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과 호남의 구분 없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故노무현 전대통령의 모습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의 오프닝과 엔딩에 <두 도시 이야기>의 첫 구절이 인용된다.
혼란의 시대, 희생의 피로 새로운 세상의 희망 씨앗을 뿌린 결말이 왠지 닮았다.
[본문 발췌]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지금과 너무나 흡사하게, 그 시절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좋든 나쁘든 간에 오직 극단적인 비교로만 그 시대를 규정하려고 했다.'
'햇빛이든 인생이라고 부르는 빛이든 올 때가 있으면 갈 때가 있는 법이었다.'
"오는 길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건 오는 중이고 오고 있다는 거야. 그건 결코 물러서거나 멈추지 않는다는 거야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헛수고는 아니야 난 우리가 승리를 보게 될 거라고 진심으로 믿어 그렇지만 보지 못하더라도, 내가 확실히 못하더라도 승리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
끄라비 공항에 내리기전 하늘에서 내려다본 끄라비 주변은 온통 초록에 울뚝불뚝 솟은 암벽 봉우리와 그리고 뱀처럼 휘어져 바다로 이어진 강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끄라비는 잘 가꾸어진 리조트에서의 휴식, 바다에 접한 해변 근처에서 암벽 등반, 보트를 타고 돌아보는 섬투어, 숲 속의 온천 에메랄드/블루풀에서의 휴식 등 즐길거리도 풍부하다.
혼자나 커플 여행객으로 아오낭 비치를 중심으로 리조트와 섬투어 정도하며 휴식을 즐긴다면 공항버스와 리조트 셔틀, 썽떼우를 잘 활용하면 되고, 가족여행으로 조그만 풀장 딸린 단독빌라 에어비앤비에 묶으면서 크라비 타운에서 장보고 블루풀 등 주변 관광지를 천천히 돌아보고 싶다면 차가 많지 않아 렌터카를 이용하는 게 좋다.
가성비 좋으면서 분위기, 환경이 좋은 반 사이나이 리조트 (Ban Sainai Resort)의 빌라 숙소와 근처에 Ton Ma Yom Thaifood Restaurant의 Today special 생선요리가 아직도 생각난다.
6~8월은 우기라 가끔 도로가 침수될 정도로 스콜이 내리기도 하는데, 이 때 밖에 나와 있다면 그냥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맥주나 와인한잔 하고 기다리면 금새 쨍쨍 해가 비친다.
아오낭의 먹거리
Tanta's 에서 피자에 맥주나 와인, 그러나 이 집 쏨땀은 비추다.
Aning Restaurant 에서 오징어와 크랩 곁들여진 쏨탐,메콤한 멕시칸윙, 뿌빳퐁커리가 괜찮다.
Ton Ma Yom, 점심과 저녁 시간이 정해져 있고 장소도 그리 넓지 않지만 예약하고 찾아가 볼 만하다. 그날 그날의 daily special 요리를 선택!
영화 세븐에서 탐욕은 변호사에게 스스로 1파운드의 살을 도려내어 저울에 달게 한다. 복부를 도려낸 뒤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하는데,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Seven Deadly Sins : 오만, 질투, 분노, 탐욕, 탐식, 음탕함, 게으름
인간의 욕망, 집착과 이기심이 탐욕을 키운다. 탐욕은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러한 욕망을 채워 주면서 더욱 부추기는 상승작용을 하며 부의 편중에 따른 사회 갈등과 혼란, 권력투쟁, 자연 파괴 등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간디는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선 풍요로운 곳이지만 탐욕을 위해선 궁핍한 곳'이라 경고하였고 노자는 도덕경(46)에서 "천하의 재앙은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천하의 죄악은 탐욕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래서 만족할 줄 아는 것만이 영원한 만족이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줄 알면 천하가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다."라고 하며 욕심을 버리라고 한다.
안분지족[安分知足]과 비움의 철학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 감으로 '탐욕'의 재앙을 벗어나야 한다.
탐욕, 貪慾
1.지나치게 탐하는 욕심. ≒도모1(叨冒).
2.불교 십악의 하나.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갖고 싶어 하고 또 구하는 마음을 이른다.
(네이버 영어사전) greed, (formal) avarice
탐욕을 부리다, be greedy
탐욕을 부리다 be avaricious
탐욕을 부리다 (남의 물건에) be covetous
탐욕을 부리다가 더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 Greed can cause a bigger loss.
그는 탐욕에 눈이 멀어 판단력을 잃었다. Greed has blinded his (good) judgment.
All crime has its origin in greed. 모든 죄는 탐욕에서 비롯된다.
[속담] The avaricious man is always in want. 탐욕한 자는 언제나 모자란다.
He is greedy for money and power. 그는 돈과 권력에 탐욕을 부린다.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탐욕'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E. F. 슈마허, <자발적 가난>
지구는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필요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큼은 자원을 제공하지만, 탐욕을 만족시킬 만큼 자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 간디
벤저민 그레이엄, 데이비드 도드, <벤저민 그레이엄의 증권분석>
수많은 사람이 <증권분석>을 읽고 존중한다면, 그 원칙을 실천하는 사람은 왜 이렇게 적을까? 나는 인간의 세 가지 본성 때문이라고 믿는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며, 탐욕을 부리는 세 가지 본성 말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천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을 때의 탐욕스러운 식욕이 그를 천하게 하는 것이다.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상대에게 탐욕스러운 기질이 엿보인다면 절대 자비에 호소하지 말라. 상대가 자비롭고 우아하게 보이고 싶어한다면 절대 탐욕에 호소하지 말라.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현대적인 축산단지와 인위적인 단백질 사디리는 사냥, 침략, 강탈, 식민지화, 탐욕의 폭력 아래에서 꾸준히 키워온 과거 의식의 가시적인 잔제이다. 북반구인들의 낭비가 심한 육식 습관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유라시아 스텝 지방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대 유럽과 신세계 그리고 그 너머 지역까지 전파되었다. 오늘날에는 식민지 정신을 되살리고 세계를 분리시키기로 작정한 다국적 기업에 의해 그 임무가 수행되고 있다. 육식이 지배하는 세상은 앞으로도 선택받은 소수와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다수 간의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키면서 어느세 현실이 되어 우리 눈앞에 다가올 것이다.
미야자기 마사카츠, <흐름이 보이는 세계사 공부>
화폐가 기호화되어 금융조작에 의한 이익 추구와 탐욕이 더해져 버블이 생긴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근대 역사에서 최대 범죄는 증오나 탐욕이 아니라 무지와 무과심에서 더 많이 나왔다. 매력적인 영국 숙녀들은 아프리카나 카리브해 지역에는 발도 디뎌본 적이 없었지만,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주식과 채권을 사는 방식으로 대서양 노예무역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그러고도 오후 네 시가 되면 눈처럼 흰 각설탕을 차에 타서 즐겨 마셨다. 물론 각설탕은 지옥 같은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그녀들은 몰랐다.
네이트 실버, <신호와 소음>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는 가장 중요한 피드백이 '공포fear'와 '탐욕greed' 사이의 피드백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투자자는 위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어떤 투자자는 위험을 무척이나 반긴다. 투자자들 사이의 이러한 선호 성향은 균형을 이룬다. 재무상태가 악화되어 회사의 주가가 떨어지면 공포에 질린 투자자들이 자기가 보유한 이 회사의 주식을 파는데, 이걸 사는 사람은 바로 이 주식이 바닥을 쳤다고 기대하는 탐욕스러운 투자자들이다. 그런데 탐욕과 공포는 변덕스럽다. 또 둘 사이의 균형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탐욕의 과잉 상태가 되면 거품이 생기고, 공포의 과잉 상태가 되면 공항이 나타난다.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인간의 세 가지 기본 번뇌. 분노, 탐욕, 어리석음
라 로슈푸코, <잠언과 성찰>
유능한 사람이라면, 이해의 경중에 따라서 일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처리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의 탐욕은 한 번에 너무 큰 것을 좇는 나머지, 때로 중요성의 순서를 뒤바뀌게 하는 수가 있다. 하찮은 물건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진짜 중요한 물건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탐욕은 때때로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시하고 당치도 않은 기대를 걸고 자기 재산의 전부를 날려 버린다. 또 어떤 자는 눈 앞의 작은 이해 관계에 눈이 어두워져 장래의 막대한 이익을 팽개치고 만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정치를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라고 쓴 적이 있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뉴스는 '소비사회'의 작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날마다 산출되는 뉴스의 결코 적지 않은 부분을 맛집, 여행, 첨단기술, 패션, 자동차, 가구 등의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정보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때 뉴스는, 우리가 실수를 모면하고, 보다 현명하고 알찬 구매를 할 수 있도록 거들면서 자신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일각에서는 소비 욕망에 대해 커다란 반감을 가지고 있다. 생존에 정말 필요한 것과는 거리가 먼 물건을 소유하려는 현대인의 욕구는 흔히 얄팍하고 지구에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헛되고, 탐욕스럽고, 이 모든 비난들을 뭉뚱그려 한마디로 물질주의적이라고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자원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필수적이지 않은 상품의 생산과 판매에 투입되고 있는지를 고려해본다면, 우리의 소비 행위가 지속되도록, 그리고 가능한 한 확실하게 계속되도록 노력하는 건 결코 하찮은 과업이 아닐 것이다. 뉴스는 우리가 돈을 제대로 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진지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김진선, <적당히 벌고 잘 살기>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탐욕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다." - 아니타 로딕, 바디샵 창업자
앙드레 코스톨라니, <투자는 심리게임이다>
증권시장에는 언제나 경제적 사실들이 황당한 이야기, 무언가를 겨냥하여 퍼뜨려진 풍문들, 절반쯤 믿을 만한 사실들, 그리고 암시들과 함께 뒤섞여 있다. 걱정과 탐욕으로 움직여지는 이러한 것들은 번번히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시세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로버트 해그스트롬,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역발상 투자자들은 탐욕이 주가를 내재가치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밀어올리고, 공포가 주가를 내재가치보다 훨씬 더 낮은 지점으로 밀어붙이지만, 언젠가는 평균으로의 회귀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변동은 시스템 내에서 바로잡힐 것이다. 하지만 골턴의 법칙이 철칙이라면, 왜 예측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어려움은 세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다. 첫째, 평균으로의 회귀는 항상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평가와 저평가는 이성적으로 인내할 수 있는 기간보다 더 오랫동안, 훨씬 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 둘째, 변동성이 너무 크고 불규칙해서 주가가 제대로 바로잡히거나 평균에 쉽게 안착되지 않는다.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주식시장처럼 유동적인 환경에서는 평균 그 자체가 안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어제의 평균이 내일은 평균이 아니다. 평균이 새로운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아무리 좋아 보이는 행동이라도 '무엇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은 비열하고 탐욕적이다. 누구를 위해서든 어떤 일을 위해서든 그것이 실패했을 때에는 상대 혹은 상황, 그 어떤 것의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이 생기고,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실력 덕분이었다는 자만심이 싹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서만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순수하게 능동적인 사랑으로 행동할 때에는 '무엇을 위해서'라는 말도 생각도 결코 하지 않는다. - 차라투르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탐욕과 괴로움은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를 고집하고,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고, 생존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중도는 바로 이런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다.
