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가 균형을 잃으면 세상은 발전이 아니라 퇴보할 수 있다. 배려와 공동체 차원의 효율적인 조직과 제도가 기반이 된다면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은 꿈이 아니다. 

 

 

[본문발췌]

 

 

자유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장에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칙과 한계가 있다. 시장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 시장의 바탕에 깔려 있는 여러 규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규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도 없다. 자유 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정부의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고, 자유 시장론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다. 객관적으로 규정된 자유 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의 임금 격차는 개인의 생산성이 달라서가 아니라 각 정부의 이민 정책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라 간의 이주가 자유롭다면 잘 사는 나라의 일자리는 대부분 못사는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 차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임금이라는 것은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것은 가난한 계층의 국민들 때문이 아니라 부유한 계층의 국민들 때문이라는 말도 가능하다. 사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잘사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지만,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은 부자 나라의 부자들에 비해 경쟁력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부자 나라의 부자들이 개인적으로 특별히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들의 높은 생산성은 단지 역사적으로 축척해 온 다양한 제도들 덕분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개인의 가치에 맞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잘못된 신화를 깨뜨려야만 한다.

 

 

변화를 인식할 때 우리는 가장 최근의 것을 가장 혁신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예를 들어 최근의 전자 통신 기술상의 발전은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 후반의 전보만큼 혁명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인터넷 혁명의 경제적, 사회적 영향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만큼 크지 않았다. 가전제품은 집안일에 들이는 노동 시간을 대폭 줄여 줌으로써 여성들의 노동 시장 진출을 촉진했고, 가사 노동자 같은 직업을 거의 사라지게 만들었다. 과거를 돌아볼 때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옛것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되고 새것을 과대평가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국가의 경제 정책이나 기업의 정책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의 직업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인플레이션을 길들였는지는 모르지만 세계 경제는 상당히 더 불안해졌다. 지난 30년 사이에 물가 변동을 잡았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흥분해서 우리는 같은 기간 동안 전 세계 여러 나라가 겪어 온 극도로 불안정한 경제 상황을 못본 척했다. 그 사이 수많은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 과도한 개인 채무, 파산, 실업 등으로 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했던 2008년 금융 위기도 그 한 예이다. 인플레이션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우리는 완전 고용이나 경제 성장 같은 중요한 문제에 충분히 신경 쓰지 못했다. '노동 시장 유연성'이라는 미명 아래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불안해졌다. 물가 안정이 성장의 전제 조건이라고들 주장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인플레이션에 고삐를 매었음에도 성장률은 미미했다. 바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성장을 둔화시켰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적당히 낮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은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 인플레이션이 낮아져 경제가 안정되면 투자를 불러일으켜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과는 정반대로, 인플레이션을 아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려는 시도는 투자와 성장을 위축시켰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이 낮아졌어도 우리는 대부분 진정한 경제적 안정을 맞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주요 목표로 하는 자유 시장 정책 패키지의 근간을 이루는 자본과 노동 시장의 자유화는 금융 불안과 고용 불안정을 초래해서 불안정한 세상을 만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이 정책이 약속했던 이른바 '성장 촉진'마저 실현하지 못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강박관념은 이제 잊어버리자. 인플레이션은 장기적 안정, 경제 성장,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희생해서 금융 자산 보유자들에게나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려는 사람들이 대중을 겁주기 위해 사용해 온 '무서운 망태 할아범' 같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은 제대로 작동한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은 자신이 개발도상국이었을 때에는 그런 정책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난 30년 동안 이 정책을 도입한 개발도상국들은 성장률 둔화와 수입 불균형 등의 부작용을 떠안아야 했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을 사용해서 부자가 된 나라는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

 

 

부자 나라들도 이른바 탈산업 사회로 접어들었는지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제 부자 나라들의 대다수 국민은 공장에서 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동안 상대 가격의 변화(제조업 제품의 가격은 내린 반면 서비스 가격은 그렇지 않음)를 감안하면 부자 나라들의 생산과 소비에서 제조업 부문의 중요성은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탈산업화 현상이 꼭 제조업의 쇠퇴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물론 그런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이 현상이 장기적인 생산성 증가와 국제수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세계 각국의 상당수 정부들이 탈산업 사회라는 신화에 세뇌되어 탈산업화 현상에 따른 부정적 결과들을 무시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특히 개발도상국이 산업화 단계를 건너뛴 다음 서비스 산업으로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서비스는 생산성이 느리게 성장한다. 그리고 생산성 증가 속도가 빠르다는 첨단 지식 기반 서비스 산업들은 강력한 제조업 없이 발전할 수 없다. 더욱이 서비스는 국제 교역이 어렵다. 그래서 개발도상국이 서비스 산업에 특화하는 경우 심각한 국제수지 적자에 직면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경제를 고도화시킬 능력 또한 떨어지게 된다. 이렇듯 탈산업 사회라는 환상은 선진국에도 좋지 않지만 특히 개발도상국에는 대단히 해롭다.

