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더이상 입지 않는 옷, 읽지 않는 책을 모아 20박스 가까이 기부하거나 버렸다. 그리고 1~2년 후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해보니 20박스가 채워졌다. 그런데도 집에는 그 몇배의 물건이 가득하다.

 

집이 좁은 게 아니라 물건이 가득차 좁게 쓰고 있다. 공간을 비우고 마음을 채우자.

 

 

[본문발췌]

 

 

미니멀리스트'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소중한 것을 위해 물건을 줄이는 사람'이다. 이때 물건이란 가구, 가전, 소품, 옷 등 물리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필요 이상의 물건을 탐내는 욕심, 무의미한 일에 쏟는 에너지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포함한다. 그렇기에 물건을 줄이면 '쾌적한 환경'과 더불어 '삶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자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소유하는 미니멀리스트, 즉 최소주의자의 삶은 단순히 방이 깨끗해져서 기분이 좋다든가, 청소하기 편하다는 표면적인 장점뿐만 아니라 훨씬 더 깊은 본질에 그 가치가 있다. 바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는 것, 누구나 추구해 마지않는 행복을 되짚어보는 일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에게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 애쓴다. - 라 로슈푸코

 

 

세상에 태어나면서 손에 뭔가를 쥐고 나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누구나 미니멀리스트였다. 그러나 자라면서 필요한 것 이상의 물건을 꽉 움켜쥘 때마다 우리는 그만큼의 자유를 빼앗긴다. 나 자신의 가치는 갖고 있는 물건의 합계가 아니다. 물건으로 행복해지는 건 아주 잠깐 동안일 뿐이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건은 에너지와 시간은 물론, 결국에는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우리는 갖고 싶은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갖게 된 물건을 보관하고 유지하기 위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버리곤 한다. 그리하여 도구여야 할 물건은 어느새 주인이 되어 버린다. 영화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 역)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결국 네가 가진 물건에 소유당하고 말 거야."

 

 

인간은 하루에 6만 가지 일을 생각한다고 한다. 그중 95퍼센트는 어제와 똑같은 일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 생각이 80퍼센트는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한다.

 

 

네 직업이 곧 너인 건 아니야. 네 재산 또한 너는 아니지. 네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가 너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네 지갑 속 지폐가 너를 말해주지도 않아. 그 빌어먹을 브랜드도 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 영화 <파이트 클럽> 중에서

 

 

'익숙함' 이라는 독. 우리는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면 금세 그 상황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진 일은 점점 당연한 일이 되고, 당연한 일은 이내 싫증이 난다. 결국 만족 못하고 불행하다고 느낀다.

 

 

사들인 물건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막대한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한다. 물건 자체가 자신의 가치, 나아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건을 사서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애초에 물건은 도구였다. 석기나 토기처럼 본래의 기능을 위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필요한 물건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인간 사회가 전반적으로 풍족해지면서 어느새 물건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즉,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내면의 깊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심하면 우울증이나 자살로까지 내몰리게 된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만 가까스로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가치에는 딱 봐서 알 수 있는 외모의 가치도 있지만 내면의 가치도 있다. 하지만 내면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가 어렵고 알리는 데 시간도 걸린다.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물건을 통해 내면의 가치를 전달하는 편이 쉽고 빠르다. 하지만 물건으로 가치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넘쳐나는 물건에 얽매이게 된다. 자신의 가치를 알리는 물건이 어느새 자기 자신이 되어버리고, 물건은 계속 늘어난다. 이런 식으로 늘어난 물건은 거꾸로 자신을 공격해온다. 시간도 에너지도 물건에 빼앗기고, 예전에는 도구였던 물건이 자신의 주인이 된다. 이쯤 되면 이미 물건은 자신의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존재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엇이 아니라 지금 갖고 있는 것을 원하는 상태다. - 하이만 샤하텔

 

 

인생이 가벼워지는 비움의 기술

  • 실제로 버리는 작업보다는 물건을 버리기로 결심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의외로 많다. 시간, 공간, 수월해진 청소, 자유, 에너지 등...

  • 추억은 디지털화..... 편지, 일기, 인화사진, 앨범 등은 디지털화 하여 보관....

  • 사람은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사실은 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 바뤼흐 스피노자

  •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끝나고 시간이 생기면 그때 버리자.' '언젠가 안정되면 그때 버리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물건으로 괴로워하는 한 그 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안정돼야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버려야 안정된다. 시간이 있어야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버리면 시간이 생긴다. 그러므로 지금 장장 버려야 한다. 버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 자꾸 버리다 보면 과거보다는 지금이 보이기 시작한다.

  • 내 사진이나 일기 같은 기록은 나 자신의 과거 자체와는 관계가 업삳. 추억이 담겨 있는 사진과 기록을 버렸다고 해도 내 마음속에 있는 기억으로서의 과거는 남아 있다. 물건을 버렸다고 해서 과거를 버렸다는 식으로 과장할 일은 아니다. 만일 잊어버린 추억이라면 잊어도 좋은, 필요 없는 기억일 것이다. 필요한 인생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 나카자키 다쓰야, <소유하지 않는 남자>

  • 자신이 소유한 물건에 만족하느냐 아니냐는 물건의 개수와는 관계가 없다.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물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 수많은 물건에 대한 조잡한 의식이 아니라 극히 적은 물건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소중하게 의식하라. 그렇게 물건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물건을 소유하는 만족감을 두 배, 세 배로 높여준다.

  • 풍부한 개성을 만드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다.

  • 물건은 기억해주는 주인을 잃을 때 가치도 함께 잃는다.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시간의 여유는 행복으로 직결되는 반면 물질의 풍요는 그렇지 않다.' - 팀 캐서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를 얻었다. - 영화 <파이트 클럽> 중에서.

 

 

사람은 어떤 물건에도 금방 익숙해진다. 그래서 물건보다 경험에서 얻는 행복의 지속 시간이 더 길다. ... 이렇듯 물건보다 경험에서 오는 행복의 지속 시간이 훨씬 긴데도 사람들은 물건에 돈을 더 잘 쓴다. 그 이유는 경험보다 물건이 남과 비교하기 쉽기 때문이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 법정

 

 

자기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해 물건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애쓰는 편이 훨씬 더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 간디

 

 

미래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완전히 살고 있지 않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 <아직 나를 만나지 못한 나에게> 중에서

 

 

미래와 과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영원한 현재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다.

 

 

미래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현재를 소홀히 한다. 가치 있는 미래를 위해 지금은 힘들어도 참아내며 미간에 주름을 짓는다. 하지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현재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미간에 주름 짓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 모든 상황에서 계속 미간에 주름을 지을 것이다. 지금 한숨을 쉬고 있는 사람은 일생동안 계속 한숨을 쉬게 된다. 만일 뭔가 달라지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달라지기 시작해야 한다. 내일도, 다음  주도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일이 와도 '지금'이다. 1년 후도 다가오겠지만 그 역시 현재다. 모든 것은 지금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식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기적 같은 건 없다고 믿는 삶,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이 기적이라고 믿는 삶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모든 현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너그러우며 체념하지 않는다. 친절하고 다정하며, 무엇보다 항상 행복해 보인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갖는 건 커다란 행복이다.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게 더 큰 행복이다. - 메네뎀

 

 

환경은 행복에 10퍼센트밖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에 인간은 곧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먼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행복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의 본보기를 그대로 따라 한 포상으로 행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 행복해지는 일은 없다. 행복은 그때마다 '느끼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뿐이다. 오직 지금 이 수간의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내일도 모레도, 1년 후에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내일도 모레도, 1년 후에도 찾아오는 것은 미래가 아닌 현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바로 지금부터 언제든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은 마음이 결정한다. ... 남이 보기에는 어떤 괴로운 상황에 있어도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지금의 환경에 감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 이것이야말로 행동이 행복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이유다. 우리는 조건을 달성함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 느껴야 한다.

 

 

물건을 최소한으로 줄인 나는 시간의 여유가 있다. 매일의 생활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도 충만한 느낌이 든다. 더 이상 남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비참한 기분에 휩싸이는 일도 없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니 마음껏 행동할 수 있다. 집중력은 높아지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다. 쓸데없는 자존심은 사라지고 염치가 좋아져서 내가 쓴 책을 출판할 정도로 대담해졌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똑똑히 느낀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히는 일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겁먹는 일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모든 것에 앞으로도 계속 감사하고 싶다. 모든 현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살고 싶다. ... 나는 물건을 줄이고 나서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다. 가족과 친구뿐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사람이나 재능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의견이 맞는 사람도, 맞지 않는 사람도 모두 소중하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의 목적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나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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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살던 시대나 현재나 삶의 지혜는 비슷하다. 평범한 그 것을 단지 실천하기 어려울 뿐!

 

 

[본문발췌]

 

 

'예절'이란 말을 구성하고 있는 두 글자의 뜻을 살펴보자. '예(禮)'는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적절히 조절하기 위한 사회적인 질서와 규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절(節)'은 대나무에 있는 하나하나의 마디처럼 그 '예'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상황별로 펼친 세부적인 실천 지침들을 가리킨다. 결국 예절은 함께 사는 사회에서 인간이 서로 배려해야 한다는 정신과 그 실행 방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어떤 사람이든 존중하고 배려하기를 좋아하는 것!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몰라줄까 그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통제하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법망을 빠져나가 형벌만 면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하지 잘못된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은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올바른 가치와 철학으로 이끌고 예의로 통제하면, 사람들이 부끄러움도 알고 스스로 마음을 올바르게 할 줄도 알게 되지요.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게 진짜로 아는 것.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으면 성공은 따라오게 돼 있다.

 

 

사람이면서 사람답지 못하면 넘치는 매너가 다 무슨 소용이겠나? 사람이면서 사람답지 못하면 높은 문화 수준이 다 무슨 소용이겠나?

 

 

내가 즐거움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나를 통제하고 있다면 그것은 '즐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즐긴다'는 표현은 내가 시작하고 내가 맺을 수 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

 

 

세상과 삶의 이치를 깨우친 지성인은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일에 대해서 꼭 이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없고, 절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저 오직 정의를 기준으로 거기에 따라 갈 뿐이죠.

 

 

높은 자리로 올라가지 못할까봐 걱정하지 말고, 거기에 올라가게 됐을 때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는지를 걱정해야 합니다. 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가를 신경쓰지 말고 남이 알아줄만한 것이 내 안에 있는지를 찾아야 하지요.

 

 

공자가 추구했던 '온전한 사람다움'의 길을 증자는 '내 진심을 다해 너를 대하고(忠), 내 마음을 미루어 네 마음을 헤아리는 것, 즉 내가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너에게 하지 않는 것(恕)'이라고 이해했다.

 

 

욕심이 사나우면 굳건하고 강해 보인다. 가져야 하고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른 가치를 깨달아 그것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외부에 맞서는 것과 제 욕심 하나 이루자고 세상에 눈을 부릅뜨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욕심으로 강해 보이는 사람은 실은 강한 게 아니다. 욕심을 충족시켜줄 대상에게 언제나 깃털보다 가볍게 무릎을 꿇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그만두게 되더라도 일단 걸으면 그 걸은 만큼은 내 것이다. 또 그 길에서 엎어지게 되더라도 그 길 안에 있으면 언제 일어나더라도 일어나는 곳은 바로 그 길이 아니겠는가? 이거다 싶은 걸 찾으면 내가 그 길을 걸을 수 없는 백만 가지 이유를 찾기 전에 일단 한 걸음부터 떼고 볼 일이다.

 

 

번지가 지혜로움이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공자가 답해주었다.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에 힘쓰고 귀신이나 신에 대해서 경외하는 마음은 갖지만 의지하지는 않고 거리를 둘 줄 안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러자 이번에는 사람다움이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진짜 사람다움이란 것은 어려운 일을 먼저 해내고 나서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지. 그렇게 하면 제대로 사람답다고 할 수 있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사람다움을 이룬 사람은 산을 좋아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황을 파악하니까 상황에 따라 계속 움직이게 되고, 사람다움을 이룬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하는 것을 할 뿐이니까 가만히 제자리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막힘없이 흘러가며 살아 즐겁고, 사람다움을 이룬 사람은 듬직하게 자기를 지키며 살아 장수합니다. 

