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사회, 문화, 경제, 기술 등 우리 생활 전반에 많은 변화가 예상됩니다. 변화의 시기에는 혼란이 생기고, 그 혼란 속에서 각 영역에서 패권을 잡기 위한 보이는, 보이지 않는 힘의 대결이 나타나겠지요. 

 

이 시점에 과거 역사 흐름 속에서 변화를 주도한 힘의 요소와 그 역학관계를 살펴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데 참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본문발췌]

 

 

세계사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간의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이 만들어낸 다섯 가지 힘, 즉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자본주의,사회주의,파시즘)', '종교' 입니다. 무엇이 과연 세상을 움직여왔는지, 큰 흐름으로 살펴보면 인류 역사를 좀 더 쉽고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의 중심은 경제의 중심과는 다릅니다. 문화예술의 경우, 그 중심이 떠나도 그곳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경제의 중심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은 쇠퇴와 몰락으로 인한 우울함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문화예술의 중심이었던 곳에는 품격 있는 건조물과 명화, 예술과 문화의 향기라는 유산이 남아서 사람들은 이전의 영광을 긍지로 여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로마, 피렌체, 파리, 빈과 같은 문화적, 예술적인 중심을 경험한 장소가 지금도 세계적인 관광지로서, '동경의 땅'으로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모으는 것은 그런 문화적인 유산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문화예술의 중심이었던 곳은 브랜드가 되고, 경제의 중심이었던 곳은 브랜드가 되지 않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원래 문명의 탄생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물건을 교환하는 것, 즉 도시화로부터 시작됩니다. 물건과 정보 교환이 번잡함을 만들어내므로 그곳에 필요한 것은 '다양성'입니다. 다양성을 가진 사람과 물건이 한 장소에 모임으로써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고, 그 문화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음으로써 도시는 성장합니다. 따라서 떠들썩한 도시는 이전 당나라의 '장안'이든 예술의 도시 '파리'든 지금의 '뉴욕'이든 다양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서로 이질적인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여러 장소로부터 모여드는 공간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먹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먹는 일이 전부라면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는 넓은 땅이 있는 곳에서 사는 것이 훨씬 낫겠죠. 하지만 실제로는 고양이 이마처럼 좁은 장소밖에 얻을 수 없는 도시로 경쟁하듯 몰려듭니다. 왜 사람들은 부나비처럼 도시로 모여들까요? 거기에는 화폐 문제가 큰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 밖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만들어지는 화려함과 즐거움, 다양성,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생겨나는 유행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분비는 테마파크에 가면 '줄 서지 않고 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제로 텅 빈 테마파크에 가면 반갑기는커녕 오히려 외롭다는 느낌을 갖기 쉽습니다.

 

 

"언어의 독점이 권력의 독점으로 이어진다." - 미셸 푸코

 

 

우리는 '권력'이라고 하면 막강한 군대를 손아귀에 넣고 민중을 원하는 대로 다스리거나 거대 자본을 장악한 뒤 시장을 통제하는 일 따위를 주로 떠올립니다. 그러나 진짜 권력은 그런 것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습니다. 진정한 권력은 그 시대의 '지식을 독점'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럽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차이를 만들어내어 차별화하는 것으로 가치를 창조'하는 데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는 물건을 소비하는 '욕망 긍정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자본주의의 진짜 적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대립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신의 뼛속까지 스며든 욕망'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제1, 2차 세계대전의 본질 - '더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싸움. 원료와 시장을 확보할 수 있는 식민지를 갖는 것.

 

 

"선전은 모두 대중적이어야 하며, 그 지적 수준은 선전이 목표로 하는 대상 중 최하 부류까지도 알 수 있을 만큼 조정되어야 한다. 그 지적 수준은 선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조정해야 한다. 따라서 획득해야 할 대중이 많으면 많을수록 순수한 지적 수준은 그만큼 낮게 해야만 한다. 민중의 압도적 다수는 진지하고 냉철한 사고나 이성보다 감정적, 혹은 감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성적 기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수하면 폐쇄적이다. .... 긍정 아니면 부정이며, 사랑 아니면 마음이고, 정의 아니면 불의이며, 참 아니면 거짓이다.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다든가, 혹은 일부분은 그렇다는 일은 없다." - 히틀러, <나의 투쟁>

 

 

사람은 불안해지면 자신과 다른 것을 찾아내 배제하는 것으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하나가 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대부터 세계사를 보면 인간이 자기 존재의 왜소함, 불안정함을 견디지 못하고 여러 대상에 의존해온 결과가 오늘날의 문화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언어가 생기고, 문자가 생기고, 종교가 확립되고, 또 다른 방향으로는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무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질서와 안정을 원하는 인간의 감정이 이 세상에 '문화'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을 갈망하는 마음이 수많은 다툼과 분쟁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입니다.

 

 

역사는 시대에 따라서 해석되고 재해석된다. 현대에 재해석되지 않은 역사는 죽은 것이고, 시대가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후대에 그 시대도 재해석되는 것이다. 해석이 죽은 시대는 그 시대 자체가 죽었거나, 해석이 살아 있는 다른 시대에 필연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다. 역사학을 가지지 않은 나라에서 능동적으로 시대를 열거나 주도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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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위주의 생각은 감각적 즐거움은 가져다 줄지 모르지만 세상의 균형 속에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분지족(安分知足) 安貧樂道(안빈낙도)의 삶에서 즐거움을 찾자.

 

 

[본문발췌]

 

 

행복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 우주의 한 시민이라고 생각하여 우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마음껏 즐기며, 자기는 후대의 생명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하여도 마음이 흔들리는 법이 없다. 이렇듯 생명의 줄기와 본능적으로 깊이 연결될 때,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이 깊은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세상과 깊은 접촉을 해야 한다. 이 의미와 가치에서 불행도 생기고 참된 행복도 생긴다. 이 세상에는 할 만한 일이 없다고 해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유능한 모든 젊은이들에게 나는 말하고자 한다. "글줄이나 끄적거려 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숫제 글을 쓰지 않으려고 힘쓰라. 모름지기 실사회로 뛰어 들어가라. 해적도 되고, 보르네오의 임금도 되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 보라. 뼈가 휘도록 일해야만 기본적인,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어려운 생활을 한번 해 보라."

 

 

요즘의 생존 경쟁이란 실상 성공 경쟁이나 다름이 없다. 누구나 경쟁을 할 경우에 두려워하는 것은 내일 아침의 끼니 걱정이 아니라 상대방보다 우세할 수 있느냐 하는 걱정이다. .... 성공하기를 바라고 또한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따라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자는 패배자라고 생각하는 한, 그의 사생활은 너무나 분주하고 걱정에 휩싸여 행복한 날을 전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돈에서 얻으려는 것은 생활의 안전과 한가한 시간이다. 현대인이 대부분 바라는 것은 돈을 더욱 많이 버는 것이요, 또한 돈을 버는 목적은 허영과 명성과 타인에 대한 우월감이다.

 

 

인간의 행동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대한 것이 못 된다. 또한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커다른 슬픔 속에서도 헤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행복에 종지부를 찍는 것처럼 생각되는 고민도 시간이 흐를수록 사그라져 나중에는 그 심각한 고통을 기억조차 못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생각도 그렇거니와, 그보다도 인간의 자아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자기의 사상과 희망을 자기 이상의 존재자에게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어지간한 고민이라면 그 속에서 어떤 평화를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철저한 이기주의자에게 발견할 수 없는 일이다. 

 

 

정신이 가장 활발하게 작용하여 사소한 일을 거들떠보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행복에 이르는 첫걸음의 하나이다. 무엇이든지 도취해야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은 가짜 행복이며 따라서 불만스럽기 짝이 없는 행복이다. 참으로 만족스러운 행복은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데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완전히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다.

 

 

흥미의 분야가 넓어질수록 행복을 누릴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적게 받게 마련이다. 하나를 잃어버리면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모든 일에 대하여 한결같이 흥미를 느끼기에는 너무나 짧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충당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에 되도록 흥미를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눈을 내부에 돌리기 쉽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의 천태만상을 외면하고 내부의 공허를 들여다보는 병에 걸리기 쉽다. 이러한 내향적인 병폐에서 비롯되는 불행에, 마치 위대한 무엇이라도 있는 듯이 생각할 것이 못 된다.

 

 

시간을 보내며 느끼는 만족감과, 사소하나마 야심을 발산하는 기쁨은 대개 사업을 성취하는 데서 온다. 설령 일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말하면 첫째 일자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보다도 행복한 것이다. 사업에 재미가 있으면 권태가 따르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한층 기쁜 만족을 느낄 수가 있다. 흥미 있는 일에 대해서는 순서적으로 이를 정리할 수 있다. 단지 재미를 붙일 수 있다는 정도의 일에서부터 위대한 사람들이 모든 정력을 바칠 만한 사업에 이르기까지, 두 가지 요소가 일의 흥미를 자아낸다. 하나는 기술의 발휘이고, 또하나는 건설이다.

 

 

오늘날 지식계급이 당하고 있는 불행의 한 원인은 대다수가 - 특히 문학적인 소질이 있는 청년들은 독자적으로 자기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속인들이 판을 치는 어느 부유한 주식회사에 고용되어 예술가에게 해롭고 무의미한 것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하는 점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신문인들에게, 자기가 종사하여 만들어 내고 있는 신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저마다 생활비 때문에 원치도 않는 일에 재주를 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직업에 참된 만족이 우러날 리가 만무하다. 한편 그 직업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키려고 하면 스스로 자기를 냉소하게 되어 진정한 만족을 느낄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직업을 택하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굶주림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굶주리지 않고 건설적인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수입은 많을지라도 자기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선택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올바로 충고해 주어야 할 것이다.

