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면 방어회의 계절이다. 그런데 작년 겨울무렵 청어회를 먹고 그 달달함에 반해 그 동안 먹어보지 못한 다른 횟감들에도 관심이 갔다. (참고로 청어는 여름이 제철이라고 한다.)
 
그 중 여러 방송 프로그램과 남도의 회맛좀 봤다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대삼치 숙성회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다가 얼마전 추자도 대삼치를 분할해 택배로 배송해 주는 것을 보고 바로 주문버튼을 눌렀다.
 
두툼하게 썰어 곱창김에 양념장을 올려 싸먹는 삼치회맛은 가히 별미다. 특히 2~3일 정도 저온 숙성해서 먹으면 감칠맛이 올라와 회맛이 더 좋아지는 듯 하다.
 
그러다가 몇 일전 자주 들어가보는 인어교주해적단 산지마켓에 목포에서 배송해주는 준치 세꼬시회를 발견했다.
준치는 반건조된 것을 구워 먹어봤지, 가시 때문에 회로 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는 새꼬시로 썰어 보내준다니 한 번 먹어봐야 겠다 바로 주문.
 
청어와 함께 잔가시가 많은 준치, 썩어도 준치라는 그 녀석. 청어와 준치 모두 회무침이 제격이고 준치가 제철은 아니지만 기름기가 덜해 고소하고 회에서 단맛이 난다.
(찾아보니 준치는 청어목이라 둘이 사촌쯤 되나보다.)
 
 

대삼치회

 

청어와 쥐치
청어회무침
준치회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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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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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타인의 기대, 시선에서 자유로워 질 때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보고 삶의 자율성을 얻는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본문발췌]

게으름을 두려워하는 걸 멈출 때 재충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교감하고, 좋아하는 취미를 다시 시작하고, 느긋한 속도로 세상을 헤쳐 나아갈 시간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성실한 직원이자 열정적인 활동가, 사려 깊은 친구이자 영원한 학생이다. 동시에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항상 미리 계획한다.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제해 불안을 줄이려 하고, 자신을 몰아붙이며 매우 매우 열심히 일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항상 피곤하고, 버거워하고, 자신에게 실망한다. 아무리 애써도 부족하다고 확신한다. 아무리 성취해도 혹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만족감이나 마음의 평화를 느낄 만큼 충분히 해내지 못했다고 여긴다. 그래서 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소진burnout과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과 만성 수면 부족을 견디면서도 한계를 갖는 것이 우리를 '게으르게' 한다고, 게으름은 항상 나쁜 거라고 확신한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 문화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신념 체계다. 이 신념 체계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믿는다.

  • 속으로 나는 게으르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 나는 내면의 게으름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극도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
  • 나의 가치는 나의 생산성을 통해 얻어진다.
  • 일이 삶의 중심이다.
  • 성취하지 못하고 열심히 할 동기가 없는 사람은 부도덕하다.

 

'게으를'수 있는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삶에서 놀이와 휴식과 회복을 위한 공간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해야 할 일 가운데 몇 가지나 해치웠는지를 자아상과 연결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커다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크게 세 가지 교리로 구성된다. 

  • 당신의 가치가 곧 당신의 생산성이다.
  • 자신의 감정과 한계를 신뢰할 수 없다.
  • 항상 더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자신의 한계와 욕구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인정하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의 신호다. 의무를 줄이는 것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망시키는 게 아니다.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싫어. 난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삶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다. 우리가 전염병처럼 피해야 할 것으로 듣고 자란 많은 '게으른' 행동은 사실 매우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선택이다.


쉬어가는 것이 실제로 창의성과 사색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십중팔구 '게을러' 보이는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는 충분히 열심히 일했으며 이제 잠시 앉아 쉬어야 한다는 신호다. 인간이 수행하는 일의 대부분은 사색, 계획 혹은 창의력을 위한 시간을 요구한다. 우리는 컴퓨터도 로봇도 아니다. 먹고 자야 하는 것처럼 빈둥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이 필요하다. '게을러' 보일  게 두려워서 재충전의 욕구를 무시하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빈둥거리기는 삶의 정상적인 일부다. 맑은 정신과 건강을 유지하려면 한가로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 게으르고 싶은 마음은 더 많은 도움과 휴식이 필요하거나 해야 할 일을 줄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알리는 강력한 내면의 경고이기도 하다. 이 게으름에 경청하면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더 잘 이해하고 진정으로 살 가치가 있는 삶을 꾸릴 수 있다.


