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주의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보고 낙천주의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본다.' - 에필로그

 

시장을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목소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시장은 어느 한 방향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처럼 변동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위기 속 기회를 찾기위해서는 불안감이나 탐욕 같은 감정을 통제한 상태에서 시장을 객관적으로 직시해야 한다.

 

 

[본문발췌]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 마크 트웨인

 

 

정보량이 급증하면서 하루에 쏟아지는 정보조차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필요한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구별하거나 그 경중을 따지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꼭 필요한 정보인 '시그널'과 이를 방해하는 '노이즈'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확증편향'에 빠지면,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보를 편시해서 받아들이게 된다. 경제시스템 속에서는 언제나 뜻밖의 반전이 찾아올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방향이든 확증편향에 빠지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버블의 광기는 파국으로 치닫기 직전에 가장 강렬하게 위를 유혹한다.

 

 

가짜 시그널을 가려내는 4가지 원칙

  • 우리의 눈을 가리는 탐욕에서 벗어나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하고 돈을 벌려면 적절한 탐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방향이 잘못된 탐욕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특히 주식 같은 위험 상품에 투자할 때 아직 실현되지 않은 수익만을 상상하면서 투자해서는 안 된다. 탐욕에 눈이 멀면 시장에서 보내는 최악의 위험 신호조차 아전인수 격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 확증편향에 빠지지 마라.
  • 최악의 순간에도 공포에 사로잡히지 마라. ... 최고의 투자 기회는 남들이 모두 포기하거나 절망한 최악의 순간에 찾아온다.
  • 항상 플랜 B를 준비하라. ... 경제는 수많은 상호작용 속에서 비선형으로 움직이는데다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리스크, 즉 블랙스완Black swan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돌발 변수에도 무너지지 않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해두거나 예측하지 못한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플랜 B'를 항상 준비해둔다.

 

장단기 금리 차이가 줄어드는 시점보다 바닥을 치고 다시 반등하는 시점에 위기나 불황이 찾아올 때도 많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부채 비율이 급격히 상승하는 것은 매우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위기 시그널이다. 

 

 

물론 경제 위기나 불황이 찾아왔을 때 일시적인 경기 부양책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위기가 반복될 때마다 근본원인을 해소하지 않고 점점 더 강력한 부양책으로 당장의 위기만 모면하려고 하면, 그다음 위기에는 점점 더 큰 빚더미가 필요하게 된다. 결국엔 거대한 산불이 나기 직전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처럼 아주 작은 자극에도 괴멸하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버블은 오를 때는 한없이 계속 치솟아 오를 것 같지만 일단 하락하면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는 특성이 있다. 더이상 비싸게 사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지금의 비싼 부동산 가격은 더 유지되기 어렵다. 버블은 꺽이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버블 붕괴의 초입에는 마치 일시적인 가격 조정처럼 보여 뒤늦게라도 버블에 올라타야 한다는 강렬한 유혹이 생긴다. 이런 전환의 시기에 자산 가격이 바로 직전보다 싸졌다는 단순한 판단으로 자산을 사들였다가는 자칫 큰 낭패를 보기 쉽다.

 

 

신흥국이나 저개발 국가의 통화 가치가 비정상적으로 오른 경우에는 위험 시그널로 보고 그 나라에 대한 투자를 보다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환율 위험을 피하려면 물가 상승률이 높은 나라를 주의한다. 물가 상승률이 높으면 그 나라의 돈 가치가 하락한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나라 통화 가치가 하락할 가능성이 커진다.

 

 

지금 중국의 기업 부채는 GDP 대비 무려 160%나 된다. 미국의 GDP 대비 기업 부채 비율이 70%인 점이나 독일이 50%인 점을 감안하면 중국의 기업 부채 비율은 높아도 너무나 높다. 만일 중국의 경제 성장률이 추락하고 더 이상 좀비기업을 지원할 여력이 없어지면 중국의 좀비기업은 단순히 기업의 위기가 아니라 금융시스템 전반으로 확산되어 중국 경제 전체에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다.

 

 

세계 주요 국가에서 인구구조가 악화되는 것은 2020년 이후 세계 경제 성장률을 끌어내리고 자산 가격을 위협하는 심각한 장해 요인이 될 것이다. 각국의 생산연령인구 비중의 감소와 고령화 속도 등 인구구조의 변화를 중요한 시그널로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으로 시작되는 2020년에는 다음의 3가지 사항을 반드시 명심하고 실천해야 한다. 

  • 첫째, 내일은 결코 오늘과 같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나다. 이 책의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경제 위기도 생명을 갖고 진화하는 바이러스처럼 끊임없이 형태를 변화하고 독성을 키워나간다. 과거에 경험했던 형태의 위기에만 대비하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준비해서는 안 된다. 같은 이유로 과거의 포트폴리오 전략이 앞으로도 성공할 것이라고 믿어서도 안 된다. 지난 10년 미국의 호황기 동안 성공했던 투자 전략을 그대로 따라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 성공했던 투자 방법이라고 이를 맹신해서도 안 된다. 과거의 것은 참고만 할 뿐 새로운 경제 시그널을 살피면서 끊임없이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
  • 둘째, 세계를 넓고 깊게 바라보며 투자와 사업 전략을 짜야 한다. 세계화 이후 투자와 사업의 무대는 전 세계로 확장된 지 오래며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만 바라보면서 미래를 대비했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면 좀 더 입체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 셋째, 최악의 공포가 시작되면 그 순간 공포를 담아라. 최대의 위기가 최고의 기회가 되듯이 남들이 모두 떠날 때가 가장 최고의 투자 기회이며 동시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위기는 기존의 강자에게 유리하던 경제 환경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도전자에게 놀라운 역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불황이 깊어질수록 영원히 경제가 회복되지 않을 것처럼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인류가 계속되는 한 반드시 경제는 다시 회복기를 맞이한다. 새로운 혁신의 물결을 일으킬 6차 파동, 혹은 4차 산업혁명도 언젠가는 반드시 시작될 것이다. 그 기회를 잡으려면 어두운 심연의 밑바닥에서 공포를 담아 희망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075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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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거나, 크고 화려함보다 작고 소박한 것을 선택하거나, 어렵고 힘든 일에 앞장서서 나가거나, 절제와 침묵을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용기에는 행동이 수반됩니다.

 

 

용기(勇氣), 명사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

[비슷한 말] 용, 의기, 기백

[반대어] 비겁, 겁

 

(네이버 영어사전) courage, nerve, (informal) guts, (Am, inf) spunk; (용기 있는 행동) bravery

용기가 있다 have the courage

 

 

[글과 책 속에 쓰인 '용기'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최갑수,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 - 파울로 코엘료

 

 

이정우 외,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

진리란 모든 것들을 품고 용납하며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야 보인다는 것이다. 진실을 마주하기 어려운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로부터의 탈출은 타인을 용납하는 용기를 필요로 하며, 결국 사랑을 품을 때에야 가능하다.

 

 

김홍신, <인생사용설명서>

색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검거나 푸르거나 붉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세상을 보려면 색안경을 벗어던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두려움은 나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공포에서 오기에 순응하고 따르며 복종하게 된다. 아직도 많은 국가들에서는 두려움을 국가 통치의 기술로 사용한다. 종교 역시 지옥 등의 공포를 팔고 있다. 회사 역시 노조에게는 공멸이란 공포를, 개인에게는 해고란 공포를 경영 기술로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낙오되면 죽는다는 두려움은 사람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다.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또 다른 거대한 힘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두려움이 스스로를 위한 이기심의 표상이라면 사랑은 남을 위한 이타심의 표상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남에 대한 사랑의 발현은 오히려 두려움을 이겨낸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나를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랑이란 외투를 입으면 두려움은 허상이란 것을 알게 된다. 용기가 두려움을 이기는 순간, 두려움은 실재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사실 두려움이란 불확실성이 증가되고 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불확실성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를 통제하겠다는 용기를 가지면 두려움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사랑하다 헤어질까봐 두려워하고 꿈에서 추락할까봐 두려워하며 비난과 조롱에 휩싸일까 두려워한다. 이 모두는 사랑과 용기만 있으면 무엇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 사는 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고 죽는 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에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두려움을 버리지 못한다면 두려움과 맞설 용기를 키우면 된다.

 

성공하면 추억이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경험이 될 뿐이다. 사람은 능력이 없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 실패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다스릴 줄 알면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 자신감이 가득하고 걸음이 꼿꼿하며 생각과 말에 힘이 생긴다. 두려움이 다시 몰려오더라도 사랑의 힘을 믿고 당당하면 언제든 두려움과 공포를 발아래 둘 수 있다. 매일매일 성실함과 열정적인 노력을 통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사랑과 용기는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열쇠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길 원한다면 노을을 보기 위해 이미 해가 진 서쪽으로 달려나가서라도 바라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내 안의 거인은 나만 깨울 수 있다. 그 아무리 위대한 선생도 내 안에 거인이 있음을 알려줄 뿐, 그를 깨어낼 수 없다. 돈키호테는 말했다.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저 하늘의 별을 잡자.' 그렇다. 돈키호테를 따르라. 그것이 거인을 불러내는 최고의 방법이다.

 

 

왕가리 마타이, <지구를 가꾼다는 것에 대하여>

공정해지려면,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맞설 용기와 힘을 얻기 위해 필요한 영적 자원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불합리한 일이 저질러졌을 때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할 정도로 높은 의식 수준을 갖는 게 아닐까. 그 의식은 우리에게 어디에도 압도당하지 않을 의지를 줄 수 있다. 우리는 강인하게 행동에 나설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점점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깨어나는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다.

 

 

인간에게 반드시 실패를 승인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 이소룡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우리는 이제 이런 것들과 용기 있게 이별해야 한다. 작지만 삶의 변화와 혁명은 일상에서 '익숙함'과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부디 익숙한 생각과 습관에서 탈출하라. 그리고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것들에 눈을 돌리고 집중하라. 감각의 회복은 거기에서 시작한다. 흰 구름 걷히면 그대로가 청산이다. 오염된 생각과 습관의 힘을 걷어 내면 그대로가 생생한 감각의 꽃이 피어난다.

 

길은 내 삶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결단과 노력에서 열린다. 진정한 출가는 용기 있는 '거부'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린다. -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김예슬 선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아니 거부한다.'

 

 

레이 커즈와일, <마음의 탄생>

지적인 바보는 어떤 것이든 더 크고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작고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 아인슈타인

 

 

오구리 히로시, <수학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

진보란 경험을 쌓는 것으로, 보다 정확한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정보를 얻었을 때 이제까지의 판단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유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베이즈의 정리는 이런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과 흐름을 쫓아다니는 사람은 많은 돈을 낭비해가며 아주 긴장되고 획일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와 반대로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돈을 절약하고 자주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규격화되고 동질화된 시대에 사치가 아니겠는가.

 

 

라 로슈푸코, <잠언과 성찰>

완벽한 용기란, 모든 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을,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데서 해치우는 것을 말한다.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우리에게 뭔가 시도할 용기가 없다면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니?

 

 

김연수, <소설가의 일>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계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이 병은 낫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이 불안을 모두 떠안겠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오지 않는 것인지 한 번 더 알아보겠다. 이게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가 아닐까. 자신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

 

어떤 사람을 둘러싼 세계에서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를 제거하면 그는 무기력해진다. 그렇다면 이건 우리 인생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사춘기가 지나면서 우리 인생도 조금씩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니까.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라거나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잘 살지는 못한다는 걸 우리는 깨달아간다. 해서 무기력은 현대인의 기본적 소양이다. 그런 무기력의 양대 산맥이 바로 현대 연애와 암 선고다. 내 뜻과 무관하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질병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연인을 견디는 일이 현대소설의 본질이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결국 현대소설의 윤리는 불안을 이겨내고 타자와 공존하는 그 용기에 있는 셈이다. 이 용기는 두번째 그룹의 개들과 마찬가지의 처지이면서도, 그러니까 모두들 안 된다고 말하고, 또 자신부터가 여러 번 실패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뭐라도 해보겠다고 나설 때 비롯한다. 용기는 동사와 결합할 때만 유효하다. 제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용기가 될 수 없다.

 

 

야마시타 히데코, 오노코로 신페이, <소중한 것은 모두 일상 속에 있다>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 미지의 체험을 추구하는 것. 여기에는 당연히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의 원천은 대체 무엇일까요? 바로 호기심입니다. 알고 싶다, 보고 싶다, 맛보고 싶다... 이런 본능과도 비슷한 욕구가 호기심입니다. 용기란 호기심, 호기심은 생명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므로 호기심이 넘칠수록, 호기심으로 가득할수록, 당신은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놓아버려야 합니다. 전부 끌어안고 이것도 저것도 다 가둬두고 있으면 당신의 존재는 추해집니다. 존재의 빛이 탁해집니다. 지금 선택하고 골라야 합니다. 반드시 버려야만 하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용기가 있어야 비로소 스스로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가 됩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대변동>

개인이든 국가든 압력을 받으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정직하고 자세하게 조사해야 한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어떤 부분이 새로운 환경에서 제대로 기능하며 적정성을 유지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런 부분은 당연히 보존하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찾아내는 용기도 필요하다.

 

 

최인철, <굿 라이프>

일(Work)을 통해 의미 있는 성취를 경험하려는 행위는 실존적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의미 있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진하느느 삶,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도전 앞에서 실망하고 좌절하지만 결국에는 이겨내려는 용기와 기백, 그리고 그 일이 자신만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소명을 발견하는 기쁨. 이런 목표가 우리를 굿 라이프로 인도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각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를 대폭 축소하게 만든다.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아주 친밀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적 네트워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의 수는 줄이는 대신 소수의 사람과의 깊이와 빈도를 늘린다. 굳이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과감히 포기한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 만나면 기분 나쁜 사람들, 꼭 나갈 필요가 없는 모임들에 대한 의무감이 사라진다. 이런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것이 인생에 큰 의미가 없다는 깨달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무릇 미움받을 용기란 나이 들면 누구에게나 생기는 법이다.

 

유연한 삶이 곧 타협하는 삶은 아니다. 삶의 복잡성에 대한 겸허한 인식이고, 생각의 다양성에 대한 쿨하 인정이며, 자신의 한계에 대한 용기 있는 고백이다. 확신을 갖되 타인에게 강요하지 안흔 삶을 사는 것이 품격이 있는 삶이다. 아무리 옳은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친 확신으로 타인을 몰아붙이는 것은 타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상대의 행복을 위협하는 행위다.

 

 

나루케 마코토, <교양고전>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라.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사실'이다. 용기를 갖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보여주면 주위 사람들도 그가 지닌 그 이상의 매력과 진실을 인정해준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수업>

'신이시여, 제게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평화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신영복, <처음처럼>

[아픔과 기쁨의 교직] 우리는 아픔과 기쁨으로 뜨개질한 의복을 입고 저마다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환희와 비탄, 빛과 그림자 이 둘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입니다.

 

[새해] 세모(歲暮)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나는 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자르고, 무엇을 잊으며, 무엇을 간직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장 도르메송,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만물 속에는, 그리고 만물의 각 조각들 속에는 악이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어느곳에서보다도, 악은 우선 우리 안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시간 속에 존재하는 악에 악을 더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있어서, 용기에 있어서, 진리의 추구에 있어서, 선에 있어서 인간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그리고 추함과, 죄악과, 거짓과, 악에 있어서 인간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인간은 기적이자 동시에 오점이며, 인간은 과오이자 용서이며, 인간은 비천함에 있어서 걸출한 것처럼 위대함에 있어서도 탁월하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적게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버려야 하는데 작은 것 하나 버리는 데도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선택이며 선택은 골라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을 버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편견과 억압적인 체제에 맞서 싸우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무지를 인정하고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는 데는 훨씬 큰 용기가 필요하다. 세속적인 교육은 우리에게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새로운 증거를 찾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더라도 우리의 의견을 의심하고 다시 검증하기를 겁내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미지의 사실을 두려워하고 모든 질문에 명확한 답을 바란다. 미지의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 그 어떤 폭군보다 더 우리를 마비시킬 수 있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일련의 절대적인 해답을 믿지 않으면 인간 사회는 와해될 거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사실은 기꺼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곤란한 질문을 제기한 용기 있는 사람들의 사회가, 모든 구성원이 단일한 해답을 무조건 수용해야만 했던 사회보다 더 번영했을 뿐만 아니라 더 평화로웠다. 자신이 믿는 진실을 잃을까 겁내는 사람은 몇 가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한 사람보다 더 폭력적인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답할 수 없는 질문이 질문을 불허하는 답보다 훨씬 낫다.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문자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시간은 분할되고 또다시 세분화할 수 있는 닫힌 공간 혹은 회화적 공간의 성격을 지닐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시간도 공간처럼 채울 수 있는 것이 된다. "내 스케줄은 꽉 찼다." 마찬가지로 시간은 텅 빌 수도 있다. "나는 다음 달에는 일주일이 빈다." 그리고 세바스티안 데 그라치아Sebastian de Grazia가 <시간, 일 그리고 여가에 관하여 Of Time, Work and Leisure>에서 보여 준 것처럼, 세상의 모든 자유 시간이 곧 여가는 아니다. 왜냐하면 여가는 "일"을 구성하는 노동의 분할과 "꽉찬 시간"이나 "빈 시간"을 만들어 내는 시간의 분할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가란 용기로서의 시간 개념을 배제한다. 시간이 일단 기계적으로 혹은 시각적으로 닫혀서 분할되고 채워지면, 시간을 더욱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이때 시간은 파킨슨이 그의 유명한 "파킨슨의 법칙"에서 보여 준 바와 같이, 노동을 절약하는 기계로 변형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롤프 포츠, <Vagabonding, 여행의 기술>

배거본딩을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소위 확실하다는 것을 움켜잡은 손을 살짝 놓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배거본딩은 여행을 삶에서 더 적절한 때로 미루지 않는 것이다. 배거본딩은 상황이 운명을 결정해주길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상황을 조절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마시모 피글리우치,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덕을 네 측면으로 나눈 소크라테스의 분류 방식을 채택했다. 그들은 그 네 측면들이 네 개의 밀접하게 상호 연결된 품성 특질들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지혜(실천적인), 용기, 절제, 정의다. 실천적 지혜는 에우다이모니아, 다시 말해 (윤리적으로) 선한 삶을 개선하는 결정들을 내릴 수 있게 해준다. 용기는 신체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더 넓게 봐서 도덕적인 측면을 가리킬 수도 있다. 절제는 욕망과 행위를 통제함으로써 과도한 결과를 낳지 않게 해준다. 소크라테스와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정의란 사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느냐에 관한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을 존엄하고 공정하게 대우하는 실천을 가리킨다. 스토아적인(그리고 소크라테스적인) 덕 개념의 한 가지 결정적인 특징은 상이한 덕들이 독자적으로 실천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스토아-소크라테스적인 의미에 따르면 절제하지 않으면서 용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전투에서는 용기를 발휘하지만 평소에는 수시로 과음을 하거나 부절제한 생활을 하더라고 말해도 우리끼리는 완벽하게 의미가 통하지만, 그래도 스토아주의자들이 볼 때 그 사람은 덕 있는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덕이란 전부 다가 아니면 하나도 못 가져가는 묶음상품이기 때문이다. 

