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화시킨 편리함 때문에 우리는 평균 개념을 많이 활용한다. 사실 통계의 본질은 평균의 성질보다 다양성/변동성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그 안에 포함된 오류의 존재와 인과관계를 이해하고 관리하는 게 핵심이다.

 

 

[본문발췌]

 

 

큰 숫자를 평균값으로 단순화시키면 우리의 뇌세포는 이를 잘 받아들인다.

 

 

평균화는 다양성을 짓밟고, 무엇이든 가장 단순무식한 개념으로 축소시켜 버린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평균을 앞세워서 다양성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과대단순화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평균보다 다양성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통계적 사고가 성숙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사실 통계는 다양성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세상은 얼마나 많이 바뀌는가? 다양성을 얼마나 광범위한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 평균은 다양성을 측정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으며, 결코 평균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 평균이 아닌 사람을 찾아내려면 일단은 평균부터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숫자보다는 사람의 심리를 움직여야 한다. ... 평균인 개념은 손에 꼽을 만한 통계학자의 발명 가운데 하나로 이제는 널리 쓰이는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하지만 통계학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 개념을 이용한다. 긴 대기시간을 걱정하는 놀이공원 마니아들과 긴 출퇴근 시간에 대해 불평하는 직장인들은 평균 대기시간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했다. 하지만 통계학자들은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원인은 시간대별로 불규칙적인 입장객 수, 또는 우연한 사건 때문에 수시로 벌어지는 변동성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변동성은 잘 짜인 계획을 헝클어 놓는다. 따라서, 대기줄이나 고속도로 교통을 관리하는 가장 효과적인 대책은 디즈니의 패스트패스 예약 시스템이나 미네소타 교통국의 램프 미터링처럼 변동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수용능력을 확장시켜서 대기줄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또는 도로를 더 건설해서 교통 체증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은 변동성을 해소하는 데에는 거의 효과가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평균의 함정이다.

 

 

모델은 알려진 것들을 동원해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다. 전염병을 탐지하는 과정에서 모델은 설문 응답, 과거의 패턴, 생물학적 증거에 바탕을 두고 감염 경로를 설명한다(보고되지 않은 경우를 포함한 모든 사례에 대하여). 신용평점 시스템에서 모델은 개인적인 특성과 과거의 패턴에 바탕을 두고 대출을 상환하지 않을 확률을 산출해 낸다.

 

 

전염병학은 오로지 원인을 찾아내는 것만이 의미 있는 목표인 응용 분야다. 몇 가지 생물학 또는 화학적 메커니즘이 질병을 일으킨 원인으로 제시된다면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관계만을 가지고 성급하게 행동하면 전염병도 막지 못하면서 전체 산업계를 무너뜨리는 결과만을 낳을 수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신용평점은 상관관계에 의존하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신용 모델러들은 인간 행동이 갖는 다양성을 단순한 규칙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증권 투자와 소비자 행동을 전공하는 모델러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다. 이들은 규칙 대신 과거로부터 얻은 축적된 지식에 의존한다.

 

 

"모든 모델은 오류를 안고 있지만 일부는 쓸모가 있다." - 조지 박스,

최고의 통계학적인 모델조차도 현실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다. 우주의 진실을 탐구하는 이론 물리학자와는 달리, 응용 통계학자들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으로만 평가받기를 원한다. 박스의 명언은 모델러들의 좌우명이 되었다. 이들은 상상 속의 완벽한 시스템과 경쟁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지금보다 나은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할 뿐이다. 이들은 오류의 미덕을 이해하고 있다. 경험에 의존하여 수작업으로 적용하던 규칙에 비하면 FICO 평점 기법은 의심할 여지없이 발전된 것이다. 사례군-대조군 연구와 DNA 지문 일치와 같은 현대적 기법은 전염병학계에서 발전을 이루었다.

