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몇 개의 글자와 여백 가운데 의미가 녹아 있다.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림은 미완성처럼 보이지만 읽는 사람이 생각 속에 음미하고 되새기며 완성된다.
[본문발췌]
시를 제대로 읽어 보려는 사람은 어떻든 시 앞에서 일단 겸허하고 공경스러워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야 내 마음의 문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한 편의 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목소리와 빛깔과 냄새들이 나에게 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시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지 못할지는 모르나, 본디 시인이란 자기 삶의 가장 순결한 형식으로 시를 섬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이에게는 하잘것없을 글 몇줄에 자신의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이 시인이다. 한 인간이 무엇인가 자기 삶을 걸어 애쓸 때 거기엔 그럴 만한 곡절이 있게 마련이며, 그 사람 나름의 절실함이 깃들어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절실함을 향해 우리는 겸허히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시를 포함하여 문학예술은 부분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에 관여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아름다움의 문제와 더 인연이 깊은 분야이다. 다시 말해 시를 쓰거나 읽는 일은 추상적인 개념을 매개로 한 논리적 추리, 분석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실물적 상상력을 토대로 한 정서적 공감과 일치에 주로 의거하는 것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머리와 눈으로 활자의 말뜻을, 그 사전적 의미들의 조합을 이해하는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를 읽는 일이란, 시를 이루고 있는 소리, 말뜻, 행과 연 등 각 단위들을 포함하여 시 전부를 어루만져 보고 냄새 맡고 미세한 색상의 차이를 맛보는 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를 잘 옷 입어 보는 일'이다.
'시는 마음/뜻이 움직이는 바가 말로 핀 것', - 시경
'슬픈 속도' - 김주대
새벽
아버지의 칼을 피해 도망치던 어머니처럼
고주망태 아버지의 잠든 틈을 타 잽싸게 칼을 숨기던 형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녀석의 그림자
돌아보면
모든 속도가 슬프다
난폭과 탐욕을 속도의 본질로 보는 견해들보다 이 시의 '슬픔 기원설'쪽이 속도에 대한 통찰로서 아무래도 더 깊은 것일 듯하다. 속도의 폭력성의 이면이, 오늘의 속도 숭배의 이면이 실은 공포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속도는 얼마간의 치욕과 자기모멸을 불가피하게 동반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빠름'들은 결국 슬픔에 속하는 것인지도.
사람이 만든 종교에 갖혀 자유를 포기하기도 한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는 도전적이다. 자연은 도전과 극복이 아니라 조화와 순응의 대상이 아닐까?
[본문발췌]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었다. 그것은 인생을 즐기지 못한 채 불완전하게 끝내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 죽음에의 공포를 다른 이들에게까지 전염시키는 것은 간교하고 잔인한 짓이다.
우리가 속한 종을 포함한 사물은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화해온 것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의 경우에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따르지만, 기본적으로 진화는 무작위적이다. 다시 말해서, 일정 기간만이라도 우연히 살아남아 번식하는 데에 성공한 종은 버티고 그렇지 못한 종은 금세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 종으로서의 우리 인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행성, 그 위로 매일 타오르는 태양도 -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영원불멸한 것은 오직 원자뿐이다. 루크레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우주에서 지구와 그 거주민이 우주의 중심을 점하고 있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인간이 신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신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불가능하고 종교적 광신이 들어설 여지도 없다. 금욕적인 자기 부인은 불필요하고, 전지전능한 힘이나 완벽한 구원에 대한 환상은 근거가 없다. 정복욕이나 자기 과시욕도 불합리하다. 그 어떤 것도 자연에 맞서 이길 수 없으며 생성과 파괴, 그리고 재생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안전에 대한 거짓 환상을 팔거나 죽음에 대한 비논리적인 공포를 선동하는 자들에게 분노하는 한편, 루크레티우스는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이전에는 너무나 위협적으로 보였던 것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도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 것임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썼다.
아무리 선의의 질문이라고 해도 질문은 토론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으며,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은 종교의 교리가 의문과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신앙으로 뭉친 수도원이라는 공동체는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며 쉼 없이 광범위한 호기심을 키워갔던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 아카데미와는 달라야 한다고 확고한 의식이 깔려 있었다.
