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흐르기 시작한 발원지에서 강을 거쳐 바다에 이르면 강의 생명은 끝나는 것 같지만, 바다에 합쳐져 순환의 다른 고리로 넘어간다.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지만, 순환을 통해 다시 발원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삶도 거스를 수 없이 흘러가 생을 마감하지만, 여러 흔적으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기도 하고 어떠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해도 존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기에 즐겁게 살다가 가뿐하게 죽을 뿐!
[본문발췌]
키르케고르가 말했듯이 삶은 뒤돌아봐야만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앞을 보며 살면서,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향하여 살아가야 할지라도 말이다.
카를로 미켈슈테터가 썼듯이, 확신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인격을 늘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순간을 빨리 태워버리려 하고, 가능한 한 빨리 올 미래의 시각에서 순간을 사용하며, 삶이 송두리째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매 순간을 파괴하고자 하는 미친 듯한 열망에 흔들리지 않고, 매 순간을 깊이 있게 사는 능력이 확신이다. 확신 없는 사람은 언제든 올 것 같은데 결코 나타나지 않는 결과를 기다리며 자신의 인격을 허비한다. 현재의 어려운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독감이 떨어지기를, 시험에 합격하기를, 결혼식을 올리거나 이혼 도장을 찍기를, 일이 끝나기를, 휴가가 오기를, 의사의 진단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계속 무화되는 결핍, '없음deesse'으로서의 삶인 것이다.
목숨이 최상의 가치는 아니며, 목숨보다 더 가치 있는 무엇, 해처럼 삶을 밝고 뜨겁게 만드는 무엇을 위해 헌신할 때 삶이 더 사랑스럽고 유쾌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두려움 없이 그들이 조용히 죽음을 맞았던 것은, 이 세상의 원칙이 이미 심판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 확신의 윤리와 책임의 윤리 사이의 딜레마는, 단지 제3제국의 독일에서만 여러형태로 위장되어 나타난 게 아니다. 우리의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가치체계들 사이의 모순들은 아직도 극복되지 못했다고 막스 베버는 진단했다.
일반적인 세상 법칙과 경제의 객관적인 숫자, 그러니까 생산, 실업, 평가절하, 물가, 봉급 등의 숫자가 진짜 주인공들이 된다. 그것들은 환영에 불과하지만 고대 비극의 폭군들처럼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실질적으로 협박한다.
토마스 만이 말했듯, 삶을 부정한 모든 책은 삶을 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한다.
분명한 것은, 강은 그 강을 따라가는 사람처럼 하류로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흘러와 섞이는 물이 어디서 왔는지 밝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가계도 100퍼센트 순수 혈통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의 뇌로 흘러들어오는 수많은 이질적인 것은 일일이 분명한 출생증명서를 보여줄 수 없다. 그러므로 강이 어디서 왔으며 진짜 이름이 인 강인지 아니면 다뉴브 강인지 혹은 어떤 다른 강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디로 가며 어떻게 끝날지는 안다.
많은 걸 겪었어도 이룬 건 하나 없어라. 즐겁게 살다 가뿐히 죽었네. - 페르디난트 자우터의 묘비명.
그는(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본질적인 것들, 최후의 것들을 숭배했다. 사람은 그 사람이 믿는 가치로 형성되고, 그가 믿는 가치들이 고귀한가 아니면 저속한가하는 표시가 그의 얼굴에 찍힌다는 것을, 황제는 알고 있었다. 영혼은 그 영혼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들로 염색되며, 각자의 가치는 각자가 중요성을 두는 가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번뜩이는 직관이며, 인간의 역사와 천성을 읽는 중요한 열쇠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 우리가 우리 정신 안에 살게 한 신들이다. 숭고하건 미신적이건 이 종교는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만들고, 우리 모습과 몸짓에 새겨지며, 우리의 존재방식이 된다.
내 모든 힘이 다하고 / 나는 늙고 약해졌도다. / 죽음이 내 방문을 두드리는구나. / 나 두려움 없이 문을 여노라. / 하늘이여, 감사를 표합니다! / 내 삶은 / 한 편의 조화로운 노래였구나.
신학자는 명확하게 밝히고 싶어하고 법을 만들고 싶어하고 우주 만물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정의하고 싶어한다. 법보다는 삶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코드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발적인 창조성의 편에 서는 것이 더 매력적이다. 그러나 시는 형식 없는 모호함보다는 단테의 3행시에서 더 진가를 나타낸다. 도덕적인 창조성은 법을 찾고 자유롭게 세울 수 있는 능력이다. 삶의 모순들의 흐름 안에서 질서를 만드는 힘만이 그 모순들에 정당성을 준다. 모순이 지나치게 왜곡될 때가 있는데, 우리가 모순 안에서, 그 흔들리는 불명확성 안에서 존재의 숭고한 진실을 보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고를 무시한 채 그 모순을 정신의 활동으로 착각할 때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라는 철학의 이름으로 모든 제스처와 행동을 같은 면 위에 올려놓고 혼합할 때, 판단은 흐려지고 생명력 자체는 거짓과 섞여 시들게 된다. 법의 의미와 엄정함은, 열정을 억누르는게 아니라, 열정에 힘과 현실성을 준다.
과거에는 미래가 있다. 미래를 바꾸는 변화가 있다. 현실이 그렇듯, 현실을 살아가고 현실을 바라보는 나 역시 복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30년 전 그 서사적인 기사들에 표시된 장소들을 따라가면서, 보이지 않는 얇은 막들을, 여러 다른 현실이 켜켜이 쌓인 층들, 맨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여전히 현존하는 것들을, 역사의 적외선이나 자외선, 필름 감광판에 와닿을 수는 없지만 늘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이미지와 순간들을, 만질 수 없지만 예민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전자들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이미지와 순간들을, 벗겨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강은 수원으로 되돌아간다. '검은 바다'라는 거창한 이름의 흑해 하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인생의 입구가 아닐까? 아마 모든 여행은 자신의 얼굴을 찾아, 무에서 자신의 얼굴을 불러낸 창조주의 의지를 찾아 기원으로 떠나는 건지도 모른다. 여행자는 반복해서 자기를 우리 속에 집어넣는 현실의 압박을 피해 자유와 미래, 다시 말해 아직 열려 있고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는 미래, 삶이 아직 그 앞에 있었던 어린 시절, 고향집을 찾는다.
인생은 시간이 소멸, 고장 나기 쉬운 기계 같다. 삶을 재는 시계처럼, 현실은 늘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몽타주의 연쇄, 영원히 반복되는 조직체, 톱니바퀴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톱니바퀴가 맞물려들어가는 상호작용을 사랑하고, 멀리 섬 여행을 떠나는 것에 마음이 들뜰 뿐만 아니라, 여권 발급에 관계된 행정 수속에도 마음이 들떠야 한다. 일상의 일반적인 이 동원을 싫어하는 강한 신념은, 무언가 다른 것, 삶보다 위대한 무언가를, 휴식시간에도, 단전 때에도, 메커니즘이 멈췄을 때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정부와 세계는 텅 비어 있음, 부족, 부재를 의미하는 휴가 상태에 있고, 여름날 쨍쨍 내리쬐는 강한 빛만이 있다.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세상은 실재한다. 그런데 세상은 왜 그리 우리의 발을 걸어 넘어뜨려야 했을까? 우리가 고작 해봐야 결국에는 뚱딴지 같은 항의 정도일 텐데 말이다. 말하자면 선생님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괜히 때때로 무단결석이나 해보는 정도 말이다.
최근에 언론과 기자를 다룬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미디어의 영향력과 언론윤리에 대한 중요성을 생각하고, 2020년 9월의 우리 언론과 미디어의 상황에 한숨이 가시지 않는다.
작년 조국 전 장관 관련 검찰과 언론의 합작으로 쏟아내던 기사들을 보며 블로그에 남겼던 "한국 언론의 수준"이란 글에서(https://wanderingplus.tistory.com/173) 대한민국 언론이 세계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자유도는 중상위권(아시아 국가중에서 1위), 신뢰도는 최하위권이란 이야기를 했다.
2020년 조사결과를 업데이트 해보니,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한 '2020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전체 180개나라 중 한국은 지난해보다 1단계 하락한 42위를 기록했고(그래도 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순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공개한 ‘디지털뉴스리포트 2020’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뉴스 신뢰도는 21%로 전체 조사국가 중 여전히 꼴찌에 있다.
기자가 쓴 확인되지 않거나 왜곡, 또는 사실이 아닌 기사에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 펜이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자에게 그런 잘못된 기사를 쓰도록 하는 것은 권력과 재벌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냥감과 먹이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헐리우드가 만든 영화 <더 포스트>나 <스포트라이트>는 언론이 권력의 잘못된 사용과 사회의 부조리를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준다면, <특종, 량첸살인기>와 <신문기자>는 한국과 일본의 언론이 얼마나 타락하고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하는지를 알려준다.
"뉴스란 게 그런거잖아. 뭐가 진짜고 가짠지 가려내는거 그거 우리일 아니야. 보는 사람들 일이지. 그들이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진실인거야." - 영화 <특종, 량첸살인기>
섬은 고립 공간이자, 드넓은 바다와 수평선, 그리고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다.
