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경제적 자유, '금전적 문제에 의해 내 살밍 흔들리거나 좌지우지되지 않는 정도의 경제적 자유'... 그 선을 넘어갈 때, 자유가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될 것이다.

 

 

 

[본문발췌]

 

투자란 '스스로 투자의 철학이 있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투자할 줄 아는 사람'이고, 투기꾼은 "왜 투자를 하는지 이유를 모르면서 아무 때나 투자를 하는 사람'이다.

 

 

일반 직장인의 경제적 목표란 금전적으로 큰 문제는 물론, 걱정 없이 남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정도가 이상적이라 봅니다. 즉, 죽는 날까지 자식들에게 손 안벌리고, 끼니 걱정하지 않으며, 마음 편히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수준, 더 나아가 2~3년에 한 번 정도는 아내(혹은 남편) 손잡고 해외 나들이 갈 수 있다면 더욱 금상첨화겠죠? 또한, 자식들 기념일이나 손주들 축하할 일이 생겼을 때 어느 정도 보태줄 수 있는 형편이라면, 경제적으로는 꽤 괜찮은 수준이라 할 수 있겠죠? 저는 이 수준을 일반 직장인이 기준으로 삼아야 할 '최소한의 경제적 자유', 즉 '최경자'라 생각합니다. 즉 금전적 문제에 의해 내 삶이 흔들리거나 좌지우지되지 않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주인 혹은 돈을 능동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최소한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사거나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 본능이 요구하는 소비패턴을 모두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일정 기간 계획을 세워 해낼 수 있는 수준 정도라면 괜찮다고 보는 겁니다.

 

 

일은 책임과 부담감의 일이 아닌 놀이로서의 일이 되어야 진정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 죽는 순간까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진짜 일입니다.

 

 

행복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시도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때, 현재와 미래의 행복은 우리 인생의 여유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성공의 기준은 철저히 자신의 만족에 두어야 합니다. 나이 들어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았을 때 만족스러운 삶이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삶입니다. 비록 부자가 되진 못했을지언정, 후회 없는 삶,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든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행복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 어느 것 하나도 놓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대신 조건을 하나 드렸죠. 절대로 돈과 행복을 같은 선상에 놓으면 안 된다고요. 19세기말 영국의 사상가이자 비평가였던 존 러스킨은 저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부란 돈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일상을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대하고 그 안에서 기쁨이 되는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태도 혹은 욕구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행복은 일상의 발견에서 시작됩니다. 현재의 행복은 현재에 온전히 집중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내 일상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을 통해 발견이라는 쾌거를 이룰 수 있는 거죠.

 

 

일상을 소중히 여겨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도전하여 새로운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할 것이며, 소중한 시간을 아껴 알차고 의미 있게 활용하여 나란 존재 혹은 내가 만들어 놓은 무언가를 이 세상에 남길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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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허물을 이야기 하기 전 나를 먼저 돌아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겸손과 배려의 부족, '나는 모두 옳다'는 생각, '확증편향' ... 나를 망가뜨리고 관계를 망가뜨리는 생각, 삶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

 

 

[본문 발췌]

 

 

"전신마취를 하면 인간은 그때 그냥 죽는 거야. 문서를 복사하면 열화가 일어나듯이 오랜 시간 마취됐다가 깨어난 사람은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야. 일종의 복사물인 거지. 도마뱀의 꼬리도 잘리면 다시 자라나긴 하지만 원래 크기로는 자라지 않는다잖아." 오빠다운 말이죠. 오빠가 거제도의 조선소에서 일했던 건 아시죠? 얼마 전 정리해고를 당했어요. 요새 그쪽이 다 어려워요. 회사에서 잘리던 날, 회사 담벼락에 노조가 붙여놓은 플래카드를 봤대요. '해고는 죽음이다.' 그걸 보고 오빠가 뭐라고 했는지 저는 알아요. "아니지, 죽음이 해고지. 해고된다고 죽는 것은 아니지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까" 명언이나 상투어를 뒤집어서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은 오빠의 오랜 버릇이거든요."해봐, 이상하게 다 말이 된다니까." 오빠가 사람들에게 장담하면 그때마다 사람들이 이것도 해보라, 저것도 해보라며 문장을 던져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오빠는 빙글빙글 웃으며 "즐길 수 없다면 피하라"고 답하고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어린왕자>의 유명한 구절을 제시하면,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다면 그게 바로 사막이다"라고 받아요. 가끔 어떤 격언은 뒤집어놓으면 더 의미심장해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금이 침묵이다' 같은 말이 그래요. 오빠가 해고를 당하던 날, 인사팀의 입사 동기가 그러더래요. "힘내라. 위기가 기회라잖아." 오빠가 뭐라고 했을지 언니도 이제 아시겠죠? " 웃기시네, 기회가 위기야." - '오직 두 사람'

 

 

언니, 제가 좋아하는 농담이 하나 있어요. 전에 어떤 일간신문 만화에서 본 건데요. 어떤 남자가 교통방송에서 뉴스를 들어요. 고속도로 어느어느 구간에 역주행을 하는 승용차가 있으니 일대를 운행하는 차량들은 모두 주의하라는 거예요. 그는 문득 그 방면으로 출장을 간 친구가 떠올라서 전화를 걸어요. 야, 그 부근에 역주행을 하는 미친놈이 하나 있대. 조심해.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한둘이 아니야. 얼른 전화 끊어. 다들 충고를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 중 하나였을 거예요. -'오직 두 사람'

 

 

"Other People's Money, 즉, 남의 돈 만세!라는 뜻이죠. 월스트리트의 뱅커들은 모든 것을 남의 돈으로 합니다. 남의 돈으로 투자하고 남의 돈으로 빌딩을 짓고 남의 돈으로 밥을 먹지요. 자기 돈을 쓰고 자기가 위험을 감수하는 놈들을 우리는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OPM이라.... - '옥수수와 나'

 

 

"난 언제나 현재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여기만 지나가자. 그럼 나아질 거야. 그런데 늘 더 나빠졌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나이가 어릴수록 더 행복했어요. 그럼 지금 이 순간도 최악이 아닐 수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그래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에서는 가장 젊고, 제일 괜찮은 순간일 수 있다는 건데.... 우리 모두 여기서 늙어가다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처음 들어왔던 때가 그래도 좋았어. 그땐 젊었고, 희망도 있었다." - '신의 장난'

 

 

"고등학교 때 담임이 만날, 우리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원했던 내일이다. 같은 헛소리르 칠판에 적어놓곤 했어요. 그 시절 노트에 보니까 내가 이렇게 적어놨더라구요. 그토록 원했던 내일도 막상 오면 헛되이 보낸 어제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너무 비관적인가요?" - '신의 장난'

 

 

문학에 어떤 역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언어의 그물로 엮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문학은 혼란으로 가득한 불가역적인 우리 인생에 어떤 반환의 좌표 같은 것을 제공해줍니다. 문학을 통해 과거의 사건은 현재의 독자 앞에 불려오고, 지금 쓰인 어떤 글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예감합니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다. 팩트 따윈 모르겠다. 그냥 그들을 느낀다.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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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만났을 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그 접점에 이르렀을 때 각 분야의 한계를 벗어나 변화와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본문발췌]

 

 

Consilience : The unity of knowledge

 

Consilience는 한마디로 '지식의 통일성'을 뜻한다. 이것은 옛날 어느 교수가 과학과 그 방법론에 관하여 가졌던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그는 그의 동료들이 과학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지극히 작은 단위들로 쪼개는 데 여념이 없어 전체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통합되어 있으며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들을 분리하면 그들만의 고유한 존재의 이유가 손상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이 같은 관점을 잃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래야 모든 과학이 개념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와인에는 더할 수 없이 어울리는 말이며 우리 네 사람의 뜻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단어다. 와인은 바로 우주와 인간의 통일을 의미하며 와인을 만드는 사람은 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직접적인 관찰로는 매우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현상들이 실제로는 통합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는 황홀함을 느낀다오. - 아인슈타인이 친구 마르셀 그로스만에게 쓴 편지 중

 

 

통섭(consilience)은 통일(unification)의 열쇠이다. 나는 이 용어를 정합(coherence)보다 더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통섭은 정합의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하나만을 뜻할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섭이라는 용어는 그 희귀성 때문에 그 의미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용어는 윌리엄 휴얼이 1830년에 <귀납적 과학의 철학>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설명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귀납의 통섭은 하나의 사실 집합으로부터 얻어진 하나의 귀납이 다른 사실 집합으로부터 얻어진 또 하나의 귀납과 부합할 때 일어난다. 이러한 통섭은 귀납이 사용된 그 이론이 과연 참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시험이다."라고 말했다. 통섭을 입증하거나 반박하는 일은 자연과학에서 개발된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자들의 노력이나 수학적 추상화에 고정되어 있기보다는 물질 우주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잘 작동해 온 사고의 습관을 충실히 따르려는 것이다.