통찰과 창의력의 순간들은 억지로 한다고 해서 나오지 않는다. 정신 활동을 하지 않는 기간이 필요하다. 좋은 아이디어들은 종종 아이디어를 내려고 애쓰는 것을 중단했을 때, 예컨대 샤워 중이거나 한가롭게 산책을 하는 동안 떠오른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뇌가 쉬는 동안 머릿속에서 조용히 무의식적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 생산적인 휴식 시간을 '부화기incubation period'라고 부른다. 건강한 병아리가 태어나려면 알을 따뜻하고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정신의 창의적인 부분도 아이디어나 통찰을 낳기 위해 안전과 휴식, 이완이 필요하다.


게으름은 우리가 통찰력 있는 창작자와 문제 해결사가 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게으름의 가치는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휴식을 취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여유를 얻으면 우리가 가진 큰 상처가 치유되고 우리에게 영양분이 되는 삶을 꾸릴 수 있다.


명상은 어떤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표현적 글쓰기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양한 방법과 마찬가지로, 명상은 잠시 목표를 내려놓고 스트레스를 놓아버리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와 웰빙을 회복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게으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의 질에 혁명적인 영향을 준다. 해야 할 일 목록에서 몇 개를 해치웠는지로 우리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을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중요한 활동을 찾아 추구한다. 사회가 부가한 ‘당위’가 아니라 진정한 느낌을 바탕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면, 훨씬 더 큰 진정성을 느낀다. 그리고 자유 시간을 만끽하고 더 느리고, 게으르고, 직관적인 속도로 일에 임할 때 수년간 과로가 남기 피해를 없애고 회복할 것이다.


우리는 여유 시간에도 일을 해야 한다는, 더 힘들고 지속 가능하지 않은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힘들고 많은 일을 짊어지고 과로하는 것은 결국 자기 패배적이고 해롭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우리는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없다. 사실 우리는 하루 2시간 이상 꾸준한 결과물을 낼 수 없다. 일터에서 생산적이고 유능한 것은 의지와 결단력의 문제가 아니다. 일을 잘하려면, 휴식을 취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몇 시간 더 일한다고 해서 생산성이 그만큼 올라가지 않는다. 인간의 주의와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양질의 일을 하려면 휴식할 시간이 필요하다.


"일터의 분위기가 좋으면 사람들은 매우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해 아무도 이전에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것들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관여하는 방식으로 관리하면 사람들은 일을 계속하고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않습니다." 조직이 직원들에게 이로운 이상으로 열심히 하도록 강제하려들면 일에서 활기와 창의력이 사라진다.


건강을 좀 더 중시하고 덜 일하기 시작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구체적 방법

  • 자율성을 주장하라.
  • 몇 시간 일했느냐가 아니라 일의 질을 중시하라.
  • 일-집 간섭 고리를 깨라.

 
스트레스를 받고 루틴에 빠져 있을 때 시간이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낀다.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불과 의무로 점철된 안개 속에 혼재될 수 있다. 당신의 존재가 즐거움 없이 달성해야만 하는 의무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음미할 수도, 심지어 자세하게 기억할 수도 없다.


삶은 생산적이거나 남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 목표에 집착하고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애쓰기만 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사실, 그렇게 살면 삶에서 좋은 것들을 인식하는 능력이 사라질 수 있다. 대신 한발 물러서서 우리의 가치를 재고하고,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든 못 하든 상관없이 삶에 내재된 가치가 있다고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고방식을 이런 식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을 바꾸기 위해 따를 수 있는, 연구에 근거한 전략들이 있다. 이러한 전략들 가운데는 음미하는 법을 배우기, 경외심을 느낄 시간을 내고, 우리가 정말 못하는 무언가를 주기적으로 시도해 보는 일이 보함된다.


경외로 가득 찬 삶은 음미하기가 훨씬 더 쉽다. 뇌가 낯선 장소와 경험을 처리하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리며, 이 때문에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것이 바로 차를 몰고 새로운 장소에 갈 때 집에 가는 것보다 항상 더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다. 모든 감각이 새로운 경험을 수용하는 데 집중할 때, 일상의 책임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잊고 세상이 넓고 많은 가능성으로 차 있다는 것을 떠올리기가 더 쉽다. 또한 경외감을 체험할 때와 음미할 때 매우 유사한 정신적 과정이 사용되므로, 음미를 습관으로 만들려는 사람에게 훌륭한 연습이다.


