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장기적 목표추구에서 오는 행복에 대한 이야기...

 

 

[본문발췌]

 

 

풍요로운 중년에 도움이 되는 3가지 주제

  • 활기차게 살라. 당신 삶의 일부(배우자, 자녀, 일)로부터 정서적으로 분리되면 산소가 부족한 환자처럼 죽음에 이르고 말 것이다. 끔찍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사실 의도한 바지만), 이제 당신 인생에서 자동조종장치는 사라졌다는 통찰이 거듭해서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열정을 쏟을 대상을 찾아라. 활기찬 중년을 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8살 이하의 아이들이 40대 이상의 중년에게 최고의 롤모델일 수도 있다.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새로운 것에 열정을 쏟는다. 그들은 마침내 성공을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며, 마음의 상처를 무릅쓰면서 친구를 사귀려 든다. 여기서 중년을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결혼생활에 열정과 애정을 쏟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가 따르고, 단지 수입뿐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일을 택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며, 노화된 두뇌를 명석하게 만들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연구결과 드러난 사실은 매우 명확하다.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을 할 때, 그 순간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보다 큰 기끔과 만족을 느낄 수 있다.

  • 행복보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라. 위스콘신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캐럴 리프와 다른 과학자들은 수천 명을 대상으로 중년 이후의 삶이 어떠한지 추적 관찰하면서 신체적, 정서적, 심리적, 생물학적, 신경학적인 측면에서 그들의 웰빙(well-being) 수준을 측정하였다. 수많은 데이터 파일을 살펴본 연구자들은 행복의 추구는 실패로 끝날 수 있지만,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이 추구는 거의 실패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개념으로, 도파민을 생성케 하는 일시적은 행복이 아니라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장기적은 목표를 추구하는 데서 오는 행복을 말한다. 이를테면 자식을 키우거나 올림픽을 목표로 훈련할 때 느끼는 만족감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사람이 각자에게 주어진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갈구하는 성배와도 같은데, 특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충분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중년에게 더욱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의 보다 깊은 목적을 추구하면 뜻밖의 보너스를 받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수십 건의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있는 사람이 더 오래 살고, 더 행복한 노년을 보내며, 기억력도 좋아지고 심각한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줄 뿐 아니라 더 충만한 사람을 살게 된다고 한다. 인생의 목적은 장기적인 건강과 행복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교육이나 돈보다 중요하다. 비록 만병통치약은 아니라고 해도 거의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 생각이 경험을 결정한다. 사고방식은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 경력, 인간관계, 건강, 행복을 결정할 수 있다. 즐거운 생각을 하면 건강하고 부유하고 지혜로워진다는 뜻이 아니다. 적어도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이 생물학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 부모,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 대한 취약성, 감정적 기질과 같은 유전적 소인은 당신이 타고 있는 조각배를 특정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바람과도 같다. 그런가 하면 당신의 주변 환경은 배를 떠미는 거센 물살이다.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상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는가 아니면 가정불화로 고통받거나 학대를 당하며 자랐는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는가? 가난한가, 부유한가? 결혼은? 직장은? 종교는? 그러나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조정할 수 있는 방향타를 갖고 있다. 승리와 패배, 기쁨과 고통과 상실 등에 대한 태도와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전문가들은 행복의 30~40%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 이 방향타가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당신의 배를 폭풍우로부터 지켜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항해를 즐기는 정도에는 확실히 영향을 끼친다. 결국 오늘 당신의 생각과 태도가 내일, 모레,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날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은 고립되고 분리된 자아로서의 내가 아닙니다. 의미 있는 것은 인생의 광대한 지속성이고, 나는 그중 아주 작은 일부지만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요. ... 인생의 마지막에서 충만함을 느낄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참여와 관심이죠. 관심을 갖고 세상과 교류해야 합니다. ...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관계 맺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관심을 가질 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보다 너그러운 사람이 될 겁니다. 관심을 가지면 오래 보존하고 싶은 게 보이고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보이는 법이니까요. 왕성하게 활동하는 노인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활기차게 사는 이유는 세상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나고 있는지 늘 관심 있게 지켜봅니다.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신이 나서 이야기하고, 새로 조성되는 공원을 보며 좋아합니다. 그들에게는 주변 세상에 대한 관심이 있어요.

 

 

활기찬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에너지와 관심의 방향을 행복의 추구에서 의미의 추구로, 성공하는 것에서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매 순간을 즐기는 것으로 전환한 사람들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두뇌 훈련을 권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열심히 노력하면 결국 좋아지게 돼 있어요. 하지만 우선 노력을 해야 해요. 노력 없이 거저 얻어지지는 않아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랍니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말이에요. 우리는 뭔가 시도해 봐야 해요. 그러면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삶의 의미를 중시하는 태도가 가져다주는 유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진다고 데이비드 베넷은 덧붙였다. "삶의 의미를 중시하는 태도는 알츠하이머의 발병을 늦출 뿐만 아니라 뇌가 알츠하이머 병변에 반응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답니다. 뇌가 다른 장기와 다른 점은 가소성, 즉 역경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입니다. 삶을 더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보다 유연한 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타고난 조건이 더 좋기 때문에 치매를 이겨낼 수 있기도 하지만 치매의 병변을 다룰 또 다른 방법들이 있기 때문에 더 잘 이겨 내는 거지요."

 

 

삶은 환경 때문에 견디기 힘들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의미와 목적이 결여되어 있을 때 견디기 힘들어진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일을 하라.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성취 지향적입니다." 크리스텐슨이 TED 강연장에 모인 청중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약간의 에너지나 30초의 시간이 주어지면 본능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가장 빨리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을 하려고 들 겁니다." 우리는 거래를 성사시키고 물품을 배송한다. 밤을 새워 원고를 쓴다. 승진을 하고 칭찬을 받는다. "그에 반해 가족에 대한 투자에는 오랫동안 보상이 따르지 않습니다." 크리스텐슨은 말을 이었다. "그 결과, 여러분과 나 같은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원하면서도 시간과 에너지와 재능을 우리의 가장 깊은 행복의 원천인 가족이 아닌 그 외의 것들에 사용합니다."

 

 

인생의 절반쯤에서 깨닫게 되는 것들.

  • 바람직한 나이 듦에 대하여

    • 중년의 우울감을 느낀다면 모두 마찬가지라는 점을 기억하라. 지금만 잘 넘기면 가장 행복한 시기가 올 것이다.

    • 행복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라. 그리하면 둘 다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영광스러운 시기를 의미 있게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기적으로 자문해 보라.

    • 중년의 뇌는 경이로워서,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것을 학습할 수 있다.

  • 활기찬 삶에 대하여

    • 인생의 매 단계에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라.

    • 중년의 길고 단조로울 수 있다. 목표를 설정하여 삶에 활력을 불어넣으라.

  • 생각의 힘에 대하여

    • 웃고 있는 동안은 쉽게 상처 받지 않는다.

    • 시련을 여유 있게 받아들여라. 몇 차례의 좌절은 인생에 도움이 된다.

    • 생각에 주의하라. 생각하는 대로 경험하게 되므로.

  •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 가능하면 플랜A를 밀고 나가라. 플랜A를 성공시키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 완전히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자신의 강점을 활용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편이 더 낫다.

    •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성공을 새롭게 정의하라.

  • 가장 소중한 것을 택하는 문제에 대하여

    • 부부가 서로에게 소홀한 것은 결혼생활에 가장 큰 위협이 된다.

    • 결혼생활을 소중히 여긴다면 배우자를 어느 정도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

    • 가장자리에 있으면 위험하다. 친구에게 투자하라.

    • 조지 베일런트가 말했듯, 행복해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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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에 절대적 원칙이란 없다.

 

단지, 편견과 그로 인한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피하고 겸손한 지혜와 탐욕을 버리는 것. 그리고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거나,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탐색하는 데 에너지의 일부를 분배할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본문발췌]

 

 

'인간의 인지적 편견과 그로 인한 잘못된 판단과 행동',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손실을 회피하고, 과신하고, 프레이밍에 취약하고, 심리회계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이성은 완벽하지 않고, 우리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린 의사결정은 동전 던지기와 다를 바 없다. 잘못된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다.

 

 

세상을 넓게 보고 이해할 수록 보다 뛰어난 투자자가 될 수 있다. 상호 관련성을 이해하려 애쓰다보면 세상 사는 지혜도 얻게 될 것이다. ... 어떻게 하면 세상 사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우선 다양한 분야의 지식에서 의미 있는 개념과 모형을 취하고 둘째,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찾아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학습해야 한다. 첫 번째 것은 스스로 공부하는 문제이고, 두 번째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문제다.

 

 

균형이 정말 세상의 자연 상태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균형이 어긋날 때 균형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자연의 목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균형은 뉴턴 물리학이 시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변함없는 상태는 아니다. 어느 주어진 순간에, 균형과 불균형이 시장에서 함께 발견될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시스템은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만든다. - 제인 제이콥스, <경제의 본질>

 

 

요셉 드 라 베가, <최고의 혼란>. 거래의 네 가지 기본 원칙

  • 다른 사람에게 주식을 사거나 팔라고 결코 조언하지 말라. 통찰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선의로 한 조언이라도 결과가 않 좋을 수 있다.

  • 놓친 수익을 안타까워하거나 후회하지 말고, 취할 수 있는 이익만 취해라. 유리한 국면이 계속되고 행운이 지속되기를 바라지 말고 취할 수 있는 것을 누리는 것이 현명하다.

  • 사고파는 과정에서 얻는 이득은 도깨비의 보물 같은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돌멩이였던 것이 석탄 조각이 되었다가, 다시 다이아몬드로, 부싯돌로, 아침이슬로 그리고 눈물로 바뀔 수 있다.

