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정보의 수집과 저장, 검색이 편리해지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과 노력이 줄어들고 뇌의 구조까지 변화가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편리함과 미디어의 최면에 걸려 우리의 지식과 사고능력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은 되새길 필요가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강하다.

 

 

[본문발췌]

 

 

스스로 답을 찾는다.

누군가로부터 답을 구하는데 익숙한 사람보다 자신을 믿고 스스로 답을 찾는 사람의 생명력이 강하다.

 

 

고민할 시간에 행동하라.

결과가 좋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으니 해 될 것이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더욱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다.

 

 

다시 생각한다.

잘못을 깨달았으면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백지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지도 못한다.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인정하면 쉽다.

어떠한 사실을 알았다면 그것을 존중하고 솔직히 인정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고 올바른 해결책을 알아낼 수 없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처음부터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생각하는 대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그것이 문제 해결의 비법이다. 가능한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제약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미래의 인재.

비즈니스 세계에서 뛰어난 인재란 매사를 스스로 분석하고, 생각하고, 새로운 일을 구상해 비즈니스에 적용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논리적 사고를 통해 현실을 해부하고 문제의 본질을 알아낸다. 그리고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세운 후 책임을 갖고 행동한다. 기업, 아니 우리 모두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인재다.

 

 

일단 부딪쳐본다.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간단하다. 자신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을 피하느냐, 아니면 일단 부딪쳐보느냐 바로 그 행동의 차이다. 처음부터 성공의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무엇이 나의 진정한 희망이고 꿈인가?' 이것을 계속해서 묻고 대답해야 내공이 단단한 고수로 거듭날 수 있다.

 

 

인간을 바꾸는 3가지 방법.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3가지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3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은 가장 무의미한 행위다.

 

 

가끔은 먼 길로 돌아간다.

조금 먼 길이 오히려 지름길일 때가 있다. 먼 길 위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주위를 둘러볼 수 있을 때도 있다. 먼 길을 택해도 가끔은 시간이 남는다. 결국에는 같은 곳, 혹은 더 좋은 곳에 다다르게 된다.

 

 

자기 인생.

'남의 인생'을 사는 것은 최악이다. 부모가 기대하는 효자로 사는 인생, 선생님이 좋아하는 모범생으로 사는 인생, 상사가 바라는 이상적인 부하로 사는 인생 등이 그 예다. 그래서 즐겁다면 당장은 좋겠지만 결국 문제가 생긴다. 언젠가 그런 인생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진실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타협.

진정한 프로페셔널에게 '타협'은 있을 수 없다. 타협은 자신을 위한 변명으로 고객의 사정은 물론 비즈니스 파트너의 입장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안이한 태도다.

 

 

왜?

나의 유일한 도구는 '왜?'다. 똑같은 상품을 파는 영업사원들 중 일부는 높은 실적을 올리는 반면, 나머지는 그렇게 못하는 것은 '왜'일까. 도쿄에서는 잘 팔리는 상품이 오사카에서는 거의 팔리지 않는 것은 '왜'일까. '왜?'라는 의문에 익숙해져야  답을 얻을 수 있다.

 

 

답이 없는 곳에 기회가 있다.

명확한 답이 없을 때가 기회다. 전문가에게 물어도 흡족한 답을 얻지 못할 때에는 '상식'을 버리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답은 스스로 찾는다.

남이 가르쳐주는 답은 좁은 범위에 답일 때가 많다. 하나의 열쇠는 오직 하나의 자물쇠를 열수 있다. 그러므로 '답을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사고력을 키우면 어떠한 문제가 주어져도 차분히 마주하며 답에 이를 수 있다.

 

 

진정한 능력이란.

정말 중요한 것은 필요할 때 요긴한 지식을 신속히 찾아내 그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질문하지 않는 사람.

뭐든지 아는 사람, 그래서 질문하지 않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아는 한 세계 최고의 경영자들은 모두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관계 지능.

자국민보다는 외국인, 비슷한 세대보다는 나이 차이가 나는 세대, 동성보다는 이성, 고향이 같은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 동종업계의 사람보다는 다른 직종의 사람..., 이렇게 자신과 다른 사람과도 원활하게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은 샐러리맨에게 있어 중요한 자질이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야말로 귀중한 정보의 매개체이다.

 

 

변화를 만드는 사람.

문제점만 지적해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논리적인 판단력을 근거로 새로운 제안을 하는 사람들이 회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

 

 

욕구를 읽어라.

'고객의 욕구'를 철저히 따르는 사업가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3C 중에서 고객이 제일 중요하다. 고객이 좋은 에어컨을 원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좋은 에어컨이 아니라 쾌적한 실내 호나경이다. 즉, 에어컨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선택과 집중.

경영에서 리더가 할 일은 2가지다. 하나는 정확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 다른 하는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명확히 정하는 것. 바로 '선택'과 '집중'의 문제다.

 

 

정답에 이르는 길.

답이 없는 세계에서는 새로운 것에 도전해 시행착오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 정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리스크를 무릅쓰고 답이 없는 길 위를 걸어야만 성과를 낼 수있 다.

 

 

계속하는 힘.

한때 나이키의 사외 이사로 일한 적이 있다.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은 간단하다. 성공할 때까지 계속하면 된다. 마지막에는 결국 성공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의한다.

"우리 회사는 ~ 이다" 하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회사는 뒤처진다. '너무 복잡해 한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회사'는 고객 역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체성.

보이지 않는 대륙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에토스(ethos, 사회 집단이나 민족 등을 특징짓는 관습)를 자신의 말로 정의해야 한다.

 

 

이단자의 시대.

전환기에는 이단자들이 활약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우등생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 종래의 우등생들은 답이 있는 세계에서 살아왔다. 상사가 답을 주면 그대로 실행했다. 그러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사회에서는 답을 알 수 없다.

 

 

구글에 답이 없을 때.

구글에 검색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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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잠깐동안 머물다 스쳐지나가기에 온 힘으로 현재를 살아야 한다. 

자신의 삶을 가득 채우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살 때는 삶에 철저하게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

삶에 철저할 때는 털끝만치도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일단 죽게 되면 조금도 삶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사는 것도 내 자신의 일이고

죽음 또한 내 자신의 일이니

살 때는 철저히 살고

죽을 때 또한 철저히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

모란처럼 뚝뚝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게

얼마나 산뜻한 낙화인가.

새잎이 파랗게 돋아나도록 질 줄 모르고 매달려 있는 꽃은

필 때만큼 아름답지가 않다.

생과 사를 물을 것 없이

그때그때의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불교의 생사관이다.

우리가 순간순간 산다는 것은

한편으론 순간순간 죽어 간다는 소식이다.

현자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본문발췌]

 

 

<지상의 양식>

 

우리의 나아갈 길들이 확실치 않아서 우리는 일생동안 괴로워했다. 그대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생각해보면 선택이란 어떤 것이든 무서운 것이다. 의무를 인도해 주지 않는 자유란 무서운 길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낯설기만 한 고장에서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니. 사람은 저마다 거기서 '자신만의'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 발견이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대의 시선 속에 있을 뿐 바라보이는 사물 속에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빛을 발광체와 분리할 수 없듯이 우리의 행위들은 우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 행위들이 우리를 소진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의 찬란함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더 뜨겁게 불탔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에게나 기이한 가능성들이 있는 것이니, 과거가 벌써 현재 속에 하나의 역사를 투영하지 않는다면 현재는 모든 미래로 충만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하나밖에 없는 과거가 하나밖에 없는 미래를 제시하고 - 공간위에 찍힌 무한한 점처럼 우리 앞에 하나밖에 없는 미래를 투사하는 것이다.

 

 

사람은 오직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자신할 수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행할 수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최대한으로 많은 인간성을 수용할 것.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공식이다. 삶의 다양한 형태들이여, 너희 모두가 다 나에게는 아름답게 보였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우리는 언제 모든 책들을 다 불태워 버리게 될 것인가!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감각으로 먼저 느껴보지 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 

 

 

모든 행복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어서 그대가 길을 가다가 만나는 거지처럼 순간마다 그대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그대가 꿈꾸던 행복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대의 행복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한다면 - 그리고 오직 그대의 원칙과 소망에 일치하는 행복만을 인정한다면 그대에게 불행이 있으리라.

 

 

내일의 꿈은 하나의 기쁨이다. 그러나 내일의 기쁨은 그와는 다른 또 하나의 기쁨인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자기가 품었던 꿈과 비슷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사물마다 제각기 '다르게'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잘됐군." 하고 말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할 수 없지." 하고 말하라. 거기에 행복의 커다란 약속이 있다.

 

 

행복의 순간들을 신이 내려주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 그럼 다른 순간들은 신이 아닌 누가 주었다는 말인가. 나타나엘이여, 신과 그대의 행복을 구별하지 말라. 만약에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신을 원망할 수도 없는 것처럼 나를 만들어주셨다고 신에게 감사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만사에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제 필요에서 태어나는 것이므로, 말하자면 외부로 나타난 하나의 필요에 불과하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사색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강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불행은 항상 저마다 자기 나름으로 바라보며, 자기가 보는 것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사물들 하나하나는 우리에게가 아니라 그 사물 자체에게 중요한 것이다. 그대의 눈은 바라보이는 사물 바로 그것이어야 할 것이다. 

 

 

시간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 나는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언제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선택이 내게는 고르는 것이라기보다는 고르지 않은 걸 버리는 것으로만 보였다. 시간이 좁다는 것과 시간이 하나의 차원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끔찍한 마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폭이 널다란 어떤 것이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것은 한낱 선(線)에 지나지 않았고, 나의 욕망들은 그 선 위를 달리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 짓밟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것' 아니면 '저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에 이것을 하면 곧 저것이 아쉬워져서 번번이 애타는 마음으로 두 팔을 벌린 채 아무것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잡으려고 팔을 웅크리면 무엇이든 '하나' 밖에 잡히지 않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때부터 다른 많은 공부를 단념할 결심이 서질 않았기 때문에 무슨 공부든 한 가지를 오래 계속하지 못하는 것이 나의 일생의 과오가 되고 말았다. 무엇이든지 그러한 대가를 치러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은 너무 값비싸게 생각되었고, 이론으로 나의 고민은 해결될 수 없었다. 휘황찬란한 것들이 가득한 시장에 들어섰지만 쓸 수 있는 돈이라고는 (누구의 덕분인가?) 너무나 적은 액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쓸 수 있는 돈! 선택이란 영원히, 언제까지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는 걸 의미했다. 수많은 그 '다른 것들'이 어떠한 하나보다도 여전히 더 좋아보였다. 

 

 

사실 지상에서의 '소유'가 어느 것이든 내게 반감만 자아내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것밖에 소유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나는 두려운 것이다.

 

 

책들은 나에게, 모든 자유란 잠정적인 것임을, 자유는 자기의 노예 상태, 아니면 적어도 자기 헌신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마치 엉겅퀴 씨가 뿌리를 내릴 기름진 땅을 찾아서 날며 헤매는 것과 같이 - 자유는 한곳에 고정되어서야 비로소 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이론이 사람들을 인도할 수는 없는 것이며, 어느 이론에나 반대 이론이 성립할 수 있고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 또한 학교 교실에서 배워 알고 있었기에, 나는 먼 길을 걸으며 그러한 반대 이론을 찾아보려고 애쓰기도 했다.

 

 

우리 마음의 젊은이여! 그 어떤 영광도 너희만 한 가치는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모든 것을 달콤한 기분으로 갈망하는 우리는 아무리 욕망을 지치게 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우리는 생각 하나하나가 모두 열정이었다. 느낀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그지없이 유별나게 톡 쏘는 맛을 가진 것이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미래를 기다리며 찬란한 청춘을 소모하였다.

 

 

우리에게 생(生)은 

야성적인 것, 돌연한 맛 

그리고 나는 여기서 행복이

죽음 위에 피는 꽃과 같음을 사랑한다.

 

 

빛을 발광체와 분리할 수 없듯이 우리의 행위들은 우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 행위들이 우리를 찬란하게 빛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오직 우리들 자신의 소진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아! 청춘 - 사람이 그것을 가지는 것은 한때뿐, 나머지 시간은 그것을 회상하는 것.

 

 

 

<새로운 양식>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하여 태어났음을 물론 자연의 모든 것이 가르쳐주고 있거늘. 식물이 싹 트게 하고 벌집에 꿀을 채우고 인간의, 마음에 선의를 채워놓는 것은 모두가 쾌락을 향한 노력인 것이다.

 

 

변덕스러운 영혼이여, 서둘러라! 가장 아름다운 꽃은 또한 가장 빨리 시든다는 사실을 알라. 그 꽃의, 향기를 어서 빨리 허리 굽혀 맡아보라. 영원불멸인 것에는 향기가 없는 법.