 

 

마케터들이 회사의 제품에 대해서 어떤 소비자들이 긍정적인지를 알기 위해서 데이터 마이닝을 활용하는 경우, 거짓 양성 판정은 잘못 선택된 소비자들에게 스팸 메일을 뿌리는 결과를 낳는다. 신용카드 결제가 사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데이터마이닝을 쓴다면 거짓 양성 판정 때문에 진실한 고객조차도 결제가 차단되어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고 결제가 정상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정도 불편이야 '수다죄'로 육체적 고통을 받고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는 문제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를 박탈하는 것만이 아니다. 정보기관들이 수백만 건의 거짓 경고를 추적하는 일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며, 역효과가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야 한다. 9.11 테러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이것이다. 테러리스트의 음모는 극도로 희귀한 경우다. 현존하는 검출 기술은 제구실을 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정확도가 떨어진다. 거짓말탐지기는 별 볼일이 없으며 대규모 데이터 마이닝 시스템은 더 허접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두 가지 오류 사이에 존재하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시소 관계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으로 남는다. 마법의 올가미는 여전히 저 멀리에 있다. 우리는 훨씬훨씬 더 나은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조작되지 않은 수많은 데이터보다 잘 선택된 몇 가지 숫자들이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해줄 것이다.

 

 

통계적 평균은 변이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못한다. 통계적 사고는 변이성을 인식하고 이를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연관성은 무척 까다롭고 여러 전문 분야를 망라한 접근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치열한 현장 조사, 또는 정보 수집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언제나 비슷한 것끼리 비교. 비슷한 집단 간에 차이점이 발견될 때, 통계학자들은 이 집단을 별개로 다루게 될 것이다. ... 집단 간 격차가 존재한다면 각 집단은 분리되어야 한다. 집단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의 생략에서 오는 오류를 막으려면 관계가 있든 없든 모든 집단에 대한 정보를 요청해야 한다. 사례군-대조군 연구.

 

 

일반화를 할 때에 통계학자들은 언제나 실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는 뜻으로 오차를 포함시킨다. 이러한 부정확성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거짓 양성 반응, 또는 거짓 음성 반응으로 통계학 서적에서는 이를 각각 제1종 오류와 제2종 오류로 부른다. 그것보다는 거짓 경고와 가능성을 놓치는 오류라고 부르는 편이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다. 그러니까 정확도는 정확하게 양성 반응을 잡아내는 능력과 정확하게 음성 반응을 잡아내는 능력을 포함하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진짜 양성을 검출하는 능력을 '민감도'라고 하며, 진짜 음성을 검출하는 능력은 '특이도'라고 한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중에 한쪽의 정확도를 향상시키게 되면 반드시 다른 한쪽은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 실제 삶에서 겪는 대부분 상황에서 두 오류 때문에 치르는 대가는 비대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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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안목과 통찰을 가지고 진실에 대한 앎과 내면의 성찰을 위해서는 개념의 이해가 시작이다.

 

 

[본문발췌]

 

 

"염불보다 잿밥"이라는 말보다 한국 사회를 더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은 없을 것 같다. 본질적인 것,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 순수한 열정을 필요로 하는 것은 뒷전이고, 온통 돈이 되는 것, 빨리 되는 것, 얄팍한 감성으로 해결되는 것, "끼"로 감당되는 것들만이 사회를 뒤흔들면서 돌아다닌다.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끝없이 재창조되고, 또 끝없이 재규정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계를 이해하고, 이 세계를 사유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겪게 되는 경험과 그 경험을 이해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개념 사이의 상호 보완, 갈등, 일치와 불일치의 끝없는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유의 역사는 개념의 역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중에서도 수천 년의 역사에 걸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재규정되고 있는 개념들, 즉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폐기되는 개념들이 아니라 끝없이 재규정되는 그런 개념들이 존재합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개념들, 즉 일상어이기도 하고 철학 개념이기도 한 그런 개념들이죠. 존재와 무, 우연 가능 필연, 하나와 여럿, 무한과 유한 등등의 개념들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지속되어 왔고 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지속될 개념들입니다. 나는 이런 철학적 개념들을 개념-뿌리들 이라고 부릅니다.

 

 

원리는 그리스어  'arche'에 해당하는 말이죠. 우선 사유의 단초로서의 원리 개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이 왜 사유를 할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살면서 '가짜'라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듯합니다. 나무막대기를 물에 넣으면 구부러져 보이죠. 나한테 분명히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나무막대기를 끄집어내면 달라지죠. 이것은 단순한 물리적 예이지만, 일상의 삶에서, 정치에서, 문화에서 언제나 우리는 '가짜'를 만나게 돼요. 가짜가 삶에 환멸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른바 '리얼리티'를 찾게 되지요. 진짜를 갈구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말에서 '참'이라는 말이 이 '리얼리티에 대응합니다. 사람들은 참사랑, 참인간, 참정치, 참사회 등을 희구합니다.