 

 

미국식 경제 모델을 지지하는 주장은 미국인의 생활수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미국이 세계에서 생활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한 나라의 평균 소득으로 구매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을 따지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생활수준을 측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나면 소위 말하는 미국의 우월성은 상당히 빛을 잃고 만다. 미국은 소득 불균형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을 짐작하는 데 평균 소득을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 이 사실은 다른 부자 나라들에 비해 훨씬 열등한 미국의 보건 및 범죄 관련 지표에 잘 드러난다.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은 미국인들의 구매력은 또 다른 미국인들, 특히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미국인들의 빈곤과 불안정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또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나라 노동자들에 비해 노동 시간이 상당히 더 길다. 같은 시간을 일해서 생기는 돈은 구매력을 기준으로 해도 유럽 여러 나라에 뒤진다. 이런데도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생활수준이 더 높다는 주장을 한다면 반론의 여자기 많다.

 

 

국가 간의 생활수준 격차를 간단히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중 1인당 소득, 특히 구매력 평가지수로 표시한 1인당 소득이 그나마 가장 신뢰할 만한 지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득으로 얼마나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살 수 있는지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여가 시간의 질과 양, 직업의 안정성, 범죄의 공포로부터 해방, 의료 혜택, 사회 복지 등 '질 좋은 삶'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을 간과하기 쉽다. 개인마다, 그리고 나라마다 이런 요소들 중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이런 것들과 소득 수준 사이의 균형을 어떤 식으로 맞추는 것이 좋을지는 각자 정하기 나름이지만 모두가 진정으로 '잘사는' 사회를 건설하려면 소득 이외의 요소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프리카가 늘 정체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열거한 모든 구조적 문제가 그대로 있었고 경우에 따라 더 심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아프리카는 상당한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발목을 잡는다고 간주되는 구조적 문제들 중 대부분은 오늘날 부자가 된 나라들도 가지고 있던 문제들이다. 나쁜 기후(극지 기후, 열대성 기후), 내륙 국가, 풍부한 천연자원, 민족 분쟁 바람직하지 않은 문화 등 그야말로 빠진 것 없이 다 갖추고 있었다. 이런 구조적 문제가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만 이런 장애 요인들이 낳는 문제를 처리할 만한 기술적, 제도적, 조직적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아프리카의 정체를 불러온 진짜 요인은 이 지역 국가들이 추진하도록 강요받았던 자유 시장 경제 정책이다. 역사나 지리적 요건과는 달리 정책은 변화시킬 수 있다.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단순히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들이 더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부자들에게 주어지는 더 많은 부가 사회 전체의 혜택으로 파급되게 하려면 국가는 각종 정책 수단(예를 들어 부자와 기업의 감세를 허용하는 대신 투자를 조건으로 제시)을 통해 부자들로 하여금 더 많이 투자하도록 해서 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하며, 복지 국가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전 사회 구성원들과 성장의 과실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 나라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의 노력이나 재능보다 공동체 차원에서 효율적인 조직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영웅적인 기업가들이 등장하는 신화를 거부하고 집단 차원의 공동체적 기업가 정신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조직과 제도를 마련하도록 돕지 않으면 가난한 나라들이 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늘 최선의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직접 관련된 일들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전문 용어로는 '제한적 합리성'이라고 한다.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우리가 그런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문제들의 복잡성을 줄이려면 일부러 선택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고 있다. 특히 극도로 복잡한 현대 금융 시장과 같은 분야에서 정부의 규제가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정부가 보유한 지식이나 정보가 더 우월해서가 아니라 정부 규제를 통해 선택의 범위를 제한하여 문제의 복잡성을 줄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일이 잘못될 가능성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교육 수준이 국가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사실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은 사람들이 더 만족스럽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생산성 향상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또 지식 경제 시대에 접어들면서 교육이 경제 발전에 필수 요소가 되었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 우선 지식 경제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 역사적으로 지식은 언제나 부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탈산업화와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선진국의 대다수 일자리에서 꼭 필요로 하는 지식 요건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지식 경제에 더 중요하다는 고등 교육도 그것이 경제 성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 나라의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교육 수준이 아니라 생산성 높은 산업 활동에 개인들을 조직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는 사회 전체의 능력이다.

