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사람은 모르는 것the unknown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the known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본문발췌]

 

 

죽음은 놀라운 어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삶이 그런 것처럼.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슬픔, 괴로움, 고민, 기쁨, 터무니없는 생각들, 재산, 시기심, 사랑, 외로움이라는 마음 아픈 불행 - 이 모두가 삶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을 전체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는 것처럼, 그중 파편 하나만 취해서 그 파편으로 살지 말고요. 바로 그렇게 삶을 이해하는 가운데에 죽음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그 둘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삶의 움직임을 전체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를 매우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간, 슬픔, 그리고 죽음입니다. 시간을 이해하는 일, 슬픔이 지닌 진짜 중요한 의미를 충분히 납득하는 일, 그리고 죽음과 함께하는 일 - 이것들 모두가 명료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어떤 이론도, 이상도 아닙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랑은 가르쳐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법이라는 과목을 수강할 수도 없고, 사랑이 뭔지 알게 될 때까지 날마다 연습해서 배울 방법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진 의미를, 슬픔이 가진 놀라운 깊이를, 그리고 죽음과 함께 오는 순수함을 정말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고 쉽게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본성, 슬픔의 특성이나 구조, 그리고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놀라운 것을, 이론적으로나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닙니다. 시간을 이해하면 죽음이 뭔지 이해하게 되고, 슬픔이 뭔지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을 슬픔이나 죽음과는 분리된 것으로 여기고 따로 떼어서 본다면, 우리가 접근하는 방법은 단편적인 것이 될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사랑이 가진 놀라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맙니다.

 

 

삶을 조각조각 나뉜 것으로 다루면 끊임없는 혼란과 모순, 불행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삶의 전체성을 보아야 하는데, 애정이 있을 때에만, 사랑이 있을 때에만 삶의 전체성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질서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혁명입니다. 수학, 의학, 역사, 경제학에 대해서 더욱 더 많은 지식을 얻고, 그런 다음 그 지식 조각들을 한데 모으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하지요. 사랑이 없으면, 혁명은 국가에 대한 섬김으로, 이미지에 대한 섬김으로, 또는 무수히 많은 전제적인 부패와 인간에 대한 파괴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두려움을 느껴서 죽음을 일상 삶과 멀리 떼어놓으면, 그 분리는 더 많은 두려움과 불안을, 그리고 몇 배나 더 많은 죽음에 대한 이론들을 키워갈 뿐입니다. 죽음을 이해하려면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삶은 생각이 연속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든 불행을 키우는 것이 바로 이 계속성continuity이지요.

 

 

사랑이 그런 것처럼, 죽음은 삶의 순간순간 여기 있습니다. 일단 이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여러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모르는 것the unknown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the known을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가족을 잃을까봐, 친구들도 없이 혼자 남겨질까봐 두려워합니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자신이 축적해놓은 경험들과 재산이 없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놓아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건 바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은 기억이며, 마음은 그 기억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기억은 단지 기계적인 것일 뿐입니다. 컴퓨터가 그걸 아주 잘 증명하고 있지요. 죽음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그때 죽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마음이 신선해지고 새로워져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면 죽음이라 불리는 그 상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생각을, 그리고 슬픔을 이해하며, 그런 사람만이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코 축적하지 않고, 결코 경험을 모으지 않으면서 순간순간 죽는 마음은 무구하며, 그래서 늘 사랑의 상태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이란 몸, 특성, 저항, 장애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고,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지만, 생각하고 감정을 느낌에 있어 자유로운 사람, 저항이나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불멸을 알게 될 겁니다. 갈망하는 것들, 움켜쥐고 있는 것들, 바라는 것들이 여러 층위를 이루며 쌓여 있는 것에 불과한 자기 자신 한계, 자기 자신 인격이나 개성을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멸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만일 여러분이 생각에서 자유롭다면, 만일 여러분이 그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을 통해 주의 깊음을 통해 그 강렬한 불꽃을 통해 꿰뚫어보았다면, 불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완벽한 조화이며, 그것은 '사랑 길'이나 '슬픔 길'이 아닌, 그 안에서는 모든 구분이 사라진 길입니다.

 

 

우리는 오직 시간이라는 관점에서만,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끝남이 있을 것이고, 죽음이 있을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사물을 선명하게,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구체적으로 보게 될 겁니다. 우리는 끝난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는데, 그건 우리 마음이 계속성을 추구하고, 가족 안에서, 재산에서, 우리 직업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오직 안전에 대한 탐욕스런 추구에서 벗어난, 계속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계속성이라는 과정에서 벗어난 마음만이 불멸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일신의 불멸을 얻으려 애쓰고 있는 마음, 지속하고 싶어 하는 '나'는 불멸이 무엇인지 절대 알지 못합니다. 그런 마음은 두려움과 죽음에 들어 있는 중요한 의미를 모를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절대 하루 안에 마무리 짓지 않고, 단 하루만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 ... 우리는 언제나 내일 아니면 어제에 살고 있지. 누군가가 오늘이 끝나면 너도 죽게 될 거라고 말한다면, 넌 어떻게 하겠니? 그날 하루를 풍요롭게 살지 않겠니? 우리는 하루를 풍요롭고 완전하게 살지 않는다. 우리는 그날을 찬미하지 않아. 언제나 내일은 뭐가 될까, 내일 끝낼 크리켓 경기, 6개월 안에 끝낼 시험, 어떻게 하면 음식을 즐길까, 어떤 옷을 살까 등등, 언제나 내일 아니면 어제를 생각하지. 그러니 결코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린 잘못된 의식으로 언제나 정말로 죽어가고 있는 거야. 만일 우리가 단 하루를 살고 그날과 함께 죽으며 또 다른 날을 마치 신선하고 새로운 날인 것처럼 다시 시작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우리가 획득한 모든 것들, 모든 지식, 모든 기억, 모든 다툼을 날마다 멈추는 것, 그것들을 다음날로 가져가지 않는 것 -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 설사 끝남이 있더라도, 새로 태어남이 있다는 말이다.

 

 

두려움은 실상에 대한 무지이며, 우리 삶은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상태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명상은 삶을 이해하는 것인데, 그것이 질서를 가져옵니다. 질서는 덕이고, 덕은 곧 빛입니다. 이 빛은 다른 사람에 의해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유식해도, 아무리 영적이라 해도 말입니다. 지상에서든 천국에서든 자신만이 이해와 명상에 빛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비어 있고, 그 비어있음emptiness, 空에서 여러분은 관찰하고 이해하며, 그러면 사는 일이 곧 죽는 일입니다. 계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창조적일 수 없습니다. 오직 끝나는 것만이 창조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삶이 또한 죽음이기도 할 때 사랑이 있고, 진리가 있고, 창조가 있습니다. 죽음은 모르는 것이고, 진리와 사랑과 창조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달리는데,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죽음이며,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넓은 틈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 영역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알고 있는 것에 매달리곤 합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알고 있는 것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며, 거기에 안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전이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확실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영속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살펴보면 그것은 영속하지 않고, 그것은 완전히 불확실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에 매달립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과거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이 진실을, 즉 죽음은 여러분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그것이 미래든, 여러분 얼굴이든, 이상이나 그 밖의 것들이든 간에) 끝나는 일이라는 걸 알 때, 죽음이라 불리는 이 아득히 먼 것을 삶이라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가져온 것이며, 그것은 곧 여러분 집착을 끝낸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일, 과거에 사로잡힌 마음이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놀랍도록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됩니다. 그 마음은 과거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날마다 완전히 끝내기 위해 마음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건 엄청난 행동이죠) 날마다 순간순간 여러분은 삶과 함께 그리고 죽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죽음처럼 몹시 복잡한 인간 문제에 대해 조사하려면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든 만일 선입견이나 믿음, 희망, 두려움이 있으면 관찰하거나 조사할 수 없습니다. 매우 진지하게 조사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왜곡하는 선입견이 없어야 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위안을 바라는 욕망 희망이 없어야 하며, 그런 것들이 모두 없어야 합니다.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완전히 비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 알아내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야생의 인간에게는 단순한 두려움 몇 가지만 있지만, 우리는 더 '문명화'되어 가면서 점점 더 복잡해지는 두려움을 셀 수도 없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초연해지려고 한다면, 반대로 더 집착하게 될 뿐이며 그래서 모순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이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집착을 통해 계속된다는 느낌에서도 자유로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왜 집착하시나요? 집착이 없으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 집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아내이며, 여러분은 여러분 은행예금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일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모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집착을 통해 계속된다는 이 느낌이 끝나면, 완전히 끝나면, 여러분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삶 끝에 있는 것, 우리 모두가 그 상태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순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 사랑, 미움, 기쁨, 즐거움... 그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 죽는 일이라고, 이런 죽음이 있어야만 새로 태어남이 있다고.... 죽음은 날마다, 순간순간,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내려놓는 거예요. 그게 죽음이예요. 죽음이 이런 거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지요? 어제를 오늘로 가져오지 말고, 오늘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는 게 죽음이예요. 날마다 죽는 게 죽음이에요. 다음날 아침 완전히 신선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게 죽음이고 삶이예요. 모든 것을,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태양을 날마다 신선한 눈으로 보는 것, 그 모든 것을 신선하고 무구한 눈으로 보는 게 삶이라고요. 그러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디 있겠어요? 그 둘은 항상 붙어 다니고, 늘 함께 있어요.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에요. 날마다 죽지 않으면 새로 태어남이 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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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삶 속에서 자신을 찾아야 하고, 그것은 편안하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중과 투쟁, 노력의 과정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본문발췌]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쪽에서 내가 원하는 생각을 할 수도 없거니와 내 쪽에서 원하는 것을 그가 생각하게 만들 수도 없어. 그러나 누군가를 잘 관찰할 수는 있는 것 같아. 그가 다음 순간에 무얼하게 될지 말이야. 그건 아주 간단해, 사람들이 그걸 모를뿐이야. 물론 연습이 필요하지. ...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주의력과 모든 의지를 어떤 특정한 일로 향하게 하면, 그는 그것에 도달하기도 하지. 그게 전부야. 네가 알고 싶었던 일도 정확하게 그래.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자세히 바라봐. 그에 대해서 그 자신보다 네가 더 잘 알게 돼.

 

 

생각이란, 우리가 그걸 따라 그대로 사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어. 너의 <허용된 세계>는 세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넌 알았어. 그리고 두번째 절반을 감추려고 했어.

 

 

우리들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 - 자기에게 금지되어 있는지. 금지된 것은 결코 할 수 없어. 금지된 것을 하면 대단한 악당이 될 수 있지. 거꾸로, 악당이라야 금지된 일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 - 사실 그것은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 속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 늘 그러게 마련이듯이 그런 사람은 살기가 쉬워. 다른 사람들은 운명을 자기 속에서 스스로 느끼지. 그들에게는 어느 명예 있는 남자건 날마다 하는 일들이 금지되어 있어.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폄하되는 다른 일들은 허용되어 있어. 그러니 누구나 자기 자신 편에 서야 해.

 

 

아무려나 어떤 목적으로 네가 지금 네 잔을 마시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 둘 다 알 수 없어. 하지만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피스토리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사물들이지. 우리가 우리들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지. 그들은 바깥에 있는 물상들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가 전혀 발언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행복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한 번 다른 것을 알면, 그때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겠다는 선택이란 없어져 버리지.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쉬워. 우리들의 길은 어렵고. 우리 함께 가보세"

 

 

우린 인간이야. 우린 신을 만들고 신들과 싸우지. 그러면 신들이 우리를 축복해.

 

 

그리고 여기서 갑자기 예리한 불꽃 같은 인식이 나를 불태웠다. 누구에게나 하나의 <직분>이 있지만, 그것은 그 누구도 자의로 택하고 고쳐 쓰고 그리고 마음대로 주재해도 되는 직분은 아니라는 것. 새로운 신들을 원한다는 것은 틀렸다. 세계에다 그 무엇인가를 주겠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기를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그 생각이 내 마음을 깊이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이 체험에서 얻은 열매였다. 나는 자주 미래의 영상들을 가지고 유희했었다. 어쩌면 시인으로 혹은 예언자로, 혹은 화가로 혹은 어떻게든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을 역할들을 꿈꾸곤 했었다.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짖기 위하여, 설교하기 위하여, 그림 그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시인으로 혹은 광인으로, 예언가로 혹은 범죄자로 끝장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건 궁극적으로 중요한게 아니었다.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반쪽의 얼치기였다. 시도를 벗어남이고, 패거리의 이상으로의 재도피이고, 무비판적 적응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새로운 영상이 무섭고도 성스럽게 눈앞에 솟았다. 수백번 예감했고 어쩌면 자주 입 밖에 내었지만 이제 비로소 체험한 것이었다.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에로, 어쩌면 무(無)에로 더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이미 많은 고독을 나는 맛보았다. 이제 예감했다. 더 깊은 고독이 있으며 그 고독은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스스로 갖겠다고 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운명뿐이었다.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다. 바깥에는 거리와 집들, 사람과 시설들, 도서관과 강의실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 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다. 여기에는 동화가, 꿈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생각과 대화 가운데서 자주 그 세계 한가운데에서 살았다. 다만 우리는 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선에 의하여 갈라져 다른 벌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다르게 바라봄에 의하여 갈려져 있었다. 우리의 과제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섬을 제시하는 것, 어쩌면 하나의 모범을, 아무튼 살아가는 다른 가능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내가, 오래 고립되어 있던 사람인 내가, 완전한 혼자임을 맛보고 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동체를 알게 되었다. 다시는 행복한 사람들의 연회를, 즐거운 사람들의 축제를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다시는, 다른 사람들의 연대를 보고 시샘이나 향수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나는 <그 표적>을 지닌 사람들의 비밀을 전수받았다.

