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는 지혜, 진리는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단순화시키며, 치우침없이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본문발췌]
몽상가는, "인생은 한바탕 꿈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현실주의자는, "옮은 말이다. 그렇다면 이 꿈을 되도록 아름답게 살아보자"고 대답한다.
결국 인생의 지혜란, 불필요한 것의 제거와 여러가지 철학문제를 몇 개의 것 - 가정의 즐거움(남편과 아내와 자식과의 관계), 살아가는 즐거움, 자연의 즐거움, 인류문화에 접촉하는 즐거움 - 으로 감소시키는 것과 다른 모든 적절치 않은 과학적 훈련이나 무익한 지식 추구 따위를 몰아내 버리는 것이다.
"어릴 때는 싸움을 경계하고, 청년 때에는 색을 경계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재물을 경계하라." - 공자
하늘 즉 신 그 자체는 중용적인 존재이니, 인간은 자기가 최선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중용적 노선을 지키면서 살아가면 무서울 거라곤 아무것도 없고, 이에 최대의 선물로 오는 것이 양심의 평화이며, 맑은 양심의 소유자는 망령까지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합리적인 것과 불합리한 것을 둘 다 주관하는 중용적인 신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만사는 다 제대로 되어가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널려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린 인물이 모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그는 지상 만물의 섭리에 대해서 아는 체하는 일이 별로 없다. 세익스피어는 대자연 그 자체와 같았다. 이 말이야말로 우리들이 세상의 문인이나 사상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이다. 그는 그저 살았고, 인생을 보았고, 그리고 죽어간 것이다.
초식동물적 인간은 자기가 할 일을 생각하면서 일생을 보내지만, 육식동물적 인간은 남의 생활에 간섭함으로써 자기의 생계를 세운다. 세상 사람의 절반은 자기 일을 하는 데 시간을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남에게 자기 일을 시키기 위해서 또는 남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살고 있다.
유리피데스는 노예를 정의하기를, 사상 또는 의견의 자유를 상실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단순성이라는 것은 사상이 깊다는 외적 증거이며 동시에 그 상징이다. 학문이나 저작에서 이와 같은 단순성에 도달한다는 것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사상을 명석하게 나타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구나 사상이 명석해질 때에만 단순성은 가능한 것이다. ...전문에서 단순으로 이르는 과정, 전문가에서 상식가로 가는 과정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말해 지식 소화의 과정으로, 단연 신체의 신진대사 작용에 비할 만한 것이다. 아무리 학식이 많은 학자라 할지라도 그 지식을 스스로 소화하여 자기의 인생관과 관련시키기 전에는 그 전문적 지식을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부딪치는 문제는 앞으로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평균 5,60년간의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한 대답이 인생 최대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인생을 만들어 가야만 하겠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말을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우주의 섭리 속에서 인생의 신비한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등의 형이상학적인 명제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문제다. ...제 2의 문제에 관한 논점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냐'하는 것이지 '무엇이어야 하는가'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실제의 문제이지 형이상학적 문제는 아니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되고 보면 누구나 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 판단을 끄집어 낼 수가 있다. 이 문제를 갖고 우리들이 늘 논쟁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며, 가치 판단이 사람에 따라서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목적이나 의의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월트 휘트먼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생을 즐긴다는 것 외에 인생에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인간 최고의 품격은 자연에 순응해서 생활함으로써 마침내 천지와 동등한 최고점에 도달하였을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계의 생물은 모두가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이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일을 한다. 왜냐하면, 문명의 진보에 따라서 의무나 책임이나 공포나 구속이나 야심 따위에 사로잡혀서, 인생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이런 것들은 자연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생겨난 것이다.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데에 돈은 필요없다. 전혀 필요없다. 한적한 생활의 참된 즐거움은 부유 계급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것은 부귀를 가장 냉소하는 사람들에게만 찾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고, 돈 버는 일에 얼마나 싫증난 사람들의 마음의 함축에서 오는 것이어야만 한다. 생활을 즐기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즐길 수 있는 생활이 언제 어디서든지 발견된다. 만일 이 지상의 생활을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인생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평범한 그날그날의 생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년기에 책을 읽는 것은 벌어진 틈을 통해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중년에 책을 읽는 것은 자기 집 뜰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노경에 이르러 책을 읽는 것은 창공 아래 정자에 올라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독서의 깊이는 체험의 깊이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독서술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물이 변하여 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수, 바둑, 술도 책이 될 수 있고, 달, 꽃도 또한 책이 될 수 있다. 현명한 여행자는 가는 곳마다 풍경이 있는 것을 안다.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술도 시도 풍경이다. 달도 꽃도 또한 풍경이다.
옛날 어느 문인은 말하였다. 10년을 독서에 바치고, 10년을 여행에 바치고, 10년을 그 보존과 정리에 바치고 싶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보존에 10년을 바칠 것까지는 없고 2,3년으로 족하다고. 독서와 여행이 내 욕심을 만족시키려면 두 배나 다섯배라도 아직 부족하다. 욕심대로 하자면, 황구언이 말한 것처럼 인간 3백 세의 수명을 보존할수밖에 없다.
"시는 시인이 가난이나 불행에 빠진 뒤에야 비로소 좋아진다." (시는 슬픔을 통해서만 참으로 깊은 맛이 난다고 하는 생각이다.)고 옛 사람들은 말하였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할 이야기가 많고 따라서 자기를 유리하게 발표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영달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에 대한 한탄도 없고 불운에 대한 불평도 없이 늘 바람과 구름과 달과 이슬의 시만을 짓고 있다고 하면 좋은 시가 나올 리 만무하다. 이런 사람들에 있어 시를 짓는 유일한 방법은 여행을 떠나 눈에 띄는 모든 것 - 산이나 들이나 풍속이나 사람 사는 꼴, 때로는 전쟁이나 기근에 시달리는 민중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낱낱이 자기 시의 소재로 삼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노래와 탄식을 위하여 남의 비애를 빌어온다면, 구태여 가난뱅이가 되고 불항하게 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도에 이르면 물에 들어가도 젖는 일이 없고 불에 들어가도 타는 일이 없으며, 허(虛)한 것처럼 실(實) 위를 걷고 실한 것처럼 허 위를 걷는다. 그 거하는 곳을 집으로 할 수 있고, 어느 곳에 거하더라도 그 홀로임을 잃지 않는다. 도를 깨달은 선비라고 하면 모두가 다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고 다만 도를 사랑하는 사람일뿐이다. 도에 이른 사람은 자신의 지배자가 되며, 우주는 그의 앞에서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이런 사람은 소란함과 더러움 속에 던져저도 진흙탕 속의 연꽃처럼 몸에 진흙이 묻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구태여 좇아야 할 도를 택할 필요가 없나. 그러나 나는 아직 그 경지에 미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와도 같기 때문이다 - 바람이 잠잠하면 나도 잠잠하고, 바람이 움직이면 나도 움직인다. 나는 물속의 모래 - 물이 맑으면 나도 맑고, 물이 탁하면 나도 탁하다.
공자 가로되, "도는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 떠나야 할 것은 도가 아니라 그 도를 지키는 사람이니라" ... "사람이 도를 닦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닦는 것이 아니다."
논리와 대조를 이루는 것에 상식이 있다. 상식이라기보다 정리(情理)라고 하는 편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정리를 존중하는 것은 인간문화에 있어 가장 건전한 최고 이상이며, 정리를 아는 사람은 최고의 문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정리를 아는 국민은 평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정리를 알고 있는 부부는 행복스럽게 살 수 있다.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는 완전한 부부란 상상할 수도 없다. 다만 알맞게 싸우고 또 알맞게 화해를 할 수 있는 정리를 깨닫고 있는 부부를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정리가 있는 인간세계에서만 우리는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서양에 있어서는 한 가지 명제가 논리적으로 완전하면 대개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중국인에 있어서는 명제가 논리적으로 정확하다는 그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것과 동시에 인간성에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에 있어 이 '인간성에 일치한다'는 것, 즉 진정(盡情, 인간적인 것)은 논리적인 것보다 중요한 문제다. 영어의 reasonableness에 해당하는 중국어는 정리인데, 이것은 정(人情, 인간성), 즉 인간성과 이(天理, 변함없는 도리)라는 두 가지 요소로 성립된 것이다. 정이 신축성 있는 인간적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는 우주불변의 법칙을 나타내는 것이다.
교양 있는 사람이라 함은 인간의 심정과 자연의 법칙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인간의 심정과 대자연의 운행에 조화된 생활을 영위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유학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인이란 주로 그 평명한 상식과 그 자연스러운 인간성, 즉 인간미 때문에 경모를 받고 있는 공자처럼 정리를 깨닫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미가 있는 사고 방법이란 정리를 깨닫는 사고 방법이라는 말이다. 논리적인 인간은 항상 자기를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적인 맛이 없다. 그러므로 잘못이다. 그러나 정리를 깨닫고 있는 인간은 어쩌면 자기가 잘못일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하는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옳은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상품, 사회 구조 및 관계의 변화는 언제나 계속 진행된다. Covid19는 단지 그 변화의 속도를 가속시켰을 뿐이다.
[본문발췌]
기술적 진화의 목적은 위험 회피와 안전 지향과도 연관이 있다. 기술이 위험으로부터 우릴 보호해주고, 이를 통해 우리의 자유를 더 확대시켜준다. 결국 언컨택트는 우리가 가진 활동성을 더 확장시켜주고, 우리의 자유를 더 보장하기 위한 진화 화두다. 비대면의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욕망의 문제다. 사회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는 것도 결국 우리가 가진 욕망이 바뀌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대로 변화하는 것이다. 언컨택트는 욕망의 진화인 셈이다.
20세기 동안 인류가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파괴해왔고, 20세기 후반부터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어왔음에도 모두가 기후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처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21세기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가 전염병에 대한 불안과 불편을 겪을 일은 앞으로 더 잦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는 노령, 장애, 빈곤을 가진 사회적 약자에겐 더 취약한 상황이 된다. 위생을 신경 쓰고 면역력을 키우는 건 각자의 몫이지만, 대면과 접촉을 줄여서도 사회와 경제가 잘 돌아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건 정부와 기업의 몫이다.
분명한 것은, 언컨택트 사회를 지향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 나서야 하는 것도, 정부와 기업에 이런 변화를 원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도, 일상에서 탄소배출 절감을 위해 행동하는 것도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당연하던 모드 것이 당연해지지 않기 전에, 당연했던 것 중에서 문제 될 것들을 과감히 내려놓는 것을 우린 받아들여야 한다. 컨택트 사회만 고집하다간 위기 상황 앞에서 일상이 멈춰버린다. 언컨택트 사회를 받아들이면서 우린 계속 일상을 이어가야 한다.
스타벅스 아메리카의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9월 기준 12억 6900만 달러(약 1조 5000억 원)가 충전하고서 아직 사용하지 않은 현금이다. 전 세계 매장 중 미국 매장이 60%가량 되니까, 전 세계적으로 20억 달러(약 2조 4000억 원) 저도가 예치금으로 확보된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스타벅스 통장 예금인 셈인데, 이자도 없고, 고객은 60%를 써야 나머지 40%를 인출할 수 있다. 스타벅스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다. 스타버스는 전 세계 64개국에 진출했다. 글로벌 금융사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전 세계 스타벅스 매장에서 별도 환전 없이 자국에서 쓰던 스타벅스 앱의 예치금을 쓸 수 있도록, 스타벅스는 백트Bakkt라는 암호화폐 거래소 파트너로 참가했다. 2018년 10월에는 아르헨티나 은행 방코 갈리시아와 제휴해 실제 오프라인 은행 지점도 오픈했다. 스타벅스가 금융업에 진출하는 것도 가능한 시나리오이고, 스타벅스가 스타벅스 앱 이용자를 활용해 다양한 비즈니스로 확장하는 것도 가능한 시나리오다.
사실 아마존의 진짜 목적은 직접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아마존은 무인 매장에서 자동으로 계산하는 기술을 '저스트 워크 아웃 테크놀로지 바이 아마존Just Walk Out Technology by Amazon'으로 명명해서 외부로도 팔고 있다. 이 기술을 대형 월마트나 타깃 같은 유통업체를 비롯, 소매 결제가 이뤄지는 다양한 영역에 팔고자 한다. 2019년 9월 CNBC는, 아마존이 아마존 고 결제 시스템을 공항 내에서 샌드위치나 식음료를 파는 'CIBO 익스프레스'의 운영회사인 미국의 OTG와 극장 체인을 가진 영국의 시네마월드 그룹에 제안했다는 보도를 한 적이 있다. 이때 CNBC는 아마존이 결제 시스템 제공으로 상품 판매액에서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받는 방식을 비롯, 초기 구축 비용과 월 단위 요금을 징수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2020년 3월 9일, 로이터통신은 이미 아마존이 여러 기업과 무인 결제 캐셔리스Cashierless 기술 판매 계약을 맺었다는 보도를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년 3월 16일, 아마존이 캐셔리스 스토어Cashierless stores 솔루션 확대 일환으로 관련 소프트웨어를 오픈소스로 제공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정황들로 보면, 확실히 아마존은 유통시장에서 무인 매장 분야의 주도권을 가져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건 유통의 미래가 언컨택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존의 솔루션은 아마존의 클라우드 서비스인 아마존웹서비스AWS로 돌아간다. 결국 아마존의 저스트 워크 아웃 기술 확산으로 유통업계의 지배력과 클라우드 서비스의 지배력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셈이다. 아마존의 전략이 성공할지 안 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유통의 방향이 바뀔 것은 장담할 수 있다.