  • 가치는 지속되기 힘들고 소문은 진실에 기반하는 일이 드물기에, 이 게임에서 이기길 바라는 사람은 누구든 인내와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 불운을 두려워하지 않고 충격을 견디는 법을 아는 사람은 천둥에 혼비백산하여 숨을 곳을 찾는 암사슴이 아니라 천둥에 포효로 응답하는 사자를 닮았다.

 

fundamentalist vs trend followers. 추세 추종자들은 시장 변동으로부터 이익을 취하려 하는데, 주가가 오르면 주식을 사고, 주가가 내리면 주식을 판다. 기본적 분석가는 가격 변동에 따라 주식을 매매하지 않고, 주가와 기업의 내재가치 사이에 차이가 생길 때 주식을 사고판다. 주식의 가치가 현재 주가보다 높으면 주식을 사고, 가치가 주가보다 낮으면 주식을 판다.

 

 

집단이 뛰어난 의사결정을 하려면 다양성과 독립성이란 두 가지 변수가 중요하다. 주식시장은 투자자들의 의사결정을 종합하는 인센티브 기반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시장의 다양성 수준과 참가자들의 독립성이다. 만약 주식시장에 다양성이 충분하고, 더 중요한 것으로 참가자들의 의사결정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시장은 효율적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독립성이 훼손되면 어떻게 될까? 시장 참가자들의 의사결정이 독립적이지 않고, 하나의 의견으로 합쳐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시스템은 실질적으로 다양성을 잃고, 이에 따라 최적의 답을 찾을 가능성도 잃게 된다. 만약 다양성이 집단의 문제해결에 핵심이라면, 다양성의 실패로 인해 집단은 최적화되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된다. 주식시장의 경우 다양성 실패는 시장의 비효율성을 가져온다.

 

 

심리학 이론을 이용하여 시장의 비효율성을 설명하는 행동재무학은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의 학문적 작업 결과로 탄생하게 되었다.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사람들이 이득이 기대되는 의사결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위험을 회피하는 반면, 명백한 손실이 보이는 의사결정에서는 위험을 추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효용이론에서는 가치가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자산에 매겨진다. 반면 손실 회피라는 개념이 핵심인 전망이론에서 가치는 이득과 손실에 매겨진다.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사람들이 단지 부의 마지막 크기만 보지 않고 부에 기여한 이득의 증가분과 손실의 증가분을 함께 본다는 것을 증명했다. 

 

 

투자자들이 주식을 더 오래 보유할 수록 더 높은 수익을 얻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투자 결과를 너무 자주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매일 포트폴리오를 확인한다면, 당신은 매일의 주가 변동을 지켜보며 걱정하게 될 것이다. 주가 확인을 오랫동안 미룰수록 당신은 변동성에 덜 마주하게 되고, 당신의 선택은 더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다시 말해 투자자가 주식 보유 위험을 감당하지 못하게 만드는 두 요인은 손실 회피와 빈번한 평가다. 탈러와 버내치는 손실 회피와 투자 성과를 확인하는 빈도를 함께 나타내기 위해 '근시안적 손실 회피'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다음으로 탈러와 버내치는 근시안적 손실 회피가 주식 리스크프리미엄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살펴보았다. 손실 회피 성향을 가진 투자자의 포트폴리오 평가 주기가 달라짐에 따라 주식 수익률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았다. 투자자가 시시각각 변하는 주식이나 채권의 투자수익률 변동성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얼마나 자주 투자 포트폴리오를 평가해야 하는지 살펴본 것이다. 답은 1년이었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과잉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잘 안다는 착각을 심어줄 수 있다. 

 

 

피셔 블랙은 시장에 떠도는 얘기들이 대부분 합리적 가격을 이끌어내는 순수한 정보라기보다는 혼란만 야기하는 소음이라고 믿었다. 투자자의 혼란은 또다시 소음을 증폭시킨다. "소음이란 우리의 관찰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블랙은 지적했다. 가격체계에 끼어든 소음으로 인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경제적 의사결정에 사용하는 가격체계는 정보로서의 유용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시장의 소음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해답은 자신이 투자한 기업의 경제적 본질을 아는 것이다. 그래야 가격이 기업의 내재가치보다 더 높게 또는 더 낮게 형성되는 순간을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이 그레이엄과 버핏이 역설한 바로 그 교훈이다. 하지만 너무도 자주, 깊이 뿌리 박힌 심리적 문제가 이런 상식적인 조언을 압도한다.

 

 

철학이라는 단어는 보통 '사랑philo'과 '지혜sophia'로 번역되는 두 개의 그리스 단어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고, 의미를 찾는데 헌신하는 사람이다. 지혜의 추구는 적극적이고 끝이 없는 발견 과정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이해하려는 열정으로 충만하고, 결코 끝나지 않는 과정을 이어간다. 방대한 철학적 탐구 영역을 간단히 분류해보면 크게 세 가지 큰 범주로 나눌 수 있다. 

  • 첫째, 세상의 보편적 본질에 관한 비판적 사고인 형이상학metaphysics이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물리학은 물리적 세계, 실재하는 물체, 자연의 힘에 대해 탐구한다. 물리학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분자들에 관해, 경사면과 자유 낙하하는 구슬에 관해, 태양과 달을 지배하는 운동법칙에 관한 연구다. 형이상학은 '물리학을 넘어선beyond physics'이란 뜻이다. 철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질문을 논할 때, 그들은 우리가 사는 시공간으로부터 독립된 생각들을 말한다. 신과 사후세계 같은 개념들이 예가 될 수 있다. 책상이나 의자처럼 실재하는 사건이 아니라 자연 세상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는 추상적 생각이다. 형이상학적 질문을 놓고 논쟁하는 철학자들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존재는 흔쾌히 인정하지만, 세계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 철학의 두 번째 분야는 미학, 윤리학, 정치학이라는 서로 연관된 세 영역을 탐구한다. 미학은 아름다움에 관한 이론이다. 미학을 공부하는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 사람들이 관찰하는 물체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느끼는 마음 상태에 있는 것인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미에 대한 탐구를 피상적 연구로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방식이 우리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판단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옳고 그름을 탐구하는 철학 분야다. 윤리학은 무엇이 도덕적이고 무엇이 비도덕적인지, 어떤 행위가 적절하고 어떤 행위가 부적절한지 묻는다. 윤리학은 사람들이 행하는 활동, 사람들의 판단, 사람들이 갖는 가치, 사람들이 성취하려 하는 품성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정치 철학은 윤리학의 사상들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윤리학이 사회 수준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탐구한다면, 정치 철학은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 어떤 법이 만들어져야 하는지, 이런 사회적 구조와 사람들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논쟁한다.

  • 철학의 세 번째 분야는 인식론epistemology으로 지식의 본질과 한계를 탐구한다. 인식론이란 용어는 '지식'을 뜻하는 그리스어 episteme와 문자적으로는 '담론'을 의미하지만 대체로 일종의 공부나 지적 탐구를 뜻하는 logos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인식론은 지식의 이론에 대한 탐구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인식론적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생각에 관해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무질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질서일 뿐이다. - 알렉산더 포프

 

 

다른 누군가보다 더 잘하는, 혹은 주식시장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주어진 데이터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해석하는 방법을 갖는 것이다. 덧붙여 다른 정보 원천과 다른 경험을 가질 필요도 있다. 투자 대가들을 연구하다 보면,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한 가지 두드러진 특성은 관심의 폭이 굉장히 넓다는 것이다. 시야가 확장되면 관찰한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거기서 얻은 통찰을 활용하여 더 큰 투자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우리는 놀랄 만한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고 일한다. 더 이상 빨리 변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가속이 일어난다. 그런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급격하게 환경이 변화될 때, 유연한 사고는 경직되고 절대적인 사고를 항상 이긴다. 

 

 

철학을 공부해서 얻는 '현금가치'는 매우 현실적이다. 간단히 말해, 철학은 더 잘 생각할 수 있게 가르친다. 일단 철학에 노력을 기울이면, 자신이 비판적 사고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상황을 남들과 다르게 보기 시작하고, 투자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게 된다. 더 많이 보게 되고,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패턴들을 알아보기 때문에 갑작스런 변화를 덜 두려워하게 된다. 새로운 생각을 즐거이 받아들인다. 그 생각으로 무엇을 할지 깨닫게 해주는 열린 마음 또한 갖게 된다.

 

 

역발상 투자자들은 탐욕이 주가를 내재가치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밀어올리고, 공포가 주가를 내재가치보다 훨씬 더 낮은 지점으로 밀어붙이지만, 언젠가는 평균으로의 회귀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변동은 시스템 내에서 바로잡힐 것이다. 하지만 골턴의 법칙이 철칙이라면, 왜 예측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어려움은 세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다. 첫째, 평균으로의 회귀는 항상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평가와 저평가는 이성적으로 인내할 수 있는 기간보다 더 오랫동안, 훨씬 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 둘째, 변동성이 너무 크고 불규칙해서 주가가 제대로 바로잡히거나 평균에 쉽게 안착되지 않는다.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주식시장처럼 유동적인 환경에서는 평균 그 자체가 안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어제의 평균이 내일은 평균이 아니다. 평균이 새로운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다.