 

 

조화로운 균형감각과 평범성의 가치란 그지없이 대단한 것이지. 그러나 사람들이 이 가치를 잊고 외면하고 산 지가 참 오래되었네요. 

 

 

인품을 잘 갈고닦지 못한 것, 배운 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익히지 못한 것,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 단점을 고치지 못한 것, 내 걱정거리는 이런 것들이라네. 

 

 

사람으로서 걸어야 할 길에 뜻을 두고, 내면의 바른 가치를 확고하게 지키고, 사랑의 정신을 중심으로 삼고, 일상생활 속에 필수 교양이 익숙하게 녹아 있어야 한다. 

 

 

부자라는 게 인력으로 되는 거라면 아무리 천하다고 하는 직업이라도 나는 그 일을 꼭 할 거네. 그러나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면 나는 그냥 나 좋은 일을 하면서 살겠어!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다보면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어. 그의 장점을 통해서 내가 본받을 것을 배우고, 단점을 통해서는 내가 고쳐야 할 부분을 배우는 거지. 

 

 

풍속이 아주 안 좋아서 함께 이야기할 종자들이 못 된다고 소문이 난 동네인 '호향'에서 한 소년이 공자를 만나러 왔다. 공자가 그를 만나주자 제자들이 갸우뚱했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나를 만나러 온 것을 인정할 뿐 돌아가서 잘못하는 것이야 미리 생각할 거 없으니 뭣 때문에 심하게 대하겠나? 사람이 자기를 반성하고 지금 새사람이 되어 내게 왔으면 그 새사람만 인정하면 되는 거야. 뭐하러 과거를 물고 늘어져?"

 

 

사치하다보면 어느새 거만해지고, 검소하다보면 어느새 쫀쫀하고 답답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거만해지는 것보다야 쫀쫀하고 답답해지는 게 낫지요. 

 

 

성숙한 인간은 늘 시원시원, 좀팽이들은 언제나 조마조마. 인간됨을 잘 수양한 지성인은 마음에 거칠 것이 없어 너그럽고 여유가 있는데 인간됨을 몰라 그저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만사 걱정 아닌 게 없어 늘 죽을상이다.

 

 

능력이 있으면서 능력이 없는 이에게 배울 줄 알고, 많이 알고 있으면서 적게 알고 있는 사람에게 배울 줄 알고, 가지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꽉 차 있으면서도 텅 빈 것 같으며, 누가 시비를 걸어도 맞대응하지 않는 자세.

 

 

민중은 옳은 길로 따라오게 할 수는 있지만 그 길이 왜 옳은 길인지를 이해시키기는 어렵네.

 

 

그 직책에 있지 않다면, 그 직무에 대한 참견은 금물. 그 자리에 있어봐야 그 자리의 무게를 안다. 내가 실행할 것이 아니라 그가 실행할 것이고 내가 책임질 것이 아니라 그가 책임진다. 그러니 섣부른 훈수는 종종 부끄러움이 되어 돌아오곤 한다.

 

 

공자는 네 가지를 절대 하지 않았다. 근거 없이 미리 억측하지 않았고, 내가 절대 옳다고 하지 않았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자기부터 앞 세우는 일을 하지 않았다.

 

 

지금 세상은 깊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재주 많은 사람, 인품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기술을 갖춘 사람이 되라 한다. 진정 위대한 사람은 큰 가치를 지향하는 마음, 올바른 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데, "내가 해봐서 아는데" 하면서 자잘한 것들만 붙들고 시시콜콜 지시하고 고집 부리는 지도자를 많이 본다.

 

 

제가 뭘 좀 안다고요? 천만에요,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가령 지식 수준이 낮은 사람의 질문에조차도 막막해지는걸요. 다만 저는 그 질문의 처음과 끝, 양쪽 방향에서 따져 들어가 모든 측면을 샅샅이 다 짚어 보일 뿐이에요.

 

 

일을 할 때는 마음을 다해서 충실하고 신의 있게 하고, 친구를 사귈 때는 만만한 사람 말고 보고 배울 게 많은 사람을 선택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실수하거든 곧장 고쳐야 합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다만 주저 없이 고치는 걸 아무나 못하는 거죠. 

 

 

군사가 수만이라도 그 장군을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한 한 사람이라도 그 생각은 빼앗을 수 없다. 

 

 

겨울이 온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오래도록 푸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 법이지요.

 

 

지혜로운 사람은 현혹되지 않고, 온전한 사람다움을 이룬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짜 선택은 반드시 나 스스로 해야 하는 정말 고독한 작업.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의 차이는 다만 내 의지의 문제.

 

 

과유불급, 지나친 건 도달하지 못한 거나 같네.

 

 

제대로 배운 지성인은 차이 속에서 조화를 이루지만 차이가 없이 마냥 똑같아지는 방향으로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짧은 사람들은 똑같아지려고 하지 차이 속에서 조화를 이루려 하지는 않죠. 

 

 

강직하고, 의지가 굳고, 꾸밈없이 소박하고 , 말이 어눌하다면 사람다움을 위한 기본 품성은 거의 갖춘 것이다. 

 

 

인간다움에 뜻을 둔 지성인은 위로 세상과 인생의 도리와 이치에 환하고, 먹고사는 일만 걱정하는 그저 그런 인간은 아래로 눈앞의 이익에만 빤하죠. 

 

 

참된 지성인은 의로움을 마음 바탕으로 삼고, 배려와 존중을 갖춰 행동하며, 공손한 자세로 자기를 표현하고, 신뢰를 통해 일을 이루어냅니다. 이렇게 하는 자가 진정한 지성인이지요. 

 

 

잘못하고서 고치지 않는 것, 그게 진짜 잘못입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조직을 이끄는 사람은 경제 규모가 작은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물자가 고르게 나눠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고, 전반적인 가난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지 못할까 걱정한다고 말이요. 고르게 나눠지면 가난이 없어지지. 사람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 경제 규모가 작은 게 문제 안 돼.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면 그 나라나 조직은 무너질 수가 없어. 다스림의 원리는 이런 거야. 통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먼 곳에 있는 이들이 먼 거리를 핑계로 명령에 따르지 않거든 지도자는 바른 윤리와 아름다운 문화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그들이 스스로 오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야. 그렇게 해서 그들이 실제로 오면 그들의 삶을 안정시켜주어야 하는 거고.

 

 

경제는 그 첫발을 부의 총량 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분배의 관점에서 떼어야 한다. 분배는 사회적인 안정과 직결된다. 분배의 정의가 확립되어야만 국민들은 마음으로부터 자기 나라 지도자를 신뢰하고 좋아하게 된다.

 

 

윗사람과 함께 대화할 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로 세 가지쯤을 꼽을 수 있어요. 윗사람이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불쑥 끼어들어 내 말을 하는 걸 경솔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말을 할 순서가 되었는데도 말하지 않는 걸 숨긴다고 하지요. 마지막으로 윗사람의 표정도 살피지 않고 그냥 냅다 말하는 걸 '장님'이라고 해요.

 

 

잘 배우려는 사람은 세 가지 시기별로 자기를 주의해서 살펴야 해요. 첫째, 젊었을 때는 혈기가 안정되질 않아 끓어오르는 혈기를 어쩔줄 몰라 하죠. 그땐 성욕을 조심해야 해요. 둘째, 장년이 되면 혈기가 뭔가 이룰 수 있을 만큼 짱짱하고 강해져요. 그땐 승부욕 때문에 싸움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죠. 마지막으로 노년이 되면 혈기가 쇠하면서 뭔가 손에 쥐고 싶어져요. 욕심이 생기는 거죠. 노년에는 노욕을 조심해야 합니다.

 

 

공자가 말한, 바른 지성인이 생활에서 항상 생각해야 할 것 아홉가지

  • 눈, 분명하게 보았는가?

  • 귀, 확실하게 들었는가?

  • 표정, 온화한가?

  • 자세, 공손한가?

  • 말, 진심인가?

  • 업무, 신중하게 처리했는가?

  • 헛갈리는 일, 분명하게 알 때까지 질문했는가?

  • 화가 치민 순간, 기분대로 저질렀을 때 뒷감당이 되겠는가?

  • 이득이 될 것을 본 순간, 내가 얻어도 되는 합당한 이득인가?

 

본성 자체는 사람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습관이 완전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놓는 거지요.

 

 

천박하고 욕심 사나운 사람과 함께 중요한 나랏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은 관직을 얻기 전에는 얻지 못할까 전전긍긍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봐 전전긍긍하죠. 자리를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기 시작하잖아요? 그럼 그들은 못하는 짓이 없게 되지요.

 

 

폭넓게 배우고 뜻을 굳건하고 진실하게 하며, 절실한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고 현실적인 것부터 구체적으로 생각하도록 하세요. 진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경지는 바로 그 안에 있는 겁니다. 

 

 

바른 리더는 아랫사람들에게 신뢰부터 얻은 뒤에 그들에게 일을 시킵니다. 아직 신뢰도 얻지 못했는데 일부터 시키잖아요? 그럼 아랫사람들은 그가 자기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자기 상사에 대해서도 그에게 신뢰부터 얻은 뒤에 문제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신뢰도 아직 얻지 못했는데 지적부터 하잖아요? 그럼 상사는 그가 자기를 욕한다고 생각하죠.

 

 

지도자가 너그러우면 백성의 마음을 얻고, 지도자가 성실하게 일하면 백성들이 나라 살림을 믿고 맡기고, 지도자가 부지런하면 많은 업적을 이루고, 지도자가 공정하면 백성들이 그에게 열광한다. 

 

 

다섯 가지 미덕을 존중하고 네 가지 악덕을 끊어버리면 정치를 잘한다고 할 수 있지

  • 백성들을 넉넉히 도와주지만 그렇다고 낭비하지 않는것,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지만 원성을 사지는 않는것, 야망은 있지만 탐욕은 부리지 않는 것, 늘 어떤 상황에서든 태연하지만 거만하지는 않은 것, 위엄이 넘치지만 사납지는 않은 것이네.

  • 해도 안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미리 다 가르쳐주지도 않고서 법을 어겼다고 잡아죽이는 것, 그런 걸 '학대'라고 하지. 미리 어떻게 하라고 방향도 가르쳐주지 않고 대뜸 성과를 요구하는 거, 그런 걸 '횡포'라고 하지. 자기 게으름 때문에 일을 늦게 주고서 기한 안에 마쳐야 한다며 다그치는 거, 그런 걸 '도둑놈 심보'라고 하지. 사람들에게 당연히 줘야 할 걸 주는 것인데도 괜히 인색하게 구는 거, 그런 걸 '관료주의'라고 하지. 이것이 네 가지 악덕이네.

 

공자는 시대를 거듭해서 내려온 제도와 질서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위치에 합당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을 살면서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는 나와 타인으로 구성된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전에 중요한 것은 내가 나에 대해 솔직한가이다. 내 속마음과 나의 행동이 어긋나면 타인과의 관계가 혼란스러워진다. 내가 '아'라고 말한 것이 '아'일 수도 있지만 실은 '어'의 뜻이라든가 '오' 혹은 '유'일 수도 있으면 심지어 '가'일 수도 있다면, 게다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신뢰(信)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내 말(言)과 행동(行)을 일치시키는 것이 타인과 관계를 맺기 전 내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내 마음을 타인에게 확장시킬 수 있다. 내 마음을 미루어 타인을 대할 수 있고(恕), 더 나아가 내 진심을 다해 타인을 위할 수 있는(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에는 사적인 감정이나 이해를 뛰어넘어 인간이면 해야할 옳음(義)에 대한 판단(知)과 더 큰 틀에서 세상의 조화를 살피는 사회적 규범에 대한 이해(禮)가 필요하다. 사람으로 태어나 나와 타인, 그리고 사회에 대해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필요한 기능을 숙지하고 숙련해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인재로 공헌할 수 있는 덕목이 인(仁), 즉 온전한 사람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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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가운데 닥치는 일들 중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더 많은 걱정과 노력, 시간을 쏟으며 스스로 삶을 힘들게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본문발췌]

 

 

온대국가에 비해 열대국가가 가난한 데는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낮은 농업 생산성이고, 다른 하나는 열악한 공중 보건입니다.