가장 대중화, 보편화된 것이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이다. 이는 가짜만으로 이뤄진 공간이다. 그 다음이 진짜 공간과 가짜 공간이 결합해 진짜 공간을 확장시키는 증강현실AR, Auugmented Reality이고, 그 다음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융합한 혼합현실MR, Mixed or Merged Reality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혼합현실에 네트워크를 결합해 원격의 서로 다른 사용자들이 현실 공간감을 함께 느끼며 친밀하게 협업하는 공존현실CR, Coexistent Reality이다. 공존현실이 완전히 구현되는 상황이 되면, 우린 가상과 현실이 경계가 지워진 확장된 공간 속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고, 어울리고,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혼자 꾸면 꿈이지만 모두가 꾸면 현실이 된다. 가상현실에서 증강현실, 혼합현실로 진화했다면, 이젠 공존현실이다. 현실과 가상이 결합된 공간에서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협업도 하고 어울리기도 한다. 혼자서만 가짜를 진짜로 여기는 게 아니라, 여럿이 함께 가짜와 진짜가 결합된 공간에서 시각과 청각, 촉각, 후각까지도 느낀다. 이쯤 되면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함께 느끼는 모든 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 자체로 모든 건 실제하는 진짜가 되는 셈이다. 진짜냐 가짜냐의 의미가 사라지는데, 대면이냐 비대면이냐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모든 기술은 언컨택트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공간이 제약을 넘어서서 더 원활하고 효율적인 컨택트를 위해 우린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언컨택트를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아마존 스카우트를 개발한 스타트업 디스패치는 2014년 자율주행 배송로봇 시제품을 내놓았는데, 2017년에 이미 아마존에 인수되었다. 아마존은 자율주행 배송로봇에 대한 투자를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해왔던 셈이다. 분명 아마존은 스카우트가 진화되어 자사의 배송에 전격 투입되고 나면, 그 뒤론 스카우트 로봇을 전 세계 다른 유통사에도 팔려고 할 것이다.
CES 2020에서 LG전자는 캐나다 인공지능 솔루션업체인 엘레멘트 AI(Element AI)社와 함께 개발한 ‘인공지능 발전 단계(Levels of AI Experience)’를 소개했다. 1단계는 효율화(Efficiency)로, 인공지능이 지정된 명령이나 조건에 따라 제품을 동작시킨다. 2단계는 개인화(Personalization)로, 사용자의 행동을 분석해 패턴을 찾고 사용자를 구분한다. 3단계는 추론(Reasoning)으로, 여러 접점의 데이터를 분석해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한다. 4단계는 탐구(Exploration)로, 인공지능 스스로가 가설을 세우고 검증해 더 나은 솔루션을 제안한다.
디스토피아는 전체주의적 정부에 의해 억압받고 통제되는 사회를 말한다. 존 스튜어트 밀이 1868년 영국 의회에서 영국 정부의 아일랜드 억압 정책을 비판하면서 이 말을 처음 썼다고 알려져 있다. 소설, 영화, 만화 등에서 미래를 그려낼 때 보편적으로 설정하는 사회가 디스토피아이기도 하다. 디스토피아의 대표적 소설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 조지 오웰의 <1984>(1948)이고, 수만흔 SF영화에서 볼 수 있는 디스토피아 배경도 이 두 소설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 볼 수 있다. ... 전 세계에서 식민 지배를 하는 제국주의 영국이, 식민지ㅔ서의 정책이 디스토피아 사회의 모습이었다. 지금 시대는 중국을 디스토피아 사회에 가깝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싱가포르도 마찬가지다. 권력이 견고하고 독재에 가까울수록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된다. 한국 사회도 군부 독재 시절에 겪어본 일이다. 과거에 물리력,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공권력에 의한 통제였다면, 지금은 IT 기술로 인한 통제가 대두된다. 사람의 대면이 줄어도 되는 사회는 데이터와 기술에 의한 관리가 원활하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를 악용하면 통제가 된다. 초연결 사회, 언컨태그 사회, 4차 사업혁명 사회, 인공지능 사회, 뭐라고 불러도 과거에 비해 디스토피아의 우려가 생기는 건 마찬가지다. 결국 언컨택트 사회로의 전환 과정에 있는 우리 사회에서 디스토피아에 대한 우려를 해소할 방법이 중요한 숙제댜. 견제와 투명성이 언컨택트 사회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우린 컨택트 사회에 태어났다. 평생 사람들과 대면하고 소통하며 살아왔다. 컨택트 사회에 완전히 적응한 기성세대일수록 언컨택트 사회에 새롭게 적응할 일이 더 많다. 이 과정에서 언컨택트 디바이드, 디지털 디바이드, 인공지능 디바이드 등만 드러나는 게 아니라, 관계에 대한 단절과 소외 현상도 드러난다. 가뜩이나 외로움이 질병이 되는 외로운 사회로 가고 있는데, 언컨택트 사회가 고립과 외로움을 더 심화시킬 수도 있다. 언컨택트 사회에 태어날 사람들과의 소통 문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과의 대면을 통해서 쌓고 배운 소통이 아니라, 기계와의 소통에 익숙하게 자란 사람들이 사람과의 소통에선 어떤 문제를 드러낼지도 앞으로의 사회적 리스크다. 사람과의 관계 문화가 달라지면 공동체이자 사회가 유지되는 데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기술로는 채우지 못할 문제들이 있는 것이다.
언컨택트 사회는 예고된 미래였지만, 코로나19로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전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언컨택트 환경을 도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이 언컨택트가 가진 문제를 급격히 노출시키는 계기도 되고 있다. 인간 소외와 새로운 갈등, 새로운 차별과 새로운 위험성, 결국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우리 사회는 언컨택트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었는데 그 시기가 당겨지고 속도가 빨라졌다. 이미 시작된 언컨택트 사회, 우린 그 속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야 한다. 이제 시작이다.
블로그 등에 올라온 여행기, 여행 안내서를 통해 새로운 여행지에 대해 이해하듯, 책을 통해 새로운 책을 읽게 되는 경험은 즐겁다.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에서 그랬고, 이 책 <여행의 문장들>을 통해서도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행과 독서를 통해 만나는 설레임!
[본문발췌]
독서술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물이 변하여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수山水, 바둑, 술도 책이 될 수 있고 달, 꽃도 또한 책이 될 수 있다. 현명한 여행자는 가는 곳마다 풍경이 있는 것을 안다.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술도 시도 풍경이다. 달도 꽃도 또한 풍경이다. - 린위탕, <생활의 발견>
세상의 길이 어떻게 만나는가를 더듬어 알고 발견하는 일이 여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행자는 그래서 땅을 읽는 독서가입니다. 어떤 책이 전혀 다른 책과 한 봉우리에서 만나고, 언어가 다른 어떤 저자의 생각이 다른 저자와 통하는 길목에 서는 일도 황홀합니다. 한 권의 훌륭한 책은 열 갈래 다른 독서의 시작이라 했던 말처럼, 책과 책 사이에도 길이 있고 산맥이 있으며 유유히 흐르는 바다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책을 읽는 사람은 진지한 여행자이기도 합니다.
이보게, 고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야.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얘야, 사랑을 네 유일한 벗으로 삼거라. 이 우주를 지탱하는 것은 사랑이니 말이다. 네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사랑이 다르게 구현된 것이니, 불은 사랑의 열기, 흙은 사랑의 토대, 바람은 사랑의 덧없음, 밤은 사랑이 꿈꾸는 상태, 낮은 사랑이 깨어 있는 상태이니라. - 쿠쉬완트 싱, <델리>
'여행'은 무언의 바이블이었다. '자연'은 도덕이었다. '침묵'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침묵에서 나온 '말'이 나를 사로잡았다. 좋게도 나쁘게도, 모든 것은 좋았다. 나는 모든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내 몸에 그것을 옮겨 적어보았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인도는 너무 많이 찍으면 안 됩니다. 인도란 나라는 어디를 찍어도 사진이 되니까요. 360도로 빙그르르 돌면서 서른여섯 번 셔터를 누르면 바로 포토스토리 한 권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인도에 간 사람들의 사진은 모두 똑같아요. 너무 많이 찍는다는 건 전부 찍어선 안 되는 거지요. 인도는 '무엇을 찍지 않을 것인가' 하는 마이너스 작업에 의해서만 그 사람의 시점이 드러납니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침묵은 물체를 보면서 거기서 일어나는 감정이입의 상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글솜씨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 침묵은 인간의 얼굴 속에 있는 하나의 기관과도 같다. 얼굴 속에는 눈과 입과 이마만 있지 않고 침묵도 있다. 침묵은 얼굴 속 어디에나 있다. -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도처에 침묵이 있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다. '모든 것이 스스로 요란한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는'(최승자) 소음의 시대에 침묵을 벗하는 일은 행복하다.
<숲>,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 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이 울린다. ...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ㄱ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숲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도 훨씬 더 사람 쪽으로 가깝다. 숲은 마을의 일부라야 마땅하고, 뒷담 너머가 숲이라야 마땅하다. - 김훈, <자전거 여행>
<술>, 술. 이 말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인지 이 말이 가리키는 물질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 섞갈릴 때가 있다. 아무튼 '술'이라는 말만큼 술처럼 들리는 말이 내가 아는 외국어에는 없다. '술'의 마지막 소리인 설측음 /ㄹ/은 술의 물리적 성질을, 다시 말해 액체로서의 유동성을, 그 흐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들린다. 한편 그 첫 소리인 치마찰음 /ㅅ/은 술이 예컨대 증류수 같은 무미 무취 무색의 액체가 아니라 빛깔과 향기와 맛을 지닌 매력적인 액체라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두 자음을 이어주는 원순 후설모음 /ㅜ/는, 내게, 술은 내뱉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또 마시되 예컨대 모음 /ㅏ/가 연상시켰을 수도 있듯 폭음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 있게 느릿느릿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 고종석, <말들의 풍경>
조금 느리지만, 슬로 미디어인 책을 통해서도 살아가는 지혜나 힘은 충분히 어을 수 있지 않을까. 앉은 자리에서 손가락과 눈으로 하는 여행보다 두 다리로 직접 만나고 가슴으로 느끼는 경험이야말로 여전히 가장 의미 있는 배움과 깨달음이 아닐까. 내게 여행은 숲에 가서 술을 마시는 일이다. 그 동네에 가서 그 동네 공기와 물을 마시며 그 동네서 난 음식과 술을 마시는 것. 그 동네가 빚어낸 책을 읽는 것. 내가 하려는 여행의 모습은 변함없이 그러하다. 숲에 가 술을 마시고 싶다. 그 글자들을 그렇게 명명한 옛 사람들의 위대한 마음을 떠올리며.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그난 사랑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을 타고난 그는 꽃향기라든가 떠오르는 태양, 말이나 새의 비상, 음악 같은 것을 너무나 깊이 체험하고 사랑할 줄 알았다. 그런 존재인 골드문트가 어째서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고 금욕의 길을 가야 하는 수도사가 되겠다고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나르치스는 이 문제 관해 곰곰이 따져보았다. -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이름이 어쨌다는 거예요.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그 향기는 역시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러니 로미오는 로미오라고 안 불러도 그 이름이 갖는 고상함은 그대로 남는 거예요. -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미와 줄리엣>
괴테에 의해 독일어가 비로소 언어로 만들어졌다면, 셰익스피어는 영어를 세계 최고의 언어로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2만 8,829개의 단어가 사용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작품에서 그전까지는 한 번도 영어에 등장하지 않던 새 단어를 1,700여 개나 소개했다. 햄릿 한 작품에만도 600여 개의 단어를 새로 선보였다. 그가 도임한 단어 중에는 오늘날 매일 사용하는 'critical(비판적인), extract(추출하다), excellent(훌륭한), assassination(암살), lonely(외로운), accommodation(숙소), amazement(경악), bloody(유혈의), hurry(서둘러), eyeball(눈알), road(길)' 등이 있다. - 빌 브라이슨, <셰익스피어 순례>
용감한 시골 귀족, 이곳에 잠들다. 탁월한 그대의 용기 죽음의 신도 그대 목숨 죽음으로써 빼앗지 못했다고 세상 사람들 전하도다. ... 광인으로 세상을 살다가 본 정신으로 세상 떠났으니.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시아베드라, <돈키호테>
유명한 묘비명, '우물쭈말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버나드 쇼),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헤밍웨이), '벗이여, 바라건대 여기 묻힌 것을 파헤치지 마라. 내 뼈를 움직이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리니' (셰익스피어)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가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서구 문학사가 탄생시킨 대표적인 두 인간형으로 흔히 셰익스피어의 대표 캐릭터인 '햄릿형 인간'과 세르반테스의 대표 캐릭터인 '돈키호테형 인간'을 꼽는다. 전자는 생각과 고민이 많아 행동으로 곧바로 나서기를 주저하는 인간이지만, 후자의 인간은 생각이고 자시고 없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행동형 인간의 표상이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이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거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비록 절대 특권을 누리던 왕일지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단두대에 목이 싹둑! 잘릴 수 있다는 공통의 경험을 통해 유럽 혹은 서구는 이후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정신을 꽃 피워나갔다 여전히 대통령과 정치인, 자본가를 봉건시대의 왕이나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추앙하는 우리네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낡은 인식의 대대적인 혁명을 불러일으켰다는 데서 프랑스 혁명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인지 되새길 만하다.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단두대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 주인공 카턴의 유언은 아직도 완벽한 자유, 평등, 박애를 이뤄내지 못한 절망의 세상을 살아가는 후대 독자에게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긴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솟아난 아름다운 도시와 현명한 사람들이, 시간이 걸릴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승리와 패배를 겪음으로써, 현재의 악행과 그것을 잉태한 예전의 악행이 스스로 속죄하고 사라지리라는 것을."