 

 

통섭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지적인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조건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는 데 있다. 방금 내가 말한 주장을 예증하는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두 선을 교차하도록 그은 후 그때 생긴 네 영역에 이름을 적어 보라. 왼쪽 위에는 환경 정책을, 왼쪽 아래에는 사회과학을, 오른쪽 위에는 윤리학을,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는 생물학이라고 기입해 보자. 우리는 이미 직관적으로 이 네 영역이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서 어느 한 분야의 합리적인 탐구가 다른 세 영역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각 분야는 현재의 학계에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따로따로 확립되어 있다. 즉 그 분야만의 전문가, 언어, 분석 양식 그리고 타당성 기준들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는 혼란일 뿐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미 4세기 전에 이 혼란을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혼란이란 논증이나 추론이 하나의 경험 세계로부터 다른 경험 세계로 전달될 경우에 일어나는 실수들 중에 가장 치명적인 실수이다." 이제 이 그림에 교차점을 중심으로 동심원들을 몇 개 그려 보자. 네 영역의 교차점을 향해 점점 줄어드는 원의 내부에서 우리는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실제 세계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교차점에 가장 가까운 원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근본적인 분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도가 없다. 또 우리를 인도해 줄 개념과 단어도 거의 없다. 단지 상상에서만 다음과 같은 시계 방향의 여행이 가능할 뿐이다. 환경 문제의 인식, 견고한 기초를 가진 정책의 필요성, 도덕 추론에 근거한 해결책 선택, 그 추론의 생물학적 기초에 관한 탐구, 생물/환경/역사의 산물로서 사회 제도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다시 환경 정책으로 되돌아가기.

 

 

모든 학부생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무엇이고 그 관계가 인간 복지에 어떻게 중요한가?" 모든 대중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도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의회에 계류 중인 법률의 절반 정도는 중요한 과학 기술적 요소들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매일매일 우리를 괴롭히는 이 쟁점들 중 대부분, 예컨대 인종 갈등, 무기 경쟁, 인구 과잉, 낙태, 환경, 가난 등은 자연과학적 지식과 인문 사회과학적 지식이 통합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만이 실제 세계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이 실제 세계를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독단 그리고 임시방편적 렌즈를 통해서 볼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한결 같이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서 훈련 받은 사람들이며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거나 전혀 없다는 현실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열악한 상황은 대중 지식인, 언론인, 평론가, 각종 두뇌 집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들의 분석이 때로는 정확하고 믿을 만한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분석의 실질적인 기초는 파편화되어 있으며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균형 잡힌 관점은 분과들을 쪼개서 하나하나 공부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분과들 간의 통섭을 추구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 통합은 쉽게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통합은 진리의 울림이다. 통합은 인간 본유의 충동을 만족시켜 준다. 학문의 커다란 가지들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는 만큼 지식의 다양성과 깊이는 심화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학문들의 기저에 존재하는 응집력 때문이다. 이런 기획은 다른 이유 때문에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성에 궁극적인 목표를 주기 때문이다. 저 수평선 너머에 넘실거리는 것은 혼돈이 아니라 질서이다. 그곳에서 모험을 떠나는 일을 어찌 망설일 수 있겠는가.

 

 

인간의 마음은 밀랍으로 만든 서판과 같지는 않다. 서판의 경우 옛 것을 문질러 지우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쓸 수가 없지만, 마음의 경우 새로운 것에 쓰지 않고는 옛 것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과학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모아서 그 지식을 시험 가능한 법칙과 원리로 응축하는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탐구이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첫째 기준은 반복 가능성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수행해도 같은 현상이 나와야 하고 그런 현상에 대한 해석이 새로운 분석과 실험을 통해 입증되거나 반증되어야 한다. 둘째 기준은 경제성이다. 과학자들은 가장 많은 정보를 가장 적은 노력으로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정보를 추상화하고자 한다. 이것을 우아함의 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기준은 측정이다. 만일 어떤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척도에 따라 적절히 측정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일반화는 명확해진다. 넷째 기준은 발견 기법이다. 최고의 과학은 종종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후속 발견들을 자극한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은 원래 원칙의 진위를 다시 시험해 보게끔 한다. 마지막으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가르는 다섯째 기준은 통섭이다. 즉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여러 설명들을 서로 연결하고 일치시킬 수 있을 때 가장 경쟁력 있는 설명이 되나. 천문학, 생의학 그리고 생리심리학은 이 모든 기준들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불행히도 점성술, UFO학, 창조 과학,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어떤 기준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진정한 자연과학은 이론과 증거로 꽉 맞물려 있으며 근대 문명의 기술적 진보에 근간이 되어 왔다는 점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이비 과학은 개인의 심리적 필요는 충족시킬 수 있으나 기술 발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문화는 하나의 산물이다. 그리고 역사적이며 아이디어, 패턴, 가치 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선택적이고 학습되며 기호들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행동으로부터의 추상이며 행동의 산물이다. - 앨프리드 크로버, 클라이드 클럭혼

 

 

뇌는 생물학적 질서의 최고 단계들의 산물로서 개체의 해부학적 구조와 생리적 작용에 함축되어 있는 후성 규칙들의 제약을 받고 있다. 뇌는 환경 자극의 범람 속에서 작동하면서 보고 듣고 배우며 자기 자신의 미래를 계획한다. 진화 과정에서 수많은 뇌의 집합적 선택은 인간의 모든 것 - 유전자, 후성 규칙, 의사소통적 마음 그리고 문화 - 의 진화적 운명(Darwinian fate)을 결정한다. 지혜로운 선택을 한 뇌는 더 높은 진화적 적응도(Darwinian fitness)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그 뇌가 잘못 선택한 뇌들보다 통계적으로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자손을 남기게 됨을 뜻한다.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로 흔히 요약되는 이 일반화는 마치 동어 반복 - 적합한 놈이 살아남고 살아남은 놈이 적합하다는 식으로 - 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생산과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수십만 년의 구석기 역사 속에서 인간의 특정한 후성 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은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점점 증가해 종 내에 널리 퍼치게 되었다. 이런 수고 덕분에 인간 본성이 탄생한 것이다.

 

 

인간의 행동을 평가할 때 행동 유전자를 고려하는 일은 현명한 선택처럼 보인다. 사회생물학(이 이름이 아니라면 다윈인류학이나 진화심리학이라 해도 좋다. 아니면 정치적인 입장에서 수용하기 더 좋을 만한 이름들을 선택해도 무방하다.)은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한 하나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사회생물학은 진화론에 입각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인류학과 심리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인간사회생물학의 주요 연구 전략은 가장 높은 진화적 적응도를 안겨주는 사회 행동이 무엇인지를 예측하기 위해 집단유전학과 생식생물학의 기본 원리에서 연구를 시작하는 일이다. 이 예측들은 세심하게 설계된 현장 연구의 결과뿐만 아니라 민속 기록과 역사 기록에서 얻은 자료들과도 비교평가된다.