  • 열대지역은 토양의 비옥도가 낮고 박토, 온대지역의 농지는 심토이고 비옥한 편. 빙하가 미국과 이탈리아의 넓은 지역을 반복해 오르내리며 바위를 문질러 새로운 흙을 만들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영양분도 흙에 더해진 반면 무더운 열대지역은 얼음으로 뒤덮인 적이 없어, 영양분이 풍부한 새로운 흙으로 재생되는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 온대지역은 나뭇가지와 낙엽이 땅에 떨어져 천천히 썩어가며 토양에 오랫동안 영양분을 방출하는 유기물이 많다. 그러나 열대지역에서는 땅에 떨어진 낙엽과 나뭇가지, 유기물이 열대의 높은 기온 때문에, 또 미생물과 작은 동물들에 의해 신속하게 분해됩니다. 게다가 열대의 잦은 비 때문에 영양분이 토양에 스며들지 못하고 강으로, 다시 바다로 씻겨 내려갑니다. 이처럼 두가지 이유에서 열대지역의 토양은 박토이고 비옥도도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 온대지역보다 열대지역에 동식물의 종이 훨씬 많습니다. 곡물을 감염시켜 병들게 하여 결국에는 생산량을 크게 떨어뜨리는 병원균과 벌레와 곰팡이의 종류도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 온대지역은 겨울의 매서운 추위에 기생충과 세균이 죽습니다. 따라서 봅이 되면 세균과 기생충이 처음부터 다시 자라기 시작해야 합니다. 반면에 열대지역에서는 기생충과 세균이 1년 내내 번창합니다.

  • 온대지역의 질병은 주로 과밀한 인구 사이에 급속히 퍼지는 전염병, 즉 천연두와 홍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과밀한 인구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는 대부분의 전염병은 평생에 한 번, 주로 어린 시절에 걸리는 질병입니다. 따라서 어린 시절에 천연두나 홍역에 걸리고도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은 평생 동안 그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 면역력을 갖게 됩니다. 반면에 열대지역의 질병들은 한 번 걸리더라도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재발성 질병(recurrent disease)입니다.

  • 열대성 질병에서 비롯되는 짧은 기대수명이 숙련된 근로자나 행정가로서 생산 활동에 기여할 수 있는 기간이 짧다. 또한 평균 사망률과 높은 이환율로 많은 자식을 낳아야 하기에 여성의 가임기가 늘어나고 어린아이의 수가 많아져 생산 활동 인구 비율이 낮아 경제에 악역향을 미친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자는 구운 점토판에 씌었고, 양과 밀 등 농산물을 헤아리는 데 사용된 듯합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는 상형문자로 구운 동물뼈에 조각되거나 그려졌습니다. 게다가 구운 동물뼈에 쓰인 상형문자는 양과 밀을 헤아리는데 사용 용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예언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중국이 쉽게 통일된 반면에 유럽은 통일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지리적 차이에 있습니다. 유럽은 반도와 산맥, 섬과 강으로 인해 여러 정치 단위 지역으로 분할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는 변변한 반도도 없고 큰 섬도 없습니다. 대륙을 가로지는 산맥도 없고, 방사형으로 뻗어 흐르는 강도 없습니다. 따라서 중국은 통일을 이루고 유지하기가 쉬운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통일이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닙니다. 통일은 때로는 유리하고 때로는 불리합니다. 중국은 일찍부터 통일된 까닭에 중국의 역사는 급격히 흔들리고 변하는 '요동'(lurching)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유럽은 수십 개로 분할된 까닭에 수많은 군주가 수많은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중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어떤 나라에 탐험가나 명망가로 성공한 사람이 나타나면 다른 나라들이 성공한 선례를 곧바로 모방하고 나섰습니다.

 

 

국가의 영향은(national impact) '해당 국가의 국민 수 x 일인당 소비율 혹은 생산율'

 

 

개인이든 국가든 변화를 요구하는 압력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적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위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위험, 단번에 많은 사람을 죽이는 위험,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위험을 과대평가합니다. 반면에 우리에게 익숙한 위험은 과소평가됩니다. 이런 이유로 자동차와 음주와 흡연, 낙상과 가전제품의 위험을 과소평가합니다. ...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테러리스트의 공격이나 유전자 조작식품보다 더 크게 걱정해야 하는 진정한 위험은 샤워실에서, 젖은 도로에서, 사다리에서 혹은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 미끄러져 넘어질 가능성입니다.

 

 

서구식 생활방식의 채택은 어떤 이유로든 비전염성 질병의 확산으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서구식 생활방식의 특징은 정주 생활, 적은 육체 활동, 매일 고칼로리 섭취와 과체중, 지나친 음주, 염분과 당분의 과도한 섭취, 또 섬유질 함량이 낮은 식품의 섭취와 흡연으로 비전염성 질병. 당뇨, 고혈압, 심근경색, 동맥경화증, 암, 신장 질환, 통풍 등의 질병을 일으켜 인간을 살아남게 한 능력이 오히려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세계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들

 

1) 지구의 기후변화(global climate change)

    • 일인당 평균 인간영향(human impact) = 일인당 평균 소비 자원량 + 일인당 평균 생산 폐기물량

    • 이산화 탄소 발생, 온실가스로 활동으로 대기온도 상승, 대양에 축적되어 산성도 상승하여 산호의 껍질이 녹고 산호초가 죽어 해양생물과 해안 지역 파도, 쓰나미로부터 보호 역할을 못함.

    • 지구 온난화로 가뭄, 식량 생산의 감소, 열대성 질병을 옮기는 벌레가 온대지역까지 이동, 해수면의 상승.

 2) 불평등

    • 국가간의 부의 불평등. 질병과 이민, 테러는 국가 간의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직접적인 결과.

    • 국가 내 부의 편중에 따른 빈부격차

 3) 인간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환경자원의 관리, 자연자원의 지속가능한 관리. 자연자원의 남용.

    • 재생 가능한 자연자원의 관리. 어류, 숲과 토양, 담수.

    • 자연은 물과 공기를 깨끗이 정화하고, 토양을 비옥하게 유지하는 생태계 서비스를 우리에게 공짜로 제공.

    • 유럽인이 아프리카인보다 평균 32배나 많은 자원을 소모하기 때문에 인구가 6,000만 명에 불과한 이탈리아가 소모하는 자원량이 10억 명의 아프리카인 전체가 소모하는 자원량보다 2배나 많습니다.

    • 어장과 같은 자연자원을 지속가능하게 관리하려면 생물학적이고 물리학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연자원을 올바로 관리하려면 사회, 경제, 정치적인 면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전화기, 자동차, 텔레비전, 이메일이 있어도 인간의 근본적인 걱정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어떻게 노인을 대할 것인가, 분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떻게 건강을 유지할 것인가, 어떻게 위험과 다른 걱정거리들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인가 입니다. 인류는 전화기, 자동차가 없던 지난 수만 년 동안에도 이와 같은 걱정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아마 로봇과 인공지능을 더 많이 갖게 된 뒤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똑같은 걱정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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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행에 푹 빠져, 다니던 대기업을 뒤로하고 여행 작가겸 가이드가 된 사람,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고향으로 돌아가 "올레길"을 만들었던 서명숙 이사장,

같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순례길'이라는 책을 펴내고 40살에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선 파울로 코엘료!

 

누구나 자신만의 여행의 이유가 있고 여행 이후에는 어떤 형태로든 삶의 변화가 시작된다.

 

 

[본문발췌]

 

 

"남들이 이미 간 길을 따라서 정상에 오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 자유의지에 따라,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 그것만이 의미가 있다.", 알버트 머메리.

누구나 가는 곳을 누구나 가는 길을 택해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는 것. 이건 여행이 아니다. 아무런 정보도 지식도 없이, 지도도 가이드도 없이 현지에서 묻고 오해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진정한 여행은 시작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 헤르만 헤세

 

 

커피나무는 열대지방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뜨거운 태양 볕을 태양 가장 가까운 데서 받으며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결하고 하얀 꽃을 피워낸다. 배꽃같이 하얀 꽃으로 붉은 열매를 맺는다. 앵두 같은 붉은 열매가 열정적인 커피체리다. 그래서 커피여행이 나를 이렇게 열정과 설렘으로 이끄는 것일지도... 떠나오길 잘했다. 떠나와서 내 심장을 더욱 뜨겁게 채운다. 논밭의 흰 눈과 하늘의 붉은 기운을 지나 검으스레한 노을이 보이는 전경을 창밖으로 흘러 보내며, 온몸과 맘에 커피꽃 향을 묻히고 떠난다.

 

 

본래 산속에서는 산의 본 모습을 볼 수 없고 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본 모습을 볼 수가 있는 법이다. 가끔은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장 위대한 여행은 지구를 열 바퀴 도는 여행이 아니라 단 한 차례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이다. - 마하트마 간디

 

 

Camino De Santiago, 카미노에서의 동행은 본인의 고통은 스스로 감당하면서 서로의 길에 깊이 간섭하지 않고 최대한 상대의 호흡과 보폭을 허용하며 같이 또 따로 걷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카미노를 다녀와서 나의 생활은 많이 바뀌었다. 느리게 걷는 즐거움과 나를 비움으로 넉넉해지는 삶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전보다 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한 달을 걸어 나는 온전한 모습으로 나에게로 돌아왔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지도 시간을 재촉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연을 만나러 가는 여행에 욕심을 내지 않으려 한다. 내가 있는 그 자리, 그 시간에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주어진 그 자연만이라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사제들은 1대 1만이 가능했을 아날로그적인 생각을 하며 현재의 우리들은 1대 다수가 가능한 디지털 사고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래된 아날로그가 1대 1만 가능하다고 해서 단편적이고 제약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무, 꽃, 하늘, 바다, 곤충, 돌 등 단 하나에 집착해 사고하거나 결론을 낼지 않는다.

오래된 고성과 회랑을 천천히 걸으며 그들은 그 개별적인 것들에서 뒤에 숨은 깊은 한 가지 본질이나 깨달음을 찾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매우 다양한 디지털 사고를 하고 있음에도 그 다수의 조각들이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서 우러난 단편적인 시각들일 뿐이다. 사물을 편협하게 이미지화시키거나 각각 개별의 사물들에 집착하며 이미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틀 속에 가둬둔 채 그것들의 의미와 본질을 정보로서 평가한다. 어찌 보면 다양한 지식과 정의는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뒤에 숨은 넓고 진실된 본질 한 가지는 놓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진정으로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사제들의 동선을 따라 그들의 사색을 따라 고성을 느릿느릿 돌아보기로 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의 경계와 틀 속에서 모든 것을 규정짓는다. 의식 속에서 살아남은 것들만이 진실로 기억되고, 명료한 기승전결을 따르지 못하면 실패로 치부되어 잊혀지고 소외되기 십상이다. 연속되어 보이지만 인식의 뒤편으로 버려진 것들은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단절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정확히 떨어지는 숫자와 단절된 찰나의 시간, 단편적인 시각의 이미지들에 집착하는 우리는 많은 것들을 인식의 뒤편으로 보내어 잊고, 잃고 살기에 그래서 외롭다. 미분의 시간 속에서 쉽게 잊혀진 찰나의 존재와 의미들은 갈 곳을 잃고 우리를 더더욱 허전하고 외롭게 만든다. 하지만 긴 시간을 인고하며 서 있는 내밀한 옛것들은 오랫동안 쌓아온 연속성과 쉽게 드러나지 않는 포용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결코 혼자 있어도 허무하거나 외롭지 않을 수 있다. 오랜 적분의 시간들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도 놓치지 않는 여유로움과 풍만하고 의미 있는 이야깃거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치가 없는 인식의 저편으로 묻혀버릴지라도 그것이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닐테니까 말이다. ... 때로는 오래된 곳들을 고즈넉이 걸으면서, 내가 속해 있지 않은 다른 곳을 찾아 여행하고 눈에 담으면서, 넓은 물속에서 노를 젓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내가 일상에서 정의내렸던 사물들과 의미에서 벗어날 때, 내가 알고 있는 장소와 물건들에서 자유를 얻었을 때 우리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본질을 보게 되고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리하면 우리의 일상은 의미 있고 소중하며 더욱 충만해지고 허무하거나 외롭지 않을 수 있다. - 정아영, 프랑스 몽생미셸,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을 수 있다.'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 게라마 블루, 아하렌 비치.... 관광객의 눈은 보이는 대로 본다. 그러나 여행자의 눈은 어린아이처럼 그 대상이 무엇이든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고 신기하게 보는 능력이 있지 않는가. 그 눈을 장착하고 무심코 지나친 섬마을의 풍경을 돌이켜보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평소에는 아무리 쫓아가도 붙잡을 수 없었던 녀석, 때로는 나를 정신없이 쫓기게 만들었던 녀석, 그 괘씸한 시간이라는 녀석이 느릿느릿 마을을 걸어 다니고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세상 밖 시간의 속도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 그날 오후처럼 '여행자의 눈'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익숙해져서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온통 설렘과 떨림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여행을 떠나면 나도 모르게 오감을 활짝 열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고 즐거워한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모든 것을 새롭고 생생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살아있는 순간만큼은, 별 볼일 없이 평범한 내 인생도 행복감으로 충만해져서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일상을 여행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 - 정윤주, 오키나와, '한없이 투명한 게라마 블루를 찾아서'

 

 

자의든 타의든 여행은 변화를 동반한다.