[본문발췌]
가장 못한 것이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널리 쓰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못한 것도 없다. 이때에 좋은 것이 있고 저때에 좋은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하면, 이 세상 속에 일단 얼굴을 내밀기로 작정만 하면, 우리는 더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하고 귀에다 속살거리는 그 악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곧 뜀박질을하고 여행을 떠나고... 그러나 <이제 막>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순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공(空)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한 발을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에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 앞으로 다가서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대가를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 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 내 어린시절, 반듯이 누워서 그리도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그리고 어느 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 <공의 매혹>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 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개인들 - 그러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 - 에 대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바는 너무나 잔혹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단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혁명에대한 희망은 물론 별도로 쳐야겠지만) 그것은 병에 걸리는 일뿐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질병과 사고가 그리도 많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표시한다. 그것들이 그리도 많은 까닭은 매일매일의 노동에 지쳐버린 인간들이 그들의 남아 있는 영혼을 구해 내고자 할 때 기껏해야 질병이라는 저 한심한 피난처밖에는 다른 방도를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병이란 여행과도 같은 값을 지닌 것이며 병원 생활이란 그 나름의 으리으리한 고대광실 생활이다. 만약 부자들이 그걸 알았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병에 걸리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런 비참 속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시련 속에서, 만사에 대하여,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하여 회의를 느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는 어떤 현실과 접촉하게 된다. 우리는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멈춰버릴 것만 같다. - <케르겔렌 군도>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들 마음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질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 <행운의 섬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그 <자기 인식 reconnaissance>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놓는다. - <행운의 섬들>
가장 달콤한 쾌락과 가장 생생한 기쁨을 맛보았던 시기라고 해서 가장 추억에 남거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 짧은 황홀과 정열의 순간들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이라 할지라도 - 아니 바로 그 강렬함 때문에 - 인생 행로의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찍힌 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순간들은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것이어서 어떤 상태를 이루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 그리움을 자아내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항구적인 어떤 상태이다. 그 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강렬한 것이 전혀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는 그 속에서 극도의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 생 피에르 섬에서 맛본 행복감에 대한 루소의 묘사..., <행운의 섬들>
나폴리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아침마다 만을 굽어보는 플로리디아나 장원을 찾아가서 시계가 정오를 칠 때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이리저리 거닐곤 했다. 그 한가로운 무위의 시간들은 파이레서의 열에 들뜬 듯한 시간들보다도 더 내 가슴을 가득하게 해주었다. 이같이 가슴 깊이 파고드는 풍경 속에서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데에만 골몰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파리나 런던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태양과 바다가 영원히 지배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즐기고 고통하고 표현하는 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만물의 중심에 있는데 이 땅덩어리의 한 끝을 조금 움직여본들 무엇하겠는가? 천천히 시계가 정오를 치고 생텔름 요새의 대포 소리가 울릴 때 어떤 충만감이 - 행복의 감정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전반적인 현존의 감정이 - 마치 존재의 모든 틈은 다 막혔다는 듯이 나와 나를 에워싼 모든 것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 <행운의 섬들>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 - 나는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 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 <행운의 섬들>
섬들을 생각할 때면 왜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되는 것일까? 난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의 수평선으로 자유스럽게 터진 바다를 섬 말고 어디서 만날 수 있으며 육체적 황홀을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 isole> - 섬 Ile의 어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섬, 혹은 <혼자뿐인> 한 인간, 섬들, 혹은 <혼자씩일 뿐인> 인간들. <부활의 섬>
<상상의 인도>
우리는 오로지 세계를 통해서만 세계로 갈 수 있고 신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갈 수 있다.
우리들의 행동과 독립된 것으로 존재한다고 우리가 믿는 우리의 개성이 사실은 우리들 행동들의 단순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한단 말인가? 우리는 이미 어떤 과거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하나하나의 사건은 우리들의 존재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를 구성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fieri가 esse 보다 먼저이며 더 상위의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한단 말인가?
전 우주가 무너져내리는 가운데, 죽음 같은 것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탄생이란 너무나도 당연하고 필연적인 일이어서 그저 그 탄생을 모면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고 방식을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살아남는 것을 믿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신앙이 필요하듯이 저들에게는 생명이 꺼지는 것을 믿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무케르지는 최근에 펴낸 그의 책에서 이야기하기를, 자기가 그냥 순진하게 왜 윌슨은 피케 카드 노름에서 <14점> 패를 잡지 못했느냐고 간디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이 만약 한 점 한 점마다 각기 일 년씩 명상을 하고, 단식을 하고, 한 점 한 점마다 불멸의 생명을 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신에게 기도를 했다면?" 하고 간디가 그에게 반문하더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존재에 의한 사고의 전체적이고 완벽한 표현이다. 서양에서는 실용주의 덕분에 그 완벽한 표현의 위조 제품을 하나 얻어 갖게 되었으니 그것이 넌센스다(태도가 사고를 창조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고대 사람들의 이상이었던 그 완전한 표현(감옥과 죽음에서 도망치기를 거절하는 소크라테스, 의사가 자기에게 주는 약을 마시는 알렉산더 대왕)은 - 비록 고대 사람들이 성스러움이 아니라 예지의 한계속에, 경시가 아니라 명상의 한계 속에 묶여 있기는 했지만 -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것이 된 나머지 우리는 언어라는 그 불완전한 (그러나 예술을 위해서는 그렇게도 중요한) 표현을 업수이 여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사람들이 문학같은 것은 집어치우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고는 아무런 실현이나 표현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 경우 출발점을 도달점으로 착각하는 결과가 된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프루스트의 다음과 같은 짤막한 한 마디는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가. <아마도 지적이고 정신적인 작업이 도달하게 된 경지는 예술적 장르가 어떤 것인가를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질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변할 수가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인간은 지금까지 변화밖에 한 것이 없다.
탐구의 종착점이 <존재 l'Etre>냐 아니면 <무 le Neant>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도대체 탐구 같은 것은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대상은 매순간 발견되고, 하나의 사실이 여러 사실들 사이의 어떤 관계에 의하여 대치되듯이 현실이 진실에 대치되기 때문이다. 만약 서양 사람이 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그보다는 덜 위선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행복의 감정이 존재의 표시라면, 그렇다, 존재는 실제로 있다. 천분의 일 초 동안만 정신을 딴 데 팔아보면 distraire 충분하다. 쇠사슬은 끊어져 버린다. 1830년대의 낭만주의자들은 오늘날의 낭만주의자들에 비해 본다면 얼마나 행복했던가! 낯선 풍경 속에 잠기려면 그저 딴 고장에 가보기만 하면 되었다(다만 네르발과 노발리스만이 예외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성을 지워버리고자 하고 삶의 경계선을 뛰어넘어 보려고 한다. 이 새로운 낭만주의자는 다만 그 방향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In fieri,실현 과정의 유(有). in facto esse 사실 상태의 유와 대조.[네이버 지식백과] In fieri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2007. 11. 25., 백민관)
한 살 더, 그러니까 살 날이 한 해 덜. 그리하여 그 생일날 나는 바캉스vacance를 가졌다. 바캉스란 일체의 행동이나 사고나 의사 교환이나 오락을 하지 않는 것을 뜻했다(그러니까 그것은 휴가vacances가 아니었다). 나는 진공을 만들려고 했고 시간을 중단시키고자 했다. 무슨 반성을 하자는 목적에서도 아니었고 무슨 준비를 하자는 목적에서도 아니었다. 과거는 분명 죽었고 미래는 형태가 없는 상태였다. 언제나 손에 잡으려면 벗어나는 것이 그 본질인 현재가 아주 예외적으로 마치 기름에 의해서 잔물결로 변하는 파도처럼 질펀해져 버릴 수는 없을 것인가? 나는 <묵상>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묵상이란 이 세계의 바탕과는 다른 바탕에서 여전히 계속되는 어떤 삶을 전제로 한다. 전진과 추락이 있고 또 무슨 방향이 있는 그것은 여전히 어떤 삶인 것이다. 나는 오히려 무가 되고 싶었다. 말을 거창하게 했지만 그저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라. - <사라져버린 날들>
바람에 펄럭이는 저 깃발을 보아라, 하고 입문하려는 제자에게 티베트의 승은 말한다. 펄럭이는 것은 그 깃발인가 바람인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입니다. 그날 내 정신을 펄럭이게 하던 것은 평소에 나를 괴롭히곤 하던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쳇바퀴 같은 습관으로 타락하는 어떤 직업의 고역, 불가능해져버린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 같은 땅에 모여 살면서 서로 싸우는 가운데서가 아니라 서로 믿는 가운데서 자신의 힘을 인정해야 마땅할 이 백성들의 상호 몰이해 등 - 어떤 성질의 기쁨에 다른 사람들이 소외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껴야만 비로소 인생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한 이기주의자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그 모든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 <사라져버린 날들>
여행을 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터이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거두어두자. 마죄르 호반의 자갈밭과 난간을 따라가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저 그것의 영광스러운 대용품들이나 찾을밖에! 그럼 무엇을? 에 - 또,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그리도 가냘프게 그리도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마른 돌담 하나만으로도 나를 격리시켜 주기에 족할 것이고 어느 농가의 문턱에 선 두 그루의 시프레 나무만으로도 나를 반겨 맞아주기에 족할 것이니...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 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 나의 보로메 섬들일 터이다. <보로메의 섬들>
퍼즐의 기술은 일단 하나의 간단한 기술, 즉 형태심리학이 간략한 지침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한 기술처럼 보인다. 목표 대상 - 그것이 지각 행위이건, 학습이건, 심리 체계이건, 혹은 지금 우리가 다루는 나무 퍼즐이건 간에 - 은 우선 분리하고 분석해야 할 단순한 요소들의 합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 즉 하나의 형태이자 구조이다. 요소는 전체에 앞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소는 전체보다 더 즉각적인 것도, 더 오래된 것도 아니다. 나아가 전체를 결정짓는 것은 요소가 아니지만, 요소를 결정짓는 것은 전체다. 전체와 그 규칙에 대한 지식, 집합과 그 구조에 대한 지식은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에 대한 개별적 지식에서 추론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퍼즐 한 조각을 사흘 동안 쳐다볼 경우, 그것의 외형과 색깔에 대해 완벽하게 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퍼즐 조립이 좀더 진척된 상태의 모습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퍼즐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하나의 퍼즐 조각을 다른 조각에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며, 이 점에서 퍼즐의 기술과 바둑의 기술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조각들은 오직 함께 짜맞추어졌을 때만 파악 가능한 어떤 형태와 의미를 얻게 된다. 따로 떼어 관찰하면 퍼즐 조각 하나하나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나의 조각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자 불투명한 도전일 뿐이다. 하지만 몇 분 동안의 실험과 실패 끝에 또는 약 30초 만에 비범한 영감을 받아 이 조각을 이웃하는 다른 조각 하나와 연결시키는 데 성공하면 그 조각은 곧바로 사라지면서 조각으로서의 존재를 멈추게 된다. 영어로 '퍼즐puzzle' - 수수께끼 - 이라는 말이 아주 잘 나타내듯, 이 조각들을 맞추는 데 수반된 강도 높은 어려움 역시 더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럴 이유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나타난다. 기적적으로 연결된 두 조각은 이제 하나의 조각 역할을 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실수, 망설임, 혼란, 예상의 출발점이 된다. .... 퍼즐의 해법은 단지 가능성 있는 모든 결합을 차례로 실험해보는 데 있게 된다. ... 퍼즐이 지니는 외적인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퍼즐은 혼자 하는 놀이가 아니다. 퍼즐을 맞추는 이가 수행하는 각각의 행위는 퍼즐을 제작한 이가 이미 행한 행위다. 그가 몇 번이고 손에 쥐어보면서 검토하고 어루만지는 각각의 조각, 그가 시험하고 또 시험하는 각각의 조합, 각각의 모색, 각각의 직관, 각각의 희망, 각각의 절망은 타인에 의해 이미 결정되고 계산되고 연구되었던 것들이다. - 머리말
분재된 수목은 지나치게 성장이 억제되고 둔화되고 변이되어 실제로는 자라지 않으면서도 성장의 표지들을 내보이고 노화를 보여주는 종으로, 그것을 가꾸는 사람들은 식물의 성장이 물질적 배려보다는 주인이 바치는 정신적 몰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저는 신체적인 고통에 대해 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극심한 고통은, 자신의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느끼는 것임을....