 

 

자연과학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자신의 연구 주제를 발빠르게 확장하여 사회과학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그 결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간격을 잇는 4개의 교량이 생겼다. 첫 번째는 인지심리학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인지뇌과학 또는 뇌과학으로서 이 분야의 종사자들은 정신 활동의 물리적 기초를 분석하고 의식적 사고의 신비를 해결하고자 한다. 두 번째는 인간행동유전학인데 이 분야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기는 하지만 인간 행동의 유전적 기초 - 예컨대, 유전자가 정신 발달에 어떤 편향적인 영향을 주는지? - 를 밝히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세 번째 교량은 진화생물학이다. 사회생물학은 진화생물학의 잡종 자손으로서 사회 행동의 유전적 기원을 설명하는 일을 목표로 하고 있다. 네 번째는 환경과학이다. 이 분야와 사회 이론과의 관계는 일견 희박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연환경은 인간이라는 종이 진화해 온 극장이다. 또한 인간의 생리와 행동은 그 환경에 정교하게 적응되어 있다. 인간 생물학이나 사회과학도 이러한 틀을 고려하지 않는 한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통섭의 세계관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현상들 - 예컨대, 별의 탄생에서 사회 조직의 작동에 이르기까지 - 이 비록 길게 비비 꼬인 연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지혜의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다. 따라서 세계는 적절한 정보를 적재적소에서 취합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중요한 선택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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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와 커피는 품종, 자라난 토양, 그리고 가공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맛과 향, 빛깔을 가지고 있다. 건축물도 지어진 자연, 사회, 문화적인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는데 편리와 효율을 강조하는 획일적인 건축 풍조에서는 삶의 풍요로움과 감성을 느끼기 어렵다.

 

 

[본문발췌]

 

 

이벤트 밀도: 100미터 구간에 있는 입구의 수. 횡단보도 없이 건너갈 수 있는 경우에는 거너편의 입구 수도 포함.

걷고 싶은 거리는 결국에는 얼마나 자주 다양한 가게가 들어서 있느냐의 물리적 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대형 콤플렉스 건물(문화 상업 복합 시설)을 만들더라도 거리와 접한 면에는 작은 소규모 가게들이 많이 배치되도록 디자인해야 하는 것이다. 이벤트 밀도가 높은 거리는 우연성이 넘치는 도시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사람들이 걸으면서 더 많은 선택권을 갖는 거리가 더 걷고 싶은 거리가 되는 것이다. 더 많은 선택권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주도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자기주도적인 삶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우연성이 넘친다는 것은 우리가 도시에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거리가 더 많을수록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필자는 예술을 '인간의 감정을 일으키는 무엇'이라고 정의한다. 마음속이 잔잔한 호수처럼 조용하다가도 어떤 노래를 듣거나 소설을 읽으면 마음속에 새로운 감정이 솟아난다. 그러면서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과 자신의 인간됨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배불리 먹고 잘 잤다고 인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 가슴속에 무엇이 됐든 감정이 솟아날 때 비로소 인간됨을 느낀다. ... 20세기 초반에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는 주택을 "사람이 살 수 있게 하는 기계"라고 정의 내렸다. 건축에서 기능적인 면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기능은 건축이라는 자전거의 두 바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자전거가 굴러가려면 두 개의 바퀴가 필요하듯 건축은 기능 이외에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바퀴가 필요하다. 현대 도시의 건축에서 부족한 부분이 이 부분이다.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빠른 자동차를 위한 길과 넓은 집들을 추구했으나 정작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감성을 깨우는 공간을 놓쳐 온 것이다. 계절에 어울리는 한 곡의 노래가 우리의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것같이 감성을 울리는 건축이 필요하다.

 

 

클래식 음악, 그림, 조각만이 예술이 아니다. 건축도 그 나라의 모든 것을 담아 후대에 남겨 주는 예술이고 문화고 정신이다. 옛날에 왕이 성당 공사 현장에서 석공 노동자에게 무슨 일을 하는고 물었다고 한다. 한 명은 돌을 깎고 있다고 하고, 한 명은 성당을 짓고 있다고 하였다. 두 번째 같은 생각을 가진 석공이 있었기에 유럽의, 여러 나라는 훌륭한 건축 문화를 후대에 남길 수 있었다. 우리도 그런 문화가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는 건축 자재로 건축물을 만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건축이 다시 우리의 삶과 정신과 문화를 만든다.

 

 

좋은 건축물은 소주가 아니라 포도주와 같다. 소주는 공장에서 화학 공식에 따라서 대량 생산되는 술이다. 소주는 생산하는 사람이나 지역의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반영되지 않고, 인간과 격리된 가치를 가지는 술이다. 건축물에 비유한다면 찍어 내듯이 양산되는 아파트나 지역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국제주의 양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포도주는 좋은 건축물 같다. 같은 종자의 포도라도 생산되는 땅의 토양에 의해서 다른 포도가 생산되고, 같은 종자의 포도와같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그해의 기후에 의해서 다른 포도가 만들어지며, 똑같은 재료라고 하더라도 포도를 담그는 사람에 의해서 다른 맛이 만들어지는 것이 포도주다. 따라서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서 세상에 단 한 종류밖에 없는 포도주가 완성되는 것이다. 건축도 이같이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땅 위에 특별하게 주어진 프로그램에 특정한 건축가가 개입되어서 단 하나의 디자인이 나와야 한다. 

 

 

좁고 긴 발코니에서는 바깥을 바라보는 일밖에는 못하는 반면, 정방형의 마당에서는 둥그렇게 마주보고 앉을 수 있다. 이런 공간에서는 사람 간의 관계성이 쌍방향을 띠게 되면서 더욱 다채로워진다. ... 정방형의 공간은 다양한 방향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사람 간의 교류가 다양해진다. 이처럼 정방형의 마당이 담을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관계성은 다양하다. 공간은 실질적인 물리량이라기보다는 결국 기억이다. 우리가 몇 년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어떠한 추억을 만들어 냈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양하게 기억되는 공간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벤트 별로 각기 다른 공간으로 각기 다른 기억의 서랍들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우리의 머릿속에서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인식된다.

 

 

처음에 아이는 한계도 모르고, 포기도 모르고, 목표도 없이, 그토록 생각 없이 즐거워한다. 그러다가 돌연 교실이라는 경계와 감금과 공포에 맞닥트리고 유혹과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상상의 전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미국 중산층 집의 크기는 두 배 가까이 커졌다고 한다. 50년간 사람의 몸이 커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족 구성원의 수는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집은 이렇게 계속 커져 갔을까? 가만히 살펴보면 커져 버린 집의 공간은 물건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눈만 뜨면 이 세상의 TV, 라디오, 신문 같은 모든 매체에서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해져야 더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물건을 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또 그 많은 물건을 넣기 위해서 더 큰 집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더 큰 집을 사기 위해서 더 많이 일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삶과 자연을 수탈하는 악순환이다. 10년 후에는 새로운 발명품이 나와서 그 물건을 넣을 다양한 종류의 방들이 더 필요해질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이 같은 현상은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나빠져서 기억할 일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 만큼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대로 어렸을 때는 기억력이 좋아서 하루만 생각해도 기억할 일이 많고 그만큼 시간이 꽉 찬 느낌으로 느리게 흘러가는 것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이를 뇌 연구 과학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뇌 시냅스 사이의 정보 전달 네트워크 기능이 느려지면서 정보를 프로세스하는 능력이 떨어지게 되고 그만큼 기억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적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더 많은 이벤트는 심리적으로 기억할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많은 기억들은 같은 시간을 더 길게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시간이 길게 느껴지면 공간은 더 크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같은 원리에 의해서 공간을 크게 느끼게 하려면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해야 하고,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하려면 기억할 사건을 많이 만들어 줘야 한다. 기억할 사건이 많게 하려면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건들을 느낌과 감정으로 저장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강신주의 말처럼, 기억할 감정이 많다는 것은 인생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벤트가 많이 일어나는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성공적인 거리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뜨는 거리가 되려면 다양하고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줄 이벤트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쇼윈도의 다양한 상품이거나 혹은 식당에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거나, 마주 걸어오는 사람들이 다채로운 모습이거나 어떠한 것이든 좋다. 건축가는 이런 이벤트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할 수 있는 무대장치를 디자인하는 연출가이다.