 

 

문 닫고 시구 찾는 것 옳은 시법 아니니, 길을 나서보면 시가 절로 생긴다네. - 양만리, ... 떠나야 영감이 떠오른다. 시인을 포함한 예술가들에게 여행은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다.

 

 

여행은 1막 밖에 없는 인생의 제2막이다. ... 책을 읽는 이유, 여행을 하는 까닭은 둘 다 세상을 알고 싶어하는 원초적 욕망 때문이다. 여행은 자아와 타인의 비교와 조화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의 시도다. 여행에서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닌 깊은 체험을 통한 변화의 힘이 나온다. 길을 떠나면 보이지 않던 세계가 펼쳐진다. ... 평범한 일상에서 느끼는 예지는 여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여행은 일상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낮은 수준의 기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낯선 여행은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 일시적으로 일상을 접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자기를 변화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평소와는 색다른 환경에서 자연과 문화 혹은 사람들과 만남은 자기 확인과 발견의 새로운 기회가 된다. 온 감각이 열리는 미지의 신세계로 다가간다. 여행은 지적 호기심 충족과 영혼의 충만감으로 사람을 변화시킨다. 여행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긴장감과 해방감이 교차되는 무대다. 여행에는 교양 제고의 목적이 있고 즐거움을 얻는 위안형도 있다. 여행은 미지의 세계와의 조우, 현실 탈피, 마음의 정화,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 편견을 너그럽게 해주는 자유와의 만남, 어디에도 속할 수 있는 자유, 호기심과 일상의 탈출이다. 여행은 일상에서 당한 굴욕을 씻을 절호의 기회다. 저곳은 기회의 땅이자 자유의 땅이다. 누구도 나를 계급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국적은 물어도 계급은 묻지 않는다. ... 수렵채집 시절부터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생존을 위한 유량벽은 오늘날 새로운 버전의 낭만주의적 경험 소비인 생존 여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은 신체의 생존 요령을 터득한 후 다른 차원의 생존 비결인 영혼의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 근원도 모를 그리움을 여행길에서 긁고 다닌다. 인간은 이유도 모르고 태어나 고민하고 늙어가면서 죽음을 맛이한다. 여행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노자의 말처럼 "좋은 여행은 궤도나 정도가 없다"일지 모른다. 여행이나 인생에 어디 객관적인 이유가 있을까. 성숙이란 긍정적 변화를 만들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우리가 떠나온 곳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갈 뿐이다. 인생이나 여행에서 무엇을 얻어서 들고 갈까. 그것은 여행길에서 만났던 황홀이라는 추억은 아닐까. 여행이 끝나는 시점 그러니까 죽음의 시점에서 지금을 바라보라. 텅 빈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떠나지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 최치헌,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진 사내'

 

 

인간은 사랑과 죽음, 그리고 여행을 통해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실감한다. - 전규태, <단테처럼 여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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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보들레르가 이야기한 근대성의 특징 '순간적인 것, 덧없는 것, 우연적인 것'은 빠른 이동과 커뮤니케이션, 수많은 미디어 소비에 둘러쌓인 현대인의 삶과 닮아 있다. 

 

빠른 속도에 휩싸여 순간에 집중하는 삶보다, 길을 돌아가거나 느린 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가는 시간도 필요한데, 예술 작품이 그런 시간을 갖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본문발췌]

 

 

하루하루를 사는 동시대인들에게는 비슷비슷한 행동의 반복으로 보이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결국은 변화가 일어난다. 따라서 역사는 인류가 '의미'를 찾고, '의미'를 살고, 그 '의미'의 핵심을 후대에 전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를 문화사회학적으로는 '밈'Me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수전 블랙모어는 밈을 "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유전자로서 재현과 모방을 되풀이하며 전승되는 언어, 노래, 태도, 의식, 기술, 관습, 문화를 통칭한다.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자 DNA가 생존에 유리한 정보를 후손에게 전하듯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인류는 생존에 유리한 문화적, 예술적 의미와 가치 역시 그들에게 전한다.

 

 

프루스트는 "예술 덕분에 우리는 단 하나만의 세계, 즉 우리 세계만을 보는 대신, 그 세계가 스스로 증식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임의에게 맡겨진 만큼의 많은 세계를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예술이 지향하는 것은 다양한 세상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예술가를 품고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류는 평화를 맞을 수 없다. 톨스토이는 좋은 예술은 반드시 일종의 감정적, 도덕적, 정신적 소통을 포함해야 한다고 했다.

 

 

코시모는 로렌초 기베르티,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베네초 고촐리, 필리포 리피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코시모의 예술 후원은 대담했다. 그는 아이디어가 참신한 신진 작가들에게 건축과 작품을 의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예술가의 재능을 자신을 미화하는 데 이용하지도 않았다. 예술가가 타고난 재주를 발휘할 수 있도록 미술 작품이나 건축물을 의뢰할 때 시시콜콜 개입하지 않은 채 낯설고 새로운 것들에서 더 나은 것들이 자라 나오는 과정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러한 코시모의 운영관에 주목한 경영학자들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분야를 접목하여 창조적이며 혁신적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는 기업 경영 방식'을 의미하는 '메디치 효과'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 이러한 개방성과 수용성은 모든 문화적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모든 위대한 문화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의 융합하는 순간 탄생했다.

 

 

이성이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올바른 접근법만 거치면 설명이 가능하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행복은 인간을 어린아이로 만들고, 고난은 인간을 철학자로 만든다.

 

 

팔십 년을 상회하는 긴 시간을 살면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확신 없이 타인과의 변덕스러운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찾아 나가는 과정에 있고, 그 속에서 무한한 기쁨과 절망을 느껴야 한다.

 

 

오늘이야말로 사상과 혁명이 결혼하는 축전이다. 내일은 시민병제군, 어젯밤 환호로 맞아들여 결혼한 코뮌이 아기를 낳도록 항상 자랑스럽게 자유를 지키면서 공장과 가게의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승리의 시가 끝나고 노동의 산문이 시작된다. - <르 크리 뒤 푀플>에 실린 <축제>

 

 

시인 보들레르는 근대성의 특징이 순간적인 것, 덧없는 것, 우연적인 것이라고 정의했다. 빠른 속도는 인생을 덧없는 것으로 만들고, 현재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1852년 아리스티드 부시코가 세계 최초의 현대적인 백화점 '봉마르셰'를 개장했다. 정기 세일, 특별 세일, 특별 전시관, 미끼 상품 등 다양한 백화점의 판매 기법이 모두 이때  개발되었다. ... 지금은 필요하지 않지만 조만간 필요하게 될 것 같기 때문에 쇼핑을 한다. 에밀 졸라가 묘사한 것처럼 이 시대는 '필요의 경제'에서 '욕망의 경제'로 이행하고 있다. 상품은 관능적인 유혹을 담아서 자신을 드러냈고 쇼핑은 그 유혹을 기꺼이 즐기고 희롱하며 화답하는 과정이되었다. 백화점의 등장과 함께 쇼핑은 부르주아 여성들의 새로운 여가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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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전쟁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고 삶의 범위를 제약하거나 고립시키며 공포와 반항의 감정을 일으킨다.

인간은 극복하겠지만 완벽한 회복은 어렵다.

 

 

[본문 발췌]

 

 

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그의 망설임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가 불안과 믿음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던 것도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들 생각만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즉 그들은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 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겸손할 줄 몰랐던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해 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때부터 페스트는 우리들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까지는 그 이상한 사건들이 빚어 놓은 놀라움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각자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맡은 자리에서 그럭저럭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상태는 그대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시의 문들이 폐쇄되자 그들은 모두(서술자 자신도 포함해) 같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으며 거기에 그냥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령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같은 개인적인 감정도, 처음 몇 주일부터 당장 모든 사람들 전체의 감정이 되었고, 공포심이 가세하면서 저 오랜 귀양살이 시절의 주된 고통거리가 되었다.

 

 

불행의 순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진실에, 즉 침묵에 익숙해진다. 

 

 

"그런데 타루." 그가 말했다. "뭣 때문에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서지요?" "나도 모르죠. 아마 나의 윤리관 때문인가 봐요." "어떤 윤리관이지요?"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 인간이 소위 영웅이라는 것의 전례와 본보기를 세워 놓고 싶어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반드시 이 이야기 속에 한 사람의 영웅이 있어야 한다면, 서술자는 바로 이 보잘것없고 존재도 없는 영우, 가진 것이라고는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아무리 봐도 우스꽝스럽기만 한 이상밖에는 없는 이 영웅을 여기에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면, 진리에겐 그 진리 본연의 것을, 둘 더하기 둘의 합에는 넷이라는 답을, 그리고 영웅주의에는 부차적이라는 본래의 지위, 즉 행복에 대한 강한 욕구 바로 다음에 놓이되 결코 그 앞에 놓일 수는 없는 그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렇게 하면 이 연대기에도 그 나람의 성격, 즉 선량한 감정, 말하자면 두드러지게 약하지도 않고 또 흥행물처럼 야비하게 선동적이지도 않은 감정으로 이루어진 기록의 성격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악은 거의가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선의도 총명한 지혜 없이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입히는 수가 있는 법이다. 인간은 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량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다소간 무지한 법이고 그것은 곧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넋은 맹목적인 것이며, 가능한 한의 총명을 다하지 않으면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

 

 

이와 같이 매주일 계속해서 그 페스트의 포로들은 저마다 재주껏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그들 중 랑베르를 포함한 몇몇은 보다시피 아직도 자유인으로서 행동하고 있었으며, 아직도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상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실상 8월 중순쯤에는 페스트가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린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역사적 사건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밖에는 없었다. 가장 뚜렷했던 것은 생이별과 귀양살이의 감정이었다. 거기에는 공포와 반항이 내포되어 있었다.