 

 

초중등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낮은 것은 이 시기의 교육이 자아실현, 모범 시민 양성, 민족 정체성과 같은 것을 함양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라면, 고등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낮은 것은 고등 교육의 기능 중 경제학에서 '분류'라 일컫는 기능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 교육은 피교육자들에게 생산성과 관련된 지식을 상당 정도 전수해 주지만, 그것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은 그 피교육자들이 얼마나 고용에 적합한지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많은 직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능력은 일을 하면서 배워 갈 수 있는 전문 지식보다는 전반적인 지능, 의지, 조직 사고력 등이다. 따라서 대학에서 역사나 화학을 전공하면서 배운 지식은 보험 회사나 교통부 공문원으로 근무할 때에는 거의 쓸모가 없겠지만,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의지가 강하며, 조직적 사고력이 있다는 신호가 된다. 대졸자를 모집하는 회사는 각 직원의 전문지식 보다는 이런 일반적 능력을 보고 직원을 채용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얻은 전문 지식은 대부분 직장에서 수행할 업무와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구성원 개인의 교육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각 개인을 잘 아울러서 높은 생산성을 지닌 집단으로 조직화할 수 있느냐에 있다. 이런 조직화의 결과는 보잉이나 폭스바겐과 같은 거대 기업일 수도 있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에 많은 세계적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일 수도 있다. 이런 기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투자와 리스크 감수를 장려하는 일련의 제도가 필요하다. 유치 산업을 보호 육성하는 교역 정책, 장기적인 생산성 향상을 위해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자본'을 제공하는 금융 시스템, 제대로 된 파산법으로 자본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좋은 복지 정책으로 노동자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주는 제도, 연구개발과 노동자 훈련에 관한 공공 보조금과 규제 정책 등이 필요한 것이다.

 

 

교육은 소중하다. 그러나 교육의 진정한 가치는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재력을 발휘하고 더 만족스럽고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경제를 발전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교육을 확장하면 큰 실망을 겪게 될 것이다. 교육과 국민 생산성 사이의 연관성이 약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한 과도한 열의는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생산적인 기업과 그런 기업을 지원할 제도를 확립하는 데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

 

 

기업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국민 경제에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 자신에게도 좋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규제가 기업에 해로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천연자원이나 노동력과 같이 기업들 모두가 필요로 하는 공동의 자원이 파괴되지 않도록 개별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기업 부문 전체에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기도 한다. 또 각 개별 기업에 단기적으로는 손해를 끼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기업 부문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규제도 있을 수 있다. 노동자 교육 규정 같은 것이 그런 예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기업 규제의 내용이지 양이 아니다.

 

 

지나치게 결과를 균등하게 하려는 것은 해롭지만, 이 '지나치다'는 것의 한계를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는 논의를 거쳐야 한다.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최소한의 소득, 교육, 의료 혜택 등을 보장함으로써 최소한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공정한 경쟁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기회의 균등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공정하고 효율적인 사회를 건설하기를 바란다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현대 금융 시장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 효율적이라는 데에 있다. 최근의 금융 '혁신'을 통해 만들어진 수없이 많은 새 금융 상품들 덕에 금융 부문은 금융 자산 보유자들을 위한 단기 이윤 창출에는 더 효율적이 되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에도 보았듯이 이 새로운 금융 자산들은 금융 시스템뿐 아니라 경제 전반을 더불안하게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금융 자산의 유동성을 이용해 자산 보유자들은 작은 변화에도 빨리 반응을 하기 때문에 실물 경제 부문의 기업들은 장기적 발전에 필요한 '기다려 줄 줄 아는' 자본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 사이에 존재하는 속도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 즉 금융 시장의 효율성을 의도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과 다른 종류의 경제학.

존 메이너드 케인스, 찰스 킨들버거(광기, 패닉, 붕괴), 하이먼 민스키,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리스트, 조지프 슘페터, 니컬러스 칼도, 앨버트 허시먼.... 그들의 공통점은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장기투자와 생산 구조를 바꾸는 기술 혁신이지, 풍선을 부풀리듯 이미 존재하는 구조를 팽창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유치 산업을 보호하고, 기술적으로 정체된 농업과 같은 산업 분야에서 보다 역동적인 산업 분야로 자원을 강제 이전하는 한편, 허시먼이 강조하던 서로 다른 부문 간의 연계 효과를 활용하는 등 기적의 성장 기간 동안 동아시아 경제 관료들이 택했던 많은 경제 정책들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경제학자들의 가르침에서 배워 온 것이지 자유 시장 경제학에서 따온 것이 아니었다.

