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본문발췌]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은 나이를 '수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이를 수직으로 생각하면 나이가 한 해마다 한 살씩 축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면 한 해 한 해를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무 역시 한 해가 지날 때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지만 결코 나이를 수직으로 축적하지 않는다. 나무의 나이는 수평이다. 나무의 이런 삶이 바로 사람보다 오래 사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나이바퀴를 의미하는 '연륜'을 이해하면 나무가 사는 법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왜 나이를 바퀴에 비유했을까. 인간 스스로 나이를 바퀴에 비유했다면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바퀴는 둥글고, 둥근 것은 시작도 끝도 없다. 나무는 수평으로 나이를 먹으면서 몸을 둥글게 만든다. 그래서 나무의 나이테는 진정한 연륜이다. 나무가 어떻게 해서 몸을 둥글게 만들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아는 순간 비로소 인간도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평온하게 살아갈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나무는 겉에서 보면 앞뒤의 구분이 없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나지 않고 둥글게 살았다는 뜻이다. 나무는 수직과 수평, 종과횡을 막힘없이 살았기 때문에 몸을 둥글게 만들 수 있었다. 더욱이 나무는 매일 평등하고 공평한 하늘의 기운을 먹고 성장한다. 나무가 둥근 것은 막힘도 없고 평등하며 공평한 하늘을 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무의 줄기는 위로 향하지만 뿌리는 아래로 향하고, 나이테는 수평으로 뻗는다. 한쪽은 위로 향하면서 다른 한쪽은 아래로 향하는 절묘한 조화가 바로 나무의 삶이다. 수평으로 늘어나는 나무의 나이테를 알고자 한다면 가지를 보라. 줄기가 위를 향할 때 가지는 옆으로 뻗는다. 나무는 햇볕을 먹기 위해 수직 상승하는 힘만큼 '수평 살이'에도 같은 힘을 쏟는다. 그래야만 균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 나무는 자신이 살았던 시간을 간직하면서 나이테를 만들어간다. 나무의 나이테는 시간이 온전히 축적된 결과다. 그러므로 나이테를 많이 만들수록 삶의 지혜는 깊어진다.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촘촘한 나이테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지혜롭다. 얼굴의 주름을 보면서 한숨짓기보다는 주름 속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현명하다. 오래사는 나무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생명체들에게 많은 것을 선물하듯, 나이든 사람도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나무가 나이를 먹어가며 다른 존재들에게 베풀면서도 자신의 성장과 성숙을 거듭하는 것처럼, 인간 역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남에게 많이 베풀면서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다. 매일 위로 성장하면서 옆으로 나이를 먹는 나무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행복하다.

 

 

자신을 드러내는 삶의 지향은 삶의 가치를 찾는 일이다.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면 그 사람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많은 사람이 가을에 잎이 물든 모습을 보면서 나무를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도 나무마다 각각 색깔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잎이 형형색색, 각양각색이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것처럼 사람도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야만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 내 정체성만큼 중요한 것이 다른 존재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 남의 입장을 고려해서 도와주더라도 상대가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진정한 배려라는 말이다. 이를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진정한 배려야말로 모든 생명체가 추구해야 할 숭고한 가치다.

 

 

생명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자.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이 결코 축복일 수는 없어도 치열한 삶 속의 단풍처럼 아름다운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무는 잎을 버린 뒤에야 여유를 찾는다. 잎을 달고 있을 때는 풍요롭지만 여유가 없다. 인간도 몸이 가벼워진 뒤라야 여유로울 수 있다. 여유는 비어 있는 여백과 같다.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면 가지와 가지 사이에 여백이 생긴다. 겨울나무는 사람들이 겨울에 옷을 껴입고 움츠리는 것과 달리 옷을 입지 않고도 힘차게 생동한다. 여유가 있어야 자유롭다. 잎 떨어진 나무는 절대 자유 그 자체다. 충만한 기운으로 가득 찬 겨울나무의 모습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이다.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고 살길 바라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고 살기보다는 흔들리면서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 공자는 나이 마흔을 외물에 유혹되지 않는 '불혹'이라 불렀다. 그러나 나이 마흔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공자는 도덕군자를 꿈꿨지만, 인간은 공자의 꿈처럼 삶을 유지하기 어렵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큰 바람에 쓰러질 수도 있다. 큰 바람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조금씩 흔들리면서 사는 것도 삶의 지혜다. 

 

 

나무가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랄 수 있는 것도 바람에 수없이 흔들리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흔들리기만 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나무는 흔들리면서 뿌리를 튼튼히 만든다. 바람에 꽃과 열매를 잃어버릴 때도 많지만 그럴 때마다 뿌리는 한층 더 튼튼해진다.

 

 

나는 늘 푸른 소나무의 자태를 보면서 '무심無心'을 생각한다. 소나무의 위대함이 무심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늘 푸른 잎을 유지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노력하는 소나무는 겨울에도 추위와 눈과 바람과 비를 온몸으로 맞는다. 추위를 피하지 않아야 소나무의 푸른 잎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추우면 춥다고 불평하고, 더우면 덥다고 불평한다. 소나무는 추우면 추운 대로 받아들이며 어떤 고난도 피하는 법이 없다. '기꺼이' 추위를 받아들이는 소나무의 자세는 추위를 의식하지 않는 무심의 경지다.

 

 

즐거움은 바로 좋아하는 데서 출발한다. 즐겁게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쉽사리 감동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감동하는 일이 줄어드는 것은 감동할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디에 감동해야 할지 무지하기 때문이다. 감동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습관만 들인다면 감동은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 감동의 횟수를 늘려야 하는 이유는 감동지수와 행복지수HPI가 비례하기 때문이다. ... 행복한 사람은 감동에 익숙하다. 감동이란 느낀 것을 과감하게 밖으로 표출하는 데서 시작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느끼는 것을 즐기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행복을 위해서는 목표지향의 삶이 아닌 목적지향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스스로 왜 사는지를 매일매일 고민하는 사람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

 

 

목적지향적인 사람은 다양한 것에 가치를 두고, 하지 않은 일들을 시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치를 지니고 있고, 행복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자의 몫이다. 사람들 무척 부지런히 살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자신이 하는 일에 큰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를 비롯해 어떤 생명체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큰 관심이 필요하다. 큰 관심은 자세히 보는데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한 존재를 단면만으로 이해하면서 전체를 안다고 생각한다. ... 한 존재를 전체로서 보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한층 풍성하고 행복하게 만든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은 상대방의 장점을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의 전부가 좋아 보인다. 마찬가지로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무의 전체를 사랑하지 꽃이나 열매만을 사랑하지 않는다. 꽃이나 열매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미성숙 단계에 있다. 사람들은 비교하는 데 익숙하지만, 사랑은 결코 비교하지 않는다. 어떤 여자와 남자가 서로 사랑할 때, 상대방을 주변에 있는 여자와 남자, 부인과 남편에 비교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존재 자체가 갖는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노자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라고 했다. 결국 인간은 자연을 본받고 살아야 하는 존재다. 자연을 본받아야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

 

 

진정한 소통은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하고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비워야만 한다.

 

 

'듣기'는 지도자의 주요한 덕목이지만, 우리 주변의 지도자 대부분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지도자들이 사회 각 분야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 듣기에서 필요한 것은 '경청'이다. 경청은 상대의 말을 공경하면서 듣는 것이다. 경청을 위해서는 상대를 진정으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대를 동등한 존재로 생각지 않고 깔보거나 낮게 본다면 경청은 성립하지 않는다. ... 현대인은 상대방과 마주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뿐더러, 마주하면서도 마주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날 것이다.

 

 

나무의 모든 순간은 치열하다.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처럼 치열함은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어떤 분야든 치열하게 살아가는 자는 아름답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불꽃은 꺼져버리고, 불꽃이 없는 인생의 앞날은 어둡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치는 이유는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치열함이 없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자는 언제나 당당하고 불안해하지 않으며 지치지 않는다.

 

 

이 세상에 감동을 주는 것은 대부분 절대적인 기다림에서 나온다.  기다림은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사랑과 희망을 낳는다. 

 

 

대나무가 늘 푸르다고 생각하면 대나무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 아니다. 대나무는 언제나 푸르지 않다. 항상 변하기 때문에 푸르게 보이는 것이다. 대나무는 막혀 있으면서도 트여 있고, 트여 있으면서도 막혀 있다. 그러므로 대나무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와 중용의 실천자다. 중도와 중용은 석가와 공자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 경지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중간에 서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일일마다 가장 적합한 상태를 판단해서 처신하는 것이 중도와 중용이다. 사람은 대개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쉽다. 인간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크고 적은 이해관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중도와 중용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삶은 어떤 흔적이든 남길 수밖에 없다. 어떤 모양이든 그 흔적은 아름답다. 남긴 흔적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기에 더욱 아름답다. 역사책에는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긴 사람만이 기록되어 있지만, 인류의 역사는 역사책에 기록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오히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흔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 흔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흔적을 기록하지는 않듯이, 모든 나무가 모과나무처럼 산고의 흔적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나무는 흔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고통의 흔적을 통해 살아간다. 흔적이 요란하지 않다고 열심히 살지 않은게 아니듯이. 겉으로 보이는 흔적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기록의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삶마다 그만한 가치의 흔적을 반드시 남긴다는 점이다. 삶 자체가 아름다운 흔적이거늘 무엇을 보태고 덜겠는가.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성공의 아름다운 과정인 것을.