 

용기: 외적 혹은 내적 반대에 직면하여 목표 성취를 위한 의지 행사에 수반되는 정서적인 힘. 이의 사레들에는 용맹성, 인내력, 진정성(정직성) 등이 포함된다.

 

일단 선출되고 나면 그 사람은 분명 더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풍경을 상대해야하고 그 풍경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방향성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이 아무리 이론적으로 건전하다 하더라도 그 이싱의 것을 요구받을 것이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바로 그 근본적인 덕들, 즉 어려운 상황에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용기, 과도함의 고삐를 죄는 절제, 자신의 결정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고려하는 정의감, 그리고 당연히 시시때때로 변덕을 부리는 불확실한 바다를 항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실천적인 지혜가 될 것이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인 연애와 그 후의 일상>

그는 이제 거의 어떤 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처럼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거의 정상인이라는 지위를 계속 확보하고,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이 계획들이 어느 영웅담 못지 않게 영웅적인 면모를 보일 기회를 제공한다. 조국에 봉사하거나 적과 싸우라고 부름을 받을 리는 없지만, 그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이 늦은 오후 여름 햇살 아래 스코틀랜드의 산비탈에서 경험한 짧은 순간 - 그리고 기 이후에도 때때로 - 라비 칸은 커스틴이 곁에 있으면 인생이 무엇을 요구하든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겠다고 느낀다.

 

 

코이케 류노스케, <침묵입문>

분노, 탐욕,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말들이 난무할 때, 그 속에서 조용히 침묵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인간이 이상으로 여기는 개인의 성장과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분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매사를 생각하고 느끼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것은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데 용기와 강인함을 지니고 자아를 철저하게 긍정하는 일이다.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현대와 같이 분업이 표준화된 사회에서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각조차 못 한 채 거대한 악행에 가담하고 있기 쉽다. 수많은 기업에서 행하고 있는 은폐와 위장은 바로 분업에 의해 가능했다. 이러한 행위를 막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떠한 체계에 속해 있는지, 자신이 하고 있는 눈앞의 일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짚어 보고 공간적, 혹은 시간적으로 큰 테두리 안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후에 무언가 개혁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용기를 내어 "이건 이상하지 않은가? 잘못된 게 아닌가!"라고 자기 의견을 적극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정철, <한글자>

글, 글을 쓴다는 건 바다를 '파도 공장'이나 '깊이 더하기 넓이'라고 멋을 부려 표현하는 게 아니라, 바다를 바다라고 말하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 재레드 다이아몬드 외, <초예측>

미국에서는 국민을 두 부류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한 부류는 에너지가 넘치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부류는 지금까지 해온 과정을 고수하려는, 야심 없는 사람들이지요. 이민은 둘 중 위험을 택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합니다. 위험이 겁나는 사람은 이민을 엄두조차 못 내지요. 미국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인 덕분에 가장 야심만만한 국민을 얻은 셈입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신뢰란 죽음만큼이나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인물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힘이다. 낯선 이를 신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 신뢰 안에는 용기뿐 아니라 기쁨과 유쾌함도 들어 있다. 신뢰는 위기가 닥쳤을 때 웃게 해준다.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우리는 이토록 폭넓은 지혜에 기초해서만 정의와 용기, 그리고 절제에 도달할 수 있다. 절제란 적절한 선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이다. "지혜란 진리에 대한 인식을 현실에 부합되는 의사결정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혜를 배우고 함양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겠는가? 이것은 틀림없이 문명이 존속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 가지 다른 더곡을 진정으로 이해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정의가 진리와 연결된다면, 용기는 선과 연결되며, 절제는 미와 연결된다. 반면에 지혜는 어떤 의미에서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지금까지 진, 선, 미를 마치 너무도 모호하고 주관적인 것이어서 사회 생활이나 개인 생활의 최고 목표로 채택되기 힘든 것이라거나 부와 권력을 갖게 되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인양 취급했던 현실론은 '괴상한 현실론'이라 불리곤 했는데, 이는 적절한 지적이다. 도처에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자문한다. "나는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어려우면서도 간단하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에 필요한 지침은 과학이나 기술에서 찾을 수 없다. 과학이가 기술의 가치는 분명히 그것이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는 이 지침을 인류의 전통적인 지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뉴스는 절대로 우리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자신만의 생각을 잉태시킬 만한 인내심 많은 산파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단단한 무엇을 하나도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무선 신호를 끊고 읽을거리도 손에 쥐지 않은 채 멀리 기차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다. 객실은 거의 텅 비어 있고 탁 트인 경치가 펼쳐 있으며 들리는 거라곤 기차바퀴가 철컹철컹 리듬감 있게 연속적으로 철로를 지나는 소리뿐이다.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아 비행기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다. 두세 시간 동안 집중할 것이라곤 구름 꼭대기와, 짐작도 못할 추위 속에서 널찍한 잿빛 날개 아래 달려 있는 롤스로이스 엔진, 우리에게서 겨우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우리의 방랑하는 사색에 시동을 거는 절제와 용기를 지닌 엔진의 지속적인 현존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여행 말이다.

 

 

김형경, <좋은 이별>

울음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눈물은 한 사람은 가장 위대한 용기,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간혹 어떤 이들은 겸연쩍은 얼굴로 자기가 울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나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도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한때 부종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부종의 고통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부종을 이겨 냈는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실컷 울어서 부종을 몸 밖으로 내보냈다네."

 

슬퍼할 수 있는 능력. 충분히 건강한 자아, 슬픔을 토로해도 용인해 주는 환경, 슬픔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용기 등이 있어야만 슬퍼할 수 있다. 눈물을 보이는 순간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울음을 보이면 세상이 외면할 거라는 두려움이 있다면 우선 그 감정부터 보살핀다. 소리 내어 울 수 있다면 마음이 건강한 상태이다.

 

하지만 "통찰은 마술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통찰과 해석으로 삶의 문제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바로 그 순간 모든 문제가 눈 녹듯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통찰로 알아낸 문제를 스스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용기와 인내의 시간이 뒤따라야 한다. 낡은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법들을 습득해 나가고, 예전의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 가는 노력을 몸에 밸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그것을 '훈습'이라 일컫는다. 불교 수행에서 깨달음을 얻은 다음 그것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보림'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훈습 단계에서 심리학의 행동 치료, 인지 치료 등 치료 기법과 인류의 지혜가 집적된 신화, 종교 등의 도움을 받았다.

 

용서하지 않을 자유, 용서할 수 있는 용기. 정말로 용서하고 싶지 않다면 억지로 용서할 필요는 없다. 용서하지 않고도 과거를 정리하고 화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용서하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다면 가해자보다 강해졌다는 뜻이다. 진정한 자유는 용서한 사람이 받는 선물이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이런 자기 소외가 깊어질수록 안타깝게도 자기 기준을 못 찾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기준, 이 사회가 좋다고 욕망하라고 정해준 것들을 내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다보면 심한 경쟁 속에서 남들 쫓아가기 바쁘고, 그 과정에서 또 상처받고 좌절하고 우울해지는 것 같아요. 남들이 뭐라 하든 내 식으로 살아보려는 용기, 내 삶의 주도권을 내가 갖고 사는 주체성 없이 남들이 여기저기서 요구하는 것들만 처리해주기도 너무 바쁜 삶, 어떠신가요? 힘들지 않으신가요?

 

이규경 시인, <용기> :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 용기를 내야 해 /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 그래서 나는 용기를 / 내었습니다 // 용기를 내서 이렇게 / 말했습니다 / 나는 못해요

 

피나는 노력을 해서 기필코 해내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라고, 자기는 못한다고, 할 수 없다고,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라고...

 

행복의 요소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바로 '삶의 주도성이 내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지금 하는 일을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할 때 사람은 행복하다고 느낀다. 내가 삶을 주도할 수 없을 때는 그게 아무리 남들이 재미있는 것이라 해도 힘겨운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세상 많은 사람이 그 주도성을 잃고 사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못한다고, 할 수 없다고,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용기 내어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처럼 자신의 미래를 내 스스로가 아닌 옆 사람들을 보면서 결정했기 때문이다.

 

'고통스럽더라도 익숙한 것'과 '행복을 가져다줄 새로운 것' 가운데 사람은 보통 고통스럽더라도 익숙한 것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내 고통에 그렇게 충성할 필요 없어요. 익숙하지 않아 두렵더라도 용기를 내서 행복의 길을 선택하세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남 인생 간섭하는 섯은 입만 있으면 된다.

 

인도의 또 다른 스승 오쇼 라즈니쉬는 인간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서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반대로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대면할 용기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민감하게 느끼면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수용하고 지혜롭게 대처해날갈 때 비로소 우리 영혼은 성숙해진다.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젊었을 때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장년기에는 신념이 있어야 하나, 늙어서는 지헤가 필요하다. 젊었을 때는 삶의 활력이 넘치는 시기이기 때무에 용기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만용이라고 할까? 자제해야 할 욕망을 위한 용기 같은 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니다. 선한 의지와 고상한 목표를 위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인생에 있어 장년기는 가장 오랜 세월을 차지한다. 30에서 60까지는 장년기에 속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어떤 이는 70까지를 장년기로 보기도 한다. 자신의 일과 더불어 성장하는 기간이며 일의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평가받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 긴 기간동안에는 어떤 신념이 있어야 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은 악이라는 윤리적인 신념도 필요하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가치 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을 식별할 수도 있어야 한다. 해서는 안 되는 것과 어렵더라도 해야 할 의무를 구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뚜렷한 삶의 목표와 목적을 위한 확고한 신념이다.

 

 

최인호,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시간과 돈, 체력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히말라야를 가고 싶어도 시간이나 돈, 혹은 체력이 없어서 가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는 사람과 돈은 있는데 시간이 도저히 안 나는 사람, 시간과 돈은 있는데 체력이 안 되는 사람 등 어느 하나가 부족해 히말라야 트레킹을 못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돈, 체력은 히말라야 트레킹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시간과 돈, 체력이 있어도 못 가는 사람이 더 많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결정하는 핵심은 가슴 속에 꿈과 열정이 살아 있느냐다. 꿈과 열정은 히말라야 트레킹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여행과 관련되어 있다. 가고자 하는 여행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것을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꿈과 열정이 있으면 히말라야 트레킹을 갈 수 있을까? 아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쉽게 떠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만 가지 핑계가 존재한다. 그 핑계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용기밖에 없다. 열정과 용기가 있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 열정과 용기를 가진 자만이 '영혼을 비추는 거울' 히말라야와 마주할 수 있다.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저개발된 지역에 이런 부러움이 생기기 시작하면 용기와 반성으로 치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3세계에서는 생존 자체가 '내 손으로 지을' 귄리와, 땅 한 뼘과 서까래 같은 몇 가지 물건을 소유할 권리 사이의 균형을 올바르게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김진선, <적당히 벌고 잘 살기>

우동사의 조정훈도 '애쓰지 않는 삶'을 이야기했다. 롤링다이스의 제현주는 '지금 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계속해나갈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 지속 가능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척도라고 했다. 그들의 유연한 삶의 방식은 매 순간 자신들의 상태를 정확히 보고 변화를 자연스레 수용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애쓰지 않는 삶이라... 어찌 보면 배부른 소리나 무책임한 말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용기가 그들을 지속하게 하는 힘인 건 분명해 보인다.

 

 

네이트 실버, <신호와 소음>

예측은 아주 중요하고, 그 때문에 더욱 어렵다. 소음에서 신호를 분리하려면 과학적 지식과 자기 인식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즉, 객관적 실체와 주관적 실체를 교차시켜야 한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겸손함과 예측할 수 있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재승, <열 두 발자국>

독창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연구하고 접촉해온 끝에 나는 놀랍게도 그들이 겪는 내면의 경험이 우리가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느끼고 회의에 빠진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용기를 내서 행동에 옮긴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다가 실패하더라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후회를 덜 한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다. - 애덤 그랜트, <오리지널스>

 

 

두려움 안느끼는게 용기가 아냐, 두려움보다 중요한.. 뭔가에 대한 확신이 용기란다. 사람이 지나치게 신중하면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없단다 - 영화, <프린세스 다이어리 2001>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둔다>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인생은 재미없다. 인생에서 '기호'를 갖는다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타인의 평판을 신경쓰는 사람은 자신의 기호가 아닌 주어진 기호대로 따라가는 사람이다. 기호가 없는 사람처럼 위험한 존재는 없다. 그들에게 타인의 조종에 의해 흥분하게 될 소질이 있다. 인간의 정신은 시시각각 선택이라는 조작에 의해 움직인다. ... 선택이란 인간 정신의 용기를 말해주는 증거다.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웰스의 유토피아 소설 <신같은 인간Men Like Gods>이나 <꿈The Dream>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를테면 용감하고, 관대하고, 튼튼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물리적인 위험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기계에 의한 진보는 분명히 위험을 제거하는 경향이 있다) 육체적 용기가 남아 있기 쉬울까? 그것이 '가능하긴' 할까? 그리고 육체노동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세상에서 육체적 힘이 왜 남아 있어야 하는가? 아무 흠도 없는 세상에서는 충실이니 아량이니 하는 것들도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마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자질로 찬미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에 맞서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그런데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꿈>이나 <신 같은 인간> 같은 책에서 힘이나 용기나 아량 등과 같은 자질이 살아 있는 것은 그것들이 매력적인 특성이며 온전한 인간에게 필요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이를테면 용기를 기르기 위해 인위적인 위험을 만들어내고, 아무 쓸모도 없는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아령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진보라는 관념에 대체로 나타나는 대단한 모순을 목격하게 된다.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환경을 안전하고 편하게는 하는 것인데, 정작 거기 사는 사람은 자신을 용감하고 강인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다. 앞으로 맹렬하게 돌진하는 동시에 뒤로 절박하게 물러나려고 하는 꼴이다. 이는 런던의 증권 중개인이 중세의 사슬 갑옷을 입고 사무실에 출근하여 중세 라틴어로 대화를 하려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니 결국 진보의 옹호자가 시대착오의 옹호자가 되는 셈이다.