행복한 가정은 모두 다 서로 비슷한 것이고, 불행한 가정은 어느 경우나 그 불행의 상태가 다른 법이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
몇 십만이나 되는 인간들이 지상의 한 작은 지역에 모여 서로 밀치락달치락하며 그 땅을 보기 흉하게 만들려고,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땅바닥을 돌멩이로 덮고, 그 틈 사이로 자라는 모든 잡초의 싹을 뽑아내고, 그 대기를 석탄과 가스의 연무로 채우고, 나무들을 잘라내고, 또모든 짐승과 모든 새들을 내쫓는 등, 제 아무리 노력을 다하였다고 해도, 그러나 봄은 역시 봄이었다. - 톨스토이, <부활>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양의 근대를 열고 창조했다고도 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거의) 최초의 철학자로 니체가 거론된다. 질서와 합리의 아폴론적인 세계가 아닌, 무질서와 쾌락의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옹호한 그의 첫 저작 <비극의 탄생>부터가 그랬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달리 말해 그의 정신 질환이 발병한 것이 정확하게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리는 모든 가치를 전도시킬 수 없는가? 악은 선이 아닐까? 신은 악마의 발명품이며 세공품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잘못이 아닐까? 그리고 만일 우리들이 기만당하고 있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또한 기만자가 아닐까?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다른 사람들은 작품을 발표하거나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3년 동안이나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했던 모든 배움보다 나에게는 더 유익하였으며,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여행은 배움의 공간이지만 비움의 시간이기도 한 것.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텅 비우는 것 역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소양이 아닐까. 나는 그런 '텅 빈 여행'을 사랑한다. 정해놓은 목적지 없이 버스터미널 시간표의 낯선 지명 앞에 서는 그런 시간을 사랑한다. ... 일부러 세상을 떠돌아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쓸쓸함이 거기(꼬창) 가득했다. 바다가 태양을 품으면 찬란함으로 가득하고, 낭만을 품으면 사랑으로 가득하고, 분노를 품으면 파괴로 가득하겠지만, 쓸쓸함을 품으면 얼마나 거대한 슬픔과 고독을 빚어내는지 알 것 같았다.
나타니엘이여! 우리는 언제 모든 책들을 다 불태워버리게 될 것인가!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감각으로 먼저 느껴보지 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나는 이렇듯 과감히 책을 버릴 것을, 그리고는 책 대신에 자연과 삶, 거리와 사람들 속에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을 충고하는 책들을 사랑한다. 서평가 이현우가 "책은 전부다. 그런데 이 전부인 책들은 책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라며 얘기한 '책의 패러독스'가 혹시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내 생각에는 길가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도서관을 가득 채운 모든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 -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놓고 불이나 놓아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산티아고에게도 길을 떠나던 날부터 읽으려 했던 책이 한 권 있었다. 그러나 대상 행렬을 바라보거나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그는 자신의 낙타를 더 잘 알고 싶었고, 낙타와 친해지기 시작하자 책을 던져버렸다. ... 책은 이젠 그에게 그저 무게만 나가는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현대 물리학으로 인한 이러한 전환은 지난 수십 년 사이 많은 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서 폭넓게 논의되어왔지만, 이런 변화들이 동양의 신비주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관념과 매우 유사한 방향의 세계관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데 대해서 좀체 깨닫지 못하였던 것 같다.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들은 극동의 종교 철학에 표명된 여러 아이디어들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원자 이론의 가르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 '우리는' 부처나 노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일찍이 부딪쳤던 인식론적 문제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 닐스 보어의 말,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자연계는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로서 거기에는 직선이나 완전한 정각형은 들어 있지 않으며, 사건이 정연한 순서대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 모두가 한데 어울려서 일어난다. 현대 물리학이 말해주듯이 막막한 우주 공간까지도 휘어져 있는 것이다. -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양자론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물리적 대상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통일된 전체의 여러 가지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관계망으로 보게 한다. 그런데 이는 동양의 신비가들이 세계를 체험했던 방법으로서, 그들 중의 몇몇은 그 체험을 원자 물리학자들이 쓴 것과 거의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생명이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적이기에 이에 대항해 싸움을 벌일 때조차도 경외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 살충제와 같은 무기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 능력 부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과학적 자만심이 자리를 잡을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 레이첼 칼슨, <침묵의 봄>
세상은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 레비 스트로스, <슬픈 열대>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것일까? 그저 좋은 시절에서 조금 덜 좋은 시절로 흐르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무엇일까? 몸이 편안하고 걱정 없는 것이 행복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던져진 존재로서 그저 살아지는 것일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무엇일까? 일상에서 답을 구할 수 없어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을 떠난다고 답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행은 무의미한 일상의 연장일 뿐일까?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지어지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 루이스 부뉴엘의 말,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 이언 매큐언, <속죄>
지금, 세상에는 진실을 은폐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더는 '속죄'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뉴스를 접하면 언론을 호도하고 본질을 흐려 진실을 가리려는 파렴치한 시도는 사회 상류층으로부터 난무하고 있다. 교회나 법당에 찾아가 값싼 기도로 자신의 거짓과 악행이 사함 받을 수 있다 믿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더욱 탐욕스럽게 살아간다. 그들이야말로 죄를 심판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확실하게 인정하고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심판의 내세가 있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극악무도한 죄를 지을 수 있으며, 그에 대해 속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속죄'가 사라진 이 절망의 시대에 소설을 읽는 맛은 씁쓸하기만 하였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 이언 매큐언, <속죄>
"이제 뭘 하죠?" "찾아야지." "뭘요?" "뭘 찾을지는 생각하지마." "왜요?" "뭔가를 찾겠다고 생각하면 다른 중요한 걸 놓치기 쉬우니까. 마음을 비워. 발견하고 나면, 자기가 뭘 찾고 있었는지 알게 될 거야." - 요 네스뵈, <스노우 맨>
오로라는 그런 것이었다. 애써 쫓는다고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방심한 상태일 땡 우리 앞에 나타나는 그런. .... 노르웨이 트롬쇠
해리는 자신이 맡은 사건이 결론에 도달하거나, 해결되거나, 종결되었을 때 기쁨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건을 수사중인 한 그에게는 목표가 있지만, 일단 그 목표에 도달하고 나면 이곳이 여정의 끝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혹은 그가 상상했던 끝이 아니라는 생각, 혹은 끝이 바뀌었거나, 그가 변했거나,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실 그는 공허했고, 성공은 약속했던 맛이 아니었으며, 범인을 잡으면 늘 '그래서 뭐 어쩔 건데?'라는 의문이 뒤따랐다. - 요 네스뵈, <스노우 맨>
"눈은 참 깨끗하지, 오빠?" "응...." "그렇지만 향기가 없어."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 눈에 향기가 있다면 큰일이야, 요코." 도오루가 웃었다. 요코도 덩달아 웃었다. - 미우라 아야코, <빙점>
겨울은 달리 보면 '따뜻한' 계절이다. '따뜻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계절은 오로지 겨울밖에 없다. '시원한'이 여름의 형용사이듯 말이다. 하지만 겨울이 따뜻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절실하다. 온기가 없는 겨울, 따뜻하게 내민 손과 마음을 나누지 않는 사람들의 계절은 혹한의 겨울보다 더 춥고 매서울 것이다.
시인 혹은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이미 자연을 쫓는 사람이라는 것. 자연의 미세한 떨림과 여린 빛에도 아파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이 또한 여행자라는 것. 헤세의 책에서 여행자와 시인은 행복하게 만나고 있다.
"당신은 시인이군요. ... 당신이 소설을 쓴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살랑거리고, 산이 햇빛에 빛난다고 해서 달느 사람들에게 그것이 뭐겠어요. 그러나 당신에게는 그 가운데 생명이 있고, 그것과 당신은 같이 살아고 있으니까요. - 헤르만 헤세, <페터 카멘친트>
반짝이는 호수나 쓸쓸한 적송나무나 햇빛을 받는 바위보다도 더욱 마음이 끌린 것은 구름이었다. 넓은 세상에서 나보다 구름을 더 잘 알고 나보다 더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혹은 또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구름은 흘러가며 눈에 위안을 준다. 구름은 축복이요, 신의 선물이요, 노여움이요, 죽음의 힘이다. 구름은 갓난아이처럼 정답고 부드럽고 평화스럽다. 구름은 착한 천사처럼 예쁘고 부유하고 은혜로우며, 죽음의 천사처럼 어둡고, 피할 수 없고 사정을 모른다. - 헤르만 헤세, <페터 카멘친트>
많은 시인과 여행자들이 모두 저 변함없이 흐르는 구름을 꿈꾸지 않았던가? 만일 구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여행자들이 그토록 많이 생겨났을까? 바람 같은 것이 있지만, 역시 여행자의 스승은 저기저 지향도 없이 형체도 없이 떠다니는 구름, 구름이 아니었을까?
시인이 된다는 것은 /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 행동의 끝까지 / 희망의 끝까지 / 열정의 끝까지 / 절망의 끝까지 // 그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 왜냐하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 그렇게 어린애처럼 작은 구구단 곱셈 속에서 / 영원히 머뭇거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 시인이 된다는 것은 / 항상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 밀란 쿤데라, <시인이 된다는 것>
고뇌에 찬 영혼이 자신의 추억과 고통을 말하기에는 어느 겨울 저녁, 집 주위로 바람이 몰아치고 있을 때, 밝은 불 하나만 있으면 족한 것이다. ... 불은 '낙원'에서 빛난다. 불은 '지옥'에서도 타오른다. 불은 온화함이기도 하고 고문이기도 하다. 불은 부엌이기도 하고 세상의 종말이기도 하다. 불은 불가에 얌전히 앉아 있는 어린아이를 즐겁게 한다. 하지만 너무 불꽃 가까이에서 놀려고 들면 그 어떤 불복종도 처벌한다. 불은 안락이자 존중이다. 불은 수호신이자 무서운 공포의 신이요, 선한 신이자 악한 신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가령 / 이것이 시다, / 라고 쓴 대부분의 것은 시가 아니다 // 설령 / 이것이 시가 되지 않더라도, / 라고 쓰여진 것은 대부분 시다 // 가령(佳嶺)은 도처에 있다. / 가령 화사하고 화려한 것. 가령 사랑이란 단어. / 가령 그리움이란 단어. 봄날 꽃놀이 관광버스가 / 가 닿는 곳. 그곳이 가령이다. // 설령(雪嶺)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스며 있다. / 어둡고 춥고 배고픈, 눈과 귀와 혀의 뿌리. / 설령 어시장 좌판이라도. 설령 공중화장실이라도. / 설령 무덤이라도.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 그곳에 있다. // 등반자여 혹은 동반자여 / 가령은 도처에 있고 설령은 도무지 없다. / 도대체 어디를 오를 것인가 - 박제영, <가령과 설령>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시켜야 한다. - 김수영, <김수영 산문집>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 윤동주, <별 헤는 밤> (1941.11.5)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1941.4. 문장 26호)
어떻게 설명 드려야 할까요? 어르신이 시를 읊으니까 단어들이 여기저기 사방으로 뒤어다니는 것 같았어요." "바다처럼? 그게 바로 리듬이라는 거야" "너무 많이 움직이다 보니 멀미가 날 정도였어요. 어르신 말씀을 타고 흔들거리는 배처럼 흘러가는 것 같았어요." "마리오, 자네가 지금 뭘 했는지 아나?" "뭘 했는데요?" "메타포."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은 / 곧 당신에게로 향한 길이었다 / 내가 거쳐 온 수많은 여행은 / 당신을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조차도 / 나는 당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발견했을 때 / 나는 알게 되었다 / 당신 역시 /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 잘랄 알 딘 알 루미
우리 안에 있는 비밀스러운 회전이 / 우주를 돌게 한다 // 머리는 발에 대하여, 발은 머리에 / 대하여, 서로 모른다 // 상관없다. 그들은 / 계속 돌고 있다 - 잘랄 알 딘 알 루미, <회전>
늙은이들은 죽을 것이고, 젊은이들은 모를 것이다. - 이스라엘의 한 정치인...
'제노사이드'를 주제로 하는 증언 문학의 성립에는 몇 단계의 어려움이 따른다. 첫번째로 일차적인 증언자 대다수가 문자 그대로 학살당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두번째, 생존자 대부부은 차라리 입을 닫고 기억을 억압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세번째, 설령 증언이 이루어지더라도 그 메시지가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고 왜곡되어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네번째로 아우슈비츠처럼, 사실을 표상하는 것이 애당초 가능한 것인지, 그것을 표상하고자 하는 행위는 불가피하게 실제 일어난 사실을 왜소화하거나 진부화 혹은 상품화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가 있다. 이 같은 의문은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치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선언 이후, 거듭 표명되었다. - 서경식, <시의 힘>
저지 캠벨, 빌 모이어스, <신화의 힘>
그(조셉 캠벨)는 세계의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신들이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을, 이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들(창세, 처녀 수태, 신자성육,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최후의 심판 이야기)이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로부터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가 무리 앞에서 설법을 하기 위해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마악 입을 열려는 찰나 새가 한 마리 끼어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가장 찍고 싶은 것이 가장 찍을 수 없는 것이다. - 베르나르 포콩, <사랑의 방>
나는 사물이 찍히면 어떻게 보일지 알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 게리 위노그랜드의 말, 수잔 손탁, <사진에 관하여>
요컨대 사진은 겁을 주고, 격분하게 하며 상처 줄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복적이다. ... 카프카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어떤 것들을 사진 찍는 것은 그것들을 정신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이다. 나의 이야기들은 눈을 감는 하나의 방식이다." 사진은 침묵해야 한다. (매우 시끄러운 사진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그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 말은 그에겐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그대는 다시는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어린 시절로, 낭만적 사랑으로, 영광과 명예에 대한 청년 시절의 꿈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다시는 방랑 생활, 다른 나라로의 도피, 그리고 '예술과 미',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이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 한때는 영원한 것으로 보였지만 언제나 변화하는 사물의 낡은 형태와 조직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으며, 다시는 시간과 기억의 도피처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 토마스 울프,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가리>
나에겐 내가 현재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면 언제나 편안할 것처럼 생각된다. ... 마침내 내 넋은 폭발한다. 그리고 현명하게 나에게 외치는 것이다. "어느 곳이라도 좋다! 어느 곳이라도! 그것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이라 읊었던 보들레르의 시에서 비로소 근대적인 '여행의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행에 관한 철학 서적인 <여행의 기술>에서 저자 알랭 드 보통은 보들레르를 평생에 걸쳐 항구, 부도, 역, 기차, 호텔방과 대양을 가로지르는 배를 사랑한 시인으로 그리고 있다. 목적지보다는 떠남 자체를 동경한 보들레르의 생각을 통해 여행이 '생각의 산파'임을, 내적인 사유를 끄집어내고 자신과 대화를 이끌어내는 공간임을 얘기한다.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꿈을 꾸다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집은 아니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수수께끼 같은 친구여, 말해 보아라,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아버지? 어머니? 누이나 형제? // 나에게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소. // 친구들은? // 당신은 오늘날까지 내가 그 의미조차 모르는 말을 하고 있구려. // 조국은? // 그게 어느 위도 아래 위치하는지도 모르오. // 미인은? // 불멸의 여신이라면 기꺼이 사랑해겠소만. // 돈은 어떤가? // 당신이 신을 싫어하듯, 나는 그것을 싫어하오. // 그렇군!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느냐, / 불가사의의 이방인이여? //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 흘러가는 구름을.... / 저기.... 저기..... 저 찬란한 구름을! - 보들레르, <이방인>
돌연변이가 발전과 진화로 이어진다. 시스템을 벗어난 생각과 행동이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한다.
