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의 '무소유', '텅빈충만'에서 주는 교훈이나, 작고 소박한 삶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물질적 부와 유행에 따른 소비보다는 우아하게 가난한 삶이 행복을 유지하는 더 나은 방법임을 알려준다.

 

 

[본문발췌]

 

윤택한 삶은 많은 돈이나 물건을 쌓아 두는 것과 무관하다. 인간은 오로지 올바른 태도를 통해서만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너도나도 욕심을 부리며 손을 뻗치는 곳에서 포기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자신의 척도로 삼지 않는 자주성, 우리의 경제적인 쇠퇴는 전적으로 불행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생활 방식을 세련되게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인식이 바로 이런 올바른 태도에 속한다.

 

 

가진 자들은 수중의 돈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도 없는 법이다.

 

 

진정한 가난은 물질적인 것의 결핍이 아니라 건강이나 아름다움, 부유함, 무엇을 쫓든지 완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실제로 돈이 없어도, 아니면 최소한 아주 적은 돈으로도 얼마든지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생활양식'이다. 이 말은 오랫동안 소비재 산업의 투쟁 구호였다. 앞으로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비결은 독자적인 생활양식일 것이다.

 

 

편안함은 비좁음을, 우아함은 공간의 여백을 사랑한다.

 

 

집에 들이는 돈이나 집이 위치한 동네가 아니라 손님들을 맞아들이는 자연스러움을 통해서 집은 아름다워진다. 친구들이 모여드는 집을 가진 사람은 부유하다. 그리고 가슴 답답한 비 오는 날에 찾아갈 수 있는 친구를 가진 사람도 부유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과 흐름을 쫓아다니는 사람은 많은 돈을 낭비해가며 아주 긴장되고 획일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와 반대로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돈을 절약하고 자주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규격화되고 동질화된 시대에 사치가 아니겠는가.

 

 

인간은 포기할 줄 알아야만 만족감을 극대화할 수 있다.

 

 

내 힘이 닿는 일에 내 자존심을 걸면 부자가 될 것이고,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에 내 행복을 걸면 가난할 확률이 아주 높다

 

 

삶을 보람 있게 해주는 것들은 수중의 돈이 감소한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의 내적인 자주성은 지금까지 결코 수입의 문제가 아니다. 박식함이나 예의범절도 마찬가지다. ... 정중함, 친절함, 다정함, 도와주려는 마음, 삶을 쾌적하게 해주는 이런 모든 것은 참으로 무한할 수 있으며, 물질적인 여건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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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조각들로 맞춰진 그림, 굴절과 불순물이 첨가된 기록과 해석 가운데, 역사로 부터 제대로 배우고 이해함으로써 변화와 행동, 진보로 향할 수 있다.

 

 

[본문발췌]

 

역사는 분실된 조각들이 많은 거대한 조각그림 맞추기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림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특정한 견해에 물들어 있던, 그리고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사실을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이미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지,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항상 굴절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우리의 최초의 관심사는 그 책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들이 아니라 그 책을 쓴 역사가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d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는 것이다.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관한 기록'이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는 데에 있다.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가 거의 반복되지 않는 하나의 이유는 두 번째로 공연할 때의 등장인물들은 첫 번째 공연의 결말을 알고 있고, 따라서 그에 관한 지식이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은 상당한 정도로까지 해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역사적 해석은 항상 도덕적 판단 - 또는, 더 중립적인 어감의 용어가 좋겠다면, 가치판단 - 을 포함하는 것이다.

 

역사란 획득된 기술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할 때에야만 의미와 객관성을 가지게 된다.

 

역사는 그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며, 혹은 - 만일 여러분이 낡은 투의 단어에 트집을 잡지 않는다면 - 진보이다.

 

'역사가의 진정한 관심은 특수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안에 있는 일반적인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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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실도 서술하는 사람의 관점과 생각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들로 표현될 수 있다. 대부분의 역사서도 그것을 기록한 승자의 관점에서 씌어진 이야기다.

 

 

[본문발췌]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역사는 과거를 '실제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방송뉴스와 신문보도가 현재를 '실제 그러한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의 선택과 선택한 사실의 해석, 역사 서술의 핵심인 두 가지가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를 둘러싼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 일자나 집필 일자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것이 때로 훨씬 많은 것을 누설한다." - 에드워드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객관적인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역사가가 허락할 때만 말을 한다. 역사가는 제멋대로 사실을 만들거나 바꿀 수 없지만 사실의 노예인 것도 아니다. 사실과 역사가는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기의 사실을 가지지 않은 역사가는 뿌리 없는 풀과 같고 자기의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죽은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E. H. 카)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전문 역사연구자가 쓴 민족사에서부터 평범한 시민이 쓴 소박한 개인사까지 다 마찬가지다. 역사는 어떤 사실을 선택해서 어떤 관계를 맺어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행동이며,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욕망이다. 사람은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안고 산다. 만약 모든 욕망을 다 채워서 어떤 결핍도 느끼지 않는다면 더는 행동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새로운 욕망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칼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제도가 아예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 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 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인 개별성을 잃게 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사람은 그 어떤 위대한 이념이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 때 행복을 느낀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존엄한 인간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엄성을 확신하는 것과 똑같은 무게로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자유주의적 각성'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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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공통적으로 효율성을 중시하고, 사람을 기계의 톱니처럼 부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누리고, 평등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를 추구한 조지 오웰의 스페인 내전 참전기....

 

 

[본문발췌]

 

무엇보다도 혁명과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갑자기 평등과 자유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느낌이 있었다. 인간은 자본주의 기계의 톱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병영 전체는 더럽고 혼란스러웠다. 의용군은 건물을 점령하기만 하면 모두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그것도 혁명의 부산물인가 보다. 구석마다 부서진 가구, 망가진 안장, 놋쇠로 만든 기병대 군모, 기병대가 쓰던 빈 칼집, 썩어가는 음식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음식, 특히 빵은 엄청나게 낭비되었다. 내가 있던 내부반에서만도 식사 때마다 빵을 들통으로 하나씩 버렸다. 민간인은 빵이 모자라 난리인 것을 생각하면 면목 없는 일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많은 일에 능숙하다. 그러나 전쟁만큼은 아니다.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비능률에 경악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시간을 안 지키기 때문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어떤 외국인이든 반드시 배우게 되는 스페인 단어가 마냐나 - '내일'(문자 그대로는 <아침>) - 이다. 그들은 가능하다고만 생각되면, 오늘 할 일을 마냐나로 미룬다. 이것은 워낙 악명 높은 악습이라서 심지어 스페인 사람들끼리도 그것을 놓고 농담을 한다. 스페인에서는 식사에서 전투에 이르기까지 정해진 시간에 되는 것이 없다. 보통은 늦는 쪽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너무 빠르다. 아마 어떤 일이든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행동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8시에 떠날 예정인 기차는 보통 9시에서 10시 사이에 떠난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번쯤은 기관사의 개인적인 변덕 때문에 7시 반에 떠난다. 이런 일에 당하면 약간 약이 오륵 된다. 입으로야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우리 북쪽 사람들과 같은 시간 강박증이 없다는 점을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 역시 그런 강박증을 가진 북쪽 사람 아닌가.

 

 

참호전에서는 다섯 가지가 중요하다. 땔감, 식량, 담배, 초, 그리고 적이다. 겨울의 사라고사 전선에서는 이 다섯 가지가 이런 순서별로 중요했다. 적이 가장 나중이었다. 밤에는 늘 기습 공격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불안했다. 그러나 그때를 제외하면 아무도 적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검은 벌레들에 지나지 않았다. 이따금씩 뛰어다니는 것이 눈에 띌 따름이었다. 실제로 양군이 가장 관심을 쏟는 문제는 추위를 쫓는 것이었다.

 

 

사실 이 전쟁에서는 인간의 능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대를 제대로 맞추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철학적으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는 양극단이다. 실제적으로, 즉 목표로 하는 사회의 형태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차이는 주로 강조점의 차이이다. 그러나 그 차이 때문에 절대 화해할 수가 없다. 공산주의자는 늘 중앙 집권과 효율을 강조한다. 무정부주의자는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내가 전선에서 알게 된 통일사회당 의용군 병사들이나, 이따금씩 만나는 국제 여단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나 배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일은 후방의 기자들이 담당했다. 우리에게 반대하는 팸플릿을 쓰고 신문에서 우리를 헐뜯는 사람들은 모두 안전한 집에, 혹은 기껏해야 발렌시아의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다. 총알과 진창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이었다. 당 사이의 불화에서 비롯된 비방은 물론이고 모든 일반적인 전쟁 선전 활동, 즉 탁자를 치며 열변을 토하거나, 과장된 영웅담을 늘어놓거나, 적을 헐뜯는 일들 역시 보통 모두 싸우지 않는 사람들, 많은 경우 싸우느니 차라리 백 킬로미터 가량 먼저 달아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전쟁에서 우울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좌익 언론도 우익 언론만큼이나 똑같이 거짓되고 부정직하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었다는 점이다.

 

 

모든 전쟁이 똑같다. 병사들은 전투를 하고, 기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진정한 애국자라는 사람은 잠깐의 선전 여행을 제외하면 전선 참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싸워서 지는 것이 아예 싸우지 않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때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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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밝혀진 뇌의 구조와 작동원리데로 라면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의 기억과 의식을 인공 신쳉와 뇌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사이버 공간에 자아를 업로드/다운로드 하던 것이 현실이 될지도....

 

 

[본문발췌]

 

 

여러 상대와 나누는 대화부터 당신이 속한 문화까지, 삶의 모든 경험들은 당신 뇌의 미시적인 세부구조를 변화시킨다. 신경학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누구인가는 당신이 어떤 곳들을 거쳤는가에 달려 있다. 당신의 뇌는 끊임없이 자신의 회로를 다시 작성함으로써 변신한다. 그리고 당신의 경험들은 유일무이하므로, 당신의 신경 연결망의 광역적, 세부적 패턴들도 유일무이하다. 그 패턴들은 평생 동안 변화를 멈추지 않으므로, 당신의 정체성은 움직이는 표적과도 같다. 당신의 정체성은 절대로 종착점에 이르지 않는다.

 

 

인간은 얼어붙은 툰드라부터 고산지대와 번잡한 도심까지 온갖 다양한 환경에서 번성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 상당히 미완성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모든 회로가 배선된 상태로 ('고정 배선' 상태로) 태어나는 대신에, 인간의 뇌는 세부적인 삶의 경험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 그래서 어린 뇌는 서서히 환경에 적합한 모습을 갖추기까지 오랫동안 무력한 상태에 머문다. 인간의 뇌는 '생후 배선'된다.

 

 

당신이 지금의 당신으로 되는 과정은 이미 있었던 가능성들을 쳐내는 과정이다. 당신이 지금의 당신으로 된 것은 당신의 뇌 속에서 무언가가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10대 시절에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예정되로 그 시절에 일어나는 뇌 변화와 관련이 깊다. 그 변화는 우리를 자기의식이 더 강하고 위험 감수 성향이 더 강하며 또래 압력에 휘둘려 행동하는 성향이 더 강한 사람으로 만든다. 전 세계의 고뇌에 찬 부모들에게 전할 메시지가 있다. 10대 청소년들의 성품은 단순히 선택이나 마음가짐의 결과가 아니다. 그 성품은 강렬하고 불가피한 신경학적 변화의 기간이 만들어내는 산물이다.

 

 

기억은 삶의 한 순간을 비디오카메라로 정확히 촬영하여 보존하는 기능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이 무언가를 기억하려면, 당신은 과거에 발생했던 불안정한 뇌 상태를 되살려야 한다. 그 상태가 바로 기억이다.

한 사건에 대한 당신의 기억은 당신의 세부적인 경험들에 관여한 뇌세포들의 유일무이한 연결망으로 표현된다.

 

 

얼핏 느끼기에 당신은 감각들을 통해 세계에 직접 접속하는 듯하다. 당신은 손을 내밀어 물리적 세계의 물질, 이를테면 이 책이나 당신이 앉은 의자를 만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촉각은 직접 경험이 아니다. 당신은 손가락에서 촉각이 일어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 모든 일은 뇌의 촉각 담당 중추에서 일어난다. 다른 감각 경험들도 마찬가지다. 시각 경험은 당신의 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청각 경험은 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후각 경험은 코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의 모든 감각 경험은 계산 능력을 갖춘 물질인 당신의 뇌에서 일어나는 온갖 활동의 산물이다.

 

 

의식적인 당신은 당신의 뇌 활동에서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행동, 믿음, 편견은 모두 당신의 뇌 연결망들에 의해 조종되며, 당신은 그 연결망들에 의식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우리 뇌의 무의식적 장치는 항상 작동하지만, 그 작동이 워낙 원활하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 작동을 쉽게 알아채는 경우는 오직 그 작동이 멈췄을 때뿐이기 십상이다.

 

 

훈련된 솜씨는 뇌의 미시적 구조 안에 새겨진다.

 

 

평생 내내 우리의 뇌는 우리가 수행하는 과제를 담당할 회로를 형성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킨다. 예컨대 걷기, 파도타기, 저글링, 수영, 운전 등을 담당할 회로를 형성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렇게 뇌 구조에 프로그램을 새겨 넣는 능력은 뇌의 가장 강력한 묘수들 중 하나다. 뇌는 복잡한 운동 과제를 전담하는 회로를 하드웨어에 새겨 넣음으로써 그 과제를 아주 적은 에너지만 써서 수행할 수 있다.

 

 

의식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때,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할 필요가 있을 때 개입한다. 뇌는 최대한 오랫동안 자동 조종 상태를 유지하려 하지만, 예상 밖의 변화구가 난무하는 세계에서 그것은 때때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의식의 역할은 놀라운 상황에 반응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의식은 뇌 내부의 갈등을 정리하는 작업에서도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호흡에서부터 침실 구석으로 가서 먹을거리를 입에 넣는 행동과 스포츠 숙달까지 광범위한 과제들에 수십억 개의 뉴런들이 참여한다. 이 과제들 각각을 뇌 속의 방대한 연결망들이 담당한다. 그런데 뇌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이를테면 당신은 아이스크림을 향해 손을 뻗지만 그것을 먹으면 후회하리라는 것을 안다고 해보자. 이런 상황에서는,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유기체-당신-와 장기적 목표들에 비춰볼 때 무엇이 최선인지 결정해야 한다. 의식은 이 특별한 관점을 가진 시스템이다. 뇌의 어떤 다른 하위시스템도 이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의식은 상호작용하는 무수한 요소들, 하위 시스템들, 훈련을 통해 새겨진 회로들의 통제권자로 구실할 수 있다. 의식은 전체 시스템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우리는 거의 늘 우리 자신의 정신적 세계 안에서 돌아다닌다. 거리에서 낯선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지나친다. 그러나 무언가가 우리의 무의식적 예상을 벗어나면, 의식적 주의 집중이 작동하여 현재 상황을 신속하게 모형화하려고 애쓴다.