 

 

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힘들지 않다. 삶 자체가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자체를 힘들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은 없다. 변하지 않으면 편안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변하지 않으면 죽어버린다. 나무처럼 매일매일 변해야 몸속에 무한으로 저장되어 있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 나이 든 사람이 위험에 빠지는 이유도 변화가 적어지면서 자신의 몸속에 내장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가 가진 창의성은 몸을 자극하지 않으면 그 샘이 금방 닫혀버린다. 그러므로 창의성은 나이와는 관계가 없다. 아무리 젊어도 창의성이 풍부하지 않고,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창의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얼마나 변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마음의 창의성을 쟁기질하는 것은 곧 생태적인 삶이다. 생태적인 삶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편하지만, 사람을 진정으로 살아 숨 쉬게 한다. 생태적인 삶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까지의 삶과 다르기 때문이다. '생태eco'는 '더불어 삶'이다. 더불어 삶은 생명체 간의 평등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동안 사람들은 다른 생명체를 평등한 관계로 인식하지 않았다. 나무와 풀인 식물만 하더라도 사람과 같은 생명체로 여기지 않고, 단순히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그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 누구도 다른 존재를 지배할 수 없다. 지배하는 순간, 그 존재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만약 더불어 살지 않고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생명을 죽인다면 결국 그 자신 역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동안 인간이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착각하면서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를 죽인 결과, 개체 수가 줄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개체 수 감소로 밀림의 사자가 살아남지 못하고 죽어가는 장면을 기억한다면, 생태적인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것이다. 

 

 

나무의 뿌리가 땅 밖으로 나온 뒤부터는 몸을 유지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래서 나무는 뿌리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넘어지지 않기 위한 방법을 찾는데, 이는 밖으로 나온 뿌리를 횡으로 감싸는 또 다른 뿌리를 만드는 것이다. 동식물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자기수용성 감각'이라 부른다. ... 자기수용성 감각은 한마디로 사람을 비롯한 동물이 쓰러지지 않고 다닐 수 있도록 해주는 균형 감각이다. 그러니 이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가. 뿌리를 고정시키는 작업에 몰두하는 나무를 상상해보라. 나는 산에서 나무가 자기수용성 감각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느라 거의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나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또 보면서 감탄을 넘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산비탈에 서 있는 나무들이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오래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바로 자기수용성 감각 덕분이다. 나무의 뿌리를 보면 삶에서 자기를 수용하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느다. 특히 균형은 지도자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균형 잡힌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조직을 이끌 수 있다. 공자가 평생 화두로 삼은 것은 인仁이지만, 삶의 태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중용中庸이었다. 중용은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다. 가운데를 의미하는 한자 '중中'에는 '적중的中'도 포함되어 있는데, 중용의 '중'은 바로 적중이다. 어떤 일이든 핵심에 적중시키는 능력이 바로 중요의 정신이다. 중용은 불교의 중도中道와 같은 의미다. 이처럼 자기수용성 감각은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와 닮았다. 나무가 인간에게 존경받는 이유도, 내가 나무를 스승으로 삼고 있는 이유도 바로 자기수용성 감각을 가장 잘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수용성 감각을 죽을 때까지 발휘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초심과 집중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무는 뿌리가 땅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자기수용성 감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그러나 사람은 위기를 만나면 그 당시에는 자기수용성 감각을 발휘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이를 잃어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 오만과 나태가 뿌리를 내린다. 나무의 근본이나 사람의 근본은 같은 의미지만, 나무는 평생 근본을 잊지 않는 데 반해 인간은 위험에 놓였을 때만 근본을 생각한다는 사실이 다르다. 자기수용성 감각을 죽을 때까지 유지할 때 한 존재는 온전히 생존할 수 있다. 특히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기수용성 감각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자기수용성 감각은 반드시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정신적으로 자기수용성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주 많다. 자기수용성 감각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생활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근본을 잃지 않는 균형 감각의 회복이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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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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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나와 다름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 변화가 필요할 때, 목적과 방향을 잃었을 때.... 여행을 떠나야 할 때다.

 

 

[본문발췌]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는 존재'라 믿으며 길 위에서 '잃어가는 나'와 '잃어버린 너'를 되찾고 싶었다. 그 강렬한 그리움이 나를 살아남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의 소득은 전혀 알거나 보지 못했던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다고 여겼던 것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끼고 새로 고쳐보는 데 있다.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은 '어디에서 왔느냐'는 물음과도 통한다. 과거에 대한 배려는 미래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다. 나그넷길에서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도 자유인이다. 인생 그 자체가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질영역에 있어서는 '물질의 법칙'에 지배되지만 정신영역에 있어서는 '마음의 법칙'에 의해 다스려진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부유浮遊하다가 생체의 '조화'를 되찾게 되었다고, 그렇게 죽음을 삶으로 바꾸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 중에서 웃는 것은 인간뿐'이라고 했고, 앙리 베르그송은 그 논거를 뒷받침하는 예화를 들면서 "고유한 의미에서 인간적이라는 것을 생략하면 재미있는 것은 없다."면서, 웃음을 인간 고유의 고급스럽고 중요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고해苦海와도 같은 세상사에서 웃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마크 트웨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역설했다. "나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다. 천국에는 지루함이나 괴로움이 없어 그 탈출구인 여행이나 웃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려운 삶을 딛고 다시 웃음을 회복해야 한다.

 

 

여행을 통해 나 자신을 기쁘게 하면서, 명승고적뿐 아니라 오지도 마다 않고 넓은 세상을 만나면 문득문득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발끝부터 머리카락 한 올까지 내 몸 곳곳에 말을 걸고 격려해주며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사랑은 나르시즘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나르시즘은 자기만을 사랑하는 자기 본위의 사랑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하되 자기 과신이 아닌 겸허와 겸손으로 끝나야 한다. 나 역시 나를 객관화해 바라볼 수 있게 되자 남에게도 부드럽고 열린 시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不言以無愁 - 말을 안 하면 근심이 없다. - 석주 대선사

 

 

베르테르는 '몸이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 여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지만, 나는 영혼과 육체가 하나임을 믿는다. 몸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마음의 그릇'이다.

 

 

고독은 우리 마음의 고향이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자기 주변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고독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을 남에게 전할 수 없을 때, 또는 남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을 때 고독해진다."고 했다. "이럴 때면 익숙했던 곳을 떠나야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고독감이란 자기 사고방식이 주변 사람들과 다를 때, 남의 사고방식이 납득되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이며, 그런 때는 그런 주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 좌절을 모르고 넉넉하게만 살아온 사람, 한곳에만 죽치고 앉아 자기 나름의 왕국을 마련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본위의 냉혈인간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 이따금 훨훨 털어버리고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면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활력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얻을 수 있다. ... 많이 괴로워하다가 길을 나선 나그네가 어느샌가 여느 사람의 슬픔이나 괴로움을 함께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과 죽음, 그리고 여행을 통해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실감한다. ... 인생은 고통과 죽음의 바다이지만 사랑과 여행으로 이를 메울 수 있다. 그런 사랑, 그런 여행은 죽을 것만 같은 시련 끝에 온다. 그리고 혼자만의 외로움을 통과해 새로운 눈을 갖게 되어야만 여행은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 사랑, 죽음, 여행, 이 세 가지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어쩌지 못하는 것임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한 번뿐인 삶을 위해서.

 

 

여행이란 스스로를 안전한 일상생활에서 긴장감이 흐르는 이질적인 세계로, 편리한 환경에서 불편한 환경으로, 호사스럽거나 넉넉한 생활에서 가난하고 모자라는 생활로 끌어내는, 끌어내리는 일이다. ... 여행이란 자유분방한 것이다. 어쩌면 여행은 '고독한 인간'의 멍에를 벗고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나서는 길이어야 한다. ... 혼자 긴 여행길에 나선다는 것은 '나 아닌 또 하나의 나를 찾는 길'이다. ... 그렇게 여행은 나를 향한 회귀, 또 다른 인생에게는 향수가 되리라.

 

 

여행이란, 정착사회의 번거로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보려는 욕구의 발로다. 여행이란, 안전한 일상생활과 다른 이질적인 세계로, 긴장을 내내 수반한다. 예컨대 편리한 환경에서 불편한 환경으로, 넉넉한 생활에서 모자라는 삶으로 스스로를 옮겨보는 과정인 것이다. 여행이란, 안전할 수도 있고 호사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자는 늘 자유분방해야 하며, 고독한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나서야만 한다. 여행이란, 여행자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 자기 안의 '고독한 인간'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스스로의 인생뿐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를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놀라운 체험이다.

 

 

누구나, 심지어 불규칙한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이는 이조차 일정한 생활 리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끔 여행을 통해 이 리듬을 흐트러뜨릴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는 살아 있는 동물에게는 엉성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구석구석 철저히 계산된, 조금의 혼란도 없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인생도 그렇다. 살다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불쑥 일어나곤 한다. 자연도 그렇다. 사계절의 변화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지만, 서늘한 여름도, 따뜻한 겨울도 있다. 살아 있는 존재에게 '흐트러짐'이란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여행은 가르쳐준다.

 

 

우리가 여가를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단순한 행위와 사실, 그것을 삶의 가장 필요하고 만족스러운 일로 즐기고 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여행 중에 느끼는 특별한 느낌들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먹고, 자고, 사랑하는 것이 그렇듯이, 여행도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고 여기고 여행해야 한다. 그냥 예사롭게 돌아다니기만 해도 마음의 감각들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새롭고 값진 것을 찾기 위해, 좀더 넉넉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 또는 예기치 못한 아이디어나 느낌을 떠올리고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여행을 하다보면 스스로도 놀랄 만한 새로운 발견과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낯선 하나는 익숙한 여럿을 일깨워준다.

