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생각없이, 성급하게 내뱉은 말에 후회한 적이 많다. '두二 번 생각한 다음에 천천히 입口을 열어야 비로소 말言이 된다'는 저자의 풀이처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줄이고 말이 필요할 때는 듣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며 조심하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 

 

 

[본문발췌]

 

 

수준이나 등급을 의미하는 한자 품品의 구조가 흥미롭다. 입 구口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품격이 드러난다. 나만의 채취, 내가 지닌 고유한 인향은 내가 구사하는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말의 총량이 듣는 총량보다 적으면 다들 불안해 한다. 말을 많이 해야 타인에게 인정받을 거라는 믿음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말을 적게 하면 공연히 손해 보는 것 같은 박탈감에 시달린다.

 

 

휴가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바캉스vacance는 '텅 비어 있다'는 뜻의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유래했다. 바캉스는 무작정 노는 게 아니라 비워내는 일이며, 진정한 쉼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쉼이 필요한 것은 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그럴싸한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게 대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말을 잘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때에 말을 거두고 진심을 나눌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숙성되지 못한 말은, 오히려 침묵만 못하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은 대게 말이 아닌 침묵 속에 자리하고 있다.

 

 

와타나베 준이치는 둔한 감정과 감각이라는 뜻의 '둔감鈍感'에 힘을 뜻하는 역力 자를 붙인 '둔감력'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곰처럼 둔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인이 어떤 일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지를 지각하고 적절히 둔감하게 대처하면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둔감력은 무신경이 아닌 복원력에 가깝습니다."

 

 

역지사지를 실천하려면 내가 서 있는 곳에 잠시 벗어나 상대방이 처한 공간과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조금 다른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기존의 관점을 내던져 '관점 전환perspective taking'을 시도해야 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삶은 그러한 것 투성이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 관점을 다른 방향으로 급격하게 바꾸는 건 쉽지 않으므로 관점의 중심을 이동해 비스듬히 기울여봄직하다. 그애야 육안肉眼이 아니라 심안心眼을 부릅뜰 수 있다.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새로운 시선과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관점을 기울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올지 모른다. 아니, 그때 비로소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말을 의미하는 한자 '언言'에는 묘한 뜻이 숨어 있다. 두二 번 생각한 다음에 천천히 입口을 열어야 비로소 말言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품격이 있듯 말에는 나름의 품격이 있다. 그게 바로 언품이다.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 성대중이 당대의 풍속을 엮은 잡록집인 <청성잡기>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내부족자 기사번 심무주자 기사황內不足者 其辭煩 心無主者 其辭荒", "내면의 수양이 부족한 자는 말이 번잡하며 마음에 주관이 없는 자는 말이 거칠다"

 

 

인생은 작은 오해와 인연을 맺거나 풀어가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다만 인생이라는 강은 단번에 건너뛸 수 없다. 사귐도 그렇다. 크고 작은 돌을 내려놓고 그것을 하나씩 밟아가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차근차근 건너가야 한다. 삶과 사람 앞에서 디딜 곳이 없다고 조급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인생과 관계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이다.

 

 

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지는 행위는 소멸도 끝이 아니다. 의미 있게 패배한다면 그건 곧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쌓은 편견의 감옥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본인의 머리와 마음속에 있는 것만을 유일한 정답으로 간주하고 나머지는 무조건 오답으로 치부하는 경우다. 편견의 감옥이 높고 넓을수록 남을 가르치려 하거나 상대의 생각을 교정하려 든다. 이미 정해져 있는 사실과 진실을 본인이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믿는다. 상대의 입장과 감정은 편견의 감옥 바깥쪽에 있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지적 과잉의 시대,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불평과 지적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듯하다. 쓴소리와 하나가 되어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경우도 있다. 그러나 타인의 허물을 콕 집어서 가리키는 지적의 말은 자칫 독설로 변질할 수도 있다. 독설은 글자 그대로 혀舌에서 나오는 독毒이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독도 있지만, 대개 몸과 마음을 망치고 독을 흩뿌린 사람의 혀마저 망친다. 착한 독설, 건설적인 지적을 하려면 나름의 내공이 필요하다. 사안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통찰은 물론이고 상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말 속에 배어 있어야 한다. 말 자체는 차갑더라도, 말하는 순간 가슴의 온도만큼은 따뜻해야 한다.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비판의 한자를 들여다보며느 미약하나마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비평할 비批는 손 수手 변에 견줄 비比가 합쳐진 글자다. 사물이나 사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며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게 제대로 된 비판이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순간 상대를 가리키는 손가락은 검지뿐이다.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한다. 세 손가락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검지를 들어야 한다. 타인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내가 떳떳한지 족히 세 번은 따져봐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다. 현재를 살면서 틈틈이 과거라는 거울을 들여다봐야 하고, 때로는 과거라는 사슬에 묶여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아닌지도 돌아봐야 한다. 과거는 벽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한다.

 

 

대화를 나눌 때 상대와의 공통점을 찾는 게 그리 특별한 기술은 아닐 것이다. 필요한 건 테크닉이 아니라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인지과학에서는 인간의 사고 유형을 크게 '굳은 사고hard thingking'와 '부드러운 사고soft thinking'로 분류한다. 전자는 어떤 대상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측정하는 사고 체계이며, 후자는 상대를 유연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다. 가령 "고양이와 냉장고의 공통점은 뭘까요?" 하는 질문에 굳은 사고를 하는 사람은 "가전제품과 살아 있는 동물한테 공통점이 있어?"라고 되물을 것이다. 그러나 부드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둘 다 색깔이 다양하고, 부엌을 좋아하고, 꼬리 비슷한게 달렸지요."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현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유연한 덕분이다.

 

 

중국 송나라 때 고서 <통감절요>에 "해납백천 유용내대海納百川 有容乃大"라는 글귀가 있다. 직역하면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고 이 대문에 (바다는) 더욱 커진다"는 뜻이다. 바다의 본질이 그러하다.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넓고 깊어서가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물을 끌어당겨 제 품속에 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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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는 정지하면 역할을 다하지 못하지만, 사람은 잠깐의 쉼표를 통해 새로운 변화와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멈춤으로 늦어질 것 같지만, 멈춰서 있는 동안 재정비하고 주변과 상황을 둘러보며 지름길을 찾아 원하는 목적지에 더 빨리 갈지도 모른다.

 

 

[본문발췌]

 

 

인생에서 두려워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이해의 대상일 뿐이다. 지금은 더 많은 걸 이해해야 할 때다. 우리의 두려움을 줄일 수 있도록. - 마리 퀴리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세 가지 힘, 즉 기술, 세계화, 기후변화는 한꺼번에 가속화되고 있다. 그에 따라 우리 사회와 일터, 지정학은 뒤바뀌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을 새롭게 구상할 필요가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선형적인 세계에 삽니다. 거리와 시간, 속도가 직선인 세계지요." 그러나 오늘날 기술 발전은 '지수적인 곡선'을 그린다. Ibm의 인지 솔루션 리서치 담당 부사장 존 켈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유일하게 지수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밟거나 갑자기 브레이크를 세게 밟아 속도를 줄일 때뿐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상당히 불확실하고 불편하게 느끼지요."

 

 

당신이 어떤 기계의 정지 버튼을 누르면 기계는 멈춰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정지 버튼을 누르면 무언가를 시작합니다. 당신은 멈춰 서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고, 당신의 전제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며, 무엇이 가능한지 다시 구상하기 시작하고, 무엇보다 당신이 가장 깊이 간직하고 있는 믿음을 다시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그 일을 하고 나면 더 나은 길을 재구상하기 시작할 수 있지요. - 도브 사이드먼

 

 

혁신의 주기가 갈수록 짧아지고 적응하는 법을 배울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가끔씩 불안정해지는 것과 끊임없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의 차이라고 텔러는 말했다. 정적인 안정성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는 우리가 새로운 유형의 안정성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유형의 안정성은 역동적 안정성dynamic stability이어야 합니다. 자전거를 탈 때와 같이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지만 일단 움직일 때 더 쉬워지는 존재의 방식이 있지요. 이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인류는 이런 상태로 존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신기하게도 다시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자면 상당한 재학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자녀들에게 역동적 안정성을 얻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있지요."

 

 

컴퓨터과학은 급속히 발전할 것이며, 의학은 그것과 함께 발전할 겁니다. 이는 공진화이지요. 우리는 서로 도울 겁니다. 나는 내가 환자가 되고 컴퓨터가 간호사가 되어 우리 연구생들과 함께 검사실에 모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상황을 마음속에 그려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모든 것이 의학을 바꿔놓고 똑똑하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꿀 것이라고 켈리는 말했다. "21세기에는 모든 답을 안다는 것이 어떤 이의 지력을 나타내주지는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늘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지성의 표상이 될 것입니다."

 

 

나는 변화가 가속화하는 이유가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들이 그토록 강력해진 까닭과 비슷하다고 본다. 컴퓨터는 정보를 처리하는 용량을 늘릴수록 주어진 일을 더 빨리 수행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더욱 집중적으로 아이디어 를 교환할수록 더 빠르게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무어의 법칙이 분석 기능을 더 빨리 수행하기 위해 논리 단위를 엮는 일과 관련된 것이라면 늘어난 소통은 창조적인 일을 더 많이 수행하기 위해 창조 단위(즉, 인간)를 엮어준다. - Eric Leuthardt

 

 

'검은 코끼리black elephant'는 '검은 백조black swan'와 '방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를 합성한 말이다. 검은 백조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매우 드물고 가능성이 낮고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뜻하며, 방 안의 코끼리는 모든 사람에게 뚜렷이 보이지만 아무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문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검은 코끼리'는 언젠가 검은 백조와 같이 엄청난 파장을 낳을 것이라는 걸 분명히 알면서 해결하지 않는 문제를 가리킨다. 애덤 스웨이든은 나에게 말했다. "지구 환경에는 지금 한 무리의 검은 코끼리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중 네 가지만 들자면 글로벌 온난화, 삼림 파괴, 대양의 산성화, 그리고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는 대규모 멸종이 그것이다. "그런 것들이 나타나면 우리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검은 백조라고 주장하겠지만 사실은 지금도 아주 잘 보이는 검은 코끼리이지요." 우리는 단지 필요한 규모와 속도로 그 문제들을 다루지 않고 있을 뿐이다.

 

 

도브 사이드먼은 이사야 벌린의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의 개념에 영향을 받아서 자유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사이드먼은 이제 세계 어디에서든 사람들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뭔가로부터 '벗어날 자유freedom from'를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독재자로부터 자유뿐만 아니라 시시콜콜 간섭하는 상사로부터의 자유, 광고를 보라고 강요하는 네트워크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동네 가게로부터의 자유, 지역 은행으로부터의 자유, 호텔 체인들로부터의 자유가 뭔가로부터 벗어날 자유다. 그러나 정치에 관한 한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유는 '행동할 자유freedom to'라고 사이드먼은 주장한다. 이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자유를 말한다. 그들의 자유는 합의를 이루기 위한 선거, 헌법, 법의 지배, 그리고 의회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는 많은 지역에서 '벗어날 자유'는 확보했지만 '행동할 자유'는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지역에서 혼란이 확산되면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이드먼은 리비아나 시리아, 예멘, 또는 호스니 무라바크 대통령 추락 이후의 이집트와 같은 나라들이 벗어날 자유는 확보했지만 행동할 자유는 얻지 못한 점에 주목해 그 차이를 '자유의 불평등'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불평등일 것이다. 사이드먼은 이렇게 지적했다. "'벗어날 자유'를 얻는 건 신속하고 격렬하고 극적으로 이뤄집니다. 그러나 '행동할 자유'를 얻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요. 이집트의 파라오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유대인들은 법률과 도덕률을 만들어 행동할 자유를 갖게 되기 전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변화는 자연의 기본 법칙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어난 변화는 개인과 기관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따르면 살아남는 것은 가장 지능적인 종도, 가장 강한 종도 아닙니다. 살아남은 종은 자신이 처한 환경의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고 맞춰갈 수 있는 종입니다. 이러한 이론적인 개념을 우리 개인에게 적용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문명은 자신이 처한 물리적, 사회적, 정치적, 윤리적, 정신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는 문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리언 C. 메긴슨Leon C. Megginson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심각한 질병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주저 없이 이렇게 답한 것이다. "그것은 암이 아닙니다. 심장병도 아니지요. 그건 바로 '고립'입니다. 오늘날 그토록 많은 사람이 경험하는 고립은 우리 삶에서 가장 큰 병리현상입니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우리는 인류 역사상 기술적으로 가장 잘 연결된 세대다. 하지만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고립감을 느낀다. 이는 앞서 머시가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부족한 연결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라고 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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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사진보다 완성되는 시간이 더 길고 구체적, 현실감이 떨어질 수 있지만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묘사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고 추상을 통해 숨겨진 의미를 담을 수 있다. 그리고 동일한 것을 보더라도 작가에게 받아들여지는, 표현되어지는 이미지의 형태는 다르다.  

 

 

[본문발췌]

 

 

모든 픽쳐는, 뭔가를 관찰하고 그것을 설명한 것이다.

 

 

픽처를 논할 땐 그것을 만드는 방법에 근거해서 범주를 나누곤 한다. 회화, 드로잉, 모자이크, 사진, 영화, 애니메이션, 카툰, 코믹 스트립, 콜라주, 게임 등으로 말이다. 혹은 바로크, 고전주의, 모더니즘 하는 식으로, 스타일이나 시기에 따라 그것을 구분하기도 한다. 이들 중 일부는 미술로 간주되고, 일부는 그러지 못한다. ... 픽쳐의 역사는 미술사와 겹치지만, 그 둘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미술은 묘사라고 간주될 수 없는 많은 것(예컨대, 장식이나 추상 같은 것들)을 포함하는 한편, 다른 종류의 이미지들은 배제한다.

 

 

모든 묘사는 하나의 사물을 그와는 다른 것으로 보는 인간의 능력에 기반을 둔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셰익스피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떨 때 우리는 용처럼 생긴 구름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비행운이나 곰이나 사자처럼 보인다."

 

 

플라톤이 볼 때, 회화와 시는 둘 다 일종의 모방(mimesis), 혹은 재현이었다. 철학자의 입장에서 이것은 논리와 수학, 그리고 기하학에 비해 대단히 저급한 수준의 지식이었다. <국가>에서, 본래는 플라톤의 스승이지만 그의 저서에서는 플라톤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재현 작업들은 진실에서 세 단계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을 다룬다." ... 그림은 실제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외양만을 묘사하는 것이다. 물에 비친 막대기는 우리 눈엔 굽어 보인다. 하지만 굽은 막대기는 진실이 아니다.