 

 

아이스크림을 먹을까 말까? 이메일 답장을 지금 보낼까? 나중에 보낼까? 어떤 신발을 신을까? 우리의 일상은 수많은 자잘한 결정들로 구성된다.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 어떻게 반응할지, 먹을지 말지 등에 관한 결정들 말이다. 결정에 관한 초기 이론들은 인간이 선택지들의 이익과 손해를 따져 최적의 결정에 이르는 합리적 행위자라고 전제했다. 그러나 인간의 결정을 과학적으로 관찰한 결과들은 그 전제를 반박한다. 뇌는 서로 경쟁하는 여러 연결망들로 이루어졌으며, 연결망 각각은 고유한 목표들과 욕망들을 가졌다.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말지 결정할 때, 당신의 뇌 속 일부 연결망들은 당 섭취를 원하는 반면, 다른 연결망들은 장기적인 몸매를 고려하여 반대표를 던진다. 또 다른 연결망들은 당신이 내일 체육관에 가기로 약속한다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당신의 뇌는 경쟁하는 정당들로 구성된 의회와 유사하다. 정당들은 국가라는 배를 조종하기 위해 끝까지 싸운다. 당신은 때때로 이기적으로 결정하고, 때로는 자비롭게, 때로는 충동적으로, 또 어떤 때는 장기적인 전망을 고려하여 결정한다. 우리는 복잡한 존재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많은 욕망들로 이루어졌고, 그 모든 욕망들이 저마다 통제권을 쥐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은 모든 것의 핵심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우리가 주위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는지의 핵심에 의사결정이 놓여 있다. 선택지들을 평가하는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들의 인질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는 지혜롭게 현재를 지휘하거나 미래를 계획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물론 단일한 정체성을 지녔지만, 당신의 정신은 단일하지 않다. 오히려 당신은 경쟁하는 많은 욕망들의 집합이다. 뇌 속에서 선택지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회를 위해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당신의 뇌가 정상으로 작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당신이 먹는 식품에서 유래한 영양분 말고도, 당신이 들이쉬는 산소 말고도, 당신이 마시는 물 말고도, 이것들에 못지않게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타인들이다. 정상적인 뇌 기능은 우리 주위의 사회적 연결망에 의존한다. 우리의 뉴런이 생존하고 번성하려면 타인들의 뉴런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함께 산 부부는 얼굴이 서로 닮는다는 사실 말이다. 결혼 기간이 길수록, 이 효과는 더 강하게 나타난다. 여러 연구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이것은 단지 부부가 같은 옷을 입거나 같은 머리모양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살면서 서로의 표정을 흉내 내다 보니 주름의 패턴이 똑같아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통증 매트릭스는 우리가 타인들과 연결되는 방식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누군가가 주삿바늘에 찔리는 모습을 당신이 보면, 당신의 통증 매트릭스의 대부분이 활성화된다. 당신이 실제로 찔렸다고 알려주는 구역들은 활성화되지 않지만, 통증에 대한 감정적 경험을 담당하는 구역들은 활성화된다. 다시 말해, 통증을 느끼는 타인을 지켜볼 때 사용되는 뉴런 장치는 스스로 통증을 느낄 대 사용되는 뉴런 장치와 동일하다. 바로 이것이 공감의 토대다. 타인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타인의 통증을 느낀다는 것이다. 타인의 상황에 자신이 처했다면 어떠할지를 당신은 불가항력적으로 시뮬레이션한다. 영화와 소설을 비롯한 이야기들이 강력한 흡인력을 바루히하고 인류 문화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이유가 바로 이같은 우리의 시뮬레이션 능력에 있다.

 

 

사회적 아픔(이를테면 배제당할 때 느끼는 아픔)에 의해 활성화되는 뇌 구역들은 신체적 아픔에 의해 활성화되는 구역들과 같다.

 

 

우리가 누가 될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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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믿고 두려움의 감정을 극복할 때 삶의 전환, 새로운 변화, 그리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두려움(공구, 恐懼) [명사] 두려운 느낌.

[비슷한 말] 근심, 무서움, 겁, 걱정, 공포

 

(네이버 영어사전) fear, dread, terror, horror; (갑작스러운) fright, panic

두려움에 떨다 tremble[shake] with fear[fright; horror]

 

 

[글과 책 속에 쓰인 '두려움'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류쉬안, <심리학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두려움에 내 자유를 저당 잡히고 싶지 않다.

 

 

법륜 스님. <인생수업>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변하는 것을 봤을 때 괴로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생성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걸 깨쳐서 집착을 놓아버리면, 생겨난다고 기뻐할 일도 없고 사라진다고 괴로워할 일도 없어집니다. 그것을 직시하면 두려움도 아쉬움도 없을 텐데, 부분적으로 인식하니까 없어졌다고 생각해서 아쉬움이 생기고, 없어질까봐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나 늙음도 죽음도 단지 변화일뿐임을 알고 나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바버라 브래들리 해커티, <인생의 재발견>

당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걱정이 될 것이다. 우리의 뇌는 변화에 저항하고 편도체는 안전을 지향하기에. 그러나 두려움이 과연 극복할 수 없는 장애일까? 그것은 벽돌로 된 벽일까 아니면 다가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저절로 열리는 자동문일까? 우리의 뇌는 단기적으로는 안전을 선호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의미와 도전과 새로움을 추구하기에는 말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떠나든, 머물든>

떠난다는 건 스스로 준비하고 버리는 일이며,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이다.

 

 

오르한 파묵, <내이름은 빨강>

삶에서 추억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두려운, 망각되는 것의 두려움....

 

 

나탈리 골드버그, <글쓰며 사는 삶>

두려운 것이 떠오르면 피하지 말고 맞서라. 그 곳에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두려움의 주변을 멤돌며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중해 기행>

지난날의 미를 전혀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세이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길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하루하루 편협하게, 광적으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전투를 치른다.

 

바람처럼 떠돌던 무애인(無碍人) 조르바를 만남으로써 그는 자신의 고뇌의 원인이 집착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집착의 원인인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자유의 최대의 걸림돌을 뛰어넘는다. 자유의 핵심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대다수의 사람은 지나친 익숙함도 싫어하지만 잦은 변화도 싫어한다. 그것은 새로움이 주는 이중적인 속성 때문이다. 새로움이란 기본적으로 잘 모르는 것이고 불확실한 것이다. 그것은 호기심과 함께 두려움을 일으킨다. 대다수의 인간은 새로운 것에 대한 즐거움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낀다. 행동과학 분야의 전문 칼럼리스트인 위니프레드 갤러거는 <NEW>에서 '새로움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세 분류로 나눴다. 새로움을 좋아하는 사람(네오필리아(Neophilia)), 새로움을 두려워하는 사람(네오포비아(Neophobia)), 새로움을 좋아하면서 두려워하는 사람이 그것이다.

 

우리는 두려움 속에 갇힐 게 아니라 두려움을 직면하고 이를 타개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 뒤에 감춰진 아름다움과 대면할 필요가 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우리를 이렇게 격려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은 도전과 준비된 모험은 여행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우리는 무모한 위험이 아닌 계산된 위험으로 걸어 들어갈 필요가 있다. 계산된 위험의 정점에까지 도달하면 두려움은 오히려 힘을 잃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긴장은 두려움이 아니라 에너지가 돼 여행자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여행에서뿐만 아니다. 계산된 위험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 턱을 한 번 넘어서는 것. 그것은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핵심이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전의 책략이다. 만일 당신이 두려움 때문에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조셉 캠벨의 <신화와 인생>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삶의 길을 가다보면 커다른 구멍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그렇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부풀려진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여행을 떠나면 당신은 종종 커다란 장애물과 마주할 것이다. 뛰어넘으라. 그 장애물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높진 않다. 아니,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 높이 뛰어오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용기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도전이며 건강한 스트레스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기쁨은 순수한 즐거움이 아니라 스트레스와 즐거움이 버무려진 '칵테일 감정'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결코 두려움을 떨칠 수 없고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삶은 대가를 필요로 한다. 불편을 거쳐야 만족은 깊어지고, 두려움 앞에 마주 서야 즐거움은 빛나게 마련이다. 두려움이 없는 게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용기다. 두려움과 맞설 때 당신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확실'하다는 것은 돌처럼 굳고 강하고 분명하고 틀림없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불확실성 그 자체다. 불확실성은 그 자체로 불안과 공포를 준다. 위험은 예측 가능하기에 어느 정도 예방하거나 피할 수 있지만, 불확실성은 예측 불가능하기에 더 높은 강도의 불안을 안겨준다. 고질라 같은 거대 괴물보다 메르스처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더 공포스러운 법이다. 인간은 불확실성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확실한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설명이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예측하고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지식은 지적 호기심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동력으로 삼아 발달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신화나 종교라는 이름으로, 어떤 사람들은 철학이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 불확실한 세상을 설명해 왔다. 그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통제감과 안도감을 준다.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은 불확실성과 즉흥성에 기초한다. ... 여행은 불확실성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는 우리에게 불확실성과 친구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것처럼 잘 닦여진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때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별로 가지 않는 길이라 불편하고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과 두려움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감내해야 할 조건이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명확한 방향을 정하고 확신에 차 걷는 사람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뎌낼 줄 알는 사람들이다. 다만 자신이 걷는 길 자체를 사랑하고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자신의 시도 하나하나가 모여 곧 길이 된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은 결국 삶으로의 여행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어떤 '부름'을 들을 때가 있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내적 신호가 북소리처럼 울리면, 인생에 있어 전환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 시기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의식을 치르려고 한다. 그 의식을 통해 지난 시기를 매듭짓고 새 시기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의식이 바로 여행이다. 그렇기에 여행지에서는 삶의 전환점에 서 있는 수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앞둔 학생,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진출을 앞둔 사람,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 은퇴 후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 등 삶의 전환기에 놓인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길 위에 있다. 그들의 여행은 지난 시간의 수고에 대한 보상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삶의 전환기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설렘과 두려움을 모두 느낀다. 그렇기에 이들은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통해 이제 그들이 곧 마주할 새로운 삶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것이다. 안전한 정착을 위한 리허설을 갖는 셈이다. 그들은 전환기의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경험을 미리 얻게 된다. 인생은 전환의 연속이다. 새가 털갈이를 하고, 뱀이 허물을 벗고, 곤충이 변태를 하듯이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때가 되면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더 큰 만남을 위해 떠나야 한다. 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 거부의 대가는 혹독할 수 있다. 조셉 캠벨은 <신화의 인생>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만일 우리가 부름에 대해 떠나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를 생각해 낸다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사회 속에 남아 있는 경우, 그 결과는 부름을 따랐을 때에 생기는 결과와 판이하게 달라진다.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을 요구되는 모험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인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여행을 몹시 갈망하고 있다면, 이는 어쩌면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삶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강신주, <감정수업>

당황 (CONSTERNATIO) : 멘붕, 즉 멘탈붕괴와 함께하는 두려움, <채널리 부인의 연인> D.H.로렌스

"당황이라는 감정인 인간을 무감각하게(stupefactum) 만들거나 동요하게(fluctuantem) 만들어 악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두려움이라고 정의한다."

 

영광 (GLORIA) : 모든 이의 선망으로 타오르는 위엄,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영광은 우리가 타인이 칭찬할 거라고 상상하는 우리 자신의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METUS) : 과거가 불행한 자의 숙명, <유령> 헨리크 입센

"두려움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다."

불행한 과거는 과거지사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질식할 것 같은 무게를 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를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금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노해, <다른길>

나는 실패투성이 인간이고 앞으로도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지만, 내가 정의하는 실패는 단 하나다.

인생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 살지 못하는 것!

진정으로 나를 살지 못했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죽음의 두려움조차 아무것도 아니다.

 

 

헬라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생활의 많은 부분을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색칠을 하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집착을 버린다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일상에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차이는 넓고도 포괄적인 자아의식을 지니고 두려움과 자기보호의 경계선 뒤로 움츠러들지 않아야 한다.

 

 

프란스 요한슨, <메디치 효과>

두려움과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다. ... 두려움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선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과 타협하고, 현재 지니고 있는 것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것은 당신이 모든 것을 잃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일을 실행해나갈 수 있을 만큼 편안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 ... 우리는 두려움을 항상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관리할 수는 있다.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실패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교차적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진할 수 있다.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용기는 두려움에 저항하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삶의 큰 변화는 일상의 익숙함과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제 이런 것들과 용기 있게 이별해야 한다. 작지만 삶의 변화와 혁명은 일상에서 '익숙함'과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부디 익숙한 생각과 습관에서 탈출하라. 그리고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것들에 눈을 돌리고 집중하라. 감각의 회복은 거기에서 시작한다. 흰 구름 걷히면 그대로가 청산이다. 오염된 생각과 습관의 힘을 걷어 내면 그대로가 생생한 감각의 꽃이 피어난다.

 

사람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은 저만치 던져 버리고 흥겨워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무디구나. 죽음의 길에 있으면서도 태평하구나. 무지 때문에 오는 불안에서 벗어나 안온한 평화를 얻기 위하여, 욕망 때문에 겪는 괴로움에서 해탈하기 위하여 나는 출가하고자 한다. - 싯다르타.

 

내가 뿌린 말의 씨앗들은 어디서 어떻게 열매 맺었을까.... 향기롭고 지혜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 위해 / 먼저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쳐야 합니다. // 거짓된 말 한마디가 삶을 헛되게 하고 / 진실한 말 한마디가 삶을 알차게 합니다. // 허영에 찬 말 한마디가 근심과 두려움을 주고 / 신념에 찬 말 한마디가 희망과 광명을 줍니다. //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 칭찬의 말 한마디가 삶의 길을 평탄케 합니다. //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하고 / 사랑 담긴 자비의 말 한마디가 삶을 복되게 합니다. // 겸허한 말 한마디가 우정을 두텁게 하고 / 덕스러운 말 한마디가 편안함과 넉넉함을 줍니다. // 차분한 말 한마디가 고요함을 자아내고 / 깊이 있는 말 한마디가 잔잔한 기쁨을 줍니다. // 때에 맞는 위트 있는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 주고 / 조리에 맞는 말 한마디가 지혜를 자아냅니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영화 <쇼생크의 탈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두려움은 너를 포로로 붙잡아 두지만, 희망은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더 많이 가질수록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늘어날 뿐이다. 여행지에서처럼 꼭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일상에서도 여행자처럼 자유로워질 것이다.

 

 

가오싱 젠, <영혼의 산>

선율보다 더 고상하고, 어법과 문법의 한계 너머에 있고 주어와 술어 사이의 구별이 없는, 인칭을 초월하고 논리를 깨뜨리며 느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미지에도, 비유에도, 생각들의 연상이나 상징에도 의존하지 않는, 순수하고, 맑고, 음악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언어를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슬픔과 기쁨을, 고독과 위안을, 난처함과 기대를, 망설임과 결단을, 약함과 용기를, 질투와 후회를, 평온함을, 초조와 자신감을, 관대함과 옹졸함을, 자비와 증오를, 연민과 실의를, 담백함과 평화를, 비열함과 악의를, 고귀함과 악독함을, 연민과 실의를, 담백함과 평화를, 비열함과 악의를, 고귀함과 악독함을, 잔혹함과 선량함을, 열정과 냉담을, 동요하지 않음을, 솔직함과 무례함을, 허영과 탐욕을, 멸시와 존경을, 자만과 의심을, 겸손과 거만을, 고집과 분개를, 노함과 치욕을, 회의와 경악을, 권태와 혼미와 갑작스런 깨달음을, 그리고 끝내는 다시 모호해지고 아무리 명백히 하려 해도 명백해지지 않는, 이 모든 것으로 인한 출발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을 그런 언어를?

 

 

최인철, <굿 라이프>

소유물은 비교를 불러일으키지만 경험은 비교를 유발하지 않는다. 경험은 우리를 비교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경험의 삶이 곧 무소유의 삶인 이유는 무소유의 본질이 소유가 유발하는 비교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소유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소유의 삶이 부담스러운 우리에게 경험의 삶은 아주 좋은 대안이다.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내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다하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수업>

사랑, 정의 내리기조차 매우 힘든 이것은 삶에서 유일하게 진실하고 오래 남는 경험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반대말이고, 관계의 본질이며, 행복의 근원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가장 깊은 부분이고, 우리 안에 살면서 우리를 연결해 주는 에너지입니다. 사랑은 지식, 학벌, 권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행위 너머에 있습니다. 또한 삶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유일한 선물입니다. 결국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환상과 꿈, 공허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은 진실의 근원입니다. 

 

두려움fear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의 약자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과거의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미래의 두려움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이런 두려움은 한 가지 좋은 역할을 합니다. 곧, 우리에게 사랑을 선택하도록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성장과 치유의 갈망입니다. 이는 또 다른 선택의 기회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한 선택, 두려움 대신 사랑을, 환상 대신 현실을, 과거 대신 현재를 선택하기 위한 기회입니다. 만일 우리가 두려움을 이겨 낼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면, 만일 그 많은 기회들을 이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꿈꾸기만 해온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편견에서 자유로워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죽음을 앞둔 사람은 바로 그 궁극적인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과 마주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깨닫습니다. 죽음이 자신을 파괴하지도 못하며,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리란 것을.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두려움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우리에게 두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 죽음은 우리를 최악의 두려움과 맞서게 합니다. 그것은 가능한 또 다른 삶을 보여 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남은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꿈꾸는 일들을 아직 행동에 옮길 수 있을 때,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두려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다른 감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감정입니다. 행복, 불안, 기쁨, 분노 등 우리가 평생 겪는 많은 감정들에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은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사랑과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모든 긍정적인 감정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사랑으부터는 행복, 만족, 평화, 기쁨이. 두려움으로부터는 분노, 미움, 걱정 그리고 죄의식이 나옵니다. 우리 내면에는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근원적인 감정이 자리 잡고 있지만, 사실은 사랑 또는 두려움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사랑을 느끼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반대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곳에 사랑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차지할 자리는 없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동시에 두려웠던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두려움들은 과거나 미래 중 어느 하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만이 현재의 감정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며, 사랑만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감정입니다. 현재 일어나는 감정은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항상 과거에 일어난 어떤 경험이나 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여겨지는 어떤 일들을 걱정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산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사는 것, 그것이 인간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으로 채울 때, 두려움을 걷어 낼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분노로 변합니다. 또한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때 그것은 화로 변합니다. 그 화를 처리하지 않으면 심한 분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표현하기보다는 화를 내는 데 더 익숙합니다.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보다는 화를 내는 것이 더 쉽지만, 그것이 마음속 깊은 곳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사실, 그것은 종종 표면의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들 뿐입니다. 사람들은 화에 대해서는 좋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이 비록 타당한 것일지라도 지나치게 화를 내면 곧 타당성을 잃게 됩니다. 