어떤 일이든 전문이 아닌 쪽에 손을 대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일단 달가운 얼굴은 하지 않습니다. 백혈구가 체내의 이물질을 배제학려고 하듯이 접근을 거부하려고 듭니다. 그래도 위축되지 않고 끈질기게 하다 보면 나중에는 차츰 '에이, 어쩔 수 없지'라는 식으로 묵인하고 동석을 허락해주는 모양이지만, 적어도 처음에는 상당히 반발이 심합니다. '그 분야'가 좁을수록, 전문적일수록, 그리고 권위적일수록 사람들의 자부심이나 배타성도 강하고 거기서 날아오는 저항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 소설을 쓴다는 - 혹은 스토리를 풀어간다는 - 것은 상당히 저속의 기어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실감으로 말하자면, 걷는 것보다는 약간 빠를지도 모르지만 자전거로 가는 것보다는 느리다, 라는 정도의 속도입니다. 의식의 기본적인 작동이 그런 느린 속도에 적합한 사람도 있고 적합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소설가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스토리'라는 형태로 치환해서 표현하려고 합니다. 원래 있었던 형태와 거기서 생겨난 새로운 형태 사이의 '낙차'를 통해서, 그 낙차의 다이너미즘을 사다리처럼 이용해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상당히 멀리 에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입니다.
어렸을 때 어떤 책에서 후지 산을 구경하러 간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그때까지 후지 산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산기슭에 서서 몇 가지 각도로 바라보고 '아, 후지 산이란 이런 곳이구나. 그래, 역시 이러이러한 점이 멋있어'라고 납득하고 돌아갔습니다. 매우 효율성이 뛰어나지요. 얘기가 빨라요. 그런데 머리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쉽게는 후지 산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혼자 남아서 실제로 자기 발로 정상까지 올라갑니다. 그러자니 시간도 걸리고 힘도 듭니다. 체력을 소모해 녹초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끝에야 겨우 '아, 그렇구나, 이게 후지 산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한다고 할까, 일단 몸으로 납득합니다. 소설가라는 종족은(적어도 그 대부분은) 어느 쪽인가 하면 후자,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머리가 그리 좋지 않은 사람 쪽에 속합니다. 실제로 내 발로 정상까지 올라가보지 않고서는 후지 산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몇 번을 올라가도 아직 잘 모르겠다, 혹은 올라가 볼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다, 라는 게 소설가의 천성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건 뭐, 효율성을 논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문제지요. 아무튼 머리 좋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알지 못할 일입니다.
아무리 거기에 올바른 슬로건이 있고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어도 그 올바름이나 아름다움을 뒷받침해줄 만한 영혼의 힘, 모럴의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 때 몸으로 배운 것은, 그리고 지금도 확신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말에는 확실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올바른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공정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말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제멋대로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전에 <뉴욕 타임스> (2014/2/2)를 읽노라니 데뷔 당시의 비틀스에 대해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They produced a sound that was fresh, energetic and unmistakably their own. (그들이 창조해낸 사운드는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들 자신의 것이었다.) 아주 심플한 표현이지만 이것이 오리지낼리티의 정의로서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것인 어떤 것.' 오리지낼리티란 무엇인가, 그것을 말로 정의하기는 몸시 어렵지만 그것이 몰고 오는 심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나는 가능하다면 소설을 쓰는 일로 그러한 '심적인 상태'를 내 안에서 다시 일으켜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멋진 기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날 속에 또 다른 새로운 날이 생겨난 것 같은, 그런 상쾌한 기분입니다. 그리고 만일 가능하다면 내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그것과 똑같은 기분을 맛보게 하고 싶다. 사람들의 마음의 벽에 새로운 창을 내고 그곳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고 싶다. 그것이 소설을 쓰면서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이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론 따위는 빼고, 그냥 단순하게.
소설가가 되려면 어떤 훈련이나 습관이 필요할까? 책을 많이 읽는것, 자신이 보는 사물이나 사상을 아무튼 세세하게 관찰하는 습관(명쾌한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그 일의 원래 모습을 소재로서 최대한 현상에 가까운 형태로 머릿속에 생생하게 담아두는 것)...
인생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경향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인간은 늦건 빠르건 반드시 다른 한쪽에서 날아오는 보복(혹은 반동)을 받게 됩니다. 한쪽 편으로 기울어진 저울은 필연적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육체적인physical 힘과 정신적인spiritual 힘은 말하자면 자동차의 양쪽 두 개의 바퀴입니다. 그것이 번갈아 균형을 잡으며 제 기능을 다할 때, 가장 올바른 방향성과 가장 효과적인 힘이 생겨납니다.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정비하고 유지할 것 - 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위로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원자력발전은 자원이 부족한 일본으로서는 아무래도 꼭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원칙적으로 원자력발전에는 반대 입장이지만, 만일 신뢰할 수 있는 관리자에 의해 주의 깊게 관리되고 합당한 제삼의 기관이 엄격하게 운영을 감시하고 모든 정보가 정확히 공개된다면 그 때는 어느 정도 협상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처럼 치명적인 피해를 몰고 올 가능성이 있는 설비를, 한 국가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품은 시스템을, '수치 중시' '효율 우선'의 체질을 가진 영리기업에서 운영할 때,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공감이 결락된 '기계적 암기' '상의하달'의 관료 조직이 그것을 '지도' 하고 '감시'할 때, 거기에서는 소름끼칠 정도의 리스크가 생겨납니다. 그것은 국토를 오염시키고 자연을 뒤틀고 국민의 신체를 손상시키고 국가의 신용을 실추시키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고유의 생활환경을 앗아 가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어떤 시대에나 어떤 세상에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입니다. 수만명에 달하는 후쿠시마 사람들을 고향 땅에서 몰아낸 것도 애초의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그 '효율'입니다. '원자력발전은 효율성이 높은 에너지고 따라서 선이다'라는 발상이, 그런 발상에서부터 결과적으로 날조되어진 '안전 신화'라는 허구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회복하기 어려운 참사를, 이 나라에 몰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패배, 라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효율'이라는 성급하고 위험한 가치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발상의 축을 개개인 속에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축을 공동체=커뮤니티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소설가는 소설을 창작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에 의해 스스로 어떤 부분에서는 창작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때그때 주어진 구두를 신고 거기에 내 발사이즈를 맞춰 행동에 들어갑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발 사이즈에 구두를 맞추는 게 아니라 구두 사이즈에 발을 맞추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일단 안 될 일이지만 소설가로 오래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그건 가공의 일이니까. 그리고 가공의 일이란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똑같은 것이니까. 꿈이란 - 그것이 자면서 꾸는 꿈이건 깨어서 꾸는 꿈이건 -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요. 나는 기본적으로 그 흐름에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따르는 한, 온갖 '안 될 일'이 자유롭게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소설 쓰는 일의 큰 기쁨입니다.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면 나 혼자 즐기는 수밖에 없지. 리키 넬슨 <가든파티>
이야기=스토리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과 사람을 근간에서부터 서로 이어줍니다.