습관적으로 과도하게 성취하려 하고 칭찬과 인정을 추구한다면, 십중팔구 잘 못하는 일을 몹시 싫어할 것이다. 이것은 특히 학교에서 '우등생'이었던 사람 또는 어린 시절 똑똑하다는 말을 늘 들었던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다. 잘한다는 칭찬을 평생 좇았다면, 무언가를 잘 못하는 것은 아주 불쾌한 일이다. 무언가를 잘 못하는 것은 게으름이라는 거짓에서 벗어나는 훌륭한 방법이다. 실패를 인정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할 수 없는) 일과 상관없이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배운다. 성공할 가망이 전혀 없는 활동을 추구하면,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즐기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비생산적이고 성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편히 우리 시간을 '낭비'하면,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체크리스트를 지워나가는 대신 자신만의 목표와 우선순위를 선택하는 자유가 생긴다.


<The Queer Art of Failure(기묘한 실패의 기술)>에서 잭 핼버스탬Jack Halberstam은 이렇게 말한다. “’실패는’ 완전한 패배다. 그리고 패배함으로써 삶, 사랑, 예술, 존재를 위한 다른 목표들을 상상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실패할 때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따르는 대신 무엇을 우리의 진정한 목표와 우선 사항으로 삼을지 선택할 자유가 생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가 잘하는 분야에서 계속 생산적이길 원한다. 그래서 잘 못하는 활동에 빠져 있으면, 우리는 성공해야 한다는 외적 압박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에 의해 동기 부여가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디지털 도구 덕분에 삶이 더 편해졌지만, 유지해야 할 수많은 계정과 걱정해야 할 알림들이 생겨버렸다. 소셜 미디어 애플리케이션들은 성취 포인트를 얻기 위해 삶의 모든 경험을 보여줘야 할 강력한 압박감을 조성했다. 즐거움이 영향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 삶의 거의 모든 활동이 기록되고, 측정하고, 그것을 잘 해냈을 때 공유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그런 집착적인 기록과 공유가 정신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온라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스마트폰을 창밖으로 던져버리는 상상을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연락하기 위해 디지털 도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삶을 게임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디지털 영역과 상호작용을 하는 법에 대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경계를 설정할 수 있다. 이러한 도구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재정의함으로써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고 우리의 생산성이 곧 우리의 가치를 정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심리학 연구는 타인과의 경쟁보다 개인의 성장에 중점을 두는게 훨씬 더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최고가 되고,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유능하고,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건 몹시 지치는 일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를 늘 불안하게 만드는데, 그래야 우리를 착취하기 쉽기 때문이다. 최고가 되길 원한다면, 결코 숨을 돌릴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항상 어떤 식으로든 나보다 ‘뛰어난’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해로운 세계관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치유의 여지가 없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색의 순간도 없다. 자신에 대해 연민을 갖고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멈출 때, 비로소 모든 느리고 ‘비생산적인’ 활동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프레드 브라이언트는 매우 성공한 심리학 연구자일지 모르지만, 그의 진정한 열정은 등산에서 찾을 수 있다. 프레드가 말한다. “정상에서 머무는 단 몇 분을 위해 우리는 힘겹게 산을 오릅니다. 하지만 등산은 정상에 오르는 경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음미하고 즐겨야 하는 경험입니다. 나는 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과정을 좋아합니다. 정상에 머물기 위해서만 가는 게 아닙니다. 내겐 그게 바로 음미입니다. ‘들판을 달리며 최대한 많은 장미 향을 빨리 맡는’ 게 아니라 ‘멈춰 서서 장미 향을 맡는 것’입니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인 동시에 짐이다. 이 점은 우리가 많이 읽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의무로 취급할 때 더더욱 그렇다. 불쾌한 뉴스에 계속 노출되면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 끝없는 정보의 홍수는 잠시 멈춰 새로 알게 된 무언가에 대해 숙고하는 일을 어렵게 한다. 우리는 정보 과부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해법은 더 배우는 게 아니라 한발 물러서서 적은 정보를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면 삶에서 자율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꿀 수 없는 거대한 부정에 끊임없이 집중하면 정말 무력해진다. 자율성의 상실은 정보 과부하가 지닌 주된 위험 가운데 하나다. 수십 년 동안 연구자들은 부정적인 뉴스를 너무 많이 소비하면 개인의 정신 건강이 황폐해지고, 무력하고 취약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뉴스를 더 많이 시청하거나 읽을수록 두려움을 더 많이 느끼고, 실제로 지역 사회가 안전한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주변 환경을 더 위험한 것으로 인식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두려움은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 것처럼 보였다. 자주 뉴스를 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회피적인' 행동을 더 많이 했다. 더 자주 집 안에 머물며 타인과 어울리지 않았고, 새로운 일을 하거나 새로운 장소에 가기를 피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런 식의 고립은 개인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에 아주 해롭다. 일부 연구에서는 잦은 뉴스 시청이 심지어 개인의 인종차별적 편향을 높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식은 곧 힘이다"라는 격언도 있지만, 겁을 주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뉴스의 경우 정반대라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겁을 주는 정보는 실제로 내적 통제감을 앗아가고, 자신과 타인을 돌볼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공중보건연구에 따르면, 뉴스에서 건강 관련 정보를 부정적으로 다루면 사람들이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가능성이 실제로 줄어든다. 예컨대 암 발생률 상승에 관해 경고하려고 만든 뉴스 기사는 실제로 반작용을 일으켜 암 검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다.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매우 두렵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뉴스 내용이 어둡고 절망적이면, 사람들은 숙명처럼 느끼고 생태계 붕괴와 맞서 싸우기 위해 개인적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관심을 줄인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매우 이분법적인 사고를 부추긴다. 사람들은 상황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하거나 아예 관심을 끊는다. 결단력과 개인의 노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거나 아니면 해결이 불가능하니 노력해 봤자 헛수고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사고는 우리가 관심을 갖는 문제에 대해 집착적으로 매달리도록 조장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게 불가능해지면,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포기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어떤 주제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실제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이 아니다. 마음이 분주해지고 늘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에 생산적인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실제로는 진짜 싸움을 할 에너지를 앗아간다.