 

무엇인가 바꿔야 하고 당신에게 그것을 바꿀 힘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하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거센 파도에 대항해 배에 고이는 물을 퍼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싸우면서 두려움을 느낄 때가 바로 그런 때입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항복해야 하는 때가 바로 그런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우리를 소모시킵니다. 평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삶에 순응할 때입니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때입니다.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고 느낀다면,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고 싶다면, 순종할 때입니다. 그리고 만일 변화를 선택해야 한다면, 정확히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사전>

인간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대할 때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다. 그 미지의 것이 적대적인 존재일지라도 일단 정체가 밝혀지면 인간은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상상을 통해 두려움을 부풀리는 과정이 촉발된다.  그리하여 각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악마, 가장 고약하고 위험한 존재가 나타난다. 미지의 존재와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무의식이 지어내는 환상적인 괴물과 대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순간에 인간의 정신이 최고 수준으로 기능하는 뜻밖의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럴 때에 인간은 주의깊고 명민해지며, 자신의 감각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여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럼으로써 두려움을 다스리고 미처 몰랐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미지의 존재는 인간을 자극하기도 하고 매혹하기도 한다. 인간의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런 것과 대면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뇌가 미지의 것에 적응하기 위한 해결책을 찾아내는지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아직 이름이 붙어 있진 않은 미지의 존재는 무엇이든 인류를 위한 새로운 도전을 유발할 수 있다.

 

 

법정 스님, <텅빈 충만>

사람들은 애욕으로 인해 걱정이 생기고 걱정으로 인해 두려움이 생긴다. 애욕에서 떠나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중아함 염처경>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이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지며, 고뇌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법을 얻게 하는 뛰어난 길이 있다. 그것은 곧 사념처법(四念處法)이다. 과거 모든 여래(如來)도 이 법에 의해 최상의 열반을 얻었고, 현재와 미래의 여래도 이 법으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오래 된 書籍(서책) / 기형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서표)을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마조리 켈리, <그들은 왜 회사의 주인이 되었나>

우리 시대, 대안적 소유 구조에 대한 필요는 어느 때보다 크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두 갈래다. 한쪽은 요새 같은 세상을 향해 뻗은 길로서 이제까지의 비즈니스가 걸어온 것이다. 그 세상에서 부유한 소수는 호화롭고 안전한 요새에 몸을 숨기고 살아가고, 대부분은 곤궁에 시달리며 두려움과 싸운다. 다른 한쪽은 새로운 경제를 향해 뻗은 변혁의 길이다. 새로운 경제란 지속 가능하며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번영을 가져올 생성적 경제다. 어떤 세상을 선택하든, 소유와 재무 구조가 그 세상에 본질적 형태를 부여할 것이다.

 

 

이기주, <글의 품격>

처음,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순간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편견과 억압적인 체제에 맞서 싸우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무지를 인정하고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는 데는 훨씬 큰 용기가 필요하다. 세속적인 교육은 우리에게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새로운 증거를 찾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더라도 우리의 의견을 의심하고 다시 검증하기를 겁내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미지의 사실을 두려워하고 모든 질문에 명확한 답을 바란다. 미지의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 그 어떤 폭군보다 더 우리를 마비시킬 수 있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일련의 절대적인 해답을 믿지 않으면 인간 사회는 와해될 거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사실은 기꺼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곤란한 질문을 제기한 용기 있는 사람들의 사회가, 모든 구성원이 단일한 해답을 무조건 수용해야만 했던 사회보다 더 번영했을 뿐만 아니라 더 평화로웠다. 자신이 믿는 진실을 잃을까 겁내는 사람은 몇 가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한 사람보다 더 폭력적인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답할 수 없는 질문이 질문을 불허하는 답보다 훨씬 낫다.

 

 

롤프 포츠, <VAGABONDING, 여행의 기술>

이 책은 장기간의 여행을 현실 도피가 아니라 모험과 열정으로 해석한다. 달리 말하면 두려움을 떨쳐내고, 당신에게 허락된 삶을 마음껏 즐기는 방법이 바로 여행이란 뜻이다. 당신은 단순함을 통해 풍요를 얻는 방법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길에서 만나는 새로운 세계와 진기한 경험에 적응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또한 당신의 경험을 하찮은 것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는 근거 없는 통념과 구실을 극복함으로써 당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여행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먼 나라의 긴 여행을 요원한 꿈으로, 때로는 낭만적인 유혹으로 생각할 뿐 지금 당장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근거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유행을 좇고, 진정으로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들여놓은 대가로 월부금을 지불하느라 단기간의 분주한 여행에 만족할 뿐이다. 우리가 '라이프 사이클'이란 추상적인 개념에 재산을 쏟아부으며 이렇게 살아갈 때 여행은 제2의 액세서리가 된다. 옷이나 가구를 사듯이 유행에 따라 포장된 여행 상품을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여행하고픈 욕구는 긍정적인 마음자세의 반향이다. 누구나 뭔가를 보고 경험하며 성장하고, 인간으로서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배거본딩은 이런 욕구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준다. 배거본딩은 이런 긍정적 마음자세를 꾸준히 유지하고 강화시킬 기회를 제공해준다. 배거본드는 편의라는 핑계로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는다. 두려움에 과감히 맞선다. 이렇게 배거본드는 더 보람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마음자세를 키워가게 한다. 이런 마음 자세로는 보람찬 삶을 만들어가기가 더 쉽다. 이른바 긍정적 피드백이란 것이다. - 에드 버린,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의 배거본딩>

 

여행은 움직이는 수도원 생활과도 같은 것이다. 길에서 우리는 더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몸에 지니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한다. 그래서 카뮈는 여행에 가치를 더해주는 것이 두려움이라 말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상황에서의 탈피, 즉 해방이다.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갖추고 있는 모든 껍데기를 벗어던지는 것이다. - 피코 아이어, <우리는 왜 여행하는가>

 

평소의 삶으로 돌아와 일자리를 구해서 기계적인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새로운 도전거리라 생각하라. 일자리를 구해서 성실하게 일하라. 단순한 삶을 그대로 유지하며 자유의 시간에 대비하라.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이 집에서는 어떻게 살았다고 말했는지 기억하라. 그들에게 배웠던 것들, 예컨대 친절, 유머 감각, 공손한 태도, 성실함 등을 기억해내고 그것을 당신의 삶에 녹여내라. 당신의 여행을 신나게 만들어주었던 참신한 생각들과 느긋한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일상의 삶을 여유롭게 꾸려가라. 여행 중에 억제했던 것들, 즉 두려움, 이기심, 허영심, 편견, 시기심 등이 일상의 삶에 다시 기어들지 못하게 하라.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이 외국 땅인 것처럼 이곳 저곳을 탐색해보라. 당신 이웃에게도 먼 나라의 부족인 것처럼 관심을 가져보라.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끊임없이 배워라.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모험을 피하지 말라. 항상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한계를 두지 말라. 단순한 삶을 유지하면서 영혼을 살찌워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 꿈이 숨쉴 여유를 주는 것이다. 그런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욕망이 언제 다시 당신을 길로 내몰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자! 길이 우리 앞에 있지 않은가!

 

 

마시모 피글리우치,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키잡이가 자신의 배를 난파시킬 요량이라면 그 배를 구해낼 때 필요한 것과 똑같은 재주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가 배를 돌린다 해도 풍랑 속으로 너무 멀리 나간 것이라면, 그는 길을 잃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 다만 주의의 결핍 때문이라 해도 역시 똑같이 그는 길을 잃을 것입니다. 인생도 완전히 똑같습니다. 만약 그대가 아주 잠깐이라도 꾸벅꾸벅 존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그대를  떠날 것입니다. 늘 깨어 있으면서 그대가 받은 인상들을 감시하십시오. 그대가 계속 간직할 것들은 사소한 것들이 아닙니다. 자기 존중, 명예, 성실성, 침착한 정신, 미혹이나 두려움이나 선동에 흔들리지 않기.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자유입니다. 이 모든 것을 뭘 위해 팔아치울 것인가요? 구매할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십시오. - 에픽테토스

 

두려움과 자기존중의 상실이라는 두 가지에 굴복할 경우에만 적들이 이기게 된다.

 

아예 죽을 작정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떻게든 살겠다고 기를 쓰는 것도 아닌 사람이 폭군의 면전에 섰을 때, 그 무엇이 그에게 두려움을 갖게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지요.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우리를 흥분시키는 구체적 요인들은 기이하고 비논리적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보다 건전하다고들 하는 다른 삶의 영역들에서 우리가 갈망하는 자질, 즉 이해, 공감, 신뢰, 조화, 관대함, 친절함의 메아리가 담겨 있다. 많은 에로틱한 자극의 이면에는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들에 대한 상징적 해소, 또는 친밀함과 이해를 향한 갈망에 대한 가슴 시린 암시가 깔려 있다.

 

아이는 어른에게 사랑의 다른 측면을 가르쳐준다. 진정한 사랑은 까다롭고 불쾌한 행동 이면에 놓여 있을지 모르는 무언가를 최대한 관대하게 해석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부모는 울음, 발길질, 슬픔, 화가 진정 무엇 때문인지를 짐작해야 한다. 이 해석 활동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평범한 성인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해석 양상과 확연히 차별되는 점은 자애심이다. 부모는 아이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괴로워하고 아파할  수는 있겠지만, 단지 아이를 찌르고 있는 핀을 확인하고 제거해주면 아이는 즉시 타고난 천진함을 회복할 것이라고, 아이가 울 때 우리는 아이가 심술궂거나 자기 연민에 빠졌다고 비난하지 않고, 무엇이 불편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한다. 아이가 깨물 때 우리는 아이가 틀림없이 겁을 먹었거나 순간적으로 골이 났을 거라 생각한다. 또한 배고픔, 소화 장애, 수면 부족이 기분에 서서히 미칠 수 있는 영향도 잘 알아본다. 만일 이 본능을 성인들의 관계에 조금이라도 도입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친절한 사람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성인들의 관계에서도 심술궂음과 잔임함을 보아 넘기고 거의 항상 그 이면에 깔려 있는 두려움, 혼란, 피로를 감지해낼 수 있다. 인류를 사랑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회피 애착 유형은 정서적 필요가 충족되지 않으면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에게 노출을 줄이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는 특징이 있다. 회피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열심히 공격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설득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고 쉽게 가정한다. 자리를 피해 도개교를 올리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유감스럽게도 회피적인 사람은 두려움에 찬 방어적인 행동 양식을 파트너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의 소원하고 무덤덤한 행동들 뒤에 숨어 있는 이유들은 안개 속에 싸인 채 진실과는 정반대로 무정하고 무심하다는 오해를 쉽게 불러일으킨다. 회피적인 사람은 사랑을 주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느끼게 되었을 뿐,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깊이 염려한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사실 그 시기에 그들은 색다르고 새로운 것은 전통적인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라며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사회의 숨겨진 적대감과 싸워 최대의 승리를 얻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페르미나 다사에게는쉬운 일이었다. 그 세계의 생활을 알기 전에는 너무나 불안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하루걸러 한 번 정도의 약속과 진부한 의식, 그리고 미리 정해진 말들의 체계에 불과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 죽이지 않으면서 즐거이 지냈던 것이다. 촌스럽고 경박한 이런 낙원을 지배하던 기호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녀는 이에 대해 아주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정의 내렸다. "공적인 생활의 과제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부부 생활의 과제는 지겨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속된 삶 -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성공하고 유명해진다.

양심을 지키는 삶 - 소명에 따라 행동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정의롭게 된다.

성공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유명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반면, 정의로움은 영원한 진리의 반석이 된다.

 

 

김영하, <읽다 / 말하다>

우리가 이렇게 '복잡하게 나쁜'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것에 하여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이 타인에 대해 갖는 공포심을 이용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이 나에 대해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진화해왔다, 또는 그런 두려움을 잊지 않은 유전자만이 지금까지 진화해왔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소설 문학의 존재 의의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바로 그런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이라는 백도어를 이용해 침입한 바이러스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가해자로 돌변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기 시작하지만, 이런 공포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작가와 작품에 의해 자기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성찰하게 됩니다. 진화심리학자라면 진화가 이런 엉뚱한 부산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자원봉사나 헌혈, 고아 입양은 인간 유전자의 이기적 본성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협력을 통해 진화해온 과정의 긍정적 부산물입니다. 함께 사냥하던 시절의 협동 정신, 공감능력이 현대의 대규모 박애적 활동으로 발전했듯이 소설을 읽는 행위 역시 타인에 대한 경계심으로 시작해서 자기 내면의 동물성과 괴물다움을 성찰하는 쪽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글은 한 글자씩 씁니다. 제아무리 빠른 사람도 글자 열 개를 한꺼번에 뿌릴 수 없습니다. 한 글자씩 한 글자씩 써야 단어가 만들어지고 이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됩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이 차례대로 쌓여야 글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는데요. 이렇게 써나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변화가 생기고 이게 축적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트라우마나 어두운 감정은, 숨어 있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막상 커튼을 젖히면 의외로 별 볼일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한 글자 한 글자 언어화하는 동안 우리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언어는 논리의 산물이어서 제아무리 복잡한 심경도 언어 고유의 논리에 딸, 즉 말이 되도록 적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좀더 강해지고 마음속의 어둠과 그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가 가진 자기해방의 힘입니다.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편견, 나약함과 비겁과 맞서는 힘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역사가들은 정확하고 그 무엇에도 쏠리지 않고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만큼, 그 어떤 증오나 두려움 때문에 진실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며 시간의 그림자이자 행위의 축적이다. 그리고 과거의 증인, 현재의 본보기이자 반영, 미래에 대한 예고인 것이다.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욕망을 키우거나 확장하는 일은 지혜에 대립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유와 평화에 대립되는 것이기도 하다. 욕망이 커지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며, 그래서 생존을 위한 두려움도 커지게 된다. 욕망을 줄이는 경우에만 분쟁과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인 긴장 상태를 진정으로 줄일 수 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

스토아 철학은 감정을 제거하기보다 길들이는 쪽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식물로 바꾸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로 스토아 철학이 추천하는 현대적 현인은 두려움을 침착함으로, 고통을 정보로, 실패를 시작으로, 소망을 실천으로 바꾸어 놓는 사람일 것이다.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의도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동요시키는 방법으로 두려움을 주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주도권을 쥐게 된다. 때때로 우리는 상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타격을 가함으로써 그를 흔들어줄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자들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방법이다.

 

시간은 끝없는 영원과 이 우주를 우리 인간이 보다 잘 견디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개념이다. 그러니 시간의 틀을 만들어 요령 있게 다루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아이들의 시간은 길고 느리며 쉽게 늘어난다. 반면 어른의 시간은 쏜살같이 빨리 지나간다. 즉 시간은 지각하기 나름이며, 지각은 뜻대로 조정이 가능하다. 타이밍을 잡는 달인이 되고자 할 때 숙지해야 할 첫 번째가 이것이다. 감정으로 인한 내부의 소용돌이 때문에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이라면, 사건이 터졌을 때 감정적 반응을 조절하면 시간이 훨씬 더 천천히 흐른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앞으로의 시간이 더 길게 느껴져, 두려움과 분노로 꽉 막혀 있던 가능성이 열린다. 더불어 타이밍을 잡는 데 꼭 필요한 기본기인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다.

 

정직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기 쉽다. 목적에 맞게 말을 만들어서 하는 것이 더 현명하며,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내뱉어 추하고 거친 진실을 전달하는 것보다 상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더 중요한 점은, 당신을 그대로 드러내면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을 존경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존경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자에게는 권력도 생기지 않는다.

 

대담함은 두려움을, 두려움은 힘을 창출한다.