 

 

P. G. 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육체적 생활과 지적 생활은 별개의 얼굴이 아닙니다. 뛰어난 문학가들, 특히 오랜 세월 위대한 작가로 불려온 대가들에게는 풍부한 운동경험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육체는 가장 훌륭한 소재였습니다. 그들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재는 다양해졌고, 인물은 풍부해졌으며, 문체는 살아 있는 생명을 누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위대한 과학자는 하나같이 운동을 공부했습니다. 자신의 신체 특성에 어울리는 육체적 활동을 고안해냈습니다. 그 발견은 곧 위대한 발명과 학설로 이어졌습니다. 감각적이고 사색적인 화가들은 어떤가요. 그들은 낯선 타지로 망설임 없이 걸어갔습니다. 그 와중에 만난 사람들, 풍경들, 경험들이 캔버스에서 위대한 예술로 재탄생하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철학이라고 다를 리 없습니다. 철학의 발상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대학도서관? 강당? 아닙니다. 순수한 육체적 용기와 인내에서 시작됩니다. 철학은 육체를 의존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인한 육체를 자랑한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신영복, <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 우리는 생각이 머리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전두엽이 변연계에서 형성되는 이미지를 생각이라고 한다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잊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 생각은 가슴이 합니다. 생각은 가슴으로 그것을 포용하는 것이며, 관점을 달리한다면 내가 거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가슴 두근거리는 용기입니다. 공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애정과 공감입니다.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우리들 마음에 있는 악마여. 당신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이요, 두 번째 군대는 불만이요, 세 번째 군대는 배고픔과 목마름이요, 네 번째 군대는 갈애渴愛다. 다섯 번째 군대는 나른함과 졸음이요, 여섯 번째 군대는 두려움이요, 일곱 번째 군대는 망설임과 의심이다. 그리고 여덟 번째 군대는 속임수와 강요, 거짓으로 얻은 이익과 명성, 존경, 명예처럼 자신을 추켜세우고 사람을 깍아 내리는 것이다. 악마여, 이것은 당신의 군대이며 어둡고 추잡한 공격이다. 용기없는 자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악마를 이길 수 없다. 용기 있는 자만이 싸워서 승리하고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법륜 스님, <인생수업>

우리의 인생도 나고 자라고 나이 들어가는데, 잘 물든 단풍처럼 늙어가면 나이 듦이 결코 서글프지 않습니다. 자연이 변화하듯 편안하게 늙어가면 그 인생에는 이미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잘 물든 단풍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나침'을 경계해야 합니다. 과욕을 부리지 않아야 하는데, 나이 들어 과한 것은 항상 부작용이 따릅니다. 젊을 때는 무리해도 금방 회복이 되지만 나이 들어서 지나치면 이겨내지를 못합니다. 과식, 과음, 과로를 하면 안 됩니다. 나이 들면 지나치면 안 되고, 젊을 때처럼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젊을 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젊은이가 용기가 있고 의욕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 큰 욕심을 내어서 무엇을 하려 하면 세상사람들이 "포부가 크다"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 생각을 하면 노욕이라고 하는데, 좀 추하게 욕심을 부린다는 뜻이거든요. 그리고 젊을 때는 격렬하게 주장해도 결과가 좋은데, 나이가 들면 어떤 주장도 격렬하게 하기보다 평화적으로 설득하고 점잖음을 유지해야 나도 좋고 세상에도 이익이 됩니다. 나이가 들면 자꾸 일을 벌이고 계획을 세워서 무언가를 하려고 할 게 아니라 정리를 해나가야 합니다. 인생을 포기한다는 게 아니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기 때문에, 잔가지들을 정리하면서 잘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나이 들어감을 한탄하거나, 나이를 인정하지 않고 젊어지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단풍처럼 물들어가는 나'를 차분하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욕심을 하나하나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얼마나 많은 용기를 갖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움츠러들기도 하고, 넓어지기도 한다. - 아나이스 닌

 

‘용기’또한 당신이 자신과의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얻는 멋진 기념품 가운데 하나다. 혼자 여행을 떠난 것 자체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스스로 그 여행을 꾸려 가면서 당신이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한두 사람이 비평에 상처받아 쉽게 포기하지 마세요. /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쉽게 한 말에 / 너무 무게를 두어 아파하지도 말아요. / 안티가 생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 용기 내어 지금 가고 있는 길, 묵묵히 계속 가면 돼요.

 

내 삶의 방향타를 내 스스로 잡고 가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삶의 지도를 그대로 따라가면 조금은 안전할 수는 있으나,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내 삶을 살고 싶다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판단하고 이야기하건 용기를 내어 내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저 유명한 엥겔스의 화려한 글은 기분 나쁠 만큼 적절하다. "역사는 모든 여신들 중에서도 아마 가장 잔인한 여신일 터이니, 그녀는 전쟁의 시기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경제 발전의 시기에도 시체 더미 위로 승리의 전차를 몰아댄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너무나 어리석은 나머지 거의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고통을 당하여 내몰리지 않는 한 진정한 진보를 위해서 용기를 내지 않는다."

 

 

김위찬, 르네 마보안, <블루오션 시프트>

"우리는 처음 결함이 있을 때 용기를 잃거나 멈춰서서는 안 돼. 오히려 이런 결함을 예상해야 해. 계속 마음을 열어놓고 있어야 해. 용기를 잃거나 누군가를 탓하려고 해서는 안 돼. 이것을 소중한 학습의 기회로 여겨야 해. 그리고 이런 결함을 최대한 빨리 해결하려고 해야 해." 결함을 전제하는 접근 방식은 시장에서 재무적인 위험, 신용상의 위험과 함께 조직 구성원에게 나타나는 의욕 상실의 위험을 최소화한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나쁜 소녀의 짓궂음>

"넌 항상 작가가 되고 싶어했지만, 그럴 용기를 내지 못했잖아. 이제 혼자 있게 될 테니 그 시간을 유익하게 사용하도록 해. 그러면 나를 너무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을 거야. 자, 말해봐. 내가 너에게 소설 한 편을 쓸 좋은 주제를 주었다고. 그렇지, 착한 소년?"

 

 

바버라 브래들리 해커티, <인생의 재발견>

활기차게 살라. 당신 삶의 일부(배우자, 자녀, 일)로부터 정서적으로 분리되면 산소가 부족한 환자처럼 죽음에 이르고 말 것이다. 끔찍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사실 의도한 바지만), 이제 당신 인생에서 자동조종장치는 사라졌다는 통찰이 거듭해서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열정을 쏟을 대상을 찾아라. 활기찬 중년을 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8살 이하의 아이들이 40대 이상의 중년에게 최고의 롤모델일 수도 있다.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새로운 것에 열정을 쏟는다. 그들은 마침내 성공을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며, 마음의 상처를 무릅쓰면서 친구를 사귀려 든다. 여기서 중년을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결혼생활에 열정과 애정을 쏟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가 따르고, 단지 수입뿐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일을 택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며, 노화된 두뇌를 명석하게 만들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연구결과 드러난 사실은 매우 명확하다.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을 할 때, 그 순간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보다 큰 기끔과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사랑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진한 사랑일수록 그 그림자도 짙다는 사실을, 태양처럼 찬란학 빛나던 사랑도 시간속에 스러진다는 것을, 설령 사랑이 변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사람이 변하고 만다는 것을. 감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이모션emotion의 어원은 라틴어 모베레movere다. '움직인다'는 뜻이다. 감정의 멈추어 있지 않고 자세와 자리를 바꿔가며 매 순간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이별 또한 사랑의 전개 과정이라고. 사랑이 기승전결을 거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어쩌면 우린 사랑이 한결같을 거란 믿음에서 벋어나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쇠퇴와 소멸을 감지할 때 지난 사랑의 생채기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고, 새롭게 다가온 사랑 앞에서 용기를 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영화 'Youth'. 시간과 세월만으로 나이가 결정되지 않는다. 나이를 좌우하는 뜨거운 용광로가 있다고 치자. 거기에는 건강이나 신체적 상태가 가장 먼저 들어갈 테지만, 인간의 감정과 생각, 상상력, 그리고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같은 요소들도 뒤섞이기 마련이다. 단순히 '젊음'을 잃으면 '늙음'이 될까?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에 불과할까? 글쎄다. 어떤 이는 '늙은 젊은이'로 불리고 또 어떤 사람은 '젊은 노인'으로 불리는 걸 보면 '늙음=나이 듦'이라는 등식이 꼭 성립하는 건 아니다. 늙음은 무엇인가 하는 이 만만치 않은 질문에 여전히 나는 답을 하지 못하겠다. 다만 '낡음'이 '늙음'의 동의어라는 주장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느끼는 일과 깨닫는 일을 모두 내려놓은 채 최대한 느리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 삶의 밝음이 사라지고 암흑같은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비로소 진짜 늙음이 시작된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자신과 친구에 대해서는 늘 성실하라. 적에 대해서는 용기를 가져라. 패자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라. 그 밖의 모든 경우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의를 지켜라.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읽기 전과 읽은 후 세상이 완전히 달리 보이는 책. 우리들을 이 세상의 저 편으로 데려다 주는 책.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이 맑게 정화되는 듯 느껴지는 책. 새로운 지혜와 용기를 선사하는 책. 사랑과 미에 대한 새로운 인식, 새로운 관점을 안겨주는 책.

 

 

이정우, <개념: 뿌리들>

플라톤에게는 영혼의 세 가지 힘이 존재합니다. 하체(욕망, 생산자 계층), 어깨(의지/열정의 삶을 살게 하는 기개, 전사 계층), 머리(이성, 지도자 계층)... 이렇게 세 계층이 가져야 할 덕이 절제, 용기, 지혜입니다만,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덕을 모두 전제하면서 동시에 이 세 가지를 통일적으로 조화시켜 주는 것이 마자믹 네번째 덕으로서 바로 정의인 것이죠. 특정한 영혼, 특정한 계층이 아니라 영혼의 모든 측면에, 그리고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플라톤은 이렇게 세 개의 특수한 덕(절제, 용기, 지혜)에 하나의 일반적 덕(정의)을 추가해 덕론을 전개했는데, 그래서 이를 플라톤의 '사주덕'이라 부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덕이 중요한 원리는 중용中庸입니다. 적절한 측도mesotes로서의 중용은 모자람과 넘침을 피하고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힘입니다. 예컨대 절제는 낭비와 인색의 중용이고, 용기는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죠. 동북아 사상에서도 중용은 특히 강조되죠. 중용을 지킨다는 것,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사실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수학처럼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와 고민을 겪어 가면서 조금씩 균형을 잡아 가게 되는 것이죠. 중용이란 이론의 문제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동안 터득해 나가는 지혜인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타인을 불편하게 대하고, 서로 싸우고, 세상이 팍팍하고 거친 이유가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편협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이유들도 많습니다. 편협함은 타인에 대한 오해, 왜곡, 비교, 경쟁의식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아집, 열등의식, 우월감, 질시, 견제를 낳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가치들 중 하나가 중용입니다. 그런데 중용은 우선 시야의 넓이를 전제합니다. 넓게 보아야 거기에서 진정한 중용을 취할 수가 있죠. 애초에 시야가 편협하다면, 그 편협한 시야 내에서 취한 중용은 사실상 치우침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유의 넓이, 삶의 넓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넓다는 것이 전제되고 그 위에서 중용을 취할 때 든든한 중용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좁은 지평에서 취한 중용은 자의적일 수 있습니다. 남이 볼 때는 치우쳐 있는데 자신은 중용을 지킨다고 고집할 수도 있으니까요. 또, 중용이라는 가치는 좀 싱겁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쁘게 말해서, 똑부러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늘 적당히 균형을 잡으라는 정도의 이야기 밖에는 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중용은 참 중요합니다. 특정한 상황에서는 특정한 방향으로 치우쳐야 한다 해도, 바로 그 치우침 자체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평소에 중용을 갈고 닦는 것은 중요한 것이죠. 중용의 잠재력을 갖추고 있어야 특정 상황에서 어디로 치우쳐야 할지도 분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옷을 입지 않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한 소년의 우화는 소년의 순진함이나 용기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진실은 반드시 진실대로 밝혀지게 마련이라는 인간간생활의 진리를 말하려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 우화의 해석은 대체로 그 우화를 구성하는 일련의 인과적 요인들이 엮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 옷을 걸치지 않고서도 입었다고 우기는 '통치자의 진리와 권위'는 임금의 것인가 측근 아첨배의 것일까. 이와 같은 '허구와 허위'는 통치자들의 속서이어야 하는가. 허위가 진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 있는 그 사회의 제도와 풍토는 어떤 것일까. ... 가장 어리석은 소년에 의해서 온 사회의 허위가 벗겨지기까지 그 임금과 재상들과 어른들과 학자들과 백성들은 타락과 자기부정 속에서 산 셈이다. ... 역사는 한 단계의 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 열중하는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맡기게 된 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 영광(또는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겠다.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두 원시인 부족이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고 해보자. 다른 조건이 모두 같은 상황에서 한 부족이 용기 있고 공감을 갖고 충실한 구성원이 많았다고 하자. 이들은 위험이 닥쳤을 때 항상 서로에게 위험을 알리고 서로 돕고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다른 부족보다 더 빛나는 성공을 거두고 결국은 다른 부족을 정복했을 것이다. (…)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의 사고력과 선견지명이 향상됨에 따라 각 구성원은 동료를 도와주면 자기도 그 답례로 도움을 받게 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단순한 동기 때문에 그는 동료를 돕는 습관을 획득했을지도 모른다. (…) 높은 도덕 기준은 한 개인이나 그 후손에게 부족 내의 다른 구성원에 비해 약간의 이득을 줄 수도 있고 전혀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좋은 품성을 갖춘 사람들이 늘어나고 도덕성의 기준이 진보할수록 부족 전체는 다른 부족에 비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높은 수준의 애국심, 충성심, 복종심, 용기, 동정심이 있어서 항상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은 부족은 다른 부족에 비해 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선택이다.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자기기만이 없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이 분출할 때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만, 그것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전쟁을 이기고, 대륙을 제압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망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롭 무어, <레버리지>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고용자 아니면 고용인, 노예 아니면 주인, 리더 아니면 추종자다. 각 개인은 다른 개인을 섬긴다. 한쪽은 레버리지 하고 다른 한쪽은 레버리지 당한다. 아무도 당신을 위해 일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당신으로부터 돈을 벌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시간과 돈이 정비레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백만장자, 억만장자 들은 그것들이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더 열심히 더 오래 일하라는 사회의 명령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 책은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변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 자신이 믿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갈 용기를 가진 사람들, 삶에 천천히 시들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있다고 믿기에 종종 오해를 받으면서도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페리클레스는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이고, 자유를 결정하는 것은 용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회는 사람들을 용기 있게 만들도록 조직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저신과 에너지를 쥐어짜는 일이 너무나 많다. 사람들을 생기 넘치고 흥미를 느끼게 하고 온전히 깨어 있게 하는 일은 너무 적다. 더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다면 일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는 노력을 인정받고 재능과 예술적 기교로 돈 많은 사람들의 변덕에 복종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요구에 대한 자각은 조직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한 진정제로만 조직에 투입되었다. 고대 아테네에서 고용은 노예를 위한 것으로 자유인은 남에게 굽실거리며 일을 해서 임금을 받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꾸로다. 고용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고 자기를 팔아서 시간제 임금을 받는 것을 성공으로 여긴다.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지내야 하는데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여긴다. 그럼에도 국가가 번창할수록 국민은 자유로운 인간으로 일하기를 꿈꾸면서 굽실거리고 아첨하지 않고도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나선다. 스스로 일을 통제하고 창조력을 발휘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고 인정받는 방법을 찾기 위한 넓은 탐색의 영역이 열려 있다. 그러나 이런 기회를 허락하는 일은 많지 않다. 굳이 이런 기회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일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체념하고 일을 하고 얻는 알량한 보상에 만족하거나 일 밖에서 만족을 찾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 <공항에서의 일주일>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이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하게 됩니다. 죽음이 우리에게우리가 마음속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삶의 길을 따라가도록 용기를 주는 거죠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궁핍과 비참, 무지와 야만이 부정의한 사회제도에 의해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힘이 자라는 데까지 이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곧 실망과 쓰라림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다. 그러나 정말로 쓰라린 것은 노력과 희생을 해보았자 희망도 결과도 없다는 생각이다. 심지어 매우 훌륭하고 용기 있는 인물도 이런 생각을 하는 수가 있다. 사실, 역사상 씨를 뿌린 사람 중에 그 씨가 자라는 것을 본 사람은 드물며, 그 씨가 도대체 자라기나 할 것인지를 확실히 안 사람도 드물다. 사실을 위장하지 말자. 이 세상에서 진리와 정의는 되풀이해서 세워져 왔다. 그러나 진리와 정의는 되풀이해서 무너지고 말았으며 유혈 사태가 발생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만일 진리에 반대하는 세력이 약하다면 어떻게 오류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배할 수 있을까? 정의의 여신이 고개를 들기만 해도 부정의를 쫓을 수 있다면 압박받는 사람들의 통곡이 그토록 오래 그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진리를 알고 따르려는 사람이나 정의를 인식하고 이를 위해 일어서려는 사람에게는 성공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성공! 성공은 거짓으로 이루기도 하고 부정의로 이루기도 한다. 진리와 정의는 본래의 권리로서 그 자신의 것인 - 우연이 본질에 의해 자신의 것인 - 그 무엇을 주지 않는가?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부모의 사랑에 굶주린 어린이들은 겁이 많고 진취적인 용기가 부족하며, 공포와 비애에 사로잡히게 되므로 활발하고 명랑한 기분으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한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창작의 영역에 반드시 지켜야 할 법칙이란 없습니다. 정해진 법칙이 없다는 것만이 예술가에게는 불변의 진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가는 그 어떤 규범에도 휘둘리지 않고 홀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예술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사회적 제약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란 늘 얼마간의 구속을 받는일이지요. 그러나 예술가라면 자신의 창작세계에서만큼은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용기와 신념을발휘해야 합니다. 정치나 윤리의 교조를 벗어던지고 유행과 습속의 구속도 떨쳐내야 합니다. 창작의 자유는 결국 예술가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김용택 엮음,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바람이 나를 가져가리라 햇살이 나를 나누어 가리라 봄비가 나를 데리고 가리라

- 지치고 힘든 순간,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

 

 

용기 ㆍ 요한 괴테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

맑은 물,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

이것만 있다면 낙심하지 마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ㆍ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 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벤저민 그레이엄의 <증권분석>

전통적으로 투자자들은 곤경에 처한 투기자들이 낙담하여 주식을 팔 때 용기와 인내심을 발휘하여 주식을 샀다.