 

 

표적을 가진 우리들은, 세상의 눈에는 이상한 사람들, 위험한 광인들로 비칠지도 몰랐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깨어난 사람들, 혹은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은 점점 더 완벽한 깨어 있음을 지향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 추구는, 그들의 의견, 그들의 이상과 의무들, 그들의 삶과 행복을 점점 더 긴밀하게 패거리에 묶는 것이었다. 그곳에도 노력은 있었다. 그곳에도 힘과 위대함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견해로는 우리 표적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것, 개별화된 것 그리고 미래의 것을 향한 자연의 뜻을 제시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고수(固守)의 의지 속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인류가,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하는 인류가 무언가 완성된 것, 보존되고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반면 우리들에게는 인류가 하나의 먼 미래,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고, 그 모습은 아무도 모르는, 그 법칙은 그 어디에도 씌어 있지 않은 미래였다.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돼요.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 에바 부인

 

 

오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 필요 있는 것은 겪게 되겠지요.

 

 

새로운 것이란 낡은 것에 매달린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겠지.

 

 

예전에 나는 한 인간이 하나의 이상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일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드문지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었다.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것은 개인적 이상, 자유로운 이상, 선택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떠맡겨진 공동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내가 인간을 과소평가했음을 알았다. 그렇게 봉사와 공동의 위험이 그들을 제아무리 제복을 입혀 획일화해 놓았어도 나는 많은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들이 운명의 의지에 눈부시도록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많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공격 때뿐만 아니라 어느 때나 확고하고 먼, 약간 신들린 듯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시선은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며 엄청난 것에 몰두해 있음을 뜻한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무얼 원하든 믿고 생각한다 - 자기들이 준비되어 있고, 쓸모 있다고, 그들에게서 미래가 형성되리라고, 그리고 세계가 점점 더 경직되어 세계와 영웅주의에, 명예와 다른 낡은 이상에 맞추어져 있는 듯 보일수록 그만큼 더 요원하게 그리고 그만큼 더 거짓말처럼 외면적인 인간성의 목소리 하나하나는 울렸다. 이 모든 것은 다만 표면이었다. 전쟁의 외적이고 정치적인 목적들에 대한 물음이 표면에 그치듯이. 깊은 곳에서는 무엇인가가 생성중에 있었다. 새로운 인간성 같은 무엇이.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으며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바로 내 곁에서 죽었다. 그들에게는 미움과 분노, 살육과 말살이 대상에 매어 있지 않다는 통찰이 느껴졌다. 아니다. 대상들은 목표들과 꼭 마찬가지로, 완전히 우연이었다. 원(原) 느낌, 가장 거친 느낌들도, 적에게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유혈의 위헙은 오로지 내면의, 그 자체 안에서 산산이 파열된 영혼의 발산이었다. 새로 태어날 수 있기 위하여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고, 죽으려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짓부수어져야 했다.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려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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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소중함을 알고 오늘, 지금, 여기의 나를 진하게 누리는 삶! 지혜로운 생활!

 

 

[본문발췌]

 

 

사는 건 경주를 벌이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내 인생을 사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한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는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봐야 알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할 일은 섣부른 판단이나 짐작은 미뤄두고 그때 자신과 충분히 마주하여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일인 것 같다. 선택했으면 열심히 해보는 일, 이 길이 아닌 것 같으면 다시 신중히 다른 것을 잡는 일, 그렇게 선택을 하며 사는 게 우리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 다녔고, 그만두었고, 이렇게 사는 지금, 나는 그냥 내 삶을 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사는 일에 성공이나 실패란 없다. 안 되는 일도 없다.

 

 

'나 때는 더했어'라는 말처럼 폭력적인 말이 없다. '다 그렇게 살아'라는 말처럼 바보 같은 말이 또 없다. - 말2

 

 

나는 곧잘 함정에 빠졌다. 아침에 한 시간 더 일찍 나와서 일해야지. 점심 간단하게 먹고 들어와 일해야지. 저녁 안 먹고 빨리 일해야지. 주말에 나와서 마저 일해야지. 일은 아침에 더 일찍 나와서 해도, 점심을 빵으로 때우고 해도, 저녁을 안 먹고 해도, 주말에 나와서 해도, 끝나지 않았다. 나를 약 올리듯 한 만큼 생겨났다. - 미스터리1

 

 

스스로 선택하여 부딪쳐보는 과정에서 무엇이라도 느끼고, 얻게 되어 있다. 높이 올라가거나 멀리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 깊어지거나 단단해진다고 믿는다. 넓어지거나 유연해질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한 뼘쯤은 성장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해보기도 전에 잘못될 걸 걱정하면 평생 무엇도 하지 못할걸. 지르면 어떻게든 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믿어봐도 좋고.

 

 

미래는 평생 오지 않는다. 언제나 오늘일 뿐이다. 돈 벌면, 나중에, 그때로 미뤄둔 일은 그러니까 평생 못 하는 것이다.

 

 

못하는 것을 평균까지 끌어올리기보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는 걸 택하겠다. 보기에 좋은 것 말고, 내 것을 하겠다.

 

 

대책을 세우는 것이면 모를까, 아직 오지 않은 상황에 대해 걱정만 해서는 달라질 게 없다. 말장난 같지만, 미래의 일을 지금 걱정해봤자인 것이다. 걱정이란 건 참 요망해서 하기 시작하면 꼬리를 물고 잔뜩 부풀어 오른다. 그런데 막상 들여다보면 속이 텅 빈 공갈빵처럼 실체가 없다. 걱정이 걱정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걱정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는 것이다. 겪어보면, 걱정했던 것보다 괜찮다.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다. 원하는 것을 위해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만 딱 그렇게 온다.

 

 

지속해오던 것을 그만둔다는 것은 쉼 없이 밀려들고 사라지는 날들 속에서 나를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 모른 척 어물쩍 넘어가거나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낸 사람이 그만둘 수 있다. 그만두는 것의 무게를 감당해보고 나면 선택 앞에서 한층 신중해지게 된다. 내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되어, 허투루 쓰고 싶지 않게 된다. 그렇게 그만둬본 사람이 비로소 진정으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날알 부여받는다.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는 나의 몫.

 

 

사는 것은 시합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제로섬 게임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서로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의 것을 하며, 저마다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자신이 하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낮추어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해나가나는 과정이니까 부족함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고유한 나의 것이 있고, 그것은 생각보다 꽤 괜찮으니, 조금은 더 자신감을 가지기를. 나부터 나를 믿고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기로 한다. 알고 보면 착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들여다보면 대단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나도, 당신도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대단해 보이기만 하는 사람도 겪어보면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 인생이나 작품의 하이라이트만 보는 것이니까. 몰라도 될 것을 너무 많이 접하고 산다. 이렇게라도 알 수 있어 고마운 정보도 있지만, 굳이 알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면서 괜히 속만 시끄러워지는 경우가 더 많다. 선별하여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을 가려내기 어렵다면 적게 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 많은 정보 속에서 허우적대느니 내게로 파고드는 것도 방법이다.

 

 

살아가면서, 나는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생각이 깊어지는 시기가 오기도 하고, 뭘 했다고 벌써 슬럼프인가 싶게 며칠이고 몇 주고 작업에 진척이 없어 답답해지는 날도 온다. 이럴 때 극복하려고 애를 쓰면 오히려 더 그 상황 속으로 빠져든다. 얼른 기운 차리라고 나를 채근할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차라리 탁, 놓아버리는 편이 낫다. 미루어둔 집안일을 하고, 보고 싶던 책이나 영화를 보고, 날씨가 좋으면 공원을 거닐고, 아니면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 못한 친구를 불러내어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나를 위해 근사한 한 끼를 차려 먹는 것도. 그러다 보면,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순간에 흘러와 있다. 한쪽으로 쏠렸던 마음이 균형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지럽던 감정과 생각이 정리되어 있기도 한다. 한 박자 지난 후에야 비로소 객관적인 상황이 보이고, 결국 별것 아니었다고 웃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아무튼, 거짓말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다.

 

 

하지 않은 것과 부족하더라도 한 것은 무와 유의 차이. 하고 나면 오해라도 할 게 생긴다. 온전히 담을 수는 없어도 무엇은 반드시 담기게 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가 100%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사랑을 나누는 이유일 것이다.

 

 

무엇을 하든 서두르지 않으려고 한다. 저마다의 효용을, 그것에 드는 시간과 품을 인정하려고 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하여, 하루라도 빨리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달리는 대신 몇 걸음 가지 않더라도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 집중하려고 한다. 내 호흡, 이 바람, 스쳐 지나가기 쉽지만 조금만 눈을 크게 뜨면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 멀리가는 것 대신 지금, 여기의 나를 진하게 누리려고 한다.

 

 

지금이 장차 무엇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이 완성이고, 전부이며, 내 인생인 것을.

 

 

나는 다시 배우고 있다. / 가는 시간 신경 쓰지 않고 지금에 녹아들어 사는 법을. /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쉬는 법을. / 좀 더디더라도 나를 기다리는 법을. / 나는 다시 깨닫고 있다. / 잘 자는 것과 잘 먹는 것처럼, / 좋아하는 사람과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 서툴고 부족할지라도 /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해나가는 오늘이 / 얼마나 행복한지를. / 그리고 이제야 안다. / 나는 굳이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 내 부족한 부분은 따뜻이 안아주고 / 사랑스러운 점은 힘껏 사랑하면서, / 그렇게 사는 것임을.

 

 

형편이 좋지 않아 진정 소망하던 건 잠시 유보하고, 취업준비를 할 수도 있다. 원하던 일은 아니지만,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긍지로 오늘을 견뎌낼 수도 있다. 몇 년 뒤 달라질 모습을 생각하며 지금의 힘듦을 버틸 수도 있고, 막상 일을 해보니 생각하던 것과 다른 데다 다른 무엇도 충족되지 않아 회사를 박차고 나올 수도 있다. 그렇게 해놓고서 홀로 서는 게 쉽지 않아 다시 채용 공고를 살필 수도 있다. 아니면 나처럼 당장 돈도 되지 않는 걸 하고 있거나 다른 이가 보기에는 '느슨하기만 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스스로 선택해서 꾸려나가는 삶이라면 이상할 것도, 안 될 것도, 잘못된 것도 없다. 자신의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잘 살고 있다. 오늘을 바꾸는 건 취업이나 퇴사, 이직이나 창업 같은 거창한 시도나 변화가 아니라 나와 내 삶에 대한 애정, 더 좋아지려는 마음가짐이다. 당장 처한 상황 전부를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반드시 있다. 어떤 식으로든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 계기는 스스로 만든다. 젊고 아름답고 건강한 날은 금방 가니까,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로 한다. 인생은 생각보다 기니까, 여유와 배짱을 좀 가지기로 한다. 사는 건 한번이니까, 내게 솔직해지기로 한다. 그렇게 살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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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속도와 양으로 텍스트를 쏟아내는 미디어 세상!

짧은 몇 단어, 몇 줄의 시[詩]에 호흡과 운율, 그리고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의미가 있다.

 

그 시가 노래가 되어 감동을 주기도 한다. 정호승 시인의 시를 안치환이 부르는 노래처럼.....

 

 

[본문발췌]

 

 

세월이 가면 ㆍ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혜화역 4번 출구 ㆍ 이상국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를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질투는 나의 힘 ㆍ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수선화에게 ㆍ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용기 ㆍ 요한 괴테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

맑은 물,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

이것만 있다면 낙심하지 마라.