 

 

헬라어에서 '자연=physis'라는 말은 'phyo'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되는 말로서 'phyomai'도 있는데, 이 말들은 자동사 형태로 '자란다', '태어난다'를 뜻하죠. 헬라어는 극히 역동적인 언어이고 언어 그 자체가 매우 철학적입니다. 인간의 사유는 언어와 뗄 수 없는데, 헬라스(그리스)에서 뛰어난 철학이 발달한 것도 헬라어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간명한 라틴어는 철학보다는 법학을 낳았죠. 또, 독일 철학이 사변적이고 건축적이고 심오한 반면 프랑스 철학이 경쾌하고 문학적이고 창조적인 것도 그 언어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동북아 사상사가 주석 중심으로 전개된 것도 한자라는 언어의 특성과 관련이 있고요.

 

 

고대인들에게 자연은 기본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 자연이란 생명이자 자율적인 힘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자율적'이라는 말도 중요해요. 왜냐면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자 다른 것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죠. 자연은 가장 본래적인 것, 궁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말 '自然'의 본래 의미 즉 '스스로 그렇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인문 교육은 뒷전이고 모든 교육이 돈 버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우리 교육이 사람들의 정신을 황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정치권력, 자본주의, 테크놀로지, 그리고 대중매체와 대중문화로 이루어진 '사각의 링'이 우리 삶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시대에 '사물'이란 무엇일까? 인간과 다른 존재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등의 물음들에 답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자연'과 '사물'에 대한 전반적인 새로운 검토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죠.

 

 

운명은 희랍어 'moira'에 해당합니다. 라틴어의 'fatum', 'destinas'가 여기 해당되죠. 전통 사회로갈수록 인간의 자의성이나 자유가 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못할 것은 거의 없는, 인간이 못하는 것이 과연 뭐가 있을까 싶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와 자의성이 현저히 증가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과거로 거슬로 올라갈수록 인간이란 존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적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고대로 내려갈수록 그만큼 운명이라는 개념이 더 중요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전통 사회와 근대 이후의 사회를 뚜렷이 갈라놓는 점이 이 점이죠. 전통 사회가 운명의 사회라면, 근대 이후 사회는 자유의 사회입니다.

 

 

도가 지나침, 무리함. 항상 무리無理를 하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인간관계가 나빠지고, 일을 그르치죠. 무리하면 안 됩니다. 인간의 삶엔 도度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도道하고도 통하죠. 도度를 넘어서거나 도道를 못 보면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무리하거나 미망에 사로잡히면 그에 따른 응보가 따르게 됩니다. 이 점에서 응보란 도덕적 의미 이전에 존재론적 의미죠. 도덕적으로 "벌을 받는다"는 의미 보다느 무리나 미망이 필연적으로 어떤 고통을 가져온다는 의미입니다.

 

 

결정론적 세계관을 거부할 경우, 시간을 초월하는 것과 시간 속에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시간은 우연과 창조를 가져오기 때문이지요. 시간 속에서 새로운 일이 발생하고 새로운 무엇인가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道'는 걸어가면서 보는 것이지 아프리오리하게 정해져 미리 주어져 있는 무엇이 아니다. 물론 참된 도[常道]를 이야기하지만 그 도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도이며("道可道 非常道") 현실에서 우리가 발견해 나가는 '도'는 늘 걸어가면서 보아야 하는 '도'이다. 길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걸어가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간은 등질적이지 않다. 별다른 사건이 없는 느슨한 시간이 있는가 하며, 숨이 막히도록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이 있다. 더 심층적으로는 각각의 시간은 잠재적 사건들을 함축한다. 공 하나로 승부가 갈리는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기 위해 자세를 잡는 시간에는 A팀이 이겼을 때 전개될 사건들(그 사건들로 이루어지는 '세계')과 B팀이 이겼을 때 전개될 사건들(의 '세계') 이 잠재적으로 접혀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을 때 잠재적 복수성-여러 가능세계들-에서 어느 한 갈래가 현실화된다. 시간의 농축된 부분, 매듭을 '시간의 지도리' 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의 지도리들을 열면서 인생을 살아간다.

