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 에너지 기반의 증기, 내연기관을 바탕으로 한 1, 2차 산업혁명은 생산성, 효율성에 기반한 소유와 소비에 집중했다면 3차 산업혁명은 신재생 에너지와 이를 활용한 기술, 협력적 이해관계, 연결성, 상호 의존에 기반을 둔 지속가능한 환경,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의 현재 진행형이다.

 

 

[본문발췌]

 

 

나는 2008년 7월에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을 세계화의 정점으로 정의한다. 우리는 이미 화석 연료와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 시스템 내에서 글로벌 경제성장을 확대할 수 있는 최댓값, 즉 그 외곽 한계에 도달해 있다. 현재 우리는 석유 시대와 그에 기반한 2차 산업혁명의 종반전에 접어들었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여야 할 냉정한 현실이다. 인류의 모든 구성원은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서둘러 전혀 새로운 에너지 체제와 새로운 산업 모델로 옮겨 가야 한다. 만약 그렇지 하지 않으면 문명의 종말까지 감수해야 할 것이다.

 

 

경제는 언제나 신뢰의 게임이다. 우리는 상업과 교역을 금이나 은이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그보다 더 중요한 예비 자원인 '대중의 신뢰'가 뒷받침해 왔다. 이 믿음이 강건할 때 경제는 번영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밝다. 대중의 믿음이 깨지면 경제는 추락하고 미래는 어둡다.

 

 

역사상 위대한 경제적 변혁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새로운 에너지 체계와 만날 때 발생한다.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은 새로운 에너지원을 이용해 전보다 복잡한 문명을 체계화하고 관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새로이 부상하는 인프라는 시간을 줄이고 공간을 좁혀 사람과 시장이 보다 다양한 경제적 관계를 형성하도록 돕는다. ...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경제적 유기체를 감독하고 조정하고 관리하는 중추신경계 역할을 하며, 에너지는 정치적 통일체를 순화하며 경제가 살아서 성장하도록 자연의 산물을 재화와 용역으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자양분을 공급하는 혈액 역할을 한다. 결국 인프라는 갈수록 많은 수의 사람이 보다 복잡한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맺도록 돕는 살아 있는 시스템과 유사하다. 

 

 

인쇄에 도입한 증기력 기술은 인쇄물이라는 매개체를 1차 산업혁명을 관리하는 주요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변형시켰다. .... 20세기 첫 10년 동안, 전기 커뮤니케이션(전화, TV, 라디오)은 석유 동력의 내연기관과 조우해 2차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결합이 3차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21세기에는 수억 명의 사람이 자신의 가정과 직장, 공장에서 직접 녹색 에너지를 생산하여 지능적인 분산형 전력 네트워크, 즉 인터그리드로 서로 공유할 것이다.

 

 

3차 산업혁명은 1차 산업혁명이 19세기에, 2차 산업혁명이 20세기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21세기에 크나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나아가 앞선 두 차례의 혁명이 그랬듯이 우리가 일하고 살아가는 방식의 모든 측면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것이다. 화석연료에 기반한 산업혁명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생활 대부분을 특정지었던 상의하달식 사회구조는 물러가고 분산 및 협력 관계가 주를 이루는 녹색 산업 시대가 부상할 것이다. 우리는 현재 사회구조가 계층적 권력에서 수평적 권력으로 이동하는 심오한 변화의 시기를 목도하고 있다. 

 

 

3차 산업혁명의 다섯 가지 핵심 요소

  • 탄소에 기초한 화석연료 에너지 체제에서 새로운 재생 가능 에너지 체계로 전환한다.

  • 모든 대륙의 건물을 현장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미니 발전소로 변형한다.

  • 모든 건물과 인프라 전체에 수소 저장 기술 및 여타의 저장 기술을 보급하여 불규칙적으로 생성되는 에너지를 보존한다. 모든 건물과 사회 인프라 전체에 수소 또는 여타의 저장 기술을 보급하고 불규칙적으로 생산되는 재생 가능 에너지를 저장하여 지속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녹색 전력의 공급 체계를 확보한다.

  • 인터넷 기술을 활용하여 모든 대륙의 동력 그리드를 인터넷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하는 에너지 공유 인터그리드로 전환한다. (수백만 개의 빌딩이 소량의 에너지를 생성하면 잉여 에너지는 그리드로 되팔아 대륙 내 이웃들이 사용할 수도 있다.)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이용하여 전기 그리드를 지능형 공익사업 네트워크로 전환함으로써(인터넷 상에서 정보가 생산되고 공유되듯이) 수백만 명이 주거지나 건물에서 직접 생산한 녹색 전력 그리드로 보내 오픈 소스 공유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 나눠 쓰도록 한다.

  • 교통수단을 전원 연결 및 연료전지 차량으로 교체하고 대륙별 양방향 스마트 동력 그리드상에서 전기를 사고팔 수 있게 한다.

 

1차, 2차 산업혁명 시대의 화석연료로 대표되는 에너지는 수직적 규모의 경제를 선호했고, 공급 사슬 전반에 걸쳐 중앙집중화된 거대 기업을 양성했다. 이런 거대 기업들은 적대적 분위기가 만연한 시장에서 경쟁하며 위계질서를 합리화한 경영진이 관리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3차 산업혁명 시대가 지향하는 풍부한 재생 가능 에너지는 분산된 수많은 기업을 시장이라기보다는 생태계에 가까운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비즈니스 협력 관계를 맺어 준다. 이 새로운 시대에 경쟁적 시장은 협력적 네트워크에 점차 밀려날 것이며, 수직적 자본주의는 분산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힘에 점점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제품 생산과 유통의 합리화를 위해서는 노동력의 합리화도 필요했다. 그 시점에 등장한 최초의 전문 경영인이 바로 프레더릭 테일러였다. 그의 과학적 경영 이론은 노동자의 페르소나를 새로운 중앙집권형 관료제 기업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운영 표준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테일러는 공학자들이 개발한 효율성 원칙을 차용, 노동자에게 적용하며 그들이 '살아 있는 기계'로 전환되길 기대했다. 그래야 표준화한 제품을 쏟아 내는 지속적인 생산공정과 동일한 형태로 그들의 작업을 최적화할 수 있었다. 테일러는 노동자의 효율성을 높이는 최상의 방법은 행동에서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과업을 어떻게 완수할 것인지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경영진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노동자가 나름의 생각에 준거해 노력을 기울인다면 방법론적 효율성이나 자본이 원하는 작업 속도를 강요하기가 불가능하다." 테일러는 중앙집권형 하향식 경영 체계에 합리적 권한 집행이라는 핵심 개념을 도입하여 모든 노동자에게 부과했다.

 

 

3D 프린팅... 3D 사업가들이 특히 첨삭식 제조(additive manufacturing)에 고무된 이유는 전통적 제조 방식에 비해 원재료가 10퍼센트밖에 들지 않을 뿐 아니라 공장 제조에 비해 에너지 소모도 적어 제조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기술을 더 많이 보급하면 현장에서 적시에 맞춤 제작품을 3D 프린터로 제작함으로써 물류 비용을 대폭 절감하는 한편 에너지 소비 또한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 경제 전체에 적용된다고 가정할 때, 원재료 절감과 제조 과정의 에너지 절약, 운송 비용의 감소 등 디지털 제조 과정의 전 단계에서 절약되는 에너지를 모두 합치면 1차, 2차 산업혁명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한 에너지 효율의 질적 개선이 이뤄질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제조 과정에서 사용되는 에너지가 현장 생산 재생 가능 에너지로 대체되면 수평적인 3차 산업혁명의 완전한 영향이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인터넷 소통으로 사회성의 많은 부분을 형성한 최근의 두 세대는 세상을 나눌 때, 하향식이며 폐쇄적이고 소유권 중심의 사고방식을 이용하는 사람 및 기관 그리고 수평적이며 투명하고 개방된 사고방식을 이용하는 사람 및 기관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3차 산업혁명의 통신 및 에너지 체계는 본질적으로 분산 및 협업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노드 사이트(nodal site, 교점지역)마다 협동조합 비즈니스 모델을 적용하는 게 유리하다.

 

 

엘리트 화석연료에서 분산형 재생 가능 에너지로의 에너지 체제 변화는, 생태학적 사고에 맞는 방향으로 국제 관계에 대한 개념 자체를 다시 정의할 것이다. 3차 산업혁명의 재생 가능 에너지는 그 양이 풍부하고 모든 곳에 존재하며 쉽게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지구 생태계에 대한 공동의 협력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에너지 접근성을 둘러싸고 적대적 행위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낮으며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협력할 가능성이 더 크다.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경쟁하기보다는 협력할 것이고 각자의 자립권보다는 소속감을 추구할 것이다. 지구가 상호 의존적인 생태 관계가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작동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생존은 우리 모두가 속한 지구 생태계의 안녕을 지키는 데에 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지속 가능한 발전의 진정한 의미이며 생물권 정치학의 핵심이다.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은 "우주의 총에너지 합은 일정하며 총엔트로피는 지속적으로 증가한다."고 선언한다.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소멸될 수 없다. 즉,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태초부터 변함없이 유지되었으며 우주의 종말이 올 때까지도 계속 그러하다는 얘기다. 에너지의 양은 고정되어 있지만 에너지의 형태는 계속해서 바뀌는데 언제나 한 방향으로만, 즉 사용 가능한 형태에서 사용 불가능한 형태로 바뀐다. 이쯤에서 열역학 제2법칙이 등장한다. 제2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언제나 뜨거운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 고농도에서 저농도로,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흐른다.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이 실제 세계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석탄 덩어리를 태우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석탄을 태우면 그 안에 있던 에너지는 하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에너지는 이산화탄소, 이산화황 등 여러 기체로 변해서 공중으로 흩어진다. 석탄 연소로 생겨난 에너지는 소멸되지 않지만 흩어진 에너지를 다시 모은 다음 원래의 석탄 덩어리로 만들어 재사용할 수는 없다. 독일의 과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에너지를 설명하기 위해 1868년에 '엔트로피(entropy)'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열역학법칙에 따른 관점에서 보면 경제활동이란 저 엔트로피 에너지 투입물을 자연에서 빌려 와 그것을 가치 있는 일시적 상품 및 서비스로 변형시키는 활동일 뿐이다. 그 변형 과정에서 생산한 특정 재화나 서비스에 포함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주변으로 상실되는 경우가 빈번한다. ... 모든 생물은 비평형상태다. 다시 말해, 모든 생물체는 평형상태와 거리가 멀며 이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이용 가능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항상 환경 전체의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예컨대 식물은 광합성 과정에서 태양에너지를 흡수하고, 그 집중된 에너지는 다른 동물이 직접 소비하거나 또는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을 때 간접적으로 소비한다. 대체로 더 진화한 종일수록 비평형상태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생명유지 과정에서 소비된 에너지를 주변 환경에 더 많이 토해 낸다.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에어빈 슈뢰딩거는 열역학 과정의 핵심을 잘 포착해 냈다. 그는 "유기체는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살아간다. 유기체는 환경으로부터 계속해서 질서를 빨아먹는다."라고 말했다. 생물학자들의 설명은 생명유지 방식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와 일치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끊임없이 에너지를 몸속에 흡수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에너지를 고갈시키며 엔트로피 쓰레기의 축적에 기여한다. 에너지 흡수를 멈추거나 또는 질병 때문에 신체가 에너지 대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우리는 죽는다. 신체는 죽음에 이르면 빠르게 분해되어 환경으로 돌아간다. 삶과 죽음은 모두 엔트로피 흐름의 일부이다. 

 

 

화학자 타일러 밀러는 생태계 안의 모든 포식 단계마다 이용 가능한 에너지가 소비되고 엔트로피가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단순화한 먹이사슬을 사용한다. 먼저 그는 포식자가 먹잇감을 집어 삼키는 과정에서 "80~90퍼센트의 에너지가 단순히 낭비되거나 열의 형태로 손실되어 주변 환경으로 빠져나간다."는 점을 지적한다. 먹잇감의 에너지 중 10~20퍼센트만이 포식자에게 흡수된다는 얘기다. 한 생물에서 다른 생물로 에너지가 변환되려면 에너지 소비가 필요하고 그 결과 에너지 손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복잡한 산업사회에서 인간이 자연의 자원을 소비할 식량으로 변환하는 과정에 수반되는 열역학적 결과를,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국가의 부를 인식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무엇을 암시하는가를 알아보자. 다음은 비프스테이크 한 접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다.

  • 450그램의 스테이크를 만들려면 사료용 곡물이 약 4킬로그램 필요하다. 사료의 11퍼센트만이 소고기를 만드는 데 쓰인다는 뜻이다. 나머지 사료는 변환 과정에서 에너지로 태워지거나, 정상적인 신체 기능 유지를 위해 사용되거나, 털이나 뼈처럼 먹을 수 없는 부위로 간다. 흔히 우리는 기름을 잔뜩 먹어 대는 차량의 에너지 비효율과 거기에 수반되는 낭비를 탄식하지만, 이는 곡물로 키우는 육류를 먹는 식습관에 수반되는 에너지 비효율과 낭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프랜시스 무어 라페는 <작은 행성을 위한 식단 Diet for a Small Planet>에서 곡류 생산에 사용되는 땅 1에이커는 육류 생산에 사용하는 땅 1에이커보다 다섯 배나 많은 단백질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1에이커를 소고기 생산에 사용하는 경우와 비교할 때 같은 면적에서 나오는 콩류는 열 배나 많은 단백질을, 잎 채소는 15배나 많은 단백질을 제공한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재배하는 곡류의 거의 3분의 1은 인간이 직접 소비하는 식량이 아니라 가축용 사료다. 따라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소수의 부유한 소비자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만끽하는 동안 다른 수억 명의 사람들은 영양실조, 기아,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다.

  • 농부들은 사료용 곡물을 재배하기 위해 화석연료 기반의 석유화학 비료, 살충제, 제초제를 다량 사용해야 한다. 또 농장 시설을 운영하기 위해 화석연료를 소비한다. 그리고 그 곡물을 소비할 가축들이 기다리는 기계화된 거대한 가축 사육장으로 운반하려면 더 많은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트럭, 기차, 선박을 동원해야 한다.

  • 사육장에서는 동물에게 온갖 종류의 약품을 투여한다. 성장 촉진 호르몬, 사료 첨가제, 때때로 처방되는 항생제 등을 사용하는데 이 역시 추가적인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소들은 비좁은 축사에서 사육되는데(심지어 5만 마리 이상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들끓는 파리가 홍안병이나 전염성 비기관염 같은 것들을 옮긴다. 이러한 질병을 막기 위해 화석연료로 만든 고독성 살충제를 고압 호스로 분사해서 축사를 독성 구름으로 채운다.

  • 충분히 살 찐 소들은 가축 운반용 트럭으로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고속도로를 통과해 도축장으로 간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화석연료 에너지를 추가로 사용한다.

  • 도축장에 도착한 동물을 도축대 위에 일렬로 세운 다음 공기총으로 기절시켜 땅바닥에 쓰러뜨린다. 일꾼은 뒷발굽에 체인을 걸어 동물을 거꾸로 들어 올린 후 목을 따고 피를 뺀다.

  • 죽은 동물은 전기로 구동되는 분해 라인을 따라 이동하며 이 과정에서 기계가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한다.

  • 이제 전기톱으로 도체를 부위별로 자른다. 목심, 갈비, 사태, 살코기가 된다.

  • 잘린 조각은 전기 구동 컨베이어 위에서 수십 명의 일꾼이 뼈를 바르고 다듬고 자른다. 그리고 최종 제품을 박스에 담는다.

  • 진공 포장한 소고기를 냉장 트럭에 실어 전국의 슈퍼마켓으로 배송한다.

  • 슈퍼마켓에 도착한 소고기 제품을 화석연료로 만든 비닐로 재포장하여 밝은 조명이 비치는 냉장 선반에 진열한다.

  • 소비자는 차를 몰고 식품점에 가서 고기를 산 다음 냉장고에 보관한다. 그 후 가스레인지나 전기스토브로 조리하여 먹는다.

 

우리는 변환의 속도와 제품 생산 속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추가 에너지 소모라는 대가를 지불한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말은 더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환경에는 더 많은 엔트로피가 쌓인다는 말과 같다.

