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는 정지하면 역할을 다하지 못하지만, 사람은 잠깐의 쉼표를 통해 새로운 변화와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멈춤으로 늦어질 것 같지만, 멈춰서 있는 동안 재정비하고 주변과 상황을 둘러보며 지름길을 찾아 원하는 목적지에 더 빨리 갈지도 모른다.
[본문발췌]
모든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인생과 삶의 목표가 있고 깨달음의 계기는 누구나 다르다.
여행하는 것처럼 산다.
2년은 긴 시간 같지만 막상 지나고 나면 인생에 찍힌 점 하나일 뿐이야. 잠시 쉰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어.. 돈은 다시 모으면 되지만 시간은 돌릴 수 없으니까.
나이와 국적, 하는 일과 사는 곳이 모두 달라도 여행길에서는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길에서는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을 모두 내려놓고 온전히 사람대 사람으로 서로를 대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모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행'이라는 주제가 있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하루를 함께 보내기까지 하는데 친해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는 것도 똑같지. 계속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잖아.
가만히 생각해보면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의 삶도 여행과 다를 것이 없다. 옆집 친구의 이사, 연인과의 헤어짐, 퇴사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내 삶과의 이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여 살아간다. 그래서 모든 시작과 만남이 중요한 것처럼 끝과 이별 역시 중요한 것인데....
매일매일 뭔가를 하고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 이렇게 쉬어줄 필요가 있어. 사람은 기계가 아니잖아? 일을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인생을 살아갈 때도, 쉼표는 꼭 필요한 거지. 인생의 쉼표...
부족함이 너희를 힘들게 하겠지만, 그 부족함이 있어서 너희가 작은 것에도 더 감사하고 만족하게 되는 거야... 인생을 살아가면서 영원히 우리는 돈이라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족함이 있어서 우리는 이 여행과 우리의 삶에 더 감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쿠나 마타타... 다 잘 될거야, 걱정할 것 없어...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연금술사>
주변을 모두 가린 채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으니까. 이 긴 여행을 시작한 이유가 나와 우리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는데, 어느새 나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내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왜 스페인 생활을 꿈꾸었던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문화를 경험하기 위함이었지, 어학 시험을 위해서는 분명 아니었다. 하루빨리 눈에 보이는 성과를 손에 쥐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고 있었다.
똑같이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생각이 많이 달라질 거야. 지금 우리가 그렇거든. 사실 난 이제껏 일과 돈이 1순위인 인생을 살았어. 그런데 쉬는 동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새로운 신념이 생겼다고 할까?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앞으로 뭔간를 선택할 때는 되도록 우리의 신념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싶어. 그게 잘 사는 거고, 행복한 거니까.
남겨진 사진 한 장보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기까지의 과정이 진짜 여행이 아닐까... 여행의 수많은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 안에 담아주는 곳, 이상하게 지나온 여행길을 되돌아보게 하는 곳, 그래서 유난히 눈물을 훔치는 여행자들이 많은 곳, 마추픽추는 그런 곳이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가는 길, 허벅지는 묵직해졌지만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홀쭉해진 우리의 배낭만큼. 항상 가볍게 살아야 겠다. 물건이든 생각이든 욕심이든. 무엇이든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고민이 많아질 것이고, 고민이 많아지면 마음의 여유를 잃어갈 것이며, 결국 우리 삶이 힘들어질테니까. 부족한 듯 조금만,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그렇게 살아야겠다. 아! 그 대신꿈은 크게 꿔야겠지. 그래야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을 테니까.
"왜 떠나야 했나요?"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종종 우리에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가치와 의미는 외부에서 찾을 수 없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얼마나 자유롭고 자주적으로 사용했느냐가 말해준다.
[본문발췌]
모든 풍경은 일생에 단 한 번이다.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속에 아이였던 노인과 노인이 될 아이가 걸어간다.
공명(共鳴), 너와 내가 울리는 찰나의 순간...
존중할 줄 알아야 존중받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여행법이다.
여행은 만남, 그리고 그 뒤에 울리는 너와 나의 공명의 시간.
존중받기 위한 영혼을 가졌다면 먼저 상대방을 존중하는 삶이길...
A+삶이란 무엇일까?
내가 만들어놓은 또는 사회가 강요하는 편안함 속에서 더 이상 꿈꿀 필요 없는 안락한 삶인가? 가진 것 없이도 자유롭게 가고 싶은 길을 가고 올곧게 내 의지로 바람처럼 살아가는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만든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허나 그것은 자신이 필요해서 걸어갔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서 있지 않은 것을 쫓다가 스스로 그 올가미에 몸을 들이미는 것이다.
이따금 네가 정말 가고 싶은 산이 있으면 그 산 아래서 산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바라보라고. 그렇게 시간을 할애한 후에 산에 들어갔을 때, 만약 네가 길을 잃어도 그 산의 생김생김을 알기에 네가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있다고. 그렇다면 오래 헤매지 않고 다시 길 위에 설 수 있노라고. 물론 길은 또 다른 길로 통하게 되어있지만, 원래 가고자 했던 그 길을 찾기 위해서는 한 번 그 산을 멀찌감치서 쳐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고....이게 바로 인생이라고. 시간에 쫓겨, 남들의 길에 쫓겨 인생이라는 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쫓아가다 보면 언젠가 인생의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나 자신이 어드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고. 가끔은 내가 가고자 하는 인생이 어떻게 생겼고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그렇게도 헤매고 고생할 일은 없을 거라고.
내가 모르는 것들. 내가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사린다.
가보긴 전엔 죽지 마라. 가보지 않았다면 판단하지 말라. 모든 여행기와 수필에는 한 개인의 지극히 주관적인 하루가 담겨 있을 뿐이다. 가보지 않았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가진 게 많지 않아도 자유로울 수 있다.
착각. 아는 만큼, 보이는 만큼 그리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보려하는 것.
내가 찍고 싶은 단 한장.
바람이 불고, 아이들은 깔깔거리고 냇가의 물이 바위를 타는 소리.
길섶의 잠자리 날갯짓 소리, 저 건너 작은 집의 아기 우는 소리.
그 모든 풍경이 들려주는 소리.
스치는 일상의 언덕 속에서 그 한 장의 사진을 보는 사람이 나와 같이 공명하고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헤매지 않을 것을. 정답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남의 길을 쫓아서 가다 보면 내 원래 가고자 했던 그 길 위에 서 있지 못한 날이 많았다. 더 이상 부끄러울 수 없어 달리지 못했던 남은 길들을, 이 아이들과 길 위에 서 있는 이 수많은 맑은 영혼들을 만나면서 다시금 힘을 내어 걸어갈 수 있었다.