 

전반적인 시장 등락을 이용하는 기법... 1900년 이후 주가가 너무 높거나 낮은 모습이 거듭 나타나므로,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사서 나중에 가치보다 높은 가격에 팔 기회가 되풀이되는 셈이다. 가장 간단한 투자방법은 과거 시장 등락의 대략 중간 지점을 잇는 직선을 그은 다음, 이 직선 아래에서 매입하여 직선 위 어느 지점에서 매도하는 것이다. 아마 이 "시스템"도 다른 기법만큼 현실적이지만, 더 과학적인 기법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시스템은 다음과 같이 다듬을 수 있다. 1) 선도업종 주식으로 잘 분산된 포트폴리오를 구성한다. 2) 현행 장기금리를 바탕으로 평균이익을 자본화하여 "정상" 가치를 산출한다. 3) 이 정상가치의 일정 비율 밑에 매수 지점을 설정하고, 일정 비율 위에 매도지점을 설정한다. (매수와 매도 규모를 점진적으로 축소하거나 확대할 수도 있다.) 이런 기법에는 타당한 논리가 들어 있다. 오랜 역사를 돌아보아도, 시장이 침체했을 때 사서 대중이 낙관할 때 팔아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법 어딘가에 문제가 있음을 곧 눈치 챘을 것이다. 결함이 무엇일까? 이 기법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시장 흐름의 일반 패턴은 예상할 수 있지만, 매수 지점과 매도 지점 설정은 트릴 수 있으며, 시장이 극단으로 치우칠 때 거래 기회를 놓칠 수 있다. 둘째, 시장 흐름은 언제든 크게 바뀔 수 있으므로, 과거에 효과를 발휘했던 기법이 가치를 상실할 수 있다. 셋째, 이 기법을 실행하려면 불굴의 용기가 필요하다. 대개 심리적으로 사고 싶을 때 팔아야 하고, 팔고 싶을 때 사야 하며, 산 다음 주가가 떨어지는 모습이나, 판 다음 주가가 더 오르는 모습을 장기간 지켜보아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단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불굴의 용기를 갖춘 사람에게는 추천할 만한 기법이다.

 

장기 기준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시장이 분명히 침체했을 때 대표적인 우량주를 산다. 이 방법에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심각한 착오를 저지를 위험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좋은 실적을 올리는 방법이다.

 

 

이희인, <여행의 문장들>

용감한 시골 귀족, 이곳에 잠들다. 탁월한 그대의 용기 죽음의 신도 그대 목숨 죽음으로써 빼앗지 못했다고 세상 사람들 전하도다. ... 광인으로 세상을 살다가 본 정신으로 세상 떠났으니.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시아베드라, <돈키호테>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발견>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성격은, 마음에 온정이 있고 근심이 없으며 게다가 용기가 있는 성격이다.

 

 

이희인, <여행자의 독서>

'나를 죽이지 못한 시련은 나를 한층 강하게 만들 뿐'이라던 니체의 말은 용기와 객기 사이에 갈 곳을 마련하는 여행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트래블'에 '트러블'은 때로 필요악이다'라던 후지와라 신야의 말도 그러하다.

 

 

야마구치 세이코, <버리고 비웠더니 행복이 찾아왔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 라인홀드 니버, <평온을 비는 기도> 중.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여행은 도전이며 건강한 스트레스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기쁨은 순수한 즐거움이 아니라 스트레스와 즐거움이 버무려진 '칵테일 감정'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결코 두려움을 떨칠 수 없고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삶은 대가를 필요로 한다. 불편을 거쳐야 만족은 깊어지고, 두려움 앞에 마주 서야 즐거움은 빛나게 마련이다. 두려움이 없는 게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용기다. 두려움과 맞설 때 당신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젊은이들은 여행을 통해 이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여행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고, 홀로서기 연습이며,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한 훈련의 장이 된다. 배낭여행을 다녀온 젊은이들은 한목소리로 용기와 자립심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행 자체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혼자 떠난 자유여행이라면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스스로 모든 것을 알아보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한다. 여행의 시간 동안 온전히 책임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건강한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과정이다.

 

우리의 자아 경계는 여행을 할 때 느슨해진다. 여행은 자아 밖으로 우리를 이끌어 새로운 사람, 자연, 문화 등과의 연결을 만들어낸다. <체 게바라 어록>에는 왜 여행을 할 때 낯선 존재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게 되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낯선 존재에게 말을 거는 용기는 아마도 자연이 가르쳐준 것이리라. 자연의 존재들은 끊임없이 낯선 존재에게 말을 건넨다. 바람은 나뭇잎과 가지에게, 곤충은 꽃에게, 하늘은 땅에게, 모든 존재들은 나에게 말을 건넨다. 그런 자연에는 절대 고독이란 없다."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은 불확실성과 즉흥성에 기초한다. ... 여행은 불확싱설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는 우리에게 불확실성과 친구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것처럼 잘 닦여진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때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별로 가지 않는 길이라 불편하고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과 두려움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감내해야 할 조건이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명확한 방향을 정하고 확신에 차 걷는 사람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뎌낼 줄 알는 사람들이다. 다만 자신이 걷는 길 자체를 사랑하고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자신의 시도 하나하나가 모여 곧 길이 된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은 결국 삶으로의 여행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어떤 '부름'을 들을 때가 있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내적 신호가 북소리처럼 울리면, 인생에 있어 전환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 시기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의식을 치르려고 한다. 그 의식을 통해 지난 시기를 매듭짓고 새 시기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의식이 바로 여행이다. 그렇기에 여행지에서는 삶의 전환점에 서 있는 수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앞둔 학생,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진출을 앞둔 사람, 직장을 그만드구 자기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 은퇴 후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 등 삶의 전환기에 놓인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길 위에 있다. 그들의 여행은 지난 시간의 수고에 대한 보상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삶의 전환기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설렘과 두려움을 모두 느낀다. 그렇기에 이들은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통해 이제 그들이 곧 마주할 새로운 삶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것이다. 안전한 정착을 위한 리허설을 갖는 셈이다. 그들은 전환기의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경험을 미리 얻게 된다. 인생은 전환의 연속이다. 새가 털갈이를 하고, 뱀이 허물을 벗고, 곤충이 변태를 하듯이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때가 되면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더 큰 만남을 위해 떠나야 한다. 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 거부의 대가는 혹독할 수 있다. 조셉 캠벨은 <신화의 인생>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만일 우리가 부름에 대해 떠나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를 생각해 낸다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사회 속에 남아 있는 경우, 그 결과는 부름을 따랐을 때에 생기는 결과와 판이하게 달라진다.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을 요구되는 모험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인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여행을 몹시 갈망하고 있다면, 이는 어쩌면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삶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계산된 위약을 부리지 않고 돈 위에 더 많은 돈을 쌓으려 하기보다 내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 알며 인간관계의 정치를 위해 신뢰를 가장하지 않고 미래의 무더기보다 현실의 한줌을 아끼면서 천박한 것을 천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되 네 편과 내 편을 종횡으로 나누어 다투고 분쟁하는 진영논리의 달콤함에 함몰되지 않길 하루하루 소망하는 자다.

 

 

프란스 요한슨, <메디치 효과>

두려움과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다. ... 두려움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선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과 타협하고, 현재 지니고 있는 것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것은 당신이 모든 것을 잃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일을 실행해나갈 수 있을 만큼 편안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 ... 우리는 두려움을 항상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관리할 수는 있다.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실패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교차적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진할 수 있다.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용기는 두려움에 저항하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다."

 

 

테미 스트로벨, <행복의 가격>

GDP는 우리 아이들의 건강, 아이들이 받는 교육의 질, 아이들이 놀이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나타내진 않는다. GDP에는 시의 아름다움이나 결혼생활의 안정성, 대중토론의 지적 수준이나 공무원의 청렴도가 포함되지 않는다. GDP는 우리의 기지도 용기도, 우리의 지혜도 학식도, 우리의 연민도 나라에 대한 헌신도 측정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GDP는 우리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측정할 뿐이다.... 그렇다면 GDP가 측정하는 것은? 이라크전쟁, 원유유출, 산림파괴, 핵탄두 개발 비용, 우리가 쇼핑몰에서 사들이는 그 모든 물건.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생산성, 소비, 서비스, 무역 등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측정한다. - 로버트 케네디

 

 

김동우, <트레킹으로 지구 한바퀴>

매일 빠른 속도로 의미 없이 일상이 내 곁을 흘러갔다. 두 눈은 어지러웠고, 두 어깨에는 극심한 피로감이 쌓였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사회에, 그리고 게슴츠레 침을 흘리는 내 인생에 쉼표를 찍어 보고 싶었다. 한 번쯤 내 감정에 솔직해지기... 나 자신에게 떳떳해지기... 남이 아닌 내가 원하는 일 해보기... 정말, 그래 보기. 하지만 가면을 벗기까지는 적잖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실현 가능성은 낮아진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움켜진 손아귀를 펴는 거다. 그러면 새로운 걸 잡을 수 있다. 새로 손에 쥔 그 무엇은, 그동안 꽉 쥐고 놓지 않았던 것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경험이었고, 놓기 전에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자유였다.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힘이 들고, 실행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니까. 회사 상사에게 "이건 잘못됐다"라고, 시어머니에게 "그건 싫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무서운 거야. 걔들한테는 지금의 생활이 주는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이 너무나 소중해.

 

 

이권우, <여행자의 서재>

모든 여행과 산행이 그러한 법. 내가 가는 듯하지만, 실은 불러서 갔을 뿐. 그래서 자연의 '온화한 힘에 대해 깊은 존경'을 느끼고. '세계의 웅장한 규모를 이해'하며, '전에는 있는 줄 몰랐던 인내심과 용기'를 발견하는 법. 그것이 어느 길이든 우리가 떠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다 담겼다. 숲이 호명하면, 응답하시길. 우리가 거듭날 절호의 기회렸다.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내 부모님은 뼈와 살 속에서 근대적 '아동' 이라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 '아동기'는 소비주의에 대한 중독성 의존증을 일찍부터 기르고, 직업적 전문가들과 정부기관들에 의한 다양한 복지 프로그램에 기대는 것을 배우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놀이터로서 기능한다. 이런 종류의 아이들 키우기는 거의 틀림없이 나이는 어른이지만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는 인간을 산출한다. 그런 인간에게는 계속해서 장난감이 필요하고, 만족감이 없으면,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느낌이 드는 법이 없다. 그들은 최소한의 것을 추구한 소로우의 이상이 내포한 지혜를 알아보지 못하고, 평생 동안 한 장소에 머물면서 그 장소가 제공하는 경이로움을 갈수록 더 깊이 느끼는 삶 속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아동기'는 갈수록 지나치게 버릇없는 인간들로 넘쳐나는 새로운 세대들을 산출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오늘날의 아이-어른들은 끊임없이 유동적이며, 언제나 새로운 일자리와 다른 도시를 찾아 헤매면서, 판에 박은 일상을 깨기 위해서 여행상품을 산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갈급증을 치유할 수가 없다. 그들은 휴가에 '이국적'이고 '흥미로운' 곳을 끊임없이 방문하여, 갈수록 심해지는 권태로움을 해소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버느라고 강박적으로 쫓기고 있다.  내가 나의 일자리를 떠날 때, 나는 내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모든 근대적 기관들 - 교육, 건강, 고용, 문화적 기관 -을 거부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 나는 내 부모님이 농민적 '편협성'이 보다 용기있고, 보다 대담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대 그들을 둘러싼 세계에서 중산계급의 '아동기'라는 관행을 의심하는 어떤 목소리도 없었다. 나는 배우는 것이 느린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내 부모님이 그들 자신의 지혜로써 자신들의 삶을 좋은 삶으로 만들고, 그들의 아이들에게 매일매일의 덕행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아이들을 '아동기'라는 수렁으로 빨아들이는 시대적 흐름에 조용히, 그리고 용감하게 저항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용기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오마에 겐이치, <난문쾌답>

모르는 상태를 견디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모르는 상태를 참고 견디며 도전하다 보면 결국 답을 찾게 된다. 아무도 답을 모르는 문제나 사건에 대해 스스로 가설을 세우고 입증해내는 '용기'와 '집요함'. 이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개인과 집단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차라리 넘어져라. 인생은 스키와 비슷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보다 차라리 넘어져버리는 것이 낫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틸수록 계속 엉거주춤할 수 밖에 없다.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과감하게 새로운 일에 도전할 용기를 가질 수 없다.

 

버리는 용기. 아이디어를 많이 생각해내는 훈련을 해보라. 그러면 쓸모없는 아이디어를 버리는 용기가 생긴다.

 

학생이 배우고 생각하는 것을 돕는 것이 교사의 유일한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학생이 의문을 가졌을 때 스스로 답을 찾도록 옆에서 도와주고 그 과정의 감동과 흥분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교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가설을 검증하며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어 갈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다.

 

 

스티브 도나휴,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

허상의 국경선은 항상 두려움을 낳는다. 이 두려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믿음과 연관되어 있고, 이 잘못된 믿음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그에 저항할 용기나 통찰력이 없다면, 그 둘이 합세하여 우리를 사막 한가운데에 가두어 버릴 수도 있다. 허상의 국경선은 허상처럼 보이지 않고, 진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 국경선을 건너면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그 국경선을 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스완>

백만장자의 공통된 특징 : 용기,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기, 낙관주의 ......

실패자들의 특징 : 용기,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기, 낙관주의 ..... 두 부류를 나누는 진정한 요인은 단 한가지 행운?

 

 

문영미, <디퍼런트>

아주 독특한 아이디어를 통해 소비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기로 결단을 내린 아이디어 브랜드. 그들은 기존 브랜드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요소들을 과감하게 삭제하기로 결정을 내린 용기 있는 브랜드다.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

무너져버릴 것 같은 순간은 앞으로도 여러 번 겪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위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용기를 얻으면 된다. 모두들 그렇게 힘을 내고 살아간다.

 

 

류콴홍, <철학우화>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그순간부터 모든 사람은 탄생과 죽음, 사랑과 미움, 괴로움과 즐거움, 행복과 불행 등과 끊임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선과 악, 고귀함과 비천함, 성공과 실패, 고통과 즐거움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함께 따라다닙니다. 우리 삶 속에는 유쾌한 일도 고민스러운 일도 함께 있지요. 생활 속의 고민은 누구나 피할 수 없지만 가끔식 생기는 유쾌한 일들이 그런 고민을 잊게 해줍니다. 누군가 성공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줄곧 어른에게 의존하며 무슨 일만 있으면 어른들의 도움을 청했지요. 주변의 낯선 세계가 두려웠고 눈앞의 험난한 현실을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용기는 우리 인생의 필수품이랍니다. 평생 부모의 품에 누워 응석만 부릴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겠지요.

 

 

김선현, <그림의 힘>

'창조란 곧 용기다. Creativity takes courage' - 마티스

 

 

클레이트 M. 크리스텐슨,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부모에게 용기 있는 결심은 아이에게 더 어렵지만 더 가치가 있는 인생의 경로를 밟게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중해 기행>

모든 길의 끝에는 <승리의 여신>이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너는 항상 조급하게 굴다 끝내 용기를 잃고 돌아서 버리지. 대중은 <세이렌>을 보지 못해. 공중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지. 눈멀고 귀먹은 채. 지상에 매인 자신들의 노를 젓느라 웅크리고 있을 뿐이야. 그러나 보다 정선된 인간인 선장은 자기 내면 - 자신의 영혼 - 에서 들려오는 세이렌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와 더불어 장엄하게 삶을 탕진하지. 너는 인생에 다른 무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가엾은 인간들은 세이렌의 소리를 듣고도 믿지 않아. 조심스럽고 겁 많은 그들은 평생 금화 다는 저울로 <예-아니오>를 저울질하다가 죽는 거야.

 

 

강신주, <감정수업>

"대담함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릎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대담함을 욕망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스피노자의 비범함을 발견하게 된다.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기쁨의 증진을 도모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사랑만큼 살아갈 힘과 기쁨을 증폭시키는 경험이 또 있을까?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모색했던 것도 바로 사랑의 파괴력, 그러니까 압도적인 힘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대담함이라는 감정이었다. 오직 위기를 감내하려고 할 때에만 용기와 대담함은 빛을 발한다.

 

"경멸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 자체 안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그 사물 자체 안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끔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동요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상상이다." 내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경멸하는 대상과 단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사는 동안 쓸데없는 일들을 걱정하고, 일을 미루고, 중요한 순간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쳐지나간다.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고, 늘 푸념하면서도 막상 행동하기는 두려워한다. 모든 것이 달라지길 바라면서도 스스로는 변화하려들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한다면, 오랫동안 미뤄온 전화 통화를 더는 미루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 삶은 지금보다는 좀더 활기를 띠게 될 것이고, 육신의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일어날 일을 두려워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인디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떠나기에 특별히 좋은 날은 없다.' 한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 곁에 있다. 그리고 당신이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할 때 필요한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은 바로 그 죽음이다.'