 

 

열역학적 효율의 관점에서 볼 때, 생산성이란 단위 산출물당 속도일 뿐만 아니라 단위 산출물당 발생한 엔트로피이기도 하다.

 

 

위키피디아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 공간들은 인간이 본래 이기적인 존재로서 끊임없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자 한다는 고전 경제이론이 기본 가정에 도전장을 던진다. 3차 산업혁명의 커뮤니케이션 및 에너지는 고전 경제 이론에서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른 생물학적 욕구를 끌어낸다. 바로 사회적 교류의 욕구와 공동체에 대한 추구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환을 가장 잘 반영하는 부분은 소유권에 대한 우리의 태도 변화다. 과거 소유권 개념에서는 시장에서 물리적 물건을 획득하여 타인을 배제한 채 그것을 즐길 권리를 갖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소유권 개념, 즉 소셜 네트워크의 정보를 얻고 타인과 공동의 경험을 공유할 권리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대개 우리가 생각하는 소유권 개념은 소유와 배제라는 전통적 개념과 긴밀히 엮여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향유해 온 더 오래된 소유권(즉, 공동 소유물에 대한 접근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배를 이용해 강을 이동하고, 숲에서 식량을 찾고, 시골길을 걷고, 가까운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공공 광장에서 회합을 갖는 권리 같은 것 말이다. 근대에 이르자 접근과 포함을 가능케 하는 이러한 오래된 소유권 개념은 점차 옆으로 밀려났다. 시장에서의 관계가 생활을 지배하고 사유재산이 '인간의 기준'을 정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산과 협업이 특징인 경제에서는 글로벌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접근 권리가 시장에서 사유재산을 보유할 권리 못지않게 중요하다. 삶의 질과 관련된 가치들, 그중에서도 특히 가상공간에서 글로벌 공동체의 다른 수많은 사람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호 연결된 세상에서는 인터넷 접근권이 강력하고 새로운 재산권 가치를 지닌다.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중앙집권적인 통신기술이나 화석연료, 원자력발전소를 시장에서 소유하려면 엄청난 자본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은 이제 새로운 분산 자본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분산 자본주의에서는 수평적 네트워크에 들어가기 위한 진입 비용이 낮기 때문에 개방적인 인터넷과 인터그리드를 이용하여 사실상 누구나 미래의 기업가나 협력자가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거대 기업을 시작할 때 적어도 초기 단계에서는 금융자본보다는 사회적 자본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20대 젊은이들이 학교 기숙사 방에서 구글이나 페이스북, 여타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든 사실을 생각해 보라. 금융 자본이 이제 무의미해졌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금융자본을 사용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경제가 수평적으로 변하고 보다 분산적이 되면 개별적 교환보다는 피어투피어 관계가 더 유리하다. 기업이 수익을 창출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소유물을 생산하여 교환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주춧돌이었다. 하지만 교환 비용이 점점 더 싸져서 결국은 사실상 제로가 되는 지능형 경제에서는 그러한 소유물 교환 방식으로 수익을 내기가 힘들다. 이러한 과정은 이미 진행 중이고 앞으로 3차 산업혁명이 무르익으면서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시장에서 소유물을 교환하는 방식은 점점 사라지고 협업 네트워크 상에서 관계를 맺는 일이 늘어날 것이다. 또 판매를 위해 생산은 필요에 따른 즉각적인 이용을 위한 생산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뉴욕 타임스> 기자 마크 러바인은 이러한 새로운 사고 변화를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표현했다. "공유와 소유의 관계는 아이팟과 8트랙 녹음테이프의 관계, 태양광전지판과 탄광의 관계다. 공유는 깨끗하고 신선하며 세련되고 포스트모던하다. 반면 소유는 지루하고 이기적이며 소극적이고 후진적이다."

 

 

이제 새로운 모습의 미래가 삶의 질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다. 바로 협력적 이해관계, 연결성, 상호 의존에 기반을 둔 미래가 그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타인에게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고 고립된 섬과 같은 존재가 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 깊이 참여할 때 얻을 수 있다. 자유가 삶의 최적화라면, 그것은 개인의 경험이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가, 또 사람들과 얼마나 강력한 사회적 유대를 맺는가를 토대로 측정해야 마땅하다. 외딴 존재로 살아가는 삶은 딱하고 무의미하다. 삶의 질이라는 꿈은 집단 내에서만 실현할 수 있다. 고립되어 타인을 배제한 채로 높은 삶의 질을 향유하기는 불가능하다. 삶의 질을 획득하려면 모든 사람이 공동체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어느 한 사람 뒤처지지 않도록 모든 구성원이 깊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계몽주의 경제학자들은 행복과 '훌륭한 삶'이 개인적 부의 축적과 동의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3차 산업혁명의 문턱에 있는 오늘날 젊은 세대는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개인의 행복은 사회적 자본의 축적에 비례하기도 한다고 믿는다. ...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속한 더욱 커다란 공동체에 대한 구성원 모두가 집단적인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면, 과연 그 공동체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에 우리의 시공간적 터전은 임의적인 정치적 경계선을 넘어 생물권 자체를 아우르는 범위까지 확대된다. 

 

 

인류를 우리가 살아가는 더 큰 생명 공동체의 구조 안에 다시 자리 잡도록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첫 단계는 바로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관계를 지구 생태계의 생물학적 관계와 유사하게 만드는 일이다. 새롭게 등장한 과학적 세계관의 전제와 가정은 3차 산업혁명 경제 모델의 기저에 깔린 네트워크적 사고와 조화를 이룬다. 과거의 세계관은 자연을 그저 대상으로 보았지만 새로운 세계관은 자연을 관계의 집합으로 본다. 과거의 관점을 특징짓는 것이 분리, 몰수, 해체, 감축이라면 새로운 관점을 특징짓는 것은 결합, 보충, 통합, 전체론이다. 예전의 과학은 자연에서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든는 방법에 몰두했지만 새로운 과학은 자연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과거의 과학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힘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새로운 과학은 자연과의 협력을 추구한다. 과거의 과학은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독립을 중시했지만 새로운 과학은 자연에 참여하는 것을 중시한다. 과거에 우리는 자연을 식민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약탈하고 노예로 만들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은 자연을 우리가 함께 돌보고 가꾸어야 할 공동체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을 소유하여 개간하고 이용하고 소유할 권리를 지양하고, 자연을 돌보고 존중해야 할 의무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자연이 지닌 효용적 가치보다는 자연이 지닌 본질적이고 고유한 가치가 점차 주목받고 있다.

 

 

생물권의 영속과 생명체 보존에 알맞은 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생물 유기체가 끊임없이 지구화학적 과정으로 상호작용한다면, 인류가 오래도록 안녕과 행복을 구가하느냐의 여부는 과연 지구 활동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적 제약 내에서 삶을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고전주의 및 신고전주의 경제 이론과 실행 사례들은 자연에 대한 일방적 이용과 소비만을 강조함으로써 지구화학적 작용과 생물학적 작용 사이의 피드백 메커니즘을 훼손했으며 지구 생태계를 피폐하게 만들고 결국 지구의 기온과 기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인류가 하나의 종으로 살아남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공간을 수동적인 자원이 담긴 용기나 창고로 바라보는 고전 경제학적 관점 대신에, 활발하고 능동적인 관계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로 바라보는 관점이 자리 잡아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틀에서 보면 지구화학적 구조는 단순한 자원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지구상의 생명체를 존속시키는 상호작용 관계에 깊이 얽힌 일부분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우선순위는 생산성이 아니라 생성력에 놓아야 하며 자연을 순전히 실용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대신에 생물권을 유지하는 상호관계를 돌보고 지키는 데 힘써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효율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구조물의 지속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공학에 대한 접근법에서도 시장 효율성을 지니는 생산 리듬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재생 주기와 조화를 이루는 방법도 모색해야 한다. 생산성에서 생성력으로, 효율성에서 지속 가능성으로 초점을 바꾼다면 인류는 우리가 불가분의 일부를 구성하는 보다 큰 생물권 공동체의 조류와 리듬, 주기성과 다시 보조를 맞출 수 있다. 이것이 바로 3차 산업혁명이 지향하는 방향이다.

 

 

인간의 경제활동을 생물권의 리듬 및 주기성과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자연으로부터 독립해서 거리를 두고 자연에 힘을 행사하려는 인간의 생물학적 성향과 충돌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는 헛되다고 주장하는 회의주의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시간생물학(chronobiology)에 대해 설명하면 필경 그런 의구심도 잦아들 것이다. 미생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생물은 무수히 많은 생체시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생체시계들은 생물의 생리적 과정이 생물권 및 지구의 보다 커다란 주기와 조화를 이루도록 조절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내적, 외적 기능을 태양일(일주기 리듬), 태음월(달의 주기), 지구가 태양을 도는 1년 주기(연주기 리듬), 계절의 변화에 맞춰 조절한다. 심리학자 존 옴은 이렇게 말한다. "물리적 우주는 기본적으로 주기를 따른다. 달은 지구의 둘레를 공전하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공전하며 태양계도 적절한 때에 공간적인 위치를 바꾼다. 이 모든 현상은 주기에 따른 규칙적인 변화를 가져오며 생물 종들의 생존은 이러한 주기 리듬을 잘 따라 가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인간도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지구의 주기에 생물학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은 시공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 놓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도 지구의 시공간적 좌표 안에 긴밀하게 엮여 있다. 신체의 세포는 매순간 끊임없이 대체된다. 우리 몸은 일정한 활동 패턴을 보인다. 자연으로부터 저엔트로피 에너지가 몸속으로 들어와서 세포를 빠르게 보충해 놓고 빠르게 다시 환경으로 돌아가 재사용된다. 인간 개개인은 생물권 전체를 흐르는 에너지 흐름과 지구화학적, 생물학적 과정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구조물이다. 태양계 내에서 생명체와 지구화학적 과정, 지구의 주기성은 정교하게 조정된 관계를 맺으면서 상호작용하며, 이로 인해 각각의 생물체와  생물권 전체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 대부분의 기간에 인류는 지구의 리듬에 맞춰서 살았다. 하지만 1차, 2차 산업혁명의 화석연료 에너지 때문에 인류는 처음으로 지구의 주기성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날마다 24시간 내내 켜진 조명, 끊임없는 인터넷 사용, 비행기 여행, 교대제 근무를 비롯하여 오늘날 이뤄지는 수많은 활동 때문에 우리는 태고부터 지녀온 생체시계와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생존에서 태양과 계절 변화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크게 감소했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탄소 기반 연료라는 형태로 저장된 풍부한 비활성 에너지 저장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우리는 인류의 번영을 좌우하는 것이 자연의 순환주기가 아니라 인간의 독창적 능력과 기술 발전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안다. 인위적인 생산리듬, 특히 기계를 동원한 효율성의 제도화는 수많은 사람에게 막대한 물질적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그 대가로 지구의 생태계가 위태로워졌고 지구 생물권의 안정성이 크게 위협받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3차 산업혁명은 다시 희망의 빛줄기를 보여 준다. 지구 생물권의 에너지 흐름(태양, 바람, 물순환, 바이오매스, 지열, 파도와 조수 등)에 의존하면 우리는 다시 지구의 리듬과 주기성에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생물권의 생태 시스템과 다시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우리 개개인의 생태발자국이 다른 모든 인간과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안녕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GDP를 재고하고 경제적 번영의 측정 방식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 생산성에 대한 관점을 수정하는 것, 엔트로피 부채를 인식하고 자연의 흐름에 맞도록 생산과 소비 균형을 맞추는 최적의 방법을 찾는 것, 소유관에 대한 개념을 재점검하는 것, 금융자본 대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을 재평가하는 것, 시장 대 네트워크의 경제적 가치를 재측정하는 것,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바꾸는 것, 지구 생물권이 작동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경제 이론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 ... 전통적인 경제 이론 가운데 여전히 가치를 지닌 통찰과 내용을 열역학의 렌즈를 통해 재고하고 수정할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 법칙을 일종의 공용어로 사용한다면 경제학자들도 공학자나 화학자, 생태학자, 생물학자, 건축가, 도시설계 전문가들(특히 이들이 종사하는 분야는 에너지 법칙에 기반을 둔다.)과 함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실제로 경제활동을 만드는 것은 이런 분야이므로, 진지한 학제 간 토론이 이뤄진다면 경제 이론과 실제 경제활동이 새롭게 통합되고 아울러 3차 산업혁명 패러다임에 동반되는 새로운 경제 모델이 출현할 수 있다. 변화가 필요한 것은 경제학만이 아니다. 경제 이론과 마찬가지로 공교육 시스템도 근대 시장의 시대 초기에 도입된 이래 별로 바뀌지 않았다. 고전주의 및 신고전저의 경제 이론과 마찬가지로 공교육 시스템도 1차, 2차 산업혁명의 시녀 역할을 해 왔으며 1차, 2차 산업혁명 상업 질서의 가정, 정책, 관습 들을 그대로 반영해 왔다. 이제 중앙집권화한 2차 산업혁명에서 수평적인 3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옮겨 가면 교육 시스템도 새로운 단장이 필요하다. 교육을 지배하는 기본 틀과 거기에 맞춰져 있는 교수법을 재검토하는 작업은 물론 쉽지 않다. 전 세계의 많은 교사는 교육 방식을 개조하는 길에 이제 막 들어섰다. 생물권 세상에 속하는 분산적이고 협업적인 경제사회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젊은 세대애 에 맞도록 교육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수렵채집 사회는 구전 문화를 토대로 했으며 '신화적 의식'에 젖어 있었다. 관계문명은 문자를 중심으로 조직화되었고 세계의 종교와 '신학적 의식'을 낳았다. 200년 전에는 인쇄 기술이 석탄과 증기기관 기반 1차 산업혁명의 수많은 활동을 조직하는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역할하며 계몽주의 시대와 더불어 신학적 의식에서 '사상적 의식'으로 변혁을 이끌었다. 20세기에는 전기전자통신이 석유 경제 및 자동차에 기반을 둔 2차 산업혁명을 관리하는 지휘 통제 메커니즘이 되었다. 전기전자통신은 새로운 '심리학적 의식'을 낳았다. 이제는 분산형 정보통신기술이 분산형 재생 가능 에너지와 만나 3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인프라를 만드는 동시에 '생물권 의식'을 위한 길을 닦고 있다. 다양성을 지닌 모든 인류를 하나의 가족으로 바라보는 시대, 지구상의 모든 다른 종을 공동 생물권 안에서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진화론적 의미의 대가족으로 바라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점차 부각하는 우리의 생물권 의식은 진화생물학, 신경인지과학, 아동발달 연구 분야에서 나온 연구 결과와 부합한다. 이 새로운 연구 결과는 공감하는 성향이 인간에게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많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믿었던 바와 달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성적이고 무심하고 욕심 많고 공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아니며 자애롭고 사교적이고 협동과 상호 의존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호포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점차 물러가고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가 떠오르고 있다. 사회사학자들은 점점 더 개인화되고 다양성이 커져 가는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 친밀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또 그럼으로써 사회 전체를 결속하는 사회적 접착제가 바로 공감이라고 말한다. 공감 수준이 곧 문명화 수준이라는 것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살아 남아 번성하려고 애쓰는 다른 생명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 생명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가치를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인식한다. 공감을 통해 우리는 동료 생명체들에 대한 연대감을 표현한다. 