 

 

확률이나 분산, 평균으로의 회귀, 두터운 꼬리 같은 수학적 도구들은 시장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줄여준다. 하지만 완전히 제거해 주지는 못한다. “위험 관리를 실생활에 필요한 실용적 기술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가장 심오한 결론을 지닌 간단하고도 오래된 한 마디에서 비롯되었다.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확실성을 포함시키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항상 어느 정도는 무지한 상태로 남게 된다. 우리가 가진 정보의 대부분은 부정확하거나 불완전한다.” - 피터 번스타인

 

 

이 세계가 안고 있는 진짜 문제는 이 세상이 비합리적이지도, 그렇다고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은 거의 합리적이긴 해도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 곳이다. 인생이 불합리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언제나 모든 곳에서 논리를 찾으려 든다면 덫에 걸려들고 마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약간은 덜 수학적이고, 덜 정확하다고 보면 된다. 정확성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부정확성은 숨겨져 있다. 자연의 야성이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수년간 심리학자들은 인지처리 과정이 두 가지 사고모드로 나뉠 수 있다는 생각에 관심을 가져왔다. 하나는 직관이라 불리는 것으로 ‘빠르고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인지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느리고 규칙을 따르는’ 정신작용인 이성이라 불리는 것이다. 오늘날 이 인지 시스템은 각기 ‘시스템1’과 ‘시스템2’로 불린다. 시스템1 사고는 직관적이다. 자발적인 통제감 없이 자동적으로 빠르고 애쓰지 않아도 작동한다. 시스템2는 사색적이다. 노력이 필요하고 느리며 세심하게 조정된다. 시스템2 사고는 집중을 필요로 하고,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된 규칙에 기반한 연산작업이 이루어진다. 

 

카너먼은 직관이 올바른 때가 있는데,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예측이 가능할 만큼 충분히 규칙적인 환경'이어야 하고, 또 하나는 '오랜 시간 연습을 통해 이런 규칙성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직관적 기술은 대체로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존재하며, 보다 복잡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 기술을 개발할 가능성이 훨씬 적다. 직관은 원인과 결과가 쉽게 확인되는 선형 시스템에서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식시장이나 경제가형 시스템에서는 두뇌의 직관적인 시스템1 사고가 효과를 내기 어렵다. 

 

보통 사람들처럼 전문가들도 사고과정의 결함을 고스란히 가진 것처럼 보였다. 특히 전문가들은 과신하고, 사후확신 편향을 갖고, 자기가 가진 신념체계를 방어하고, 베이즈 추론과정이 결여된 상태였다. 이런 심리적 편견들로 인해 시스템1 사고가 문제를 일으킨다. 사람들은 타고난 편견과 휴리스틱 때문에 사고과정에 오류가 생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성급하고 직관적으로 의사결정한다. 하지만 시스템2 사고를 통해서만 판단을 잘못 내렸는지 점검할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생산적으로 활용할 방법도 찾아야겠지만, 동시에 새로운 지식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고 홀랜드는 말한다. 홀랜드의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활용exploitation'과 '탐색exploration'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가지고 있는 모형으로 곧바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당연히 그런 시장의 비효율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빌딩블록을 탐색하는 작업을 멈춰서는 안 된다.

 

 

개미군락의 개미들 대부분은 가장 강력한 페로몬 자취를 따라 먹이가 있는 곳을 찾아가지만, 일부 개미들은 다른 먹이가 있을 만한 곳을 무작위적으로 찾아다닌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냥에 나갈 때, 무리의 구성원 대부분은 이미 알려진 사냥터로 향한다. 하지만 몇몇 사냥꾼들은 정령이 담긴 뼈를 굴리는 주술사의 인도에 따라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장소로 보내진다. 노르웨이 어부들도 비슷하게 행동한다. 선단에 있는 대부분의 배들은 전날 물고기가 가장 많이 잡힌 장소로 보내지지만, 일부 어선들은 물고기가 있을 만한 다른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여기저기 탐색한다. 우리들 투자자도 균형을 맞춰 가장 확실한 수익 기회를 활용하면서도, 동시에 정신적 에너지의 일부는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써야 한다. ... 새로운 빌딩블록을 찾는 일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한다. 기업이 지금 당장에 초점을 맞춰 연구개발 예산을 줄인다면, 단기간의 성과는 좋아지겠지만, 미래의 어느 순간 그 기업은 경쟁열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아이디어 탐색을 멈추어도 얼마 동안은 여전히 주식시장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미래의 변화하는 환경은 우리를 점점 불리한 위치로 몰아갈 것이다.

 

 

망치만 가진 사람은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인다.

 

 

찰리 멍거가 말한 '세상을 사는 지혜'를 얻는 기술은, 단일한 특정 분야의 전문지식 획득을 강조하는 현대의 학습방식보다는 고대와 중세 시기의 리버럴 아트 학습법과 공통점이 많다. 지금까지 인류가 많은 지식을 축적해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바로 '지혜'다. 고등교육기관은 지식을 분야별로 분리해놓았는데, 지혜는 그것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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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이나 고가의 내구재, 소비재 제품을 등을 살 때 사람들은 시간을 두고 이것저것 알아보고,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식을 살 때는 그 기업과 속해 있는 산업에 대한 이해도 없이 무턱대고 단 몇 초만에도 매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주식을 보유하는 것은 그 기업의 일부를 보유하는 것',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욕심에 눈이 먼 묻지마 투자는 하지 않을 것이다.

 

 

[본문발췌]

 

 

주식시장이 하락하면 저는 보수적인 종목을 팔아 중소형 성장주와 경기민감주를 삽니다. 또 시장이 올라갈 때는 주가가 많이 오른 중소형 성장주와 경기민감주를 팔아서 보수적인 종목들을 사는 거죠.

 

 

주식시장의 흐름을 보지 않고 종목만 분석해 투자하는 진정한 종목 투자자에게 저가 매수는 기독교의 성배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가치이다. 주식시장의 급격한 매도세로 순자산이 10~30% 가량 사라진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주식시장의 조정을 재난으로 보지 않고 더 많은 주식을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이런 식으로 장기간에 걸쳐 커다른 부가 형성되는 것이다.

 

 

경기 침체는 조만간 끝나게 마련이고 침체로 인해 급락한 주식시장에는 여기저기 저가 매수의 기회가 널려 있다. 그러나 고평가된 시장에서는 살 만한 주식을 찾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노력하는 투자자들은 시장이 300포인트 오를 때보다는 300포인트 떨어질 때 더 행복한 법이다.

 

 

신중하게 고른 종목들로 구성된 투자 포트폴리오는 정기적으로 점검해 관리해야 한다. 대개 6개월마다 한 번씩 점검하는 것이 좋다. ... 6개월 정기점검은 단지 투자한 종목의 주가를 확인하는 것, 혹은 증권사의 연구 부석에 맡겨버리는 것이 아니다. 투자자라면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당신은 다음의 단계를 밟아나가야 한다. 우선 다음 두 가지 기본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1) 이 주식은 이익과 비교할 때 주가가 여전히 매력적인가? (2) 이 기업은 이익을 늘리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면 다음 세 가지 중 한 가지 결론을 얻을 것이다. (1) 상황이 더 좋아졌다. 이 경우에는 투자를 늘려야 한다. (2) 상황이 나빠졌다. 이 경우엔 투자를 줄여야 한다. (3) 상황에 변함이 없다. 이 경우엔 투자를 유지할지 아니면 이 주식을 팔고 좀더 매력적인 다른 기업에 투자할지 결정해야 한다.

 

 

주식투자자들의 관심사는 주로 주가 등락에만 집중되기 때문에 주식을 보유한다는 것은 기업의 일부를 보유하는 것이란 사실을 잊어버리기가 쉽다. 임대건물을 소유하고 있으면 건물이 잘 유지되고 관리되고 있는지, 보수가 필요한 곳은 없는지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기업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을 때도 기업에 새로운 경영상의 변화가 있는지 정기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피터 린치의 원칙 Principal of Peter Lynch at Beating The Street

  1. 오페라 관람 횟수가 미식축구 관람 횟수를 30으로 압도적으로 앞선다면 당신의 인생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2. 채권을 선호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3.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아이디어에는 투자하지 말라.
  4. 백미러로는 미래를 볼 수 없다. – 과거의 사건으로 미래를 예단하지 말라.
  5. 라디오로 첼리스트 요요마의 연주를 들으면서 돈을 낼 필요는 없다. – 국공채에 투자하려면 수수료 내면서 펀드에 하지 말고 직접 하라.
  6. 이왕 펀드에 투자하려면 좋은 펀드를 골라야 한다.
  7. 회사 사무실의 사치스러움과 경영진이 주주들의 이익에 신경 쓰는 정도는 정확히 반비례한다. 즉 사무실이 호화스러운 기업의 경영진은 주주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돌려주려는 의지가 약하다.
  8. 장기 국채 수익률이 주식의 연평균 수익률 6%보다 높을 때는 주식을 팔고 채권에 투자하라.
  9. 평범한 주식들이 모두 다 똑같이 평범한 것은 아니다.
  10. 아우토반을 달릴 때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
  11. 가장 좋은 주식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다.
  12. 수익을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은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하면 확실히 치유된다.
  13. 영결 나팔 소리가 울리고 있는데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환상을 품지 말라. – 이미 끝난 주식에 미련을 갖지 말라.
  14. 어떤 기업의 매장을 좋아하게 되면 그 주식을 사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15. 기업 내부자가 주식을 사고 있다면 이는 긍정적인 신호이다.
  16. 사업에서 경쟁은 독점력보다 절대 강할 수 없다.
  17.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연차보고서에 컬러 사진이 가장 적은 기업에 투자하라. – 외양을 꾸미지 않을수록 실속 있는 기업이다.
  18. 애널리스트마저 외면할 때야말로 그 없종 혹은 그 기업에 투자할 때이다.
  19. 상황을 비관적으로 봐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매도 투자자거나 돈 많은 배우자를 찾는 시인이 아니라면.
  20. 사람이나 기업이 이름을 바꾸는 이유는 다음 2가지 중 하나다. 결혼(합병)을 했거나 사람들이 잊기를 바라는 재난을 당했거나.
  21. 영국 정부가 무엇인가를 팔려고 하면 무조건 사라. – 공기업이 민영화할 때는 주저 말고 참여하라.