 

 

실뱅 다르니, 마튜 르 루,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급박한 문제들은 우리에게 이론적인 공방에서 벗어나 신뢰할 만하고 효과적인 대안들을 더 빨리 고안해 내고 실험해 볼 것을 요구한다. 이제 더 이상 정략적 이론을 세우는 데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지구의 현실에 여러 가지 모델을 적용시켜 보는 실용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 우리 세대는 그저 사는 방식에 있어서  실용적일 뿐이다. 우리는 직업과 가족, 행동과 신념 그리고 지구의 보존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안락함 사이에서 조화를 추구한다. 이 책에 있는 80개의 이야기들은 이러한 서로 다른 갈망들 사이에 모순이 없음을 보여 준다. 무기력과 행동,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정신 그리고 사라진 과거에 대한 향수와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려는 욕구 사이의 대립만이 있을 뿐이다.

 

 

김형경, <좋은 이별>

슬퍼할 수 있는 능력. 충분히 건강한 자아, 슬픔을 토로해도 용인해 주는 환경, 슬픔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용기 등이 있어야만 슬퍼할 수 있다. 눈물을 보이는 순간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울음을 보이면 세상이 외면할 거라는 두려움이 있다면 우선 그 감정부터 보살핀다. 소리 내어 울 수 있다면 마음이 건강한 상태이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인간 중심 상담의 창시자인 미국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우리가 외로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줬을 때 상대가 수용해주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만약 그랬을 때 상대가 나를 따뜻하게 지지해주는 것이 아닌 내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평가하고 상처내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떠벌리고 다닐 수도 있기 때문에 섣불리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상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한다. 진짜 자기 모습을 감춘 채 사회적 시각에서 봤을 때 비난받지 않을 수준에서 안전하고 피상적인 만남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만남은 깊은 유대감이나 연결감을 느끼게 하지 못하고 누굴 만나도 마음에 공허함만 남는다. 

 

잘못된 한 생각이 올라오면 태산 같은 걱정과 두려움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잘못된 그 생각이 지나가면 걱정 없는 마음하늘 푸르게 드러나네. 천상과 지옥도 한 생각이 만든다네. 그러니 잘못된 생각, 믿지 말고 놓아주소.

 

 

데이비드 색스, <아날로그의 반격>

우리는 선택지가 무한하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쇼핑을 하게 되면 선택지가 제한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선택의 심리학>의 저자 배리 슈워츠에 따르면, 끊없는 선택권이 주어질 경우 사람들은 무력해지다 못해 두려움을 품게 된다고 한다. 사람들이 아마존에서 느끼는 감정도 그런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들 중에서 고른다는 것은 꿈같은 일처럼 보이지만 막상 좋은 책을 발견하기 위해 킨들에서 수십만 권의 책을 샅샅이 살펴보고 게다가 그 책에 달린 모든 리뷰들을 확인해야 한다면 그것은 절대 꿈같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인간은 나이를 먹고, 자신의 내면에서 노화를 촉진시키는 나약함과 무기력함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냥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이런 좌절스러운 상태가 어떤 특별한 원인 때문이며, 질병을 고치듯 이 원인으로부터 회복할 희망이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달랜다. 헛된 꿈이로다! 그것은 노쇠함이라는 질병이다. 노쇠함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들은 사람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종교로 귀의하게 되는 이유가 죽음과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 자신의 경험으로 분명하게 터득한 바로는, 종교적인 감정은 그런 상상이나 두려움과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발전하는 경향을 보인다. 왜냐하면 격정들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상상력과 감수성이 덜 자극을 받고, 자극을 받는 가능성 또한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성에 침투해서 방해를 하던 관념들과 욕구, 잡념들로 인해 간섭을 덜 받아 사고력이 명석해지면, 그제야 구름 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타난다. 우리의 영혼은 모든 빛의 원천을 향하고 그 빛을 보고 느낀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이다. 왜냐하면 존재라는 현상이 내면이나 외부로부터의 인상들에 의해서 더 이상 속박을 받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존속하는 무엇에 - 그러니까 절대적이고도 영구한 진실처럼 절대로 우리에게 거짓된 장난을 치지 않는 어떤 현실에 의존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감각들의 세계에 생명과 매력들을 부여하는 모든 힘이 이제는 우리로부터 흘러나가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신에게로 향하기 마련인데, 그 까닭은 이 종교적인 감정이 본질상 너무나 순수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영혼을 매우 기쁘게 해주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모든 다른 상실을 보상해준다.'"  무스타파 몬드는 책을 덮고 의자에 길게 기대었다. "이 철학자들이 하늘과 땅의 수많은 일들 가운데 미처 꿈도 꾸지 못했던 것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다니엘 슈라이버, <어느 애주가의 고백>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실패의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이 세상의 끝은 아니며 야망에 찬 목표를 내려놓음으로써 가벼워질 수 있다고 말이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로 지속할 수 없는 존재다. 이거 야망이 있고 없고와는 상관없는 문제다. 성공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대개 자신이 아니라 외부 - 부모나 특정한 사회적 기대 - 에서 왔다ㅡ걸 인정해 보자.

 

 

사이먼 사이넥,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우리 모두가 지독히 합리적이라면 신생기업은 생겨날 수 없다. 탐험에 나서는 사람도 없고, 혁신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도록 영감을 불어넣는 훌륭한 리더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행동을 하게 하는 힘은 보다 나은 것을 향한 인류 불멸의 신념에서 나온다. 그러나 신념은 이유 없는 증오, 두려움과 같은 다른 감정도 부추기고 부정적인 행동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네이트 실버, <신호와 소음>

9/11위원회가 추론하듯이, 테러를 사전에 포착하지 못한 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상상력의 부족이다. 예측을 할 때는 호기심과 회의주의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취할 필요가 있다. 호기심과 회의주의는 양립할 수 있다. 우리가 세운 가설을 더 열심히 탐구하고 검증할수록, 우리는 세상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완벽한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더 기꺼이 이정할 수 있으며, 실패의 두려움을 덜 느낄 수 있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앎으로써 좀 더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다.

 

 

정재승, <열 두 발자국>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상황도 그보다 비극적이진 않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 이건 아마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도 좋은 전략이 될 것입니다. 내일 혹은 한 달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정말 소중한 일들에 집중하게 되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고, 선택의 무게도 훨씬 가벼워집니다. '내가 눈 감을 때 무슨 후회가 들까'를 생각해보면 절실함 혹은 진정성은 커질테고요. 그런 면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절대 불길하거나 우울한 것이 아니에요. 결국 삶을 살아내는 데 도움이 되지요.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빠르게 결정하지 못할 일어 없어집니다.

 

독창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연구하고 접촉해온 끝에 나는 놀랍게도 그들이 겪는 내면의 경험이 우리가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느끼고 회의에 빠진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용기를 내서 행동에 옮긴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다가 실패하더라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후회를 덜 한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다. - 애덤 그랜트, <오리지널스>

 

 

김연수, <소설가의 일>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반영한다.(한번 더 여러분들을 괴롭힌다면, 그래서 좋은 이야기일수록 핍진성이 풍부하다.) 그러므로 이야기 작법에서는 행동은 반드시 갈등을 일으키고 이 갈등은 주인공을 감정적으로 좌절시킨다고 말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법구경>을 들춰보면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마라. 미운 사람과 만나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랑에서 근심이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이야기 작법 중 행동/액션의 운용원칙을 말하는 것 같다. 행동은 갈등을 낳고, 이 갈등은 주인공을 감정적으로 좌절시킨다.

 

"저건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란다." "아니오. 이건 얼음이오." 그 집시가 고쳐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그 납작한 덩어리를 만져보려고 손을 내밀자 집시가 그의 손을 막았다. "만지려면 5레알을 더 내시오." 집시가 말했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5레알을 낸 뒤 얼음 위에 손을 얹은 채 몇 분 동안 그대로 있었는데, 그사이 신비한 물건을 만지고 있다는 두려움과 기쁨으로 인해 그의 가슴은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자식들이 그 신비한 경험을 직접 할 수 있도록 10레알을 더 지불했다. 어린 호세 아르까디오는 얼음을 만지려 하지 않았다. 반면에 아우렐리아노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 얼음에 손을 얹더니 화들짝 뒤로 뺐다. "펄펄 끓고 있어요."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1>

 

 

이기주, <한때 소중했던 것들>

적당한 두려움을 느낄 때 마음에서 무모함과 지나친 낙관주의가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두려움은 곧 진지함이 되고 진지함은 곧 일의 동력이 도리 수 있죠. 반대로 어떤 상황 앞에서 두려움이 깡그리 사라지면, 그러니까 겁을 상실하면 겸손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자신이 잘났다는 착각에 사로잡혀서 실수를 저지르거나 오류에 빠지기도 쉽죠. 적당한 두려움.

 

문제는 그들 중 일부가 꽤 공격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밖으로 쏟아낸다는 겁니다. 타인의 성과를 깎아내리거나 비난하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하죠. 왜냐고요? 그래야 덜 불안하거든요. 사람의 공격성이라는 게 노여움이나 분노뿐만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장막을 찢고 나온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미치오 카쿠, <미래의 물리학>

과학은 결코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2100년이 되면 인간은 과거 한때 두려움과 경배의 대상이었던 신들과 거의 동일한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컴퓨터는 마음으로 물체를 움직이게하고, 생명공학은 생명을 창조하고 수명을 늘려줄 것이다. 또한 나노기술은 물체의 형상을 마음대로 바꾸게 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인류를 I단계 문명으로 인도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 인류는 I단계 문명으로 진입할 수도 있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도덕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사람들은 흔히 과학을 '양날의 칼'이라 부르곤 한다. 한쪽 날은 가난과 질병과 무지를 잘라내면서, 반대쪽 날은 과학이 자신의 창조주인 사람의 목을 겨누고 있다는 뜻이다. 이 위험한 무기를 안전하게 다루려면 인간의 '지혜'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야마시타 히데코, 오노코로 신페이, <소중한 것은 모두 일상 속에 있다>

두려움은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지 못하는, 인생 최대의 병입니다.

 

 

두려움 안느끼는게 용기가 아냐, 두려움보다 중요한.. 뭔가에 대한 확신이 용기란다. 사람이 지나치게 신중하면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없단다 - 영화, <프린세스 다이어리>, 2001

 

 

전주희,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겨디고 있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래 (노동에게) 외적 정체성이던 근면 성실의 가치가 노동자의 내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되는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일이다. 이 메커니즘에서는 앞서 강조했듯 외적 강제 과정에서 자행된 물리적, 제도적 폭력이 당사자에게 너무나 심대한 상흔과 더불어 심층적인 두려움을 남긴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바로 이 두려움을 당사자가 정면 돌파하기보다 온갖 형태로 억압하고 은폐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생존 전략으로 강자 동일시, 체제 동일시, 강자 숭배를 하게 된다. 여기서는 외형적 굴복보다 내면적 굴복이 더 무섭다. 외적 강제도 결국은 내적 굴복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P. G. 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우리는 환자나 마찬가지에요. 우리 삶은 결코 건강하지 않아요.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이든, 몸이든, 정신이든 우리의 일부는 아프고 병들어 있어요. 환자를 다루는 법은 간단해요. 우선은 스푼에 물을 적시어 입술을 축이죠. 그러면 환자는 혀로 축축해진 입술을 닦아요.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겁니다. 그 반응을 본 다음에 음식물을 입에 조금 넣어줍니다. 외부 자극에 반응했던 환자는 무의식중에 음식을 삼키게 돼요. 처음부터 입에 고깃덩어리를 넣어준다면 환자는 삼키기는커녕 토해냈을 겁니다. 같은 이야기를 나는 우리 인생에 들려주고 싶어요. 변화를 원한다면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강도를 높여나가는 방법을 택하세요. 갑작스레 앞으로 이런 인생을 살아갈 거야, 라고 얘기하지마세요. 가슴은 흥분으로 두근거리겠지요. 하지만 그건 정확한 의미에서 기대감과는 달라요. 두려움과 낯설음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무리한 심장박동이에요. 나중에 심장마비가 올지도 몰라요.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가 뭘까요? 환자는 침대에 누워 있고,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두 발로 걸어다니고 있는 걸까요? 맞는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는 '걷다'가 되겠지요. 환자는 걷지 못하고 건강한 사람은 걷고 있다, 이 말은 즉 계속 걸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곧 환자라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중단한 사람이 곧 환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잠시라도 그 걸음을 멈추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지금 아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두려움은 믿음이 약해졌다는 신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두려운 까닭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람이 두려운 까닭은 그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몰입할 때 자유를 얻는 까닭은, 더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흔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몰입하면 자유로운 까닭은, 중요한 일에 집중해 정신을 가다듬는 게 건강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몰입하면 결정을 내리기 쉬워지고 좋은 것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질 수 있다. 지금 내게 있는 게 충분히 좋다는 걸 안다면, 무엇 때문에 마냥 더 좋은 것을 쫓아다니느라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몰입하면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목표에 집중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대단한 성공을 이뤄낼 수 있다. 이처럼 대안을 거부할 때 우리는 자유를 얻는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자신이 선택한 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거부할 때, 깊이 없이 폭넓은 경험만을 추구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그래, 어린 시절에는 경험의 폭을 넓히는 게 바람직하다. 아마 필수라 해도 좋을 거다. 결국엔 세상을 폭넓게 경험하면서 내 모든 걸 바칠 만큼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황금이 묻혀 있는 곳은 깊다. 뭔가에 끊임없이 몰입해 깊이 파고들어 그걸 캐내야 한다. 관계, 직업, 훌륭한 생활 방식을 만들기를 비롯한 모든 일에서 마찬가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국기행>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충동 두 가지를 들자면 <굶주림>과 <두려움>이다. 굶주림은 인간으로 하여금 최대한 자신의 힘을 확장시켜 공략하고 정복하고 착복하여 먹이를 획득하도록 한다. 반면에 두려움은 이미 획득한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감정으로서, 자신이 얻은 것을 최대한 안전하게 오래도록 지키도록 몰아간다.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우리들 마음에 있는 악마여. 당신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이요, 두 번째 군대는 불만이요, 세 번째 군대는 배고픔과 목마름이요, 네 번째 군대는 갈애渴愛다. 다섯 번째 군대는 나른함과 졸음이요, 여섯 번째 군대는 두려움이요, 일곱 번째 군대는 망설임과 의심이다. 그리고 여덟 번째 군대는 속임수와 강요, 거짓으로 얻은 이익과 명성, 존경, 명예처럼 자신을 추켜세우고 사람을 깍아 내리는 것이다. 악마여, 이것은 당신의 군대이며 어둡고 추잡한 공격이다. 용기없는 자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악마를 이길 수 없다. 용기 있는 자만이 싸워서 승리하고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시바타 쇼지, <무라카미 하루키 & 나쓰메 소세키 다시읽기>

그러나 결과적으로 <1Q84>는 상품과 정보가 유통되는 자본주의사회의 시스템으로 인간들을 유입시키는 포스트모던적 감시사회의 비인간성을 주제로 한 작품이 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하루키의 모던 회귀 방향이자 사회 시스템에 대한 저항 장치로서 '이야기의 힘'에 대한 신봉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발표된 2009년 2월에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졌던 하루키의 예루살렘상 수상연설이다. 여기서 하루키는 소설가의 역할이 '인간 정신의 존엄성을 두드러지게하고 그것에 빛을 비추는' 것이며 '인간성이 시스템 망 속에 휘말려 그것에 망가지고 멸시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 그는 예루살렘상 수상연설에서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사랑이야기를 써서 사람을 울리고 혹은 두려움에 떨게 하거나 웃게 함으로써 개개인이 갖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밝히고자 계속 시도하는 것, 그것이 소설가의 일입니다'라고도 말한 바 있다.

 

 

로널드 T. 포터, <욱하는 성질 죽이기>

분노와 두려움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감정이다. 예를 들어, 두 감정 모두 뇌에서 편도를 통해 이동한다. 또한 사람들은 즉각적인 위험 앞에서 도망을 갈지 혹은 정면으로 대응할지를 놓고 급하게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일반적인 투쟁 도주 반응에서 가능한 선택들이다.

 

나는 강력한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였을 때 생존성 분노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사고력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력한 두 감정이 조합되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욱하는 성질을 내는 사람을 보면 화만 내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핵심 메시지가 '네가 날 죽이기 전에 내가 널 먼적 죽여야 해'라는 걸 기억하라. 이것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널 죽이겠다' 혹은 '나를 방해하지 못하게 너를 죽이겠다'와는 무척 다른 생각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공격적으로 변한 것이다.

 

수치심이 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일부러 피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신의 결함이 분명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꺼린다. 

 

버림받은 것에 대한, 거부당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언제, 어떻게, 왜 분노로 바꾸는지, 그리고 누구에 대한 분노인지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라.