 

 

자존심이 없는 곳에 참된 행복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자기가 종사하는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존심을 가질 도리가 없다. 건설적인 사업에서 느끼는 만족은 소수가 누리는 특권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이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 사업에 주인이 된다면 저마다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사업이 가치가 있어 보이고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이 특권을 누릴 수가 있다. 어린아이들을 행복하게 기르는 일은 우리에게 깊은 만족을 느끼게 하는 어려운 건설 사업이다. 어린아이를 훌륭히 기른 어머니라면 자기의 수고로 말미암아 -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이 갖지 못할 뻔한 -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고 나서 그것을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은, 두고두고 그것을 걱정하는 사람보다 일에 훨씬 능률을 올릴 수 있다. 자기가 한 일을 잊어야 할 경우에, 그 일밖에 다른 여러가지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손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하루하루의 업무로 말미암아 피로해진 몸을, 이러한 흥미 때문에 소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흥미는 의지의 힘, 즉각적인 결단, 그리고 도박과 같은 경제적인 타산을 내포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감정을 피로하게 하고 의식이나 무의식을 발동시킬 만큼 자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많은 오락이 이러한 조건을 해소시켜 준다. 즉 운동경기를 구경하거나 극장에 가거나, 골프를 치는 것 등등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탓할 것이 몯 된다. 학자들은 자기 전문분야 이외의 독서를 하는 것이 매우 유리한 것이다. 아무리 중대한 고민이라도 종일 끙끙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이 점에 대하여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대체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자기 일을 쉽사리 잊어버리지만, 여자들은 가사를 보살피는 관계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남자들은 직장을 나서면 새로운 기분을 갖게 되지만 여자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이와 같은 나의 주장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점에 있어서는 밖에서 일하는 여자는 집에서 일하는 여자와는 다르다. 여성들은 실제적인 가치가 없는 일에 대하여는 흥미를 갖기가 어렵다. 목적 관념이 여자들의 사상과 행동을 지배한다. 여자들은 책임이 따르지 않는 관심사에는 좀처럼 눈을 돌리지 않는다. 물론 내가 하는 말은 일반론이다. 따라서 예외도 있을 것이다.

 

 

모든 비개인적인 관심은 휴양을 한다는 입장을 떠나 생각해 보더라도, 여러 가지 의의가 있다. 우선 우리의 감정을 조화시킨다. 우리는 자기 목표, 자기의 사업, 그 밖에 자기의 세계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인간의 전체적인 행동에서 볼 때, 그것은 실로 보잘것없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세계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교육이 단지 어떤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격하된 결과, 세계를 공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정신의 시야를 넓히려고 하지 않는 것이 현대의 고등교육이 지닌 하나의 결함이다. 예를 들어 정당 싸움에서 오직 자기 당이 승리하기 위해 애쓴다. 그것은 또 좋다고 치자. 그런데 그 투쟁의 과정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세상에대한 증오심과 폭력과 의혹을 조장하는 방법도 사양치 않는다. 그리하여 외국 국민을 욕되게 하여서까지 승리를 얻기 위한 가장 가까운 방도를 찾는 경우도 있다. 보는 눈이 현재에만 국한되어 있거나 무조건 능률만 올리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불미스러운 방법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장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만일에 당신이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고 인간이 부분적으로 서서히 야만 상태에서 벗어났으며 인류의 존재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헤아리는 긴 시대와 비교할 때 짧기가 한량없다는 것을 언제나 절실히 느끼며 그런 생각을 잊지 않고 있다면, 당신이 지금 가담하고 있는 조그마한 싸움은 별로 의미가 없으므로, 우리가 헤어난 암흑시대로 후퇴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당장 그 일에 패배를 한다고 하더라도 야비한 수단을 쓰지 않게 한 흐뭇한 감정에 싸일 것이다.

 

 

세계는 어떤 손실로 말미암아 치명상을 입을 만큼 비좁은 곳은 아니다. 한두 번의 실패로 패배하고 손을 드는 것은 결코 판단에 민감하다고 해서 치하할 일이 못 되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력의 파괴로서 슬퍼해야 할 일이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죽음에 지배된다. 죽음은 어느 때든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닥쳐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터전이 있으면, 인생의 의의와 목적이 우연에 의해 지배를 받기 쉽다. 따라서 지혜롭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먼저 생각의 중심을 세우고, 그 이외에 여러 가지 2차적인 흥미를 갖도록 힘써야 한다.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살아가고, 자유로운 애정과 광범위한 흥미를 갖고 이를 통하여 자기의 행복을 소유하는 자요, 자기가 남에게 흥미와 애정의 대상이 되어 행복을 느끼는 자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건전한 상식의 토대 위에서, 하루하루의 생활을 즐겁고 명랑하게 영위하도록 힘써 행복을 손에 넣어야 하며, 행복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시민이라고 느끼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마음껏 즐기며, 자기 자신을 자기 뒤에 오는 생명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느끼므로, 죽음을 생각하여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으며, 이와 같이 생명의 물줄기와 깊이 본능적으로 결합될 때에 가장 큰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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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를 축적하는 센서와 통신 네트워크의 발달, 쌓이는 데이터의 종류와 양의 폭발적 증가, 알고리즘을 수행하는 컴퓨팅 파워의 비약적 발전, 그리고 뇌의 사고구조 이해를 알고리즘에 적용하여 인공지능이 실용성이 높아지고 있다.

 

 

[본문발췌]

 

 

이러한 진보를 가능케 하는 연료는 무한히 축적되는 데이터다. 데이터가 새로운 종류의 기름이고 학습 알고리즘이 원료 데이터에서 정보를 뽑아내는 정유공장인 셈이다. 정보는 지식을 창출하는 데 쓰일 수 있고, 지식은 이해를 이끌어내며, 이해는 지혜의 바탕이 된다.

 

 

딥러닝은 수학과 컴퓨터공학, 신경과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머신러닝의 한 분야다. 딥러닝 네트워크는 아기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배워나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데이터를 통해 학습하나. 생생한 눈으로 시작해 점차 새로운 환경을 탐색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해나가는 아기들처럼 말이다. 딥러닝의 기원은 인공지능을 창출하는 방법에 관한 두 가지 다른 시각이 경합을 벌이던 1950년대의 인공지능 태동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는 로직과 컴퓨터 프로그램에 기초한 시각으로 수십 년 동안 인공지능 세계를 지배했으며, 다른 하나는 데이터로부터 직접 학습하는 방식에 기초한 시각으로 성숙단계에 이르기까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능은 심리학에서 의식을 제외한 다른 어떤 주제보다 더 많이 연구되고 발표된 주제다. 의식과 지능 두 가지 모두 그만큼 정의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1930년대 이후 심리학자들은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때 이전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서 추론과 패턴 인식을 사용하는 유동성 지식(fluid intelligence)과 마찬가지 경우에 이전의 지식에 의존하는 결정적 지능(crytallized intelligence)을 구분해왔다. 표준 IQ 테스트가 측정하는 지능은 후자에 속한다. 유동성 지능은 발달 과정을 거치며 성년 초기 최고치에 도달하고 나이와 더불어 감소하는 반면, 결정체적 지능은 인생의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점증적으로 증가한다. 알파고는 다소 좁은 영역에서 유동성 지능과 결정체적 지능 모두를 드러내는데, 해당 영역 내에서는 놀랄 만한 창의성까지 보여준다. 전문 지식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좁은 영역의 학습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가. 

 

 

인공지능은 '무형'의 정보 경제를 가속화하고 있다. 경제적 성과의 지표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달러화로 환산한 가치의 합계, 즉 국내 총생산(GDP)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식품, 자동차, 의료 등 유형의 상품과 서비스를 위주로 하는 산업 경제를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정보 기업의 가치는 그런 유형의 상품으로 측정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가 소유한 건물과 장비는 고작 10억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의 시장 가치의 1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나머지 가치는 소프트웨어와 마이크로소프트를 위해 일하는 프로그램 제작 인력의 전문성에 기인한다. 각자의 스마트폰을 통해 내려받은 정보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가? 이제 우리에게는 모든 형태의 정보의 가치를 감안한 새로운 경제성과 지표가 필요하다. 바로 생산성의 지표 측정인 GDP를 증대시키는 국내총무형자산(Gross Domestic Intangibles, GDI)이다.

 

 

"과거의 기술은 물리학의 법칙에 기반을 두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미분방정식과 연속변수의 수학을 통해 물리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시공간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수학을 통해서 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기술은 알고리즘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21세기는 컴퓨터과학과 생물학의 복잡성 특성을 이해하는 데 이산수학과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시대다." - 브라이언 아서(W. Brian Arthir)

 

 

알고리즘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비교해볼 수 있는 복잡한 세상을 만들어낼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로 20세기에 발견된 알고리즘으로 인해 우리는 복잡성의 특성을 새롭게 조명하게 된 바 있다. 1980년대의 뉴럴 네트워크 혁명 또한 그와 유사한 성격의 시도들이 주도한 것이다. 뇌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들 말이다. 비록 우리가 만든 뉴럴 네트워크 모데른 뇌의 뉴런 회로에 비해 상당히 단순하지만 학습 알고리즘 덕분에 방대한 뉴런으로의 정보 전달과 같은 일반 원칙에 대한 탐구가 가능해졌다. 어떻게 비교적 단순한 학습 규칙으로부터 네트워크 기능의 복잡성이 발생하는 것인가? 보다 쉽게 분석할 수 있는 복잡성을 보유한 보다 단순한 체계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현재의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이라면(페타급 컴퓨팅보다 천 배 더 강력한) 엑사급 컴퓨팅을 위해서는 50메가와트의 전력이 필요하다. 뉴욕시의 지하철 운영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전력량이다. 따라서 차세대 슈퍼컴퓨터는 영국계 다국적 반도체 기업인 암홀딩스(ARM Holdings, ARM)에서 휴대전화기에 장착하기 위해 개발하고 최적화시킨 것과 같은 저전력 칩으로 구동되어야만 한다. 머지않아 가장 연산 집약적인 애플리케이션의 실행을 위해 범용 디지털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은 더 이상 실용적이지 않을 것이며 특수 목적 칩이 지배적인 상황이 도래할 것이다. 이미 휴대전화기에 지배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뇌에는 대략 천 억 개의 뉴런이 있고 각각의 뉴런은 수천 개의 다른 뉴런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어 시냅스 수는 천 조(10^15)개에 이른다. 신체의 전체 질량에서 뇌는 고작 3퍼센트만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의 구동에 필요한 전력은 대략 20와트 또는 몸 전체를 움직이는 데 필요함 힘의 20퍼센트 정도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간의 뇌 성능에 훨씬 못 미치는 페타급 슈퍼컴퓨터는 5메가와트 또는 25만 배나 많은 전력량을 소비한다. 자연은 분자 단위까지 신호를 전달하고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필요한 뉴런의 구성 요소들을 소형화하고 부피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뉴런들을 3차원적으로 연결함으로써(마이크로칩의 표면에 장착되는 트랜지스터는 고작 2차원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그와 같은 놀라운 효율성을 구현해냈다. 이 경이로운 자연의 기술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해온 것이기에 우리 인간이 만회해야 할 시간도 결코 적지 않다.