문병로, <메트릭 스튜디오>
추세선에서 멀어지는 움직임들은 시작과 끝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노이즈다. 매일 매일의 등락에 신경을 쓰지 않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다. 좀 긴 단위의 움직임을 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뉴스는 잡음이다. 투자 정보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시장에 잡음을 주는 뉴스, 잡음을 주는 투자자의 비이성적 탐욕, 공포, 이런 것들이 없다면 평균을 넘는 수익을 올리는 투자는 정말로 힘들어진다. 다행히 전 세계 모든 시장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잡음투성이의 잔치판이다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트리슈나', 즉 집착 또는 탐욕이다. ... 실제로는 무상하고 영원히 변전하는 것임에도 우리가 확고하고 영속하는 것으로 보는 사물들에 집착하려 한다면, 우리는 모든 행위가 행위를 낳고 매 질문에 대한 해답이 새로운 질문이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시인 제라르 드 네르발은 재능과 기질 때문에 부르주아 세계에는 어울릴 수 없었던 그의 세대의 예민한 동지들의 경험을 이렇게 요약했다. "야망은 우리 시대에 속한 것이 아니다. ... 자리와 명예를 쫓는 탐욕스러운 경주에 질려 우리는 정치 활동의 영역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우리에게는 시인의 상아탑만 남았는데, 우리는 이곳으로 점점 더 높이 올라가 군중으로부터 고립된다. 그 높은 고도에서 우리는 마침내 고독의 순수한 공기를 숨쉰다. 우리는 전설의 황금 컵으로 망각을 마셨다. 우리는 시와 사랑에 취했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빈곤의 진정한 원인은 과거나 현재나 인간의 탐욕이지 자연의 인색함이 아니다.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애덤 스미스가 정육점, 양조장, 빵집 주인에 관해 한 이야기에서 잘 나타났듯이 자유 시장 경제학은 모든 경제 주체가 이기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탐욕, 이기심과 같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본성을 사회에 이롭고 생산적으로 바꾸는 것이 시장 시스템의 장점이라고 주장한다.
윤재수, <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
투기란 '주가가 이미 기업의 내재가치를 초과하여 버블이 심한데도 불구하고 계속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매매차익을 얻기 위해 주식을 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투기장에서는 언제나 투자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를 때 더 많이 오르고 떨어질 때 더 많이 떨어지는 것이 주가의 변함없는 속성이다. 오를 때는 탐욕이, 떨어질 때는 공포라는 인간의 투기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구길본 등 16명, <길에게 길을 묻다>
내마음으로 섭취되는 것은 독초도 있고, 약초도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탐욕, 시기, 질투, 애증, 분노, 경멸, 무시, 사기, 배반, 억압, 지배, 비난, 비판, 근심, 걱정, 슬픔, 비탄 등 부정적 생각과 행동은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초와 다름없을 것이다. 반면 사랑, 자비, 연민, 희생, 봉사, 인내, 신뢰, 자유, 평등, 조화, 칭찬, 공경, 존중, 희망, 기쁨, 희열 등 긍정적 생각과 행동은 우리 마음을 치유하는 약초에 해당된다. ... 걷는 것은 세심洗心하는 것이다. 걷기는 일상의 탈출을 통해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재탄생시킨다. 몸과 마음을 자연과 생명 본원의 청명한 기운으로 환원한다. - 구길본, <걷기와 세심>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수행은 곧 내 삶의 참된 변화와 완전한 내적 혁명이다. 수행은 언젠가의 지향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현해야 할 삶 그 자체이다. 거짓에서 진실로, 탐욕에서 비움으로, 분노에서 자애로, 차별에서 평등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사견에서 정견으로, 늘 지금 이 자리에서 개선되고 탈바꿈하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다. ... 그러므로 이런 삶을 이루어 내는 모든 실천, 곧 생각과 움직임이 수행이다. ... 세상을 벗어난 한적한 깊은 산중에서 번거로운 일 싫어하고 그저 고요히 내면을 관조하는 그 자체가 수행의 목적이 될수는 없다. '탐욕과 성냄과 자만과 위선이 떨어져 나간 사람, 거칠거나 속되지 않고 분명하게 진실을 말하고, 말로써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람, 바라는 것 없고 기대도 없고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 아무런 집착도 없고 의혹이 없어 집착과 근심을 초월해 더러움이 없이 맑은 사람, 자비로운 생활을 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라고 <법구경>은 말하고 있다.
김승옥, <무진기행>
남녀 관계란 근본적으로 경제적 관계야. 남자끼리의 관계만 사상적 관계지. .... 아이란 우리들의 신이야. 인간적인 사랑이란 삼각형의 관계 형식 속에서만 가능하다구 생각해. 한 꼭지점에는 남자, 또 한 꼭지점엔 여자 그리고 또 한 꼭지점엔 신이 있어야 하는 거야. 남자와 여자가 함께 바라보는 신이 있을 때 추잡한 거래 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신이 없는 두 꼭지점만의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란 이기적으로 무한히 탐욕적인 동물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아. 어느 한 편이 상대를 잡아먹고서야 끝나는 투쟁에 지나지 않아. 끝나고 괴로운 투쟁이지. 왜냐하면 상대를 잡아먹어 버렸으니 남은 건 고독한 자기란 말야. 신이 있으면 달라. 신에게는 남자도 여자도 다 있어 줘야 한다는 걸 알고 남자와 여자는 진실로 평등하게 상대를 존중하게되지. 서양 사람들에게는 그 신이 있지만 신이 없는 우리들에겐 자식이 그 신 노릇을 하는 거야. 물론 그 신이 불변하고 영원한 하나의 신이 아니라 변하고 일시적이고 수많은 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드는 삼각형은 불완전한 삼각형이고 너무나 많아서 충동하기 쉬운 다신교라고 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남자와 여자 사이에 추잡한 동물적 사랑이 아닌 숭고한 인간적 사랑을 최소한이나마 가능하게 해 주는 거야. 신이 인간을 구제한다면 아이들이 우리를 구제해 주고 있는 거야. - <서울의 달빛 0장>
전영우, <비우고 채우는 즐거움, 절집 숲>
삼보일배는 '불보, 법보, 승보의 삼보에 귀의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흔히 첫걸음에 이기심과 탐욕을 멸하고 두 번째 걸음에 속세에 더럽혀진 진심을 멸하며, 세 번째 걸음에 어리석은 치심을 멸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웬델 베리, <생활의 조건>
가르침과 배움은 가치를 따질 수 없기 때문에 무료로 제공되어야 한다. 교육을 상품화하는 것은 곧 그것을 망치는 길이다. 우리가 굳이 교육의 가격을 따진다면, 그 가치가 손상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결국 학생들은 그들이 받아 누리는 선물에 늘 따라다니는 책임들, 다시 말해 받은 것을 잘 이용하고 후세에 온전하게 물려줄 책임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육을 상품화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무기로 만드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책임의식에서 멀어질 때 교육은 탐욕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나는 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좀더 전통적인 내 이웃사람들과 함께 일 함으로써, 그들의 농사일에 두 가지 자질이 지배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즉, 무엇을 기른다는 것의 신비, 경이로움 앞에서의 외경, 그리고 자연과의 협력. 이러한 자질은 그들이 하는 말에서, 또 그들이 동물과 밭을 대하는 태도에 쉽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경향의 농부들 사이에서 내가 본 것은 전혀 다른 태도였다. 즉, 작물과 가축을 엔지니어의 입장에서 통제하려 하고, 주로 이익에 대한 갈망만이 동기 된 - 예전에는 하나의 도덕적 실패로 낙인찍혔을, 오로지 '탐욕'만으로 - 합리적인 계획을 짜고자 하는 태도였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무언가 나보다는 훨씬 크고 강한 어떤 것이 나를 앞으로 이끌고 간다. 호기심?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나의 첫 번째 동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혼자인 나를 발견하고 싶다는 바람일 것이다. 그런 고독 속에서는 사회생활의 거짓과 탐욕은 줄어들고 내적인 진실함은 더욱 커지니까. 또한 세상의 광대한 신비로움 속에서 더욱 존재감을 느낄 수 있고, 기적적인 만남의 시간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여행은 끝이 없어야만 하고,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담처럼 잠시 삽입된 것이 아니라, 삶의 도정 속에서 아주 길게 지속되는.....
최지원, <유학들의 동물원>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은 창조적 파괴라고 부르는) 끊임없는 경쟁으로 인간에게 좌절을 허용한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좌절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의 좌절을 금지할 것인가. 배를 태우던 사람들이 느끼던 좌절? 자본주의는 원래 소박했던 인간에게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장치가 아니라, 언제나 창궐했던 인간의 탐욕을 좌절시키는 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정치가들과 중상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악의 근원이라면서 뒤로는 자신들의 이기주의를 도모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반발 심리를 이용해서 부족주의적 영달을 추구한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탐욕은 사회적으로 전염되는 질병이다. "남들은 다 먹는데 나는 왜 못 먹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시기, 질투, 선망의 포로가 되고 '못 먹는 자'는 불출, 무능, 도태의 존재로 강등된다. 욕망이라는 것이 빠지면 인간의 삶은 동력을 상실할지 모른다. 그러나 욕망과 탐욕은 그 차원이 다르다. 사회 전체가 탐욕과 선망의 질병에 걸리면 인간은 존재의 품위와 광채를 잃고 거대한 입과 밥통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딜레마는 우리가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지금의 세계 경제체제가 정확히 탐욕과 선망의 체제라는 점이다. 탐욕과 선망을 증폭시키지 않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경제의 비극적 결함이며 그 결함의 체제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현대적 생존의 딜레마다. 우리가 이 딜레마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이 시대를 어떻게 살까에 대한 지혜는 인간을 살아남게 한 위대한 어떤 능력이 동시에 현대적 난국의 기원이기도 하다는 아이러니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나오지 않을까 싶다.
코이케 류노스케, <침묵입문>
불교의 삼독 : 탐욕(貪欲, 욕망), 진에(瞋에 분노), 우치(愚癡, 어리석음)
분노, 탐욕,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말들이 난무할 때, 그 속에서 조용히 침묵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박웅현, <책은 도끼다>
무욕만 한 탐욕이 없습니다.