 

 

 

도보순례 ㆍ 이문재

 

나 돌아갈 것이다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질 것이다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짐짓 무시할 것이다

 

나 돌아갈 것이다

무심했던 몸의 외곽으로 가

두 선 두 발에게

머리 조아릴 것이다

한없이 작아질 것이다

 

어둠을 어둡게 할 것이다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즉각 반응할 것이다

하나하나 맛을 구별하고

피부를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눈을 쉬게 할 것이다

 

이제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할 것이다

생활하기 위해 생존할 것이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 것이다

 

 

 

걸어보지 못한 길 ㆍ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 두 갈래길

나그네 한 몸으로

두 길 다 가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덤불 속 굽어든 길을

저 멀리 오래도록 바라보았네

 

그러다 다른 길을 택했네

두 길 모두 아름다웠지만

사람이 밟지 않은 길이 더 끌렸던 것일까

두 길 모두 사람의 흔적은

비슷해 보였지만

 

그래도 그날 아침에는 두 길 모두

아무도 밟지 않은 낙엽에 묻혀 있었네

나는 언젠가를 위해 하나의 길을 남겨 두기로 했어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법

되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

 

먼 훗날 나는 어디선가

한숨지으며 말하겠지

언젠가 숲에서 두 갈래 길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갔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게 달라졌다고

 

 

 

갈대 ㆍ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해답 ㆍ 거트루드 스타인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해답이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비망록 ㆍ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구부러진 길 ㆍ 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어쩌면 ㆍ 댄 조지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데려갈 거야

어쩌면 꽃들이 아름다움으로

너의 가슴을 채울지 몰라

어쩌면 희망이 너의 눈물을

영원히 닦아 없애 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묵이 너를 강하게 만들 거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ㆍ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 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먼 행성 ㆍ 오민석

 

벚꽃그늘 아래 누우니

꽃과 초저녁달과 먼 행성들이

참 다정히도 날 대려다본다

아무것도 없이 이 정거장에 내렸으나

그새 푸르도록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느냐

아픈 봄마저 거저 준 꽃들

연민을 가르쳐준 궁핍의 가시들

오지않음으로 기다림을 알게 해준 당신

봄이면 꽃이 피는 이유가 다 있을 것이다

잘린 체게바라의 손에서 지문을 채취하던

CIA 요원 홀리오 가르시아도

지금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그 거리에서 내가 던진 돌멩이는

지금쯤 어디로 날아가고 있을까

혁명의 연기가 벚꽃 자욱하게 지는 저녁에

나는 평안하다 미안하다

늦은 밤의 술 약속과

돌아와 써야할 편지들과

잊힌 무덤들 사이

아직 떠다니는 이쁜 물고기들

벚꽃 아래 누우니

꽃잎마다 그늘이고

그늘마다 상처다

다정한 세월이여

꽃 진 자리에 가서 벌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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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발전에서 고독은 고립을 의미하고 다른 분야, 학문간 통섭이 혁신의 촉매가 된다.

예술에서 고독은 창작의 시작이며 밑거름이다.  "아이는 홀로 있을 때 어른이 되기 시작하고, 개인은 홀로 있을 때 성장한다."

 

 

[본문발췌]

 

 

고독은 차가운 정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일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휴머니즘을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은 진정 어려운 일이다. 개인의 자주독립은 사회로부터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자기 자신이 싸워서 얻어내야만 한다. 그러려면 개인은 사회가 줄지도 모르는 명성이나 이익과 같은 유혹을 거부해야만 한다. 명리를 택하든 자유를 택하든 결정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개인은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역량을 갖추고 있다.

 

 

창작의 자유는 거저 얻어지지 않으며 돈으로 살수도 없습니다. 이 창작의 자유는 먼저 작가 자신이 그것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필요로 해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마음속의 자유는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지켜봅니다. 만약 이 자유를 다른 무언가와 바꾸려고 한다면 자유라는 새는 멀리 날아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를 팔려고 한 대가입니다. 작가가 다른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해서만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지만, 그 사회에 대해서는 도전이 됩니다. 물론 그것은 의도한 도전이 아니므로 작가 스스로 영웅이나 투사가 된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령 영웅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있다해도 그것은 어떤 위대한 과업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작품 외적으로 약간의 공훈이 더해졌을 때의 일입니다. 작가가 사회에 도전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언어를 통해서여야 합니다. 그조차도 작품 속 인물이나 배경을 빌려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큰 손실을 각오해야 합니다. 문학은 분노의 고함소리가 아니며, 개인적인 성토의 수단도 아닙니다. 작가는 다만 한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작품에 녹여내 문학으로 완성시킬 뿐입니다. 그런 작품만이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내고 길이 남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사회에 도전합니다. 세월의 흐름을 견디고 살아남은 작품은 그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유력한 답이 됩니다. 이로써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모든 소란은 사라지고, 작품 자체의 목소리만이 남아 독자의 가슴을 울립니다.

 

 

문학이 인간 삶의 증언이라는 견해는 대부분 반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또한 진실성이 증언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동의하시리라 믿고요. 진실 이외에는 그 무엇도 문학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문학이 자유정신의 터전이라면, 그 자리에서 작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명령 또한 진실추구입니다. 이익보다 중요한 가치를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며 글을 써 내려갈 때,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진실 그 자체입니다.

 

 

오늘날 전면화된 상품경제와 정보폭발 아래에서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날로 심각해지는 사유의 빈곤입니다. 20세기의 정치투쟁이 야기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대립은 사람들의 삶 구석구석에 파고들어 '좌 아니면 우'라는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고, 개인의 독립적인 사고는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작가 개인의 목소리가 정치적 획일화에 갇혀버리면 그 목소리는 반드시 무력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문학은 자유정신의 피난처이자 개인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방어선입니다. 작가에게 주어지는 천부적 선물이란, 동시대 사람들이 차마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상태가 되었을 때 하늘로부터 하사받는 언어입니다. 문학이 필요로 하는 언어는 제대로 표현된 적 없는 언어, 직접적으로 진실을 가리키는 언어입니다. 그 언어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움직이는 감수성이자 일체의 주의나 관념이 없는 무엇습니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어떤 정의나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어를 통한 표현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할 때입니다.

 

 

작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합니다. 냉정한 관찰로 감정이 발설을 제어하고, 시비, 선악, 도덕의 판단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작가는 다만 냉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면 됩니다. 세상은 본래 이러하다는 것, 그 누구의 의도로도 개조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보아야만 합니다. 작가는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외부세계를 관찰하는 동시에 자기 내면을 관조해야 합니다.

 

 

창작의 영역에 반드시 지켜야 할 법칙이란 없습니다. 정해진 법칙이 없다는 것만이 예술가에게는 불변의 진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가는 그 어떤 규범에도 휘둘리지 않고 홀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예술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사회적 제약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란 늘 얼마간의 구속을 받는일이지요. 그러나 예술가라면 자신의 창작세계에서만큼은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용기와 신념을 발휘해야 합니다. 정치나 윤리의 교조를 벗어던지고 유행과 습속의 구속도 떨쳐내야 합니다. 창작의 자유는 결국 예술가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예술가의 혁신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형식을 낳는 개념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형식 안에서 표현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후자는 이미 존재하는 형식 안에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발굴하는 방식이다. 오래된 형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에서 길어 올린 생명력은 무궁무진하다. 화가의 창조력만 있다면 회화라고 하는 이 오래된 예술에는 영원히 끝이 없을 것이다. 한때는 예술가에게 창작 충동이 되었던 현대성은 이제 공허한 원칙이 되어버렸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앞 세대를 부정하던 정신은 예술가의 창조성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끊임없이 유행만 교체시키는 상품기제로 바뀌었을 뿐이다.

 

 

심미는 영원히 개인적인 것이다. 예술가가 창작을 할 때도, 누군가가 작품을 감상할 때도, 저마다 조금씩 다른 심미 취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뿐만 아니라 심미 활동은 어디까지나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술은 역사와 다르다. 역사는 매번 다시 쓰이지만, 예술작품은 한번 완성되면 다시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나 예술작품과 역사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점과, 그 시대의 지배관념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예술가의 이론은 예술가 자신의 창작작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이다. 동조를 구하기보다 차이를 발견하는 데 예술가의 의의가 있다. 창조는 차이의 발견에서 오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보편적인 심미기준이나 가치관을 세우는 데 공을 들이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관념이나 미적 표준을 따르지도 않는다. 그런 것을 따르는 순간 창작의 자유는 잃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술가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기만의 고유한 심미평가 기준을 갖는다. 예술가의 심미도 변하기는 하지만, 그 뿌리가 굳건하기에 시류와 풍속에 함부로 휘둘리지 않는다. 예술가가 자신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한 미적 취향과 판단은 혼자만의 자의적 기준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문화적 연원을 지닌다. 바로 이런 공공성 덕분에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때의 교류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직관과 감수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시공간에 대한 사변이 예술표현의 주제가 되는 것은 현대예술의 운명이다.

 

 

선禪은 신학의 문제가 아니다. 선은 철학의 문제며 언어학의 문제다. 예술 속의 선은 현대예술에 와서야 생긴 것이 아니다. 선은 말로 할 수 없고, 말해버리면 사실이 아니다. 오직 직관과 깨달음에만 의지할 뿐이다. 그러나 현대예술은 언어에 의존하므로 선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허무를 장황하게 언급하는 현대예술의 언어는, 예술의 허무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예술의 허무란 일종의 정신이다. 예술가가 체험한 마음의 상태를 작품에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 속의 시공간은 바로 이런 정신과 하나로 맞물려 있다. 예술의 시공간은 물리학적 시공간과 일치하지 않으며, 물리학의 시공간과는 다른 형이상학적 시공 개념을 지니고 있다. 다시 회화로 돌아와보자. 선종 회화는 다양하지만 그 안에는 일정한 도상圖像이 있다. 공空은 도상 안에 있으면서도 도상 밖에 있다. 일종의 해탈이며 정신적 경지다. 사람은 일정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또한 그 제약을 뛰어넘어 자유롭고자 한다. 선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예술가에게 중요한 일깨움을 준다. 시간과 공간은 회화에 부여되는 일종의 한계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한계에서 벗어나 무소부재하는 선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이렇듯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조형예술이다. 

 

 

"죽어서 잊히기 전에, 너는 너의 생명을 네 손에 장악해야만 한다. 너의 인생을 남김없이 살아내는 것만이 죽어도 아쉽지 않을 유일한 방법" - <죽음에 대하여>

 

 

<고독의 필요성>, 2002년6월 8일 아일랜드 더블린 제 41회 국제평생공로아카데미 '세계정상회의' 황금공로상 수상 기념 연설

  • 고독은 사람이 갖는 느낌입니다. 나무 한 그루나 새 한마리가 외로워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나무와 새를 바라보는 사람이 부여한 감정이지요. 나무와 새 자신은 외로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무와 새가 있는 풍경이 고독을 간직한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 것이지요. 그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바깥의 풍경과 내면의 감정이 한자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관찰이 아닙니다. 그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고독감은 일종의 심미가 됩니다. 바깥 풍경을 관찰하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자아는 점차 자기 자신의 가치를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르시시즘에 뿌리를 두고 있을 이 고독감은 자기연민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오만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이 감정이 맹목적인 충동으로 흐르면, 그 사람은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을 잃고 자기 내면만을 고집스럽게 파고들게 되지요. 교만과 아집이라는 병통이 바로 이런 심리상태에서 빚어집니다. 고독감이 병통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차갑게 바라보는 자세기 필요합니다. 바깥의 풍경이든 내면의 심경이든 어느 하나라도 차갑게 관조할 수 있게 되면, 자아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제 3의 혜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지요. 지혜의 안목은 거리두기에서 옵니다. 사람과 사건은 한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 더 뚜렷하게 볼 수 있고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고독감은 일종의 심미적 판단일 뿐 아니라 자기 삶에 건설적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를 긍정하고 있다면, 그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습니다. 그 의미 있는 일이 꼭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는 일일 필요는 없지만요.

  • 아이는 고독감을 느끼며 어른이 되어갑니다. 개인은 고독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독감은 개인의 독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격의 확립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개인의 고독감이 사회의 조건을 형성하는 데 꽤 많이 기여하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꼭 필요한 거리가 없으면 온종일 충돌이 일어납니다. 가정과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관용과 양해가 필요한데, 관용과 양해는 각자의 마음속에 충분한 공간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독은 개인의 자유에 필요한 최우선 조건입니다. 자유는 자유로운 사고에서 비롯되는데,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사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 세상에는 옳고 그름, 찬성과 반대, 혁명과 반동, 진보와 보수, 정치적 올바름과 그릇됨이라는 이분법적 틀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때는 독립적인 사고의 여지를 남겨두고, 천천히 선택을 해도 됩니다. 특히 어떤 이념이나 사조, 유행, 열광이 밀려들 때는 고독만이 그 사람을 자유로울 수 있게 합니다. 미디어가 모든 시간을 장악해버린 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누군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면, 고독만이 그 사람을 지탱해줄 것입니다. 고독이 병통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고독은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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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커즈와일, 일론 머스크,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은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SF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HER>, <스타트렉>, <백투더 퓨처> 등에서 보던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이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다. '특이점'이 그 속도를 더 가속시킬 것이고, 기계 인간이 되기 위해 머나먼 안드로메다로 향하는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 '철이'가 실현될 날도 멀지 않았다.