 

 

25개의 투자 황금률

  1. 투자는 재미있고, 흥분되지만 위험하다. 기업에 대한 분석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2. 투자자로서의 강점은 월스트리트 전문가들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 기업이나 산업에 투자하는 식으로 자신의 강점을 활용한다면 전문가들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3. 지난 30년간 주식시장은 전문 투자가 집단이 지배해왔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반대로 전문투자가 집단이 주식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 투자가 주식투자를 하기는 더 쉽다. 당신은 전문투자가 집단을 무시함으로써 주식시장 평균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달성 할 수 있다.
  4. 모든 주식 뒤에는 기업이 있다. 기업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라.
  5. 몇 달간, 심지어 몇 년이 기업의 실적과 주가가 따로 노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기업의 실적과 주가는 100%같이 가게 되어 있다. 장기적으로 기업의 성공과 주식의 성공은 100% 상관관계가 있다. 기업의 성공과 주식의 성공 사이의 괴리가 돈을 벌게 해주는 핵심 요인이다. 인내심은 보답 받으며, 성공하는 기업의 주식을 갖고 있어도 역시 보답 받는다.
  6. 자신이 어떤 주식을 왜 갖고 있는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할 수 있는가. ‘이 주식은 반드시 오를 거야라는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7. 위험성이 큰 투기는 거의 언제나 예상을 빗나가 손실을 내게 마련이다.
  8. 주식을 보유하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다. 잘 돌볼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는 보유하지 말라. 다른 일을 하면서 주식투자를 하는 시간제 투자자라면 아마도 8~12개 기업을 꾸준히 추적하면서 상황에 따라 사고 팔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8~12개 기업을 계속 분석하되 어떤 경우라도 한번에 5개 이상의 기업에 투자할 필요는 없다. 5개 이상의 기업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9. 매력적이라고 느껴지는 기업이 없을 때는 마음에 드는 주식이 나타날 때까지 돈을 은행에 넣어두라.
  10. 재정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업에는 절대 투자하지 말라. 주식투자에서 가장 큰 손실은 재무구조가 취약한 기업에서 발생한다. 투자하기 전에 언제나 기업이 채무 지불능력이 충분한지 대차대조표를 통해 꼼꼼히 살펴보라.
  11.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성장산업의 최고 인기주식은 피하라. 비인기∙저성장 산업의 위대한 기업이야말로 꾸준히 높은 수익을 안겨준다.
  12. 소형주에 투자할 때는 그 기업이 흑자로 돌아설 때까지 기다린 후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
  13. 침체된 산업에 투자할 생각이라면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의 주식을 사라.  침체된 산업이 회복기미를 보일 때 사라. 예를 들어 마차를 몰 때 쓰는 채찍이나 진공관 라디오는 절대 회복될 수 없는 침체산업이다.
  14. 1000달러를 주식에 투자한다면 잃을 수 있는 최대한의 돈은 1000달러이다. 하지만 인내심만 있다면 당신이 벌 수 있는 돈은 1만 달러, 심지어 5만 달러가 될 수도 있다. 펀드매니저들은 수많은 기업으로 투자를 다각화 해야 하지만 개인투자자들은 몇 개의 좋은 기업에만 집중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면 소수의 좋은 기업에 집중할 수 있다는 강점을 잃어버린다. 평생의 투자를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소수의 고수익 기업이다.
  15. 모든 산업, 모든 지역에서 위대한 성장기업을 먼저 찾아낸 이들은 전문가가 아닌 주의 깊은 개인투자자였다.
  16. 주식시장이 하락하는 것은 1월에 눈보라가 치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일이다. 대비만 되어 있다면 주가 하락이 당신에게 타격을 줄 수 없다. 주가 하락은 공포에 사로잡혀 폭풍우 치는 주식시장을 빠져나가려는 투자자들이 내던지 좋은 주식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이다.
  17. 누구나 주식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머리는 있지만 아무나 배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주가하락에 두려움을 느끼며 모든 것을 팔아 치우는 성격이라면 주식투자는 물론 주식형 펀드투자도 피해야 한다.
  18. 부정적인 소식과 걱정거리는 늘 있게 마련이다. 주말에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뉴스의 부정적인 전망들을 무시하라. 주식을 팔려면 그 기업의 펀더멘탈이 약화됐을 때 팔아라. 세상이 무너질 것 같다는 이유로 주식을 팔지는 말라.
  19. 금리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으로의 경제상황과 주식시장의 향방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런 전망은 깨끗이 잊고 당신이 투자한 기업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지에만 집중하라
  20. 10개 기업을 분석했다면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경영상황이 훨씬 더 좋은 기업을 1개는 발견할 수 을 것이다. 50개 기업을 분석했다면 5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식시장에는 언제나 투자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놀라운 기회가 숨어 있다. 전문 투자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탁월한 기업들이 그 기회이다.
  21. 기업에 대해 전혀 공부하지 않고 주식에 투자하는  것은 포커를 칠 때 카드를 보지 않고 돈을 거는 것과 같다.
  22. 뛰어난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면 시간은 당신 이다. 당신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도 좋다. 월마트를 상장 첫 5년간 사지 못했다 해도 그 이후 5년 동안 월마트를 사서 보유하면 된다.  5년을 놓쳤다 해도 그 다음 5년간 투자해도 좋을 만큼 월마트는 위대한 주식이었다.
  23. 주식투자를 할 만한 배짱을 갖고 있지만 기업을 꼼꼼히 분석할 만한 성격이 아니고 시간도 없다면 주식형 펀드에 투자하라. 주식형 펀드에 분산 투자하려면 성장형 펀드, 가치형 펀드, 소형주 펀드, 대형주 펀드 등과 같이 서로 다른 운용 스타일을 가진 몇 개 펀드에 돈을 나눠 넣어라. 똑 같은 성격의 6개에 투자하는 것은 분산투자가 아니다. 한 펀드에서 다른 펀드로 너무 자주 갈아타면 양도소득세를 많이 내야 한다. (역자주: 우리나라는 주식에 양도소득세가 부과되지 않는다.) 투자한 펀드가 하나든, 몇 개든 펀드 수익률이 좋다면 변덕스럽게 환매하지 말고 계속 갖고 있어라.
  24. 미국주식시장은 지난 10년간 전 세계 주요 주식시장 중 여덟 번째로 총 수익률이 좋았다. 고성장 국가에서 수익을 얻고 싶다면 자산의 일부는 과거 운용성과가 좋은 해외펀드에 투자하라.
  25. 잘 선정된 주식들로 이뤄진 포트폴리오나 주식형 펀드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채권이나 MMF보다 수익률이 좋았다. 잘못 고른 주식들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는 장롱 속에 숨겨둔 돈보다 수익률이 좋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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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호흡,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위험감수와 행동, 그리고 여유...

 

 

[본문발췌]

 

 

돈의 가치는 시간과 연동된다.

 

 

선택의 순간, 인간의 비합리성이 고개를 든다. 비합리적인 심리적 편향들...

 

사람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돈의 크기가 있다. 이를 늘리려면 내공을 키워야 하는데, 대개의 경우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 내공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벼락 재산은 사람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연예인 중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빈번한 것을 보면 돈의 많고 적음이 삶의 전부는 아닌 듯하다. 자신의 내공 크기를 넘어선 돈은 독약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재산 극대화 전략이 삶에 주는 시사점은 투자의 영역만큼이나 분명하다.

  • 첫째, 삶은 단기적인 관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재산 극대화 전략은 굉장히 긴 시간 관념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좇기보다는 긴 호흡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주식회사는 대부분 실적을 3개월마다 발표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영진의 성과에 대한 보상이 이뤄진다. 이러한 이유로 경영진이 장기적인 성장이나 지속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단기적인 변동성은 높을지라도 3년 이상의 기간을 놓고 보면 가족 기업이나 상장되지 않은 기업이 상장 기업을 앞서는 성과를 보인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환경 문제 또한 장기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다면 그 해결책을 좀 더 쉽게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 둘째, 삶은 우리에게 리스크를 회피하지 말고 항상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리스크를 질 것을 요구한다. 리스크를 회피하고 확실한 길로만 가겠다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거의 확실하게 실패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고 껴안으며 발전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퇴보하고 있다는 의미다. 살면서 겪는 한 두 번의 실패는 오히려 한평생을 놓고 보면 오점이기보다는 인생의 귀중한 경험이자 자산이다. ... 내가 어떤 분야에 우위가 있는지 없는지 미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투자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직접 시도해 보고 실패해 보는 방법밖에 없다. 일종의 통제된 실험을 통해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이는 벤처 회사를 설립해 성장시킬 때 매우 유효한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론만으로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오직 실행만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개체와 사회의 학습에 대한 이론으로서 탐험(exploration)과 활용(exploitation)을 대입해 비교하는 경우가 있다. 탐험이 어떤 분야에 우위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시간들이라면, 활용은 탐험을 통해 파악된 우위가 있는 분야에 집중해 그로부터 복리의 성장을 구가하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 셋째,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리스크는 지지 말아야 한다. 재산 극대화 전략의 관점으로 보면 일생일대의 기회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하기만 하면 그 한번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풀리는 일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운이 나쁘면 실패를 거듭하게 될 수도 있지만, 재산 극대화 전략을 꾸준히 따르다 보면 결국은 성공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그래서 삶의 재산 극대화 전략을 계속해서 구사할 수 없게 만드는) 리스크는 절대로 지면 안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지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이 외에도 이런 범주에 속하는 일들이 여럿 있다. 완전한 파산에 이르렀다고 행운의 여신을 탓하지 말라. 재산 극대화 전략을 따르지 않은 당신 탓이 더 크다.