 

 

딥러닝은 고도로 연산 집약적이며 중앙 집중식 서버에서 연산을 수행하고 휴대전화기와 같은 단말 장치로 결과물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결과적으로 단말 창치의 독립성이 관건이며 그것은 곧 근본적으로 다른 하드웨어를 의미한다. 클라우드 컴퓨팅에 비해 훨씬 가볍고 전력 소비도 훨씬 적은 하드웨어 말이다. 다행히도 그런 하드웨어가 이미 존재한다. 바로 인간의 뇌에서 영감을 얻어 고안된 뇌신경 모방 침, 일명 '뉴로모픽 칩(neuromorphic chips)'이 그것이다. 

 

 

돌이켜보면, 20세기 행동에 대한 정반대의 접근법을 취했던 행동주의와 인지과학은 뇌를 배제하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행동주의자들은 내적 검증에 의해 오도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지침을 얻기 위해 뇌의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했다. 그드른 블랙박스의 인풋과 아웃풋을 신중하게 통제함으로써 어떤 우발적 상황에서도 행동주의적 법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기능주의적 인지 과학자들의 입장은 정신의 내적 표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행동주의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뇌가 내적 표상을 어떻게 이행하는지에 관한 세부 사항들은 무관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이 개발한 내적 표상의 기반은 신뢰할 수 없는 직관과 민족심리학이었다. 자연은 인간보다 영리하다.

 

 

지금까지 뇌 구조로부터 얻은 새로운 기능을 추가할 때마다 딥러닝 네트워크의 기능성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피질 영역의 수직 계층 구조, 심층학습과 강화학습의 결합, 반복적 피질 네트워크에서 작동하는 기억, 사실과 이벤트에 대한 장기 기억 등이다. 우리가 배울 수 있고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뇌의 연산학적 원리는 이 외에도 무수히 많다. 

 

 

인간의 뇌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추상적인 생각만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다. 뇌는 우리의 신체 모든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다시 감각 인풋과 동작 실행기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생물학적 지능은 그러한 관계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뇌가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는 긴 성숙의 과정을 거쳐 발달된다는 점이다. 학습은 발달과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이며 성인기에 도달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진다. 그러므로 학습은 일반 지능 발달의 핵심이다. 인공지능에 있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상식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어린이들에게는 현저하게 부족하고 대부분의 성인에게는 세상 속에서의 장기적 경험을 얻은 후에야 서서히 드러나는 그것 말이다. 인공지능에서 흔히 무시되는 감정과 공감 역시 지능의 필수적인 측면이다. 감정은 국부적인 뇌 상태에 의해 결정될 수 없는 뇌가 행동을 취하기 전 준비 과정에 필요한 보편적 신호다.

 

 

강화학습의 기저를 이루는 시간차 학습 알고리즘이 고도로 복잡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고 대뇌 피질에서 이뤄지는 딥러닝에 의해 인간의 행동은 그보다 더 복잡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자연에는 인공적 시스템이 배울 수 있는 지능적 행동의 영역이 존재한다. 컴퓨터공학과 생물학 사이에 걸쳐 있는 새로운 과학의 분야인 알고리즘 생물학에서는 생물적 체계에서 사용되는 문제 해결 전략을 설명하는 데 있어 알고리즘 언어의 사용을 추구한다. 그러한 생물학적 알고리즘이 공학 분야의 새로운 연산 인식 체계를 생성하는 데 일조하고 생물학적 네트워크에 대한 시스템 차원의 이해를 가능케하기를 희망한다. 이것은 시공간적 척도를 가로지르는 생물학적 시스템에 내포된 복잡성의 수준을 궁극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작은 시발점이다. 유전자 네트워크, 대사 네트워크, 면역 네트워크, 뉴럴 네트워크 그리고 사회적 네트워크와 그 안에 있는 모든 하위 네트워크까지 포함하는 복잡한 체계 말이다. 

 

 

딥러닝은 비용함수의 최적화에 의존한다. 자연의 비용함수는 무엇인가? 진화의 정반대 비용은 적합성이다. 그러나 이 적합성은 환경적이든 또는 최적화되는 시스템으로부터든 구체적 제약 조건의 집합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다. 인간의 뇌에는 행동을 제어하는 태생적 비용함수가 있다. 예를 들면 음식, 온기, 안전, 산소, 생식에 대한 욕구가 그것이다. 강화학습에서 행동은 미래의 보상을 최적화하기 위해 취하는 것이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인간 행동의 범주를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생존을 보장하는 보상 이외에 다양한 범주의 보상이 최적화의 대상이 된다. 이런 다양성의 원인이 되는 근본적이 보편적인 비용함수는 존재하는 것인가?

 

 

도파민 뉴런은 뇌에서 동기부여를 제어하는 핵심 시스템을 구성한다. 인간 뇌의 도파민 뉴런은 중뇌에 있는 다수의 핵(복측피개부와 흑질)은 피질과 기저핵(선조체와 중격의지핵)으로 축색돌기를 돌출시킨다. 일시적 파열은 보상에 대한 예측과 주어진 보상 사이의 불일치를 의미하며, 이것은 행동의 선택 및 예측의 수정에 이용된다.

 

 

지각-행동 주기는 감각 데이터에 기초해 행동을 계획하는 모든 문제의 해결에 적용될 수 있다. 행동의 결과는 예측된 아웃풋과 비교될 수 있고 그 차이는 예측 시스템의 상태를 업데이트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또한 이전 조건에 대한 기억은 자원의 활용을 극대화하고 잠재적 문제를 예측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인간이 하는 학습의 대부분은 관찰과 모방에 기초한다. 우리 인간은 딥러닝이 새로운 객체를 인식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례를 필요로 한다. 비분류 감각 데이터는 넘쳐난다. 강력한 비지도 학습 알고리즘은 지도나 감독이 개입하기 전에 이런 데이터들을 유리하게 사용할지도 모를 일이다. ... 비지도 학습은 머신러닝에서 차세대 개척지와 같다. 우리는 이제 막 인간 뇌 방식의 컴퓨팅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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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수록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는 것, 그리고 새로운 경험과 지식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본문발췌]

 

 

[오이디푸스 왕]

  • 크레온 : 모든 일은 시기에 맞을 때 아름다우니까요.

  • 코로스 : 오, 조국 테바이의 거주자들여, 보라,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로다. / 그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알았고, 가장 강한 자였으니 / 시민들 중 그의 행운을 부러움으로 바라보지 않은자 누구였던가? / 하지만 보라, 그가 무서운 재난의 얼마나 큰 파도 속으로 쓸려 들어갔는지. / 그러니 필멸의 인간은 저 마지막 날을 보려고 / 기다리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도다, / 아무 고통도 겪지 않고서 삶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는.

 

 

[안티고네]

  • 코로스 : 무서운 것 많지만, 사람보다 / 더 무서운 것은 없도다. / 그는 잿빛 바다까지 / 넘어, 몰아치는 남풍을 타고/ 건너도다. 두루 덮치는 / 파도 밑을 지나며, 또한 신들 가운데 / 가장 존귀한, 불멸하며 / 지치지 않는 대지를, 해에 해를 이어 / 구르는 쟁기로 닳게 하누나, / 말에서 난 종족을 써서 갈아엎으며. / 마음 가벼운 새의 무리와 / 들판의 짐승 종족과 / 바다의 짠물 속에 생겨난 것들을 / 교묘한 인간은 얽은 그물을 / 던져 에워 잡도다. / 또한 기술로 / 지배하도다. 들판을 집 삼고 / 산을 오가는 짐승들을. 또 갈기가 북실북실한 / 말과, 산에 사는 지칠 줄 모르는 황소를 / 목에 멍에 씌워 묶도다. / 말소리와, 바람같이 빠른 / 생각과, 도시를 이뤄 살려는 / 마음을 스스로 가졌도다. 또 살기가 불편한 / 노천의 설와 / 고약한 빗방울의 공격을 피하려는 생각도. / 그는 모든 일에 대처하도다. 방편없이 맞이하지 않도다. / 그 어떤 일이 다가와도. 다만 하데스만큼은 / 피할 방법을 내놓지 못하겠으나, / 어쩔 수 없던 질병에 대해서도 그는 피할 방편을 / 생각해 내었도다. / 그는 기술의 교묘함에서는, / 예상을 넘어설 만큼 현명한 존재이지만 / 때로는 나쁜 결과에, 때로는 좋은 결과에 도달하도다. / 땅의 법과 신들께 / 맹세한 정의를 존중하면 / 융성하는 도시를 가지게 되도다. 그러나 대담하게도 / 선하지 않은 것과 함께하는 자는 도시를 잃게 되도다. / 이런 짓을 하는 자가 나와 같은 화로에 / 속하지 않았으면! 나와 / 같은 대의를 나누지 않았으면!

  • 하이몬 : ... 그러니 마음속에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품지 마십시오. /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만 옳고 다른 것은 옳지 않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 왜냐하면, 누구든지 저 혼자만 현명하다고, / 혹은 자신이 다른 누구도 갖지 않은 혀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 사람들은 열어 보면 빈껍데기로 드러나는 법이니까요. / 현명한 사람이라 해도, 많이 배우려 하고 / 자기를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 아버지께선 겨울철 격류에 얼마나 많은 / 나무들이 몸을 굽혀 가지들을 구하는지 보시지요. / 반면에 저항하는 것들은 뿌리째 뽑히고 맙니다. / 또 마찬가지로 배의 돛 아래 줄을 계속 당기며 / 바람에 전혀 굴복치 않는 사람은 결국 배가 / 뒤집혀, 남은 여정을 뒤집힌 의자에 앉아 항해하게 되지요. / 그러니 노기를 그치고 태도를 바꾸십시오. /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젊은 제게도 어떤 지혜가 있다면, / 사람이 나면서부터 지식으로 가득한 게 / 단연코 으뜸이라 하겠지만, / 그렇지 않다면 - 사실 그렇기는 어려우니까요. - / 좋은 충고를 하는 이에게서 배우는 것도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 하이몬 : 한 사람에 속한 것은 국가라 할 수 없습니다.