 

 

여행이란 자신을 되찾게 하고 오래되고 선천적인 고정관념을 바꾸게 하는, 깨어 있는 의식의 변종. - 토니 히스, <깊은 여행>

 

 

여행이 주는 색다른 느낌을 가까이하게 되면 예사로운 것에서도 새로운 맛을 느끼게 되고, 나아가 삶을 송두리째 바꾸게 되기도 한다. ...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우리는 꿈을 통해 자신의 재능과 상상의 힘을 발견하고 놀라는 때가 많다. 꿈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들을,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또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가정들을 부풀려서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의 눈을 새로이 뜨게 한다. 실제의 꿈이 아닌 자각몽일 경우에는 불현듯이, 그리고 아무런 위협이나 위험도 없이 그런 가정들에 도전할 기회를 갖게 된다. 능숙한 여행자가 그러하듯이. 꿈과 여행은 닮아 있다.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진다는 것도,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것도 비슷하다. 여행의 도정에서 얻은 예기치 않은 발견들을 하나둘 자기 것으로 만들다보면, 어쩌면 꿈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파랑새가 꼭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희망도, 꿈도, 사랑도, 행복도, 모두 찾아 나서지 않으면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감나무 밑에서 홍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감을 따야 하듯이 행복도 즐거움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여행은 '파랑새'를 찾기위한 하나의 과정이요 수단이다. 여행은 여행지에서 돌아와 일상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장소에 갔다 오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느꼈던 새로움을 다시 감각해야 한다. 그런 순간에 치르치르와 미치르처럼 새로운 눈을 갖게 된다.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 존재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떨림, 전율, 절묘한 환희. 이것이 여행의 마음, 여심旅心이다.

 

 

이 세상은 한낱 관찰의 대상이 아니고, 새로운 것을 끌어들이는 과정. - 보들레르, <이국향기>

 

 

여행은 새로운 생각의 산파다. 새로운 생각은 색다르고, 새로운 장소에서 난다. 여행은 깨우침의 미학이다. 단테의 <신곡>처럼....

 

 

여행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관습에서 탈피하는 일이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일이다. 굳이 해방을 꾀하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여행을 하다보면 누구나 자유로워진다. ... 여행은 끊임없는 과정이다. ... 여행, 사랑, 죽음은 모두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죽음을 확실히 의식한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듯 무한한 수명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흥미로운 것이다. 이런 생각도 내가 여행에서 얻은 소득 중 하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은 평소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게 사물을 보아 넘기며 살아간다. 물리적인 시간은 일정하지만 시간을 대하는 각자의 방식에 따라 그것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 역시 여행을 통해 배웠다. 한순간이 영원이 될 수도 있고 하루가 일 년이 될 수도 있다. 여행 중에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을 음미할 때마다 그것을 실감하곤 한다.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돌아온 후 이를 반추하면서, 나는 나의 남은 시간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세상은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자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자연을 '따른다' 또는 자연에 '맡긴다'는 것에 엄청난 힘이 숨어 있다는 것도 노경老境에 접어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야 또 하루가 다가오면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를 가져본다. ...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짐짓 알면서도 막상 결심하고 첫발을 내딛기가 어렵다. 그러나 결심을 해야 한다. 어디로 떠나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가장 여행다운 여행을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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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플레이와 네트워크에 연결되지 않으면 불편하고 불안해하는 세상이다.

좀 더 인간적이고 충만한 삶을 위해 연결을 잠깐 멈추어 생각하고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No Screen, No Network Time!

 

 

[본문발췌]

 

 

stop! breathe! think!

 

 

인간은 외부와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 혹은 군중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추구하는 정반대의 욕망을 '동시'에 갖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욕망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스크린은 개인과 기업을 비롯한 다양한 조직에 필요한 업무를 손쉽게 해결해주었다. 편리함과 즐거움을 제공할 뿐 아니라 세상을 한 걸음 더 가깝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스크린을 통한 네트워크가 촘촘해질수록 우리의 일상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로 인해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잃고 말았다. 바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느끼고 생각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깊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사고와 감정의 깊이, 인간관계의 깊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깊이가 사라지고 있다.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의 핵심인 깊이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스크린을 통해서도 가치 있는 경험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유는 반드시 필요하다. 아마 빛을 받지 못하고 이미 지나가버린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이건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지나가버린 그 기회가 그리워질 것이다. 얻지 못했던 깨달음, 통찰력, 기쁨, 마음이 결코 떠나지 못했던 여행이 그리워질 것이다.

 

 

디지털 기술을 대하는 지금의 사고방식, 즉 네트워크는 절대 끊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은 시간의 공백이 가진 중요성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시간의 공백은 디지털 도구를 실용적인 도구에서 창조성, 깊이, 초월성의 도구로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시간의 공백은 사람들을 줄 서게 만든 마법의 핵심이다. 시간의 공백 덕분에 나는 지극히 평범한 경험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는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시간의 공백이 없다면 가치 있는 경험도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공백을 만들기는커녕 점점 더 없애고 있다.

 

 

20세기의 철학자 폴 틸리히는 '외로움loneliness'은 '홀로 있는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인 반면 '고독solitude'은 '홀로 있는 영광'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라고 말했다. 나는 대학 시절 두 가지 상태를 모두 경험했지만 기억에 남는 대부분의 기억은 고독에 관한 것이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실감하게 되었다. 사회는 군중이 없는 개인은 무가치하며 모든 것이 군중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세뇌시킨다. 그리고 개인과 군중 사이의 장애물을 끊임없이 제거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나라의 시민들은 그러한 은밀한 메시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유에 따르는 책임은 무거운 법이며 책임이 무거울수록 순응에 대한 매력도 커진다. 이를 알아챈 광고업자들은 군중 속의 개인들이 가진 개인주의적 감정을 일깨워 제품을 파는 방법을 익혀 왔다. 그들은 콜라부터 자동차까지 모든 제품이 자기표현과 자유를 위한 수단이라고 홍보한다. 물론 현실은 그 반대다. 반항하라! 모두가 신고 있는 이 신발을 신고!

 

 

군중이 일제히 하나의 관점만 받아들이면 비판적 사고의 기능은 사실상 멈추고 만다. 특히 디지털 맥시멀리스트들의 생각은 바뀌기가 어렵다. 그들은 군중과 함께하는 것이 전부이며 스스로 그러한 목표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중독의 문제는 3가지 측면에서 발생했다. 첫째, 개인의 내적인 삶이다. 전문가들은 내가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정신적, 정서적 장애가 확산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 가족을 비롯한 개인적인 인간관계이다. 스크린을 사용하는 시간이 얼굴을 맛대는 시간을 대신하고 있다. 셋째, 기업을 비롯한 조직적인 측면이다.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는 직원들로 인해 생산성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노모포비아nomophobia, 휴대전화가 없는 상태를 두려워하는 증상

 

 

가난한 자는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원하는 사람이다. - 세네카

 

 

몰입flow은 한 가지 활동에 몹시 빠져들어 주변 세상이 멀리 사라지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칙센트 미하이가 말하는 '일상생활에 대한 불안이나 걱정 없이 특정 활동에 수월하게 깊이 몰입한 상태'를 가능하게만 한다면 그 활동은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단순한 활동일 수도 있고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처럼 복잡한 활동일 수도 있다. 이 상태에서는 집중을 방해하는 것이나 시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고 그 순간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다. 칙센트 미하이에 따르면 인간은 '내적 경험을 통제'하고 '의식의 질서'를 발견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이 행복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몰입 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활동에는 일종의 한계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완수할 가능성이 있는 목표 지향적인 활동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맞지도 않는 퍼즐을 맞추거나 링도 없이 칠판을 향해 농구공을 던지는 활동으로는 결코 몰입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분주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조금 덜하는 것이 더 얻는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보람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좋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과 기술의 상호작용에 대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물리적 실체가 있는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더 선호한다. 물리적 실체가 있는 3차원적 도구는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인간의 마음에 더 쉽게 작용한다. 3차원적 도구는 직관을 일깨운다. ... 속도가 곧 미덕인 오늘날 종이 수첩의 또 다른 장점은 바로 디지털 세상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의 속도를 늦추고 마음을 여유롭게 한다. 스크린 안의 활동은 늘 변화하며 덧없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매우 가볍다. 하지만 가끔은 무겁게 가라앉을 필요도 있다.

 

 

인간의 맥시멀리즘적 성향을 일깨우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어 왔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조용히 그리고 끈질기게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새로운 기술이 선사하는 미래로 건너갈 수 있게 해주는 다리가 아닐까. 스티븐 그린블랫에 따르면 <햄릿>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는 바로 '자기 성찰의 충실한 묘사'다. 셰익스피어는 개인이 어떤 문제와 씨름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 역동하는 진짜 생각을 붙잡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다. 햄릿의 자기 성찰이 바로 <햄릿>의 핵심이며 그는 테이블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기술에 대한 배움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도구의 등장은 늘 3가지 범주의 문제를 야기 한다. 첫째, 기능적 측면이다. 이 도구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둘째, 행동적 측면이다. 이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 바꿔야 할 오래된 습관이나 습득해야 할 새로운 습관이 있는가? 마지막 세 번째 측면은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초기 단계에서 종종 경시되는 문제기도 하다. 바로 내적 혹은 '인간적' 측면이다. 이 도구가 나와 내 경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이 도구가 내 사고방식을 바꿀 것인가? 이 도구가 하루의 리듬을 바꿀 것인가? 이 도구를 사용하면 삶이 더 빨라질 (혹은 느려질) 것인가? 이 도구가 내가 하는 일에 영향을 끼칠 것인가? 가정생활에는? 만약 그렇다면 좋은 영향일까 나쁜 영향일까? 이 세 번째 측면의 문제가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나서야 우리는 그때까지의 기술 사용법에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접근법을 찾기 시작한다. 거대 기업들은 디지털 홍수가 기업의 이윤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이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기업의 생산성에 문제를 일으키는 측면도 바로 이 인간적인 측면이다. 직원들의 '마음 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생산성이 감소한 것이다. 이 세 번째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바로 문제를 자초하는 것이기도 하다.