 

 

[본문발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발명가가 자신의 지적 창조물이 성공하는 것을 볼 때 느끼는 전율보다 더 큰 전율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 니콜라 테슬라, 1896년, 교류 발명가

 

 

대부분의 발명이 실패하는 이유는 연구 개발 부서가 해결책을 만들어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시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발명은 파도타기와 비슷하다. 물결을 정확히 예측하고 잡아낼 수 있어야 한다.

 

 

세계는 원자가 아니라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 뮤리엘 러카이저.

 

 

사람들은 자기 비전의 한계를 세계의 한계로 생각한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특이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에 기술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라지고 그 영향이 매우 깊어서 인간의 생활이 되돌릴 수 없도록 변화되는 시기를 뜻한다.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이때, 비즈니스 모델부터 인간의 수명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위해 사용하는 온갖 개념들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죽음도 예외가 아니다. 특이점을 이해하게 되면 지나간 과거의 의미와 미래에 다가올 것들에 대한 시각이 바뀐다. 특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보편적 삶이나 개인의 개별적 삶에 대한 인생관이 본질적으로 바뀐다.

 

 

특이점은 생물학적 사고 및 존재와 기술이 융합해 이룬 절정으로서, 여전히 인간적이지만 생물학적 근원을 훌쩍 뛰어넘은 세계를 탄생시킬 것이다. 특이점 이후에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 또는 물리적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에 구분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에도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인간성이란 게 있을까? 물론이다. 늘 현재의 한계를 넘어 물질적, 정신적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인간의 고유의 속성은 여전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변화로 인해 인간성의 중요한 부분들을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문제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가올 기술의 모습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기계들은 인간의 섬세한 생물학적 성질들이 결여된 존재였다. 특이점의 여러가지 함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 가장 인간다운 특성이라고 여겨지는 정교함과 유연함에 있어 인간에 맞먹게 되고 나아가 뛰어넘으리라는 것이다.

 

 

진화는 더 복잡한 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답을 찾아낸다. ... 질서는 정보를 필요로고 한다. 질서란 목적에 부합하는 정보다. 질서의 크기는 정보가 목적에 부합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생물 진화의 목적이라면 살아남는 것이다. 제트 엔진 설계에 진화 알고리즘(문제 해결을 위해 진화를 시뮬레이션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적용한다면, 그때의 목적은 엔진의 성능, 효율 등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질서를 측정하는 것은 복잡성을 측정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 질서를 측정하려면 각 상황에 맞는 '성공'의 척도가 필요하다. 진화 알고리즘을 만드는 프로그래머는 이러한 성공 척도('효용 함수'utility function라 불리는)를 제공해야 한다.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계에 맞춘다. 비이성적인 사람은 세계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애쓴다. 그럼으로 모든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에게 달려 있다. - 조지 버나드 쇼, <혁명가를 위한 격언>, <인간과 초인> 중, 1903년

 

 

경제학 수업에서 가르치는 경제 모델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통화 정책을 수립할 때나 정부 기관들이 경제 정책을 수립할 때, 그리고 여러 경제 예측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경제 모델들은 거의 대부분 장기적인 추세를 평가하는 시각에 결함이 있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기하급수적 관점에 근거하지 않고 '직관적인 선형' 관점(변화의 속도가 현재 속도로 지속될 것이라고 가정하는)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선형 모델들이 얼마간 유효한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애초에 직관적 선형 관점을 채택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즉 기하급수적 추세는 짧은 기간 동안, 특히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초기에 관찰하고 경험할 때는 확실히 선형적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곡선의 무릎'에 다다라 기하급수적 성장이 폭발적으로 시작되면, 선형 모델은 무너진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미국에서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변경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2042년까지 내다보는 프로그램인데, 그것은 내가 특이점의 도래 시기로 추정한 때와 가깝다. 이 경제 정책 검토는 이례적으로 매우 긴 기간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경제 성장 및 수명 연장에 대한 선형 모델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비현실적인 예측이다. 우선, 수명 연장의 폭은 정부의 신중한 예측을 훨씬 앞지를 것이다. 둘때, 예순 다섯 살에도 서른 살 때와 같은 몸과 뇌를 유지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굳이 은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GNR' 기술이 도입될 경우 경제 성장은 정보 예측치인 연간 1.7퍼센트를(지난 15년간 실적의 반 정도로 낮게 보고 있는 것이다) 훨씬 능가할 것이다. 생산성의 기하급수적 증가세는 이제 막 폭발적인 단계를 시작하고 있다. 미국의 실질 국내총생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왔다. 기술에 의한 생산성 개선의 결과였다. 일부 비평가들 중에는 국내총생산의 기하급수적 성장 원인이 인구 증가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일인당으로 계산해보아도 동일한 추세를 볼 수 있다.

 

 

상식이란 단순한 게 아니다. 힘겹게 얻어낸 실용적 발상들이 방대하게 모여 이룬 것이다. 생활에서 배운 규칙과 예외, 기질과 경향, 균형과 제어가 무수하게 모여 형성한 무엇이다. - 마빈 민스키

 

 

인간 수준 지능의 가장 중요한 면모는 제대로 기능할 때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궁지에 몰렸을 때 어떤 일을 하느냐이다. - 마빈 민스키

 

 

21세기 전반부에 우리는 세 개의 혁명이 꼬리를 물고 중첩되어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유전학의 혁명, 나노기술의 혁명, 로봇공학의 혁명이다. 그로써 내가 제5기라 칭한 시대, 즉 특이점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처한 지점은 'G(Genetics, 유전학)' 혁명의 초기 단계다. 우리는 생명이 간직한 정보 처리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인체의 생물학을 재편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 질병을 근절하고, 인간의 잠재력을 극적으로 넓히고, 수명을 놀랍도록 연장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한스 모라벡의 지적에 따르면 우리가 아무리 DNA에 기반을 둔 생물학을 자유자재 활용하게 된다 해도 인간은 '2류 로봇'으로 남을 것이다. 일단 생물학의 작동 원리를 완벽히 이해한 뒤 손질을 가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더 이상 생물학의 도구만으로는 부족하리라는 뜻이다. 생물학의 한계는 넘게 해줄 것은 'N (Nanotechnology), 나노기술)' 혁명이다. 우리 몸과 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분자 수준으로 정교하게 재설계하고 재조랍하게 해줄 것이다. 가장 강력한 혁신은 다가올 ' R(Robotics, 로봇공학)' 혁명이다. 인간의 지능을 본받았지만 그보다 한층 강력하게 재설계될 인간 수준 로봇들이 등장할 것이다. R 혁명은 최고로 의미 있는 변화다. 지능이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지능은, 제대로 발달하기만 한다면, 자기 앞에 놓인 어떤 장애물이라도 쉽게 내다보고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것이다. 각 혁명은 직전 혁명으로 발생한 문제점들을 풀어주겠지만 또한 새로운 위험을 끌어들이기도 할 것이다. G 혁명은 질병과 노화라는 인류 고래의 문제를 풀겠지만 생물학 바이러스 무기라는 새로운 위협을 양산할 것이다. N 혁명이 충분히 발전하면 생물학적 사고에 대한 대비를 갖출 수 있겠지만, 이번엔 자기복제라는 나노봇으로 인한 위협을 겪을 것이다. 생물학이 야기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오는 것이다. 그런 사고에 대비하려면 R 혁명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발전할 경우, 그 때는 어찌할 것인가?

 

 

무언가를 한 가지 방식으로만 이해한다면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뭔가가 잘못될 경우 그 고정관념에만 사로잡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의 의미를 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다른 모든 사실들과 그 사실을 연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를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은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한 가지 사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줄 안다면 어떨까? 한 가지 접근법이 실패하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다. 물론 지나치게 마구잡이로 사건들 간 연결을 시도했다가는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하지만 표상들을 적절히 연결하게 되면 마음속에서 생각들이 제대로 구성되고, 다양한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고, 그러다보면 잘 들어맞는 것을 고를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생각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 마빈 민스키

 

 

미래에 대한 통념 중 제일 잘못된 것은 미래를 우리에게 벌어지는 어떤 일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하는 어떤 것인데 말이다. - 마이클 아니시모프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것만 창조할 수 있다.

 

 

어느 바람 부는 날, 두 수도승이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입씨름을 했다. 한 수도승이 말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지, 바람이 아니라네." 다른 수도승이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지, 깃발이 아니라네." 세 번째 수도승이 그 옆을 지나다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게 아니오, 깃발이 펄럭이는 게 아니오. 당신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오." - 선승들의 우화

 

 

물리학자들은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예측해내는 것이 물리학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끈 이론' 이나 'M 이론' 도 그럴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 하지만 그들은 왜 우주에 표준 우주 모형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하는지, 왜 40개 이상의 변수들이 현재와 같은 값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끈 이론이 예측하는 유일한 상태가 현재와 같은 혼란스런 세상이라고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가? 나는 사람들이 마치 눈가리개라도 한 듯, 우주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는 묻지 않고 최종적인 상태에 대해서만 집중하는 모습이 우습다. - 제임스 가드너

 

 

인간과 기술의 융합은 분명 급속한 변화를 가져올 사건이다. 하지만 놀라운 혜택들을 가능케 할 오르막이지, 니체의 심연에 빠지게 할 내리막은 아니다. 융합 후의 인간을 새로운 '종'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순수한 생물학적 개념인데, 정작 변화는 생물학 자체를 초월하는 것이다. 특이점이라는 변화는 기나긴 생물학적 진화 역사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아예 생물학적 진화를 통째로 딛고 올라서는 단계인 것이다.

 

 

꿈을 꾸는 동안에는 현실이다. 삶 또한 겨우 그런 것 아니려나? - 헤이블록 엘리스

 

 

존재론적 위험에 대해서는 시행착오적 접근법을 써선 안된다. 이른바 '예방 원칙' 접근법(어떤 행위의 결과를 완벽히 알 수는 없다 해도, 무척 심각한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과학자들의 분석이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행위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원칙)을 취해야 할 텐데, 문제는 예방 원칙을 해석하는 데도 여러 상충되는 의견이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기술에 따른 위험을 물리칠 수 있다는 확신을 최고로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새로운 존재론적 위험이 등장하기 전에 아예 기술 발전 자체를 막아버리자고 집요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 포기는 적절한 반응이 못 된다. 미래 기술의 편익을 놓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훨씬 끔찍한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막스 모어도 예방 원칙의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하고는 대신 '행동 장려 원칙'을 세우자고 주장한다. 행동할 때의 위험과 하지 않을 때의 위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자는 것이다. 

 

 

미래의 기술의 영향을 숙고하는 사람들은 종종 세 가지 생각의 단계를 겪는다. 첫째는 오래된 골칫거리들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데서 오는 경외와 놀라움, 둘째는 새로운 기술에 수반할 심각한 위험들에 대한 두려움, 마지막은 우리가 책임감 있게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위험을 적절히 관리하여 편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조심스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라는 깨달음이다.

 

 

마이클 덴턴을 인용하면, 유기체는 "자기 조직적이고 .... 자기 참조적이고.... 자기 복제적이고..... 상호 호혜적이고.... 자기 형성적이며...... 전체론적이다." 그러한 유기체는 오로지 생물학적 과정을 통해서만 탄생될 수 있으며, 그런 유기체만이 "변환 불가능하고... 침투 불가능하고.... 근본적인 존재의 실체이다." 실로 생물학적 설계에는 심오한 원칙들을 활용할 수 있으며, 활용하고 있다. 비생물학적 체계가 생물계의 특성인 패턴 창발성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인간 지능에 대한 완벽한 모델이 구축되면 기계는 양쪽 세계의 장점들을 취한다. 유연하고 미묘한 인간적 패턴 인식 능력에다가 기계 본연의 장점, 즉 빠른 속도, 엄청난 기억 용량, 무엇보다도 지식과 기술을 쉽게 공유하는 능력까지 갖출 것이다.

 

 

뇌를 역분석함으로써 우리는 병렬적, 자기조직적, 카오스적 인간 지능 알고리즘을 강력한 연산 기관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옮겨진 지능은 자신의 설계를 개선해갈 것이다.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반복적 개량 과정을 통해 급속히 성장할 것이다.

 

 

과학 덕분에 인간이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자만을 고쳐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과학 혁명들이 유일하게 공통적으로 지녔던 특성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기존의 신념을 차례차례 부숨으로써 인간의 교만에 사망선고를 내렸다는 점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말은 옳은 것 같다. 인간은 머릿속에서 모델 즉 가상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평범한 듯 보이지만 대단한 엄지손가락을 지녔고, 덕분에 기술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진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그로써 생물학적 진화로부터 시작된 가속적 발전은 끊이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발전은 온 우주가 우리 인간의 손가락 끝에 놓일 때까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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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의 작동원리는 작고 단순하지만 뉴런의 집적도와 복잡한 연결성이 우리 생각의 한계를 예측할 수 없게 한다.