 

 

교육에 대한 기존의 하향식 접근법에서는 경쟁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접근법은 지식의 사회적 성격이 아이들에게 스며들도록 하는 분산적이고 협업적인 교육 경험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관점에서 볼 때 지식은 전 세대로부터 물려받는 유산이나 축적 가능한 자원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분산 및 공유되는 경험이다.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은 젊은 세대들이 인터넷의 오픈 소스 교육 공간이나 소셜 미디어 사이트에서 정보와 아이디어, 경험을 공유하고 학습하는 방식과 닮은꼴이다. 또한 분산적이고 협업적인 교육은 21세기 인재들이 분산과 협업을 특징으로 하는 3차 산업혁명 경제에 적응하도록 준비시킬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분산적이고 협업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면 스스로를 공감적 존재로, 점점 더 포괄적인 성격으로 변해가는 공동체 안에서 공유 관계들의 거미줄에 얽혀 있는 공감적 존재로 본다는 점이다. 그러한 공유 관계들은 결국 생물권 저체로 확장된다. 분산적이고 협업적인 관점은 학습이 언제나 본질적으로 사회적 경험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참여를 통해서 배우고 학습한다. 전통적인 교육에서는 학습이 사적인 경험이라는 관점을 장려했지만, 실제로 "사고 과정은 사람의 내면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우리는 누구나 혼자서 숙고하는 시간을 갖지만 결국 생각의 내용은 타인과 공유한 과거의 경험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공유한 의미를 내면화하여 흡수한다. 새로운 교육 개혁가들은 가상공간에서든 현실에서든 벽을 허물고 보다 분산적이고 협업적인 학습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으라고 강조한다.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고, 창조적 탐구, 문제 해결, 지적 발달을 위한 기회를 자연계만큼 풍부하게 제공하는 영역은 거의 없다." - 스티븐 캘러트

자연은 경외감과 경이로움의 원천이다. 자연이 없다면 인간의 상상력도 존재할 수 없고, 상상력이 없으면 인간 의식도 퇴화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세상은 신선하고 새롭고 아름다우며 경이로움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인간 존재의 경계를 넘어서는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지켜 주고 키워주는 것은 어떤 가치를 지닐까? 자연계를 탐험하는 것은 단순히 어린 시절이라는 황금기를 즐겁게 보내는 방법일 뿐인가, 아니면 거기엔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나는 거기에 분명히 더 깊은 의미가, 영구적 힘을 가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확신한다. ... 지구의 아름다움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은 삶을 지속하는 한 사그라지지 않을 강인함을 비축하는 것과 같다.' - 레이첼 카슨. 

 

 

온갖 종류의 전자 매체를 통한 자극이 넘쳐나고 끊임없이 정보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자란 요즘 청소년들은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연구 결과가 최근 속속 등장했다. 교실에서는 멀티태스킹과 주의력 분산이 일상화되었고, 곰곰이 생각하여 사고를 조리 있게 정리하고 집요하게 생각하여 결론을 이끌어 내는 능력을 아이들에게서 찾아보기가 점점 힘들다.

 

 

생물권 전체로 확장한 사고를 토대로 하는 공감적 경험, 분산적이며 협업적인 학습 과정을 채택하는 쪽으로 교육이 변화한다면, 우리는 역시 분산과 협업, 공감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3차 산업혁명 패러다임에 필요한 비판적 사고 능력과 의식을 아이들에게 키워 줄 수 있다.

 

 

3차 산업혁명은 대산업 시대 전설의 마지막 편이면서 동시에 다가오는 협업 시대의 첫 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3차 산업혁명은 경제사의 두 시대, 근면한 행동 방식이 특징이던 시대와 협력적 행동 방식이 특징인 시대를 잇는 과도기를 의미한다. 산업 시대가 규율과 근면한 노동, 권위의 하향식 흐름, 금융자본의 중요성, 시장의 작용, 소유권 관계를 중시했다면 협업 시대는 창의적인 놀이와 피어투피어 상호작용, 사회적 자본, 개방형 공유체 참여, 글로벌 네트워크 접속 등을 보다 중시한다.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농경이 기계적, 화학적 대용물로 인간 노동을 대체하기 시작했을 때 대체된 수백만 명의 인력은 도시로 이주해 공장의 숙련, 비숙련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공장들이 자동 생산을 시작했을 때 수백만 명의 블루칼라 인력은 셔츠를 바꿔 입고 기술을 업그레이드해서 급성장하는 서비스산업에서 화이트칼라 노동력에 합류했다. 마찬가지로 서비스산업이 대량 노동을 지능형 기술로 교체하기 시작했을 때 그 인력은 의료사업과 복지사업, 엔터테인먼트, 여행 및 관광 등의 돌봄산업 및 체험 분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오늘날 농경, 산업, 서비스, 돌봄 및 체험 등 네 분야 모두가 대량 임금노동을 소규모의 하이테크 노동력과 정교하고 신속한 스마트 기술 시스템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이 3차 산업혁명의 인프라 단계를 지나 완전한 분산 및 협업 시대에 접어들면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산업 시대의 대량 임금노동자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보면 이 경우의 일에 대한 개념 변화는 수백만 명의 농노들이 봉건제도의 고용 관계에서 해방되어 자유계약자가 되도록 강요받으며 시장경제에서 임금노동자가 되었던 시절의 대격변과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단순히 노동력을 어떻게 재교육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의미를 어떻게 재구상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 할 수 있는 영역은 시장, 정부, 비공식 경제, 시민사회로 네 곳이다. 그러나 지능형 기술 시스템 도입으로 시장 부문의 고용은 계속 줄어들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정부도 조세 징수나 국방 서비스와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노동력을 줄이고 지능형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 비공식 경제는 가내 생산이나 물물교환, 극단적으로는 암시장이나 범죄적 경제활동 등을 포함하는데, 전통적 경제가 하이테크 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비공식 경제도 줄어들 것이다. 결국 고용 수단으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시민사회뿐이다. 이 영역은 종종 '제3부문'으로 불리는데 이 표현에는 시장이나 정부보다 덜 중요하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이 부문의 단체들 또한 '비영리'나 '비정부기구'라는 과소평가된 용어로 불린다. .... 시민 사회는 인간이 사회적 자본을 만들어 내는 곳으로 종교 및 문화 단체, 교육, 연구, 의료, 사회복지, 스포츠, 환경 그룹, 오락 활동, 사회적 연대를 조성키 위한 목적의 지지 단체 등 다양한 범위의 이익 단체로 구성된다. 

 

 

지구상 곳곳의 똑똑한 젊은이들 상당수가 시장이나 정부의 전통적인 일자리를 회피하고 비영리 제3부문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인터넷과 함께 자라고 분산 및 협업 소셜 공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세대는 제3부문의 분산 및 협업 특성을 보다 매력적인 대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가상공간의 힘줄을 구성하는 오픈 소스 공유체처럼 제3부문 역시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공유하고 사회적 연결이라는 순전한 기쁨을 맛보며 함께 살아가는 공유체다. 또한 인터넷과 마찬가지로 시민사회의 핵심 전제도 더 큰 네트워크 공동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는 것이 개별 구성원뿐만 아니라 전체 그룹의 가치를 최적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시장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대개 도구적이며 목적(각 개인의 물질적 사리를 최적화하는 것)을 위한 수단이다. 이와 달리 제3부문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그래서 단순한 실용적 가치보다 내재적인 가치로 충만하다.

 

 

19세기와 20세기의 산업혁명이 사람들을 농노 신분과 노예제도, 도제 노동에서 해방한 것과 마찬가지로 3차 산업혁명과 그로 인한 협업 시대는 인간을 기계화한 노동에서 해방하고 심오한 놀이(deep play)에 참여케 할 것이다. 사회성이란 결국 놀이의 문제다. 내가 '심오한 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하찮은 오락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동료 인간과의 공감적 접촉 유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오한 놀이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공동의 노력 과정에서 우리가 서로를 경험하는 방법이다. 또한 스스로를 초월해서 더 크고 포괄적인 생명 공동체에 연결하는 방식이다. 제3부문은 결국 우리가 우리 존재의 의미 탐구라는 인생 여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아주 단순한 수준으로라도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이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시장 시대의 여명기인 1795년에 작성한 논문 <인간의 미학 교육에 관한 고찰(On the Aesthetic Education of Man)>에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은 자신이 인간임을 완전히 느낄 때만 놀이를 한다. 그리고 사람은 놀이를 할 때만 온전히 인간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근면함이 사람의 표지였고 생산적인 노동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물질적인 부를 맹렬하게 추구하면서 수세대의 사람들이 기계로 변했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살았다." 3차 산업혁명과 협업 시대는 인류를 실용적 세계에 갇힌 기계화된 삶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를 들이마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놀기 위해 산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자유와 놀이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포착해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고 싶을 때.... 그의 활동은 놀이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는 덧붙이고 싶다. 사람이 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다고 느낄 때가 있는가?

 

 

향후 40년은 우리에게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밀레니엄 세대와 그 자녀들은 산업 경제와 협업 경제 양쪽 모두에서 일하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갈수록 더 많이 시민사회에 고용되어 사회적 자본을 창조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상업 영역에서는 인간 노동의 많은 부분(물론 전부는 아닐 것이다.)을 지능형 기술로 대체할 것이다.

 

 

경제적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고되고 단조로운 일에서 인류를 자유롭게 한다는 전망은 오랜 세월 철학자들의 꿈이었다. 인간 영혼이 날아올라 존재의 의미와 거대한 세상 구조 속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면, 그 오래된 영적 탐구를 하면서 광활한 사회적 미개척지를 배회할 수 있다면, 지구상 모든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지상의 한정된 시간 중 과도하게 많은 부분을 생존이라는 최소한의 안락을 꾸려가는 데 사용했다. 초월적 영역에서 심오한 놀이를 즐길 시간도, 삶을 반추할 여유도 거의 없었다. 

 

 

시민사회를 발전시키고 사회적 자본을 창조하는 데 우리의 시간과 관심을 더 많이 쏟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당연히 매혹적이므로 전 세계 선진국 곳곳에서 급속히 호응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류의 40퍼센트가 하루에 2달러 이하를 벌고 있다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정도의 돈이다. 이 비극적인 현실은 두 가지 요인으로 더욱 악화되고 있다. 하나는 기본 식량과 건축자재에서 교통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가격이 무서울 정도로 변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더욱 섬뜩한 것으로, 2차 산업혁명이 긴 종반기에 들어서면서 기후변화가 세계 농경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3차 산업혁명은 적어도 1차, 2차 산업혁명에서 사실상 소외되었던 지구상 극빈국들도 다음 50년 동안에는 분산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대로 도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실 나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의 막대함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시장과 비공식 경제 부문에서 단순 노역과 고된 노동을 하고 있는 인류의 40퍼센트에게 그 고역의 족쇄에서 해방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안위 수준을 확보해 주는 것, 나아가 그들이 자유롭게 사회적 자본을 추구하면서 심오한 놀이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위압을 느낄 정도로 벅찬 과제다. 산업이 유발한 기후변화를 완화할 수 있도록 경제생활을 재조직해야 할 필요성까지 감안하면 더욱더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최소한 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희망을 갖는다. 

 

 

역사에 등장한 모든 문명은 중요한 심판의 순간을 경험했다. 어떤 문명이든 새로운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급격히 경로를 변경하거나 아니면 종말의 가능성을 맞이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얘기다. 일부는 제때에 스스로 변화할 수 있었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문명의 붕괴가 시공간적으로 한정된 범위에서 일어났고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지금 이 시점이 과거와 다른 까닭은 기후변화로 지구의 온도와 화학 구성의 질적 변화 가능성이 증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는 동식물의 대멸종을 불러올 수도 있고 그와 더불어 실제로 우리 인류가 대규모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당면한 중대 과제는 인류의 공적 자본, 시장 자본, 특히 사회적 자본을 활용해서 3차 산업혁명 경제와 탄소 후 시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런 규모의 변화를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생물권 의식으로 도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 인류뿐만이 아니라 지구 위에서 진화를 겪으며 체류 중인 동료 여행자 모두를 확장된 글로벌 가족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공유하는 생물권 공동체를 구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이행성을 쇄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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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배추, 무가 무럭무럭. 비오니 한 포기 뽑아서 배추전! 달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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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찬바람 불고 가을이 깊어간다.

점심 먹고 장성 축령산 치유의 숲 산책길, 초록과 단풍, 파란 하늘이 어우러진 자연의 풍경화!

집에오니 나무에서 홍시로 익어가는 몇개 남은 감, 노랑, 하얀 색색이 국화꽃이 가을, 가을, 가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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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 가운데 진보와 발전을 통해 더 살기 좋아졌다고 착각하면서 삶의 터전과 생태계를 파괴하며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레이첼 카슨이 말처럼 자연에 대한 겸손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력으을 발휘해 지속가능한 삶으로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류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지배력을 발휘해 보여야 할 상황에 처했습니다.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

 

 

[본문발췌]

 

 

"과학이 예술처럼 그 사명을 진실하고 온전하게 수행하려면, 대중이 과학의 성취를 그 표면적 내용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 아인슈타인, 1939년 뉴욕 박람회 연설 중

 

 

과학은 사랑처럼 그런 초월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하나 되어 온전하게 살아가는 벅찬 경험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과학이 자연에 접근하는 방식과 내가 이해하는 사랑의 방식은 같다. 사랑은 우리에게 자신의 바람과 두려움을 상대에게 유치하게 투사하는 대신 상대의 현실을 받아안으라고 말한다. 그런 강인한 사랑은 계속 더 깊이 파고들고 더 높이 오르려고 애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과학이 자연을 사랑하는 방식이 꼭 그렇다. 최종 목적지, 즉 절대적 진리를 가정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과학이 성스러운 탐색에 걸맞은 방법론이 되어주는 이유다. 방대한 우주는 - 그리고 그 방대함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 주는 사랑은 - 교만한 자에게는 자신을 열지 않는다. 코스모스는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수시로 상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만을 온전히 받아 준다. 우리는 우리가 현실로 믿고 싶은 것보다는 진짜 현실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나는 우리가 자연을 완전히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는 어둠의 커튼을 살짝 들추는 방법을 하나 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의 기본 규칙들이다. 어떤 발상이든 실험과 관찰로 확인해 볼 것. 시험을 통과한 발상만 받아들일 것. 통과하지 못한 발상은 버릴 것. 어디든 증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의심할 것. 권위에 대해서도. 이 규칙들만 지킨다면, 코스모스는 우리 것이다. 

 

 

인류가 블룸보스 동굴에서 시작해 빛을 타고 별로 항해하게 되기까지 우주력으로 겨우 몇 분밖에 안 걸렸다니. 그렇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위험 천만하리만치 결정적인 분기점에 와 있다. 하지만 아직 너무 늦지는 않았다. 우리는 가장 뛰어난 정신들이 품었던 가장 터무니없는 희망들마저 거뜬히 달성할 수 있다는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 왔다. 여러분이 이 책에서 곧 만날 과거와 미래의 가능한 세계들, 그리고 곧 듣게 될 영웅적인 탐구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해 준다. 우리에게는 기술적 사춘기를 극복하고, 우리의 작은 행성을 보호하고, 시공간의 망망대해를 항해할 안전한 항로를 찾아냄으로써 "땅과 바다와 하늘"에 매인 처지에서 벗어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마음은 무력이 아니라 사랑과 이상으로만 정복할 수 있다. - 바뤼흐 스피노자, <에티카The Ethics>에서

 

 

지금 우리의 처지는 이렇다. 농업이 발명된 지 약 1만 년이 흘렀다. 우리는 코스모스를 알게 되었고, 그곳을 탐험하고자 아장아장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동시에 우리는 근시안적 사고와 욕심으로 우리 문명을 깡그리 무너뜨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런 결과를 피하려면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변할 수 있을까? 우리 종에게는 스스로를 바꿀 능력이 있을까? 아니면 우리 내면에는 어쩔 수 없이 자기 파괴로 내모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철학은 내일의 양심, 미래에의 헌신, 희망의 지식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 지식도 갖지 못할 것이다. -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희망의 원리The Principle of Hope>

 

 

뇌는 하늘보다 넓다 / 나란히 놓아 보면 / 뇌 안에 하늘이 쉽게 들어가고 / 더구나 당신까지 드러가니까 // 뇌는 바다보다 깊다 / 푸른 것에서 푸른 것까지 담아 보면 / 뇌가 바다를 흡수하니까 / 스펀지처럼 양동이처럼 // 뇌는 신의 무게와 같다 / 나란히 들어 보면 / 혹시 다르다 해도 그 차이는 / 음절과 음성의 차이 정도일 테니까 - 에밀리 디킨슨

 

 

무언가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결정적 특징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수준이야 어떻든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지 않고서는 그 일을 썩 잘 해낼 수 없을 것이다.

 

 

놔는 아주 좁은 공간에 든 아주 넓은 장소다.