[본문발췌]
그들은 시스템의 기준대로 분류되고, 이미 방향이 정해진 트랙 위에 놓여 지정된 경로를 따라 앞으로 이동해 지시를 받는다.
정교하게 구성된 수많은 과정을 통과하며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정보를 주입받는다. 이 모든 과정은 적절한 결과를 내기 위해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다.
모든 일은 상자에서 일어난다. 네모난 상자 안에서. 공간뿐 아니라 시간과 경험도 상자 안에 넣어진다. 이것들은 각각 개별 단위로 분류되어 깨끗하게 포장되고, 효율적인 의사전달을 위해 말하는 자는 듣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새겨진 수많은 틀은 내재화된다. 외부에서 주입된 내용이 내면에 그대로 흡수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정기적으로 시스템이 시행하는 검사를 받는다. 갖가지 다양한 도구를 동원해 인간을 계량화하고 데이터로 전환해 더 많은 상자를 만들어낸다.
스스로 보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동떨어진 힘에 의해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는다.
모두가 좁디좁은 틈에 끼워 맞춰져 누구에게나 대체 가능한 인간으로 규격화된다.
단일한 차원에 줄 세워진 '생각'과 '행동'. 정확하게 같은 발걸음으로 열을 맞춰 줄지어 걷다가 똑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역동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잠재적 에너지는 감소되고 그 활기를 완전히 잃었다. 대신 단조로움만 덩그러니 남았다.
마르쿠제가 말했듯, "이 세계가 정한 조건 속에 위축되어 살아온" 그들은 의지를 결여한 실체없는 그림자로만 존재한다.
플랫랜드인들 같이 우리도 관점의 한계라는 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채. 뿌리 깊은 패턴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구가 정사각형에게 했던 것처럼 정신적인 충격을 주어야 한다.
쿠바 출신의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성이 위협받는 것 같을 때마다 늘 신화 속 페르세우스처럼 다른 공간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이성적 세계나 꿈속으로 도망치자는 말이 아니라 접근 방식을 달리 하자는 뜻이다. 과거와 다른 시각, 다른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방법으로 인식과 검증에 나서는 것이다. 새로운 접근 방식은 앞으로 우리가 떠날 여행의 목표와 완전히 부합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발견하고, 수많은 가능성의 문을 열고, 생생하게 깨어 있기 위한 '신선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우리 두 눈 사이에 공간이 있다는 것은 각각의 눈에 시각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하나의 '올바른'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에 한 쪽식, 눈을 가리고 번갈아 보면 이 사실은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변화, 즉 시차 덕분에 우리는 대상과의 거리를 인지할 수 있다. 두 관점의 통합이 곧 입체적 시각을 창조한다. 두발로 걷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보는 행위 역시 서로 다른 두 원천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인 대화라 할 수 있다.
'입체화unflattening'란 다양한 관점을 동원해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행위다.
인류가 만들어온 다양한 렌즈 덕분에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렌즈는 시야의 폭을 협소하게 만들고, 우리는 렌즈를 통해 나타난 관점을 실재reality라고 착각한다. 단일한 관점에 의지하면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할 수 없다. 고정된 관점, 즉 천편일률적인 사고는 함정이 될 수 있다. 찾고자 하는 것만 보는 함정. 다른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기존의 통념이 뒤집히고 유일하게 '옳은' 관점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각기 다른 시점을 유지한채 대화에 참여한다. 각각 나란히 존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 교차하고, 맞물리고, 교류하고, 결합하고 정보를 교환한다. 두 눈이 결합해 입체적 시각을 완성하는 것처럼 서로의 궤도를 도는 다양한 관점은 연결되고 상호작용하고 중첩되다가 새로운 관점의 등장을 촉발한다. 수많은 생각이 날실과 씨실을 이루어 춤을 추듯 얽히고 설키면 공통 기반이 형성된다. 이질적인 것들이 풍성히 얽혀 있는 직물 그 위에서 문제와 대면하고 차이를 인정하며, 복잡한 것은 복잡한 대로 남겨 둔다. 현존하는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경계는 서로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경직되고 닫힌 사고방식은 상호 연결된 포괄적 관계망에서 재구상된다. 각각의 관점이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더 이상 고립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관점과 소통하며 지속적으로 서로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이처럼 새롭게 통합된 지평에서 더욱 포괄적인 이해의 가능성이 펼쳐진다.
제임스 카스는 "제한적인 것은 우리의 시야이지, 우리가 보는 대상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끊임없이 시야 너머의 존재를 추구하는 것, 바로 호기심이다.
다차원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 주변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관찰할 수 있고, 바로 놓을 수도, 뒤집어놓을 수도 있다. 관점을 바꾸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이해의 폭을 넓힌다.
이미지는 '존재 자체'를, 텍스트는 '어떤 견해'를 표현한다. 사유를 표현하는 주요 수단으로 텍스트에만 의존하게 되면 언어의 선형적 구조 바깥에 있는 것들은 무시된다. 그리고 그 위로 '비이성적'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위쪽'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플랫랜드인처럼. 시각적인 것은 문자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다. 우리는 무엇을 놓쳐왔을까? 대상에 '대한' 사유뿐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보려고 할 때 무엇이 시각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가?
만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을 재구성하기 때문에 보다 높은 차원의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시각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만든 족쇄를 풀고 답답한 틀을, 상식의 틀을 벗어날 수 있다.
사물들의 깊이는, 아른하임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들(현상)"과 "존재해야 할 것들(본질)"을 비교함으로써 우리에게 넌지시 전해진다.
레이코프와 존슨, 라파엘 누네스에 따르면 인간이 인식하는 근본 개념은 탈육체화된 순수한 이성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우리가 존재하고 보는 것에 뿌리를 둔다. 즉, 일상적 지각 활동 및 신체 활동을 통해 우리는 이미지와 유사한 역동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우리는 경험을 체계화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미지의 구조는 우리의 지각적 의식 기저에서 작동하여 생각과 행동을 형성한다. 구체적 경험은 이미지 구조의 주춧돌 역할을 하고, 이로부터 우리는 사고 능력을 신장시키며 보다 추상적인 개념을 만들어진다. 우리는 기존 지식을 토대로 새로운 개념을 이해한다.
우리는 본래 아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이해한다. 다시 말해 유사하지 않는 것들끼리 엮으며 새로운 지식을 구축한다. 이를 두고 바버라 스태퍼드는 "그럴듯한 인어를 만드는 상상력의 노동"이라 비유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이 본래 시각적인 과정이라 주장했는데 관계 안에서 사물을 보는 행위는 분리된 대상을 연결해 그리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단 하나의, 객관적인 관점이란 없다. 우리는 다양한 시각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지각을 한다. 고정된 시각은 관계 속 역동적인 관찰을 방해한다. 지각은 불필요한 과정이 아니다. 장식이나 잡생각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지각은 사유와 불가분의 관계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서로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다. 사유와 관찰을 재통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사유와 그 정의에 관한 개념을 확장한다. 루트번스타인에 따르면 예술에 조예가 깊은 과학자들이 새로운 발견에 있어 분명 유리하다. 그들은 탁월한 예술 감각으로 사물과 현상에 다른 측면에서 관찰하고 놀이를 즐기며 관련성을 파악한다. 이로써 그들은 문제를 폭넓게 바라볼 수 있다. 뛰어난 사상가를 탄생시키려면 뛰어난 관찰자를 먼저 육성해야 한다.
다양한 관점으로 무장하면 다차원적 시야을 확보할 수 있다. 플랫랜드의 구처럼 기존 장벽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창의적인 가능성이 흘러넘친다.
상상력 덕분에 우리는 제한된 기존의 관점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 시각이나 접근 불가능한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타인의 이해 방식을 경험하려면 기꺼이 상상력을 통한 도약이 있어야 한다.
에티엔 펠러프랫과 마이클 콜이 설명했듯 상상력은 시각 정보의 빈틈을 메우고 파편화된 장면들을 연결해 안정적인 단일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 덕분에 우리는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다. 이미지는 곧 상상하는 행위이며 우리는 늘 그 행위에 참여한다.
경계를 나누는 장애물이자 동시에 가교 역할을 하는 문의 이중성을 생각해보자. 문은 출입인을 차단하는 동시에 그가 경계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위에서 보면 문은 평면이면서 그렇지 않기도 하다. 경첩이 있기 때문에 열릴 가능성이 있고 그를 통해 준거들을 통과시키거나 내친다. 이야기 또한 일종의 문과 같아서 그 문이 열리면 우리는 그것을 탈것 삼아 이동한다.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 속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보여주듯 이야기는 우리를 붙잡아 자유로운 공간으로 데려간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해 타인의 관점으로 보고 타인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고 타인의 경험을 내 이야기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분명히 하자면, 여기서 이야기란 단지 신비로운 설화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 틀을 만들어 그 틀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부분의 활동을 뜻한다.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견고한 형식을 부여하는 구조물을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천체와 지구의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도구가 거꾸로 루이스 멈퍼드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을 일치시키는 메커니즘"으로 변모했다.
'우리는 제대로 이해했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개념을 돌에 새기면, 우리는 반성없이 그것을 그대로 따를 위험이 있다.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망각한 적 없는 영웅 페르세우스와 달리, 인간은 질문을 멈추는 순간 메두사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한 듯 온몸이 얼어붙고, 죽은 것과 같은 상태, 방전 상태가 된다.
오랜 시간 한 가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그 일에 능숙해진다. 그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굳어지면 같은 동작을 매번 학습할 필요가 없어진다. 처음 익힐 때는 고생스럽지만 금세 제2의 본성, 즉 습관이 된다. 그러나 존 듀이가 경고했듯 이 과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른바 '가소성'이 오히려 우리를 습관의 노예로 만드는 주범이 되면서, 우리는 점차 유연성을 잃어 간다.
늘 같은 경로를 오가는 통근길은 한 사람의 세계를 축소시킨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나의 아내가 매번 다른 길로 출퇴근한다고 해보자. 이는 그녀의 인식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 새로운 길에서 그녀는 시시각각 색다른 풍경을 경험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갈 것이다. 국제상황주의 예술운동이 제안한 '데리브(derive, 표류)' 개념과 흡사하게 걷기는 목표 지향의 여정이 아니라 자유롭게 즐기듯 표류하는 여행으로 간주된다. 즉 통근길이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해가는 여정이 아닌 놀이하듯 이동하는 여행이 된다. 일상적인 것 너머의 낯선 차원으로 몸을 던지려면 우리의 시야는 열려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상상력으로 가득한 춤사위는 활발하고 생생하게 유지해야 한다. 우스꽝스러운 걸음을 걸어보는 매우 단순한 시도만으로 우리는 그렇지 않다면 보지 못했을 다른 차원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다.
서로 다른 별개의 개념들을 머릿속으로 한데 엮어 개념 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해 지평을 넓혀 나간다.
꼭두각시의 일상은 시계태엽처럼 정확히 흐른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식사를 한다. 꼭두각시는 그렇게 자신의 역할을 충직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일상은 변함없이 순조롭게 흐르는 듯했으나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는 대본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뭔가가 꼭두각시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며, 엄청난 허기를 몰고 왔다. 별것 아닌 아주 사소했던 것이 점차 그 경계를 허물며 몸집을 키운다. 그리고 꼭두각시의 모든 의식 영역에 침투한다. 아무 말도 하진 않지만 호기심을 끄는 이 방문객(애벌레)은 꼭두각시가 익숙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크게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생명이 말을 걸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너는 누구니? 이 말을 끝으로 그 생명은 몸을 반으로 접어 거꾸로 매달렸다(번데기로..). 그러자 꼭두각시가 보는 세상 또한 뒤집혔고 마음에 잔상으로 남은 질문만 계속해서 메아리쳤다. 지금껏 자신을 옭아맸던 줄의 존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철학은 놀라움과 함께 시작된다" -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사자死者와 같은 무리가 연이어 행진한다. 숨 막히는 대기를 가르는 한 줄기 불꽃, 타성을 향한 이 벼락은 매끄럽고 획일적인 '외관'들의 그럴듯한 허울을 부수고 우리가 평면적 존재가 아님을 폭로한다.