 

 

세계 경제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 예금 보험을 확대해서 집단적인 예금 인출 사태를 막고 엄청난 금융 구제 자금을 제공하고 경기가 악화되면 자동으적으로 복지 지출이 증가하는 시스템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1930년대 보다 훨씬 더 극심한 경제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엄청난 세계 경제 위기를 자초한 자유시장 주의 경제학을 적당히 수리하면서 사용한다면 또 다시 위기는 찾아올 것이다. 그냥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 재구성을 위한 여덞 가지 원칙을 제공한다.

  • 첫째, 자본주의는 나쁜 경제 시스템이다. 특히 더 나쁜 자유시장주의 자본주의가 모든 종류의 자본주의는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모두에게 맞는 하나의 경제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스칸디나비아식 자본주의와 다르고 스칸디나비아식 자본주의는 독일식 혹은 프랑스식과 다르다. 일본식은 말할 것도 없다. 이윤 동기는 여전히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원료이지만 이윤 동기에 아무런 규제도 하지 않는 다면 엄청난 피해가 돌아온다는 것을 배웠다. 시장 메커니즘은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세심한 규제와 조정을 필요로 한다. 더 잘 규제된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를 해야 한다. 다른 종류가 어떤 것인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표, 가치, 믿음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 둘째, 인간의 합리성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는 인식 위에서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2008년 경제 위기는 우리가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복잡한 세상을 만들어 버린 탓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이 붕괴한 것은 복잡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근본적으로 무한하다고 믿는 경제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시스템이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금융혁신이 계속 무제한적으로 허용된다면 우리의 규제 능력은 끝까지 우리의 혁신 능력을 따라 잡지 못할 것이다. 복잡한 금융상품의 발행을 금지해야 한다. 식품이나 약품 자동차 비행기 상품은 출시전에 엄격한 안전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왜 경제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금융상품은 쉽게 시장에 발행이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 '로켓 사이언티스트'들이 새로운 금융 상품을 개발하면 그 상품이 금융 회사의 단기적 이윤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 전체에 장기적으로 어떤 위험과 이익을 미치는지 평가한 뒤에 출시를 허용하는 승인 절차를 만들 필요가 있다.

  • 셋째, 인간은 이기심 없는 천사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나쁜 면보다 좋은 면을 발휘하게 하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은 물질적 자기 이익추구를 하는 존재이지만 그것이 행동동기의 전부는 아니다. 자유시장 주의자들은 개인과 기업이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미화했다. 그래서 이익만 창출 할 수 있다면 사회적 책임을 무시해도 되는 세상을 만들었다.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물질적 부를 중요시하되 유일한 목표가 되지 않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단기적인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면 우리는 전체 시스템을 파괴할 것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 넷째, 사람들이 항상 받아 마땅한 만큼 보수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개개인으로 따지면 부자 나라 사람들 보다 더 생산적이고 기업가 정신이 더 뛰어난 경구가 흔하다. 이들은 개인의 자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기 나라의 경제시스템과 선진국의 이민 정책 때문이다. 또한 기회의 평등만 보장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 마땅하다는 말은 아니다. 어느 정도 결과의 평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모든 아이들이 최소한의 영양과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면 시장이 제공하는 기회의 평등 정도로는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을 보장 할 수 없다. 우리가 시장의 결과에 대해 과감하게 문제를 제기할 때만이 더욱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시장의 결과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 다섯째, 물건 만들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석유위에 떠다니는 브루나이, 쿠웨이트가 아닌 다음에야 제조업을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생활 수준을 향상 시킬 수 없다. 흔히 탈산업화의 성공 사례로 간주되는 스위스나 싱가포르 등은 사실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나라다. 더욱이 대다수의 고부가가치 서비스들(금융, 기술컨설팅 등)은 제조업 부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산업정책 역시 핵심 제조업 부문을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 여섯쩨.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이 더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금융 부문이 하는 중요한 역활 중의 하나가 투자를 하고 나서부터 그 투자가 결실을 맺을 때까지의 시차를 메워주는 것이다. 금융은 속성상 빨리 움직일 수 없는 실물 자산에 유동성을 부여함으로서 자원을 신속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금융 자유화로 국경을 넘어 돈의 이동의 쉬워졌고 투자자들은 더 참을성이 없어져 즉각적인 이윤을 원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정부와 기업은 장기적인 전망 보다는 즉각적인 이윤에 집중하게 되었다. 돈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정부와 기업에 대한 협상 카드로 사용한 투자자들은 국민소득의 더 많은 부문을 금융 소득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이것으로 고용불안(고용불안은 이윤을 신속하게 창출하는 데에 필요하다)은 심화되었다. 금융 거래세, 초국적 자본이동에 대한 제한, 기업 인수 합병에 대한 규제 강화 등은 금융 산업의 속도를 늦춰서 금융이 실물 경제를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도록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노키아도 전자산업에서 이윤을 내기까지 17년이 걸렸고 일본 자동차도 시장에서 인정받기 까지 40년이 걸렸다.

