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집근처 문어요리집 대표 메뉴 문어 4합을 보고 올해 말복 보양식으로 정했다.

삼겹 수육과 문어 삶고 홍어에 2년 묶은지까지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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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서울 출발하면서 비가 장대같이 내리더니 고창 집에 도착하니 장마 걷히고 파란하늘이 반짝!

점심 먹고 잠깐 옆동네 해리, 상하, 심원으로 이어지는 드라이브 길.

첫 목적지는 용대저수지. 연꽃을 기대하고 갔는데 꽃은 없더라!

바로 옆 구시포는 항구에 캠핑객들 가득, 물 빠진 해수욕장에는 모래파고 조개잡는 피서객들로 가득, 무료입장시간 맞춰 도착한 상하목장에는 애들 데리고 나들이 온 가족들이 가득!

집에 오니 저녁 바람이 시원하고 석양과 밤 별보며 하루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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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몇 개의 글자와 여백 가운데 의미가 녹아 있다.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림은 미완성처럼 보이지만 읽는 사람이 생각 속에 음미하고 되새기며 완성된다.

 

 

[본문발췌]

 

 

시를 제대로 읽어 보려는 사람은 어떻든 시 앞에서 일단 겸허하고 공경스러워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야 내 마음의 문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한 편의 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목소리와 빛깔과 냄새들이 나에게 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시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지 못할지는 모르나, 본디 시인이란 자기 삶의 가장 순결한 형식으로 시를 섬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이에게는 하잘것없을 글 몇줄에 자신의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이 시인이다. 한 인간이 무엇인가 자기 삶을 걸어 애쓸 때 거기엔 그럴 만한 곡절이 있게 마련이며, 그 사람 나름의 절실함이 깃들어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절실함을 향해 우리는 겸허히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시를 포함하여 문학예술은 부분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에 관여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아름다움의 문제와 더 인연이 깊은 분야이다. 다시 말해 시를 쓰거나 읽는 일은 추상적인 개념을 매개로 한 논리적 추리, 분석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실물적 상상력을 토대로 한 정서적 공감과 일치에 주로 의거하는 것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머리와 눈으로 활자의 말뜻을, 그 사전적 의미들의 조합을 이해하는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를 읽는 일이란, 시를 이루고 있는 소리, 말뜻, 행과 연 등 각 단위들을 포함하여 시 전부를 어루만져 보고 냄새 맡고 미세한 색상의 차이를 맛보는 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를 잘 옷 입어 보는 일'이다.

 

 

'시는 마음/뜻이 움직이는 바가 말로 핀 것', - 시경

 

 

'슬픈 속도' - 김주대

 

새벽 

아버지의 칼을 피해 도망치던 어머니처럼 

고주망태 아버지의 잠든 틈을 타 잽싸게 칼을 숨기던 형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녀석의 그림자 

 

돌아보면 

모든 속도가 슬프다

 

 

난폭과 탐욕을 속도의 본질로 보는 견해들보다 이 시의 '슬픔 기원설'쪽이 속도에 대한 통찰로서 아무래도 더 깊은 것일 듯하다. 속도의 폭력성의 이면이, 오늘의 속도 숭배의 이면이 실은 공포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속도는 얼마간의 치욕과 자기모멸을 불가피하게 동반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빠름'들은 결국 슬픔에 속하는 것인지도.

 

 

'시는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도피' -  T. S. 엘리엇.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326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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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만든 종교에 갖혀 자유를 포기하기도 한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는 도전적이다. 자연은 도전과 극복이 아니라 조화와 순응의 대상이 아닐까?

 

 

[본문발췌]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었다. 그것은 인생을 즐기지 못한 채 불완전하게 끝내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 죽음에의 공포를 다른 이들에게까지 전염시키는 것은 간교하고 잔인한 짓이다.

 

 

우리가 속한 종을 포함한 사물은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화해온 것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의 경우에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따르지만, 기본적으로 진화는 무작위적이다. 다시 말해서, 일정 기간만이라도 우연히 살아남아 번식하는 데에 성공한 종은 버티고 그렇지 못한 종은 금세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 종으로서의 우리 인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행성, 그 위로 매일 타오르는 태양도 -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영원불멸한 것은 오직 원자뿐이다. 루크레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우주에서 지구와 그 거주민이 우주의 중심을 점하고 있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인간이 신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신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불가능하고 종교적 광신이 들어설 여지도 없다. 금욕적인 자기 부인은 불필요하고, 전지전능한 힘이나 완벽한 구원에 대한 환상은 근거가 없다. 정복욕이나 자기 과시욕도 불합리하다. 그 어떤 것도 자연에 맞서 이길 수 없으며 생성과 파괴, 그리고 재생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안전에 대한 거짓 환상을 팔거나 죽음에 대한 비논리적인 공포를 선동하는 자들에게 분노하는 한편, 루크레티우스는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이전에는 너무나 위협적으로 보였던 것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도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 것임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썼다.

 

 

아무리 선의의 질문이라고 해도 질문은 토론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으며,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은 종교의 교리가 의문과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신앙으로 뭉친 수도원이라는 공동체는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며 쉼 없이 광범위한 호기심을 키워갔던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 아카데미와는 달라야 한다고 확고한 의식이 깔려 있었다.

 

 

우리는 닥쳐올 재앙에 대한 공포에 짓눌린 채로 끝없이 고통스러워하며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비참한 운명을 맞으리라는 공포 때문에 우리는 그런 걱정을 결코 멈추지 못하고 항상 재물에 대한 갈망으로 허덕이면서 단 한순간도 영혼과 육신에 평온을 느끼지 못하지요. 그러나 작은 것에도 만족하면서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축제처럼 보냅니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인생은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자신과 벗의 행복이라는 이 목적을 이루려는 것 이상으로 더 고귀한 윤리적 목적은 없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열광하는 부(富)라는 것이 많은 경우에서 무의미하며 더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 것과는 거의, 어쩌면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고 있다. "멋지게 장식한 불타는 듯한 주홍빛 옷을 입고 뒹군다고 해도 평범한 옷을 입고 몸져누워 있는 것보다 타는 듯한 열병이 더 빨리 가라앉지 않으리니." 그러나 신과 사후세계에 대한 공포에 저항하기 힘든 것처럼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물욕과 정복욕을 발휘하여 안전을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결국 행복의 가능성을 줄이고 모두를 파멸의 위험 속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쾌락에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 아니라 망상이다.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주요한 적은 유한한 세계에서 가능한 그 이상을 얻으려는 환상인 과도한 욕망과 삶을 좀먹는 공포이다. ... 실제로는 꿈에 불과한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 마음을 파고들며 끝내 전소시키고 마는 그 망상적인 소유욕이 문제인 것이다.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깊은 경이로움을 낳는다. 우주가 원자와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 세상은 창조주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정신적 삶과 육체적 삶도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비교했을 때 별다를 것이 없다는 것, 영혼도 육신만큼이나 물질적이며 소멸하는 것이라는 것, 이 모두를 깨닫게 된다고 해도 절망에 빠질 이유는 없다. 오히려 사물의 실제 본성을 이해하게 된 것이야말로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길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걸음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이 모두 인간 존재와 그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인간 존재의 사소함은 좋은 소식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인간이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착각하거나 신을 두려워하거나 필멸의 존재를 초월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가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고결하게 희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달랠 수 없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행복한 인생의 주요 장애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의 수련을 통해 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는 영혼은 이 세상에 잠시 머물 뿐이며 궁극적으로 다른 곳으로 간다는 신앙은 인간 존재에 독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신앙은 자신의 단 한번뿐인 삶을 살고 있는 이 세상과 파괴적인 관계를 맺게 할 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물과 서로 연계되어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이 세계를 포함한 사물은 결국은 붕괴되어 그 구성요소인 원자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원자로부터 영원한 물질들의 군무 속에서 다시 다른 사물이 형성된다. 그러나 최소한 살아 있는 동안에는 최고의 쾌락을 즐겨야 하는 법이니, 우리 또한 루크레티우스가 본래 관능적인 것이라고 칭송한 이 세상을 창조하는 장대한 과정의 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주에는 질서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질서란 사물의 본성으로서 우주는 이에 따라서 구성되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로 만들어진다. 하늘의 별에서부터 인간과 빈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 사물의 본성이란 추상적인 힘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어머니와 같은 것이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이로써 루크레티우스식의 우주로 입장하게 되는 것이다. ... "세계는 그 자체로 멋지다." - 조르다노 브르노

 

 

우주는 결코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행동이나 운명과도 무관하다. 우리는 이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이 거대한 어떤 것을 이루는 아주 작은 한 조각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포에 질려 움츠러들 이유는 없다. 단지 놀라움과 감사함, 그리고 경외심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받아들이면 된다.