 

 

변화를 추진하는 제도의 힘은 '제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그 제도가 어떤 의미인가에 달려 있다. 제도를 통해 뿌리 깊은 행동 양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마음속에 반드시 변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바꿀 수 있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바꿔야만 하는 '이유'에 관한 문제다. 내적 변화는 내적 확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나쁜 습관을 없애고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좋은 성품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고 3가지 덕목과 이를 갖추기 위해 필요한 행동 지침을 적었다. 프랭클린은 이 규범을 '도덕적 완전함에 이르기 위한 담대하고 험난한 계획'이라고 불렀다.

  • 절제 - 배부르도록 먹지 마라. 취하도록 마시지 마라.
  • 침묵 - 자신이나 타인에게 유익한 말만 하라. 쓸데없는 대화를 피하라.
  • 규율 -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두어라. 모든 일은 제때에 하라.
  • 결단 - 해야 할 일은 실천할 것을 결심하고 결심한 일은 반드시 실행하라.
  • 검약 - 자신이나 남에게 이로운 일에만 돈을 써라. 쓸데없이 낭비하지 마라.
  • 근면 -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언제나 유익한 일을 하라. 불필요한 행동을 삼가라.
  • 성실 - 타인을 속여 상처를 주지 마라. 결백하고 공정하게 생각하라. 말할 때도 그렇게 하라.
  • 정의 - 타인을 모욕하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타인의 이익을 해치지 마라.
  • 중용 - 극단을 피하고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도 화를 자제하라.
  • 청결 - 신체, 의복, 주택을 불결하게 하지 마라.
  • 평온 - 사소한 일이나 피할 수 없는 사고에 흥분하지 마라.
  • 순결 - 성관계는 건강과 자손을 위해서만 하라. 그로 인해 심신이 둔해지거나 약해지지 않도록 하고 자신이나 타인의 평화 혹은 명성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하라.
  • 겸양 -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아라.

 

 

나는 숲으로 갔다. 천천히 살며 오직 삶의 본질만 마주하고 삶이 내게 가르쳐준 것 중에서 배우지 못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마침내 죽게 되었을 때에야 제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 나는 숲으로 갔다. ... 나는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며 깊이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내 오두막에는 3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해,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을 위해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당신은 내가 인류에게서 멀어짐으로써 내 자신을 빈곤하게 만든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독 속에서 나만을 위한 실을 지어 번데기를 만들고, 그 번데기에서 빠져나와 더 나은 사회에 알맞은 더 완벽한 창조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중요한 것은 메시지와 내용 자체이지 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 마샬 맥루한

 

 

데이비드 리스먼은 그의 책 <고독한 군중>에서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따르는 '내부 지향형inner-directed' 인간이 줄어들고 사회의 가치와 신념을 따르는 '타인 지향형other-directed' 인간이 늘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 리스먼은 객관적 존재가 자기 성찰을 대신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는 인간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지만 통제하는 측은 바로 '우리'여야 한다. 맥루한은 매스미디어 사회에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밝혔다. 누구나 가끔 뇌가 몸을 떠나 외부 세계까지 확장되어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들 때 다시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혼자만의 사고를 하는 것은 몹시 어렵다. 깊이는 인간의 의식이 바깥에서 안으로 가져온 많은 정보를 정리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외적인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 때 깊이가 가능하다. 내적으로 행복한 삶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내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며 끊임없이 바깥세상에 한눈을 팔고 있다면 결코 불가능하다. 주의력 결핍이나 인터넷 중독을 비롯해 기술과 관련된 다른 모든 병폐는 전부 바깥을 향해 고정된 시선을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는 균형의 상실,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 스크린을 향한 충동이 야기하는 마음 상태다. 우리는 가족과 함께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과 함께, 스크린을 위해, 스크린 안에서 살고 있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군중 안에 존재하는 작은 단위인 가족에게도 가족만의 내적 삶이 있다. 이 내적 삶을 충만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스크린에서 떨어져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과 가족은 군중에게 의지하게 되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저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따라 스스로를 정의하게 된다. 소로는 강박적으로 우체국을 찾는 남자는 자신으로부터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가족 구성원이 무엇을 위해서든 스크린을 더 많이 찾을수록 진심을 나눌 시간은 줄어들고 가족의 내적 삶은 성장하지 못한다.

 

 

디지털 문화는 한 시간도 네트워크에서 달아나지 말라고 우리를 붙잡으며, 달아나면 뒤쳐진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조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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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역학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 법칙', 에너지는 형태가 변할 수 있을 뿐 새로 만들어지거나 없어질 수 없다.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 가운데 시간도, 사랑도, 삶의 가치를 찾는 관심과 노력도 총량이 정해져 있을 수 있다.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포기하거나 버려야 하는 것처럼....

 

 

[본문발췌]

 

 

내가 생각하는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란 삶에서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더욱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미니멀리스트에게 물건의 많고 적음은 그저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를 소유한 물건이나 타인의 인정 등 외부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 삶,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삶이 바로 최소한주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인 것이다.

 

 

주변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여도 자신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에 가치를 두고 온 열정을 쏟는 삶.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미니멀리즘이자 꿈꾸던 삶의 자세. 자신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더욱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삶.

 

 

여유롭고 단순한 삶을 살려면 가장 먼저 소유한 물건부터 버리고 마음도 비워야 한다. 우리는 뭔가를 추구하다 보면 비우기보다 채워 넣는 쪽으로 몰입하기 쉽다. ... 하나를 손에 넣으려면 그 전에 먼저 하나를 버려야 한다. 하나가 내 안에 들어오면 다른 하나를 내려놓고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소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에 쓰지 않는 것은 버리고,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생각 외에는 버리는 것이다.

 

 

조금만 소유하고 의미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삶, 외면의 욕망이 아닌 내면의 욕망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본질에 충실한 삶. 이것이 바로 미니멀리스트에게 주어지는 가장 좋은 선물이 아닐까.

 

 

물건이 넘치면 사람이 사라진다.

 

 

버리고 비우기의 최고 경지는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비워야 할 것은 물건만이 아닌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걱정, 욕심, 집착, 이것들을 모두 버리고 소중한 것만 지니고 살아가고 싶다. 바로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순간순간, 내 앞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말이다.

 

 

물건은 하나밖에 없으면 마지막까지 소중히 쓰고 다루지만, 많이 가지고 있으면 아까운 줄 모르고 막 쓰게 된다. 적게 소유하고 살면 아이들도 그만큼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기를 수 있다.

 

 

인생은 도전과 실패의 반복. 성공보다 한걸음 내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0보다 1을 목표로' 삼으라고 가르친다. 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도전하고, 실패해도 "괜챃아, 멋진 도전이었어!"라고 스스로를 칭찬해주며 다음 기회를 위한 발판으로 삼으면 된다고 조언한다. 그러면 인생에 대한 두려움과 도전에 대한 망설임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 라인홀드 니버, <평온을 비는 기도> 중.

 

 

좁았던 것은 집이 아니라 버리고 내려놓지 못한 마음, 이제 갖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니까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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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뿌리에서 같은 지향점을 다른 길로 가는 세 종교 이야기. 그들 모두 배려와 관용의 미덕을 가르치지만 자신들만이 신을 독점하기 위해 갈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문발췌]

 

 

역사를 보면 정치든 사상이든 관용성을 보이며 상대를 포용하면 융성했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면 어김없이 쇠퇴를 불러왔다.

 

 

높은 산을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하느님께 가는 길도 이와 같지 않을까? 틀린 길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길이다. 각 종교마다 올바르게 사는 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유대교에서는 '율법', 기독교에서는 '복음', 이슬람교에서는 '코란', 불교에서는 '다르마', 힌두교에서는 '요가', 도교에서는 '도'라 부른다.

 

 

무신론자인 이탈리아 <라 레푸블리카> 신문 설립자가 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신을 믿지 않거나 믿음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신이 용서할지'를 물었다. 그때 교황은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으며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고 답변했다. 교황조차 하느님의 자비는 무신론자에게도 베풀어진다고 답한 것이다.

 

 

유대인은 영원한 유목민으로 방랑과 이산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떠돌이 민족은 척박한 환경에서 고난을 극복해야만 살아 갈 수 있다. 정주민족은 절대로 이들을 이길 수 없다. 정착사회에서 편하게 자란 민족이 사막과 황야의 시련에 단련되고 생존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유목민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유대인의 공동체 복지제도,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으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한다.'

 

 

"망각은 포로 상태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 - 유대인 속담.

 

 

유대의 훌륭한 랍비로 추앙 받고 있는 힐렐은 유대 율법의 모체인 <모세오경> 즉 <토라>가 무엇인지 짤막하게 이야기해 달라는 질문에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너의 이웃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토라>의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부연 설명이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유대교는 '율법에 의한 구원'을, 기독교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이슬람교는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세 종교의 같은점은 유일신, 세 종교의 뿌리 <구약성경>, 부활과 최후의 심판. 다른점은 예수에 대한 관점(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선지자로 봄), 구원에 대한 견해, 안식일 차이(이슬람 금, 유대교 토, 기독교 일), 사제의 유무 등....