  • 마지막으로, 살다 보면 우위가 없음에도 한판 붙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재산 극대화 전략은 이런 경우 절대로 리스크를 지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피치 못하게 리스크를 져야 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재산 극대화 전략은 아니지만 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한 가지 알려 주겠다. 피해 갈 수 없다면, 그리고 우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당신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거는 것이다. 조금씩 찔끔찔끔 나눠 걸어 봐야 큰수의 법칙에 의해 좀 더 확실히 지기 때문이다. 물론 우위가 없기 때문에 질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더라도 이러한 상황에서는 여전히 이른바 '올인'이 최선의 전략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수적 열세에 있는 휘하의 장졸들에게 왜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으로 구사한 생즉사 사즉생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계량화가 곤란한 불확실성이 이익에 핵심적인 요소"

 

 

투자와 투기, 헤징은 어떻게 다른가?

  • 투자는 다음의 2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거래다. 둘 중 하나라도 위배되면 투자라고 판단할 수 없다.

    • 100퍼센트 자기 소유의 돈이어야 하며, 이 돈이 내 손을 떠나 줄어들지도 모르는 위험 상태에 빠져 있어야 한다.

    • 처음에 투입한 돈을 다 잃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 잃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

  • 헤지는 다음의 4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거래들이다. 투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라도 위배되면 헤지라고 판단할 수 없다.

    • 헤지하고자 하는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 헤지 대상의 원금보다 헤지거래의 원금이 작거나 같아야 한다.

    • 헤지 대상과 헤지거래의 방향이 서로 정반대여야 한다.

    • 헤지 대상과 헤지거래의 기초 자산이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 투기는 위에서 정의한 투자로도 헤지로도 판명되지 않는 나머지 모든 거래다.

 

 

옵션은 협상도 원활하게 이끈다. 영어로 옵션의 동의어에 '얼터너티브(alternative)'라는 단어가 있다. '대안', '선택 가능한 것'이라는 뜻이다. '협상술'에서는 대안의 발굴이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라고 가르친다. 보통, 협상을 상대로부터 더 많은 이익을 빼앗기 위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라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 좁은 의미의 협상이다. 서로 아무런 대안없이 오로지 한 가지 차원으로만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협상이라기보다는 투쟁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협상이 뺏느냐 뺏기느냐의 문제가 돼 버리면, 그다음에는 오직 누구의 힘이 더 강한가에 의해 최종적인 결과가 결정돼 버리는 일만 남는다. 결국 지속적으로 좋은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워진다. 협상의 대가들에 의하면, 한 가지 측면만을 가지고 다투는 협상은 최악의 협상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 한 가지 외에도 협상할 만한 측면들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가격만 가지고 협상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외에도 물량이나 기간, 품질 등 협상할 수 있는 차원은 얼마든지 개발하기 나름이다. 이와 같이 협상할 수 있는 측면들이 다양해지면 서로 조금씩 주고받을 것이 생기고, 그렇게 되면 쌍방이 어느 정도씩 수긍할 수 있는 협상안을 도출할 수 있다. 이는 비단 비즈니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리스크는 피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익이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예측을 기반으로 미래 계획을 세우는 것은 회사나 개인이 흔히 행하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 미래의 그 시점이 되면 예측한 대로 계획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경험해 봤을 것이다. 예측에 기반을 둔 계획이 항상 틀리는 것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계획 오류(planning fallacy)'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오류는 심리적인 문제 말고도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 계획의 개별 구성단위들은 각각 예상 수량이나 예상 소요 시간과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작아지는 데는 0이라고 하는 한계가 있지만 커지는 데는 한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예상보다 오래 걸리기 마련이고, 실제 비용도 항상 예상보다 더 들기 마련이며, 실제 불량품은 항상 예상보다 더 많이 나오기 마련이다. 

 

 

삶이 멱 법칙을 따른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시사할까? 미래를 정교하게 전망하거나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해하기 쉽도록 지진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진도 10의 지진이 발생할 확률은 물론 매우 작은 값이지만 그렇다고 0은 아니다. 진도 15, 진도 20의 지진 또한 마찬가지로 진도 10의 지진보다는 발생할 확률이 작겠지만 여전히 0은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확률들이 작다고 내일 당장 그런 지진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갑자기 그냥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니 예측은 무의미하다. 좋든 싫든 엄연한 사실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삶이 이와 같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눈을 크게 뜨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타조처럼 고개를 당에 처박고 그렇지 않다며 헛되이 믿을 것이냐의 선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잘못된 일은 제거해 버리고 잘될 일만 남겨 놓는 것, 세상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손실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이익을 보는 것, 그러한 상태를 '반취약성(anti-fragility)이라고 한다. 이것은 강건성(robustness)과도 다르다. 강건성은 예상외의 큰 변동이 발생해도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제일 불리한 상태는 취약성(fragility)이다. 예상외의 큰 변동 앞에 취약한 상태를 속절없이 큰 손실을 입는다. 반면 반취약한 상태는 변동이 큰 만큼 이익도 커진다.

 

 

삶을 반취약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이 순리다.

 

 

반취약성은 오직 '실행'에 의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론으로는 반취약성을 달성할 수 없다. 실행을 중시하고 그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은 결정을 내릴 때 행동의 결과, 즉 페이오프(payoff)에 집중한다. 반면,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 책상머리 이론가들은 예측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취약하다.

 

 

취약성과 반취약성의 궁극적인 리트머스 시험지는 시간과 역사라는 점이다. 취약한 것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그 성질을 드러내고 만다. 당신이 리스크를 회피하지 않으면 감내하고 당신의 운명에 대해 위엄을 가지고 맞서면,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초라하게 만들 수 없다. 반대로 당신이 리스크를 감내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위대하게 만들 수 없다. 결국 나를 비천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는 남이 아니고 오직 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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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과 편리함 때문에 시스템 속 삶에 젖어든다. 그 선택으로 내 자유가 포기되었다는 것을 모른체....

 

 

[본문발췌]

 

 

일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을 해서 돈을 벌려고 노력한다. 이 경우, 행복이 목적이고 금전은 수단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착각해 버린다. 그리고 그 목적에 사로잡혀 피폐해지고 행복에서 점차 멀어져간다.

 

 

사람들이 수단과 목적을 착각하는 이유는 그쪽이 편하기 때문이다. 행복이 목적이라고 하지만 그 행복이 무엇인지에 관해 지속적으로 자문하고 고민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간단히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금전 쪽으로 목적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자유'는 사실 냉엄하다. 그것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단순한 방종과 자유는 결정적으로 다른 위치에 존재한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도, 자유는 의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칸트는 우선,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고, 이성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동물은 본능에 지배를 당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눈앞에 바나나가 있으면 무조건 먹으려 한다. '먹지 않는다'라는 선택의 여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즉,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을 갖추면서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바나나가 눈앞에 있어도 '먹지 않을'수 있다. 그리고 그 바나나를 정물화의 모티프로 삼기도 한다. 선택의 여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본능이나 욕구에 현혹되지 않고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즉 무엇이 '의무'인지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다. 그런 깨달음을 따르는 것이 자유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자유가 냉엄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런 의미에서다. 하지만 자신의 꿈에 다가가려면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아니, 반드시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는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쨌든 기획을 세우려면 자유로워져야 한다. 관리받는 편안함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된다.

 

 

'휴먼 스케일(human scale:인간의 체격을 기준으로 한 척도, 인간의 자세, 동작, 감각에 입각한 단위)'

 

 

생텍쥐페리의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휴먼 스케일의 조직에서는 상사-부하의 관계가 아니라 동료로서 동일한 위치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당연히 고객이다. 눈 앞에는 항상 고객이 존재한다. 그렇게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고객 가치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좋은지 각자 자유롭게 구상하면서 클라우드적으로 기획을 실현해 나간다. 그런 과정을 통해 싹트는 동료에 대한 공감과 신뢰는 조직을 구성하는 사원들 각자를 연결해 주고 조직에 형태를 부여한다.

 

효율과 행복은 다르다. 효율은 확실히 편리하고, 편리는 대부분의 경우 쾌적함을 이끌어 낸다. 단, 쾌적함과 행복은 등가가 아니다.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숲 속의 산책로를 지나가야 한다면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곳을 걸을 때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은 결코 효율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다, 어쩌면 효율과 행복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753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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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감염자가 전세계 204개 국가 및 지역에서 100만이 넘었고 사망률도 약 5%에 달해 초기에 2~3% 사망률에서 조금씩 올라가고 있습니다.

 

과거 코로나계열의 사스, 메르스가 발병했을 때는 치사율은 현재 코로나19보다 높았으나 특정 지역 중심으로 발생했고, 감염자도 1만명을 넘지 않았었는데 일일 신규발병자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어 아직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이네요.

 

일부 연구자들은 20세기 최악의 감염병인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2500만~5000만을 넘어설 수도 있다고 전망하기도 합니다.

 

최대한 빠른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기를 기다리며 감염속도와 범위를 늦출 수 있는 생활예방 수칙을 지키는 것이 이 재앙에 맞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겠지요.

 

 

source, https://www.worldometers.info/corona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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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중 잠깐의 걷기를 통해 여유를 느끼거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는데 탈것을 이용한 이동에서는 그 속도감 때문인지 걷기에 비해 풍경을 제대로 바라보고 느끼거나 사유의 시간을 가지기 어렵다.

 

섬의 어느 길 끝에 펼쳐지는 나무와 바다, 그 위에 떠 있는 다른 섬과 하늘의 풍경! 

