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의 양면처럼 사람은 이타심과 이기심을 동시에 가지며,
이타심이 이기심을 앞서기에 세상은 유지된다.

이기심이 앞서는 소수는 다수를 착취하여 쌓아올린 부와 권력으로 그 다수를 지배한다.
지속가능한 삶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의 아름다움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어야 한다.



[본문발췌]


서문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게 내 인생이다.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다. 품었던 수수께끼가 플리는 순간의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왜 그런지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바로 눈물, 즉 박애fraternite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있다면 자유와 평등을 하나 되게 했던 프랑스 혁명 때의 그 프라테르니테fratenite, 관용의 '눈물 한 방울'이 아닌가. 나와 다른 이도 함께 품고 살아가는 세상 말이다.



2019년

자신을 위한 눈물은 무력하고 부끄러운 것이지만 나와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여백을 살해하라. 흰 종이는 흰고래다. 펜은 작살이다. 나는 에이하브 선장이다.


심심하다는 무위無爲다. 슴슴하다는 무미無味다. 심심할 때 나는 나에게로 돌아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 아무 맛도 없는 음식을 먹는 것. 일상으로부터 도망칠 때이다. 빈 스크린이 있기 때문에 서부 활극을 볼 수 있다. 조용한 공백 속에서 음악이 들려오듯이. 모든 의미는 여백을 살해할 때 출현한다. 여백을 죽인 죄는 크다. 짜고 매운 음식을 만든 죄는 크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마개는 금기이고 뚜껑은 통제다. 열리지 않는 뚜껑, 딸 수 없는 마개라면 브레이크에 걸려 달릴 수 없는 자동차. 제어 장치만 있는 사회, 법, 규제. 딸 수 없는 병, 열리지 않는 솥(냄비) 때문에 목이 타고 배가 고프다.


늙다와 낡다. 오래 산 사람을 늙다고 하고(늙었다고)
노인을 늙은이라고 하면 화를 내지만
오래 쓴 물건을 낡다고 한다(낡았다고).
옷은 낡아도 몸은 낡는다고 하지 않는다.
사람과 물건이 다르다는 뜻이다.
물건은 죽을 수 없다. 산 적도 없었으니까. 생명은 부서지지 않는다.
그 말 하나로 늙은이는 안심해도 좋다. / 낡은 게 아니라 늙은 것이다.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로봇은 병나지 않고 고장 난다. 부서진다.
물건으론 깨지고 부서지고 바래가는 것이 아니다.
상자가 궤짝이 아니라
상자는 부서져도 상자 속의 공간은 없어지지 않는다.
당당한 살아 있는 생명체로 늙어간다.
비어 있는 것은 영원하다. 시간이 멈춘다.
바위의 이끼처럼.



나는 지금 달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보고 있다.
어둠의 바탕이 있어야 하얀 달이 뜬다.

나는 지금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얀 종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흰 바탕이 있어야 검은 글씨가 돋아난다.

달을 보려면 어둠의 바탕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책을 읽으려면 백지의 흰 바탕이 있어야 한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려면 밤하늘과 정반대의
바탕이 있어야 한다.
검은 별들이 반짝일 때 밤하늘의 하얀 별들이 성좌를 그린다.

지금까지 나는 그 바탕을 보지 않고 하늘의 달을 보고
종이 위의 글씨를 읽었다. 책과 하늘이 정반대라는 것도 몰랐고,
문자와 별이 거꾸로 적혀 있따는 것도 몰랐다.
지금까지 나는 의미만을 찾아다녔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의미의 바탕을 보지 못했다. 겨우겨우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의미 없는 생명의 바탕을 보게 된다. 달과 별들이 사라지는
것과 문자와 그림들이 소멸하는 것을 이제야 본다. 의미의
거미줄에서 벗어난다.



경험은 점点이다. 점과 점을 이어야 비로소 지식은 창조로 변한다.



내가 노숙자인 까닭.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위에 천장이 있다는 것
그것이 하루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노숙자로 살아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곁에 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하루의 보람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노숙자로 살아야 한다.