왕가리 마타이, <지구를 가꾼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지구의 자원이 무한하다고 생각하고 자원이 베푸는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자원에 값을 매긴다. 우리가 바로 이런 태도로 지구를 대하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생태 위기가 그렇게나 많이 발생한 것이다. 환경 파괴는 더 많은 것을 바라는 탐욕 때문에 일어난다.
21세기 초 도시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을 지배하는 정신 상태는 두 개의 강력한 '코드'에 관통당해 있다. 더 날씬한 은유가 생각나지 않아 좀 투박하게 대놓고 말하자면, 하나는 '탐욕의 코드'이고 또하나는 '선망의 코드'이다.
탐욕의 코드는 폴 새뮤얼슨이 말한 자본주의적 '행복 방정식'을 따른다. 이 경제학자가 소개한 계산법에 의하면 행복(H)은 욕망(D) 분의 소비(C)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만큼 소비했는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 소비를 소유로 바꿔놓으면 이해하기 쉽다.
선망의 코드는 "저 자는 갖고 있는데 나는 없어, 이건 안되지, 암 안 될 일이고말고"라고 사람들을 들쑤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전염성 질투의 부호다.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나도 가져야 한다. 내가 저 인간만큼 갖지 못한다면 나는 불행하다. 내가 가질 행복을 저 자가 갖고 있네그랴? 저런 도둑놈, 내 행복을 훔쳐가다니, 화가 치미는 바로 그 순간에 질투의 여신이 나타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확인시켜준다. 저 자가 가진 것은 너도 가져라, 뺏고 훔쳐서라도. 그러면 행복은 네것이다. 아니, 너는 저 자가 가진 것 이상으로 가져야 해.
탐욕과 선망의 부호가 행복 방정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려준 것은 석가모니다. 욕망의 크기는 무한해서 그것을 충족시킬 방도가 없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된 것이 붓다의 '깨침' 가운데 하나다. 욕망은 일정량의 크기로 묶이지 않는다. 100을 바라던 욕망은 그 100을 소유하는 순간 200으로 불어나고, 200을 갖는 순간 300으로 커져 달아난다. 욕망의 크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를 키우는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기루 잡기다. 그러므로 욕망의 크기를 줄여라. 그것만이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욕망이 제로일 때는 제로의 소유만으로도 너는 행복하다. 재갈을 물릴 수 없는 무한 욕망이 탐욕이다. 그 탐이 충족되지 않아 너를 화나게 하고 질투하게 하는 것이 '진, 분노'이며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것이 '치, 어리석음'다. 그러므로 욕망을 다스려라, 줄여라, 끊어라, 그리고 평화로워라, 친구여.
만약 행복의 추구가 불행의 완벽한 제거와 고통의 완벽한 회피에 목표를 둔다면 그 목표는 달성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고통의 기원이 된다. 완벽한 행복의 추구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삶의 진실이 아니며, 인간 사회의 도덕적 이상도 아니다.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법을 열심히 찾아 헤매야 하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절망의 사회다.
240여년 전 우리 선조들의 해외 여행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만으로 그려지지 않는 이 질문에 생생한 여행길의 풍경, 여행지에서의 낯선 만남과 우정, 느낌을 엿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허생전, 호질 이야기가 열하일기 속 액자구조(소설)로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랑가 모르겠내?\
중국말도 잘 못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이방인들과 '찐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느냐고, 그러면 연암은 그렇게 답할 것이다. 우정을 나누는 데 필요한 건 외국어 실력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또 그러기 위해선 언제, 어디서건 웃음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 머리말 중에서
"자네, 길道을 아는가" 수역 홍명복에게 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시온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는 말씀을 이르시는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니야.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든느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무슨 뜻인지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한 법이지. 서양 사람들은 기하학이 한 획을 변증하면서 선 하나를 가지고 가르쳤다네. 그런데도 그 미세한 부분을 다 변증하지 못해 '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라고 말했어. 이건 바로, 부처가 말한 '닿지도 떨어져 있지도 않는다'는 그 경지일세. 그러므로 이것과 저것, 그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만 볼 수 있는 법, 옛날 정자산 같은 사람이라야 될걸." - <도강록> 신미일 6월24일
'사이'란 무엇인가? 흔히 생각하듯, 두 견해 사이의 중간이나 평균을 뜻하는 건 결코 아니다. 양변의 절충이나 타협으론 결코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이것과 저것, 그 양변을 떠난 제3의 경로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방향도, 목적도 없다! 따라서 그것은 삶의 구체적 장면 속에서 매순간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 머리말 중에서
존 러스킨은 "독서란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들과의 대화"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문장론>에서 "다독은 인간의 정신에서 탄력을 빼앗는 일종의 자해다. 압력이 너무 높아도 용수철은 탄력을 잃는다. ... 지나친 독서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떨어뜨리는 위험성을 내포되어 있다. ... 진정 스스로 사색하는 자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그 소재를 현실세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독서는 어디까지나 작가에 의해 가공된, 인공적 현실이다."라고 독서의 부정적인 면을 소개하지만, 이는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독서는 읽고, 느끼고 자신만의 주관적 이성으로 해석해 새롭게 창조해보고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이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지적 탐험과 간접 경험으로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어 삶 곳곳에 스며든다.
"타인의 구미에 맞추어 일할 때 우리는 성공하지 못할 수 있지만,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할 때 그 결과는 반드시 누군가의 공감을 끌어내기 마련이다." - 러스킨에 의한 아미앵의 노트르담, 존 러스킨 <아미앵의 성서> 역자 서문 중에서
우리는 작가의 지혜가 끝날 때 우리의 지혜가 시작됨을 느끼고, 작가가 우리에게 해답을 주기를 원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에게 욕구를 불어넣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욕구를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예술에 있어 최후의 노력을 하여 도달할 수 있었던 최고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감상하게 할 때에만 가능하다. - 독서에 관하여, 존 러스킨 <참깨와 백합> 역자 서문
<유대인의 역사>를 쓴 폴 존슨은 그의 저서에서 그 무렵 유대인 상업의 특징을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그들은 '혁신'을 생활화했다. 무엇이든지 효율과 능률적인 방법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주식시장이 좋은 예다. 주식시장은 생산 현장에 재원을 효율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만든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둘째, 판매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셋째, 가능한 넓은 시장을 추구했다. 규모의 경제에 대한 중요성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넷째, 그들은 될 수 있으면 상품의 가격을 낮추려고 애썼다. 생산성 향상과 유통구조 합리화 등 늘 경쟁력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다섯째, 유대인들은 상업정보 수집과 활용에 정통했다. 세계 각국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간의 소통과 결집력 덕분이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18세기 경제체제에서 종합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더 낫고, 더 쉬우며, 더 싸고, 더 빠른' 방식들을 끊임없이 모색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합리주의'를 추구했다. 이는 세상의 부란 다른 사람을 도와줌으로써 만들어진다는 원리를 일찍이 터득한 것이었다. 옛날부터 유대인들은 고객들의 필요와 욕구를 경쟁자보다 더 빨리 파악하고 만족시키는 '기업가 정신'에 충실했다. 따라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은 경쟁자보다 훨씬 나은 가치를 제공해 고객을 만족시켰다는 뜻이다. 이른바 현대 경영학에서 이야기하는 '고객만족 경영'이었다.
충격과 공포를 이용해 자본을 수탈하는 '양털 깎기(fleecing of the flock)'라는 국제 투기자본들의 은어가 오늘날에도 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이자놀이보다는 고의적인 공포나 불황을 만들어 자본을 이동시킨 후 개인이나 기업들의 재산을 한꺼번에 수탈해갔다. 그것이 훨씬 이익이 컸기 때문이다. 이후 '양털 깎기'는 주기적으로 시장의 희생을 강요했다.
포퍼는 "인류사회는 인간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때에만 진보하며 궁극적인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더 큰 집, 더 큰 차,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소비, 필요를 넘어 무엇이든 더 크고 많은 걸 원한다. 그 넘침이 세상을 병들게 하는지 모르고...
자연과 더불어 지속 가능한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더 많이, 더 크게, 더 빠르게가 아니라 느리고, 작은 것, 균형과 조화로운 삶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중에서
슈마허에게 경제 성장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아울러 쾌적한 자연 환경은 경제 성장을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기존의 성장지상주의는 이런 측면을 무시하고, 자연 환경을 오로지 성장수단으로만, 그것도 '좀더 빠르게, 좀더 높게, 좀더 강하게' 성장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취급한다. 여기서 인간은 기술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고, 경제 성장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성장'으로 전환된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성장방식은 인간과 자연을 파괴한 대가로 물질적인 풍요를 제공할지 몰라도, 진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경제구조를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슈마허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답은 '작은 것'이다
"경쟁과 속도전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그마한 규모를 유지할 때 비로소 쾌적한 자연 환경과 인간의 행복이 공존하는 경제구조가 확보될 수 있다"
"대지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 간디
"재생될 수 없는 재화는 오로지 피할 수 없는 경우에만 이용되어야 하며, 그 경우에도 이를 보전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과 관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재화를 신중하지 않거나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 행위이다."
"자연은 항상 언제 어디서 멈춰야 할지 알고 있다. 자연이 성장도 신비롭지만, 이보다 더한 것은 성장을 멈추는 자연의 신비로움이다. 자연 세계의 모든 것에는 규모, 속도, 힘의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그 결과 인간을 포함하는 자연체계는 자기균형 능력을 보이면서 스스로를 조절하고 정화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술은 그렇지 않다. 아니 기술과 전문화에 의해 지배당하는 인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술은 규모, 속도, 힘 측면에서 스스로를 제한하는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자기균형, 자기조절, 자기정화의 미덕을 갖고 있지 않다. 미묘한 자연체계에서 기술, 특히 근대 세계의 거대 기술(super-technology)은 낯선 물건처럼 작동하는데,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에 대해서 수많은 거부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현명하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에 도달하여 지혜를 완성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현실에 대해 '말없이 응시' 하면서 자기 중심적인 관심을 적어도 일시적으로나 억제하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사실 시간이란 달력과 시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시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막연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시간이란 소중한 비밀을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목표를 이루고 나면 행복을 거머쥘 것 같지만 정말 그럴까?
파울로 코엘료, <아크라 문서>
사람들은 시간을 팔아 돈을 벌지만 훗날 그 시간을 돈으로 되살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한다.
최인철, <굿 라이프>
부의 증가는 행복을 살 수 있는 기회와 자원을 대폭 늘려주었지만, 동시에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의 결핍을 가져왔다.