 

 

과학자들이 찾아내려는 코스모스의 자연 법칙이 강력한 것은 그것이 결코 무효화되거나 깨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 법칙은 우리의 희망과는 무관하게 늘 참이다. 자연 법칙은 특정 장소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 모든 시간에 적용된다. 우리는 다른 세계의 지적 문명과 무엇을 공유할까? 과학과 수학이다. 과학자와 공학자가 쓰는 기호 언어인 수학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메시지가 번역될 때 손실이 없도록 해 준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비롯한 기호 언어들은 그냥 말보다 정확도가 훨씬 더 높다. 오해의 여지가 더 적다.

 

 

다윈의 연구는 인간이 나머지 생물들과는 다르게 창조되어 그들의 관리자로 선택된 생명계의 왕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인간은 오래된 생명의 대가족에서 뒤늦게 등장해 어쩌다 잘나가게 된 후손일 뿐이다. 다윈은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한 점 의혹 없이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그 밖의 다른 발견도 해냈다. 그는 만약 모든 생명이 정말로 연관되어 있다면 그 사실에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는 점을 처음 깨우친 사람이기도 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창조된 게 아니라면, 당연히 인간과 동물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공통점이 더 많지 않을까? 의식도, ... 다른 종들과의 관계도, .... 심지어 감정도? 

 

 

다윈은 우주에 인간의 의식이라는 외딴 섬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생명과 의식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에게 과학은 더 깊은 감정 이입과 겸손을 가져다주는 수단이었다.

 

 

숲 바닥에 숨겨진 세계를 처음 과학적으로 연구한 것도 다윈이었다. 그는 나무의 뿌리 끝이 일종의 뇌처럼 기능해서 감각 정보를 받아들이고 비록 느리기는 해도 나무가 움직이도록 이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또 다른 동물들도 우리처럼 즐거움, 고통, 두려움을 느끼는지 알아보고자 그들의 표정을 연구했다. 다윈은 어머니 자연에 깨달음을 간청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과학 지식은 그가 품은 연민의 바탕이었고, 그 연민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근거였다.

 

 

저는 우리 세계를 플랫랜드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의 행복한 독자들, 3차원 공간에서 사는 특권을 누리는 당신들에게 우리 세계의 본질을 좀 더 명확하게 알려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 에드윈 애벗 애벗(Edwin Abbott Abbott), <플랫랜드(Flatland)>에서

 

 

우리는 광자가 어떻게 입자인 동시에 파동일 수 있는지 아직 모른다. 내가 과학에서 좋아하는 점 중 하나는 과학이 우리에게 모호함을 참아내는 능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자신의 무지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도록 요구한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변변찮으나마 이미 가진 지식을 활용해 현실의 새로운 언어들을 찾아보고 해독하는 일만은 문제없이 계속할 수 있다. 이 방대한 코스모스에서 우리는 모두 플랫랜더다. 그런 우리가 위를 상상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인류가 의식하는 시간 범위는 농업의 발명과 함께 비약적으로 커졌다. 사람들은 몇 달 뒤의 수확을 바라고 지금 작물을 기르며 장시간 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의 이득을 위해서 현재의 만족을 미뤘다. 미래를 계획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방랑자였다. 우리는 100킬로미터에 걸쳐 서 있는 나무 하나하나를 다 알고 있었다. 과일이나 열매가 익었을 때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해마다 우리는 짐승 무리가 옮겨 다니는 곳을 따라다녔다. ...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다. 혼자 한다는 것은 한곳에 정착하는 일처럼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이 거대한 망원경은 과거를 돌아보는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주를 볼 때는 늘 과거의 천체를 보는 셈이다. 빛의 속도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해를 볼 때, 그 해는 사실 8분 20초 전의 해다. 다르게 볼 방법은 없다. 태양 빛이 지구까지 1억5000만 킬로미터를 달려오는 데 늘 그 만큼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주 이 망원경으로 다른 어떤 세계를 보더라도 역시 과거를 보는 셈일 것이다.

 

 

알쿠비에레 워프 드라이브의 멋진 점이 무엇인가 하면, 우주선이 아니라 우주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알쿠비에레 드라이브 우주선은 중력파를 발생시켜서 자신의 앞쪽에 있는 시공간은 압축시키고 뒤쪽에 있는 시공간은 팽창시켜서 광속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알쿠비에레 드라이브 자체는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공간에 잡힌 주름이 그 앞에서는 더 쪼글쪼글해지고 그 뒤에서는 더 넓어진다.

 

 

인류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지배력을 발휘해 보여야 할 상황에 처했습니다.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 레이첼 카슨

 

 

우리 우주는 약 140억 년 전 물질, 에너지, 시간, 공간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때 어둠은 차가웠고, 빛은 뜨거웠으며, 그 양극단이 결합함으로써 물질에 형태와 구조가 생겼다. 우리 태양보다 수백 배 더 무거운 별들이 생겨났다. 그 별들은 폭발하면서 이후 생겨날 세계들에 산소와 탄소를 공급해 주었고, 금과 은으로 장식해 주었다. 죽은 별들은 어둠이 되었고, 그 어둠의 무게는 빛을 비끄러매는 닻이었다. 그리고 그 별들의 수의에서 새 별들이 태어났다. 별들은 함께 어울려 춤추기 시작했고, 그러자 은하들이 생겨났다. 은하는 별을 낳았다. 별은 행성을 낳았다. 그 행성 중 최소한 하나에서, 뜨겁게 녹은 심장의 열기가 솟구쳐 나와서 물을 데웠다. 그러자 먼 별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던 물질이 생명을 얻어 살아났고, 별의 물질로 만들어진 생명은 결국 의식을 얻어 깨어났다. 그 생명은 땅에 의해 조각되었고, 살아 있는 다른 것들과의 싸움을 통해 조각되었다. 그리하여 커다란 나무가, 많은 가지를 길러낸 나무가 자랐다. 하마터면 여섯 번이나 쓰러질 뻔했지만, 여전히 용케 자라고 있다. 우리는 그 나무의 작은 한 가지일 뿐이고, 나무 없이는 우리도 살 수 없다. 우리는 서서히 자연의 책을 읽는 법을, 자연의 법칙을 배우는 법을, 나무를 보살피는 법을 익혔다. 우리가 코스모스라는 망망대해에서 언제,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코스모스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수단이, 별로 돌아가는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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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습관'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습관'을 고쳐야 한다는 경험이나 주변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형성된 인식이 아닐까?

 

'습관'은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경우에따라 중독이라는 것으로 발전해 삶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습관'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며, '습관'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발췌]

 

 

듀크 대학교 연구진이 2006년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우리가 매일 행하는 행동의 40퍼센트가 의사결정의 결과가 아니라 습관 때문이었다.

 

 

뇌의 기저핵이 패턴을 기억해서 패턴대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조절장치였다. 달리 말하면 뇌의 다른 모든 부분이 마비가 되어도 기저핵만 살아 있으면 우리가 습관대로 움직일 수 있다.

 

 

뇌가 일련의 행동을 기계적인 관례로 변환하는 과정은 '청킹(chunking, 덩어리짓기)'으로 알려져 있다.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의 근원에 청킹이 있는 셈이다. 우리는 매일 최소한 수십 가지의 행동덩이들을 반복하고 있다. 칫솔에 치약을 묻힌 다음에야 칫솔을 입에 넣는 단순한 행동덩이부터, 옷을 입거나 아이들의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행위처럼 다소 복잡한 행동덩이까지 다양하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습관이 형성되는 이유는 우리 뇌가 활동을 절약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기 때문이다. 어떤 자극도 주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뇌는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거의 모든 일을 무차별적으로 습관으로 전환시키려고 할 것이다. 습관이 뇌에게 휴식할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뇌가 활동을 절약하려는 본능은 우리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한다. 뇌가 효율적이면 그만큼 뇌에 필요한 공간이 줄어들고, 따라서 머리 크기도 작아질 수 있다. 머리가 작으면 분만하기가 더 쉬워지고, 따라서 분만 과정에서 영아와 산모의 사망률도 줄어든다. 또한 뇌가 효율적으로 작동한 덕분에 우리는 걷기나 먹는 것 등 기본적인 행위를 하는데 드는 에너지를 줄일 수 있었고, 남는 정신 에너지를 더욱 창조적인 일에 투자해서 칼과 관개시설을 만들 수 있었다.

 

 

우리 기저핵은 습관을 사용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는 기발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행동덩이를 시작하거나 끝낼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 우리 뇌에서 이런 과정은 3단계의 고리로 이루어진다. 첫 단계는 신호다. 신호는 우리 뇌에게 자동모드로 들어가 어떤 습관을 사용하라고 명령하는 자극이다. 일종의 방아쇠이다. 다음 단계는 반복 행동이 있다. 반복 행동은 몸의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심리 상태나 감정의 변화로도 나타날 수 있다. 마지막 단계는 보상이다. 보상은 뇌가 이 특정한 고리를 앞으로도 계속 기억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호 - 반복 행동 - 보상'이 반복되며 고리는 점점 기계적으로 변해간다. 신호와 보상이 서로 얽히면서 강렬한 기대감과 욕망까지 나타난다.

 

 

습관은 잊힐 수도 있고 변할 수도 있으며 대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습관 고리를 찾아내는 게 중요한 이유는 "어떤 습관이 형성되면, 뇌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걸 완전히 중단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뇌가 부지런히 활동하는 걸 멈추거나 다른 일로 관심을 돌린다. 따라서 어떤 습관을 떨쳐 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요컨대 새로운 반복 행동을 찾아내지 않으면 그 습관 패턴이 자동적으로 전개된다.

 

 

습관은 일반적인 생각보다 우리 삶에 훨씬 많은 영향을 미친다. 습관은 우리 뇌를 상식적인 판단을 비롯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오직 그 습관에만 매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무척 강력하다.

 

 

습관 고리가 뇌 속에서 점점 굳어지는데도 그런 패턴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습관 고리를 깨뜨릴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신호와 보상을 인식하는 법을 배우면, 반복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스콰이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기억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다가 유진 폴리를 통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행복한 삶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도 우리 뇌에는 행복을 찾아내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이 우리 삶을 해치더라도 그 능력을 없애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습관은 강력하다. 습관은 신경학적으로 열망을 조장한다. 이런 열망은 아주 점진적으로 자리 잡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런 열망이 존재하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습관의 영향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습관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신호와 보상만으로 부족하다. 신호는 반복 행동을 유발하는 자극제를 넘어서 보상을 열망하는 마음까지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열망은 습관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열망을 자극하는 방법을 알아내면 새로운 습관을 더 쉽게 형성할 수 있다.

 

 

습관을 영원히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변하기 위해서 한마음으로 서로 도울 때, AA(Alcoholics Anonymous) 프로그램에 효과를 더해 주는 과정(개개인에 믿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집단의 힘)이 그대로 일어난다. 공동체와 함께할 때 더 쉽게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습관을 바꿀 수 있을까?

  •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에게 효과 있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습관을 근절할 수는 없지만 습관을 바꿀 수는 있다. 또 "동일한 신호와 동일한 보상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반복 행동을 더하라"는 습관 변화의 황금률을 사용하면 습관을 가장 쉽게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습관을 항구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여기에 필요한 믿음은 같은 목적을 지닌 모임의 도움을 받을 때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다.
  • 담배를 끊고 싶다면, 담배에서 얻는 열망을 대신 채워 줄 새로운 반복 행동을 생각해내라. 그 다으메는 금연에 성공한 사람들의 모임이나, 니코틴을 멀리하고도 지낼 수 있다는 믿음을 당신에게 심어 줄 공동체를 찾아내서, 결심이 흔들릴 때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라.
  • 체중을 줄이고 싶다면, 당신의 습관을 면밀히 과날해서 간식거리를 찾아 매번 책상을 떠나는 이유를 알아내라. 그런 다음에는 카페테리아로 먹을 것을 찾아가는 대신에 당신과 함께 산책할 사람이나, 체중감량이란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는 모임, 혹은 가까운 곳에 감자칩보다는 잘게 썬 사과를 놓아두려는 사람을 구하라.
  •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습관을 바꾸고 싶다면 다른 반복 행동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모임의 일원으로서 습관을 바꾸려할 때 성공할 확률이 극적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습관의 변화에서 믿음은 필수적인 요건이다. 믿음은 공동체와 함께할 때 성장한다. 공동체라고 항상 대단한 규모를 생각할 것은 없다. 두 사람만으로도 공동체는 가능하다.
  • 변화가 가능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알코올 중독자도 술을 끊을 수 있고, 흡연가도 담배를 끊을 수 있다. 만년 패배자도 챔피언이 될 수 있다.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이나, 직장에서 간식을 먹는 습관도 끊을 수 있다. 아이들에게 소리치고, 밤을 꼬박 세우며, 작은 일에 쓸데없이 걱정하는 습관도 멈출 수 있다.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습관의 변화로 개인의 삶만이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습관이 바뀌면 기업과 조직 및 공동체의 운명도 달라진다.

 

많은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습관을 지닌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숙제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성적도 좋으며, 감정조절도 잘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매일 아침 자신의 손으로 침대를 정리하는 습관은 생산성, 행복지수, 예산을 통제하는 절제력 등과 상관관계가 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나 깔끔한 침대가 좋은 성적이나 절제된 삶의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변화가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다른 좋은 습관이 몸에 배도록 자극한 것만은 확실하다.

 

 

핵심 습관을 바꾸거나 함양하는 데 집중하면 광범위한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핵심 습관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핵심 습관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어떤 특징을 찾아나서는 것과 같다. 핵심 습관은 학계에서 '작은 승리(small wins)'로 알려진 것을 제공한다. 그리고 새로운 구조를 구축함으로써 다른 습관들이 형성되도록 지원하고, 변화가 점염병처럼 확산되는 문화를 형성한다.

 

 

핵심 습관은 다른 습관들이 형성되는 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변화를 유도한다. 

 

 

혼란이 닥쳤을 때야말로 책임을 부여하고 한층 공평한 세력 균형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조직의 습관을 바꿀 수 있는 적기이다. 위기에 직면하면 조직의 습관이 유연해지기 때문이다.

 

 

때때로 소비자는 습관의 동물처럼 행동하며, 현재의 목적에 관계없이 과거의 행동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한다.

 

 

새로운 습관을 마케팅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에 익숙한 것을 덧입혀서 낯선 것을 친숙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 습관이란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이 아무런 의식 없이 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그런 습관이 자신의 몸에 배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사회적 습관 때문에 서로 일면식도 없는 시위자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다양한 이유로 행진하지만 모두가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어떤 계획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규모 운동으로 발전하는 반면에 어떤 계획은 그렇게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도 사회적 습관에서 비롯된다. 사회적 습관이 그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 데는 대규모 혁명이든 교회 혁신 운동이든 간에 대다수 운동의 근저에는 세 단계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 첫 단계에서 사회운동은 가까운 지인들 간의 우애와 강력한 연대감으로 시작된다.
  • 다음 단계에서 사회운동은 이웃과 집단을 하나로 묶는 약한 연대감과 공동체의 습관 덕분에 커져 간다.
  • 마지막 단계에서는 사회운동의 지도자들이 참여자들에게 새로운 습관을 심어 준다. 변화된 정체성과 주인의식을 잉태하는 새로운 습관의 영향으로 사회운동은 지속된다.

 

"약한 연대를 맺지 않은 사람들은 사회체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정보를 거의 얻지 못하고, 지역 소식과 친한 친구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박탈로 인해 그들은 최근의 지식과 유행에서도 소외되고, 노동 시장에서도 불리한위치에 처할 수 있다. 노동시장에 진출하려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일자리가 비었다는 걸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 마크 그래노베터

 

 

모두가 갑자기 한꺼번에 똑같은 방향을 보기로 결심한다고 사회운동이 시작되지는 않는다. 어떤 사회적 패턴이 우정이란 습관으로 시작해서 공동체의 습관으로 발전하여, 참여자의 정체성을 바꿔 놓는 새로운 습관에 의해 유지될 때 사회운동은 가능해진다.