 

봄이면 찾곤 했던 사량도 섬산행길 추억을 떠올리는 강제윤 작가의 <섬을 걷다> 

 

 

[본문발췌]

 

 

삶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누구도 삶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누구도 삶의 판관일 수 없다. 어제는 어제의 삶을 살았고 오늘은 오늘의 삶을 산다. 너는 너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전부다. 나는 늘 삶에 대해 서툴다. 그렇다고 내 삶이 실수투성이인 것을 책망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처음 살아보는 삶이 아닌가.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변치 않는 진리일 것이다. 눈에 보여지는 것만이 아닌 거기 담겨있는 진실일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 조화로움일 것이다. - 발문, 그리하여 아름다운 섦들의 풍경, 박남준(시인)

 

 

여행자들은 들떠 있으나 그들은 차분하다. 여행자들이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 그들은 지루함에 눈을 감거나 부족한 잠을 청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바다 풍경도 익숙해지면 일상이다. 풍경이 주는 감동의 대부분은 낯설음에 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 한자 길道 자는 辶(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은 "辶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나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나아가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했다. 하지만 도시의 길들은 자동차와 온갖 장애물의 위협으로 인해 더 이상 생각에 몰두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이 길들은 오로지 통로로만 기능할 뿐이다. 이런 오솔길, 흙길, 사람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들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아닐까. 나는 많은 길들이 '사유의 확장' 기능을 되찾을 때, 이 소란하고 얕은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더 깊고 고요해질 것을 믿는다.

 

 

실상 삶에는 방향 표지석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삶은 정해진 방향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그저 주어진 삶은 없다. 어디에서도 삶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삶일 뿐이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시작되고, 아침이 와도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달력이 바뀐다고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삶을 바꾸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그래서 한 해의 첫날 찬바람 속을 걷는 의미는 각별하다. 오늘은 섬의 동쪽으로 간다.

 

 

대개 섬에서 사람 사는 마을의 뒤편은 공동묘지다. 볕이 잘 드는 봉분 근처에 자리 잡고 앉는다. 사람은 죽음의 뒷마당에서도 삶의 앞뜰을 생각한다. 죽음 곁에서도 삶은 따뜻하다! 어떠한 삶도 양면이다. 슬픔의 뒷면은 기쁨이고, 상처의 뒷면은 치유다. 실연의 뒷면은 사랑이고, 절망의 뒷면은 희망이다. 어둠의 뒷면은 빛이다.

 

 

또 모자랄까 두려워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함, 그것이 이미 모자람일뿐. 그대들은 샘이 가득 찼을 때에도 목마름을 채울 길 없어 목마름을 두려워하진 않는가? - 칼릴 지브란

 

 

나누지 못하는 것의 근원은 소유욕이 아니다. 불안이다. 모자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다 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나누지 않고 자꾸 쌓아 두려 한다. 나 또한 그러하다. 배낭 하나 메고 떠도는 삶이지만 나날이 배낭은 무거워진다.

 

 

진정한 나눔이란 무엇일까. 자신이 쓰고 남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눔이 아닐까. 

 

 

돈을 더 많이 번다고 해서 삶에 대한 불안이 줄지는 않는다. 가득 채우고도 늘 모자랄까 두려워한다. 만족을 모르는 삶은 도시와 농어촌이 다르지 않다. 본디 일이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만드는 사회는 사악하다. 하지만 이 사회는, 국가는, 자본은 개인이 필요보다 더 많이 일하도록 끊임없이 선동한다. 개인에게는 온갖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강요하면서도 개인의 삶은 책임져 주지 않는다. 교육, 의료, 노후까지도 철저하게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사회. 그러니 소득이 늘어도 개인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는다. 개인의 불안은 사회의 불안을 잉태한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국가 안보와 체제 불안을 조장하는 가장 큰 반국가 세력은 자본과 국가 자신이다!

 

 

나는 인간은 '동물' 이라는 사실에 더 주목한다. 다시 말하자면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이다. - 이일훈, <모형 속을 걷다>

 

 

신들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신들의 힘이 아니다. 신을 믿는 자들의 믿음의 깊이다.

 

 

옛날 어선들은 눈으로 가늠해 가며 그물을 던졌으나 이제는 어군탐지기로 물고기들이 지나는 길목을 정확히 찾아내 그물질을 하니 치어까지 싹쓸이되고 만다. 어로 기술의 발달이 단기적으로는 이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바다의 파국을 앞당기는 독이 된 것이다. 수만 년, 누대에 걸쳐서 나눠 써야 할 자원을 단기간에 고갈시켜 버리는 과학 기술. 인간이 이룬 과학 기술의 발달을 인간이 통제할 수 없게 될 때 과학 기술은 더 이상 인류에게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사물은 객관적이지만 풍경은 주관적이다. 풍경은 속도에 종속된다. 걷는 속도, 탈것의 속도, 바람과 안개와 구름의 속도, 마음의 속도에 지배된다. 같은 풍경을 보고 와서도 그려 내는 풍경이 사람마다 제각각인 것은 사물을 관찰할 때의 속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속도가 놓치는 풍경을 걷기의 속도는 포획해 낸다.

 

 

사람의 마음이 늘 무겁거나 가볍기만 하겠는가. 무겁기가만 하다면 가라앉아 버릴 것이고 가볍기만 하다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추가 있기 때문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균형을 잡아 주는 균형추. 마냥 마음의 오고감에 휘둘리며 살 이유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이 너무 잔혹하지 않고 꿈이 너무 비현실적이 아닌 나라에서 살았으면. - 버나드 쇼, <존 불의 또 하나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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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폭력 감소의 원인/요소 중 하나로 여성의 이해와 가치를 좀 더 존중하는 방향으로 문화가 변하는 "여성화"를 이야기하며 "여자와의 결혼이 젊은 남자를 문명화시킨다"는 생각은 진부하고 입에 발린 말로 느껴지지만, 현대 범죄학에서는 당연한 상식이란다.

 

 

[본문발췌]

 

 

여섯 가지 경향성

  • 첫 번째 변화는 수천 년의 규모로 벌어졌다. 인류 진화 역사에서 대부분을 차지했던 무정부적 수렵, 채집, 원예 농업(horticulture) 사회들이 약 5000년 전부터 도시와 정부를 갖춘 최초의 농업 문명으로 전이한 사건이다. 이와 더불어 과거 자연 상태의 삶을 특정지었던 만성적 습격(raid)와 혈수(feud)가 줄었고, 폭력적 사망의 비율이 5분의 1로 줄었다. 나는 이런 평화의 부여를 평화화 과정(Pacification Process)이라고 부르겠다.

  • 두 번째 변화는 500여 년에 걸친 과정으로, 유럽에서 제일 잘 기록되었다. 중세 후기부터 20세기까지 유럽 국가들의 살인율은 과거의 10분의 1에서 50분의 1 사이로 낮아졌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고전 <문명화 과정>에서 이 놀라운 감소는 조각조각 나뉘었던 봉건 영토들이 중앙 권력과 상업 하부 구조를 갖춘 큰 왕국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엘리아스에게 동의하는 의미에서 이 경향성을 문명화 과정(Civilizing Process)이라고 부르겠다.

  • 세 번째 변화는 수백 년의 규모로 펼쳐졌고, 17세기와 18세기 이성의 시대 및 유럽 계몽 시대에 시작되었다(고대 그리스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그리고 세계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선례들이 있기는 했다.). 전제 정치, 노예제, 결투, 사법적 고문, 미신적 살해, 가학적 처벌, 동물에 대한 잔학 행위처럼 사회적으로 용인된 폭력을 철폐하려는 조직적 움직임이 이때 처음 등장했고, 체계적인 평화주의도 이때 처음 움텄다. 역사학자들은 이 변화를 인도주의 혁명(Humanitarian Revolution)이라고 부르곤 한다.

  • 네 번째 주요한 변화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벌어졌다. 이후 50~60년 동안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목격했다. 강대국들과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축북 받은 정세를 긴 평화(Long Peace)라고 부른다.

  • 다섯 번째 경향성도 전투에 관한 것이지만, 좀 더 작은 차원이다. 오늘날 뉴스 독자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냉전이 끝난 1989년 이래 모든 종류의 조직적 충돌이 - 내전, 집단 살해, 독재 정부의 억압, 테러 - 세계적으로 감소했다. 나는 이 다행스러운 변화의 임시성을 인식하는 의미에서 이것을 새로운 평화(New Peace)라고 부르겠다.

  • 마지막으로, 1948년 세계 인권 선언 발기로 상징되는 전후 시대에는 더 작은 규모의 공격성, 이를테면 소수 집단, 여성, 아이, 동성애자, 동물에 대한 폭력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195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사람들은 일련의 운동들을 통해서 인권 개념으로부터 파생된 이런 권리를 - 시민권, 여성권, 아동권, 동성애자 권리, 동물권 - 옹호해 왔다. 나는 이것을 권리 혁명(Rights Revolutions)이라고 부르겠다.