태어날 때 부모의 환영과 보살핌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 전 가족의 보살핌과 배웅을 받아 왔는데, 요즘은 생의 마지막길을 홀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
[본문발췌]
나이든 사람들은 항상 머릿속에 생각이 많은 법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 하밀 할아버지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다.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한다.
법이란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로자 아줌마가 개였다면, 진작에 사람들이 안락사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사람에게보다 개에게 더 친절한 탓에 사람이 고통 없이 죽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바캉스 장소를 산과 바다 중에서 선택하듯이 사람들도 그렇게 선택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관심을 끌지 못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 사람들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듯이,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나치나 베트남 전쟁같은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을 선택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층에 사는, 과거에 너무 고통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유태인 노파 같은 건 누구의 관심사도 될 수 없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몇백만 이상의 돈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돈이 적게 드는 일일수록 그만큼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까...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
무서워하는 데는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너뿐.
[슬픈 결말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 조경란(소설가)
로자 아줌마가 이제 천천히 죽어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모모는 열다섯 살 때의 아주머니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건 지금의 늙은 로자 아줌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진 속의 처녀는 앞날이 충만하고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이제 모모는 생은 그러한 것들로만 채워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파괴해가는 것은 다름아닌 生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했다. 로자 아줌마가 의식을 잃기 시작했을 때 모모는 아주머니를 아주머니가 평소에 사랑했던 방, 혼자만의 방, 무서운 것이 있을 땐 혼자 숨어들곤 했던 지하실의 방으로 데리고 간다. 로자 아줌마는 거기서 죽었고 그녀가 죽은 지 삼 주 후, 진동하는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사람들이 지하실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까지 모모는 거기서 아주머니와 자고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모모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새롭게 살아갈 낯선 땅을 찾아가던 길에 모모는 문득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 들기 전에 해주었던 말을 떠올린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는 그 말을. 그리고 모모는 깨닫는다. 손에 쥔 달걀 하나,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 로자 아줌마를 죽인 것은 생이지만 그녀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도 바로 그 신비롭고 경이로운 生이라는 사실 또한. 그건 모모의 깨달음이자 곧 그 책을 읽는 우리들의 깨달음이기도 할 것이다.
일상에서 움직이는 동선은 대개 비슷하다. 동선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경험의 다양성이 부족한 것이고 이는 삶의 단조로움과도 연결되어 있다. 단조로운 삶은 시간의 속도를 가속화 시킨다.
[본문발췌]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공화국>은 우리나라에 아파트가 유별나게 많다는 사실과 서구 사회와는 달리 절대적 주택부족 현상이 해소된 지금도 여전히 아파트가 재테크의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면서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행사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연구서이다. 이와 유사한 연구서나 글도 많지만 대부분 아파트 평수 늘리기가 인생의 목표이고 아파트 평수로 줄을 세우는 한국 사회를 통탄하거나 아파트 브랜드와 위치, 평수가 구별 짓기의 수단으로 작동하는 현상을 문제 삼아 아파트의 노예가 된 한국인이라고 자학하는 대책 없는 자아비판들이다. 이러한 자아비판은 주택시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아파트라고 몰아세우는 과장된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단독주택이 열린사회의 공간 구조를 가지는 것이라면 아파트단지는 갇힌 사회가 될 터이다. 이동 경로가 단순한 아파트단지가 지루하고 심심한 표준적 생활공간이라면 단독주택은 경로의 선택에 따라 풍경이 바뀌고, 다채로운 개인 생활이 밖으로 드러나는 다원적 생활공간이다. 아파트가 획일적이라는 지적은 주거동의 모양이 똑같다는 점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단지에서의 생활이 단조롭고 무료한 것이어서 삶의 활력을 갖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획일적이라는 말을 단순히 모양이 같아 문제라고 이해하는 것은 그 말의 속내를 제대로 읽지 못한 어설픈 진단에 불과하다. ... 우리 사회에서 시급한 일은 아파트단지가 아닌 사회공간에서의 삶을 선택 가능한 것으로 보편화 시키는 일이다. 삶의 형식과 내용을 피동적인 것으로부터 능동적인 것으로 바꾸는 일이며, 표준적이고 균질적인 '단지형' 사회에서 차이를 존중하는 남을 배려하는 '열린' 사회공간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그것은 곧 사회적 담화공간인 길의 회복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붇돋우는 사회운동이 되기도 한다.
아파트단지 거주자는 주변 도시공간과는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는 공간에서 격리된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파트단지는 사막형 주거단지라고 해야 적당하다. 사막에서는 주변으로부터의 보호를 목적으로 담장을 차폐되고 자족적인 생활환경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담장 두른 아파트단지가 늘어난다는 것은 사막 대접을 받는 도시공간이 늘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도시가 점점 삭막해지고 있는 것은 늘어난 아파트단지와 무관하지 않다. 공공공간이 개인들의 삶터로부터 격리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단독주택과 아파트의 필연적 차이는 아니다. 단독주택이라도 단지로 개발된다면 아파트단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요즘 타운하우스라는 부적절한 이름으로 개발되는 단독주택단지들은 주변과의 폐쇄성이나 출입 통제 면에서 도시와의 격리 정도가 아파트단지보다 더 하면 더했지 나을 것이 전혀 없다.
아파트는 각 개인의 생활동선이 정해져 있는 나무구조이고 단독주택은 개인들의 경로 선택이 가능한 그물망구조다. 나무구조에서는 각 동선공간을 사용하는 집들이 정해져 있으니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이 일정 범위로 제한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그물망구조에서는 길에서 누구라도 마주칠 확률이 있다. 게다가 그물망구조의 길은 누구에게나 통행이 개방된 공공공간이 아닌가.
건축사는 건축허가를 위한 건축설계를 할 수 있는 법적 자격을 갖춘 사람이고 건축가는 법적 자격과는 별개로 건축설계를 진지한 작업으로 다루는 사람을 말한다. 그 진지함은 예술과 연결된 것일 수도 있고 휴머니즘, 혹은 지구 생태학에 연결된 것일 수도 있다. 건축가와 건축사의 차이는 소설가, 화가, 음악가라는 용어와 의사, 변호사, 회계사라는 용어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청춘이라는 단어를 생물학적 나이의 어느 한 시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과 무모함만의 함유량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그 시기가 나의 청춘이었다.' - 최갑수 여행작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말라리아에 걸리면서도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일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1만원이 아니라 1시간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을 때 돈이라는 종이쪼가리를 쥐고 가지는 않으니까.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 그들은 98%가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항상 부족한 양은 2%이다. 마음속에 2%가 부족해 떠나지 못하는 당신을 위한 책.' - 임승수 작가
매일 빠른 속도로 의미 없이 일상이 내 곁을 흘러갔다. 두 눈은 어지러웠고, 두 어깨에는 극심한 피로감이 쌓였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사회에, 그리고 게슴츠레 침을 흘리는 내 인생에 쉼표를 찍어 보고 싶었다. 한 번쯤 내 감정에 솔직해지기... 나 자신에게 떳떳해지기... 남이 아닌 내가 원하는 일 해보기... 정말, 그래 보기. 하지만 가면을 벗기까지는 적잖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실현 가능성은 낮아진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움켜진 손아귀를 펴는 거다. 그러면 새로운 걸 잡을 수 있다. 새로 손에 쥔 그 무엇은, 그동안 꽉 쥐고 놓지 않았던 것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경험이었고, 놓기 전에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자유였다.
여행의 질은 무게에 반비례할 때가 많다.
여행은 경험이고 그 경험이 마음속 깊이 새겨진다. 여행은 일종의 중독입니다. 무엇보다 편하면 재미가 없죠. 힘든 여정이 점점 자신을 단련시킵니다. 여행 뒤 훨씬 강해진 나를 발견하게 되죠. 그래서 여행을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 어린왕자 중
인생이 그렇듯 여행의 본질도 선택의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여행이 편할 줄만 알았다. 보고 먹고 자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여행은 온전치 않았고 만족스럽지 못했다. 여행도 넥타이를 매고 회사에 다니는 것처럼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여행 안에서 자유로웠지만 여행은 또 다른 숙제를 안겨주었다. 직장을 잡고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칠 때 여행은 점점 의식 속에서 사라져 갔다. 어쭙잖은 지식과 경험을 믿고 허세를 부리며 자만에 빠져 살던 시절이 있었다. 세계 일주의 시작 중국은 교만한 나를 일깨워주었다. 국경을 넘으며 난 여행을 다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여행이 여행이 아니었구나."
여행은 자신의 인생에 배워야 할 지식과 희로애락을 아우르는 공부의 시작이다.
배낭여행객의 블랙홀 : 카오산, 다합, 훈자
훈자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은 '느림' 이다.
여행은 가끔 생각지도 않은 장소와 상황에서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며 기쁨과 행복을 안겨준다. 우린 그걸 '인연'이라 부른다.