 

 

하나의 사진 속 모든 요소는 동시에 촬영된 것이다. 하지만 회화는 그렇지 않다. ... 그렇기에, 대개는 사진 하나를 그렇게 오래 바라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진은 1초에 훨씬 못 미치는 순간을 보여 주며, 그러므로 사진을 통해서는 대상을 복층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 그림에서는 겹겹이 쌓인 시간이 드러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진보다 회화가 훨씬 흥미롭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만약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은 당신의 기억과 다르다.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동일한 것을 동일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없으면 공간도 없다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이 별개로 존재하며,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과 공간은 서로 같은 대상의 다른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시간과 공간은 하나다. 하지만 우리는 공간이 전혀 없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시간이나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시간이 한정되어 이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시간에 신축성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회화는 시간과 공간의 예술이다.

 

 

사진은 그 모든 것을 (단일 시점의 렌즈를 통해, 짧은 찰칵 소리로) 한 번에 포착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는 장면을 관찰하고 그것을 통해 공간을 만들어 내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르네상스 유럽의 원근법에는 소실점이 있지만, 일본이나 중국 회화에는 소실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한 지점에서만 바라보는 관점은, 실제로 우리가 풍경을 감상하는 방식과 다소 차이가 있다. 풍경을 감상할 때 우리는 계속 움직인다. 그런데 만약 그림에 소실점을 넣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버린다. 그렇게 되면, 그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라고 하기 힘들다. 

 

 

그림을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그림에 대입하지만, 영화와 비디오 아트를 볼 때는 영화와 비디오 아트의 시간이 우리에게 대입된다.

 

 

존 로크의 <인간지성론>(1690)은 18세기 앵글로색슨계 철학의 기초 문헌이다. 이 책에서 로크는 "관념들(ideas)"과 캄라 옵스큐라(로크의 표현에 따르면, 암실)를 통해서 본 이미지들(images)을 탁월하게 비교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관념이란 생각을 구성하는 벽돌이다). "그처럼 그림들이 암실로 들어와서 거기 남아, 필요할 때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정리될 수 있다면, 그 방은, 모든 시각 대상과 그것들에 대한 관념에 관련된, 인간의 지성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로크의 철학에 따르면, 마음 속에는 "관념들"이 쌓여 나가며, 이 관념들은 사진(즉, "외부 현실과 시각적으로 유사한 것")과 거의 같다. 그렇기 때문에, 카메라 이미지는 현실의 지표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픽처들(특정 종류의 픽처들, 즉 광학적으로 투영된 픽처들)을 봄으로써 세계에 대해 배워 나갈 수 있다. 이 픽처들은 "외부 물질에 대한 관념들(ideas of things without)"을 제공해 준다. 즉, 그들은 현실을 묘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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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속에 피 터지게 싸울 것인가? 다른 생각과 접근으로 다른 종류의 문제를 제기해 신선하고도 혁신적인 방법으로 기회와 위험을 보고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것인가?

 

 

[본문발췌]

 

 

지나치게 경쟁자를 의식해 그들보다 빠르고 싸게 하려고만 하면, 즉 위와 아래에 보이는 경쟁자들을 이기는 데만 안간힘을 쓰려고만 노력하면 자칫 전략의 본질을 망각하게 됩니다. 전략의 본질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고객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가치를 만드는 것에서 출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경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경쟁을 불식해야 합니다 기존의 사고방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확장해야만 지금의 레드오션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사실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존재 그 자체로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 시가 됨으로써 인생의 여정 그리고 인생의 아름다움에 약간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블루오션 시프트의 세 가지 핵심 요소

  • 블루오션관점. 사람들의 시야를 넓히고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 블루오션 관점을 채택해 시야를 넓히고, 기회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바꾸는 것. 새로운 가치-비용의 경계를 연 조직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다시 말해 이들은 현재 시장에서의 경쟁에서만 집중하는 조직과 달리, 다른 대상을 생각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문제를 제기해 신선하고도 혁신적인 방법으로 기회와 위험을 보고 이해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고객에게 다른 종류와 다른 정도의 가치를 제공하는 방식을 모색한다.

  • 시장 창출 방법론과 지침. 사람들의 창의적 역량을 형성하고 새로운 가치-비용의 경계를 연다. 시장을 창출하는 블루오션 관점을 적용할 실질적인 도구와 적절한 가이드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로써 확실한 고객 가치를 제공하는 새로운 상품을 가지고 신규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 단계적으로 기존 가치-비용 경계를 돌파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핵심 질문들로 당신을 안내한다.

    • 당신은 당신의 사업 혹은 당신의 기업이 몸담고 있는 시장의 명시적 암묵적 가정들에 어떤 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는가?

    • 당신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비고객의 오션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는가?

    • 당신은 경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새로운 가치-비용의 경계를 열기 위해 시장의 경계를 어떤 식으로 체계적으로 재정의할 수 있는가?

    • 당신은 저비용으로도 차별성을 지닌 상품을 어떻게 만들어서 제공하는가?

    • 당신 조직의 전략적 비전을 시장에 접목했을 때 수익을 창출할 사업모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 과정상의 인간다움. 사람들이 효과적인 실행을 위한 과정을 받아들이고 이를 추진하도록 자신감을 고취시킨다. 우리가 '인간다움'humanness이라 부르는 인본주의적 과정을 갖는 것이다. 효과적인 실행을 위해 사람들의 자신감을 고취시켜서 스스로 실행과정을 이끌어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블루오션 시프트 추진 과정은 모든 단계에서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사람들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자신감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목표를 성취한다. 그 방식이란 '세분화'atomization, 체험에 의한 '직접적인 발견'firsthand discovery, 전 과정에서의 '공정한 절차'fair process이다.

 

구매자들은 간편하고, 사용하기 쉽고, 즐거움과 원하는 바를 주기 때문에 이를 좋아한다. 즉 구매자들은 기술이 고객가치의 획기적 향상에 본질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제품과 서비스에 열광한다.

 

 

CRM 소프트웨어와 영국의 자선모금 산업은 분명 다른 세계에 속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둘 사이의 두드러진 유사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산업의 참여자들이 너무나도 자주 서로를 답습하는 모습을 본다. 그들은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고, 같은 대상에 투자하며, 산업의 기존 고객에게 집중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범용화하고 산업의 규모를 제한한다. 둘째, 산업 내 참여자들이 기존 시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만, 사실상 잠재적 시장은 기존 시장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기존 시장의 경계를 주어진 것으로 놓고 행동한다. 사실 이러한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고 우리 생각의 산물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생각할 때, 우리는 이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끝으로, 각 업계에서 조직들이 전략의 기본을 재정의함으로써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차별화와 저비용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조직에서 이것을 어떻게 실행하는가에 달려 있다.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을 듣는데 ... 그러나 이는 너무 좁은 견해다. 굉장히 간단한 사실 하나가 삶의 시야를 넓혀줄 것이다. 인생이라고 부르는 당신 주변의 모든 것은 당신보다 별로 똑똑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 만들었다. 당신은 모든 것을(인생을) 바꿀 수 있고, 또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당신 자신의 것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리고 인생의 어떤 곳을 찔렀을 때 다른 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이해하는 순간 ...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당신 스스로 인생을 달라지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인생이 저기 있고 당신은 단지 그 속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다. ...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의 삶은 결코 이전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얻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배운 것의 가치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아는 것(그리고 모르는 것)을 직접 발견하도록 하는 것은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가치를 인정하도록 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879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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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벽두부터 코로나19가 전세계를 엄습하여 누군가는 질병과 싸우고, 누군가는 그들의 치료를 돕고 더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반 대중 또한 감염병의 공포와 싸우고 있는 와중에 저 멀리 떨어져서 코로나19 전쟁에 참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헐뜯고 비방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 재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어떠한 노력이나 대안도 내놓지 않는다.  오로지 요사스런 말과 기사로 대중을 홀리고 감염병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의 힘을 빼면서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채우려는 데 열중하고 있다.

 

얼마전에 읽었던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스페인 내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썼던 글 중 "모든 전쟁이 똑같다. 병사들은 전투를 하고, 기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진정한 애국자라는 사람은 잠깐의 선전 여행을 제외하면 전선 참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는 코로나19와 싸우는 사람들과 그들의 뒤에서 비방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설명해주고 있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내가 전선에서 알게 된 통일사회당 의용군 병사들이나, 이따금씩 만나는 국제 여단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나 배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일은 후방의 기자들이 담당했다. 우리에게 반대하는 팸플릿을 쓰고 신문에서 우리를 헐뜯는 사람들은 모두 안전한 집에, 혹은 기껏해야 발렌시아의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다. 총알과 진창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이었다. 당 사이의 불화에서 비롯된 비방은 물론이고 모든 일반적인 전쟁 선전 활동, 즉 탁자를 치며 열변을 토하거나, 과장된 영웅담을 늘어놓거나, 적을 헐뜯는 일들 역시 보통 모두 싸우지 않는 사람들, 많은 경우 싸우느니 차라리 백 킬로미터 가량 먼저 달아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전쟁에서 우울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좌익 언론도 우익 언론만큼이나 똑같이 거짓되고 부정직하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었다는 점이다." --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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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자존감을 높여주고,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는 사회적 관계를 좋게 유지시키다.

 

 

믿음(信), [명사]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

종교 =신앙(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ㆍ사랑ㆍ의뢰심을 갖는 일)

 

[비슷한 말] 신망, 신뢰, 신념, 신앙, 신용

[반대말] 의심, 불신

 

(네이버 영어사전) 1.belief,confidence, (신뢰) trust,faith   2.(신앙심) (religious) belief,faith

 

 

[글과 책 속에 쓰인 '믿음'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이기주, <말의 품격>

말의 총량이 듣는 총량보다 적으면 다들 불안해 한다. 말을 많이 해야 타인에게 인정받을 거라는 믿음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말을 적게 하면 공연히 손해 보는 것 같은 박탈감에 시달린다.

 

믿음을 의미하는 한자 '신信'에는 깊고 오묘한 뜻이 담겨 있다. 모름지기 사람人은 자신이 한 말言을 지켜야 신뢰信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P. G. 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두려움은 믿음이 약해졌다는 신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두려운 까닭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람이 두려운 까닭은 그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믿기만 한다면 인생은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방을 믿어주기만 한다면 그의 말과 행동이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나에 대한 불신은 극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치유해야 할 질병입니다. 이것은 감기와 같습니다. 감기는 특별한 약이 없습니다. 내 몸의 항체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감기를 대항하는 처방입니다. 감기처럼 불신도 특별한 처방이 있거나, 효과가 뛰어난 항생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한 믿음으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1988.11) 詩作 메모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중에서

 

비로소 너희가 전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 듯이 믿음은 부재(不在) 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쉴 것이니,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 많지 않으랴. - '포도밭 묘지 2'

 

 

이병률, <끌림>

역사가 길지 않은 믿음은 가볍다. 그 관계엔 부딪침만 있고 따분함만 있을 뿐이며 혼자인 채로 열등할 뿐이며 가벼울뿐더러 균형마저 잃는다. 심연은 깊은 못이나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그 한가운데 존재한다. 사람을 믿지 않으면 끝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끝이고 더 이상 아름다워질 것도 이 땅위에는 없다.

 

 

최인철, <굿 라이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채움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비움으로 채우려고 한다. 시간과 돈의 여유가 없어서 나누어줄 수 없다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하소연할 때, 행복한 사람은 나누지 않으면 시간과 돈의 여유는 갈수록 없어진다는 믿음으로 나눔을 실천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수업>

인내심의 열쇠는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믿음, 인간이 모르는 큰 계획이 존재한다는 신뢰를 키우는 데 있습니다.

 

 

류쉬안, <심리학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신뢰를 얻길 갈망한다. 관계 맺기가 쉬워질수록 신뢰의 중요성은 더욱 커져간다. 심리학에서는 신뢰를 '인지적  신뢰Cognitive Trust'와 '정서적 신뢰Affective Trust'로 분류한다. '인지적 신뢰'란 상대가 자신을 도와 원하는 결과를 얻게 해주리라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인지적 신뢰는 상대에게 기대 자신이 갈망하는 무언가를 얻을 때 생겨난다. 그러나 정서적 신뢰는 이와 다르다. 정서적 신뢰는 상호 교류와 서로에 대한 호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일체'감이 반영된다. 다시 말해서 상대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고 정서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길 때 정서적 신뢰가 쌓인다. 

 

 

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지음,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인간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자 위대한 장점은 신뢰다. 자신의 믿음이 악용될 거란 두려움이 없다면, 다시 말해 타인을 전적으로 믿게 된다면, 모두의 인생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돈과 관련된 경제생활도 훨씬 편해질 것이다. 신뢰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신뢰 역시 무수히 많고 자잘한 사람 관계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신뢰에 더 많이 의존하고 법에 덜 의존할수록,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은 더 잘 작동하는 법이다. ... 타인에 대한 믿음을 입증하느라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들일 필요가 없어진다면, 세상은 정말 훨씬 더 살기 편할 것이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비극은 어른들이 자신이 잘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할 시간과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가능성과 더 많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단지 많은 이들이 이런 부분을 간과하여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주어진 현실을 절대 뒤집을 수가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현실을 바꾸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건 스스로에 대한 약한 믿음일 뿐이다.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당신의 믿음을 맹신하지 않는 것. 당신이 100% 옳다는 확신을 내려놓고, 언제든 실수하고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기존에 갖고 있던 믿음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당신은 독선주의 허세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순간, 우리는 그 의미에 집착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뇌가 만든 의미 쪽으로 치우쳐 그걸 놓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만든 의미에 모순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할 때조차 그걸 무시하고 기존의 믿음을 고수한다.

 

불확실성은 모든 진보와 성장의 뿌리다. 옛말에 이르길,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고 했다. 먼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무지를 인정할수록 배울 기회가 더 많아진다. 우리의 가치관은 불완전하다. 자신의 가치관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천만한 독단적 사고방식에 빠져 허세를 부리고 책임을 회피하기 십상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먼저 여태까지의 행동과 믿음이 잘못되고 비효율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흔쾌히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인생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검토하고 그걸 더 나은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반드시 현재의 가치관을 의심해봐야 한다. 심혈을 기울여 현재의 가치관을 분석하고, 그 안에 있는 오류와 편견을 들춰내고, 그것이 어째서 세상과 조화되지 않는지 밝혀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걸 인정해야 한다. 왜냐면 우리의 무지가 우리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유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자유는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기회를 주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의미 있고 중요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수많은 선택지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자유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를 선택해 몰입해야 한다. 하나의 장소, 하나의 믿음, 하나의 사람을 말이다.

 

 

박노해, <다른길>

씨알을 심는 농부는 기다림을 산다.

기다림은 씨앗이 땅에 심기었다는 믿음,

지금 무언가 시작되었다는 믿음,

어둠 속 대지에서 하루하루 커나간다는 믿음.

나에게 진정 간절한 기다림이 있는가.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오직 희망이 있을 뿐.