 

 

매일 나로 하여금 신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감사하는 내 마음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고 끊임없이 경탄을 금치 못한다. 고통의 끝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왜 기쁨의 끝에 오는 아픔보다 더 크지 못한 것인가? 그 까닭은, 슬플 때는 그 슬픔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생각하지만, 행복에 잠겨 있을 때는 그 행복 덕분에 면하게 되는 고통들을 조금도 머리에 떠올리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행복하다는 것이 당연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인 것이다.

 

 

각자에게는 자신의 감각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행복의 양이 할당되어 있는 것. 아무리 소량이라도 그것을 빼앗기면 그것을 도둑맞은 것이 된다. 내가 존재하기 전에는 내가 생명을 요구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지금은 모든 것이 나의 몫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은 너무나도 감미롭고 사랑한다는 것이 내겐 너무나도 당연하게 감미로워서 지나가는 바람의 조그만 애무도 내 마음속에 감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준다. 감사하는 마음의 필요성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라고 가르쳐준다.

 

 

저마다의 긍정은 자기희생 속에서 완결된다. 그대가 자신 속에서 포기하는 모든 것은 생명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자기 긍정을 모색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를 부정한다. 자기를 버리는 모든 것은 자기를 긍정한다. 완전한 소유는 오직 증여에 의하여 비로소 입증된다. 그대가 줄 줄 모르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그대를 구속한다. 희생이 없는 부활은 없다. 기꺼이 바치는 일 없이는 아무것도 꽃피지 않는다. 그대가 자신 속에서 보호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위축된다. 무엇을 보고 그대는 과일이 익었다는 것을 아는가? - 과일이 나뭇가지를 떠나는 것을 보고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은 증여를 위하여 익고 기꺼이 줌으로써 완성된다. 미덕은 어느 것이나 다 자기희생에 의하여 비로소 완성된다. 과일이 더할 수 없는 단맛은 오직 싹이 트는 것을 지향할 따름이다.

 

 

가장 중요한 발명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채 남아 있다는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발명들도 다만 극히 간단한 착상의 해명일 뿐이지요. 자연의 모든 비밀들은 어느 것이나 다 인간의 눈에 발견되지 않은 채 매일같이 우리의 시선에 비치지만 우리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훗날의 사람들은 태양으로부터 빛과 열을 채취하여 활용하게 될 때 지금처럼 땅속에서 힘들게 빛과 연료를 채굴하여 뒤에 올 후손들의 걱정은 할 줄도 모르고 그저 낭비만 하고 있는 우리를 동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저 사업적인 시각에서 절약하는 것밖에 모르는 인간이 언제쯤이면 지구상의 온도가 가장 높은 지점들에서 불필요한 여분의 열을 끌어다가 사용하는 법을 발견하게 될까요? 그런 날이 오겠지요. 그런 날이 올 겁니다. 지구의 열이 식기 시작하면 그런 일에 성공을 거두게 될 테지요. 바로 그때쯤이면 석탄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할 테니까요.

 

 

이 땅 위에는 너무나 많은 가난과 비탄과 어려움과 끔찍한 일들이 가득해서 행복한 사람은 자기의 행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는 행복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행복해질 수 없는 자는 남의 행복을 위하여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 속에 행복해야 할 절박한 의무를 느낀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남에게서 빼앗아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행복은 가증스럽게 여겨질 뿐이다. 

나의 행복은 남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데 있다. 나 자신이 행복하려면 만인이 행복해질 필요가 있다.

 

 

언어는 실제 삶에서 보다 더 많은 논리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경우가 잦고, 또 우리들 내면의 가장 귀중한 것은 표현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부분이니 말이다.

 

 

오! 우리가 하지 못한 모든 것, 그러나 우리가 할 수도 있었을 모든 것.... 하고 이승을 떠나려는 순간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했어야 마땅한 모든 것, 그러나 우리가 하지 못한 모든 것! 체면 걱정 때문에, 기회를 기다리려다가, 게을러서, 그리고 "제길! 시간이 좀먹나." 하는 생각만 줄곧 하고 있다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매일 매일,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을 때 순간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결심, 노력, 포옹을 뒤로 미루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시간은 지나가 버리고 만다. 오! 뒤에 올 그대는 보다 민첩해져서 순간을 놓치지 말라! 하고 그대들은 생각할 것이다.

 

 

남에게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최악의 비겁한 짓들을 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용기로 충만해 있다고 자신하다가 그들의 굳은 믿음이 한갓 '유토피아'라는 말 한마디와 양식 있는 사람들의 눈에 헛된 꿈에 팔린 사람으로 비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갑자기 기가 꺽이고 말았던가. 마치 인류의 모든 위대한 발전이 실현된 유토피아에 힘입은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치 내일의 현실은 어제와 오늘의 유토피아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닌 것처럼 - 만약 미래가 과거의 단순한 반복(그것이야말로 나에게서 삶의 기쁨을 송두리째 다 앗아갈 가능성이 가장 큰 이유가 되겠지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 발전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없다면 내게 삶이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 그래서 나의 소설 <좁은 문>에서 알리사의 입을 통해 "제 아무리 행복한 것일지라도 발전이 없는 상태란 나로서는 바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발전이 없는 기쁨이라면 경멸할 것입니다."라고 한 말은 바로 내 마음의 표현이다.

 

 

변화시켜야 할 것은 이 세계뿐만이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 새로운 인간이 어디서 솟아날 것인가? 분명 밖에서 솟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동지여, 그대 자신 속에서 그를 발견해 내도록 하라. 그리하여 광석에서 찌꺼기가 없는 순수한 금속을 추출해 내듯이 그대에게 대망의 새로운 인간을 요구하라. 그 새로운 인간을 그대 자신에게서 얻어내라. 대담하게 그대 자신이 되라. 적당히 넘어가지 말라. 저마다의 존재 속에는 놀라운 가능성들이 잠재해 있다. 그대의 힘과 그대의 젊음을 굳게 믿어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다짐할 줄 알아야 한다. "오로지 나 자신에 달린 일이다."라고.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갈라지게 되면 그것은 이미 그 뚜렷한 윤곽과 현존과 현실성을 잃어버린 것이야. 너무나도 색채가 흐릿해져 버린 세계여서 그걸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더 이상 큰 고통이 아니게 되고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어진다네. 그래서 나는 죽는다는 게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따지고 보면 누구나 다 죽게 되는 것이니까. 결국 그건 길들여야 할 한갓 습관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해. 사람은 단 한 번만 죽은 것이긴 하지만. 그렇지만 자신의 삶을 가득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 죽음이란 끔찍한 거야. 그런 사람에게 종교는 때를 만났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지. "걱정하지 마라. 진짜는 저쪽 세상에서 시작인거야. 넌 거기 가서 보상을 받게 돼." 그러나 살아야 할 곳은 바로 여기 '이승'인 것이다.

 

 

고통이란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것, 자연 속에서는 모든 것이 그것을 피하도록 되어 있어서 인간이 그것을 발명해 내지만 않는다면 고통은 별것 아닌 것으로 축소될 수 있다.

동물은 오직 현재에만 살고 있어서 후회, 회한과 같이 과거의 재현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수많은 상상의 고통들은 느끼지 않는다.

 

 

인간을 포함하여 자연계 전체에서 존재의 기쁨이 고통보다 훨씬 더 우선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와서 정지되고 만다. 그것도 인간의 잘못 때문에. 인간이 좀 덜 무모할 경우 전쟁으로 야기되는 고통들을 면할 수 있었고, 남에게 좀 덜 잔인하게 굴 경우, 가장 많은 경우인, 빈곤으로 야기되는 고통들을 면할 수 있었다. 이것은 결코 가공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고통 대부분은 결코 숙명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다만 우리들 자신 탓으로 생긴 것일 뿐이라는 단순한 확인이다. 우리가 피해 갈 수 없는 고통들의 경우에도, 우리가 여러 가지 병에 걸릴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또한 약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어느 면으로 보나, 인류가 보다 더 기운차고 건전하고, 그리하여 보다 더 즐거울 수 있으며,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고통은 그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바이다.

 

 

만인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것을 그대의 행복으로 삼아라. 일하고 투쟁하며 그대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면 그 어느 것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라. 모든 것이 자기가 하기에 달렸다는 것을 끊임없이 마음에 새겨라 비겁하지 않고서야 인간이 하기에 달려 있는 모든 악의 편을 들 수는 없는 법. 예지가 체념 속에 있다고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한 적이 있거든 다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라.

 

 

동지여, 사람들이 그대에게 제안하는 바대로의 삶을 받아들이지 말라. 삶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굳게 믿어라. 그대의 삶도, 다른 사람들의 삶도. 이승의 삶을 위안해주고 이 삶의 가난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어떤 다른 삶, 미래의 삶이 아니다. 받아들이지 말라. 삶에서 거의 대부분의 고통은 신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그대가 깨닫기 시작하는 날부터 그대는 그 고통들의 편을 더 이상 들지 않게 될 것이다.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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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협동조합의 목표와 사상은 공산주의와 일맥상통할지 모르나, 인간에 대한 신뢰와 존엄, 그리고 민주적 정의라는 측면에서 다르다.

 

 

[본문발췌]

 

 

몬드라곤의 사상적 전통과 태도에 대한 "호세 마리아" 신부의 이야기

  • 협동조합의 노동자는 영광에 찬 노동자 세상에서 이탈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경제사회적으로 해방된 조건에서 일할 기회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협동조합 노동자들이 새로운 부자 혹은 노동자 특권층이 되거나 그렇게 처신해서는 안 된다.
  • 협동조합운동이 단지 좀 더 나은 복지로써 또 다른 소수 계층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잘못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부르주아 사회에 있는 소수 특권계층에 몇몇을 덧붙일 뿐이라는 견해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는 다른 노동자들과의 연대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우리에게 책임과 연대는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 이 실험은 인간 자신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의 기풍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해방, 존엄, 정의의 의미가 이 땅의 민주적인 기관들에 스며들어 그 의미를 되살려낼 것이다. 우리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실천이다. 이때의 실천은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활동할 줄 아는 것을 뜻한다.
  • 우리가 확신하고 바라는 것은 몽상보다는 행동, 소유보다는 존재, 지배보다는 진보해가는 민중의 정신을 이해하고 공동이익을 추구하면서 노동을 통해 자기실현을 보장하는 다양한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다.

 

 

몬드라곤의 10대 원칙

  • 자유로운 가입(Open Admission)

  • 민주적 조직(Democratic Organization), 총회의 주권(1인 1표의 원칙), 경영조직의 민주적 선출 공동작업

  • 동자 주권(The Sovereignty of Labour), 노동이 자연과 사회, 인간을 개조하는 주요 요소, 창출된 부는 제공한 노동에 따라 분배(일자리 창출에 대한 확고한 결의)

  • 자본의 도구적, 종속적 성격(Instrumental and Subordinate Nature of Capital), 자본은 기업 발전에 필요한 요소로, 노동의 수단이며 노동에 종속된 것

  • 참여형 경영(Participatory Management), 경영에 대한 조합원의 참여을 점진적으로 발전.경영 참여를 위한 적절한 장치와 통로의 개발, 경영 변동 사항에 대한 투명한 정보, 조합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제,조직,작업의 결정 과정에서 조합원 및 그들의 대표자와 토의하고 협력, 사회적 훈련 및 직업 훈련 계획의 체계적 적용, 더축 큰 직무 수행을 위한 내부 훈련 계획의 수립

  • 급여 연대(Payment Solidarity), 연대에 기초하여 충분한 급여 지급

  • 상호 협력(Inter-cooperation)

  • 사회변혁(Social Transformation), 획득한 순수익의 재투자, 공동체 발전을 위한 활동 지원, 연대와 책임에 기반하여 협동조합 시스템에 조응하는 사회보장정책 운영, 사회경제적 성격을 갖는 기타 기구들과의 협력

  • 보편성(Universality), 사회적 경제의 영역에서 경제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과 연대를 표명하고 국제협동조합운동의 특징인 평등, 정의, 발전이라는 목표를 지지

  • 교육(Education), 호세 마리아 신부는 항상 '인간에 의해 채택된 사상과 개념에 대한 교육은 대중의 발전과 진보의 열쇠가 된다', '교육은 새로운 인간과 공정한 사회질서의 창출을 위해 당연하면서도 필수불가결한 주춧돌이다', 지식은 권력을 민주화하기 위해 반드시 사회화되어야 한다'

 

몬드라곤의 기업목표 : 고용창출 (일반 기업의 목표는 수익창출/확대)

 1) 고객 중심(고객과의 전략적 협력), 

 2) 발전(성장/국제화/시너지 효과 극대화), 

 3) 혁신(혁신경영/기술개발), 

 4) 수익성(경쟁력 제고), 

 5) 공동체 참여(기업의 책임/사회변혁에 복무), 

 6) 협동(인적자원 개발/지도력 배양/협동정신 교육/작업 중의 건강과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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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왜곡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도구, 프레임!