뒷모습은 정직하다. 눈과 입이 달려 있는 얼굴처럼 표정을 억지로 만들어 보이지도 않는다. 마음과 의지에 따라 꾸미거나 속이거나 감추지 않는다. 뒷모습은 나타내 보이려는 의도의 세계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존재다.
'뒷모습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 미셸 트루니에
영원히 잊히는 시간은 없다.
길에서 배우게 된 것 하나, 담배연기를 내뿜으면 모든 게 잊히는 줄 알았던 시간이 있었다.
허나 그건 잊히는 게 아니고 잠시 가려줄 뿐....
많이 필요치는 않다. 튼튼하게 쉬지 않고 내 의지로 걸어갈 열정과, 아이들과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엉거주춤 배구를 할 수 있는 웃음과, 도란도란 같이 앉아 콜라를 마실 수 있는 경제력.... 우리는 언제나 너무 많이 고민하며 다가갈 시간을 놓쳐버리며 살고 있다.
시간은 기다려주는 법이 없다. 어떤 하루도 되풀이되지 않는다. 지나간 후에야 그리워지는 것.
자유로운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하노니.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말고 길을 잃지 않기를.... 그리고 날이 밝으면 행복한 미소 지으며 길을 떠날. 이 길의 끝이 어드메일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올곧게 내 의지로 자유롭기를 바라며. 그 끝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게 되기를....
일평생 자유롭게 내 의지대로 바람같이 살아가길 바라며....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가장 먼저 고민하고 물어보는 이야기, 소통하는 법. 나 역시도 '영어'라는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만나는 이들이 모른다면 그건 언어도, 소통의 수단도 아니다. '소통은 몇 가지 단어와 너와 내가 나누는 눈빛으로 가능한 것.' 마음으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 우리는 모두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나누는 말을 알고 있다.
자신의 꿈을 잃고 남들이 기대한는 삶을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삶을 자랑스러워하고 당당할수 있기를 바라며... 인생이든 아니면 여행이든 그 안에서 가장 빛나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
눈 덮인 들길 걸어 갈재
행여 발걸음 어지러이 하지 말세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 서산대사
여행은 저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꿈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유명한 고적과, 경치 좋은 마을이 아니라, 저의 발 닿은 곳곳마다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으로 채워질 수 있었습니다.
죽은 뒤의 세계를 지나치게 걱정하느라고 지금 이 세상에서 사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다.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용기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아직 저 애의 양심은 세상 물정에 물들지 않았어. 하지만 조금만 나이를 먹어 봐. 그러면 저 앤 구역질을 느끼지도 않고 울지도 않을 거야. 어쩌면 세상에서 옳지 않은 일을 봐도 울먹이지 않을 거야. 앞으로 몇 년만 나이를 더 먹어봐, 그렇게 될 테니
"그래, 맞아. 광대가 되는 거야. 웃는 것 말고는 사람들에 대해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그래서 서커스단에 들어가 허파가 터지도록 실컷 웃을 거야." 딜이 말했습니다. "딜, 넌 지금 반대로 알고 있는 거야. 광대들은 언제나 슬퍼. 그들을 보고 웃는 건 관객이란 말이야."
"그럼 난 새로운 종류의 광대가 될래. 무대 한가운데 서서 관객들을 쳐다보고 웃을 거야."
아냐. 누구나 다 배워서 아는 거야. 날 때부터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월터도 자기 나름대로 똑똑한 거야. 집에 남아서 아빠 일을 도와줘야 하기 때문에 종종 뒤처질 뿐이지. 그 애한테 잘못된 것은 없어. 내 생각으로는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이 있을 뿐이야. 그냥 사람들 말이지. ...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 있다면, 왜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할까? 그들이 서로 비슷하다면, 왜 그렇게 서로를 경멸하는 거지? 스카웃, 이제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왜 부 래들리가 지금까지 내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말이야, 아저씨가 집 안에 있고 싶어 하기 때문이야.
스카웃이 고통과 좌절을 겪으며 얻는 삶의 교훈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남에 대한 배려와 관용 그리고 사랑이다. 스카웃은 말하자면 <타자>,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입장에서 남을 생각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이와 반대로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웃은 그토록 무서워하던 래들리 집 현관에 서서 자신의 집과 이웃을 바라다본다. 늘 자신의 집에서 래들리 집을 바라보던 태도에서, 이제는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래들리 집에서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달라진 입장에서 스카웃은 비로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라는 아버지의 말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는다.
오늘날 우리 광장에는 전지 전능한 것처럼 자기 목소리만 높이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공부가 필요하겠지?
"하느님의 문서를 보고 온 사람들처럼. 철학이란 물건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면, 정말 알고 있는 것보다 목소리를 더 높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본문발췌]
살아가는 누구나, 이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 저마다 짐작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 짐작이 얼마쯤 뚜렷한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있다. 사람은 초목이나 짐승과는 달라서, 이 짐작이라는 것을 나면서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저편에서 가르쳐주고, 제가 깨달아간다는 것이 사람의 삶의 어려움이다. - <일역판 서문>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 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곳에 이르는 길에서 거상의 자결을 목도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쫓으면서 온 사람도 있다.
그가 밟아온 길은 그처럼 갖가지다. 어느 사람의 노정이 더 훌륭한가라느니 하는 소리는 아주 당치 않다. 거상의 자결을 다만 덩치 큰 구경거리로밖에는 느끼지 못한 바보도 있을 것이며 봄 들판에 부유하는 민들레 씨앗 속에 영원을 본 사람도 있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 <1961년판 서문>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껍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 <초판 서문>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과 이어져 있어요. 정치는 인간의 광장 가운데서두 제일 거친 곳이 아닌가요? ...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꺽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구,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 집 변소에 차려놓구, 페이브먼트를 파 날라다가는 저희 집 부엌 바닥을 깔구.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지요.
요즈음 그 숱한 정치 모임의 어느 하나도 모르고 지내온 생활이었다. 까닭은 두 가지다. 벌어지고 있는 일의 뜻을 잘 알 수 없었다. 너무 큰일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내친 말을 하고 있다. 하느님의 문서를 보고 온 사람들처럼. 철학이란 물건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면, 정말 알고 있는 것보다 목소리를 더 높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높은 가락만 들리는 판에서는 싸울 뜻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광장에는 꼭두각시뿐 사람은 없다. 사람인 줄 알고 말을 건네려고 가까이 가면, 깍아놓은 장승이었다. 그는 사람을 만나야 했다.