 

 

파울로 코엘료, <아크라 문서>

패배자는 패배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선택한 사람이다. 패배는 특정한 전투나 전쟁에서 지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는 아예 싸우러 나가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패배했다고 느낀다. 실패는 애초에 무언가를 꿈꿀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그러면 실망도 없을 것이다'가 실패의 표어이기 때문이다. 패배는, 두렵지만 열정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또한 패배는 용감한 사람들의 것이다. 용감한 사람만이 패전의 명예와 승전의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는 만큼 받는 데 익숙해 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주는 만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접어야 한다.

사랑은 믿음을 보여주는 행위이지 교환 행위가 아니다.

사랑은 열쇠고리 맨 끝에 달린 마지막 열쇠다. 그 열쇠를 써야 비로소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제러미 리프킨, <3차 산업혁명>

경제는 언제나 신뢰의 게임이다. 우리는 상업과 교역을 금이나 은이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그보다 더 중요한 예비 자원인 '대중의 신뢰'가 뒷받침해 왔다. 이 믿음이 강건할 때 경제는 번영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밝다. 대중의 믿음이 깨지면 경제는 추락하고 미래는 어둡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무엇보다도 혁명과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갑자기 평등과 자유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느낌이 있었다. 인간은 자본주의 기계의 톱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데이비드 이글먼, <더 브레인>

의식적인 당신은 당신의 뇌 활동에서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행동, 믿음, 편견은 모두 당신의 뇌 연결망들에 의해 조종되며, 당신은 그 연결망들에 의식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박종훈, <부의 지각변동>

보다 큰 문제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마저 꺾이고 있다는 점이다.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부모의 소득격차가 자녀의 성적이나 성공의 결정적 원인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가난해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값비싼 사교육에 의존하면서 부모의 소득 수준이 자녀의 성적까지 결정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구원으로 가는 결정적인 것은 믿음이나 희망이 아니라 오로지 올바른 방법 뿐이다. 구원의 가능성을 믿지만 잘못된 실천 방법을 취하는 사람은 "우유를 좋아하면서 쇠뿔에서 우유를 짜는 사람과 같다." "신념을 갖고 그렇게 하든 신념 없이 그렇게 하든, 그는 우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유를 얻는 올바른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젖에서 우유를 짜는 사람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어도 우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적절한 방법이 구원으로 이끌어주며, 이때 믿음은 부차적인 의미를 지닌다. (폴커 초츠, <붓다>, 김경언 옮김, 한길사, 1997, 116쪽)

 

 

손미나,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인생은 모든 순간이 그 고유의 가치가 있는 거란다. 겉으로 보이거나 소유하고 있는 것들과 상관없이 의지를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며 그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단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대변동>

개인의 핵심 가치. 자아 강도와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요인은 핵심 가치core value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믿음을 뜻한다. 또 종교와 가족에 헌신하는 마음처럼 도덕률과 인생관의 기초를 이루는 것도 핵심 가치라 할 수 있다. 위기에 맞닥뜨리면 선택적 변화를 받아들일 때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핵심 가치를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끝까지 고수할 것인지 알아내야 한다.

 

경제적 불평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 다른 쟁점은 사회경제적 신분 이동, 즉 개인이 경제적 불평등을 극복하고 가난한 사람이 부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 다른 주요 민주국가의 국민보다 미국인은 '미국이 능력을 중시하는 국가'라고 굳게 믿는다. 따라서 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성공하고 보상받을 수 있는 사회가 미국이라는 게 미국 국민의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무일푼에서 부자로!'라는 미국의 이상으로 상징된다. 요컨대 미국인은 무일푼으로 미국에 이주한 사람도 능력과 근면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인의 이 소중한 믿음은 과연 진실일까? ... 다른 주요 민주국가와 비교할 때 미국에서 사회경제적 신분 이동 가능성은 낮지만, 가족 세대 간 상관관계는 더 높다. 예컨대 아버지가 자신의 세대에서 하위 20%에 속한 경우, 그 아들 역시 42%가 그 세대에서 하위 20%에 머물렀다. 반면 그렇게 가난한 아버지를 두고도 상위 20%까지 올라선 아들, 즉 무일푼에서 부자가 된 아들은 8%에 불과하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 두 부문의 비율은 약 26%(미국은 42%)와 13%(미국은 8%)이다.

 

 

장 도르메송,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인간은 공기나 빵을 필요로 하듯이 확실한 것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상상을 하고 인간은 믿는다. 종교적 믿음과 관계된 것을 표현할 때에만 믿는다라는 동사를 선택한 일은 매우 웅변적이다. 신자들은 믿는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은 과학이다. 그리고 과학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 그리고 과학의 영역이 멈추는 곳, 그곳에서는 믿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안다는 것보다 분명 열등하다. 사업에서, 정치에서, 기계 분야에서, 일상적인 사회 생활에서, 믿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다. 당신이 타야 할 기차가 8시 15분 전 기차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놓칠까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시험이나 콩쿠르를 치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믿는 것에 대한 질문은 주어지지 않는다. 아는 것에 대한 질문이 주어진다. 아드리아노플(터키 지명) 전투의 날짜, 시칠리아의 산물, 직삼각형의 성질이나, 질소의 성질은 믿음이나 견해의 영역이 아니라, 지식의 영역에 속한다. 모든 견해와 모든 믿음에는 모호한 면이 있다. 지식은 긍정적이다. 믿는 것은 불확실하다. 우리가 아는 것만이 진리라는 명칭에 걸맞다. 믿음은 부분적이고, 갈팡질팡하는, 간접적인, 근거 없는 지식이다. 지식은 의견의 불일치를 겪지 않는, 겨우 토론이나 겪는 믿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갈릴레오조차, 아니 특히 갈릴레오는 자신의 지식을 위해 죽을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을 위해 죽을, 실제로 믿음을 위해 죽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다. 신앙은 부조리한 가운데, 과학보다 강하고 과학보다 고결하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욱 참여적이다. 지시그이 영역에 속하는 진리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신앙만 없다면, 만물에는 나름의 모순이 있고 이성은 그것을 능가하기 힘들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자동차 리콜의 사례로 돌아가자. 만약 경영자가 불량부품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추다가 탄로가 날 때 받게 될 비난과 손실을 두려워해서 지진 리콜을 결정했다면 그것은 정언명령Ⅰ에 위배된다. 그러나 스스로 "결함이 있는 제품은 리콜한다"는 행동준칙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 따랐다면 정언명령Ⅰ에 부합한다. 하지만 스스로 세운 행동준칙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실천한 동기가 만약 리콜 비용보다 소비자의 믿음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크다는 이해타산이었다면 정언명령Ⅱ에 위배된다. 소비자를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의 욕구를 채우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연합정치가 지지를 받는 것은 국민들이 그 속에서 정치인의 책임의식을 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책임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믿음의 대상이 된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가장 중요한 세속주의의 가치는 진실이다. 단지 믿음이 아닌 관찰과 증거를 기반으로 한 진실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바보라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특정한 믿음을 위한 희생이 크면 클수록 신앙은 더 강해진다. 이것이 신비한 희생의 연금술이다. 희생적인 사제는 사람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다. 비도, 돈도, 전쟁의 승리도, 그보다는 무언가를 없애면 되다. 사람들이 고통스런 희생을 감수할 정도의 확신만 주면 그들은 덫에 걸려든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여러 해가 지나고 또 여러 편의 사랑에 관한 에세이를 접한 후에야 라비는 몇몇 다른 결론에 도달하고, 한때 그가 낭만이라 보았던 것 - 무언의 직관, 순간적인 갈망, 영혼의 짝에 대한 믿음 -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배워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서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가 추구하는 건 친밀함이다. 우리는 유년기에 아주 익숙했던 감정들 그대로를 성년의 관계 안에서 재현하길 바라고, 그 감정은 다만 애정과 보살핌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맛본 사랑이란 보다 파괴적인 다른 역학들과도 얽혀 있다. 예를 들어, 통제 불능의 어른을 도와주고 싶은 느낌, 아빠나 엄마가 다정하지 않다거나 그들의 분노가 느낌 또는 철없는 소원을 자유롭게 표현할 만큼 집안 분위기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느낌과도 뒤얽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으로서의 우리가 어떤 후보군을 그들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조금은 너무 옳기 때문에 - 왠지 지나치게 안정적이고 성숙하고 분별 있고 믿음직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 거부하게 되리라는 것도 얼마나 필연적인가. 심정적으로 이러한 올바름은 이질적이고 거저 얻은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보다 자극적인 사람을 쫓는다. 그들과 함께하는 삶이 더 조화로울 것이라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그 삶이 가질 좌절의 양식이 안심하리만치 친밀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김영하, <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이천팔백여 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그래서 방송을 오래하는 전문적인 방송인들도 두 유형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한 부류는 어떻게든 프로그램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으려는 이들이다. 자신의 노력과 결과 사이에서 작은 인과관계라도 찾아내면 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더 잘 통제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태도. 이것은 르네상스 이후에 인류가 선택해온 길이다. 합리성을 믿고, 과학적 진보를 통해 세계와 인간을 변화시키고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 바로 근대성이다. 또다른 부류는 바로 무조건적 믿음에 의탁하는 이들이다. 유능하고 신망이 있는 프로듀서와 그 팀을 믿는 것이다. '아무개 피디라면 믿을 수 있어'라는 말을 나는 자주 들었다. 르네상스 이전의 인간들을 지배하던 태도, 다시 말해 절대적 믿음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지금과 너무나 흡사하게, 그 시절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좋든 나쁘든 간에 오직 극단적인 비교로만 그 시대를 규정하려고 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

실생활에서는 지식보다 노출이 더 중요하다. 의사결정의 효과가 논리를 대체한다. 교과서가 주는 지식은 보상의 숨은 비대칭성을 못 보게 한다. 바로 평균의 개념이 그렇다. 끔찍하게도,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에서는 세상의 구조를 연구하거나 참과 거짓을 이해하는 대신 당신의 행위로부터 얻는 보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성에 주목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보상, 즉 행위로부터 얻는 혜택이나 손실이 얼마나 큰가에 있다. '철학자들은 참과 거짓을 이야기한다. 실생활에서 사람들은 보상, 노출, 결과(리스크와 보상) 즉 프래질과 안티프래질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때로 철학자, 사상가, 연구자들은 참과 리스크 혹은 참과 보상을 서로 같은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참과 거짓(따라서 우리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결정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참과 거짓에서 나오는 보상이다. 그리고 이런 보상은 거의 항상 비대칭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결과는 다른 결과에 비해 보상이 훨씬 더 커서 정의 비대칭성 혹은 부의 비대칭성, 즉 안티프래질 혹은 프래질의 특징을 갖는다.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숭배 집단을 형성하는 효과적인 방법 하나는 종교와 과학을 혼합하는 것이다. 최신 기술 트렌드나 유행에 고상한 대의, 신비로운 믿음, 새로운 치료법을 접목시켜라. 사람들은 엄청난 호응을 보이며 열광할 것이고, 그들은 당신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엄청난 힘이 당신에게 있다고 믿을 것이다.

 

 

실뱅 다르니, 마튜 르 루,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

이 '대안 기업가'들은 강한 윤리의식을 갖고 있으며, 인간 저마다의 능력이 긍정적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는 데 근본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의 가치체계에 맞추어 일상의 활동을 영위할 수 있다는 데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그들은 부의 창출과 인본주의를, 그리고 생산 활동과 생태적 책임감을 결합시킬 수 있는 대안적 해결방법을 모색하느느 데 큰 의미를 둔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세계를 건설하는 데 참여한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힘들고 지친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내 삶의 고요함을 잃어버리고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디를 가도 끊임엇이 나를 봐달라는 소란한 광고 소리, 시시각각 일어나는 사건사고 뉴스 소리, 여기저기서 울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 두드리고 부수는 공사 소리,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소리가 들리지요. 거기다 우리 손에 쥔 핸드폰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벨과 문자 알림 소리가 울립니다. 현대 문명은 한순간도 우리 영혼을 가만히 쉴 수 없게 하는 것 같아요.

 

배움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 같다. 책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머리로 분석하면서 얻는 배움과 본인이 직접 몸으로 뛰면서 참고 고생하면서 얻는 배움. 온몸으로 배운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아도 왠지 믿음이 가고, 대화를 나누면 그 깊이가 전해지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구체적이면서 실용적이다.

 

 

니콜라스 카, <유리감옥>

자동화에 대한 안심과 편향 모두 우리의 제한적 집중력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 안심하려는 경향은 우리가 우리 주변과 꾸준히 상호작용하지 않아도 될 때 집중력과 자각력이 얼마나 쉽게 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편향적으로 정보를 평가하고 무게를 재려는 성향은, 우리가 선별적으로 집중하고, 잘못된 믿음이나 심지어 유용할 것 같은 프롬프트의 등장만으로도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안심과 편향은 자동화된 시스템의 질과 신뢰성이 높아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 여러 실험 결과 들을 보면, 우리는 빈번하게 오류를 일으키는 시스템에 대해 경계심을 갖는다. 우리는 주변 환경을 계속 의식하고, 다양한 출처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예의주시한다. 하지만 시스템이 어쩌다가 한번 고장이 나거나 오류를 일으키는 정도로 높은 신뢰성을 보일 때 우리는 게을러진다. 그럴 경우 우리는 시스템이 결코 틀리지 않는다고 가정하기 시작한다.