 

 

이슬람교의 의미 자체가 평화를 뜻하는 순종이다. 무슬림들의 일상의 인사말 "앗 쌀라 알라이쿰(평화가 당신에게 있기를)"도 평화를 나타낸다. 평화는 이슬람교의 본질이요, 목적이다.

 

 

사람을 해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근심, 말다툼, 그리고 빈 지갑이다. 몸의 모든 부분은 마음에 의존하고 마음은 돈 지갑에 의존한다. 돈은 사람을 축복해 주는 것이다. 부는 요새이고 가난은 폐허다. - 유대교 경전 <탈무드>가 가르치는 돈의 중요성에 대한 유대인 속담.

 

 

모든 교조주의의 특징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틀림으로 몰아 죽음으로 징계하려 한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종교적 원리주의가 발흥하면 그 역사는 틀림없이 망하거나 쇠퇴했다.

 

 

우주 속에는 필연적이고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가 딱 한 분이 계시다.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 간의 갈등이나 논쟁은 저마다 신을 독점하려는 데 있으며 자신들만이 필연적이고 영원하고 무한하다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 파스칼, <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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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다람쥐 챗바퀴 돌듯, 무미건조한 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순간순간의 경험이 된다. 그 선택은 내 몫이다.

 

 

[본문발췌]

 

 

다름과 독불장군적인 기상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요소다. 만일 당신이 나와 너무 똑같다면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내게 무얼 배우겠는가? ... 우리의 서로 다른 흥분을 접하는 건 함께하는 삶의 또 다른 선물이다.

 

 

에머슨은 세계가 Nature(자연)와 Soul(정신)로 이루어져 있으며 Nature는 nature(일반적으로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공기, 강, 나뭇잎 따위), art(인간의 의지로 만들어진 집, 운하, 동상, 그림 따위), 다른 모든 사람들, 자신의 육체를 포괄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Nature는 철학적인 의미와 자연, nature는 일반적인 의미와 자연으로 규정된다.

 

 

모든 세상은 눈을 통해 받아들여져서 영혼에 닿으며 거기서 더 중요한 것, 즉 외관들보다 심오한 영역의 상징이 된다. 이상적이고 숭고한 영역, 오로지 물질성의 결여와 정적만을 나타내는, 우주가 꾸준히 눈부시게 존재하는 심오한 고요의 영역. 에머슨은 가정적이고 사회적이고 집단적이며 행동을 요구하는 세상을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흔들림 없는 내면의 광휘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직관적이었으며, 이성적인 말을 만들지 않고 열정적이고 번역 불가능한 노래에 심취했다. 인간은 무릇 가정적이고, 견실하고, 도덕적이고, 정치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바람의 손아귀에 든 먼지처럼 소용돌이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의 유연하면서도 꺽이지 않는 신념이다.

 

 

도덕적 일탈은 호손의 중심 주제다. 선과 악, 사회와 개인 간의 긴장 관계는 그 중심에서 멀 수가 없다. <일곱 박공의 집>에서 호손의 주제는 권력의 부패와 거의 영원히 대물림되는 그것의 연속성이다. 이 작품은 또한 보상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과거에 저당 잡힌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역사라는 공동의 불길에 갇힌 삶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날이 선, 반짝반짝 빛나는 십 대, 자물쇠 채워진 시간. 단단한 이십 대. 느슨해지는 삼십 대. 초조한 사십 대. 가끔은 희망과 약속의 시간이 있는, 버팀의 오십 대. 지금은, 육십 대. - 가자미, 여덟

 

 

우리의 스승이 되어주는 건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지 일반적인 게 아니다. 사랑의 관념은 사랑이 아니다. 바다의 관념은 소금도, 모래도 아니다. 물개의 얼굴은 관념에서 솟아올라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사건과 함께 풍성해지고 즐거워져야만, 비로소 생각이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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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자체가 길 위에 있고, 그 길은 언젠가 끝난다. 길의 끝을 향해 쫓기듯 빨리 갈 필요는 없다. 여유롭게 주변도 둘러보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 가볍게 인사할 수 있는 삶의 길을 걷자. 소요유(逍遙遊)...

 

 

[본문발췌]

 

 

길을 걸으며 생각을 담고 인생을 깨닫고 자신을 직면하는 것이 길이 할 일이다.

 

 

길에서 느낀 행복, 자유, 평화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내 고향 제주에 내기로 했다. - 서명숙, <사람을 살리는 길, 치유하는 길>

 

 

수묵화에 자신의 색을 입히는 것이 인생이구나. - 박수자, <길은 '마음의 병' 처방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길 위에서의 질주를 잠시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자. 인생이란 길 위에서 찾은 자기만의 삶의 방식이 행복지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왜 뛰고 있는지 모른 채 정신없이 달려가는 삶을 살고 있다. 남들이 뛰니까 남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그냥 정신없이 달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만 가는 삶에는 남들만 있을 뿐 자신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 오솔길에 들어서면 누구나 철학자가 되어,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와서 지금 어디에 있고 앞으로 어디를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를 자문한다. 마음의 여유로 해서 비로소 찾은 자기와의 만남이다. 바로 이것이다. 남들을 따라 정신없이 뛰어가던 큰길에서 잠시 벗어나 자기와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숲속의 오솔길 만들기. 큰길을 그렇게 달려가 봤자 결국은 아무것도 만져지는 것이 없다는, 달려간 길 끝에서의 허망을 아는 사람만이 목적이 아닌 그것으로 가는 과정의 삶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마련이다. - 전상국, <삶의 오솔길 걷기>

 

 

"나는 이 세상에서 세 가지의 소원이 있으니,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고, 이 세상의 좋은 일을 하고 싶은 것이고, 또 이 세상의 좋은 경치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 이수광, <지봉유설>

 

 

"그대들의 눈에 비치는 사물들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바라보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사람의 일상과 일생은 채우고 비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학습, 체험, 지적인 일, 사무, 인적 연결 등은 정신적으로 채우는 행위이고 식음, 운동, 접촉, 육체적 노동 등은 신체적으로 채우는 행위이다. 우리는 채우는 것의 결과로 지식축적, 명예, 지위, 권세 등의 지적 적신적 산물과 체력 외모 등의 형태적 산물을 향유해간다. 그런데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채워진 산물들에서 채움과 비움이 조화를 이루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지만 균형을 잃으면 병들고 불행해진다. 우리 몸에서 채움이 크고 비움이 적어 기와 혈의 순환과 소통이 원만하지 못해 오는 결과가 비만, 암과 같은 신체적 질병이고 마음에 채움이 크고 비움이 적어서 온 결과가 갈등, 불면증, 성냄, 불만, 소외감, 우울증 등의 정신적 질병이다. 이렇게 우리의 몸과 마음,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행복은 결과적으로 채움과 비움의 소통과 순환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순행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도덕경>의 '爲學日益(위학일익), 爲道日損(위도일손), 배움은 채우는 것이요, 도는 비우는 것이다'라는 말은 이 채움과 비움, 소통과 순환의 가치와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채움과 비움의 순환이 순조롭게 이뤄져 조화하고 있는지 챙겨볼 일이다. 구길본, <채우기와 비우기>

 

 

걷는다는 것은 찬찬히 들여다보며 살피고 음미함을 통해 몸과 마음이 어떤 대상과 하나가 될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다.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다. 생명의 순환 그물 속에 한코의 그물임을 시작하는 것이다. 걷기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사느라 무심했던 것, 스쳐왔던 것에 대해 뒤돌아봄이요, 미처 몰랐던 세계의 발견이다. 그리하여 걷기는 시나브로 치유와 소통, 배려와 존중, 더불어 삶을 찾는 학교이자 병원이고 도서관이다. - 이성근, <온 마음으로 걷기>

 

 

내마음으로 섭취되는 것은 독초도 있고, 약초도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탐욕, 시기, 질투, 애증, 분노, 경멸, 무시, 사기, 배반, 억압, 지배, 비난, 비판, 근심, 걱정, 슬픔, 비탄 등 부정적 생각과 행동은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초와 다름없을 것이다. 반면 사랑, 자비, 연민, 희생, 봉사, 인내, 신뢰, 자유, 평등, 조화, 칭찬, 공경, 존중, 희망, 기쁨, 희열 등 긍정적 생각과 행동은 우리 마음을 치유하는 약초에 해당된다. ... 걷는 것은 세심洗心하는 것이다. 걷기는 일상의 탈출을 통해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재탄생시킨다. 몸과 마음을 자연과 생명 본원의 청명한 기운으로 환원한다. - 구길본, <걷기와 세심>

 

 

도종환, <처음 가는 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뿐이다. / 두려워 두려워하였지만 /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길의 존재 이유를 찾아가는 것이다. 내가 왜 이 길을 걷는가에 대한 답은 이 길은 왜 여기에 존재했는가에 대한 물음과 닿아 있다. .... 길은 일부러 만든다고 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이유가 분명해야 길이 되는 것이다. 또한, 길은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인생사가 투영되어 있을 때만이 사랑을 받는다. - 김산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길>

 

 

길은 무엇인가? 길의 철학이 무엇일까? 왜 사람들이 길에 관심을 두는가? 길은 걷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길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고 길 위에는 인생과 삶과 철학이 있다. 길은 소통이고 관계이다. 길에는 사람이 있다.