모든 우상은 보이지 않는 걸 믿지 못하는 사람의 약함 때문에 태어난 것. 보이지 않는 것은 나도 믿지 못해.
대중은 오래 흥분하지 못한다. 그의 감격은 그때뿐이다. 평생 가는 감정의 지속은 한 사람 몫의 심장에서만 이루어진다. 광장에는 플래카드와 구호가 있을 뿐, 피 묻은 셔츠와 울부짖는 외침은 없다. 그 건 혁명의 광장이 아니었다. 따분한 매스 게임에 파묻힌 운동장. 이런 조건에서 만들어내야 할 행동의 방식이란 어떤 것인가. 괴로운 일은 아무한테도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정이었다. 혼자 앓아야 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에 들어 있다는 것은 풀어서 말하면, 그 사회 속의 어떤 사람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라면,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의, 어디다 뿌리를 박을 것인가. 더구나 그 사회 자체에 대한 믿음조차 잃어버린 지금에. 믿음 없이 절하는 것이 괴롭듯이, 믿음 없이 정치의 광장에 서는 것도 두렵다.
철학을 배운 그는, 이 곡절을 흘려 보지는 못했다. 곡절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제자였다는 데 있었다. 헤겔은, 바이블에서, 먼저, 역사적 옷을 벗기고, 다음에 고장 색깔을 지워버린 후, 그 순수 도식만을 뽑아낸 것이다. 말하자면, 헤겔의 철학은, 바이블의 에스페란토 옮김이었다. 도식이란, 그것이 뛰어날수록 본뜨기 쉽다. 마르크스는 선생이 애써 이루어놓은 알몸에다, 다시 한 번 옷을 입혔다. 경제학과 이상주의의 옷을.
명준의 눈에는, 남한이란, 키르케고르 선생식으로 말하면,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 아닌 광장이었다. 미친 믿음이 무섭다면, 숫제 믿음조차 없는 것은 허망하다. 다만 좋은 데가 있다면, 그곳에는, 타락할 수 있는 자유와, 게으를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정말 그곳은 자유 마을이었다.
준다고 바다를 마실 수는 없는 일. 사람이 마시기는 한 사발의 물. 준다는 것도 허황하고 가지거니 함도 철없는 일. 바다와 한 잔의 물. 그 사이에 놓인 골짜기와 눈물과 땀과 피. 그것을 셈할 줄 모르는 데 잘못이 있었다. 세상에서 뒤진 가난한 땅에 자란 지식 노동자의 슬픈 환장. 과학을 믿은 게 아니라 마술을 믿었던 게지. 바다를 한 잔의 영생수로 바꿔준다는 마술사의 말을. 그들은 뻔히 알면서 권력이라는 약을 팔려고 말로 속인 꾀임을. 어리석게 신비한 술잔을 찾아나섰다가, 낌새를 차리고 항구를 돌아보자, 그들은 항구를 차지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참을 알고 돌아온 바다의 난파자들을 그들은 감옥에 가둘 것이다. 못된 균을 옮기지 않기 위해서, 역사는 소걸음으로 움직인다.
남하고 돌아선, 아무리 초라해도 좋으니까 저 혼자만이 쓰는, 그런 광장 없이는 숨을 돌리지 못하는 버릇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약한 자가 숨는 데였다.
우리 목숨을 주무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장삼이사, 그놈이 그놈이다. 자기만 별난 줄 알면 못난이 사촌이다. 광장에서 졌을 때 사람은 동굴로 물러가는 것. 그러나 과연 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사람은 한 번은 진다. 다만 얼마나 천하게 지느냐, 얼마나 갸륵하게 지느냐가 갈림길이다.
전원생활을 동경하며 떠나는 도시인들이 막상 접하는 어려움은 토박이들의 텃새, 집 안팎으로 늘어나는 관리요소들 - 돈을 주고 사람을 쓸 수 있지만, 그마저도 기다림에 지쳐 직접 해결하려고 나서는 경우가 많다 - 벌레/해충의 공격, 도시보다 더한 추위와 난방비, 겨울에는 큰길로 오고가기 위해 눈도 치워야 하는 등등... 그래도 불편함을 적응하고 극복하며 삶 자체를 느끼고 싶기에 누군가는 전원생활을 꿈꾼다.
설명할수록 민망해졌다. 내 삶의 허식들이 그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의 단출하고 원초적인 삶과 비교했을 때 이 모든 물건들은 조잡스럽게만 보였다. 알푸하라스 사람들은 그런 잡다한 물건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갖고 있는 것이나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나갈 수 있었다. 플라스틱 청량음료 병과 포장용 끈 한 묶음만 있으면, 여름에 물이나 와인을 차갑게 유지할 수 있는 - 적어도 펄펄 끓어오르는 것은 막을 수 있는 - 보냉병이 만들어졌다. 낡은 폐타이어로는 수로에서 사용하는 샌들 한 켤레로 변신했고, 뼛조각은 문 받침대로 쓰였다. 산자락에 자라나는 풀로는 집에서 필요한 온갖 살림살이를 엮어낼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우리에게는 수도도, 온수기도, 오븐도 그리고 도로도 있었다. 우리는 자연 속으로 떠나면서 버리고 왔던 그 모든 것들의 노예 신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그렇듯, 마누엘 역시 매끄럽고 유창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얘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문자가 발전하면서 인간은 긴 얘기를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능란하게 풀어내는 재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삶의 경험들을 단순히 스쳐 보내는 대신 거기서 얻은 교훈을 실천해야 하니까.
[옮기고 나서]
때문에 스튜어트가 가장 존중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도밍고나 안토니아처럼, 외국인과 토박이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삶을 투명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만큼 남들의 삶 역시 그렇게 받아들인다. 폭우로 강이 범람한 후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사건, 그리고 동화 속처럼 환상적인 결말 부분의 묘사는 어쩌면 작가의 바람이 살짝 가미된 상징적 픽션인지도 모른다. 모든 동화들이 그렇듯이.
'죽음', 아무리 두려워하고 부정하며, 피하려고 해도 모두가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어쩔 수 없이 닥칠 일,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잘 준비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본문발췌]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생의 마지막 단계이자 자연스러운 섭리입니다. 죽음을 배움으로써 삶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고 주변을 돌이켜볼 수 있는 교양인으로서의 품격을 가질 수 있다.
인생은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죽음이 있기에 삶의 목적을 향해 힘겹더라도 걸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고 피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생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할 수 없다. 그러면 막상 죽음이 닥쳤을 때 우리는 비참함과 슬픔에 사로잡혀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또한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감정의 둔마를 겪게 되고 더 나아가서 무관심하게 될지 모른다.