 

 

"적을 친구로 돌려놓을 만큼 사랑하십시오. 이제 우리는 저항에서 화해로 옮겨가야 합니다. ... 그런 헌신이 있을 때 우리는 인간이 인간을 잔혹하게 대하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암흑에서 벗어나, 자유와 정의가 살아 있는 밝고 환한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역사적으로 신경과학에서는 뇌손상이 있는 환자는 자유의지를 부분적으로 상실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병적인 도박꾼이 카지노를 보면 무척 유사한 반응을 보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듯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관련해서 어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습관에 의해서, 어떤 사람들은 가르침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의 힘이 절대적이라 생각했다. 또 생각 없이 행해지는 행동은 본성의 증거라며, "씨앗에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서 땅을 미리 준비해야 하듯이, 올바른 것을 즐기고 미워하기 위해서는 학생의 마음이 습관이 되도록 다듬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어렵게 하는 일을 점점 쉽게 해내고, 충분히 연습한 후에는 거의 기계적으로 혹은 거의 의식하지 않은 채 해낼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바로 습관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면 종이나 코트가 일단 구겨지거나 접히면 그 후로는 항상 똑같은 곳이 접혀지는 경향이 있듯이, 우리도 훈련하고 연습한 방향으로 성장한다." - 윌리엄 제임스

 

 

"물은 자신의 힘으로 길을 만든다. 한번 만들어진 물길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진다. 흐름을 멈춘 물이 다시 흐를 때에는 과거에 자신의 힘으로 만든 그 길을 따라 흐른다." - 윌리엄 제임스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한 4단계 법칙

  • 반복 행동을 찾아라
  • 다양한 보상으로 실험해 보라. 반복 행동을 자극하는 열망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다양한 가정을 시험해 보는 것.
  • 신호를 찾아라. 우리에게 어떤 습관을 자극하는 신호를 찾아내기 힘든 이유는, 우리가 습관과 관련된 행동을 시작할 때 우리에게 쏟아지는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습관의 패턴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면밀하게 관찰해야 할 행동들을 규정해야 한다. 이런 행동들을 규정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과학적 연구 결과가 있다. 이에 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거의 모든 습관의 신호는 장소(어디에 있는가?), 시간(몇 시인가?), 감정 상태(감정 상태는 어떤가?), 다른 사람(주변에 누가 있는가?), 직전의 행동(충동이 있기 직전에 무엇을 했는가?)이라는 다섯 가지 중 하나에 속한다.
  • 계획을 세워라. 습관 고리를 알아내면, 즉 습관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보상과 신호, 그리고 습관에 따른 반복 행동이 무엇인지 알아내면 그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신호에 만반의 대비를 하고, 당신이 열망하는 보상을 안겨줄 적절한 행동을 선택함으로써 반복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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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위처럼 보이는 것도 주변 관계를 이해하고 전체적 공간의 조망, 시간의 흐름 속에서 패턴을 찾아보면 나름의 법칙이 있다.

 

 

[본문발췌]

 

 

컴퓨터에서 휴대 전화, 우주여행에서 신약까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기술 진보의 대부분은 지난 수백 년 동안의 과학적 탐구 덕분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묘사하고, 정량화하고, 예측할 수 있으며, 결국 통제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추진된 일이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계몽적인 혁명은 자연과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오늘날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인간의 행동이라는 영역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여러 사건들이 여전히 불가사의하고 혼란스럽게만 보인다.

 

 

과학의 장기는 결국 일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을 고찰할 때도, 우리의 목표는 결국 보편적 성질을 밝혀내는 것이다.

 

 

1915년에는 사람들이 겪는 사고 횟수가 푸아송의 예측을 따른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푸아송의 수학은 보험 산업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의 인터넷 라우터는 사용자들의 마구잡이식 웹 브라우징 및 소통 트래픽이 무작위적 푸아송 과정을 따른다는 가정하에 설계된다. 푸아송 공식은 전염병에 의한 사망자 수나 한 가구 내에서의 장티푸스 발병 횟수를 예측하는 데도 쓰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과학자들은 인간 행동이 사실상 무작위적이라는 가정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되었고, 이 가정은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 분야에서 근본적인 패러다임으로 기능해왔다. 그러니까 인간의 행동은 사실상 예측 불가능하고, 일회적이고, 결정 불가능하고, 예견 불가능하고, 불규칙하다는 것이다. 이 가정에는 문제가 딱 하나 있다. 틀렸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든 무의식적으로 멱함수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개념적으로는 단순하지만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법칙이나 패턴은 이전에는 설명되지 않았던 현상들을 분명하게 해석해줄 때만 중요하게 여겨질 가치가 있다. 

 

 

인생은 무작위성을 근절하려는 전쟁이고, 안전하고 질서 있는 상태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은 친구의 수와 질에 달려 있다고 한다.

 

 

확률적인 방법은 사전에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으면 랜덤한 것부터 시작한다.

 

 

환원주의(reductionism)는 20세기의 과학적 연구를 배후에서 이끌어간 주된 원동력이었다. 이에 따르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것의 구성 성분들을 해독해야 한다. 여기에는 부분을 이해하며 전체를 이해하기 훨씬 쉬울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세계를 그 구성 성분들을 통해 바라보도록 강요당한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원자나 초끈을,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 분자를, 복잡한 인간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개별 유전자를, 유행과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예언자를 연구하도록 훈련 받아왔다. 이제 조각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은 거의 다 아는 상태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전체로서 자연을 이해하는 데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가까이 왔다고 하기 어렵다. 재조립은 과학자들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환원주의를 따를 때, 복잡성(complexity)이라는 견고한 벽에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은 다시 재조립하는 방법이 오직 하나뿐인 잘 설계된 퍼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건이나 현상은 복잡한 세계(complex universe)라는 퍼즐의 엄청나게 많은 다른 조각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들에 의해 생겨나고 또 상호작용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는 좁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히 상이한 학문 분야에 속한 모든 과학자들이 모든 복잡성은 엄격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일제히 발견하게 되면서, 우리는 거대한 혁명이 진행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는 비로소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 <링크> 중에서

 

 

공간적인 요동 현상에 의해 나타난 것이 척도 없는 네트워크였다면, 시간적인 요동 현상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버스트(bursts) 현상이다. 가우스 확률분포 함수로써는 도저히 설명하지 못하는, 숨어 있는 신의 손에 의해 벌어지는 요동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주식 가격의 연쇄 폭등 또는 폭락, 글로벌 경제 현상, 어느 날 갑자기 터지는 누리꾼들의 댓글 잔치와 그로 말미암아 각광을 받은 루저, 거리로 나선 촛불 시위 등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도 숨어 있다. 시간적으로 사건의 발생이 요동치면서 숨 돌릴 수 없이 밀어닥치는 버스트 현상 그 이면에는 가우스 랜덤 확률 법칙이 아닌 새로운 법칙, 멱함수 법칙이 숨어 있다. "아웃라이어, 즉 남들과 다른 그 무엇이 성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처럼, 드물지만 그러나 정말 드물다고 할 수 없는 갑자기 일어나는 버스트 현상이 역사를 바꾸기도 했고, 우리의 미래를 바꾸기도 할 것이다"

 

 

인간 역학 연구,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폭발성이라는 패턴이 숨어 있다.

 

 

인간 행동에 폭발성이 드러나는 것은 '우선순위 설정' 때문이다. 우리가 한정된 자원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늘 우선순위를 설정하기 때문에 그 행동 패턴이 멱함수 법칙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선순위를 끌어들이는 순간, 모든 데이터들이 엇비슷한 규모인 세상과는 안녕이다. 대신에 행동이 폭발적으로 몰려 벌어지는 시기들이 등장하고, 어처구니없이 큰 규모인 예욋값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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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 본능의 결과다.

 

 

[본문발췌]

 

 

40억 년 전 스스로 복제 사본을 만드는 힘을 가진 분자가 처음으로 원시 대양에 나타났다. 이 곧 자기 복제자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그것들은 절멸하지 않고 생존 기술의 명수가 됐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주 오래 전에 자유로이 뽐내고 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 그것들은 거대한 군체 속에 떼 지어 마치 뒤뚱거리며 걷는 로봇 안에 안전하게 들어있다. 그것들은 원격 조종으로 외계를 교묘하게 다루고 있으며 또한 우리 모두에게도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것들을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를 알게 해주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것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이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짜 넣은 로봇 기계이다. 이 유전자의 세계는 비정한 경쟁, 끊임없는 이기적 이용 그리고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경쟁자 사이의 공격에서 뿐만 아니라 세대 간 그리고 암수 간의 미묘한 싸움에서도 볼 수 있다. 유전자는 유전자 자체를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에 원래 이기적이며, 생물의 몸을 빌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물의 이기적 행동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타적 행동을 보이는 것도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집단 내 이타주의는 집단 간의 이기주의를 동반할 때가 많다. 이것이 노동조합의 기본 원리다.

 

 

선택의 기본 단위, 즉 이기성의 기본 단위가 종도 집단도 개체도 아닌,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다.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가령 '살아 있다'라는 말이 사전에 있다고 해도 그 말이 반드시 현실 세계에서 무엇인가 명확한 것을 지칭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고충이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초기의 자기 복제자를 '살아 있다'고 하든 하지 않든 그들은 생명의 조상이며, 우리의 선조였다. 

 

 

유성 생식을 하는 종에서 개체는 자연 선택의 중요한 단위가 되기에는 너무 크고 수명이 짧은 유전 단위다.

 

 

성과 교차로 인해 유전자 풀은 유동적이며 유전자는 부분적으로 뒤섞인다. 진화는 유전자 풀 속에서 어떤 유전자는 그 수가 늘어나고 또 어떤 유전자는 수가 줄어드는 과정이다. 

 

 

음의 피드백(negative feedback)

'목적 기계', 즉 의식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기계 내지 물건은 사물의 현재 상태와 자신이 '바라는' 상태의 차이를 측정하는 일종의 장치를 가지고 있다. 이 차이가 클수록 기계는 더 열심히 돌아가도록 만들어진다. 이렇게 해서 기계는 자동적으로 그 둘의 차이를 좁혀 가며(이 때문에 '음의 피드백'이라고 불린다.), 자신이 '바라는' 상태에 도달하면 작동을 멈춘다. 와트 증기 기관의 조속기에는 증기 기관의 힘으로 도는 한 쌍의 공이 있는데, 그 공은 각각 경첩이 있는 팔의 끝에 붙어 있다. 공이 빨리 돌수록 원심력이 세져 팔이 수평 위치로 밀려 올라가게 되는데, 중력이 그 움직임을 제한한다. 팔은 엔진에 증기를 보내는 밸브에 연결되어 있으며, 팔이 수평에 가까워지면 증기의 공급이 감소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엔진이 지나치게 빨라지면 공급되는 증기의 양이 줄고 엔진은 느려진다. 반대로 엔진이 너무 느려지면 밸브를 통해 자동적으로 더 많은 양의 증기가 엔진에 보내져 엔진은 제 속도를 되찾는다. 이와 같은 목적 기계는 종종 과다 반응과 시차 때문에 그 성능이 들쭉날쭉하기도 하는데, 이 성능의 변동 폭을 줄이는 부속 장치를 잘 만드는 것이 기술자의 몫이다. 

 

 

체스 게임이 그렇듯이 생명체가 맞닥뜨릴 수 있는 우발적 사건이란 수없이 많기 때문에 도저히 그 모든 것을 예상할 수는 없다. 체스 프로그래머와 마찬가지로, 유전자는 생존 기계에게 생존 기술의 각론이 아니라 일반 전략이나 비결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 선택은 환경을 가장 잘 이용하도록 자기의 생존 기계를 제어하는 유전자를 선호한다. 이것은 같은 종이거나 다른 종이거나 상관없이 다른 생존 기계를 가장 잘 이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 여러 종의 생존 기계는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생존 기계에 영향을 준다. 그들은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일 수도 있고, 기생자와 숙주의 관계일 수도 있으며, 희소 자원을 놓고 싸우는 겨쟁 관계일 수도 있다. 또 벌이 꽃가루 운반자로서 꽃에게 이용당하는 경우와 같이 특수한 방법으로 이용당할수도 있다. 

 

 

'전략'이라는 것은 미리 프로그램된 행동 방침이다. 전략의 일례를 들어 보면, "상대를 공격하라. 그가 도망치면 쫓아가고, 그가 보복해 오면 도망쳐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체가 전략을 의식적으로 고안해 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 동물을, 근육을 제어하는 미리 프로그램된 컴퓨터가 조종하는 로봇 생존 기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편의상 이 전략을 일종의 지시처럼 말로 쉽게 표현하는 것뿐이다. 어떤 불분명한 메커니즘에 의해 동물은 마치 이러한 지시를 따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즉 ESS(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는 개체군에 있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일단 그 전략을 채택하면 다른 대체 전략이 그 전략을 능가할 수 없는 전략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미묘하고도 중요한 개념이다. 바꿔 말하면, 어떤 개체에게 가장 좋은 전략은 개체군 대부분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 개체를 제외한 나머지 개체들도 각각 자기의 성공을 최대화하려는 개체들이므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일단 그 전략이 진화하면 다른 어떤 전략도 그 전략보다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없는 그런 전략이다. 환경에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면 잠시 동안 진화적으로 불안정한 기간이 올 수 있으며, 개체군 내에서 변동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전략이 일단 ESS가 되면 그것은 계속 ESS로 남는다. 자연 선택은 이 전략에서 벗어나는 전략을 벌할 것이다.

 

ESS 개념은 우리가 제3장에서 뒤로 미뤘던, 좋은 팀워크를 필요로 하는 한 보트 안의 조정 선수들(한 몸 안의 유전자들에 해당)의 예에서 생긴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유전자는 혼자 있을 때 '좋은 것'이 아니라, 유전자 풀내 다른 유전자들을 배경으로 할 때 좋은 것이어야 선택한다. 좋은 유전자는 수 세대에 걸쳐 몸을 공유해야 할 다른 유전자들과 잘 어울리고 또 상호 보완적이어야 한다. 식물을 잘게 씹는 이빨의 유전자는 초식 동물의 유전자 풀내에서는 좋은 유전자지만 육식 동물의 유전자 풀내에서는 나쁜 유전자이다.

 

 

유전자 풀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유전자들의 세트가 될 것이며, 이는 어떠한 새로운 유전자도 침입할 수 없는 유전자 풀로 정의된다. 돌연변이나 재조합, 또는 이입으로 생기는 새로운 유전자는 대부분이 자연 선택의 벌을 받아 즉시 제거되고 진화적으로 안정한 유전자 세트는 복원된다. 어떤 새로운 유전자가 그 세트에 침입하는 데 성공해 유전자 풀내에 퍼져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불안정한 과도기를 거쳐 진화적으로 안정한 새로운 조합이 만들어진다. 작은 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공격 전략에 대한 예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개체군에는 또 다른 안정점이 하나 이상 존재할 수 있고 때때로 이쪽 안정점에서 저쪽 안정점으로 갑자기 펄쩍 뛰어넘기도 한다. 진보를 향한 진화는 꾸준히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한 안정기에서 다음 안정기로 불연속적인 계단을 올라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개체군 전체가 마치 하나의 자기 조절단위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착각은 유전자의 수준에서 진행되는 선택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유전자는 그 '우수성' 때문에 선택된다. 그러나 그 우수성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세트, 즉 현재의 유전자 풀을 배경으로 했을 때 그 성과가 얼마나 뛰어난지에 기초하여 결정된다.

 

 

이기적 유전자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DNA의 작은 조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원시 수프에서처럼, 그것은 온 세상에 퍼져 있는 특정 DNA 조각의 모든 복사본들이다. 우리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적절한 용어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유전자가 마치 의식적으로 목적을 갖고 있는 듯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이 무엇인가 질문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풀 속에 그 수를 늘리는 것이다.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장소인 몸에 프로그램 짜 넣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유전자가 다수의 다른 개체 내에 동시에 존재하는 분산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장의 핵심은 유전자가 남의 몸속에 들어앉아 있는 자신의 복사본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개체의 이타주의로 나타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전자의 이기주의에서 생겨난 것이다. 