P. G. 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우리가 각자의 시간에 노력이라는 열정을 어느정도 투입했는가에 따라 일의 가치가 결정된다.
정찬주, <길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에게 기쁨과 사랑을 주는 일이다. - 톨스토이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시간의 엄수와 효율성은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되어 사람들에게 하루에 더 많은 활동과 성취를 이루도록 채찍질해서 개인의 리듬을 개성 없는 정해진 시간표에 맞추도록 강요한다. 인류는 점차 특권에 의해서만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삶을 인정하고 사회가 정해준 생활에 기꺼이 적응해서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자기가 하는 일과 그 일을 언제 할지를 통제해서 모든 활동을 자기 나름의 속도로 수행하고 예상 밖의 사건과 다양성, 놀라움과 즉흥성에서 큰 즐거움을 얻는 사람들로 나뉜다. 이로써 사람들이 원하는 미래상도 크게 달라진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언제나 '공짜'다. 공기, 시간, 삶.....
유한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공간은 실질적인 물리량이라기보다는 결국 기억이다. 우리가 몇 년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어떠한 추억을 만들어 냈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이 같은 현상은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나빠져서 기억할 일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 만큼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대로 어렸을 때는 기억력이 좋아서 하루만 생각해도 기억할 일이 많고 그만큼 시간이 꽉 찬 느낌으로 느리게 흘러가는 것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영생은 삶을 시간의 제약에서 해방시킨다. 그런데 시간이 희소성을 잃으면 삶도 의미를 상실한다. 유한성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든 것들이 무한 반복의 쳇바퀴를 도는 지루한 일상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진정한 힐링은 나를 내 삶의 주체로 세우고 독창적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 이를 통해 자유와 행복은 성취된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암 진단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직관이 내는 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이미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박웅현, <다시 책은 도끼다>
눈앞에 걸여야 할 길과 만나야 할 시간들이 펼쳐져 있는 사실만으로 여행자는 충분히 행복하다. 짧은 길을 긴 시간을 들여 여행한 사람은 경험상 행복한 사람입니다. - 포구 기행
오르한 파묵, <내이름은 빨강>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무한한 시간이 있었고, 내가 죽은 뒤에도 시간은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무궁한 암흑과 암흑 사이에서, 잠시 빛을 발하며 살았을 뿐이다.
강신주, <감정수업>
인간에게는 두 가지 시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속이란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순간이란 시간이다. 지속은 우리에게 예측 가능한 시간을 주면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안겨 준다. 반면 순간은 첫 만남처럼 과거 자신의 안정적인 모습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위험한 시간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를 보자마자 인생이 앞으로 완전히 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래서 결코 과거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바로 그때가 '순간'인 셈이다.
완전한 기쁨은, 몸이나 마음 중 어느 하나를 희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기쁨으로 충만할 때,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이 쾌감으로 전율할 때, 바로 그 시간이 우리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다.
류시화,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짧은 봄날이 마치 무한히 지속되기라도 하듯, 싹은 서두르거나 허둥대는 일없이 천천히 부풀어 오른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언제나 변함없는 고르디 고른 곡조의 그 울음소리는 지금의 시간을 영원으로 여기라는 충고이다." - 소로우
베르나르 베르베르, <죽음>
제가 인정하는 비평가는 단 하나뿐이에요. 바로 시간이죠. 작품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건 시간이에요. 고만고만한 작가들을 사라지게 하고 혁신적인 작가들만 영원히 살아남게 만드는 건 시간이라는 비평가가 지닌 힘이죠.
한동일, <라틴어 수업>
우리 모두는 생을 시작하면서 삶이라는 주사위가 던져집니다. ... 누구도 자기 생의 남은 시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또박또박 살아갈밖에요.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매일매일 충분히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남은 생 동안 간절하게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두 가지를 하지 않고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것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정철, <불법사전>
시간, 가고 오지 않는 것. 결코 쉬지 않는 것. 그렇다고 지난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 아깝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이 아까우니까.
김영하, <빛의 제국>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돼. 나한테도 여러 번 그런 순간들이 있었어. 그 선택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게 인간이 시간여행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과거로 돌아가 아주 사소한 거 하나만 바꿔도 이 세상은,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김용규, <생각의 시대>
뇌신경학자들은 아이들이 언어를 습득하면서 뇌에 시간장이 형성되고, 시간장이 형성되면서 과거를 인식하고,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며, 또 과거에 대한 인식과 현재에 대한 이해가 모여 미래에 대한 개념이 생겨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렇게 형성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 의식이 자연환경에 얽매인, 다시 말해 즉각적인 현재만 존재하는 동물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에덜먼은 이것을 "시간이라는 독재자로부터 해방"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 같은 시간의식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매순간 상황을 판단하고 앞으로 해야 할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판단과 선택이 차츰 자기의식을 형성한다. 전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 모든 일을 언어가 한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언어가 아예 없거나, 침팬지처럼 미약한(통사론이 없다는 의미다) 동물들에게는 시간의식도 없거나 미약하다. 동물들은 단지 시각을 통해 얻어진 장면들이 마치 스냅사진처럼 존재하는 현재라는 독재자에 얽매어 산다. 조지프가 그런 것처럼 지각에 대한 부류(예: 어떤 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어느 것이 다가가야 할 것이지 아닌지 등)는 할 수 있지만, 추상적인 개념을 마음에 새기고,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당연히 시간의식, 역사의식, 자기의식이 없다. 한마디로, 언어가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인지생물학자 마투라나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했다. "자기의식, 의식, 정신 따위는 언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따라서 그것들 자체는 오직 사회적 영역 안에서 일어난다."
홍익희, <유대인 이야기>
유대인들은 '시간과 복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시간과 복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은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돈을 번다'는 것이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며 시간의 그림자이자 행위의 축적이다. 그리고 과거의 증인, 현재의 본보기이자 반영, 미래에 대한 예고인 것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시간은 내가 낚시질하는 강을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강물을 마신다. 그러나 물을 마실 때 모래 바닥을 보고 이 강이 얼마나 얕은가를 깨닫는다. 시간의 얕은 물은 흘러가 버리지만 영원은 남는다. 나는 더 깊은 물을 들이켜고 싶다. 별들이 조약돌처럼 깔린 하늘의 강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
할레드 호세이니, <그리고 산이 울렸다>
"시간이란 마법과 같아. 생각하는 것만큼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야노 가즈오, <데이터의 보이지 않는 손>
시간은 일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재회 간격이 벌어질수록 더 빠르게 흐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시계만이 시간을 정량화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간을 두 개의 다른 표현, 즉 기계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크로노스 시간', 인간이 내적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을 '카이로스 시간'이라고 부르면서 둘을 명확하게 구별했다. 시계로 잴 수 있는 크로노스가 과학적 객관적이라고 한다면, 주관적인 시간인 카이로스는 얼핏 비과학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신체 움직임이라는 한 사건이 일어난 뒤 다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걸리는 간격을 시간으로 정의함으로써 주관적인 카이로스에 객관성을 부여한다.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시간은 끝없는 영원과 이 우주를 우리 인간이 보다 잘 견디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개념이다. 그러니 시간의 틀을 만들어 요령 있게 다루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아이들의 시간은 길고 느리며 쉽게 늘어난다. 반면 어른의 시간은 쏜살같이 빨리 지나간다. 즉 시간은 지각하기 나름이며, 지각은 뜻대로 조정이 가능하다. 타이밍을 잡는 달인이 되고자 할 때 숙지해야 할 첫 번째가 이것이다. 감정으로 인한 내부의 소용돌이 때문에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이라면, 사건이 터졌을 때 감정적 반응을 조절하면 시간이 훨씬 더 천천히 흐른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앞으로의 시간이 더 길게 느껴져, 두려움과 분노로 꽉 막혀 있던 가능성이 열린다. 더불어 타이밍을 잡는 데 꼭 필요한 기본기인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다.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전자 세계에서는 시간이 동시성으로 압축되고 공간이 '가상 현실'로 줄어들며 글로벌 시장과 글로벌 쇼핑센터를 위해 그 경계선들이 제거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인류는 가장 중요한 경계선 하나를 없애지 못하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먹는 자와 굶주린 자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인공위성 통신, 정보 기술, 첨단 무기, 유전자 공학 기술로 정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도 인류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나뉘어져 지구의 풍부한 유산에 다른 이들이 참여하는 권리를 서로 부정하고 있다.
김형경, <좋은 이별>
시간과 함께 풍화되는 사물의 속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환상도 미화도 모두 과거의 시간에 갇히는 일이다. 대상을 크리스털처럼 아름답게 만들어 간직한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마음도 딱딱하게 변한다. 멀쩡한 현재의 삶과 자기 자신이 문득 초라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세상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집이나 차, 옷 같은 것도 아주 잠깐 빌려 쓰는 것이지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그저 사랑하고 감사해하며 잠시지만 누리세요.
니콜라스 카, <유리감옥>
컴퓨터의 무시무시한 생산성에는 대가가 따른다. 즉 키보드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늘어나지만, 생각하는 시간은 줄어든다.
최인호,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시간과 돈, 체력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히말라야를 가고 싶어도 시간이나 돈, 혹은 체력이 없어서 가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는 사람과 돈은 있는데 시간이 도저히 안 나는 사람, 시간과 돈은 있는데 체력이 안 되는 사람 등 어느 하나가 부족해 히말라야 트레킹을 못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돈, 체력은 히말라야 트레킹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시간과 돈, 체력이 있어도 못 가는 사람이 더 많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결정하는 핵심은 가슴 속에 꿈과 열정이 살아 있느냐다. 꿈과 열정은 히말라야 트레킹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여행과 관련되어 있다. 가고자 하는 여행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것을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꿈과 열정이 있으면 히말라야 트레킹을 갈 수 있을까? 아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쉽게 떠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만 가지 핑계가 존재한다. 그 핑계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용기밖에 없다. 열정과 용기가 있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 열정과 용기를 가진 자만이 '영혼을 비추는 거울' 히말라야와 마주할 수 있다.
데이비드 색스, <아날로그의 반격>
우리는 깨어 있는 시간 내내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키보드를 누르고, 화면을 밀거나 두드린다. 우리의 하루는 디지털 화면과 사운드가 만들어내는 리듬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음으로 잠을 깨고 침대에서 환하게 빛을 내는 휴대전화 스크린을 보면서 잠든다. 우리는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일상의 몇몇 순간들을 더욱 또렷하게 인식한다. 잠잘 때, 샤워할 때, 그리고 휴대전화의 전파가 닿지 않는 곳(점점 줄어들고 있다)에 머물 때.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고도의 상품 환경에서는 상품이 결정하는 필요에 적절히 반응한다 해도 더 이상 그 사람의 만족을 함축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영영 뭔가가 '필요한' 상태로 이해됩니다. 필요가 무제한이 되면서 사람은 갈수록 더 궁핍해집니다. 역설적이게도, 필요의 만족을 위한다는 상품을 만드는 데에 시간과 자원을 소비할수록 사람의 욕망은 더 얕아지고 그것이 충족되는 구체적 형식에 더 무관심해집니다. 사람이 갈수록 더 궁핍해지고 가르치기 쉬워지고 욕구불만 상태로 넘어가는 문턱은 아주 낮습니다.