나는 그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 모두 이르든 늦든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삶 앞에 준비된 자이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시민의 덕 : 인간 사회의 정의, 공동체를 위한 덕목,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능력과 용기와 실천력 - "플라톤 대화편"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마음속에 흔들림 없는 원칙을 새겨 두고 가야 할 길을 지도에 분명하게 긋는 사람, 흐트러짐 없는 용기와 절제력을 가진 사람에게 인생은 전혀 복잡하지 않다. 복잡하다는 것은 스스로 지어낸 것들이다. - B. C. 포브스

 

두려움은 우리를 가두고, 신념은 우리를 석방한다. 두려움은 마비시키고, 신념은 힘을 준다. 두려움은 용기를 빼앗고, 신념은 용기를 준다. 두려움은 병을 주고, 신념은 약을 준다. 두려움은 무용지물로 만들고 신념은 쓸모있는 것으로 만든다. - 헨리 에머슨 포스딕

 

의기투합하는 친구들로 자신을 보강하라! 무작위로 여러 명을 고른 뒤 누구에게는 편지를 쓰고, 누구는 함께 밥을 먹으러 가고, 누구는 집에 놀러 가고, 누구는 문제가 있을 때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어라. 개중에 최소한 한 명은 나를 이해해주고, 용기를 갖게 하며, 언제라도 필요할 때 기분을 전환시켜줄 친구가 있을 것이다. - 조지 매슈 애덤스

 

용기는 무모하거나 바보 같은 경우가 거의 없다. 용기는 맞서 싸워야 할 장애물에 대한 고도의 실질적인 판단을 수반한다. - 마거릿 트루먼

 

 

다릴 앙카.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가슴 뛰는 것과 불안해 하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는 긍정적으로 본 것이고 하나는 부정적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정말로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불안감을 피하기 위해 그 행위를 하고 있는지, 당신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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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개봉했던 영화 "왓 위민 원트 What Women Want"에서 남자 주인공 멜 깁슨은 여성들의 속 마음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얻어, 여자를 잘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매력을 뽐내고 직장에서도 이 능력을 활용해 성공한다.

 

영화 속 초능력은 아니더라도 조금만 신경써서 세심하게 상대의 행동이나 말, 습관을 관찰하고 소통한다면 상대의 마음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배려와 존중을 통해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본문발췌]

 

 

타인과 교류할 때의 나를 관찰해야 비로소 나 자신을 알 수 있다. - 리샤오룽

 

 

아무리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라도 단편적인 행동이나 표정만으로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판단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상대를 관찰해 추론하는 일은 누구나 가능하다. 이때 중요한 점은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상호 교류를 통해 상대의 몸짓 신호에 숨겨진 심리를 테스트해보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이것이 상대에게 좀 더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언어 상대주의(Linguistic Relativism, 사피어-워프의 가설Sapir-Whorf hypothesis)에 따르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가 사용자의 사고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제아무리 무료한 시간도 모두 한정판인 셈이다.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쳤을 때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예컨대 맥아담스처럼 내러티브 이론을 논하는 많은 심리학자들은 '이야기를 하는 행위'와 '이야기를 듣는 행위'를 통해 인간은 단순한 소통을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구조화하고 의미화한다고 말한다. 즉, 아무리 소소하고 일상적인 경험일지라도 그에 대해 완벽하게 서술하는 순간 서술과 경청이라는 상호 과정을 통해 그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탐색하는 중요한 사고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로써 더 이상 사소한 일이 아닌 서로에게 의미 있는 경험이 된다는 뜻이다.

 

 

진실한 사람은 사랑을 핑계로 무례하게 굴지 않는다. 우리가 애초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를 존중할 만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장 자크 루소의 <에밀> 중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신뢰를 얻길 갈망한다. 관계 맺기가 쉬워질수록 신뢰의 중요성은 더욱 커져간다. 심리학에서는 신뢰를 '인지적  신뢰Cognitive Trust'와 '정서적 신뢰Affective Trust'로 분류한다. '인지적 신뢰'란 상대가 자신을 도와 원하는 결과를 얻게 해주리라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인지적 신뢰는 상대에게 기대 자신이 갈망하는 무언가를 얻을 때 생겨난다. 그러나 정서적 신뢰는 이와 다르다. 정서적 신뢰는 상호 교류와 서로에 대한 호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일체'감이 반영된다. 다시 말해서 상대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고 정서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길 때 정서적 신뢰가 쌓인다. 

 

 

친밀감, 열정, 헌신 중 당장 어떤 요소를 중요시하든 관계를 지속해 나아가려면 기꺼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신뢰를 쌓고 서로를 존중하려는 모든 노력이 사랑을 만들고 또 그 사랑을 유지시켜주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중요한 건 일정표에 적힌 우선순위가 아니라 당신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 스티븐 코비

 

 

부정적 사고를 이기는 행동으로 기분을 전환해도 좋고, 부정적 사고를 이기는 심리요법으로 부정적 사고회로에서 벗어나도 좋다. 그러나 정말로 영구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미국의 대문호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도전은 삶에 재미를 더하지만, 도전을 극복하면 삶이 의미 있어진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007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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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경제부국들 중 일부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했고, 일부는 저개발, 개발도상국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싼값에 자원 독점하거나 적은 비용으로 자신들의 폐기물 처리장으로 활용하며 편익과 부를 쌓았다. 

 

잘사는 나라 사람들의 자원과 에너지 소비량, 폐기물 생산량은 저개발, 빈곤국가 사람들보다 몇 배에서 수 십배에 이른다. 지속가능한 환경과 자연을 후손들과 공유하기 위해 더 많은 책임을 누가 져야 할까?

 

 

[본문발췌]

 

 

위기와 변화를 요구하는 압력은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닥친다. 한 사람의 개인부터 팀과 기업, 국가와 전 세계까지 규모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있다. 위기는 외부적 압력으로 야기될 수 있다. 예컨대 개인이라면 이혼으로 배우자와 헤어지거나 배우자의 죽음으로 혼자가 되기도 한다. 또 국가는 다른 국가의 위협이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다. 한편 내부적 압력도 위기의 원인이 된다. 개인에게는 질병, 국가에는 사회적 갈등이 내부적 압력의 대표적 예이다. 외부적 압력이나 내부적 압력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려면 선택적 변화selective change가 필요하며, 이는 개인과 국가 모두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선택적'이란 단어이다. 개인이나 국가는 완전히 변할 수도 없고 과거의 정체성을 규정하던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없다. 물론 그런 변화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위기를 맞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중요한 과제는 정체성 중 제대로 기능해서 바꿀 필요가 없는 부분이 무엇인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바꿔야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압력을 받으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정직하고 자세하게 조사해야 한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어떤 부분이 새로운 환경에서 제대로 기능하며 적정성을 유지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런 부분은 당연히 보존하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찾아내는 용기도 필요하다. 동시에 개인과 국가는 자신의 능력과 가치관에 양립하는 새로운 해결책도 찾아내야 한다. 물론 분명한 기준을 세우고 정체성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강조해야지, 그 부분까지 바꿀 이유는 없다.

 

 

오랫동안 무르익던 외부의 군사적 위협이 갑자기 구체화되며 급작스레 위기를 맞았다는 점에서 핀란드와 메이지 시대 일본은 유사했다. 핀란드인과 일본인은 강력한 국가 정체성과 핵심 가치를 지닌 까닭에 절대적 열세를 무릅쓰고 목숨을 희생하며 국가지를 지켰다. 일본인은 메이지 시대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런 시험을 받았다. 핀란드와 일본은 무서울 정도로 정직하고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 두 국민은 정반대였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많은 국가, 그것도 일본 자체를 위협하던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았지만 핀란드는 겨울 전쟁 동안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일본은 문제의 해결을 본보기로 삼을 만한 모델이 많았지만 핀란드는 그런 본보기가 없었다. 또 많은 인구, 경제력, 적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거리라는 이점을 활용해 일본은 위협하는 국가들과 군사적으로 대등한 수준에 올라서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핀란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데다 국력도 약해 그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칠레와 인도네시아의 위기는 정치계의 양극화, 깊이 내재된 핵심 가치의 불일치, 타협의 거부와 정적의 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요즘의 외교에 비추어보면 바르샤바 게토에서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행동은 가해국의 지도자가 큰 고통을 당한 피해국의 국민에게 보낸 진심 어린 사과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국민에게, 일본 총리가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스탈린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에게, 드골이 알제리인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한 적이 있었던가?

 

흥미롭게도 독일은 각각 21~23년이란 기간 동안 참담한 패배를 당한 후 그 패배를 딛고 금세 일어서는 네 번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첫째는 1848년의 실패한 통일 시도부터 통일에 성공하는 1871년까지 23년의 기간, 둘째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부터 그 패전의 조건을 뒤집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하는 1939년까지 21년의 기간이다. 셋째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부터 1945년경에 태어난 대학생들이 시위하며 저항한 1968년까지 23년의 기간이고, 넷째는 1968년의 대학생 시위부터 독일이 재통일된 1990년까지 22년의 기간이다. 물론 네 기간과 관련한 사건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고 그 기간, 특히 1968년부터 1990년까지의 기간을 결정하는 데는 외부 요인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기간의 유사함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는 듯하다. 21~23년은 대략 인간의 한 세대이다. 1848년, 1919년, 1968년은 당시 청소년 혹은 성년기에 접어든 독일인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로부터 20년 후에 그들은 독일 지도자로 성장했고, 청년기에 경험한 사건을 궁극적으로 완료하거나(1871년, 1990년) 뒤집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1939년). 1968년의 학생 시위에 참여한 주역과 시위를 이끈 지도부는 당시 40대나 50대이던 노련한 정치인이 아니라 20대이던 미숙한 급진주의자였다. 하지만 1968년의 학생 시위를 경험한 한 독일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1968년이 없었다면 1990년도 없었을 겁니다."

 

 

장래에 일본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첫 번째 장애물은 변화된 환경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 전통적 핵심가치. 예컨대 일본은 점점 줄어드는 자연 자원을 지속 가능하게 수확하려는 국제사회의 공동 노력을 선도하지 않고, 세계의 자연 자원이 무궁무진한 것처럼 무제한적으로 확보하려는 욕심을 좀처럼 거두지 않고 있다.

 

두 번째 장애물은 제2차 세계대전과 당시의 잔혹 행위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지 않고, 자기 연민에 초점을 맞추며 일본을 피해국으로 해석하는 경향이다. 개인의 삶이 그렇듯 국가 정책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면 문제 해결에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일본이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진정으로 개선하고 싶다면 독일의 선례를 따라 자국의 책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몇몇 핵심 영역에서 정직하고 현실적인 자기평가가 부족한 것도 일본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앞에서 언급한 자연 자원과 제2차 세계대전도 정직한 자기평가의 결여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인구 감소의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믿음이다. 물론 인구가 현재의 1억 2,700만 명에서 2,000만 명으로 줄어들면 문제가 되겠지만, 내가 보기에 8,000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면 불리한 것은 없고 오히려 이점이 훨씬 더 많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현대사에서 저주와 다름없는 수입 자원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 말했듯 일본이 강한 이유는 질적인 부분에 있는 것이지 인구 자체 때문이 아니다. 

정직한 자기평가가 필요한 또 하나의 분야는 이민이다. 이민은 많은 국가가 일본이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문제 - 젊은 노동인구와 은퇴한 노령자 비율, 보육을 위한 제한된 선택 가능성, 턱없이 부족한 노령자 도우미 - 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일본은 캔다의 성공한 이민정책을 모방하거나, 일본인 해외 이주자가 미국과 남아메리카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국에 적합한 이민정책을 수립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반면 일본이 계속 이민을 제한하더라도 명확한 대안을 실행에 옮기는 방법도 있다. 예컨대 여성이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걸 방해하는 요인을 제겋마으로써 일본인 노동인구를 확대하고, 어린아이의 보육자와 간호사 혹은 노령자의 도우미 등 특정한 분야에서 일할 이주 노동자에게 발급하는 비자 요건을 완화하는 방법이다. 이런저런 해법 중 완벽한 거은 없다. 어떤 방법이든지 장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필요한 것은 지금처럼 좌고우면하며 망설이지 않고 어떻게든 하나의 해결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장래에 미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강점과 중대한 문제

 

미국인의 삶에서 이 모든 영역은 최근에 폭넓게 논의되는 현상 -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쇠퇴 - 의 면면이다.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이 <나 홀로 볼링>에서 정의했듯 "사회적 자본은 개인의 관계, 즉 사회적 네트워크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호혜성과 신뢰성의 규범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자본은 몇몇 사람이 '시민적 품성civic virtue'이라 부르던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적 자본은 북 클럽과 볼링 클럽, 교회 모임과 공동체 조직, 사친회부터 정치 조직, 전문가 모임과 로터리 클럽, 주민 회의와 노동조합, 재향군이회까지 온갖 종류의 단체에 적극적으로 가입해 회원이 됨으로써 얻는 신뢰와 우애, 소속감,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가리킨다. 이런 단체에 가입하면 일반화와 호혜성이 형성된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하고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 따라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회원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얼굴을 대면하는 오프라인 모임의 기회가 줄어든 반면, 상대를 만나지도 않고 목소리를 듣지도 않는 온라인 모임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퍼트넘을 비롯한 많은 학자는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이 쇠퇴하는 이유에 대해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포기하고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정치적 타협의 결렬, ... 나는 정치의 양극화를 현재 미국이 당면한 가장 위험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상대적으로 집착하는 중국이나 멕시코와의 경쟁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중국이나 멕시코가 미국을 파괴할 가능성은 없다. 미국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는 미국인뿐이다.

 

투표/선거의 문제, 투표율이 낮은 이유가 유권자의 자발적 선택이든 아니든 유권자 등록을 위한 까다로운 조건은 유권자에게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행동하도록 만들며, 미국 민주주의의 기본 장점을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앞에서도 말했듯 민주주의의 장점은 국민에게 모든 제안을 토론하고 평가한 후 선택할 기회를 제공하며, 국민에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고 의견을 평화롭게 표현할 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또 시민 폭력의 위험을 줄이고 타협을 장려하며 정부가 일부 국민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민주주의의 장점이다. 결국 투표는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수단인 셈이다. 따라서 미국인이 적극적으로 투표하지 않고, 투표하더라도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장점을 스스로 내팽개치는 짓과 다를 바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미국 민주주의에 대해 흔히 비판적으로 거론하는 문제점, 즉 폭발적으로 상승한 선거비용을 다루지 않고는 현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토론도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홍보 수단이 비교적 저렴한 인쇄물에서 값비싼 텔레비전으로 바뀐 것이 원인이다. 선거비용은 이해관계를 따지는 부자에게 주로 지원받는다. 게다가 선거운동 기간이 한없이 늘어진 것도 비용 상승의 주원인이다. 이제는 실질적으로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선거운동을 시작해야 할 지경이다. 그 때문에 미국 정치인은 국가 관리라는 본연의 임무보다 기금 모금과 선거운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알애한다.

 

미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또 하나의 문제는 불평등이다. 

가장 불평등한 민주국가는 바로 미국이다. 이 결론은 오래전부터 분명한 사실이었고 미국의 불평등은 지금도 더욱 심화되고 있다.

미국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몇몇 기준은 자주 인용되며 이제는 상당히 친숙한 개념이 되었다. 예컨대 미국의 상위 1%가 벌어들인 조정 전 국민소득은 1970년대에 10% 이하였지만, 오늘날에는 25% 이상으로 증가했다. 부유한 계층 내에서도 불평등이 심화하는 실정이다. 상위 1%의 소득이 상위 5% 보다 훨씬 많이 증가했다. 3대 부자(현재 제프 베조스, 빌 게이츠, 워런 버핏)의 순자산을 합하면 하위 1억 3,000만 명의 순자산을 합한 액수와 거의 동일하다. 또 미국 국민 중에서 억만장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두 번째로 비율이 높은 캐나다와 독일의 두 배이고, 대부분의 주요 민주국가와 비교하면 일곱 배나 높다. 한편 미국 최고경영자의 평균 소득은 1980년에 이미 동일 회사 근로자 평균임금의 40배였는데, 이제는 수백 배까지 치솟았다. 또 다른 주요 민주국가들과 비교할 때 미국 부자의 경제적 지위는 월등히 높은 반면, 가난한 미국인의 경제적 지위는 더 낮다.

경제적 불평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 다른 쟁점은 사회경제적 신분 이동, 즉 개인이 경제적 불평등을 극복하고 가난한 사람이 부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 다른 주요 민주국가의 국민보다 미국인은 '미국이 능력을 중시하는 국가'라고 굳게 믿는다. 따라서 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성공하고 보상받을 수 있는 사회가 미국이라는 게 미국 국민의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무일푼에서 부자로!'라는 미국의 이상으로 상징된다. 요컨대 미국인은 무일푼으로 미국에 이주한 사람도 능력과 근면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인의 이 소중한 믿음은 과연 진실일까? ... 다른 주요 민주국가와 비교할 때 미국에서 사회경제적 신분 이동 가능성은 낮지만, 가족 세대 간 상관관계는 더 높다. 예컨대 아버지가 자신의 세대에서 하위 20%에 속한 경우, 그 아들 역시 42%가 그 세대에서 하위 20%에 머물렀다. 반면 그렇게 가난한 아버지를 두고도 상위 20%까지 올라선 아들, 즉 무일푼에서 부자가 된 아들은 8%에 불과하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 두 부문의 비율은 약 26%(미국은 42%)와 13%(미국은 8%)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전부터 미국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심화했고, 사회경제적 신분 이동은 줄어들었다. 연방과 주, 지방 차원에서 모든 정부가 부자에게 영향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각 정부는 부자에게 유리한 법(예컨대 유권자 등록법과 조세정책)을 통과시키고, 그 결과로 부자가 선호하는 후보가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후보가 당선되면 다시 부자에게 유리한 법을 더 많이 통과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정부는 다시 부자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악순환이 끝없이 이어진다. 