  • 일곱째, 더 크고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정부 개입이 많이 늘었지만 주로 위기관리를 위한 것이다. 정부는 위기관리를 넘어서 풍요롭고 평등하며 안정적인 사회를 건설하는데 더 큰 역활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정부는 사회의 여러 상충된 요구들을 조정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가장 우수한 장치이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거대한 복지국가와 경제 성장률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는 작은 정부가 항상 성장에 이롭다는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잘 드러내 준다. 그리고 오늘날 부유해진 나라들은 모두 정부가 경제발전을 위해 적극 개입했다. 정부 개입은 제대로 계획되고 추진되기만 하면 경제를 더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 정부는 사적인 수익은 적지만 사회적으로 수익이 높은 곳에 투자하고 또 연구개발이나 노동자 훈련등 시장에 제대로 하지 못하는 투입물에 공급을 늘려야 한다.

  • 여덟째, 세계 경제 시스템은 개발도상국들을 불공평하게 우대해야 한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많은 나라들은 자유시장을 맹신하는 국제기구나 부자나라들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유시장 정책을 채택해야 했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민주주의가 취약했기에 자유시장 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더라도 그 정책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그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따라서 세계 경제 시스템은 개발도상국들이 자국에 적합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책 공간을 넓혀 주는 방향으로 완전히 개편되어야 한다. 특히 자국시장 보호, 외국인 투자 규제, 지적 재산권 등에서 개발도상국에 더 관대한 체제가 필요하다. 이 같은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WTO를 개혁하고 빈국과 부국간의 다자간 자유 무역 협정 및 투자 협정들을 폐기하거나 개정해야 한다. 물론 이런 모든 제안은 개발도상국들에게 부당하게 유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개발도상국은 국제관계에서 부당하게 수많은 불이익을 당했다. 이 정도의 봐주기 시스템은 용납될 수 있다고 본다.

  • 세계를 퇴보 시키고 재앙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던 원칙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예전과 비슷한 대참사들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제 좀 불편해질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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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사회, 문화, 경제, 기술 등 우리 생활 전반에 많은 변화가 예상됩니다. 변화의 시기에는 혼란이 생기고, 그 혼란 속에서 각 영역에서 패권을 잡기 위한 보이는, 보이지 않는 힘의 대결이 나타나겠지요. 

 

이 시점에 과거 역사 흐름 속에서 변화를 주도한 힘의 요소와 그 역학관계를 살펴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데 참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본문발췌]

 

 