정재승, <열 두 발자국>
놀이란 '특별한 생산적인 목적 없이 우리가 시간을 즐기기 위해 하는 행동' - 옥스퍼드 사전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마음이 젊다고 해서 청춘일 수는 없어요. 육체적인 건 차치하고서라도 마음만은 청춘이려면 시간이 아주 많아야만 해요. 저는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이 청춘이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하도 많아서 남은 시간 같은 것은 따져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진짜 젊은 사람들이죠. 그래서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도 있어요.
김연수, <소설가의 일>
시간을 초월해서 과거와 미래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느 존재가 세상에는 둘밖에 없는데, 하나는 이 우주를 창조한 신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다, 바로 한 권의 소설을 완성한 소설가다. 신과 소설가의 공통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를 창조하되 자신은 그 시간 바깥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신은 우주의 바깥에, 소설가는 소설의 바깥에. 어떻게 하면 소설의 신이 될 수 있는지 그간 궁금했다면, 여기 그 해답이 있다. 소설의 바깥에 있으면 된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기를.
이기주, <한때 소중했던 것들>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정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이유가 필요하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야마시타 히데코, 오노코로 신페이, <소중한 것은 모두 일상 속에 있다>
충만한 시간일수록 짧고, 지루할수록 길게 느껴집니다. 시간은 단순히 일정하게 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사는 우리의 모습에 따라 짧아지기도 하고 길어지기도 합니다.
전주희,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
인간의 시간이란 연속적이지 않다. 시계가 가리키는 초침과 분침은 균질적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기억과 미래일 뿐이다. 현재는 늘 순식간에 과거로 흘러가 기억으로 쌓인다. 기억으로 쌓인 시간이 미래를 정확하게 그릴 수 없다는 것은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서 벗어나는 시간, 다른 시간을 꿈꿀 수 있는 이탈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하지만 자본의 시간, 부채가 결정하는 시간은 이러한 인간의 시간을 설계하고 계산하며 통제한다. 부채가 인간의 삶을, 인간의 모든 시간을 강탈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면 기억과 미래라는 연속적이지 않은 인간의 시간은 화폐가치로 환산된 시간표가 될 것이다. 1교시가 끝나면 어김없이 2교시가 기다리는 시가느이 연속이 삶의 전부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사건을 찾아 여행을 떠나지 않는 개인에게는 시간이란 지금-지금-지금이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만이 남겨지게 될 것이다.
마스다 미리, <오늘의 인생>
살아 있는 시간이 더 길다. 아무리 짧은 인생이었더라도 살아 있는 시간이 더 길다.
시간, 그것은 인생이라고 부를 소중한 것입니다.
유시민, <표현의 기술>
행복하게 살려면 나하고 잘 맞는 사람, 통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교감해야 합니다. 맞지 않는 사람과 다투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으니까요. 같은 이치로 내게 재미있는 책,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책, 내가 감동받는 책을 읽으면서 사는 게 최선입니다.
피터 갤리슨,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우리는 오랫동안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똑같은 빠르기로 똑딱똑딱 흘러간다고 믿어왔다. 온 우주에서 시간이 똑같이 흘러가기 때문에 이곳의 시간과 저곳의 시간이 다르지 않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이 보편적인 믿음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이곳의 시간과 저곳의 시간이 같은지 아니면 다른지 알기 위해서는 직접 그 시간들을 비교해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시계를 가지고 시간을 관측해야 한다. 또 그렇게 시계를 바라보는 관측자가 움직이고 있을 때의 시간과 멈춰 있을 때의 시간이 같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의 기준을 빛을 이용하여 정하고 나면, 이곳의 시간과 저곳의 시간이 다를 뿐 아니라 움직이는 관측자이 동시와 멈춰 있는 관측자의 동시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신영복, <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 재생의 힘이 있어…. /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 떨어졌을 때에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 <틴턴 사원 몇 마일 위에서 지은 시> 중에서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누군가의 노동의 결과를 강탈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시간을 강탈하고 그에게 다양한 활동을 명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군가 당신에게 일정한 시간 동안 특정한 일 또는 보수가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한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며, 그 일로 어떤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가를 직접 정하는 꼴이다. 이런 행위는 .... 부분적으로나마 그들을 당신의 소유주로 만든다. 당신에 대한 소유권을 그들에게 넘기는 행위다. - 로버트 노직,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회화는 음악보다 뛰어나다. 음악은 시간 속으로 흘러가버리지만, 회화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예술이니까. 회화는 시보다도 뛰어나다. 세상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게 있지만, 회화는 눈에 보이는 건 무엇이든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묘사의 생생함으로 보아도 시는 회화를 따라갈 수가 없다. 회화야말로 예술 중의 예술이다.
롤프 포츠, <여행의 기술>
"삶의 최고 황금기를 보내버린다. 우리 삶에서 가장 가치 없는 시간에 의심쩍은 자유를 즐길 돈을 벌겠다면서 말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법륜 스님, <인생수업>
젊을 때는 시간이 지루할 만큼 안 가는데, 나이가 들면 시간이 아주 빨리 간다고 느낍니다. 같은 시간인데 왜 다르게 느껴질까요. 어릴때 시간의 흐름은 성장을 가져오지만, 나이 들어서는 노화가 따르잖아요. '해놓은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구나' 하는 생각에, 미래가 두려워지면서 마음이 과거를 향합니다. 그래서 흔히 나이 들면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에 잠기고 지난 세월을 그리워해요. 후회는 지금의 나,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을 충실히 살면, 그 사람은 늘 인생의 황금기를 사는 거예요.
팀 페리스, <나는 4시간만 일한다>
더 많은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일을 덜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활용해야 할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가 짧게 '해야 할 일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고, 둘째가 '하지 말아야 할 일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우리는 회의, 식사, 영화 관람 또는 다른 활동을 할 때 시간을 정확히 지키기 위해 손목시계를 착용하고 시간을 맞춥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초, 분, 시간, 일, 주, 월, 년이라는 인위적인 구분이 시간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면, 각자 자신의 시간을 다르게 경험한다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시간의 가치가 개인적인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 속의 어떤 것들은 그것들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깨달을 때 그 의미가 변합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 시간을 정말 소중히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행복해집니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늘 바삐 움직이는데도 공허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느림' 이라는 사치를 누리자 현재라는 시간이 선물해 주는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본권, <로봇시대, 인간의 일>
현대인들이 "시간이 부족하다" 또는 "시간이 넉넉하다"라고 말할 때의 시간은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이다. 경력을 개발할 시간, 외국어를 학습할 시간, 여인과 함께 보낼 시간, 운동할 시간, 여가를 보낼 시간 등 개인이 필요로 하는 시간은 객관적 시간이다. 우리가 '바쁘다', '지루하다', '쏜살같다'고 말할 때의 시간은 주관적 시간이다. 측정되는 과학의 시간은 균일하지만 우리가 지각하는 생활 속의 시간은 주관적이다. <슈피겔> 편집장 출신의 독일 과학저술가 슈테판 클라인은 <시간의 놀라운 발견>에서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시간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갖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현대인들의 시간 기근 현상은 자신에게만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스스로 지각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주관적 감정 상태이다. 자신의 욕망과 목표, 사회적 기대 수준에 비춰보아 자신의 시간이 부족하다는 자각에서 비롯하는 감정인 것이다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시간의 경과를 자연적 과정 - 계절의 순환이라든가 사람의 일생과 같은 - 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의식적으로 연루되고 의식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정한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역사는 시작된다.
E. F. 슈마허, <굿워크>
영혼 없는 노동으로 인간은 돈벌이의 수단이 되었고, 악의에 찬 경쟁으로 인간 정신은 굴종과 복종에 순응하게 되었다. 신이 주신 활력과 기쁨이라는 노동의 본질이 굴종과 굴욕이라는 노예노동으로 변질됨으로써 우리의 노동시간은 해방과 깨달음의 시간이 아니라 불안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의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일을 해도, 일을 하지 않아도 모두 불안하게 되었다. 직업이 있어도 직업이 없어도 아이들도 노인도 모두 불안하긴 마찬가지이다.
데이비드 호크니, 마틴 게이퍼드, <그림의 역사>
우리는 기억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만약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은 당신의 기억과 다르다.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동일한 것을 동일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없으면 공간도 없다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이 별개로 존재하며,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과 공간은 서로 같은 대상의 다른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시간과 공간은 하나다. 하지만 우리는 공간이 전혀 없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시간이나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시간이 한정되어 이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시간에 신축성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회화는 시간과 공간의 예술이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그대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 하나하나 예찬하자면 시간이 모자라겠구려.
아베 히로시, 노부오카 료스케, <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소중히 해야 한다. 시간은 연결되어 있으며 뛰어넘을 수 없으니까요. 오래된 것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못합니다. 항상 새로운 것만을 주시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과거와 미래, 양쪽 모두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
권오상, <돈은 어떻게 자라는가>
돈의 가치는 시간과 연동된다.
취약성과 반취약성의 궁극적인 리트머스 시험지는 시간과 역사라는 점이다. 취약한 것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그 성질을 드러내고 만다. 당신이 리스크를 회피하지 않으면 감내하고 당신의 운명에 대해 위엄을 가지고 맞서면,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초라하게 만들 수 없다. 반대로 당신이 리스크를 감내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위대하게 만들 수 없다.
하보숙, 조미라, <커피의 모든 것>
고산지대일수록 고품질 커피가 생산된다. 서리가 내리지 않고 일교차가 클수록 커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의 시간이 길다. 따라서 밀도가 높고, 향과 신맛이 우수한 커피가 재배된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이다." - 폴 발레리.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인생에는 돈도, 쾌적한 주거도, 건강하고 풍성한 식사도 필요하다. 그것들을 손에 넣음으로써 사람은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소유가 도를 넘으면 사람은 180도 돌변하여 소유욕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소유하기 위해서 인생을 소비하고 휴식 시간까지 구속당하며, 조직에 조종당하고 끝내는 국가의 구속까지 받게 된다. 인생이란 것이 끝없이 많이 소유하는 경쟁을 위해서 주어진 시간일 리 없다.