정보 과부하는 심지어 인지 능력에도 해롭다. 연구에 따르면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지면 사람은 집중력을 잃는다. 그 가운데 아주 적은 정보만이 기억에 저장된다. 너무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넣으려고 하면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이해하거나 보유할 수 없다. 

정보 과부하는 비슷한 이유에서 의사 결정 능력에도 해를 준다. 어떤 정보가 유용하려면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처리하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맞아떨어지는지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정보 과부하 상태에서 이런 차분한 사색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온갖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사람들이 정신이 산만해지거나 과부하에 걸리면 누군가가 거짓말하는 것을 잘 눈치채지 못하고 주어진 정보의 질이나 진위 여부를 평가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습관적으로 너무 많은 정보를 소비할 때 '가짜 뉴스에 속아 넘어갈 위험이 가장 크다.


인간은 상호 의존적이다. 잘 살기 위해 사회적 교류와 공동체가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타인을 실망시킬까 봐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고 그 과정에서 건강과 행복을 포기한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의 가치가 타인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의해 정해진다고 가르침으로써 이 고통스러운 자기 지우기를 조장한다. 타인과 진정성 있고 안전한 관계를 형성하려면 타인을 실망시키는데 편안해져야 한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많은 업무량과 다른 책임을 줄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관계에서도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서적 무리는 일터에서 과로하는 것만큼 삶을 피폐하게 한다. 이 두 문제에 대한 해법은 우리의 진정한 욕구를 받아들이고, 싫다고 말하는 게 우리를 게으르게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그만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중단할 때, 마침내 자신과 자신의 가치를 분명하게 본다. 그리고 개개인이 우리에게 부가하는 요구에 도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가하는 거대하고 광범위한 요구를 더 잘 떨쳐버린다.


당연히 우리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제시하는 이러한 이상들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정해버리고, 바쁘고 정신없이 살게 하며, 욕구를 가진 것이 잘못인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당한 기준에 맞춰 자신을 평가할 필요가 없다. 한발 물러서서 사회가 우리에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많은 것이 사실 우리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자신을 타인의 마음에 들도록, 이해받도록 작게 만들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당위'에 저항할 때, 우리는 게을러지는 게 아니라 강해진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우리에게 해가 되는 기대에 부응하기를 거부해야 한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제약들에 순응하지 않으면 '게으르다'고 치부될 수 있지만,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훌륭한 일이다.