 

미국 정부가 대다수 미국인의 미래를 위한 투자에 인색: 인적자원과 공공의 목적을 위해 투자하는 돈의 감소

미국은 과학과 테크놀로지 및 고급 노동 인력에 기초한 과거의 경쟁 우위를 상실하고 있다. 적어도 세 가지 추세에 이런 쇠퇴가 가속화되고 있다. 첫째는 교육에 투자하는 비용의 감소이고, 둘째는 교육비에서 얻는 결과의 감소이며, 셋째는 미국인이 받는 교육의 질이 천양지차라는 현실이다.

 

미국인은 미국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지만,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아직 이루어내지 못했다. 정직한 자기평가도 턱없이 부족하다. 근본 문제가 양극화, 투표율과 까다로운 유권자 등록, 불평등과 쇠퇴하는 사회경제적 신분 이동, 교육과 공공의 목적에 대한 정부 투자의 감소라는 폭넓은 합의도 없다. 대다수 미국 정치인들과 유권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또 압도적 다수가 미국 문제를 미국인 자신보다 '다른 족' 탓으로 돌리며, 그 비판의 화살은 중국과 멕시코 및 불법 이민자에게도 향한다.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소수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된 현상 자체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와 영향력을 할애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과 가족만이라도 미국 사회의 문제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으려고 발버둥 칠 뿐이다. 

 

 


장래에 세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전 세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네 가지 유형의 문제: 1) 핵무기 폭발, 2) 기후변화, 3) 세계적 자원 고갈, 4) 세계적 차원의 생활수준 불평등... 다른 문제들: 이슬람 근본주의, 새롭게 생겨난 전염병, 소행성 충돌, 생물의 대량 멸종

 

1인당 평균 인간 영향은 한 사람이 소비하는 평균 자원량(예, 석유)과 생산하는 평균 폐기물량(예, 하수)을 뜻한다. 세 요소의 양 - 인구수, 자원 소비량, 폐기물 생산량 - 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석유, 금속 같은 자원의 1인당 평균 소비량과 플라스틱, 온실가스 같은 페기물의 1인당 평균 생산량은 개발도상국가보다 제1세계 국가에서 약 32배 높다. 예컨대 가난한 국가의 시민보다 미국인이 32배 많은 휘발유를 소비하고, 32배 많은 플라스틱 폐기물과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는 뜻이다. 32라는 인수는 개발도상국가 국민의 행동에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의 미래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926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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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동서양의 왕족, 귀족, 명문가에서는 10~20대의 집안 젊은이들을 먼 지방이나 먼 나라까지 여행을 보내,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친구를 사귀고, 지식을 쌓고, 스스로와 주변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발견, 꿈을 키우고, 삶의 방향과 목표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본문발췌]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우선순위에 있다. 다른 사람의 기대를 나의 자유 의지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기 때문에 삶이 힘든 것이다.

 

 

누구나 인생을 사는 동안 한 번은 혼자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남이 정해 준 대로 살게 된다. 여행은 내가 원하는 삶을 발견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여행은 당신에게 적어도 세 가지의 유익함을 줄 것이다. 첫째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고, 둘째는 집에 대한 애정이고, 셋째는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 브하그완 S. 라즈니쉬

 

 

희망과 목표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희망을 품고 살아갈 때, 자기 삶에서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대화가 인간의 지적 활동에 묘약인 것처럼 고독은 인간의 정신 활동에 묘약이다. - 에밀 시오랑

 

 

당신이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을 만큼만 소유해라. 언어를 배우고, 국가를 이해하고, 사람들을 받아들여라. 당신의 기억력이 곧 당신의 여행 가방이 될 수 있도록...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삶을 유쾌하게 바꾸는 여행의 지혜 A to Z

  • A. 솔직함, 진정성  

    여행을 할 때는 훗날 일을 생각해서 적당히 좋은 척을 하거나 스스로를 포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행동하면 되고, 다른 사람들 또한 당신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 들인다. 스스로에 대해 숨김이 없게 되니, ‘솔직함’ 또한 예전보다 커진다. 일상에서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본래의 나로 행동함에 따라 ‘진정성’도 얻게 된다.

  • B. 열정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노출 되면 일상에 억눌려 있던 열정이 깨어나곤 한다. 삶에 대한 열정이나 하고 있는 일 또는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정’이 내면에서부터 끓어오른다.

  • C. 기질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속한 집단과 사회에 맞게 사회화가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타고난 특성, 즉 기질은 모습을 감출 때가 많다. 그런데 혼자 여행을 하면 숨겨져 있던 이 ‘기질’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러 돌발 상황과 새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는지 유심히 관찰해 보라. 자신의 성향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 B. 열정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노출 되면 일상에 억눌려 있던 열정이 깨어나곤 한다. 삶에 대한 열정이나 하고 있는 일 또는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정’이 내면에서부터 끓어오른다.

  • D. 감사하는 마음 

    처음 여행을 떠나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일상이 지루하리 만치 반복적으로 흘러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곁에서 노력하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다 보면 평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생활 환경이나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 E. 결단력 

    혼자만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일상생활을 해 보면 자신이 예전보다 결정을 훨씬 수월하게, 훨씬 빨리 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예전과 달리 다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결정을 당당하게 내리게 된다. 혼자서 여행할 때 수많은 결정을 직접 내렸기 때문이다. 여행에서는 어느 누구도 당신 대신 결정을 내려주지 않으며, 결정에 대한 책임을 대신 떠맡지도 않으므로 당신의 ‘결단력’이 신장된다. 당신 자신을 발견해가고,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결정을 당당하게 내려 보라!

  • F. 융통성 

    계획을 아무리 철저하게 짰더라도 여행지에서 계획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자신과의 여행을 하면서 돌발 사고에 대처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융통성’ 또한 커질 수 있다.

  • G. 즐길 수 있는 능력 

    우리는 여행 중에 종종 일상에서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일탈 행동을 할 때가 있다. 흥에 취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가둬 두는 많은 제약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능력’ 역시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 H.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 

    혼자서 여행을 할 때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 처음 보는 여행자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도와주기도 하고, 여행지의 현지인이 선의를 가지고 호의를 베푸는 경우도 있다. 당신은 여행을 하면서 당신을 돕고자 하는 사람과 여러 차례 마주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하고 나면 당신 역시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 것이다.

  • I. 직관  

    여행 중에는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 판단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가 비일비재하다. 이때는 우리의 ‘직관’에 집중해야 한다. 기업의 최고 경영자 중에 자신의 직관에 따라 결정을 내렸을 때 최고의 결과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직관에는 이성적인 사고가 갖지 못한 어떤 힘이 숨겨져 있다. 당신이 평소 논리적인 사람이었다면 여행은 직관적 판단을 내리는 연습을 하기에 아주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 J. 젊음 

    세계적인 동화 작가 안데르센은 “나에게 여행은 정신의 젊음을 되돌려 주는 샘물이다”라고 말했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즐거움과 도전 정신을 회복하게 되면 자연스레 우리의 생각도 ‘젊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 K. 힘을 복돋아 주는 강장제  

    여행이 끝난 뒤에 여행은 그 자체로 선물이 된다. 당신이 삶에 지치거나, 의욕을 잃었을 때 여행의 기억은 당신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강장제’의 역할을 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기력이 회복되는 추억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 L. 해법지향적인 사고  

    자신과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화를 내거나 불평하는 횟수가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화를 내거나 불평을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고 부질없는 일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혼자 여행할 때는 짜증을 내도 아무 소용이 없고, 불평을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가 해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우리가 혼자 여행을 하는 동안 ‘해법지향적인 사고’를 끊임없이 훈련할 수 있는 이유다.

  • M. 용기  

    ‘용기’또한 당신이 자신과의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얻는 멋진 기념품 가운데 하나다. 혼자 여행을 떠난 것 자체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스스로 그 여행을 꾸려 가면서 당신이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 N. 호기심  

    자신이 살던 곳과 완전히 다른 문화권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여행자들은 마치 아이가 된 것처럼 호기심이 넘친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일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아지고, 세상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렸던 탐구심과 ‘호기심’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 O. 정리의 시간   

    여행 기간 동안 당신은 자신이 짊어진 불필요한 짐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떤 짐을 계속 짊어지고 갈 것인지, 어떤 짐을 던져 버릴 것인지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불필요한 짐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배낭처럼 과감하게 던져 버리고, 정돈된 삶을 살도록 하라!

  • P. 책임감   

    홀로 여행을 하다 보면 ‘책임감’ 또한 신장된다. 당신이 정한 여행 목적지에 실제로 무사히 도달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이다. 여행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과 결정으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탓할 수 없고 그 결과를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당신의 책임감 또한 강해질 것이다.

  • Q. 감정의 근원  

    당신은 자기 감정의 근원지를 알고 잇는가? 슬픔, 기쁨, 환희, 분노, 좌절의 감정들을 유발하는 ‘감정의 근원’ 말이다. 이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 자신뿐이다. 이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 자기 자신과 시간을 가지면 자신이 무엇 때문에 슬퍼지고, 무엇 때문에 기뻐지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 R. 마음의 평화  

    당신이 여행을 다녀온 뒤라면 지금 한번 생각해 보라. 출발 전과 달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는가?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평온한 곳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나면 마음에 ‘평화’가 깃든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S. 자아실현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마치고 얻는 기념품 중에 내가 가장 값지게 생각하는 것은 ‘자아실현’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며 새롭게 자의식을 확립해 간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자아의 본질을 실현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 T. 자신에게 맞는 삶의 속도   

    홀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기회이자 과제이기도 한 것은 여행을 하는 동안 자신에게 맞는 ‘삶의 속도’를 찾는 것이다. 여행 가이드가 정한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동반자가 옆에서 당신의 이동 속도를 늦추거나 재촉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성향에 잘 맞는 속도로 여행을 할 수 있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속도를 찾았다면,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삶의 속도에 이를 적용시킬 수 있다.

  • U. 독립성  

    자신과의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면 ‘독립성’ 또한 강화된다. 함께 여행을 떠날 파트너를 구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언제라도 자신에게 적절한 시점에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 여행을 떠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여행 목적지를 결정할 수도 있다. 이는 대수롭자 않게 여길 수도 있지만 꽤 중요한 일이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삶의 여정에 도달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 이듣이 너무나도 많다. 혼자 여행으로 한층 강화된 독립성을 지니게 된 당신은 앞으로 이들과 달리 당신의 성장을 도와주는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 V. 상처의 치유 

    자신과 함께 여행하는 날이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당신은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지 더 깊이 알아 갈수록, 스스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 내면에 있던 상처가 ‘아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W. 내면적 성장,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안목  

    자신과의 여행 동안에는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 이 시간들을 충분히 활용하면 우리는 ‘내면적 성장’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안목’을 얻어 집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 Z. 경청하는 법 

    여행을 하다 보면 여러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여행자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이야기일 수도 있고, 현지인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인 이야기, 혹은 각자의 이유로 여행을 떠나온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좀 더 풍요로운 여행을 하기 위해 이 이야기들을 보고 듣고 흡수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이야기를 ‘경청하는 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경청하는 방법은 인생에서 유용하게 쓰일 소중한 자산이니 일상에서도 경청하는 자세를 잊지 않도록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중요한 날이 둘 있다. 그중 하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한 날이다. - 윌리엄 바클레이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특성을 발휘할 수 있고, 그래야만 무언가 올바른 것을 이행할 수가 있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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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미지의 공간, 새로운 발견의 기회가 많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다른 시각으로 보고 관찰과 사실에 근거한 판단과 해석으로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본문발췌]

 

과학이란 마치 길 건너편에서 열쇠를 잃어버리고 반대편 가로등 아래서 열쇠를 찾고 있는 술 취한 사람과 흡사합니다. 가로등 아래에 빛이 있기 때문이죠.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 노엄 촘스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전통적인 방법을 계속 따른다. 물리학자들은 풀어야 할 문제를 풀었다기보다는 풀 수 있는 문제를 풀어왔던 것이다.

 

 

폴 에르되시의 묘비명에는 "마침내 나는 더 이상 어리석어지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그에게 삶이란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다.

 

 

땅에 바늘을 꽂고 하늘에서 작은 씨앗을 떨어뜨려 바늘에 씨앗이 꽂힐 확률, 이 계산도 안 되는 확률로 너와 내가 만난 것이다. -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아나톨 프랑스는 이런 말을 했다. "우연이란 신이 서명하고 싶지 않을 때 쓰는 가명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원인 없이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우연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원인이 있는데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막연히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명확한 법칙으로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하며, 따라서 우연적인 사건을 기술하는 확률과 통계에 익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확률적으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 재수나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거나, 확률에 관한 오해가 살인자를 세상으로 내보내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끊임없이 질서(규칙성)와 의외성(불규칙성)을 즐긴다. 아주 잘 짜여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새로움이 느껴질 때 우리는 그 음악을 좋아하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잘 짜인 부드러운 전개(질서)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새롭고 예측하지 못했던 부분이 주는 참신함을 즐기는 것이다.

 

 

언어학에서 지프의 법칙, 경제학에서 파레토의 법칙, 베키의 법칙과 무수한 Power law. 이들은 모두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불평등과 불균형이다. 경제나 맥주 소비, 웹페이지 사용 빈도, 도시 인구 등 시스템은 다르지만 각 시스템은 대부분 특정한 몇몇 개체에 대부분의 숫자가 몰려 있고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의 역할(빈도)은 미약하다는 것이다. 또 이런 양상은 어떤 스케일에서 관찰하든 같은 패턴을 보인다는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지프의 법칙의 경우, 한 권의 책에 등장하는 단어들에서 이런 특성이 보일 뿐 아니라 영어로 된 모든 소설, 혹은 모든 문학 작품, 혹은 더 넓게 모든 활자매체의 글을 조사해봐도 똑같은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도시의 인구 분포도 한 나라뿐 아니라 아시아 또는 전 지구적으로 스케일을 넓힌다고 해도 똑같은 모양의 그래프르르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스케일에 무관하게 같은 구조를 되풀이하는 것을 '자기 유사성self-sinmilarity'이라고 부른다.

 

 

공원을 설계하는 건축가들은 공원의 조경이나 설계를 시민들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공원에 오게 하는 것은 대리석 조각품이나 꽃밭, 폭포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는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가 필요하다. - 윌리엄 화이트, 도시인류학자

파코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소비자의 심리를 파악해서 좋은 판매 전략을 세우고 매장 설계와 진열에 이를 응용하자는 것이지 소비자의 심리를 파악해서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것이 아니다. 고객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판매 전략이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와 판매 촉진을 위한 서비스가 대치할 때 과연 그 제공자들은 무엇을 따를까? 이렇듯 고객을 위한 설계와 이윤을 위한 설계가 정면으로 대치할 때 가게 주인은 반드시 이윤을 택하게 마련이다. 백화점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파코 언더힐의 '쇼핑의 과학'이 윌리엄 화이트의 공공장소 설계 원칙과 다른 점이다.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 - 마르셀 프루스트

 

 

위키피디아가 소중한 이유는 다음 세대에게 "공유할수록 서로 부유해진다"는 인생의 놀라운 진실을 가르쳐주었다는 데 있다. 위키피디아는 우리에게 지식을 운반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참여와 공유의 습관을 가르치고, 그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롱테일 법칙의 근간은 현대사회가 히트 상품이나 주력 상품에 집중하는 획일적 사고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능성에 눈뜰 수 있는 계기를 바련해주었다는 데 있다. 실제로 롱테일 법칙은 소수의 히트 상품, 영향력 있는 소수를 넘어, 80퍼센트의 다양한 다수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과 그 다양성의 힘에 주목하고 있다. 80/20 법칙에 너무 매몰되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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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처럼 파편화된 이야기 전개에 쉽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읽는데 시간도 오래 걸렸지만 궁금증 때문에 마지막 장까지 가보지 않을 수 없다. 지친 마음의 안식처든, 깨달음의 길이든, 정처없이 떠난 나그네의 호기심이든 누가나 영산을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어느 한 구석에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1권 발췌]

  • 나는 진작 내가 몸담고 있던 오염된 환경을 떠나 진정한 삶을 찾아 자연으로 되돌아갔어야 했다.