법적 및 의학적인 의미의 죽음은 사망 원인과 사망 종류를 통해 정의된다. 이 두 가지는 분명 다른 것인데 일반인들은 이를 헷갈리기 쉽다. 우선 사망 원인은 의사의 진단명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암이다, 간암이다 하는 것은 사망 원인이다. 추락사로 사망했으면 그것이 사망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망 종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째는 자연사, 즉 병사다. 두 번째는 외인사, 즉 외적 원인에 의한 사망이고, 여기에는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한 불상이 포함된다. 우선 자연사 또는 병사는 이해하기 쉽다. 의사가 "돌아가셨습니다"하고 말하면 의사에 따른 질병명이 병의 원인인것이고 병사에 의한 사망이 되는 것이다.
의학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현대에는 죽음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바로 연명의료다. 의학과 의료의 발전으로 그동안 생각하지도 않던 문제가 논쟁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중환자 의료의 발달로 치명적인 상황에 빠진 환자를 상당수 살려낼 수 있게 되었으나, 이면에는 더 이상의 의료가 소용없는 경우 이를 중지하고자 할 때 그 절차와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를 함께 가져왔다. 즉 이제는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가는 단계라고 보는 졸음의 단계, 혼수상태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의학적으로 그 소멸의 상태를 중단시켜 심장을 계속 뛰게 할 수 있고 호흡을 계속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말기암 환자라든지 식물인간 상태를 겪는 뇌질환 환자 등에게도 생명 연장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현재 연명의료로 발생하는 그레이존gray zone, 즉 삶과 죽음 중 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불분명한 중간 지대의 존재가 새롭게 부상했다. 이외에도 과학과 기술이 발달로 우리는 죽음에 관해 새로이 고려할 사항이 많아진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내적 요인이나 외적 요인이 생체에 작용하면 여러 반응계가 작동해 생체는 동적 평형 상태를 유지하므로 이른바 반응계가 작동한다. 그러나 내적 또는 외적 요인이 생체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나면 동적 평형 상태는 깨지고 생명 활동은 완전한 정지를 향해 불가역적인 변화를 시작한다. 즉 자극에 대한 반응성이나 운동성은 감소하고 약해져서, 결국에는 대사 기능도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다. 이 상태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죽음permanant cessation of vital reactions of individual이다.
법의학자는 이러한 사람의 죽음을 세포사, 장기사, 개체사, 법적 사망의 단계로 분류한다. 개체의 죽음에는 우선 전신의 생명 기능이 극도로 약해져서 객관적으로 살아 있다는 징후를 증명하기 어려운 상태인 가사 상태가 선행하게 된다. 순차적으로 주요 장기인 순환계통, 호흡계통, 중추신경계통의 심장, 페, 뇌 특히 뇌간 가운데 어느 하나가 불가역적으로 기능을 멈추면 개체는 반드시 생명 활동을 영구히 종지終止하게 되는 데 이를 장기사라 한다. 장기사는 심장의 박동이 종지해 결국 개체가 죽는 심장사, 호흡 정지가 먼저 나타나는 페사, 뇌 특히 뇌간의 기능이 종지하는 뇌사로 다시 분류하기도 한다. 이 중 심장사와 폐사는 오래전부터 죽음의 정의로서 사용되어 '심장이 멈추었다' '숨을 거두다' 등으로 표현되어 왔다. 이렇게 장기가 사망하면 그다음에 세포들이 사망하게 된다. 심장이 멈췄다고 해서 세포가 바로 다 죽는 것은 아니라서 사망 직후에는 각막이라든지 뼈를 이식할 수 있다. 이러한 장기가 불가역적으로 정지하면 개체로서 생명 활동은 필연적으로 종지하는데 이를 개체사라 한다. 이러한 개체의 죽은 바로 한 개인의 죽음으로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망을 일컫는다.
만약 환자가 알려달라고 했는데도 알려주지 못한 상태에서 환자가 혼수상태에 빠져 연명의료에 돌입하게 되면, 실제로 환자는 자신의 치료에 대한 결정권을 한번도 행사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 결정은 가족들의 몫이 된다. 결국 환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병원 장례 시스템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집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전체 사망자의 30~40퍼센트를 차지했고, 집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그런데 지금은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병원에 간다. 왜 그렇게 바뀌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우선은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과 우리의 삶을 별개로 떨어뜨려놓고자 하는 의식이 발동한 것이다. 죽음은 병원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타자화시키고 우리는 죽음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조금 더 죽음으로부터 안전한 삶의 공간에 남아 있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병원이나 장례식장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처럼 현대의 타자화된 죽음 때문에 죽음이 한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시스템 안에 매몰됨으로써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가 자살에 대해 갖고 있는 상식, 즉 죽고 싶어 죽는 것이라거나 즉흥적인 판단의 결과라는 것은 모두 틀린 말이다. 세상에 진정으로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법이다. 죽음의 이유는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는 부채 의식인데, 실제로 짐이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본인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노인 자살이 많다. 지금 노인 세대들은 남에게 신세 지기를 싫어하고 독립적으로 살아온 세대이기에, 프랑스 같은 선진국들의 노인들이 국가의 자원을 당연히 여기는 것과 달리 정부에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서 노후에 자신이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를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자살 원인으로는 소속감 부재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소속감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극심한 소외감으로 우울증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마지막 세 번째 원인은 죽음에 대한 무감각적인 학습이다. 이것은 사회적 역할이 방기되어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할 텐데,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문제의 해결책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I see it now. This world is swiftly passing! 이제야 깨달았도다. 생이 이렇게 짧은 줄을!" - <마하바라타> 중 카르나의 대사
"죽음은 서늘한 여름과 같다. 과거에도 사람들이 나를 오해했고, 현재도 사람들이 나를 잘못 알고 있고, 미래에도 사람들이 아마 나를 잘못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두렵지 않다." - <신삼국지>라는 드라마에서 조조의 마지막 유언
"나의 몸은 이슬에서 와서 이슬로 사라진다. 나니와의 영화도 꿈속의 꿈이런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지막 말. 나니와(지금의 오사카)
과거와 현재의 죽음 사이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생겼다. 바로 예감이다. 예전에는 서서히 노화가 시작되어 늙어가다가 어느 순간 생의 기미가 푹 꺼지는 지점이 찾아왔고,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아, 이제 돌아가시겠구나' 하고 말이다. 노년층 중에는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을 예감하고 어느 정도의 심리적인 준비를 마침 후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고 장례를 치렀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예감이라는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과거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과거에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죽음은 서늘한 여름과 같다"는 말도 할 수 있었고, "세자는 몸이 허하니 상중이라도 고기를 꼭 먹어라"라는 말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를 남길 틈도 없이 병원에서 아무런 준비나 의식 없이 마지막 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처럼 급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죽음은 실패가 아닌 자연스러운 질서. 죽음에 관한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끝, 자연의 마지막 질서이자 나의 스토리의 마지막 종결로 보는 태도다. 이것을 중립적 수용neutral acceptance 자세라고 한다. 