 

 

다니엘 슈라이버, <어느 애주가의 고백>

절대로 가 보지 않은 길이 얼마나 힘든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만약 모든 목표가 이루어진다면 자신과 잘 맞는 나만의 특별한 해법 같은 건 찾아낼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일도, 자신의 믿음에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생각해 볼 일도 없다. 그로 인해 미리 만들어진 동그라미 속을 평생 맴돌게 될 것이다.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부정가치는 두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 첫째는 가치가 아닌 선을 관심사로 삼는 공동체를 서술할 때도 '가치' 측정이 목적인 경제적 범주를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진 경우입니다. 선은 일정 장소에 고유하게 나타나는 여러 요소의 혼합체와 지역적 '이념'에 - 팔라셀수스와 다마노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 속하는 반면, 가치는 과학이라는 추상적 이념에 어울리는 수치입니다. 부정가치가 눈에 띄지 않는 두 번째 원인은 진보가 이루어질 거라는 강박적 확신입니다. 공생을 원시 경제로 격하하고 전통을 혐오하는 행위에 타 문화의 진보에 헌신한다는 그럴 듯한 허울을 입히지만, 사실은 과거를 근시안적으로 파괴하도록 부추길 뿐입니다. 전통을 폐기의 역사적 표현으로 보고 과거의 쓰레기와 함께 버려야 하는 대사으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김진선, <적당히 벌고 잘 살기>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친구와 함께.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그의 책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에서 '인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가 불안할수록 우리는 서로 도우며 함께 살 수밖에 없다. 부자들이야 담을 높이 쌓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면 되지만 대다수 돈없는 이들은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 관계망을 구축하고 신용을 쌓는 일에는 왕도가 따로 없으니 일상적으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쌓는 것, 그럴 수 있는 인성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가장 중요한 능력일 거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네이트 실버, <신호와 소음>

이는 모든 경험적 믿음은 동일하게 올바르다거나 타당하다는 주장이 아니다. 나는 우리 인간은 자기 믿음에 대해 완벽한 객관성, 합리성, 정확성을 결코 지닐 수 없다고 본다. 그저 덜 주관적이고, 덜 비합리적이며, 덜 잘못되려고 노력할 뿐이다. 자기 믿음을 토대로 예측하는 것은 스스로를 검증할 수 있는 최고의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길이다. 만일 객관성이 우리의 주관을 넘어서는 더 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예측이 우리가 그 진리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살필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면, 우리 중 가장 객관적인 사람은 제일 정확한 예측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객관성을 실험실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 파악한 피셔의 통계적 방법론은 베이즈주의적 추론에 비교하면 이런 과제를 달성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사실 베이즈주의의 한 가지 특성은 우리에게 더 많은 증거와 자료들이 주어지면 우리가 가진 믿음들은 저절로 진리를 향해 수렴한다고 보는 데 있다. 투자자 세 사람은 현재의 주식시장이 호황일지 불황일지 판단하려고 한다. 이들은 매우 다른 믿음을 갖고 출발한다. 한 사람은 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며 호황일 가능성을 90퍼센트로 본다. 다른 한 사람은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호황의 가능성을 10퍼센트로 본다. 나머지 한 사람은 50퍼세트로 본다. 시간이 흐르며 주가가 등락할 때마다 세 사람은 자신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또 예측을 수정한다. 나는 하루 단위로 무작위 등락이 반복되긴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약 60퍼센트 상승하도록 시장을 시뮬레이션했다. 이 경우, 비록 우툴두툴한 과정을 거치지만 모든 투자자들은 (비록 정확하게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100퍼센트에 가까운 확신을 갖고 시장이 호황이라고 올바르게 판단했다.

 

이론적으로는 과학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 과학적 차원의 합의는 매우 까다롭다. 그러나 과학계의 여러 의견은, 수많은 발상이 토론되고 새로운 증거를 발견함에 따라, 조금씩 더 진리에 수렴된다. 이 과정은 주식시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전진하는 것도 아니고 평탄하지도 않다. 과학계는 새로운 증거에 맞춰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는 종종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베이즈주의의 기차를 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또 이들이 정확하게 100퍼센트 또는 0퍼센트 진리라고 믿는 명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정한다면(이런 극단적 믿음들은 베이즈 정리 아래서는 바뀌지도 않을 것이며 또 바뀔 수도 없다), 심지어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더라도 결국에는 진리에 가깝게 보정된다.

 

과학에서 '모든' 측정점이 정확하게 단일한 결론을 가리키는 일은 거의 없다. 실제 현실의 자료는 소음으로 범벅되어 있다. 어떤 이론이 완벽하다더라도 그 이론의 신호가 발산하는 힘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그리고 베이즈 정리 아래에서는 그 어떤 이론도 완벽하지 않다. 모든 이론이 그저 진행 중인 '과정'에 있을 뿐이다. 계속해서 검증을 받으며 다듬어질 뿐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 회의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정치에서는 상대방, 다시 말해 적에 대한 인정사정없는 공격만이 있을 뿐이다. 특정 당파 사람들은 경제적 사회적 외교적 정책(본질적으로는 서로 거의 무관한 정책)과 관련된 일련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 이런저런 어림값이 타협안으로 제시된다 해도, 민주당과 공화당의 입장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정보는 맥락에 놓일 때만 비로소 지식이 된다. 맥락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신호와 소음을 구분할 수 없다. 이 경우에 진리를 좇는 탐색은 온갖 가짜 '참'에 파묻혀버린다. 경험적 믿음이 전혀 없다는 건 베이즈 정리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다. 당신은 베이즈 정리 아래에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의 크기를 줄여나가야만 한다. 편견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건 그만큼 편견이 많다는 뜻이다. 자기 믿음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 즉 '바로 여기가 내가 시작하는 지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확신으로 '예측'을 하는 일이며 또한 주관성의 필터를 통해 현실의 실체나 진리를 깨닫는 길이다.

 

베이즈 정리 아래서는 누구든 자기 견해나 믿음을 더 많이 검증하려 들테고, 또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위에 열거한 문제점을 더 빠르게 극복하고 이를 실수를 통해 배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번쩍거리는 통찰을 얻는 일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모습이다. '커다란 생각big idea'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점진적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전진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예측이 좀 더 정확해질 수 있다.

 

 

유시민, <역사의 역사>

역사학의 수준을 높여 더 과학적으로 만들려면 역사가들 스스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과학자와 사회과학자와 역사가는 분야는 달라도 모두 환경과 인간의 상호 영향에 관해 연구한다. 연구 목표도 같다. 환경에 대한 이해도와 지배력을 높이는 것이다. 물리학자, 지질학자, 심리학자, 역사가의 연구 방법은 세세한 면에서는 차이가 크다. 그러나 성취하려는 기본 목적과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하는 기본 방법은 똑같다. 여느 다른 과학자처럼 역사가도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 동물이다. - <역사란 무엇인가> 130~131쪽

 

나는 역사의 진보가 종점에 도달했다고 믿지 않는다. 역사의 진보에 특정한 목적이 있다는 19세기 사상가들의 관념은 옳지 않았고 쓸모도 없었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자동적이거나 필연적인 과정을 믿는 게 아니라 인간 잠재력의 지속적인 발전을 믿는 것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구체적인 목표는 역사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역사의 과정에서 생겨난다. 나는 인간이 완전하다거나 지상천국이 오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도전하고 성취해 냄으로써만 그 정체를 밝히고 타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 우리가 상상할 수 있거나 상상할 필요가 있는 한계에 굴복하지 않는 진보의 가능성에 나는 찬성한다. 그러한 진보의 개념이 없이 어떻게 사회가 생존할 수 있겠는가. - <역사란 무엇인가> 179쪽

 

 

리처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유교, 도교, 불교 모두 '조화', '부분보다는 전체', '사물들의 상호 관련성'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세 철학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종합주의(holism)'는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종합주의라는 개념은 공명(resonance) 현상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악기의 한 줄을 건드리면 공명에 의해 다른 줄이 울게 되듯이 인간, 하늘, 땅은 서로에게 이런 공명을 일으킨다. 만일 땅에서 군주가 나쁜 일을 하면 우주의 상태 역시 나빠진다는 믿음이 바로 이러한 종합적 사고의 한 예이다.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두다>

재미나게도 신앙에서는 실패한 인생이란 없다. 신을 믿기만 하면 무슨 일을 하든 실패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신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에서는, 가령 약간의 좌절은 있더라도 그런 좌절에서조차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찾아낸 의미가 인생의 빛이 된다. 이 빛은 세상에 널린 흔한 빛이 아니다. 세상이라는 어둔 그림자 속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나만의 기쁨이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역전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정치가, 심리학자, 극작가도 해내지 못할 역전극이며, 해방이다.

 

 

피터 갤리슨,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우리는 오랫동안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똑같은 빠르기로 똑딱똑딱 흘러간다고 믿어왔다. 온 우주에서 시간이 똑같이 흘러가기 때문에 이곳의 시간과 저곳의 시간이 다르지 않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이 보편적인 믿음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이곳의 시간과 저곳의 시간이 같은지 아니면 다른지 알기 위해서는 직접 그 시간들을 비교해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시계를 가지고 시간을 관측해야 한다. 또 그렇게 시계를 바라보는 관측자가 움직이고 있을 때의 시간과 멈춰 있을 때의 시간이 같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의 기준을 빛을 이용하여 정하고 나면, 이곳의 시간과 저곳의 시간이 다를 뿐 아니라 움직이는 관측자이 동시와 멈춰 있는 관측자의 동시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더 놀랍게도 그렇게 상식과 직관에서 벗어나는 주장이 정교한 실험을 통해 확인되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더, <괴델, 에셔, 바흐>

"전일주의"란  "전체는 그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크다"는 믿음이지. 우뇌형인 자라면 전일주의를 거부할 수 없어. "환원주의"란 "전체란 우리가 그것의 부분들과 그 '합'의 성격을 이해하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지. 좌뇌형인 자라면 환원주의를 거부할 수 없어.

 

 

로널드 T. 포터, <욱하는 성질 죽이기>

희망을 가져라. 욱하는 성질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모든 욱하는 성질은 바로 자신의 머릿속, 즉 뇌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잘 된 것일 수도 있다. 자기 머리, 자기 뇌니까 자신이 해결하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자신이 바꿀 수 있다. 항상 그러지는 못하겠지만, 또한 완벽하게 바꿀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삶을 훨씬 나아지게 만들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을 바꿔라. 반박 방법, A=전조. 자신을 화나게 만드는 일, B=상황에 대해 화가 더 많이 나도록 만드는 부정적인 믿음. C=분노에 따른 결과. 홧김에 저지르는 행동. D=반박. B를 대신하며 화를 가라앉힐 수 있는 새로운 생각. E=새로운 생각이 미치는 영향. 보통 마음을 비우거나 분노에서 비롯된 에너지를 다른 일에 쏟는다.

 

증오를 버릴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화해이다. 화해라 함은 가해자와 다시 관계를 맺는 일이다. 즉, 실제로 편지를 나누거나 대화를 하거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다. 화해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신에게 그 사람과의 관계가 왜 이번이 지난번과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화해를 하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 가해자는 말 그대로 자신이 예의바른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용서는 자기 내에서 혼자 하면 되지만, 화해란 두 사람 이상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유시민, <글쓰기 특강>

대입원서를 내는 학생이라면 자신이 공부하기를 원하며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중심으로 인생을 요약해야 한다. 기업 입사원서를 내는 청년이라면 자신이 회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으면서 그 믿음의 근거를 제공하는 사실을 중심으로 인생을 요약해야 한다. 텍스트 요약도 자기소개서 쓰기와 다르지 않다. 요약하는 사람의 소망과 의지와 태도에 따라 같은 텍스트라도 다르게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구본권, <로봇시대, 인간의 일>

입력된 것을 변형 없이 그대로 저장하는 컴퓨터 저장장치의 방식과 사람의 기억 방식은 다르다. 기억을 연구해온 하버드 대학의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샥터 교수는 기계와 달리 사람의 기억은 살아 있으면서 진화하는 사고의 구조물이라고 말한다. 샥터는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해서 '일곱 가지 오류' 성향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약해지는 '소멸transience', 주의와 기억 간의 접촉 이상으로 인한 '정신없음absent-mindedness', 어떤 정보를 끄집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막힘blocking', 잘못된 기억을 사실로 착각하는 '귀인오류misattribution', 과거를 상기하려고 할 때 새롭게 생겨나는 기억들인 '피암시성suggestibility', 현재의 지식과 믿음이 기억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편향bias', 마음에서 사라져버리기를 원하는 고통스러운 정보가 반복해서 떠오르는 '지속성persistence' 등이 기억을 불완전하게 하는 요인들이다. 기계 기억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사람의 기억 현상에서만 나타나는 오류들이다.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나는 진보를 '역사서술의 근거가 될 과학적인 가설'이라고 본 액턴의 설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원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역사외적이고 초이성적인 힘에 과거의 의미를 예속시킴으로써 역사를 신학으로 바꿀 수 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역사를 문학 - 의미도 중요성도 없는, 과거에 관한 꾸며낸 이야기와 설화들의 묶음 - 으로 바꿀 수도 있다. 그 이름에 걸맞는 역사는 역사 그 자체 안에서 방향감각을 찾아내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다. 우리가 어딘가로부터 왔다는 믿음은 우리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믿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미래의 진보능력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의 진보에 대한 관심도 이내 포기할 것이다. 내가 첫번째 강연의 첫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역사관은 우리의 사회관을 반영한다. 지금 나는 사회의 미래에 대한 그리고 역사의 미래에 대한 나의 믿음을 밝힘으로써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출생과 소유의 모든 특권이 폐지되고 누구나 모든 직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면, .... 사람들은 마음 놓고 무한히 야심을 펼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자신들이 위대한 것을 이루라는 소명을 타고났다고 즐겨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날마다 경험을 통해 수정되는 잘못된 생각이다. ... 불평등이 일반적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인 경우에 극심한 불평등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모든 것이 평등한 경우에는 아주 미미한 차이도 마음을 상하게 한다. ... 이것은 민주주의의 주민들이 풍요 한가운데서 기이하게도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 나는 부자들이 누리는 것을 희망과 부러움의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는 가난한 시민을 미국에서 단 한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 이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 덕분에 특히 처음에 젊은 사람들은 피상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과 행운아 들은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절망한다. 그들의 영혼은 비통함에 숨이 막힌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로제 폴 드루아,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철학자로 걸으면서' 나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여행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들이 온갖 기후와 땅, 풍광을 살았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더라도. 인간은 지구를 걸었고, 곳곳에서 눌러앉았다. 가파르고 무덥고 얼어붙은 지역들에까지. 그들은 환경에 따라 삶의 방식과 사회, 주거지와 양식을 만들어냈다. 인류는 쉬지 않고 보잘것없는 곳에서 드넓은 곳에 이르기까지 계속 걸으며 이주와 침략, 전쟁과 대결, 탈출과 유배를 이어갔다. 인간의 걸음을 통해 지금도 상업 중심지, 물품과 생각의 이동로가 만들어지고, 학설과 신앙, 시와 음악 작품, 전설이 전파된다. 걷기와 인간의 역사 사이의 이 뿌리 깊고 항구적인 결합을 떼어놓기란 불가능하다. 더구나 역사 자체도 걷는다. 각 시대마다 인간의 몸만 두 다리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 것이 아니다.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그들로 인해 걸은 것은 말, 담론, 생각, 문제, 지식, 방법, 사고방식, 학설, 물음, 믿음 등이다. 오류와 진리도. 학식과 허상도 걸었다. 정신의 걷기는 무수한 비틀거림과 되찾은 도약으로, 숱한 방향과 탐지로 이루어졌다.

 

 

토머스 프리드먼, <늦어서 고마워>

당신이 어떤 기계의 정지 버튼을 누르면 기계는 멈춰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정지 버튼을 누르면 무언가를 시작합니다. 당신은 멈춰 서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고, 당신의 전제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며, 무엇이 가능한지 다시 구상하기 시작하고, 무엇보다 당신이 가장 깊이 간직하고 있는 믿음을 다시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그 일을 하고 나면 더 나은 길을 재구상하기 시작할 수 있지요. - 도브 사이드먼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건축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장소가 달라지면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사람도 달라진다는 관념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이상적인 모습을 우리 자신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건축의 과제라는 신념이 생긴다.