 

 

이덕무, <문장의 온도>

명상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들여다보라. 그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변하는지 살펴보라. 그러다 보면 마음을 괴롭히는 번뇌와 근심이 대개 특별한 이유가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번뇌와 근심의 원인과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조차도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마음을 관찰하는 지점 곧 관점의 변화와 전환에 따라 번뇌와 근심의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에르스무스, <바보예찬>

사람들은 두 가지 주요한 장애 때문에 일에 실패하곤 해요...즉 명석한 정신을 흐리멍덩하게 만드는 망설임과, 위험을 보여 주어 행동력을 떨어뜨리는 두려움 때문에 실패하는 거죠...그런데 바보신은 그 두 가지를 전부 쫓아 버립니다...망설임을 버리고 뭐든 감행하면 커다란 이득을 볼 수 있는데, 아쉽게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구본권, <로봇시대, 인간의 일>

알고리즘 사회가 드리우는 그늘과 두려움을 피하려면 사회의 기술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알고리즘에 대해 투명성과 접근성이 요구된다.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는 '정보 비대칭' 상황에서 비롯하는 것인 만큼 사회적 차원에서 대응책을 논의해야 한다. 디지털 리터러시, 코드 리터러시는 정보 비대칭 상황으로 인한 힘의 불균형, 삶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도구다.

 

 

E. F. 슈마허, <굿워크>

영혼 없는 노동으로 인간은 돈벌이의 수단이 되었고, 악의에 찬 경쟁으로 인간 정신은 굴종과 복종에 순응하게 되었다. 신이 주신 활력과 기쁨이라는 노동의 본질이 굴종과 굴욕이라는 노예노동으로 변질됨으로써 우리의 노동시간은 해방과 깨달음의 시간이 아니라 불안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의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일을 해도, 일을 하지 않아도 모두 불안하게 되었다. 직업이 있어도 직업이 없어도 아이들도 노인도 모두 불안하긴 마찬가지이다. - 옮긴이의 글 중

 

 

김위찬, 르네 마보안, <블루오션 시프트>

블루오션 시프트 추진 과정은 모든 단계에서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사람들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자신감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목표를 성취한다. 그 방식이란 '세분화'atomization, 체험에 의한 '직접적인 발견'firsthand discovery, 전 과정에서의 '공정한 절차'fair process이다.

 

 

토머스 프리드먼, <늦어서 고마워>

인생에서 두려워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이해의 대상일 뿐이다. 지금은 더 많은 걸 이해해야 할 때다. 우리의 두려움을 줄일 수 있도록. - 마리 퀴리

 

 

이언 해킹, <우연을 길들이다>

통계학자들은 대체로 자유로운 공리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통계학자들의 철학에 대해, 또는 그들의 철학이 현행의 사회적 문제들의 해결을 지칭하는 것에 대해 믿지 않았던 이들은 통계학자들을 미묘한 두려움이 뒤섞인 무시로 대했다. 푸아송의 선견지명 같은 말을 빌리자면, 숫자는 인간으로부터 개별성을 박탈해 버렸다(The Numbers did strip human beings of their individuality).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복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듯 보이는 공리주의자들은 정작 사람에 대해서는 디킨스 소설의 등장인물 그래드그린드처럼 무관심해져 갔다.

 

 

서은국, <행복의 기원>

쾌의 느낌에 우리가 붙이는 명칭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기쁘다, 재미있다, 통쾌하다, 즐겁다, 신난다, 좋다.... 그러나 모두 쾌가 원료인 경험이고, 이들은 행복감의 가장 기초적인 재료가 된다. 이런 쾌의 전구가 켜지며 발생하는 여러 세세한 감정을 묶어 심리학에서는 '긍정적 정서'라고 한다. 반대로 불쾌에 바탕을 둔 여러 감정(분노, 슬픔, 두려움, 외로움 등)을 묶어 '부정적 정서'라고 부른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휠체어를 타든 목발을 짚든 지팡이를 짚든 간에 그 삶은 언제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사라지면,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깨닫게 되면 그때가 죽을 때인 거지요. 전 지금처럼 살아가는 시간이 과연 저에게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많이, 아주 많이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고통은 아무 가치가 없고 제 고통의 원인 역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제때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면 그 아픔은 인간적인 수준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죽는다는 건 단지 그런 거예요. 태양이 제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를 새겨두는 것처럼 각자 가지고 있는 좋은 추억을 이 세상과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에 남겨두는 것, 잠드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원망도 없이 그저 피곤에 지쳐 고요하고 평온하게 눕는 겁니다. 그러나 죽음을 그렇게 느끼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인간적이길 바란다고 할 만큼 굉장히 자유롭고 선해야 겠지요. 안락사, 또는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려면 진정으로 인간과 삶을 사랑할줄 알아야 하고 선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 라몬 삼페드로.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정치학자 제임스 피어론과 데이비드 레이틴은 "우리의 이론적 해석은 경제적 해석이라보다 홉스적 해석이다. 국가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변덕스러우면, 두려움과 기회에 자극 받아 지방에서 통치자를 꿈꾸는 자들이 득세한다. 그들은 '세금을 걷을' 권리를 사칭하고, 가혹한 정의를 집행하고, 종종 더 큰 대의를 표방한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영화 'Youth'. 시간과 세월만으로 나이가 결정되지 않는다. 나이를 좌우하는 뜨거운 용광로가 있다고 치자. 거기에는 건강이나 신체적 상태가 가장 먼저 들어갈 테지만, 인간의 감정과 생각, 상상력, 그리고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같은 요소들도 뒤섞이기 마련이다. 단순히 '젊음'을 잃으면 '늙음'이 될까?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에 불과할까? 글쎄다. 어떤 이는 '늙은 젊은이'로 불리고 또 어떤 사람은 '젊은 노인'으로 불리는 걸 보면 '늙음=나이 듦'이라는 등식이 꼭 성립하는 건 아니다. 늙음은 무엇인가 하는 이 만만치 않은 질문에 여전히 나는 답을 하지 못하겠다. 다만 '낡음'이 '늙음'의 동의어라는 주장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느끼는 일과 깨닫는 일을 모두 내려놓은 채 최대한 느리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 삶의 밝음이 사라지고 암흑같은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비로소 진짜 늙음이 시작된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4분의 3은 공포심에서 태어난다. 공포심을 가지고 있기에 이미 체험한 적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힘들어 한다. 하물며 그것은 아직 체험하지 않은 것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 공포심의 정체라는 것은 현재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기에.

 

상대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없던 곤경에 빠져 있기 때문에, 상황이 너무 나쁘기 때문에, 역전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지고 겁먹고 있을 때, 스스로 파멸과 패배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카리스마의 기술. 자신을 카리스마를 가진 깊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길 원한다면, 어느정도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일종의 어둠을 몸에 두르면 된다. 자신의 모든 것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도록, 밑바닥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끝,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일종의 신비와 깊이를 느끼기 때문이다. 연못과 늪이 그 혼탁함으로 인해 바닥이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늪의 깊이에 두려움을 느낀다.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라 불리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란 그 정도의 것이다.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중도'는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가 넘어서야 할 관념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도는 극단적인 견해와 이분법적 사고를 피하는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견해로 인해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되고, 잘못된 인식은 두려움, 화, 분별심, 절망과 같은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 된다. 이런 모든 종류의 괴로움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모든 종류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잘못된 인식, 생각, 관념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곳이 마음챙김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이다. 

 

마음챙김 호흡은 우리에게 안락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마음챙김은 이런 마음을 계속해서 지속시켜주려는 성향이 있다. "내가 숨을 쉴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또 내가 화가 날 때도 숨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럼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우리의 모든 족쇄들을 깨부수는 데 도움을 주는 통찰력을 갖게 하고, 또 우리를 두려움이 없는 마음으로 이끄는 지혜의 가르침, 즉 무분별심의 속으로 깊이 들어간 상태에 머물게 한다. 이는 수행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고 가장 위대한 열매이다. 만약 우리가 생각에 얽매어 있고, 슬픔에 사로잡혀 있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나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다룬 핵심 주제가 인간과 권력의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열전을 읽으면서 나는, 권력이 뿜어내는 찬란한 광휘의 이면에 인간의 참혹한 비극이 놓여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려면 되도록 권력을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권력은 마주 서 있을 때보다는 함께 서 있을 때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양들은 주변에 익숙하지 못하다. 양에게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기괴하고 전에 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리석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양에게는 인간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다. 양들의 그러한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자아낸다. 양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생에 대한 두려움과 이 세상에서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느낌 때문에 종족이나 민족으로 무리를 짓는 것이리라. 

 

 

알랭 드 보통, <불안>

이 문제를 이해하려다 보면 결국은 두려움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두려움은 세대를 따라 전해진다. 모든 학대 행위에 적용되는 패턴이지만 속물도 속물을 낳는다.

 

눈에 두드러지는 집단의 속물근성은 모든 사람을 사회적 야심의 방향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런 야심을 못마땅해하다가도, 어느새 그것이 사랑과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수단인 양 쫓아다니게 된다. 그런 행동은 두려움에서, 존엄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경멸하기보다는 슬퍼하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 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야심을 품고, 어떤 결과들을 선호하고,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 밖에 없는 대가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토머스 모어의 시대 이후 삶을 좀 더 살아볼 만하게 만들어주는 사건도 많았지만 갖가지 새로운 불안이 등장하고 원래부터 도사리던 불안과 결합해서 세상을 공정하게 바라보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지속적인 변화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하고, 대도시는 외로움을 키우고, 약물은 병을 치룧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위험 요인을 양산해서 건강 염려증을 키우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과 바이러스가 과거의 악마와 도깨비를 대신하고, 날카로운 지성과 부도 우리의 걱정을 없애주지 못하고, 경쟁이 스트레스를 키우고, 직장의 중압감이 동료들과의 관계를 저해하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스스로 부족하다는 느낌을 강화하고, 여가도 술도 충분한 보상이 되어주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난관에 대응할 방법을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남들이 내게 두려움을 주고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건넬 방법을 모르거나 그들이 내게 말을 건넬 방법을 모르거나 우리가 서로 욕구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세포와 같다. 하지만 두려움이 배고픔만큼 불가피하다고 해도 두 가지 모두에 품위 있게 대응하는 방법 있다. 두려움을 탐색하는 것은 삶의 사명이고, 두려움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개인들의 소통이 정신을 선명하게 만들고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고 예기치 못한 시너지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말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말이 생각의 엔진이 되는 대화로 발전되지 못하 뿐이다.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 소통의 기회도 많고 그만큼 장애물도 많다. 기술의 발명이 인간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그래서 모두의 경험, 모두의 시행착오가 삶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된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두려움은 나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공포에서 오기에 순응하고 따르며 복종하게 된다. 아직도 많은 국가들에서는 두려움을 국가 통치의 기술로 사용한다. 종교 역시 지옥 등의 공포를 팔고 있다. 회사 역시 노조에게는 공멸이란 공포를, 개인에게는 해고란 공포를 경영 기술로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낙오되면 죽는다는 두려움은 사람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다.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또 다른 거대한 힘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두려움이 스스로를 위한 이기심의 표상이라면 사랑은 남을 위한 이타심의 표상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남에 대한 사랑의 발현은 오히려 두려움을 이겨낸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나를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랑이란 외투를 입으면 두려움은 허상이란 것을 알게 된다. 용기가 두려움을 이기는 순간, 두려움은 실재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사실 두려움이란 불확실성이 증가되고 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불확실성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를 통제하겠다는 용기를 가지면 두려움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사랑하다 헤어질까봐 두려워하고 꿈에서 추락할까봐 두려워하며 비난과 조롱에 휩싸일까 두려워한다. 이 모두는 사랑과 용기만 있으면 무엇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 사는 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고 죽는 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에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두려움을 버리지 못한다면 두려움과 맞설 용기를 키우면 된다.

 

두려움을 다스릴 줄 알면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 자신감이 가득하고 걸음이 꼿꼿하며 생각과 말에 힘이 생긴다. 두려움이 다시 몰려오더라도 사랑의 힘을 믿고 당당하면 언제든 두려움과 공포를 발아래 둘 수 있다. 매일매일 성실함과 열정적인 노력을 통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사랑과 용기는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열쇠다.

 

 

<제주, 소요>

내가 생각하기에 재능이란(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 - <뭐라도 되겠지>, 김중혁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진보가 갓 시작한 곳, 생산과 교환의 방식이 아직 거칠고 비능률적인 곳, 가장 좋은 집이라 해도 오두막 수준이고 옷감이나 종이의 질이 보잘 것 없고 부자도 매일 열심히 일해야 사는 곳에 한번 가보라. 거기에는 큰 부자도 없지만 동시에 거지도 없다. 사치도 없지만 동시에 절대 빈곤도 없다. 놀면서 편안하게 살거나 매우 잘 사는 사람도 없집만 동시에 누구든지 생계는 꾸릴 수 있고 또 일할 능력과 의사만 있다면 궁핍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받지 않는다.

 

문명 발달의 직접적인 결과는 욕구 충족을 위한 인간 노동의 힘을 모든 면에서 증대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빈곤을 타파하고 궁핍과 궁핍에 대한 두려움을 추방한다. 진보의 내용과 진보하는 사회가 추구하는 상태의 직접적이고 자연적인 결과는, 영향권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물질적 상태를 - 그에 따라 지적, 도덕적 상태도 - 개선하는 것이다. 인구의 성장, 교환의 양과 범위의 확대, 과학적 발견, 줄 이은 발명, 교육의 확산, 정부의 개선, 예절의 순화 등을 물질적 힘으로 볼 수 있다면, 이들은 모두 노동의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직접적인 효과를 가진다. 그리하여 일부의 노동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의 생산력이 향상되며, 일부 분야의 산업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산업의 생산력이 향상된다. 사회에서 부의 생산법칙은 "부분은 전체를 위해, 전체는 부분을 위해(each for all, and all for each)"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은 문명 발달이 가져오는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누군가 이를 가로채기 때문이다. 노동에 필요한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전락하여,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면 모두 지대 - 노동이 자신의 힘을 적용하는 기회의 사용 대가로 지불하는 가격 - 상승으로 흡수된다. 일하여 계속되는 진보에 의해 생긴는 모든 이익이 토지소유자에게 돌아가고 임금은 증가하지 않는다.

 

사람이 음식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부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람이 음식에 욕심을 부리는 경우는 음식의 분배가 공정하지 않아서 모두에게 충분한 양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할 때이다. 그러나 공정한 분배와 충분한 음식이 보장되면 아무도 음식에 욕심을 내지 않게 된다. 현재의 사회에서는 분배 상태가 매우 불공정해서 각자에게 충분한 부가 돌아가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궁핍하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에 욕심을 부린다. 현 사회제도는 "꽁무니에 있으면 귀신에게 잡힌다"는 속담이 들어맞는 제도이므로 사람들은 부를 향해 질주하고 다투면서 정의, 자비, 종교, 인정을 짓밟아 버리고 자기의 영혼을 망각하며 죽어서 가져갈 수도 없는 부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부를 공정하게 분배하면 모든 사람이 궁핍에 대한 두려움에서 풀려나므로, 품위 있는 상류사회에서 음식을 탐하지 않는 것처럼 부에 대해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지치만 매 순간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계산과 두려움 때문에 뒤로 미룬 모든 날들이 우리가 놓친 길일들이다.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지금이다. 행동하는 날, 그날이 바로 길일이다.

 

어떤 일에 성공하려면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외적 수단으로는 그 답을 얻을 수 없다. 해답은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자만심과 부족한 인내심과 두려움은 자기 안의 위대한 신비가 보내는 메시지를 가로막는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의 80퍼센트는 두려움에 바탕을 둔 것이다. 가슴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결정을 내리고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인생의 비전을 차단시킨다. 안전한 길은 큰 기쁨을 주지 못한다.

 

모든 경전과 철학서들은 여행 서적과 같다. 세상에는 떠나지 않고도 장소에 대한 매력을 갖게 하는 책들이 많다. 그러나 정말로 떠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여행서들이 가진 오류를 누가 발견할 것인가? 즐겁고,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교리들은 잘못 베낀 것일 가능성이 높다. 모든 정의와 도그마를 넘어 두려움 없이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면 언제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경전이다. 인생은 필사본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써 나가는 책이다. 우리는 예술가이며 예술 그 자체이다.