 

 

재앙만큼이나 보잘것없는 구경거리는 없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불행은 오래 끌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로운 것이다. 그런 나날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페스트를 겪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이 끝없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커다란 불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바닥 밑에 놓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리는 끝날 줄 모르는 답보 상태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그 시기의 커다란 고통, 가장 심각한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고통은 바로 생이별의 감정이었으며 페스트의 그 단계에 나타나는 생이별의 감정에 대해 새로운 기록을 남겨 놓는 것이 양심적으로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당시에 있어서 고통 자체는 그것의 비장감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시민들, 적어도 그 생이별로 말미암아 가장 심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에 길들어 버렸던 것일까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들은 감정의 메마름 때문에 괴로워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페스트의 초기 단계 때는 잃어버린 사람을 뚜렷이 기억할 수 있어서 그들이 없음을 애석해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그 얼굴, 그 웃음, 나중에 생각해 보니 비로소 그이가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어느 날의 일, 이런 모든 것들은 뚜렷하게 생각이 나지만, 그런 것을 다시 그려 보는 바로 그 시간에, 또한 그때 이후 그렇게도 먼 곳이 되어 버린 그 장소에서, 상대방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상상하기란 대단히 힘들었다. 요컨대 그 시기에, 그에게는 기억력은 있었지만 상상력은 부족했다. 페스트가 2단계에 접어들자 그들은 기억력조차도 상실해 갔다. 그 얼굴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이야기지만, 그 얼굴에서 살이 없어져 그 얼굴을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알아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페스트가 발생한 처음 몇 주 동안은 사랑을 느끼고 싶어도 이제는 허깨비밖에는 상대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 후에는 그들은 추억 속에 간직해 왔던 미세한 얼굴들마저 잊어버림으로써, 그 허깨비는 전보다 더 살이 빠져 버린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 길고 긴 생이별의 세월을 겪고 나자 그들은 둘이서 누리던 그 무르녹은 정분도 이제는 더 이상 상상할 수가 없었으며, 또 언제든지 손을 얹어 놓을 수 있었던 상대가 어떻게 자기 곁에 살고 있었던가도 더 이상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들은 빈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페스트의 지배 속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도시에서는 이제는 아무도 거창한 감정을 품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단조로운 감정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끝날 때도 되었는데." 하고 시민들은 말하곤 했다. 왜냐하면 재앙이 계속되는 기간 중에 집단적인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또 실제로 그들은 그것이 끝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은, 초기에 있었던 열정이나 안타까운 감정은 찾아볼 수 없는 채, 다만 우리에게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는, 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성이 비쳐 보이는 말들이었다. 처음 몇 주일간의 그 사나운 충동이 사그라지자 낙담이 뒤따랐는데, 그 낙담을 체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역시 일종의 일시적인 동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기억도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실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현재로 변해 버렸다. 페스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아 가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말해야겠다. 왜냐하면 연애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미래가 요구되는 법인데, 우리에게는 이미 현재의 순간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까지 가서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리유는 페스트가 발생한 후 처음으로 그가 웃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왜 선생께서는 내가 떠나는 것을 말리지 않으시나요? 말릴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요." 리유는 버릇처럼 된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것은 랑베르의 문제이고 랑베르는 행복을 택한 것이며, 리유 자신은 그에 반대할 뚜렷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고, 그 문제에 관해서 자기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왜 저에게 빨리 서두르라고 하시나요?" 이번에는 리유가 미소를 지었다. "아마 나 역시 행복을 위해서 무엇이고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 어린애의 고통과 그 고통에 따르는 공포, 그리고 거기에서 찾아내야 할 여러 가지 이유보다 이 땅 위에서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 밖의 인간 생활에서 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용이하게 해 주시며, 따라서 거기까지는 종교의 공덕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는 반대로 우리를 고통의 담 밑으로 몰아넣고 계시다. 그리하여 우리는 페스트의 담 밑에 와 있으며 그 치명적인 그늘 속에서 우리의 이익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심지어 파늘루 신부는 그 담을 기어오를 수 있게 해 주는 안이한 우선권조차 누리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어린애를 기다리는 영생의 환희가 능히 그 고통을 보상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로서는 쉬운 일이겠으나, 실상은 그 점에 대해서 자기는 전혀 아는바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영생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을 보상해 준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이 유행병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당신들 편에 서서 그 병과 싸워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그렇습니다. 리유,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 만사를 다 알고 있지요),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리유,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하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해 줄 것 같지 않은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인간이 페스트나 인생의 노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에 관한 인식과 추억뿐이다.

 

 

이제 그들은 인간이 언제나 욕구를 느끼며, 가끔씩은 손에 넣을 수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인간을 초월해, 자기로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던 사람들은 결국엔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타루는 그가 말하던 소위 마음의 평화라는 어려운 것에 도달한 듯싶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것을 죽음 속에서, 이미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고 말았을 때에 가서야 겨우 발견했던 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 즉 집집의 문턱에서 기울어 가는 햇볕을 받으며, 서로를 힘껏 껴안은 체 정신없이 마주 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바라던 바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리유는 그랑과 코타르가 사는 거리로 접어들면서, 적어도 가끔씩은 기쁨이라는 게 찾아와서 인간만으로, 인간의 가난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사랑만으로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보람을 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항구로부터 공식적인 축하의 첫 불꽃이 솟아올랐다. 온 도시는 길고 은은한 함성으로 그 불꽃들을 반기고 있었다. 코타르도, 타루도, 그리고 리유가 사랑했으나 잃고 만 남자들과 여자들도, 사자(死者)들도, 범죄자들도 모두 잊혔다. 노인의 말이 옳았다. 인간들은 늘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순진함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리유는 모든 슬픔을 넘어서 자신이 그들과 통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 힘차고 더 긴 함성이 테라스 밑에서 발밑에까지 밀려와 오래도록 메아리치는 가운데, 온갖 빛깔의 불꽃 다발들이 점점 그 수를 더해 가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의사 리유는,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페스트에 희생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 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 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래도 그는 이 연대기가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기록은 다만 공포와 그 공포가 지니고 있는 악착같은 무기에 대항해 수행해 나가야 했던 것, 그리고 성자가 될 수도 없고 재앙을 용납할 수도 없기에 그 대신 의사가 되겠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행해 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일 뿐이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해설]

 

"비록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나 잔혹성에 대해서일망정 연대성을 부정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협력하거나 투쟁하는 것이다. ... 일단 전쟁이 터지고 보면 자기는 책임이 없다는 구실로 회피하려는 것은 헛되고 비겁하다. 상아탑은 무너졌다." - <작가수첩>1권, 172쪽

 

'페스트'라는 표제에 이어서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다니엘 디포를 인용하고 있다.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빗대어 대신 표현해 보는 것은, 어느 것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표현해 본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당한 일이다."

 

"나는 페스트라는 질병을 통해서, 우리들이 고통스럽게 겪은 그 질식 상태와 우리들이 몸담고 있었던 그 위협과 귀양살이의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한다. 나는동시에 그러한 해석을 삶 전체라는 일반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하고 싶다." - <작가수첩>

 

"행동이 그 형식을 찾아내고 최후의 말들이 발음되고, 존재들이 존재들에 어울리고, 삶이 송두리째 운명의 모습을 띠는 그 세계가 바로 소설이 아니겠는가? 소설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수정에 지나지 않는다." - <반항적 인간>, 666쪽

 

그의 '증언'은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에 대한 '반항'이다. 카뮈 자신도 다른 어떤 글에서 이렇게 반문했다. "끔찍하고 집요한 범죄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지뵹한 증언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시사평론 II>, 플레야드판 카뮈 전집 2권, 719쪽) 페스트에 대항해 투쟁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증인'이다. 투쟁하는 사람의 행동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증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페스트>가 표면에 드러내 보이고 있는 거부와 '부정(否定)' 속에는 억누를 수 없는 하나의 '긍정'이 감추어져 있음을, '반항' 속에는 '행복에 대한 조바심'이 전제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는 카뮈의 전체 작품 속에서 <페스트>가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를 가늠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카뮈는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받을 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나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게는 정확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우선 나는 부정(否定)을 표현했다. 세 가지 형태로 말이다. 소설로는 <이방인>이었고 극으로는 <카리굴라>와 <오해>였으며 이념적 형태로는 <시지프 신화>였다. 만약 내가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겐 전혀 상상력이 없어서 지어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있어서 이를 테면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부정 속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시지프 신화>의 서문에서 그 점을 미리 밝혀 놓았더랬다. 그래서 나는 다시 세 가지 형태의 긍정을 표현해 보고자 했다. 소설로는 <페스트>, 극으로는 <계엄령>과 <정의의 사람들>, 그리고 이념적인 것으로는 <반항적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벌써 사랑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 번째의 한 층위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내가 구체화해 가는 주인 계획들이다." (플레아드판 카뮈 전집 2권, 19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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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도 하지만, 우리는 계속 새로운 것을 찾고 있다.

 

 

[본문발췌]

 

의식을 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가 창의적이라고 말할 때에는 새로움novelty과 적절성appropriate이라는 두 가지 기준이 사용된다. 어떠한 물건이나 아이디어가 창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물건이나 아이디어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것이어야 하는 동시에 유용하기도 해야 한다.

 

 

두 가지 창의

  • 새로운 새로움 : 모르기 때문에 새롭다고 느끼는 새로움.

  • 새롭지 않은 새로움 : 이미 알고는 있어지만 생각하기 어려운 새로움.

 

창의를 만드는 재료

  • 10년의 법칙과 전문성, 10-year-rule, 2만 시간의 노력.

  • 전문가들의 가장 큰 특징은 고도로 조직화된 지식의 구조를 이용해 지식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이들은 방대한 양의 지식을 소유하고 그러한 지식이 사용되는 과정을 자동화시킴으로써, 즉 일련의 단계를 의식적인 통제가 거의 필요하지 않은 통합된 루틴으로 만들어서 문제를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해결한다.

 

지능intelligene은 보통 적응adaptation이라는 말로 정의되며, 적응이란 곧 생존을 의미한다. 이때 생존을 위해서는 두 가지 필수요건이 충족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정확성accuracy'과 '신속성speed'이다.

 

 

인간이 지식의 효율적 인출을 위해 지식을 네트워크의 형태로 저장한다. 생존을 위해 정확성과 신속성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지식에 조금이라도 빨리 접근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 머릿속의 지식들이 네트워크를 이루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가 제약조건 내에서 최적화 대신 만족화를 택하는 인지특성을 가진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휴리스틱스적인 사고가 잘못된 사고과정이 아니라 인지부하를 감소시키면서 동시에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는 우리의 고유한 인지 특성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검토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는 우리의 인지구조 내에서 정확성과 신속성의 최적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상향처리보다는 하향처리를 그리고 규범적 합리성보다는 휴리스틱 합리성을 선호하며 진화하도록 만들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가 반드시 최적의 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가급적이면 인지에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최선의 답을 찾으며 진화되어 왔다.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휴리스틱적인 사고는 결점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본질인 것이다.

 

 

하향처리과정(top down processing)은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상황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방법임에 틀림없다.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경우 하향처리과정은 문제의 탐색공간을 축소시켜 주며 우리가 인출해야 하는 지식의 범위를 좁혀주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의 답을 찾아가는 상황에서는 분명히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다양한 답을 만드는 데에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인출할 지식의 범위가 축소되면 그만큼 다양한 생각이 만들어질 확률이 적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 상황이 달라지면 당연히 그 상황에 적합한 또 다른 인지과정을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창의적인 사고과정을 연구해온 학자들은 다양한 답이 가능한 상황에서도 하향처리과정을 선호함으로써 기존의 지식을 떠올리게 되고 결국 이러한 지식 때문에 다양한 생각이 어려워지는 현상을 '고착fixation'이라고 불러 왔다.

 

 

고착 현상은 단순히 기억의 문제뿐만 아니라 문제해결 과정에서도 발생하며, 창의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발생한다. 특히 창의적 문제해결 과정에 대한 연구들은 전형적 사고typical thinking와 암묵적 가정implicit assumption 그리고 최근 경험recent experience 등이 고착을 만드는 주요 원인이라고 제안한다. 전형적 사고란 우리가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내재해 온 문제해결 방식을 말하며, 본질적으로는 일반적 사고와 같은 의미다. 암묵적 가정이란 문제에 제시되어 있는 정보와 상관없이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제약조건을 의미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이러한 가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로 인해 새로운 답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경험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때 이전에 반복적으로 수행했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최근의 경험과 유사하다고 판단하게 되면 최근에 문제를 해결했던 방식으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데, 만약 그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대안적인 인지조작자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렵게 된다.

 

 

'새로운 새로움'의 창의를 만드는 재료는 전문성

 

 

'새롭지 않은 새로움'의 창의는 우리가 무의식적이고 관습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던 습관에서 벗어나야 만들어질 수 있다. '다양하게 생각하고, 다른 것들을 연결하라.', 고착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는 것.