 

 

이언 해킹, <우연을 길들이다>

1892년에, 인습 타파적인 미국의 철학자 퍼스는 '우주의 모든 사건 하나까지도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상식적인 믿음을 검증할 것'을 주장했다. 퍼스가 숙명론the doctrine of neccessity이라고 불렀던 이 '의심스러운 명제'가 뜻하는 바는, '어떤 한 시점에 존재하는 사물의 상태가, 모종의 불변의 법칙과 어우러져 다른 모든 시점에서의 사물의 상태를 완전하게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명제에 대한 퍼스의 검증은 신랄했다. <숙명론 검증The Doctrine of Neccessity Examined>의 말미에서 그는 '이상으로부터 나는 보편적인 필연성을 주장하는 이론을 고수해야 할 모든 중요한 이유들에 대해 철저한 검토를 실시했으며, 그 결과 그러한 이유들이 무효함을 보여 주었다고 믿는다'라고 썼다. 필연성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기술은 시작에 불과했다. 퍼스는 나아가 세상이 환원 불가능한 우연성을 띠고 있다고 분명하게 주장했다. 자연과학이 자랑하는 외관상의 보편적 법칙은 우연의 작용이 낳은 산물이라는 것이다.

 

확률이라는 개념은 빈도 측면과 믿음의 정도 측면 양쪽에서 탄생했다. 초기에는 확률이 지닌 두 측면에 대해 구분하지 않아도 무방했다. 라플라스의 젊은 시절에 확률은 그 영역을 크게 확장했지만, 우연적 사건, 출생, 혼인과 사망, 그리고 측정오차와 관련하여 사용되던 확률은 여전히 이전에 사용되던 빈도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객관적 빈도 또는 경향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자 라플라스는 다양한 결과들이 지니는 용이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가면서 가망성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는 데 기꺼이 나서기는 했지만, 확률은 우리의 지식과 무지에 관련되는 주관적 개념이라고 정의내렸다.

 

빈도와 믿음이라는 용어로 각가 표현되는 '객관적'과 '주관적' 확률 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모형화modeling와 추론inference의 차이이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통해 앎을 얻는다고 했지만 과학은 우리에게 앎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신도 영접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나는 기독교 신화 역시 이런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왜 하필이면 선악과, 즉 '지혜의 나무'였을까? 언뜻 보면 신화에 발이 묶인 듯 보이는 서양에서 지극히 합리적인 현대 과학이 탄생한 것을 어떻게 이애해야 할 것인가?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자유 의지의 몸부림과 다시 신에게 돌아가려는 운명적인 믿음 사이에서 벌어지는 서사시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그 속의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꿰뚫는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노력 즉 통섭의 노력 역시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늘 "알면 사랑한다!"를 외치고 다닌다.

 

 

토머스 S. 쿤, <과학 혁명의 구조>

대다수 과학의 초창기 발전 단계는 자연에 관한 상이한 견해들 간의 부단한 경쟁으로 특정지어지는데, 그 각각의 견해들은 모두 부분적으로 과학적 관찰과 방법의 명령으로부터 유도된 것이며, 모두 그런 명령과 대개 부합하는 것들이다. 이들 다양한 학파를 구별지었던 것은 저마다 나름대로 "과학적"이었던 방법론의 이런저런 실패가 아니라, 세계를 공약불가능한(incommensurable) 방식으로 보고 그 속에서 과학을 한다는 점이었다. 관찰과 경험은 수용할 수 있는 과학적 믿음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제한할 수 있으며 또 제한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찰과 경험만으로 과학적 믿음의 특정한 요채를 결정할 수가 없다. 개인적인 이유에서나 역사적 우연 때문에 만들어진 임의적인(arbitrary) 요소가 항상 한 시대의 과학자 공동체에 의해서 제창도니 믿음의 구성성분으로 끼어들게 마련이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하나의 사건을 공격자, 피해자, 중립적 제삼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각각 서사가 달라지는 현상은 폭력의 삼각형에서 겹쳐진 심리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도덕화 간극(Mralization Gap)이라고 부르자. 도덕화 간극은 자기 위주 편향(self-serving bias)이라는 더 큰 현상의 일부이다.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한다. '좋다'는 것은 효율적이고 능력 있고 가치 있고 유능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착하고 정직하고 너그럽고 이타적이라는 뜻일 수 도 있다. 인간에게 자신을 긍정적으로 내보이려는 동기가 있다는 것은 20세기 사회 심리학의 중요한 발견이었다. ... 자기 위주 편향의 대표적인 현상은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평가를 조작함으로써 자신이 스스로의 행동을 잘 통제한다는 인상을 지키려고 애쓰는 성향이다. 레이크 워비건 효과(Lake Wobegon Effect)도 있다. (작가 개리슨 케일러가 창조한 가상의 마을 이름으로, 그곳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평균이상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바람직한 재능과 특징에 있어서 자신을 평균 이상으로 평가하는 성향을 말한다. 자기 위주 편향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치르는 진화의 대가이다. 우리가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서로 자석처럼 끌리는 로봇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게 사회적, 도덕적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기와 공감을, 감사와 신뢰를, 외로움과 죄책감을, 질투와 분노를 느낀다. 이런 감정들이 내면의 규제자로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 생활의 대가로 고통 받지 않으면서도, 즉 사기꾼이나 무임승차자에게 착취당하지 않으면서도 사회 생활의 이득을 - 상호 교환과 협동을 -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협동할 것 같은 사람에게 공감, 신뢰, 감사를 느끼고, 우리도 그에게 협동으로 보답한다. 반면 우리를 속일 것 같은 사람에게는 화내고, 배척하고, 협동을 무르고, 처벌한다. 개인의 선행 수준을 결정하는 저울의 양쪽에는 협동자라는 평판에 따르는 존경, 그리고 은밀한 속임수로 얻은 부정한 이득이 놓여 있다. 사회 집단은 다양한 수준의 너그러움과 신뢰도를 지닌 협력자들의 시장이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들통 나지 않을 정도로만 자신의 너그러움과 신뢰도를 실제보다 높게 선전한다. 이런 도덕화 간극 때문에, 피해자와 가해자는 보상 협상에서 서로 상보적인 전략을 펼친다. 불법 행위를 두고 법적에서 맞붙은 변호사들처럼, 사회적 원고는 피고의 행동이 고의였음을 강조한다. 적어도 불량할 정도로 무심한 태도였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원고의 고통과 괴로움을 강조한다. 대조적으로, 사회적 피고는 자기 행동의 합리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원고의 고통과 괴로움을 최소화한다. 이렇게 경쟁하는 관점들이 보상 협상을 결정지으며, 구경꾼들의 공감과 믿음직한 상호 교환자로서의 평판을 더 많이 얻으려는 경쟁을 펼친다.

 

 

권오상, <돈은 어떻게 자라는가>

IMF와 증권사의 전망은 왜 늘 빗나갈까. ... 금융과 경제를 예측하는 것이 현재는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아도 언젠가는 좀 더 만족할 만한 이론이 나올 것이라는 일종의 순진한 믿음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는 그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자연계와 달리 금융 시장은 다수 사람들의 상호 작용으로 만들어지는 대표적인 사회적 복잡계(complex system)이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 그 복잡계를 이루는 구성원들은 예측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조삼모사하는 인간들이다. 어떨 때는 가격이 비싸다고 안 사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가격이 비싸다고 더 많이 사기도 하는....

 

 

피터 린치, 존 로스차일드, <피터린치의 이기는 투자>

지난 30년간 주식시장은 전문 투자가 집단이 지배해왔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반대로 전문투자가 집단이 주식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 투자가 주식투자를 하기는 더 쉽다. 당신은 전문투자가 집단을 무시함으로써 주식시장 평균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달성 할 수 있다.

 

 

로버트 해그스트롬,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믿음은 이성적 사고를 앞선다. 두뇌는 자동적으로 패턴을 찾는 '믿음 엔진'이다. 패턴이 먼저 발견되고 뒤이어 의미가 부여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지지하는 정보를 찾고, 믿음과 상충하는 정보는 무시한다. 셔머는 이것을 '믿음이 만들어낸 현실'이라고 부른다. 셔머가 얘기한 미신적 사고와 믿음 엔진을 생각하면, 주식시장을 예측하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왜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동작하는지를 연구한다. 언뜻 보기에는 비인격적인 재무재표와 손익계산서의 투자세계와는 너무 동떨어져 보일 수 있다. 심리학이란 단어 자체는 '마음에 대한 탐구'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심리학자는 생각하고 아는 과정인 인지를 통제하는 부분과 감정을 통제하는 부분으로 구성된 두뇌의 모든 작동을 이해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의사소통하고, 어떻게 감정을 느끼는지,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지, 우리 행동을 이끄는 핵심 믿음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탐구한다.

 

철학은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 철학이 쉬운 이유는 우리들 개개인의 일상적 삶에 관련된 친숙한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철학하는 데 필요한 도구, 바로 두뇌와 마음과 영혼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다. 한편 철학은 한 가지 단순한 이유 때문에 가장 어려운 분야기도 하다. 바로 철학은 우리에게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과학과 달리 철학은 절대적인 답이 없고, 미리 정리된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 철학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 철학이 가진 그 어떤 진리도 본질적으로 사적이고 개별적이며, 그것을 추구해온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철학의 교의가 우리 것이 되려면 우리의 경험, 믿음, 해석이라는 인지적 여과를 거쳐야 한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사랑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진한 사랑일수록 그 그림자도 짙다는 사실을, 태양처럼 찬란학 빛나던 사랑도 시간속에 스러진다는 것을, 설령 사랑이 변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사람이 변하고 만다는 것을. 감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이모션emotion의 어원은 라틴어 모베레movere다. '움직인다'는 뜻이다. 감정의 멈추어 있지 않고 자세와 자리를 바꿔가며 매 순간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이별 또한 사랑의 전개 과정이라고. 사랑이 기승전결을 거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어쩌면 우린 사랑이 한결같을 거란 믿음에서 벋어나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쇠퇴와 소멸을 감지할 때 지난 사랑의 생채기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고, 새롭게 다가온 사랑 앞에서 용기를 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사람 보는 '눈'이라는 건 상대의 단점을 들추는 능력이 아니라 장점을 발견하는 능력이라는 것과, 가능성이란 단어가 종종 믿음의 동의어로 쓰인다는 것을.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약한 존재인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다. 타인의 신뢰를 얻고자 한다면 말로 자신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는 수밖에 없다. 피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에서의 진실하고 흔들림 없는 행동이야말로 타인의 믿음에 호소할 수 있다. - <방랑자와 그 그림자>

 

 

유시민, <청춘의 독서>

지대는 과거의 생산물이 아니라 현재의 생산물에서 징수된다. 지대는 노동에 대한 항상적이고 연속적인 부담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모든 순간마다 지대가 빠져나간다. ... 매서운 겨울이 이리를 마을로 몰아넣듯이 지대는 탐욕과 죄악을 사회에 퍼뜨린다. 지대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믿음을 흐리게 하며 힘들고 어둡고 잔인한 운명의 장막으로 정의롭고 자비로운 창조주의 영상을 가린다. 지대의 사유화는 과거에 있었던 강도질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자행되는 강도질이며,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어린이들의 타고난 권리를 빼앗는 강도질이다. 우리는 왜 이 제도를 담순에 해추우지 않고 머뭇거리는가? 어제, 그제, 그끄제 도둑을 맞았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 그리고 내일도 도둑 맞아도 좋은 이유가 되는가? 이러한 도둑을 도둑질할 권리를 가진 도둑이라고 결론지을 이유가 있는가? ... 사회 전체가 창출한 지대는 반드시 사회 전체의 것이 되어야 한다. - <진보와 빈곤>

 

역사와 사회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이다. 진보는 추상적인 말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구체적 목표는 역사의 흐름에서 때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지 역사 밖에 있는 어떤 원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 <역사란 무엇인가>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본능적인 혐오감은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주된 원인이다. 누구나 처음 접한 단편적인 증거 한 토막을 근거로 곧장 결론으로 치닫는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반응이고 사람들은 흔히 대상을 정확하고 직관적이고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날 때마다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근거로 서서히 나타나는 반응도 있다. 감수성은 놀라움에 열려 있고 거짓으로 증명되기를 기꺼이 반기는 자세다. 이것은 위험한 과정일 수 있다. 따라서 역사를 읽는 것은 안전하게 연습하는 방법이다. 역사는 내가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알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또한 의견 차이를 개인적인 모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때로는 익숙하지 않은 만남에 필요한 안전 거리를 확보해준다.

 

프레더릭 바틀렛의 선구적인 실험 이후 기억은 사건을 온전한 실체로 소환하는 과정이 아니라 무수히 흩어진 파편을 재구성하는 과정으로서 어쩔 수 없이 현재의 감정이나 믿음이 섞여 들어가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는 과거를 끊임없이 재창조한다. 21세기의 가장 의미 있는 발견 중 하나는 기억을 저장하는 뇌 영역과 미래를 생각하는 뇌 영역이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미래관은 과거의 지식으로 결정된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인간은 가치와 명분에 따라 움직인다. 그 일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조직 내에서 한 부품 같은 구성원으로 추락하며 동기도 의욕도 욕구도 사멸된다. 이럴 때 이런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급여와 더 많은 급여뿐이다. 하지만 <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들어가는 순간 이 조직은 위대한 조직이 된다. ... <무엇은> 단순한 저보다. 듣고 기억하면 그만이다. <어떻게>는 기능이다. 손과 몸의 훈련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왜>는 우리가 감정을 다스릴 열쇠다. 충성, 믿음, 정직 등 인간 본연의 가치를 갖게 하며 인간의 행동과 의사결정을 유도하고 이끈다. 우리는 안다고 행동하지 않는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일 뿐이다.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자본주의는 나쁜 경제 시스템이다. 특히 더 나쁜 자유시장 주의 자본주의가 모든 종류의 자본주의는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모두에게 맞는 하나의 경제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스칸디나비아식 자본주의와 다르고 스칸디나비아식 자본주의는 독일식 혹은 프랑스식과 다르다. 일본식은 말할 것도 없다. 이윤 동기는 여전히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원료이지만 이윤 동기에 아무런 규제도 하지 않는 다면 엄청난 피해가 돌아온다는 것을 배웠다. 시장 메커니즘은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세심한 규제와 조정을 필요로 한다. 더 잘 규제된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를 해야 한다. 다른 종류가 어떤 것인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표, 가치, 믿음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더 크고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정부 개입이 많이 늘었지만 주로 위기관리를 위한 것이다. 정부는 위기관리를 넘어서 풍요롭고 평등하며 안정적인 사회를 건설하는데 더 큰 역활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정부는 사회의 여러 상충된 요구들을 조정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가장 우수한 장치이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거대한 복지국가와 경제 성장률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는 작은 정부가 항상 성장에 이롭다는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잘 드러내 준다. 그리고 오늘날 부유해진 나라들은 모두 정부가 경제발전을 위해 적극 개입했다. 정부 개입은 제대로 계획되고 추진되기만 하면 경제를 더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 정부는 사적인 수익은 적지만 사회적으로 수익이 높은 곳에 투자하고 또 연구개발이나 노동자 훈련등 시장에 제대로 하지 못하는 투입물에 공급을 늘려야 한다.