 

 

레이 커즈와일, <특이점이 온다>

미래의 기술의 영향을 숙고하는 사람들은 종종 세 가지 생각의 단계를 겪는다. 첫째는 오래된 골칫거리들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데서 오는 경외와 놀라움, 둘째는 새로운 기술에 수반할 심각한 위험들에 대한 두려움, 마지막은 우리가 책임감 있게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위험을 적절히 관리하여 편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조심스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라는 깨달음이다.

 

 

이 하찮은 가치 - 김용택

 

11월이다.

텅 빈 들 끝,

산 아래 작은 마을이 있다.

어둠이 온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는 동안

지나온 마을보다

다음에 만난 마을이 더 어둡다.

그리고 불빛이 살아나면

눈물이 고이는 산을 본다.

어머니가 있을 테니까. 아버지도 있고,

소들이 외양간에서

마른 풀로 만든 소죽을 먹고,

등 시린 잉걸불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고구마가 익는다.

비가 오려나 보다.

차는 빨리도 달린다. 비와

낯선 마을들,

백양나무 흰 몸이

흔들리면서 불 꺼진 차창에 조용히 묻히는

이 저녁

지금 이렇게 아내가 밥 짓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무런 까닭 없이

남은 생과 하물며

지나온 삶과 그 어떤 것들에 대한

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졌다.

나는 비로소 내 형제와 이웃들과 산비탈을 내려와

마을로 어둑어둑 걸어들어 가는 전봇대들과

덧붙일 것 없는 그 모든 것들에게

이렇게 외롭지 않다.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

이 무한한 가치로

그리고 모자라지 않으니 남을 리 없는

그 많은 시간들을 새롭게 만들어 준, 그리하여

모든 시간들이 훌쩍 지나가버린 나의 사랑이 이렇게

외롭지 않게 되었다.

 

 

크리슈나무르티, <삶과 죽음에 대하여>

마음이 두려움을 느껴서 죽음을 일상 삶과 멀리 떼어놓으면, 그 분리는 더 많은 두려움과 불안을, 그리고 몇 배나 더 많은 죽음에 대한 이론들을 키워갈 뿐입니다. 죽음을 이해하려면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삶은 생각이 연속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든 불행을 키우는 것이 바로 이 계속성continuity이지요.

 

사랑이 그런 것처럼, 죽음은 삶의 순간순간 여기 있습니다. 일단 이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여러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모르는 것the unknown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the known을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가족을 잃을까봐, 친구들도 없이 혼자 남겨질까봐 두려워합니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자신이 축적해놓은 경험들과 재산이 없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놓아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건 바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은 기억이며, 마음은 그 기억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기억은 단지 기계적인 것일 뿐입니다. 컴퓨터가 그걸 아주 잘 증명하고 있지요. 죽음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그때 죽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마음이 신선해지고 새로워져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면 죽음이라 불리는 그 상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생각을, 그리고 슬픔을 이해하며, 그런 사람만이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코 축적하지 않고, 결코 경험을 모으지 않으면서 순간순간 죽는 마음은 무구하며, 그래서 늘 사랑의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끝난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는데, 그건 우리 마음이 계속성을 추구하고, 가족 안에서, 재산에서, 우리 직업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오직 안전에 대한 탐욕스런 추구에서 벗어난, 계속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계속성이라는 과정에서 벗어난 마음만이 불멸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일신의 불멸을 얻으려 애쓰고 있는 마음, 지속하고 싶어 하는 '나'는 불멸이 무엇인지 절대 알지 못합니다. 그런 마음은 두려움과 죽음에 들어 있는 중요한 의미를 모를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만일 우리가 단 하루를 살고 그날과 함께 죽으며 또 다른 날을 마치 신선하고 새로운 날인 것처럼 다시 시작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우리가 획득한 모든 것들, 모든 지식, 모든 기억, 모든 다툼을 날마다 멈추는 것, 그것들을 다음날로 가져가지 않는 것 -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 설사 끝남이 있더라도, 새로 태어남이 있다는 말이다.

 

두려움은 실상에 대한 무지이며, 우리 삶은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상태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죽음처럼 몹시 복잡한 인간 문제에 대해 조사하려면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든 만일 선입견이나 믿음, 희망, 두려움이 있으면 관찰하거나 조사할 수 없습니다. 매우 진지하게 조사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왜곡하는 선입견이 없어야 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위안을 바라는 욕망 희망이 없어야 하며, 그런 것들이 모두 없어야 합니다.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완전히 비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 알아내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야생의 인간에게는 단순한 두려움 몇 가지만 있지만, 우리는 더 '문명화'되어 가면서 점점 더 복잡해지는 두려움을 셀 수도 없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야마구치 세이코, <버리고 비웠더니 행복이 찾아왔다>

인생은 도전과 실패의 반복. 성공보다 한걸음 내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0보다 1을 목표로' 삼으라고 가르친다. 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도전하고, 실패해도 "괜찮아, 멋진 도전이었어!"라고 스스로를 칭찬해주며 다음 기회를 위한 발판으로 삼으면 된다고 조언한다. 그러면 인생에 대한 두려움과 도전에 대한 망설임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강판권, <나무 철학>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은 나이를 '수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이를 수직으로 생각하면 나이가 한 해마다 한 살씩 축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면 한 해 한 해를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무 역시 한 해가 지날 때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지만 결코 나이를 수직으로 축적하지 않는다. 나무의 나이는 수평이다. 나무의 이런 삶이 바로 사람보다 오래 사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나이바퀴를 의미하는 '연륜'을 이해하면 나무가 사는 법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왜 나이를 바퀴에 비유했을까. 인간 스스로 나이를 바퀴에 비유했다면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바퀴는 둥글고, 둥근 것은 시작도 끝도 없다. 나무는 수평으로 나이를 먹으면서 몸을 둥글게 만든다. 그래서 나무의 나이테는 진정한 연륜이다. 나무가 어떻게 해서 몸을 둥글게 만들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아는 순간 비로소 인간도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평온하게 살아갈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나무는 겉에서 보면 앞뒤의 구분이 없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나지 않고 둥글게 살았다는 뜻이다. 나무는 수직과 수평, 종과횡을 막힘없이 살았기 때문에 몸을 둥글게 만들 수 있었다. 더욱이 나무는 매일 평등하고 공평한 하늘의 기운을 먹고 성장한다. 나무가 둥근 것은 막힘도 없고 평등하며 공평한 하늘을 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무의 줄기는 위로 향하지만 뿌리는 아래로 향하고, 나이테는 수평으로 뻗는다. 한쪽은 위로 향하면서 다른 한쪽은 아래로 향하는 절묘한 조화가 바로 나무의 삶이다. 수평으로 늘어나는 나무의 나이테를 알고자 한다면 가지를 보라. 줄기가 위를 향할 때 가지는 옆으로 뻗는다. 나무는 햇볕을 먹기 위해 수직 상승하는 힘만큼 '수평 살이'에도 같은 힘을 쏟는다. 그래야만 균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진숙, <시대를 훔친 미술>

이성이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올바른 접근법만 거치면 설명이 가능하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스티븐 그린블렛, <1417년, 근대의 탄생>

이 세계에 들어왔던 것처럼, 당신이 죽음에서 삶으로 왔던 그 똑같은 길을 따라 어떤 감정이나 두려움 없이 다시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자. 당신의 죽음은 우주의 질서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죽음 역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의 한 부분이다. // 우리의 삶은 서로에게서 빌린 것이니, 인간은 주자(走者)처럼 삶의 횃불을 따라가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박웅현, <다시 책은 도끼다>

나는 스위스 알프스에 있는 론 강의 원천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비단 리본만큼 좁다란 파란 물이 초록색 빙하 아래로, 마치 어디로 갈지 무엇이 될지 모르는 듯 주춤거리며 나아간다. 그것은 천천히 움직이며 조금씩 커져 다른 물의 띠와 만난다. 그리고 결심한 듯 길을 파 만들며 더 이상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나아간다. 이제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더 넓어지고 깊어져 마을을 적시고, 방앗간을 돌리고, 멜론 밭을 축이고, 도시를 가르며 지나 흘러 - 이미 그것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 바다로 향한다. - 천상의 두 나라

 

 

테미 스트로벨, <행복의 가격>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곧 마음가짐을 바꾼다는 뜻이다. 사쿙 미팜Sakyong Mipham은 저서 <내가 누구인가라는 가장 깊고 오랜, 질문에 관하여>에서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경지에 이르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은 날마다 잠깐씩 짬을 내어 마음가짐을 변화시키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하루에 10퍼센트씨간 바꿔 가면 된다."라고 썼다. 우리는 긍정적인 변화를 향해 마음을 열고 적극 노력해서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나 역시 매일 실천 가능한 작은 노력을 기울여서 두려움을 극복했다. 결국 이런 작은 노력이 모여 직업이나 환경에 큰 변화를 일으킬 추진력이 생긴다. 너무 느린 것 같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소박한 삶을 통해 엄격한 기대를 버리고 새로운 기회에 마음을 여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마음가짐의 작은 변화가 인생을 얼마나 크게 바꿔 놓는지 배웠다.

 

 

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지음,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인간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자 위대한 장점은 신뢰다. 자신의 믿음이 악용될 거란 두려움이 없다면, 다시 말해 타인을 전적으로 믿게 된다면, 모두의 인생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돈과 관련된 경제생활도 훨씬 편해질 것이다. 신뢰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신뢰 역시 무수히 많고 자잘한 사람 관계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3인류>

"나는 시키는 대로 일하면서 살고 싶어요. 만약 내가 자유를 얻게 되면,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면 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죠. 그보다 불안한 일이 또 있을까요? 나는 개인적인 결정을 어떻게 내리는지 몰라요. 나는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잘못 선택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움에 빠질 거예요. 그보다는 남들이 나 대신 결정해 주는  게 좋겠어요. 그러면 설령 그들이 그릇된 선택을 하더라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죠."

 

인간에게는 세 개의 뇌가 있다. 가장 오래된 첫 번째 뇌인 뇌간은 파충류의 뇌라 불리는데, 오로지 두려움과 욕망으로만 작동한다. 생존을 관장하기 때문에 세 뇌 중 가장 영향력이 크다. 두 번째 뇌는 변연계로, 모든 감정과 욕망과 좌절이 들어있다. 세 번째 뇌인 대뇌피질은 계획과 전략, 논리를 관장한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다뉴브>

목숨이 최상의 가치는 아니며, 목숨보다 더 가치 있는 무엇, 해처럼 삶을 밝고 뜨겁게 만드는 무엇을 위해 헌신할 때 삶이 더 사랑스럽고 유쾌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두려움 없이 그들이 조용히 죽음을 맞았던 것은, 이 세상의 원칙이 이미 심판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모든 힘이 다하고 / 나는 늙고 약해졌도다. / 죽음이 내 방문을 두드리는구나. / 나 두려움 없이 문을 여노라. / 하늘이여, 감사를 표합니다! / 내 삶은 / 한 편의 조화로운 노래였구나.

 

 

홍병선/최현철, <과학 기술과 철학의 만남>

우리 인류는 불을 자연에 대한 기본적인 발전력을 극대화하는데 사용하였다. 우선 제1의 불인 '자연적 불'을 생산하고 다루는 과학기술을 습득한 인간은 여타의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되게 되었다. 또한 제2의 불인 '전기의 발견'은 인간으로 하여금 불을 에너지로 어디에서나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게 해주었다. 또한 매우 적지만 가장 불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원자력은 제3의 불이라 불릴 수 있는 현대적 의미의 에너지이다. 이러한 불과 에너지에 관한 과학기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은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류의 역사였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미래의 에너지 자원에 대한 고갈의 두려움과 공포는 우리 인류로 하여금 자연적 한계에 대한 인간만의 거대한 도구를 마련하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웬델 베리, <지식의 역습>

발전의 성과를 계산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비용을 무시하지만,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자연 세계와 산업 기술이 정확한 균형을 이룬 적은 한 번도 없다. 나쁘게 표현하면 모순과 충돌과 심각한 피해가 있었다. 산업 기술은 적절한 규모와 응용의 타당성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거나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행동의 기준은 장소와 생물의 개별적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술의 용량에 의해 결정된다. 산업 기술은 자기 자신을 생명체에 적응시키는 대신 생명을 단순한 기계적 과정이나 화학적 과정으로 취급하면서 생명을 자기 자신에 적응시키려 한다. 산업 기술은 사랑, 상상력, 친근감, 연민, 두려움, 공포와 같은 감정의 작용을 억제한다. 일상에 대한 책임감은 줄어들고 노동의 '과정'은 단축된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잃게 된다.

 

 

스티븐 핑커, <빈 서판>

인간이 그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 공동의 힘을 갖지 못하고 사는 동안에는 이른바 전쟁이라는 상황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그것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벌이는 싸움이다. .... 그런 조건 아래에서는 노동을 위한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성과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문화도 없고, 항해나, 해상을 통해 수입될 수 있는 상품의 사용도 없고, 널찍한 건물도 없고, 큰 힘을 필요로 하는 물건의, 이동과 운송 수단도 없고, 지형에 대한 지식도 없고, 시간 계산도 없고, 예술도 없고, 문학도 없고, 사회도 없다. 가장 끔찍한 것은 끝없는 두려움과 폭력적인 죽음의 위험이다. 인간의 삶은 외롭고, 가난하고, 더럽고, 짧다. - 토머스 홉스

 

내가 보기에 지구가 이토록 고귀하고 훌륭한 것은 바로 그 안에서 다양한 변경, 변화, 생성 등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변화도 없어서 지구가 광대한 모래 사막이나 벽옥의 산으로 남았거나,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지구를 덮었던 물이 얼어붙어 거대한 얼음 덩어리로 남았다면, 내 눈에는 그저 이 우주 속에서 아무 운동도 하지 않는, 한마디로 불필요하고 존재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덩어리로만 보일 것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동물과 죽은 동물의 차이인데, 나는 달과 목성과 그 밖의 모든 천체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 사람들이 완벽함, 영원성 등을 높여 찬양한다면 내 생각에 그것은 계속 살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걱정은 네 가지 두려움으로 요약된다.

  •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다르다면 억압과 차별이 정당화될 것이다.

  •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부도덕하다면 인간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은 무익할 것이다.

  • 사람이 생물학적 법칙의 산물이라면 자유 의지는 신화가 될 것이고 더 이상 사람들에게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지 못할 것이다.

  • 사람이 생물학적 법칙의 산물이라면 삶의 의미와 목적이 사라질 것이다.

 

합리성의 개방적 측면에 대한 강조는, 마음이 조합적, 회귀적 체계라는 인지과학의 발견과 일맥 상통한다. 우리는 생각을 할 뿐 아니라, 생각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에 대한 생각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이 장에서 살펴보았던 갈등 해결의 진보적 방법들 - 법치에 복종하는 것, 양편이 체면을 잃지 않고 양보하는 방법을 찾는 것, 자기 기만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평등한 눈으로 보는 것-은 조합적, 회귀적 사고 능력에 달려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폭력의 진화론적 논리를 외면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것을 수용하거나 승인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고상한 야만인이 던져 주는 안락한 망상을 추구하면서, 폭력이 학습의 임의적 산물이거나 외부에서 침투한 병원균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폭력의 논리를 거부하면 폭력이 얼마나 쉽게 고개를 드는지를 잊기 쉽고, 폭력에 불을 붙이는 마음의 기능들을 무시하면 그 불을 끌 수 있는 마음의 기능들을 간과하기 쉽다. 우리의 많은 관심사들처럼 폭력의 경우에도 문제는 인간 본성에 있고, 해결책도 인간 본성에 있다.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유럽대륙의 불행한 사람들에게 빵보다 더 필요한 것은 '위대함'이다. 그런데 위대함에는 오직 두 종류가 있을 뿐이다. 즉, 영성적인 차원의 진정한 위대성과 세계 정복이라는 오래된, 거짓 위대성이 있다. ... 오늘날 진정한 위대성의 형태는 삶의 영성에 토대를 둔 문명 속에 존재한다. ...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개념을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만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더럽히지 않고, 그것이 거짓말이 되지 않게 하면서 그 개념에 접촉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시대는 너무나 거짓말로 오염되어서 그것이 접촉하는 모든 것이 거짓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시대에 속해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깨달은 것은 소규모 자급농을 통해서 우리는 '땅의 기운(genius loci)'에 눈뜨게 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의 삶터에는 그 땅을 보호하는 영적 기운이 있다. 우리가 한 장소의 독특한 힘과 아름다움을 체험하기 위해서 티베트나 혹은 다른 이른바 이국적인 지방으로 여행할 필요는 없다. 시인들은 진리를 말해왔다 - 한 장소를 안다는 것은 그 땅의 영기에 사로잡혀, 거기에서 두려움과 공경심, 겸손과 감사의 미암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어떠한 나라이든 명민하고, 정직하고, 친절하며, 인간적인 곳이면 잘 실현될 수 있을 것인데, 그런 나라에서 대체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할 필요도, 그럴 욕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제일 최고'가 되는 데 마음을 쓰는 일도 없고, 심한 빈곤과 소외감, 실패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지도 않으며, 서로서로 착취하거나 잡아먹는 일도 없을 것이다. - 존 홀트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두려움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 프랭클린 루즈벨트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오래 전부터 몇몇 사람들은 온 몸으로 생생히 느낄 수 있을 만큼 두려움을 자아낼 수 있다면,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의 포악함과 광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어 왔다.