 

 

이 세계에 들어왔던 것처럼, 당신이 죽음에서 삶으로 왔던 그 똑같은 길을 따라 어떤 감정이나 두려움 없이 다시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자. 당신의 죽음은 우주의 질서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죽음 역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의 한 부분이다.

우리의 삶은 서로에게서 빌린 것이니, 인간은 주자(走者)처럼 삶의 횃불을 따라가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토머스 제퍼슨,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물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다른 존재도 있는 것이지요. 나는 그것들을 '물질(matter)'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나는 그것들이 장소를 바꾸며 움직이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이것이 '운동(motion)'이지요. 그리고 그런 물질이 없는 곳인 '진공(void)', '무(nothing)' 또는 '비물질적 공간(immaterial space)'이라고 부릅니다. 물질과 운동으로부터 받는 감각에 기초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고 필요로 하는 모든 확실성들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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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물러서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을 보고 생각해 보면 삶의 원칙이 보인다. 원칙은 누구나 발견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모두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실행해야지 그 과실을 얻을 수 있다.

 

 

[본문발췌]

 

 

가격은 사람들의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고, 그래서 실제 결과기 기대보다 좋을 때 가격이 상승하고, 예상보다 나쁠 때 가격이 하락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할 때 이미 모든 것이 가격에 반영돼 있기 때문에 여기에 승부를 거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나는 또 모든 행동(통화완화와 대출완화)에는 그에 비례하는 결과(이 사례의 경우 높은 인플레이션)가 있고, 동일하거나 정반대의 반응(통화와 대출의 긴축)으로 시장의 역작용을 초래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이런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여러 차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건은 유사한 사건의 다른 버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논리적 인과관계에서 보면 대부분의 사건은 과거에도 반복해서 발생했다. 물론 그런 일들 가운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적절히 찾아내고, 그 이면의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되돌아보면 거의 모든 것이 불가피하고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어떤 것도 분명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장 인기 있는 것을 따라가고, 그렇지 못한 것은 피하는 경향이 있다. 

 

 

한 건의 투자나 심지어 여러 건의 투자결정이 나에게 감당할 수 있는 규모 이상의 큰 손실을 초래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투자는 공격적인 동시에 방어적이어야 한다. 공격적이지 못하면 돈을 벌 수 없고, 방어적이지 않으면 돈을 지킬 수 없다. 나는 투자에서 돈을 번 사람은 누구나 어느 시점에서 엄청난 고통을 경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투자는 전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잘못하면 전기에 감전될 수 있다. 

 

 

'더 멍청한 바보들'이 주식을 계속 사거나 팔기 때문에 주식 가격은 너무 높아지거나 너무 낮아질 수 있다. 하지만 가축은 소비자들이 얼마를 지불할 것인가에 근거해 육류 판매대에서 가격이 결정된다. 따라서 판매에 이르는 과정을 구체화하고, 거래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관계들을 파악할 수 있다. 가축은 곡물(주로 옥수수)과 대두 가루를 먹고, 옥수수와 콩은 재배 면적이 경쟁력이기 때문에 두 시장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상품간 가격 변동성, 방향을 고려한 비용 고정하여 수익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 닭고기 생산업체가 가장 걱정하는 변동성 비용은 사료 가격이다. 옥수수와 대두선물을 혼합해 비용을 고정하고 안정적으로 닭고기를 공급

  • 소사육업체에게 육우, 옥수수, 대두 등 비용 요인들 사이의 가격 변동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고정

 

"당신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상장기업의 역사와 배경에 대해 의대생이 해부학을 공부하는 것처럼 연구할 준비가 돼 있어도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추가로 도박사의 냉정한 배포와 미래를 내다보는 육감 그리고 사자의 용기를 가지고 있어도) 시장에서 이길 확률은 거의 없다." - 버나드 바루치Bernard Baruch

 

 

옳은 판단을(정확한 답을 찾기) 위한 원칙

  •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가장 똑똑한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 의견을 밝히지 말아야 하는 때를 알아야 한다.

  •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인 원칙들을 개발하고 시험하고 체계화하라.

  • 큰 이익을 지키고 손실을 줄이는 방법으로 위험의 균형을 유지하라.

 

아이디어 성과주의(idea meritocracy), 사려 깊은 반대 의견을 권장하고, 사람들의 능력에 비례해 의견의 중요성을 평가하는 능력주의

 

 

사실을 말하면 예측은 큰 가치가 없고, 예측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시장에서 돈을 벌지 못한다. 그 이유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측을 할 때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다양한 요인의 개연성을 무시할 경우 우리는 개연성이 높은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다양한 확률을 가진 광범위한 가능성을 얻게 된다. 우리는 시장의 움직임이 경제의 움직임을 반영한다고 믿고 있다. 경제 통계와 시장 움직임 사이의 관계를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경제와 시장의 환경 그리고 우리의 투자 전략에서 중요한 변화를 찾아내기 위한 정확한 규칙을 개발했다. 다시 말하면 경제 환경의 변화를 예상하고 이에 따라 투자 전략을 바꾸는 대신, 우리는 발생하고 있는 변화를 찾아내어 변화하는 환경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내는 시장에 우리의 돈을 투자하는 것이다.

 

 

위험중립적 벤치마크 포지션Risk-neutral benchmark position을 구축하고, 제한된 범위에서 벗어나는 접근법은 우리가 나중에 알파 오버레이Alpha overlay라고 부르는 투자 관리 방식의 시초였다. 알파 오버레이에서는 수동적인 위험 노출(베타)과 적극적인 위험 노출(알파)이 분리돼 있다. 시장의 수익률(예를 들면 주식시장 등)은 베타라고 불린다. 알파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투자해 생기는 이익을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주식시장의 수익률을 앞서가고, 다른 사람들은 시장의 수익률에 못미친다. 시장수익률을 웃돌면 포지티브 알파이고, 시장수익률보다 낮으면 네거티브 알파이다. 알파 오버레이를 통해 우리는 기본적으로 시장수익률과 관계없는 투자 방식을 제공한다. 알파 오버레이 방식을 이용한 시장접근법을 통해 나는 정말로 자신 있는 분야에만 투자했고, 투자 대상을 잘 분산시키는 것이 성공한 투자자가 되는 비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배웠다.

 

 

나는 열심히 그리고 창의적으로 일하면 원하는 것을 거의 얻을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성숙함은 훨씬 더 좋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 좋은 대안을 거절하는 능력이다.

 

 

모든 투자 방법과 위대한 투자자들도 곤경에 처할 때가 있다. 이런 시기에 투자자와 투자 방법에 대한 믿음을 잃는 것은 성과가 좋을 때 과도하게 그들에게 의존하는 것과 같은 실수를 유발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논리적이기보다 감정적이기 때문에 단기 성과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경기가 좋지 않을 때 투자를 포기하거나 낮은 가격에 팔고, 경기가 좋을 때 너무 높은 가격에 산다. 나는 이것이 투자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명한 사람들은 오르내림에 관계없이 기본 원칙을 지킨다. 반면 경솔한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반응하여 상황이 좋을 때 일에 뛰어들고, 그렇지 않으면 포기한다.

 

 

제대로 균형이 잡히고 위험이 분산된 상관관계가 낮은 투자를 하는 것이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수익을 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

 

 

셰이퍼, 특별한 비전을 가지고 어떤 분야에서 기반을 확립하는 선구자. 빌 게이츠, 앨런 머스크, 리드 헤이스팅스, 무아마드 유누스, 제프리 캐나다, 잭 도시, 데이비드 캘리 등 입증된 셰이퍼들...

셰이퍼들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자신들의 대담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은 일을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설계도를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현실 세계에서 이것을 시험하고 더 잘 실현될 수 있도록 일하는 방식을 바꾸려는 의지력을 가지고 있다. 셰이퍼들은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려는 욕구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고통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실패에서 회복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세이퍼들은 원래부터 통찰력을 가지고 있거나,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들에게서 통찰력을 얻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보다 통찰력의 범위가 더 넓다. 셰이퍼들은 큰 그림과 세부적인 것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각 단계의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다양한 견해들을 종합할 수 있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 또는 다른 하나의 관점에서만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들은 창의적이고 체계적이며 실용적이다. 셰이퍼들은 자기주장이 강하지만 동시에 개방적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열정적이고, 일을 못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으며, 세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 한다.