요즘 한국 사회는 정치, 언론의 온갖 프레임에 휘둘리고 있다.

 

 

[본문발췌]

 

 

세상을 보는 관점의 이해, 프레임은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고 판단할 때 작동하는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한다.

 

 

우리는 프레임에 따라 받아들인 정보를 조합하여 현실을 머릿속에 재구성한다.

 

 

프레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택, 강조된 관점의 정보 이외에도 축소, 배제된 것들을 파악해야 한다.

 

 

프레임은?

  • "프레임은 현실에 대한 인식, 해석, 제시, 선택, 강조, 배제 등의 수단을 지속적으로 패턴화하여 언어 또는 영상 담론을 조직한 것" - Todd Gitlin
  • "지각된 현실의 여러 측면 가운데 특정 부분을 선택하여 문제 규정, 원인 규명, 도덕적 평가, 대응 방안 제안 등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 텍스트 속에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 - Robert M. Entman
  • "하나의 이슈와 관계된 여러 사건들을 연결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조직화하는 핵심적인 아이디어 또는 스토리라인" - Claes H. de Vreese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대부분 우리는 먼저 보고 나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내린 다음에 본다" - Public Opinion(여론), Walter Lippmann

 

 

언론이 만들어낸 해석의 틀이 미디어 프레임이고, 이것이 수용자의 프레임으로 전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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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좀 더 풍성하게 살기 위해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

 

 

[본문발췌]

 

 

바람직한 삶은 '우리가 속해 있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삶의 목적을 갖고 자기 일을 하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재발견하는 과정이다.

 

 

짐을 풀고 다시 꾸리기 위한 질문

  •   나의 삶은 어떤 영화인가? 신나는 영화인가 지루한 영화인가?

  •   좋았던 것은 무엇인가?

  •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   이것이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인가?

  •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떤가?

  •   지금 몸담고 있는 곳에서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   당신의 재능을 어떻게 발휘하고 있는가?

  •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대부분 어디에 쏟고 있는가?

  •   돈 문제만 걸리지 않는다면 당신의 삶과 일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완벽한 직업 찾기

  •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 재능, 열정, 가치관을 분명히 알아가는 과정

  •   '당신은 무엇을 제일 잘하는가?'

  •   '당신은 무엇을 제일 재미있어 하는가?'

  •   '당신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일은 무엇인가?'

  

E. F.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말하는 일의 중요한 세가지 기능

  •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계발할 기회를 주는 기능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함으로써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

  •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기능

 

 

목적을 찾아가는 방법

  •   Q1. 당신은 어떤 환경에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가? 당신은 일과 일상생활에서 어떤 환경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게 재능을 발휘하는가?

  •   Q2. 당신이 가진 재능은 무엇인가? 당신의 세가지 기능을 압축해서 한두마디로, 가령 사랑하기, 보살피기, 가르치기, 듣기, 만들기 등

  •   Q3 당신은 무엇에 열정을 품고 있는가? 무엇이 당신을 설레게 하는가? 무엇에 대해 공상에 잠기곤 하는가? 에너지와 시간을 좀 더 쏟아보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등

 

 

다목적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공식 = (재능+열정+환경) x 꿈

  • 당신의 재능

    하고 있으면 신이 나는 기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능력

    별다른 노력 없이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특별히 따로 배운 기억이 없는 능력

  • 당신의 열정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는 문제

    당신이 좀 더 참여했으면 하는 문제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거나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은 분야

    지속적으로 깊은 흥미를 갖고 있는 일

  • 당신의 환경

    당신의 재능과 열정을 가장 쉽고 편안하게 발휘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작업환경

    당신이 선호하는 장소와 스타일

  • 당신의 꿈

    당신은 자신의 삶에서 재능과 열정과 환경을 어떻게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가?

    당신이 꿈꾸는 미래는 어떤 것이며,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떻게 그 미래를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는가?

    내년(아니면 그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이어질 것 같은가?

 

 

"이제 더 이상 '시간의 양'은 중요하지 않게 돼버렸어요. '시간의 질'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침묵의 휴가, 잠깐의 쉼표를 통해 삶을 더 풍성하게 하기

  1. 감춰진 나의 재능을 재발견하자. (창조적 삶)

  2. 당신의 목적을 되찾자. (목적은 헌신과 열정을 불러일으킴)

  3. 당신의 직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자.(만족은 늘 불만족을 낳는다. 새로운 문제와 주제)

  4. 당신을 위한 '개인 이사회'를 새로 선출하자

  5. 성장의 칼날을 다시 갈자

  6. 인간관계의 가방을 다시 꾸리자

  7. 시간과 돈의 사용을 검토하자

  8. 바람직한 삶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자.

    (당신에게 성공이란 정말 어떤 것인가? 2010년 12월31일 밤 11시 59분 당신은 어디 있었는가?

     누구와 있었는가? 당신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가? 당신은 목적 있는 삶을 살고 있었는가?)

  9. 매일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자 (정기적 휴식)

 10. 웃음을 되찾자

 

 

감사의 주제: 재능을 소중히 여길 것, 현재를 받아들일 것, 가진 것을 나눌 것

 

 

여행의 목적지보다 그 여정 자체를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마지막 목적지가 아니라, 그곳까지 가는 여정 그 자체라는 것을... 내일의 목적을 갖고 열정을 다해 오늘을 살라.

 

 

오늘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참된 성공의 증거, 

"다음주 내내 마실 우유가 그득하다고 해도 지금 내가 우유를 마실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마사이족 코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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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폭넓게 살펴보고 이해하는 것, 냉철한 판단, 여유.

 

 

[본문발췌]

 

 

1. 시계(始計) -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은, 이겨놓고 시작해야 한다. 이길 자신이 없으면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싸움은, 제대로 살피지 않고 벌였다가는 큰 코 다친다. (兵子 不可不察也)

  싸움의 조건은 도의(道), 기상(天), 지리(地), 장수(將), 법제(法)

  장수의 자질은 지략(智), 신의(信), 사랑(仁), 용기(勇), 엄격함(嚴)

  싸움은 속임의 미학이다. 적이 튼튼하면 약하게 만드는게 승리의 비결이다. 약점을 드러내는 순간 공격하면 백전백승이다.

  지는 싸움 앞에선 꼬리 내릴 줄 알아야 한다.

 

 

2. 작전(作戰) - 전쟁, 오래 끌면 헛장사다

  전쟁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 싸움은 손해를 본다고 해도 일찌감치 끝내는게 낫다.

 

  전쟁에는 하루에  천금이 든다. (日費千金 일비천금)

  이겨도 오래 끌면 헛장사다.

  전쟁이란, 이기더라도 오래 걸리면 군사력이 약해진다. (勝久칙鈍兵挫銳 승구즉둔병좌예)

  전쟁의 요체는 이기는 데 있지 오래 끄는 데 있지 않다. (兵貴勝 不貴久 병귀승 불귀구)

  싸움터에서 고민하지 마라.

  교묘한 작전이라고 오래 끄느니(巧久 교구) 어설프더라도 서두르는 게(拙速 졸속) 낫다.

 

 

3. 모공(謨攻) -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진정한 승리다

  가장 좋은 승리는 좋게 타일러서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목적을 이뤘다면 모양새가 어떠하든 간에 그 싸움은 이긴 것이다.

  안 싸우고 이기는 게 최선이다.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걸 최고라고 하지 않는다. (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백전백승 비선지선자야)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을 최고라고 한다.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

  반드시 온전한 그대로의 천하를 다퉈야 한다. (必以全爭於天下 필이전쟁어천하)

  싸움의 단계.

  벌모(伐謨) - 싸울 엄두도 못 내게 한다.

  벌교(伐交) - 왕따로 만들어 힘을 뺀다.

  벌병(伐兵) - 직접 부딪혀 싸운다.

  공성(攻城) - 준비를 끝낸 적에게 덤빈다.

 

 임금이 근심거리가 되는 3가지 이유

  1) 잘 모르면서 작전에 개입한다.

  2) 잘 모르면서 인사에 개입한다.

  3) 명령 계통을 어지럽힌다.

 

  승리의 5가지 조건

  1)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아는 자가 이긴다. (知可以與戰 不可以與戰者勝 지가이여전 불가이여전자승)

  2) 군대의 많고 적음을 쓸 줄 아는 자가 이긴다. (識衆寡之用者勝 식중과지용자승)

  3) 상하가 일치단결하는 쪽이 이긴다. (上下同欲者勝 상하동욕자승)

  4) 싸울 준비를 끝내고 적을 기다리는 자가 이긴다. (以虞待不虞者勝 이우대불우자승)

  5) 장수는 유능하고 임금은 개입하지 않는 쪽이 이긴다. (將能而君不御者勝 장능이군불어자승)

 

 적 이전에 나를 알아야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 지피지기 백전불태)

  적을 모르고 나만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진다.(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싸울 때마다 진다.(不知彼 不知己 每戰必敗 부지피 부지기 매전필패)

 

 

4. 군형(軍形) - 이기는 싸움만 한다

  싸움은 지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이길 싸움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때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지지 않는 게 먼저다.

 

  먼저 승리를 빼앗기지 않게 준비하고 이길 기회를 기다린다. (先爲不可勝 以待敵之可勝 선위불가승 이대적지가승)

  승리를 빼앗기지 않는 건 내게 달려 있고 이기는 건 적에게 달렸다. (不可勝在己 可勝在敵 불가승재기 가승재적)

  승리를 알 수는 있어도 만들 수는 없다. (勝可知而不可爲 승가지이불가위)

  이미 패배한 자를 상대로 승리한다. 공격은 이길 수 있을 때 한다.(可勝者 攻也 가승자 공야)

  진짜 싸움 잘하는 사람은 쉽게 이길 만한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다. (善戰者 勝於易勝者也 선전자 승어이승자야)

  승리란 이미 패배한 자를 상대로 거두는 것이다. (勝已敗者也 승이패자야)

  이기는 군대는 이겨놓고 싸움에 나서고 지는 군대는 싸움부터 하고 승리를 찾는다. (勝兵先勝而後求戰 敗兵先戰而後求勝 승병선승이후구전 패병선전이후구승)

 

 

5. 병노(兵勢) - 계란으로 바위치기? 바위로 계란치기!

  싸움은 세가 결정한다. 그러나 세는 미리 결정된 게 아니다. 만들어낼 수 있다.

  싸움에 정석은 없다.

 

  군대가 적을 맞아 지지 않게 하는 방법은 원칙과 변칙의 혼용이다. (可使必受敵而無敗者 奇正是也 가사필수적이무패자 기정시야)

  전쟁을 벌일 때 바위로 계란을 치는 듯 하는 방법은 허와 실의 혼용에 있다. (如以하投卵者 虛實是也 여이하투란자 허실시야)

 

세勢가 싸움의 관건이다.

  사납게 흐르는 물이 돌을 굴리는 힘, 그게 바로 勢다. (激水之疾 至於漂石者 勢也 격수지질 지어표석자 세야)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공격 기세가 거침없고 순식간에 이뤄진다. (其勢險 其節短 기세험 기절단)

  세에서 싸움의 답을 찾지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求之於勢 不責於人 구지어세 불책어인)

 

세勢는 정해져 있지 않다.

  수에서 밀린다고 생각하면 질서 있는 대오가 무너진다. (治亂數也 치란수야)

  세에서 밀린다고 생각하면 용맹스러운 병사도 겁쟁이가 된다. (勇怯勢也 용겁세야)

  객관적 전력에서 밀린다고 생각하면 강하다가도 약해진다. (强弱形也 강약형야)

  이익으로 적을 움직이게 해서 아군이 기다린다. (以利動之 以卒待之 이리동지 이졸대지)

  싸움 잘하게 하는 세란 바로 이 목석을 천 길 낭떠러지에서 굴리는 세다. (善戰人之勢 如轉圓石於千인之山者勢也 선전인지세 여전원석어천인지산자세야)

 

 

6. 허실(虛實) - 선택과 집중

  모든 곳을 지키면 모든 곳이 약해지는 법이다.