 

 

개개의 부모 동물은 가족계획을 실행하는데, 이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손의 출생률을 최적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자기 새끼의 수를 최대화하려고 힘쓴다. 개체에서 너무 많은 수의 새끼를 가지도록 하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 계속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 종류의 유전자를 체내에 가진 새끼들은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로서 자기 복제자. 밈(meme)

 

 

자기 복제자의 일반적 성질 - 장수, 다산성, 복제의 정확도

 

 

뇌에서는 아마도 저장 용량보다 시간이 중요한 제한 요인이며, 심한 경쟁의 대상일 것이다. 인간의 뇌와 그 제어를 받는 몸이 동시에 하나 또는 몇 종류 이상의 일을 해치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밈이 어떤 사람의 뇌의 집중력을 독점하고 있다면 '경쟁자'의 밈이 희생되는 것은 틀림없다. 밈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 광고 게시판의 공간, 신문 기사의 길이, 그리고 도서관의 서가 공간 등과 같은 상품에서도 경쟁하고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동물의 행동은, 그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가 그 행동을 하는 동물의 몸 내부에 있거나 없거나에 상관없이 그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의 생존을 극대화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동물의 행동'에 대해 썼지만 이 정리는 색깔, 크기, 형상 등 어떤 것에나 적용될 수 있다. 

 

 

자연 선택의 근본적인 단위로 생존에 성공 또는 실패하는 기본적인 것, 그리고 때때로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수반하면서 동일한 사본의 계보를 형성하는 기본 단위를 자기 복제자라고 한다. DNA 분자는 자기 복제자다. 자기 복제자는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어떠한 이유로 거대한 공동체적 생존 기계, 즉 운반자 속에 모인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운반자는 우리 자신과 같은 개체의 몸이다. 따라서 몸은 자기 복제자가 아니다. 그것은 운반자이다. 지금까지 잘못 이해되어 왔기 때문에 나는 이 점을 특히 강조하는 것이다. 운반자 자신은 스스로를 복제하지 못한다. 운반자는 자기를 구성하는 자기 복제자들을 퍼뜨리기 위해 일한다. 자기 복제자는 행동하지 않는다. 또한 세상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며 먹이를 잡거나 포식자로부터 도망치지도 못한다. 자기 복제자는 이와 같은 모든 것을 하는 운반자를 만든다.

 

 

진화는 유전적인 변화, 즉 돌연변이를 필요로 한다.

 

 

병목형 생활사가 왜 분명히 구분된 단위 운반자로서 생물 개체의 진화를 촉진하는가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살펴 보았다. 이 세 가지에는 각각 '제도판으로의 회귀back to the drawing board', '주기의 규칙성orderly timing-cycle', '세포의 동일성cellular uniformity'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다. 

 

 

불멸의 자기 복제자.... 이기적 유전자/확장된 표현형이라는 생명관의 전체에 대한 요약이다. 나는 이것이 우주의 어떤 장소에 있는 생물에게도 적용되는 생명관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생명의 원동력이자 가장 근본적인 단위는 자기 복제자다. 우주에서 자신의 사본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자기 복제자다. 최초의 자기 복제자는 작은 입자들이 우연히 마구 부딪쳐서 출현한다. 자기 복제자가 일단 존재하면 그것은 자신의 복사본을 한없이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복제 과정도 완벽하지 않으며 자기 복제자들의 집단 내에는 몇 개의 다른 변이체가 생긴다. 이 변이체 중 어떤 것은 자기 복제 능력을 잃어서 자신이 소멸할 때 그 변종도 아울러 소멸하고 만다. 다른 변이체는 아직 복제를 할 수는 있으나 효율이 나쁘다. 또 다른 변이체는 새로운 묘법을 획득하여 자기의 조상이나 다른 변이체들보다 자기 복제의 효율이 훨씬 좋다. 그리하여 개체군 내에서 많아지는 것은 그들의 자손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상은 가장 강력하고 재주 있는 자기 복제자로 채워진다. 또한 좋은 자기 복자제가 되기 위한 더욱 정교한 방법들이 서서히 발견된다. 자기 복제자는 자기 고유의 성질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세상에 초래하는 결과 덕분에 살아남는다. 그 결과는 매우 간접적일 수도 있다. 필요한 단 한 가지 조건은 그 결과가 얼마나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것이든 간에 피드백을 통해 최종적으로 자기 복제자의 복제 성공률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어떤 자기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성공할 것인지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즉 선제 조건에 달려 있다. 이런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종류의 자기 복제자와 이것이 초래하는 결과일 것이다. 영국인과 독일인 조정 선수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이익을 주고받는 자기 복제자들은 양자가 존재할 때 그 수가 많아질 것이다. 지구 상의 생물이 진화하는 과정 중 어느 시점에선가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자기 복제자가 모여 개체적 운반자 - 세포, 그리고 이후에는 다세포 생물체 - 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병목형 생활사를 가진 운반자가 번성하게 되었고 이들은 보다 더 개별적으로 구분이 가능하게 되었고 운반자다워졌다. 생물 물질이 이처럼 개별 운반자 속에 포장되는 것은 뚜렷이 도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기 때문에, 생물학자가 이 세상에 등장하여 생명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을 때 그 질문 대부분은 운반자, 즉 생물 개체에 관한 것이었다.

생물학자가 처음 인식한 것은 생물 개체였던 반면, 자기 복제자, 즉 유전자는 생물 개체가 사용하는 장치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생물학을 다시 올바른 길로 돌려, 역사상에서뿐만 아니라 그 중요성의 측면에서도 자기 복제자가 우선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명심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노력을 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이 점을 명심하는 하나의 방법은, 오늘날에도 한 유전자가 표현형에 미치는 효과가 모두 그것이 위치하는 개체의 몸속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그리고 사실상 유전자는 개체의 체벽을 통과하여 바깥세상에 있는 대상을 조종한다. 그 대상 중 어떤 것은 무생물체고, 어떤 것은 다른 생물이며, 또 어떤 것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확장된 표현형의 힘이 방사상으로 뻗은 그물눈 중심에 유전자가 들어앉아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있는 대상물은 여러 생물 개체 속에 들어앉은 여러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력의 그물이 합쳐지는 지점이다. 유전자의 긴 팔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다. 세상 전체가, 멀거나 가까운 표현형에 미치는 유전자의 영향을 잇는 인과의 화살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우연이라기에는 실제적으로 너무 중요하지만, 필연이라 하기에는 이론적으로 불충분한 사실을 하나 추가해 두자. 그것은 이들 인과의 화살이 뭉쳐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자기 복제자는 더 이상 바닷속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지 않다. 이들은 거대한 군체, 즉 개체의 몸속에 포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뭉쳐진 자기 복제자가 표현형에 초래하는 결과는 세상 전체에 균일하게 분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그 개체에 응집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구에서 우리에게 이다지도 낯익은 개체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우주의 어떤 장소든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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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과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인간이 많은 것을 창조한 것 같지만, 자연을 파괴하고 소비하여 새로운 형태로 인간의 편리함과 욕구를 충족시켰을 뿐이다.

 

소비를 최소화하고 효율화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환경을 인류 후손에게 물려주기위한 최선이 아닐까?

 

 

[본문발췌]

 

 

자연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크든 작든, 공공의 것이든 개인의 것이든 모든 종류의 자연이 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절대 야생의 지대가 필요하다. 나는 어떤 장소에서든 인간경제와 관련해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이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자연은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도록 허용할 것인가? 셋째, 자연은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인가?

 

 

보호주의자들은 생태학적으로 번영한 상태에서 인간 역시 번영할 수 있으며, 그런 건강 상태의 기준과 지표는 야생생물들의 다양성임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본능이라고 부르는, 우리 자신의 잠재된 야생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한다. 아울러, 표토 속에 우글거리는 야생의 생물체들을 떼어놓고는 농업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벌레, 박테리아, 기타 야생의 생물체들이 표토 속에서 분해, 부식토 생성, 수분 저장, 배수 등 제 나름의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야생을 지키는 것이 세상을 보존하는 길이다"라는 헨리 소로의 말은 내면의 진리일뿐만 아니라 현실이기도 하다. 

 

 

일찍이 그리스인들과 히브리인들은 스스로 모든 규칙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인간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한 바 있네. 

 

 

일이 부적절하게 이루어지더라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은 산업경제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다. 일이 부적절하게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값비싼 대가가 치러지게 마련이다. '경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음 세대에게 계산서를 넘겨주는 것이 전부인데, 그 과정에서 고통스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가르침과 배움은 가치를 따질 수 없기 때문에 무료로 제공되어야 한다. 교육을 상품화하는 것은 곧 그것을 망치는 길이다. 우리가 굳이 교육의 가격을 따진다면, 그 가치가 손상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결국 학생들은 그들이 받아 누리는 선물에 늘 따라다니는 책임들, 다시 말해 받은 것을 잘 이용하고 후세에 온전하게 물려줄 책임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육을 상품화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무기로 만드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책임의식에서 멀어질 때 교육은 탐욕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산업경제로 인해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한 가지 원인은 그 비포용성 때문이다. 더욱이 산업경제는 자신에게 포함되지 않는 것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으며, 무엇이 산업경제에 포함되느냐 포함되지 않느냐에 지나치게 연연한다. 이렇듯 산업경제에 대해 비판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것도 외면하지 않고 폭넓게 받아들이는 경제는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길게 고민하지 않고도 하느님 나라의 첫 번째 원칙, 즉 만물을 아우른다는 원칙이 떠오른다. ... 두 번째 원칙은 생태학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원칙인데, 하느님 나라에 속한 만물은 그 나라와 그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에는 질서가 있다. 세 번째 원칙은, 인간은 하느님 나라에 속한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서, 혹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완벽한 방식이나 규칙으로 그것들을 아우르는가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결코 알 수도 없다는 것이다. ... 즉 우리는 질서 속에서 살아가며, 이 질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난해하다. 우리 처지가 어렵다는 것은 그 질서를 완벽하고 적절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섣불리 참견하고 침해한다면 엄중한 형벌을 받을것이라는 네 번째 원칙을 알면 분명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전통적인 지식이 허용하는 수준에서 완전하게 인간으로서의 우리 스스로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에 입각한 지식, 계산, 계략 등의 방법을 통해서 상당한 범위의 작은 인간경제에 참여한다. 위대한 경제에 참여할 때 역시 그것들이 필요하지만 겸손, 연민, 인내, 관용, 이해력이 추가로 구비되어야 한다. 앞에서 암시되기는 했지만 두 경제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는, 인간 경제가 가치를 평가하고 분배하고 이용하고 또 가치 있는 것들을 보존할 수 있어도 가치를 직접 창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가치는 오로지 위대한 경제 안에서만 만들어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연의 것들에 가치를 덧붙이는 것이다. 우리는 나무를 합판으로, 합판을 의자로 변형시키면서 만들어낸 각각의 물건에 가치를 첨가할 수 있다. 선한 인간경제에서 이 같은 변형은 적절한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작업은 적절한 평가를 거쳐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선한 인간경제는 자신이 직접 만들지 않은 재료들과 힘을 비롯한 여러 가지 것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인간경제는 나무를 만들지 않았으며, 노동자의 지식과 재능도 만들지 않았다. 모든 단계에서 인간이 가미한 것은 인공적인 것이며, 기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교의 가치는 인간생활에는 중요할지 몰라도 어쨌거나 2차적인 가치일 뿐이다. 인간은 가치를 창출할 마음을 먹으면 맨 먼저 추상적인 가치를 만든다. 그 다음에는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 그릇되고, 압제적이고, 파괴적인 가치를 만든다. 예를 들어 돈의 가치는 의식주와 같은 생필품의 가치를 정당하고 분명하게 표현할 때만 진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 생필품들은 궁극적으로 보면 위대한 경제 안에서 창출된 것이다. 인간들 역시 금전적인 가치를 추상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만 인플레이션과 폭리를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생필품의 가치를 왜곡하고 자연과 인간 자원에 손실을 입힌다. 인플레이션과 폭리 그리고 이에 따른 손실은 어쩌면 인간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억지 부리는 데 대한 징벌쯤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기계적으로 볼지도 모르지만 흙은 그 기능을 살펴보면 복합적이고도 놀라운 활동을 한다. 예를 들어, 건강한 토양은 물을 보유하는 동시에 배출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분수계(혹은 분수령. 내린 비가 각각 반대쪽으로 흐르는 경계선으로 하천의 유역을 나누는 경계선이 된다)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말할 때 이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다. 또한 분수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용하는 '건강'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단순히 역학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건강한 토양은 죽어 그 속에 묻히는 생명체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물을 저장하는 동시에 배출하는 토양의 이 이중적 능력은 우리에게 온갖 도움을 준다. 토양은 우리에게 좋은 작물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홍수 조절과 지속적인 수분 공급, 그리고 침식 조절의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좋은 표토는 물을 배출하는 동시에 보유한다. 이처럼 다양성이 수용력을 증가시키는 점은 산업적인 논리와는 크게 다르다. 산업주의자들은 저수와 배수를 서로 다른 반대 기능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다양성을 산업적인 과정에 해로운 것으로 보고 한 가지를 희생해서 다른 한 가지를 활성화하려고 한다. 그들은 지역을 확대함으로써 수용력을 확대하려는 절망적인 방법을 이용한다. 따라서 문제를 격리시켜 지나치게 간소해야만 효과가 나타나는 기계적인 해결책에 의존한다. 산업주의자들이 비난받는 이유는 발전이란 설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저수를 쉽게 하려면 분리대나 댐과 같이 전문화된 물 저장장치에 의지해야 한다. 또, 베수를 의해서는 배수관이 도랑이나 심토파쇄기를 이용해야 한다. 물론 내 분석이 지나치게 막연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예외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토양 보호의 책임이 원칙적으로 농부나 토양 관리인이 아니라 기술자에게 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양 보호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땅을 파헤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의 이상은 '최소의 소비를 통한 최대의 복지' (E. F. 슈마허)가 되어야 하며, 이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확인시키고 또 요구한다. 

 

 

작은 경제의 일들이 위대한 경제 안에 적절하게 배치될 때 이런 미덕들을 꼼꼼하게 배려하면서 그 원리를 실행에 옮길 수 있으며, 그렇게 하면 전문화를 필할 수 있다. 산업경제는 일에 대한 극도의 전문화, 다시 말해 일에서 그 결과를 분리할 것을 요구한다. 산업경제는 이익의 분배로 존속되는 데다가 생산자와 소비자, 판매자와 구매자, 사용자와 노동자, 일하는 자와 일과 생산물, 원재료와 상품, 자연과 인공, 생각과 말과 행동 등이 서로 맺고 있는 근본적인 유대관계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유대관계에서 분리된, 전문화된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은 자신들을 '관찰자' 혹은 '객관적 관찰자', 즉 아무런 관련도 책임질 일도 없는 구경꾼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산업화된 예술과 과학은 거짓이며, 이러한 분리는 엄청난 오류이다. 결과의 전문화란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경제 안에서는 바깥쪽도, 전문화나 보편성으로의 도피도, 휴식시간도 없다. 심지어는 무의미도 탈출구가 되지 못한다. 인간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든 말든 상관없이 위대한 경제의 구성원들 모두가 하나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집하고 인내하지 못한다면 분해하고 파괴하는 것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범위 바깥에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지만, 그런 억측은 다른 구성원들과의 유대관계를 해칠 뿐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도 상처를 입는다. 산업경제에서 예술과 과학은 전문화된 '직업'인 데다 각각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 의사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위대한 경제 안에서는 예술과 과학 모두가 그 구성원이다. 예술과 과학은 위대한 경제로부터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고 서로 통하는 공동체의 언어 또한 익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땅을 집약적으로 이용하려면 땅을 파괴하지 않는 직접적이고 친밀한 인간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흔히들 소유권을 지녔다고 하면 적절하게 보살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부재 소유권이 땅에 대한 저주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확인되어온 사실이다. 기업의 소유자는 종업원의 무능력, 무책임 혹은 반감에 시달린다. 적어도 우리에게 있는 수로와 도로의 대중 소유권은 실제로 욕을 먹고 있다. 그러므로 땅은 소유권뿐만 아니라 소유자 개인이 참여하고 이용해주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땅을 가장 바람직하게 이용하는 길은 소유권을 가장 폭넓게 분배하는 것이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자기 것이라 생각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싸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자발적으로 싸울 것인가는 의문이다.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에는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싶은 열망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일시성을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는 목적과 기준이라는 규정에 의해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다. 결혼, 혈연, 우정, 이웃의 정으로 맺어진 어떤 관계도 그저 편리에 따라 존재할 수는 없다.