 

 

기득권과의 갈등은 국제적으로 전개되지 않지만, 국가 내부적으로는 심각해질 수 있다. 대부분의 정책결정자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척하지만, 진실을 찾아내고 모든 사람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그들이 대표하는 유권자들의 이익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예를 들면 소득이 높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은 높은 세금이 성장을 억누를 것이라고 말하고, 저소득층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은 반대로 이야기한다. 전체의 이익을 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람이 객관적으로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도록 만드는 것도 매우 어렵다.

 

 

성공에 대한 만족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잘 헤쳐 나가는 데서 온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의 한계효용은 매우 빨리 사라진다. 사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적당히 소유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정상에 있는 것은 선택의 폭을 넓혀주지만, 당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아마 유명해지는 것은 익명으로 지내는 것보다 더 나쁠 것이다. 유명해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좋은 영향력은 커지겠지만, 넓은 시야에서 보면 여전히 아주 보잘것없다. 이런 이유로 성공적이지만 치열한 인생을 사는 것이 즐거움이 가득한 여유로운 인생보다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강한 것이 약한 것보다 좋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힘을 내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타고난 그대로 살았다면 내 인생을 변화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알려줄 수 없다. 그것은 당신이 선택해야 하는 문제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본성에 어울리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고통+자기성찰=발전

 

 

지금 당장 자신에게 가장 해로운 습관 세 가지를 적어보라. 그리고 이런 습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한 다음 그 습관을 버리는 데 집중하라. 이것을 실천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세 가지 습관을 모두 깨뜨린다면 인생의 궤도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 아니면 체득하고 싶은 습관 세 가지를 정하고, 그 습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

 

 

모든 사람이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고,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배우기 바란다. 자연은 목적을 가지고 모든 사물과 사람을 창조했다.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이기려는 용기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아에 충실해지는 용기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을 관리하는 문제에 있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비유는 훌륭한 오케스트라이다. 책임자는 행동을 하지 않고(악기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만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결과를 제시하고, 구성원이 목표를 달성하도록 감독하는 예리한 지휘자이다. 지휘자는 구성원 각자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 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도록 해야 한다. 단원들은 개인적으로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부분의 합보다 더 좋아지도록 협력해야 한다. 지휘자가 하는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 연주를 못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합주를 못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지휘자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소리를 듣는 것처럼 악보가 정확하게 연주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목표이다. "그 부분은 이렇게 들려야 돼." "베이스 주자들은 곡의 구조를 잘 살려야 해. 여기가 연결 부분이고 여기가 곡의 핵심 부분이다."라고 지시하고, 그렇게 연주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오케스트라에는 각 부분의 리더들(악장, 수석)이 있고, 이들은 작곡가나 지휘자의 생각을 잘 표현하도록 도와준다.

 

 

인생의 모든 측면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훗날 돌이켜 생각할 때보다 훨씬 더 커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한발 뒤로 물러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때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날 때까지 결정을 미루는 것이 좋다.

 

 

장기적으로 최선인 결과를 산출하는 의사결정 논리를 활용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과학이 되었다. 의사결정 논리는 확률, 통계, 게임 이론 그리고 다른 도구들을 활용하고 있다. 이런 도구들이 많은 도움이 되지만, 효율적인 의사결정의 기본은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사실 의사결정의 토대는 유전적으로 우리의 뇌에 다양한 수준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 야생에 있는 동물들을 관찰해보면 먹이를 찾기 위해 소비하는 에너지를 최적화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기대가치를 계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잘하는 동물들은 번성하고, 자연 선택의 과정을 통해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준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동물들은 멸종한다. 사람은 이런 것을 잘하지 못해도 멸종하지는 않겠지만, 경제적 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 불이익을 보게 될 것이다. 의사결정에는 두 가지 접근법이 있다. 고차원적인 뇌에서 나오는 증거/논리에 기초한 접근법과 저차원의 동물적인 뇌에서 나오는 무의식/감정에 기초한 접근법이다.

 

 

지혜는 양쪽을 모두 보고 적절하게 비교 검토하는 능력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개인적 목표보다 체제의 원칙들을 더 가치 있게 평가했을 때 정부의 조직이 제대로 작동했다는 사실은 지속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사람들이 체제를 훼손할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고, 체제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보다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싶은 욕구가 더 클 경우 체제는 실패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원칙을 지지하는 권력은 개인적 이익보다 원칙에 입각한 조직 운영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허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절대다수가 원칙에 기초한 체제를 바라고, 이를 위해 투쟁하도록 하려면 사람들을 합리적이고 사려 깊은 방식으로 대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인생에서 내가 할 일을 찾아내고, 인생이 달라졌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한탄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은 "성공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에서 실패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만들어진다."라고 말했다. 당신은 성공과 실패 사이를 오가는 과정을 즐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신의 진로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다.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1. 혼자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좋은 방식으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영향력

  2. 훌륭한 공동체를 함께 건설하는 수준 높은 관계

  3.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살 돈

 

아이디어 성과주의의 목표는 의미 있는 일과 의미 있는 관계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은 극단적 진실과 극단적 투명성이다.

 

 

사람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무엇을 기대할 수 없는지를 파악하고, 최고의 아이디어가 성공할 수 있도록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최선의 의사결정 방법이다. 아이디어 성과주의에 따른 의사결정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전통적인 독단적 의사결정이나 민주적인 의사결정보다 뛰어나다.

 

 

아이디어 성과주의의 성공을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를 실행해야 한다. 

  1.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말한다.

  2. 수준 높은 토론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려 깊은 반대가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가능한 한 최고의 집단적 해법을 얻기 위한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다.

  3. 해결되지 않은 견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이디어 성과주의적인 방법(신뢰도에 가중치를 둔 의사결정 방법 등)을 준수해야 한다.

 

인생에서 무엇을 얻고 싶고 무엇을 주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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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햇빛, 신선한 공기, 시원한 바람, 맑은 물~~~ 자연이 주는 선물을 제대로 느끼는 것도 행복이다.

 

 

[본문발췌]

 

 

'다른 곳'은 공간에 있어서의 미래이다. '다른 곳'과 '내일' 속에 담겨 있는 측정할 길 없는 잠재력은 모든 젊은 가슴들을 뛰게 한다. 떠난다, 문을 연다, 깨어 일어난다, 라는 동사들 속에는 청춘이 지피는 불이 담겨 있다.

 

 

'행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경이, 공포, 그 철저하고 낭만적이지도 않은 고독감, 그 모두로 인하여 나의 영혼, 나의 몸속에 꺼지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는 청춘을 '이동하는 집'의 주민들은 포기해 버린다. 이동식 행복, 이동식 안락의 공간을 끌고 다니는 월급쟁이들이 나는 무서웠다. 카라반의 집단이 반드시 어느 날 내 청춘의 불덩어리를 서서히 눌러 끄고 그들의 관광, 그들의 바캉스, 그들의 안락을 유형무형으로 나에게, 우리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엑상프로방스는 능률을 찾는 자, 시간이 바쁜 사람, 견문을 넓히려는 교양인, 소유의 노예들,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일체의 환상을 거부한다. ... 누구나 영원한 봄, 영원한 여름을 프로방스의 자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햇빛이 참으로 우리들의 눈이 아니라 프로방스의 속담처럼 '나의 살을 노래하게 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 모든 부질없는 허영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 지중해안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못 견디게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아니 적어도 많은 절망의 한구석에 아직 저 필사의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우리들의 건강한 육체가, 죄 없는 육체가 아는 행복감의 씨앗을 아직 죽이지 않은 자들만이 올 일이다.

 

 

우리가 사랑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여야 할 것은 지나거버리는 것이다. - 알프레드 드 비니

 

 

머나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하여 현재의 행복을 끊임없이 희생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지중해안의 사람들은 철부지같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 광대한 풍경은 우리들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을 다 비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산타크루스에서는 한계가 파괴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와 같은 대장관 앞에서 눈을 감고 스스로를 그 속에 몰입시켜 자연 자체가 되고 그 영향을 얻고 싶어질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후일 그 대장관 없이도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장관은 우리들 자신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 장 그르니에, 생트 빅투아르... 산타크루스... 프로방스

 

 

산다는 것은 물론 표현한다는 것과는 어느 정도 반대되는 것이다. 토스카나 파의 대화가들에 의하면, 산다는 것은 침묵과 불꽃과 부동 속에서,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증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거장들의 그림 속에 그려진 인물들이 우리가 피렌체나 피사의 길거리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는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참다운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줄도 모르게 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동시대 사람들을 잘 바라보지도 않게 되었다. 오로지 그들에게서 우리의 처신에 필요한 방향과 규칙만을 찾는 데 급급한 탓이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 그 자체보다 가장 천박한 시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 카뮈, <사막>... 존재의 참된 증거인 살과 뼈를 그 자체로서 바라보기 전에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 신분, 그의 보이지 않는 생각과 인격에 따라서만 그 사람의 모습을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른바 카뮈가 '천박한 시'라고 부르는 것) 이전에 사람의 얼굴은 생명이 약동하는 살과 뼈로 거기에 있다.