노숙자는 노숙자路宿者가 아니라
노숙자露宿者인 게다.
이슬을 맞으며
잠든 사람.

노숙자의 눈물은 눈물이
아닌 게다.
이슬인 게다.



모래가 다 흐르면
뒤집어 놓는다
새로운 시간이 시
작된다. 모래가
다 차면 뒤집어
놓는다. 다시 시
간이 계속된다.



나는 어렸을 때 죽음을 알았고
나는 늙었을 때 생(탄생)을 알았다.거꾸로 산 것이다.




2020년

화폐의 가치, 나를 위해 쓰는 돈이 아깝지 않듯이 너를 위해서 쓰는 돈이 아깝지 않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깃털은 흔들린다.
날고 싶어서.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공깃돌은 흔들린다.
구르고 싶어서.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내 마음은 흔들린다.
살고 싶어서.



죽음의 조련사는 없다. 죽음은 길들일 수 없는 야수. 수식어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하나의 명사 하나의 동사만 남는다. 죽음, 그리고 죽다.


'거의'라는 말이 좋다.
목적지에 도달하면 기쁨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다.

'거의' 다 왔어. 지루한 기차(완행 같은 것) 안에서 영등포역을 지날 때가 제일 즐겁고 기대감이 컸던 기억.

완성 직전. 화룡점정의 점 하나 찍기 직전의 기쁨과 짜릿함. 그
비어 있는 마지막 공간이 있을 때, 삶은 새벽별처럼 빛난다.

용은 날지 않아도 된다. 잠룡
승천하지 않는 용. 이무기
눈알이 찍히지 않은 용들의 비늘
막 바람이 일기 직전의 숲의 이파리(나무)
용의 눈을 찍지 마라.



'아! 살고 싶다. 옛날처럼' 외치다
눈물 한 방울
벌써 옛날이 되어버린 오늘 하루.

코로나만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한다.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세상으로.

누구에게나
남을 위해서 흘려줄
마지막 한 방울의
눈물
얼음 속에서도 피는 기적의 꽃이
있다. 얼음꽃




2021년

오래동안 글을 쓰지 않았더니
만년필이 말라 화초에 물을 주듯
물을 뿌려 글씨를 심는다.

'쓴다'와 '심다'. 어느 것이 정말 정확한 표현인지 이상도
글씨를 쓰는 것을 (줄을 맞춰서) 모를 심는 것에 비유한 적이 있었으니까!

낙서의 장소로 가장 이상적인 곳이 뒷간이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공간, 그래서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
무소유의 공간 그래서 변소 벽에는 항상 낙서가 무성하다.

사적 공간이면서도 막상 어떤 개인도
소유할 수 없는 공적 공간, 이 아이러니 속에서
탄생되는 낙서 역시 가장 은밀한 것이면서도,
공개된 벽보와 같이 노출되어 있다.

내가 낙서를 다시 계속해가야 할 이유다.



많이 아프다. 아프다는 것은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신호다.
이 신호가 멈추고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이 우리가 그처럼 두려워하는 죽음인 게다.
고통이 고마운 까닭이다. 고통이 생명의 일부라는 상식을 거꾸로 알고 있었던 게다. 고통이 죽음이라고 말이다.
아니다. 아픔은 생명의 편이다. 가장 강력한 생生의 시그널.
아직 햇빛을 보고 약간의 바람을 느끼고 그게 풀이거나 나무이거나 먼 데서 풍기는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픔을 통해서다.
생명이 외로운 것이듯 아픔은 더욱 외로운 것.
고통의 무인도에서 생명의 바다를 본다.
그리고 끝없이 되풀이하는 파도의 거품들.
그 많은 죽음을 본다.




죽음 앞에 서면
어떤 동사도 움직일 수 없다
어떤 명사도 제자리를 지킬 수 없다.
형용사와 부사는 갈 곳을 몰라 방황한다.

나와 너의 인칭도 구별되지 않고
단수와 복수도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글 끝에 보이지 않던
종지부 마침표의 점만이 검은 태양처럼 떠오른다.
두 문자로 시작되었던 낱말들을 태양의 흑점이 삼켜버린다.