 

 

"우리는 언제나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는 이 두 가지로부터 최고의 장점들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과학기술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진보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지만, 동시에 직관적이고, 사용하기 쉽고, 사용하는 데 즐거운 그러한 제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것이 사용자에게 진정으로 적합한 제품이 되는 것이니까요. 사용자가 제품으로 다가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제품이 사용자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 2010년 1월,  iPad 제품설명회에서, 스티브 잡스

 

 

인문학적  교양이란 단순히 과학과 대비되는 문과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이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답을 제시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될 것이다. 교육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위해 가르쳐야 하는지를 고민할 것이고, 과자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만드는 과자의 의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단지 이윤을 남기고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규정할 때와, 교육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기능해야 하고 과자는 사람에게 건강과 즐거움을 전해 주는 기능을 해야 한다고 규정할 때, 그 이후에 각각의 경우가 만들어 내는 결과는 완전히 상이할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생각을 하기 힘든 이유는 우리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폴더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는 폴더는 대개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우리의 욕구에 의지한다. 인문학적 교양은 우리의 이러한 본능적인 욕구에 저항하고 보다 의미 있는 폴더를 열 수 있는 눈을 만들어 줄 것이다. 결국 인문학적 교양은 우리가 쉽게 보지 못하던 새롭고 의미 있는 폴더로 접근하는 훌륭한 열쇠인 것이다.

 

 

'새로운 새로움'의 창의는 그 분야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일반적인 인지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새롭지 않은 새로움'의 창의는 지식과 경험이 만드는 고착을 벗어나거나 새로운 폴더에 들어감으로써 만들어진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642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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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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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벗어나 삶에 변화가 필요할 때, 둔감해진 감각을 깨우고 싶을 때, 새로운 경험과 만남을 원할 때, 홀로 고독의 시간을 원할 때, 일상의 책임/삶의 방식/타인을 의식하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나라. 가능하면 좀 긴 여행을.... '여행'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본문발췌]

 

 

'매너리즘'은 기존의 틀에 갖혀 독창성과 신선미, 창조력을 잃어가는 것을 말한다. 매너리즘의 악순환에 빠지면 깊은 고민이나 새로운 시도 없이 현상 유지에만 치중하게 된다.  ... 인간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은 뇌의 특성과 관련이 깊다. 뇌는 정보처리 속도와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늘 세상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지각 방식과 반응의 패턴을 만들어낸다. 공장의 공정 자동화 시스템처럼 '의식과 반응의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자동화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니는 편해진다. 익숙한 자극과 상황은 자동적으로 처리해 버리고 새로운 자극과 상황에만 반응하면 된다. ... 외부 환경 변화와 새로운 경험은 우리의 뇌를 깨우고 삶에 새로움을 불어 넣는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매너리즘에 대한 좋은 처방이다.

 

 

삶의 이동성은 커졌고 변화는 일상이 됐다. 지금은 안정적이고 질서 잡힌 삶을 소망한다고 해도 그렇게 살기 어려운 시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특정 환경을 고집하고 기존의 질서에 고착하며 안전지대에 머무르려는 사람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기 힘들어진 셈이다. 그렇다고 모두 네오필리아가 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모든 일탈이 창조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모든 반복이 안정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단순히 새로움은 좋은 익숙함은 나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려는 욕구와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려는 열망 사이의 조율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맞는 반복과 일탈의 적절한 리듬을 찾아야 한다. 여행은 우리 안에 있는 일탈과 새로움의 본능을 흔들어 삶의 역동성을 자극한다.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된 새로움에 대한 거부감을 진정시키고 새로움에 대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여행은 이 시대의 빠른 변화 속도를 견뎌내게 해주는 예방접종인 셈이다.

 

 

긴 여행은 삶 전체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기록의 과잉은 여행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우리는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로 더 이상 타인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의 전화번호조차 외우지 못하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의 뇌는 갈수록 할 일이 없다. 기억의 저장고가 점점 내부에서 외부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사진 등 촬영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뇌는 덜 느끼고 덜 기억한다. 가뜩이나 바쁜 일정으로 인해 여행의 감동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데, 과도한 기록 작업은 여행을 더욱 메마르게 만든다. 미국의 비평가 수전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에서 이러한 세태를 꼬집었다. 그녀는 노동 윤리가 냉혹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일수록 사진 찍기에 더욱 집착한다고 본다.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들은 휵를 가거나 일하지 않을 때 불안감을 느끼는데, 사진 촬영을 열심히 함으로써 일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고 안심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걷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내가 시간을 조절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히말라야에서 늘 시간에 쫓기는 것 같은 그 고질적인 느낌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시간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시간과 나란히 걷고 있다고 느꼈다. 그 느낌이 나를 무척 편안하게 만들고 힘을 줬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통해 진정한 휴식은 여유 시간이 많을 때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을 때 찾아오는 것임을 느꼈다. 그리고 진정한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편안함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능동적인 몰입임을 깨달았다.

 

 

삶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남는 듯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시간부자란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시간부자란 자신에 맞게 삶의 속도를 조절할 줄 알고, 그 순간에 빠져들어 오염되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일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느린 속도로 일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거나, 느린 속도의 삶은 여유롭고 빠른 속도의 삶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는 이분법에 갇히기 쉽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속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속도로 인해 과도한 긴장감과 적대감 그리고 분노가 유발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한다. 실제로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 오히려 시간 압박이 없으면 삶의 활력이 사라져 심신의 건강에도 좋지 않다. 결국 적절한 시간 압박이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나는 여행을 통해서 '나와 시간의 관계'와 '일과 휴식의 관계'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바라보고, 필요에 따라 시간의 속도를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진정한 휴식의 시간은 삶에 연쇄적인 변화를 가져옴을 느겼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듯이 시간과 관계가 만나 삶을 이룬다. 삶을 이루는 두 개의 중요한 원자 중에 하나가 바로 시간이다. 삶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그러므로 내가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지금 이 시간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시간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시간을 쫓아다니거나 쫓겨 다니는 게 아니다. 시간과 같이 흘러가는 것이다. 나는 안나푸르나에서처럼 지금 이 사간을 사랑하고 싶다. 그때처럼 시간을 음미하며 다양한 속도를 즐기고 싶다.

 

 

여행은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딱 언제라고 이야기하기 어렵겠지만 생각해 보자. 여행 계획을 세울 때일까? 비행기 표를 끊은 날일까? 비행기를 타는 날일까? 아니면 여행지에 도착해서부터일까? 언제를 여행의 시작점으로 잡아야 할까? 그것은 사랑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일까? 처음으로 고백한 날일까? 첫 데이트를 한 날일까? 아니면 그 사람으로 인해 내 마음이 처음으로 설렜던 때일까? 설렘이 시작됐을 때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여행의 시작도 그렇다. 여행으로 인해 마음이 설렐 때, 그 순간이 바로 여행의 시작이다. 여행을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이 달리 보인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다소 가벼워진 느낌이 들고 삶의 생기가 느껴진다. ... 여행은 잠시 동안이라도 일상의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일상적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소는 여행을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난 '완전히 해방된 틈'이라고 불렀다. 나는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의 <걷기예찬>에서 그 표현을 발견하고 무척이나 반가웠다. "나는 내 일생 동안 그 여행에 바친 칠팔 일간만큼 일체의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틈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그 추억은 그 여행과 관련된 모든 것, 특히 산들과 도보여행에 대한 가장 생생한 맛을 내게 남겨놓았다. 나는 오직 행복한 날에만 늘 감미로운 느낌을 만끽하며 걸어서 여행했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은 일상의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또다른 자유로움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관계의 그물을 피해 갈 수 없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낯선 여행지에서 자신의 꼬리표를 떼어놓는다. 내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인지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무명인'이 된다. 익명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행지에서 평소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때로는 자신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욕망과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여행은 익숙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일 뿐만 아니라 익숙한 자기로부터의 일탈이기도 하다.

 

 

실제로 여행은 일상의 책임, 삶의 방식, 타인을 의식하는 시선으로부터 우릴 자유롭게 해준다.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을 의식하는 마음에서도 벗어나게 해준다. 즉, 자의식까지 사라지는 것이다. 최고의 놀이란 바로 자의식과 시간 감각이 사라질 때 가능하다. 온전히 그 경험에 빠지는 것이다. 여행은 '어른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놀이에 빠져 있는 아이의 자의식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는 여행 중에 종종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 ... 내가 나를 의식하는 마음이 줄어들자 내 행위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고, 내 눈앞에 존재하는 것들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것은 내게 고요함과 잔잔한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여행에 느끼는 최고의 자유는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각기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고, 기본적으로 상대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 유유상종이라지만 두 사람 이상이 만나면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 나와 다른 성격을 나쁘게 여기거나 안 좋게 느끼는 순간, 성격 차이는 갈등과 싸움으로 이어진다. 취향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취향 차이가 갈등을 빚는 게 아니라 취향의 차이를 통해 서로를 구분 짓고 우위의 문제로 바라보는 순간 갈등이 생긴다. 반대로 취향 차이를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어떻게 될까? 취향의 심화나 확대로 이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을 닮아가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지 않은가?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을 닮는 법이다. 그 사람이 즐겨 듣는 음악을 함께 듣고, 그 사람이 좋아한느 음식을 맛있게 먹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운동을 같이 즐긴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가까이 지내면, 취향이 달라지거나 취향이 확대되는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사람들 간의 우정과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 세계의 축소가 아니라 확대를 의미한다. 우리가 혼자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또 다른 세계를 상대를 통해 경험함으로써 우리의 세계는 그만큼 커지고 풍성해진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문화와 문화 등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났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질적인 대상들이 만나 서로 섞이는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인 존재다. 자신의 감수성과 안목, 취향을 좋게 평가하고 상대방의 그것은 좋지 않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편향성을 직시하고 서로의 취향을 좀더 존중하는 데 이르면 우리의 취향은 더욱 발달하고 서로의 관계는 보다 깊어질 수 있다. 다음은 이명옥의 <인생, 그림 앞에 서다>에서 읽은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취향에 관한 철학이다. '자신의 취향은 동일한 취향과 접촉하기 때문에 함양하는 것이고, 또한 이질적인 취향과 만나서 계발되는 것이며, 높은 취향에 매료되기 때문에 향상심이 생기는 것이다. 세상 운명의 7할 이상은 이 취향의 발달로 인한 것이므로, 취향이 고립돼 말라죽게 된다면 세계의 진보는 멈추게 될 것이다.'

 

 

"사진 촬영 계획을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가 너무 많은 사진거리에 현혹되어 방황만 하다가 마는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의 주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놀라운 일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고, 방향을 가지고 있으며, 또 열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진작가 브라이언 피터슨이 쓴 <창조적으로 이미지를 보는 법>에 나오는 내용이다. .... 비단 사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현혹하는 자극과 정보가 너무 많다.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제한된 시간 내에 보고 싶은 것도 많고 갈 곳도 많다. 어떤 것을 넣고 어떤 것을 빼야 할지 감이 잘 서지 않는다. 특히 자신의 기호와 취향이 불분명하면 타인의 이야기에 휩쓸리고 만다. 결국 무색무취의 여행을 하기 쉽다. 그러나 테마를 가지고 여행을 떠나면 여행의 느낌은 보다 달라진다. 여행의 시간 동안 우리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특정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정 주제에 심취해 가는 기쁨과 자신만의 여행 노하우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 나만의 여행 테마가 있을 때 여행이 더욱 깊어진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망각 할 수 있어서다. 아이들이 늘 웃을 수 있는 것은 나쁜 일을 오랫동안 곱씹지도, 필요 이상으로 자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잘 잊을 수 있는 망각 능력 즉, '쾌망'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행을 할 때 우리의 기억은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우리의 기억 기능과 망각 기능이 동시에 활성화된다. 즉, 여행 중에는 나쁜 일을 빨리 잊어버릴 수 있다. 반면 잊고 있던 추억이나 잊고 싶은 아픈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것도 전혀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말이다. 낯선 공간에서의 새로운 자극이 우리 안에 감쳐둔 기억과 감정을 일깨우는 것이다.

 

 

여행은 본디 처음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귀환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에 떠나는 길과 돌아오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방랑자는 돌아갈 곳이 없거나 돌아갈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여행이 아니라 정처 없는 방랑을 한다. 여행자들은 홀로 떠난 여행 중에도 별로 외로워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심리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언제라도 여행을 끝내고 자신을 환영해 주는 누군가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고독의 시간을 즐긴다. 반면 방랑자들은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없으며, 여행이 끝나도 자신을 진심으로 환영해 줄 그 누군가 혹은 그 어딘가가 없다. 당연히 방랑자는 여행 중에도 종종 외로움의 고통에 시달린다. 다만 환경이 낯설고 다른 여행자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내면보다 외부로 의식이 옮겨 가기 때문에 외로움과 고통을 덜 느낄 뿐이다.