 

 

"창 너머로는 피렌체가 내다보이고 책상 위에는 죽음이 놓여 있다. 절망 속에서 어느 만큼 계속하여 견디다보면 희열이 생겨날 수도 있다" - 카뮈, <사막>. 우리들 삶을 참으로 삶이게 하는 행복과 비극의 표리...피에솔레 언덕의 프란체스코 수도원...

 

 

아름다움은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자가 정신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보다 한층 더 신에 가깝다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전자 속에는 신이 있지만 사랑 받는 사람 속에는 신이 없다는 것이다.

 

 

안개 속의 곤돌라들은 저 깊은 잠과 같은 죽음 속을 끝없이 그렇게 가고 있는 듯하다. 배이자 관이고 관이자 배인 '카롱'의 통나무처럼, 삶과 죽음이 따로 없는 안개 속, 시간도 공간도, 위도 아래도 없는 몽환 속으로 곤돌라는 가고 있다.

 

 

인간을 초월하는 행복이란 없다, 하룻날의 곡선 저 너머에 영원은 있지 않다.

 

 

해 질 녘, 초록색의 황혼 녘, 바닷가에 서면,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나의 별, 잘 익은 과일, 하루에 한 번 익은 지구가 비로소 내 가슴에 깊이깊이 들어앉는다. 내가 그 별 속에 살고, 그 별이 나의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전을 시작한다. 당신은 혹시 보았는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그 잘 익은 별을, 혹은 그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때 나지막이 발음해보라. "청춘." 그 말 속에 부는 바람 소리가 당신의 영혼에 폭풍을 몰고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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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더이상 입지 않는 옷, 읽지 않는 책을 모아 20박스 가까이 기부하거나 버렸다. 그리고 1~2년 후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해보니 20박스가 채워졌다. 그런데도 집에는 그 몇배의 물건이 가득하다.

 

집이 좁은 게 아니라 물건이 가득차 좁게 쓰고 있다. 공간을 비우고 마음을 채우자.

 

 

[본문발췌]

 

 

미니멀리스트'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소중한 것을 위해 물건을 줄이는 사람'이다. 이때 물건이란 가구, 가전, 소품, 옷 등 물리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필요 이상의 물건을 탐내는 욕심, 무의미한 일에 쏟는 에너지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포함한다. 그렇기에 물건을 줄이면 '쾌적한 환경'과 더불어 '삶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자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소유하는 미니멀리스트, 즉 최소주의자의 삶은 단순히 방이 깨끗해져서 기분이 좋다든가, 청소하기 편하다는 표면적인 장점뿐만 아니라 훨씬 더 깊은 본질에 그 가치가 있다. 바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는 것, 누구나 추구해 마지않는 행복을 되짚어보는 일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에게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 애쓴다. - 라 로슈푸코

 

 

세상에 태어나면서 손에 뭔가를 쥐고 나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누구나 미니멀리스트였다. 그러나 자라면서 필요한 것 이상의 물건을 꽉 움켜쥘 때마다 우리는 그만큼의 자유를 빼앗긴다. 나 자신의 가치는 갖고 있는 물건의 합계가 아니다. 물건으로 행복해지는 건 아주 잠깐 동안일 뿐이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건은 에너지와 시간은 물론, 결국에는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우리는 갖고 싶은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갖게 된 물건을 보관하고 유지하기 위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버리곤 한다. 그리하여 도구여야 할 물건은 어느새 주인이 되어 버린다. 영화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 역)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결국 네가 가진 물건에 소유당하고 말 거야."

 

 

인간은 하루에 6만 가지 일을 생각한다고 한다. 그중 95퍼센트는 어제와 똑같은 일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 생각이 80퍼센트는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한다.

 

 

네 직업이 곧 너인 건 아니야. 네 재산 또한 너는 아니지. 네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가 너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네 지갑 속 지폐가 너를 말해주지도 않아. 그 빌어먹을 브랜드도 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 영화 <파이트 클럽> 중에서

 

 

'익숙함' 이라는 독. 우리는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면 금세 그 상황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진 일은 점점 당연한 일이 되고, 당연한 일은 이내 싫증이 난다. 결국 만족 못하고 불행하다고 느낀다.

 

 

사들인 물건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막대한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한다. 물건 자체가 자신의 가치, 나아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건을 사서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애초에 물건은 도구였다. 석기나 토기처럼 본래의 기능을 위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필요한 물건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인간 사회가 전반적으로 풍족해지면서 어느새 물건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즉,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내면의 깊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심하면 우울증이나 자살로까지 내몰리게 된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만 가까스로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가치에는 딱 봐서 알 수 있는 외모의 가치도 있지만 내면의 가치도 있다. 하지만 내면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가 어렵고 알리는 데 시간도 걸린다.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물건을 통해 내면의 가치를 전달하는 편이 쉽고 빠르다. 하지만 물건으로 가치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넘쳐나는 물건에 얽매이게 된다. 자신의 가치를 알리는 물건이 어느새 자기 자신이 되어버리고, 물건은 계속 늘어난다. 이런 식으로 늘어난 물건은 거꾸로 자신을 공격해온다. 시간도 에너지도 물건에 빼앗기고, 예전에는 도구였던 물건이 자신의 주인이 된다. 이쯤 되면 이미 물건은 자신의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존재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엇이 아니라 지금 갖고 있는 것을 원하는 상태다. - 하이만 샤하텔

 

 

인생이 가벼워지는 비움의 기술

  • 실제로 버리는 작업보다는 물건을 버리기로 결심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의외로 많다. 시간, 공간, 수월해진 청소, 자유, 에너지 등...

  • 추억은 디지털화..... 편지, 일기, 인화사진, 앨범 등은 디지털화 하여 보관....

  • 사람은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사실은 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 바뤼흐 스피노자

  •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끝나고 시간이 생기면 그때 버리자.' '언젠가 안정되면 그때 버리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물건으로 괴로워하는 한 그 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안정돼야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버려야 안정된다. 시간이 있어야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버리면 시간이 생긴다. 그러므로 지금 장장 버려야 한다. 버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 자꾸 버리다 보면 과거보다는 지금이 보이기 시작한다.

  • 내 사진이나 일기 같은 기록은 나 자신의 과거 자체와는 관계가 업삳. 추억이 담겨 있는 사진과 기록을 버렸다고 해도 내 마음속에 있는 기억으로서의 과거는 남아 있다. 물건을 버렸다고 해서 과거를 버렸다는 식으로 과장할 일은 아니다. 만일 잊어버린 추억이라면 잊어도 좋은, 필요 없는 기억일 것이다. 필요한 인생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 나카자키 다쓰야, <소유하지 않는 남자>

  • 자신이 소유한 물건에 만족하느냐 아니냐는 물건의 개수와는 관계가 없다.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물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 수많은 물건에 대한 조잡한 의식이 아니라 극히 적은 물건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소중하게 의식하라. 그렇게 물건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물건을 소유하는 만족감을 두 배, 세 배로 높여준다.

  • 풍부한 개성을 만드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다.

  • 물건은 기억해주는 주인을 잃을 때 가치도 함께 잃는다.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시간의 여유는 행복으로 직결되는 반면 물질의 풍요는 그렇지 않다.' - 팀 캐서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를 얻었다. - 영화 <파이트 클럽> 중에서.

 

 

사람은 어떤 물건에도 금방 익숙해진다. 그래서 물건보다 경험에서 얻는 행복의 지속 시간이 더 길다. ... 이렇듯 물건보다 경험에서 오는 행복의 지속 시간이 훨씬 긴데도 사람들은 물건에 돈을 더 잘 쓴다. 그 이유는 경험보다 물건이 남과 비교하기 쉽기 때문이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 법정

 

 

자기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해 물건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애쓰는 편이 훨씬 더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 간디

 

 

미래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완전히 살고 있지 않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 <아직 나를 만나지 못한 나에게> 중에서

 

 

미래와 과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영원한 현재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다.