우리는 닥쳐올 재앙에 대한 공포에 짓눌린 채로 끝없이 고통스러워하며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비참한 운명을 맞으리라는 공포 때문에 우리는 그런 걱정을 결코 멈추지 못하고 항상 재물에 대한 갈망으로 허덕이면서 단 한순간도 영혼과 육신에 평온을 느끼지 못하지요. 그러나 작은 것에도 만족하면서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축제처럼 보냅니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인생은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자신과 벗의 행복이라는 이 목적을 이루려는 것 이상으로 더 고귀한 윤리적 목적은 없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열광하는 부(富)라는 것이 많은 경우에서 무의미하며 더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 것과는 거의, 어쩌면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고 있다. "멋지게 장식한 불타는 듯한 주홍빛 옷을 입고 뒹군다고 해도 평범한 옷을 입고 몸져누워 있는 것보다 타는 듯한 열병이 더 빨리 가라앉지 않으리니." 그러나 신과 사후세계에 대한 공포에 저항하기 힘든 것처럼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물욕과 정복욕을 발휘하여 안전을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결국 행복의 가능성을 줄이고 모두를 파멸의 위험 속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쾌락에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 아니라 망상이다.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주요한 적은 유한한 세계에서 가능한 그 이상을 얻으려는 환상인 과도한 욕망과 삶을 좀먹는 공포이다. ... 실제로는 꿈에 불과한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 마음을 파고들며 끝내 전소시키고 마는 그 망상적인 소유욕이 문제인 것이다.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깊은 경이로움을 낳는다. 우주가 원자와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 세상은 창조주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정신적 삶과 육체적 삶도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비교했을 때 별다를 것이 없다는 것, 영혼도 육신만큼이나 물질적이며 소멸하는 것이라는 것, 이 모두를 깨닫게 된다고 해도 절망에 빠질 이유는 없다. 오히려 사물의 실제 본성을 이해하게 된 것이야말로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길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걸음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이 모두 인간 존재와 그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인간 존재의 사소함은 좋은 소식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인간이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착각하거나 신을 두려워하거나 필멸의 존재를 초월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가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고결하게 희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달랠 수 없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행복한 인생의 주요 장애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의 수련을 통해 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는 영혼은 이 세상에 잠시 머물 뿐이며 궁극적으로 다른 곳으로 간다는 신앙은 인간 존재에 독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신앙은 자신의 단 한번뿐인 삶을 살고 있는 이 세상과 파괴적인 관계를 맺게 할 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물과 서로 연계되어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이 세계를 포함한 사물은 결국은 붕괴되어 그 구성요소인 원자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원자로부터 영원한 물질들의 군무 속에서 다시 다른 사물이 형성된다. 그러나 최소한 살아 있는 동안에는 최고의 쾌락을 즐겨야 하는 법이니, 우리 또한 루크레티우스가 본래 관능적인 것이라고 칭송한 이 세상을 창조하는 장대한 과정의 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주에는 질서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질서란 사물의 본성으로서 우주는 이에 따라서 구성되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로 만들어진다. 하늘의 별에서부터 인간과 빈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 사물의 본성이란 추상적인 힘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어머니와 같은 것이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이로써 루크레티우스식의 우주로 입장하게 되는 것이다. ... "세계는 그 자체로 멋지다." - 조르다노 브르노
우주는 결코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행동이나 운명과도 무관하다. 우리는 이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이 거대한 어떤 것을 이루는 아주 작은 한 조각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포에 질려 움츠러들 이유는 없다. 단지 놀라움과 감사함, 그리고 경외심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받아들이면 된다.
이 세계에 들어왔던 것처럼, 당신이 죽음에서 삶으로 왔던 그 똑같은 길을 따라 어떤 감정이나 두려움 없이 다시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자. 당신의 죽음은 우주의 질서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죽음 역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의 한 부분이다.
우리의 삶은 서로에게서 빌린 것이니, 인간은 주자(走者)처럼 삶의 횃불을 따라가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토머스 제퍼슨,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물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다른 존재도 있는 것이지요. 나는 그것들을 '물질(matter)'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나는 그것들이 장소를 바꾸며 움직이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이것이 '운동(motion)'이지요. 그리고 그런 물질이 없는 곳인 '진공(void)', '무(nothing)' 또는 '비물질적 공간(immaterial space)'이라고 부릅니다. 물질과 운동으로부터 받는 감각에 기초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고 필요로 하는 모든 확실성들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