 

공격의 3대 요결

  1) 선제(先制), 싸움터에 먼저 자리잡고 적을 기다리면 편하다. (先處戰地而待敵者佚 선처전지이대적자일)

  2) 주동(主動), 적을 끌어들이지 적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다. (致人而不致於人 치인이불치어인)

  • 적이 편할 때는 피곤하게 한다. (佚能勞之 일능로지)

  • 적이 배부를 때는 배고프게 한다. (飽能饑之 포능기지)

  • 적이 안정돼 있을 때는 동요시킨다 (安能動之 안능동지)

  3) 의표(意表)

   생각지도 못하는 곳을 공격하라.(趨基所不意 추기소불의)

   적이 어디를 지켜야 할지 모르게 한다.(敵不知其所守 적부지기소수)

   허점을 찌르면 공격해 들어가는 데 방어가 없다.(進而不可禦者 衝其虛也 진이불가어자 충기허야)

  선택과 집중

   모든 곳을 지키면 모든 곳이 약해진다.(無所不備 즉無所不寡 무소불비 즉무소불과)

   왼손이 오른손을 못 구해주고 오른손이 왼손을 못 구한다.(左不能救右 右不能救左 좌불능구우 우불능구좌)

   적이 비록 많더라도 못 싸우게 하면 그만이다.(敵雖衆 可使無鬪 적수중 가사무투)

  싸움은 정해진 틀이 없다.

   최고 경지의 진법은 형태가 없다.(形兵之極 至於無形 형병지극 지어무형)

   전술이란 물과 같다.(兵形象水 병형상수)

 

 

7. 군쟁(軍爭) - 지름길은 없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마음만 급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싸움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서 시작한다.

 

 우직지계(迂直之計)

   에둘러 가는 길이 곧장 가는 길이고 걱정거리가 이익이 된다. (以迂爲直 以患爲利 이우위직 이환위리)

   군쟁에서 이익을 중시하면 위험해진다. (軍爭爲利 軍爭爲危 군쟁위리 군쟁위위)

   점령지에서 챙긴 게 있으면 병사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掠鄕分衆 약향분중)

 

 풍림화산의 군대

   바람처럼 빠르고(其疾如風 기질여풍)

   숲처럼 조용하며(其徐如林 기서여림)

   불처럼 쳐들어가고(侵掠如火 침략여화)

   산처럼 꿈쩍않으며(不動如山 부동여산)

   그림자처럼 알 수 없고(難知如陰 난지여음)

   번개같이 움직인다(動如雷霆 동여뢰정)

 

 싸움에서 다스릴 4가지

   기(氣) - 기가 살아 있을 때는 피하고 늘어져 있을 때를 노려라.

   마음(心) - 적의 무질서와 동요를 노려라.

   힘(力) - 적을 지치고 굶주리게 하라.

   변화(變) - 질서정연한 적과는 싸우지 마라.

 

  피해야 할 싸움

   싸울 때 언덕을 향하지 말고

   언덕에서 쳐내려오는 적과 맞서지도 말라.

   거짓으로 도망가는 적을 쫓아서는 안 된다.

   정예병은 공격하는 게 아니고(銳卒勿攻 예졸물공)

   먹잇감으로 내놓은 부대를 쳐서도 안 된다(餌兵勿食 이병물식).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이 위험하다.

   돌아가는 군사를 막아서지 마라.

   포위 공격할 때는 반드시 구멍을 만들어 놔라.(圍師必闕 위사필궐)

   궁지에 몰린 적에게 덤비지 마라.(窮寇勿迫 궁구물박)

 

 

8. 구변(九變) - 장수의 조건

  장수는 智, 信, 仁, 勇, 嚴으로 적의 힘은 약화시키고, 내 힘은 극대화해야 한다.

 

  주어진 일이라고 다 하는 게 아니다.

    길에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고(途有所不由 도유소불유)

    군대도 치지 말아야 하는 군대가 있고(軍有所不擊 군유소불격)

    성에도 공격하지 말아야 하는 성이 있고((城有所不攻 성유소불공)

    땅에도 싸움을 피해야 하는 땅이 있고((地有所不爭 지유소불쟁)

    명령에도 받지 말아야 하는 명령이 있다.(君命有所不受 군명유소불수)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줘라.

   유리한 조건과 불리한 조건을 모두 고려한다.(必雜於利害 필잡어리해)

   불리한 조건을 보여주면 적을 굴복시킬 수 있고(屈諸侯者以害 굴제후자이해)

   유리한 조건을 보여주면 적을 유인할 수 있다.(趨諸侯者以利 추제후자이리)

   적이 오지 않을 것을 믿지 말고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는 나를 믿는다.

   (無恃其不來 恃吳有以待也 무시기불래 시오유이대야)

 

  장수의 5가지 위험요소

   죽자고 덤비면 죽이면 그만이다.(必死 可殺也 필사 가살야)

   사는 데 연연하면 사로잡힌다.(必生 可虜也 필생 가로야)

   성질 급하면 함정에 빠진다.(忿速 可侮也 분속 가모야)

   깨끗한 척하면 더럽히면 된다.(廉潔 可辱也 염결 가욕야)

   백성을 사랑한다면 백성을 괴롭힌다.(愛民 可煩也 애민 가번야)

 

 

9. 행군(行軍) - 본질은 숨어 있다

  나의 일은 한발 떨어져서 보고, 남의 일은 한발 다가서서 본다.

  입장 바꿔보는 것이 정답이다.

 

  작은 기미에 큰 뜻이 숨어 있다.

   말은 공손하게 하면서도 전투 태세를 강화한다면 공격이 임박했다는 뜻이다. (辭卑而益備者 進也 辭强而進驅者 退也 사비이익비자 진야 사강이진구자 퇴야)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강화를 요청할 때는 다른 꿍꿍이가 숨어 있다. (無約而請和者 謨也 무약이청화자 모야)

   무기를 지팡이 삼아 짚고 서 있다면 제대로 못 먹고 있다는 반증이다. (倚仗而立者 饑也 의장이립자 기야)

   군대가 시끄러우면 장수가 위엄이 없다는 신호이다. (軍擾者 將不重也 군요자 장부중야)

   장교들이 화를 내면 병사들이 게으르다는 뜻이다. (吏怒者 倦也 이노자 권야)

   적이 정중하게 사과할 때는 쉬고 싶다는 뜻이다. (來委謝者 欲休息也 래위사자 욕휴식야)

 

  잘 싸우는 장수는 불친절하다.

   장수가 자상하고 다정하게 반복해서 말하는 건 부하들의 마음을 잃었다는 뜻이다. (諄諄翕翕徐言入人者 失衆也 순순흡흡서언입인자 실중야)

   상을 남발하는 건 사정이 급해졌다는 뜻이고, 벌을 남발하는 건 상황이 딱하다는 뜻이다. (屢賞者 窘也 數罰者 困也 누상자 군야 수벌자 곤야)

   포악한 행동을 하고 나서 부하들의 눈치를 보는 건 군사들의 동요가 갈 데까지 갔다는 뜻이다. (先暴而後畏其衆者 不精之至也 선폭이후외기중자 부정지지야)

   사소한 행동에도 이유가 있다.

 

  지켜져야 명령이다.

   이치에 맞게 명령을 내리고 제대로 지켜지는지 엄하게 살펴야 영이 바로 선다. (令之以文 齊之以武 是謂必取 영지이문 제지이무 시위필취)

   명령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서 국민을 가르치려 들어봤자 국민들은 따르지 않는다.

 

 

10. 지형(地形) - 패전의 이유

  싸움에는 변화무쌍한 상황이라는 외부 변수가 있다. 싸울 때는 이 모든 요소를 고려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지형

    통형(通形) - 나도 갈 수 있고 적도 갈 수 있는 곳

    괘형(괘형) - 가기는 쉬운데 돌아오기가 어려운 곳

    지형(支形) - 나도 가봤자 도움 안 되고 적도 가봤자 별 이익이 없는 곳

    애형(隘形) - 좁고 막혀 있는 곳

    험형(險形) - 산세가 험한 곳

    원형(遠形) - 아군과 적군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

 

  패전

    주(走) - 분산된 힘으로 집중된 적을 상대하는 미련한 경우

    이(弛) - 병사들은 강한데 부사관들이 약한 경우

    함(陷) - 부사관들은 강한데 병사들이 약한 경우

    붕(崩) - 장교들이 장수의 명령에 불복해 마음대로 싸우는 경우

    난(亂) - 장수가 중심 못 잡는 경우

    배(北) - 장수가 적의 전력을 잘못 분석한 경우

 

  이기는 싸움은 누가 뭐래도 한다.

    절대 이기는 싸움은 임금이 싸우지 말라고 해도 싸워 이긴다. (戰道必勝 主曰無戰 必戰可也 전도필승 주왈무전 필전가야)

    반드시 지게 돼 있는 싸움은 임금이 싸우라고 해도 싸우면 안 된다. (戰道不勝 主曰必戰 無戰可也 전도불승 주왈필전 무전가야)

    자기 이름 떨치자고 공격하지 않는다. (進不求名 진불구명)

    벌 받기 무서워서 물러서지 않는다. (退不避罪 퇴불피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승리는 확실하다. (知彼知己 勝乃不殆 지피지기 승내불태)

    여기에 기후와 지형까지 안다면 승리는 완벽하다. (知天知地 勝乃可全 지천지지 승내가전)

    일단 움직이면 망설이지 않는다. (動而不迷 擧而不窮 동이불미 거이불궁)

 

 

11. 구지(九地) - 본심을 들키면 진다

  많은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싸움에 임하게 하려면,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 마음을 다잡도록 해야 한다.

 

  9가지의 땅

   산지(散地), 경지(輕地), 쟁지(爭地), 교지(交地), 구지(衢地), 중지(重地), 비지, 위지(圍地), 사지(死地)

 

  위기의 싸움법

   1) 의표 찌르기

     전쟁은 속도를 생명으로 본다.(兵之情主速 병지정주속)

     적의 예상을 뛰어넘어 주의가 미치지 않는 허점을 공격하라. (乘人之不及 由不虞之道 攻其所不戒也 승인지불급 유불우지도 공기소불계야)

 

   2) 위기의식 조장

     도망갈 곳이 없으며, 죽지 않으려면 이기는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아넣는다. (投之無所往 死且不北 투지무소왕 사차불배)

     죽음 앞에서는 못할 게 없다.(死焉不得 사언부득)

     병사들은 포위되면 방어하고, 다른 수가 없으면 맞서 싸우고, 그 단계가 지나면 맹목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故兵之情 圍則禦 不得已則鬪 過則從 고병지정 위즉어 부득이즉투 과칙종)

 

   3) 정보 통제

     자세한 전투 계획을 알려주지 않는다. (運兵計謨 爲不可測 운병계모 위불가측)

     병사들이 제멋대로 판단하면 안 된다. (使人不得慮 사인부득려)

     쓸데없는 미신과 의심만 없으면 죽음에 이리기까지 못 갈 곳이 없다. (禁祥去疑 至死無所之 금상거의 지사무소지)

 

   4) 약점 노출 유발

     적의 뜻에 따르는 척하면서 싸움을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順詳敵之意 병敵一向 순상적지의 병적일향)

     시작은 처녀처럼 해서 적이 틈을 보이도록 만들고, (始如處女 敵人開戶 시여처녀 적인개호)

     그 다음에는 토끼처럼 잽싸게 적을 따돌린다. (後如脫兎 敵不及拒 후여탈토 적불급거)

 

 

12. 화공(火攻) - 얻는 게 없으면 나서지 않는다

  전쟁은 분풀이가 아니다. 냉철하게 이익을 따져야 한다.

 

  싸움은 분풀이가 아니다.

    임금은 기분 나쁘다고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主不可以怒而興師 주불가이노이흥사)

    장수는 화난다고 싸우려 들면 안 된다.(將不可以온而致戰 장수불가이온이치전)

    전쟁에서 이겼더라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면 헛일이다. (夫戰勝攻取而不修其功者凶 令曰費留 부전승공취이불수가공자흉 영왈비류)

    얻는 게 없으면 나서지 않고 급하지 않으면 싸우지 않는다. (非利不動 非得不用 非危不戰 비리부동 비득불용 비위부전)

    이익에 부합하면 움직이지만 이익이 안 되면 그만둘 일이다. (合於利而動 不合於利而止 합어리이동 불합어리이지)

  전쟁은 신중해야 한다.

    나라는 망하면 그걸로 끝이다.(亡國不可以復存 망국불가이부존)

    똑똑한 군주는 전쟁에 신중하다.(明君愼之 명군신지)

    훌륭한 장수는 싸움을 조심한다.(良將警之 양장경지)

 

 

13. 용간(用間) - 아는 게 힘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싸움이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적을 아는 게 곧 승부의 핵심이다.

 

  간첩의 5가지 : 향간(鄕間), 내간(內間), 반간(反間), 사간(死間), 생간(生間)

 

  정보의 특징

    1) 정보는 돈이다.

       돈 아끼느라고 적의 사정을 모른다면 장수가 될 수 없다.

       (愛爵祿百金 不知敵之情者 不仁之至也 非人之將也 애작록백금 부지적지정자 불인지리야 비인지장야)

    2) 정보는 해석이다.