 

 

미래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현재를 소홀히 한다. 가치 있는 미래를 위해 지금은 힘들어도 참아내며 미간에 주름을 짓는다. 하지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현재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미간에 주름 짓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 모든 상황에서 계속 미간에 주름을 지을 것이다. 지금 한숨을 쉬고 있는 사람은 일생동안 계속 한숨을 쉬게 된다. 만일 뭔가 달라지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달라지기 시작해야 한다. 내일도, 다음  주도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일이 와도 '지금'이다. 1년 후도 다가오겠지만 그 역시 현재다. 모든 것은 지금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식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기적 같은 건 없다고 믿는 삶,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이 기적이라고 믿는 삶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모든 현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너그러우며 체념하지 않는다. 친절하고 다정하며, 무엇보다 항상 행복해 보인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갖는 건 커다란 행복이다.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게 더 큰 행복이다. - 메네뎀

 

 

환경은 행복에 10퍼센트밖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에 인간은 곧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먼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행복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의 본보기를 그대로 따라 한 포상으로 행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 행복해지는 일은 없다. 행복은 그때마다 '느끼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뿐이다. 오직 지금 이 수간의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내일도 모레도, 1년 후에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내일도 모레도, 1년 후에도 찾아오는 것은 미래가 아닌 현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바로 지금부터 언제든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은 마음이 결정한다. ... 남이 보기에는 어떤 괴로운 상황에 있어도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지금의 환경에 감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 이것이야말로 행동이 행복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이유다. 우리는 조건을 달성함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 느껴야 한다.

 

 

물건을 최소한으로 줄인 나는 시간의 여유가 있다. 매일의 생활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도 충만한 느낌이 든다. 더 이상 남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비참한 기분에 휩싸이는 일도 없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니 마음껏 행동할 수 있다. 집중력은 높아지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다. 쓸데없는 자존심은 사라지고 염치가 좋아져서 내가 쓴 책을 출판할 정도로 대담해졌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똑똑히 느낀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히는 일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겁먹는 일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모든 것에 앞으로도 계속 감사하고 싶다. 모든 현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살고 싶다. ... 나는 물건을 줄이고 나서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다. 가족과 친구뿐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사람이나 재능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의견이 맞는 사람도, 맞지 않는 사람도 모두 소중하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의 목적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나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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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살던 시대나 현재나 삶의 지혜는 비슷하다. 평범한 그 것을 단지 실천하기 어려울 뿐!

 

 

[본문발췌]

 

 

'예절'이란 말을 구성하고 있는 두 글자의 뜻을 살펴보자. '예(禮)'는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적절히 조절하기 위한 사회적인 질서와 규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절(節)'은 대나무에 있는 하나하나의 마디처럼 그 '예'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상황별로 펼친 세부적인 실천 지침들을 가리킨다. 결국 예절은 함께 사는 사회에서 인간이 서로 배려해야 한다는 정신과 그 실행 방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어떤 사람이든 존중하고 배려하기를 좋아하는 것!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몰라줄까 그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통제하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법망을 빠져나가 형벌만 면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하지 잘못된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은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올바른 가치와 철학으로 이끌고 예의로 통제하면, 사람들이 부끄러움도 알고 스스로 마음을 올바르게 할 줄도 알게 되지요.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게 진짜로 아는 것.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으면 성공은 따라오게 돼 있다.

 

 

사람이면서 사람답지 못하면 넘치는 매너가 다 무슨 소용이겠나? 사람이면서 사람답지 못하면 높은 문화 수준이 다 무슨 소용이겠나?

 

 

내가 즐거움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나를 통제하고 있다면 그것은 '즐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즐긴다'는 표현은 내가 시작하고 내가 맺을 수 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

 

 

세상과 삶의 이치를 깨우친 지성인은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일에 대해서 꼭 이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없고, 절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저 오직 정의를 기준으로 거기에 따라 갈 뿐이죠.

 

 

높은 자리로 올라가지 못할까봐 걱정하지 말고, 거기에 올라가게 됐을 때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는지를 걱정해야 합니다. 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가를 신경쓰지 말고 남이 알아줄만한 것이 내 안에 있는지를 찾아야 하지요.

 

 

공자가 추구했던 '온전한 사람다움'의 길을 증자는 '내 진심을 다해 너를 대하고(忠), 내 마음을 미루어 네 마음을 헤아리는 것, 즉 내가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너에게 하지 않는 것(恕)'이라고 이해했다.

 

 

욕심이 사나우면 굳건하고 강해 보인다. 가져야 하고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른 가치를 깨달아 그것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외부에 맞서는 것과 제 욕심 하나 이루자고 세상에 눈을 부릅뜨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욕심으로 강해 보이는 사람은 실은 강한 게 아니다. 욕심을 충족시켜줄 대상에게 언제나 깃털보다 가볍게 무릎을 꿇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그만두게 되더라도 일단 걸으면 그 걸은 만큼은 내 것이다. 또 그 길에서 엎어지게 되더라도 그 길 안에 있으면 언제 일어나더라도 일어나는 곳은 바로 그 길이 아니겠는가? 이거다 싶은 걸 찾으면 내가 그 길을 걸을 수 없는 백만 가지 이유를 찾기 전에 일단 한 걸음부터 떼고 볼 일이다.

 

 

번지가 지혜로움이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공자가 답해주었다.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에 힘쓰고 귀신이나 신에 대해서 경외하는 마음은 갖지만 의지하지는 않고 거리를 둘 줄 안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러자 이번에는 사람다움이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진짜 사람다움이란 것은 어려운 일을 먼저 해내고 나서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지. 그렇게 하면 제대로 사람답다고 할 수 있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사람다움을 이룬 사람은 산을 좋아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황을 파악하니까 상황에 따라 계속 움직이게 되고, 사람다움을 이룬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하는 것을 할 뿐이니까 가만히 제자리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막힘없이 흘러가며 살아 즐겁고, 사람다움을 이룬 사람은 듬직하게 자기를 지키며 살아 장수합니다. 

 

 

조화로운 균형감각과 평범성의 가치란 그지없이 대단한 것이지. 그러나 사람들이 이 가치를 잊고 외면하고 산 지가 참 오래되었네요. 

 

 

인품을 잘 갈고닦지 못한 것, 배운 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익히지 못한 것,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 단점을 고치지 못한 것, 내 걱정거리는 이런 것들이라네. 

 

 

사람으로서 걸어야 할 길에 뜻을 두고, 내면의 바른 가치를 확고하게 지키고, 사랑의 정신을 중심으로 삼고, 일상생활 속에 필수 교양이 익숙하게 녹아 있어야 한다. 

 

 

부자라는 게 인력으로 되는 거라면 아무리 천하다고 하는 직업이라도 나는 그 일을 꼭 할 거네. 그러나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면 나는 그냥 나 좋은 일을 하면서 살겠어!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다보면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어. 그의 장점을 통해서 내가 본받을 것을 배우고, 단점을 통해서는 내가 고쳐야 할 부분을 배우는 거지. 

 

 

풍속이 아주 안 좋아서 함께 이야기할 종자들이 못 된다고 소문이 난 동네인 '호향'에서 한 소년이 공자를 만나러 왔다. 공자가 그를 만나주자 제자들이 갸우뚱했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나를 만나러 온 것을 인정할 뿐 돌아가서 잘못하는 것이야 미리 생각할 거 없으니 뭣 때문에 심하게 대하겠나? 사람이 자기를 반성하고 지금 새사람이 되어 내게 왔으면 그 새사람만 인정하면 되는 거야. 뭐하러 과거를 물고 늘어져?"

 

 

사치하다보면 어느새 거만해지고, 검소하다보면 어느새 쫀쫀하고 답답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거만해지는 것보다야 쫀쫀하고 답답해지는 게 낫지요. 

 

 

성숙한 인간은 늘 시원시원, 좀팽이들은 언제나 조마조마. 인간됨을 잘 수양한 지성인은 마음에 거칠 것이 없어 너그럽고 여유가 있는데 인간됨을 몰라 그저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만사 걱정 아닌 게 없어 늘 죽을상이다.

 

 

능력이 있으면서 능력이 없는 이에게 배울 줄 알고, 많이 알고 있으면서 적게 알고 있는 사람에게 배울 줄 알고, 가지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꽉 차 있으면서도 텅 빈 것 같으며, 누가 시비를 걸어도 맞대응하지 않는 자세.

 

 

민중은 옳은 길로 따라오게 할 수는 있지만 그 길이 왜 옳은 길인지를 이해시키기는 어렵네.

 

 

그 직책에 있지 않다면, 그 직무에 대한 참견은 금물. 그 자리에 있어봐야 그 자리의 무게를 안다. 내가 실행할 것이 아니라 그가 실행할 것이고 내가 책임질 것이 아니라 그가 책임진다. 그러니 섣부른 훈수는 종종 부끄러움이 되어 돌아오곤 한다.