 

 

평등이란 다 같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각자의 고유한 특성과 위치를 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입니다. 어른은 어른이고 아이는 아이죠. 각자의 고유한 자리가 있습니다. 물론 그 '자리'가 본질주의를 근거로 고착화된다면 그것은 억압으로 화합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반드시 "~야 한다"고 강압하면 억압이 되죠. 한국 사회는 이런 억압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지금은 거꾸로 무턱대고 틀을 깨려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아요. 각 존재의 고유한 본성이 존중되면서도 그 본성이 너무 고착화되어 억압이 되면 안 되죠. 각 사물에는 각자의 '도'가 있지만, 그 '도'는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리고 자율적으로 유연하게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죠.

 

 

참된 존재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생성의 와중에서 형상들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런 사고를 '합리주의'라고 하죠. 합리주의는 현상을 넘어 실재를 발견하고자 하며, 그런 발견의 능력이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곧 '리'이고 '이성'이죠. 그런데 합리적 사유는 분석적 사유와 통합입니다. 분석이란 바로 혼란스러운 것, 생성, 복잡한 것을 면밀하게 나누어 명료한 것, 본질적인 것, 간명한 것을 발견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죠. 합리적/분석적 이성은 기본적으로 플라톤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사람들의 몸을 분석하고, 생물학자들은 생명체들을 분석하고, 경제학자들은 경제 현상들을 분석하죠. 결국 아페이론으로서의 생성의 와중에서 일정한 페라스들을 발견하려는 행위들입니다. 감각세계를 뚫고서 본질세계, 즉 가지적 세계를 보려는 것이죠.

 

 

철학은 세계를 종합적으로 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은 어느 한 부분을 정확히 보려는 힘에 의해 이끌리고, 철학은 세계와 인간을 넓게 굽어보려는 힘에 의해 이끌리죠. 철학의 이런 성격을 잘 나타내는 개념들 중 하나가 '범주'範疇category라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일상어에서도 "이게 어느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거지?"하고 물어 볼 때가 있죠? 범주라는 말은 일단 매우 커다란 분류와 관련됩니다. 책상은 '가구'라는 범주에 들어가고, 개나리는 '식물'이라는 범주에 들어가죠. 이런 생각을 세계 전체에 대해 행하는 것이 범주론입니다. 생물학에서 '분류학'이 중요합니다만, 범주론은 말하자면 '철학적 분류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의 'kategoria'라는 말은 "나는 단언한다"를 뜻하는 'kategoreo'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은 본래 법률 용어로서 "나는 고발/고소한다"는 뜻이에요. 고발은 '단언'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이 말이 "나는 단언한다"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람을 고발하는데 단언으로 하지 않으면 곤란하겠죠. 단호하게 이야기해야지 "나는 이 사람을 고발할지도 모릅니다" 하는 식으로 말하면 곤란하고, 그래서 "단언한다"의 뜻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단언한다"를 좀더 부드럽게 표현하면 "나는 긍정한다/판단한다"는 뜻이 되죠. 그래서 이 말이 판단한다는 뜻이 됩니다. "I affirm"은 "I judge"라는 말과 통한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범주라는 개념은 '판단'이라는 개념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인간이란 존재를 평균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영혼을 추구하는 존재로 보기는 힘들죠. 피상적인 쾌락을 찾는 존재라고 해야 할 겁니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을 유심히 들어 보면, 거의 대부분이 돈 이야기, 권력(넓은 의미) 이야기, 또는 스포츠, 연예 ... 등 감각적 쾌락에 관련된 이야기죠. 대중적인 삶이란 결국 이 세가지를 둘러싸고 전개됩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의 신탁을 늘 음미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말을 자주 오용하죠. 누군가가 잘못을 범하거나 잘난 척하면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엉뚱한 해석(?)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네가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라"라는 뜻이에요. 당신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당신은 미천한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라는 뜻이에요. 당신은 단순한 돌멩이도 나무도 개도 아니다. 당신은 영혼을 가진 인간이다. 이성적 인식을 할 수 있고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심미적 기쁨에 젖을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런 뜻입니다. 바로 그렇죠. 인간은 사유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고, 아름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인데, 그리고 인생이란 단 한 번밖에 없는 것인데, 왜 당신은 인생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가라는 뜻인 것이죠.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간에는 현재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인간은 그저 매 순간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이고 '나'라는 정체성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기억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생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이죠. 의식이 있어도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매 순간의 현존만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보다 고급한 기억 능력을 가진 생명체일수록 보다 긴 시간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꼭 수명이 길다는 뜻이 아니라 보다 긴 시간을 체험한다는 것이죠. 생물학적 맥락에서 보면 진화 역시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어요. 생명체가 '진화' 한다는 것은 보다 큰 시간(과 공간)을 영위하는 생명체가 된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도달하면 마침내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까지 생각하게 되죠. ... 인간이 형이상학적 동물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이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대면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죠. 아니, 어떤 면에서 무한은 시공간의 극한, 나아가 시공간의 초월과 관련됩니다. 인간은 무한을 사유함으로써 진화의 한 결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진화 자체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지식은 'episteme'예요. 과학적 정확성을 가지고서 분석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에피스테메'입니다. 그런데 그리스 사유에서는 지금처럼 과학적 지성과 철학적 지성이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과학자의 이미지와 철학자의 이미지가 전혀 다르죠? 과학자 하면 실험실에서 작업하고 복잡한 수식을 계산하는 사람이 떠오르고, 철학자 하면 주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었습니다. 과학과 철학의 구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죠. 에피스테메는 과학적 지식이자 철학적 지혜의 소산이었던 것이죠. 진선미가 분열되지 않고 통일되어 있었고, 지식인=철학자는 이 모두를 구비한 인물이었던 겁니다. 근대에 이르게 되면 형이상학적 지혜가 부정당합니다. 과학이 진眞을 담당하게 되고, 철학은 선善에 주력하게 되고, 예술은 미美를 담당하게 되죠. 칸트의 작업은 이런 삼분법을 잘 보여 줍니다.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이라는 삼분법을 사용하여 과학적 지식 및 그것에 대한 인식론, 도덕적 지혜, 그리고 심미적 능력을 인성의 세 부분으로 보았던 것이죠. 