그런데 종교적인 내세관을 가진 사람들은 또 다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행복한 내세에 대한 믿음으로 접근적 수용apporach acceptance 자세를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태도는 죽음에 관한 가장 안 좋은 자세라고 여겨지는데, 바로 죽음을 고통스러운 삶의 탈출로 받아들이는 탈출적 수용escape acceptance 자세다. 이는 사망 전 신체적 고통 등에 의해 유발될 수도 있으나, 이렇듯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자세로는 결코 행복한 죽음을 맞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을 하나의 여정 또는 작품이라고 본다면 죽음은 마지막 종착지 또는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즉 나만이 완성할 수 있는 내레이션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죽음은 의사의 내레이션이 되고 말았다. 내 인생을 내가 끝내야 하는데, 인생의 결정권이 생판 모르는 의사나 가족에 의해 행사되고 있다. 물론 그것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각자의 삶은 각자의 소유이고 스스로가 결정권자여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서 본다면 연명의료는 현대 의학에서 가장 큰 문제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죽음을 맞고 싶다는 소망도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순간 사라지게 된다. 사고가 아닌 암이나 뇌혈관 질환, 심혈관 질환을 앓는 환자라면 중환자실에서 가족과는 떨어진 상태로 홀로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하버드 의과대학 보건대학 교수인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이 있다. 인간다운 죽음을 강변하며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연명의료에만 급급해하기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과연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갈 것인지 돌아보는 것이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다. 인간다운 죽음이란 일방적으로 병원에서 제시하는 해결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을 행사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선택을 현명하게 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 병원 본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처럼 찬란한 칭송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토록 찬란한 내 삶의 모험 같은 스토리, 그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되어야 하는지도 지금 건강할 때 조금은 치밀하게 계획해두는 것이 찬란한 삶을 끝까지 빛나게 하는 방법이지 않나 싶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금 이 순간을 낭비 없이 꽉 채우는 온전한 현재의 삶을 사는 것! 삶의 마지막 여정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먄 현재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있다.
카르페 디엠Cape diem! 현재를 즐겨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어떠한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깊은 의미를 품는다.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이란 특별하지 않다.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이 곧 좋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삶이 열심히 사는 삶일까? 평소 많은 죽음을 실제로, 또 기록으로 보면서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며, 이를 통해 삶 속에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그리고 자주 해야 한다. 죽음은 급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하기에 꼭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소에 표현해야 한다.
둘째, 죽기 전까지 자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일, 즉 꿈꾸고 있던 일을 해야 한다. 마지막 순간 삶의 아쉬움이 어찌 없을 수 있겠냐마는 자신이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면 더 큰 후회가 남을 것이다.
셋째, 내가 살아온 기록을 꼼꼼히 남겨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겨줄 자산이 있었야 한다. 자산은 꼭 돈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주변에 알려주고 싶은 것 모두를 의미한다. 자신에 대한 기억을 사후에도 오랫동안 가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면 이를 기록해 꼭 전하기를 권장한다.
넷째, 자신의 죽음을 처리하는 장례 등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모으기 위해 경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기를 바란다. 어느 정도 금전적인 준비를 해두는 것은 사망 후 남겨진 가족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스스로 죽음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다.
다섯째, 지금 건강하다면 건강을 소중히 여기고 더욱 건강해지기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제 건강이란 질병이 없는 최선의 몸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라고 재정의되고 있다. 즉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평상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 만약 삶의 마지막에 엄청난 후회를 하며 세상을 떠난다면 죽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참함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품위 있는 죽음이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상태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생명체의 필연적 과정이다. 사실 철학, 과학, 종교는 죽음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죽음의 본질은 생명체의 소멸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체는 소멸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본다. 그런 후 대척점에 있는 삶을 치열하게 끌어안은 인생을 산다면, 그러한 사람에게 품위 있는 죽음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한 사람만이 삶의 마지막 과정에서 자신이 존엄하게 어떤 방식으로 사망할지 고민하고 준비할 수 있으며, 자신만의 내러티브로 인생이라는 마지막 장을 서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과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늘 죽음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유한한 삶에 감사하며, 자신과 주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지막 죽음의 과정에서 선택할 여유를 갖게 된다. 이러한 죽음이 곧 품위 있는 죽음이 아닐까. 우리 모두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이에 대해 깊게 생각하며, 지금 사유하고 있는 나의 삶에 감사하며 살기를 바란다.
옛 실크로드 길을 혼자 걸으며 노년에 쇠이유라는 도보여행을 통한 청소년 갱생프로그램을 만들며 삶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던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또 다른 책!
작년에 tvN에서 방영한 <스페인 하숙>에 방문했던 중년남성과 소녀도 산티아고 순례자길을 걸으며 '쇠이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문득 떠오른다.
[본문발췌]
걷는 일이란 '나'를 향하는 길, 그리고 타인을 향하는 길.
순례자들의 길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를 걸으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 길의 끝이 구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는다.
세상에 흔적을 남기기 바란다면, 그 세상과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지옥의 모든 것이 이 단어 속에 있다, 고독. - 빅토르 위고
마라톤이란, 더 빨리 가려고 하는 몸과 마지막을 위해 '여력을 남겨두려고' 애쓰는 정신 사이의 싸움이다. 우리 모두는 강하건 약하건 느리건 날쌔건 간에 35킬로미터 지점에서 고비를 맞기 때문이다. '최대한 천천히 출발하고 그 후엔 브레이크를 조금 걸 것' 이라는 마라톤의 법칙을 나는 아주 좋아한다.
떠난다는 건 스스로 준비하고 버리는 일이며,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이다.
문턱(쇠이유SEUIL) 프로젝트에 합류한 사람의 대부분은 은퇴자, 조기 퇴직자, 실업자 같이 '비활동적인' 인구로 분류되는 이였다. 그들도 나처럼, 더 이상 사랑할 줄 모르고 계산만 하려는 시스템에 의해 '폐품' 취급을 받거나 이득 또는 손실로 간주되길 거부한 사람들이다. 자신이 격리되는 것에 반발하는 그들의 욕망이 표현되는 방식을 보고 놀란다. 효율성과 합리성을 주요 원칙으로 삼는 거만하고 도가 지나친 이 자유주의 사회에서, 그들은 자기보다 더 소외되고 내쳐진 젊은이들을 돕는 길을 택한 것이다.