 

 

공자는 네 가지를 절대 하지 않았다. 근거 없이 미리 억측하지 않았고, 내가 절대 옳다고 하지 않았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자기부터 앞 세우는 일을 하지 않았다.

 

 

지금 세상은 깊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재주 많은 사람, 인품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기술을 갖춘 사람이 되라 한다. 진정 위대한 사람은 큰 가치를 지향하는 마음, 올바른 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데, "내가 해봐서 아는데" 하면서 자잘한 것들만 붙들고 시시콜콜 지시하고 고집 부리는 지도자를 많이 본다.

 

 

제가 뭘 좀 안다고요? 천만에요,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가령 지식 수준이 낮은 사람의 질문에조차도 막막해지는걸요. 다만 저는 그 질문의 처음과 끝, 양쪽 방향에서 따져 들어가 모든 측면을 샅샅이 다 짚어 보일 뿐이에요.

 

 

일을 할 때는 마음을 다해서 충실하고 신의 있게 하고, 친구를 사귈 때는 만만한 사람 말고 보고 배울 게 많은 사람을 선택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실수하거든 곧장 고쳐야 합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다만 주저 없이 고치는 걸 아무나 못하는 거죠. 

 

 

군사가 수만이라도 그 장군을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한 한 사람이라도 그 생각은 빼앗을 수 없다. 

 

 

겨울이 온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오래도록 푸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 법이지요.

 

 

지혜로운 사람은 현혹되지 않고, 온전한 사람다움을 이룬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짜 선택은 반드시 나 스스로 해야 하는 정말 고독한 작업.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의 차이는 다만 내 의지의 문제.

 

 

과유불급, 지나친 건 도달하지 못한 거나 같네.

 

 

제대로 배운 지성인은 차이 속에서 조화를 이루지만 차이가 없이 마냥 똑같아지는 방향으로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짧은 사람들은 똑같아지려고 하지 차이 속에서 조화를 이루려 하지는 않죠. 

 

 

강직하고, 의지가 굳고, 꾸밈없이 소박하고 , 말이 어눌하다면 사람다움을 위한 기본 품성은 거의 갖춘 것이다. 

 

 

인간다움에 뜻을 둔 지성인은 위로 세상과 인생의 도리와 이치에 환하고, 먹고사는 일만 걱정하는 그저 그런 인간은 아래로 눈앞의 이익에만 빤하죠. 

 

 

참된 지성인은 의로움을 마음 바탕으로 삼고, 배려와 존중을 갖춰 행동하며, 공손한 자세로 자기를 표현하고, 신뢰를 통해 일을 이루어냅니다. 이렇게 하는 자가 진정한 지성인이지요. 

 

 

잘못하고서 고치지 않는 것, 그게 진짜 잘못입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조직을 이끄는 사람은 경제 규모가 작은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물자가 고르게 나눠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고, 전반적인 가난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지 못할까 걱정한다고 말이요. 고르게 나눠지면 가난이 없어지지. 사람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 경제 규모가 작은 게 문제 안 돼.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면 그 나라나 조직은 무너질 수가 없어. 다스림의 원리는 이런 거야. 통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먼 곳에 있는 이들이 먼 거리를 핑계로 명령에 따르지 않거든 지도자는 바른 윤리와 아름다운 문화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그들이 스스로 오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야. 그렇게 해서 그들이 실제로 오면 그들의 삶을 안정시켜주어야 하는 거고.

 

 

경제는 그 첫발을 부의 총량 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분배의 관점에서 떼어야 한다. 분배는 사회적인 안정과 직결된다. 분배의 정의가 확립되어야만 국민들은 마음으로부터 자기 나라 지도자를 신뢰하고 좋아하게 된다.

 

 

윗사람과 함께 대화할 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로 세 가지쯤을 꼽을 수 있어요. 윗사람이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불쑥 끼어들어 내 말을 하는 걸 경솔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말을 할 순서가 되었는데도 말하지 않는 걸 숨긴다고 하지요. 마지막으로 윗사람의 표정도 살피지 않고 그냥 냅다 말하는 걸 '장님'이라고 해요.

 

 

잘 배우려는 사람은 세 가지 시기별로 자기를 주의해서 살펴야 해요. 첫째, 젊었을 때는 혈기가 안정되질 않아 끓어오르는 혈기를 어쩔줄 몰라 하죠. 그땐 성욕을 조심해야 해요. 둘째, 장년이 되면 혈기가 뭔가 이룰 수 있을 만큼 짱짱하고 강해져요. 그땐 승부욕 때문에 싸움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죠. 마지막으로 노년이 되면 혈기가 쇠하면서 뭔가 손에 쥐고 싶어져요. 욕심이 생기는 거죠. 노년에는 노욕을 조심해야 합니다.

 

 

공자가 말한, 바른 지성인이 생활에서 항상 생각해야 할 것 아홉가지

  • 눈, 분명하게 보았는가?

  • 귀, 확실하게 들었는가?

  • 표정, 온화한가?

  • 자세, 공손한가?

  • 말, 진심인가?

  • 업무, 신중하게 처리했는가?

  • 헛갈리는 일, 분명하게 알 때까지 질문했는가?

  • 화가 치민 순간, 기분대로 저질렀을 때 뒷감당이 되겠는가?

  • 이득이 될 것을 본 순간, 내가 얻어도 되는 합당한 이득인가?

 

본성 자체는 사람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습관이 완전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놓는 거지요.

 

 

천박하고 욕심 사나운 사람과 함께 중요한 나랏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은 관직을 얻기 전에는 얻지 못할까 전전긍긍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봐 전전긍긍하죠. 자리를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기 시작하잖아요? 그럼 그들은 못하는 짓이 없게 되지요.

 

 

폭넓게 배우고 뜻을 굳건하고 진실하게 하며, 절실한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고 현실적인 것부터 구체적으로 생각하도록 하세요. 진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경지는 바로 그 안에 있는 겁니다. 

 

 

바른 리더는 아랫사람들에게 신뢰부터 얻은 뒤에 그들에게 일을 시킵니다. 아직 신뢰도 얻지 못했는데 일부터 시키잖아요? 그럼 아랫사람들은 그가 자기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자기 상사에 대해서도 그에게 신뢰부터 얻은 뒤에 문제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신뢰도 아직 얻지 못했는데 지적부터 하잖아요? 그럼 상사는 그가 자기를 욕한다고 생각하죠.

 

 

지도자가 너그러우면 백성의 마음을 얻고, 지도자가 성실하게 일하면 백성들이 나라 살림을 믿고 맡기고, 지도자가 부지런하면 많은 업적을 이루고, 지도자가 공정하면 백성들이 그에게 열광한다. 

 

 

다섯 가지 미덕을 존중하고 네 가지 악덕을 끊어버리면 정치를 잘한다고 할 수 있지

  • 백성들을 넉넉히 도와주지만 그렇다고 낭비하지 않는것,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지만 원성을 사지는 않는것, 야망은 있지만 탐욕은 부리지 않는 것, 늘 어떤 상황에서든 태연하지만 거만하지는 않은 것, 위엄이 넘치지만 사납지는 않은 것이네.

  • 해도 안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미리 다 가르쳐주지도 않고서 법을 어겼다고 잡아죽이는 것, 그런 걸 '학대'라고 하지. 미리 어떻게 하라고 방향도 가르쳐주지 않고 대뜸 성과를 요구하는 거, 그런 걸 '횡포'라고 하지. 자기 게으름 때문에 일을 늦게 주고서 기한 안에 마쳐야 한다며 다그치는 거, 그런 걸 '도둑놈 심보'라고 하지. 사람들에게 당연히 줘야 할 걸 주는 것인데도 괜히 인색하게 구는 거, 그런 걸 '관료주의'라고 하지. 이것이 네 가지 악덕이네.