 

 

산업사회의 방식에 따르면, 이상적인 인간의 거주는 거주자들이 일을 하지 않는 곳이다. 남이 집을 지어주고, 설비를 갖추어주고, 장식해주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비해준다. 그곳에 사는 부부는 가능한 한 가족이나 집과 관련해서 생기는 힘든 일들을 직접 하지 않는다. 가정 내에서 그들이 하는 노동이란 주로 물건을 사고, 보관하고, 내다버리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조차 '열등한' 사람에 의해 행해져야 '최선'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산업사회가 지향하는 최종의 목표는 버튼만 누르면 모든 문제가 처리되는 '주택'이다. 그런 '주택'에 사는 부부는 서로에 대해 성적, 법적, 사회적 의미의 파트너이긴 하겠지만 협력자는 아니다. 그들은 공동으로, 혹은 서로에게 필요한 일들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들이 늘어놓는 말에는 자기 손으로 해내거나 만들어낸 것이 전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한 과거에는 본질적으로 장소가 결여되어 있다. 여기에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 없음은 당연하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뿐이다. 

 

 

우리는 기계에 의한 대체가 오랫동안 뿌리내려온 과정의 하나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동안 산업경제는 분리, 퇴화, 교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가 서로서로 분리되자 노동과 그 산물이 퇴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계가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각이 타락하면 정신은 기계나 전문가들, 정부에 의해 대체되고 만다. 더욱이 산업화 과정을 통해서 공짜로 주어지던 것이 비싼 대용품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신체적인 건강은 삶에 필요한 노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쓸모 없어진 신체를 대신해서 번영한 산업화 시대의 기계는 치명적이고 잔혹하리만큼 비싸다. 인간의 몸이 유용하던 시절에는 육체가 쓸모 없어지면 당연히 죽는 것이고, 죽음은 치유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에서 죽음은 점점 더 비싼 치료가 필요한 질병과 같이 멸시된다. 또한, 산업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시골 마을과 도시 근교에서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았다.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공짜로 주어지거나 싼값에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산업화 시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단순하고도 너무나 취약한 결합은 쉽게 붕괴되었으며 값비싸고 파괴적인 통신 및 운송 산업에 의해 대체되었다.

 

 

산업경제는 전형적인 채취산업으로서 가져오고, 만들고, 이용하고, 폐기한다. 다시 말해 소비로부터 오염에 이르는 과정을 거친다. 반면에 농업은 가져오고, 만들고, 이용하고, 반환해서 다시 채워 넣는 경제에 속한다.

 

 

농업적 시각에서 볼 때, 생산성보다 나은 말은 번영이다. 이 말에는 회계적인 충실도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번영이란 말에는 생산적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생산 수단을 적절히 배려한다는 뜻도 들어 있다. 자기 주변을 소중히 돌볼 줄 알아야 번영할 수 있다. 번영한다는 것은, 전체의 일부가 되어 함께 번영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홀로 번영할 수 없다. 자신의 땅, 작물, 동물, 장소, 공동체가 번영할 때에만 비로소 번영할 수 있다. ... 생산성이라는 기준을 통해서는 지속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결코 알 수 없다. 지속성의 가치는 오로지 번영에 의해 드러난다.

 

 

정착생활 때문에 비만을 비롯한 기타 질병들의 전염이 횡행하고 '건강 증진 운동'이 다양하고 활발하게 실천되는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아직까지도 개발되지 못한 이용 가능한 에너지 공급원은 어쩌면 인간의 몸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의 경제가 할 일은 이런 에너지를 가치 있게 이용하고 그에 대해 보상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손실과 수익 사이에서 흔히 나타나는 지리적 격차 때문이다. 농업에서 발생하는 손실은 농장과 농장 공동체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석탄에 의한 수익이 주로 매장된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발생하듯, 농업의 큰 수익들은 모두 도시에서 발생한다. 수익은 거의 손실을 자각할 압력이나 의무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 즉 잃어버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차지한다. 소 때문에 토양이 침식된 데 따른 손실은 포장된 비프스테이크로 벌어들이는 수익에서 공제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켄터키 주 산악지대에 있는 삼림, 표토, 가옥이 유실된다고 해서 석탄 수익이 줄지는 않는다. 수익과 손실, 상품과 실비용 사이의 이런 특수한 격차는 우리가 곧 잘 사용하는 자원resource이라는 단어 속에서도 나타난다. 이 단어의 뜻은 부활한다는 의미의 라틴어 resurgere에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자원은 의존할 만한 공급원이며, 퍼내도 퍼내도 금방 가득 차오르는 샘물처럼 되살아난다. 표토와 농사짓는 인간의 문화는 적절한 '가정 경영', 즉 적절한 경제 속에서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스스로를 재충전하며 땅만큼 태양만큼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적절한 경제는 자원과 부활하는 자원의 힘을 존중하고,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한 그야말로 적절하다.

 

 

인간이 다른 생물체와 가장 다른 점은 그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져야 했다는 점, 즉 인간은 문화가 만든 인공물이라는 점이다. 문화적 단련을 통해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새나 짐승을 훈련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오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힘' 때문이다. 지구상에 있는 생물체들 간의 힘의 서열에 있어 우리는 최상위에 있으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현재 우리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하고,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홍수, 폭풍, 화산, 지진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래서 우리를 인간, 즉 검약, 정의, 불굴의 의지, 인내를 비롯한 미덕들을 지닌 생명체로 만들 수 있는 문화를 가지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문화의 제약, 규율, 개선에서 일탈할 인간들은 '자연적'이거나 '생각하는 동물'이거나 '털 없는 원숭이'가 아니라 마구잡이의 탐욕스런 살인자이며 파괴자인 괴물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역사가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끔찍한 행위를 쉽게 저지르는 본성으로 따진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의 추종을 불허한다. ...문화와 자연의 회복은 농장을 잘 경영하는 방법, 숲을 보존하고 추수하고 재생하는 방법, 만들고 건설하고 이용하고 반환하고 부활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문화와 자연의 회복은 인간성도 회복시키며, 그 속에는 길들여진 것과 야생의 것이 영원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의무와 책임, 이 두 가지는 늘 어려운 데다 때로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분명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자연을 기준으로, 즉 자연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인식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는 문화는 자연을 파괴하고 결국 스스로를 파괴한다. 문화가 자신이 이룩한 최고의 작업과 다른 문화들이 이룩한 최고의 작업들을 근거로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는다면 문화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결국 자연을 파괴할 것이다. 문화와 자연 간에는 대화가 있어야 하고, 조화는 그 대화의 한 가지 상황, 곧 바람직한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인간은 의식적이고 진지하게 자기들의 일에 관해 이렇게 질문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좋은가? 이것은 우리의 장소에 좋은가? .... 야생은 지금 우리가 쌓아야 할 인간적인 이해와 관용에 의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가 자연과 함께 보존해야 할 유일한 것은 문화이며, 야생과 함께 보존해야 할 유일한 것은 가정이다.

 

 

소유하는 것(집이나 직업, 배우자나 자동차)은 오로지 자기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교환될 수 있을 때에만 가치를 지닌다. 이는 끝없는 불만족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경제 과정이다. 

 

 

우리는 단일 작물만 심어진 광대한 밭에서 자연의 힘이 쇠약해져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일 부류만을 염두에 두어 획일적으로 개발되는 주택지를 보면서도 인간생활의 토대가 탄탄치 못함을 걱정한다. 산업문명이 가져온 획일적 문화에 젖은 우리는 마치 향수병에 걸린 것처럼 수많은 여백과 다양성을 가진 다목적 풍경이 보여주는 인간성과 자연성을 열망한다. 여백이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는 작업의 종류와 땅의 종류뿐만 아니라 부지를 나누기도 한다. 산울타리 사이의 좁은 길, 강가, 나무가 늘어선 울타리 등등의 여백들은 항상 야생이 소유했으되 인간의 의도에 따라 그 범위가 설정되는 것들이다. 이런 장소들은 동식물과 같은 야생의 생물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아이들이 야외에서 뛰어놀기에도 더없이 좋다. 이런 여백의 장소들로 인해서 인간과 야생 쌍방은 서로의 경계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이는 단일 재배의 풍경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생명들에게 보다 안전한 조화의 풍경인 것이다. 우리는 단일 문화의 풍경이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반면에 조화의 풍경은 민주적이고 자유롭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농사와 관련된 여타 업종에서도 사업 규모를 제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규모가 적절해야만 노동과 관리의 균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선택의 자유에는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이 따른다. 트랙터를 대신하는 말수레, 비료를 대신하는 분뇨거름, 제초제를 대신하는 사이갈이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옥수수 경작에 대해 랜시는 "노동력을 판다"고 말한다. 즉, 경제적 의미에서 합리적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서 이런 합리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그는 희생자로 전락할 것이다. 랜시는 쟁기와 써레로 땅을 일구고 화학약품 없이 작물을 경작하면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노동력을 대신하여 고가의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다. 또한 그는 연료를 구입하는 대신 말이 끄는 수레를 이용해서 농사를 짓고, 고가의 장비를 구매하는 대신 말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다. 그는 석유를 대신하여 자신이 생산한 옥수수, 귀리, 건초를 사용하면서 시장가격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득을 얻으며 사료를 판매하고 있다. 그와 그의 말들은 농장에 내리쬐는 햇빛을 공짜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태양에너지 전화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집에서 에너지와 비료를 생산하고 잡초를 제거한다. 그러나 다른 농부들은 그런 기능을 갖춘 장비들을 구입하느라 등골이 휜다. 산업생산 방식에 찌든 농부들은 생산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한다. 그들의 몰락으로 번영을 누리는 공급업자들에게 그들은 한낱 소비자에 불과하다. 국가경제에 관한 한 이런 유형의 농부들은 오로지 값싼 식품을 제공하고 농업 관련 기업들만 배불리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산업주의는 양심의 가책이란 게 없는 정신이다. 산업주의는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물건으로 취급하며, 물건은 궁극적으로 쓰레기로 취급하는 개념을 단순히 받아들일 뿐이다. 산업주의는 실용과 문화, 인간과 토지 간에 꼭 필요한 관계에 무관심하다. 인간생활의 기초 경제와 경제학에 무관심한 것이다. 우리 경제는 점점 추상화하고 문서화하고 있다. 사람들의 의식주를 결정하는 실질경제를 설명하지도 못하고 그것에 보탬이 되지도 않는다. 우리 경제는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적 활력과 행복의 기준으로 염원하는 거짓 경제 또는 공상적인 경제로 점점 더 변해가고 있다. 이른바 보편적인 기준이라고 말해지는 이런 경제에는 그 자체로 기준이 없다. 산업경제로는 자연의 건강함에 의존하는 경제를 측정할 수 없다. 산업경제는 자연을 단지 '천연재료'의 공급원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산업경제로는 사람의 건강함에 의존하는 경제 또한 측정할 수 없다. 산업경제는 사람을 단지 '노동력'(즉, 도구나 기계의 일부) 또는 '소비자'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산업경제는 오직 통화량에 의해 경제의 건강함을 측정할 뿐이다.

 

 

"오직 성공한 자만을 위하는 것이라면 그 시스템은 실패한 시스템이다" - 마티 스트레인지 Marty Strange, "지속 가능 농업이 경제적 구조 The Economic Structure of a Sustainable Agriculture"

 

 

암만파(Amish)의 몇 가지 원칙들, 이 원칙들은 관리자와 주주 그리고 전문가들이 착취해대는 세상이 아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 가족과 공동체를 보존하고 있다.
  • 이웃과 정을 나누는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 부엌과 정원, 가구와 농장에 딸린 농가의 가내 예술품들을 보존하고 있다.
  • 이용 가능한 인력이나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동력(태양, 바람, 물 등에 의한 동력)을 멀리하지 않기 위해 기술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
  • 이웃과 정을 나누는 관습과 저동력 기술의 최적화된 사용을 병행하기 위해 농장 규모를 제한하고 있다.
  • 앞서 언급한 관습과 기술의 제한을 통해 비용을 제한하고 있다.
  • 집에서 생활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도록 자식들을 교육하고 있다.
  • 농사일을 실용적 기술이자 정신적 단련으로 여겨 존중하고 있다.

 

 

생활수준(얼마나 많은 돈을 소비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생활수준)은 향상되었지만 공동체의 삶은 여러모로 쇠퇴했다.

 

  

식민경제의 결점은 그것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식민경제는 현실을 왜곡한다. 사실상 그것은 착취이익의 장부에서 비용을 지워버리는 간단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착취이익에는 농촌이 배제되어 있다. 외국의 식민지나 진배없는 것이다. 이런 배제의 결과로 실질적인 생산 비용을 착취이익이 지불하지 않으면서 착취되는 토지와 농민에게 고통만 안겨주고 있다. 이국이건 자국이건 식민지는 생태계와 공동체가 단일하기 때문에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식민주의에서는 건실한 지역경제의 발전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식민경제는 오로지 '천연원료'를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하는 구조만을 가지고 있다. 통제되지 않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식이다. 그런 시장은 식민지로부터 가치를 유출시킨다. 따라서 식민경제는 E. F. 슈마허가 주장하는 "지역의 자원을 가지고 지역에서 생산한 재화를 지역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이상의 실현과 완전히 동떨어진 개념이다. 국가경제는 내부 식민지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공동체를 파괴한다. 즉, 지역경제뿐만 아니라 지역문화의 자급자족 원리까지 파괴한다.

 

 

지역경제는 문화적 지식과 태도 그리고 기술, 가족과 공동체의 밀접한 관계, 가족과 공동체의 노동력 그리고 재능, 겸손, 성실, 아량, 이웃간의 정과 같은 문화적, 종교적 원칙 등과 관련하여 가치 있는 무형 자산이 될 수 있다. 또한 동식물 및 인간의 신체를 일종의 '태양 에너지 전환기'로 이용하면서 동력을 공급할 수 있으며, 이웃과 지식 및 기술을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무상의 공급물을 경제적 이익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그런데도 지역경제는 대개 우선순위 목록에서 밀려나 있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현재 공동체의 개념과 관련된 이런 경제적, 정신적 가치가 과거 공동체들의 경제적 자산이었으며, 경제적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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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 물건의 갯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올초에 입지않는 옷을 비롯한 몇 가지를 물품을 정리해 아름다운가게에 기증한 갯수가 200여개 였다. 집에 남은 숫자는 그 몇배, 몇십배에 달할 것이다.

 

문요한의 <여행하는 인간> 중에 "'일본의 한 사진작가에 의하면 몽골인은 평생 가지고 있느 물품이 300여 개인데 비해 일본인은 한평생 6200여개를 갖는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여행하듯 사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불필요한 욕망을 걷어내고 소유에 덜 연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 지평을 한 차원 넓혀준다."라는 글에서 아 나도 저렇게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있겠구나 생각했고 누군가 쓴 '물건은 기억해주는 주인을 잃을 때 가치도 함께 잃는다.'는 표현에서, 내 기억속에 사라졌지만 집안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을 생각하면 잠깐의 편리와 만족을 위한 소비에 대한 반성을 한다.

 

파타고니아의 기업 철학과 활동을 엿보며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위해 물건에 대한 소유와 소비태도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본문발췌]

 

 

"바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사용하는 일은 적절한 이유에 따라 행해졌을 때 우리 자신의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 받으소서 - 우리의 안식처를 돌보는 일에 대하여' 중에서

 

 

"알고서 하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 - 왕양명

 

 

글로벌 생태 발자국 네트워크(Global Footprint Network)는 현재 깨끗한 물 깨끗한 공기, 경작 가능한 토지, 풍부한 어장, 안정된 기후와 같은 필수적인 '서비스'의 사용량이 이를 공급하는 지구 역량의 150퍼센트에 달한다고 계산하고 있다.