 

 

[본문발췌]

 

 

포유류의 뇌, 특히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집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계층적' 사고를 할 수 있고, 다양한 요소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만들어내는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배열을 기호로 재현할 수 있고, 그렇게 만든 기호를 훨씬 복잡한 배열 속에 하나의 요소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신피질'이라고 하는 뇌구조가 수행한다. 인간의 신피질은 발전을 거듭한 결과, '생각' - 다시 말해,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능력 - 을 할 수 있는 '진화의 문턱'을 넘어섰다. 이 문턱을 넘어선 순간 호모사피엔스는 끝없는 순환프로세스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훨씬 복잡한 생각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순환적으로 연결된 생각이 집적된 거대한 배열을 우리는 '지식'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쌓아온 지식기반은 다시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이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지식은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뇌는 추상성의 또 다른 수준을 넘어섰다. 뇌의 지능은 우리 눈앞에서 조작할 수 있는 부속물 - 엄지손가락 - 을 사용하여 환경을 조작함으로써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로써 신경학은 '기술'을 낳았다. 우리가 만들어낸 도구는 진화가 새로운 방식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인간의 지식기반이 지금까지 무한하게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도구(기술) 때문이다. 인간이 처음 발명해낸 도구는 '말'이다. 말이란 '구별되는 발화'로서 생각을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다. 뒤 이어 발명해낸 '글'은 '구별되는 기호'로 생각을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다. 글을 모아놓은 도서관은, 순환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생각의 지식기반을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도서관은 우리 뇌의 능력을 크게 확장시켜준다.

 

 

지적인 바보는 어떤 것이든 더 크고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작고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 아인슈타인

 

 

[패턴인식 마음 이론]

  • 신피질의 계층구조 : 신피질은 약 50만 개의 피질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질 기둥에는 대략 600개의 패턴인식기가 담겨 있고, 패턴인식기에는 각각 100여 개의 뉴런이 담겨있다. 신피질 전체를 따졌을 때 패턴인식기는 총 3억 개, 뉴런은 총 300억 개 존재한다. 신피질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패턴인식기다. 말 그대로 정보를 패턴으로 인식한다. 논리적 사고에 최적화된 구조가 아니다. 인간은 왜곡되거나 변형된 패턴을 인식하는 데에는 컴퓨터를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뛰어나지만 논리적 사고를 수행하는 데에는 매우 미숙하다.

  • 패턴인식기의 구조

    • 패턴인식기는 뉴런 100개 정도가 집적되어 있는 신피질의 기본적인 정보처리모듈이다. 기본적인 정보처리과정은 뉴런과 동일하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입력부(수상돌기)는 하위레벨에 위치하는 패턴인식기의 축삭(출력부)에 연결된다. 하위레벨의 패턴인식기 밑에는 또다시 무수한 하위레벨의 패턴인식기가 존재한다. 이처럼 모든 패턴인식기는 다른 패턴인식기와 계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입력신호들의 세기가 일정한 수준(인식의 문턱)을 넘으면 축삭이 활성화된다. 즉 개개의 모듈이 담당한 패턴을 인식했다고 외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입력이 유효할 필요는 없다. 모듈은 자신이 담당하는 패턴이 인식될 가능성을 '가중치'와 '크기' 파라미터를 고려하여 계산하기 때문이다.

    • 수상돌기는 기본적으로 모듈 안으로 신호를 받아들이는 기능을 하지만 때로는 신호를 모듈 밖으로도 내보내기도 한다. 수상돌기를 통해 들어온 하위레벨 패턴들이 일정 비율 이상 확인되면, 이 패턴 인식기는 거꾸로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하위레벨 패턴을 처리하는 패턴인식기에 신호를 내려 보내, 그 패턴이 곧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면 신호를 받은 하위레벨의 패턴인식기는 인식의 문턱을 나춘다. 이로써 입력 중 일부가 빠지거나 불분명해도 축삭이 활성화될 (패턴을 인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하위레벨의 패턴인식기에서 올라오는 신호는 패턴을 인식할 가능성을 낮추기도 한다 (억제신호). 이 패턴인식기가 담당하는 패턴과 일치하지 않는 하위레벨 패턴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예컨대, 콧수염을 인식했다면, 그 사람이 '아내'일 가능성은 낮아진다.) 축삭은 상위레벨에 위치한 여러 패턴인식기의 수상돌기로 연결된다. 이로써 출력은 다시 입력이 되어 올라간다. 이 신호는 파라미터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개념적인 계층구조에서 상위레벨에 있는 패턴인식기들이 이 정보를 인식을 결정하는 요소로 고려한다. 상위레벨 패턴인식기에서 내려오는 신호 역시 패턴을 인식할 가능성을 낮추기도 한다(억제신호). 이 패틴인식기가 담당하는 패턴과 일치하지 않는 상위레벨 패턴(맥락)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 모든 입력에는 가중치, 예상되는 크기, 예상크기의 가변성이라는 파라미터가 저장되어있다. 패턴인식모듈은 이러한 파라미터와 더불어 입력되는 신호의 세기를 고려하여 패턴이 나타날 전체적인 가능성을 계산한다. 패턴인식의 가능성을 수학적으로 가장 적절하게 계산해내는 방법은 HMM(은닉마르코프모형)이라는 기법이다. 이러한 모형을 (신피질이든 신피질을 모방한 인공지능이든) 계층구조에 맞게 조직한 HHMM(계층적 은닉마르코프모형)이라고 한다.

  • 패턴의 특성

    •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정보는 최소 2차원 이상의 데이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각정보들은 신피질의 패턴인식기로 입력되는 과정에서 1차원 데이터로 변환된다. 우리 뇌에 입력된 데이터는 이로써 여러 계층에 걸친 패턴의 나열로 저장된다. 어떤 패턴이든 '리스트' 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면 그것을 촉발한 또다른 패턴이 활성화되었다는 뜻이다. 패턴인식기의 계층은 물리적인 계층이 아니라 개념적인 계층이다. 맨 아래에는 감각데이터를 처리하는 패턴인식기들이 있고 맨 위에는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패턴을 처리하는 패턴인식기들이 있다. 이것은 언어의 계층적 구조와 같다. 물론 생각이 곧 언어는 아니지만, 언어와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우리 생각이 본래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만, 언어 역시 신피질에서 패턴의 계층구조로 존재하기 때문에 언어에 기반하여 생각을 하는 것이 대개의 경우 자연스럽다.

    • 패턴의 계층적 리스트는 또다른 리스트 속에 하나의 항목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데, 이것을 '순환'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러한 순환과정을 무한하게 반복할 수 있다. 인간만이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신피질에 활성화된 패턴을 모조리 탐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 활성화된 패턴의 위아래 레벨에 있는 패턴을 모두 파악하지 못하면 - 다시말해, 전체 계층구조에 접근하지 못하면 - 활성화된 패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신피질을 속속들이 꿰고 있어야 한다. 하물며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물론 다른 사람의 신피질에 접근할 수 있는 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나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사람들의 의사소통능력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서로 오해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신피질의 놀라운 패턴인식능력.

    • 인간은 왜곡되어 있는 패턴도 쉽게 인식할 수 있는데, 이는 아직 컴퓨터가 따라잡지 못하는 인간의 능력 중 하나다. 이처럼 뛰어난 패턴인식이 가능한 것은 자동연상과 불변이성이라는 기능이 패턴인식과정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 자동연상. 패턴의 일부만 보고도 패턴 전체를 떠올리는 능력으로, 이는 패턴인식과정에서 '가중치'가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불변이성. 패턴에 변이가 발생한 경우에도 그것을 일관되게 인식해내는 능력으로, 이는 다음 네 가지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로 여겨진다.

      • 데이터변형. 감각데이터는 신피질에 입력되는 과정에서 포괄적으로 변형된다.

      • 리던던시(Redundancy). 수많은 변이를 이미 저장하고 있다.

      • 다른 리스트의 응용. 이미 학습한 리스트를 새로운 정보를 해석하는 데 적용한다.

      • 크기 파라미터 활용. 패턴의 가변성을 패턴 자체에 표시한다.

  • 신피질 기능의 열쇠 : 학습, 학습은 곧 세상을 인식하는 작업이며, 인식한 패턴을 기억으로 저장하는 작업이다. 학습 없이는 신피질은 아무런 기능도 발휘하지 못한다. 인간의 경우, 수정 후 한 달쯤 지나면 파충류의 뇌가 완성되고, 26주가 되었을 때 신피질이 완성된다. 태어나기 전부터 본격적인 학습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억은 새롭게 입력되는 자극을 해석하는 이데아 역할을 한다. 실제 개를 볼 때 이전에 개를 인식하여 학습한 기억은 그것이 개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결국 모든 학습은 - 기억은 - 더 정확한 인식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 생각의 방향성

    • 생각의 작동방식 측면에서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방향성 없는 생각으로, 논리와 무관한 생각을 촉발하는 것이다. 낙엽을 쓸거나 거리를 걷다가 몇 년 전 기억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라고 해도, 그것은 아무 관련성 없이 떠오른 것이 아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모든 패턴은 언제나 순서대로 촉박되며, 기억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쳐 떠오른다. 따라서 과거의 어떤 장면이 눈앞에 갑자기 떠올랐다고 해도, 그 기억을 떠올리기 전부터 그 기억을 암시하는 어떤 '힌트'로부터 출발하여 그 장면이 떠오를 때까지 우리 마음속에는 무수한 패턴의 촉발이 일어난 것이다. 기억을 촉발한 계기가 명확하게 인지될 수도 있지만 어렴풋할 수도 있고, 전혀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인지한다고 해도 연관성이 떨어지는 비선형적인 연상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장면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연상되는 여러 기억을 종합하여 좀더 생생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뇌는 그림이나 소리를 그대로 저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 두 번째는 방향성 있는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체계적인 반응을 형성하고자 할 때 우리가 의도적으로 촉발하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예행연습을 할 수 있으며, (진짜 종이 위에 글을 쓰든, 마음 속 공간에 글을 쓰든) 어떤 문장을 쓸 것인지 마음속으로 구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을 곰곰이 분석해보면, 우리가 원래부터 그러한 과업을 계층적인 구조로 쪼개어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책을 쓰는 것은 장을 쓰느 것으로 이루어지고, 장은 단락으로 이루어지고, 단락은 문단으로 이루어지고, 문단은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문장은 아이디어로 이루어진다. 아이디어는 여러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며, 요소와 요소들의 관계가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아이디어는 성립한다. 동시에 신피질은 그러한 과업을 수행하면서 따라야 하는 규칙을 학습한다. 글쓰기 과업의 경우, 불필요한 내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써야 한다. 문법과 문체에 관한 규칙도 따라야 한다. 또한 글을 쓸 때 마음속에 가상의 독자를 세워놓아야 하는데, 그러한 심상 또한 계층구조로 이루어진다.

    • 방향성 있는 생각을 할 때는 신피질 안에 존재하는 리스트를 하나씩 거쳐야 하는데, 그 리스트에는 제각각 고려사항마다 하위리스트가 달려 있어 복잡한 계층구조로 확장된다. 더욱이 신피질 패턴에 있는 리스트에는 조건문이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다음에 나타날 생각과 행동은 처리과정에서 형성되는 평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더 나아가, 방향성 있는 생각은 제각각 방향성 없는 생각의 계층구조를 촉발한다. 감각경험은 물론 방향성 있는 생각을 하는 중에도 우리를 깊은 생각 속으로 빨아들이는 강렬한 폭풍이 끝없이 휘몰아친다. 우리의 정신적 경험은 실제로 매우 복잡하고 산만하다. 1초 사이에도 수백 번씩 무수한 패턴들이 번쩍이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신피질의 정보처리방식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뇌의 가소성이다. 가소성plasticity은 학습을 통해 뇌의 연결망이 달라지거나 어느 한 영역의 역할을 다른 영역이 대신할 수 있는 특성으로, 이는 신피질 전체의 공통된 알고리즘이 작동한다는 뜻이다.

 

 

공포는 미신의 주요원인이자, 잔인함의 주요원인이다. 공포를 정복하는 데에서 지혜는 시작된다. - 버트란드 러셀

 

 

문제는 어떻게 새롭고 혁신적인 생각을 떠올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낡은 생각을 떨쳐내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머릿속은 낡은 가구로 가득 찬 건물과도 같다. 머리 한 구석을 비우는 순간 창조성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 디 호크

 

 

창조성의 핵심요소는 위대한 은유, 즉 다른 것을 재현하는 상징을 찾는 과정이다.

 

 

공포는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사랑은 위험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개인적 행동에서조차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믿으며, 매 순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후천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전혀 자유롭지 않으며, 필연성에 종속되어있으며, 어떠한 결심과 성찰에도 행동이 바뀌지 않으며,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이 저주하는 바로 그 인성을 지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괴로워한다. ... 우리는 앞으로 할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어느 시점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체적인 단 하나뿐이다. 그 하나를 뺀 나머지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 쇼펜하우어

 

 

진화과정에서 뇌가 발생한 1차적인 이유는 미래를 예측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우리 선조 중 한 명이 수천년 전 사바나를 걸어가다 어떤 동물이 다가오는 모습을 봤다고 하자. 자신이 가던 데로 계속 간다면 그 동물과 마주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러한 예측에 따라 방향을 바꿨고, 그러한 선견지명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처럼 미래를 예측하는 우리의 능력은 신피질의 선형적 구상에서 나오는 자질이다.