 

 

트레킹. 산 정상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는 것이 아닌, 그 정상까지 가는 길 위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사람 살아가는 일이 그렇다. 오직 '무엇'을 위해 걸어가는 길은 '어떻게' 걸어야 즐거울 것인가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나중에 정승처럼 살기 위해서는 현재를 개처럼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처럼 산 그가 정승이 될 수도 없을 뿐더러 설사 정승이 됐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늙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개 바라보듯 할 것이 분명하다.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을 향해 가는 과정, 그 길 위에서의 시간을 생애 최고의 순간 만들기에 마음을 쓸 일이다. - 전상국, <산길에서 나를 만나다>

 

 

길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걸어간 삶의 궤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길 위에서 그네들이 남기고 간 숱한 이야기와 만나게 된다. - 전상국, <김유정의 그 '길'을 걷다>

 

 

지리산 그 푸른 능선의 구불구불한 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각인된다. 쩨쩨하게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살지 말자. 당당하게 독립적이고 자존을 지키며 살자. 작은 감정에 휘둘려 미혹에 흔들리지 말고 큰 산 그림자가 되자. 몸이 경험한 만큼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 박수자, <지리산에는 못난 소나무가 산다>

 

 

원종문, <오래 두고 걷고 싶은 구도의 길 '오헨로'>. 시코쿠 순례길. 길은 누구에게도 기대나 의무 같은 조건이 없이 받아주고 돌려보내는 넓은 포용력을 보여준다. 길 위에서 누군가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누군가는 새로운 삶을 발견하고 준비하는 무게를 지며, 누군가는 삶을 정리하고, 누군가는 만남을 통해 관계를 형성해나간다. 길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늘 우리 주변에 서 있는 찾기 쉬운 동무이다. 

 

 

차를 타고 점 중심으로 본 제주도와 올레길을 걸으며 선 중심으로 경험한 제주도는 맛이 다르고 느낌과 시각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 길은 도로와 다르다. 길은 걷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도로는 차와 산업과 경제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길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고 도로는 사람이 만들고 개발한 것이다. 길 위에는 인생과 삶과 철학이 있고 도로 위에는 산업과 경제와 과학이 있다. 길은 소통이고 도로는 속도다. 방향 중심이 길이고 속도 중심이 도로다. 도로에는 일이 있지만 길에는 관계가 있다. 도로에는 차가 있고 길에는 사람이 있다. 도로는 사업을 위해서 바쁘고 길은 만남을 위해서 여유롭다. 도로는 도시 중심이고 길은 지역과 시골 중심이다. 도로는 집권적이고 중앙 집중적이지만 길은 분권적이고 지역 중심적 분산적이다. - 안동규, <길의 철학>

 

 

로버트 푸르스트, <가지 않은 길>. ....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노라고 /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노라고 / 그리고 그것이 내 운명을 정했노라고....

 

 

공간적인 길, 삶에서의 방법이나 수단을 의미하는 길, 살아갈 때의 방향이나 지침을 나타내는 길.... 자동차를 타기보다 걷기를 즐기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아무래도 삶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일 거라고 선뜻 믿어버리게 되는 것은 길이 지닌 이 은유적 속성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인생에도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다거나, 누구는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거나, 지름길을 택했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삶의 한 단면을 길에 비유한 것입니다. - 한명희, <이런길, 저런길, 요런길>

 

 

길은 소통과 순환의 통로가 될 때 가장 빛나는 것이다. - 이성근, <동해 해파랑길에서>

 

 

선진국의 개발과 번영은 지구의 환경을 담보로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다. 그러나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와 인위적 쾌적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그나마 세계화의 소통 속에 지구의 안위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다행이다. 우리네 삶은 '지구별 여행자'라는 나그네 길, 잠시 머물다 가는 지상의 삶이 아름다운 건 공존의 삶을 살 때 가능할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원이며, 뿌리며, 울이라는 인식이 기본 바탕이다. 인간 중심의 삶을 선택하면서 우리는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불행의 늪으로 추락하고 있다. - 신용자, <길의 3박자>

 

 

경제성장은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고 편리하게 해주었지만, 국민들의 정서적 측면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서 '성공'이란 단어는 '부의 창출'이라는 도식이 형성되었다. 이 도식에 따라 국민들은 경제적 논리에 포섭되었고, 이는 성과에 대한 집착과 압박, 지나친 빠름의 추구, 이기주의, 무임승차 등의 문제들이 순환되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부작용의 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다양한 창조적 시도들이 전개되고 있다. 국가 중심의 논리에서 지역 논리로, 빠름보다는 장기적 안목과 계획을 안배한 느림으로, 이기주의보다는 상생을 위한 네트워크 사회로, 무임승차보다는 참여를 통한 소통으로의 시도가 그것이다. 이런 시도들이 우리 사회에 좋은 변화를 이끌어내고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계 또한 내포하고 있다. - 원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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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Before Covid) / AC(After Covid)....

질병이 사회, 문화, 경제, 환경 등 삶의 모든 분야에 변화를 가속화한 분기점에 서 있다.

 

 

[본문발췌]

 

 

미래에 닥칠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준비하고 대비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코로나19 팬데믹은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코로나19 이후에도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인간 본성, 기술 발전, 역사적 트렌드 등과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어떻게 일치하는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먼 미래에 중요해질 기술에 대한 논의만큼이나 향후 10년간 광범위하게 채택될 만한 기술에 대한 논의가 중요한데, 퓨처리스트 인스티튜트 팀과 나는 이 차이를 "이제 곧"과 "어쩌면 언젠가"의, 시간대로 나누어 부른다. 먼 미래에 더욱 중요해질 것들이 무엇인지 아는 일만큼이나 머지않은 미래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일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보자. 원격 근무가 좀 더 보편화될 것이라는 기대는 지난 4년간 앞으로 10년을 내다보며 "이제 곧"이라고 이야기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와 바내로 지구 밖 우주에서 근무하게 될 것이란 기대는 "어쩌면 언젠가"의 시간대에 있는 일이다. 사실 원격 근무에 대해 "어쩌면 언젠가"로 논의하는 토론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기업이나 조직이 이를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원격 근무 환경의 변화 외에도 세 종류의 직업, 즉 세 종류의 노동자들에 대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필수 노동자, 지식 노동자, 그 외 노동자. 먼저 필수 노동자들을 위한 필수 직업이 있다. 이 직업들은 사람들이 일터에 나와야 할 수 있는 일들을 말한다. 여기에는 의료, 공공시설, 제조업, 농업, 유통망 그리고 그 외에 경제가 굴러가고 사회 전반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산업들이 해당한다. 두 번째로는 지식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사무실 밖에서 업무를 볼 수 있는 인력들이며 기술, 금융, 여타 분야의 많은 산업군이 여기에 속한다. 사무실 밖에서 운영될 수 있는 전문직종 외에도 필수 직업의 사무, 행정, 경영 인력들 또한 사무실 밖에서 일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인력 분류가 있다. 이 분류는 말 그대로 그 외의 노동자들이다. 불행히도 이 부류의 많은 인력이 사무실 밖에서 일할 수가 없고 이런 노동자들은 필수 인력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서비스 기반의 일들이 대표적이다. 식당과 술집, 영화관, 카지노, 미용실, 네일숍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전체 숫자로 따지면 정말 많은 수의 일들이 필수적이지 않은 현장 업무 인력으로 분류된다.

 

 

핀테크에서 발견한 세 가지 트렌드 - 금융 중개 탈피, 민주화, 사용자 경험의 향상 - 는 교육의 미래에도 같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첫 번째 트렌드는 교육 길드 시스템을 해체함으로써 교육에 들어가는 중간 단계 비용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두 번째 트렌드는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접근을 민주화하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시스템을 보편적으로 만들어 보다 많은 이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세 번째 트렌드는 학습 경험을 향상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재택근무의 확산이 갖는 가치는 간단하다. 직장인들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용주의 지출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고용주는 사무실 공간, 편의시설, 서류 용지 등의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고 직장인들이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으니 주차 공간도 필요 없어진다. 전자 상거래가 향후 수십 년간 에너지 수요를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다면 재택근무 추세는 그러한 수요 증가에 제동을 거는 요인이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재택근무를 하는 직장인들은 늘어날 것이다. 재택근무 급증에 팬데믹의 충격이 한몫하더라도 증가 추세는 팬데믹 이후에도 꾸준히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짚어 보자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재택근무와 온라인 교육 모두 주목받게 된 셈이다.

 

 

지난 15년간 대체로 많은 이들이 미국의 도시화가 큰 추세가 될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팬데믹의 몇 가지 영향으로 도시화의 흐름이 바뀔 수도 있다. 먼저 재택근무를 경험하며 공간의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뀔 수 있다.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직장에 나가는 대신 직장에서 떨어져 비좁은 공간에서 가족들과 같이 지내며 업무를 봐야 한다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더 넓은 공간을 찾을 것이다. 게다가 밀집된 도심일수록 식료품이나 생필품이 품절될 가능성이 크고 공공장소에서 전염의 위험성 또한 높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도시나 도심부보다는 교외 지역이나 시골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 부부가 재택근무하고 자녀들은 온라인으로 수업을 대체하는 가정이라면 이러한 선호는 더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학교든 직장이든 가족들이 한 지붕 아래서 온라인으로 일을 처리하는 상황이라면 물리적으로 오갈 필요가 없는 학교나 직장과 가까운 아파트에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고 그럴 바에는 공간이 넓은 주택을 선호할 거이다.