       꼼꼼하지 않으면 정보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非微妙不能得間之實 비미묘불능득간지실)

    3) 정보는 보안이다.

       간첩은 누구도 모르게 움직인다.(事莫密於間 사막밀어간)

       기밀을 발표하지도 않았는데 다른 경로로 들려온다면, 그 간첩은 물론 중간에서 기밀을 보고한 자까지도

       살려두면 안 된다. (微哉微哉 無所不用間也 間事未發而先聞者 間與所告皆死 미재미재 모수불용간야 간사미발이선문자 간여소고자개사)

    4) 정보는 전략이다. 

       임금도 첩보전을 이해해야 한다.(五間之事 主必知之 오간지사 주필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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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생에서 자주 두 갈래 길에 마주선다. 미래에 펼쳐질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경우 상상력이 그려낸 두려움이 선택을 어렵게한다.

 

 

[본문발췌]

 

 

남의 의견은 들어주되 판단은 삼가라... (플로니어스)

 

 

이 가슴속에 간직하고 자물쇠를 잠갔으니, 열쇠는 오빠가 맡으세요. (오필리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아내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고통의 물결을 두 손으로 막아 이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가? 죽는 건 잠드는 것, 그뿐이다. 잠들면 모든 것이 끝난다. 마음의 번뇌도 육체가 받는 온갖 고통도, 그렇다면 죽고 잠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열렬히 찾아야 할 삶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잠들면 꿈도 꾸겠지. 아, 여기서 걸리는 구나. .... 죽은 뒤의 그 어떤 두려움과 한 번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결심을 무디게 하고, 그래서 미지의 저승으로 날아가느니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참게 만드는 것인가? (제 3막 제1장 중)

 

 

중용을 지켜서 연기에 대사를, 대사에 연기를 일치시켜야 해. 특히 자연의 절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무엇이고 지나치면 연극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법이니. 연극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을 거울에 비추어 선은 선한 모습으로, 악은 악한 모양으로 반영해서 그 시대의 양상을 본질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니까. (제 3막 제2장 중)

 

 

습관은 악습에 대한 인간의 모든 감각을 먹어 삼키지만 천사의 역할도 합니다. 항상 좋은 행동을 하고 있으면, 처음에는 어색한 옷 같지만 어느새 몸에 꼭 어울리게 만들어 줍니다. (제3막 제4장 중)

 

 

대개 민중이란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고 눈으로 보아서 좋고 옳고 그름을 결정해서, 범죄자가 받는 형벌만 문제를 삼고 범죄 그 자체는 생각지 않거든. (제4막 제3장 중 클로디어스 왕)

 

 

우리는 우리가 살찌자고 다른 동물들을 살찌우고, 우리가 살찌는 것은 구더기를 살찌우기 위한 것입니다. 살찐 임금이나 여윈 거지나 맛은 다르지만 한 식탁에 오르는 두 쟁반의 요리지요. 그뿐입니다.

왕을 뜯어먹은 구더기를 미끼로 고기를 낚고, 구더기를 먹은 그 고기를 사람이 먹을 수도 있습니다.

왕이라도 거지 뱃속으로 행차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제4막 제3장)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행위와 한평생의 삶이 단지 자고 먹는 것뿐이라면? 그렇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신이 우리 인간에게 이렇듯 위대한 사유의 힘을 주시고 앞뒤를 살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은, 그 능력과 신 같은 이성을 쓰지 않고 곰팡이가 피도록 내버려두가로 하신 것은 아닐 터. 그렇다면 짐승처럼 잘 잊어버리기 때문인가, 아니면 일의 결과를 너무 세밀하게 생각하는 좁은 마음의 망설임 탓인가. (제4막 제4장)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신의 특별한 섭리야. 지금 오면 나중에 오지 않고, 나중에 오지 않으면 지금 오네. 올 것은 지금 안 와도 나중에 오고야 마는 거야. 요는 각오야. 언제 버려야 좋은지. 그 시기는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목숨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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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정한 목격자의 한 사람으로 타인의 고통을 알리고 예방하고 치유하는데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 권력과 자본의 앞잡이가 되어 소설쓰듯 이야기를 지어내 일반 대중을 왜곡과 편향으로 이끄는 일부 기자들과 책임과 윤리라곤 나몰라라 하는 일부 언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본문발췌]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것은 지난 1세기하고도 반세기 동안 (오늘날의) 언론인과 같다고 알려진 전문적인 직업여행자들이 촘촘히 쌓아올린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경험이다. 오늘날 우리는 거실에서도 전쟁을 구경할 수 있게 됐다.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 이른바 '뉴스'는 비참한 모습을 시청자들의 눈에 내던져 동정심이나 격분, 그도 아니면 찬성 같은 반응을 자아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분쟁과 폭력을 대서 특필하기 마련이다.(헤드라인뉴스의 케케묵기 그지없는 지침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피가 흐르면 앞쪽에 실어라") 전쟁이라는 재앙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쟁점이 되어 왔다.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의 사명. 전쟁의 시기에서든 평화의 시기에서든, 광신적 애국주의의 편견에서 벗어난 채 공정한 목격자의 한 명으로서 자신들이 활동하던 시대를 기록할 것.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진에 손장난을 치는 일은 디지털사진과 포토샵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 사진이 부정확할 가능성도 늘 존재해 왔다. 회화나 데생은 그것을 제작했다고 알려진 예술가가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라고 밝혀질 때 위조품이라고 판명된다. 그러나 사진(아니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영상기록)은 그것이 묘사하려고 했다는 장면을 둘러싸고 뭔가 관람객을 속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 위조품이라고 판명된다.

 

 

시간이 지남에따라, 연출됐던 그토록 많은 사진들이 그 순수하지 못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역사적 증거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전쟁이 점점 더 적을 추적하는 정밀한 광학 장치들로 수행되는 행위가 되어갈수록, 전선에서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카메라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도 점점 더 엄격해졌다. 사진 없는 전쟁, 즉 1930년 에른스트 윙거가 관찰했듯이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인 것이다. 윙거는 이렇게 썼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우 꼼꼼히 보존하려는 행위와 자신이 지닌 무기로 적들의 위치를 정확히 몇 초, 몇 미터 단위까지 추적해 그들을 섬멸하는 행위는 모두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수행된다."

 

 

미국이 자신들의 권력에 저항하는 무수한 적들에 맞서 원격으로 전쟁을 지휘하는 이 시대에는, 대중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둘러싼 정책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텔레비전 뉴스 생산자들과 신문, 잡지의 사진 편집자들은 매일같이 주저하면서도 대중들이 알아야 할 범위를 놓고 의견의 일치를 봐야 한다. 때때로 그들의 결정 사항은 '훌륭한 감식력,' 즉 특정 기관이 앞장서 주장할 때에는 흔히 억압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일종의 기준에 대한 판단이 되기도 한다.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국가론> 제4권의 한 구절, 플라톤은 이 구절에서 부끄럽기 그지없는 욕망이 이성을 압도하게 되는 경위, 그래서 자아가 자신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욕망에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경위를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설명했는지 보여준다. 플라톤은 심적 기능(영혼)이 이성, 노여움이나 격정, 욕구나 욕망, 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움직인다는 이론을 개진했다. 이 이론은 초자아, 에고, 이드로 구성된 프로이트의 도식을 예견케 해준다.(차이점이 있다면, 플라톤은 이성을 맨 윗자리에 올려놨고, 의분으로 대변되는 양심을 한가운데에 놓았다는 점이다).

 

 

에드먼드 버크... "내 확신에 따르면 사람들은 현실의 불행과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얼마간, 그것도 적지 않은 즐거움을 느낀다"

윌리엄 해즐릿... "우리는 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화재 사건이나 충격적인 살인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를 늘 읽곤 하는가? ... '불행에 대한 사랑,'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의 관점... 고통을 희생에, 희생을 정신적 고양에 결부시킨다. 따라서 고통을 뭔가 잘못된 것이라거나 불의의 사건, 혹은 일종의 범죄로 여기는 감수성, 즉 고통을 고쳐야 할 무엇, 거부해야 할 무엇,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엇으로 여기는 현대의 감수성에는 낯설기 그지없는 관점이다.

 

 

사진이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 하다. ...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여길 수 있는 감정일지라도 연민을 자아내기에는 너무 단순할 수도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이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사진으로 찍혀 보여진 바가 전혀 없는 사건보다는 사진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사건이 훨씬 더 현실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사진에 찍힌 사건도 반복적으로 노출되다보면 결국 점점 덜 현실적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 <사진에 관하여>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극을 받게 되면 "정신적 분별력이 무뎌질" 뿐만 아니라 "정신이 미개하다고 할 만큼 무감각해지는 상태에 빠지는" 결과가 빚어진다.

 

 

'매일, 매달, 혹은 매년 신문지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가장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소식이 실리지 않을 때가 없다. .... 처음 줄부터 끝줄까지, 모든 신문들은 공포에 질릴 만한 소식투성이이다. 군주들, 국가들, 사적 개인들이 저지른 온갖 전쟁, 범죄, 절도, 호색, 고문, 사악한 행위, 온 세상에 판치는 잔악 행위 등등. 문명화된 인간은 매일 이 메스꺼운 전채로 아침식사의 식욕을 돋운다.' - 보들레르 (1860년대 초 자신의 일기)

 

 

<사진에 관하여>에 제시된 견해, 그러니까 상스럽고 소름이 돋을만한 이미지가 무차별로 확산된다면 윤리를 지켜나가며 생생한 감수성으로 각각의 경험에 반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견해는, 이런 이미지의 확산을 보수적으로 비판한 견해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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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눈에 보이는 잠깐의 편리, 편익을 위해 지속가능한 삶의 원천인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도시의 뒷골목, 지하에 쌓이는 유독물질과 쓰레기, 농약으로 자연의 생명력을 잃어가는 토지, 항생제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집단사육장! 휴식을 위해 찾아가는 휴양지도 쓰레기로 넘쳐나고 있다.

 

오로지 해결책은 작고 단순하며 자연 친화적인 삶!

 

 

[본문발췌]

 

 

해충방제는 필수불가결하고 바람직하지만 동시에 생태계와 관련된 것이기에 그저 화학자들의 손에 맡길 수만은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윤 추구를 주목적으로 하는 화학적 방제는 기술적, 양적 접근법이다. 이와 달리 생태학적인 접근은 자연의 세력 균형, 다수의 경쟁적 요소 혹은 상충하는 이익 간의 적절한 통합을 중시한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생태학은 그저 단순히 양적 혹은 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생태학은 전체적인 상황을 다루며 양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질적인 관점에서 동등하게 중시하는 분야이다. 현재와 미래, 즉각적이고 부분적인 이익과 인류 전체의 지속적인 이익 사이에서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생태학은 자원의 최적 이용뿐 아니라 최적 보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원의 범주에 식량이나 광물 등 물질적 자원뿐 아니라 아름다운 경치, 고즈넉함, 미적 가치, 흥미 등 향유할 수 있는 무형 자원들을 포함시켜야 하며 식량 생산을 통한 이익 창출과 더불어 인간의 건강증진, 획기적 보존, 레크리에이션 창출 같은 다른 이익들과도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 줄리안 헉슬리, <서문> 중

 

 

예전에는 그렇게도 멋진 풍경을 자랑하던 길가는 마치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듯, 시들어 가는 갈색 이파리만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생물이란 생물은 모두 떠나버린 듯 너무나도 고요했다. 시냇물마저 생명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물고기들이 다 사라져버렸기에 찾아오는 낚시꾼들도 없었다.

불길한 망령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찾아오며 상상만 하던 비극은 너무나도 쉽게 적나라한 현실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수많은 마을에서 활기 넘치는 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왜일까?

 

 

지구 생명의 역사는 생명체와 그 환경의 상호작용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 지구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물리적 형태와 특성은 환경에 의해 규정된다. 지구 탄생 이후 전체적인 시간을 고려할 때 그 반대 영향, 즉 생물들이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20세기에 들어서 오직 단 하나의 생물종(種), 즉 인간만이 자신이 속한 세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위력을 획득했다.

 

 

지난 25년간 이 위력은 불안감을 심어줄 정도로 크게 증가했을 뿐 아니라 그 본질에도 변화가 생겼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공격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위험하고 때로는 치명적인 유독물질로 공기와 토양과 하천과 바다를 오염시킨 일이었다. 이런 피해를 입은 자연은 원상태로 회복이 불가능한데, 그 오염으로 인한 해악은 생명체를 유지하는 외부세계뿐 아니라 생물들의 세포와 조직들에도 스며들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재난을 불러온다. 보편적인 환경 오염에 있어 화학물질은 세상의 근원 - 생명의 본질마저도 - 을 변화시키는 방사능의 사악하고 비밀스러운 동반자 역할을 한다.