 

 

발명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갖춰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감각은 타이밍이다. 수많은 발명과 발명가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대개 발명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타이밍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발명품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기도 전에 먼저 만들어내거나, 기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놓치고 너무 늦게 만들어내 실패하는 것이다.

 

 

한 철학자가 꿈을 꾸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나타났다.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말했다. “당신의 철학을 15분 안에 모두 요약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정말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엄청난 양의 철학을 단 15분으로 압축해서 훌륭하게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 철학자가 어떤 반박하는 말을 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다 사라져버렸다. 그 다음 플라톤이 나타났다.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졌고,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했던 말을 플라톤에게도 똑같이 했다. 플라톤 역시 대답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렇게 역사상 유명한 철학자들이 하나씩 나타났지만, 우리의 철학자는 단 한 마디 말로 그들을 모두 물리쳐버렸다. 마지막 철학자가 사라지고난 뒤 우리의 철학자는 혼잣말을 했다. “나는 지금 잠을 자고 있으며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나는 지금 어떠한 철학체계도 대답하지 못하는 보편적인 반박을 찾아냈어!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잊어버릴지도 몰라. 이 대단한 발견을 놓친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야!” 불굴의 의지로 이 철학자는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가서 자신이 발견한 보편적인 반박을 종이에 썼다. 그러고는 안도의 숨을 쉬며 다시 이불 속으로 뛰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책상으로 가서 자신이 무엇을 써놓았는지 보았다. “그건 ‘네’ 생각일 뿐이고.” –레이먼드 스멀리언Raymond Smullyan, 데이비드 차머스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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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고자 하면 먼저 비워야 한다. 집착,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 삶의 짐을 내려놓는 것! 앎을 버림으로써만 깨닫게 되는 것!

 

 

[본문발췌]

 

 

사미를 괴롭혔던 것은 여인이라는 물체가 아니라, 여인에 대한 사미의 의식이었고, 그 의식의 집중을 일으킨 집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려놓아도 될,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짐이었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걸어가면 될 텐데 계속 짐을 지고 가는 것이지요.

 

 

삼(사)법인

    • 제행무상(諸行無常 · Anicca), 움직이는 모든 현상은 향상됨이 없다. 인과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

    • 일체개고(一切皆苦 · Dukkha), 모든 것이 고苦다!

    • 제법무아(諸法無我 · Anatta), 모든 다르마는 아我가 없다. 주체가 없다! 자기동일성의 지속이 없다!

    • 열반적정(涅槃寂靜), 번뇌의 불길을 끄자! 그러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삼학, 가장 기본적인 불교 교리이며, 일체의 법문(法門)은 모두 삼학으로 귀결된다. 삼학은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의 세 가지이며, 증상계학(增上戒學)·증상심학(增上心學)·증상혜학(增上慧學)이라고도 한다.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정사유(正思惟) · 정사(正思): 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정정진(正精進) · 정근(正勤): 바르게 정진하기, 정념(正念): 바르게 깨어 있기, 정정(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정견은 나머지 일곱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리고 팔정도는 여덟 가지 항목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성도를 이루는 각 부분이며, 여덟 가지는 일체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별개의 것이 아니다. 또한 팔정도를 계(戒)·정(定)·혜(慧) 삼학과 관계지어 보면 정견과 정사유는 혜이며, 정어·정업·정명은 계이며, 정정진은 삼학에 공통되고, 정념·정정은 정과 관계지을 수 있다.

 

 

인생은 고통스럽고, 그 고통에는 집적된 원인이 있고, 그 집착을 없애면 열반적정에 든다. 그런데 그 멸집에 8가지 방법이 있다. 그 8가지 방법을 요약하면, 계, 정, 혜 삼학이다!

 

 

"바라밀다"("건너간다"라는 뜻이 있다)를 전제로 해서 말한다면 차안(此岸(이쪽 강둑)에서 피안彼岸(저쪽 강둑)으로 가는 배가 큰 것은 대승이고 작은 것은 소승일 텐데, 건너간다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큰 수레나 작은 수레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버스와 자가용을 생각한다면 버스는 아무나 탈 수 있지만 자가용은 그 주인과 아는 사람만이 탈 수 있습니다. 버스는 개방적인 데 반해 자가용 세단은 폐쇄적이죠. 버스는 대중이 "더불어" 갈 수 있는 수단이고 자가용은 "선택된" 소수만이 갈수 있는 수단입니다.

 

 

수행자들의 성격에 따라 그들이 타는 수레와 관련하여 쓰는 삼승(三乘)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3종류의 수레라는 뜻이지요.

    • 그 첫째가 성문승, 그 둘째가 독각승(혹은 연각승), 그 세째가 보살승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3승은 실제로 기나긴 초기불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문승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싯달타가 말하는 소리(聲)를 실제로 들은(聞) 사라믈이니까 가섭, 수보리, 가전연, 목건련 같은 불제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싯달타의 자가용에 자연스럽게 올라탈 수 있는 선택된 소수들이겠지요. 그 다음에 독각승이라는 것은 홀로(獨) 깨닫는(覺) 사람, 즉 선생이 없이 홀로 토굴에서 수행하여 깨닫는 사람들, 12인연因緣을 관觀하여 깨닫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연각승이라고도 합니다. 분명 이 독각, 연각이야말로 성문 다음 단계에 오는 수행자들이었겠죠.

    • 그 다음이 보살이라는 개념인데 보살이라는 것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입니다. "보리"는 지혜, 깨달음의 뜻이 있죠. "살타" 즉 "사트바"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외연이 넓은 말입니다. "본질", "실체", "마음", "결의", "태아", "용기". 그리고 "유정"(정감이 있는 존재라는 뜻)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보리살타라는 것은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 "그 본질이 깨달음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부류의 사람 중에서 성문과 독각은 물론 작은 수레의 인간들이겠죠. 그렇다면 셋째 번의 보살이야말로, 보살이 타는 보살승이야말로 큰 수레가 될 것입니다.

 

싯달타의 "4문출유四門出遊"라 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의 고뇌의 테마는 노老(늙음), 병病(병듦), 사死(죽음)의 3자입니다. 노, 병, 사가 고苦로서 자각되었다는 것은 인간 모두가 평소에 젊음에 대한 오만과 건강에 대한 오만과 살아있음에 대한 오만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죠. 젊음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인간의 늙어감에 대한 비통이 생겨나고, 건강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병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게 되고, 삶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나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노, 병, 사를 고苦로서 자각할 수 있었던 아주 예민한 감성의 젊은이가 싯달타였기에 그의 고뇌는 모든 인간에게 공감이 되는 보편성이 있는 것입니다. 노, 병, 사를 자각할 때,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의 파며를 의미하는 것이죠. 이 자기파멸의 과정을 어떻게 자기완성의 길로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고뇌 속에서 무명無明(인간의 본질적 무지)을 발견하고, 사성제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금강경"은 실제로 "벼락경" "벽력경"으로 번역되어야 했습니다. 벽력처럼 내려치는 지혜!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는 멸집의 지혜입니다.

 

 

"앎도 없고 얻음도 없다!" 여기 "지智"는 반야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냥 "안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도 뭘 모르는 자들이 그렇게 "안다고" 떠들어대는 데 있습니다. 반야는 앎을 버림으로써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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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공감, 사랑, 그리고 현재를 즐기는 것!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이다.

 

 

[본문발췌]

 

 

삶에서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매일매일이 단조로워 주위 세계가 무채색으로 보일 때,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아 심장이 무너질 때, 혹은 정신이 고갈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렸을 때, 그때가 바로 자신의 퀘렌시아를 찾아야 할 때이다. 그곳에서 누구로부터도, 어떤 계산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 자유 영혼의 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자아를 회복하는 길이다. 나의 퀘렌시아는 어디인가? 가장 나 자신답고 온전히 나 자신일 수 있는 곳은?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나의 퀘렌시아를 갖는 일이 곧 나를 지키고 삶을 사랑하는 길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것보다 더 높은 성품은 없다고 붓다는 말했다. 영성은 내가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일이며, 나 자신 못지않게 다른 존재들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일이다. 타인에게 문제가 있으면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세상이 아프면 나도 아플 수밖에 없다.

 

 

갈등의 10퍼센트는 의견 차이에서 오며, 나머지 90퍼센트는 적절치 못한 목소리와 억양에서 온다는 심리학의 통계가 있다. 목소리의 크기가 옳음의 척도는 아니다. 소리를 지르는 관계는 가슴이 멀어진 관계이다. 그래서 자기 말이 들리게 하려고 더 크게 소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슴은 더욱 멀어진다. 소리친 다음의 침묵은 가슴이 죽어버렸음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는 행동이나 말이 그 사람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은 그 느낌을 간직하고 떠나게 된다.

 

 

동일한 무게의 배낭을 지고 동일한 길을 걸었으나 두 사람이 느끼는 짐의 무게와 고난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목표 지점과 원하는 결과를 향해 가느라 삶이 그 여정에서 선물하는 것들을 지나치기 일쑤이다. 삶은 그 여정들로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말이다. 한 사람은 도중의 난관들을 피해 서둘러 목저지에 도착하느라 마음이 급하지만, 또 한 사람은 과정에서 발견하는 신비와 뜻밖의 경험들에서 순수한 기쁨을 얻는다. 그에게 삶은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며, 목적지는 오히려 그 과정들을 경험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설정한 지점에 불과하다. 목적지에 이르면 또 다른 목적지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과정과 순간순간이 목적지'라는 말은 트레킹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진리이다. 사실 전 세계의 산과 정글 속에서 행해지는 트레킹의 진정한 의미는 목표 지점에 서둘러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정의 매 순간을 즐기고 감동했는가'에 있다. 그 즐거움과 감동이 고난을 불사른다. 순간순간을 즐기면 발거음도 가볍고 자연스럽게 목적지로 나아간다. 그 기쁨이 신비하게도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때 나아가는 길이 더 명확해진다. 모든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여행의 내용이다. 어느 지점에 도달 했는가보다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가, 얼마나 많이 그 순간에 존재했는가가 여행의 질을 결정한다. 우리는 여행자이면서 동시에 여행 그 자체이다. ...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있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 ... 삶의 향기는 언제 목적지에 도착하는가의 여부와 관게없이, 우리가 걸어가는 길 중간중간에 피어 있는 들꽃 같은 얼굴들과 매 순간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담벼락에 핀 꽃을 보는 마음의 여유와 관심, 그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쉬어 감이 그 여정을 풍요롭게 만든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다. 공간의 이동만이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로의 이동,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도 길이다.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라고 하는데 '떠도는 사람', '길 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방황하며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찾는 존재를 가리킨다. 호모 비아토르는 길 위에 있을 때 아름답다. 꿈을 포기하고 한곳에 안주하는 사람은 비루하다. 집을 떠나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진 사람만이 성장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인생에서 많은 것을 놓쳤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놓친 것은 '지금 이 순간들'이다. 삶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언제든 줄 준비가 되어 있다.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지치만 매 순간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계산과 두려움 때문에 뒤로 미룬 모든 날들이 우리가 놓친 길일들이다.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지금이다. 행동하는 날, 그날이 바로 길일이다.

 

 

여행이 내게 준 선물은 삶과 세상에 대한 예찬, 그것이다. 광부는 수많은 돌들에 불평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광부의 눈은 보석을 발견할 뿐이다. 예찬하는 마음 역시 모든 돌들을 보석으로 만든다. 부자는 누구인가? 많이 감동하는 사람이다.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

 

 

<지상의 양식>에서 앙드레 지드는 말한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한 송이 꽃의 기적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바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혼자 걷는 길은 없다. 당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여행을 하든 과거에 그 길을 걸었던 모든 사람, 현재 걷고 있는 모든 사람이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당신과 함께한다. 당신은 그 모두와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같은 파동끼리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주 안에서는 어떤 에너지도 사라짐 없이 보존된다. ... 자신이 분리된 존재라고 믿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의 고정된 생각과 관념, 제한적인 지각 작용이 만들어 내는 환상일 뿐이다. 그것이 존재 대한 가장 큰 오해이다. 우리가 우리의 큰 의식과 접촉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개인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그때 우리는 시공간을 넘어 동일한 파동을 지닌 존재들과 연결된다.

 

 

때로는 우회로가 지름길이다. 삶이 우리를 우회로로 데려가고, 그 우회로가 뜻밖의 선물과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안겨 준다. 먼길을 돌아 '곧바로' 목적지로 가는 것, 그것이 여행의 신비이고 삶의 이야기이다. 방황하지 않고 직선으로 가는 길은 과정의 즐거움과 이야기를 놓친다. 많은 길을 돌고 때로는 불필요하게 우회하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헤매는 것 같아 보여도 목적지에 도달해서 보면 그 길이 지름길이자 유일한 길이다. 길들이 자세히 표시된 지도를 가끔은 접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길을 잘못 접어들어 들르게 된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줄 수도 있는 것처럼. 신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기 위해 때로는 길을 잃게 한다.