모든 꽃이 시들 듯이 청춘이 나이에 굴복하듯이. 생의 모든 과정과 지혜와 깨달음도 그때그때 피었다 지는 꽃처럼 영원하진 않으리.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슬퍼하지 않고 새로운 문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만 한다. 무릇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공간들을 한나씩 지나가야 한다. 어느 장소에서도 고향에서와 같은 집착을 가져선 안 된다. 우주의 정신은 우리를 붙잡아 두거나 구속하지 않고 우리를 한 단계씩 높이며 넓히려 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그러면 임종의 순간에도 여전히 새로운 공간을 향해 즐겁게 출발하리라. -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 중
계획이 계획대로 되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신의 세계가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의 고통을 대가로 구현되는 것이라면 나는 그런 신은 받아들일 수 없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의 말.
"자네가 지금 보고 있는 건, 삶 자체가 아니라 삶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라네. 진짜 삶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나?", 킬리만자로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청춘에는 이유가 없다. 마음이 가면 그걸로 된 거다. 이유가 생기는 순간 더 이상 청춘이 아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자신감.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초연함.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의연함. 난 이 모든 것의 청춘이고 싶다. 언제까지나....
눈으로 보지 않고 만져보지 않은 것들은 모두 내 관념의 단상에 지나지 않았다. 경험은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지구 진화의 긴 시간 가운데 현생 인류의 역사는 최근의 일이다. 인간의 욕망을 현재와 같은 속도, 방법으로 채워간다면 그 짧은 역사 가운데 인류 종의 소멸을 넘어 전 지구의 파멸까지 불러올지도 모른다.
[본문발췌]
한 사람의 관점이 달라지는 것을 우습게 보면 안 돼요. 한 사람의 변화가 출발점이 되어 우리 종 전체의 진화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내 아버지는 이따금 말씀하셨조. "물방울 하나가 대양을 넘치게 할 수도 있다"라고
이런저런 실패를 딛고 나면 예술적인 선택이 나오는 법
과거를 이해함으로써 미래를 엿보려 한다. 진화에 관한 우리의 프로젝트들은 저마다 역사의 한 국면에 관한 개인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어요. 당신은 피그미들을 통해 유랑 부족들의 시대를 보고 있고, 나는 아마존들의 왕국을 통해 고대를 보고 있어요....마치 앞을 멀리 보기 위해서는 먼저 뒤를 멀리 보아야 한다는 듯이....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이 그물이나 창보다 더 무서운 덫이로군요. 저 고릴라는 손을 펴고 과일을 포기하기만 했어도 자유를 얻고 목숨을 건졌을 텐데....<놓아 버리기>의 필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죠. 우리가 무언가를 우리 것이라고 믿고 간직하려는 하는 것은 하나의 덫이에요... 우리는 무언가를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며 포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덫에 걸린다.
환경의 영향이 유전자의 영향보다 더 중요해요. 생물 변이설을 주장한 라마르크가 옳아요. 생물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를 변화시켜요.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과 아주 달라요. 다윈은 그냥 환경에 가장 적합한 자들이 선택된다고 믿었죠.
자니코 중위의 티셔츠에 새겨진 머피의 법칙...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반드시 잘못된다.
일견 간단해 보이는 일치고 실제로 간단한 게 없다.
무슨 일이든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리게 마련이다.
될 대로 되라 하고 일을 방치하면 점점 나빠지는 경향이 있다.
문제가 해결될 때마다 새로운 문제들이 야기된다.
누가 전문가인지 알아맞히려면, 똑같은 일을 놓고 가장 긴 작업 시간과 가장 많은 비용을 예상하는 사람을 찍어라.
뒤늦게 아는 것, 그것만이 완전한 지식이다.
무리하게 힘을 가해서 부서진 물건을 놓고 아까워하지 말라. 어차피 수리가 필요했던 물건이니...
현대 과학 편란 : 녹색이나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과 관련된 것은 생물학, 악취를 풍기면 화학, 통하지 않으면 물리학.
무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을 때는 <그야 자명하죠> 하고 말하라.
이론이 있으면 일은 잘 돌아가지 않아도 그 이유는 알게 된다. 실천을 하면 일은 돌아가는데 그 이유는 모른다.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면 일도 돌아가지 않고 그 이유도 모르게 된다.
과학은 진리를 쥐고 있다. 실상을 관찰해 보면 그 진리와 어긋날 수도 있으므로 관찰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번의 실험으로 그대의 이론을 확증했다고 해서 증인들 앞에서 실험을 되풀이하려 하지 말라. 두 번째 실험에서 성공할 확률은 그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그대가 초대한 증인들의 수에 반비례한다.
어떠한 실험도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따라 해서는 안 될 사례로 남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적은 언제나 두 가지 경우에 공격해 온다. 자기가 준비되어 있을 때, 그리고 그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
절대로 사격하지 마라.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흥분시킬 뿐이다.
적이 그대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면, 그대 역시 적의 사정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앞장도 서지 말고 뒷장도 서지 말 것이며, 임무를 지원하지도 마라.
우두머리가 어리석을수록 그가 수행해야 할 임무는 더 중요하게 마련이다.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 그 일을 직접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복잡한 임무에는 간단하고 알기 쉬운 해결책이 있다. 문제는 그 해결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임무에 성공할 가능성이 50퍼센트라면, 그건 실패할 가능성이 75퍼센트라는 뜻이다.
모든 게 잘 돌아간다 싶으면 어딘가에서 탈이 난다.
명령을 내릴 때는 언제나 구두로 내려야 한다. 서면으로 내린 명령은 흔적을 남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큰 피해를 야기하고자 한다면,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복잡한 문제는 간단하고 알기 쉽게, 틀린 답으로 해결할 수 있다.
사람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셈을 할 줄 아는 사람들과 셈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종교가 없는 사람은 자전거가 없는 물고기와 같다.
어떤 조직에나 실제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은 쫓겨나기 십상이다.
어떤 사건이 허위임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게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모든 작은 문제에는 큰 문제의 씨앗이 들어 있다.
미지의 세계를 탐사할 때는 장차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혼자 배우고 깨우치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의 세뇌에 시달리지 않는 행운을 누린다.
돈을 내는 자가 규칙을 정한다.
어떤 사람에게 우리 은하에 3천억 개의 별이 있다고 말해보라. 그러면 그는 당신 말을 그대로 믿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 벤치에 방금 페인트칠을 해놓았다고 말해 보라. 그러면 그는 당신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 벤치를 만져 볼 것이다.
가장 쓸모 있고 적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론은 지독한 바보가 가장 어리석은 질문으로 공격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어느 회사에서 한 직원이 실제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는 회사를 떠나야 한다.
가슴에 난 상처는 걸음을 늦추라는 자연의 뜻이다.
어리석어 보이는 게 통하면, 그건 어리석은 게 아니다.
하찮게 보이려고 노력하라. 적은 탄약이 부족할지도 모르고, 그러면 당신 때문에 총알을 낭비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면, 당신은 무언가를 빠뜨린 것이다.
바보들의 공격을 이겨 내는 무언가를 구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보들은 창의력이 매우 풍부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기로 결정하든, 먼저 해야 할 다른 일이 있다.
괜찮은 여자들과 괜찮은 남자들에게는 이미 임자가 있다. 만약 임자가 없다면, 그들에게 무언가 감춰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매력이 있다면, 그 매력의 30퍼센트는 그가 가진 것과 관련되어 있고, 나머지 70퍼센트는 그가 가졌으리라고 남들이 믿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사랑은 지성에 대한 상상력의 승리이다.
결혼은 경험에 대한 희망의 승리이다.
한 여자가 한 남자의 장점에 끌려 가까워지지만, 그 장점이란 대개 3년이 지나면 여자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약점으로 변한다.
적은 언제나 두 가지 경우에 공격해 온다. 자기가 준비되어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
어떤 전투 계획도 적을 만난 뒤까지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
세상에 완벽한 작전이란 없다.
계속 시도하면 결국 성공한다. 그러니까 망할 게 있다는 건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그냥 순조롭게 끝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해결책이 없다면, 애초에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과 나라들은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만약 다른 모든 행동 방식을 해볼 만큼 다 해보았다면 말이다.
찾아다니지 않고 발견하려면, 오랫동안 발견하지 못하고 찾아다녀야 한다.
역사는 절대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이 게으른 탓에 앞선 역사학자들이 말한 것을 반복할 뿐이다.
당신이 첫 시도에 성공하지 못하면, 성공의 정의를 바꾸면 된다.
경험 덕분에 이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새로운 실수를 하게 된다.
정치권에 가장 부족한 게 뭔 줄 아시오? 바로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오. 나는 마르크스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지만, 그에겐 적어도 한 가지 장점이 있소. 인류의 진화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했다는 것이 바로 그거요. 오늘날에는 배우들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소. 그들은 홍보 전문가들이 써준 연설문을 읽으며 연기를 할 뿐, 자기네 나라를 위한 총체적인 전망과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지 않소. 인류 전체를 위한 프로젝트는 생각조차 할 수 없소. 설령 그들이 앞을 내다본다고 해도 그 기간은 2년을 넘지 않소. - 드루앵 대통령
실패하는 자들은 변명거리를 찾고 성공하는 자들은 방법을 찾아낸다. - 나탈리 대령
종교에는 한 가지 이점이 있어요. 군중의 에너지를 빠르게 한 방향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사고의 틀>로 기능한다는 거죠..