  • 내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삶이 문학의 원천이라고, 문학은 삶에, 삶의 진리에 충실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내 잘못은 바로 삶에서 멀어지고 삶의 진리에 역행하는 데에 있었다. 삶의 진리 다시 말해 삶의 본성은 다름아닌 바로 있는 그대로의 것이어야만 한다. 내가 이러한 진리에서 멀어진 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없는 삶의 현상들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나는 현실을 왜곡하는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 당신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앞만 보고 걸어간다. 당신은 살아오는 동안 정확한 목표를 세운 적이 없었다. 당신이 새운 목표들은 시간이 지나면 변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했다. 그래서 당신은 결국 목표를 갖지 않게 되었다. 잘 생각해보면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벌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아쉽지만 그것을 건드리는 것은 별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줄 것이다. 원래 있던 곳에 그냥 두고 건드리지 않은 채 관찰만 하는 편이 낫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당신은 기분이 훨씬 가벼워진다. 경치가 아름답기만 하다면 당신이 어딜 가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2권 발췌]

  • 인류의 최초의 관념은 문양으로부터 나와 나중에 소리와 결합했고, 그 다음에 언어와 의미가 출현했다.

  • 철학 역시 결국은 하나의 정신적 유희다, 그것은 수학이나 엄밀한 과학들이 도달할 수 없는 변경에 위치한다. 그것으 온갖 종류의 복잡한 구조와 틀들을 제공한다. 구조들이 완성되면 놀이는 끝난다. 소설은 감수성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철학과는 다르다, 소설은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기호의 코드들을 욕망의 혼합물 속에 삼투시킨다, 어느 특별한 순간에 그 체계가 와해되어 살아 있는 세포들로 변하면 생명이 출현한다. 그러면 독자들은 그 생명의 탄생과 성장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정신적 유희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이다. 하지만 그 행위는 삶처럼 어떠한 목적도 지향하지 않는다.

  • 진실이란 재미있거나 듣기 좋은 것일 수 없다, 그것은 분명 어느 정도는 귀에 거슬린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자신의 운명을 심각하게 고려할 수 있겠는가? 

  • 목표를 가지지 않는 것, 그것 역시 하나의 목표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찾아 헤매는 행위 역시 하나의 목표다, 원래 삶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 그냥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것뿐이다.

  • 인간은 인정하지 않을 때에만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지르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자이다. 인간은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내는 이상한 존재다.

  • 당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어린애가 블록을 쌓으며 놀듯, 당신은 언어를 가지고 논다, 하지만 블록으로는 정해진 형태들밖에 만들 수 없다, 모든 구조들은 이미 블록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하든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 언어는 문장이 지나가는 반죽덩어리와 같다. 문장은 버리게 되면 그 즉시 당신은 마치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 속에 빠져버린 듯한 상태가 된다. 

  • 이미지를 잃는 것은 공간을 잃는 것이고, 소리를 잃는 것은 언어를 잃는 것이다. 입술을 움직여도 소리가 나지 않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게 되어도 의식의 한가운데에는 아직 욕망이 남아 있다. 그 약간의 욕망조차 사라지면 그땐 열반에 들게 된다.

  • 선율보다 더 고상하고, 어법과 문법의 한계 너머에 있고 주어와 술어 사이의 구별이 없는, 인칭을 초월하고 논리를 깨뜨리며 느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미지에도, 비유에도, 생각들의 연상이나 상징에도 의존하지 않는, 순수하고, 맑고, 음악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언어를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슬픔과 기쁨을, 고독과 위안을, 난처함과 기대를, 망설임과 결단을, 약함과 용기를, 질투와 후회를, 평온함을, 초조와 자신감을, 관대함과 옹졸함을, 자비와 증오를, 연민과 실의를, 담백함과 평화를, 비열함과 악의를, 고귀함과 악독함을, 연민과 실의를, 담백함과 평화를, 비열함과 악의를, 고귀함과 악독함을, 잔혹함과 선량함을, 열정과 냉담을, 동요하지 않음을, 솔직함과 무례함을, 허영과 탐욕을, 멸시와 존경을, 자만과 의심을, 겸손과 거만을, 고집과 분개를, 노함과 치욕을, 회의와 경악을, 권태와 혼미와 갑작스런 깨달음을, 그리고 끝내는 다시 모호해지고 아무리 명백히 하려 해도 명백해지지 않는, 이 모든 것으로 인한 출발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을 그런 언어를?

  • 당신은 계속 산들을 오른다. 지칠 대로 지쳐 정상에 다가갈 때마다 당신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정상에 도착해 흥분이 좀 가라앉으면 당신은 또다시 뭔가 미진함을 느낀다. 피로가 풀리면 풀릴수록 당신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간다. 당신은 끝없이 이어져 출렁이는 산들을 바라본다. 산을 오르고 싶은 욕망이 또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당신은 이미 오른 산에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은 그너머 산에는 당신이 아직 그 존재를 모르는 또 다른 진풍경들이 숨겨져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산에 올라봤자 당신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당신을 맞이하는 건 쓸쓸한 바람뿐이다.

  • "길은 항상 옳아. 잘못된 건 그 길로 접어든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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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이 말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comedy in long-shot)"은 동일한 상황이 시간, 관점에 따라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내 인생은 희극으로 끝마칠까? 비극으로 끝마칠까? 그 선택은 나에게 있다.

 

 

 

희극(喜劇) 

[명사] 1. 웃음을 주조로 하여 인간과 사회의 문제점을 경쾌하고 흥미 있게 다룬 연극이나 극 형식. 인간 생활의 모순이나 사회의 불합리성을 골계적, 해학적, 풍자적으로 표현한다. ≒코미디.

2. 남의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이나 사건.

 

(네이버 영어사전) comedy, farce

나는 비극보다 희극이 좋다 I prefer comedy to tragedy.

 

 

 

비극(悲劇) 

[명사] 1. 인생의 슬프고 애달픈 일을 당하여 불행한 경우를 이르는 말. 

2. 인생의 슬픔과 비참함을 제재로 하고 주인공의 파멸, 패배, 죽음 따위의 불행한 결말을 갖는 극 형식.

 

(네이버 영어사전) tragedy

그녀가 그렇게 일찍 죽은 것은 비극이었다 It was a tragedy that she died so young.

 

 

[네이버 지식백과] 희극 [喜劇]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희극(喜劇)은 인간의 성격이나 행동에 존재하는 모순과 부조리 같은 약점을 묘사하여 골계미를 드러내도록 하는 극의 양식이다. 비극이 엄숙하고 진지하게 인생의 고뇌를 그리는 반면에, 희극은 명랑하고 경쾌한 기분 속에 인간의 결점이나 사회의 비리를 꼬집어 내어 웃음으로 분규를 해소한다. 희극을 뜻하는 코미디(comedy)라는 말은 그리스 희극인 코모이디아(komoidīa)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제연(祭宴)의 행렬을 뜻하는 코모스(komos)와 노래를 뜻하는 오이데(oide)의 합성어이다. 코모이디아가 디오니소스 축제 때 불러진 남근숭배 노래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은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코미디라는 말은 르네상스 이후 단테의 「신곡(神曲)」의 원제목인 「디비나 코메디아(Divina Commedia)」에서처럼 극 이외의 문학양식에서도 사용되기도 한다. 희극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경쾌하며 웃음이 위주가 된다는 점이다. 희극의 웃음은 인간성의 불합리나 사회의 모순을 꼬집어 내는 데에서 빚어지는 웃음이다. 그러므로 희극에는 기지와 풍자와 해학 등의 요소가 작용하며, 동시에 비판 정신이 강조된다. 희극은 행복하고 즐겁게 결말을 맺는다. 주동인물이 처음에는 패배하고 고전하지만, 결국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행복에 이른 것이 희극이다. 희극의 인물은 서민적이며, 사회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비극의 인물이 고귀한 신분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점과 서로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비극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지만, 희극에 관한 논의가 그리 많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을 비극과 대조하면서 희극은 일상적 인간보다 뒤처진 사람을 그리고 있지만 그 열등함이나 우스운 모양이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간단히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희극이라는 것이 인간의 일상생활을 묘사하되 그 결말이 웃음과 행복으로 끝나는 연극이라고 규정하게 된 르네상스 이후의 일반화된 희극의 정의로 발전한다. 중세기 이후까지 희극은 일반 사람들보다 모자라는 인물을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 관객을 교화한다는 것이 일반화된 논리였다. 18세기 말부터는 상대방에 대한 우월감에서 희극의 웃음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지닌 부조화성에서 웃음이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희극에 담겨진 희극정신과 그 문학적 효과를 높이 평가한다. 낭만주의 예술에서 높게 평가하는 아이러니,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과 조소, 삶의 부조리성의 적극적 표현 등에서 희극의 특징이 드러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극 [tragedy, 悲劇] (두산백과)

인간의 마음 속에 생기는, 자신의 동료나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의 갈등의 결과로 생기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을 취급한다. 비극의 기원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디오니소스신을 찬양하는 열광적인 노래와 춤이 포함된 디시램브(dithyramb)라고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종교적인 축제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아카데미의 축제기간에 열리는 연극경연대회에서 우승한 비극시인에게 양 한 마리를 주었기 때문에 트라고이디아(tragoīdīa)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詩學)》에서 비극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를 내렸는데, “비극은 가치 있거나 진지하고 일정한 길이를 가지고 있는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다. 쾌적한 장식을 한 언어를 사용하고, 각종 장식이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삽입된다. 서술의 형식이 아니라 행동의 형식을 취한다. 또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감정을 정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라고 정의하였다. 비극은 무자비하고 비극적인 운명에 의해 추구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가장 고귀하고 가장 용감한 인간을 표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낙관적인 견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운명에 의해 파멸될 때라도 그는 그것 때문에 고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은 독백이나 대화의 대사 이외에 고대 축제의 합창과 춤을 지녔다. 행동을 구성하는 에피소드들은 이러한 합창에 의하여 결합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였다. 뚜렷한 행동이 없으며, 등장인물의 수가 적고, ‘서브플룻’이나 ‘코믹 릴리프’가 없었다. 전쟁이나 암살과 같은 실제의 사건들은 무대 위에서 상연되기보다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서술되었다.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그리스 비극시인 중 가장 위대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에 대한 분석의 기초로 삼은 것도 바로 이들의 작품이다. BC 240년 그리스인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가 그리스극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공연함으로써 비로소 로마인에게 비극이 소개되었다.

 

그 이후 로마의 비극은 계속 그리스극의 형식을 따랐다. 로마의 비극은 완전하게 전하는 것은 없고 그 단편만이 남아 있지만, 그것들을 통해 살펴볼 때 그리스 비극보다 훨씬 더 멜로드라마틱하다. 로마 비극의 유일한 대가(大家)는 세네카로 그가 나타났을 때 이미 로마연극에는 분열이 생겨 대중적인 무대극과 공연용이 아닌 읽기 위한 문학적인 극으로 나뉘어 있었다. 세네카의 극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서 호라티우스가 그의 《시학:Poetica》에서 제시한 연극이론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호라티우스는 비극에서 그리스의 원형을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연극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육적 효과까지도 믿었다.

 

세네카의 서재극(書齋劇:closet drama)에 의해 표현되고, 14세기와 15세기 인문주의 번역자들에 의해 전승된 바로 이러한 철학이 중세와 르네상스 유럽연극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질서 있는 세계에서의 비극은 운명의 장난으로 위대하고 고결한 정신이 패배하는 것이었다. 중세의 새로운 질서가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의 영혼 위에서 작용하기 전까지는 그러한 비극의 개념이 유지되었다. 중세 세계관에서 볼 때,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은 오히려 인간이 운명의 지배를 받도록 만들었으며, 그래서 인간의 조건은 그리스와 로마의 그것만큼 비극적이었다. 거기에다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는 자신에게 속죄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신의 질서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것은 더 이상 영웅적인 것이 될 수 없었으며, 신의 자비를 받지 못하거나 역경에 굴복하는 것은 곧 비극이었다.

 

중세의 기적극(奇蹟劇:miracle play)이나 신비극(神秘劇:mystery play)은 신자들을 가르치고 속죄를 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데 공헌하였다. 비극이나 연극의 교훈적 ·윤리적 기능에 대한 개념이 주장되는 한편에서는 유럽 문화가 전반적으로 종교에서 분리되는 것과 함께, 15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재발견함으로써 비극의 고전적인 개념이 부활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대한 신고전주의자들의 해석은 바로 법이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의 해석자들은 연극이 자연의 완전한 모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무대상의 시간과 실제의 시간이 일치해야 하며, 행동은 한 번에 한 장소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다. 즉, 시간 ·장소 ·행동의 3일치를 엄격하게 지켜야만 되었다. 이와 같이 엄격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구조 속에서 17세기 프랑스의 코르네유나 라신 같은 신고전주의 극작가들은 비극을 새로운 위치에 올려 놓았다. 신고전주의의 영향은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었지만 영국과 에스파냐의 극작가들은 덜 독단적이었다.

 

말로나 셰익스피어 등은 고전적인 것과 토착적인 것, 비극과 희극, 높은 신분의 인물과 천한 계급의 인물을 혼합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베가, 세르반테스, 칼데론 데 라바르카 등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이와 같은 영향 때문에 영국과 에스파냐의 연극에서는 신고전주의의 도그마가 사실상 확고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하였다. 또한 볼테르와 알피에리가 18세기의 원숙한 신고전주의 연극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있다고 쓰기는 했지만, 그 곳에서도 이미 신고전주의의 요새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에 이르러 운명이나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비극의 신뢰는 기반을 잃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초, 중산계급의 비극 또는 부르주아극(劇)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영국의 조지 릴로, 이어서 프랑스의 디드로, 보마르셰,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독일의 레싱 등에 의해 비극의 초점은 왕자나 초인간적인 영웅의 고통 또는 불행으로부터 서민들의 그것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극작가들은 그들의 영웅을 죽음이나 패배로 몰고 가는 것을 주저하기조차 하였다.

 

그것은 괴테나 실러의 낭만적인 비전에서 볼 때, 시련은 극복되는 것이며 마지막에 이르러 낭만적인 영웅은 고전비극의 영웅과 마찬가지로 역경(逆境)에 의해 고결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통과 인내에 대한 보답은 패배가 아니라 필연적인 승리였다. 반대로 처벌이 비겁과 악에 대한 보답으로 되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멜로드라마나 19세기의 고딕 로맨스와 별로 다르지 않다. 후에 뒤마 피스, 졸라, 그 밖의 다른 사실주의 극작가들은 현대인의 비극을 역사 ·경제 ·사회의 결정론적인 힘에 대항하여 희망없는 싸움을 하는 것에서 찾았다.

 

반면에 입센과 그의 추종자들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 즉 고독이나 정서적인 고립이라고 생각하였다. 20세기의 상호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세계 속에 있는 인간의 이와 같은 비극적 소외는 사르트르, 카뮈, 피란델로, 베케트 등과 같은 극작가들에 의해 다루어졌으며, 실존주의 연극이나 부조리극(不條理劇)의 핵심이 되었다. 이들이나 다른 극작가들에게 인간의 존재는 바로 비극적인 것이며 공포의 대상이 었다.

 

 

 

[글과 책 속에 쓰인 '희극/비극'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최인철, <굿 라이프>

삶이란 해석과 재해석의 연속이다. 과거의 즐거움이 지금 생각하니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후회하고, 과거의 고통이 지금 생각하니 축복이었다고 감사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comedy in long-shot)"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순간의 경험들은 그 순간에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평가된다. 따라서 순간의 기분만을 가지고 좋은 삶을 이해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플롯은 스토리 내에서 행해진 것, 즉 사건의 결합을 의미한다. 한편 성격은 행동자를 일정한 성질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바를 의미하며, 사상은 행동자들이 무엇을 증명하거나 또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할 때 그들의 언사에 나타나는 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이 여섯 가지 요소에 의하여 비극의 일반적인 성질도 결정되는데, 플롯과 성격과 조사와 사상과 장경과 노래가 곧 그것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조사와 노래)는 모방의 수단에 속하고, 한 가지(장경)는 모방의 양식에 속하고, 세 가지(플롯, 성격, 사상)는 모방의 대상에 속한다.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동 가운데 있으며 비극의 목적도 일종의 행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인간의 성질은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행, 불행은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드라마에 있어서의 행동은 성격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격의 행동을 위하여 드라마에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또 행도 없는 비극은 불가능하겠지만 성격 없는 비극은 가능할 것이다.

 

비극은 가능한 한 태양이 일 회전하는 동안이나 이를 과히 초과하지 않는 시간 안에 사건의 결말을 지으려는 경향이 있다.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한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세상사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 찰리 채플린

 

 

윌리엄 피네건, <바바리안 데이즈>

삶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다.

 

 

피천득, <인연>

가난한 것이 비극이 아니라 가난한 것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다. - 치옹 윤오영

 

하품을 하면 따라 하품을 하듯이 우정은 오는 것이다. 오랫동안 못 만나게 되면 우정은 소원해진다. 희미한 추억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나무는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르는 것이 더욱 어렵고 보람 있다. 친구는 그때그때의 친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좋은 친구는 일생을 두고 사귀는 친구다. 우정의 비극은 이별이 아니다. 죽음도 아니다. 우정의 비극은 불신不信이다.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비극은 온다. - 「우정」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타자는 깨달음의 계기다. 자기 시점에서 세상을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타자에 의한 세상의 이해와는 다르다. 물론 타자의 견해를 '네 생각은 틀렸어'라며 부정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인류에게 일어난 비극의 대부분이 자신은 옳고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는 틀렸다고 단정한 데서 야기되었다. 그러나 나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른 타자를 배움과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와 다른 관점의 가치관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비극은 선한 삶에 대한 깨달음을 주어야 할 뿐 아니라 너그러운 마음을 붇돋아주기도 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들은 우리가 얼마나 사악하고 어리석고 육욕에 불타고 화를 잘 내며 맹목적일 수 있는지 알려주기를 즐겼지만, 그러면서도 복잡한 연민을 가질 여지는 남겨놓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사례들을 전함으로써, 우리가 고귀하지만 추악한 결점을 가진 종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잘 타이른다. 우리는 놀라운 재주를 지녔거나 능숙하게 의술을 선보이는 사람이기도 하고, 오랜 기간 사랑으로 자녀를 돌보는 존재일 수도 있지만, 딱 한 번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삶 전체를 돌려세워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를 두려워해야 한다.