 

 

셰익스피어, <햄릿>

죽은 뒤의 그 어떤 두려움과 한 번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결심을 무디게 하고, 그래서 미지의 저승으로 날아가느니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참게 만드는 것인가?

 

 

스티브 도냐후,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뭔가를 시도해 보고 싶지만 두려움이나 실리적인 생각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정체 상태에 빠지면 좌절감을 느끼거나 화가 난다.

 

마음속 보초가 당신은 열정을 따라 하고 싶은대로 하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허상의 국경선에 멈춰 버리면 열정도 죽는다. 허상의 국경선은 항상 두려움을 낳는다. 이 두려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믿음과 연관되어 있고, 이 잘못된 믿음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그에 저항할 용기나 통찰력이 없다면, 그 둘이 합세하여 우리를 사막 한가운데에 가두어 버릴 수도 있다. 허상의 국경선은 허상처럼 보이지 않고, 진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 국경선을 건너면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그 국경선을 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마키아벨리, <군주론>

잔인함과 인자함,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나은가?

현명한 잔인함이 진정한 자비이다. 모든 군주들이 잔인하지 않고 인자하다고 생각되기를 더 원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신민들의 결속과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잔인 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너무 자비롭기 때문에 무질서를 방치해서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죽거나 약탈당하게 하는 군주보다 소수의 몇몇을 시범적으로 처벌함으로써 기강을 바로잡는 군주가 실제로는 훨씬 더 자비로운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 <자전거 여행>

배낭이 무거워야 살 수 있지만, 배낭이 가벼워야 갈 수 있다. 그러니 이 무거움과 가벼움은 결국 같은 것인가. 같은 것이 왜 반대인가. 출발 전에 장비를 하나씩 빼 버릴 때 삶은 혼자서 조용히 웃을 수밖에 없는 비애이며 모순이다. 몸이 그 가벼움과 무거움,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짊어지고 바퀴를 굴려 오르막을 오른다. 빛 속으로 들어가면 빛은 더 먼 곳으로 물러가는 것이어서 빛 속에선 빛을 만질 수 없었고 태백산맥의 가을 빛은 다만 먼 그리움으로서만 반짝였다.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자기 비난이 과거의 벽돌 벽을 바라보면서 잘못 놓인 두 장의 어긋난 벽돌만을 보는 것이라면, 두려움은 미래의 벽돌 벽을 바라보면서 잘못 놓이게 될 벽돌만을 보는 것이다. 두려움이 눈을 가리면, 완벽하게 쌓아올려질 나머지 벽돌들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벽 전체를 바라보는 일이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불행한 가능성에 집중할 때, 그것은 두려움이라 불린다. 반면에 다른 가능성들이 훨씬 많음을 기억할 때, 그것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라 불린다.

 

두려움은 미래의 잘못될 일들을 예측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마음속에 간직하기만 해도, 결코 무엇이 잘못될 것인가 예측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두려움은 끝이 난다.

두려움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자각함과 동시에 녹아 없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지혜를 사용하지 않으면, 두려움이 우리를 녹여 없앨 수 있다.

 

두려움은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다. 고통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벗어던지면 단지 아프다는 감각만이 남는다.

 

 

노동효, <길위에서 책을 만나다>

안정을 추구할수록 더욱 불안정해진다. 불안정이 삶의 근본 이치인 까닭에.

안정을 추구하지 않을 때 비로소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삶의 불안정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뻐할 때 성숙이 그대를 찾아올 것이다 - 틈

 

 

류콴홍, <철학우화>

자유는 완벽하게 자신의 일이며, 자아의 선택에는 어떤 기준도 없답니다. 자유는 행동을 의미하고, 이런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절망과 고통을 통해 자유를 경험하고, 진정한 고통은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지요. 사람은 자유가 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는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모든 일은 알 수 없는 동시에 또한 가능한 것이기에 과거나 현재, 미래와 대면했을 때 인간은 일종의 막연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유를 회피하기도 합니다. ... 흔히 말하는 절대자유란 이런 사실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선택에는 대가가 뒤따르기 마련이에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지요.

 

인류 초기의 문화 활동을 살펴보면 신앙은 인류의 다양한 심리적 공허함을 채워주었고, 어려움 속에서도 평정심과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답니다. 또한 실망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게 해주었지요. 영혼의 보살핌이 있기에 인류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선현, <그림의 힘>

과거의 기억에 따른 아픔, 현재에 대한 불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나 한 번쯤 겪듯이,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화해하며 그렇게 매일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른이 될수록, 실망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에 애초에 기대를 버리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매분 매초를 황홀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잊고 살았던 게 아닐까요? 앤의 말처럼 앞일을 생각하는 건 발견과 상상으로 가득한 즐거운 일인데 말이죠.

 

죽음 역시 우리 인생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며 두려움을 다독여주는 것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다면 앞으로 몇 시간 내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알기 위해 거울속에서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내 육체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존 로빈스, <인생혁명>

중요한 것은 할 필요가 있는 일을 하고, 돈과 인간의 정신에 관해 같은 숨결로 말하고, 돈에 관해 결정할 때는 두려움이 아닌 올바른 선택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계좌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건 있는 그대로 자기 모습에서 웃음과 기쁨, 아름다움을 찾아보자.

 

 

가와구치 요시카즈, <신비한 밭에 서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의 한 생명에 집착함이 없이, 목적에 눈이 어두워 무명의 세계에 떨어지는 일이 없이, 다른 생명을 탐내는 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 <영혼의 미술관>

모든 연인 관계에는 상대방이 나를 올바르게 탐사하기보다는 오해하고 마음대로 상상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겪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아는 척하면서 엉뚱한 곳을 짚을 때 우리는 심란해진다. 상대방은 진실을 알려 하지 않고, 내가 겪는 상황의 본질을 세심히, 애정을 기울여 알려하지 않는다

 

 

윤태호, <미생>

익숙한 것, 친숙한 것으로부터 낯설기. 그것은 곧 다르게 생각하기와 패러다임 변화의 시작이죠. 매일 똑같은 생활과 반복되는 업무는 매너리즘을 동반하고 조건반사형 인간만을 만들어내죠. 우린 좀 더 우리 삶을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낯설게 보기를 위해 우리는 공포에서 한 발짝 떨어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포의 대부분은 실체가 없는 비이성적 두려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까 하는.....

 

 

작가란 무엇인가?

글을 쓰는 노력은 똑같습니다. 정확한 문장을 쓰기 위해 들이는 노력도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상상력으로 쓰는 작품은 논픽션 작품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자유가 있고 훨씬 더 많이 조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종종 상당한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다음에 무엇이 나올까? 내가 쓰고 있는 문장이 절벽의 가장장리에서 나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선전적인 작품에서는 미리 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작가의 주요한 의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글 쓰는 것이 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고독의 발명>의 첫 부분에 사용된 제사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헤라클리투스가 쓴 문장 하나를 인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가이 데븐포트의 비정통적이지만 상당히 우아한 번역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 나설 때 예상치 못한 일들에 대비하라, 왜냐하면 진리를 찾는 것은 어려우며, 그것을 찾았을 때 당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글쓰기는 글쓰기입니다.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주여, 우리의 의심을 지켜주소서. 의심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의심은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의 문제에 대한 많은 답들과 두려움 없이 마주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 성스러운 순간 (기도문) 중에서

 

누구나 살면서 피해갈 수 없는 비극과 맞닥뜨리는 때가 있다. 살고 있는 도시가 파괴되거나, 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근거 없는 비난을 받으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리기도 한다. 삶은 위기의 연속이며, 이 사실을 망각한 사람은 운명이 준비한 도전에 무방비상태로 맞서게 된다. 고통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묻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파울로 코엘료, <아크라 문서>

여행자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온갖 새로운 일들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이 다쳤을 때 제대로 대처하는 방법을 모를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번민한다. 하지만 나아가야 하는 길 위에 서 있고 다른 대안이 없으면 그는 굳건한 의지력을 발휘하게 되고, 결국 주변 상황이 그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적의 계획을 알고 싶으면, 현명한 사람은 거짓으로 공격을 시도한다. 우리는 누구나 남들이 우리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피해망상 속에 살기 때문에, 늘 스스로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 (바버라 셔)

우리 마음속에는 늘 뭔가를 경계해 조심하고, 격한 행동은 멀리하려는 본능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본능은 우리를 보호하며, 위험해 보이기만 해도 일일이 피하도록 한다. 그런데 그 본능은 틀린 적이 많다.

 

결정에 따른 두려움 (화자 미상)

내 선택이 잘못된 것임이 판명 날 경우, 그 경험에서 배우고 배울 수 있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그 결정이 크든 사소하든 결정에 따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신념이 두려움을 이긴다 (헨리 에머슨 포스딕)

두려움은 우리를 가두고, 신념은 우리를 석방한다. 두려움은 마비시키고, 신념은 힘을 준다. 두려움은 용기를 빼앗고, 신념은 용기를 준다. 두려움은 병을 주고, 신념은 약을 준다. 두려움은 무용지물로 만들고 신념은 쓸모있는 것으로 만든다.

 

 

다릴 앙카,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가슴 뛰는 일을 하라. 그것이 당신이 이 세상에 온 이유이자 목적이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당신은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나가는 힘이 누구에게나 있다. 두려움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삶도 두려움으로 가득차게 만든다. 사랑과 빛을 믿는 사람은 오직 사랑과 빛만을 체험한다. 당신이 체험하는 모든 물리적 현상은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당신 삶에서 하고 있는 체험들은 당신 자신이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는가 부정적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체험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파괴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이 파괴적인 결과를 부릅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것을 계속 자신의 인생에 끌어들이게 됩니다. 

 

두려움은 부정적인 것을 끌어들이는 파장을 냅니다. 기쁨의 파장은 기쁜 일만을 끌어들입니다.

모든 것은 당신이 내보내는 파장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라디오를 켜 봅시다. 어떤 채널에서는 긍정적인 프로그램을 하고 있고, 다른 채널에서는 부정적인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고 합시다. 당신 스스로 선택한 채널에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가 나옵니다. 그것을 듣고 있을 때 다른 채널의 방송은 들리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당신의 라디오를 부정적인 채널에 맞춥니다. 기쁨과 신뢰는 긍정적인 채널을 선택합니다.

 

두려움은 신뢰의 부족이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우리는 항상 많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타인의 분노라든가 폭력에 의해 자신이 피해자기 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한 두려움이 없으면 더 많은 사랑을 체험할 수 있고 더 나은 인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으로부터 판단이 아니라 신뢰로부터의 판단을 하자.

환경은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다. 남은 것은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고 즐기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한 가장 좋은 시간은 '지금 이순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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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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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로봇을 통해 인간은 좀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와 여가의 시간을 비주체적 미디어소비와 게임에 뺏길지 모른다.

 

 

[본문발췌]

 

 

사람의 판단은 고유한 상황에서 활용되고 그 패턴을 정형화시킬 필요가 없는 유연성을 갖지만 컴퓨터에겐 이러한 유연함이 없다. ... 기계가 사람처럼 유연한 판단을 하게 하려면 고유한 상황도 정밀하게 패턴화해서 그에 맞는 대응 절차를 입력해야 한다. 컴퓨터가 상황에 따라 적절하고 유연한 판단을 내린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알고리즘의 정교한 설정에 따른 결과다.

 

 

자율주행 상황의 딜레마는 우리의 삶이 알고리즘의 세계로 변환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람의 판단과 행동이 언제나 합리적이지도 않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지도 못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우연과 무작위, 그리고 무지의 장막으로 보호되어왔다. '실수'라는 것은 사람에게 허용된 자유의 영역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로봇과 인공지능에 의존하고 위임한다는 것은 이러한 우연과 무작위의 세계를 벗어난다는 의미다. 우리는 사람과는 달리 기계에 대해서는 너그러울 수도, 자유를 부여할 수도 없다.

 

 

기계 처리와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인간 고유의 사고력과 통찰력이 중요해진다. 두 개 이상의 두뇌를 굴리려면 제1 두뇌가 더 기민하고 정확하게 작동해야 한다. 슈퍼컴퓨터 수준의 외뇌를 손에 쥐게 됐다는 것은 우리가 엄청난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의미다. 외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능력과 삶의 질이 달라지는 세상이 도래했다. 이런 환경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외뇌와 도구는 항상 제1 두뇌의 명령과 조작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백과사전의 쇠락은 정보의 디지털화에서 비롯한다. 아날로그 시대에 개별성과 유한성을 지녔던 선형적 정보가 디지털 환경에서 비선형적으로 달라지면서 연결성과 무한성을 지니게 됐다. 뛰어난 연결성은 정보에 시간 축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고 정보의 실시간성이 부각되었다. 지식의 규모와 구조, 속성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모든 정보는 '절대 지식'이 될 수 없고 유효기간과 반감기를 가진 '가변적 지식'이라는 통찰의 힘은 디지털 시대에 더욱 두드러진다. 위키피디아는 '지식의 반감기'가 점점 단축되는 환경에 적합한 지식체계다. 온라인 백과 위키피디아의 가장 큰 특징은 다중이 참여하는 열린 편집체계라는 점 못지않게 '빨리빨리'라는 뜻의 '위키'처럼 빠른 속도로 지속 변화하는 지식의 진화 구조에 최적화된 체계라는 점이다. 위키피디아의 장점은 정보의 '정확성'과 '불변성'이 아니라 '가변성'과 '신속성'이다. 권력과 전문성을 지닌 소수가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도맡던 시절에 비해 누구나 정보에 접근하고 생산에 참여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지식의 변화속도는 말할 수 없이 빨라졌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는 '지식의 반감기'가 단축되는 환경에 최적화한 열린 지식체계이지만, 지식의 가변성은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다. 즉 위키피디아의 정보는 기본적으로 '최종적 지식'이 되기 어렵다. 위키피디아를 만든 지미 웨일스는 "위키피디아를 잘 쓰는 방법은 지식의 최종 지점이 아닌 출발 지점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식과 교육 시스템은 언제나 학습자에게 호기심과 동기를 제공하고 지식의 출발 지점을 알려줄 따름이다. 이후는 학습자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여정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고 또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로봇과 다른 지적 존재로서 성장할 첫걸음이다.

 

 

왜 사람에게 일자리가 필요한지는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가 1759년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노동을 하면 우리는 세 가지 악에서 멀어질 수 있으니, 그 세 가지 악이란 바로 권태, 방탕, 궁핍이라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행복의 정복>에서 인간은 권태, 죄의식, 피해망상증 때문에 불행해진다며 열정, 사랑, 노력과 체념 그리고 일이 행복을 정복하는 중요 도구라고 주장했다.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에 일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는 상식이다.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여가가 대중사회에서 대중화, 민주화되었다는 것은 여가 활동이 누구나 손쉽게 구매하고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는 의미다. 대표적인 것이 여행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은 1962년 <이미지의 환상>에서 지난날 일종의 모험이자 '수고로운 일travail'로서의 고유한 경험이던 여행travel이 대중사회화와 상품화로 인해 누구나 구매할 수 있는 관광tour으로 변한 현실을 지적했다. 미지의 모험이자 예측 불가능한 경험의 연속이라는 여행의 본질은 사라지고 모든 과정이 예측되고 통제되는 준비된 '상품'으로서의 이미지만 남아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수고로움과 위험을 동반한 '트래블'이 '투어'가 되면서 여행의 진짜 경험은 사라져버리고 사진 찍기용 상품이 되어버린 가짜 사건pseudo-event의 연속이 되어버린 것이다.