케찰코아틀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원시적인 소인들은(인간) 성격이 매우 까다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라는 개념을 거추장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자유를 요구하는 자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침묵하는 다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무엇에 대해서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그 가르침이 옳고 그르고는 나중 문제였다). 그들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보다 우두머리에게 순종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일이 잘못 돌아가서 상황이 재앙으로 변하면, 그들은 우두머리를 교체했다. 그들은 틀에 둘러싸이는 것을 좋아했다. 국경선은 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고, 금기는 행동반경을 분명하게 해주었으며, 법률과 형벌은 그들의 삶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 야만적인 소인들이 책임지기를 싫어한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것의 책임은 우두머리나 운명이나 우연이나 신에게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개인적으로 후회를 하거나 자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도망치기 일쑤였고, 관찰과 실험을 활용하기보다는 세계를 교의에 비추어 해석하거나 마법적인 이야기로 둔갑시키는 것을 더 좋아했다.
시간을 존중하면서 건설하지 않은 것은 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너무 빨리 가다 보면 불필요한 위험을 안게 됩니다. - 다비드 웰스
경제적 진화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때는 집중을 추구했던 기업들이 점차 분산을 지향하리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웃을 수 있는 기업은 관리하기가 쉽지 않은 거대한 복합기업과 트러스트가 아니라, 모든 종업원이 서로 알고 지낼 뿐만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내부 갈등 때문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작은 기업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 기업이 가진 에너지의 60퍼센트가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부 갈등을 관리하기 위해 사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업을 분할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사람, 자신의 행복이 외부의 어떤 사람에게 달려 있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코뿔소의 뿔이나 상어 지느러미, 고래, 아프리카의 백색증 환자, 멸종 위기에 놓인 모든 동물에 대해서 그러듯이, 한쪽에는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고 모두가 그것에 동의하지만, 다른 쪽에는 바로 그 원칙을 거스르기 위해 거금을 낼 준비가 되어 있는 고객들이 있어요. 결국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은 토론회에서 승리를 얻고 때로는 재판에서도 이기지만, 원칙을 무시하는 자들은 실전에서 이익을 취해요. 마지막에 승리를 거두는 자들은 언제나 돈을 지불하는 자들이에요. 금지는 그저 가격을 올릴 뿐이죠.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그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다.' 수학자 괴델... 한 번쯤은 내 삶을 멀리서 바라보고 싶기도 하거든. 깨닫기 위해서는 멀어져야 해.
"나는 시키는 대로 일하면서 살고 싶어요. 만약 내가 자유를 얻게 되면,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면 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죠. 그보다 불안한 일이 또 있을까요? 나는 개인적인 결정을 어떻게 내리는지 몰라요. 나는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잘못 선택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움에 빠질 거예요. 그보다는 남들이 나 대신 결정해 주는 게 좋겠어요. 그러면 설령 그들이 그릇된 선택을 하더라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죠." - 어느 샤오제
에마 109는 한 집단의 진정한 지도자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원칙을 경험적으로 터득한다.
1)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말 것.
2)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말 것.
3) 임기응변의 해결책을 재빨리 찾아낼 것. 만약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할 때는 무슨 일이든 할 것. 그러지 않으면 지도자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음을 남들이 알아차리게 된다.
4) 무슨 일을 하든 시간을 주도적으로 결정할 것. 남의 재촉에 쫓겨서 또는 강요에 못 이겨 약속 시간이나 대결의 순간을 정하지 말 것. 남들이 언제나 지도자의 일정을 받아들이게 할 것.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 그리고 저마다 내가 자기편이라고 믿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진정한 정치적 재능이야. ... 모든 진영의 대표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서 내가 그들과 생각이 같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다른 진영에 맞서 은밀하게 그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 거야....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진영에 속해야 한다.... 패배할 위험을 줄이고 승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편에 서서 게임을 하지 말아야 하고, 개입을 하되 자신의 책임으로 돌아오지 않을 말들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진정 유익한 것은 질문 그 자체이지 대답이 아니다.
탈바꿈의 마지막 단계 : 나비가 알에서 애벌레로 부화하여 고치를 짓고 번데기가 되었다가 도달하는 세 번째 단계는 <새로운 존재인 성충으로 거듭 태어 나는 것>이다. 탈바꿈의 이 단계에서는 애벌레 때와 전혀 다르게 거뭇하거나 몸에 털이 나 있지도 않고 옴실옴실 기어다니지도 않는다. 개체가 가늘고 섬세한 날개가 달린 성충으로 변화하여 공기 역학을 거스르지 않는 사뿐한 존재가 된다. 날개를 펼치면 알오다롱한 빛깔이 드러난다. 금속성 파랑이나 주황이나 노랑이나 연보라가 섞여 있는가 하면, 붉은 바탕에 검정과 하양의 얼룩이 나 있는 것도 있다. 경이로운 무늬들이 가면처럼 환각을 불러일으키고 형광색 광택을 낸다. 어느 구석을 보더라도 아름답고 조화롭고 가벼운 새 생명체다. 번데기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비는 날개를 펴서 말리고, 따뜻한 기운과 빛을 발하는 태양 쪽으로 올라간다. 나비는 꿀을 찾아 이 꽃 저 꽃으로 날아다닌다. 바야흐로 나비의 임무는 단 하나, 자기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짝짓기 상대를 만나 종의 영속성을 위한 교미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비는 빛에 현혹된다. 어둠이 깃들고 촛불이 켜지면, 그 단순한 불꽃을 햇빛과 혼동하기도 한다. 그 감각의 덫에 속절없이 이끌린 나비는 불에 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불꽃으로 날아든다. 불을 경험한 동물 종들은 본능적으로 불을 피한다. 그렇게 반사적으로 행동하도록 자기들 유전자에 고통의 경험을 새긴 것이다. 하지만 나비는 예외다.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애벌레에서 나비로 탈바꿈하는 것은 섬세하고도 복잡한 일인데, 왜 자연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장 파괴적인 요소인 불에 대한 유혹을 나비의 유전자에 남겨 놓았을까?
어떤 일이 잘 되기를 바란다면 너보다 정통한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겨라.
모험이란 미래를 밝히기 위해 어둠 속으로 돌진하는 거야.
나는 죽는 순간을 나 자신이 결정한다. 그럼으로써 매 순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더는 겪지 않는다.
한 문명의 절정. 우리는 다음과 같은 때에 한 문명이 절정(꼭대기, 그러나 성장 과정이 뒤접어지는 때)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정치가들은 국가의 이익을 내세우며 자유를 제한한다.
언론인들은 자기네 개인적인 의견을 내세우며 진실을 감춘다.
종교인들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내세우며 개인들 사이에 사랑이 번지는 것을 방해한다.
교육자들은 훈육을 내세우며 상상력을 발휘하거나 속생각을 발표하는 것을 방해한다.
은행가들은 기업이 돈을 대출해 달라고 하면, 사정을 잘 알면서도 기업의 상환 능력을 넘어서는 돈을 빌려준다.
판사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가치를 내세우며 정의의 실현을 포기한다.
병원들은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치유할 수 없는 병으로 변하는 장소가 된다.
군인들은 새로운 문기를 시험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소방의 임무를 띠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또한 자기들의 봉급이 오르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방화광으로 변한다.
환경이 더 이상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사는 곳을 바꿔야 한다.
명상이 허무로 이어진다. 텅 비어 있음이 가득 참을 이끈다.
사람살이에 규칙은 딱 하나요. 미래는 살아 있는 자들의 것이라는 거.
낙관론자와 비관론자. 독일의 한 대학에서 2013년2월18일에 비관론과 낙관론이 개인의 수명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세 개의 연령층에 속하는 4만 명의 대상자들에게 10년에 걸쳐 질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연구 대상자들은 향후 5년 동안의 삶을 예상해서 0점에서 10점까지 점수를 매겨야 했다. 그 결과, 43퍼센트는 실제로 벌어진 일에 비해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대답했다. 25퍼센트는 정확히 판단해 벌어진 상황을 제대로 예측했다. 32퍼센트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그런데, 연구 결과 마지막 그룹의 건강 악화 위험이 평균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9.5퍼센트는 중증 장애가 발생했고, 10퍼센트는 단기적으로 사망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 연구를 행한 과학자들은 비관론자들이 건강 문제에 더 예민하기 때문에 의사나 치과 의사를 자주 찾다 보니 치료도 더 신속하게 이루어진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앞으로의 기대 수명이 더 긴 것도 바로 이 비관론자들이다. 결과적으로 비관론자가 되는 것이 더 오래 사는 비결인 셈이다.
군중을 움직이는 데는 공포만큼 강력한 엔진이 없지요. ... 전쟁은 결집력 면에서 축구를 능가하는 것 같군요. 게다가 선수권 대회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전쟁이라는 게, 그러니까, '정부의 후원을 받는 서포터들이 벌이는 대대적인 난투극' 비슷한 거 아니겠어요.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 그럴싸한 프로파간다를 원해요. 그렇지만 종국에는 프로파간다가 진실과 반대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거짓말도 오랜 시간 계속해서 반복되다 보면 진실이 되는 법입니다. 아니, 진실보다 더한 신념이 되고 말지요.
미래에 벌어질 일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직접 그 미래를 만드는 것.