 

 

대형 다국적 기업에게 조종을 받는 정부들이 운영하는 세계 경제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수익과 성장에 의존하고 있다. 좀 더 지속 가능하고 푸른 지구를 가지기 위해 노력해 얻었던 성과들은 양적 성장에 모두 잡아먹히고 있다. 양적 성장은 아무도 입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다.

 

 

옳은 것을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압도적으로 성공하는 법: 환경의 붕괴가 목전에 있다는 전 세계 과학자들의 보편적인 합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행동을 취할 의지가 부족하다. 우리는 무관심, 타성, 상상력의 부재로 인해 집단적인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 파타고니아는 통념에 도전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책임 있는 기업을 보여 주려고 한다. 우리는 끝없는 성장을 필요로 하고 자연 파괴에 대해 책임져야 마땅한 자본주의 모델은 반드시 대체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파타고니아와 2000명의 직원들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세상에 유익하면서도 수익성이 있는 기업을 만든다는 것을 전 세계 기업들에게 입증해 보일 수단과 의지를 갖고 있다.

 

 

'위험과 마주하는 것은 등반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기어오르는 상태 그 너머에서 일순간 느껴지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험들 중 하나이다.' - 리오넬 테레, <쓸모없는 것을 정복하는 사람들>

 

 

항공기 뿐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하는 모든 산업 활동, 모든 계산과 추정, 사람들이 초안을 만들고 청사진을 그리는 데 보낸 모든 밤들은 하나의 원리로 수렴된다. '단순성'이라는 궁극의 원칙으로. 가구의 곡선이나 배의 용골이나 비행기의 동체를 다듬는다고 생각해 보자. 장인 정신을 담은 수 세대에 걸친 실험을 통해, 인간의 가슴이나 어깨의 곡선과 같은 궁극의 자연스러움을 드러내야 한다는 법칙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일에 임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완벽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적나라한 상태에 이를 때에 달성된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존 뮤어는 자신의 짐을 양철통 하나에 넣을 수 있는 정도로 제한하곤 했다. 묵은 빵 한 덩어리와 외투 한 벌로 말이다. 그것은 환경적인 고려이기도 하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모든 것들은 만들어져서, 팔리고, 운송하고, 보관되고, 세탁되고, 결국은 버려지는 그 모든 단계에서 환경에 피해를 입힌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기도 하고, 우리에게서 비롯되어 다른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자로서든 소비자로서든 무언가를 구입할 때에는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 구매가 필요한가? 요가를 하기 위해서 새로운 옷이 정말로 필요한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이 제품이 한 가지 이상의 일을 해낼 것인가?

 

 

전체에 대한 책임: 우리가 쓰는 것, 만드는 것, 그것을 만드는 방법, 버리는 것 모두가 사실은 윤리의 문제이다. 우리는 전체에 대한 무한대의 책임을 갖고 있다. 감당하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성공하지는 못하는 책임 말이다. 품질과 제품이 내구성을 유지하는 기간도 이런 책임의 일부이다. 고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고객과 사용자를 존중하고 그들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감수하는 방법이다. 사용법과 관리법을 익힌 사람들의 손에 들어간 고품질의 제품은 내구성이 훨씬 더 높아진다. 소유자, 곧 사용자에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다 큰 전체, 지구와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일이다. 내구성의 향상은 우리가 덜 쓰고(원료와 에너지 소비가 감소하고), 적게 생산하고(더 중요하거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일을 할 시간이 늘어나고), 적게 파괴한다(적게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랑스포스 브룩 AB

 

 

기능 중심의 디자인은 대개 미니멀하다. 브라운의 디자인 책임자인 디터 람스의 주장처럼 "좋은 디자인은 최소한의 디자인이다." 복잡하다는 것은 기능적 필요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신호이다.

 

 

합리적인 소비자이자 건전한 시민으로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책임감 있는 의류 구매 방법은 중고 의류를 구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드라이클리닝이나 다림질이 필요한 옷을 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탁은 찬물에 해야 하고 가능한 건조기 없이 건조대에 널어 말려야 한다. 셔츠는 하루 이상 입고 빤다. 여행 가방을 챙길 때는 100퍼센트 면직 의류보다는 더 빨리 마르는 대체품을 선택하는 게 좋다.

 

 

몬태나주립대학의 토마스 M. 파워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재화와 서비스에 쓰는 돈 가운데 생존에 필요한 것은 10~15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어떤 문제를 고민할 때면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고민이 끝났을 때 그 해법이 아름답지 않다면 잘못된 답이다. - 리처드 버그민스터 퓰러 

 

 

세계 경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세계 경제는 오로지 값싼 화석연료를 태우는 데만 의지하고 있다. 기차나 배를 통해 물건을 1킬로미터 운송하는 데 톤당 250T가 소모된다. 트럭 운송에는 톤당 2000BTU 이상이, 항공 화물은 1톤의 화물을 1킬로미터 옮기는 데 13,465BTU의 에너지가 든다. 카탈로그나 웹을 토해 쇼핑을 할 때는 메인에서 살아 있는 바닷가재를 주문하는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당일 배송으로 하룻밤 사이에 도착하는 바지가 정말로 필요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BTU(British termal unit, 영국의 열량 단위로서 1파운드의 물을 ㄷ기압 하에서 1F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의 에너지)

 

 

파타고니아의 이미지는 인간적인 목소리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신념에 대해 열정적인 사람들, 미래에 영향을 주고자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표현한다. 그 과정에서 가공이 가해지거나 인류애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미지가 규범을 깨뜨리고 영감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에게는 상정하고 있는 고객 이미지가 있다. 고객이 똑똑하다고만 상정하는 것이 아니다. 고객이 쇼핑을 재미로 하지 않으며, '삶을 돈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으며, 삶을 허접한 쓰레기로 만들지 않고 보다 깊고 단순하게 만들기를 원하며, 공격적인 광고의 표적이 되는 데 지쳤거나 무관심하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물론 고객에게도 가장 귀중한 조언은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주는 조언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삶의 기술에 통달한 사람은 일과 놀이, 노동과 휴식, 몸과 마음, 훈련과 오락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다. 무엇이 어떤 것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그 안에서 탁월성에 대한 비저늘 추구할 뿐이고, 자신이 일을 하고 있는지 놀고 있는지에 대한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스스로에게 그는 항상 양쪽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 L. P. 잭스

 

 

가장 강한 종이나 가장 지능이 높은 종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는 것은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다. - 찰스 다윈

 

 

나는 인간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영리한 동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 이외의 어떤 동물도 자신의 보금자리를 더럽히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상적인 행동의 장기적인 결과를 예상할 만큼은 똑똑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원자력, 텔레비전, 에탄올, 패스트푸드 같은 새로운 것을 발명하고 개발하는 뛰어난 과학자나 기업가도 종종 자신의 발상이 가진 어두운 면을 보지 못한다. 문제는 상상의 실패이다. 호기심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그들은 종종 맹목적인 믿음을 갖는다. 맹목적 신념의 가장 무서운 점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심지어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자신의 행동을 책임져야 하는 작고 동질적인 사회에서 가장 잘 작동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숨는 것이 불가능하다. 동료 집단의 압박이 있기 때문에 경찰, 변호사, 판사, 감옥이 필요치 않다. 개인은 자신과 부모의 '사회적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 결정은 타협이 아닌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세상의 변화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당신 자신이 그 변화가 되어야 한다." - 마하트마 간디

 

 

소비자의 원래 정의는 "사용을 통해 파괴 혹은 소진하는 사람, 게걸스레 먹거나 헤프게 쓰는 사람"이다. 세계의 다른 사람들이 미국인과 같은 속도로 소비를 한다면 지구가 7개는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쇼핑센터에서 사들이는 것의 90퍼센트는 60~90일 내에 쓰레기 더미로 들어간다. 우리가 이제 시민 대신에 소비자라고 불리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소비자는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정치가와 기업가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는지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소비하고 버리는 일을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세계 경제가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죄인은 바로 우리다. 우리는 '써 버리고, 파괴하는' 소비자이다. 우리는 필요는 없지만 원하는 물건들을 계속해서 사들인다. 우리에게 만족이란 없는 것 같다.

 

 

사업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내가 싸워야 할 가장 큰 문제가 '안주'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항상 파타고니아가 지금부터 100년 후에도 이곳에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회사를 운영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 말은 목표까지 100년의 시간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성공과 수명은 빠르게 변화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을 위해서는 절박한 느낌을 유지해야 한다. 한가롭고 느긋해 보이는 파타고니아의 기업 문화에서는 특히 어려운 과제이다. 사실 내가 우리 회사 관리자들에게 주는 가장 큰 과제는 변화를 일으키라는 것이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우리를 살아남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연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생태계는 대재해나 자연선택을 거쳐 환경에 적응한 종을 지지한다. 건강한 환경이 작동하려면 성공적인 기업과 마찬가지로 다양성과 포괄성이 필요하다.

 

 

사회가 너무 복잡해진 나머지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상황이라고 해서 끝내 진창에 빠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데이비드 브로워의 말대로 뒤로 돌아서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절제, 품질, 단순함과 같은 단어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장이라면 다 좋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빠르게 성장하는 것과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유한한 지구에서는 소비를 줄일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까 걱정인가? 어차피 자동화와 로봇 기술의 발달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것만을 구입한다면, 다기능의, 내구성이 좋은, 수선이 가능한, 품질이 좋은, 유행이 없는 그리고 다음 세대까지 물려줄 수 있는 것만을 산다면 어쩌면 일부 사람들은 일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일에 달인이 되는 길은 단순함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기술 대신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많이 알수록 필요한 것은 적어진다. 자신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려는 미미한 시도들을 통해 나는 보다 단순하게 살아야, 혹은 그렇게 살기로 선택해야 정말 중요한 모든 면에서 빈곤하고 결핍된 삶이 아닌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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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신에 대한 믿음이다. 종교 속에서 사람들은 선한 것을 추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거나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는 증거를 종교에서 비롯된 전쟁의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고, 지금도 종교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행되는 악행을 접할 수 있다.

 

종교가 왜곡되고 악의 영역에 발들이지 않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

 

 

[본문발췌]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 로버트 퍼시그

 

 

나는 인격신을 상상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신은 우리의 불충분한 감각으로 세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경외심을 품게 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유신론자는 초자연적 지성을 믿는다. 그 지성은 우선 우주를 창조하는 큰 일을 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주위를 맴돌면서 자신이 창조한 것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유신론적 신앙 체계 내에서 신은 인간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 이신론자는 초자연적 지성을 믿지만, 그 지성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설정하는 일에만 관여할 뿐 인간사에 개입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범신론자는 초자연적인 신을 아예 믿지 않지만 신이라는 단어를 자연이나 우주 또는 그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리키는 비초자연적 동의어로 사용한다. ..."신은 심술궂지만 악의적이지는 않다.",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 "신은 우주를 창조할 때 선택을 했을까?" 같은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들은 이신론적이거나 유신론적이지 않고 범신론적이다. 

 

 

인도를 비롯한 각지에서 종교, 하여튼 조직 종교라고 불리는 것의 현란한 모습을 보고 나는 공포에 질렸고, 그것을 비난하는 말을 자주 해왔으며 그것이 깨끗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내가 볼 때 그것은 거의 언제나 맹목적인 믿음과 반응, 독단과 편협, 미신, 착취, 기득권의 유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 간디

 

 

사실 불가지론은 신조가 아니라 방법 또는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할 때 기반이 되는 본질이다. .... 그 원칙은 긍정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즉, 지성의 문제와 관련된 경우, 다른 생각은 고려하지 말고 당신의 이성을 따르라. 그리고 부정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즉, 지성의 문제와 관련된 경우, 증명되지 않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결론을 놓고 확실한 척하지 말라. 그래서 나는 불가지론을 취한다. 사람이 건전하고 순수하다면, 그는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지든 우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 토머스 헉슬리

 

 

굴드는 <시대의 반석들>에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듯한 대단한 노력의 성과물을 보여주었다. 거기에서 그는 '겹치지 않는 교도권(nonoverlapping magisteria)'의 약어인 NOMA라는 말을 제시했다. '과학의 그물 즉, 교도권은 경험 세계를 덮고 있다. 그것은 우주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사실) 왜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가(이론)를 다룬다. 종교의 교도권은 궁극적인 의미와 도덕적 가치 문제들을 포괄한다. 이 두 교도권은 겹치지 않을 뿐더러, 모든 의문을 포괄하는 것도 아니다(예를 들어 예술과 아름다움의 의미에 관한 교도권을 생각해보라). 진부한 표현을 쓰면 과학은 암석의 시대를 다루고 종교는 시대의 반석을 다룬다. 과학은 천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연구하고 종교는 천국에 가는 법을 연구한다.' 

 

 

종교에서 진리는 그저 살아남은 견해를 지칭한다. - 오스카 와일드

 

 

이성적인 존재를 동의 없이 어떤 목적(설령 그 목적이 남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 해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 - 이마누엘 칸트

 

 

마크 하우저와 피터 싱어는 공동으로 세 가지 가상의 궁지에 초첨을 맞춤으로써 무신론자와 종교인의 판단을 비교했다. 그들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가상의 행동을 제시한 후 그것이 도덕적으로 '의무적인' 것인지, '용납되는' 것인지, '금지된' 것인지를 택하게 했다. .... 하우저와 싱어의 결론은 무신론자와 종교인의 판단에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선하거나 악하기 위해서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지닌 견해와 들어맞는 듯하다. 

  • 더니즈의 궁지. 90퍼센트가 화차를 우회시켜서 한 명을 희생시키는 대신 다섯 명을 구하는 것이 용납된다고 말했다.

  • 연못에 아이가 빠졌는데 주위에 달리 도와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아이를 구한다면 당신의 바지가 젖을 것이다. 97퍼센트가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놀랍게도 3퍼센트는 바지를 지키는 쪽을 택했다).

  • 앞서 말한 장기 이식과 관련된 궁지. 97퍼센트는 대기실에 있는 건강한 사람을 희생시켜서 그의 장기로 다섯 명을 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금지된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 그것이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고 나쁜 사람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 스티븐 와인버그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 파스칼

 

 

신 십계명

  • 남들이 당신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 매사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라.

  • 당신의 동료 인간들, 동료 생물들, 나아가 세계 전체를 사랑과 정직과 성실과 존경으로 대하라.

  • 악을 못 본 척하지 말고 정의를 구현하는 데 주저하지 말라. 그러나 잘못된 행위를 솔직히 인정하고 진심으로 후회한다면 언제라도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

  • 기쁨과 경이로움을 느끼며 살아라.

  • 늘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라.

  • 모든 것을 시험하라. 늘 자신의 생각을 사실에 비추어 점검하고, 설령 소중히 믿는 것이라고 해도 사실에 부합되지 않으면 폐기할 태세를 갖추어라.

  • 검열을 핮도, 이의를 막으려 하지도 말라. 다른 사람들의, 다른 의견을 낼 권리를 늘 존중하라.

  •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토대로 독자적인 견해를 수립하라. 남들에게 맹목적으로 끌려 다니지 말라.

  •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라.

 

'종교 신앙의 위험은 그것이 없었다면 정상적일 사람들을 광기로 내몰고 광기를 신성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이 종교적 주장들은 다른 모든 주장들이 거쳐야 하는 정당화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배우기 때문에, 문명은 여전히 얼토당토않은 무리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고대 문헌 때문에 자살하고 있다. 그토록 비극적으로 불합리한 일이 가능하리라고 누가 과연 생각했겠는가?' - 샘 해리스, <신앙의 끝>

 

 

나는 죽어서 썩으면 내 자아 중에 살아남는 것은 없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젊지 않으며 삶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사멸한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짓을 경멸한다. 행복은 언젠가 끝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진짜 행복이며, 사유와 사랑도 한없이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두대에 설 때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바로 그 자긍심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인간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올바로 고찰해야 한다. 설령 활짝 열린 과학의 창문들이, 처음에는 대대로 내려온 인간화한 신화들이라는 안락한 실내 온기에 적응되어 있던 우리를 덜덜 떨게 할지라도, 결국에는 신선한 공기가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드넓은 세상이 우리 앞에 장엄함을 드러낼 것이다. - 버트런트 러셀, <내가 믿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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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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