 

 

덕이란 기본적으로 영혼의 덕입니다. 어떤 존재의 덕은 기본적으로 그 존재의 영혼의 힘입니다. 덕의 가장 일차적인 의미는 힘인데 여기에서 힘이란 생명력, 정신력의 의미에서의 힘을 가리키기 때문에, 결국 덕의 가장 일차적인 의미는 영혼의 힘인 것입니다. 특히 정신으로서의 영혼의 힘이 바로 덕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힘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영혼의 힘은 특히 뛰어난 인간에게서 불 수 있습니다 빼어난 인간에게서 배어 나오는 힘이 바로 고귀한 영혼의 힘이죠. 그렇다면 문제의 장소가 옮겨 갑니다. 이제 문제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 뛰어난 인간인가 하는 것이 되죠. 어떤 인간이 뛰어난 인간인가? 이 물음에 어떤 답을 하느냐가 한 인간의 가치관, 한 사회/문화의 가치관을 핵심적으로 특징짓습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뛰어난 인간의 이미지를 일정하게 그리고 있죠. 그리고 한 사회는, 물론 그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들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막연하게나마 뛰어난 인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뛰어난 인간의 이미지가 보다 일정하게 규정되는 사회가 보다 통합된 사회이고, 그 이미지가 보다 다원화된 사회일수록 그만큼 다원적인 사회라고도 할 수 있겠죠. 부모들이 흔히 아이들에게 "이 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하고 말하죠. 그런데 이때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이 뭔지는 각 부모에 따라 다 다릅니다. 어떤 부모에게는 벤츠타고 다니는 사람을 뜻하고, 어떤 부모에게는 의사, 변호사, 판사, 교수 등등 전문가들을 뜻하고, 또 (극히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어떤 부모에게는 인간미 넘치는 다정한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의 개념이 다 다르죠. 요새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가 '훌륭한 사람'이죠.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사람'의 개념이 다 다르지만, 자세히 보면 거의 대부분이 돈과 권력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한국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은 바로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인 것이죠. 이렇게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훌륭한 사람'의 이미지가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상인들이나 광대들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았죠. 그러나 지금은 돈 많이 버는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들"로 대접받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라는 개념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늘 변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이 점이 중요합니다.