전쟁별 사망자 숫자.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 : 6천5백만 명
중국 마오쩌둥 정권의 숙청(1949년부터) : 4천5백만 명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년) : 2천2백만 명
러시아 스탈린 정권의 숙청(1950년부터) : 1천3백만 명
한국 6.25전쟁(1950년부터) : 280만 명
수단 내전(1955년부터 : 190만 명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1975~1979년) : 180만 명
베트남 독립전쟁(1954년부터) : 170만 명
아프가니스탄 소련과의 전쟁 그리고 탈리반과의 전쟁(1980년부터) : 160만 명
나이리지라 비아프라 분리 독립 전쟁(1967~1970년) : 130만 명
이라크 대 이란전쟁(1980~1988년) : 120만 명
상당수의 사람들은 시간이 진행될수록 과거는 사라져 가는 레일처럼 진화를 단선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달리 사고해 볼 수도 있다. 진화가 단선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별 모양의 과정을 겪는다는 상상도 가능한 것이다. 별의 한 가지는 다른 가지로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진화는 평행적으로 동시에 일어날 수도, 유턴을 거칠 수도 있다. 단선 진화의 관점은 우주에 대한 편협한 시각으로 이어지지만, 별의 관점은 우주에 대한 전방위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인간에게는 세 개의 뇌가 있다. 가장 오래된 첫 번째 뇌인 뇌간은 파충류의 뇌라 불리는데, 오로지 두려움과 욕망으로만 작동한다. 생존을 관장하기 때문에 세 뇌 중 가장 영향력이 크다. 두 번째 뇌는 변연계로, 모든 감정과 욕망과 좌절이 들어있다. 세 번째 뇌인 대뇌피질은 계획과 전략, 논리를 관장한다.
수렵-채집인에서 정주 농경인으로의 이행.인간이 수렵-채집인에서 정주 농경인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간단치 않았다. 초기 정주 농경인은 자신의 집과 가까운 곳에 구덩이를 파거나 장소를 정해 쓰레기와 배설물을 모아 놓았다. 그러다 보니 쓰레기가 삭고 썩어 악취를 풍기고 파리 떼와 모기 떼가 날아들었다. 막힌 공간에서 쓰레기와 가까이 살다 보니 당연히 지저분해지고 세균과 질병이 퍼졌다. 반면 유목 생활을 한 수렵-채집인은 수시로 이동을 했기 때문에 불결한 쓰레기 더미 옆에서 살지 않아도 됐다. 그들은 발길 닿는 대로 떠돌다가 한데서 잠을 잤다. 이틀은 토착 농경민들이 오염시키지 않은 깨끗한 강과 호수에서 몸을 씻으며 상대적으로 청결하게 생활했다. 수렵-채집인은 나무뿌리와 풀뿌리, 과일, 사냥한 동물을 먹으며 건강하고 하얀 치아를 유지했다. 반면, 발효 과정에서 당분이 산성으로 변하는 빵을 주식으로 삼은 농경인은 충치가 생기고 치아가 망가져 치근만 남고 심한 구취가 났다. 농사일은 조직화와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노동을 요구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다음 수확을 하는 세 단계로 이루어진 농사는 수렵이나 채집에 비해 피로도가 높은 일이었다. 수렵-채집인은 늘 새로운 환경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았지만 농경인은 짜여진 일상을 살았다. 조직화된 노동을 하면서부터 정주인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생겨났다. 수렵-채집이들은 음식과 잠자리를 찾게 길을 안내해 주는 가이드 같은 역할을 하는 우두머리 한 명으로 충분했지만, 정주 농경 사회에서는 우두머리 밑에 있는 사람, 또 그 밑에 있는 사람, 이런 식으로 타인의 노동을 이용해 자신의 노동은 최소화하는 중간자들이 층층이 생겨났다. 막힌 공간에서 살다 보니 지배 남성들 간에 경쟁이 심화되고 지나친 폭력이 초래됐다. 수렵-채집인의 식단은 무척 다양했던 반면, 농경인은 거의 매일 똑같은 음식(가령 유럽의 초기 농경 공동체의 주식은 호밀과 완두콩이었다)을 먹다 보니 비타민과 미량 원소 결핍을 겪게 됐다. 한 쪽은 불안정하지만 건강한 음식을 섭취했고, 다른 쪽은 규칙적인 대신 영양이 부족한 음식을 섭취했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고 공기와 물, 음식의 질이 떨어지다 보니 정주 농경인은 신장이 점차 줄어들었고, 농사일의 자세 탓에 척추에 문제가 생기고 관절 류머티즘이 발생했다. 수렵-채집인은 많은 아이를 키울 수 없고 걷거나 사냥이 힘든 노인들을 보살필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스스로 출산을 제한한 반면, 정주 농경인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낳는 대로 다 키웠다. 수렵-채집인은 현재를 살았던 반면 정주 농경인은 미래를 살았다.몇 달 뒤에 수확하기 위해 씨를 뿌리는 행위는 당연히 미래를 관리하는 사고 체계를 필요로 했고, 이런 속에서 최초의 달력이 생겨났다. 1만 년 전에 결국 정주 농경인만 살아남았다. 수렵-채집인은 서서히 자취를 감춰 지금은 몇 개 부족만 아마존과 파푸아, 콩고의 마지막 남은 울창한 삼림 지역에 살고 있다.
법과 원칙은 사회와 조직이 질서를 갖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도구이다. 갈수록 사람들 간의 다툼, 조직간의 다툼이나 이견에 법과 원칙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그것으로 질서가 잡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은 곪고 있을 지 모른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신뢰에 더 많이 의존하고 법에 덜 의존할수록,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은 더 잘 작동하는 법이다.... 타인에 대한 믿음을 입증하느라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들일 필요가 없어진다면, 세상은 정말 훨씬 더 살기 편할 것이다."는 말을 되새기며 실천해야 한다.
[본문발췌]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어리석은 자는 마구 넘겨 버리지만, 현명한 자는 열심히 읽는다. 인생은 단 한 번만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장 파울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인생을 최대치로 활용한다는 것은 곧 인생에서 현명하고 훌륭한 선택을 최대한 많이 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선택에 대하여, 그리고 내 선택이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이해하는 것이 바로 경제학의 본질이다.
우리가 고기와 술, 빵을 먹으며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업자, 빵집 주인이 관용을 베풀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이익을 중시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거래할 때 그들의 인간애가 아닌 자기애에 호소한다. 또한 우리가 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유리한 점을 말한다.
우리가 신성한 미덕을 실행하는 것은 이웃과 인류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인류애보다 더 큰 사랑, 더 강력한 애정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롭고 고상한 것에 대한 사랑, 존엄과 위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탁월한 인격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남의 말은 잘 안 듣고 자기 혼자만 얘기하는 사람을 가끔 본다. 그런데 실은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일 수 있다. 사람들이 좀처럼 알아채기 힘든 부분이다. 사람이란 본래 자기 자신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자기 의견을 입증하기도 좋아한다. 각자 하나같이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대화를 할 때 내 얘기를 하기 위해 상대의 말을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대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인 적이 얼마나 있는가? 상상속의 공정한 관찰자는 당신의 대화 스타일을 어떻게 평가할까? 공정한 관찰자를 상상하면, 대화라는 행위가 상대의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내 얘기를 쏟아내는 힘겨운 운동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추는 춤으로 바뀌게 된다. 서로 경쟁하듯 내뱉는 독백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진정한 대화로 거듭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명예나 재산을 추구하는 삶에 열광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스미스가 쓴 '사랑받다'는 말이, 오늘날 연애나 가족 간의 사랑을 뜻하는 '사랑받다'와 같은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 훨씬 넓고 완전한 의미를 품고 있다. 사람들이 누구에게나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요약하여 표현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이 표현을 썼다.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고, 소중하게 여기길 바란다. .... '행복이란 감정은 사랑받는다는 느낌으로부터 생겨난다.' ....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반대로 내가 미움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깊은 불행을 느낀다.
자기기만은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인간이 살면서 겪는 혼란의 절반은 바로 이 자기기만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볼 줄 알기만 해도 자기기만이란 맹점에 빠지지 않는다. 자기기만을 계속 방치한다면 결국 우리는 거짓된 자기 모습을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다. 조물주는 자기기만이라는 인간의 약점을 방치하지 않았다. 또한 인간이 완전한 착각 속에 빠져 살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다행히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스스로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깨닫게 만들었다. 반대로 우리는 타인의 옳은 행동을 인정할 줄 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 역시 그 행도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걸 듣는다. 그 행동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을 표하고 보답을 하려 한다. 그 행동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강력하게 갈망하는 모든 감정들, 즉 사랑, 감사,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지켜보면서 우리 역시 그 행동을 모방하려고 한다.
세상은 복잡한 곳이다. 어제의 주가가 왜 올랐는지, 혹은 내렸는지는 세상 모든 사람이 잘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내일의 주가가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이야기 짓기 오류'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이야기 짓기 오류' ... 나심 탈레브, 복잡한 상황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이야기를 통해 받아들이는 것.
이성의 한계에 대한 자각은 인간이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일깨워주는 경고다. 인간에겐 분명 결점이 존재한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지혜의 시작이다.
파인만의 지적을 기억하라. 세상에서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은 절대로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았다면서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바다는 계속 들어갈수록 깊어진다.' 나심 탈레브가 2012년에 출간한 책 <안티프래질>에서 인용한 베니스의 속담이다. 많은 것을 알아갈수록, 앞으로 알아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더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척할 필요가 없다. 무지를 인정하면 더없이 행복할 수 있으므로. 스미스는 인간의 본성에 결점이 있음을 알려준다.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욕구는 반대 의견을 아예 묵살해버릴 정도의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여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 정작 진짜로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지는 않는다. 또한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사랑 받으려는 인간의 욕구 자체가 위험하다는 스미스의 말은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건강하고, 빚이 없으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의 행복에 무엇을 더하겠는가?