 

 

여행은 도전이며 건강한 스트레스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기쁨은 순수한 즐거움이 아니라 스트레스와 즐거움이 버무려진 '칵테일 감정'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결코 두려움을 떨칠 수 없고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삶은 대가를 필요로 한다. 불편을 거쳐야 만족은 깊어지고, 두려움 앞에 마주 서야 즐거움은 빛나게 마련이다. 두려움이 없는 게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용기다. 두려움과 맞설 때 당신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계 바깥으로 나가보는 것' 즉, 도전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계 바깥에 나아가는 순간 우리가 생각해 왔던 한계가 사실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관념적인 한계였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었으나 발휘하지 못했던 또다른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여행은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체험해 보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경험이다. 안전하다는 것은 실패의 위험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여행에서 실패랄 게 뭐가 있겠는가. 바깥세상으로의 외출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여행을 갈망하는 것은 단지 쉬고 싶고 놀고 싶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도전을 통해 더 성장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성장의 본능이 우리를 여행으로 이끄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 경계는 여행을 할 때 느슨해진다. 여행은 자아 밖으로 우리를 이끌어 새로운 사람, 자연, 문화 등과의 연결을 만들어낸다. <체 게바라 어록>에는 왜 여행을 할 때 낯선 존재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게 되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낯선 존재에게 말을 거는 용기는 아마도 자연이 가르쳐준 것이리라. 자연의 존재들은 끊임없이 낯선 존재에게 말을 건넨다. 바람은 나뭇잎과 가지에게, 곤충은 꽃에게, 하늘은 땅에게, 모든 존재들은 나에게 말을 건넨다. 그런 자연에는 절대 고독이란 없다."

 

 

나는 지난 여행을 통해 고독과 외로움의 확연한 차이를 알게 되었다. 물론 둘 다 홀로 있는 것이지만 '고독(solitude)'이 스스로 관계에서 물러나 자신을 벗 삼고 있는 시간이라면 '외로움(loneliness)'은 다른 사람과 단절되고 자신도 의지가 되지 않는 공허의 시간이다. 여행은 자신과 함께하는 고독의 시간이다.

 

 

여행에서 우리의 호기심은 커지고 공감 능력은 향상된다. 여행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돼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공감의 시간이다.

 

 

여행자가 갖춰야 할 일곱 가지 항목 중 첫 번째는 "자신의 기준과 맞지 않는 기준을 인정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 - 프레야 스타크

 

 

여행에서 우리는 시간표에 길들여진 삶에서 벗어난다. 새로운 공기와 낯선 풍경은 감각의 문을 두드린다. 감각의 문이 서서히 열리면 우리의 지각은 보다 분명해진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고, 귀에 와 닿지 않는 소리까지 듣게 된다. 생각은 자꾸 우리를 과거와 미래로 끌고 가지만 감각은 우리를 현재에 머무르게 해준다. 감각이 살아나기에 우리는 점점 '지금-여기'에 존재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살아 숨 쉬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 조셉 캠벨, <신화의 힘>

 

 

여행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순화시키고 감각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더 생생하게 느끼거나 듣게 되고, 더 뚜렷하게 바라보고, 더 주의 깊게 맛보거나 만져보게 된다. 여행지는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풍경에 불과하지만 여행자의 예민해진 감각을 거치면서 새로워지고 때로는 신비로워진다. 낯선 땅의 여행자는 그 새로움을 깊이 받아들인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 상대의 작은 몸짓에도 뜨거워지듯이 여행자는 얼마든지 절정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 이렇듯 여행지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깨어난다. 우리의 에너지는 머리를 벗어나 온몸으로 흘러 들어간다. 심장은 힘차게 박동하고, 감각기관의 세포는 하나하나 열리고, 감춰진 몸의 더듬이는 말미잘의 촉수처럼 뻗어 나와 풍경의 채집자가 된다. '깨어 있는 몸',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과 교감할 준비가 돼 있는 여행자의 몸이다.

 

 

'확실'하다는 것은 돌처럼 굳고 강하고 분명하고 틀림없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불확실성 그 자체다. 불확실성은 그 자체로 불안과 공포를 준다. 위험은 예측 가능하기에 어느 정도 예방하거나 피할 수 있지만, 불확실성은 예측 불가능하기에 더 높은 강도의 불안을 안겨준다. 고질라 같은 거대 괴물보다 메르스처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더 공포스러운 법이다. 인간은 불확실성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확실한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설명이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예측하고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지식은 지적 호기심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동력으로 삼아 발달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신화나 종교라는 이름으로, 어떤 사람들은 철학이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 불확실한 세상을 설명해 왔다. 그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통제감과 안도감을 준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려면 새로운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심리적 유연성이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파악하고, 상황에 따라 선택과 행동을 달리할 줄 알아야 한다. 상황이 달라졌는제도 이전의 방식과 계획을 고집하는 사람이라면 변화와 불확실성에 적응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연성을 기를 수 있을까? 무엇보다 불확실성과 친해져야 한다.

 

 

확실성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여행은 재미없고 좁아지고 닫히게 된다. 그러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순간, 여행은 보다 즐겁고 넓어지고 열리게 된다. 

 

 

삶의 발전은 오직 시행착오와 후회 그리고 이를 통한 개선으로 이뤄진다. 우리는 지난 선택을 비난하는 대신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삶을 성장시키고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실수하고 헤맬 수 있는 권리와 그로부터 배워야 하는 의무가 있다. 

 

 

여행에서 느끼는 문제나 불편은 내가 가진 것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내가 가지거나 누리고 있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렇다 보니 문제나 불편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아무리 여행이 편해졌다지만 집 떠나면 여전히 고생이며 골치 아픈 문제의 연속이다. 왜 여행을 뜻하는 'travel'의 어원이 '고된 일'을 뜻하는 'travail'이겠는가. 하지만 여행에서의 고생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기에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자발적인 불편은 우리 내면에서 기쁨으로 전환된다. 불편함은 나쁜 것이고, 편안함은 좋은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오히려 불편함이 여행의 풍미를 느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향신료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유연해지는 것이다.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은 불확실성과 즉흥성에 기초한다. ... 여행은 불확싱설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는 우리에게 불확실성과 친구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것처럼 잘 닦여진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때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별로 가지 않는 길이라 불편하고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과 두려움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감내해야 할 조건이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명확한 방향을 정하고 확신에 차 걷는 사람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뎌낼 줄 알는 사람들이다. 다만 자신이 걷는 길 자체를 사랑하고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자신의 시도 하나하나가 모여 곧 길이 된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은 결국 삶으로의 여행이다.

 

 

우리는 여행에서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했던 것처럼 '새로운 눈'을 갖게 되며 그 눈을 통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인생의 숨겨진 비밀을 깨닫을 수 있다.

 

 

여행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세상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영역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 프리드리히 프뢰벨

 

 

평범하고 밋밋한 시간들이 있기에 여행 동안 느꼈던 잠깐의 행복이나 즐거움의 순간들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꽃을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 별을 더욱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수많은 평범한 시간들이 있기에 여행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더 빛이 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대부분의 시간은 평범하고 무료하다. 하지만 그 무난한 흐름을 뚫고 올라오는 불꽃같은 시간들이 있다. 바로 도전, 사랑, 여행 등을 하는 시간이다. 그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들이 우리의 평범한 삶을 빛나게 만든다. 그렇다고 가슴 뛰는 순간만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고단하거나 무료한 이상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빛나는 시간 또한 존재할 수 있었으리라. 평범한 시간들이 있기에 여행과 같은 일탈의 시간들은 더욱 아름답게 채색될 수 있다.

 

 

휴대전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문자 메시지, 삭제하지 않고 둔 수많은 이메일, 오랫동안 입지 않은 옷이나 신발로 가득 찬 수납함, 십 년 넘게 펼쳐 보지도 않은 오래된 책들이나 캠핑 도구, 날짜가 지났지만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잡지나 신문, 철 지난 아이들의 장난감 등. 당장 가까운 곳만 봐도 버리지 못한 것투성이다. 과잉 소유와 과잉 저장은 현대인들의 불안과 공허감 때문이다. 몸에 음식을 채워 넣어 심리적 공허감을 보상하려는 폭식증 환자와 다를 바 없다.

 

 

'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가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나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접한 칼 마르크스의 말에서 현대인들이 어떻게 해야 저장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 바로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표적 행위가 여행이라고 본다. 여행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존재감은 커지고 우리는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히 소유욕과 저장강박이 약해진다. 일본의 한 사진작가에 의하면 몽골인은 평생 가지고 있느 물품이 300여 개인데 비해 일본인은 한평생 6200여개를 갖는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여행하듯 사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불필요한 욕망을 걷어내고 소유에 덜 연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 지평을 한 차원 넓혀준다. 불필요한 내부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외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자유다. 그 자유는 때로는 여행이 끝난 후의 삶으로도 확장된다. 그 자유를 경험함으로써 덜 쓰고 덜 일하되 더 여유로운 삶을 모색할 수 있다. 마음의 에너지가 물질을 소유하는 대신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하면 우리는 여행의 속도를 유지할 수 없다. 흔히 삶의 속도를 가속시킨다. 여행을 다녀오느라 비워뒀던 공백을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어떤 새로움으로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일상의 무료함이나 답답함을 계속해서 '더 많이'와 '더 새로운'이라는 방향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새로움의 반대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움의 반대어라고 하면 흔히 낡음, 익숙함, 오래됨 등을 떠올린다. 물론 그러한 단어들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나는 더 중요한 반대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얕음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낡고 진부하다고 느끼는 것은 실제로 새로운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체험이 표면적이고 얕아서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라 무언가를 더 깊이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고수의 여행이다. 우리가 여행에서 즐거웠던 것은 오로지 새로운 세계를 접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감각이 깨어나고, 자아가 열리고, 생각이 깊어졌기에 똑같은 경험이라고 해도 더 깊이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의 그 예민해진 감각과 여행자 정신을 일상으로 가지고와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더 깊이 경험해야 한다. 무심코 지나친 일상의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움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늘 이곳을 부정하고 저곳을 꿈꾸는 자는 여행자가 아니라 도망자다. 여행자는 저곳의 여행을 통해 이곳을 재발견하며 이곳을 살아 숨 쉬는 곳으로 개척한다.

 

 

여행이 끝나면 그 효과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다시 여행을 시작할 때까지 우리에게 안정과 번영을 약속해 준다. 좋은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여행이 끝나면 다시 자기를 잃어버리고 지금을 놓친 채 일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일상을 새롭게 일궈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일상이 바쁘더라도 한 번씩 멈춰 서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것이다. 소소한 일상이나 익숙한 관계에서도 그 소중함을 느끼고, 한 번씩 주위의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 앞에서 고민만 하기보다는 부딪쳐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목적지만이 아니라 그 여정을 좋아했던 여행의 시간처럼 삶의 목표만이 아니라 삶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면 당신은 좋은 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좋은 여행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행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 이후의 일상에 달려 있다. 좋은 여행은 여행자 정신을 유지하고 일상을 보다 새롭게 볼 수 있게 해준다. 그에 비해 여행 때는 좋았더라도 여행 후의 일상이 더 초라하게 느껴지거나 고달프거나 빈곤해져 간다면 이는 좋지 않은 여행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어떤 '부름'을 들을 때가 있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내적 신호가 북소리처럼 울리면, 인생에 있어 전환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 시기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의식을 치르려고 한다. 그 의식을 통해 지난 시기를 매듭짓고 새 시기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의식이 바로 여행이다. 그렇기에 여행지에서는 삶의 전환점에 서 있는 수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앞둔 학생,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진출을 앞둔 사람, 직장을 그만드구 자기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 은퇴 후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 등 삶의 전환기에 놓인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길 위에 있다. 그들의 여행은 지난 시간의 수고에 대한 보상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삶의 전환기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설렘과 두려움을 모두 느낀다. 그렇기에 이들은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통해 이제 그들이 곧 마주할 새로운 삶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것이다. 안전한 정착을 위한 리허설을 갖는 셈이다. 그들은 전환기의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경험을 미리 얻게 된다. 인생은 전환의 연속이다. 새가 털갈이를 하고, 뱀이 허물을 벗고, 곤충이 변태를 하듯이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때가 되면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더 큰 만남을 위해 떠나야 한다. 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 거부의 대가는 혹독할 수 있다. 조셉 캠벨은 <신화의 인생>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만일 우리가 부름에 대해 떠나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를 생각해 낸다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사회 속에 남아 있는 경우, 그 결과는 부름을 따랐을 때에 생기는 결과와 판이하게 달라진다.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을 요구되는 모험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인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여행을 몹시 갈망하고 있다면, 이는 어쩌면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삶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 여행을 통해 여행이 삶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여행이라고 느꼈다. 여행에는 시작과 끝이 없음을 깨달았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여행자의 등급을 나누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하면서 오히려 관찰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눈먼 자들이다.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실제로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세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에서 그 무엇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자신 속에 가지고 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다. 끝으로 최고의 능력을 가진 몇몇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동화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 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여행자에 대한 이 다섯 부류에 따라 대체로 모든 사람들은 삶의 모든 여정을 지나간다."