 

 

몸의 건강은 개인의 의지나 노력을 비켜가는 경우가 많다. 신체적 건강을 위한 노력이 상당 부분 역할을 하지만, 불쑥 찾아오는 병은 한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속수무책인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영혼의 건강, 마음의 건강은 한 개인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 높여 나갈 수 있다. 물론 타고난 기질, 성정의 힘이 무척 강하지만, 자연으로부터 받은 조건들을 넘어서 스스로의 영혼을 닦아 갈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가능성인 것이다.

 

 

앎의 강도는 그 앎이 한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변화시켰느냐를 통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사회는 일정한 윤리적 평균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균치 이상에 대해서는 "내가 무슨 특별한 사람이라고"하면서 그 이상으로 행동하려 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평균치 이하에 대해서는 "저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면서 역시 그 이하로 내려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그런 평균치가 모호하게나마 존재하는 것이죠. 그것이 그 사회의 '에토스'(평균적인 윤리의식, 윤리적 관행)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용은 우선 시야의 넓이를 전제합니다. 넓게 보아야 거기에서 진정한 중용을 취할 수가 있죠. 애초에 시야가 편협하다면, 그 편협한 시야 내에서 취한 중용은 사실상 치우침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유의 넓이, 삶의 넓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넓다는 것이 전제되고 그 위에서 중용을 취할 때 든든한 중용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타인과 관계 맺을 때 개입되는 힘에는 권력이 있고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권력은 일종의 강제력이고, 매력은 일종의 흡인력입니다.

 

 

좋은 대통령을 바라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니라, 대통령이 누구인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사회 구조가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각 시민사회들이 확고한 도덕성 위에서 활기차게 돌아갈 때, 사실 정부의 개입, 기성 정치인들의 개입은 별로 필요 없습니다. 시민사회가 허약하기 때문에 그만큼 정부의 힘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 필요한 것은 군주의 매력이 아니라 대중의 매력인 것이죠.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에 휘둘리고, 대중문화, 대중매체에 휘둘리고, 말초적 욕망에 휘둘리면서 살아가는 우중이 아니라 비판적 다중으로서의 대중, 이런 대중의 매력이 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대통령이 누가 되든, 대통령이 있건 없건 그 사회는 흔들림 없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북극성이 중심이 되어 뭇별들이 도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마치 광장에는 집들이 없는 것과도 같죠. 그러나 광장의 빔, 광장의 '무'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중심은 늘 비어 있어야 합니다. 중심에는 누구도 앉지 말아야 합니다. 그 빈 중심, 중심의 '무'가 모든 '유'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죠.

 

 

철학적 언어 사용에 있어, 옳음의 짝은 그름이고 좋음의 짝은 나쁨이다. 선과 악은 이렇게 양의적으로 이해됩니다만, 두 경우는 매우 다른 내용을 뜻합니다. 옳음/그름은 초월적 가치 기준과 의무 개념을 함축하지만, 좋음/나쁨은 내재적 가치 기준과 행복/기쁨의 개념을 함축합니다.

 

 

우리는 니체적인 맥락에 서서 귀족의 가치와 노예의 가치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귀족과 노예는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구별이지 신분적 구별이 아닙니다. 귀족 집에서 태어나 저절로 귀족이 되고 노예 집에서 태어나 저절로 노예가 되는 그런 신분제도와는 상관없이, 한 인간의 삶의 방식에서의 귀족과 노예입니다. 귀족은 고귀한 가치 창조들을 위해 삽니다. 노예들은 세속적 가치들에 대한 집착을 위해, 나아가 세상에 대한 앙식怏心='르상티망' 때문에 삽니다. 공부하고 책을 쓰는 것을 예로 들어 봅시다. 귀족의 가치를 가진 사람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행복해서 공부합니다.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 인간의 본성, 역사의 의미 등을 읽고 사유하는 데 행복을 느낍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또는 좋은 책을 남기기 위해서, 역사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 책을 씁니다. 그러나 노예의 가치를 가진 사람은 출세하기 위해 공부합니다. 교수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책을 쓸 때에도 책이 얼마나 팔릴 것인가, 내 책이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인정받을 것인가, 자기보다 더 인정받고 있는 자를 누를 수 있을 것인가 등에 집착합니다. 귀족의 가치를 가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순수한 기쁨, 창조에의 욕망, 인류에 대한 사랑이죠. 노예의 가치를 가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열등의식, 세속적 욕망, 남과의 비교입니다. 물론 귀족의 가치와 노예의 가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라 해야겠죠.