20대에는 의지, 30대에는 기지, 40대에는 판단이 지배한다. 오래 살기를 바라기보다 잘 살기를 바라라. - 벤자민 프랭클린
그런데 시계를 고를 때는 그토록 까다로운 사람이, 약속 시간은 왜 정확하게 지키지 못할까? 또 지금이 정확히 몇 시인지 확인하지도 않는 걸까? 그는 시간이라는 정보를 얻기 위해 새 시계를 산 게 아니다. 그저 시계의 그럴듯한 겉모습에 끌려 구입한 것뿐이다.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별로 유용하지 않은 하찮은 것들에 돈을 써버리고 스스로를 파산시키고 있는가? 장난감 애호가들은 장난감의 효용이 아니라 장난감의 효용을 높이는 기계의 성능을 좋아할뿐이다. 그들의 주머니는 작고 편리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이런 물건들을 더 많이 가지고 다니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옷에서는 찾기 힘든 새로운 주머니들까지 고안해낸다.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격렬하게 바라는 상황들 중 비교적 바람직한 상황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신중의 원칙, 정의의 원칙을 위반하면서까지 격정적인 욕망을 가질 만한 상황은 없다.
우선, 우리에게 가장 유용한 자질은 뛰어난 '이성'과 '지적 사고력'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모든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로인한 이익과 손해가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자제력'이다. 자제력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참을 수 있으며, 미래의 더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 오늘의 고통을 견딜 수 있다. 그리고 이성과 지적 사고력, 자제력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미덕이 바로 '신중'이다. 신중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유용한 자질이다. ...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혜와 미덕이 존경의 유일한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부도덕하고 어리석은 행위가 경멸의 유일한 대상도 아니라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실제로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 도덕적인 사람보다는 부자와 권세가들에게 존경심 가득한 눈길을 던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지 않은가....권세가들의 거실과 궁전에서는, 총명하고 박식한 동료들의 존경으로 성공과 승진이 결정되지 않는다. 무지하고 주제넘고 오만한 윗사람들의 별나고 어리석은 편애로 결정된다. 이처럼 권세가들의 거실과 궁전은 공적과 능력보다 아첨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곳이다. ...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가 자연스럽게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부로 누릴 수 있는 유쾌한 것들에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두둑한 주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는 생각에 그는 가습이 벅차오르는 드하다. 부유함으로 얻을 수 있는 다른 어떤 이익보다, 바로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어 그는 부자가 되려고 한다. ... 지위와 명성이 높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의 재산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환희를 대리만족하고 싶어 한다. 결국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대중의 관심사가 된다.
세인의 관심으로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자유를 상실하는 일이 뒤따르더라도, 사람들은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이를 통해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생과 근심, 굴욕을 충분히 보상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사실은, 이런 관심을 얻는 순간 모든 자유와 편안함, 근심 걱정 없는 안전함은 영원히 잃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운명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부자다. 스미스는 인생의 만족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돈과 명예 말고도 우리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 재산이나 명예, 권력을 통해 세인의 관심을 추구하는 대신, 지혜롭고 선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부자, 유명인, 권세가가 되어 타인에게 사랑받는 방법 외에 현명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도 타인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인간 표본이 제시된다.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성격과 행동을 만들어간다. 그중 하나는 천박하고 화려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반면, 다른 하나는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윤곽이 선명하고 우아하며 또 아름답다. 전자가 목적 없이 헤매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당긴다면, 후자는 열심히 배우고 신중하게 관찰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스미스가 제시하는 행복 처방전은 단순하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면 된다.이는 곧 존경받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칭찬받고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이 실제의 나와 같으면 된다. 한 마디로, 정직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존중을 받으면 된다. 사랑을 받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명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스미스는 그중 두 번째 방법, 즉 지혜와 미덕의 길을 선택하라고 충고했다. 그렇다면 미덕이란 무엇일까?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이 질문에 대한 스미스의 첫 번째 답은 '적절성'이라 부르는 최소한의 기준을 지키는 것이다.
슬픔과 기쁨에는 차이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쁨은 작을수록, 슬픔은 클수록 쉽게 공감하는 경향이 있다. ... 슬픔보다 기쁨에 더 많이 공감하는 인간의 성향 때문에, 우리는 부를 과시하고 가난을 감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통스러운 우리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다. 가난한 우리의 처지가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우리가 겪는 고통의 반만큼도 연민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크나큰 비애다. 인간의 이런 본능 때문에 우리는 부를 추구하고 가난을 피하는 것이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더 훌륭한 방법으로, 스미스는 미덕을 갖춘 삶을 권했다. 미덕, 이 애매한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스미스가 생각하는 미덕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중 그가 가장 강조한 세 가지가 있으니, 바로 신중, 정의, 선행이다. 이를 갖춘 인간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게 된다. 즉, 이 세 가지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자격요건인 셈이다.
신중 = 자기 자신을 돌본다.
정의 =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선행 = 다른 사람을 선한 마음으로 대한다.
신중한 사람은 언제나 진지하고 열심히 연구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지식을 매개로 다른 사람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때문에 비록 그의 재능이 늘 훌륭한 것은 아닐지라도 언제나 진실한 것만은 틀림없다. 신중한 사람은 교활한 사기꾼의 교묘한 계략으로 당신을 속이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오만한 현학자의 건방진 태도로, 혹은 천박하고 경솔하게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처럼 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떠벌리지도 않는다. 그의 대화는 간결하고 겸손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대중의 관심과 명성을 얻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엉터리 홍보 기술들을 끔찍이 싫어한다.
신중한 사람은 진실하다. 그는 자신의 재주와 성공에 늘 겸손하다. 신중한 사람이 되기 위한 스미스의 조언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적게 말하고 많이 행동하라.'일 것이다.
단순히 내 행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행복을 해친다면, 절대로 공정한 관찰자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나에게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남에게서 정말 유용한 것을 빼앗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남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자신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이런 본성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공정한 관찰자의 공감을 절대 얻지 못한다.
신은 우리에게 두 손을 주었다. 하나는 받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주기 위함이다. - 빌리 그레이엄
거의 모든 미덕의 원칙들, 즉 신중, 자선, 관대, 감사, 우정이란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 이 원칙에 대해서는 예외의 경우가 많고, 수정이 필요한 경우도 대단히 많다. 때문에 이들을 온전히 지키면서 행동을 조절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정의의 원칙은 문법의 규칙에 비교할 수 있다. 반면 그 외의 다른 미덕에 관한 원칙들은 비평가들이 고상하고 격조 높은 문장을 쓰는데 필요하다고 얘기한 규칙과도 같다. 전자는 정밀하고 정확하고 필수불가결하다. 그에 비해 후자는 모호하고 명확하지 못하다. 또한 후자는 우리가 완벽을 추구할 때 필요한 정확한 지침을 주지 못한다. 단지 완벽함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을 제시해줄 뿐이다.
전지전능한 조물주는 인간에게 형제들의 감정과 판단을 존중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형제들이 자신의 행동을 인정해주면 기쁨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에 반대하면 마음에 상처를 받도록 가르쳤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조물주는 인간에게 인류의 심판관이라는 역할을 부여했다. 형제들은 조물주가 부여한 인간의 권한과 심판권을 인정한다. 따라서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질책 받을 때는 수치심과 굴욕을 느끼고, 반대로 칭찬을 받으면 의기양양해진다.
신뢰에 더 많이 의존하고 법에 덜 의존할수록,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은 더 잘 작동하는 법이다. ... 타인에 대한 믿음을 입증하느라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들일 필요가 없어진다면, 세상은 정말 훨씬 더 살기 편할 것이다.
<도덕감정론>에서도 밝혔지만 스미스가 가장 경멸한 사람은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었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란, 특정 설계나 비전에 따라 사회를 세우려 하는 지도자들을 뜻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기 위한 비전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그것이 이상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자신이 만든 비전에 파묻힌 그들은, 그로인해 자칫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이나 계획의 실행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 역시 보지 못한다. 시스템에 갇힌 몽상가는 그 일에 몰두해버린 채,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뿐만 아니라 그 계획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힘이 도사린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은 이 거대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자기 멋대로 쉽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체스판의 말들을 손으로 배열하는 것처럼 말이다. 체스판의 말들은 오직 사람의 손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체스판에서는 모든 말 하나하나가 자율성을 갖고 있다. 즉 입법 기관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율성과 외부적 힘, 그 두가지가 서로 일치하고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면, 인간 사회라는 게임은 편안하고 조화롭게 진행될 것이다. 게임의 결과 또한 행복하고 성공적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두 가지가 서로 반대되거나 다르다면, 인간 사회라는 게임은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 사회는 최악의 무질서 상태에 처할 것이다.
세상은 복잡한 곳이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억지로 애쓰지 말자. 내가 손잡이를 힘껏 돌린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문이 다 열리는 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 지주들이 주민들에게 땅을 똑같이 나눠준것처럼, 생필품도 똑같이 분배한다. 이런 식으로 지주들은 무의식중에, 부지불식중에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인류가 살아갈 수단을 제공해준다. 하늘의 섭리는 소수의 위풍당당한 지배자들에게 땅을 나눠줄 때, 땅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잊은 것도, 내버린 것도 아니다. 그 사람들은 땅을 받지 못한 대신, 땅에서 나오는 수확물을 받는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구성하는 요인을 생각했을 때, 그들의 행복은 지배자들의 행복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렇듯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안락하고 정신적으로 평화로운 삶의 수준을 거의 동일하게 누린다. 큰길가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거지조차도 안정을 맘껏 누린다. 이 거지들이 누리는 안정은 왕들이 전투를 해서라도 얻으려는 안정과 다를 바 없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이 시간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 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