세계사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간의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이 만들어낸 다섯 가지 힘, 즉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자본주의,사회주의,파시즘)', '종교' 입니다. 무엇이 과연 세상을 움직여왔는지, 큰 흐름으로 살펴보면 인류 역사를 좀 더 쉽고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의 중심은 경제의 중심과는 다릅니다. 문화예술의 경우, 그 중심이 떠나도 그곳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경제의 중심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은 쇠퇴와 몰락으로 인한 우울함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문화예술의 중심이었던 곳에는 품격 있는 건조물과 명화, 예술과 문화의 향기라는 유산이 남아서 사람들은 이전의 영광을 긍지로 여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로마, 피렌체, 파리, 빈과 같은 문화적, 예술적인 중심을 경험한 장소가 지금도 세계적인 관광지로서, '동경의 땅'으로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모으는 것은 그런 문화적인 유산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문화예술의 중심이었던 곳은 브랜드가 되고, 경제의 중심이었던 곳은 브랜드가 되지 않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원래 문명의 탄생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물건을 교환하는 것, 즉 도시화로부터 시작됩니다. 물건과 정보 교환이 번잡함을 만들어내므로 그곳에 필요한 것은 '다양성'입니다. 다양성을 가진 사람과 물건이 한 장소에 모임으로써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고, 그 문화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음으로써 도시는 성장합니다. 따라서 떠들썩한 도시는 이전 당나라의 '장안'이든 예술의 도시 '파리'든 지금의 '뉴욕'이든 다양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서로 이질적인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여러 장소로부터 모여드는 공간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먹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먹는 일이 전부라면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는 넓은 땅이 있는 곳에서 사는 것이 훨씬 낫겠죠. 하지만 실제로는 고양이 이마처럼 좁은 장소밖에 얻을 수 없는 도시로 경쟁하듯 몰려듭니다. 왜 사람들은 부나비처럼 도시로 모여들까요? 거기에는 화폐 문제가 큰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 밖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만들어지는 화려함과 즐거움, 다양성,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생겨나는 유행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분비는 테마파크에 가면 '줄 서지 않고 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제로 텅 빈 테마파크에 가면 반갑기는커녕 오히려 외롭다는 느낌을 갖기 쉽습니다.

 

 

"언어의 독점이 권력의 독점으로 이어진다." - 미셸 푸코

 

 

우리는 '권력'이라고 하면 막강한 군대를 손아귀에 넣고 민중을 원하는 대로 다스리거나 거대 자본을 장악한 뒤 시장을 통제하는 일 따위를 주로 떠올립니다. 그러나 진짜 권력은 그런 것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습니다. 진정한 권력은 그 시대의 '지식을 독점'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럽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차이를 만들어내어 차별화하는 것으로 가치를 창조'하는 데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는 물건을 소비하는 '욕망 긍정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자본주의의 진짜 적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대립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신의 뼛속까지 스며든 욕망'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제1, 2차 세계대전의 본질 - '더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싸움. 원료와 시장을 확보할 수 있는 식민지를 갖는 것.

 

 

"선전은 모두 대중적이어야 하며, 그 지적 수준은 선전이 목표로 하는 대상 중 최하 부류까지도 알 수 있을 만큼 조정되어야 한다. 그 지적 수준은 선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조정해야 한다. 따라서 획득해야 할 대중이 많으면 많을수록 순수한 지적 수준은 그만큼 낮게 해야만 한다. 민중의 압도적 다수는 진지하고 냉철한 사고나 이성보다 감정적, 혹은 감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성적 기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수하면 폐쇄적이다. .... 긍정 아니면 부정이며, 사랑 아니면 마음이고, 정의 아니면 불의이며, 참 아니면 거짓이다.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다든가, 혹은 일부분은 그렇다는 일은 없다." - 히틀러, <나의 투쟁>

 

 

사람은 불안해지면 자신과 다른 것을 찾아내 배제하는 것으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하나가 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대부터 세계사를 보면 인간이 자기 존재의 왜소함, 불안정함을 견디지 못하고 여러 대상에 의존해온 결과가 오늘날의 문화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언어가 생기고, 문자가 생기고, 종교가 확립되고, 또 다른 방향으로는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무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질서와 안정을 원하는 인간의 감정이 이 세상에 '문화'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을 갈망하는 마음이 수많은 다툼과 분쟁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입니다.

 

 

역사는 시대에 따라서 해석되고 재해석된다. 현대에 재해석되지 않은 역사는 죽은 것이고, 시대가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후대에 그 시대도 재해석되는 것이다. 해석이 죽은 시대는 그 시대 자체가 죽었거나, 해석이 살아 있는 다른 시대에 필연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다. 역사학을 가지지 않은 나라에서 능동적으로 시대를 열거나 주도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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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위주의 생각은 감각적 즐거움은 가져다 줄지 모르지만 세상의 균형 속에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분지족(安分知足) 安貧樂道(안빈낙도)의 삶에서 즐거움을 찾자.

 

 

[본문발췌]

 

 

행복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 우주의 한 시민이라고 생각하여 우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마음껏 즐기며, 자기는 후대의 생명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하여도 마음이 흔들리는 법이 없다. 이렇듯 생명의 줄기와 본능적으로 깊이 연결될 때,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이 깊은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세상과 깊은 접촉을 해야 한다. 이 의미와 가치에서 불행도 생기고 참된 행복도 생긴다. 이 세상에는 할 만한 일이 없다고 해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유능한 모든 젊은이들에게 나는 말하고자 한다. "글줄이나 끄적거려 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숫제 글을 쓰지 않으려고 힘쓰라. 모름지기 실사회로 뛰어 들어가라. 해적도 되고, 보르네오의 임금도 되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 보라. 뼈가 휘도록 일해야만 기본적인,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어려운 생활을 한번 해 보라."

