  또한 규칙 속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보장해주고, 능력 있는 사람이 법을 통해 정당히 평가 받습니다. 유교의 덕치주의는 윗사람에 대항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부당한 기득권이 고정화되고, 경쟁이 무의미해지면서 사회발전을 꾀할 수 없습니다. 선의, 덕이라는 말은 아름답게 들릴지 몰라도 정치에 본격적으로 도입하면 사회는 혼란스러워질뿐더러 부패한다는 정치상의 역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백년 전쟁 이전에는 유럽의 주요 간선 루트에 끼지 못해 이익을 바라보지 못했던 영국이었지만, 백년 전쟁 중에 습득한 '자본과 기술의 집적', 여기에 따른 중앙집권화라는 근대적 이노베이션으로 세계경제의 패권을 쥐게 됩니다. 이노베이션은 때때로 역경과 갈등 상황에서 비롯되는데, 그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겠다는 영국의 의지가 근대로 향하는 이노베이션을 탄생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항해 시대의 도래는 유럽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는 상업혁명입니다. 이는 종래의 지중해가 무대인 제한된 시장권이 대서양을 거쳐 아시아, 신대륙을 향해 글로벌한 시장권이 갖추어지는 변화를 가리킵니다. 또 하나는 가격혁명입니다. 신대륙에서 대량의 은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은에 의한 화폐경제가 눈에 띄게 발전합니다. 이에 따라 유럽의 경제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되고 물품의 가격도 상승(인플레)하면서 이른바 고도 성장을 이룹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계층이 신흥 부르주아라는 비즈니스맨들입니다. 반면에 기사, 귀족 등 제후 세력은 격동하는 시장 경제의 흐름에서 도태되어 중세 봉건 시대의 유물이 됩니다. 가격혁명은 중세의 사회구조를 끝내게 만들었고 화폐경제,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시대를 등장시켰습니다.

 

 

20세기의 역사가인 페르낭 브로델의 저서, 특히 제 2권인 <교환의 역할>이 압권으로 산업혁명 이전의 유럽 자본주의 태동에서 시작해 18세기의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페르낭 브로델은 자본주의와 시장을 구별해 "시장은 도시민, 농민, 소상인으로 구성되는 물질의 교환 장소이다"라고 정의합니다. 시장의 거래는 소박한 등가교환이고, 큰 이익을 얻지는 못합니다. 한편 자본주의는 베네치아처럼 대도시 상인에 의해 구성되는데 페르낭 브로델은 "도시는 시장과 시장을 잇는 교역의 접점이고 대상인들은 대도시에서 파생되는 교역의 이권을 독점, 자본을 축적했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중세의 도시경제 형성과 먼 거리 무역 안에서 그는 근대자본주의로 이어지는 원형을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정치경제학자인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로빈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권력, 번영, 빈곤의 기원>에서 일부 사람들이 부를 독점하는 정치적 제도를 저자들은 '수탈적 제도'라고 부르고, 이 제도는 부의 분배를 요구하는 다수에 의해 필연적으로 붕괴된다.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의 혁명,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사례로 들어 '수탈적 제도'의 붕괴가 제도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리카도 vs 멜서스, 곡물법을 둘러싼 논쟁. 19세기의 곡물법을 둘러싸고 당시의 경제학자들도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리카도는 자유주의 관점에서 보호주의인 곡물법을 폐지하라고 주장했고 한편 멜서스는 저서 <인구론>에서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대비해 국내농업을 보호해야 한다며 곡물법을 지지했습니다.

 

 

정부가 재량을 갖고 재정 정책을 펼쳐 경기를 자극시킨다는 케인스 학파에 통화주의자들은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정부에 의한 인위적인 재정확대지출은 매크로 경제의 실상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취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앙은행이 재량을 갖고 화폐를 공급하는 것도 적절한 대응이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실물경제에 부작용과 악영향을 끼친다고 했습니다. 통화주의자들은 물가의 장기적 안정을 중요시했기에, 화폐량의 증가율을 적절한 비율로 고정함으로써 재정, 금융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고도 주장했습니다. 통화주의자의 대표 격인 인물은 밀턴 프리드먼입니다.

 

 

문명 혹은 국가는 탄생하고 붕괴됩니다. 대부분의 역사책은 그 흥망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흥망이 '왜' 발생했는지를 추구한 책은 아주 드뭅니다. 그 드문 책이 바로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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