 

 

물류 창고와 유통 센터에 대한 수요가 장가할 것으로 보인다. 유통망이나 전자 상거래는 그 특성상 본질적으로 이러한 수요를 견인하는 주요 요인이 될 것이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hold Brecht는 그의 작품 <서푼짜리 오페라The Threepenny Operas>에서 인생의 이치를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일단 먹고 나야 도덕을 찾는다(Erst kommst as fressen, dann kommt die Moral)"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가 불러야 그 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음식을 원활히 구할 수 없다면 경제는 통째로 흔들리고 만다.

 

 

'합의편향consensus bias'. 객관적 진실과 현실이 주관적 인식의 문제가 되고, 고도의 개인 맞춤형 정보는 왜곡된 인식을 강화하며, 사람들은 동질적인 하위 집단을 이루고 주관화된 정보들을 소비하고 공유한다. 이것이 일그러진 미디어의 민낯이다. 이 같은 민낯은 코로나19와 같은 위기를 기회삼아 고개를 들 것이다. 그때마다 미디어 생태계는 큰 피해를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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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 시절 MT대신 답사여행을 떠나는 친구가 알려줬던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 유산 답사기 1권 '남도답사 일번지', 20여년이 흐르고 국내편에 이어 일본편, 중국편 등 우리 문화와 연관이 있는 주변 국가들까지 확장판이 나왔다.

 

어딘가 여행을 떠날 때,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에 포함된 지역이라면 가기전에 읽고, 가서 읽고, 갔다와서 읽어보길 권한다.

 

 

[본문발췌]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나는 옛 시인이 '인간도처유청산'이라고 한 것을 살짝 바꾸어 생각지도 못했던 상수를 만나거나 신기한 것만 보면 '인생도처재상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지곡서당에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가 신입생이 재학생을 불계로 이기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인생도처재상수'라고 말했더니 돌아가신 청명 임창순 선생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면서 "자네는 한문공부를 좀더 해야겠어"라며 '재(在)'는 be동사이고 '유(有)'는 have 동사이니 제대로 말하려면 '인생도처유상수'라고 하라고 하셨다.

 

 

'누각을 일으켜 새로 세우는 것은 나라를 경륜함과 비슷함이 있으니 기운 것은 바르게 하고 위태로운 것은 편안하게 하고 ... 흙은 쌓되 단단히하고 땅을 깊이 파서 습기를 없애는 것은 그 큰 기업을 튼튼히하는 것입니다. 들보와 마룻대와 기둥과 주춧돌을 웅장하게함은 무것운 것을 지탱하는 것이 약해서는 안되는 까닭이요, 대공과 지도리와 문설주가 모두 제각기 갖춤이 있는 것은 작은 제목은 큰 소임을 맡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추녀 끝을 시원하게 트이게 함은 사방으로 보고 들어 총명하자는 것이요, 밑을 내려다보면 반드시 두려우니 이는 경외를 갖자는 것이요, 멀리 보아 빠뜨리지 않으니 그것은 포용함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제비들이 와서 서로를 하례함은 인민들이 기뻐함이요, 파리가 붙지 못함은 간사하고 참소하는 무리가 물러감이요, 그림이 사치스럽지 않음은 제도문물이 중도를 얻음입니다. 이때를 맞추어 여기에서 노는 것은 문무의 긴장에 이완이 알맞게 따른 것이니 오르고 내릴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정치를 행한다면 이 누각의 유익함은 진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 하륜, 경회루 기문.

 

 

배를 건조하고 싶으면 사람들에게 나무를 모아오고 연장을 준비하라고 하는 대신 그들에게 끝없는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켜라. - 쌩떽쥐뻬리

 

 

모든 나라의 왕궁 앞에는 그 나라를 상징하는 광장이 있다. 광장은 근대 시민사회의 상징적 공간이며 왕궁 앞 광장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왕조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 그것은 고궁 앞 광장이거나 유서깊은 거리다.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과장,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광장과 샹젤리제거리, 영국 런던의 버킹엄궁과 트라팔가광장,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이 있는 보리수 아랫길에 다녀오지 않고 중국, 프랑스, 영국, 독일에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없다. 광장은 도시의 심장이고, 거리는 동맥이며, 골목길은 실핏줄이다. 이것이 살아숨쉬는 도시공간의 구조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 김수근 선생의 건축수상집

 

 

선암사는 1년 365일 꽃이 없는 날이 없다. 춘삼월 생강나무, 산수유의 노란 꽃이 새봄을 알리기 시작하면 매화 살구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 자두 배 사과 영산홍 자산홍 철쭉이 시차를 두고 연이어 피어난다. 그것도 여느 곳에서는 볼수 없는 늠름한 고목에서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예쁘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선암사는 열흘마다 몸단장을 달리한 것처럼 우리를 새롭게 맞이한다. 봄의 빛깔이란 어제와 오늘은 비슷해도 열흘을 두고 보면 확인히 다르다.

옛사람들은 화무십일홍이라고 했지만, 선암사는 열흘마다 다른 꽃을 선보이며 꽃이 지지 않는 절이 되었다. 신록의 계절에는 온 산이 파스텔톤의 연둣빛으로 물드는 것이 꽃보다 아름다운데, 백당나무, 불두화는 주먹만한 하얀 꽃을 불쑥 내민다. 이때 계곡 한쪽에서는 산딸나무 층층나무의 새하얀 꽃이 청순한 자태를 조용히 드러낸다. 절마당에서는 태산목이 연꽃봉오리 같은 탐스러운 하얀 꽃을 오늘은 이 가지, 내일은 저 가지에서 한달 내내 피웠다 떨어뜨린다. 이처럼 신록의 계절에는 나무꽃이 하얗게 피어난다.

그러다 여름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오동나무는 보랏빛 꽃대를 높이 세우고, 자귀나무 빨간 꽃은 뼘을 재듯 가지마다 옆에서 뻗어나온다. 여름이 깊어지면 배롱나무꽃이 피기 시작해 장장 석달 열흘을 위부터 아래까지 온몸을 붉게 물들인다. 그때가 되면 선암사 한쪽 구석에는 모감주나무의 노란 꽃, 치자나무의 하얀 꽃, 석류나무의 빨간 꽃이 부끄럼을 빛내며 우리에게 눈길을 보낸다. 봄이 나무꽃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풀꽃의 세상이다. 선암사 뒤안길 돌담 밑에는 봉숭아 채송화 달리아가 돌보는 이 없이도 해마다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도 잘도 피고 진다. 그러자 절집의 꽃으로는 역시 가녀린 꽃대에 분홍빛으로 청순하게 피어나는 상사화가 제격이고, 여름이 짙어가면 삼인당 섬동산 빨간 꽃술의 꽃무릇으로 환상적으로 뒤덮인다.

가을은 은행잎이 떨어져 절마당을 노란 카펫으로 장식하고 청단풍이 새빨갛게 물들어갈 때가 절정이다. 가을이 깊어가면 밤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가 온 산을 마치 캔버스에 바탕색 칠하듯 차분한 갈색을 뒤덮으며 들국화 구절초 쑥부쟁이 코스모스 감국이 여름꽃의 바통을 이어받아 선암사 화단을 장식하며서 호젓하고 스산한 정취를 자아낸다. 가을을 심하게 타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계절 선암사에 오면 누구나 여린 감상에 물들게 된다. 사람들은 곧잘 겨울은 삭막하다고 말한다. 겨울나무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다며 꽃 피고 잎 돋던 그때와 비교하며 깊은 정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선암사의 겨울은 그렇지 않다. 소나무 전나무 같은 늘푸른바늘잎나무야 우리 산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선암사는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 남해바다 가까이 있어 늘푸른넓은잎나무의 난대성 식물이 잘 자란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녹나무 태산목 팔손나무 붉가시나무 종가시나무 호랑가시나무가 여전히 절마당 곳곳에서 초록을 빛내고 있다. 남들이 요란을 떨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화려한 단풍으로 자태를 뽐낼 때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묵묵히 자기를 키워온 이들 늘푸른 넓은잎 나무가 윤기나고 두터운 사철 푸른 잎을 자랑하며 나무 전체가 꽃이라는듯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직도 남아 있는 산수유나무 마가목 먼나무 호랑가시나무의 빨갛고 탐스러운 열매가 빛바랜 계절의 꽃어럼 행세하고 있을 때 벌써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빠알간 동백꽃이 겨울은 결코 무채색의 계절만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때 풀꽃이 사라진 쓸쓸한 화단 곳곳에서는 키작은 남천의 빨간 잎, 빨간 열매가 빛의 조건에 따라 짙고 옅음을 달리하며 가녀린 맵시를 다소곳이 내보인다. 남쪽이어서 눈이 드물 것 같지만 선암사에는 눈도 많이 내린다. 눈 덮인 선암사 진입로 산자락을 뒤덮은 산죽밭의 모습은 환상의 겨울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초록과 흰색의 향연이다. 