  • 테이레시아스 :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요. / 하지만 실수했을 때, 한 번 잘못에 빠졌어도 / 치유책을 찾고 고집 부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 결코 생각 없고 운 없는 사람이 아니오. / 그대도 알다시피, 자만은 어리석다는 평을 빚질 뿐이오. / 어쨌든, 고인에게 양보하고 죽은 이를 / 찔러 대지 마시오. 죽은 자를 또 죽이는 게 무슨 용기 있는 행동이겠소? 

  • 전령 : ... 사람이 즐거움을 잃었을 때, 나는 그를 산 사람으로 / 여기지 않고 숨이 붙어 있는 시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 그대가 원한다면, 집안에 큰 부를 쌓고, / 군주의 위광을 갖추고 살아 보시오. 그렇다 해도 거기에서 /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누구에게서도 / 즐거움 이외의 다른 것은 사지 않으렵니다. 연기의 그림라도 값으로 치르기에 아깝습니다.

  • 코로스 : 현명함은 행복의 으뜸가는 / 바탕이로다. 그리고 신들에 관해서는 / 아무것도 불경스럽지 말 것이로다. 지나치게 오만한 자들의 / 방자한 말은 큰 타격을 / 희생을 치르고서 / 노경(老境)에야 현명함을 가르치는 법이니.

 

 

[작품 해설 중에서]

 

오이디푸스의 운명과는 별개로, 이 작품은 지식 일반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현명한' 오이디푸스가 그 현명함으로 지위와 권력을 얻었지만, (적어도 처음에는)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결국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선 세계를 차지하고 지배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 있다. 이것은 오이디푸스가 남부럽지 않게 갖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은 삶의 의미를 가지기 위해 필요한 지식, 아마도 자신에 대한 지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데 우리의 주인공은 처음에는 이것을 갖지 못했던 듯하다.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의 추락을 통해 세계를 향한 지식만큼이나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깨닫게 한다.

 

작품의 첫머리에 나오는 "항상"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슷한 의미의 '늘', '언제나', '계속', '결코' 같은 말들은, 인간이면서도 신과 같이(이 작품 첫 줄의 "항상"은 아테네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다.) 변치 않는 일관성을 추구했던 영웅 아이아스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자결하기 위해 모래 속에 묻는 칼마저도 꼿꼿하게 서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 그가 따르는 행동 준칙은 기독교가 보편화되기 이전 시대에 어디서나 통용되던 원칙, 즉 '친구에게는 달콤하게 적에게는 쓰라리게' 였다. 그는 자기 적들에게 항상 적으로 남아 어떻게든 피해를 입히려 한다. 그와 대비되는 인물이 오뒷세우스다. 그는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변하며, 이전에 친구였던 사람이 적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변화도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는 인간이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죽은 자 앞에 염치를 지키고 동료들에게도 관용을 설득한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오뒷세우스가 이렇게 너그럽고 합리적인 인물로 나오는 것은 구식 영웅의 '전락' 뒤에 일종의 '부활'이 이루어짐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인류의 정신이 새로운 덕목을 갖추고 다시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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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사회에서 돈이 숭배받는 자본주의 가운데 발생하는 양극화, 승자독식! 빈곤이 무엇에서 발생하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해결방법을 찾기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평등속의 어울림'

 

 

[본문발췌]

 

 

현대의 진보가 이룩하는 모든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사치를 조장하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진보라 할 수 없고 또 이러한 진보는 오래 가지도 못한다.

 

 

철학을 추구하는 자는 마음이 자유로워야 한다. - 프톨레마이오스

 

 

빈곤의 진정한 원인은 과거나 현재나 인간의 탐욕이지 자연의 인색함이 아니다.

 

 

문명 수준이 일정할 때 많은 인구는 적은 인구보다 물자를 더 많이 마련할 수 있다. 빈곤과 비참함의 원인은 - 현재의 이론은 인구증가 때문이라고 한다 - 자연의 인색이 아니라 사회의 부정의에 있다. 인구 증가로 생겨나는 새로운 입은 과거의 입보다 더 많은 식품을 소비하지 않지만 새로운 손은, 자연스러운 질서 속에서, 더 많은 물자를 생산해 낸다.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 부의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진다면 인구가 많을수록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더 많아진다. 평등이 보장되는 상태에서 인구의 자연증가는 개인을 가난하게 하기는커녕 언제나 부유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기성 지역의 부가 우위에 있는 것은 생산력의 우위 때문이 아니라 부의 축적 때문이며, 신생 지역에서는 시간이 없어 부를 축적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축적된 부라는 개념에 대해 잠시 검토해 보는 것이 좋겠다. 사실 부가 축적될 수 있는 양은 아주 조금밖에 안 되며, 사회도 대부분의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산다. 몇 가지 사소한 형태를 제외하면 부의 축적이 많이 이루질 수가 없다. 우주의 물질은 노동에 의해 원하는 형태로 변했다가 끊임없이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어떤 형태의 부는 몇 시간, 어떤 것은 며칠, 어떤 것은 몇 달, 어떤 것은 몇 년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형태의 부는 드물다. 매우 유용하고 수명이 긴 형태, 예를 들어 선박, 가옥, 철도, 기계류 등의 부를 보더라도, 노동을 통해 계속 보수하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못 쓰게 된다. 어느 사회에 노동이 중단되면 마치 분수로 흘러가는 물을 잠그는 것처럼 부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노동이 다시 시작되면 부는 금방 되살아난다.

 

 

노동자는 미개인보다 더 장시간 더 힘들게 일을 하지만 미개인이 얻는 단순한 생활필수품 이상을 얻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미개인이 누리는 독립성을 잃고 산다. 자신의 힘으로 욕구를 직접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이 동시에 일해 주지 않으면 간접적으로 충족시키지도 못한다. 이 노동자는 생산자와 소비자로 구성된 거대한 체인의 한 연결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다. 사회속의 지위가  낮을수록 사회에 더 의존적이 되고, 무엇이든 혼자 힘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극히 줄어든다.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노동을 행하는 힘조차 자신의 통제 밖에 놓인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또는 자신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 마치 태양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듯이 - 어떤 일반적인 원인에 의해서 이 힘이 박탈되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원초적 저주를 은혜처럼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단순한 육체노동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 선인 듯이, 그리고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주장하고, 법제화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는 인간성의 본질적인 요소, 즉 신처럼 환경을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능력을 잃고 만다. 노동자는 노예나 기계나 상품이 되어 버리고, 어떤 점에서는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인류 문명 발달의 불평등을 설명해 주는 원리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관한 원리가 아니며, 인구가 생존물자에 압력을 가한다는 원리도 아니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에 있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 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커다른 기본 요인이다. 이점은 틀림이 없다. 토지는 인간의 삶터이고, 인간이 필요한 물자를 꺼내 쓰는 창고이며, 욕구를 충족시킬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노동을 투입하는 대상이 되는 원료이다. 토지 또는 토지 생산물이 없다면 해산물도 취할 수 없고, 태양열도 이용할 수 없고, 그 밖의 어떠한 자연력도 이용할 수 없다. 우리는 토지에서 태어나 토지로부터 물자를 얻어 살다가 토지로 돌아간다. 인간은 들의 풀이나 꽃과 마찬가지로 흙의 자녀이다. 사람에게서 토지에 속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사람은 육체 없는 영혼에 불과할 것이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에서 부를 생산하는 힘을 보태줄 뿐이다. 따라서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고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가치를 올리고 토지 소유의 힘을 강하게 해 줄 뿐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토지소유는 귀족층의 근거이자 거대한 재산의 기초이고 권력의 원천이다. 인도의 최상 계층은 브라만이 오래 전에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시대건 토지를 소유하는 자에게 토지의 열매가 귀속된다. 하얀 일산과 거드름 피우는 코끼리는 토지 소유의 꽃이다."

 

 

임금의 상승 및 지대를 걷어 공공목적에 씀으로써 생기는 새로운 고용 기회의 창출은, 낭비를 막고 엄청난 사회적 손실을 없애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힘이 노동에 더해질 것이다. 임금이 가장 높은 곳의 노동이 가장 생산적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은 비능률적인 노동이다. ... 노동의 능률은 언제나 일반적인 임금과 같이 상승한다. 임금이 오르면 자존심, 지적 능력, 희망, 활력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다. 기계나 동물은 정해진 능력이 있으면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생산의 큰 원동력은 근육이 아니라 마음이다. 인간의 신체가 낼 수 있는 힘은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능력에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물결이 흐르고 인간의 의지 앞에 물질은 찰흙처럼 유연하게 된다. 대중의 안락과 여가와 독립을 증대시키면 지적 능력도 증대된다. 그리하여 두뇌가 손을 도우며, 극미한 생물을 측정하고, 별의 궤도를 추적할 수 있는 자질이 평범한 일상에서도 발휘된다. 부의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도록 하는 사회제도는 부를 생산하는 노동의 능력을 무한정 끌어오릴 수 있을지 모른다. 현재와 같은 생산 과정에서도 그 이익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높아지면 그만큼 생산 과정의 개선이나 기계류의 발명과 활용도 빠르고 쉽게 진행된다.

 

 

문명에 고통을 주는 원인이자 문명이 사망하는 원인은 불평등한 분배이다!