 

 

여행은 얼마나 '좋은 곳'을 갔는가가 아니라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고 얼마나 자주 그 장소에 가슴을 갖다 대었는가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하며, 그것에는 시간이 걸린다. 세상의 모든 장소들은 사리와 숄로 얼굴을 가린 여인과 같다. 낯선 자가 다가오면 더 가릴 것이다. 그리고 그 색색의 천 뒤에서 검은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세상에는 시간을 쏟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가고, 또 가고, 또다시 가라. 그러면 장소가 비로소 속살을 보여 줄 것이다. 짐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일정은 계획한 것보다 더 오래 잡으라. 인생은 관광tour이 아니라 여행travel이다. 그리고 여행은 고난travail과 어원이 같다. 장소뿐만 아니라 삶도 쉽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면 삶 역시 우리에게 사랑을 돌려준다. 사랑하면 비로소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공감은 '나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관심을 갖겠다는 선택'이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에서 나 자신이 해방되는 일이다. - 칼루 린포체

 

 

수 세기에 걸쳐 인간은 다른 사람의 삶을 추종하고 모방해 왔다. 종교와 수행도 그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혹시 누군가가 도중에 '기쁨'을 '심각함'으로 잘못 베끼고, '웃음'을 '근엄함'으로 틀리게 적고, '즐거움'을 '죄'로 혼동하지는 않았을까? '예찬'을 '무덤덤함'으로, '행복'을 '소유'로 옮겨 적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 역시 잘못된 필사본을 후대에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경전과 철학서들은 여행 서적과 같다. 세상에는 떠나지 않고도 장소에 대한 매력을 갖게 하는 책들이 많다. 그러나 정말로 떠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여행서들이 가진 오류를 누가 발견할 것인가? 즐겁고,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교리들은 잘못 베낀 것일 가능성이 높다. 모든 정의와 도그마를 넘어 두려움 없이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면 언제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경전이다. 인생은 필사본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써 나가는 책이다. 우리는 예술가이며 예술 그 자체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면 삶이 그만큼 더 소중해진다. 자신이 간발의 차이로 살아남은 행운아임을 안다면 무의미한 고민이나 일들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주어진 날들이 선물처럼 다가온다. 더 절실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 가장 아까운 것이 '매 순간을 살지 않은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시작해야 하는 가장 창조적인 행위는 삶의 매 순간을 붙잡는 일이다.

 

대재앙이 일어나리라는 걸 알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가를 묻는 프랑스 일간지의 질문에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 삶이 갑자기 멋있어 보인다. 삶이 얼마나 많은 계획, 여행, 사랑, 배워야 할 것들을 숨겨 놓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의 게으름으로 인해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 끊임없이 미루고 있는 그것들을. 하지만 그것들이 영원히 불가능해질 위기에 처하면 그것들은 다시 아름더워진다. 아, 대재앙이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면 많은 것을 하리라! 새로운 화랑들을 구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던지고, 인도로 여행 갈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 하지만 대재앙은 일어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 일들 중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으름이 절실함을 무력화시키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늘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대재앙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죽음이 오늘 밤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영적인 깨어남이란 새로운 각도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삶을 원하고 새로운 장소를 갈구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새로운 눈이다. 관념은 우리를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많은 것을, 무엇보다 경이로움을 빼앗는다. 눈앞의 사람과 사물을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게 도고, 놀라워하지 않고 감동하지 않게 된다. 합리적인 머리만 작동할 뿐 직관적인 가슴이 기능을 멈춘다. 어느 순간 세상이 빛을 잃었다면 시인의 눈으로 바라볼 일이다. 인생의 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얼마나 많이 느끼고 감동하며 살았는가'이다. 시인은 평범한 자두 열매에도 감동할 줄 알는 사람이라고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말했다. 풀벌레 하나, 꽃 한 송이, 저녁노을, 사소한 기쁨과 성취에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이다. 감동을 느낄 때 우리는 정화되고, 행복해지고, 신성해진다. 그리고 감동받아야 감동을 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불을 전하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이 불타야 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내면의 불이 꺼진 사람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뒤돌아보는 새는 죽은 새다. 모든 과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날개에 매단 돌과 같아서 지금 이 순간에 여행을 방해한다. 마음이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분노를 느낄수록 현재를 사랑하기가 더 어렵다. 마음의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과거의 일을 계속 곱씹으면서, 그것에 의해 왜곡된 인식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내려놓고 현재를 붙잡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오래전에 놓아 버렸어야만 하는 것들을 놓아 버려야 한다. 그다음에 오는 자유는 무한한 비상이다. 자유는 과거와의 결별에서 온다.

 

 

내려놓을수록 자유롭고, 자유로울수록 더 높이 날고, 높이 날수록 더 많이 본다. 가는 실에라도 묶인 새는 날지 못한다. 새는 자유를 위해 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 자체가 자유이다. 다시 오지 않을 현재의 순간을 사랑하고, 과거 분류하기를 멈추는 것. 그것이 바람을 가르며 나는 새의 모습이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한 바람이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새는 날갯깃에 닿는 그 바람을 좋아한다.

 

 

외부의 힘에 의해 깨진 알은 생명이 끝나지만, 내부의 힘에 의해 깨진 알은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위대한 일은 언제나 내부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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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가 균형을 잃으면 세상은 발전이 아니라 퇴보할 수 있다. 배려와 공동체 차원의 효율적인 조직과 제도가 기반이 된다면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은 꿈이 아니다. 

 

 

[본문발췌]

 

 

자유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장에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칙과 한계가 있다. 시장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 시장의 바탕에 깔려 있는 여러 규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규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도 없다. 자유 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정부의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고, 자유 시장론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다. 객관적으로 규정된 자유 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의 임금 격차는 개인의 생산성이 달라서가 아니라 각 정부의 이민 정책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라 간의 이주가 자유롭다면 잘 사는 나라의 일자리는 대부분 못사는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 차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임금이라는 것은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것은 가난한 계층의 국민들 때문이 아니라 부유한 계층의 국민들 때문이라는 말도 가능하다. 사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잘사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지만,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은 부자 나라의 부자들에 비해 경쟁력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부자 나라의 부자들이 개인적으로 특별히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들의 높은 생산성은 단지 역사적으로 축척해 온 다양한 제도들 덕분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개인의 가치에 맞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잘못된 신화를 깨뜨려야만 한다.

 

 

변화를 인식할 때 우리는 가장 최근의 것을 가장 혁신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예를 들어 최근의 전자 통신 기술상의 발전은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 후반의 전보만큼 혁명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인터넷 혁명의 경제적, 사회적 영향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만큼 크지 않았다. 가전제품은 집안일에 들이는 노동 시간을 대폭 줄여 줌으로써 여성들의 노동 시장 진출을 촉진했고, 가사 노동자 같은 직업을 거의 사라지게 만들었다. 과거를 돌아볼 때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옛것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되고 새것을 과대평가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국가의 경제 정책이나 기업의 정책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의 직업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인플레이션을 길들였는지는 모르지만 세계 경제는 상당히 더 불안해졌다. 지난 30년 사이에 물가 변동을 잡았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흥분해서 우리는 같은 기간 동안 전 세계 여러 나라가 겪어 온 극도로 불안정한 경제 상황을 못본 척했다. 그 사이 수많은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 과도한 개인 채무, 파산, 실업 등으로 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했던 2008년 금융 위기도 그 한 예이다. 인플레이션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우리는 완전 고용이나 경제 성장 같은 중요한 문제에 충분히 신경 쓰지 못했다. '노동 시장 유연성'이라는 미명 아래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불안해졌다. 물가 안정이 성장의 전제 조건이라고들 주장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인플레이션에 고삐를 매었음에도 성장률은 미미했다. 바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성장을 둔화시켰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적당히 낮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은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 인플레이션이 낮아져 경제가 안정되면 투자를 불러일으켜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과는 정반대로, 인플레이션을 아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려는 시도는 투자와 성장을 위축시켰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이 낮아졌어도 우리는 대부분 진정한 경제적 안정을 맞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주요 목표로 하는 자유 시장 정책 패키지의 근간을 이루는 자본과 노동 시장의 자유화는 금융 불안과 고용 불안정을 초래해서 불안정한 세상을 만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이 정책이 약속했던 이른바 '성장 촉진'마저 실현하지 못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강박관념은 이제 잊어버리자. 인플레이션은 장기적 안정, 경제 성장,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희생해서 금융 자산 보유자들에게나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려는 사람들이 대중을 겁주기 위해 사용해 온 '무서운 망태 할아범' 같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은 제대로 작동한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은 자신이 개발도상국이었을 때에는 그런 정책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난 30년 동안 이 정책을 도입한 개발도상국들은 성장률 둔화와 수입 불균형 등의 부작용을 떠안아야 했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을 사용해서 부자가 된 나라는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

 

 

부자 나라들도 이른바 탈산업 사회로 접어들었는지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제 부자 나라들의 대다수 국민은 공장에서 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동안 상대 가격의 변화(제조업 제품의 가격은 내린 반면 서비스 가격은 그렇지 않음)를 감안하면 부자 나라들의 생산과 소비에서 제조업 부문의 중요성은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탈산업화 현상이 꼭 제조업의 쇠퇴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물론 그런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이 현상이 장기적인 생산성 증가와 국제수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세계 각국의 상당수 정부들이 탈산업 사회라는 신화에 세뇌되어 탈산업화 현상에 따른 부정적 결과들을 무시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특히 개발도상국이 산업화 단계를 건너뛴 다음 서비스 산업으로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서비스는 생산성이 느리게 성장한다. 그리고 생산성 증가 속도가 빠르다는 첨단 지식 기반 서비스 산업들은 강력한 제조업 없이 발전할 수 없다. 더욱이 서비스는 국제 교역이 어렵다. 그래서 개발도상국이 서비스 산업에 특화하는 경우 심각한 국제수지 적자에 직면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경제를 고도화시킬 능력 또한 떨어지게 된다. 이렇듯 탈산업 사회라는 환상은 선진국에도 좋지 않지만 특히 개발도상국에는 대단히 해롭다.

 

 

미국식 경제 모델을 지지하는 주장은 미국인의 생활수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미국이 세계에서 생활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한 나라의 평균 소득으로 구매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을 따지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생활수준을 측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나면 소위 말하는 미국의 우월성은 상당히 빛을 잃고 만다. 미국은 소득 불균형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을 짐작하는 데 평균 소득을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 이 사실은 다른 부자 나라들에 비해 훨씬 열등한 미국의 보건 및 범죄 관련 지표에 잘 드러난다.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은 미국인들의 구매력은 또 다른 미국인들, 특히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미국인들의 빈곤과 불안정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또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나라 노동자들에 비해 노동 시간이 상당히 더 길다. 같은 시간을 일해서 생기는 돈은 구매력을 기준으로 해도 유럽 여러 나라에 뒤진다. 이런데도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생활수준이 더 높다는 주장을 한다면 반론의 여자기 많다.

 

 

국가 간의 생활수준 격차를 간단히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중 1인당 소득, 특히 구매력 평가지수로 표시한 1인당 소득이 그나마 가장 신뢰할 만한 지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득으로 얼마나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살 수 있는지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여가 시간의 질과 양, 직업의 안정성, 범죄의 공포로부터 해방, 의료 혜택, 사회 복지 등 '질 좋은 삶'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을 간과하기 쉽다. 개인마다, 그리고 나라마다 이런 요소들 중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이런 것들과 소득 수준 사이의 균형을 어떤 식으로 맞추는 것이 좋을지는 각자 정하기 나름이지만 모두가 진정으로 '잘사는' 사회를 건설하려면 소득 이외의 요소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프리카가 늘 정체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열거한 모든 구조적 문제가 그대로 있었고 경우에 따라 더 심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아프리카는 상당한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발목을 잡는다고 간주되는 구조적 문제들 중 대부분은 오늘날 부자가 된 나라들도 가지고 있던 문제들이다. 나쁜 기후(극지 기후, 열대성 기후), 내륙 국가, 풍부한 천연자원, 민족 분쟁 바람직하지 않은 문화 등 그야말로 빠진 것 없이 다 갖추고 있었다. 이런 구조적 문제가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만 이런 장애 요인들이 낳는 문제를 처리할 만한 기술적, 제도적, 조직적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아프리카의 정체를 불러온 진짜 요인은 이 지역 국가들이 추진하도록 강요받았던 자유 시장 경제 정책이다. 역사나 지리적 요건과는 달리 정책은 변화시킬 수 있다.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단순히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들이 더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부자들에게 주어지는 더 많은 부가 사회 전체의 혜택으로 파급되게 하려면 국가는 각종 정책 수단(예를 들어 부자와 기업의 감세를 허용하는 대신 투자를 조건으로 제시)을 통해 부자들로 하여금 더 많이 투자하도록 해서 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하며, 복지 국가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전 사회 구성원들과 성장의 과실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 나라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의 노력이나 재능보다 공동체 차원에서 효율적인 조직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영웅적인 기업가들이 등장하는 신화를 거부하고 집단 차원의 공동체적 기업가 정신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조직과 제도를 마련하도록 돕지 않으면 가난한 나라들이 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늘 최선의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직접 관련된 일들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전문 용어로는 '제한적 합리성'이라고 한다.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우리가 그런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문제들의 복잡성을 줄이려면 일부러 선택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고 있다. 특히 극도로 복잡한 현대 금융 시장과 같은 분야에서 정부의 규제가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정부가 보유한 지식이나 정보가 더 우월해서가 아니라 정부 규제를 통해 선택의 범위를 제한하여 문제의 복잡성을 줄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일이 잘못될 가능성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교육 수준이 국가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사실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은 사람들이 더 만족스럽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생산성 향상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또 지식 경제 시대에 접어들면서 교육이 경제 발전에 필수 요소가 되었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 우선 지식 경제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 역사적으로 지식은 언제나 부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탈산업화와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선진국의 대다수 일자리에서 꼭 필요로 하는 지식 요건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지식 경제에 더 중요하다는 고등 교육도 그것이 경제 성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 나라의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교육 수준이 아니라 생산성 높은 산업 활동에 개인들을 조직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는 사회 전체의 능력이다.