 

 

원시적 농업 시대에 곤충은 농부들에게 별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곤충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농업이 본격화되고 대규모 농지에 단일 작물 재배를 선호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런 방식으로 농사를 짓게 되면 특정 곤충 개체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단일 작물 경작은 자연의 기본적 원칙이라기보다는 기술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자연은 자연계에 다양성을 선사했지만 인간은 이를 단순화하는 데 열성을 보이고 있다. 특정 영역 내의 생물에 대해 자연이 행사하는 내재적 견제와 균형 체계를 흐트러뜨리려 애쓰는 것이다. 자연의 견제로 각각의 생물들은 자신들에게 적합한 넓이의 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일 작물을 경작할 경우(예를 들어 밀과 다른 작물을 섞어 키우는 대신 밀만 재배하는 경우)에는 다른 작물 때문에 널리 퍼져나갈 수 없던 해충이 급증하게 마련이다.

 

 

새로운 합성살충제의 특징은 놀라운 생물학적 잠재력에 있다. 이 살충제들은 단지 독성을 지니는 것만이 아니라 생물들의 몸 속에 침투해 가장 사악하고 치명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변화시킨다. 이런 살충제는 유해물질로부터 신체를 보호해주는 효소를 파괴하고 에너지를 얻는 산화과정을 방해하며 각종 기관의 정상적인 기능을 억제해 불치병을 일으키는 등 점진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유도한다.

 

 

우리는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그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토양은 서로 연결된 생물들로 촘촘하게 짜여진 거미줄과도 같다. 생물은 토양에 의지해 살며, 토양 역시 공동체를 구성한 생물들이 번성할 때에만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

 

 

물과 토양, 그리고 지구의 녹색 외투라 할 수 있는 식물들로 인해 지상에서 동물들이 살아갈 수 있다. 현대인들은 이런 사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태양 에너지를 이용해 우리의 식량을 만들어주는 식물이 없다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물에 대해 우리는 정말로 편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각적인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식물을 잘 키우고 보살핀다. 하지만 지금 당장 별로 바람직하지 않거나 관심 없는 거라면 즉시 이 식물을 없애버린다. 인간이나 가축에게 해를 끼치는 식물뿐 아니라 먹을거리를 제공해주는 식물이라고 해도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있다면 바로 제거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별로 원치 않는 식물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거되는 식물도 있다.

 

 

식물과 대지, 식물과 식물, 식물과 동물 사이에는 절대 끊을 수 없는 친밀하고 필수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식물 역시 생명계를 구성하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일부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관계를 교란시키는 선택을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한참 후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려 깊게 생각해야 한다.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는 그 주변 역사와 풍토를 고려해야만 한다. 자연 식생은 그 환경을 구성하는 다양한 생물들이 벌이는 상호작용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경관을 갖추게 되었는지, 왜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잡초와 토양 사이에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는 우리의 편협한 시각에서도 이 관계는 왠지 유용한 듯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토양과 그 속 혹은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명체 사이에는 상호의존적이고 상호이익을 주는 관계가 존재한다. 추측컨대 잡초는 토양으로부터 무언가를 취하고 대신 토양에 무언가 도움을 줄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식물을 방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특정 식물을 먹이로 하는 곤충을 이용하는 것이다. 목초지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이런 가능성은 상당히 무시되었다. 곤충들은 자신이 원하는 식물만 먹이로 삼는데 그런 제한적인 식성을 잘 이용한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살충제는 대부분 비선택적이다. 없애려는 특정한 종만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독성이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살충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살충제와 접촉하는 모든 생물, 가족들의 사랑을 받는 고양이, 농부가 키우는 가축, 들판에서 뛰노는 토끼, 하늘 높이 날아가는 종달새가 모두 위험에 빠진다. 이런 동물은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사실 동물과 그 주변 환경의 존재로 인해 인간의 삶이 더욱 즐거워진다. 그러나 인간은 그 보답으로 갑작스럽고 무시무시한 죽음을 선사한다. 살아 있는 생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묵인하는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서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을까?

 

 

곤충의 최대 적은 다른 육식성 곤충들, 조류, 작은 포유류 등이지만 DDT는 자연이 내려준 이런 천적들과 아름다운 경치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한다. ... 우리는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잠깐 편안함을 누릴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벌레를 없애지도 못하면서 사악한 해충방제의 희생물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해충의 천적들이 농약 때문에 사라진다면, 새로운 해충이 등장해 느릅나무뿐 아니라 다른 나무들을 공격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통제할 것인가?

 

 

동식물 집단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열쇠는 영국의 생태학자인 찰스 엘턴이 말한 '종 다양성 유지'에 있다. 

 

 

삼림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물고기를 살리는 방법이 분명히 존재한다. 모든 강이 죽음의 강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포자기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대안들을 보다 폭 넓게 활용해야 하며 지식과 자원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대안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 가문비나무 벌레 억제에 있어서는 기생충을 활용하는 방법이 살충제보다 효과적이었다는 사례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런 자연적 통제를 최대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독성이 약한 살충제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보다는 삼림 생물 전체에는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해충만 없애는 미생물을 활용하는 편이 낫다. 구체적으로 그런 대안은 무엇이며 그런 방식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차후에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해충을 없애는 데 있어 화학약품 살포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며 또한 최선의 방법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만, 하구, 강어귀, 연안 습지들은 매우 중요한 생태학적 지형이다. 이런 곳은 어류 연체동물, 갑각류들의 생존과 너무도 밀접하게, 그리고 불가결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만약 여기서 생물이 살 수 없게 되면 이내 우리 식탁에서 바다식량들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농지와 숲을 대상으로 시작된 화학물질의 공중살포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었고, 그 양도 급속도로 증가하여 이제는 어느 영국 생태학자의 말처럼 '놀라운 죽음의 비'가 지구 표면에 내리고 있다. 또한 독극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미묘하게 변화했다. 한때 독극물은 해골과 엇갈린 뼈가 그려진 용기에 담겨 있었고, '부득이한 사용시에는 극도로 주의해야 하며 사용 목적 이외의 다른 대상에는 절대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함께 표기되곤 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새로운 유기 살충제가 개발되고 비행기들이 남아돌자, 이런 경고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현재 사용되는 독극물들은 예전 그 어떤 것들보다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공중에서 무차별적으로 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구제 목표인 곤충이나 식물만이 아니라 화학약품이 뿌려진 지역에 사는 인간마저도 예기치 못한 재앙처럼 독극물과 접촉하게 된다. 숲과 경작만이 아니라 마을과 도시에도 유독물질이 살포되고 있는 것이다.

 

 

'잔류 허용량 기준치' 제정은 결국 농부와 가공업자들에게 생산비용 절감이라는 혜택을 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먹는 음식에 독성 화학물질 사용을 허락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동시에 시민들이 섭취하는 화학물질이 위험 수준이 아님을 확신시켜주는 정책기관을 만들고는 그 유지 비용을 세금으로 충당하려는 수단이기도 하다 최근 사용되는 농약의 양과 독성 정도를 고려할 때, 이런 임무를 수행하자면 엄청난 비용이 필요한데 의회의 국회의원들 중 그런 비용 지출을 승인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은 없다. 결국 운이 지독히도 없는 시민들은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잘못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세금으로 부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가장 필요한 것은 염화탄화수소계 화학물질, 유기인산계, 기타 다른 독성 화학물질에 대한 잔류 허용량을 폐지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농부들에게 부담이 심하다며 반대하는 사람도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과일과 채소에 있어 7ppm(DDT 허용량), 1ppm(파라티온), 혹은 0.1ppm(디엘드린)이라는 허용치를 제정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아예 화학물질이 전혀 검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몇몇 농작물의 경우에는 헵타클로, 엔드린, 디엘드린의 검출이 금지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든 농작물을 대상으로 이렇게 화학물질 검출을 금지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닌가?

 

 

덜 위험한 농약을 만들어내는 것뿐 아니라 비화학적인 방법을 개발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정 곤충에게 병을 유발하는 박테리아를 응용하는 방법은 이미 캘리포니아 주에서 시도되고 있는데 이런 연구가 좀더 활발해져야 한다. 농작물에 해로운 잔류물을 남기지 않는 해충방제법도 연구되고 있다. 이런 해결책이 대규모로 시도될 때까지 우리는 현재 상황에 대해 그저 안심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로마 시대의 보르자 가의 초대를 받은 손님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보르자 가에서는 손님을 초대해놓고 독살해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등장한 화학물질이 우리 환경을 삼켜버리면서 전혀 새로운 공중보건 문제가 대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천연두, 콜레라, 페스트가 나라 전체를 휩쓸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했다. 오늘날 우리의 관심사는 곳곳에 편재하는 병원균이 아니다. 위생, 더 나은 생활환경, 새로운 약으로 인해 전염병은 비교적 잘 통제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은 근대적 생활방식을 수용하면서 인간 스스로 초래한 새로운 형태의 환경 오염이다. 

 

 

병든 환경을 조성하고 질병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살충제는 어떤 역할을 할까? 살충제들이 토양과 물, 음식을 오염시키며 고기가 뛰놀지 않는 개울과 새가 없어 온통 고요하기만 한 정원과 숲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했다. 인간이 아무리 안 그런 척 행동해도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이 세상 곳곳에 만연된 공해로부터 과연 인간은 도망갈 수 있을까?

 

 

책임 있는 공중보건 책임자들은 화학물질의 영향은 오랜 기간 축적되며, 개인에 대한 위험은 전 생애에 걸쳐 노출된 화학물질 총량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그런 위험을 쉽게 무시하고 만다. 앞으로 재앙을 일으킬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확실치 않은 위협은 그저 무시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질병에 대해서만 신경 쓰게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눈에 잘 띄지 않은 채 슬그머니 나타나는 병이다"라고 현명한 의사인 르네 뒤보(Rene Dubos) 박사는 말했다.

 

 

사람들은 즉각적인 일에만 관심을 보인다. 문제가 즉시 드러나지 않고 그 형태도 명확하지 않으면 그저 무시하고 그 위험을 부정해버린다. 연구자들조차 아주 미미한 증세만 가지고는 원인을 추적하기 힘들다. 확실한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병의 원인을 찾기가 힘들다는 사실은 현대의학이 해결하기 힘든 문제다. 

 

 

생물학자인 조지 월드(George Wald)는 눈의 시각 색소에 관한 자신의 독특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사용한 바 있다. "멀리 떨어진 아주 작은 창문을 통해서는 오직 한 줄기 빛만을 볼 수 있다. 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의 시야는 점점 더 넓어지고 결국 이 창을 통해 전 우주를 다 볼 수 있게 된다."

 

 

우리 몸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몸의 세포 하나, 그 다음엔 세포 속의 미세한 구조들, 그리고 마침내는 그 구조 속의 분자들로 우리 관심이 옮겨가게 된다. 우연히 우리 몸 속으로 들어온 외부의 화학물질이 미치는 심각하고 광대한 영향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의학자들은 생명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각 세포들의 기능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몸의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건강유지뿐 아니라 생명유지에도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기관이나 기능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세포 속에서의 에너지 생산이 순조롭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몸은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런데 곤충과 설치류, 잡초를 없애려고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이런 시스템에 직접 영향을 주어서 아름다울 정도로 정교한 신체 기능을 교란시킨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볼 때, 개개인의, 생명보다 궁극적으로 더욱 소중한 것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유전적 형질이다. 영겁처럼 긴 시간 진화를 거쳐 만들어진 우리의 유전자는 현재의 모습을 규정할 뿐 아니라 인간의 미래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유전자는 희망찬 약속이 될 수도 있고 커다란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한 유전자의 변이는 이 시대에 대한 협박, '우리 문명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위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생물체 중에서 유독 혼자만 암 유발물질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 불행히도 이것은 지난 몇 세기 동안 우리 환경의 일부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모든 화학적 발암물질을 제거하는 일은 비현실적인 목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중 상당수는 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성분이 아니다. 이런 발암물질들 제거하면 전체 발암물질의 양은 훨씬 줄어들고 그 결과 네 명 중 한 명에게서 암이 발병할 가능성 역시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음식과 식수와 대기를 오염시키는 발암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음식과 식수, 공기 속의 위험물질은 수년간 지속적으로 계속 흡수되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요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연은 결코 인간이 만든 틀에 순응하지 않는다. 곤충들은 자신에대한 화학적 공격을 우회적으로 피해가는 방법을 찾아낸다. 인간이 뿌려대는 화학물질로 인해 환경의 내재적인 저항력과 각 생물 종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방어벽이 약화되는 현상이다. 우리가 이런 방어벽을 무너뜨릴 때마다 곤충들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난다. 