신문 없는 날이 좋더라.
새 소식이 없으니
새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

신문에도 얼굴이 있어서
면面이라고 부르는데.
아침마다 그 얼굴을 안 보니
잃어버렸던 얼魂이 보이더라.

신문 없는 날은 좋더라.
아무 일도 없으니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그리고 문화마저도 보이지 않으니

하늘이 보이더라.
땅이 없으니
별이 보이고 구름이 보이고
해가 떠오르더라.




2022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시간의 덫에 걸려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데자뷰라는 현상 속에서 사막에서 혹은
깊은 숲속에서 헤매는 사람처럼 수천 번을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중입니다.

반복의 지루함을 아시지요, 하나님. 시시포스의 형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응징의 법은 바로 반복이었습니다.
이 지겨운 반복의 덫에서,
시간이ㅡ 덫에서 지금 나는 천만 번이나
수억겁 년을 반복할지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남은 말,
사랑이라든가 무슨 별 이름이든가
혹은 고향 이름이든가?
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
시인들이 만들어낸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지상에는 없는 말, 흙으로 된 말이 아니라
어느 맑은 영혼이 새벽 잡초에 떨어진 그런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내 몸이 바로 흙으로 빚어졌기에
나는 그 말을 모른다.
죽음이 죽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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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은 인생에 주어진 시험이다.
누군가는 스스로 길을 찾아 방황을 끝내고,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방황한다.
이 또한 지나갈 뿐이다.


[본문발췌]

저는 다케이치의 말을 듣고 그때까지 그림에 대한 제 마음가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즉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원초적인 비법.


그는 저와 형태는 달랐지만 역시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동류였습니다. 그가 의식하지 못한 채 익살꾼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 게다가 익살꾼의 비참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저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었습니다.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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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에서 멀리 치워진다고, 분리수거와 재활용 제품을 찾아 소비한다고 쓰레기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코로나19를 겪으며 배달음식 주문과 1회용품 사용이 늘어나며 얼마나 많은 플라스틱과 비닐, 쓰레기가 생겨났을까?


[본문발췌]

 
「프롤로그」, 당신이 '분리수거한' 플라스틱이 도착하는 곳, 민 카이 마을
  • 재활용은 인간이 자연 활동을 관찰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쭉 논의되어 왔다. 연금술사가 납을 금으로 바꾸려 했던 것처럼 버려진 물건과 재료는 거의 무한대로 가치 있는 물건, 심지어 은화로 가공할 수 있다는 원칙에 기반한다.
  • 이 신화는 물질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동시에 문화적이다. 사회 속에서 인간관계의 변형만큼이나 재료의 변형에 대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건을 가치화하는 것은 재료의 수거와 가공에 가담하는 개인들의 가치화와 맥을 같이 한다. 마치 19세기 파리에서 넝마주이들이 쓰레기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지원금으로 여겼던 것처럼 말이다.
 