※ 문턱(쇠이유SEUIL 협회), '문턱'은 아동 사회보조 또는 법무부(청소년에 대한 사법적 보호조치 기구)의 지방사무소와 협조하여 활동한다. 감금될 처지에 놓인 젊은이는 감옥이나 교육적 감금 보호 센터에 들어가는 대신 도보여행을 완수할 수 있다. 이러한 걷기 프로그램은, 전통적인 틀 안에서 자신의 불행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젊은이에게도 예방 차원에서 제시된다. http://www.assoseuil.org
젊은이는 에너지가 있고 선입견이 없으며, 세상을 발견하고 그 안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을 지녔다.
나이 든 사람은 초보자에게 유용하게 사용될 경험을 가지고 있다.
계획이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다. 비록 그가 모든 계획을 실현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심은 떡갈나무가 탁자로 만들어질 만큼 충분히 자라려면 300년은 기다려야 한다. 아마도 나는 그 일을 내 손자와 손녀에게, 또 그들의 아이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 다행히도 하루하루가 너무 짧다고 생각하며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만 돌보는 건 별 재미가 없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게 정말 열광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특히나 운명이 딴죽을 걸어서 넘어졌는데 혼자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을 돌보는 건 더욱 그러하다.
친구가 없는 시대에, 형제애는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인생의 모든 상처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는 수많은 보험 증서가 그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상처는 보호해주지 못한다.
느림이야말로 현대의 삶이 모두에게 강요하는 끔찍한 압박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해독제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다.
여러 세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세상에서 나와 다른 부류의 생각과 변화를 외면하면 고립될 수 밖에 없다.
[본문발췌]
나와 같은 세대 또한 꼭 죽음이라는 단어를 빌리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낡아 사라지고, 다음 세대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그 시점이 언제인지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이제는 새로운 것이 아닐지라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며 공존의 길을 찾는 일일 것이다.
세대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에는 새로이 출현한다는 의미가 있다. 변화가 그 전제가 되는 것이다. 이 변화는 구세대가 만들어놓은 틀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데, 그 변화의 끝에서 틀은 깨지기 마련이다. 구세대로서는 그 틀이 깨지면 의식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른들의 말을 왜 안 듣냐?"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과거의 경험에 집착하는 기성세대보다 그로부터 자유로운 청년이 더 빠른 적응력을 보이고, 따라서 젊은 세대에게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살아본 적 없는 미래의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시간 속의 이주민'인 셈이다. 이제 청년이 스승이 될 수 있다.
90년대생의 특징
모든 '길고 복잡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심지어 피해야 할 일종의 악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첫번 째 키워드는 '간단함'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 습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문화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열쇠는 언어에 있게 마련이다. 생각과 느낌을 남과 주고받기 위해 동원하는 수단이 바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담함을 추구하는 90년대생들의 언어 습관에서는 축약형 은어인 '줄임말'이 자주 나타난다.
웹 네티이브인 80년대생들과 앱 네이티브인 90년대생들은 사고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인터넷이 주는 풍요를 누리고, 이후 24시간 온라인에 연결되어 있는 앱 네이티브들에게는 어느 때보다 유연한 사고방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조용하고 집중적인 기존의 선형적 사고는 구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온라인상으로 제공되는 축약된 정보를 빠르게 흡수하고, 필요할 때 바로 찾는 비선형적인 사고방식이 중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의 시기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네이티브의 시작점을 알렸던 웹 네이티브를 넘어서, 그 정점을 찍고 있는 앱 네이티브 세대로 주도권을 넘기고 있다. 새로운 지적, 문화적 역사를 여는 중요한 단계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90년대생의 두 번째 특징은 바로 '재미'다. 80년대생 이전의 세대들이 소위 '삶의 목적'을 추구했다면, 90년대생들은 '삶의 유희'를 추구한다. 이들은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질서라는 것을 답답하고 숨 막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질서를 요구하거나 진중해지는 모습을 보면 바로 "어디서 진지국 끓이는 소리가 들리는데?"라며 응수한다. 진지한 척하지 말라는 의미다. 문화 현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들이 재미를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그리고 그 사례들은 90년대생들이 이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기승전병'이다. 기승전병이란 기승전결(起承轉落)에 '병맛'이라는 신조가 결합된 또 다른 신조어다. 병맛이란 대체로 어떤 대상이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다. 주로 대상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병맛의 개념을 가장 널리 표방하는 방식은 웹툰으로, '병맛 만화'로도 불린다. 병맛 만화의 특징은 대충 그린 듯한 그림체, 비정상적인 이야기 구성 및 내용이다. 그러니 기승전병을 말 그래도 해석하면 이야기가 시작되고 전개되다가 절정 및 새로운 전환을 보여주고, 병맛스러운 결말을 짓는다는 뜻이다.
90년대생을 대표하는 마지막 특징은 '정직함'이다. 사실 정직함은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보편적인 가치 중 하나로 특히 신세대를 지칭하는 표현 중 하나였다. 하지만 90년대생들에게 정직함이란 기존 세대의 정직함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정직함이란 성품이 정직하다거나, 어떤 사실에 대해 솔직하거나 순수하다는 'Honest'와 다르다. 나누지 않고 완전한 상태, 온전함이라는 뜻의 'Integrity'에 가깝다. 그들은 이제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완전무결한 정직을 요구한다.당연히 혈연, 지연, 학연은 일종의 적폐다.
90년대생들에게 이제 정직함과 신뢰는 말로써 약속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명문화되거나 강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뢰의 시스템화'를 원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신뢰의 시스템화 요구는 점차 커질 것이다. 그 범위도 진학과 취업을 넘어서 사회 전방위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올림픽과 월드컵 같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에서 선수 선발 시 '인맥 논란'이 일곤 한다. 선수 선발에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신뢰의 시스템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철저한 선수 기록 통계와 데이터 등을 통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선발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90년대생을 대표하는 마지막 특징은 '솔직함'이다. 사실 솔직함은 예로부터 신세대를 지칭하는 가장 보편적인 표현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90년대생들에게 솔직함이란 기존 세대의 솔직함과는 그 범위가 다르다. 그들에게 솔직함이란 자신의 솔직함뿐 아니라 남들의 솔직함도 포함한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예를 들어 본인들을 고용한 기업이라든가 소비재를 파는 기업들에게서 솔직함이 보이지 않는다면 인정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몇 년 전, 인터넷에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글이 화재가 된 적이 있다. 이 법칙은 쉽게 말해서 어느 조직이든 일정량의 얌체, 진상, 무능력자, 아첨꾼 등의 일명 '또라이'가 존재한다는 법칙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을 패러디한 이 법칙은 아래와 같은 형식을 따르게 된다.