 

공자는 시대를 거듭해서 내려온 제도와 질서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위치에 합당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을 살면서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는 나와 타인으로 구성된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전에 중요한 것은 내가 나에 대해 솔직한가이다. 내 속마음과 나의 행동이 어긋나면 타인과의 관계가 혼란스러워진다. 내가 '아'라고 말한 것이 '아'일 수도 있지만 실은 '어'의 뜻이라든가 '오' 혹은 '유'일 수도 있으면 심지어 '가'일 수도 있다면, 게다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신뢰(信)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내 말(言)과 행동(行)을 일치시키는 것이 타인과 관계를 맺기 전 내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내 마음을 타인에게 확장시킬 수 있다. 내 마음을 미루어 타인을 대할 수 있고(恕), 더 나아가 내 진심을 다해 타인을 위할 수 있는(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에는 사적인 감정이나 이해를 뛰어넘어 인간이면 해야할 옳음(義)에 대한 판단(知)과 더 큰 틀에서 세상의 조화를 살피는 사회적 규범에 대한 이해(禮)가 필요하다. 사람으로 태어나 나와 타인, 그리고 사회에 대해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필요한 기능을 숙지하고 숙련해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인재로 공헌할 수 있는 덕목이 인(仁), 즉 온전한 사람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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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가운데 닥치는 일들 중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더 많은 걱정과 노력, 시간을 쏟으며 스스로 삶을 힘들게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본문발췌]

 

 

온대국가에 비해 열대국가가 가난한 데는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낮은 농업 생산성이고, 다른 하나는 열악한 공중 보건입니다.

  • 열대지역은 토양의 비옥도가 낮고 박토, 온대지역의 농지는 심토이고 비옥한 편. 빙하가 미국과 이탈리아의 넓은 지역을 반복해 오르내리며 바위를 문질러 새로운 흙을 만들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영양분도 흙에 더해진 반면 무더운 열대지역은 얼음으로 뒤덮인 적이 없어, 영양분이 풍부한 새로운 흙으로 재생되는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 온대지역은 나뭇가지와 낙엽이 땅에 떨어져 천천히 썩어가며 토양에 오랫동안 영양분을 방출하는 유기물이 많다. 그러나 열대지역에서는 땅에 떨어진 낙엽과 나뭇가지, 유기물이 열대의 높은 기온 때문에, 또 미생물과 작은 동물들에 의해 신속하게 분해됩니다. 게다가 열대의 잦은 비 때문에 영양분이 토양에 스며들지 못하고 강으로, 다시 바다로 씻겨 내려갑니다. 이처럼 두가지 이유에서 열대지역의 토양은 박토이고 비옥도도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 온대지역보다 열대지역에 동식물의 종이 훨씬 많습니다. 곡물을 감염시켜 병들게 하여 결국에는 생산량을 크게 떨어뜨리는 병원균과 벌레와 곰팡이의 종류도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 온대지역은 겨울의 매서운 추위에 기생충과 세균이 죽습니다. 따라서 봅이 되면 세균과 기생충이 처음부터 다시 자라기 시작해야 합니다. 반면에 열대지역에서는 기생충과 세균이 1년 내내 번창합니다.

  • 온대지역의 질병은 주로 과밀한 인구 사이에 급속히 퍼지는 전염병, 즉 천연두와 홍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과밀한 인구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는 대부분의 전염병은 평생에 한 번, 주로 어린 시절에 걸리는 질병입니다. 따라서 어린 시절에 천연두나 홍역에 걸리고도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은 평생 동안 그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 면역력을 갖게 됩니다. 반면에 열대지역의 질병들은 한 번 걸리더라도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재발성 질병(recurrent disease)입니다.

  • 열대성 질병에서 비롯되는 짧은 기대수명이 숙련된 근로자나 행정가로서 생산 활동에 기여할 수 있는 기간이 짧다. 또한 평균 사망률과 높은 이환율로 많은 자식을 낳아야 하기에 여성의 가임기가 늘어나고 어린아이의 수가 많아져 생산 활동 인구 비율이 낮아 경제에 악역향을 미친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자는 구운 점토판에 씌었고, 양과 밀 등 농산물을 헤아리는 데 사용된 듯합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는 상형문자로 구운 동물뼈에 조각되거나 그려졌습니다. 게다가 구운 동물뼈에 쓰인 상형문자는 양과 밀을 헤아리는데 사용 용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예언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중국이 쉽게 통일된 반면에 유럽은 통일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지리적 차이에 있습니다. 유럽은 반도와 산맥, 섬과 강으로 인해 여러 정치 단위 지역으로 분할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는 변변한 반도도 없고 큰 섬도 없습니다. 대륙을 가로지는 산맥도 없고, 방사형으로 뻗어 흐르는 강도 없습니다. 따라서 중국은 통일을 이루고 유지하기가 쉬운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통일이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닙니다. 통일은 때로는 유리하고 때로는 불리합니다. 중국은 일찍부터 통일된 까닭에 중국의 역사는 급격히 흔들리고 변하는 '요동'(lurching)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유럽은 수십 개로 분할된 까닭에 수많은 군주가 수많은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중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어떤 나라에 탐험가나 명망가로 성공한 사람이 나타나면 다른 나라들이 성공한 선례를 곧바로 모방하고 나섰습니다.

 

 

국가의 영향은(national impact) '해당 국가의 국민 수 x 일인당 소비율 혹은 생산율'

 

 

개인이든 국가든 변화를 요구하는 압력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적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위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위험, 단번에 많은 사람을 죽이는 위험,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위험을 과대평가합니다. 반면에 우리에게 익숙한 위험은 과소평가됩니다. 이런 이유로 자동차와 음주와 흡연, 낙상과 가전제품의 위험을 과소평가합니다. ...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테러리스트의 공격이나 유전자 조작식품보다 더 크게 걱정해야 하는 진정한 위험은 샤워실에서, 젖은 도로에서, 사다리에서 혹은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 미끄러져 넘어질 가능성입니다.

 

 

서구식 생활방식의 채택은 어떤 이유로든 비전염성 질병의 확산으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서구식 생활방식의 특징은 정주 생활, 적은 육체 활동, 매일 고칼로리 섭취와 과체중, 지나친 음주, 염분과 당분의 과도한 섭취, 또 섬유질 함량이 낮은 식품의 섭취와 흡연으로 비전염성 질병. 당뇨, 고혈압, 심근경색, 동맥경화증, 암, 신장 질환, 통풍 등의 질병을 일으켜 인간을 살아남게 한 능력이 오히려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세계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들

 

1) 지구의 기후변화(global climate change)

    • 일인당 평균 인간영향(human impact) = 일인당 평균 소비 자원량 + 일인당 평균 생산 폐기물량

    • 이산화 탄소 발생, 온실가스로 활동으로 대기온도 상승, 대양에 축적되어 산성도 상승하여 산호의 껍질이 녹고 산호초가 죽어 해양생물과 해안 지역 파도, 쓰나미로부터 보호 역할을 못함.

    • 지구 온난화로 가뭄, 식량 생산의 감소, 열대성 질병을 옮기는 벌레가 온대지역까지 이동, 해수면의 상승.

 2) 불평등

    • 국가간의 부의 불평등. 질병과 이민, 테러는 국가 간의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직접적인 결과.

    • 국가 내 부의 편중에 따른 빈부격차

 3) 인간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환경자원의 관리, 자연자원의 지속가능한 관리. 자연자원의 남용.

    • 재생 가능한 자연자원의 관리. 어류, 숲과 토양, 담수.

    • 자연은 물과 공기를 깨끗이 정화하고, 토양을 비옥하게 유지하는 생태계 서비스를 우리에게 공짜로 제공.

    • 유럽인이 아프리카인보다 평균 32배나 많은 자원을 소모하기 때문에 인구가 6,000만 명에 불과한 이탈리아가 소모하는 자원량이 10억 명의 아프리카인 전체가 소모하는 자원량보다 2배나 많습니다.

    • 어장과 같은 자연자원을 지속가능하게 관리하려면 생물학적이고 물리학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연자원을 올바로 관리하려면 사회, 경제, 정치적인 면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전화기, 자동차, 텔레비전, 이메일이 있어도 인간의 근본적인 걱정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어떻게 노인을 대할 것인가, 분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떻게 건강을 유지할 것인가, 어떻게 위험과 다른 걱정거리들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인가 입니다. 인류는 전화기, 자동차가 없던 지난 수만 년 동안에도 이와 같은 걱정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아마 로봇과 인공지능을 더 많이 갖게 된 뒤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똑같은 걱정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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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행에 푹 빠져, 다니던 대기업을 뒤로하고 여행 작가겸 가이드가 된 사람,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고향으로 돌아가 "올레길"을 만들었던 서명숙 이사장,

같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순례길'이라는 책을 펴내고 40살에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선 파울로 코엘료!

 

누구나 자신만의 여행의 이유가 있고 여행 이후에는 어떤 형태로든 삶의 변화가 시작된다.

 

 

[본문발췌]

 

 

"남들이 이미 간 길을 따라서 정상에 오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 자유의지에 따라,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 그것만이 의미가 있다.", 알버트 머메리.