이러한 자각은 자신과 주변 환경을 성찰하는 능력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실재하는 동시에 사라질 수 있고 분리된 동시에 서로 연결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동시에 여러 다양한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기계적이면서도 개념적인 렌즈를 통해 시야를 확장해왔다. 덕분에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었고 보다 높은 차원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플랫랜드>의 구는 인정하지 않을지언정) 그 덕분에 우리 내부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우리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경험 및 상호작용. 우리를 씨줄과 날줄로 엮고 있는 사회적 직조물.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목적으로 모든 사회적 유대를 끊을 수는 있다.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상태로는 그저 부유하게 되고, 우리 존재의 본질을 이루는 것들로부터 분리될 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에 따르면 진정한 해방은 '유대로부터의 탈피'가 아닌 '진정한 결속'이다. 연결망의 끈은 계속 이어진다. 보다 많은 연대의 끈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결속을 제약이 아닌 동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항해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유럽의 탐험가들은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분리 방법을 선택했다. 길을 안내할 항해 도구에 의지해 울렁이는 3차원 세상을 평평한 격자판에 축소해 그려 넣은 것이다. 태평양 제도 원주민들이 만든 막대 지도는 위의 지도와 외관상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상 이 막대 지도는 위치 정보가 아닌 해류와 조류의 흐름을 묘사한다. 이 지도에는 바다와 하늘에 관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이 담겨 있다. 이런 지식은 대개 집단적 서사로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들의 복잡한 자연환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별과 새들 풍랑의 패턴 기단과 조류 바다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해정 생명체들, 이 모든 것이 생생하게 신호를 보낸다. 그들은 이렇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궤도, 벡터를 통해 길을 찾는다.
이제 다시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자. 존 듀이는 이 본질을 외부로부터 채워질 수밖에 없는 공허한 무엇이 아닌 "분명히 지니고 있는 힘"으로 정의했다. 즉 '발전될 잠재력'이다. 그런 힘은 안으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밖으로 뻗어나가므로 시작과 끝 지저을 확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처럼 고정된 존재도, 종료된 존재도 아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힘의 상호작용으로, 즉 벡터들의 수많은 조합으로 탄생하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변할 수 있고 변하기 쉬운 특성을 지닌다.
자녀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생명의 열망으로 태어난 아들이며 딸입니다. ... 당신은 활이요, 당신의 자녀는 이미 당신을 떠난, 살아 있는 화살입니다. - 칼릴 지브란
우리는 평면적이고 협소한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변화무쌍한, 다양하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다차원 지각 능력과 역동적 능력이 모두 필요하다. 물론 표준화도 쓸모가 있다. 그러나 타인의 기대에 따르는 태도는 좋지 않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으면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렵듯이. 서로의 차이와 고유한 우리 존재의 구성 방식을 무시하면 우리는 민첩성을 잃게 된다.
각기 모양이 다른 우리 두 발처럼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길을 스스로 개척할 때 어떤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지는지 살펴보자. 신는 이에 따라 신발 사이즈가 달라지듯이.
본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해한다는 것은 '저것'과의 관계에서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관점들을 취하고 서로 엮는다 해도 그 사이의 공간은 붕괴되지 않는다.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관점의 종결도 아니며 관점을 종결시키는 과정도 아니다. 각각의 관점이 관계 안에 새롭게 참여함으로써 또 다른 관점이 탄생한다. 관점 간의 거리는 항상 남아 있다. 미지의 공간, 상상력이 흘러나올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불완전함은 새로 발견할 것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다.
우리는 축적된 경험을 나침반 삼아 방향을 찾지만 때로는 이 경험의 무게가 여정을 짓누르기도 한다. 우리 눈의 시선의 끊임없는 움직을 통해 관점을 새롭게 하듯 사유를 촉발하고 전복하는 수단 역시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언플래트닝unflattening'을 통해 세상을 향해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된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교육 공장의 상자 안 학생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시체의 안구 같은 말간 흰 벽이 응시하는 가운데 송장처럼 색을 잃고 우주의 맥락에서 분리된다. 우리는 본래 세상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지만, 그런 유쾌한 행위는 이른바 훈육이라는 미명 하에 속박당하고 묵살당한다. 훈육은 기민하고 쉴 새없으며 대자연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얻기를 갈망하는 아이들의 감수성을 죽인다. 우리는 박물관에 전시된 시체 표본과 같이 무기력하게 책상에 앉아 있고, 꽃잎에 떨어진 우박처럼 누군가의 일방적 가르침이 떨어진다.
한 팀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데는 다양성과 차이가 중요하다. - 스콧 페이지
타인이 재단한 삶의 기준과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벗어나면 '이방인'으로 취급당하고, 부적격자로 낙인 찍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 할 필요 없다. 내 삶은 내 것이다.
[본문발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런 소리를 사장에게도 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그런 말을 해 본댔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사람이란 조금은 잘못이 있게 마련이니까.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일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햇볕에 진동하는 해변 전체가 내 뒤에서 죄어들고 있었다. 나는 샘으로 향해 몇 걸음 나섰다. 아랍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아직 내게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얼굴 위에 드리운 그늘 탓이었던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특히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 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 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하면서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무엇에나 결국은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감옥에 있으면 시간관념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나도 분명히 일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러한 것이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한나절이 얼마나 길면서도 동시에 짧을 수가 있는 것인지 나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지내려면 물론 길게 느껴지지만 날들이 어찌나 길게 늘어지는지 하루가 다른 하루로 넘쳐 나서 경계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하루하루는 그리하여 이름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어제 혹은 내일 같은 말만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피고석에 앉아서일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 있는 일이다.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 변론이 오가는 동안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마 내 범죄에 대해서보다도 나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연 양쪽의 변론은 큰 차이가 있었던가? 변호사는 두 팔을 쳐들어 올리고 유죄를 인정하되 변명을 붙였다. 검사는 양손을 앞으로 뻗치며 유죄를 고발하되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딘가 좀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조심을 하기는 하면서도 때로는 나도 한마디 참전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는, "가만있어요. 그래야 일이 잘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여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한 겁니다. 내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 보면,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얻는 데서 맛보는 흥미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검사의 변론이 나에게는 곧 따분하게 느껴졌다. 나의 관심을 끌거나 흥미를 일으킨 것은 다만 단편적인 말들, 몸짓들, 혹은 전체와는 동떨어진 한 토막의 장광설, 그러한 것들뿐이었다.
재판장이 잔기침을 하고 나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덧붙여 할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야기하고 싶었으므로 일어서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랍인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그건 하나의 의사표시라고 대답하고, 지금까지 자기는 나의 변호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변호사의 말을 듣기 전에 내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동기를 분명하게 말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빨리 좀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장내에서 웃음이 터졌다.
내 변호사의 변론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는 그런 투로 계속하면서 나에 대해서 말할 적마다 '나는'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나는 간수에게로 몸을 굽혀 그 이유를 물었다. 간수는 잠자코 있으라고 말하고 조금 있더니, "변호사들은 모두 그런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것도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 놓고 나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고, 어떤 의미로는 그가 나 대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벌써 그 법정에서 아득히 멀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내 변호사도 내겐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에 별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드리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작품해설> 중에서
예술가와 예술 작품. 진정한 예술 작품은 가장 말이 적은 작품이다. 한 예술가의 총체적 경험, 가의 생각+삶(어느 의미에서 그의 체계 - 이 낱말이 내포하는 조직적인 면은 빼고)과 그의 경험을 반영하는 작품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다. 예술 작품이 그 경험을 문학적 장식으로 포장하여 모조리 다 보여 준다면 그 관계는 좋지 못한 것이다. 예술 작품이 경험 속에서 다듬어 낸 어떤 부분, 내적인 광채가 제한되지 않은 채 요약되는 다이아몬드의 면 같은 것일 때 그 관계는 좋은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과잉 장식과 수다스러운 문학이 있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저 그 풍부함이 짐작만 될 뿐인 온갖 경험의 암시로 인하여 풍요로운 작품이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수첩 I>, 147~148 쪽
묘사하는 작품과 설명하는 작품을 서로 조화시킨다. 묘사에 그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묘사는 그 자체만으로는 멋진 것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가져다 주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한계가 의도적으로 설정된 것임을 느끼게 해 주면 된다. 이렇게 되면 한계는 사라지고 작품은 '울림'을 갖게 된다. <작가수첩> 195~196쪽
3월. 이 어두운 방에서 - 갑자기 낯설어진 한 도시의 소음을 들으며 - 이 돌연한 잠 깨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모든 것이 낯설다. 모든 것이, 내게 낯익은 존재 하나 없이, 이 상처를 아물게 해 줄 곳 하나 없이,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이 몸짓, 이 미소는 무엇과 어울리는 것인가?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다 - 다른 곳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세계는 내 마음이 기댈 곳을 찾지 못하는 알지 못할 풍경에 불과하다. 이방인, 그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이방인, 내게 모듯 것이 낯설다는 것을 고백할 것.
모든 것이 분명해진 지금, 기다릴 것, 그리고 아무것도 빠뜨리지 말 것. 적어도 침묵과 창조를 동시에 완전하게 하는 방식으로 일할 것. 그 밖의 것은 모두, 그 밖의 것은 모두, 어떤 일이 생기건 상관없다. <작가수첩 I>, 232쪽
"끔찍한 고독. 사회생활에 대한 약으로서: 대도시. 이제 이것은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사막이다. 여기서 육체는 더 이상 자랑이 아니다. 육체는 보기 흉한 살갗에 뒤덮여 숨겨져 있다. 오직 있는 것은 영혼뿐이다. ... 그러나 영혼은 또한 그의 유일한 위대함, 즉 침묵 속의 고독도 가지고 있다." <작가수첩 I>, 236쪽
"소설이란 어떤 철학을 여러 가지 이미지들로 구체화한 것에 불과하다. 좋은 소설에는 철학이 송두리째 이미지들로 변해 있다." - 카뮈의 샤르트르 <구토>에 관한 서명 중에서
"그렇다. 모든 것이 단순하다.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다. 우리들에게 헛된 수작은 하지 말라. 사형수에 대해 '그는 사회에 대한 빚을 갚게 될 것이다'라고 하지 말고 '이제 그의 목이 잘릴 것이다'라고 하라. 이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신의 운명을 두 눈으로 직시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사형수에 대한 언급
이처럼 텍스트의 암시적 지표들 속에 숨어 있는 죽음은 <이방인>전체의 주제인 동시에 그 형식을 지탱하는 창조적 충동으로 작용한다. 한편으로 어머니의 죽음과 뫼르소의 사형은 소설의 양쪽 끝, 즉 소설이 시작되기 전과 소설이 마감된 뒤에 어느 지점으로부터 '숨결' 혹은 '바람'의 모습으로 불어와서 소설의 한복판, 살인이라는 '구심점'에서 서로 만난다. 또한 그와 반대로 법정은 오직 소설의 시작에 위치한 어머니의 죽음 쪽으로만 관심을 보이며 뫼르소의 행동을 해석하고 뫼르소 자신은 오직 미래에 다가올 자신의 죽음 쪽으로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일종의 '원심력' 운동을 나타낸다. 즉 재판부와 피고는 소설의 중심인 살인사건에서 소설의 시작과 끝 쪽으로만 향하는 힘의 방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두가지 서로 상반된 힘의 운동은 서로 대칭, 균형을 이룬다. 따라서 소설의의미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기반을 둔 1부와 2부 사이의 평행 관계로부터 산출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다 "사형수"다. 삶의 긑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확신이 인간을 사형수로 만들어 놓는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 운명에 처해져 있는 것이다. 사형수는 죽음과 정대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배경이며 거울이다. 삶과 죽음은 표리 관계를 맺고 있다.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 때문에 삶은 의미가 없으므로 자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이 소설의 참다운 주제는 삶의 찬가, 행복의 찬가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이 비극적인 소설의 진정한 결론이다.
<작가연보> 중에서
"기계 문명의 야만적 횡포가 극에 달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집단자살이냐 아니면 자연과학적 성과의 현명한 사용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 <인류에게 쏟아지는 공포의 전망>,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세계의 어느 한 구석에서, 한 노동자가 탱크 앞에서 맨주먹으로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고 외치며 대항할 때, 우리들이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 1953년 동베를린에서 노동자 봉기 후 뮈튀알리테 회관에서 가진 연설 중
'워라밸' (Work and Life Balance), 러셀은 1930년대에 '워라밸'을 이야기하고 있다.
[본문발췌]
복잡하기 그지없는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은 도그마엔 언제든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 자세와 모든 다양한 관점들에 공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차분하게 숙고하는 일이다.
※ 도그마 :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
(게으름에 대한 찬양)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지표면 혹은 지표면 가까이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 놓는 일이다. 또 하나는 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다. 첫번째 종류의 일은 즐겁지 못하고 보수도 박하다. 두 번째의 일은 즐겁고 보수도 높다. 또한 이 일은 무한히 확대될 수 있어서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뿐 아니라 어떤 지시를 내려야 할지에 대해 조언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 흔히, 조직화된 두 개의 집단에서 정반대되는 두 가지 조언이 동시에 나오게 마련인데 이게 소위 정치역학이다. 이런 류의 일을 하는 데 요구되는 기능은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말과 글로써 설득하는 기술, 즉 선전에 관한 지식이다.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현대의 지식은 평균적 건강 수준을 엄청나게 진보시켰지만 동시에, 대도시를 독가스로 전멸시키는 방법도 찾아 냈으니....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엔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현대의 도시인들은 점점 더 수동적이고 집단적인 여흥, 즉 다른 사람들의 능란한 활동을 피동적으로 구경하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물론 그런 여흥도 전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교육을 통해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 폭넓은 지적 관심사들을 가지게 된 사람들의 여흥에 비하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히 푸르른 것은 오직 생명의 나무' -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
햄릿을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고의 극단적인 모델로 여기지만 오델로를 생각없는 행동을 경고하는 본보기로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르그송 같은 교수들은 실리적 인간을 추구하는 일종의 속물적 사고에 기초해 철학의 가치를 깎아내리면서 한창 때의 인생은 돌격하는 기병대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볼 때 행동이란 낭만적이고 불균형한 자기 주장만 있는 터무니없이 열정적인 충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서 나올 때 최상의 행동이 된다.