 

 

요즘의 생존 경쟁이란 실상 성공 경쟁이나 다름이 없다. 누구나 경쟁을 할 경우에 두려워하는 것은 내일 아침의 끼니 걱정이 아니라 상대방보다 우세할 수 있느냐 하는 걱정이다. .... 성공하기를 바라고 또한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따라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자는 패배자라고 생각하는 한, 그의 사생활은 너무나 분주하고 걱정에 휩싸여 행복한 날을 전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돈에서 얻으려는 것은 생활의 안전과 한가한 시간이다. 현대인이 대부분 바라는 것은 돈을 더욱 많이 버는 것이요, 또한 돈을 버는 목적은 허영과 명성과 타인에 대한 우월감이다.

 

 

인간의 행동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대한 것이 못 된다. 또한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커다른 슬픔 속에서도 헤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행복에 종지부를 찍는 것처럼 생각되는 고민도 시간이 흐를수록 사그라져 나중에는 그 심각한 고통을 기억조차 못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생각도 그렇거니와, 그보다도 인간의 자아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자기의 사상과 희망을 자기 이상의 존재자에게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어지간한 고민이라면 그 속에서 어떤 평화를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철저한 이기주의자에게 발견할 수 없는 일이다. 

 

 

정신이 가장 활발하게 작용하여 사소한 일을 거들떠보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행복에 이르는 첫걸음의 하나이다. 무엇이든지 도취해야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은 가짜 행복이며 따라서 불만스럽기 짝이 없는 행복이다. 참으로 만족스러운 행복은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데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완전히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다.

 

 

흥미의 분야가 넓어질수록 행복을 누릴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적게 받게 마련이다. 하나를 잃어버리면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모든 일에 대하여 한결같이 흥미를 느끼기에는 너무나 짧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충당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에 되도록 흥미를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눈을 내부에 돌리기 쉽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의 천태만상을 외면하고 내부의 공허를 들여다보는 병에 걸리기 쉽다. 이러한 내향적인 병폐에서 비롯되는 불행에, 마치 위대한 무엇이라도 있는 듯이 생각할 것이 못 된다.

 

 

시간을 보내며 느끼는 만족감과, 사소하나마 야심을 발산하는 기쁨은 대개 사업을 성취하는 데서 온다. 설령 일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말하면 첫째 일자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보다도 행복한 것이다. 사업에 재미가 있으면 권태가 따르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한층 기쁜 만족을 느낄 수가 있다. 흥미 있는 일에 대해서는 순서적으로 이를 정리할 수 있다. 단지 재미를 붙일 수 있다는 정도의 일에서부터 위대한 사람들이 모든 정력을 바칠 만한 사업에 이르기까지, 두 가지 요소가 일의 흥미를 자아낸다. 하나는 기술의 발휘이고, 또하나는 건설이다.

 

 

오늘날 지식계급이 당하고 있는 불행의 한 원인은 대다수가 - 특히 문학적인 소질이 있는 청년들은 독자적으로 자기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속인들이 판을 치는 어느 부유한 주식회사에 고용되어 예술가에게 해롭고 무의미한 것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하는 점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신문인들에게, 자기가 종사하여 만들어 내고 있는 신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저마다 생활비 때문에 원치도 않는 일에 재주를 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직업에 참된 만족이 우러날 리가 만무하다. 한편 그 직업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키려고 하면 스스로 자기를 냉소하게 되어 진정한 만족을 느낄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직업을 택하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굶주림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굶주리지 않고 건설적인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수입은 많을지라도 자기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선택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올바로 충고해 주어야 할 것이다.