1. 또라이를 피해 조직(팀 또는 회사)을 옮기면 그곳에도 다른 또라이가있음.
2. 상또라이가 없으면 덜또라이 여럿이 있음.
3. 팀내 또라이가 다른 데로 가면 새로운 또라이가 들어옴.
4. 또라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다른 또라이가 될 필요도 있음.
5. 팀내에 또라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시니 또라이임.
조직학의 대가 아미타이 에치오니가 지적했듯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결정을 방어적으로 회피하거나 필요 이상의 정보를 수집하며 시간을 끄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의도적인 비효율이 발생할 수 있다. 책임 회피를 위해 꼭 필요한 의사결정을 미루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농업공학자 막스 링겔만의 실험 이후 널리 알려진 '사회적 태만'은 협업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개인별 노력의 최대량이 줄어드는 경향을 말한다. 책임을 분산하고픈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조직은 구성원의 임무를 명확히 분배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권한과 책임의 선이 희미해지면 책임을 분산하려는 욕구가 조직에 비효율을 일으킬 수 있다. 불필요한 이메일의 남발이나 안건과 관련이 없는 사람까지 참석시키는 회의가 대표적이다. 책임의 회피와 분산을위해 일단 이메일을 통해 내용을 공유하거나 꼭 필요치 않은 사람도 회의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마이클 맨킨를 비롯한 베인앤컴퍼니사의 컨설턴트 역시 2014년 5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쓴 글에서 조직 내 이메일이 폭증하고 회의도 증가하고 있지만 그것이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처럼 조직에서는 메일 체크와 회의 홍수에 귀중한 시간이 낭비되고 고객에게 쓸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참견'이 아닌 '참여'를 원하는 세대. 새로운 세대는 참여라는 말에는 긍정적이지만 참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가? 참견參見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와 별로 관계없는 일이나 말 따위에 끼어들어 쓸데없이 아는 체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함'이고, 참여參與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함'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와 어느 정도 관계있는 일이나 말 들에 직접 나서고자 한다.
업무 몰입이나 흥미 증진에 있어서 제도의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90년대생들에게 '일을 통해서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을 통해 성장할 수 없다면 지금의 일은 의미가 없고 죽은 시간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지금의 이 업무가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 된다면 일은 단순한 돈벌이 이상의 의미가 될 수 있다.
Always remember, others may hate you, but those who hate you don't win unless you hate them.
이것을 잘 기억해두게. 만일 상대가 자네를 미워했다고 하더라도 자네가 상대를 같이 미워하지 않는 한, 그들은 자네를 이길 수 없다네. - 닉슨
나는 학교를 졸업한 이래 어떤 조직에도 속하는 일 없이 혼자서 꾸준히 살아왔지만, 그 20여 년 동안에 몸으로 터득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개인과 조직이 싸움을 하면 틀림없이 조직이 이긴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결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개인이 조직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어수룩하지 않다. 분명히 일시적으로는 개인이 조직에 대해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조직이 승리를 거두고야 만다.
때때로 문득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어차피 지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정말 피곤하네'라고 인정하면서도, 나름대로 힘껏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개인이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 존재 기반을 세계에 제시하는 것, 그것이 소설을 쓰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를 관철하기 위해 인간은 가능한 한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해두는 것이 좋다고(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여름에 책이 잘 팔리고 당연히 피서지나 관광지의 서점이 번창하게 된다. 그 서점들은 대부분 신간 전문점이 아니고 헌책방이다. 사람들은 읽고 난 책을 그 서점에 팔고 새로운 책과 교환해간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익스체인지exchange'라고 불리는 서점이 생겨나고 많아진 것이다.
'먹기, 자기, 놀기' 고양이 손목시계....
시계를 보고 있기만 해도 왠지 마음이 느긋해진다. 안달해봤자. 기껏해야 이건이 인생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마도 안자이 화백의 경우에는 '그리기, 술 마시기, 자기' 시계가 될 것이다.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아!"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글을 쓸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언제나 컨디션이 좋을 순 없다. 오랫동안 뭔가를 계속하자면 산도 만나고 골짜기도 만나는 법이다. 컨디션이 나쁠 때는 나쁜 대로 자신의 페이스를 냉정하고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범위 안에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나가는 것도 중요한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무리하지 않고, 고개를 치켜들고 꾸준히 참고 해나간다면, 다시 조금씩 컨디션이 되돌아오는 법이니까.
42킬로미터를 달리는 일은 결코 따분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매우 스릴 넘치는 비일상적이고도 창조적인 행위다. 달리다 보면 평소에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라도 '뭔가 특별'해질 수 있다. 설령 짧게밖에 살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짧은 인생을 어떻게든 완전히 집중해서 살기 위해 달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고양이는 세계와 단절된 듯한 자세로 세계에 대한 냉담함을 드러내 보여주는 전혀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이다. 개가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자신의 온몸과 정신을 쏟아부을 때, 고양이는 능청스럽게 자기만의 세계와 사고를 고집한다. 길고양이는 말할 것도 없고 온전히 집에서만 자라는 고양이도 그러하다. 마치 고양이가 그 집주인인 것처럼 행세한다.
'레종 데트르', 즉 인간의 존재 이유를 탐구하는 작가 하루키의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 두기'의 미학 정신이 고양이의 사는 모습과 거이 닮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꼬마 모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주는 재주였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모모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문득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끔, 그렇게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모모에게 말을 하다 보면 수줍음이 많은 사람도 어느덧 거침이 없는 대담한 사람이 되었다. 불행한 사람, 억눌린 사람은 마음이 밝아지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 내 인생은 실패했고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마치 망가진 냄비처럼 언제라도 다른 사람으로 대치될 수 있는 그저 그런 수백만의 평범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모모를 찾아와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말을 하는 중에 벌써 어느새 자기가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모모는 그렇게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많은 일들을 해결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모모가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모모는 베포가 대답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었고, 또 그의 말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모모는 베포가 진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베포는, 모든 불행은 의도적인, 혹은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거짓말, 그러니까 단지 급하게 서두르거나 철저하지 못해서 저지르게 되는 수많은 거짓말에서 생겨난다고 믿고 있었다.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 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지.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그리고 점점 더 빨리 서두르는 거야. 허리를 펴고 앞을 보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지. 그러면 더욱 긴장되고 불안한 거야. 나중에는 숨이 탁탁 막혀서 더 이상 비질을 할 수가 없어. 앞에는 여전히 길이 아득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 해 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 한 걸음 한 걸 음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 ... 그게 중요한 거야.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시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까.