 

 

측정되는 과학의 시간은 균일하지만 우리가 지각하는 생활 속의 시간은 주관적이다. <슈피겔> 편집장 출신의 독일 과학저술가 슈테판 클라인은 <시간의 놀라운 발견>에서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시간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갖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현대인들의 시간 기근 현상은 자신에게만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스스로 지각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주관적 감정 상태이다. 자신의 욕망과 목표, 사회적 기대 수준에 비춰보아 자신의 시간이 부족하다는 자각에서 비롯하는 감정인 것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여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유시간을 즐기는 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별다른 기술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자유시간은 일보다 즐기기가 어렵다. 여가를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여가가 아무리 생겨도 삶의 질은 높아지지 않는다. 여가를 효과적으로 쓰는 것은 자동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비주체적인 미디어 소비에 지나치게 많은 여가시간을 쏟아붓느라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활동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늘 바빠서 하고 싶은 일을 할 틈이 거의 없다"라고 엉뚱한 핑계를 대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뇌에는 사고, 기억, 판단 등 인지활동을 할 때가 아니라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멍하게 있을 때 비로소 활성화되는 일련의 부위가 있다는 연구다. 편안하게 아무 생각 없이 쉬는 동안 활성화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자아 성찰, 사회성과 감정, 창의성을 지원하는 두뇌의 부위라는 것이 잇단 연구로 밝혀지고 있다. 멍하게 쉬어야 비로소 가장 사람다운 기능이 두뇌에서 작동한다는 발견은 우리의 삶에서 휴식과 여가가 갖는 의미가 지대함을 알려준다.

 

 

애착 감정은 상대의 반응이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냐 못지않게 내가 얼마나 그 대상에 주의와 감정을 기울였느냐에 달려 있다. <어린 왕자>에서 사막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들인 시간이란다"라고 일러주었듯이 말이다. 우리에게 편리함과 안전함을 제공해주고 감성적 피드백을 보내는 로봇에 대해 우리의 애착감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로봇과의 교감이 가능해지는 것은 로봇이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을 모방해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표현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로봇이 감정을 지니고 정서적 표현 능력을 갖춘 것이 아니라 사람이 로봇에게 그런 감정이 있다고 믿고 로봇의 감정적 표현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다. 로봇이 섬세하게 나의 기분을 맞추고 반응하는 덕분에 내가 로봇을 나에 대해 잘 아는 생명체처럼 여기더라도 이는 로봇의 내부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공감하는 감정적 동물이다.

  • 공감과 돌봄은 힘들고 수고로워 보이지만 생명체로서 우리가 진정 사람다워지는 본질적 속성이다. 

  •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 덕분에 사회적 존재로서 인류는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다.

  • 인간관계에서 만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로감을 느끼는 배경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과 상대의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점이 있다. 일라이자의 사례처럼 로봇과의 관계는 교감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상대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는, 의무 없는 편안한 관계다.

  • 사람에게 감정은 신체의 통증이나 고통과 유사하다. 통증은 피하고 싶은 괴로운 현상이지만 사실은 생존을 돕는 생명유지 장치이다. 통증 덕분에 우리는 위험과 신체의 상태를 지각할 수 있고 더 큰 고통을 피하면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감정도 유사하다.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인 우리는 원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도록 되어 있다.

 

멀티태스킹의 부정적 효과를 세계적 논쟁거리로 만든 카의 2011년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보기술과 호기심의 미묘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인터넷이 하이퍼링크와 멀티태스킹 기능은 지적 추구에 최고의 환경을 제공한다. 모든 질문과 호기심에 대해 즉시 답을 줄 수 있다.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도서관의 도서목록 카드와 서가를 뒤지거나 책장을 넘길 필요 없이 바로 원하는 정보를 눈앞에 가져다준다. 컴퓨터 한쪽에 위키피디아나 검색 창을 열어놓고 과업을 수행하다가 모르는 것이나 궁금한 것이 생기면 검색해보고 그 정보를 활용해 과업을 진전시키고 심화시킬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하이퍼링크와 멀티태스킹은 호기심을 숙성시킬 수 있는 틈(스콜레)을 없애버렸다.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새로운 정보에 탐닉함에 따라 집중력과 깊은 사고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 카의 지적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이 능력이 장인 노동의 기본을 이룬다. 초점을 맞추고localize, 질문하고question, 문제를 설정하는open up 능력이다. 초점 맞추기는 작업 대상을 구체화하는 일이고, 질문은 그 대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특징을 파악하는 일이고, 문제 설정은 무의미해 보이는 요소들 간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직관적 도약과 개방적 사고를 통해서 대상의 의미를 확장하는 일이다. 이는 사실상 호기심과 질문이 작동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구분한 것이다. 호기심을 숙성시켜서 제대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추구해가는 것이 탁월함을 만든다는 통찰이다. 더욱이 지적이고 정신적인 작업 위주인 학자나 사상가가 아닌, 자신의 몸을 도구로 사용해 예술적 경지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육체적 노동을 필수로 하는 장인들의 경우에도 질문은 핵심적 가치를 갖는다.

 

 

예측 불가능의 복잡한 상황에서 가장 유용한 도구는 유연함이고 이는 호기심으로 나타난다.

 

 

우리에게 기억은 의도적 망각과 삭제의 과정을 거친 결과이고 추상화 작용의 핵심이다. 

 

 

망각은 인간 기억 기능의 결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추상화와 일반화를 가능하게 해서 창의력과 통찰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전략적 선택이다. 

 

 

기억을 외부에 의존하는 행위가 스스로 무지함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에게 지식이 있는 것으로 잘못 판단하게 만든다는 말은 인터넷 환경에서 더욱 돋보이는 통찰이다.

 

 

기억은 우리가 주의력을 집중하는 정도에 따라 자세하게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 기억장치에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뇌는 그 대상에 주의력을 덜 할당하게 된다.

 

 

우리가 경험과 학습을 통해 형성하는 기억의 총체가 곧 의식이자 삶이다. 풍부한 기억이 곧 풍요로운 삶이다. 친구와 가족, 배우자가 각별한 것도 서로 공통된 기억을 통해 삶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기억은 비록 부실하지만 우리가 부여받은 값진 선물이다.

 

 

메리 올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힘은 감정과 호기심을 말한다. 기계가 따라 할 수 없는 사람만의 특성인 사랑과 호기심은 감정적 결핍과 지적 결핍에서 나온다. 감정과 호기심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마법의 불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불쏘시개와 연료로 만들어버리는 치명적인 에너지라는 시인의 통찰은 인공지능 시대에 사람은 어떻게 사람다울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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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공간이동을 하지 못하는 식물은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뎌내면서 시간을 통한 여행을 한다'

씨앗속에 생명을 간직하고 싹 틔우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기다리는 것, 몇 백년을 자라며 깨끗한 공기와 시원한 그늘을 주는 아름드리 나무들... 이런 것들이 식물의 시간 여행이겠지?

 

 

[본문발췌]

 

 

돈은 늘 지식을 위한 과학이 아닌 전쟁을 위한 과학에 몰렸다.

 

 

씨앗은 번성하기를 기다리지만 나무는 죽기를 기다린다.

 

 

우리는 갈고, 포장하고, 태우고, 베고, 판다. 우리가 사는 도시 환경에서 번창할 수 있는 식물은 단 한 종류밖에 없다. 바로 빨리 자라고 공격적으로 번식하는 잡초들이다. 살지 않아야 할 곳에서 사는 식물은 골칫덩어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살지 않아야 할 곳에서 번창하는 식물이 잡초다. 우리는 잡초의 대담성에 화를 내지는 않는다. 모든 씨앗은 대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잡초들의 눈부신 성공이다 인간들은 잡초밖에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잡초가 많이 자란 것을 보면 충격을 받은 척, 화가 나는 척한다.

 

 

당신이 아무리 일을 사랑해도 일은 당신을 사랑해주지 않아요.

 

 

30억 년 동안 진행된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생물 중 단 한 종의 생물만이 이 모든 과정을 뒤집어 지구를 훨씬 덜 푸른 곳으로 만들 능력을 지녔다. 도시화는 식물들이 4억 년 전에 고생 끝에 푸르게 만들었던 곳에서 식물의 흔적을 없애고 땅을 다시 딱딱하고 황폐한 곳으로 되돌리고 있다.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눈 속에서 사는 식물들에게 겨울은 여행이다. 식물은 우리처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여행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식물은 장소를 이동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뎌내면서 시간을 통한 여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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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잘 쓴 글이고, 글쓴이의 개성을 입혀 읽는 사람의 공감과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면 훌륭한 글이다.

 

 

[본문발췌]

 

 

논증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려면 꼭 지켜야 하는 규칙 세 가지

  • 단순한 취향 고백과 논증해야 할 주장을 분명하게 구별한다. 

  •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사실은 그저 기술하면 된다. 그러나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반드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옳은 주장이라는 것을 논증해야 한다.

  • 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글을 쓸 때는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 엉뚱한 곳으로 가지 말아야 하고 관련 없는 문제나 정보를 끌어들이지 않아야 한다. 원래 쓰려고 했던 이유, 애초에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잊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직선으로 논리를 밀고 가야 한다.

 

글쓰기의 목적은, 그 장르가 어떠하든,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해 타인과 교감하는 것이다.

 

 

텍스트 요약은 단순한 압축 기술이 아니다. 요약하는 사람의 사상과 철학을 반영하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텍스트 요약도 자기소개서 쓰기와 다르지 않다. 요약하는 사람의 소망과 의지와 태도에 따라 같은 텍스트라도 다르게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글을 잘 썼다고 할까? 시와 소설 같은 문학작품은 객관적인 기준을 세우기 어렵다. 그러나 논리 글은 다르다. 논술 시험 답안, 문학평론, 신문 기사와 칼럼, 연구 논문, 보도자료 같은 글은 어느정도 객관적인 기준을 정할 수 있다. 나는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쉽게 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박하거나 동의할 근거가 있는 글이어야 한다. 이렇게 글을 쓰려면 다음 네 가지에 유념해야 한다.

  • 첫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주제가 분명해야 한다.

  • 둘째, 그 주제를 다루는 데 꼭 필요한 사실과 중요한 정보를 담아야 한다.

  • 셋째, 그 사실과 정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나타내야 한다.

  • 넷째, 주제와 정보와 논리를 적절한 어휘와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

 

논리적인 글을 잘 쓰려면 주제와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사실과 정보를 최대한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야 하며, 그것을 적절한 논리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소리 내어 읽어봄으로써 못난 글을 알아보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한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언어는 말과 글이다. 생각과 감정을 소리로 표현하면 말(입말)이 되고 문자로 표현하면 글(글말)이 된다. 말과 글 중에는 말이 먼저다. 말로 해서 좋아야 잘 쓴 글이다. 글을 쓸 때는 이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노래를 잘해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글쓰기도 노래와 다르지 않다. 독자의 공감을 얻고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잘 쓴 글이다. 많은 지식과 멋진 어휘, 화려한 문장을 자랑한다고 해서 훌륭한 글이 되는 게 아니다. 독자가 편하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것이 기본이다. 기본을 지키기만 하면 최소한 못나지 않은 글을 쓸 수 있다. 여기에 나름의 개성을 입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면 훌륭한 글이 된다.

 

 

'의'와 '에의' '으로의' '에서의' '에 있어서의' '에로의' '으로부터의' 같은 일본식 조사는 주로 글에서 볼 수 있다. 말까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너무나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이렇게 못난 글을 쓴다. '민중의 주인 된 삶' '문학에의 초대' '고향으로의 귀향' '급변하는 사회에 있어서의 문학의 영원성' '냉전 체제로의 회귀'와 같이 일본말 조사를 따라 쓴 글은 학술 논문부터 문학평론, 신문 기사, 방송 리포트, 여성잡지를 가릴 것 없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미디어에 널려 있다.

 

 

글은 단문이 좋다. 문학작품도 그렇지만 논리 글도 마찬가지다. 단문은 그냥 짧은 문장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길어도 주어와 술어가 하나씩만 있으면 단문이다. 문장 하나에 뜻을 하나만 담으면 저절로 단문이 된다. 주어와 술어가 둘이 넘는 문장을 복문이라고 한다. 복문은 무엇인가 강조하고 싶을 때, 단문으로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때 쓰는 게 좋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다. 표현할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써서 인정받고 존중받고 존경받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내면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내면을 가지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글은 '손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다. 글은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쓰는 것이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방법만 배운다고 해서 글을 잘 쓰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시와 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재주가 아니라 삶으로 글을 쓴다고 말한다. 시사평론과 칼럼, 논술문과 생활글은 더 그렇다. 은유와 상징이 아니라 사실과 논리로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기술은 필요하지만 기술만으로 잘 쓸 수는 없다. 잘 살아야 잘 쓸 수 있다. 살면서 얻는 감정과 생각이 내면에 쌓여 넘쳐흐르면 저절로 글이 된다. 그 감정과 생각이 공감을 얻을 경우 짧은 글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사람은 무엇인가 표현할 것이 있으면 글을 쓰고 싶어진다. 내면에 어떤 가치 있는 것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글로 표현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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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 쉼표... 여유를 위해 우리가 잠깐이라도 가져야 할 시간입니다.

 

 

[본문발췌]

 

삶의 지혜란 굳이 내가 무언가를 많이 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편안한 멈춤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간단한 진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아니, 단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고 싶었다. 그런 지혜가 생기면 비로소 나 자신과 지금의 상황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때 편안함도 더불어 느낄 수 있게 된다.

 

 

세상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쉬면 세상도 쉽니다.

 

 

음악이 아름다운 이유는

음표와 음표 사이의 거리감, 쉼표 때문입니다.

말이 아름다운 이유는

말과 말 사이에 적당한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쉼 없이 달려온 건 아닌지,

내가 쉼 없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때때로 돌아봐야 합니다.

 

 

행복은

생각이 적을수록,

함께 같이 나눌수록,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마음이 와 있을수록

더해집니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쉬고 마음속으로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평안하길...' 기도해보세요.

이 말과 함께 평안이 곧 밀려옵니다.

 

 

행복의 지름길.

첫째, 나와 남을 비교하는 일을 멈추십시오.

둘째,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내 마음 안에서 찾으십시오.

셋째, 지금 이 순간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느끼십시오.

 

 

인간관계는 난로처럼 대해야 합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냥 내가

약간 손해 보면서 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사십시오.

우리는 자신이 한 것은 잘 기억하지만

남들이 나에게 해준 것은 쉽게 잊기 때문에,

내가 약간 손해 보며 산다고 느끼는 것이

알고 보면 얼추 비슷하게 사는 것입니다.

 

 

나는 상대의 거울입니다.

상대는 또 나의 거울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상대로부터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이렇게 해달라 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렇게 합니다.

 

 

행복을 결정하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의미를 가져다주는가?

둘째, 나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은가?

이 두 가지 질문이 사람들의 행복의 열쇠라고 합니다.

 

 

삶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이 아닌, 나 자신과 벌이는 장기 레이스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준비란 없습니다.

삶은 어차피 모험이고 그 모험을 통해

내 영혼이 성숙해지는 학교입니다.

물론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하겠지만

백 퍼센트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렸다

길을 나서겠다고 하면 너무 늦어요.

설사 실패를 한다 해도

실패만큼 좋은 삶의 선생님은 없습니다.

 

 

리더는 일을 할 때

대외적으로 어떻게 비춰질지에 대한 염려가

우선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차적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일을 하면서

어떤 실질적인 변화가 부하 직원들과 고객들에게

돌아갈지에 대해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자유'입니다.

좀 힘들어도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

남의 눈치 보며 돈을 조금 더 버는 것보다

훨씬 나은 삶입니다.

내 자유를 돈 받고 팔지 마세요.

 

 

지식은 말하려 하지만, 지혜는 들으려 합니다.

 

 

사랑,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문득 손님처럼 찾아오는 생의 귀중한 선물입니다.

 

 

내 마음도 내 뜻대로 하지 못하면서 무슨 수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무소유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아니다 싶을 때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 진짜 자유인입니다.

반대로, 없어서 갈증을 느끼는데도 무소유라는 이름으로

참고 사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도인이 달리 도인이 아닙니다.

알지만 말하지 않고 참을 수 있는 힘,

변화시킬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가만히 놔둘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도인입니다.

남들에게 보여주는 도(道)는 아직 설익은 도일 뿐입니다.

 

 

나이 드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삶의 열정이 식는 것은 두렵다.

 

 

내가 옳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같이 행복한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머리가 똑똑해 옳은 소리 하면서 비판을 자주 하는 사람보다

가슴이 따뜻해 무언가를 나누어주려고 궁리하는 사람,

친구의 허물도 품어줄 줄 아는 사람,

타인의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 되세요.

 

 

수용하세요. 내 뜻대로 일이 되지 않더라도 화내지 말고 나를 내려놓고 수용하세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79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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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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