 

 

어느 나라 건축인들 자연과 건축이 교감하지 않으리오만 우리 전통건축에서 자연과 인공이 어울리는 방식은 아주 특별하다. 같은 문화권이지만 중국과 일본의 저택들은 모두 울타리 안에서만 건축이 이루어진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섬세하고 치밀한 인공의 손길이 강조되고, 중국은 높은 담장 속에 장대한 공간을 연출하는 데 힘쓴다. 비록 중국 전통건축에도 차경이라는 개념이 있어 자연풍광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처럼 자연과 인공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전통건축물은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연이고 또 하나의 풍경이다. 중국의 건축물은 장대하지만 마치 벽처럼 느껴지고, 일본의 전통건축물은 정교하지만 나약해 보여 건축물이 아닌 가구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에 비해 한국의 건축은 주변 경관을 깍고 다져서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자연 위에 그냥 얹혀 있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전통건축은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 프랑스 건축하협회장 로랑 쌀로몽

 

 

전국 돌담길. 고성 학동마을, 제주 하가리마을, 담양 삼지천마을, 강진 병영성마을, 산청 남사마을, 영암 죽정마을, 여수 추도마을, 대구 옻골마을, 예천 금당실, 부여 반교마을

 

 

나물은 기본적으로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음나무순 두릅나무순 같은 나무의 새순이다. 음나무순은 두릅나무보다 맛이 더 싱그러운데 이름은 개두릅이다. 이외에도 오갈피나무 가죽나무 고추순나무 빛새나무 노린재나무 산초나무 왕초피나무 삿갓나무 참빗살나무(화살나무) 우산대나무 다래넝쿨의 새순은 다 나물이 된다. 또 하나는 다년초, 즉 풀의 새잎이다. 쑥을 비롯해 달래 냉이 씀바귀는 나물의 고전이고, '취'는 나물의 대종으로 취자가 붙은 풀은 다 나물로 먹는다. 곰취 참취 미역취 단풍취 바위취(범의 귀) 전대취 각시취 분취 수리취. 이외에도 많다. 고사리 고비 개발자국 백지 장녹(자리공)순 미남지싹 얼레지 비비추 엉겅퀴 민들레 쇠비름 콩고투리 청침 부지깽이나물 꿩나물 복주머니나물 벌통나물 기름나물 비름나물 멸구나물 산마늘 는쟁이나물(명아주) 으아리(위령선). 당귀 잔대 창출 머위 둥굴레 돌나물, 참나물 곤드레 고들빼기 돌나물....

 

 

하늘은 이불,  땅은 요, 산은 베개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독

크게 취해 거연히 춤을 추고 싶어지는데

장삼자락이 곤륜산(히말라야)에 걸릴까 걱정이 되네.

- 진묵대사의 무량사 우화궁 건물 주련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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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인 작가의 여행과 독서에 대한 또 다른 책!

 

 

[본문발췌]

 

 

(1권) 책을 읽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다

 

 

그렇더라도 나는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어지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물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진짜 양서良書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한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 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준다. - 법정  스님 <무소유 중에서>

 

 

천가지 욕망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냐, 한 가지 욕망을 이겨내는 것이 중요하냐. - 영화 <삼사라> 중에서.

천가지 채울 수 있는 욕망보다 이겨내기 어려운 한 가지 욕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일까?.....

 

 

지쳐버린 많은 살람들은 그동안 자기 자신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일을 잠시 멈추고 자신들의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지 않은 것이다. 자신에게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모든 일을 잠시 내려놓고, 그동안 무시했던 그대의 영혼이 다시 그대를 만나게 하라. 그것은 그대의 잊혀진 신비와 다시 가까워지는 멋진 일이다. - 켈트인의 속담 중

 

 

진정한 여행은 어느 정도 삶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 삶에 작은 변화라도 없었다면 당신은 진정한 여행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의 삶은 누군가에겐 풍경이 된다"

 

 

진정한 걷기 애호가는 구경거리를 찾아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기분을 찾아서 여행한다. 우리들의 발에는 뿌리가 없다. 발은 움직이라고 생긴 것이다. -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예찬>

 

 

"자, 내 운명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세",

"운명아, 너 가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

"여행아, 너 가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 - 오이디푸스

 

 

"우리 중에 떠돌아 다니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양치기밖에 없어."

"그렇다면 전 양치기가 되겠어요."

산티아고의 당돌함이 멋지다 생각할 즈음 그의 아버지는 금화 세 개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으로 양들을 사거라.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 맘껏 돌아다녀. 우리의 성이 가장 가치 있고, 우리 마을 여자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걸 배울 때까지 말이다." - <연금술사> 중에서

 

 

대지는 우리에게 온갖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장애물과 스스로 겨눌 때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 <인간의 대지> 중에서

 

 

산티아고에게도 길을 떠나던 날부터 읽으려 했던 책이 한 권 있었다. 그러나 대상 행렬을 바라보거나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그는 자신의 낙타를 더 잘 알고 싶었고, 낙타와 친해지기 시작하자 책을 던져버렸다. 책은 이젠 그에게 그저 무게만 나가는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 <연금술사> 중에서

 

 

사막은 사람에게 행동하라 가르친다. 그 행동이란 의도된 철학적, 존재론적 행위가 아니다. 생존을 위한 안간힘일 뿐이다. 사막 같은 극한의 땅위에 서면 누구나 일상을 뛰어넘는 사색과 결단을 하게 되고 마침내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사막은 책 따윈 버리고 대신 땅을 읽으라 한다.

 

 

"단단하고 높은 벽이 있어 그곳에 하나의 달걀이 부딪쳐 깨질 때, 아무리 그 벽이 옳다고 해도 아무리 달걀이 잘못했다고 해도 나는 달걀 편에 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개개인은 하나의 달걀과 같으며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깨지기 쉬운 껍질에 쌓여 있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싸우는 것은 높은 벽이며 그 벽은 곧 제도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

 

 

가장 멋진 여행은 아직 떠나지 않은 여행이며, 가장 훌륭한 책은 아직 쓰이지 않은 책이다.

 

 

이상 사회, 유토피아는 경제 지표나 통계 등 숫자로 가늠되는 나라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 얼굴에 담긴 표정, 그들이 보이는 씀씀이나 여유에서 드러날 것이다.

 

 

여행은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꿈을 하나 둘 잃어가는 것에 더 가깝다. 가슴 속에 고이 간직했던 땅들이 마침내 눈과 코, 발바닥 앞에 벗겨질 때 그 만큼의 감격과 함께 꼭 그 만큼의 상실감이 따라온다. 꿈꾸던 곳을 디딘 순간, 꿈이 하나둘 가슴팍 어딘가에서 허무하게 빠져나간다. 처음부터 꿈 따위는 갖고 가지 않는 것이 현명한 여행자일지도 모른다. 

 

 

이 땅의 주인인 인디오들은 여전히 자신의 땅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고, 식민지를 수탈했던 유럽의 후손들은 여전히 땅의 주인인 양 여행을 한다. 슬픈 역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소명이 영원히 세계 곳곳을 방랑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항상 호기심을 갖고,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들여다 보고, 세상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그리고 항상 어떤 곳에도 뿌리내리지 않고, 적어도 사물의 근저에 무엇이 있는지 깨달을 만큼 오래 머무르지 않는.... 우리는 표면적인 것만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 <체 게바라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중에서

 

 

여행을 떠날 때는 따로 책을 들고 갈 필요가 없었다. 세상이 곧 책이었다. 기차 안이 소설책이고, 버스 지붕과 들판과 외딴 마을은 시집이었다. 그책을 나는 읽었다. 책장을 넘기면 언제나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 류시화 <지구별 여행자> 중에서

 

 

"그들은 모든 꽃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 파블로 네루다

 

 

결국, 인간은 얼마나 사는 걸까?

천 년? 단 하루?

일주일? 수 세기?

인간은 얼마나 오랫동안 죽는 걸까?

'영원히'라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 파블로 네루다의 시, <영혼의 집> 중에서

 

 

당신이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면, 언젠가 사람들이 길이라고 부르겠지. - 이철수 판화 <길>

 

 

 

(2권) 길을 안다는 것, 길을 간다는 것

 

 

아직 읽지 않은 책, 아직 가지 않은 여행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 때,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러산의 대불은 정말 컸고, 청두 문수원의 스님들은 한가로웠으며 주자이거우의 물빛은 세상의 빛깔이 아니었다.

확인하러 가는 것도, 감탄하고 오는 것도 모두 여행이다. 실망하러 가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감동하는 능력, 작고 사소한 것에도 감탄하는 능력인지 모른다. 언제부터 우리가 쿨한 것, 감정을 억제하거나 표현하지 않는 것, 쉽게 만족하지 않는 것을 세련되고 고상한 것으로 여기는 세상에 살았던가. 그래서 우리는 더 행복하고 세련되었는가. 감동이 드문 사람의 삶은 얼마나 무미건조한 것인가. 반대로 쉽게 감동할 줄 아는 자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집단은 어차피 집단이라고.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집단이 되면 모두 똑같아.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못 지켜서 안달이지! 개인 단위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과 자유를 손에 넣는 거얏!" - <남쪽으로 튀어>에서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타인의 고통에서>

 

 

"왜 살아야 하는 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니체의 말,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를 죽이지 못한 시련은 나를 한층 강하게 만들 뿐'이라던 니체의 말은 용기와 객기 사이에 갈 곳을 마련하는 여행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트래블'에 '트러블'은 때로 필요악이다'라던 후지와라 신야의 말도 그러하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 <여행의 기술>에서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 <여행의 기술>, <팡세>에서 인용....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나라란 대체 어디일가? 이런저런 잣대를 들이대면 대관절 위험하지 않은 나라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까? 위험하지 않은 나라란 어디에도 없다. 처음부터 위험한 나라란 존재하지 않았듯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의 산물이 처하게 되는 이러한 상황은 예술작품의 존속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어쨌든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을 '아우라(Aura, 독특한 분위기)'라는 개념 속에 요약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중에서

 

TV나 사진, 책 등에서 무수히 넘쳐나는 여행의 이미지와 정보들을 통해 우리 시대 여행은 설렘과 기대로 넘쳐나는 '아우라'를 상실한 지 오래다. 비용과 시간만 넉넉하다면 아주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여행일뿐더러....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40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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