 

 

미개인들은 일단 먹을 것만 있으면 일을 안 한다는 겁니다. 하나의 일화가 남아 있는데, 어떤 서구인이 미개인들에게 기계를 준 적이 있다고 합니다. 기계를 쓰면 노동효율이 높아지겠죠. 그런데 미개인들은 높은 효율성을 이용해 물건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만큼 더 쉬었다는 겁니다. 더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일 안해도 되는 만큼 더 논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확대재생산이니 잉여가치니 하는 것들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소비를 위한 노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가 가난한 미개인으로 상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미개인들은 자기 배만 채우면 일을 안 한다는 겁니다.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isonomia' 같은 개념도 정의 개념과 같은 함축을 띱니다. 'Iso'라는 접두어는 '같은'을 뜻합니다. 'Nomia'는 '권리'에 해당하는 말이죠. 그래서 '똑같은 권리'라는 뜻입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사죠? 그래서 이때의 똑같은 권리란 신체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이 동등하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체를 이루고 있는 이 부분들 사이에 조화가 이뤄진 것이 바로 '건강'이죠. 그리스 의학의 요점은 병이 났을 때 신체를 어떻게 치유하느냐에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식이요법에 있어요. 식이요법이란 결국 몸의 균형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죠. 건강을 잃는다는 것, 즉 병을 얻는다는 것은 몸의 균형일 잃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몸의 정의를 찾는 것이죠.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타자들the others, 새로운 소수자들the minorities을 만들어냅니다. 오늘날 타자들, 소수자들은 공장 노동자들만이 아닙니다. 푸코와 들뢰즈/가타리가 이야기한 타자들, 소수자들은 사회에서 핍박받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정의론은 타자들/소수자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애초에 부정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한 시대, 한 사회의 부정의는 바로 타자들/소수자들에게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죠. 타자들/소수자들은 그들이 부정의를 구현하고 있다는 그 점에서 정치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타자들/소수자들이 과거처럼 등질적인 것도 아니고, 또 '혁명의 시대'에서처럼 늘 날카로운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타자들/소수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을 배제시키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그들의 정치의식은 어떻게 결집될 수 있는가? 어떻게 부정의와 싸울 수 있는가? 이런 물음들이 우리 시대의 정치적 화두들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정의란 바로 소수자들의 저항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깨어 있는 다중의 끝없는 저항만이 우리 삶에 숨쉴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기술이든 예술이든 철학이든 과학이든, 또 그 무엇이든 오로지 그 자체만을 잘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삶에 대해, 사회에 대해, 역사에 대해, 인간에 대해 넓은 안목을 가지고, 삶 자체를, 세계 자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만듦으로 가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만듦은 우리 삶의 만듦, 우리의 윤리적-정치적 삶의 양태의 만듦입니다. 이것은 미셸 푸코가 말년에 주력했던 문제이기도 하죠. '자기 만들기', '자기 돌보기'의 문제죠. 물론 나를 만든다는 것은 당연히 나와 얽혀 있는 사회, 역사, 세계를 만든다는 것과 뗄 수 없습니다. 특정한 물건, 특정한 책, 특정한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자체, 자기 자체, 사회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고, 다른 만듦들도 이런 만듦의 결을 따라가면서 이루어질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앞에서 논했던 덕의 만듦, 정의의 만듦입니다. 덕과 정의의 만듦보다 더 위대한 만듦은 없는 것이고, 우리는 덕과 정의가 있는 곳에서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938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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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참으로 동죽부추전, 두릅튀김, 골담초/민들레/사과꽃/달래 튀김, 당귀/방풍 장아찌, 달래무침!

 


고창 심원 갯벌 동죽 사다가 밭미나리, 양파 넣고 동죽무침! 탁주 안주로 안성맞춤.

 
해장은 동죽부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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