행동보다 사고에서 기쁨을 찾아내는 습관은 어리석음을 막아주고 과도하게 힘을 추종하는 현상을 방지해 주는 보호막이며 불행할 때 평온을, 근심에 싸였을 때 마음의 평화를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다.
개인적인 것에만 한정된 생활은 언젠가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보다 큰 우주를 향하여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야 인생의 비극적인 단면을 이겨 나갈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특정한 정보가 아니라 전체의 시각에서 본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지식이다. 여기에는 예술, 역사, 영웅적인 사람들의 인생 접하기, 우주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한심할 정도로 우연적이고 하루살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 특유의 것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해하고 아는 힘, 도량 있게 느끼는 힘, 올바르게 사고하는 힘을 키워준다. 비개인적인 감정과 결합된 폭넓은 인식으로부터 비로소 지혜가 솟아나오는 것이다.
개인적인 불행이든 공적인 불행이든, 의지와 지성이 상호 작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극복될 수 있다. 의지에는 악을 피하고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포함된다. 지성에는 그 악을 이해하고,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책을 찾아내고, 만일 불가능하다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벗어난 다른 영역, 다른 시대, 행성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들에는 무엇이 놓여 있나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악을 참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포함된다.
(건축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어쨌거나 내가 주장해 온 것과 유사한 '협동 조합'의 건설은 크게 볼 때 대규모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서만 가능하다. 이윤 동기만 가지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윤 추구가 경제 활동을 규정하는 한, 어린이들의 건강 및 성격과 아내들의 신경은 계속 고통받게 될 것이다..... 근심과 가난과 마찬가지로 추악함도 우리가 사적 이윤이란 동기의 노예가 되어 있음으로 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
(현대판 마이더스)
만일 내가 곤궁할 때를 대비해 100파운드를 저축해 놓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곤궁해지더라도 그 100파운드만은 쓰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 돈은 이미 내 재산으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한 것이다.
가치투자는 실제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증권을 사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1달러짜리를 50센트에 사는 식이다. 염가증권에 투자하면 "안전마진margin of safety"을 얻게 되며, 이는 실수, 부정확, 불운, 경제와 주식시장의 변동에 대비하는 완충재가 된다. 가치투자가 기계적으로 염가증권을 찾아내는 수단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심층적인 기본적 분석, 장기 투자, 위험 축소, 군중심리 억제를 강조하는 종합투자철학이다. 주식시장에는 단기 수익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사람들은 가치에 상관없이 가격이 오른다는 희망을 바탕으로 투자가 아니라 투기에 휩쓸리게 된다. 대개 투기자들은 주식을 종이쪼가리로 간주하여, 기업의 실체와 평가 기준을 무시한 채 수시로 사고판다. ... 투기자들은 단기 수익에 몰두하지만, 가치 투자자들은 손실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위험을 회피하는 투자자들은 이익 가능성보다도 손실 위험을 더 중시한다. 자본을 어느 정도 모은 사람은 대개 이익이 증가할 때 얻는 기쁨보다 손실이 발생할 때 겪는 고통이 더 크다.
시장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저울로 보는 사람들은 감정에 따라 몰려다니는 군중에 속한다. 반면에 시장을 (인기 경연이 벌어지는) 투표소로 보는 사람들은 극단으로 치우치는 시장 심리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다.
가치투자의 핵심 특성: 인내, 절제력, 위험회피.
좋은 사업이란 진입 장벽이 높고, 자본이 많이 들어가지 않으며, 고객을 믿을 수 있고, 기술 진부화의 위험이 낮으며, 성장 잠재력이 높고, 잉여현금흐름이 규모도 크면서 증가하는 사업이다. 좋은 사업은 기술혁신과 경쟁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보통주 투자의 지침으로 삼을 명확한 기준
미래의 기업 이익
기업 사이의 질적 차이. 선도기업, 대기업/중소기업, 비인기업종...
금리가 배당이나 이익에 미치는 영향
시점 선택이 매매에서 차지하는 비중. 분석을 통해서 매력적인 가격에 사는 방법이 아니라면, 시점 선택은 늘 적절한 시점에 주식을 살 수는 없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주식을 팔 때에도 이른바 기술적 신호에서 단서를 잡을 것이 아니라, 주가가 객관적인 가치기준을 초과해서 상승했을 때 팔아야 한다. ... 전통적으로 투자자들은 곤경에 처한 투기자들이 낙담하여 주식을 팔 때 용기와 인내심을 발휘하여 주식을 샀다.
우량주를 사려면 경기가 침체하고 주식시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런 때가 아니면 높은 가격에 사서 나중에 후회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강세장이 과열되는 시기를 제외하면, 이른바 수많은 '비우량주'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진정한 투자 기회를 제공한다. 수많은 비우량주는 매우 인기 없는 대상이지만, 진정한 투자자와 재능 있는 증권 분석가에게 더 합리적인 도전기회가 될 수 있다.
심각한 손실을 피해야 높은 복리 수익률을 유지할 수 있다.
증권의 내재가치를 바탕으로 건전하게 투자하라. "내재가치"란 기업을 장기간 보유할 때 얻게 되는 가치. 즉, 기업에서 장기간 걸쳐 발생하는 현금흐름의 가치로서, 즉시 되팔아서 얻게 되는 투기적 가치와는 분명히 다르다.
손익계산서와 현금흐름표의 차이가 벌어진다면, 이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다.
분석가는 증권의 내재가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특히 내재가치와 시장가격의 괴리에 초점을 두게 된다. 그러나 내재가치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정의하자면 예컨대 자산, 이익, 배당금, 확실한 전망처럼 사실로 뒷받침되는 가치로서, 인위적 조작이나 극단적 심리로 왜곡되는 시장 호가와는 다른 개념이다.
시장 요소 : 기술, 조작, 심리
미래가치 요소 : 경영진과 평판, 경쟁 여건과 전망, 규모/가격/원가의 변화
내재가치 요소 : 이익, 배당금, 자산, 자본구조, 발행 조건 등
시장은 각 종목의 가치를 그 구체적 특성에 따라 정확하고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므로, 저울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시장은 차라리 투표소라고 보아야 한다. 수많은 사람이 이성과 감정을 뒤섞어 선택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분석 요소들은 양적 요소와 질적 요소로 구분하면 편리하다. 양적 요소는 회사의 통계 자료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손익계산서와 대차대조표의 유용한 항목이 모두 포함되면, 생산, 단가, 원가, 생산능력, 수주잔고 등과 관련된 데이터도 보함된다. 이런 다양한 항목들은 자본, 이익과 배당금, 자산과 부채, 운영 통계로 분류할 수도 있다. 반면에 질적 요소가 다루는 내용은 사업의 특성, 산업에서 해당 기업이 차지하는 위치, 회사의 실물, 지리, 운영 특성, 경영진의 특성, 기업/산업/사업 전반에 대한 전망 등이다. 대개 이런 질문들은 기업의 보고서에서 다루는 내용이 아니다. 분석가는 신빙성이 천차만별인 잡다한 정보원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대체로 말해서, 철저한 분석에는 질적 요소보다는 양적 요소가 훨씬 낫다. 양적 요소는 숫자도 적고, 더 쉽게 얻을 수 있으며, 명확하고 신뢰도 높은 결론을 내리기에 훨씬 더 적합하다. 게다가 재무실적 자체가 질적 요소를 압축해서 보여주므로, 질적 요소를 상세히 연구하더라도 중요한 정보가 많이 추가되지는 않는다.
주식을 평가할 때 추세를 너무 강조하면 과대평가나 과소평가가 나오기 쉽다. 이는 추세를 미래 어느 시점까지 내다보아야 하는지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세는 평가 과정이 아주 정확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심리적이며 매우 자의적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추세가 형식상 숫자로 표현되더라도, 실제로는 질적 요소라고 간주한다.
증권분석은 예측이 아니라 주로 사실에 근거해서 가치를 다룰 때 가장 유용하다. 따라서 분석가가 쓰는 방식은 미래 예측 능력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투기자의 방식과 정반대가 된다. 물론 분석가도 미래 변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 주요 목적은 미래로부터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손실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분석가는 기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그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투자운용이란,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원금의 안전과 만족스러운 수익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런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운용은 투기다. 종목에 따라 투자인지 아닌지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가격이 투자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한 종목이 어떤 가격에서는 투자로 분류되지만, 다른 가격에서는 투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단독으로는 안전성이 부족한 종목이더라도, 여러 종목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면 투자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분산투자를 통해서 개별 종목의 위험을 낮추는 방법으로 투자의 요건을 충족할 수도 있다.
채권투자에서 신용위험 분석의 성패는 기업의 부채 상환능력 평가에 달렸다. 폭넓게 재무제표를 분석하는 것보다도 회사 전망을 노련하게 판단하는 편이 더 중요하다. '수익이 한정된 채권을 선정하는 작업은 비교적 단순해야 한다. 지금까지 회사의 이익이 이자비용보다 훨씬 많아서 회사의 현재가치가 부채를 크게 초과하는지 양적 기준을 분석하여 확인해야만 한다. 덧붙여서, 회사가 장래에도 계속 성공적으로 운영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회사가 파산할 가능성이 희박해야 한다.'
<증권분석>은 책에 담긴 구체적 지침보다도 상식이 훨씬 값지다. 상식이 주는 여러 교훈은 오늘날에도 분명히 타당하다. 특히 그레이엄과 도드의 통찰과 사고과정을 보면 피상적인 관습을 꿰뚫고 본질을 파악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증권의 가격과 수익률은 기대 위험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증권의 인기도에 따라 결정된다. (시장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우리는 이익 실적의 다른 측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는 이익추세, 최소 이익, 현재 이익이 포함된다. 각 이익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엄격한 평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요소들을 분석할 때, 매력적인 조건이 되려면 a)이익이 증가하는 추세이고, b)최근 이익이 특히 많아야 하며, c)조사가 기간 모든 해에 이자보상비율이 만족스러워야 한다. 위 세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가 부족하다고 해서 반드시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대신 이자보상비율이 최소 기준보다 훨씬 높아야 하고, 회사의 일반 요소나 질적 요소에 깊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투기 분야에서는 돈 내고 조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조언자가 진짜 실력자라면 번거롭게 조언하러 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도 비슷한 말을 했다. "롤스로이스를 타는 사람이 지하철을 타는 사람에게 조언을 듣는 곳은 월스트리트뿐이다."
부도증권투자를 포함한 가치투자에서 제기되는 근본적 질문 하나가 왜 헐값에 거래되는가? 이다. 학계에서 주장하듯이 시장이 효율적이라면, 오늘 가격이 왜 증권의 진정한 가치에 접근하는 최상의 추정치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 그레이엄과 도드는 교수였지만 이론보다는 현실을 직시하였으므로, 효율적 시장가설Efficient Makret Hypothesis(EMH)이 시카고대학에서 개발되기도 훨씬 전에 거부했다. 두 사람은 시장을 저울이 아니라 투표소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무게를 측정하는 곳이 아니라, 이성과 감정이 뒤섞여 결과가 산출되는 곳으로 보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다음 두 가지 가정을 세웠다. "첫째, 시장가격은 종종 진정한 가치에서 벗어난다. 둘째, 이렇게 벗어난 가격은 진정한 가치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투자자가 탐욕, 공포, 압박, 의심, 그리고 온갖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인 한, 감정을 극복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돈 벌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군중심리가 남아 있는 한, 홀로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역발상 투자자들에게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레이엄과 도드가 햄릿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렇게 선언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기질과 판단력의 조화를 이룬 덕에, 운명의 여신 손에 휘둘려 멋대로 소리 내는 피리가 되지 않는 사람은 복되도다." - 햄릿, 3막2장
아무리 정교하게 분석해도 주식의 매력도나 실제가치에 대해서 믿을만한 결론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개별종목에 대해서는 실적분석을 통해서 상당히 자신 있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례적인 주식의 경우에만 분석이 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일반 주식은 분석하더라도 투기에 도움이 될지 불확실하며, 무리해서 억지로 분석하면 사람들은 현옥하는 기법이 될 뿐이다.
주식분석에 걸림돌이 된 두 요소는 1) 유형자산의 안정성 상실과 2) 무형자산의 중요성 증대다.
투기주식은 1)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음, 2) 이익이 적고 불규칙함, 3) 주식이 희석됨(실제로 사업에 투자된 자본보다 주식발행량이 지나치게 많음)
우량주식은 1) 계속해서 배당금을 지급함. 2) 이익이 상당히 안정적이고 평균적으로 배당금보다 훨씬 많음. 3) 실제로 사업에 투자된 자본이 주식의 시장가치보다 많음.
과거의 주식투자의 세 가지 기본 개념 1) 적절하고 안정적인 배당수익률, 2) 적절하고 안정적인 이익 실적, 3) 충분한 유형자산.
새 시대의 투자이론, 이익추세....
새 시대 이론을 받아들인 투자신탁 원칙... 1) 불황기에 저가로 사서 호황기에 고가로 판다. 2) 여러 분야와 여러 국가에 걸쳐 분산투자한다. 3) 종합적이고 전문적인 통계조사를 바탕으로 저평가된 개별종목을 발굴하여 사들인다.