 

 

토지가치에 모든 조세를 부과한다면 거대한 재산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부자를 무일푼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 이 조치는 재산이 줄어도 별 타격을 입지 않을 계층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지금보다 더 빈곤하게 만들지 않는다. 거대한 재산을 줄일 뿐 누구도 빈곤에 빠뜨리지 않는다. 부의 총량이 엄청나게 증가할 뿐만 아니라 평등하게 분배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양의 부를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각자의 힘과 욕구가 서로 다른 경우에 평등한 분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부가 각자 근면, 기술, 지식, 절제를 통해 공동의 부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분배된다는 뜻이다. 생산하는 사람에게서 생산하지 않는 소수의 수중으로 부를 집중시키는 큰 원인이 사라질 것이다. 불평등이 계속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불평등일 뿐, 자연법을 부정함으로써 생기는 불평등은 아니다. 비생산자가 사치 속에서 빈둥거리고 생산자가 동물적인 생존에 필요한 물자만을 겨우 얻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토지 독점이 사라지면 엄청난 부자가 생길 염려도 없다. 부자의 재산은 문자 그대로 노동 생산물인 부로 구성될 것이고, 부는 계속해서 소모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 토지사유제를 철폐하면 국가 부채의 원인이 사라지므로 국가 부채도 오래지 않아 소멸할 것이다. 각자 자기 노력으로 정당하게 번 것을 가지는 동시에 그 이상은 가질 수 없다면 거대한 재산이 형성될까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도대체 백만 달러를 자기 노력으로 정당하게 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며 인간에게 저주스러운 것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대가가 생기지 않는 노동과 결과가 나오지 않는 노력을 혐오할 뿐이다. 매일 매일 힘들여 일해서 겨우 연명한다면 이는 정말로 고된 노동이다. 이것은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펌프질을 계속하거나, 깔려 죽지 않기 위해 바퀴를 계속 밟는 지옥 같은 형벌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미한 일에서 해방된다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더 열심히, 더 훌륭히 일하게 되며, 그럴  때 자신을 위해 또는 타인을 위해 무언가 일다운 일을 하게 된다. ... 인류의 생활을 개선하는 일, 예를 들면 지식을 확대하고 힘을 증가시키고 문예를 풍부하게 하고 사상을 고양시키는 일은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은 채찍질이나 동물적 욕구에 의해 강제되는 노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할 뿐, 더 많이 먹고 마시고 입고 과시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사회에서 궁핍이 사라지면 이러한 종류의 일이 대폭 증가할 것이다.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면 개인의 모든 힘이 생존 유지에 다 소요된다. 정신력은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릴 때에만 자유롭게 되어 고차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 어울림으로 인해 분업이 가능해지고 다수인의 협력에 의해 생기는 경제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어울림은(association) 진보의 첫째 요소이다. 개선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어울릴 때 이루어지며, 어울림이 넓고 긴밀할수록 개선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리고 인간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도덕법칙이 무시되느냐 존중되느냐에 따라 정신력이 대립 속에 낭비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므로, 평등 또는 정의(equality of justice)는 진보의 둘째 요소이다. 이렇듯 평등 속의 어울림(association of equality)이 진보의 법칙이다. 어울림은 정신력을 자유롭게 하여 개선에 바칠 수 있도록 해주며 평등, 정의, 자유는 - 이 세 용어는 도덕법칙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 정신력이 쓸데없는 싸움에 소모되는 것을 막아 준다. 이제 모든 다양성, 모든 전진, 모든 정체, 모든 퇴보를 설명할 수 있는 진보의 법칙이 나왔다. 인간은 같이 모임으로써 진보하며, 서로 협조함으로써 개선에 바칠 수 있는 정신력을 증대시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갈등이 발생하거나 어울림이 조건과 힘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진보 경향은 약화되고 결국에는 반전된다.

 

 

진화에 대한 허버트 스펜서의 정의를 사용한다면, 사회의 발전은 그 구성원과 관련하여 볼 때 불확실하고 비체계적인 동질성에서부터 확실하고 체계적인 다양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발전 단계가 낮은 사회는 장기도 팔다리도 없는 하등동물과 비슷하여 신체의 일부를 잘라도 살 수 있다. 발전 단계가 높은 사회는 기능과 힘이 전문화된 고등생물과 같아서 각 부분은 다른 부분에 극히 의존적이다.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한 원인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 경향이었다. 이런 경향이 현재의 우리 문명에 강도를 더하여 나타나고 있다. 임금과 이자는 계속 하락하고 지대가 상승한다.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빈자는 힘도 희망도 잃고 있으며, 중산층은 사라지고 있다.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 덕, 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정치는 부패한 독재정치보다 그 자체로 더 나쁘지는 않지만 국민성에는 더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부랑자, 극빈자 등 노동의 기회가 극히 제한된 계층이나 구걸하지 않으면 훔치거나 굶어야 하는 계층이 선거권을 갖게되면 파괴적인 결과가 발생한다. 가난으로 고통받고 타락한 계층의 손에 정치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마치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 옥수수 밭에 풀어 놓는 것과 같으며, 삼손의 눈을 빼고 국민 생활이라는 기둥에 팔을 비끄러매는 것과 같다. 권력의 승계가 세습이나 추첨 - 고대 공화국에는 이런 제도가 있어다 - 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현명하고 정의로운 권력자가 더러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부패한 민주정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는 더 악한 자에 의해서만 쫓겨날 수 있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

 

 

사실상 돈을 많이 가진 어떤 자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경우, 인구와 사업이 번창한 큰 중심지에 가서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고 자수하면 백중 구십구는 일시적인 구금을 당하는 정도 이상의 큰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고, 다만 일부는 자기 재산에 비례하여 또 일부는 피살자의 재산과 지위에 비례하여 얼마간의 손실을 입을 뿐이다. 게다가 살인자의 돈은 보호자를 잃은 피살자의 가족이나, 시민을 잃은 국가에 돌아가지 않는다. 소송을 지연하고 증인을 세워 배심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방법을 아는 변호사에게 돌아간다. 그리하여 도둑질을 크게 하는 자는, 훔친 것의 일부를 잃는 정도의 처벌밖에 받지 않게 된다고 확신할 것이다. 또 도둑질을 크게 하여 처벌을 받더라도 한 밑천 남길 수 있는 자는, 마치 바이킹이 항해를 성공리에 마쳤을 때처럼 동료들의 환영을 받게 된다. 자기를 믿어준 사람의 재산을 털거나 과부와 고아의 재산을 털더라도 많이만 털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부를 안전하게 자랑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점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경향은 부의 분배가 가장 불평등한 곳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며, 불평등이 심할수록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야만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이와 같이 정의가 파괴되는 예는 모든 분야에서 사법제도가 무력해지고 있는 현상의 하나에 불과하다. 차라리 법을 폐기하고 제일원리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치안위원회 같은 기구를 조직하여 스스로 사법제도를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인간은 남에게 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받는다. 이 권리에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가 포함된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면 이들 권리도 부정된다. 토지는 사람이 생활하는 터전이자 유일한 터전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하사물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면서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는 사회에서 정치적 자유는, 인구가 증가하고 발명이 계속되면 굶주림을 겨우 면할 정도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자유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이 진리를 무시해 왔다. 그리하여 거지가 생겨 거리를 배회한다. 빈곤은 우리가 정치적 주권자라고 더 받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결핍에서 생기는 무지는 학교에서 고칠 수 없다. 국민은 상전이 시키는대로 투표를 한다. 정치가의 역할을 선동꾼이 차지한다. 정의의 저울에 달린 추의 무게는 돈으로 결정된다. 시민적 덕목을 중시하지 않는 자가, 심지어 위선으로라도 그 덕목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튼튼하다고 생각했던 공화국의 기둥은 무거운 하중을 견디지 못해 이미 굽어 있다. ... 자유! 이는 신비한 힘을 가진 단어이다. 공허하게 귀를 어지럽히는 단어가 아니다. 자유는 정의이고, 정의는 자연법이며, 건강과 조화와 힘과 동지애와 협동의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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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겠지만 옛날 조상들이 살던 세상과 비교해 우리 삶은 더 편리하고 풍요롭게 좋아졌다. 반면, 필요한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버리고 주변의 사소한 일들에 무디어져 가고 있지 않나요?

 

박노해 시인의 글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삶에 대한 맷집을 더 키울 수 있다.

 

 

[본문발췌]

 

 

어떤 일이든 시작 전에는 예상을 하고 짐작을 하고 기대를 하게 된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으니 그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긴 하다. 그러나 예상, 짐작, 기대가 현실과 100퍼센트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상, 짐작, 기대가 현실과 일치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이 맞는 정도?

그러니까 제주에서 살면 어떨까. 덥고 습해서 힘들까? 그곳 사람들은 어떨까? 돈벌이는 어떨까? 많은 예측과 상상과 추측이 나래를 펴고 때로는 그 생각들 때문에 두렵기도 기쁘기도 하겠지만 어느 것도 현실은 아니라는 점. 일단은 저지르고 부닥쳐 보면 알리라는 것, 답은 그뿐인 듯....

 

 

가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자기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다면 쉬어보라고. 내가 이 세상의 '리얼'을 경험한 때는 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쉴 때였다. 맨발로 해변을 걸을 때, 오토바이를 타고 라오스와 중국의 국경을 넘을 때, 아이의 손을 잡고 집 앞 공원을 산책할 때 어쨌든 나는, 나는, 쉬고 놀 때, 세계를 보고 만졌다. 그리고 내가 '쉬는 시간'에 세계는 실재하고 있었다. - <우리는 사랑아니면 여행이겠지>, 최갑수

 

 

환경의 변화는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다. 나는 그 기회가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형태이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변화 앞에선 모든 일이 좋을 수많은 없는 것이다.

 

 

인생에서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그 기회가 긍정적인 사건의 형태로 오기를 생각하고 기대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시나 모욕감 등과 같은 고통이 오히려 그 자신의 본질을 찾고 알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의 사건이든 그때 경험하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 프리츠 펄스

 

 

동화작가 정채봉님은 '오늘 내가 나 자신을 슬프게 한 일들이 뭐가 있을까?' 하면 이런 게 떠올랐다고 해요. 꽃밭을 그냥 지나쳐버린것, 새소리에 무심하게 응대하지 않은 것, 밤하늘의 별들을 새어보지 않은것, 좋은 데도 체면 때문에 환호하지 않은 것.... 어른이 되면서 사소한 일들에 점점 무디어져 갔죠. 좋은 일이 있어도 크게 기뻐하지 못하고, 슬픈 일이 있어도 목 놓아 엉엉 울지 못하고, 재미난 일에도 박장대소 웃지 못하면서요. 일부러 시크한 척 노력했던 걸 거예요. 그래야 마음이 덜 다치는 줄로만 믿었으니까요. 제주에 지내면서 알아차린 게 있네요. 내 삶에 언제부터 이렇게 감탄사가 사라져 있었지? 였어요. 더 이상 새롭지도, 신기하지도 않고, 고맙지도 않고, 의례 그러려니 하는 감동 없는 일상. 어른스럽게 굴자. 느끼지 마, 소리 내지마, 자신을 억누르면서 마음 속 작은 소리, 누군가의 외로운 몸짓 같은, 작지만 중요한 것들을 알아채는 감각도 함께 무뎌졌더군요. 생채기를 덮어둔 채 다 나았다 믿고 있었죠. 세상에서 수없이 반짝이고 있는데 미처 주의를 주지 못한 것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고 음미하는 일. 좋은 건 좋다 말하고, 신나는 일에는 환호성을 지르고, 슬픈 일에는 펑펑 우는 일. 이렇게 평범하지만 어려운 일을 조금씩 연습하는 중이에요. 원한 적도 없는 '나이'라는 선물은 매년 배달이 되네요. 삶이 주는 그 선물을 싫다고 하기보다 아이들처럼 잘 갖고 놀아 볼래요.