 

 

크리슈나무르티, <삶과 죽음에 대하여>

죽음처럼 몹시 복잡한 인간 문제에 대해 조사하려면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든 만일 선입견이나 믿음, 희망, 두려움이 있으면 관찰하거나 조사할 수 없습니다. 매우 진지하게 조사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왜곡하는 선입견이 없어야 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위안을 바라는 욕망 희망이 없어야 하며, 그런 것들이 모두 없어야 합니다.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완전히 비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 알아내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지표면 혹은 지표면 가까이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 놓는 일이다. 또 하나는 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다. 첫번째 종류의 일은 즐겁지 못하고 보수도 박하다. 두 번째의 일은 즐겁고 보수도 높다. 또한 이 일은 무한히 확대될 수 있어서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뿐 아니라 어떤 지시를 내려야 할지에 대해 조언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 흔히, 조직화된 두 개의 집단에서 정반대되는 두 가지 조언이 동시에 나오게 마련인데 이게 소위 정치역학이다. 이런 류의 일을 하는 데 요구되는 기능은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말과 글로써 설득하는 기술, 즉 선전에 관한 지식이다.

 

 

홍익희, <세 종교 이야기>

무신론자인 이탈리아 <라 레푸블리카> 신문 설립자가 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신을 믿지 않거나 믿음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신이 용서할지'를 물었다. 그때 교황은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으며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고 답변했다. 교황조차 하느님의 자비는 무신론자에게도 베풀어진다고 답한 것이다.

 

유대교는 '율법에 의한 구원'을, 기독교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이슬람교는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디지털 기술을 대하는 지금의 사고방식, 즉 네트워크는 절대 끊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은 시간의 공백이 가진 중요성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시간의 공백은 디지털 도구를 실용적인 도구에서 창조성, 깊이, 초월성의 도구로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시간의 공백은 사람들을 줄 서게 만든 마법의 핵심이다. 시간의 공백 덕분에 나는 지극히 평범한 경험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는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시간의 공백이 없다면 가치 있는 경험도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공백을 만들기는커녕 점점 더 없애고 있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은 불확실성과 즉흥성에 기초한다. ... 여행은 불확싱설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는 우리에게 불확실성과 친구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것처럼 잘 닦여진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때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별로 가지 않는 길이라 불편하고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과 두려움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감내해야 할 조건이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명확한 방향을 정하고 확신에 차 걷는 사람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뎌낼 줄 알는 사람들이다. 다만 자신이 걷는 길 자체를 사랑하고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자신의 시도 하나하나가 모여 곧 길이 된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은 결국 삶으로의 여행이다.

 

 

공자, 임자헌 옮김, <군자를 버린 논어>

아무리 큰 나라나 조직이라고 해도 관리 원칙은 다를 게 없습니다. 아주 신중하게 일해서 아랫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예산 관리를 잘하고 사람을 아끼며, 사람들한테 뭘 시킬 때 그들의 사정을 봐가면서 하면 되는 거예요.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다. 설령 내가 초인적인 노력으로 스스로의 개인적 욕망을 상상의 질서의 속박에서 풀려나게 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나는 한 개인에 불과하다. 상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수백만 명의 낯선 사람에게 나와 협력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상상의 질서는 내 상상력 속에만 존재하는 주관적 질서가 아니라 수억 명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상호 주관적 질서이기 때문이다.이를 이해하려면 '객관' '주관' '상호 주관'이란 용어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다. 객관적 현상은 인간의 의식이나 믿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 주관이란 한 개인의 의식과 신념에 따라 존재하는 무엇이다. ... 상호 주관이란 많은 개인의 주관적 의식을 연결하는 의사소통망 내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지옥과 극락은 현실 너머 사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생각과 증오가 있는 곳이 곧 지옥이고, 바른 생각과 배려가 있는 곳이 곧 극락이다. <화엄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염염보리심 처처안락국', 늘 진실과 자비의 마음이면 내가 서 있는 그곳이 바로 극락이라는 것이다. 이시대의 청춘들이 생동하는 기운을 맘껏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잘못된 경쟁체제와 구속과 착취의 고리를 걷어 내야한다. 그 속에서 비로소 청년들은 바름 생각과 배려를 배울 수 있다. 타인을 사랑하는 순간 자신이 사랑의 수혜자가 된다는 믿음을 모두 가졌으면 좋겠다.

 

 

이우철, <열혈 백패킹>

먼 길, 위험한 길, 새로운 길, 힘든 길을 가는 데 가족만큼 든든하고 자연스럽고 믿음직한 동반자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오늘은 좋은 날이다. 매일 매일을 위한 생각 모음집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무작위로 생각들을 모아놓지 않고 논리적 체계를 갖추었다. 인생의 손님들인 사랑, 행복, 영혼, 신, 믿음, 삶, 죽음, 말, 행동, 진리, 거짓, 노동, 고통, 학문, 분노, 오만 등의 주제들이 반복되도록 했고, 하루의 생각이 앞선 생각과 관련해 의미를 가지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하루하루가 서로 연결된다. 또한 우리 행동의 지침이 되는 총체적인 철학으로 완결성을 가지도록 했다.

 

반짝거리는 새 신발을 신은 사람은 진흙탕을 밟지 않으려 조심한다. 하지만 실수로 신발을 더럽히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신경 쓰지 않고 진흙탕을 걷게 된다. 우리 영혼의 삶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라. 잘못하여 진흙탕에 들어갔다 해도 곧 빠져나와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살인, 도둑질, 정욕, 거짓말, 음주를 다섯 가지 죄로 여긴다. 이들 죄를 피하는 방법은 자기 절제, 소박한 살, 노동, 겸손, 믿음이다. 누구나 살면서 죄를 짓고 참회하는 과정을 거친다. 죄란 마치 달걀 껍질이나 밀기울과 같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나 싹터 오른 씨앗이 자유롭게 신선한 공기와 빛에 노출되는 것과 같다. 육체는 영혼에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반대 상황이 너무도 자주 벌어진다. 이를 나는 죄라고 부른다. 어린아이는 어른보다 더 순수하게 보인다. 이는 아마도 그 마음이 어른들의 편견에 물들지 않아서일 것이다. 어른은 자신의 죄와 싸워야만 한다.

 

명상과 생각은 영원으로 가는 길이다. 반면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명상하고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믿음을 갖지 않고 공허한 말만 늘어놓은 사람은 죽은 존재나 다름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세 가지는 우리 모두가 인생의 길에서 던져야 할 질문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안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때문이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 깨달았다면 그 사랑에만 집중하라. 진정한 믿음을 가지려면 거짓 스승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지적 능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지적 능력을 통해 믿음을 시험해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

 

 

웬델 베리, <지식의 역습>

우리가 지속가능한 사회를 원한다면 돌봄, 믿음, 친절, 이웃, 평화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한다. 좋은 언어 역시 '사유화'가 불가능한 사회의 귀중한 자산이다. 

 

우리의 삶의 모든 시간은 더없이 새롭다. 다만 우리가 가진 지식에 의해 그 새로움이 왜곡되는 것뿐이다. 무지의 길은 믿음의 길이기도 하다. '겸손의 지혜'를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형식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며, 매 순간 "우리의 존재 전체에 대한 새롭고 충격적인 평가"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지금과 같은 '기업가 정신'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나아가 그 구성원들이 동의하지 않고 외면하게 된다면 '기업가 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워드에 따르면 동양의 어느 종교에서는 이 순환을 '윤회 The wheel of Life', 즉 생명의 바퀴라고 부른다. 자연 속의 생명은 이 바퀴의 부단한 회전에 의해 유지된다. 이 저술 의 근간이 되는 믿음은, 농장은 그 자체의 바퀴를 완전하게 회전시키는 운동과 일체가 되어야 '자연의 회귀 법칙'에 어긋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높은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동양의 모든 종교에서 지고의 가치는 "타트 트밤 아시 Tat tvam asi" - 즉,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 라는 산스크리트어의 교리에 놓인다. 이 교리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나 자신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과 나 자신이 인식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없음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깨우침의 경지다. 논리의 세계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리를 전제로 하여 성립된다. 따라서 논리는 궁극적 지혜가 아니다. 주체가 객체가 나뉘어 있다는 환상을 제거하는 최상의 방법은 물리적 행위, 정신적 행위, 정서적 행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위한 훈련 방법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산스크리트어로 "디아나dhyana"라고 하는 것인데, 이 말이 다르게 발음되어 "찬(禪)"이 되었고, 다시 한 번 다르게 발음되어 일번어로 "젠"이 되었다. 파이드로스는 결코 명상에 끼어든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에 그가 머무는 동안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었으며, 이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게 할 만한 공정한 방법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건대, 그의 입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믿음,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외로움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심리적 거리로, 몬태나 주와 아이다호 주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대단하지만 심리적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 반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일차적 차원의 미국이다. 지지난밤 프라인빌에서 교차로로 들어서자 우리가 맞닥뜨리고 그 이후 내내 우리와 함께했던 미국이 바로 이 같은 일차적 차원의 미국이다. 이 일차적 차원의 미국은 고속도로와 제트기 여행과 텔레비전과 초대형 영화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이 같은 일차적 차원의 미국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들 주변을 직접 둘러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별로 의식하지 않은 채, 그들 삶의 대부분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의 마음에 그들 주변을 직접 둘러싸고 있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준 것은 다름 아닌 대중 매체들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믿음 때문에 그들은 외로운 것이다. 당신은 그들의 얼굴에서 외로움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무언가를 아주 순간적으로 찾는 듯하다가 이윽고 당신에게 눈길을 줄 때가 되면, 당신은 일종의 상관없는 대상이나 객체와 같은 것으로 그들 눈에 비칠 뿐이다. 그들에게 당신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은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텔레비전 화면을 장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통과해온 이차적 차원의 미국-그러니까 샛길, 중국인이 만든 도랑들, 애펄루사 종의 말들, 넓게 펼쳐져 있는 산맥들, 명상적인 생각들, 그리고 솔방울을 들고 있는 아이들, 호박벌들, 몇 마일이고 계속하여 우리 위로 펼쳐져 있는 탁 트인 하늘이 있는 바로 그 이차적 차원의 미국-에서는 내내, 한결같이, 실재하는 것들이,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리처드 도킨스, <눈먼 시계공>

진화에는 장기적인 목표 따위는 엇다. 먼 미래의 목표, 선택의 기준이 될 궁극적인 완벽함 따위는 없다. 진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 인간이라는 믿음은 터무니없는 인간 허영심의 산물에 불과하다. 실제 상황에서 선택의 기준은 항상 단기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개체의 생존이거나 아니면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성공적인 번식이다. 수백만 년이 흐른 뒤에 뒤돌아보았을 때 그 과정이 어떤 머나먼 목표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단기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여러 세대에 걸친 우연적인 결과이다. '시계공', 즉 누적적인 자연선택은 미래를 알지 못하며 장기적인 목표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스티븐 핑커, <빈 서판>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주는 정서적 위안도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뇌가 죽을 때 우리의 존재가 끝난다면 삶은 목적을 상실하는가? 오히려 매 순간을 감각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소중한 선물이라는 깨달음보다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순간순간 "인생은 짧다" 라는 사실을 떠올림으로써 얼마나 많은 싸움을 피했고, 얼마나 많은 친구를 사귀었으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아꼈고, 얼마나 많은 애정을 표현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인도를 비롯한 각지에서 종교, 하여튼 조직 종교라고 불리는 것의 현란한 모습을 보고 나는 공포에 질렸고, 그것을 비난하는 말을 자주 해왔으며 그것이 깨끗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내가 볼 때 그것은 거의 언제나 맹목적인 믿음과 반응, 독단과 편협, 미신, 착취, 기득권의 유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 간디

 

 

웬델 베리, <생활의 조건>

우리가 우리 땅 위에서 그 땅에 의지해서 잘 살기를 원한다면 그런 과정의 지속성을 믿고, 그것들과 협력할 우리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믿으며 살아가야 한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예수의 기도는 이런 믿음을 확인시켜주지만, '쌓아 놓은 많은 물건'에 대한 믿음은 부인한다. 우리의, 생활과 생계는 흙과, 그것을 잘 관리해서 좋은 밀을 재배하고 좋은 빵을 만들겠다는 우리의 의지와 능력이 주는 선물이다. 그런 것들은 원재료를 쌓아놓고 구매력을 갖춘다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산업경제는 가능성, 심지어는 살아 있는 표토의 가능성도 오로지 돈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불모지도 어쩔 수 없이 풍요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산업경제가 자연과 인간문화 모두와 맺은 변함없는 이 방식은 매장된 지하자원이 그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채굴하는 방식과 다를 것이 없다. 산업 경제는 빵으로부터 영양분과 인간의 솜씨를 빼앗는 것처럼 땅으로부터 자연의 풍요와 인간의 솜씨를 빼았는다(기계에 의한 획일적인 상품 제조와 경작이라는 의미에서). 그래서 땅은 길이와 너비라는 시장에서 유통되는 추상적인 양으로 전락하고, 빵은 돈의 가치로는 크지만 음식의 가치로는 낮은 상품으로 평가절하된다.

 

 

A. L. 바라바시, <버스트>

컴퓨터에서 휴대 전화, 우주여행에서 신약까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기술 진보의 대부분은 지난 수백 년 동안의 과학적 탐구 덕분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묘사하고, 정량화하고, 예측할 수 있으며, 결국 통제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추진된 일이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계몽적인 혁명은 자연과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오늘날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인간의 행동이라는 영역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여러 사건들이 여전히 불가사의하고 혼란스럽게만 보인다.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인간이 원초적으로 신에게 다가가는 데 종교가 믿음과 희망과 자비의 원리이듯이, 충성심은 우리가 자신의 부모와 고향땅을 향해서 갖고 있는 자비의 원리이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한 국민으로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행한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깊은 믿음을 가지지 못할 정도로 '상대주의'가 만연해온 끝에, 이제 우리는 우리가 그것으로 우리 자신을 측정하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일해야 하는 하나의 절대적 선이 결국 존재하고 있지 않은지를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생각에 그 절대적 선은 '건강'이다. 단순히 개인적 위생이라는 의미에서 건강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건강함과 온전함, 그리고 궁극적으로 거룩함이라는 의미에서의 건강 말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건강은 오직 그 속의 일부분일 뿐이다. - 웬델 베리, <미국의 붕괴>

 

우리는 지금 "인류역사의 가장 파괴적이고, 따라서 가장 어리석은 시대"의 한가운데서 살고 있다고 말하는, 농부이자 시인인 웬델 베리의 판단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 의견은 전문적 학술지나 신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최신의 과학적 보고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구체적으로 특정한 땅에 친숙하고, 그 땅과 더불어 일하는 한 시인의 감수성과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해에 걸쳐 자신의 작은 농장의 피폐해진 흙을 회복시키고 기르는 경험을 통해서 그는 지구가 아니라 자기 발밑의 흙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개인이 '지구를 구하는' 행동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또 발언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지구를 구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생각이다. 전통적으로, 주제넘음이란 실제로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내가 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로 이해되어왔다. 이러한 믿음은 허영심에서 나온다. 주제넘음은 우리시대의 전형적인 죄악이다.