 

 

공간과 SPACE.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공자, 노자, 석가모니의 영향으로 동양 문화의 가치 체계는 '관계'와 '비움'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 같은 동서양의 다른 가치 체계는 공간을 뜻하는 두 개의 단어만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서양에서의 공간을 뜻하는 단어는 'space'로, 이 단어는 동시에 우주를 뜻하기도 한다. 우주라는 영어 단어는 universe, cosmos, space 이 세 단어가 혼용되어서 쓰인다. 따라서 'space=cosmos'라는 결론이 나온다. cosmos라는 단어의 의미는 혼돈이라는 뜻의 chaos의 반대어로 수학적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space=수학적 규칙'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단어를 통해서 살펴보면 서양인의 의식 속에는 비어 있는 우주, 공간, 수학적인 규칙을 내재하고 있는 cosmos 등의 의미가 상호 연결되어져 있으며, 공간을 '수학적 규칙을 가진 비어 있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서양의 공간은 다분히 수학적인 분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반면, 동양의 공간은 비어 있다는 뜻의 '공'과 사이라는 뜻의 '간'이 합성된 단어이다. 공간이라는 단어는 '비움'과 '관계'의 합성어로 만들어져 있다. 이렇듯 단어만 살펴보더라도 동양에서는 단순히 비어 있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보는 '비움'과 상대적 가치인 '관계'로서 공간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은 주로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인공물인 건축도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세 가지이다. 이를 경사 대지 위에 건축물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설명해 보자. 첫째,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 아파트 단지 재개발에 사용되는 방식이다. 대지의 경사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고 거대한 축대를 쌓아서 평평한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아파트 건물을 앉힌다. 대형 토목 공사가 필요하고 자연의 모습을 모두 바꾸어 버리는 폭력적인 방식이다. 두 번째는 자연을 이용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방식은 첫번째 방식보다 좀 더 스마트하다. 경사 대지가 있다면 그 경사면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서 경사 대지에 교회를 짓는다면 대지의 경사면을 이용해서 교인의 객석을 배치하고 강대상을 아래쪽에 두어서 편하게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능적인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재미난 건축을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자연을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보는 방식이다. 성 베네딕트 채플이 그러한 경우이다. 이 교회는 경사 대지에 마루를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벽체와 마루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땅과 교회 마루 사이의 비어 있는 공간을 통해서 음향의 공명을 만들어 내고 인공의 건축물과 자연이 대화할 수 있는 디자인을 했다. 이렇게 한 이유를 건축가는 "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교회'를 디자인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성 베네딕트 채플은 자연을 대화의 상대로 보는 건축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정자가 이러한 종류의 자연과 대화를 가능케 하는 건축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자는 물의 가운데 위치해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자연과 건축물 사이의 물로 확보된 빈 공간에서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건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같은 디자인은 자연을 극복할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이용할 대상으로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연을 대화의 상대로 보는 동등한 관계 설정이 있고서야 나올 수 있는 디자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하듯이 디자인에서도 자연환경을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보는 것이 가장 성숙한 디자인의 방식이다.

 

 

현대 산업화 사회로 더 발전할수록 땅에 선을 긋는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실제로 자연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다. 자연을 나누는 것은 인간일뿐이다. 국경선, 38선, 이스라엘 가자 지구도 그렇다. 건축에서 울타리는 벽이고, 벽은 단절을 의미하는데, 인간은 자연 속에 너무 많은 단절의 벽을 세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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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이 많을수록 선택과 움직임의 제한이 생기고 자유도가 낮아진다.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는 가르침! 

 

 

[본문발췌]

 

 

단순하면서도 가난하되,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닌 삶, 그것이 내가 스님의 처소에서 받은 첫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물건 더미와 장식물을 자랑하는 '풍요로운 감옥'들에 대한 서늘한 깨우침이 아닐 수 없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밖에서 오는 행복도 있겠지만 안에서 향기처럼,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그것은 많고 큰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사소하고 아주 조그마한 데서 찾아온다. 조그만 것에서 잔잔한 기쁨이나 고마움 같은 것을 누릴 때 그것이 행복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다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이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우주는 한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고 옹졸하게 산다면 그만큼 비좁아지고 옹색해진다. 마음을 활짝 열고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그만큼 자기 자신이 선한 기운으로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면 내 자신이 기뻐지고, 누군가를 언짢게 하거나 괴롭히면 내 자신이 괴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메아리다. 마음의 뿌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옛말에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에 못지 않게 인생의 중요한 몫이다. 인간은 안으로 충만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 잡념 없이 기도를 올릴 때 자연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때는 삶의 고민 같은 것이 끼어들지 않는다. 내 마음이 넉넉하고 충만하기 때문이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에 있다. 나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서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삶의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산길을 지나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마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다. 그 꽃을 통해서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 또 다정한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전화 한 통화를 통해서도 나는 행복해진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데 있지 않다.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욕망은 분수 밖의 바람이고, 필요는 생활의 기본 조건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불필요한 것들을 다 덜어내고 꼭 있어야 할 것과 있어야 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어떤 결정체 같은 것, 그것이 단순과 간소이다. 꼭 있어야 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복잡한 것을 다 소화하고 난 다음의 어떤 궁극적인 경지이다. 

 

 

단순과 간소는 다른 말로 하면 침묵의 세계이다. 또한 텅 빈 공의 세계이다.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이 단순과 간소에 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텅 비우려고는 하지 않는다. 텅 비워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어야 거기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것이 들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다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이다. 텅 비어 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절제된 미덕인 청빈은 그 뜻이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청빈은 그저 맑은 가난이 아니라, 그 원뜻은 나눠 가진다는 뜻이다. 청빈의 상대 개념은 부가 아니라 탐욕이다. 한자로 '탐貪'자는 조개 '패' 위에 이제 '금'자이고, 가난할 '빈貧'자는 조개 패 위에 나눌 '분'자이다. 탐욕은 화폐를 거머쥐고 있는 것이고, 가난함은 그것을 나눈다는 뜻이다. 따라서 청빈이란 뜻은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만일 가난이 없었다면 나눠 가질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가난해 봄으로써 우리 이웃의 가난, 어려움에 눈을 돌리게 된다.

 

 

만족할 줄 알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모든 게 긍정적으로 일이 풀린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고 거기서 다시 또 뭔가를 하려고 하면 자기 앞에 돌아온 몫까지도 걷어차 버린다.

 

 

어떤 것에도 스스로 소유당하지 말며, 자신의 삶을 살되 삶에 휘둘리지 말라.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홀가분한 마음, 여기에 행복의 척도가 있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거듭 새겨 두기 바란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내가 아무것도 갖지 않았을 때 온 세상을 차지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할 때 크건 작건 그것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소유를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유해진다.

 

 

단순한 삶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근원적인 눈을 뜨게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투철한 자기 억제와 자기 질서를 가져야 한다.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은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좋을 것은 듣지 말고,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은 읽지 말며, 먹지 않아도 좋은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가려 가면서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입고, 적게 먹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성숙해지고 승화될 수 있다.