니콜라스 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웹 페이지를 훑어보는 데 시간을 보내느라 책 읽을 시간이 사라졌듯이, 작은 글자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간 때문에 문장과 절을 지어내는 데 투자하는 시간이 사라졌듯이, 링크들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보내는 시간이 조용한 명상과 사색의 시간을 몰아냈듯이 오래된 지적 기능과 활동에 사용되던 회로들은 약해지고 해체되기 시작했다. 뇌는 사용하지 않는 뉴런과 시냅스를 더욱 긴급한 업무 수행을 위해 재활용한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과 시각을 얻지만 오래된 것은 잃어버린다.
이정우, <개념: 뿌리들>
"염불보다 잿밥"이라는 말보다 한국 사회를 더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은 없을 것 같다. 본질적인 것,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 순수한 열정을 필요로 하는 것은 뒷전이고, 온통 돈이 되는 것, 빨리 되는 것, 얄팍한 감성으로 해결되는 것, "끼"로 감당되는 것들만이 사회를 뒤흔들면서 돌아다닌다.
결정론적 세계관을 거부할 경우, 시간을 초월하는 것과 시간 속에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시간은 우연과 창조를 가져오기 때문이지요. 시간 속에서 새로운 일이 발생하고 새로운 무엇인가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시간은 등질적이지 않다. 별다른 사건이 없는 느슨한 시간이 있는가 하며, 숨이 막히도록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이 있다. 더 심층적으로는 각각의 시간은 잠재적 사건들을 함축한다. 공 하나로 승부가 갈리는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기 위해 자세를 잡는 시간에는 A팀이 이겼을 때 전개될 사건들(그 사건들로 이루어지는 '세계')과 B팀이 이겼을 때 전개될 사건들(의 '세계') 이 잠재적으로 접혀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을 때 잠재적 복수성-여러 가능세계들-에서 어느 한 갈래가 현실화된다. 시간의 농축된 부분, 매듭을 '시간의 지도리' 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의 지도리들을 열면서 인생을 살아간다.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간에는 현재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인간은 그저 매 순간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이고 '나'라는 정체성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기억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생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이죠.
베블런, <유한계급론>
여가는 시간의 비생산적 소비를 함축한다. 시간을 비생산적으로 소비한다는 것은, (1) 생산 활동은 무가치하다는 감정과 (2) 게으른 삶을 제공할 정도로 금전적 능력이 있다는 증거를 의미한다.
문병로, <메트릭 스튜디오>
한 종목을 사는 것보다 여러 종목을 사는 것이 변동성이 작아 산술 평균은 동일하지만 기하 수익이 더 커진다고 했다. 이것이 분산 투자를 해야 하는 이유다. 이를 '횡적' 분산 투자라 하자. 반면에 '종적' 분산 투자도 있는데, 시간에 따라 나누어 사는 것을 말한다. 한 종목을 사더라도 하루에 다 사는 것보다 여러 날에 걸쳐서 사는 것이 변동성이 작다.
J. K.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어째서 그들은 이와 같이 시간과 건강을 희생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 철학자는 그들의 호기심을 끄는 보수라는 개념 - 부하에게는 하찮은 복종을 요구하고, 자신은 막상 쓸 시간도 없는 돈에 집착하는 - 에 의아해할 것이며, 어째서 그들이 이처럼 열심히 일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철학자는 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어리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롭 무어, <레버리지>
비전의 규모와 범위는 시간을 조망하는 시선과 비레한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면 모든 일은 뿌리를 내릴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싹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는 과정을 반복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과정이 되풀이될수록 복리 효과를 통해 성공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의심하게 된다. 하룻밤 사이에 성공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최대의 복리 효과를 위해 뿌리가 깊이 자리 잡을 때까지 시간을 투자한 사람들이다. 뛰어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선택하고, 사용하고, 투자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리처드 파인만,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
모든 물리 법칙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서로 간의 상호 관통은 공간과 시간 역시 상호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피코 아이어, <여행하지 않을 자유, 우리가 잃어버린 고요함을 찾아서>
마르크스의 말처럼 이동과 연결과 공간의 시대가 되었지만, 정작 우리의 일상은 시간에 잡아먹혀버렸다. 물론 마르크스가 이 말을 한 맥락은 지금과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느 곳에나 연결될 수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지리적인 제한이 사라지자마자 시간이 점점 더 우리에게 횡포를 부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이 어울릴수록 나 자신과 소통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내가 돈에서 얻으려는 것은 생활의 안전과 한가한 시간이다. 현대인이 대부분 바라는 것은 돈을 더욱 많이 버는 것이요, 또한 돈을 버는 목적은 허영과 명성과 타인에 대한 우월감이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시간은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힘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간 그 자체이다. 지금 이 시간에 탄생하는 모든 것은 이 시간의 특성을 포함한다고 칼 융은 말했다.
우리는 인생에서 많은 것을 놓쳤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놓친 것은 '지금 이 순간들'이다. 삶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언제든 줄 준비가 되어 있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엔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현대의 도시인들은 점점 더 수동적이고 집단적인 여흥, 즉 다른 사람들의 능란한 활동을 피동적으로 구경하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물론 그런 여흥도 전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교육을 통해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 폭넓은 지적 관심사들을 가지게 된 사람들의 여흥에 비하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이희인, <여행의 문장들>
여행은 배움의 공간이지만 비움의 시간이기도 한 것.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텅 비우는 것 역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소양이 아닐까. 나는 그런 '텅 빈 여행'을 사랑한다. 정해놓은 목적지 없이 버스터미널 시간표의 낯선 지명 앞에 서는 그런 시간을 사랑한다. ... 일부러 세상을 떠돌아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쓸쓸함이 거기 가득했다. 바다가 태양을 품으면 찬란함으로 가득하고, 낭만을 품으면 사랑으로 가득하고, 분노를 품으면 파괴로 가득하겠지만, 쓸쓸함을 품으면 얼마나 거대한 슬픔과 고독을 빚어내는지 알 것 같았다.
린위탕, <생활의 발견>
초식동물적 인간은 자기가 할 일을 생각하면서 일생을 보내지만, 육식동물적 인간은 남의 생활에 간섭함으로써 자기의 생계를 세운다.
세상 사람의 절반은 자기 일을 하는 데 시간을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남에게 자기 일을 시키기 위해서 또는 남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살고 있다.
이희인, <여행자의 독서>
지쳐버린 많은 살람들은 그동안 자기 자신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일을 잠시 멈추고 자신들의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지 않은 것이다. 자신에게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모든 일을 잠시 내려놓고, 그동안 무시했던 그대의 영혼이 다시 그대를 만나게 하라. 그것은 그대의 잊혀진 신비와 다시 가까워지는 멋진 일이다.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인간은 외부와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 혹은 군중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추구하는 정반대의 욕망을 '동시'에 갖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욕망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전규태, <단테처럼 여행하기>
물리적인 시간은 일정하지만 시간을 대하는 각자의 방식에 따라 그것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 역시 여행을 통해 배웠다. 한순간이 영원이 될 수도 있고 하루가 일 년이 될 수도 있다. 여행 중에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을 음미할 때마다 그것을 실감하곤 한다.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돌아온 후 이를 반추하면서, 나는 나의 남은 시간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세상은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자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자연을 '따른다' 또는 자연에 '맡긴다'는 것에 엄청난 힘이 숨어 있다는 것도 노경老境에 접어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야 또 하루가 다가오면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를 가져본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삶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남는 듯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시간부자란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시간부자란 자신에 맞게 삶의 속도를 조절할 줄 알고, 그 순간에 빠져들어 오염되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미쉘, <오늘부터 미니멀라이프>
물건이 적어지니 시간에 여유가 생겼고 더불어 마음까지 가볍고 자유로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강판권, <나무 철학>
인간은 시간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 나무는 자신이 살았던 시간을 간직하면서 나이테를 만들어간다. 나무의 나이테는 시간이 온전히 축적된 결과다. 그러므로 나이테를 많이 만들수록 삶의 지혜는 깊어진다.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촘촘한 나이테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지혜롭다. 얼굴의 주름을 보면서 한숨짓기보다는 주름 속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현명하다. 오래사는 나무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생명체들에게 많은 것을 선물하듯, 나이든 사람도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나무가 나이를 먹어가며 다른 존재들에게 베풀면서도 자신의 성장과 성숙을 거듭하는 것처럼, 인간 역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남에게 많이 베풀면서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다. 매일 위로 성장하면서 옆으로 나이를 먹는 나무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행복하다.
현대인은 상대방과 마주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뿐더러, 마주하면서도 마주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날 것이다.
HK여행작가아카데미, <여행의 이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의 경계와 틀 속에서 모든 것을 규정짓는다. 의식 속에서 살아남은 것들만이 진실로 기억되고, 명료한 기승전결을 따르지 못하면 실패로 치부되어 잊혀지고 소외되기 십상이다. 연속되어 보이지만 인식의 뒤편으로 버려진 것들은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단절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정확히 떨어지는 숫자와 단절된 찰나의 시간, 단편적인 시각의 이미지들에 집착하는 우리는 많은 것들을 인식의 뒤편으로 보내어 잊고, 잃고 살기에 그래서 외롭다. 미분의 시간 속에서 쉽게 잊혀진 찰나의 존재와 의미들은 갈 곳을 잃고 우리를 더더욱 허전하고 외롭게 만든다. 하지만 긴 시간을 인고하며 서 있는 내밀한 옛것들은 오랫동안 쌓아온 연속성과 쉽게 드러나지 않는 포용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결코 혼자 있어도 허무하거나 외롭지 않을 수 있다. 오랜 적분의 시간들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도 놓치지 않는 여유로움과 풍만하고 의미 있는 이야깃거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치가 없는 인식의 저편으로 묻혀버릴지라도 그것이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닐테니까 말이다.