「'플라스틱' 블랙박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 조르주 바타유는 저서 <저주의 몫>에서 일반 경제가 생산한 에너지와 재료의 과잉을 정의하면서 인간 사회가 '소모'의 길을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축적된 쓰레기 속에는 실제로 저주의 양상이 있을 수 있다. 어쨌거나 물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행복과 불행은 역사의 주역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 2016년에 베트남 중앙 지역에서 목격한 재활용 쓰레기를 파는 여성의 모습은 나에게 '운명의 수레바퀴'를 떠오르게 했다. 가뜩이나 적은 그의 수입은 변동적인 시장 상황과 원재료 가격에 따라 달라진다. 권력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기회의 불공평과, 누군가는 폐기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실상의 불평등은 세계에서 작은 지역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퍼지며 갈등을 낳는다.
  • '원천적 쓰레기 분류'와 '환경을 위한 작은 실천'이라는 법령 속에서 개인의 사생활과 일상에 쓰레기 관리 문제가 정치적으로 끼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적으로 불평등한 무역이 이뤄진다는 명백한 사실과 더불어, 아일랜드에서 출발한 더러운 종이 상자를 분리하는 베트남 농민의 두 손을 통해 드러난 것은 바로 정치적 문제다.
  • 약간의 비판도 공론화하지 못하는 현실의 억압된 측면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표현하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창조적 발언'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찰한다는 것은 나타낸다는 것과 동의어이므로 본다는 것은 곧 눈에 띈다는 것이다.
  • 쓰래기의 은폐와 해외 이전이라는 쓰레기 관리의 문제
  • 2020년에 유럽 연합은 27,490,340톤의 쓰레기를 수출했다. 2004년 이후로 두배나 증가한 양인데, 주로 플라스틱, 종이, 종이 상자, 금속 등이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가 해상 수송으로 두 배나 더 먼 곳으로 이동하면서, 그 존재와 그에 따른 문제들도 멀어졌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소비하면서 버린 재료들이 우리 눈에서 멀리 치워진다하더라도 누 꾸인 지역에서는 더 잘 보이게 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먼 곳에서 화물선에 실려 하이퐁 항구에 도착한 쓰레기 컨테이너들은 이곳에 매일 하역되어, 쓰레기 더미 위에 중산층 집들이 들어서는 민 카이 마을에서 해체되고 분리되어 팔리고 재활용된다.