 

 

보다 적은 것이 보다 귀한 것이고, 결과적으로도 넉넉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생활 태도를 소극적인 생활 태도라고 잘못 알아선 안 된다. 그것은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행복의 조건은 결코 크거나 많거나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작은 일을 갖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고, 저녁 노을을 보면서도 하루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너무 거창한 데서, 큰 데서, 야단스러운 데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그런 행복도 놓치고 만다. 행복의 조건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작은 일 속에 있다. 우리가 그걸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니고 자기 자신답게 살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다.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소음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침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침묵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그런 복잡한 얽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내 자신이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적으로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가. 의미없는 말을 하룻동안 수없이 남발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서 얘기할 때 유익한 말보다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다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들 자신마저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간에 그 내부는 비어 있다.

 

 

불교 경전은 말하고 있다.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전부 말해 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메아리가 없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말을 안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다.

 

 

나는 지금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곳에 살고 있다. 물론 내가 사는 환경이 궁핍하고 거의 원시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은 못 되지만 우선 순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그냥 그곳에 잠시 있을 뿐이다. 나그네처럼 있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영원한 거처가 어디 있는가. 나그네처럼 잠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작은 선이라도 좋으니 하루 한 가지씩 행해야 한다.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남이 알아 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것이 내 삶의 질서이다. 하루 한 가지씩 작은 선이라도 행해야 한다. ...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룻동안에 한 가지 착한 일을 듣거나 행할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것이다. 참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했는가, 하루 한 가지라도 이웃에게 덕이 되는 행동을 했는가 안했는가에 의해서 그날 하루를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된다.

 

 

친절과 사랑은 우러나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친절과 사랑 안에서 성장한다. 자비를 베풀라, 사랑해라, 여러 말이 있지만 친절하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미덕이다.

 

 

'당신의 오늘 일은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마음으로부터 인사를 하고 싶어하는 그런 친구를 만드는 일이다.'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사물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고 내 내명의 흐름을, 내 생각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보리달마는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고 말했다.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모든 현상을 거둬 들인다'는 뜻이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소유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소유한 것만큼 편리한 것도 있지만 소유로부터 소유를 당하는 측면이 있다. 부자유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애지중지 아끼던 것이 파손됐거나 또는 잃어 버렸을 때 정신적인 상처도 동시에 뒤따른다. 가진 것만큼 집착이 커지기 때문에 그렇다.

 

 

나눔이란 무엇인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당연히 지불해야 할 보상의 행위이고 감사의 표현이다. 나눔으로써 이 세상을 제대로 건널 수 있다. ... 기쁨을 나누면 그 기쁨은 곱으로 늘어난다. 반대로 괴로운과 슬픔을 나눠 가질 때, 그 괴로움과 슬픔은 몇 곱으로 줄어든다. 나눔에는 이렇듯 미묘한 율동이 따른다.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진다. 또한 그런 관계가 우리들 자신을 만들어간다.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은 빨리 시든다. 세상의 유행을 좇다보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중심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항상 새롭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고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피어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 하지 말라.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된다. 모자랄까봐 미리 걱정하는 그 마음이 바로 모자람이다. 그것이 가난이고 결핍이다.

 

 

크고 많은 것, 그것은 허한 것이다. 소유를 꼭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제한하고 자제하는 것이 우리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길이다. 적게 가져야 더 많이 얻는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명상이라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늘 지켜보는 일이다. 그 다음은 사랑의 실천이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가을은 잎이 가지를 떠나고, 열매가 나무를 떠나는 계절이다. 사람이 길을, 먼 길을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다시 말해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계절이다. 따라서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기보다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그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가끔은 자기 살던 곳을 떠나 볼 일이다. 떠나 보면 평소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새삼스럽게 자기 존재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다.

 

 

떠난다는 것은 곧 새롭게 만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남이 없다면 떠남도 무의미하다. 출가는 빈 손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다. 크게 버림으로써 크게 얻을 수 있다. 크게 버리지 않고는 결코 크게 얻을 수 없다. 적게 버리면 적게 얻을 수밖에 없다. 어중간하게 버리면 어중간하게 얻는다. 이것이 소유의 법칙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온 세상을 다 차지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가진 것만큼 속박을 당한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출가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탐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기 그릇 밖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둘째는 미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후세 역사가들이 오늘날의 시대를 뭐라고 표현할 것인가. 아마도 증오의 시대라고 기록할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지 않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의 조건인가. 그것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이 충만할 때 그는 비로소 사람이며, 사랑이 메마르고 증오로 가득찰 때는 그는 사람이 아니다. 사랑과 고통은 함께 있따.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과 고통이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예수가 죽은 날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사랑은 고통이 포개어져 있음을 비로소 체험한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 역시 포근하고 따뜻한 것인 동시에 그 속에는 아픔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자비慈悲이다. 자애로움과 슬픔이 함께 있는 것이다. 셋째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불교적인 용어로 바꾸면 무명이다. 밝음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이유와 인연으로 출가한 구도자가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 순간을 사는 일이다. 현재의 이 순간 속에 자신을 불태우는 것, 그것이 곧 출가자의 자세이다.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마지못한 삶, 순간 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 버리는 삶, 그것이 불행한 삶이다. 꽃처럼 거듭거듭 피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즐겁게 살되 아무렇게나 살지 말아야 한다. 한 개인의 삶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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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내 삶속에서 느끼는 것이다. 단순하고 작고 적은 것에 만족하며 삶을 즐길 수 있을 때 행복은 내 안에 있다.

 

 

[본문발췌]

 

먹고 자고 사랑할 때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 결국은 생존을 위해서다.

행복, 즉 쾌감을 느껴야만,

혹은 쾌감을 느끼기 위해 인간은 먹고 자고 사랑하는 데 몰두한다.

이 관점으로 보자면 행복은 삶의 최종 이유도 목적도 아니다.

생존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모든 특성은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도구다. 제프리 밀러에 의하면, 신체적 특성뿐 아니라 고차원의 정신적인 특성도 이 '생존의 도구'의 역할을 한다. 피카소는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산것이 아니다. 보다 진화론적인 해석은 피카소라는 한 생명체가 그의 본질적인 목적(유전자를 남기는 일)을 위해 창의력이라는 도구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마음의 정신적 산물들은 사실 몸의 번성을 위한 도구인 것이다.....행복감 또한 마음의 산물이다. 창의력과 마찬가지로 행복도 생존을 위한 중요한 쓰임새가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삶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 철학자들의 의견이지만, 사실은 행복 또한 생존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마치 피카소의 창의성 같은?

 

 

쾌의 느낌에 우리가 붙이는 명칭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기쁘다, 재미있다, 통쾌하다, 즐겁다, 신난다, 좋다.... 그러나 모두 쾌가 원료인 경험이고, 이들은 행복감의 가장 기초적인 재료가 된다. 이런 쾌의 전구가 켜지며 발생하는 여러 세세한 감정을 묶어 심리학에서는 '긍정적 정서'라고 한다. 반대로 불쾌에 바탕을 둔 여러 감정(분노, 슬픔, 두려움, 외로움 등)을 묶어 '부정적 정서'라고 부른다.

 

 

문화,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감정은 쾌 혹은 불쾌의 두 바구니 중 하나에 반드시 담긴다. 그래서 희랍시대의 철학자부터 오늘날 행복 연구자들까지 쾌와 불쾌의 상대적인 비율을 행복의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한다.

 

 

행복은 핵심은 부정적 정서에 비해 긍정적 정서 경험을 일상에서 더 자주 느끼는 것이다. 이 쾌락의 빈도가 행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많은 현대인의 삶이 행복과녁을 제대로 못 맞추는 이유가 쾌락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행복감을 발생시키는 우리 뇌는 이처럼 사람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회적 경험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사회적 경험이 행복에 중요한것은 물론이고,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행복감(쾌감)은 사회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고까지 생각한다.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 사회는 돈이나 지위 같은 삶의 외형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과 의미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곳이다.