 

다섯 가지 내면의 악마, 이른바 폭력의 내적 압력 이론을 암묵적으로 믿는 사람이 많다. 인간의 내면에는 공격성을 지향하는 추동이 있고 (죽음의 본능 혹은 피에 대한 갈증), 그것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에 간간이 방출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밝혀낸 폭력의 심리는 이와는 딴판이다. 공격성은 단일한 동기가 아니고, 하물며 점증하는 욕구는 더 아니다. 공격성은 환경적 유발 기제, 내부적 논리, 신경 생물학적 바탕, 사회적 분포가 서로 다른 여러 심리 체계들의 결과물이다. 나는 8장에서 그중 다섯 종류를 설명하겠다. 포식적(predatory) 혹은 도구적(instrumental) 폭력은 단순히 목적에 대한 실용적 수단으로서 동원된 폭력이다. 우세(dominance) 경쟁은 권위, 위세, 명예, 힘의 욕구로서, 개인 간의 마초적 허세로 드러날 수도 있고 인종, 민족, 종교, 국가 집단 간의 패권 경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복수심(revenge)은 보복, 처벌, 정의를 지향하는 도덕주의적 욕구를 부채질한다. 가학성(sadism)은 타인의 괴로움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ideology)는 공유된 신념 체계를 말한다. 보통 유토피아적 전망을 품고 있고, 무제한의 행복(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무제한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네 가지 선한 천사,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지는 않지만(선천적으로 악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으로부터 멀어져 협동과 이타성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동기들을 갖고 태어난다. 감정 이입(empathy)은 (특히 공감적 염려라는 의미에서) 우리로 하여금 남들의 고통을 느끼게 하고, 그들의 이해와 우리의 이해를 연결 짓도록 만든다. 자기 통제(self-control)는 충동적 행동의 결과를 예상하게 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절제하도록 만든다. 도덕적 감각(moral sense)은 같은 문화 속 구성원들의 상호 작용을 다스리는 일군의 규범과 터부(금기)를 규정하는데, 그래서 폭력이 줄 때도 있지만 오히려 늘 때도 있다(부족적, 권위적, 청교도적 규범일 때). 이성(reason)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만의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반성하게 하며, 더 나아질 방법을 찾게 한다. 그리고 본성의 다른 선한 천사들을 활용할 때 길잡이가 되어 준다. 나는 9장의 한 절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최근 역사가 말 그대로 덜 폭력적인 방향으로 진화했을 가능성, 즉 게놈의 변화라는 생물학적 의미에서 실제로 진화했을 가능성을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환경 변화에 맞춰져 있음을 명심하자. 이 책은 과거의 환경 변화들이 인간의 고정된 본성을 어떤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용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섯 가지 역사적 힘, 어떤 외생적 힘들이 인간 내명의 온화한 동기들을 선호함으로써 폭력을 다각적으로 감소시켜 왔는지 살펴보겠다. 이것은 심리학과 역사를 합치는 작업이다. 리바이어던(Leviathan), 즉 힘의 적법한 사용을 독점하는 국가와 사법 제도는 착취적 공격의 유혹을 줄이고, 복수의 충동을 억제한다. 또한 리바이어던은 각자 자기야말로 천사의 편이라고 믿는 이해관계자들의 자기 위주 편향을 피할 수 있다. 상업(commerce)은 모두가 이길 수 있는 포지티브섬 게임이다. 우리가 기술 발전 덕분에 더 많은 교역 상대와 더 멀리까지 물건과 생각을 교환하게 되면, 상대가 죽었을 때보다 살았을 때 내게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타인을 악마화하거나 비인간화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여성화(feminization)는 여성의 이해와 가치를 좀 더 존중하는 방향으로 문화가 변한 것을 말한다. 폭력은 대체로 남성의 오락이다. 따라서 여성에게 힘을 실어 주는 문화는 폭력의 미화에서 쉽게 벗어나며,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젊은 남성들의 위험한 하위문화를 덜 양성한다. 세계주의(cosmopolitanism)의 세력들, 가령 문해 능력, 이동성, 매스미디어는 우리로 하여금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시점을 취해 보게끔 하고, 그런 사람들까지도 공감의 대상으로 아우르도록 공감의 범위를 넓혔다. 마지막으로 인간사에 지식과 합리성을 더 많이 적용하는 능력은 - 이성의 에스컬레이터(escalator of reason) - 폭력의 순환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하고, 자신의 이해를 타인의 이해에 앞세우는 행위를 줄이고, 폭력의 개념을 재구성함으로써 폭력을 경쟁에서 승리해야 할 행위라기보다는 해소해야 할 숙제로 보게 한다. 

 

 

여행이 우리의 정신을 넓히는 것처럼, 우리의 문화적 유산을 있는 그대로 둘러보는 것은 옛 사람들이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살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싸움(quarrel)은 세 가지 주된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첫째는 경쟁(competition), 둘재는 불신(diffidence), 셋째는 영광(glory)이다. 첫째는 이득을 노려 침입하는 것이고, 둘째는 안전을, 셋째는 평판을 노린다. 첫째는 남에게 딸린 일꾼, 아내, 아이, 가축을 자신이 갖기 위해서 폭력을 쓰는 것이다. 둘째는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폭력을 쓰는 것이다. 셋째는 말, 웃음, 다른 의견, 기타 자신에게 직접 가해졌거나 친척, 친구, 나라, 직업, 이름에 간접적으로 가해진 멸시의 신호 따위 사소한 것 때문에 폭력을 쓰는 것이다.

 

 

홉스는 인간에게 특히 세 가지 분쟁(싸움)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득(포식적 습격), 안전(선제적 습격), 신뢰성 있는 억제(평판/보복적 습격)를 추구하기 위해서. 비국가 사회 사람들도 이 셋 모두를 놓고 싸웠다.

 

 

모든 폭력 연구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한 가지 현상은 대부분의 폭력을 15~30세 사이의 남자들이 저지른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포유류에서 수컷이 암컷보다 더 경쟁적이다. 게다가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에는 남자가 위계 서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평판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 평판은 성인기 초기부터 투자해야 얻을 수 있고 그 후에는 그 보상을 평생 누릴 수 있다. 남자들의 폭력성은 그 정도가 연속적 눈금으로 조절된다. 한쪽 극단은 남자들이 여자를 놓고 서로 겨루는 것이고, 반대쪽 극단은 남자들이 여자에게 직접 구애하고 아이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그 사이의 연속성 상에서 한 지점을 선택하여 자신의 에너지를 할당할 수 있다. 생물학자들은 가끔 이 연속선을 가리켜 '난봉꾼이냐 아버지냐(cads vs. dads)'라고 부른다. ... 여자와의 결혼이 젊은 남자를 문명화시킨다는 생각은 진부하고 입에 발린 말로 느껴지지만, 현대 범죄학에서는 당연한 상식이다.

 

 

수백 년 전 선조들은 자발성과 개인성의 징후를 모조리 찍어 눌러야만 스스로를 문명화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미 비폭력의 규범이 공고해졌기 때문에 이제는 구식이 되어버린 일부 금지들은 오히려 어겨도 괜찮다. 

 

 

문명화된 인간은 미개인보다 더 무례하다. 버릇없이 굴어도 머리통이 쪼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소설가 로버트 하워드

 

 

우세 경쟁에서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 쟁점은 정보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세는 포식과 구별된다. 우세 경쟁도 치명적 충돌로 격화할 수는 있다. 경쟁자들이 막상막하이고 서로 긍정적 착각에 물들었다면 더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세 경쟁은 과시 행동으로 마무리된다.(인간도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양측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무기를 휘두르고, 서로 벼량 끝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다가 한쪽이 꼬리를 내리면 끝이 난다. 대조적으로 포식에서는 끝내 욕망의 대상을 얻는 것만이 목표이다.

 

 

사법 체계는 비싸고, 비효율적이고, 피해자의 요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가해자를 강제로 투옥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폭력적이다. 요즘 많은 공동체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때로는 형사 재판을 보완하고, 때로는 아예 대체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조정자 앞에 나란히 앉는데, 가족과 친구가 동행할 때도 있다. 조정자는 피해자에게 괴로움과 분노를 표현할 기회를 주고, 가해자에게는 진심 어린 회한과 피해 보상을 전달할 기회를 준다. 흡사 대낮에 방송되는 진부한 텔레비전 방송처럼 들리지만, 이런 자리는 최소한 진심으로 뉘우치는 가해자에게는 바른 길로 들어설 기회를 주고 피해자를 만족시킴으로써, 너무나 느릿느릿한 사법 체계로 분쟁을 가져가지 않아도되도록 해준다.

 

 

비극은 두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해결책이 있고, 체홉의 해결책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결말에서는 무대에 시체들이 나뒹굴고, 아마도 저 높은 곳 어딘가에 정의가 어른거릴 것이다. 반면에 체홉의 비극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환멸을 느끼고, 씁쓸해지고, 상심하고, 실망하고, 철저히 망가진 상태로 끝나지만, 여전히 모두가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셰익스피어식이 아니라 체홉식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비극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 아모스 오즈

 

 

인생에는 구속을 벗어나 제 멋대로 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점에서, 이성은 우리에게 그 순간이 언제인지를 알려 준다. 그것은 타인이 제 멋대로 할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에서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때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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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발전은 세상에 대한 절대적 진리를 향해서 누적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단절적인 변화를 연속적으로 겪는다."

 

새로운 발견이나 다른 방식으로 보고 해석하는 깨우침을 통해 과거의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도 폐기될 수 있다.