사사키 후미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시간의 여유는 행복으로 직결되는 반면 물질의 풍요는 그렇지 않다.' - 팀 캐서
김훈, <라면을 끓이며>
된장이나 간장, 무짠지, 오이지, 고추장아찌는 맛의 심층구조를 갖는다. 시간이 그것들의 맛의 심층을 빚어낸다. 기다림 없이는 짠지다운 짠지를 맛볼 수 없다. 김장이나 오이지를 담그고 나서 우리는 설레는 환상을 참으며 그것들의 숙성을 기다려야 한다. 미리 뚜껑을 열고 들쑤시면 동티가 나서 다 망친다. 시간이 간을 재료의 안쪽으로 밀어넣고 재료의 성질을 변화시켜 맛의 심층을 이룬다. 그 맛은 거기에 절여진 시간의 맛이다. 된장찌개 국물은 된장과 여러 건더기들의 삼투와 종합으로 이루어진다. 그 국물은 된장도 아니고 개별적인 건더기도 아닌, 어떤 새로운 창조물이다. 거기에 깊이가 드리워진다. 그 깊이는 인간을 위안하는 힘이 있다. 미역국의 위안은 섬세하고 된장찌개의 위안은 깊다. 이 깊이와 섬세함은 스밈과 우러남에서 온다. 건더기는 국물 속으로 우러나고 국물은 건더기 속으로 스민다. 완성된 된장찌개 속에서 건더기가 뭉그러져서는 좋은 찌개가 아니다. 건더기는 그 고유한 맛을 국물에 내어주고 나서도 건더기로서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때 건더기는 국물의 스밈에 의해 새로운 맛의 건더기로 신생하는 것인데, 이 조화 속에서의 독자성은 아름답다. 삶의 심층구조와 서사적 로망을 회복한다는 것은 이제는 영영 불가능해 보인다. 이 부박한 삶의 영양소로서 라면은 몸속으로 들어온다. 시간의 작용이나 기다림, 환성, 스밈, 우러남처럼 삶에 깊이를 가져오는 기능은 음식에서조차 사라지고 있다.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시간이 흘러간다고들 말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다. 인생은 너무 짧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안겨주지도 못할 만큼 짧다. 그러니 어서 서둘러 친절한 행동을 하라. ... 인생은 공간이나 시간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 바깥에, 영혼 속에 존재한다.
삶이 곧 끝나버린다고 생각하며 살라. 그러면 남은 시간이 선물로 느껴질 것이다. 현재의 삶은 최고의 축복이다. 우리는 다른 때, 다른 곳에서 더 큰 축복을 얻게 되리라 기대하며 현재의 기쁨을 무시하고는 한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좋은 때는 없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현재라는 아주 짧은 순간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 전체를 집약해 준다. 현재에 행하는 일만 생각하라. 과거의 일은 생각하면 후회스러워진다. 미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공상일 뿐이다. 현재에 집중하라. 그것이 진정한 삶이다. 사랑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랑할 수는 없다. 오직 현재, 지금 이 순간에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성스러움의 발현이다. 성스러움에는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발현되는 것이다.
다카무라 토모야, <작은 집을 권하다>
빚을 내서 물건을 사는 행위는 미래의 시간까지 구속하는 일이므로 아무리 호화스러운 것을 산다 해도 그걸 자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테미 스트로벨, <행복의 가격>
소박한 삶의 핵심은 시간은 늘리고 빚은 줄이는 데 있다. 일하고 쇼핑하는 데 시간을 다 쏟아붓고서는 형편에 벅찬 물건값을 치르기 위해 더 많이 일하는 사람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소박한 삶이다.
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이 시간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 톨스토이
한강, <채식주의자>
시간은 흐른다.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리사 나폴리, <행복한 라디오>
나는 더 많은 소비를 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 휴식 시간마저 포기한 채 만성적인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나는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업무와 교통 체증 같은 이유로 도시 반대편에 사는 친구와 식사 약속 한 번을 잡는 데도 몇 달이 걸리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달력에 무언가 빽빽하게 스케줄을 채워 넣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 스케줄도 없는 빈 시간은 사람들을 불안하고 공허하게 만들었다.
최갑수,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어차피 시간은 지나가고, 시간은 우리에게 의미 따위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는 경험하고 늙어갈 뿐이다. 코엘료 역시 단호하게 말한다. "시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건 피로하다는 느낌. 나이를 먹었다는 느낌뿐이지"라고. 맞다. 그리고 이 또한 우리가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있어도, 때볕이 내리쬐는 사막을 걷고 있어도 우리는 어차피 늙어가고 있으니까.
토머스 프레이, <미래와의 대화>
종말을 알리는 이정표가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돌진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시간의 존재를 실감한다.
웬델 베리, <지식의 역습>
우리의 삶의 모든 시간은 더없이 새롭다. 다만 우리가 가진 지식에 의해 그 새로움이 왜곡되는 것뿐이다.
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우리에게 즐거운 시간을 재는 척도란 '시간' 보다는 '즐거운'에 역점이 맞춰진 것이다. 이처럼 역점을 달리하면 사물에 접근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꾸불꾸불한 언덕길이 시간적으로는 더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길이 꾸부러질 때마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자동차 대신, 몸을 옆으로 기울이기만 하면 되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여행할 때는 그러한 꾸불꾸불한 길이 한결 더 즐거운 여행길이 된다. 교통량이 적으면 적을수록 여행길은 더욱더 즐거워지게 마련이며, 게다가 안전해지기까지 한다. 근처에 휴게소나 옥외 광고판이 없을수록 좋은 길이며, 작은 숲이나 초원, 과수원이나 잔디가 갓길에 가급적 맞닿아 있을수록 더 좋은 길이다. 그런 길로 여행을 하다 보면, 지나가는 도중 손을 흔들어주는 아이들과 만나거나 누가 지나가는지를 현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길을 묻기 위해 멈추었을 때 바라던 것보다도 한결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사람들과 만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어디에서 왔는지 얼마 동안 여행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다.
후회란 시간 낭비다. 그것들은 현재의 너를 병들게 할 뿐이야. 현재의 발목을 잡는 과거일 뿐이다. -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 중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시간, 즐거움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다르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엄청난 액수의 낭비가 선전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때 그 목적은 사물의 사용 가치를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탈취하는 것, 즉 사물을 유행으로서의 가치와 급속도의 갱신에 따르게 함으로써 사물의 가치=시간을 탈취하는 것이다.
김형욱, <손끝에 닿은 세상>
이따금 네가 정말 가고 싶은 산이 있으면 그 산 아래서 산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바라보라고. 그렇게 시간을 할애한 후에 산에 들어갔을 때, 만약 네가 길을 잃어도 그 산의 생김생김을 알기에 네가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있다고. 그렇다면 오래 헤매지 않고 다시 길 위에 설 수 있노라고. 물론 길은 또 다른 길로 통하게 되어있지만, 원래 가고자 했던 그 길을 찾기 위해서는 한 번 그 산을 멀찌감치서 쳐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고....이게 바로 인생이라고. 시간에 쫓겨, 남들의 길에 쫓겨 인생이라는 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쫓아가다 보면 언젠가 인생의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나 자신이 어드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고. 가끔은 내가 가고자 하는 인생이 어떻게 생겼고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그렇게도 헤매고 고생할 일은 없을 거라고.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시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시는 이야기를 갖고 있고 이야기로의 번역이 가능하며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한다. 시 한 편이 응축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긴 영화 한 편이 나올 수도 있다. 시의 1분은 영화의 한 시간, 산문의 두 시간이다
오마에 겐이치, <난문쾌답>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3가지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3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은 가장 무의미한 행위다.
리처드 왓슨, <퓨처 마인드>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즐기는 시간은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 버트런트 러셀"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제러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세상만사가 서비스화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상품을 교환하는 데 바탕을 둔 체제에서 경험 영역에 접속하는 데 바탕을 둔 체제로 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에어컨 자체를 사지 않고 에어컨 서비스를 받기로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에어컨을 통해 얻는 경험에 대해서 돈을 지불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자본주의에서는 물질의 차원보다는 시간의 차원이 훨씬 더 중요하다. 장소와 물건을 상품화하고 그것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서로의 시간과 식견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고 필요한 것을 빌린다. 그것은 우리가 한시적으로 구입하는 활동이나 사건이 된다. 자본주의는 물질에서 출발했지만 물질성을 벗어던지고 점점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개별적 사건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정우 외,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
오류=자유=저항의 존재는 '프로그램'을 위협한다. 그래서 오라클은 미래가 열린 미래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내 관심사는 하나야. 미래. 미래는 모두가 함께 열어가야 해." 완벽한 결정론으로부터의 일탈, 그것은 존재론적 분기를 통해 나타난다. 베르그송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듯이, 결정론의 세계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그곳에는 선택도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존재하는 세계는 지도리가 존재하는 세계, 분기점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논리적으로 여럿인 갈래들 중에서 현실적으로 하나의 갈래만이 선택되어야 한다. 그 선택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필연인가, 주체들이 의지인가? 주체들은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문을 열어야 한다.
법정 스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문명은 직선이고 자연은 곡선이다. 곡선에는 조화와 균형, 삶의 비밀이 담겨 있다. 이것을 익히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이다.
김한민, <그림 여행을 권함>
이렇게 나를 되돌아 볼 수 있을 때는 바쁨을 자각할 수라도 있지만, 문제는 우리가 바쁜 상태에 너무 익숙해져 오히려 여유 시간이 주어지면 불안해한다는 점이다. 마치 여유를 즐길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처럼. 분주함은 여행 최대의 적이자,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다.
이노우에 야스시, <둔황>
웅대한 자연의 질서와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인간이란 극히 제한된 시간을 할애받은 초라한 존재에 불과하며, 그들이 영위하는 삶은 결국 고독하고 허무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김선현, <그림의 힘>
공기, 물 중력 등 평소엔 느끼지 못하지만 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가 됩니다.
어쩌면 시간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 같았던 시간이 희박해지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는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죽음이 임박한 시간을 리얼하게 포착한 조르주 쇠라의 <임종을 맞이하는 아나이스 페브르 오몽테>는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하라'는 얼얼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쉴 시간이 없을 때가 바로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다.
리칭즈, <여행의 속도>
고속열차는 청춘의 뜨거운 피다. 짧은 시간 안에 꿈에 닿기 위해 전력으로 내달리는 질주본능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청춘을 붙잡고 싶은 중년의 집착일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중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얼마나 많은 꿈들이 실현되지 못하고 사라져 갔는지 깨닫는다. 돌이켜 보면 가보고 싶었던 곳들 중 반도 가보지 못하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하늘이 내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더 허락할지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중년의 여행은 청춘의 그것처럼 느긋할 수 없다. 일반열차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참아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유한한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일생의 꿈을 실현해야 한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따위 엿이나 먹어라>
하루 8시간 노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직장에 구속되어 있는 시간이 고작 하루의 삼분의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 8시간을 위해 8시간의 수면이 필요하고 나머지 8시간에 출퇴근과 야근, 접대, 사교 등의 시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거이 없는 셈이다. 식사와 목욕, 때로는 독서까지도 직장을 위한 시간이 되고 만다. 쉬는 날 역시 육체와 정신의 피로를 푸는 데 다 쓰는 꼴이다 보니 이 또한 직장을 위한 시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퇴직하는 날까지 몇십 년을 고스란히 직장에 빼앗기는 것이다. 그래서야 타인을 위한 인생이지, 아무리 열심히 해 봐야 본인을 위한 인생이랄 수 없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만일 시의 목적이 놀라움을 주는 것이라면, 시의 시간은 백 년이라는 단위로 측적되는 것이 아니라 날과 시간, 그리고 아마도 초로 측정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유명한 시인은 발명가라기보다는 발견자라는 것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가와구치 요시카즈, <신비한 밭에 서서>
원래 시간과 공간, 생과 사에는 구별이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세월은 화살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지금 당신과 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의 순환 속에 있지만 한편 매 순간 우리는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다. "내일부터...", "이것만 하고...", "그렇게 까다롭게 어려운 이야기는 다음에..."라는 말들은 모두 잘못된 시간관념 속에는 나오는 말이다.