 

 

시간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생각보다 빨리 지운다.

 

 

범위 빈도 이론(range-frequency theory) : 극단적인 경험을 한 번 겪으면, 감정이 반응하는 기준선이 변해 그 후 어지간한 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행복한 이들은 공연이나 여행 같은 '경험'을 사기 위한 지출이 많고, 불행한 이들은 옷이나 물건 같은 '물질' 구매가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타인중심적인 생각은 행복 성취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회의 일원으로 살며 타인의 평가와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나침판이 되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에 대한 타인의 반응이 더 중요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삶을 경험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살게 된다..... 이렇듯 과도한 타인 의식은 집단주의 문화의 행복감을 낮춘다. 행복의 중요 요건 중 하나는 내 삶의 주인이 타인이 아닌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 - 알베르트 카뮈

 

 

행복은 나를 세상에 증명하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잣대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도 없고, 누구와 우위를 매길 수도 없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들보다(필요나 목적 때문에 만나는 자리)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이냐, 행복한 삶을 살 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첫째, 이 둘은 같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삶의 선택과 관심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잣대가 필요하고, 많은 경우 그 잣대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지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내 선택을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다. 내가 지금 좋고 즐거운 것보다 남들 눈에 사려 깊고 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앞에서 설명했듯 여기서 행복은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고혈압 환자에게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는 생각을 자주 하라는 처방을 내리는 의사는 없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지침들은 대부분 그렇다. "불행하다면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생각을 바꾸라는 것은 손에 못이 박힌 사람에게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 하는 것과 비슷하다. 생각을 통해 바뀌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생각이다. 행복의 핵심인 고통과 쾌락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니다.

행복에 대한 이해는 곧 인간이라는 동물이 왜 쾌감을 느끼는지를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 쇼팽과 세익스피어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쾌감은 먹을 때와 섹스할 때, 더 넓게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진화의 여정에서 쾌감이라는 경험이 탄생한 이유 자체가 두 자원(생존과 번식)을 확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한국인이 하루 동안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행위는 먹을 때와 대화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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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에 의한 기능적, 실용적인 면에서 시작한 건축은 질서와 복잡함의 모순 속에 예술적 아름다움을 표현함으로 완성된다.

 

 

[본문발췌]

 

집은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성소가 되었다. 집은 정체성의 수호자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소유자들은 밖으로 떠돌던 시절을 끝내고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했다. ... 이 집이 거주자들의 수많은 병들을 치료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방들은 행복의 증거를 보여준다. 이 행복에 건축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했다.

 

 

이 모든 아름다움이 소멸할 운명이라는 것, 겨울이 오면 사라진다는 것, 인간의 모든 아름다움과 인간이 창조했거나 창조할 아름다움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유용하고,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것을 뭔가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는 일, 그것이 건축의 의무이다. -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

 

 

우리는 건물이 우리를 보호해 주기를 바란다. 동시에 우리는 건물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란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거나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을 이야기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 존 러스킨

 

 

우리는 건축이 우리가 분석하고 평가하는 개념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단순한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건축은 말을 한다. 그것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주제들에 관해서 말을 한다. 건축은 민주주의나 귀족주의, 개방성이나 오만함, 환영이나 위협, 미래에 대한 공감이나 과거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한다. 디자인된 물건은 모두 자신이 지지하는 심리적 또는 도덕적인 태도에 대한 인상을 심어준다. 예를 들면 평범한 스칸디나비아의 도자기 세트와 장식이 화려한 세브르의 도자기에서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성취 개념을 느낄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 도자기는 민주적이면서도 우아한 감수성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듯하며, 세브르의 도자기는 계급에 얽매여 격식을 차리는 기질을 드러내는 듯하다. 본질적으로 디자인과 건축 작품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그 내부나 주변과 가장 어울리는 생활이다. 이 작품들은 그 거주자들에게 장려하고 또 유지하려고 하는 어떤 분위기에 관해서 말한다.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면서도 동시에 우리에게 특정한 종류의 사람이 되라고 권유를 한다. 행복의 전망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따라서 어떤 건축이 아름답다고 묘사하는 것은 단순히 미학적으로 좋다는 뜻 이상이다. 그것은 이 구조물이 지붕, 문손잡이, 창틀, 층계, 가구를 통해서 장려하고자 하는 특정한 생활방식의 매력을 내포한다. 아름답다는 느낌은 좋은 생활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물질적으로 표현되었을 때에야 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건축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것이 어떤 개인적이고 신비한 시각적 선호에 거슬렸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올바른 존재감각과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건축이 어울리느냐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 종종 심각해지고 살벌해지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만큼이나 아름다움의 양식도 다양하다. - 스탕달. 

 

 

건축이나 디자인 작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번영에 핵심적인 가치를 표현한다는 사실, 우리의 개인적 이상이 물질적 매체로 변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건축 양식은 자신이 이해하는 행복을 이야기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을 사고 싶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지만, 우리의 진정한 욕망은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기보다는 그것이 구현하는 내적인 특질을 영원히 차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대상을 소유하면 자신에게 그것이 암시하는 미덕을 흡수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음을 불현듯이 깨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미덕들이 자동적으로 또는 아무런 노력 없이 시간만 지나면 우리에게 스며들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아름다운 것을 구매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갈망을 처리하는 가장 무미건조한 방식일 수도 있다. 누군가와 자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감정에 대한 가장 무딘 반응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보면,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상과 장소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내적으로 닮는 것이다.

 

 

왜 아름다운 것을 향한 마음이 바뀔까? 1907년 독일의 젊은 미술사가 빌헬름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그런 변화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설명해보려고 했다. 보링거는 인간의 역사에서 예술에는 오직 두 가지 기본 유형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추상적" 예술과 "사실적" 예술인데, 어떤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회에서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선호될 수도 있다. 수천 년간 추상예술은 비잔티움, 페르시아,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콩고, 말리, 자이레에서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바로 그가 살던 시대, 그러니까 20세기 벽두에 서양에서 다시 두드러진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추상예술은 대칭, 질서, 규칙성, 기하의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조각이든 양탄자든, 모자이크든 도자기든, 파푸아뉴기니의 웨와크에서 바구니를 짜는 사람의 작품이든 뉴욕 화가의 작품이든 추상예술은 평평하고 반복적인 시각적 평면들을 바탕으로 고요한 분위기를 창조하려고 하며,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세상에 대한 암시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보링거는 이와 대조적으로 사실적 예술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의 미학을 지배했으며, 르네상스부터 19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경험을 떨림과 색채로 손에 잡힐 듯이 전달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향의 예술가들은 위협적인 소나무 숲의 분위기, 인간의 피의 질감, 눈물의 솟구침, 사자의 잔혹성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보링거 이론의 가장 강력한 측면 - 회화만이 아니라 건축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측면 - 은 한 사회가 한 가지 미학적 양식에서 다른 양식으로 충성심을 옮기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보링거는 그것을 결정하는 요인이 그 사회에 결여된 가치에 있다고 믿었다. 사회는 무엇이든 자기 내부에 충분하지 않은 것을 예술에서 찾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조화, 고요, 율동과 융합된 추상예술은 주로 차분함을 갈망하는 사회 - 법과 질서가 흔들리고, 이데올로기가 변하고,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혼란 때문에 신체적인 위협을 강하게 느끼는 사회 - 에서 호소력을 발휘한다. ... 그러나 높은 수준의 내적, 외적 질서를 달성한 사회, 그래서 그 안에서 영위되는 삶이 예측 가능하고 또 지나치게 안정적인 사회에서는 그와 대립되는 갈망이 생겨난다. 시민들은 일상과 예측 가능성의 숨 막히는 손아귀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며, 심리적 갈증을 달래고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강렬한 느낌을 다시 확인하려고 사실적 예술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는 사회가 전반적으로 소유하지 못한 특질들을 집중적인 형식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을 찾아낼 때마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부르게 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데려가고, 우리가 갈망하는 것으로 가까이 데려다줄 수 있는 양식, 우리에게 없는 미덕들을 적절하게 가지고 있는 양식을 존중한다. 애초에 우리가 예술을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거의 언제나 불균형의 위험, 우리의 극단들을 조절하지 못할 위험, 삶의 커다란 대립물들 - 권태와 흥분, 이성과 상상, 단순과 복잡, 안전과 위험, 내핍과 사치 - 사이의 중용을 놓칠 위험에 빠져 있다는 표시이다.