작은 활동에 만족하라. 활동에서 스트레스를 줄이고 지치지 않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의무라는 생각을 멈추고 대신 매일 할 수 있는 소소하고 구체적인 방법에 집중하는 것이다. 미국심리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추상적이고 무서운 문제를 보고 그것이 얼마나 거대하고 복잡한지에만 신경을 쓸 때 우리는 무력감과 슬픔을 많이 느끼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반대로 관심을 문제 해결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작고 지엽적인 방법들로 돌리면 상황에 대한 통제감이 커지고, 불안이 줄어들고, 계속  싸울 동기가 더 많이 생긴다.


호기심을 보이는 것이 편견과 편향을 탈학습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타인의 상황에 대해 알면 알수록 타인과 눈에 보이는 단점에 대해 더 많은 연민을 갖게 된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사람들이 처한 더 넓은 맥락을 보는 대신, 사람을 평가해 낙인찍고 재단하라고 부추긴다. 그들이 처한 사회적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들을 복잡하고 역동적인 인간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사람으로부터 결함이 없는 행동과 생산성을 기대하는 것을 멈추고 생산성과 상관 없이 가치 있는 사람으로 데하는 데 도움이 된다.


휴식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의 생산성이 당신의 가치를 정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반려동물의 가치는 활동 수준이나 내 삶에 '기여하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 그것의 가치는 아름답고 불완전하게 살아 있는 데서 온다. 이 작은 동물의 삶이 그 녀석이 무엇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본연의 가치가 있고 아름답다면, 내 삶도 본연의 가치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랑과 안락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이렇게 누구나 갖는 본연의 가치가 생산성과 무관하다고 깨닫는 건 멋진 일이다. 나는 이 점을 항상 기억하진 않지만, 시간을 들여 그것에 대해 의식적으로 곰곰이 생각할 때 평온함으로 충만해진다. 그렇게 하면 많은 일을 하느라 고군분투할 필요도, 과도한 책임을 떠맡고 열심히 일하며 나 자신을 벌줄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족하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방대한 역사를 가졌고 산업화, 제국주의, 노예제의 유산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부터 가장 가깝게는 유튜브  채널까지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매체에 침투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대부분 근면 성실의 가치와 야심과 동기가 없는 것의 위험에 대해 끊임없이 듣고 자랐다. 이런 종류의 강력한 문화적 프로그래밍은 쉽게 없앨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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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제적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고 삶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행복과 삶의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


[본문발췌]

이 책은 뼈 빠지게 일해도 결국 자본과 슈퍼리치의 노예가 되고 마는 현실에서 벗어나, 조금만 일하고 더 행복해지는 신개념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3만엔 비즈니스'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벌자는 게 아니라, 착한 일만 해서 돈을 벌고, 한달에 이틀만 일해도 충분하며, 남는 시간에 가족과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인 것이다. 대도시에서 비싼 집세를 내면서 닭장 같은 사무실에서 하루 열 두 시간 노동을 하다가 몸만 망가뜨리는 미련한 삶을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

이 책의 철학은 우리보다 조금 일찍 난감함에 봉착한 서양의 '선진국 주민들' 사이에서 DIY라고 불리던 삶의 방식, 그리고 지역화,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허브 등 사회경제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움직임과 닿아 있다. 승자독식의 경쟁사회에서 비켜나서 슬기롭게 살아갈 길은 '사회에 이로운 착한 일거리'를 찾아 하면서 마을에서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그는 말해주고 있다.


'3만엔 비즈니스'의 밑바탕엔 '에너지와 돈에 의존하지 않는 풍요로움',  즉 '자급자족 생활'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생활을 '가난과 불편함'으로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독립적인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자존감을 통해서 얻는 더 큰 풍요로움'으로 받아들일 수 도 있습니다.
돈을 벌어들이는데 사용하는 시간을 줄여서 남는 시간에 자급률을 높이니까 자연히 지출이 줄어들어 궁핍하다고 느낄 이유가 없으며, 남는 시간을 문화 활동에 사용하거나 지성을 갈고 닦는데 사용하여 정신적으로 윤택하고 나아가 물질적으로도 윤택한 생활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출의 법칙
1. '의존형 라이프스타일'은 지출이 많다.
2. 자급률과 지출은 반비례한다.
    -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 자급률 목표는 자급하지 않을 경우의 지출을 기준으로 75%로 맞춘다.
      즉, 소비형 지출은 25%로 줄어든다.
    전체지출 = 소비형 지출 + 자급 활동을 위한 비용 지출
3. 자급자족 활동의 비용이 높으면 지출은 줄어들지 않는다.
    - 자급자족 활동의 비용을 낮추기 위해 노력한다.
    - 목표는 같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입하는 가격의 30% 수준으로 맞춘다.
4. 휴일과 지출은 반비례한다.
    - '의존형 라이프스타일'은 휴일이 많을수록 지출이 늘어난다.
    - '자급자족형 라이프스타일'은 휴일이 많을수록 지출이 줄어든다.
    - 휴일을 늘리도록 노력한다.
    - 목표는 주 2일제, 일주일에 최소 5일은 휴식 및 자급 활동을 한다.
    소비성 지출(25%) + 자급비용 지출(75%X30%) = '의존형 라이프스타일' 지출의 47.5%
 