 

 

여행의 등급, 6단계.

  • 1단계. 둘러보는 여행. 많은 곳을 둘러보는 여행을 말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은 곳을 가는 것이 중요하기에 유명 관광지를 중심으로 이동해 재빨리 사진을 찍고 또다른 관광지로 이동한다.

  • 2단계. 관찰하는 여행. 자세히 살펴보고 기록하는 여행을 말한다.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여행을 시작하며 여행을 통해 이를 확인하고 생생한 정보를 추가함으로써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더욱 체계화시켜 나간다.

  • 3단계. 체험하는 여행. 오감과 신체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여행이다. 이들의 감각은 열려 있기에 더 깊이 경험하고 감동을 느낀다. 이국의 맛과 예술을 즐기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가슴 뛰는 활동에 도전하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 4단계. 각성하는 여행. 열린 마음을 통해 깨닫는 여행이다. 이들의 의식과 자아는 열려 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과 경험에 열려 있고, 새로운 세계와 끊임없이 교류하며 자기와의 대면을 통해 의시그이 지평을 넓힌다. 이들은 여행을 통해 지혜와 깨달음을 얻는다.

  • 5단계. 체득하는 여행. 여행에서의 자각이 체화돼 삶과 연결되는 여행을 말한다. 여행이 끝난 후에도 여행에서 배우고 깨달았던 것을 몸으로 실행하고, 여행자 정신이 살아 있어 일상을 보다 새롭게 바라보고 가꾼다.

  • 6단계. 삶으로의 여행. 여행과 삶이 하나가 돼 삶 전체를 여행으로 보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삶 전체가 여행이기에 여행을 하지 않는 시간 동안에도 여행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평생 자기 길을 찾고 자기 세계를 만들어간다.

 

삶이란 우리가 잠시 머물렀다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일시적인 여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나는 안식년 여행을 통해 그곳이 '자연'이라는 답을 얻었다. 우리는 자연에서 왔다가 이 땅에서 잠시 머물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보면 우리는 우주에서 왔다가 이 별에서 잠시 머물고 다시 우주로 돌아간다. 우리는 우주의 움직임 속에 존재한다. 인생이란 삶에서 죽음처럼 처음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우주에는 처음도 끝도 없으며 순환이 있을 따름이다.

 

 

지난 여행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면 뭐라고 해야 할까?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책에서 "훌륭한 화가는 자신의 그림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종국에 가서는 우리 마음속의 풍경까지 바꿔놓는다"라고 했다. 그의 글에서 '그림' 대신 '여행'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좋은 여행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속 풍경을 바꿔놓는 것은 물론 때로는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렇다. 지난 여행이 내게 준 것은 아름다운 경치만이 아니었다. 여행을 통해 나의 내면 풍경이 달라졌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 또한 바뀌었다.

 

 

니체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것들은 바로 길 위에 있었다." 나는 길 위에 있을 때 가장 순수했고, 가장 자유로웠으며, 가장 행복했고, 가장 많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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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책임지기 위해 버틴다.

 

 

[본문발췌]

 

 

자신이 받은 알량한 상처의 총량을 빌미로, 타인에게 가하는 상처를 아무것도 아닌 양 무마해버리는 비겁함. 우리는 모두 상처받으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존경과 권위는 스스로 선배라고 선언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행동과 품위, 아껴 보고 배울 점들로부터 자연스레 얻어지는 것이다.

 

 

평범한 어른이란, 과오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책임이다. 인간은 그러니까 어차피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죽는 것이다. 그 과거의 크기에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좌절하지도 말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짊어질 수 있는 그만큼씩을 가지고 살아나가면, 그것이 평험한 어른이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주변을 책임질 일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책임을 진다는 건 말처럼 그리 고상한 일이 아니다.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내 소신이 아니라 남의 소신을 지켜주어야 하는 일이다. 아무튼 산다는 건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일과 비슷한 것이다. 때어내어 다시 붙이려다가는 못 쓰게 된다. 먼지가 들어갔으면 들어가 대로, 기포가 남았으면 남은 대로 결과물을 인내하고 상기할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주변 세계를 향한 애정을 조금씩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계산된 위약을 부리지 않고 돈 위에 더 많은 돈을 쌓으려 하기보다 내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 알며 인간관계의 정치를 위해 신뢰를 가장하지 않고 미래의 무더기보다 현실의 한줌을 아끼면서 천박한 것을 천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되 네 편과 내 편을 종횡으로 나누어 다투고 분쟁하는 진영논리의 달콤함에 함몰되지 않길 하루하루 소망하는 자다.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지요. 부조리의 관성을 세계의 질서라고 이야기하지요. 더불어 그걸 인정하고 대안과 차악을 선택하는 게 더 너르고 성숙한 세계관이라고 포장하지요. 세상이 바뀌지 않는 건 세상을 바꿀 마음도 의지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 세계의 지도와 구조를 그려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얼마나 쉽게 이유를 만들고 합리를 씌워 결과를 만들어내는가. 누군가의 신념을 매도하고 개성을 희롱하고 사실을 왜곡하기에 얼마나 편리한 곳인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게, 누군가는 괴물이 된다.

 

 

어떤 행동에 단 한 가지 명백한 원인만이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다못해 날씨부터 사소한 대화, 어느 생각 없는 기자가 써내려간 기사 한 줄이 안겨준 짜증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행동을 가능케 하는 원인에는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하나로 유력한 이유를 만들고 매우 명확한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처럼 포장하면 정작 문제의 본질은 휘발될 수밖에 없다.

 

 

끔찍한 사건의 범인을 격리하고 처벌하는 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사회정의다. 그러나 명백한 이유를 만든답시고 자극적인 수사와 무리한 추정에 바탕해 엉뚱한 데에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범인을 그냥 '괴물'로 만들어버리면, 우리는 동일한 범죄가 반복되는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그렇데 되는 순간 사건은 더이상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우리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다른 철창 속 괴물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서커스가 철창 안의 괴물을 전시하듯 담론은 사라지고 프릭쇼freak show만 남는다. 이때 진짜 괴물은 살인범인가, 언론인가.

 

 

살아 있는 누군가는 깍아내려짐으로써 상품화된다. 이미 죽은 누군가는 신화화됨으로써 상품화된다. 진심과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본질에 대한 어떤 규명이나 확인도 없이 괴물은 우상이 되고 우상은 괴물이 된다. 돈이 된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세상에서 가장 쉽고 천박하며 공공연한 진실이다.

 

 

세간의 소문, 혹은 기소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는 순식간에 악인이 된다. 우리는 공공의 적을 만들어 그것을 가능한 한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단죄할 때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한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주변에 증명하기 위해 더 강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더불어 공동체를 위해 마땅한 정의를 실현했다고 시그럽게 과시한다. 그 정의 앞에 다른 모든 가치판단은 유보되거나 선행된 판단에 맞추어 재배열된다.

 

 

한번 실추된 누군가의 명예는 결코 와전하게 회복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들은 대게,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지키려는 집단과 바꾸려는 집단.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 귀족과 부르주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정규직과 비정규직.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투쟁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투쟁과 역전의 대목마다 인류의 세계는 다시 한번 존속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왔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다름 아닌 가능성이다. 우리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것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기르고 있다. 공공연한 폭력의 최전선은 전쟁터가 아니라 가정이다. 남이 하면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삿대질할 것도 엄마에게 형제에게 자식에게 남김없이 쏟아낸다. 사람이 괴물 되는 건 순식간이다. 자기 자신과 주변의 모습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고선 스스로 괴물이 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단 두세 마디로 규정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삶은 크고 작은 모순들로 가득 차 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 사람부터, 끝내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찍힌 사람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인의 모순을 잘 참아내지 못한다. 왜 일관되지 않느냐고 타박한다. 상대의 굴곡으로부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삶은 자연스레 단 두세 마디 인상비평의 소재가 되기를 거듭한다. 나쁜 놈이거나, 착한 놈이거나.

 

 

<레 미제라블>이 제시하는 이슈는 정의의 궁극적 승리 따위가 아니다. 혁명이라는 거대서사의 소용돌이 안에서조차, 서로 다른 가치관과 계급과 세대애 속한 이들을 공히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개인의 평생에 걸친 자기비판과 성찰, 그리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박애뿐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 운명 따윈 없다. 약속된 땅도 계획도 다음 생 같은 것도 기대하지 마라. 덜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기 위해, 결코 도래하지 않을 행복을 빌미로 오늘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정체를 규명해야만 한다. 역할에 휘둘릴 것인가, 아니면 정말 관계를 할 것인가. 그 쉽지 않은 답을 찾는 것으로 우리는 정말 나아질 수 있다. 끝이 어떠하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시합에서 져도, 머리가 터져버려도 상관없어. 15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아무도 거기까지 가본 적인 없거든.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 있으면, 그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낸 순간이 될 거야." ... <록키>는 지난 세월을 꼰대들과 불화하며 답답하게 보낸 서른 살의 한 남자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온전하게 증명해내는 이야기다. 그의 해답은 이기든 지든 끝까지 자기 힘으로 버티어내는 데 있었다. 인생의 좌표라는, 그 단어부터 너무나 거대해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세상의 말에 더이상 무심할 수 없는 나이에 닿아 가면서, 결국 버티어내는 것만이 유일하게 선택 가능하되 가장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기는 것도, 좀더 많이 거머쥐는 것도 아닌 세상사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버티어 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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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집안에서 좀더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보다 공간의 여백과 마음의 여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본문발췌]

 

 

뭔가 깨끗하게 다 쓰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꼭 필요한 것을 아주 잘 샀다는 생각도 들고, 중간에 시들해지지 않고 끝까지 쓴 것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시행착오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살림의 햇수가 늘수록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자주 사용하게 되는지 점점 명확히 알아가는 것 같다. 그것을 갖기 위해서 다른 것은 줄이거나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살면서 이렇게 좋아하고 필요한 것만 내 것으로 가질 수 있다면 인생이 얼마나 가볍고 풍요로울까.

 

 

물건이란 소유하기보다 간수하기가 더 힘들다.

 

 

집에서 마시는 커피는 해야 할 일 사이에서 잠시 멈춤을 부르는 쉼표. 혹은 그사이 하고 싶은 일을 살포시 밀어 넣는 접속의 역할을 한다. 설거지, 청소, 빨래를 하다가 지칠 때, 뭔가로 정신없이 바쁠 때, 그럴 땐 미처 끝내지 못한 설거지가 담긴 싱크대 한 귀통이라도 상관없다. 그라인더에 커피콩 한 줌을 넣어 커피를 갈고 물을 끓인다. 그런 다음 드리퍼에 서걱한 종이 필터 한 장을 올리고 적당히 간 커피를 넣은 다음 뜨거운 물을 포트에 옮기면 나도모르게 찬찬히 숨을 고르게 된다. 어깨와 팔꿈치를 단정히 움츠리고 포트 쥔 손목을 조심스레 돌려가며 커피를 내린다. 내린 커피를 잔에 따르고 나면 방금 전까지 무릎을 마루에 붙이고 힘껏 걸제질하던 손이 저절로 우아하게 커피잔에 닿는다. 마음을 쉬게 하고 기운을 되찾게 해주는 시간. 커피를 즐긴다는 것은 바로 그런 시간을 스스로 허락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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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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