 

 

인간이 어느 시점에서 훌륭한 능력을 발휘하여 도시 설계의 걸작을 창조했다면, 그 이후에 이어지는 여러 세대도 똑같이 훌륭한 환경을 마음대로 꾸며낼 능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가 마치 진귀한 피조물이나 되는 것처럼 경의를 표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초원이나 관목지를 개발할 때에 그 미덕을 얼마든지 다시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존이나 복원에 에너지를 집중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무능할 때에나 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베네치아의 강변을 위협하며 찰랑거니를 물에 위협을 느낄 필요도 없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 귀족의 궁전들을 바다에 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아름다움에서 그 낡은 석조 건물들에 맞먹는 새로운 건물을 언제라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에서는 질서의 베일을 통해서 혼돈이 아른거려야 한다. - 노발리스

 

 

아름다움이 질서와 복잡성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 있다는 오래된 격언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배후에 위험이 존재해야만 안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듯이, 혼란과 질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건물에서만 우리는 질서를 세우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알 수 있다.

 

 

건축가들이 쾌적한 환경을 창조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생활의 다른 영역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나쁜 건축이란 결국 설계의 실패인 동시에 심리 파악의 실패이기도 하다. 건축에서는 이런 경향이 물질로 표현되지만, 다른 영역으로 가면 엉뚱한 사람과 결혼을 한다거나, 어울리지 않는 일자리를 고른다거나, 재미없는 휴가 예약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경향이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에 만족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건축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설명해줄 것을 찾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진부한 목표물에 눈길을 고정한다. 우리는 슬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상황에서 화를 낸다. 적당한 위생시설과 가로등을 도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래된 거리를 그냥 부수고 만다. 우리는 만족의 근원을 이해하려고 헛된 노력을 하다가, 슬픔으로부터 그릇된 교훈을 배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곳들은 겸손과 끈기를 갖춘 보기 드문 건축가들의 작품이다. 그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자신의 욕망에 관해서 캐묻는다. 기쁨을 이해하면,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끈기를 가지고 논리적 설계도로 바꾸어놓는다. 이런 겸손과 끈기가 결합되어 그들은 우리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요구까지 충족시키는 환경을 창조할 수 있다.

 

 

건축의 미덕 : 질서, 균형, 우아, 일치, 자기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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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은 우연과 불확실성을 법칙의 세계와 연결하고 논리적, 객관적 의사결정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그 부작용은 평균과 빈도를 따라 개별성과 다양성을 빼앗아 간다.

 

 

[본문발췌]

 

 

확률은 4중의 성공, 즉,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논리학적, 윤리학적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형이상학은 우주의 궁극적 상태에 관한 과학이다. 형이상학에서, 양자역학의 확률은 보편적인 데카르트의 인과율을 대체해 버렸다. 인식론은 지식과 신념에 대한 이론이다. 오늘날 우리가 증거를 활용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며, 실험을 설계하고, 신뢰성을 평가하는 일은 확률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논리학은 추론과 논증의 이론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순수 수학이 제시하는 공리에 대해서는 연역적 해법 또는 종종 반복적인 해법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매우 실용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통계적 추론의 논리를 때로는 엄밀하게, 때로는 약식으로 활용한다. 윤리학은 부분적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이다. 확률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만, 관료들이 내리는 모든 합리적인 선택의 근거에는 확률이 자리하고 있다. 공정 결정, 위험 분석, 환경 영향의 평가, 군사전략은 확률의 관점에서 표현된 의사 결정 이론 없이는 수행될 수 없다. 견해에 객관성을 덧칠함으로써 의사결정은 계산으로 대체된다.

 

 

필자의 중점 과제는 철학적인 면에 있다. 즉, 현재 우리가 다음의 두 영역에서 지니고 있는 개념의 체계를 가능하게 해준 조건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는 물리적 비결정론의 차원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 통제의 목적을 위해 발달한 통계 정보의 차원이다. 본 연구는 보다 일반적인 철학의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필자는 위에서 이미 그중 하나를 언급한 바 있는데, 즉 '만들어진 사람들'이라는 아이디어다. 필자는 계량화는 범주화를 필요로 하고, 통계적 목적을 위해 새로운 계급을 정의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상상하는 방식과 우리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우연을 법칙으로 끌어들이게 됨으로써) 세상은 이전보다 불확실하게 된 것이 아니라 훨씬 덜 불확실하게 되었다.

 

 

'과학의 법칙으로부터 과학적 측정에 이르는 길은 그 반대되는 방향으로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계량적 규칙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떤 규칙성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가 명확해야 하고 규칙성을 찾기 위한 도구들 역시 그에 맞추어 고안되어야 한다.' - 토마스 쿤

 

 

확률이라는 개념은 빈도 측면과 믿음의 정도 측면 양쪽에서 탄생했다. 초기에는 확률이 지닌 두 측면에 대해 구분하지 않아도 무방했다. 라플라스의 젊은 시절에 확률은 그 영역을 크게 확장했지만, 우연적 사건, 출생, 혼인과 사망, 그리고 측정오차와 관련하여 사용되던 확률은 여전히 이전에 사용되던 빈도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객관적 빈도 또는 경향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자 라플라스는 다양한 결과들이 지니는 용이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가면서 가망성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는 데 기꺼이 나서기는 했지만, 확률은 우리의 지식과 무지에 관련되는 주관적 개념이라고 정의내렸다.

 

 

빈도와 믿음이라는 용어로 각가 표현되는 '객관적'과 '주관적' 확률 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모형화modeling와 추론inference의 차이이다.

 

 

통계학자들은 대체로 자유로운 공리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통계학자들의 철학에 대해, 또는 그들의 철학이 현행의 사회적 문제들의 해결을 지칭하는 것에 대해 믿지 않았던 이들은 통계학자들을 미묘한 두려움이 뒤섞인 무시로 대했다. 푸아송의 선견지명 같은 말을 빌리자면, 숫자는 인간으로부터 개별성을 박탈해 버렸다(The Numbers did strip human beings of their individuality).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복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듯 보이는 공리주의자들은 정작 사람에 대해서는 디킨스 소설의 등장인물 그래드그린드처럼 무관심해져 갔다.