 

 

자연의 균형이란 유동적이고 계속 변화하며 조절과 조정이 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인간 역시 자연이 이루는 균형의 일부분이다. 가끔씩 인간이 이런 상태를 자의적으로 바꾸곤 한다. 그 결과 인간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문제가 일어난다. 

 

 

살충제의 수와 다양성, 그 파괴성이 매년 실질적으로 증가하면서 환경 저항은 점점 더 감소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질병을 옮기고 농작물을 해치는 곤충의 개체수는 유래 없을 만큼 심각하게 증가했다.

 

 

캐나다의 곤충학자 G. C. 울리에트, '우리는 그 동안 유지해온 철학을 바꾸어야 하며 인간이 우월하다고 믿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또 특정 생물체의 수를 조절하는 데 있어 자연이 인간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고 다양한 방법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위험한 길을 탐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방제법에 관해 열심히 연구를 하겠지만 이 방제법은 생물학적인 관점이어야지 화학적인 관점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적은 폭력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주의 깊게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올바른 방향을 향하는 것이다.

 

 

생명이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적이기에 이에 대항해 싸움을 벌일 때조차도 경외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 살충제와 같은 무기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과 능력 부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과학적 자만심이 자리를 잡을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지금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 곳에 서 있다. 하지만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 등장하는 두 갈래 길과는 달리, 어떤 길을 선택하건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오랫동안 여행해온 길은 놀라운 진보를 가능케 한 너무나 편안하고 평탄한 고속도로였지만 그 끝에는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가지 않은 다른 길은 지구의 보호라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라 할 수 있다.

그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동안 무분별하고 놀라운 위험을 강요해왔다는 사실을 인식학 된다면, 지금까지 충분히 인내해온 우리가 마지막으로 '알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그때야말로 독극물로 세상을 가득 채우려는 사람들의 충고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어떤 또 다른 길이 열려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화학적 방제를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을 찾고자 한다면 놀라운 정도로 다양한 선택이 존재한다. 어떤 것은 이미 사용되었고 화려한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아직 실험중인 것도 있다. 또한 상상력 풍부한 과학자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가 실험으로 옮겨질 날만을 기다리는 방법들도 있다. 이들 모두는 공통점이 있따. 방제 대상이 되는 유기체와 이 유기체가 속해 있는 전체 생명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하는 생물학적 해결법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한다면 자연은 자신의 방식에따라 견제와 균형이라는 복잡하고 훌륭한 시스템을 가동시켜 삼림을 해충으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자연을 통제한다'는 말은 생물학과 철학의 네안데르탈 시대에 태어난 오만한 표현으로, 자연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응용곤충학자들의 사고와 실행 방식을 보면 마치 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원시적인 수준의 과학이 현대적이고 끔찍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 곤충을 향해 겨누었다고 생각하는 무기가 사실은 이 지구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크나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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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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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할 수 있는 가치의 다양성, 타자의 이해에 기반한 관용, 왜곡과 편견을 멀리하는 새로운 눈, 상상력, 모험심... 이런 것들이 '별들 사이에 길을 놓는다'는 표현을 만든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 -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본문발췌]

 

 

교육과 소득 수준의 관계,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 등을 열심히 연구해온 시카고 대학 경제학자 제임스 헤크먼은 인간 성장에 가장 중요한 시기를 '15세까지'로 잡는다. 타고난 생물학적 조건을 배제했을 때, 한 인간의 지적, 정서적 능력이 거의 결정되는 나이가 15세 선이라는 것이다. 그의 연구가 강조하는 것은 '교육의 효과' 부분이다. 15세 이후에는 교육 등의 외적 개입이 개체의 기본적 능력 형성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이 극히 미미하다고 그는 말한다. 15세 이후의 교육은 한 인간의 기술적 능력 개발은 돕지만 그의 근본적인 능력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 15세 까지의 연령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가 '8세까지'라는 주장이다.

 

 

인간의 성장 속도가 느린 것은 그 느린 과정에 의해서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능력들이 자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조생 밀감이 아니다. 신의 설계이건 자연선택의 결과이건 간에 사람을 사람으로 키우는 과정은 느려야 하고 숨통 조이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여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은 느림, 자유, 여유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속도의 포로가 된 어른들은 모든 아이들에게 어른에게나 적용될 속도계를 강요한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생김새를 물려받고 삶에 대한 진지한 추구의 자세를 배웠다.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나는 삶을 즐기는 법과 이야기 지어 내기의 즐거움을 물려받았다." - 괴테...

 

 

"바람과 불과 물과 땅 - 나는 이들을 아름다운 공주들로 바꾸어 내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러자 자연의 모든 것들이 훨씬 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밤이면 우리는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았고 위대한 정신들을 만나곤 했다."

 

 

시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시는 이야기를 갖고 있고 이야기로의 번역이 가능하며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한다. 시 한 편이 응축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긴 영화 한 편이 나올 수도 있다. 시의 1분은 영화의 한 시간, 산문의 두 시간이다. .... 스탠리 쿠니츠 <핼리 혜성>

 

 

종교적 관용의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개인의 불관용보다는 조직, 국가, 체제에 의한 불관용이 더 무섭과 파괴적이다. 그렇다고 개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결국 자기 사회의 관용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분법 사라지는 곳에 낙원이 있다." - 롤랑 바르트

 

 

가치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이 인간의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하는 문화적 선택이며, 정의로운 사회의 길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점점 더 깊게 인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 타자의 이해와 존중을 가르치는 쪽.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 시달릴 때에도 사람들이 시집 한 권, 음반 하나, 한 장의 그림에서 '행복'을 찾아내어 삶의 위기를 관리할 수 있게 하는 이상한 힘을 갖고 있다. 배고프고 병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문화가 무슨 소용인가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도 문화는 필요하다.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면 그 역도 진리다. 건강한 정신이 또한 건강한 몸을 만들므로.

 

 

문학에서 본 인간은 무엇보다도 '이야기 하는 동물'이다. 그는 이야기를 만들고, 듣고, 이야기로 세계를 이해하고 인간과 인간의 , 그리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파악한다. 아니, 이야기는 그의 '세계'이다. 그는 이야기의 우주속에 태어나고 이야기로 성장하고 이야기 속에 살다가 이야기를 남기고 죽는다. 죽어서도 그는 이야기 속에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우리 속담은 말한다. '이름'은 어떤 문장 속에 들어가 주어 노릇을 할 때에만 제대로 이름이 된다. 그 문장이 '이야기'다. 이야기를 빼면 인간은 그냥 원숭이다.

 

 

인간세계에서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불평등을 어떻게 더 큰 사회적 평등 속으로 녹여내고 불평등이 부분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조건들을 마련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강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한 사회의 문화적 역량은 '성찰과 반성의 능력'이다. 그러나 문화의 이 역량은 위풍당당한 시장주의와 오락주의의 행진 앞에 거의 빈사지경이 되어 있다. 문화는 문화의 학살을 가리켜 '이것이 문화'라 말하고 있다.

 

 

관용의 문화 없이는 어떤 문명도 공존의 정의를 실현시킬 윤리적 토대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패권주의자들에게 차이의 존중, 사랑, 관용이라니, 얼마나 허약해 보이는 제안이가! '타자를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체제'로서의 '관용'

 

 

한번은 석가세존이 여행길에 강을 건널 일이 있어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근방의 도인이 하나 나타나 석존에게 도전한다. "나는 25년 수도 끝에 배 없이도 물위를 걸어 강 건너는 법을 터득했다. 당신은 25년 설법 끝에 이만한 강도 건너질 못하는가?" 석존이 껄껄 웃고 왈, 배 타고 건너면 될 것을 그까짓 강 건너는 기술 하나 터득하자고 25년 세월을 보냈다니 참 안됐소 그려. 도인은 대꾸를 못하고 달아났다.

스님의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오래된 무덤 속처럼 텅텅 빈 주머니 안의 공허를 맨손으로 만나기 위해서다. 제로를 애무하는 것은 불교적 구도의 핵심이다.

인간의 행복을 욕망의 규모와 소유의 크기로 계산해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행복 모형이라면 붓다가 제시한 것은 욕망의 축소, 단절, 무소유의 모형이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소유의 위력이 한층 커진 것은 소유가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유까지도 확대해준다는 산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술로 따지면 자유는 지갑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러나 붓다적 자유의 모형은 돈지갑과 관계없고 두둑한 지갑과는 더더구나 관계없다. 지갑의 노예는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니다. 소유의 즐거움을 내세우는 자본주의 행복론 앞에서 소중하게도 정확히 그 반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이 붓다의 행복론이자 자유론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욕망과 소유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

 

 

오디세우스의 선택은 유한성과 일시성에서 오히려 인간존재의 품위를 발견하려는 자의 감성을 보여준다. ... 인간이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는 생각이 같지 않다. 그러나 당신의 말할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나는 내 목이라도 내놓을 용의가 있다" - 볼테르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그러나 그가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 그가 천사 앞에 내놓을 위대한 자랑거리는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그 순간성의 조건과 유한성의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순간>

 

 

기억과 사유, 상상과 표현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독특한 능력들의 목록을 대표한다. 인간이 천사를 향해 자랑할 것도 그 네 가지 능력으로 집약된다. 인간은 기억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존재이다. 그 네 가지 능력의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다. 기억은 수많은 구멍들을 갖고 있고 사유는 불안하다. 상상은 기억과 사유의 한계를 확장하지만 유한한 경험의 울타리를 아주 벗어나지는 못하다. 표현의 형식과 내용도 시간성에 종속된다. 그러나 기억, 사유, 상상, 표현의 인간적 시도들은 그것들이 지닌 한계 때문에 무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들만이 가지는 순간적 아름다움의 광채를 포착하고 표현하기 때문에 위대하다. 워즈워스의 "5월의 꽃", 푸시킨이 노래한 "해질녘 다리 위의 소녀와 잠자리떼", 괴테가 본 "마리앤바드의 위대한 가을 숲",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겨울 숲" - 이런 것들은 그 순간성 때문에 아름답다. ... 

인간의 뇌는 애초부터 책 읽으라고 설계된 것이 아니다. 문자가 등장한 역사는 5000년, 지금 같은 형태의 종이인쇄 책의 역사는 600년에 불과하다. 자연선택이 사냥과 채집 같은, 인간종의 생존에 필요한 다른 여러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설계한 뇌 건축물의 부수적 파생 효과 가운데 하나가 책을 쓰고 책을 읽는 기능이다. 말하자면 그 능력은 덤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덤'이 참으로 중요하다.

 

 

구미 각국이 리터러시 강화 정책을 펴는 데는 '잘 읽고 잘 쓰는 국민' 이야말로 다른 어떤 자원이나 능력보다도 한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을 위한 '기본적인 힘'이라는 인식과 판단이 깔려 있다.

  • 잘 읽고 잘 쓰는 능력은 시민의 경제력 제고와 자립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리터러시는 모든 분야에서의 정보 접근, 수집, 판단, 활용의 기본이며 이 기본적 능력 없이는 기회 창출, 자립, 삶의 질 향상이 불가능하다.

  • 잘 읽고 잘 쓰는 시민의 리터러시 능력 없이는 민주주의의 유지와 발전이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정보를 가진 시민, 잘 판단하는 시민, 참여하는 시민을 요구한다.

  • 매체문화 환경이 다양해지면서 활자매체와 책 읽기로부터 이탈하는 인구가 늘고 있다. 이는 사회적 위기이다. 상상력, 비판력, 사고력의 중심 매체인 책의 힘이 약화되면 사회는 창조성 고갈의 위기를 맞는다. 정책적 대응이 필요하다.

 

"당신은 이 지구에 왜 왔는가?", 박진영은 "춤추러 왔다."고 대답한다.

나는 당신의 신념 작심이 어떤 내용의 것일지 알지 못한다. 당신에게는 일자리가 필요할지 모르고 더 많은 돈, 더 많은 사랑이, 더 큰 행복과 빛나는 성취가 필요할지 모른다. 나는 당신의 작심 내용을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단 한 가지, 나는 당신의 신년 결의가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그 작심이 당신의 '삶의 품위'와 '삶의 기쁨'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으면 싶다. "나는 이 지구에 왜 왔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비록 부대끼며 살아도 그 삶이 지녀야 할 품위를 생각하게 하고 "춤추러 왔다'는 대답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서 살건 간에 그 삶에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요청의 절실함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한다. 몸으로 추는 춤만이 춤의 모두가 아니다. 몸의 춤이 있다면 마음의 춤, 영혼의 춤도 있다. 우리에게는 몸의 춤과 마음의 춤이 모두 필요하다.