「쓰레기 패러독스」, 다시 태어났는데 또 쓰레기?
  • 민 카이 마을에 있는 수공업 공장들의 재활용 라인을 한 단계 한 단계 훑으면 물질 부스러기는 광석으로 변한다. 인간과 기계의 힘이 작용한 여러 작업 단계를 거쳐 처음의 형태를 잃는다. 큰 보따리가 작은 보따리가 되고, 필름이 조각이 되며, 조각은 냉온탕을 지나 세척된 후 녹아서 떨어지고 섞인 다음, 용암이 되어 사출기를 밧줄처럼 빠져나가서 알갱이가 된다. 마치 산이 수많은 모래알로 침식되는 것처럼 고체와 액체 사이의 불분명한 이 재료의 성질은 향후 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형태가 없어야 다시 형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변형이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에게 관찰의 척도를 바꾸고 물질과 함께 지하세계로 뛰어들 것을 권한다. 이 세계에는 보고, 맛보고, 느끼고, 들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 특화된 형태와 색, 특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날카로운 감각을 개발하는 것이다.
  • 민카이에 있는 가족 회사의 라인에서 온 광석은 극도로 제한된 판로를 갖는다. 대부분이 사출이나 팽창 과정을 통해 다시 플라스틱 봉투를 만드는 데 쓰인다. 그렇게 더러운 봉투가 깨끗한 봉지로 바뀌면서 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인 것이다.
  • 오염된 재료의 비중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근원적 정화가 이뤄져야 한다. 보물로 둔갑하여 숨기려고 하는 것은 곧 '쇠퇴'라는 것을 잊지 말자. 형태만 바뀔 뿐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 플라스틱 가공을 할 때 색 배합에는 교훈이 숨어 있다. 근본을 숨기기 위해 변에 무엇을 섞어도 그 구린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활용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 누군가는 진화하고 누군가는 퇴화한다
  • 반짝이는 논 위로 왜가리가 날고 밤에는 개구리가 울어대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과거 베트남 평야의 평화로운 풍경을 그와 함께 상상해 보려 했다. 그러나 이제 쓰레기, 오염, 공장, 도로 교통의 존재감이 워낙 뿌리 깊어서 이런 풍경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다. 
  • 부서진 쓰레기들이 햇빛에 썩어 가면서 뿜어내는 악취가 코끝을 자극하고,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모터와 기계의 소음뿐이다. 아마도 개구리는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다. 오염된 늪지에 숨어 있겠지만 소음이 점령한 이 풍경에서 개구리는 사라지고 없다.
  • 재활용된 알갱이들을 생산하는 작업장에서는 플라스틱 입자가 둥둥 떠다니는 더러운 물을 흘려보낸다. 분쇄된 폴리머 쓰레기의 세척 수조에서 나오는 오수는 마을의 도랑이나 재활용 공장 주변의 공터로 흘러가 고여 있다.
  • 인간에 대한 불신만 커진 것은 아니다. 항상 주위의 다른 것에는 오염물이나 독극물이 없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공동이 소유하고 공유하는 강은 일상생활의 전부이고, 지역의 특성을 나타내면서 공동체를 공들여 키워낸 존재이기도 하다. 베트남어 'nước'은 '물'과 '국가' 모두를 의미하는데, 이 점에서 우리는 오염된 물이 정체성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문할 수 있다.
  • 일상의 경험과 풍경 속에서 우리 삶의 방식은 플라스틱 재활용의 발전과 그에 따른 영향에 타격을 받는다. 더구나 그 영향들은 처음에는 인지할 수 없지만 환경, 인간관계 그리고 사물과 존재의 관계에 깊이 주입되어 있다. 마치 극빈곤층이 주로 잡는, 쓰레기를 먹으면서도 생존력이 강한 물고기 틸라피아 같다.
  • 이런 향수 어린 쇠퇴론은 황금기와 손실을 암시하는 '과거에는 정말 좋았는가?'에 대한 담론이 기초되어야 하지만, 사실 누 꾸인 지역의 퇴화는 이미 뿌리 깊다. 매일 오염에 노출되다보니, 여러 발생원으로부터 시작되어 다양한 연쇄 관계로 묶인 유해 물질과 가까이, 더 나아가 위험 물질과 '섞여 사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주변 유해 물질에 한 가지 원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인들은 결합되었거나 얽혀서 혼합되어 있다.
  • 관계가 있는 사물을 평가, 측정, 분류, 격리하는 현대 과학에서 이제는 구식이 된 용어를 다시 꺼내보자면, '미아즈마(Miasma)'(유행병의 원인을 나쁜 공기로 본 폐기된 학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막스 리부아이론에 따르면 이 용어는 변화되기 쉽고 순회하는 잡다한 물질로, 플라스틱 가공제, 첨가제, 그리고 박테리아를 유발하는 플라스틱의 영향을 분석하는 데 적합하다.
  • 민 카이 마을과 가까운 이곳에서 플라스틱은 그 상태가 다양하고-플라스틱성-어디에나 존재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 침투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유독 물질에 반복적으로 노출된다고 볼 수 있다. 
  • 대기와 땅, 그리고 강은 훼손됐고 동시에 삶도 변질됐다. 인간은 개인, 공동체 등 몸통을 구성하는 '화학적 관계의 범위를 인식'하고 환경과 다른 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 미셸 머피의 '또 다른 삶(alterlife)'처럼 말이다. 
  • 그러나 대체적인 전망은 분명하지 않다. 시간의 화살은 더 많은 자원 개발, 물질 축적, 에너지 남용을 촉진시키고, 이러한 퇴화를 상쇄시키는 경제적 번영은 재활용 성공 모델을 가진 소수의 기업만 웃게 만든다.
  • 이 모든 것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열역학에서 말하는 엔트로피왁 같은 것이다. 패자들은 모두 운하 근처에서 탄식만 할 뿐이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미래로 가는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퇴화에 대한 거론은 꺼리면서 그들이 가져온 발전과 공로만을 이야기하곤 한다. 
 
「돌고 돌아 다시 원점?」, 순환이라는 거짓말
  • 플라스틱은 '야생'의 상태로 돌아가면 혹자가 '인류세'라 부르는, 즉 지구 생태계의 인간 발자국을 정의하는 미시, 중시, 거시적인 모든 측면에서 그 흔적을 남긴다. 빙하 코어부터 도심 나뭇가지에서 펄럭대는 비닐봉투를 거쳐 대양에 생겨난 플라스틱 섬까지, 플라스틱은 여기저기로 비집고 들어와 지금까지 끄떡없어 보였던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리고 있다.
  • '쓰레기 연금술, 모든 것은 모든 것 안에 있다. 저마다 원리와 그 역을 가지고 있어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타고 마르는 것은 비옥하게 하고 영양을 공급한다. 악취는 향수가 되고 썩은 것은 황금이 된다.'
  • 돈에는 악취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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