 

 

그러나 한 가지 매우 곤혹스러운 것이 있다. 즉 통계학자와 전문가들, 그리고 인간성의 애호자라는 분들이 인생의 밝은 면들을 나열하면서 어떻게 한 가지 특별한 점은 한결같이 빠트릴 수 있는 것인가? 자유롭고 구속 받지 않는 개인 의지, 즉 개인의 변덕(어느정도로 심하든 간에) 내지는 공상(때때로는 정신이상의 수준으로 격앙되기도 하지만)은 가장 큰 행복이자 가장 위대한 행복이며, 이는 어떠한 분류체계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으나 이것이 빠진 일체의 시스템이나 이론은 악마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Notes from Underground>

 

 

필자가 본서의 제목을 '우연을 길들이다The Taming of Chance'로 선택한 것은 19세기가 통계적 법칙의 구조 내에서 우연을 포착해 낸 방식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결실은 1860년까지는 완전하게 달성되지 않았다. 오차 법칙에 대한 케틀레의 비범한 가설, 즉 사람들의 신체적 도덕적 특성에 대한 표준 곡선은 법칙이라는 것을 인간성과 자유선택에 억지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설은, 기저에 작용하여 정규분포를 생성해 내는 무수히 많은 결정론적 원인들이라는 허구를 통해 개념적으로 보강되었다. 따라서 케틀레의 통계적 법칙들은 자율성을 향한 도상 과정에 있었지만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 법칙들이 부수적인 필연성을 유발하는 미세한 요인들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체로 법칙으로 간주된 것은 보다 이후였다. ... 새로운 유형의 법칙이 무대에 오르면서 사람들과 세계는 덜 지배받기보다 더 제어받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우연이 길들여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역을 벗어난 형이상학적 문제를 제기하려 들 것이 아니라, 이 통계 이론이 인간에게서 모든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도리어 이 통계 이론을 따를 경우 사회적 현상의 출처를 개인에게서 찾는 경우에서보다 자유의지의 문제는 덜 침해당한다. 실제로, 집단적인 현상이 지니는 규칙성의 원인이 무엇이든지간에 집단적인 현상은 발생지와는 무관하게 그 효과를 강제로 창출해 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현상이 가져오는 효과가 무작위로 달라져야 하지만, 실제로는 고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원인들이 개인들에 내재되었다면 그러한 원인을 지니는 사람들이 누군지가 결정되어야 한다. 그 결과, 집단적 현상이 발현되는 원인이 개인에 내재되어 있다는 가정은 엄격한 결정론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만약 인구통계 데이터에 나타나는 안정성이 개인 외부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엄격한 결정론이 필수는 아니다. 그와 같은 힘은 특정한 개인을 가려 가면서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 힘의 결과로 특정한 유형의 행위가 구체적인 횟수만큼 실행되지만, 그러한 행위를 누가 수행할 것인지는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 힘에 저항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이 힘에 휘둘리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관념은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작용하는 힘의 명단에 기존의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심리적 힘 이외에 사회적 힘 하나를 추가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기존의 힘들이 인간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힘 역시 인간의 자유를 방해한다고 볼 필요가 없다. 기존의 힘들과 사회적 힘에 대해 똑같은 조건을 가정하면 된다. 전염병이 발생하는 경우 병의 강도는 사망률을 미리 결정짓겠지만, 이에 의해 누가 전염될 것인지까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살을 유발하는 풍조와 관련하여 자살의 희생자들이 처하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 에밀 뒤르켐Durkheim, Suicide

 

 

정상인란 평균이다. 우리는 또한 정규분포의 평균값average에 대해 '평균mea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평균적인 인간이라는 말의 어원은 프랑스어의 l'homme moyen이며, 이를 만들어 낸 이는 케틀레였다. 이 아이디어의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가지 않는가? 그렇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평균'은 거의 '정상'만큼이나 짓궂은 단어이다. (묘사의 관점에서) 평균 또는 중간intermediate이 (평가의 관점에서) 훌륭한 것에 해당한다는 아이디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들 중 가장 낯익은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흄의 주장과 같은 상태/당위성의 구분에 구애받지 않았다. 중용golden mean은 (널리 통용되는 이 어구의 의미에 따르면) 가장 바람직한(좋은) 것이며, (실제로) 양 극단의 사이에 위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절묘하고 주의 깊었다. 그는 '미덕은 과도함과 부족함이라는 두 악덕 사이의 중용'이라고 썼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좀 더 난해하다. '존재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리고 본질에 대해 기술하는 경우에는 미덕에 해당하는 것은 중용이지만, 좋음과 최선에 관한 문제가 걸려 있을 때 미덕에 해당하는 것은 양 극단들 중 어느 한쪽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025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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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공존하고 미래 후손이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지금의 내 소비와 선택이 주변과 환경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본문발췌]

 

 

사회의 변화는 언제나 작은 계기에서 시작된다. 변화 자체가 너무 조그맣기 때문에 아무도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씩 변화가 확대되다 보면 언젠가는 그것이 우리 사회를 바꾼다. 사람을 움직이고 미래를 만들어 낸다.

 

 

"오랜 세월 자연과 공존해 온 인디언은 일곱 세대 앞을 내다보고 산다고 해요. 일곱 세대 앞 미래에 펼쳐질 사회의 지속성을 생각하며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거죠. 그런 시점에서 바라보니 자연에 부담을 주지 않는 생활 방식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숙박객 모든 분이 자연과 지속가능한 공존을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소중히 해야 한다. 시간은 연결되어 있으며 뛰어넘을 수 없으니까요. 오래된 것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못합니다. 항상 새로운 것만을 주시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과거와 미래, 양쪽 모두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 이것이 도예가로서도, 우리 미래로서도 중요한 사고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전체의 거대한 행복도 결국은 매일 매일의 작은 행복을 느끼는 마음의 집합체다.

 

 

지금은 포식의 시대를 칭송하며 물건이 넘쳐흐르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란 한번 사치의 맛을 알게 되면 처음으로 되돌아가기 힘든 동물입니다. 그 결과 마음도 물건도 디플레이션을 일으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죠.  

 

 

나 혼자 벌어 만족하고 살면 그만인 시대가 아니다.

 

 

협의의 글로벌화란 가격 이외의 정보에 둔감해지는 사태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에는 본래 전체가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 중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글로벌화가 가속되면 가격 정보만으로 간단히 선택해 버리고 만다. 균질화가 초래하는 위험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내가 도달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란 다음 세 가지를 충족하는 삶이다. 지역 사회는 이 세 가지 균형을 유지하고자 의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풍습이나 문화를 미래에 전하며 지역을 양호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 생활: 사람과 자연의 균형. 얼마만큼 스스로의 삶을 파악하고 있는가. 스스로 살아갈 힘이 얼마나 되는가. 자급 경제라고도 부른다.

  • 모두의 일: 사람과 사람의 균형. 옛 농경 사회에서 말하는 '지역의 일'을 칭한다. 나와 내 자식 세대뿐만 아니라 언젠가 태어날 자손을 위해 주변 사람들과 깊은 신뢰 관계를 쌓으며 지역 사회에 얼마만큼 공헌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증여(호혜) 경제라고도 부른다.

  • 돈벌이: 노동의 균형. 사회와 나의 관계를 고찰한 후 사회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서로 맞춰가는 것. 그리고 주변 사람이 기뻐할 만한 성과를 올리며 필요한 금전적 대가를 얻고 있느냐 하는 것. 화폐 경제라고도 부른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144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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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과 감정에 바탕을 둔 문학, 예술이 감동을 준다. 그 작품이 읽고 보는 사람의 것이 되기에 공감을 주는 것이리라...

 

 

[본문발췌]

 

 

그가 말하기를 제 미소가 얼굴에 나비처럼 번진대요. ... 제 웃음이 한 떨기 장미고 영글어 터진 창이고 부서지는 물이래요. 홀연 일어나는 은빛 파도라고도 그랬고요.

 

 

그대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 하나하나 예찬하자면 시간이 모자라겠구려.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예요!

 

 

정확히 백 년 전, 가련하지만 찬란한 시인, 처절하게 실망하던 한 시인이 이런 예언을 썼습니다.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리라." 저는 예지자 랭보의 이 예언을 믿습니다. 저는 지리적으로 철저히 격리된 나라의 알려지지 않은 한 지방 출신입니다. 가장 버림 받은 시인이었고, 저의 시는 지방적이고 고통스럽고 비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코 희망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도달했습니다. 시와 깃발을 가지고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미래는 랭보의 말대로라는 것을 노동자, 시인, 그리고 선한 의지로 가진 사람들에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불타는 인내를 지녀야만 빛과 정의와 존엄성이 충만한 찬란한 도시를 정복할 것입니다. 이처럼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 네루다의 노벨상 연설

 

 

문학은 엄숙하고 진지하기만 하기보다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것이니, 삶의 활력과 즐거움도 문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6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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