 

 

최지원, <유학자들의 동물원>

우리는 성공하는 개체의 능력에 주목할 뿐, 그 성공을 가능하게 한 기술을 내것으로 복제하려는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의 특출난 능력을 복제하려면 엄청난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기술과 능력은 분명히 다르다. 기술은 지식이기에 그 방법을 알기만 하면 누구나 남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입맛에 맛게 변형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능력은 단순히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잠재된 에너지일 뿐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했다는 믿음만으로도 인간은 쾌락을 얻는다. 누군가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면 그의 친구나 애인이 되기 위해 안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용적인 유학자들은 에너지를 확보했다는 '믿음'에 기대며 살아가는 미신적 태도보다는, 능력을 기술로서 통용시키기 위해 동물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인간 사회를 반추해 보는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인간성마저 기술로서 통용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성은 인간이 자신의 동물성을 억누르기위해 육성시키는 의지력이 아니라, 누구나 그 방법만 알면 스스로의 마음에 이식시킬 수 있는 알고리즘인 것이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방향과 목표를 주는 모든 가치 체계, 모든 믿음의 체계, 모든 행복의 지침은 근본적으로 서사적이며 서사적 이야기의 틀이다. 그 틀은 "이것이 가치 있는 삶이고 삶의 목표이며 의미이다. 이렇게 살아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때로 우리는 어떤 하나의 틀 아닌 두 개, 세 개의 틀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게 몇 개이건 같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이야기의 틀 속에서 갈등과 모순을 조화시키며 산다.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산다. 사회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사회도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 있지 않다. 모든 사회는 몇 개의 거대한 이야기 틀을 갖고 있고 그것들에 의해 지탱된다.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사회적 삶 전체가 '문학적'이다.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시스템1은 인상, 느낌, 성향을 만든다. 시스템2의 승인을 받으면 이들은 믿음, 태도, 의도로 변한다.

 

Heuristics and Biases(휴리스틱과 편향)

인간은 자신이 보는 것의 지속성과 정합성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서둘러 결론 내리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마음대로 쉬운 질문으로 바꾸어 이해하려 한다. 의심을 지속하기 어려워하고 과장된 믿음을 발휘한다.

 

적은 숫자 법칙에 대한 믿음(Belief in the law of small numbers), 적은 표본에 대한 연구원들의 과장된 믿음은 후광효과, 즉 우리가 사실상 전혀 모르는 사람을 잘 알고 이해한다는 느낌과 밀접하게 관되어 있다. 시스템1은 여러 증거 조각들에 기초해 풍부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사실보다 앞서간다. 서둘러 결론 내리려는 기계는 적은 숫자 법칙을 쉽게 빋으려 할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보면 그것은 과도한 의미를 갖는 현실의 반영을 생산해낸다.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는 자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입장에 있고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 공정성의 원칙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은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이처럼 개인의 처지와 상대와의 관계,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가치 있게 여겨온 원칙들, 종교적 신념에 따른 가치 등에 비추어 공정성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면 우리는 단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 공정성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더 이상 견지할 수 없게 된다. 나아가 공저성을 실현하려면 적절한 방식으로 개인과 공동체가 추구해온 가치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스티브 도나휴,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

마음속 보초가 당신은 열정을 따라 하고 싶은대로 하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허상의 국경선에 멈춰 버리면 열정도 죽는다. 허상의 국경선은 항상 두려움을 낳는다. 이 두려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믿음과 연관되어 있고, 이 잘못된 믿음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그에 저항할 용기나 통찰력이 없다면, 그 둘이 합세하여 우리를 사막 한가운데에 가두어 버릴 수도 있다. 허상의 국경선은 허상처럼 보이지 않고, 진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 국경선을 건너면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그 국경선을 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스완>

철학 바깥에 있는 문제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철학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철학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철학 유파들이 후퇴하고 있다. ... 진정한 철학은 언제나 철학 외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가 부패하면 철학도 죽는다. ... 비철학적 문제의 압력에 의하여 철학에 이끌리는 대신 철학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은 이 뿌리를 쉽게 망각한다.

 

 

헬라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자아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착각은 아마도 깨달음에 이르는 데 있어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실체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욕망을 낳고 또 그 욕망은 고통을 가져온다. 분리된 자아와 분리된 사물에 대한 관념에 집착함으로써 우리는 끊임없이 뭔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찾던 것을 얻는 순간 그 빛은 사라져버리고 우리는 또 다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만족스러운 순간은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신간>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고,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모든 일이다. - 엥케이리디온 / 에픽테토스

 

"어떤 사업도 협동조합주의, 상업주의, 그리고 중농주의를 반박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어느 시대에 등장하든 간에, 모더니티는 기존의 믿음을 산산이 부수지 않고서는 그리고 '실재의 결여'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모더니티는 다른 실재들을 발명하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포스트모던의 조건,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리오타르"

 

 

프레드 아이켈트, 롭 마키, <고객이 열광하는 회사의 비밀>

고객은 그 회사에 대해 기분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회사가 자신을 잘 알고, 이해하고, 소중히 생각하며,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며, 원칙을 공유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고객은 그 회사를 친구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그 회사와 거래를 하면 지불한 가격에 대해 좋은 가치를 제공받을 뿐 아니라, 좋은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류콴홍, <철학우화>

사람은 늘 어떤 희망을 품어야 하고, 희망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믿으려 해요. 그리고 희망은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져다주지요. 희망을 가진 사람은 늘 믿음이 있고, 이 믿음에 미래를 걸지요. ... 신념이 있기에 당신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의미가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쉽게 말해 신앙은 바로 당신의 꿈이랍니다.

 

인류 초기의 문화 활동을 살펴보면 신앙은 인류의 다양한 심리적 공허함을 채워주었고, 어려움 속에서도 평정심과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답니다. 또한 실망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게 해주었지요. 영혼의 보살핌이 있기에 인류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존 로빈슨, <인생혁명>

이 사회에는 남을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지위나 물질로 보상하는 법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대에 만연한 탐욕에 대항할 무기가 될 기증자형의 너그러움과 배려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우리 문화에서 기증자형의 특징이 긍정적으로 발현되면 모두 훨씬 너그러워지고 삶은 더 풍요로워지며 믿음이 쌓이고 불안은 줄어든다.

 

인생에 감사하는 한, 물질이라는 가리개를 넘어 자리한 의미와 목적을 잊지 않는 한, 마음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한 우리는 새롭고 멋진 인생을 즐길 수 있다. 삶을 새롭게 인식하고 믿음을 되돌리며 일상적인 것 속에서 성스러운 것을 찾고 영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인생을 새롭고 멋지게 살 수 있다.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길, 사랑을 따뜻한 담요로 삼고 평화를 편안한 베게로 삼고 기쁨을 영원한 삶의 동반자로 삼기를 기원한다.

 

 

폴 폴락, <적정기술 그리고 하루 1달러 생활에서 벗어나는 법>

교육, 도로, 보건에는 공공투자가 필요한 것처럼 가난한 농촌에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문제든 해결책을 찾을 때는 시장의 힘을 발휘하도록 할 방법을 찾는 단계를 먼저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빈곤퇴치에 보조금보다 더 큰 걸림돌이 되어온 것이 하나있다면 바로 이미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기부를 통해 사람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을 벗어나려면 그들 자신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한다. 빈곤을 탈출하는 길은 제3세계의 사업자들이 힘을 발휘하는 데 있다. 다행히도 하루 1달러로 살아가는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농들은 이미 탁월한 사업가이고, 작업장, 상점, 수리점을 운영하는 수천 명의 소규모 사업가들을 주위에 두고 있다. 이들 모두가 저렴한 비용으로 수익을 낼 기회만 얻을 수 있다면 돈을 버는 데 투자할 용의와 능력이 있다.... 무엇보다 극빈층이 스스로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저렴하고 매력적인 기회를 활용해 수익을 늘리도록 돕는 것만이 빈곤을 퇴치할 현실적인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인식하고 있다.

 

현재 개발분야 전문가들의 해결방안은 앞서 설명한 '기부를 통해 사람들이 빈곤을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과 같은 허구에 의해 주도되고 있지만,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절대 빈곤층은 스스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다. 바로 소득의 불충분이다. 그들은 또한 소득을 높이기 위해서 취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확고한 생각이 있다. IDE는 이를 받아들여 차별화되고 노동집약적이며 부가가치가 높은 수익작물, 예를 들면 다양한 과일, 채소와 허브에 투자하도록 소규모 농가를 독려해왔다. 또한 민간부문의 공급망을 개발해, 저렴한 관개시설, 종자, 비료가 보급되도록 했다. IDE와 미국의 비영리단체 테크노서브TechnoServe를 비롯한 여러 단체는 1에이커 농부들이 민간부문의 가치사슬을 통해 수확물을 팔 수 있도록 시장 접근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앞서 설명한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IDE는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250~300만의 가구가 연간 순수익을 크게 증대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물론 각 가정은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자금을 투자했다.

 

 

이현석,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꿈이 무엇이든,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든,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움직여본 경험이 단 한번이라도 있다면 분명 앞으로의 내 삶도 내가 의지하는 바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그 짤막한 문장을 통해, 하루하루 내 앞에 닥쳐오는 부질을 겸허히 받아들여 언젠가 단단히 제련된 주철을 두 손 가득 잡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그의 마지막 문장을 되뇌어본다. life is magic. 삶은 곧 마법이다..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선지자 무함마드)

오 알라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시고 숨겨진 것도 아시나니 제게 가르쳐주소서.

지금 제가 행하는 일이 지금과 미래의 저 자신과 제 믿음과 제 사람에 유용한 것이라면, 이 일을 수월하게 하시고 축복하소서.

지금 제가 행하는 일이 지금고 미래의 저 자신과 제 믿음과 제 사람에 해로운 것이라면, 제게서 이 일을 거두소서.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모든 인간은 세가지 지식과 세가지 미덕을 갖추어야 하고, 교육의 목적은 이 여섯 가지에 대한 애해를 키우는 것이다. 남자 아이든지 여아 아이든지, 모든 아이들은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과 비옥한 '토양'의 특성에 대해 배워야 하고, 또한 이러한 환경을 어떻게 지키고 누려야 하는지도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미덕은 '감사'와 '소망'과 '사랑' 이다. 누구든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인생의 아름다움과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세계 안에 갖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을 만끽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망 없이 살아가는 자, 곧 신의 공의에 대해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자들은 그 마음이 늘 우울하기 마련이다. 사랑 없이 살아가는 자, 모든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을 자신의 친지와 친척으로 여기는 '아히삼(불살생)'의 정신이 없는 사람 역시 인생의 비밀을 절대 깨닫지 못할 법이다.

 

 

박태현, <앞으로 뭐하고 살지?>

고착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뭔가 잘못된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타고난 환경 탓으로 돌린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도 자신의 무능감의 표출이라 여긴다. 그렇기에 삶에서 변화나 개선을 위한 활동이 따르지 않는다. 성장마인드는 환경에 대한 주도적 마음이다. 어려움이 닥치거나 문제에 봉착했을 때 지속적으로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걱정과 불안감으로 가득 찬 마흔에게 가장 필요한 마인드는 바로 이것이다. 이 나이에 내가 뭘 하겠어와 같은 고착마인드가 아니라 '제2의 또는 제3의 인생을 위해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와 같은 성장마인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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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면 멈췄던 생각, 망각의 늪에 잠겨 있던 기억, 새로운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생각하기와 걷기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균형을 통해, 무한히 균형을 잃었다가 되찾으면서 멀리 나아간다.

 

 

[본문발췌]

 

 

오래 걸을수록 걷기는 우리를 사로잡고, 점령하고, 우리의 몸짓과 호흡 리듬, 심장 박동을 바꿔놓는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까지 다르게 형성한다. 우리가 몰두하고 전념하는 중심활동이 되면서 걷기는 생각에 연이은 변화와 새로운 자극을 가져오고, 그것이 특별한 제약처럼 작용해 생각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오랜 걷기로의 복귀는 우리를 자연 속으로, 몸의 느린 전진 속으로, 근육과 호흡의 지구력 속으로 끌어들인다. 또 이런 걷기는 우리를 다시 풍경 속으로 돌려보내 높낮이와 거리, 땅을 의식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오랜 리듬, 심오하고 우주적인 리듬을 되찾게 하고 이동의 피로를 느끼게 하며 어느 고개, 어느 산봉우리를 돌아설 때 문득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보상으로 돌려준다. 오랜 걷기의 이 모든 면모들은 - 육체적이건, 심리적이건, 도덕적이건, 문학적이건, 철학적이건 - 최근에 폭넓게 재발견되어 칭송받고 있다.

 

 

여정이 얼마나 지속되는지는 중요치 않다. 일단 이 움직임이 시작되면 3초건 3일이건 우리는 걷거나 생각한다. 철학적 생각 속에서 위대한 여행, 긴 흐름의 항해를 이어갈 수 있고, 한평생 이어질 질문들을 파고들 수 있다. 아니면 그저 매 분, 매 시간, 일상을, 현재의 몸짓들을, 우리가 투사하는 모든 것을,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대답들을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건, 생각하기와 걷기는 서로 닮았다. 생각 또한 불안정한 균형을 통해 나아간다. 무한히 균형을 잃었다가 되찾으면서 멀리 나아간다.