시간에 속박되어 있고 시간에 매이게 되면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오는 것, 지금 이 자리를 바로잡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늘 아침은 어제 아침과 다르고, 이 여름은 일 년 전의 여름과 다른 것이다.
클레이튼 M. 키르스텐슨,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각자 다르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잘 관리해서 모두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박노해, <다른길>
아빠가 아이에게 주었던 것은 '시간의 선물'.
사랑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먼 훗날 한숨지으며 내 살아온 동안을 돌아볼 때
'아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생각되는 순간은
오직 사랑으로 함께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그 시간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그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
'역사를 보는 눈'
지구의 역사를 일주일이라는 시간으로 환치하면, 하루는 대락 6억 6천만 년에 해당한다.
우리의 역사가 월요일 0시에 지구가 단단한 구체로 출현하면서 시작된다고 가정해 보자.
월요일과 화요일과 수요일 오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수요일 정오가 되면 생명이 박테리아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목요일에서 일요일 오전까지 박테리아가 증식하고 새로운 생명형태로 발전한다.
일요일 오후 4시쯤에는 공룡이 나타났다가 다섯 시간 뒤에 사라진다.
더 작고 연약한 생명 형태들은 무질서한 방식으로 퍼져 나가다가 사라진다.
약간의 종만이 우연히 자연재해에서 살아남는다.
일요일 자정 3분 전에 인류가 출현하고, 자정 15초 전에 최초의 도시들이 생겨난다.
자정 40분의 1초 전, 인류는 최초의 핵폭탄을 투하하고 달에 첫발을 내디딘다.
우리는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우리가 <의식을 가진 새로운 동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한 순간 전의 일일 뿐이다.
알랭 드 보통, <영혼의 미술관>
삶의 문제들은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며칠, 그리고 강렬하거나 혹은 멍한 몇 시간 동안은 아주 크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사소해져 기억조차 희미한 하찮은 과거의 일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시간에 구속된 동물이라는 사실을 그리 잘 이해하지 못한다.
조정래, <정글만리>
역사 정신은 과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며, 역사란 흘러간 시간인 과거가 아니라 그 과거가 비추는 빛에 따라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다.
김홍신, <인생사용설명서>
어느 기업 광고에 인생을 80년 산다면 26년 잠자고 21년 일하고 9년 먹고 마시지만, 웃는 시간은 겨우 20일뿐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조사에 따르면 화내는 데 5년, 기다리는 데 3년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기쁨의 시간이 곧 웃는 시간일 텐데 팔십 평생 겨우 20일 정도만 기뻐하는 건 자신의 존재가치를 너무 낮게 취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화내는 시간을 반쯤 뚝 잘라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루 15초만 웃어도 수명을 이틀이나 연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건강하게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명 연장이 아니라 팔십 평생을 재미있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쁨은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줄까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내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잠시 기쁠 뿐입니다. 재산이 많고 권세가 높고 명예가 커도 기쁘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행복의 제조자인 자신이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탈리 골드버그, <글쓰며 사는 삶>
'유일한 시간은 현재뿐이다.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은 단지 머릿속의 개념일 뿐이다.' - 조지프 골드스타인 <통찰의 경험>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의지의 힘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 헨리 드루먼드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를 오롯이 주시한다는 뜻이다. "더울 때는 더위가 되고, 추울 때는 추위가 되라!"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잔다" "평상심의 도다!" 등의 선사들의 경구가 그런 경지에 대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종종 체념과 수동성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즉, 분노와 열정을 다 포기하고 대충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아니다. 오인일뿐더러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로 읽은 것이기도 하다. 대충 살아서는 결코 저와 같은 일상을 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표상의 그물을 뛰어넘는 아주 역동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자아는 물론 가족, 혈연, 국가 등의 표상들이 형성하는 장벽을 벗어나 그야말로 우주적 인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정적으로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선형성을 탈피해야 한다. 즉, 과거-현재-미래는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박웅현, <여덟단어>
개는 밥을 먹으면서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잠을 자면서 내일의 꼬리치기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개들은 원형의 시간을 살고 있다. 행복은 원형의 시간 속에 있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결과다.' - 나폴레옹
하루하루가 쌓여서 언젠가 내 인생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잘 보낸 시간은 긍정으로 돌아오고, 지금 잘못 보낸 시간은 부정으로 돌아온다는 걸 염두에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인간의 유한성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모든 일들에 같은 양의 시간을 투입하거나 동일한 중요성을 둘 수가 없다. 그는 가치 있는 일, 중요한 일들과 그렇지 않은 일들을 분별하면서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배분해야 한다. 중요한 일들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동의할 만한 세 가지 '큰일'을 고른다면 무엇일까? 첫째는 의미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둘째는 희망 없는 곳에 희망을 주입하는 일, 셋째는 정의가 없는 곳에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이들 큰일의 첫번째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의미성의 도전'에 대한 대응이고, 두번째 것은 '지옥의 조건에 대한 거부'이며 세번째 것은 '야만에 대한 저항'이다. 의미, 희망, 정의는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개의 지주와도 같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시간과 공간은 현대예술의 주요 테마다. 주제나 조형성이 없는 예술에서조차 시간과 공간은 주된 표현대상이다. 동서양의 예술전통에는 각각 시간과 공간을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특히나 공간은 조형예술에서 가장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회화는 2차원 공간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조형예술은 3차원 공간에 의존한다. 시간은 주로 문학성으로 드러난다. 특정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고대 로마의 벽화나 불교의 석각화에서처럼 회화적 묘사 혹은 음각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기법들은 눈앞의 현장이나 동태적 풍광, 인물화 속 한순간의 눈빛 등을 재현함으로써 화면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초상화나 정물, 수묵화처럼 어느 한 가지 상태로 시간을 고정시키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전통적인 예술에서는 시간이 형상에 의존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대회화는 공간을 2차원 평면에서 새롭게 처리할 방법을 찾고 있다. 세잔과 피카소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직선적 투시법에서 벗어나 공간의 깊이를 없애고 입체주의를 창안했다. 회화사에서늬 일대 전환이 아닐 수 없다. 혹은 뒤샹의 기계적 중첩이나 파울 클레의 추상처럼 시간이라는 요소를 2차원 평면에 직접 재현하거나, 칸딘스키처럼 점 선 면을 중첩시켜 일종의 움직임을 부여하거나, 베이컨의 일물화처럼 동작을 표현하기도 한다. 평면에서의 공간 표현은 분할이나 투명, 새로운 조합의 부여 등으로 나타나는 반면, 시간의 표현은 중복적 유동적이다. 음악 같은 시간예술도 실은 조형성을 벗어나 있지 않다. 예술가가 공간을 포착하는 방식은 과학자의 실증과 다르며 철학자의 사변과도 다르다. 화가의 공간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인 공간이다. 기하학적 공간이나 기하학의 공간과는 관련이 없으며, 추론이나 논증이 필요하지 않다. 화가의 공간은 예술가의 직관과 깨달음에서 온다. 시공간에 대한 사변이 예술표현의 주제가 되는 것은 현대예술의 운명이다. 추상예술에서부터 조형예술의 시간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조형예술의 극한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시간이 멈추어버렸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간을 예술표현의 직접적인 수단으로 삼기 시작하자 시간은 조형예술의 한계에서 벗어나기에 이르렀다. 행위예술이 나타난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런 경계마저 허물어, 아예 시간 자체를 예술표현의 대상으로 삼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곧장 '말하기'로 나아갔다는 뜻이다. 평론가의 사변적 해설에서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작품과 결부되어 있지 않다. 물론 아직도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의 작품이 있다면 말이다. 이렇듯 예술을 전복하려는 시도는 대개 언어유희로 빠지고 만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 과학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과학에서 연구하는 시공간은 언어가 아닌 개념과 정의에 기반을 두고 있고,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수단을 통해서 결과를 측정한다. 그러나 관념예술에서 시간과 공간은 일종의 유희적 언어가 되어버린다. 현대예술의 허무는 바로 이렇게 생겨났다. 어떤 사물이든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다. 언어의 오묘함이자 언어의 자주성이다. 이것을 철학으로 밀고 나가면, 철학의 문제는 곧 언어의 문제가 되고 언어학의 문제는 철학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둘 다 예술가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가 철학이나 언어학에 대해 함부로 떠든다면, 신은 웃지 않는다 해도 아마 학자들은 웃을 것이다.
세상에는 옳고 그름, 찬성과 반대, 혁명과 반동, 진보와 보수, 정치적 올바름과 그릇됨이라는 이분법적 틀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때는 독립적인 사고의 여지를 남겨두고, 천천히 선택을 해도 됩니다. 특히 어떤 이념이나 사조, 유행, 열광이 밀려들 때는 고독만이 그 사람을 자유로울 수 있게 합니다. 미디어가 모든 시간을 장악해버린 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누군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면, 고독만이 그 사람을 지탱해줄 것입니다. 고독이 병통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고독은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삶과 죽음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삶의 움직임을 전체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를 매우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간, 슬픔, 그리고 죽음입니다. 시간을 이해하는 일, 슬픔이 지닌 진짜 중요한 의미를 충분히 납득하는 일, 그리고 죽음과 함께하는 일 - 이것들 모두가 명료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어떤 이론도, 이상도 아닙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랑은 가르쳐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법이라는 과목을 수강할 수도 없고, 사랑이 뭔지 알게 될 때까지 날마다 연습해서 배울 방법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진 의미를, 슬픔이 가진 놀라운 깊이를, 그리고 죽음과 함께 오는 순수함을 정말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고 쉽게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본성, 슬픔의 특성이나 구조, 그리고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놀라운 것을, 이론적으로나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닙니다. 시간을 이해하면 죽음이 뭔지 이해하게 되고, 슬픔이 뭔지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을 슬픔이나 죽음과는 분리된 것으로 여기고 따로 떼어서 본다면, 우리가 접근하는 방법은 단편적인 것이 될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사랑이 가진 놀라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