 

 

[본문발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physica)>,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와 <광학(Opticks)>, 프랭클린의 <전기에 관한 실험과 관찰 기록(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Electricity)>, 라이엘의 <지질학(Geology)> 등의 책들과 다수의 여타 저작들은 한동안 연구 분야에서의 합당한 문제들과 방법들을 다음 세대의 연구자에게 묵시적으로 정의해주는 역학을 맡았다. 이 저술들은 두 가지 본질적인 특성을 공유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것들의 성취는 경쟁하는 과학 활동의 양식으로부터 끈질긴 옹호자 집단을 떼어내어 유인할 만큼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재편된 연구자 집단에게 온갖 종류의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남겨놓을 만큼 충분히 융통성이 있었다. 이 두 가지 특성을 띠는 성취를 이제부터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용어는 '정상과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법칙, 이론, 응용, 도구의 조작 등을 모두 포함한 실제 과학 활동의 몇몇 인정된 실례들이, 과학 연구의 특정한 정합적 전통을 형성하는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을 시사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과학사학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또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역학'(또는 '뉴턴의 동역학'), '입자광학'(또는 '파동광학') 등의 제목으로 기술하는 전통들이다. 패러다임은 지금 거론된 이런 이름들보다 훨씬 더 전문적인 전통들도 포함하는데, 이런 패러다임에 대한 공부는 과학도가 훗날 과학 활동을 수행할 특정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런 공부를 통해서 과학도는 바로 그 확고한 모델로부터 그들 분야의 기초를 익혔던 사람들과 만나게 되므로, 이후에 계속되는 그의 활동에서 기본 개념에 대한 노골적인 의견 충돌이 빚어지는 일은 드물 것이다. 공유된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연구하는 사람들은 과학 활동에 대한 동일한 규칙과 표준에 헌신하게 된다. 그러한 헌신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분명한 합의는 정상과학, 즉 특정한 연구 전통의 출현과 지속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진리는 혼동에서보다는 실수로부터 더 쉽게 나타난다. - Bacon, Novum Organum (The Works of Francis Bacon의 VIII권)

 

 

정상과학의 목적은 새로운 종류의 현상을 불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의 창안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으며,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 창안된 이론을 잘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오히려 정상과학 연구는 패러다임이 이미 제공한 현상과 이론을 명료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나는 이들 세 가지 유형의 문제들, 즉 의미 있는 사실의 결정, 사실의 이론과 일치, 그리고 이론의 명료화 등은 실험과학과 이론과학 양쪽에서 정상과학 문헌을 모두를 차지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과학의 문헌을 모두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일반적이 아닌 비정상적인 문제들도 들어 있으며, 이런 비정상적인 문제의 풀이는 과학적 활동 전부를 특별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문제들은 요구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문제들은 정상연구의 진보에 의해서 마련된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출현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문제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압도적 다수는 보통 앞에서 요약한 세 가지 범주 가운데 하나에 속하게 된다. 패러다임 아래에서의 연구는 여타의 방법으로는 수행될 수 없으며, 그 패러다임을 버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 정의하는 과학의 실행을 중단한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곧이어 실제로 그러한 패러다임이 폐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폐기가 바로 과학혁명이 돌아가는 축이 된다(혁명[revolution]의 중심과 회전[revolution]의 축을 비유적으로 빗대어 쓴 말). 그러나 그런 혁명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기 전에, 거기에 이르는 길을 마련하는 정상과학적 연구 활동의 총체적인 조망에 관해서 개관할 필요가 있다.

 

 

발견은 변칙현상(anomaly)의 지각, 즉 자연이 패러다임이 낳은 예상들을 어떤 식으로든 위배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이러한 예상들은 정상과학을 지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변칙현상의 영역에 대한 다소 확장된 탐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그 변칙현상이 예상한 것으로 귀결되는 방식으로 패러다임 이론을 조정하는 경우에 종결된다. 새로운 종류의 사실을 동기화시키는 것은 이론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조정 이상을 요구하며, 그 조정이 완료되기까지, 즉 과학자가 자연을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깨우치기까지 새로운 사실은 결코 과학적 사실이 되지 못한다.

 

 

관찰과 개념화, 사실과 이론에의 동화, 이 두 가지가 발견 과정에 밀접하게 얽혀 있다면, 발견은 하나의 과정이며 시간이 소요되어야만 한다. 다만 관련되는 개념적 범주가 모두 미리 갖추어진 경우에 한해서, 그것을 발견하는 일과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 함께 즉각적으로 한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발견된 현상이 새로운 종류가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제시된 견해들이 진리임을 확신하지만, .... 오랜 세월 동안 나의 견해와 정반대의 관점에서 보아왔던 다수의 사실들로 머릿속이 꽉 채워진 노련한 자연사학자들이 이것을 믿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는데, 편견 없이 이 문제의 양면을 모두 볼 수 있을 젊은 신진 자연사학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 다윈, <종의기원>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 Max Planck, <과학적 자서전(Scientific Autobiography)>

 

 

과학의 발전은 직선적인 것이라고 말하기가 힘들어진다.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것은 덜 좋은 것에서 더 좋은 것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의 변화이다. 과학의 발전은 세상에 대한 절대적 진리를 향해서 누적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단절적인 변화를 연속적으로 겪는다. 이는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진화론과 유비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치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진화가 미리 설정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가 아니듯이, 과학의 발전도 궁극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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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수 없는 부나 영원한 시간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 행복할까? 삶은 부족하거나 결핍 가운데 충만함을 느끼기도 하고, 여러 제약과 제한 속에서 열정과 의미, 가치를 느끼기도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각자에게 있으며, 가장 큰 원칙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본문발췌]

 

 

나는 열정이 있는 삶을 원한다.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유롭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 인생이라는 짧은 여행의 마지막 여정까지, 그렇게 철이 덜 난 그대로 걸어가고 싶다. 내 삶에 단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그렇게 사는 게 나다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내가 좋다. 자유로움과 열정, 설렘과 기쁨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가져다 쓰자.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사람마다 인생을 다르게 산다. 평생 공부하는 사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돈을 버는 데 골몰하는 사람, 일만하는 사람, 권력을 쫓는 사람, 신을 섬기는 사람 등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삶이 있다. 어느 것이 더 훌륭한지 가늠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것이라면 어떤 삶이든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자유의지로 만들어낸 삶이 아니면 훌륭할 수 없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상상해보았다. 과연 행복할까? 그런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영생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말살한다. 영원히 산다면 오늘 만난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와 교감, 함께한 일들이 의미가 없어질 것만 같다. 그 모든 것이 다 굳이 오늘 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일이 된다. 어디에도 굳이 열정을 쏟아야 할 필요가 없다. 오늘 다하지 못하는 일은 내일 하면 그만이다. 오늘 무엇인가 잘못해도 상관없다. 다음에 다르게 하면 된다. 영생은 삶을 시간의 제약에서 해방시킨다. 그런데 시간이 희소성을 잃으면 삶도 의미를 상실한다. 유한성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든 것들이 무한 반복의 쳇바퀴를 도는 지루한 일상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 죽을 수 없다면 삶은 형벌이 될 것이다. 너무나 간절하게 영생을 원한 나머지 그것을 구하는 일에 몰두하느라 유한한 인생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환희와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는 영생을 원하지 않는다. 단 한 번만, 즐겁고 행복하게 의미 있게 살고 싶을 뿐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철학자 밀의 주장이다. 그냥 이 구절을 읽으면 그저 옳은 말로 보인다. 하지만 인생은 너무 짧은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그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그렇다. 내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누가 시키는 대로 또는 무엇인가에 얽매어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의 모든 순간은 죽음이라는 운명과 대비할 때 제대로 의미를 드러낸다.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까? 잘 죽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혼자 이런저런 대답을 생각해본다. 답을 꼭 찾아야 할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남은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다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이가 많이 든 후에도 철학적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킨 예외적 인물들은 공통점이 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젊은 사람들과 수평적으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나이가 많이 들어도 변함없이 개방적으로 생각하며 유연하게 행동한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음을 황홀하게 느끼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진정하고 싶은 것인가? 내 삶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는가?'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삶의 존엄도 없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존엄한 것은 '가치value'를 따질 수 없다. 어떤 것의 '가치'는 사람들이 가치를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며 얼마만큼 높게 평가하는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도덕적 차원을 가진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선택을 나타내는 것만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인간다움humanity, 존엄성dignity이 그런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의지free will이다. 살든 죽든,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휠체어를 타든 목발을 짚든 지팡이를 짚든 간에 그 삶은 언제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사라지면,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깨닫게 되면 그때가 죽을 때인 거지요. 전 지금처럼 살아가는 시간이 과연 저에게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많이, 아주 많이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고통은 아무 가치가 없고 제 고통의 원인 역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제때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면 그 아픔은 인간적인 수준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죽는다는 건 단지 그런 거예요. 태양이 제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를 새겨두는 것처럼 각자 가지고 있는 좋은 추억을 이 세상과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에 남겨두는 것, 잠드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원망도 없이 그저 피곤에 지쳐 고요하고 평온하게 눕는 겁니다. 그러나 죽음을 그렇게 느끼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인간적이길 바란다고 할 만큼 굉장히 자유롭고 선해야 겠지요. 안락사, 또는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려면 진정으로 인간과 삶을 사랑할줄 알아야 하고 선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 라몬 삼페드로.

 

 

훌륭함, 존엄, 품격이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치이고 쓸모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타인의 상대적 가치 평가이다.

 

 

행복은 사람에서 기쁨을 느끼고 자기 삶에 만족하여 마음이 흐뭇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언제 이런 흐뭇함을 느끼게 되는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행복을 느낀다. 

 

 

홍사중 선생은 아름답게 나이를 먹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일흔여덟에 쓴 수필집에서 그는 밉게 늙는 사람들의 특징을 정리했다. -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

  • 평소 잘난 체, 있는 체, 아는 체를 하면서 거드름 부리기를 잘 한다.

  • 없는 체 한다.

  • 우는 소리, 넋두리를 잘 한다.

  • 마음이 옹졸하여 너그럽지 못하고 쉽게 화를 낸다.

  •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한다.

  • 남의 말을 안 듣고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홍사중 선생이 예시한 '밉상짓 목록'은 젊은이들에게도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 된다. 만약 다음과 같이 정반대로만 한다면 노인이든 청년이든 똑같이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

  • 잘난 체, 있는 체, 아는 체 하지 않고 겸손하게 처신한다.

  • 없어도 없는 티를 내지 않는다.

  • 힘든 일이 있어도 의연하게 대처한다.

  • 매사에 넓은 마음으로 너그럽게 임하며 웬만한 일에는 화를 내지 않는다.

  •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신중하게 행동한다.

  •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남의 말을 경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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