 

 

사람 사이에서는 준만큼 돌려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더 빼앗기는 경우도 왕왕 있는데 자연에서만큼은 늘 준 것 이상으로 돌려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위대한 갯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박스 속 작은 귤 하나에도 1년의 비와 바람과 햇살과 새의 그림자, 벌레의 흔적, 사람의 손길과 그 모든 이야기들이 담긴다. 반짝거리는 결과물 이면에는 사람들이 미처 주목하지 않는 고된 과정이 있을 것임을, 나는 이제야 알겠다.

 

 

통조림을 먹고 싶은 데 깡통 따개가 없고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졌는데 충전할 곳이 없고 버스와 지하철은 파업 중인데 자가용은 수리센터에 들어가 있고 폭설이 사흘이나 계속 내려 슈퍼에 몇몇 상품의 재고가 바닥나는 날이면... 이런 경험을 할 때면 우리는 필요한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나는 오늘도 걷는다>, 미쉘 퓌에슈

 

 

내가 생각하기에 재능이란(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 - <뭐라도 되겠지>, 김중혁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 의미 있게. 그 순간을 가장 어여쁘고 가장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만들면 돼. 평생을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는 없어. 그러나 10분은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 있다. 그래, 그 10분들이 바로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첫 번째 걸음이고 그것이 수억 개 모인 것이 인생이야. - <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광고인 박웅현의 <여덟 단어>라는 책에 "인생에 정석과 같은 교과서는 없습니다. 열심히 살다 보면 인생에 어떤 점들이 뿌려질 것이고, 의미 없어 보이던 그 점들이 어느 순간 연결돼서 별이 되는 거예요." 라는 글귀가 나오는데 나는 이 비유가 참 좋다. 우리의 인생을 잘 들여다보면 사방에 무작위로 찍힌 점 같지만 나중에 이 점들이 모여 특정한 선 모양을 그린다는 의미다. 지금 당장 찍는 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행착오라고 여겼던 것들이 하나의 일관된 방향으로 선을 그려가고 있었음을 알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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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침 없이 세상을 보고 듣고, 받아들이고, 외부가 아니라 내 안에서 행복을 찾으며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는 삶....

 

 

[본문발췌]

 

 

사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말은 돈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돈이 얼마나 있으면 행복하느냐는 관점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관점으로 바꿔야 맞는 질문이다.

 

 

부는 우리에게 많은 재화를 소비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지만, 동시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감소시킨다. - 조르디 쿼드바흐

 

 

돈으로 무엇을 사고 싶다면 상품이나 물건보다 경험이나 지식을 사라.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면 행복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언제나 '공짜'다. 공기, 시간, 삶.....

 

 

행복은 현재 우리의 상황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돈은 이것을 보완할 뿐이다. 돈이 행복을 주진 않지만 돈이 행복을 도울 수는 있다. 내가 돈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돈이 나를 주인으로 모시게 만든다면 돈은 얼마든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내일부터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그 결심을 이루기 위해 도전한다면 결과는 두 가지뿐이다.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것이다. 성공하면 그 길로 계속 가면 된다. 만약 실패해도 좀 더 현명한 사람이 되어 다시 도전하면 된다.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공했거나 더 현명해졌을 분이다. 단지 행동하지 않을 때만 손해가 있을뿐이다. 지금 즉시 목표를 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바란다. 오늘 하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90퍼센트다. 즉시 해야 한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가 말했듯 걱정의 40퍼센트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고, 걱정의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22퍼센트는 안 해도 그만인 사소한 것이고, 걱정의 4퍼센트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 4퍼센트는우리 힘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거리다. 불과 4퍼센트 때문에 나머지 96퍼센트까지 걱정을 더 하며 사는 것이다.

 

 

나는 줄기차게 그 사람의 크기는 그 사람의 생각의 크기라고 말해왔다.그런데 이 크기를 실제로 현실에서 만들어내는 도구는 끈기와 기개다.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생각을 현실화할 수 없다. 평범한 사람도 끈기가 있으면 비범해지고 비범한 사람도 끈기가 없으면 평범한 사람이 된다. 끈기는 모든 것을 이겨낸다. 세상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보상한다. 기회는 항상 다시 돌아오는데 끈기가 없으면 돌아오는 것을 보기 전에 그만두게 된다. 이외수의 존버 정신은 존중받을 만한다. 어떤 분야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성공과 가장 큰 상관관계가 있는 개인적 품성이라면 나는 당연히 끈기를 첫 번째로 본다.

 

 

위험이란 칼과 같아서 날을 잡으면 다치지만 손잡이를 잡으면 멋진 도구가 된다. 하지만 위험하다고 피하기만 하면 상처가 날 수밖에 없다. 인생에 두려운 것도 없고 배신도 없었고 모욕을 당하거나 굴욕적인 날들도 없었다면 그는 한 번도 위험을 감수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위험을 감수하거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위험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단 한 개도 찾을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주위의 모든 것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생명이 있는 것이든 생명이 없는 것이든, 나와 상관이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사물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모두 한 하늘 아래 있고 한 공간 안에 있다. 가까운 것은 가까운 이유로 더 많은 영향을 주고받을 것이고 멀면 먼대로 다른 영향을 줄 것이다. 이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다른 상황에서 존중을 만든다. 이런 상호 공감의 확장이 나를 성장시키고 공동체 전체를 안전하게 하며 전체가 성장하는 틀을 만든다. 남을 지게 만든다고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상식이야말로 최고의 지성이다.

 

 

인간은 가치와 명분에 따라 움직인다. 그 일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조직 내에서 한 부품 같은 구성원으로 추락하며 동기도 의욕도 욕구도 사멸된다. 이럴 때 이런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급여와 더 많은 급여뿐이다. 하지만 <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들어가는 순간 이 조직은 위대한 조직이 된다. ... <무엇은> 단순한 정보다. 듣고 기억하면 그만이다. <어떻게>는 기능이다. 손과 몸의 훈련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왜>는 우리가 감정을 다스릴 열쇠다. 충성, 믿음, 정직 등 인간 본연의 가치를 갖게 하며 인간의 행동과 의사결정을 유도하고 이끈다. 우리는 안다고 행동하지 않는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일 뿐이다.

 

 

인간이 바뀌는 두 가지 계기는 새로운 곳에 살게 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이 두 가지가 한 번에 바뀌는 경우가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이직할 때다. 이런 경우라면 누구든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환경이 바뀌거나 최근에 만난 사람이 나를 바꾸고 성장시키며 삶을 윤택하게 혹은 거칠게 만든다.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는 이렇게 한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상대가 말을 하고 내가 듣는 것이 대화다. 상대가 말을 하고 내가 그것을 이해하려 하면 그것이 교류다. 상대가 말을 하고 내가 공감하는 순간, 한 인간이 내게 들어오는 것이다. 귀를 열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지속적인 행복은 기대와 더불어 이기적인 집착을 기꺼이 포기했을 때 찾아온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이 없고 상실의 고통을 느낄 이유도 없다. 모든 것은 언젠가 당신을 떠나게 된다.

 

 

"그릇은 진흙으로 만들지만, 쓰이는 것은 그릇 속에 담긴 비움이다." - <도덕경>

 

 

세상이 힘든 이유는 욕심과 부러움 때문이다. 만족은 내가 가진 것이 많아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력이 있어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있다. ... 만족하지 못하면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높아도 행복할 수 없다. 나보다 부자는 여전히 많고, 나보다 현명한 사람 또한 많으며, 나보다 건강하거나 젊은 사람은 계속 늘기 때문이다. 부러워만 하면 자존감도 없어진다. 자신을 자책하기 바쁠 뿐이다. 비교를 중단하고 욕심을 버리는 순간, 만족과 행복이 손을 잡고 들어온다.

 

 

가진 것과 갖고 싶은 것의 차이를 크게 느끼면 불행을 느끼기 마련이다. 꿈은 그를 행복하게 하지만 꿈에 이끌려 가면 꿈도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지나친 바람이나 걱정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을 사라지게 만든다. 행복은 스스로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니 결코 외부의 조건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지 않기 바란다. 내가 지금 충분히 행복을 만끽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내가 가진 것이 행복의 근원이 아니라는 지각을 얻고 난 후에 생긴 자유 덕분이다.

 

 

결국 행복과 건강, 기쁨은 외적인 소유가 아니라 내적인 자각의 결과다. 내가 생각을 옳게 쓰면 나는 생각을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이고, 내가 생각을 옳지 못하게 쓰면 생각이 나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선인이 되거나 악인이 되는 것도 모두 이 생각의 쓰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성공하면 추억이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경험이 될 뿐이다. 사람은 능력이 없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 실패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다스릴 줄 알면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 자신감이 가득하고 걸음이 꼿꼿하며 생각과 말에 힘이 생긴다. 두려움이 다시 몰려오더라도 사랑의 힘을 믿고 당당하면 언제든 두려움과 공포를 발아래 둘 수 있다. 매일매일 성실함과 열정적인 노력을 통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사랑과 용기는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열쇠다.

 

 

마음을 자극하는 가장 유혹적인 감정은 진심에서 나오는 친절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언제나 그것에 굴복한다. 당신이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방법은 친절, 배려, 관용으로 선한 사람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갖는 것이다. 나는 분명 이것으로 여러분의 평생 행복을 보장한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길 원한다면 노을을 보기 위해 이미 해가 진 서쪽으로 달려나가서라도 바라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내 안의 거인은 나만 깨울 수 있다. 그 아무리 위대한 선생도 내 안에 거인이 있음을 알려줄 뿐, 그를 깨어낼 수 없다. 돈키호테는 말했다.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저 하늘의 별을 잡자.' 그렇다. 돈키호테를 따르라. 그것이 거인을 불러내는 최고의 방법이다.