안전마진 원칙에 의한 종목선정
전반적인 시장 등락을 이용하는 기법... 1900년 이후 주가가 너무 높거나 낮은 모습이 거듭 나타나므로,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사서 나중에 가치보다 높은 가격에 팔 기회가 되풀이되는 셈이다. 가장 간단한 투자방법은 과거 시장 등락의 대략 중간 지점을 잇는 직선을 그은 다음, 이 직선 아래에서 매입하여 직선 위 어느 지점에서 매도하는 것이다. 아마 이 "시스템"도 다른 기법만큼 현실적이지만, 더 과학적인 기법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시스템은 다음과 같이 다듬을 수 있다. 1) 선도업종 주식으로 잘 분산된 포트폴리오를 구성한다. 2) 현행 장기금리를 바탕으로 평균이익을 자본화하여 "정상" 가치를 산출한다. 3) 이 정상가치의 일정 비율 밑에 매수 지점을 설정하고, 일정 비율 위에 매도지점을 설정한다. (매수와 매도 규모를 점진적으로 축소하거나 확대할 수도 있다.) 이런 기법에는 타당한 논리가 들어 있다. 오랜 역사를 돌아보아도, 시장이 침체했을 때 사서 대중이 낙관할 때 팔아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법 어딘가에 문제가 있음을 곧 눈치 챘을 것이다. 결함이 무엇일까? 이 기법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시장 흐름의 일반 패턴은 예상할 수 있지만, 매수 지점과 매도 지점 설정은 트릴 수 있으며, 시장이 극단으로 치우칠 때 거래 기회를 놓칠 수 있다. 둘째, 시장 흐름은 언제든 크게 바뀔 수 있으므로, 과거에 효과를 발휘했던 기법이 가치를 상실할 수 있다. 셋째, 이 기법을 실행하려면 불굴의 용기가 필요하다. 대개 심리적으로 사고 싶을 때 팔아야 하고, 팔고 싶을 때 사야 하며, 산 다음 주가가 떨어지는 모습이나, 판 다음 주가가 더 오르는 모습을 장기간 지켜보아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단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불굴의 용기를 갖춘 사람에게는 추천할 만한 기법이다.
저평가 증권 발굴 기법... 거래가격보다 가치가 훨씬 높은 것으로 분석되는 종목을 사는 방법도 있다. 질적인 요소가 모두 만족스러운 동시에 이익, 배당금, 자산 등 양적 요소에 비해서도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주식은 드물다. ...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질문은, 양적 기준으로 싸면서도 미래 전망이 평균 수준에 이르는 주식에 투자할 수 있느냐이다. 이런 주식은 비교적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성장전망이 이례적으로 좋은 기업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이 이렇게 성장요소를 강조하는 탓에, 역사도 유구하고, 재정도 건전하며, 산업이 선도기업이고, 미래에도 계속 존속하면서 끝없이 이익을 벌어들일 기업인데도, 투기적 매력이나 성장 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시장에서 차별받아, 사업가가 비상장기업을 살 때 치를 가격보다도 낮게 거래되는 주식이 매우 많다.
주식시장은 저울이 아니라 투표소다. 미래 주가는 건전한 예측의 영역이 아니다. 가격이 잘못되면 최고의 기업을 사도 투기가 될 수 있다. 수익력이 유지될지 평가하려면 사업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는 말하기는 쉬워도 실행하기는 어려운데, 인간은 본성상 남들과 함께 가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투자와 투기는 구분해야 한다. 경영자가 부도덕한 회사에는 절대 투자하지 마라. 이익에서 일회성 항목은 빼야 한다. 자본구조에서 부채비율을 높이면 수익률도 높아지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시장은 먼저 오른 다음에 이유를 찾는다.
투자 이론에서 수익력 개념은 명확하고도 중요하다. 이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장기간의 실제이익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리라는 기대를 나타낸다. 이런 실적은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야 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실적은 한 번 나타날 때보다는 거듭 나타날 때 더 인상적인 법이고, 둘째, 장기간에 걸친 평균 실적을 사용하면 경기순환이 미치는 왜곡 효과를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멋대로 흩어진 숫자들을 단순히 계산해서 나온 평균과, 연간 실적이 확실히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는 최빈치 성격의 평균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전환사채, 주식 매입 선택권, 기타 참여특권 등으로 희석될 수 있는 주식의 내재가치는, 이런 권리가 모두 행사되었을 때 산출되는 가치보다 높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이 <증권분석>을 읽고 존중한다면, 그 원칙을 실천하는 사람은 왜 이렇게 적을까? 나는 인간의 세 가지 본성 때문이라고 믿는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며, 탐욕을 부리는 세 가지 본성 말이다.
긴 시간을 들여 세심하게 분석해도, 대규모로 투자할 만큼 명확한 결론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따분함을 무릅쓰고 수많은 회사를 조사해 보아도, 대부분 특별하지도 않고 크게 저평가 상태도 아니다. 투자를 신중하게 해놓아도, 주가는 늘 제자리걸음인 듯하고 심지어 하락하기도 한다. 이는 회사이 가치가 1년 52주, 매주 5일, 매일 6.5시간씩 주가로 나타나 잦은 매매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합리적 투자로 가는 두 번째 과제는, 주식시장이 극도로 우울해지거나 도취감에 휩싸이더라도 자신의 논리적 확신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비상장회사 소유주들은 단기적인 기업가치 등락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장회사 주식 투자자들은 전혀 달라서, 주가가 오르면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주가가 내리면 자신이 바보라고 생각한다. 투자한 회사가 고전하거나 주가가 연거푸 하락하면, 우리 회사에서는 일단 투자할 때 세웠던 논리적 근거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자신을 의심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면, 한때 기회로 보였던 모습이 재앙으로 돌변한다. 그레이엄과 도드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다. "대중의 유행에 거슬러서 생각하고 행동하려면 강인한 성품이 필요하고, 몇 년 걸릴지도 모르는 기회를 기다리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세 번째 과제는 항상 투자자들의 행동을 왜곡하는 탐욕을 극복하는 일이다. 헤지펀드가 급증하는 모습을 보면, 특히 요즘 시장에 탐욕이 넘친다. 헤지펀드투자자들은 최근 인기 펀드매니저를 붙잡으려고 이 펀드 저 펀드로 계속 갈아탄다. 펀드매니저들은 높은 보수를 얻으려고 "단기 대박" 트레이딩 전략을 추구한다. 투자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워도 높은 수익률을 약속하면 열광하므로, 펀드 실적이 좋아지면 더 많은 자금이 몰려든다.
투자자들은 이 펀드에서 저 펀드로 재빨리 갈아타고, 헤지펀드매니저들은 매달 홈런을 날리려고 안감힘을 쓴다. 나는 전미 오픈 골프 선수권대회에 가본 적이 있는데, 가까이에 내가 모르는 헤지펀드매니저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내내 사업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순전히 운용자산 규모와 보수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
요즘 대중은 단발적인 데이터, 수시로 바뀌는 최근 경기전망, 최근 조사보고서에 실린 의견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정보가 넘침으로 사람들은 주식을 신속하게 사고팔며, 스스로 열심히 분석하여 결론을 내리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수익률을 과감하게 부채를 끌어다 쓰는 수많은 사람을 "트레이더"나 "투기자"로 불러야 할 듯한다. 이런 방식에서는 잦은 매매에서 거래비용을 차감하고서도 이익을 내야 하며, 장기 투자자보다 훨씬 높은 자본이득세를 내야 한다. 이들은 감정이 상하고 찢어지는 값비싼 대가도 치러야 한다.
훌륭한 기업에 투자하면 마음 편하게 휴가를 보내거나 가족생활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확신도 없이 수많은 거래를 해야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부채를 쓰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기법은 언젠가 크게 실패하기 쉬운데, 고객의 돈에 자기 돈까지 태워서 투자하는 사람들은 이런 위험을 감당하기 어렵다.
대체로 유동자산가치가 장부가치(유동자산가치+고정자산가치)보다 더 중요하다.
유동자산가치는 청산가치를 개략적으로 알려주는 지표다.
유동자산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주식이 많다. 이는 청산가치보다도 낮게 거래된다는 뜻이다.
많은 주식이 계속해서 청산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현상은 본질적으로 불합리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심감한 잘못이 있다는 뜻이다. a) 시장의 평가 오류, b) 경영진의 정책 오류, c) 주주들의 잘못된 태도.
시장이 증권을 평가하는 과정은 비합리적이고 잘못된 경우가 많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는 기계적 과정이 아니라 증권을 사고파는 사람들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리과정이다. 따라서 시장에서 발생하는 실수는 집단이나 개인들이 저지르는 실수다. 대부분 실수를 일으키는 원인은 세 가지로서, 과장, 지나친 단순화, 무지다.
분석을 통해서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사례는 흔치 않으므로, 많은 종목을 분석해야 유망한 종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종목을 발견하려면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체계적으로 열심히 분석해야 한다. 분석가가 쓰는 기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앞 챕터에서 설명했듯이, 기업들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비교분석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각 집단의 표준 속성을 파악할 수 있으며,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는 기업들을 찾아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철강회사 보통주의 주가 대비 이익 비율이 업종 평균의 두 배로 드러난다면, 이 회사의 주요 질적/양적 요소들을 철저하게 조사할 수 있다. 이 기법은 채권과 우선주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법정관리 철도회사 채권을 고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위가 비슷한 법정관리 철도회사 채권 10여 종을 모아서 실적을 비교분석하는 것이다. 또는 공익회사 우선주 중에서 종목을 선정한다면, 1) 배당금+이자 보상비율, 2) 주가 대비 가치 비율, 3) 주가와 수익률을 비교분석할 수 있다. 이렇게 간단히 유형별로 분석하기만 해도 평균보다 안전하면서도 수익률이 높은 종목이나, 실적과 비교해서 가격이 지나치게 높은 종목을 가려낼 수 있다.
둘째, 기업보고서를 정밀하게 조사하여 그 회사 주식이나 채권의 시장가격과 비교분석하는 방법이다. 이런 기업보고서의 요약자료는 여러 일간신문에 실린다. 더 종합적인 자료는 금융서비스 회사에서 제공하는 일일 기업보고서 자료나, 주간지인 <커머셜 앤드 파이낸셜 크로니클>에서 찾을 수 있다. 기업보고서 100개 정도를 훑어보면 이익이나 유동자산 측면에서 흥미로운 기업이 5~10개 나타나므로, 이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면 된다.
시장분석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있다. 첫째는 과거 주가 자료만을 바탕으로 시장을 예측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경기현황, 이자율, 정치전망 등 온갖 경제 요소들을 모두 고려하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시장 움직임도 수많은 요소 가운데 하나로 간주한다.) 첫째 방법을 잘 요약하는 말이 "시장예측은 시장이 가장 잘한다."라는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시장 움직임은 개별종목이나 평균주가의 움직임을 차트에 표시하여 분석한다. 주로 주가 움직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을 "차티스트"라고 부르며, 이들이 하는 작업을 "차트 분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시장분석은 시장 움직임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아, 증권 분석까지 결합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일반경제지표가 보완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할 여지가 많아서, 시장 움직임을 나타내는 기술적 지표들을 해석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런 지표들을 외부 요소들과도 대조해야 한다. 그러나 시장분석기법으로 가장 유명한 "다우 이론"은 시장 움직임만 분석한다.
차트 분석의 의미
차트 분석은 과학이 될 수 없다. 차트 분석이 과학이라면, 규칙에 따라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그러면 누구나 내일의 주가를 예측할 수 있고, 따라서 누구나 정확한 시점에 주식을 사고팔아 계속 돈을 벌 것이다.
차트 분석은 확실하게 이익을 내는 방법임을 지금까지 입증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성공할 수 없다.
차트 분석의 이론적 근거는 논리가 잘못되었거나 단순한 주장에 불과하다.
차트 분석의 이론적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시장 움직임은 이해 관계자들의 활동과 태도를 반영한다. 2) 따라서 시장의 과거 움직임을 분석하면 시장의 미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 ... 이 가정은 옳을지 몰라도, 이 결론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차트 분석이 인기를 얻은 것은 단순한 투기보다 장점이 있기 때문이지만, 이런 장점도 차트 분석자들이 증가하면 감소하게 된다.
증권분석은 시장분석보다 장점이 많아서, 지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성공하기 더 쉬운 분야다. 증권분석에서는 예기치 않은 사건에 대비하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안전마진을 확보하여 위험에 대비한다. 그러면 우리가 투자한 증권이 생각했던 것보다 매력이 떨어지더라도, 여전히 이익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시장분석에는 안전마진이 없다. 맞든지 틀리든지 둘 중 하나인데, 틀리면 손실이 발생한다. 손실은 짧게 끊고 이익은 길게 가져가라는 시장분석의 원칙을 따르다 보면, 거래가 빈번해진다. 이는 거래비용이 실적에 큰 부담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증권분석의 원칙을 따르면 빈번하게 거래할 필요가 없다. 세 번째로, 시장분석은 본질적으로 두뇌싸움이기 때문에 불리하다. 트레이딩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대부분 다른 트레이더를 희생시켜서 얻는 돈이다. 트레이더들은 활발한 종목을 선호하는데, 이런 종목의 가격변동은 수많은 트레이더가 빈번하게 매매한 결과다. 시장 분석가는 다른 시장 분석가보다 더 똑똑하거나 운이 좋은 경우에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반면에 증권 분석가는 다른 증권 분석가와 경쟁 관계가 아니다. 자신이 분석해서 사는 종목을 다른 증권 분석가가 애써 분석한 다음 파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증권 분석가는 시장 분석가보다 다루는 종목이 훨씬 많다. 이렇게 많은 종목 가운데서 시장의 무관심이나 과민반응 때문에 내재가치보다 훨씬 떨어진 종목을 고른다. 시장분석이 증권분석보다 더 쉽고, 단기간에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장기적으로 더 실망하기 쉽다. 월스트리트든 다른 어떤 곳이든, 쉽고 빠르게 돈 버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증권가에 나오는 분석과 조언 대부분은 기업의 단기전망에 근거한 내용이다. 사람들은 이익이 증가할 전망이면, 실제로 이익이 증가할 때 주가도 상승할 것이므로 주식을 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추론방식은 증권 분석가나 시장 분석가나 똑같다. 이들은 시장 전망이 사업 전망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로 단기전망이 좋다는 이유로 주식을 산다면, 투기 종목을 고르기 십상이다. 문제는 현재 주가에 미래 전망이 이미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전망은 실제 이상으로 낙관적인 경우가 많다. 내년 이익이 증가하리라는 기대로 주식을 산다면, 두 가지 위험을 떠안게 된다. 첫째, 내년 실적전망이 틀릴 수 있다. 둘째, 전망이 맞더라도, 이 전망이 현재 주가에 그 이상으로 반영되었을 수 있다.