 

 

초중등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낮은 것은 이 시기의 교육이 자아실현, 모범 시민 양성, 민족 정체성과 같은 것을 함양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라면, 고등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낮은 것은 고등 교육의 기능 중 경제학에서 '분류'라 일컫는 기능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 교육은 피교육자들에게 생산성과 관련된 지식을 상당 정도 전수해 주지만, 그것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은 그 피교육자들이 얼마나 고용에 적합한지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많은 직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능력은 일을 하면서 배워 갈 수 있는 전문 지식보다는 전반적인 지능, 의지, 조직 사고력 등이다. 따라서 대학에서 역사나 화학을 전공하면서 배운 지식은 보험 회사나 교통부 공문원으로 근무할 때에는 거의 쓸모가 없겠지만,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의지가 강하며, 조직적 사고력이 있다는 신호가 된다. 대졸자를 모집하는 회사는 각 직원의 전문지식 보다는 이런 일반적 능력을 보고 직원을 채용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얻은 전문 지식은 대부분 직장에서 수행할 업무와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구성원 개인의 교육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각 개인을 잘 아울러서 높은 생산성을 지닌 집단으로 조직화할 수 있느냐에 있다. 이런 조직화의 결과는 보잉이나 폭스바겐과 같은 거대 기업일 수도 있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에 많은 세계적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일 수도 있다. 이런 기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투자와 리스크 감수를 장려하는 일련의 제도가 필요하다. 유치 산업을 보호 육성하는 교역 정책, 장기적인 생산성 향상을 위해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자본'을 제공하는 금융 시스템, 제대로 된 파산법으로 자본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좋은 복지 정책으로 노동자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주는 제도, 연구개발과 노동자 훈련에 관한 공공 보조금과 규제 정책 등이 필요한 것이다.

 

 

교육은 소중하다. 그러나 교육의 진정한 가치는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재력을 발휘하고 더 만족스럽고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경제를 발전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교육을 확장하면 큰 실망을 겪게 될 것이다. 교육과 국민 생산성 사이의 연관성이 약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한 과도한 열의는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생산적인 기업과 그런 기업을 지원할 제도를 확립하는 데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

 

 

기업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국민 경제에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 자신에게도 좋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규제가 기업에 해로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천연자원이나 노동력과 같이 기업들 모두가 필요로 하는 공동의 자원이 파괴되지 않도록 개별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기업 부문 전체에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기도 한다. 또 각 개별 기업에 단기적으로는 손해를 끼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기업 부문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규제도 있을 수 있다. 노동자 교육 규정 같은 것이 그런 예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기업 규제의 내용이지 양이 아니다.

 

 

지나치게 결과를 균등하게 하려는 것은 해롭지만, 이 '지나치다'는 것의 한계를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는 논의를 거쳐야 한다.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최소한의 소득, 교육, 의료 혜택 등을 보장함으로써 최소한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공정한 경쟁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기회의 균등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공정하고 효율적인 사회를 건설하기를 바란다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현대 금융 시장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 효율적이라는 데에 있다. 최근의 금융 '혁신'을 통해 만들어진 수없이 많은 새 금융 상품들 덕에 금융 부문은 금융 자산 보유자들을 위한 단기 이윤 창출에는 더 효율적이 되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에도 보았듯이 이 새로운 금융 자산들은 금융 시스템뿐 아니라 경제 전반을 더불안하게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금융 자산의 유동성을 이용해 자산 보유자들은 작은 변화에도 빨리 반응을 하기 때문에 실물 경제 부문의 기업들은 장기적 발전에 필요한 '기다려 줄 줄 아는' 자본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 사이에 존재하는 속도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 즉 금융 시장의 효율성을 의도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과 다른 종류의 경제학.

존 메이너드 케인스, 찰스 킨들버거(광기, 패닉, 붕괴), 하이먼 민스키,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리스트, 조지프 슘페터, 니컬러스 칼도, 앨버트 허시먼.... 그들의 공통점은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장기투자와 생산 구조를 바꾸는 기술 혁신이지, 풍선을 부풀리듯 이미 존재하는 구조를 팽창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유치 산업을 보호하고, 기술적으로 정체된 농업과 같은 산업 분야에서 보다 역동적인 산업 분야로 자원을 강제 이전하는 한편, 허시먼이 강조하던 서로 다른 부문 간의 연계 효과를 활용하는 등 기적의 성장 기간 동안 동아시아 경제 관료들이 택했던 많은 경제 정책들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경제학자들의 가르침에서 배워 온 것이지 자유 시장 경제학에서 따온 것이 아니었다.

 

 

세계 경제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 예금 보험을 확대해서 집단적인 예금 인출 사태를 막고 엄청난 금융 구제 자금을 제공하고 경기가 악화되면 자동으적으로 복지 지출이 증가하는 시스템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1930년대 보다 훨씬 더 극심한 경제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엄청난 세계 경제 위기를 자초한 자유시장 주의 경제학을 적당히 수리하면서 사용한다면 또 다시 위기는 찾아올 것이다. 그냥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 재구성을 위한 여덞 가지 원칙을 제공한다.

  • 첫째, 자본주의는 나쁜 경제 시스템이다. 특히 더 나쁜 자유시장주의 자본주의가 모든 종류의 자본주의는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모두에게 맞는 하나의 경제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스칸디나비아식 자본주의와 다르고 스칸디나비아식 자본주의는 독일식 혹은 프랑스식과 다르다. 일본식은 말할 것도 없다. 이윤 동기는 여전히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원료이지만 이윤 동기에 아무런 규제도 하지 않는 다면 엄청난 피해가 돌아온다는 것을 배웠다. 시장 메커니즘은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세심한 규제와 조정을 필요로 한다. 더 잘 규제된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를 해야 한다. 다른 종류가 어떤 것인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표, 가치, 믿음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 둘째, 인간의 합리성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는 인식 위에서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2008년 경제 위기는 우리가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복잡한 세상을 만들어 버린 탓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이 붕괴한 것은 복잡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근본적으로 무한하다고 믿는 경제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시스템이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금융혁신이 계속 무제한적으로 허용된다면 우리의 규제 능력은 끝까지 우리의 혁신 능력을 따라 잡지 못할 것이다. 복잡한 금융상품의 발행을 금지해야 한다. 식품이나 약품 자동차 비행기 상품은 출시전에 엄격한 안전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왜 경제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금융상품은 쉽게 시장에 발행이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 '로켓 사이언티스트'들이 새로운 금융 상품을 개발하면 그 상품이 금융 회사의 단기적 이윤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 전체에 장기적으로 어떤 위험과 이익을 미치는지 평가한 뒤에 출시를 허용하는 승인 절차를 만들 필요가 있다.

  • 셋째, 인간은 이기심 없는 천사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나쁜 면보다 좋은 면을 발휘하게 하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은 물질적 자기 이익추구를 하는 존재이지만 그것이 행동동기의 전부는 아니다. 자유시장 주의자들은 개인과 기업이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미화했다. 그래서 이익만 창출 할 수 있다면 사회적 책임을 무시해도 되는 세상을 만들었다.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물질적 부를 중요시하되 유일한 목표가 되지 않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단기적인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면 우리는 전체 시스템을 파괴할 것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 넷째, 사람들이 항상 받아 마땅한 만큼 보수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개개인으로 따지면 부자 나라 사람들 보다 더 생산적이고 기업가 정신이 더 뛰어난 경구가 흔하다. 이들은 개인의 자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기 나라의 경제시스템과 선진국의 이민 정책 때문이다. 또한 기회의 평등만 보장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 마땅하다는 말은 아니다. 어느 정도 결과의 평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모든 아이들이 최소한의 영양과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면 시장이 제공하는 기회의 평등 정도로는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을 보장 할 수 없다. 우리가 시장의 결과에 대해 과감하게 문제를 제기할 때만이 더욱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시장의 결과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 다섯째, 물건 만들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석유위에 떠다니는 브루나이, 쿠웨이트가 아닌 다음에야 제조업을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생활 수준을 향상 시킬 수 없다. 흔히 탈산업화의 성공 사례로 간주되는 스위스나 싱가포르 등은 사실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나라다. 더욱이 대다수의 고부가가치 서비스들(금융, 기술컨설팅 등)은 제조업 부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산업정책 역시 핵심 제조업 부문을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 여섯쩨.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이 더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금융 부문이 하는 중요한 역활 중의 하나가 투자를 하고 나서부터 그 투자가 결실을 맺을 때까지의 시차를 메워주는 것이다. 금융은 속성상 빨리 움직일 수 없는 실물 자산에 유동성을 부여함으로서 자원을 신속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금융 자유화로 국경을 넘어 돈의 이동의 쉬워졌고 투자자들은 더 참을성이 없어져 즉각적인 이윤을 원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정부와 기업은 장기적인 전망 보다는 즉각적인 이윤에 집중하게 되었다. 돈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정부와 기업에 대한 협상 카드로 사용한 투자자들은 국민소득의 더 많은 부문을 금융 소득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이것으로 고용불안(고용불안은 이윤을 신속하게 창출하는 데에 필요하다)은 심화되었다. 금융 거래세, 초국적 자본이동에 대한 제한, 기업 인수 합병에 대한 규제 강화 등은 금융 산업의 속도를 늦춰서 금융이 실물 경제를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도록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노키아도 전자산업에서 이윤을 내기까지 17년이 걸렸고 일본 자동차도 시장에서 인정받기 까지 40년이 걸렸다.

  • 일곱째, 더 크고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정부 개입이 많이 늘었지만 주로 위기관리를 위한 것이다. 정부는 위기관리를 넘어서 풍요롭고 평등하며 안정적인 사회를 건설하는데 더 큰 역활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정부는 사회의 여러 상충된 요구들을 조정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가장 우수한 장치이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거대한 복지국가와 경제 성장률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는 작은 정부가 항상 성장에 이롭다는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잘 드러내 준다. 그리고 오늘날 부유해진 나라들은 모두 정부가 경제발전을 위해 적극 개입했다. 정부 개입은 제대로 계획되고 추진되기만 하면 경제를 더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 정부는 사적인 수익은 적지만 사회적으로 수익이 높은 곳에 투자하고 또 연구개발이나 노동자 훈련등 시장에 제대로 하지 못하는 투입물에 공급을 늘려야 한다.

  • 여덟째, 세계 경제 시스템은 개발도상국들을 불공평하게 우대해야 한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많은 나라들은 자유시장을 맹신하는 국제기구나 부자나라들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유시장 정책을 채택해야 했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민주주의가 취약했기에 자유시장 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더라도 그 정책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그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따라서 세계 경제 시스템은 개발도상국들이 자국에 적합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책 공간을 넓혀 주는 방향으로 완전히 개편되어야 한다. 특히 자국시장 보호, 외국인 투자 규제, 지적 재산권 등에서 개발도상국에 더 관대한 체제가 필요하다. 이 같은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WTO를 개혁하고 빈국과 부국간의 다자간 자유 무역 협정 및 투자 협정들을 폐기하거나 개정해야 한다. 물론 이런 모든 제안은 개발도상국들에게 부당하게 유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개발도상국은 국제관계에서 부당하게 수많은 불이익을 당했다. 이 정도의 봐주기 시스템은 용납될 수 있다고 본다.

  • 세계를 퇴보 시키고 재앙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던 원칙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예전과 비슷한 대참사들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제 좀 불편해질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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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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