누구나 가는 곳을 누구나 가는 길을 택해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는 것. 이건 여행이 아니다. 아무런 정보도 지식도 없이, 지도도 가이드도 없이 현지에서 묻고 오해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진정한 여행은 시작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 헤르만 헤세

 

 

커피나무는 열대지방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뜨거운 태양 볕을 태양 가장 가까운 데서 받으며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결하고 하얀 꽃을 피워낸다. 배꽃같이 하얀 꽃으로 붉은 열매를 맺는다. 앵두 같은 붉은 열매가 열정적인 커피체리다. 그래서 커피여행이 나를 이렇게 열정과 설렘으로 이끄는 것일지도... 떠나오길 잘했다. 떠나와서 내 심장을 더욱 뜨겁게 채운다. 논밭의 흰 눈과 하늘의 붉은 기운을 지나 검으스레한 노을이 보이는 전경을 창밖으로 흘러 보내며, 온몸과 맘에 커피꽃 향을 묻히고 떠난다.

 

 

본래 산속에서는 산의 본 모습을 볼 수 없고 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본 모습을 볼 수가 있는 법이다. 가끔은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장 위대한 여행은 지구를 열 바퀴 도는 여행이 아니라 단 한 차례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이다. - 마하트마 간디

 

 

Camino De Santiago, 카미노에서의 동행은 본인의 고통은 스스로 감당하면서 서로의 길에 깊이 간섭하지 않고 최대한 상대의 호흡과 보폭을 허용하며 같이 또 따로 걷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카미노를 다녀와서 나의 생활은 많이 바뀌었다. 느리게 걷는 즐거움과 나를 비움으로 넉넉해지는 삶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전보다 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한 달을 걸어 나는 온전한 모습으로 나에게로 돌아왔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지도 시간을 재촉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연을 만나러 가는 여행에 욕심을 내지 않으려 한다. 내가 있는 그 자리, 그 시간에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주어진 그 자연만이라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사제들은 1대 1만이 가능했을 아날로그적인 생각을 하며 현재의 우리들은 1대 다수가 가능한 디지털 사고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래된 아날로그가 1대 1만 가능하다고 해서 단편적이고 제약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무, 꽃, 하늘, 바다, 곤충, 돌 등 단 하나에 집착해 사고하거나 결론을 낼지 않는다.

오래된 고성과 회랑을 천천히 걸으며 그들은 그 개별적인 것들에서 뒤에 숨은 깊은 한 가지 본질이나 깨달음을 찾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매우 다양한 디지털 사고를 하고 있음에도 그 다수의 조각들이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서 우러난 단편적인 시각들일 뿐이다. 사물을 편협하게 이미지화시키거나 각각 개별의 사물들에 집착하며 이미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틀 속에 가둬둔 채 그것들의 의미와 본질을 정보로서 평가한다. 어찌 보면 다양한 지식과 정의는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뒤에 숨은 넓고 진실된 본질 한 가지는 놓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진정으로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사제들의 동선을 따라 그들의 사색을 따라 고성을 느릿느릿 돌아보기로 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의 경계와 틀 속에서 모든 것을 규정짓는다. 의식 속에서 살아남은 것들만이 진실로 기억되고, 명료한 기승전결을 따르지 못하면 실패로 치부되어 잊혀지고 소외되기 십상이다. 연속되어 보이지만 인식의 뒤편으로 버려진 것들은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단절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정확히 떨어지는 숫자와 단절된 찰나의 시간, 단편적인 시각의 이미지들에 집착하는 우리는 많은 것들을 인식의 뒤편으로 보내어 잊고, 잃고 살기에 그래서 외롭다. 미분의 시간 속에서 쉽게 잊혀진 찰나의 존재와 의미들은 갈 곳을 잃고 우리를 더더욱 허전하고 외롭게 만든다. 하지만 긴 시간을 인고하며 서 있는 내밀한 옛것들은 오랫동안 쌓아온 연속성과 쉽게 드러나지 않는 포용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결코 혼자 있어도 허무하거나 외롭지 않을 수 있다. 오랜 적분의 시간들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도 놓치지 않는 여유로움과 풍만하고 의미 있는 이야깃거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치가 없는 인식의 저편으로 묻혀버릴지라도 그것이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닐테니까 말이다. ... 때로는 오래된 곳들을 고즈넉이 걸으면서, 내가 속해 있지 않은 다른 곳을 찾아 여행하고 눈에 담으면서, 넓은 물속에서 노를 젓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내가 일상에서 정의내렸던 사물들과 의미에서 벗어날 때, 내가 알고 있는 장소와 물건들에서 자유를 얻었을 때 우리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본질을 보게 되고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리하면 우리의 일상은 의미 있고 소중하며 더욱 충만해지고 허무하거나 외롭지 않을 수 있다. - 정아영, 프랑스 몽생미셸,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을 수 있다.'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 게라마 블루, 아하렌 비치.... 관광객의 눈은 보이는 대로 본다. 그러나 여행자의 눈은 어린아이처럼 그 대상이 무엇이든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고 신기하게 보는 능력이 있지 않는가. 그 눈을 장착하고 무심코 지나친 섬마을의 풍경을 돌이켜보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평소에는 아무리 쫓아가도 붙잡을 수 없었던 녀석, 때로는 나를 정신없이 쫓기게 만들었던 녀석, 그 괘씸한 시간이라는 녀석이 느릿느릿 마을을 걸어 다니고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세상 밖 시간의 속도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 그날 오후처럼 '여행자의 눈'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익숙해져서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온통 설렘과 떨림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여행을 떠나면 나도 모르게 오감을 활짝 열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고 즐거워한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모든 것을 새롭고 생생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살아있는 순간만큼은, 별 볼일 없이 평범한 내 인생도 행복감으로 충만해져서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일상을 여행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 - 정윤주, 오키나와, '한없이 투명한 게라마 블루를 찾아서'

 

 

자의든 타의든 여행은 변화를 동반한다.

 

 

문 닫고 시구 찾는 것 옳은 시법 아니니, 길을 나서보면 시가 절로 생긴다네. - 양만리, ... 떠나야 영감이 떠오른다. 시인을 포함한 예술가들에게 여행은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다.

 

 

여행은 1막 밖에 없는 인생의 제2막이다. ... 책을 읽는 이유, 여행을 하는 까닭은 둘 다 세상을 알고 싶어하는 원초적 욕망 때문이다. 여행은 자아와 타인의 비교와 조화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의 시도다. 여행에서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닌 깊은 체험을 통한 변화의 힘이 나온다. 길을 떠나면 보이지 않던 세계가 펼쳐진다. ... 평범한 일상에서 느끼는 예지는 여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여행은 일상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낮은 수준의 기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낯선 여행은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 일시적으로 일상을 접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자기를 변화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평소와는 색다른 환경에서 자연과 문화 혹은 사람들과 만남은 자기 확인과 발견의 새로운 기회가 된다. 온 감각이 열리는 미지의 신세계로 다가간다. 여행은 지적 호기심 충족과 영혼의 충만감으로 사람을 변화시킨다. 여행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긴장감과 해방감이 교차되는 무대다. 여행에는 교양 제고의 목적이 있고 즐거움을 얻는 위안형도 있다. 여행은 미지의 세계와의 조우, 현실 탈피, 마음의 정화,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 편견을 너그럽게 해주는 자유와의 만남, 어디에도 속할 수 있는 자유, 호기심과 일상의 탈출이다. 여행은 일상에서 당한 굴욕을 씻을 절호의 기회다. 저곳은 기회의 땅이자 자유의 땅이다. 누구도 나를 계급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국적은 물어도 계급은 묻지 않는다. ... 수렵채집 시절부터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생존을 위한 유량벽은 오늘날 새로운 버전의 낭만주의적 경험 소비인 생존 여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은 신체의 생존 요령을 터득한 후 다른 차원의 생존 비결인 영혼의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 근원도 모를 그리움을 여행길에서 긁고 다닌다. 인간은 이유도 모르고 태어나 고민하고 늙어가면서 죽음을 맛이한다. 여행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노자의 말처럼 "좋은 여행은 궤도나 정도가 없다"일지 모른다. 여행이나 인생에 어디 객관적인 이유가 있을까. 성숙이란 긍정적 변화를 만들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우리가 떠나온 곳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갈 뿐이다. 인생이나 여행에서 무엇을 얻어서 들고 갈까. 그것은 여행길에서 만났던 황홀이라는 추억은 아닐까. 여행이 끝나는 시점 그러니까 죽음의 시점에서 지금을 바라보라. 텅 빈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떠나지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 최치헌,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진 사내'

 

 

인간은 사랑과 죽음, 그리고 여행을 통해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실감한다. - 전규태, <단테처럼 여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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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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