우리가 영혼의 춤을 가장 잘 출 수 있는 것은 타인의 마음, 타인의 정신, 타인의 영혼을 만날 때이다. 이 만남의 소중한 순간을 제공하는 것이 '책 읽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두 영혼의 만남이 일으키는 신명나는 춤판, 마음의 공동체가 벌이는 즐거운 무도회, 인간이 자기 존재를 들어올리고 확장하는 사계절 축제이다. 거기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따로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가 삶의 품위를 지키고 삶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박한,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이다.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실리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경쟁력, 곧 인격과 가치의 형성이라는 소득이다. 사회, 기업, 조직은 인격체이기 어려운 반면 개인은 인격체이고자 하며, 이 인격 존재는 그의 삶을 안내하고 지탱할 기본 가치와 원칙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원칙들을 부단히 만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책 읽기의 즐거움이다. 인격 존재를 지향하는 개인과 비인격적 사회 조직 사이에는 가치 충돌이 자주 발생한다.

이런 경우의 위기관리 능력도 근본적으로 인격에서 나온다. 물론 돈을 벌어야 살지만 그렇다고 "돈 되는 일, 돈 버는 데 필요한 일이며 모두 오케이"라는 지침만으로 행동 원칙을 삼는 것은 아주 파괴적이다. 성적과 상장을 돈으로 거래하기도 한다는 최근의 교육 현장 실정은 몰가치적 돈지상주의가 어떻게 사회를 망가뜨리는지 잘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대면하는 최대의 딜레마는 "인간 생존의 절대 모태인 자연을 망가뜨리지 않고서는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역설적 곤경으로 표현된다. 오비디우스의 신화 시집 <변신>에는 먹고 먹고 또 먹어도 허기를 채울 수 없고 마침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몸을 뜯어먹는 에뤼식톤이라는 걸신들린 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현대인의 초상은 제 몸 뜯어먹고 소멸해가는 에뤼식톤의 형상과 극히 유사하다. 현대인은 고대인에 비해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바로 그 풍요 때문에 더 많이 죽어가고 그 풍요 때문에 더 가난해지고 더 고통 받아야 하는 역설적 존재가 되어 있다.

 

 

몸의 건강을 위해 단련이 필요하듯이 정신 근육도 단련이 필요하다. 독서가 중요한 것은 정신의 확장과 근육 키우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단기적(이를테면 취업, 자격증, 시험 같은) 목표 때문에 관련된 책을 읽는 이른바 목적성 독서는 '사냥'과 흡사하다. 반면, 특정의 정보 사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비목적성 독서는 '춤'과 같은 데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비목적성 독서의 경우에도 '마음 가꾸기'라는 목적이 없지 않다. 그러나 마음 가꾸기는 단기적 일시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정보 사냥과 다르다. 정보 사냥은 목표가 달성되면 그만두어도 되는 반면, 마음 가꾸기는 단기간에 성취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사냥과 달리, 이 경우의 독서행위는 정신을 자극하고 마음을 확장하는 일, 곧 '혼의 즐거운  춤' 같은 것이다. 이 춤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생 추어야 하는 춤이다.

 

 

생택쥐페리의 말처럼 인간은 장애물에 자신을 견주어보았을 때에만 자기를 발견한다.

 

 

도움을 주기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고 돈만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도움받는 사람들이 자구와 자립의 의지를 잃고 외부 지원에만 의존하게 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파탄이며, 이런 파탄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 모든 종류의 지원사업에 따라붙는 어두은 그늘이다. 그 그늘 속에서는 자립과 자활의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다. 노약자 등 절대적 지원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립, 자활, 자치의 능력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 모든 복지사업과 지원사업이 궁극적 목표다. 

 

 

사람이 산을 만나면 위대한 일이 벌어진다. - 윌리엄 블레이크

 

 

아바스 카이로스타미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the friend's home>...

결코 기발하지도 특이하지도 않은 소재. 보통의 작가라면 애당초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 '선택의 비범성'이다. 보통의 작가와 보통 이상의 작가를 나누는 분계선은 거기 있다. 보통 이상의 작가에게 원칙상 '시시한 소재'란 없다. 보통의 작가가 무슨 기발한 소재를 찾아 헤매고 다닐 때 보통 이상의 작가는 모든 소재로부터 진지한 도전을 발견한다. 그러나 선택의 비범성만으로 보통 이상의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시시해 보이는 소재를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에 보통 이상의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소재를 가지고 결코 시시하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보통 이상의 작가이다.

 

 

작은 파편 속에 전체를 집약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고 예술의 꿈이다. 그것은 조그만 캡슐 안에 우주를 잡아넣는 일과도 같다. 짧고 범박한 단편적 에피소드 안에 성장의 큰 이야기를 담아내고 보여준다는 것은 보통 솜씨가 아니다. 이것이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예술'이 되는 모멘트이다.

 

 

사회통합이라는 것이 결국은 사람과 사람을 묶어주는 것이랄 때, 그 묶어주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며 그 관계를 지탱해주는 공유의 가치와 연결의 끈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관계나 연결의 끈이 중요한 시대가 아니다. 이 시대에 최고로 중요한 것은 개인소득이거나 국민소득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에 이르고 3만 달러에 이르면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망상이 공공정책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소득 수준과 사회통합 사이에는 사실상 별 관계가 없고 소득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도 큰 관계가 없다. 소득 수준 높아지는 것 자체를 놓고 왈가왈부할 일은 절대로 아니지만 소득 수준의 높이로 사회가 통합되고 사람들도 더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망상도 그런 망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근복적으로 '문학적'인 것은 이처럼 우리들 누구나가 다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작자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어디 먼 곳에 따로 있지 않고 문학인들만이 문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 속에 있고 삶 그 자체이다. 요란스레 자서전을 남기고 누가 전기를 써주지 않아도 인간은 자기 자서전의 주인공이고 자기 전기의 작자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한 편의 자서전을 쓰는 일이며 스스로 플롯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미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책임지는 일이다. ...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방향과 목표를 주는 모든 가치 체계, 모든 믿음의 체계, 모든 행복의 지침은 근본적으로 서사적이며 서사적 이야기의 틀이다. 그 틀은 "이것이 가치 있는 삶이고 삶의 목표이며 의미이다. 이렇게 살아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때로 우리는 어떤 하나의 틀 아닌 두 개, 세 개의 틀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게 몇 개이건 같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이야기의 틀 속에서 갈등과 모순을 조화시키며 산다.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산다. 사회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사회도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 있지 않다. 모든 사회는 몇 개의 거대한 이야기 틀을 갖고 있고 그것들에 의해 지탱된다.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사회적 삶 전체가 '문학적'이다.

 

 

선진사회에서도 아직 빈곤은 남아 있지만, 그것은 굶주림이 죽음의 원인이 되는 그런 정도의 절대 빈곤이라기보다는 분배의 편차에서 발생하는 상대적 빈곤이다. 상대적 결핍감도 고통의 한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이 느끼는 고통은 물질적 빈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위기, 의미의 위기, 가치의 위기에서 더 많이 초래된다.

잘 먹고 잘 살기는 하는데 그 삶이 인간의 내부에 큰 구멍을 내고 있을 때, 그리고 그 구멍을 돈으로 메울 방도가 없어 보일 때, 인간은 정신의 위기를 경험한다. 이 경험은 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다. 물질적 삶의 안정과 풍요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할 때,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과 "내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끊잆없이 제기될 때, 사람은 의미의 위기를 경험한다.

 

 

잘못된 것을 용인하고 불의를 허용하는 자는 불가피하게 그 불의의 공범자이다. - 마틴 루터 킹

 

 

좋은 삶이란 존 스튜어트 밀이 잘 말했듯이 "선택하는 삶"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보다는 이런저런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좋은 삶, 품위 있는 삶이다.

 

 

선택은 반드시 '다양성'의 가치를 전제한다. 문화 소외는 다양성을 거부하고 궁핍을 선택한다. 쏠림 현상도 다양성을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궁핍의 선택이다. 다양성은 문화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쏠림 현상이건 문화적 소외이건 간에 궁핍의 선택이 강화되는 사회에서 문화는 위기 상황에 빠진다.

 

 

인간이 가진 많은 재주들 중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한 것은 '무엇이건 먹어치울 수 있는 능력'이다.

동물들은 식단을 바꾸지 못한다. 생태계 변화가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그 변화가 그들을 절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외다. 환경이 바뀌어도 거기 얼른 적응해서 거의 자유자재로 식단을 바꾸고 먹거리 종류를 무한대로 넓혀 생존을 유지해온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문명사는 먹거리 확장의 역사다. 먹을 수 없어 보였던 것도 삶아먹고 구워먹고 튀겨먹는 인간의 화려한 조리 기술에 걸리면 모두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둔갑한다. 

탐욕은 사회적으로 전염되는 질병이다. "남들은 다 먹는데 나는 왜 못 먹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시기, 질투, 선망의 포로가 되고 '못 먹는 자'는 불출, 무능, 도태의 존재로 강등된다. 욕망이라는 것이 빠지면 인간의 삶은 동력을 상실할지 모른다. 그러나 욕망과 탐욕은 그 차원이 다르다. 사회 전체가 탐욕과 선망의 질병에 걸리면 인간은 존재의 품위와 광채를 잃고 거대한 입과 밥통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딜레마는 우리가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지금의 세계 경제체제가 정확히 탐욕과 선망의 체제라는 점이다. 탐욕과 선망을 증폭시키지 않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경제의 비극적 결함이며 그 결함의 체제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현대적 생존의 딜레마다. 우리가 이 딜레마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이 시대를 어떻게 살까에 대한 지혜는 인간을 살아남게 한 위대한 어떤 능력이 동시에 현대적 난국의 기원이기도 하다는 아이러니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이 우주의 한 우연한 생명 형식일 수 있지만, 그 때문에 그의 운명이 전적으로 우연에 내맡겨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축구 경기가 재미있는 것은 그게 반드시 우연의 게임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연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라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보를 판단하는 비판적 능력,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지식을 생산하는 '생각의 능력'입니다. 사물과 현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힘, 기존 지식의 틀을 넘어 엉뚱한 생각을 해보는 상상력, 남들이 던지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모색하는 지적 모험, 인간과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능력 - 이런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넘어선 곳에서 작용하는 생각의 능력입니다.

지식만능주의는 지식이란 것이 사과나무에 사과 달리듯 거기 어딘가에 달려 있을 것이므로 내가 가서 따기만 하면 된다는 착각과 함께 무슨 산수 문제 풀듯 '정답 찾기'의 환상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갑니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정답 찾는 훈련에 몰두하도록 훈육됩니다. 그래서 정답이 없는 문제, 판단과 해석과 의미를 요구하는 문제를 만나면 망연자실 기절하지요.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는 지식만이 아니라 새로운 눈, 상상력, 모험심, 넓은 이해력이 필요합니다.

 

 

책은 되레 우리 시대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 되었고 책 읽는 행위는 우리 시대의 고유한 문화적 활동이 되었습니다. 이 문화 자산과 문화행위의 특징은 그것들이 돈이나 권력보다는 '가치의 추구 행위'를 대표하고 '의미를 만드는 행위'를 대표한다는 점입니다.

가치와 의미? 그래요. 지금은 돈이 가치의 전부를 표현하고 의미의 전부를 만드는 시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지금도 중요한 본질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소중한 의미는 돈으로 생산되지 않습니다. 한 예로, 사회봉사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돈을 받지 않고, 돈을 주면 버럭 화를 냅니다. 봉사활동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라는 직관을 그들은 갖고 있어요.

이런 가치 추구가 사실은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행복은 "내가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하고 쫓아다니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가치를 추구하자. 그러면 행복이란 녀석이 웃으며 따라오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 자기 삶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때는 자살을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입니다. 무가치와 무의미 상태에서는 그가 전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단순한 교양 쌓기를 넘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행위라는 생각, 이 행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가장 확실하고 돈 적게 드는 길의 하나라는 자신감, 자기 변화와 도덕적 상승이 독서를 통해 가장 잘 이루어진다는 경험 - 이런 자신감과 경험이 사회적 지혜가 되어 널러 퍼졌으면 합니다.

사회에 물질적 제도적 안전망이 필요하다면, 사람들의 정신적 심리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필요합니다. 독서는 그런 심리적 안전망 구축의 한 방법입니다. 독서를 통해 느티나무처럼 내부가 튼튼해진 사람은 웬만한 일에 허둥대지 않고 바람 앞에 우왕좌왕하지 않아요. 위기를 관리할 내공이 생겨 있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죠. 독서를 통해 만들어진 모임, 도서관, 친목클럽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 친밀감, 배려, 돌봄, 소통의 기회를 증진시켜 소통의 공동체를 만듭니다. '사회자본'이라 불리는 무형의 자본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도서관 운동을 하면서 도서관이 사회 안전망의 하나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폈어요. 도소관이라는 인프라만이 아니라 그 토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마음의 공동체'도 안전망이라는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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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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