시간을 아끼는 사이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점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 그것은 아이들 몫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아이들을 위해서도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난 돈만 벌면 그많이잖아. 그래, 시대가 변하고 있어. 전에는 나도 달랐지. 남들에게 떳떳이 내놓을 수 있는 걸 지으면서 내 일에 대해 긍지를 느꼈어. 하지만 지금은..... 돈을 많이 벌면 미장일을 때려치우고 딴 일을 할 거야. - 미장이 니콜라
인생에서 중요한 건 딱 한 가지야. 뭔가를 이루고,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뭔가를 손에 쥐는 거지. 남보다 더 많은 걸 이룬 사람, 더 중요한 인물이 된 사람, 더 많은 걸 가진 사람한테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거야. 이를테면 우정, 사랑, 명예 따위가 다 그렇지. - 회색 신사의 말
왜 얼굴이 잿빛이에요?
죽은 것으로 목숨을 이어 가기 때문이지.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인간의 일생을 먹고 살아 간단다. 허나 진짜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간은 말 그대로 죽은 시간이 되는 게야.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거든. 시간은 진짜 주인의 시간일때만 살아 있지. - 호라 박사
세 형제가 한 집에 살고 있어.
그들은 정말 다르게 생겼어.
그런데도 구별해서 보려고 하면,
하나는 다른 둘과 똑같아 보이는 거야.
첫째는 없어.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참이야.
둘째도 없어. 벌써 집을 나갔지.
셋 가운데 막내, 셋째만 있어.
셋째가 없으면, 다른 두 형도 있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되는 셋째는 정작
첫째가 둘째로 변해야만 있을 수 있어.
셋째를 보려고 하면,
다른 두 형 중의 하나를 보게 되기 때문이지!
말해 보렴. 세 형제는 하나일까?
아니면 둘일까? 아니면 아무도 없는 것일까?
꼬마야, 그들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으면,
넌 세 명의 막강한 지배자 이름을 알아맞히는 셈이야.
그들은 함께 커다른 왕국을 다스린단다.
또 왕국 자체이기도 하지! 그 점에서 그들은 똑같아.
첫째는 미래, 둘째는 과거, 셋째는 현재... 셋이 함께 다스리는 커다란 왕국은 시간...
세 형제가 함께 사는 집은 세상....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니까. 또 자기 시간을 지키는 것도 사람들 몫이지. 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나누어 줄 뿐이다.
죽음이 뭐라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게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람들의 인생을 훔칠 수 없지.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건 꿈이 이루어지는 거야. 적어도 나처럼 되면그렇지. 나는 더 이상 꿈꿀 게 없거든. 아마 너희들한테서도 다시는 꿈꾸는 걸 배울 수 없을 거야. 난 이 세상 모든 것에 신물이 났어. ... 지금 내가 아직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묵묵히 사는 것뿐일 거야. 아마 남은 여생 동안 그래야겠지. 아니면 적어도 사람들이다시 나를 잊어 버리고, 그래서 내가 다시 이름 없는 가난한 놈이 될 때까지는 그래야 할 거야. 하지만 꿈도 없이 가난하다는 것..... 아니, 모모, 그건 지옥이야. 그래서 나는 차라리 지금 그대로 머물고 있는 거야. 이것 역시 지옥이지만, 적어도 편안한 지옥이거든. - 기기의 말
차라리 음악을 듣지 않고, 색채들을 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선택을 하라고 했다면, 이 세상 어떤 것을 준다고 해도 음악과 색채에 대한 기억과 바꾸진 않았으리라. 그 기억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모모는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으면,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파멸에 이르는 그런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꼬마 모모와 베포 할아버지, ... 관광 안내원 기기(기롤라모), 파올로, 마시모, 프랑코, 꼬마 동생 데데를 데리고 다니는 소녀 마리아, 클라우디오를 비롯하여 옛날에 모모를 늘 찾아왔떤 아이들.... 음식점 주인 니노, 니노의 뚱뚱한 아내 릴리아나와 갓난아기, 미장이 니콜라.... 모모의 친구들.....
집을 나서면 좁고 지저분한 골목길이 보일 뿐이고, 조금만 더 나가면 차들이 쌩쌩 달리는 커다란 도로가 나오는 곳. 그리고 고층 건물들. 나는 그 앞에만 서면 개미보다 더 작은 하찮은 미물이 된 듯 주눅이 든다. 그 후 나의 삶은 전혀 딴판이 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 생활, 대학원, 결혼, 두 아이. 뭔가를 이루고,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뭔가를 손에 쥐기 위해 이를 앙다물고 시간을 쪼개며 살다 보면 문득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르고, 왜 이렇게 항상 시간이 모자랄까? 왜 아직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느낌이 드는 걸까?
<모모>를 번역하며 나는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아리게 자리잡고 있던 이 문제와 마주하는 행복을 맛보았다."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시간이란 달력과 시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시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막연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시간이란 소중한 비밀을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목표를 이루고 나면 행복을 거머쥘 것 같지만 정말 그럴까?모모와 친구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 비밀을 알려 준다. 모모의 친구들은 회색 신사의 방문을 받은 후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기 위해 시간을 아끼면서 예전의 따스한 정을 잊고 점차 차갑고 삭막한 사람들이 되어 간다. 모모는 호라 박사와 꼭 반 시간 후의 일을 미리 알고 있는 신기한 거북 카시오페이아의 도움을 받아 시간을 훔치는 회색 신사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은 예전처럼 한 순간 한 순간을 즐기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이처럼 동화의 형식을 빌어 재미있게 전개되지만,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을 아끼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네 이야기이기도 하다. 회색 신사들, 그들은 바로 우리가 뭔가를 이루고,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뭔가를 손에 쥐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 마음 속에 생겨나는 존재이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 속에서 자라날 수도 있다. 그러니가 작가가 "짧은 뒷이야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모모와 친구들의 이야기는 이미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어른은 물론 중-고등학생, 초등학생, 심지어는 유치원생까지 다른 사람보다 앞서 가는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 꽉 짜인 시간표에 따라 바쁘게 일하고 공부하고 있다. 물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야겠지만, 그러는 동안 우리네 삶은 꿈과 따뜻함을 잃고 점점 삭막해져 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그리고 한 순간 한 순간의 과정을 즐기며 목표에 이르는 길은 어떤 것일까?<모모>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