 

 

자존심이 없는 곳에 참된 행복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자기가 종사하는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존심을 가질 도리가 없다. 건설적인 사업에서 느끼는 만족은 소수가 누리는 특권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이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 사업에 주인이 된다면 저마다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사업이 가치가 있어 보이고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이 특권을 누릴 수가 있다. 어린아이들을 행복하게 기르는 일은 우리에게 깊은 만족을 느끼게 하는 어려운 건설 사업이다. 어린아이를 훌륭히 기른 어머니라면 자기의 수고로 말미암아 -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이 갖지 못할 뻔한 -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고 나서 그것을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은, 두고두고 그것을 걱정하는 사람보다 일에 훨씬 능률을 올릴 수 있다. 자기가 한 일을 잊어야 할 경우에, 그 일밖에 다른 여러가지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손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하루하루의 업무로 말미암아 피로해진 몸을, 이러한 흥미 때문에 소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흥미는 의지의 힘, 즉각적인 결단, 그리고 도박과 같은 경제적인 타산을 내포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감정을 피로하게 하고 의식이나 무의식을 발동시킬 만큼 자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많은 오락이 이러한 조건을 해소시켜 준다. 즉 운동경기를 구경하거나 극장에 가거나, 골프를 치는 것 등등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탓할 것이 몯 된다. 학자들은 자기 전문분야 이외의 독서를 하는 것이 매우 유리한 것이다. 아무리 중대한 고민이라도 종일 끙끙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이 점에 대하여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대체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자기 일을 쉽사리 잊어버리지만, 여자들은 가사를 보살피는 관계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남자들은 직장을 나서면 새로운 기분을 갖게 되지만 여자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이와 같은 나의 주장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점에 있어서는 밖에서 일하는 여자는 집에서 일하는 여자와는 다르다. 여성들은 실제적인 가치가 없는 일에 대하여는 흥미를 갖기가 어렵다. 목적 관념이 여자들의 사상과 행동을 지배한다. 여자들은 책임이 따르지 않는 관심사에는 좀처럼 눈을 돌리지 않는다. 물론 내가 하는 말은 일반론이다. 따라서 예외도 있을 것이다.

 

 

모든 비개인적인 관심은 휴양을 한다는 입장을 떠나 생각해 보더라도, 여러 가지 의의가 있다. 우선 우리의 감정을 조화시킨다. 우리는 자기 목표, 자기의 사업, 그 밖에 자기의 세계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인간의 전체적인 행동에서 볼 때, 그것은 실로 보잘것없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세계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교육이 단지 어떤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격하된 결과, 세계를 공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정신의 시야를 넓히려고 하지 않는 것이 현대의 고등교육이 지닌 하나의 결함이다. 예를 들어 정당 싸움에서 오직 자기 당이 승리하기 위해 애쓴다. 그것은 또 좋다고 치자. 그런데 그 투쟁의 과정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세상에대한 증오심과 폭력과 의혹을 조장하는 방법도 사양치 않는다. 그리하여 외국 국민을 욕되게 하여서까지 승리를 얻기 위한 가장 가까운 방도를 찾는 경우도 있다. 보는 눈이 현재에만 국한되어 있거나 무조건 능률만 올리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불미스러운 방법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장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만일에 당신이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고 인간이 부분적으로 서서히 야만 상태에서 벗어났으며 인류의 존재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헤아리는 긴 시대와 비교할 때 짧기가 한량없다는 것을 언제나 절실히 느끼며 그런 생각을 잊지 않고 있다면, 당신이 지금 가담하고 있는 조그마한 싸움은 별로 의미가 없으므로, 우리가 헤어난 암흑시대로 후퇴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당장 그 일에 패배를 한다고 하더라도 야비한 수단을 쓰지 않게 한 흐뭇한 감정에 싸일 것이다.

 

 

세계는 어떤 손실로 말미암아 치명상을 입을 만큼 비좁은 곳은 아니다. 한두 번의 실패로 패배하고 손을 드는 것은 결코 판단에 민감하다고 해서 치하할 일이 못 되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력의 파괴로서 슬퍼해야 할 일이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죽음에 지배된다. 죽음은 어느 때든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닥쳐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터전이 있으면, 인생의 의의와 목적이 우연에 의해 지배를 받기 쉽다. 따라서 지혜롭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먼저 생각의 중심을 세우고, 그 이외에 여러 가지 2차적인 흥미를 갖도록 힘써야 한다.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살아가고, 자유로운 애정과 광범위한 흥미를 갖고 이를 통하여 자기의 행복을 소유하는 자요, 자기가 남에게 흥미와 애정의 대상이 되어 행복을 느끼는 자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건전한 상식의 토대 위에서, 하루하루의 생활을 즐겁고 명랑하게 영위하도록 힘써 행복을 손에 넣어야 하며, 행복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시민이라고 느끼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마음껏 즐기며, 자기 자신을 자기 뒤에 오는 생명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느끼므로, 죽음을 생각하여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으며, 이와 같이 생명의 물줄기와 깊이 본능적으로 결합될 때에 가장 큰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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