 

 

행복의 비결은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을 언제 포기해야 하는지 아는 데서 출발한다. 욕심과 욕망을 줄이는 순간, 행복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행복을 잡으러 다니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그 행복이 눈 앞에 보이게 된다. 우리가 태어나서 벌어놓은 모든 것은 소멸된다. 소멸되는 것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다. 행복은 영속적인 것을 찾아 인간과 우주에 대한 사랑을 실현함으로써 가능하다.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부를 가져도 행복할 수 없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것은 이미 명백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내가 더 열심히 살 이유를 찾게 된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결핍을 느끼게 되지만, 냉소적이거나 부정적인 사람이 아닌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 된다. 남들보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이나, 외모가 부족하거나 재능이 없어도 이 문제로 부모를 탓하거나 남을 탓하기를 그치게 된다. 이 불평등에 순응하는 순간 불평등은 '도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공도 없다'는 진리를 확인해줄 뿐이다. 그러나 불평등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면 누구든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된다. 지금 주어진 환경이나 태어난 여건은 내가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만, 앞으로의 환경과 여건은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갈 수 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시절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축복이라고 생각되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오히려 사소한 역경이나 시련 앞에서 무너질 때가 많다. 인생이란 험한 세상에서 단 한 번의 예방주사조차 맞지 않아서 인생의 고난에 저항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흔히 우리가 말하는 축복받은 환경이나 재능이 오히려 단점일 수 있다는 뜻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떤 행위를 오래 지속하면 서서히 힘이 쌓여 어느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의 초기는 지루할만큼 천천히 움직이지만 어느 순간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는 변곡점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노력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변곡점에 서기 전에 포기한다. 때로 변곡점은 나를 이겨내는 시점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남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는 순간을 폭발하듯 맛보게 된다. ... 인생의 변곡점 역시 마찬가지다. 변곡점은 자신이 어디 있다고 알려주지 못한다. 다만 그렇게 쌓이고 모인 힘은 한낱 눈송이 하나, 물방울 하나에 부서지는 눈사태와 댐처럼 우리를 가로막았던 모든 상황을 한순간에 해결해버리는 것이다. 결국 믿는 만큼 성취하는 것이며 나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사업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선수다. 사업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고수다. 하지만 선수나 고수도 사업하는 때를 아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 의미로 사업가는 중용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용이란 가운데, 양극단의 중간이 아니다. 중용은 위치상 가운데가 아니라 시간이 포함된 개념이다. ... 중용은 때를 알고 알맞게 행동함을 뜻한다.

 

 

정치적으로 보수든, 진보든 인간 존중과 공생의 의미를 실천하는 쪽에 서겠다는 기준이 중용이다. 그렇게 시대에 따라 사안에 따라 보수도 진보도 될 수 있는 게 중용이다. 모든 일마다 언제나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이라면 옳지 않은 일도 지지하게 된다. ... 중용을 제대로 이해하면 이렇게 양극단을 자유롭게 오가도 마음에 걸릴게 없다. 위대한 지도자는 이러한 중용적 태도를 깊게 이해해야 한다. 중용을 지킨다는 건 들어갈 때와 나올 때를 이해하며 안다는 말과 동일하다. 중용을 이해하면 칭찬이나 비난이 같은 곳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그러니 기뻐하고 들뜨거나 해치려 하거나 분노를 표현할 때가 아님을 안다. ... 결국 중용이란 평범한 일상에 대한 평범한 선택이다. 즉 상식으로 돌아간다는 뜻과 같다. 이때야 비로소 모든 일에 무리수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거나 주는 일 없이 순리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순리를 따라 움직이게 되는 일이야말로 경영자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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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사는 사람들은 현재를 즐길 줄 안다. 그냥 사는 것, 인생을 흘러가는 삶.

 

 

[본문발췌]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자기 운명에 대한 예언이 된다.

 

 

그날 나는 학생들에게 '자기 안의 어린 예술가를 구하라'는 주제로 예정에도 없던 강연을 했다. 여러분의 내면에는 상처받기 쉬운 어린 예술가가 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실수는 그 어린 예술가를 데리고 예술학교에 들어온 것이다. 물론 이곳은 좋은 학교이고 훌륭한 선배 예술가들이 있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는 질투라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성운이다.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친구나 선생들은 본래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모르게 여러분의 재능을 시기하고 있다. 그건 이 세계에선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선생은 평가를 해야 하고 동료들도 당신 작품에 판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며 새로운 예술을 알아볼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게다가 마음속 깊숙한 곳에 이곳을 박차고 나가고 마음껏 자기 재능을 발휘하고픈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중이다. 여기, 이 게토에 갇혀 있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내면에 숨어 있던 어린 예술가가 신나게 붓을 휘두르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따라서 주변 모든 예술가의 어떤 새롭고 참신한 시도에도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아니 냉혹하다. 우리, 두꺼운 껍데기로 방어막을 둘러친 얼치기 애늙은이 평론가들은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를 노리고 있다. 사자가 어린 치타 새끼를 물어죽이듯, 그것은 그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어쩌면 여러분 자신도 동료들에게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일단 여기 들어온 이상, 여러분의 임무는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상처받지 않도록, 그가 겹겹의 방어막으로 단단히 자신을 감싸 끝내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정신적 불구가 되지 않도록 잘 아끼고 보호하여, 학교 밖으로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배움은 다음 문제다. 학교에서는 평생을 함께할, 평가와 비난이 아니라 격려와 사랑을 함께 나눌 예술적 동지를 구하라. 타인의 재능을 샘내지 말고 그것을 배우고 익혀 훗날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활동을 시작할 때, 양분으로 삼고 그 어린 예술가의 벗으로 키우라.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 학교에서는 좋은 연설에 다음 세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든가 웃기든가, 아니면 유용한 정보를 줘라. 내 서가의 책들도 그런 기준을 적용했다. 나를 감동시켰거나 즐겁게 해주었거나 아니면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는 책들은 살아남았다. 그 세 가지 중에 단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책들은 다른 운명을 찾아 내지을 떠났다. 

 

 

평균적인 가정에는 수만 개가 넘는 물품들이 있다고 한다. 정주민의 삶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려면 그 모든 물품에 일일이 가치를 매겨야 한다. 그리고 그 물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당당히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일종의 비자를 받고 나의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나라는 인간의 과거에 깊숙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추억과 사연을 가진 물건들이었고 그 돈으로 살 수 있었던 무언가를 희생하고 들인 것들이었다.

 

 

내 삶에 들러붙어 있던 이 모든 것들, 그러니까 물건, 약정, 계약, 자동이체, 그리고 이런저런 의무사항들을 털어내면서 나는 이제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쓸데없는 것들을 정말이지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읽지 않는 책들, 보지 않는 DVD들, 듣지 않는 CD들이 너무 많았다. 인터넷서점에서 습관적으로 사들인 책들이 왜 자기를 읽어주지 않느냐고 일제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런 비난이 두려워 우리는 후회의 순간을 미래로 이월해버린다. 나중에는 보겠지, 언젠가 들을 날이 있을 거야. 그러나 그런 날은 여간해서 오지 않는다. 새로운 물건들이 계속 도착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순간의 만족을 위해 사들인, '너무 오래 존재하는 것들'과 결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서 축적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게 왔다가 그대로 가도록 하는 삶, 시냇물이 그러하듯 잠시 머물다 다시 제 길을 찾아가는 삶, 음악이, 영화가, 소설이, 내게로 와서 잠시 머물다 다시 떠나가는 삶. 어차피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물질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순수한 힘으로 보았다. 힘이 커지면 어른이 되고 힘이 완전히 사라지면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 죽는 것이다. 힘은 좋은 공기와 물, 자연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강해지고 반대의 경우 약해진다. 권력자는 사람들로부터 힘을 많이 받는 사람이고 또 그 힘을 잘 나누어주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훌륭한 인간이란 많은 것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많은 것이 잘 지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두는 사람이다. 하나의 사상이 나라는 필터를 거쳐 한 권의 책이 되고 한 곡의 음악이 나라는 필터를 거쳐 아름다운 문장이 된다. 이럴 때 나의 힘은 더욱 순수하고 강해진다. 모든 것이 막힌 것 없이 흘러가며 그 과정에서 본래의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을 생성하게 될 때, 인간은 성숙하고 더욱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 - 이탈리아 속담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돌아보면 지난 시칠리아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 긴 여행에서 그 어떤 것도 흘리거나 도둑맞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다시 짐을 점검해 보았다. 있을 것들은 모두 있었다. 오히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전광판을 보며 나는 지난 세월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장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시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날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날, 건달의 세월을 견딜 줄 알았고 그 어떤 것도 함부로 계획하지 않았고 낯선 곳에서 문득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새삼 깨닫고 놀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변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비슷한 옷을 입고 듣던 음악을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느새 그토록 한심해하던 중년의 사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애써 외면해왔을지도 모른다. 정말 젊은 사람들은 젊은이의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젊게 생각한다는 것은 늙은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늙은이들은 걱정이 많고 신중하여 어디로든 잘 움직이지 않느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 젊은이들은 자신의 취향도 내세우지 않으며 낯선 곳에서 받는 새로운 감흥을 거리낌없이, 아무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 Memory L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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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 파타고니아, 그리고 카리브.... 마음의 빈 공간에 남미의 바람을 채우고싶다.

 

 

[본문발췌]

 

 

여행은 영혼을 위한 비타민이자 가장 솔직한 자아를 마주하는 길이며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부활의 과정이기도 하다. 일종의 명상이나 수련처럼 자신을 비우고 단련하는 가장 신 나는 방법이고 시들해진 일상에 호기심과 열정을 다시 채워 넣어준다. 어디 그뿐인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나 뜻밖의 인연을 선물해 한 사람의 운명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버킷 리스트' 상위권에 '여행'이라는 단어를 올린다. 여행은 그 자체가 꿈이며, 우리를 끝없이 꿈꾸게 하고 때로는 꿈이 현실로 바뀌는 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행은 인간이 가슴에 품고 사는 우주를 확장시키고 내면의 성장을 도와주는 '길 위의 학교'다. 단언컨대, 한 번 여행을 할 때마다 당신의 영혼은 깊어지고 넓어지고 모난 부분이 깎여 부드러워질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행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아예 그것을 직업 삼아 살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직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인생의 부정적인 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것이 가장 다행스럽다. 나는 여행자로 살면서 '삶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 즉 아픔, 슬픔, 실패, 좌절, 불완전함 등을 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내 인생의 일부'로 끌어안고 공존해 살아가는 '체념의 미학'을 터득해가고 있다. 이것은 결코 삶을 비관적으로 보고나 자포자기 하는 자세, 혹은 무책임한 태도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은 유한하다'는 비극적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 여행은 가장 큰 힘과 지혜를 준다.