소액 투자자의 투자 정책에 대한 견해
고정수익투자. 현재 상황에서 개인이 안전하게 소득을 확보하는 유일하게 합리적인 투자는 미국저축채권을 사는 방법이다. 다른 투자상품은 수익률이 더 높지도 않을뿐더러, 이 상품만큼 손실을 방어해주지도 못한다. 일반 채권과 우선주가 겉으로는 수익률이 높아 보이지만, 확실히 그만큼 위험도 많다. 다양한 저축제도와 판매직원들이 권유하는 증권에는 함정이 많다. 수익률이 높다는 이들의 설득에 넘어가서 미국저축채권 대신 그런 상품을 선택한다면, 나중에 후회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매매차익 획득
장기 기준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시장이 분명히 침체했을 때 대표적인 우량주를 산다. 이 방법에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심각한 착오를 저지를 위험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좋은 실적을 올리는 방법이다.
성장 가능성이 큰 개별종목을 실적과 비교해서 합리적인 가격에 산다. 성장전망이 밝은 종목은 가격이 합리적일 때가 드물다. 소외된 종목 중에서 성장전망이 밝은 종목을 발굴하면,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이 전망이 틀리면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안전성 높은 선순위증권을 산다. 매우 안전하면서 전환가치도 높은 종목은, 드물긴 하지만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인내력과 끈기를 갖춘 투자자라면 이런 종목을 발굴하여 좋은 실적을 올릴 수 있다.
내재가치보다 훨씬 싼 증권을 산다. 내재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에는 과거 이익과 유동자산가치뿐 아니라, 보수적으로 추정한 미래 수익력도 포함된다. 오늘날 보통주 대부분이 인기를 상실하여 미래 수익력 기준으로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하므로, 분별력 있는 투자자에게는 정말로 좋은 기회다. 채권, 우선주, 보통주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다.
투자자는 자신이 원하면 투기자가 될 권리도 있다. 또한 나중에 후회할 권리도 있다. 투기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성공확률도 재각가이다.
작고, 느리고 단순한 삶! 그 속에 여유가 있고, 여유 가운데 주변을 둘러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친밀감을 형성하고 현재를 즐길 수 있다.
[본문발췌]
감정은 "설명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 - 곰돌이 푸
'휘게'는 사물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정취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느낌과 관련이 있다. 집에 머무는 느낌, 안전한 느낌,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 그래서 긴장을 풀어도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이때 우리는 삶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끝없이 대화를 이어가거나, 서로 아무 말 없이 안온한 기분에 휩싸이거나, 아니면 혼자서 조용히 차 한 잔을 음미하게 된다.
국내총생산(GDP)은 어린이들의 건강과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감안하지 않는다. 국내총생산은 시의 아름다움이나 결혼의 영향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공개토론에서 다뤄지지 않는 주제들이나 공무원들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요컨대 국내총생산이 측정하는 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 로버트 케네디
의외로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회적 지지'다.사회적 지지는 간단히 말하자면 어려운 시기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 좋은 대인관계는 행복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거꾸로 행복한 마음 덕분에 좋은 대인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휘게는 간소한 것, 그리고 느린 것과 관련이 있다. 휘게는 새 것보다는 오래된 것,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 자극적인 것보다는 은은한 분위기와 더 가깝다. 여러 면에서 휘게는 '느리고 단순한 삶'의 덴마크인 사촌이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잠옷을 입고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는 것, 좋아하는 차를 마시면서 창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것, 여름휴가 기간에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모닥불을 피우는 것 모두 휘게다. 단순함과 겸손함은 휘게의 중요한 미덕일 뿐만 아니라 덴마크의 디지안과 문화 전반의 미덕이기도 하다. 덴마크의 디자인은 단순함과 기능성이 매우 뛰어나다.
휘게는 삶의 단순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
좋은 분위기나 유대감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바쁠 때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휘게할 수 없다. 친밀감을 형성한다는 것은 시간을 들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과 뭔가를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휘게는 돈을 더 많이 소비함으로써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된다고 할 수 있다. 휘게는 시장 자본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개인의 행복에는 매우 좋은 영향을 끼친다. 휘게는 삶의 가장 단순한 것에서 느끼는 기쁨이며 거의 아무런 비용 없이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휘게는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데서 오는 소박한 즐거움의 순간을 누리는 것이다.
휘게는 현재를 만끽하는 것이며 현재로부터 최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무언가를 만끽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감사함이란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음을 유념하고, 그 순간에 집중하며, 현재 누리는 삶을 감사히 여기고, 가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돌보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 뿐만 아니라 남을 기꺼이 돕고자 하는 마음도 더 크며 또한 덜 물질적이라고 한다.
연구 결과 감사하는 마음은 심리적, 신체적, 사회적으로 유익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 일기를 적은 사람들은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향상되었고, 어떤 일을 할 때 열의를 갖고 임했으며, 숙면을 취했고, 면역력의 강해졌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도 더욱 빨리 알아차렸다.
인간의 감정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물이나 현상, 특히 긍정적인 사물이나 현상에 빠르게 적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똑같은 사고방식에 갇히는 일을 경계하고 감사해야 할 새로운 일들을 계속해서 떠올려야 한다.
휘게는 단순한 즐거움을 만끽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휘게를 실천한다면 우리가 매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휘게는 현재를 최대한 만끽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의 행복을 계획하고 과거의 행복을 추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휘게 10계명>
분위기. 조명을 조금 어둡게 한다.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충실한다. 휴대전화를 끈다.
달콤한 음식. 커피, 초콜릿, 쿠키, 케이크, 사탕. 더 주세요!
평등. '나'보다는 '우리'. 뭔가를 함께하거나 TV를 함께 시청한다.
감사. 만끽하라, 오늘이 인생 최고의 날일지도 모른다.
조화. 우리는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당신을 좋아한다. 당신이 무엇을 성취했든 뽐낼 필요가 없다.
편안함. 편암한을 느낀다. 휴식을 취한다. 긴장을 풀고 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휴전. 감정 소모는 그만. 정치에 관해서라면 나중에 얘기한다.
화목. 추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관계를 다져보자. "기억나? 우리 저번에..."
보금자리. 이곳은 당신의 세계다. 평화롭고 안전한 장소다.
행복했던 순간에는 늘 누군가 함께 있었다.
덴마크 사람들이 휘겔리한 저녁을 준비할 때 구성원 모두가 일을 평등하게 분담한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인 혼자 부엌에서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보다는 모두가 각자 자기 몫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더욱 휘겔리하다.
유엔자문 기구가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기본적인 생활 요건을 갖추는 것이 우선적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생활 요건이 충족된 후에는 행복은 소득보다는 인간관계의 질에 더욱 크게 좌우된다."고 한다.
놀이. 우리는 어렸을 때는 놀이를 사랑하지만 어째서인지 어른이 되면 놀이를 그만둔다. 어른이 되면 삶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바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린스턴대학교의 경제와 사회 문제학과 앨런 크루거 교수가 이끄는 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는 여가활동을 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어른들이 문제점은 어떤 활동을 할 때 그 결과와 목적에 너무 연연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일을 하고, 몸무게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헬스클럽에 가며, 인간관계는 확장하고 출세하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을 만난다. 그저 재미있기 때문에 뭔가를 하던 시절은 어디로 갔을까?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 자체가 너무 오래 되었다면 '공부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속담을 떠올려보자.
휘게는 여러 가지 책임을 짊어지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 어른들을 너그럽게 안아준다. 좀 여유를 갖자. 잠시만이라도 말이다. 휘게는 단순한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하고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이라고 안심시켜준다.
부정적인 감정이 없는 상태보다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 삶의 만족도 측면에서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행복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커다른 행운이 아니라 매일 발생하는 작은 친절이나 기쁨 속에 있다." - 벤자민 플랭클린
자존감, 정체성,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누군가는 고통이다.
[본문발췌]
도대체 '병의 본질'이라든가 '새로운 병'이란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의사는 자연학자와는 달리 다양한 생명체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을 이론화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 아이비 맥킨지
P선생이 장갑을 장갑으로 보고 판단할 수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비록 인지적인 가정은 잘했지만 인지적인 판단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판단이란 것은 직관적이고 개인적인 동시에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접할 때 그것을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 P선생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보는' 능력 즉 관계를 짓는 능력이었다.
물론 뇌는 하나의 기계이자 컴퓨터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고전 신경학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할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 판단이나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을 등한시하고 완전히 추상적이고 계량적으로만 변해가는 과학이 장차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경고 말이다.
우리는 다리나 눈을 잃으면 다리가 없고 눈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 사실 자체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을 깨달을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물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너무도 단순하고 친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늘 눈앞에 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법이다. - 비트겐슈타인
'상실' 즉 기능적 결함에만 주목하는 한 그것이 지극히 편협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능의 과잉도 있을 수 있다면, 결손에만 주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기억상실증뿐 아니라 기억과다증도 있는 것이다. 인식불능증과 반대하는 인식과다증도 있다. 이밖에도 '과다현상'은 얼마든지 많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갖가지 건강 상태 사이를 왔다 갔다 했고 지금도 그것을 계속하고 있다. 병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 없다고조차 말할 수 있다. 지독한 고통을 극복했을 때야말로 정신은 궁극적으로 해방된다." - 니체
우리는 각자 오늘날까지의 역사, 다시 말해서 과거라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연속하는 '역사'와 '과거'가 각 개인의 인생을 다룬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생 이야기, 내면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이야기에는 연속성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전기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 자신을 통해, 우리들 안에서 즉 지각, 감각, 사고,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무의식중에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물론 입으로 말하는 이야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로서 우리 모두는 각각 고유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지금까지의 이야기인 내면의 드라마를 재수집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 편의 이야기 즉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감히 말한다면.... 우리는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차례차례 이어지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흘러간다.', 흄의 생각대로라면 개인의 정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각 혹은 지각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인간은 그저 계속해서 변화하기만 하는 감각의 집합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해 통일을 유지하는 확고한 존재이다. 그러나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처럼 불안정한 존재의 경우에는 흄의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분명히 그들의 생활은 어느 정도 왔다 갔다 하는 발작적인 지각과 움직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알맹이를 이루는 이성도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영처럼 동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흄이 말한 거품과도 같은 존재이다. 철학적 신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자아가 충동에 의해 압도당하는 경우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다. 충동에 압도당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적인 운명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프로이트적인 운명의 경우에는 비극적이기는 해도 이성(의식)이 존재하는 반면에 흄적인 운명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진정한 인간, 어디까지나 '개체' 다운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충동과 싸워야 한다. 투렛 증후군 환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무시무시한 장벽에 직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야말로 '경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들은 싸움에서 승리한다. 살아가는 힘,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의지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충동이나 병보다도 강하다. 건강, 싸움을 겁내지 않는 용맹스런 건강이야말로 항상 승리를 거머쥐는 승리자인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환영이 하찮고 꺼림칙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지고한 황홀감에서 나오는 영감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예를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간질 증세가 있던 그는 황홀감에서 나오는 아우라를 자주 경험하곤 했다. 그에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경험이었다. '불과 5, 6초밖에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영원한 조화와 존재를 느낀다. 놀랍도록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를 황홀경에 휩싸이게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다. 만약 이러한 상태가 5초 이상 지속된다면 우리의 영혼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고 소멸될 것이다. 이 5초 동안 나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전체를 산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내 모든 생명을 걸수도 있을 것이고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것이다.'
자연 만물의 본래 모습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오히려 반대이겠지만, 신경학자들은 '구체성, 구체적인 사상'을 열등하고, 고려할 가치가 없고, 통일성이 결여되었고, 퇴보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체계화, 조직화에 관한 한 당대 제일인자로 불렸던 쿠르트 골드스타인 등은 인간의 정신에 추상화와 분류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단 뇌에 손상을 입으면 인간은 고상한 영역으로부터 인간적이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차원 낮은 '구체성'의 수렁으로 내동댕이쳐진다고 생각했다. 만일 인간이 '추상적, 범주적 태도' (골드스타인) 혹은 '명제적인 사고력' (휴링스 잭슨)을 잃으면 도리없이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며, 중요성도 없고 관심의 대상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구체성이야말로 기본이다. 현실을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것으로, 개인적이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구체성'이다. 만일 '구체성'을 상실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철학자는 우주에 내재한 교향곡의 메아리를 자기 내부에서 들은 뒤, 이를 관념의 모습으로 뒤바꾸어 다시금 외부세계로 투사하려는 사람이다." - 니체
인간의 영혼은 그 사람의 지능이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물리학자나 수학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여기서 말하는 조화의 감각이 주로 지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지적이라고 해서 감각적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감각이 전혀 뒤섞이지 않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각(sense)이란 단어는 항상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감각적'(sensible)이란 단어는 '개인적'(personal)이란 뜻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과 어떤 점에서든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폐증 환자는 원래 좀처럼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립적으로 살아갈 '운명'에 놓인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에게는 독창성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들의 내면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들의 독창성은 내부에서 생긴 것,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완전히 내부로 향하는 존재, 독창성이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라를 생각이 강하게 든다.
성공의 비밀은 좀더 특별한 곳에 있다. 모츠기는 이 지능 낮은 예술가를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기로 했다. 상대를 위해서 몸을 내던지는 헌신,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모츠기는 이렇게 말했다. "야나무라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서 내가 한 일은, 그의 영혼을 내 영혼으로 여기는 일이었다. 교사는 아름답고 정직한 저능아 학생을 사랑하고, 그들의 밝은 세계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 C. C. 파크, <나디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