 

 

진보 - 몸이 어떤 장소로 나아가는 진보, 생각이 어떤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 - 는 매번 촉발되었다가 모면되는 추락의 형태를 취한다. 철학에서건 과학에서건 서양 역사 속에서 진보는 언제나 하나의 확신에서 문제 삼기로, 두 번째 확신과 만회에서 새로운 문제 삼기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철학적 체계, 학문적 이론, 정치적 주장, 미학적 세계 모두 동일한 움직임이 되풀이된다. 넘어뜨리기, 만회하기, 다시 넘어뜨리기, 다시 만회하기, 그러면서 나아간다. 이런 형태의 걷기를 곳곳에서 '진보'라고 부르는 건 우연히 아니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은 사실 걷기를 말하는 것이다. 라틴어로 '걷기'는 Gradus, '걷다'는 Gradere이다. 진보pro-gresus는 나아가게 하는 것,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서나 정신적 세계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걷기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인간의 걷기와 깊고도 정확하게 상응한다.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빙빙 돌며 헤매지 말아야 하고, 제자리에 머물러서는 더욱 안 되며, 이쪽이든 저쪽이든 언제나 같은 쪽을 최대한 똑바로 걸어야 하고, 사소한 이유로 길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처음에는 오직 우연이 그 길을 선택하게 했을지라도, 이 방법으로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 가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어딘가 끝에는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이 아마 숲속 한가운데보다는 나을 것이다."

 

 

걷기가 절뚝이는 것이고, 넘어지다가 다시 만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여행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똑같이 지속적인 불균형, 똑같은 중심 상실과 되찾기로 이루어진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742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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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물질과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개인을 물질과 욕망의 노예,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문화, 반생태적인 환경으로 세상을 이끌 것이다.

 

양보다는 질, 작고, 간단하고, 자본이 적게 들고, 비폭력적인 기술을 활용해 개인이건 공동체건 자기 힘으로 자립할 수 있는 일이 '굿워크'가 아닐까?

 

 

[본문발췌]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 알베르트 카뮈

 

 

노동의 세 가지 목적

  • 첫째는 인간 삶에 꼭 필요하고 유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 둘째는 선한 청지기처럼 신이 주신 재능을 잘 발휘하여 타고난 각자의 재능을 완성하기 위해서

  • 셋째는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협력하기 위해서

  • 세 가지 차원에서의 이런 역할을 통해 노동은 인간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노동이 없는 인간의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동'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의 마음속에서 확신과 결심, 남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 문제를 이해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압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중간기술로 나아가기 이전에 먼저 체제부터 바꾸자, 자본주의와 이윤추구 동기를 없애자, 다국적 기업을 해체하고 관료주의를 폐지하자, 교육을 개혁하자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체제를 바꿀 방법은 약자들이 자기 힘으로 생산함으로써 지금보다 더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새로운 형태의 기술을 도입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말이지요.

 

 

지난 수백 년간에 걸쳐 기술 발전이 점점 더 커지고, 더 복잡해지고, 더 자본집약적이며, 더 폭력적인 흐름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 올바른 진단이라면 치료방법은 분명히 정반대 방향에서 찾아봐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 필요한 위의 네 가지 기준 혹은 '지침'이 모든 사람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네 가지 지침은 단순한 이론 작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과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 보자면 작고, 간단하고, 자본이 적게 들고, 비폭력적인 기술 혹은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갖춘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개인이건 공동체건 자기 힘으로 자립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기술은 보다 인간적이고 생태적이며, 화석연료에도 덜 의존하는 생활양식을 낳게 되고, 여기서 나온 생활양식은 거대하고 복잡하며 자본이 많이 들고 폭력적인 기술로 생긴 생활양식보다 인간이 지닌 현실적 욕구에 더 다가갈 수 있습니다. 위의 지침이나 기준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지침이라도 제시해야 합니다. 지침이 없으면 대안을 찾는 일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실제로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작업은 체계적인 토대 위에서 서둘러 시작할수록 더 좋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벌써 시작하여 수년간 활발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비록 힘은 적지만 서로에게 배우며 서로의 경험을 통해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돈을 모으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첫째가 돈이고 그다음에 돈으로 무얼 좀 해보자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래, 비록 생계를 위해 일을 하지만 나한테는 다른 일을 할 시간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결국 최고의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식의 최고의 일은 생계를 버는 일과 달리 사회에 빌붙어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선'을 쫓느라 '차선' 마저 놓치게 되는 시대 흐름에 휩쓸려 과거에 있었던 훌륭한 지식과 장비가 사라져 버린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당연히 더 좋은 것을 쫓아야 진보하게 되고, 이런 흐름은 환영할 만한 것이겠죠. 적어도 그런 흐름이 '최선'을 누릴 형편도 안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최소한 누릴 수 있는 '차선'이라도 앗아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서구식 경제학은 외국에서 물건을 더는 싸게 들여올 수 없을 때가 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말라고 합니다. 풍요로운 환경을 가진 푸에르토리코에 갔더니 당근을 미국의 텍사스에서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텍사스산 당근이 국내산보다 값이 더 싼 이상 푸에르토리코 농부들은 당근을 재배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시스템입니다. 중국인들이 이것을 뒤집어버렸습니다. 중국인들은 자기가 만들 수 없다고 확신하지 않는 한 외국에서 사들여 와서는안 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더 싸게 사 올 수 있다면 생산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발전이 저하됩니다. 반면에 확실히 만들어낼 수 있는 한 사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도전하게 만듭니다.

 

 

노동은 인간에게 1) 자신의 잠재력을 사용하고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2)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일을 함으로써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게 해주며 3) 품위 있는 생존을 위해 인간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을 기계나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지겹고, 무의미하며, 신경만 괴롭히는 멍청한 일을 젊은이들이 거부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노동이란 삶의 즐거움이자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노동은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점도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 좋은지를 결정하여 좋은 것은 잘 자라도록 최선을 다하고, 마찬가지로 무엇이 나쁜지를 결정하여 나쁜 것은 줄여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두 과정을 합산해서 전체적으로 커졌는지 작아졌는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바로 삶의 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위기를 인간이 진정 무엇인지를 우리 마음속에 되살리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저 역시 새로운 내용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오래된 지혜를 다시금 일깨우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여러가지 설명이 있지만 결국 인간은 신의 위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의 아들이거나 딸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에 대한 모든 윤리와 가르침은 바로 이런 통찰력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습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존재이기에 인간은 전통적 언어를 통해 신을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개별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인간이 만든 사회조직에는 이 세 가지 절대적 욕구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합니다.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불행하게 되고, 파괴적이 되며, 야만적인 자살 미치광이가 될 것입니다. 사회 정치 경제 조직에 인간의 욕구가 반영되어야 합니다. 

 

 

[옮긴이의 글]

 

슈마허는 경제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 역시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았다. 점점 커지고, 복잡하며, 자본집약적이고, 폭력적인 현대의 산업기술은 바로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결국은 소수를 위한 기술, 착취를 위한 기술,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반생태적인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전문가란 점점 덜 중요한 것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쌓느라 결국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에 대해서만 잘 알게 되는 사람들"이라는 비판은 산업사회의 소위 전문화된 지식이 전문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공동체의 좋은 삶을 구현하는데도 지극히 무력하다는 슈마허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에너지에 대해서도 지금의 과학기술은 에너지를 오직 동력을 얻기 위한 물질로써만 취급할 뿐 에너지 그 자체가 바로 모든 생명의 시작이자 끝이며, 우리 삶의 생기이자 창조의 기쁨이라는 영적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하기만 하다.

 

 

영혼 없는 노동으로 인간은 돈벌이의 수단이 되었고, 악의에 찬 경쟁으로 인간 정신은 굴종과 복종에 순응하게 되었다. 신이 주신 활력과 기쁨이라는 노동의 본질이 굴종과 굴욕이라는 노예노동으로 변질됨으로써 우리의 노동시간은 해방과 깨달음의 시간이 아니라 불안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의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일을 해도, 일을 하지 않아도 모두 불안하게 되었다. 직업이 있어도 직업이 없어도 아이들도 노인도 모두 불안하긴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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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을 통해 직접적이든, 독서를 통해 간접적이든 경험을 통해 다양한 변화와 위험에 대처하는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본문발췌]

 

 

요즘은 '내일이 있잖아'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사람들을 엄습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내일이 있기에 오늘의 근심을 잊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오늘을 어쩔 줄 몰라 하다니, 정말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나 봅니다.

 

 

'천직'이나 '사회적 사명'이라 하면 매우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 일의 의의는 돈을 버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와 관계를 맺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 일이란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자 '나다움'의 표현입니다. 저는 '나다움'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 없이 일단 한번 내딛어보는 한걸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신이 역점을 두는 대상을 몇 가지로 분산시켜둔다면 일이 잘 안 풀려 큰 피해를 보고 낙담하게 되었을 때도 그런 나를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 받은 상처 또한 일이 아닌 다른 종류의 보람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 다차원의 축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리스크에 강합니다.

 

 

무리하지 않고, 잘난 체하지 않고, 작위적이지도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식하는 것. 그렇다고 해서 굳이 노력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무리하게 자신을 크게 보이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스스로를 값싸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 바로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 자연스럽다는 것은 '부족함을 안다', '자족한다'는 말과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 사람이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포함하여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 스스로를 알고 그런 나를 긍정하는 것이 바로 자연스러움입니다.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지헤를 얻고, 의사 체험을 즐기며, 자기 내 대화를 촉진한다는 세 가지 효용이 바로 독서의 큰 장점입니다. 이러한 장점을 통해 책 읽기는 살아 있는 체험이 되고 개인의 인격 형성에도 기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읽어도 그저 권수만 늘리면 된다는 식으로 독서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논어>에는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막연하여 얻는 것이 없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보로서 받아들일 뿐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책만이 가진 효용을 살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으면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가 어떻게 형성되며,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실현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만약 일이라는 행위에서 영혼이 빠져버리면 일은 그저 단순한 스포츠와 다를 바 없으며, 그 결과로 사회 전체가 폭주하는 기계처럼 변할 것이라는 베버의 시나리오는 마치 오늘날의 시장 주도 자본주의를 예견한 듯하여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기업의 목적은 개별 기업 바깥에 있다. 기업은 사회의 기관이며 그 목적은 사회에 있다. 기업의 목적에 관한 정의는 하나밖에 없다. 바로 고객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노베이션으로 만드는 것은 과학이나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경제와 사회에 가져오는 변화다" - 피터 드러커, <매니지먼트>

 

 

비즈니스 퍼슨은 전차의 궤도가 바뀌는 역사의 '전철'을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안에 하나의 명확한 좌표축이 있다면 시대의 변화를 재빠르게 포착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터입니다. 어떤 일에서건 경제 상황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명확한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현재 자신의 위치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잘못된 판단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다양성이란 나의 외부에 다른 사람이 있고 다른 시각이 있어서 그것들이 각자 나름대로 공존하며, 동시에 내가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486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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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은 확률적 가능성이다. 데이터 양과 종류가 많아지고 예측 방법이 발달함으로 예측의 정확도는 높일 수 있으나 100% 확실성을 담보할 수도, 담보할 필요도 없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는 불확실성 속에서 선택과 집중, 다양성이 균형을 이루며 여러 가능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본문발췌]

 

 

"사람들은 만병통치약을 찾는다. 사람들은 모두를 치료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비방을 찾는다. 19세기부터 20세기 대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학은 보편적인 것에 집착했다. 심리학자, 의학자, 경제학자들은 우리 모두의 행동을 결정하는 규칙을 찾아내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지난 10년 내지는 15년 동안 과학 분야에서 일어난 위대한 혁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편성의 추구로부터 다양성의 이해로 옮겨간 것이다. 이제 의학 분야에서 우리는 단지 암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해서아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당신의 암이 내 암과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어한다." - 말콤 글래드웰

 

 

셀 수 있는 모든 것을 세고, 잴 수 있는 모든 것을 재어라. 그리고 잴 수 없는 것은 잴 수 있게 만들어라. - 갈리레오

 

 

'큰 데이터'는 문법적으로 잘못되었다. 그것은 마치 '큰 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차라리 '많은 데이터' 또는 '풍부한 데이터'라고 해야 한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확장 속도가 중요하다.

 

 

사실상 한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가 그 사람이 미래에 무엇을 할지를 예측하게 해준다. 과거에는 지역이나 성별과 같은 무미건조하면서도 핵심적인 인구학적 특징들을 많이 사용한 반면에 예측 분석은 이를 더 확장하여 최근성, 빈도, 구매, 금융활동, 통화 및 웹서핑 등 '행위 예측 변수'를 포함하는 데이터를 섭취한다. 상당수의 경우 이러한 행위들은 가장 가치 있는 데이터이다. 우리가 예측하고자 하는 것은 항상 특정한 행위이며, 실제로 행위가 행위를 예측하게 해준다. 장폴 샤르트르가 말하였듯이 "[한 사람의] 행동이 그의 진정한 자아를 말해 준다."

 

 

과거와 현대의 경계를 가르는 혁명적 사고는 바로 리스크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엔 미래란 단순히 신들의 변덕이 아니며, 사람들이 자연에 순응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인간이 이러한 경계선을 넘어설 방법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미래란 단지 과거의 거울이었거나 예언자나 점쟁이의 음산한 영역에 불과했다. - 피터 번스타인, <신들에 맞서다: 리스크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

 

 

세상에는 세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이다. - 영국 총리 벤자민 디즈랠리, 마크트웨인이 인용해서 유명해짐.

 

 

예측을 위한 모델링을 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일반적 원칙을 수립해야 하고 확보한 데이터에서 잡음을 걸러내야 하는 핵심적 도전과제에 직면한다.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학습 대상인 데이터에 설사 수백만 개 또는 수십억 개의 사례가 존재하더라도 미래에 맞닥뜨릴 상상 가능한 상황들이 얼마나 많은지와 비교해 보면 그것은 여전히 제한적인 부분집합에 불과하다. 학습사례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한 조합의 수는 기하급수적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많은 학습과 지나치게 적은 학습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학습 프로세스를 설계하는 것은 가장 뛰어난 과학자조차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고 신비로운 것으로 느껴진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과학보다 예술이 필요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 빠질 수 없는 구성요소이다. 예술은 그것을 작동하게 만들고, 과학은 그것이 작동하는 것을 증명해준다.

 

 

대리석 덩어리를 볼 때면 내 앞에 자연스럽게 서 있는 듯한 인물상이 보인다. 그 인물은 자세한 행위를 완벽하게 취하고 있다. 나는 단지 이 사랑스러운 환영을 가두고 있는 거친 장벽들을 깍아내어 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이도록 하는 일을 할 뿐이다. - 미켈란젤로

 

 

대개의 경우에 평균은 평범하다. 그러나 의사결정을 할 때 평균은 대체로 우월하다. - 제임스 서로위키, <대중의 지혜>

 

 

전문가든 보통사람이든 더 확신에 찬 예측을 더 정확한 예측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지나친 확신이 대개는 실패의 원인이다. 불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나아질수록 우리의 예측 또한 나아질 것이다. - 네이트 실버, <신호와 잡음:왜 많은 예측이 실패하는 반면에 어떤 예측은 성공하는가>

 

 

바보들은 철석같이 확신하는데 지식인은 언제나 회의에 차 있다는 것이 이 세상의 문제이다 - 버트란트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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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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