스스로 식량과 에너지를 생산하고 집을 짓는 자급자족 활동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우리 조상들이 갖지 못했던 뛰어난 과학기술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과학기술은 인류와 자연이 지속가능한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으로 문명을 이끌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기회가 있다는 게 저의 소박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기술을 지혜롭게 '적당히'만 사용한다면, 에너지와 돈에 의존하지 않고도 적절한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과도기에는 변화가 여러 지점에서 조금씩 다양하게 일어납니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작지만 수많은 기회가 생긴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장소와 테마를 폭넓게 선택하면 비즈니스 기회는 그만큼 많아집니다. 변화의 방향은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만 보입니다. 변화의 시기에는 그 변화를 따르거나 변화를 일으키는 비즈니스가 유망하다는 걸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지역에서 '겸업화'를 촉진했으면 합니다. 본업과 부업 개념이 아니라 복수의 본업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겸업입니다. 문명의 전환기에는 겸업화가 고도로 발전합니다. 문명의 전성기에는 분업화가 대세입니다. 가치관, 사회 시스템, 문화 등의 틀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분과 수입도 안정되어 있습니다. 변화가 필요없는 사회인거죠. 이럴 때는 분업화할수록 효율이 높고 일하기도 편합니다.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경제 규모도 성장일변도입니다. 정치나 학문, 때로는 예술도 이런 흐름을 따릅니다. 하지만 어떤 분야든 지나친 분업화는 창조성을 떨어뜨리고 '재미'를 죽입니다.


남들이 만든 가이드라인과 매뉴얼을 잘 따라하는 '복제 기술'을 갖춘 사람은 많아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고차원의 개념화 기술'을 갖춘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입니다. 이런 구태의연한 '인재'들은 변화의 시대에는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멀어지면, 생산지를 속이거나 농약의 과다 사용 같은 문제들이 필연적으로 생겨납니다. 또 의존성이 심해지면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능력이 줄어듭니다. 우울증, 면역력 감퇴, 성인병 증가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게 자급률을 높이는 일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이유입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 도시에서 좋은 직장을 얻고 많은 돈을 벌면서 소비생활을 즐기는 출세경쟁지향.
자연과 가까운 시골에서 좋아하는 친구들과 서로 도우면서 돈은 적지만 행복하게 사는 걸 희망하는 평화공생지향.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연과 이웃과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하는 생활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밝은 표정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급자족도를 높인다고 해도 어쨌든 약간의 돈은 필요합니다. '3만엔 비즈니스'는 이 약간의 돈을 '착한 일을 하면서' '친구들과 도우면서' '편하게' 벌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작은 '힌트' 입니다.


인간은 용기와 희망을 잃었을 때 가장 불행합니다.


현대인이 '시스템의 올가미'에 빠져 있다. '슈퍼 리치' 한 명을 만들기 위해 '보통사람' 1만명이 죽도록 일해야 하는 시스템. '돈과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는' 자급자족 생활의 지향점은 우리 모두가 이런 시스템의 덫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착한 일'만 하는 '3만엔 비즈니스' 아이템을 복수로 운영해서,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현금소득을 올리고, '좋은 친구와 동료'를 많이 만들어서 이들과 함께 남는 시간을 자급자족 활동에 사용하여, 지출도 줄이고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을 실현한다. 착한일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나쁜 일'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자연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말하지요.
이 책에서 설명한 이론과 원리를 적용해서 자신만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실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작업을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여럿이 같이 하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 '시간', '체력' 만 있다면 얼마든지 같이 생각하고 다듬고 실행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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