 

 

'이상적인 여행사가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어디를 가고 싶으냐고 묻기보다는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냐고 물어볼 텐데.' - 알랭 드 보통, <공항에서의 일주일을>

 

 

집 안 대청소를 해서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고 먼지를 떨어내듯 머릿속도 켜켜이 쌓인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해야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쁨으로 채울 수 있다. 우리 몸에 가끔 디톡스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정신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긴장과 스트레스에 시달린 영혼에서 독소를 빼내야 한다. 걱정, 불안, 경쟁심, 분노, 조바심 등을 내보내고 빈 공간을 마련하는 일. 그것이 바로 휴가다.

 

 

"젊은 아가씨, 우리의 땀이 곧 우리의 삶이에요. 인생은 그런 거지요. 어디에서 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똑같아요. 중요한 건 가슴에,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있죠. 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요. 당신도 부디 행복하세요." - '아베니다 데 라 호야(Avenida de la Hoya)' 식당 주인 아주머니...

 

 

페루 여행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어 더욱 감사한 시간이었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한없이 낮아지던 경험. 때로는 그저 겸허하게 받아들이거나 포기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깨달음. 인간 능력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교만함을 버릴수록 영혼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소중한 진리. 이것이 바로 페루 여행에서 얻은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역사는 쉬지 않고 흐른다. 우리는 그 역사의 강을 따라 흘러가버리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인간들. 창틀에 소복하게 쌓였다가 바람 한번 불면 포로로 날아가는 먼지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짧은 여행길 같은 인생에서 욕심 따위는 버리고 걸어도 좋다. 죽음도 너무 두려워하거나 애석해하지 말지어다. 그것 또한 삶의 일부인 것이니.'

 

 

"인생은 모든 순간이 그 고유의 가치가 있는 거란다. 겉으로 보이거나 소유하고 있는 것들과 상관없이 의지를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며 그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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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이고, 자유를 결정하는 것은 용기" - 페리클레스

 

자유를 위한 용기를 내려면 우선,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한다.

 

 

[본문발췌]

 

 

인류의 위대한 모험은 나머지 인류와 다른 길을 간 소수의 단호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역사는 호기심으로 세상에 저항한 이들의 기록이다.

 

 

생각은 혼자 두면 외롭고 무력하다. 생각은 소통을 통해 수정되어야만 남들에게도 의미 있는 생각이 된다. ... 모든 개인은 각자의 감성과 기억을 토대로 새로 흡수한 정보를 생각으로 형성한다. 그리고 생각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접하기 전에는 그 나름의 가치를 모른다.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생각과 접목하여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것은 창조성이 아니라 감성이다.

 

 

진보는 항상 번영과 함께 빈곤을 낳았다. 대다수가 가난하지 않던 시대가 언제였는가? 일부 사람들이 전보다 덜 가난해졌다고 해도 가난을 종식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돈이 발명된 이래로 모두가 만족할 만큼 풍족한 적은 없었다. 돈이 충분한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인구의 10분의 1이 부의 85퍼센트를 소유하는 현실을 막지는 못했다. 식민주의가 끝났다고 해도 해마다 수천억 달러가 빈곤국에서 부유한 나라로 흘러들어가는 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인구의 5분의 4가 여전히 부의 15퍼센트만 소유한 반면에 1퍼센트의 부자가 부의 3분의 1을 소유한다.

 

 

자선 사업의 목표는 물질적인 결핍을 메우는 것 이상으로 더욱 폭넓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소외감에 대응하고 단순히 무엇을 주고받는 것을 넘어서 호혜적인 '관계'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권력자는 더 이상 스스로를 믿지 않고 아무도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느끼며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자살한다. 권위자는 자신의 예측이 실현되지 않을 때 자살한다. 전문가는 다른 전문가들이 하는 말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때 자살한다. 친절한 사람은 친절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직업에 종사할 때 자살한다. 가장 흔한 형태의 자살은 희망을 잃는 것이다. 가장 우울한 자살은 고마워하는 마음의 자살이다. 시기와 탐욕과 오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만성질환이지만 그나마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억제되었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한때 사회를 융화시키거나 적어도 혐오감을 줄옂는 끈이었다. 이를테면 신, 조상, 부모, 스승, 이웃, 자연에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평등을 염원할수록 권리가 기반을 이루고, 상업화될수록 고마워하는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줄어든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독립에 대한 모독이자 자존심을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면 인간은 위협받은 때보다는 이해받을 때 외부 세계에 호기심을 가져왔다. 관심이야말로 우리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찬사다. 우리를 풍요롭게 만드는 최선의 방법은 남의 생각을 배우는 것이다. 인간이 항상 아주 작은 위험 신호에도 껍데기 속으로 숨어버리는 달팽이처럼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이해받으려면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를 알아보고 그들의 생각과 공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해한다고 해서 불일치가 다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일치를 풍부한 경험으로 만들어준다. 

 

 

시간의 엄수와 효율성은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되어 사람들에게 하루에 더 많은 활동과 성취를 이루도록 채찍질해서 개인의 리듬을 개성 없는 정해진 시간표에 맞추도록 강요한다. 인류는 점차 특권에 의해서만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삶을 인정하고 사회가 정해준 생활에 기꺼이 적응해서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자기가 하는 일과 그 일을 언제 할지를 통제해서 모든 활동을 자기 나름의 속도로 수행하고 예상 밖의 사건과 다양성, 놀라움과 즉흥성에서 큰 즐거움을 얻는 사람들로 나뉜다. 이로써 사람들이 원하는 미래상도 크게 달라진다.

 

 

자유는 단지 권리가 아니라 획득해야 할 기술이다. 나만의 렌즈가 아니라 다양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기술이자 아무도 상상한 적 없는 무언가를 상상해서 아름다움이나 의미나 영감을 찾는 기술이다. 각자의 삶은 이런 자유에 관한 우화다.

 

 

사람은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존재다. 인간은 타인과 개인적으로 결합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못한다. 관계가 호혜적인 관계이고 동시대인이나 선조들과의 공동체 의식으로 풍성해질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최근에 농촌에서 도시로,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 나라로 대규모로 이주하는 현상은 자연의 다채로운 변화에 대응하는 인류의 변함없는 특징이다. 국가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국경 안에 붙잡아두기 위해 다양한 장벽을 세워왔지만 최근에는 기술과 통신과 교육이 모든 사람을 연결해서 새로운 세대를 다시 유목민으로 만들고 있다.

 

 

사람의 나이를 살아온 햇수로만 세지 않고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강도와 그 사람이 흡수한 경험의 다양성으로 헤아린 다음 다시 멍하니 절반만 존재하면서 흘려보낸 시간을 모두 빼서 계산하듯이, 각 개인의 조국도 고마워하는 마음, 신의, 영감의 다양한 파편과 등급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페리클레스는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이고, 자유를 결정하는 것은 용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회는 사람들을 용기 있게 만들도록 조직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정신과 에너지를 쥐어짜는 일이 너무나 많다. 사람들을 생기 넘치고 흥미를 느끼게 하고 온전히 깨어 있게 하는 일은 너무 적다. 더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다면 일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는 노력을 인정받고 재능과 예술적 기교로 돈 많은 사람들의 변덕에 복종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요구에 대한 자각은 조직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한 진정제로만 조직에 투입되었다. 고대 아테네에서 고용은 노예를 위한 것으로 자유인은 남에게 굽실거리며 일을 해서 임금을 받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꾸로다. 고용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고 자기를 팔아서 시간제 임금을 받는 것을 성공으로 여긴다.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지내야 하는데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여긴다. 그럼에도 국가가 번창할수록 국민은 자유로운 인간으로 일하기를 꿈꾸면서 굽실거리고 아첨하지 않고도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나선다. 스스로 일을 통제하고 창조력을 발휘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고 인정받는 방법을 찾기 위한 넓은 탐색의 영역이 열려 있다. 그러나 이런 기회를 허락하는 일은 많지 않다. 굳이 이런 기회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일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체념하고 일을 하고 얻는 알량한 보상에 만족하거나 일 밖에서 만족을 찾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삶은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것이 삶의 의미이고 목적이다. - 도스토엡스키

 

 

일본에 강하게 남아 있는 다비 전통은 남을 발견하기보다 자기를 발견할 것을 장려한다. 다비란 속세의 경쟁과 질시를 멀리하고 자연과 교감하며 황야로 나가서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도보 여행을 뜻한다. 현대의 여행객들은 료칸에 머물며 과거로 걸어 들어가 성공에 대한 욕망을 떨치고, 조상들의 고행과 불확실성을 인정하던 마음, 덧없음의 미학, 사람이나 장소와 헤어지는 슬픔을 되찾으려는 막연한 욕망을 실현한다. '획일화된 단체여행을 피하라'는 조언은 혼자 여행하는 사람과 다츠사라(탈샐러리맨이라는 뜻으로 월급에 얽매인 생활에서 벗어나 독립한 사람)가 좋아하는 여행서 <걸어서 세계를 여행하는 법The way to walk the world>에서 전하는 메시지이지만 사실 자기 자신과 고된 현실에서 벗어나봤자 아무 데로도 가지 못한다.

 

 

의사소통은 메시지를 전송하고 상대가 발신자의 의도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사람마다 지식의 배경이 제한적이고 메시지의 함의를 파악하려는 의지나 에너지의 양이 다르기 때문에 수신자가 메시지에서 얼마나 많은 관련성을 발견하는가에 따라 메시지를 이해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메시지의 함의가 많고 함의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노력이 적을수록 관련성이 커진다. 남들이 우리에게 알아내도록 의도한 함의를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추측이 개입한다. 의사소통은 불확실성과의 싸움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다루는 지식의 상당 부분이 가변적이거나 희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발견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고, 사전에 정해진 목표로부터의 자유와, 사물이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불가피성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태도로부터의 자유에 의존한다.

 

 

살아 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연결되어야 한다. ... 살아 있다는 것은 그저 심장이 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심장은 어떻게 뛰고 다른 정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채는 일이다. 삶을 공격하는 치명적인 질병은 '생전 경직rigor vitae', 곧 호기심을 다 태워버리고 반복적이고 무감각한 일상에 안주하는 정신의 경직 상태다. 이런 상태는 살아 있다는 착각을 주기 때문에 '사후 경직rigor mortis'보다 더 위험하다. 전에는 생각해본 적 없는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서 영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저 명목상으로만 살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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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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