 

 

안드레아스 와이겐드, <Data for the poeple: 포스트 프라이버시 경제>

미디어와 마케팅 전문가들도 끊임없이 우리의 감정을 조종하며, 정보를 선별적으로 공개하여 우리의 마음을 좌지우지한다. 이것이 그리스 비극, 정보 광고, 그리고 '꼭 봐야 할' TV 프로그램이 본질이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비극은 어른들이 자신이 잘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할 시간과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가능성과 더 많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단지 많은 이들이 이런 부분을 간과하여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주어진 현실을 절대 뒤집을 수가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현실을 바꾸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건 스스로에 대한 약한 믿음일 뿐이다.

 

 

호프 자런. <랩걸>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스티드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자신을 잘 안다는 것 (시드니 J. 해리스)

세상의 모든 비극 중 구십 퍼센트는 자기 자신, 능력, 약점, 심지어 실제 가치조차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주요한 미적 범주가 시대마다 달라진다. 가령 그리스 예술에선 '미'라는 범주가 우세했다. 반면 중세 예술은 철두철미하게 '숭고'의 예술이었다. 중세에는 희극성을 허락하지 않았고, 저 천상의 '미'와 지상의 '추'를 대비시켰다. 한편 고전주의 예술은 '미'를 추구했지만, 바로크 예술은 '극적인' 묘사를 추구했고, 로코코는 '우미'의 예술이었다. 고전주의자는 예술에 '추'를 그리는 걸 일절 허락하지 않았지만, 낭만주의자는 오히려 허울 좋은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추함'을 폭로하는 걸 즐겼다. 미적 범주의 가능성은 이렇게 시대마다, 유파마다 달라진다.

 

이렇게 세계 자체가 한 편의 거대한 비극이다. 무대 위의 비극은 이 우주적 비극의 반복일 뿐이다. 그래서 비극에도 마야의 세계와 그걸 한순간에 집어삼키는 광포한 힘이 있다. 아폴론은 극 중 마야 세계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가상 세계를 만들어낸다. 인생에 취하듯이, 우리는 극에서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가상에 매혹된다. 아폴론은 이렇게 덧없는 현세를 긍정함으로써 '개체화 원리의 장렬한 신상'이 된다. 하지만 아폴론적 가상은 디오니소스적 세계 위에 드리워진 얇은 베일일 뿐이다. 이 베일 뒤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비극의 주인공을 여지없이 파멸로 몰아간다. 아폴론이 개별화로 생긴 세계를 긍정하면, 디오니소스는 개체를 파괴하여 원래의 근원적 존재의 품안으로 되돌린다. 이때 무서운 삶의 진실이 드러난다. 개체화 자체가 고통이다. 이 땅에 행동하는 개체로 태어난 것부터가 고통의 근원이다. 비극이 주는 지혜는 바로 이 가혹한 삶의 진리다. 이 디오니소스의 지혜를 아폴론의 아름다움으로 감성화한 것, 그게 바로 비극이다. 비극 속에서 전혀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그리스인들의 두 주신은 이렇게 한 몸이 된다.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어떤 광고도 의식적으로 주목하게 되면 희극적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광고는 의식적인 소비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광고는 사람들에게, 특히 사회과학자들에게 최면술을 걸기 위해 잠재의식에 작용하는 약과 같은 것이다.

 

상업적인 오락 전술은 정신생활과 사회생활 모두에 동일하게, 모든 미디어가 미치는 영향의 속도와 힘의 최대치가 될 수 있게 보장해 준다. 따라서 그것은 변화보다는 영속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는 희극적 전술이 된다.

 

 

김영하,  <읽다>

비극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내재된 성격적 결함으로 파멸하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희극은 우리보다 못한 이가 우스꽝스런 행동을 하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나리오를 쓰려고 한다면 적어도 자기가 쓰는 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를 결정해야 하고, 그에 따라 걸맞은 덕성 혹은 모자람을 인물에게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비극에서 우리를 가장 매혹하는 것은 급전과 발견"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어 극작의 초심자들이 "사건의 결합보다 조사와 성격 묘사에서 성공을 거둔다"고 말하는데, 이는 플롯을 성격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그의 이론과 일치합니다. 그는 극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의 성격보다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플롯에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를 완전히 달리 보게 만드는 반전, 그리고 그 반전을 통해 주인공이 획득하게 되는 새로운 인식이라고 보았습니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항상 너무 늦은 순간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곤 하지만, 저는 독서를 통해 커다란 위험 없이 무지와 오만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특히 고전이란, 이탈로 칼비노의 정의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읽지 않았으면서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제 오만은 오이디푸스의 자신감을 닮았습니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관찰은 판단에 앞서고 판단보다 위대합니다. 판단에는 기준이 미리 존재하고 그 기준으로 삶을 재단하죠. 타인을 지옥으로 간주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나약함은 과소평가합니다. 악은 인간의 나약함과 굴종, 묵인을 통해 제 길을 열어갑니다. 나약과 굴종, 묵인이 걷는 길은 악이 걷는 길과 거의 일치합니다. 우리가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악이 자행하는 횡포는 물론 악의 진행방향과 인간 삶이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보다 근본적으로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관찰하는 존재는 깊고 넓고 관대한 내면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속에서 길어 올리는 새로운 이해와 슬픔과 번민은 일체의 시비판단과 은원을 넘어섭니다. 희극을 쓰든 비극을 쓰든 작가는 객석에 앉아 관객을 바라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다르는 정화와 탈피의 효과는 역사의 역할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작가는 철저히 인간 내면의 증언자여야 합니다. 진실을 관조할 때는 무엇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관조를 통한 진실추구야말로 작가 고유의 일이며 지고무상의 윤리입니다. 삶의 진실은 분명 우리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진실을 바라볼 때 그 붓끝에서 빚어지는 문학은 구원을 받습니다. 비록 작가 자신은 구원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문학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삶에 대한 관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삶의 조건과 인간 사회,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관조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런 관조의 글에는 판단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판단이 있다면 심미적 판단이 있을 뿐입니다. 문학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판단이 있다면, 그 또한 심미적 판단입니다. 희극, 비극, 서정, 황당무계, 골계, 숭고, 시의 등이 모두 심미적 판단에 속합니다. 문학도 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심미라는 가치만을 인정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작품에 대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심미뿐이라는 뜻입니다. 심미 외에 정치, 사회, 윤리, 습속 등은 문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발견>

어떤 문명이든 인위에서 자연으로 진보하고 의식적으로 소박한 사색과 생활로 회귀할 때까지는 이것을 완벽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또 나는 어떤 인간이든 현명한 자의 지혜에서 어리석은 자의 지혜로 진전하여 우선 인생의 비극부터 느끼고 다음에 인생의 희극을 느껴 웃는 철학자가 되기까지는 그를 현명하다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웃을 수 있기 전에 울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슬픔에서 각성이 생기고 그 각성에서 온정과 관용을 겸비한 철학자의 홍소가 생긴다.

 

나는 조용히 인생이란 것에 생각해 보았네. 아마 인생은 비극이다 하는 비극감에 의하여 눈이 띄게 되었나봐. 언젠가 하늘을 바라보고는 무슨 까닭으로 일월성신이 바쁜 사람처럼 주야로 저렇게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는 것일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한 것일세. 오늘이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 내일이 오기는 하지만 벌써 그건 오늘은 아냐. 금년이 가버리면 두번 다시 오진 않아. 내년이 있지만 그건 벌써 금년은 아냐. 이리하여 대자연의 일월은 끝없이 전개되어 가지만 인생의 일월은 나날이 짧아질 뿐이거든. 나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3만 6천일밖에 안 돼. 그러므로 백 년만 넘으면 아무것도 없는 법일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수업>

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는 것이다.

 

 

신영복, <처음처럼>

[석과불식]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희망의 언어'입니다. 무성한 잎사귀 죄다 떨구고 겨울의 입구에서 앙상한 나목으로 서 있는 감나무는 비극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 가지 끝에서 빛나는 빨간 감 한 개는 '희망'입니다. 그 속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입니다. 그 봄을 위하여 나무는 잎사귀를 떨구어 뿌리를 거름하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 <텅빈충만>

꽃이 피어나는 것은 생명의 신비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잠재력이 꽃으로 피어남으로써 그 빛깔과 향기와 모양이 둘레를 환하게 비춘다. 그 꽃은 자신이 지닌 특성대로 피어나야 한다. 만약 모란이 장미꽃을 닮으려고 하거나 매화가 벚꽃을 흉내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모란과 매화의 비극일 뿐 아니라 둘레에 꼴불견이 되고 말 것이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사상의 생명은 서로 다른 지식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다양한 개인들의 상호작용이다. 이성은 그와 같은 차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성장한다.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해 어떤 견해가 이성의 성장을 도울 것인지 여부를 우리는 미리 예측할 수 없다. 지금 가진 어떤 견해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모두에게 강요하면 이성은 성장할 수 없다. 집단주의 사상은 이성을 숭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출발했지만 이성이 성장하는 과정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이성을 파괴하는 비극으로 끝난다. 

 

 

조정래, <천년의 질문>

도시는 자꾸 비대해지고, 비대해지는 만큼 경쟁은 치열해지고, 경쟁은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고, 그 적대감은 서로를 경계하며 소통이 차단되는 개체화가 되고, 그 분열은 서로를 소외시키다가 끝내는 자기 자신까지 소외시키기에 이른다. 그 자기 소외는 곧 정신 질환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현대 도시인들이 갖는 가장 큰 비극이다. 그 치유책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하소연할 수 있고, 넋두리를 할 수 있는 친구를 갖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역사 기록이 시작된 이후 대부부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논리적 이유로 결혼을 했다. 신부의 토지가 신랑의 토지와 붙어 있거나, 신랑의 가족이 번성하는 농가이거나, 신부의 아버지가 읍의 치안판사이거나, 지켜야 할 성이 있거나, 양가 부모가 동일한 성서 해석을 따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합리적인 결혼에서 외로움, 강간, 간통, 폭력, 가혹함, 육아실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비명이 생겨났다. 합리적 결혼은 어떤 진실한 관점에서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으며, 자주 편의주의적이고, 편협하고, 속물적이고, 착취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이를 대체한 것 - 감정에 의거한 결혼 - 이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면제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결혼을 절실히 바라고, 본능에 압도되어 서로에게 빠져들고, 결혼이 옳음을 가슴으로 아느냐다. 현대는 '합리성', 그 불행의 촉매이자 회계적 요구에 물린 듯하다. 더 나아가 결혼이 경솔해 보일수록(예를 들어 만난 지 6주 만에, 어느 한쪽이 직업이 없을 때, 또는 둘 다 10대를 갓 넘겼을 때), 사실은 더 안전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외관상의 '무모함'이 과거의 이른바 현명한 결합이 유발했던 그 모든 오류와 비극의 평형추로 간주되는 것이다. 본능의 명성은 수 세기에 걸친 비합리적인 '합리성'에 반하여 나타난 집단 트라우마 반응의 유산이다.

 

 

심보선 시집

여기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덜 슬프겠는가, 어느 것이 먼 훗날 불멸의 침대 위에 놓이겠는가, 확률은 반반이다, 확률이란 비극의 신분을 감춘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계산법이 아닌가  – 심보선,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

 

집  /  심보선

그들은 저주받았다

관념론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유물론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엔 영원히 잠들지 않는 아이가

잠들기 직전

납으로 된 의문부호 하나를 자정의 발등 위에 못박는다

그들의 꿈에선 언제나 썩은 피가 샌다

 

또한 그들에게 희망이란

주머니 속의 빵 부스러기를 세는 식이다

그러나 한 번도 맞게 센 적이 없다

세면 셀수록 부스러지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셈을 멈추지 않는다!

 

불평등이란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

 

그들은 언제까지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집 안으로 그들을 부르기 위해서는

집 밖으로 난 창문들을 모두 깨야 한다

 

그들의 집은 문이 없다

그들의 집은 불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이다

그 집을 지켜야 한다

 

 

김용규, <생각의 시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일리아스>를 서사시와 비극의 전범으로 평가했다. 작품의 주제를 살리기 위해 스토리 구성에 있어서 "전체에서 한 부분만 취하고 그 외의 많은 사건은 삽화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시는 역사와 다르다고 했다. 그리고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며 호메로스의 작업을 한껏 지켜세웠다.

 

하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자연의 수량화를 통해 우리가 잃은 것은 자연을 '개발의 대상'이자 '정복의 대상'으로 봄으로써 오늘날 문제가 되는 온갖 비극적 난국과 파국의 불씨를 심었다는 것이다. 수로 계량된 자연은 양적 대상일 뿐 더 이상 아름답고 신성한 대상이 아니고, 수로 계량하는 인간은 자신의 탐욕을 양적으로 실현하는 존재일 뿐 더 이상 검소하고 신중함, 타인에 대한 존중, 약자에 대한 배려, 생명과 자연보호 등을 실천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결과 피타고라스가 교훈한 조화가 깨지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병들어가고 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

안티프래질이 살아남은 모든 자연적 시스템 혹은 복잡계의 특징이라면, 이런 시스템에서 가변성, 무작위성, 스트레스를 제거하면 시스템에 피해를 줄 것이다. 시스템은 약해지거나 소멸하거나 붕괴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작위성과 가변성을 억누르면서 경제, 건강, 정치, 교육 등 거의 모든 것을 프래질하게 만들어왔다. 스트레스를 제거하면 복잡계는 약화되거나 소멸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근대의 구조화된 세계는 하향식 정책을 비롯한 각종 장치들을 통해 우리에게 피해를 입혀왔다. 이런 현상은 근대가 낳은 비극이다. 마치 자녀를 지나치게 보호하는 부모처럼 우리에게 도움을 주려다 가장 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야 했다. '나한테 난해한 주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둔한 주장이라고 간주해야 하는가? 어쩌면 논리학자들을 밀어내는 지혜의 영역이 있는 것은 아닌가?'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니체는 두 가지 힘을 보았다. 하나는 아폴로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힘이다. 아폴로의 힘은 이성과 극기를 바탕으로 질서, 균형, 합리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다. 디오니소스의 힘은 우리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이해하기 힘들고 본능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힘이다. 고대 그리스 문화는 소크라테스가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에게 영향을 미쳐서 아폴로의 힘에 손을 들어주고 디오니소스의 힘을 붕괴시켜 합리주의가 지나칠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하게 되기 전까지 이들 두 가지 힘 간의 균형을 표현했다. 이처럼 합리주의가 큰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은 호르몬을 주입해 우리 몸의 자연스러운 작용을 붕괴시키는 것과 똑같다.

 

 

니콜라스 카, <유리감옥>

조종석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이와 유사한 문제들이 일어난다. 이때 조종사들은 비행기를 수동 조작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비행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하고, 정보 표시기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의, 지시대로 하다가 경로를 이탈해본 사람은 누구나 컴퓨터 자동화가 갑자기 업무 부담을 어떻게 높여줄 수 있는지를 직접 깨닫는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스마트폰을 조작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배운 사실은, 자동화는 근로자들이 이미 과중한 업무부담에 시달리고 있는 것과 같은 최악의 순간에 가끔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이 오류에 빠질 확률을 낮춰주는 보조 수단으로서 세상에 등장한 컴퓨터는 결국 충격을 받았던 쥐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잘못된 곳으로 가게 만들 확률을 더 높여준다.

 

 

정재승, <열두 발자국>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상황도 그보다 비극적이진 않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 이건 아마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도 좋은 전략이 될 것입니다. 내일 혹은 한 달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정말 소중한 일들에 집중하게 되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고, 선택의 무게도 훨씬 가벼워집니다. '내가 눈 감을 때 무슨 후회가 들까'를 생각해보면 절실함 혹은 진정성은 커질테고요. 그런 면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절대 불길하거나 우울한 것이 아니에요. 결국 삶을 살아내는 데 도움이 되지요.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빠르게 결정하지 못할 일어 없어집니다.

 

 

유시민, <역사의 역사>

지배적 소수자는 철학을 낳고, 그 철학은 때로 세계 국가의 원동력이 된다. 내적 프롤레타리아트는 고등 종교를 낳고, 그 종교는 세계 교회의 형태로 자기를 구현한다.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영웅시대를 낳고, 그것은 야만족 전투 단체의 비극이 된다. 몇몇 세계 국가는 외래 제국 건설자가 만들었고, 몇몇 고등 종교는 외래 영감이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몇몇 야만적 전투 단체는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세계 국가와 세계 교회, 영웅시대는 동시대 문명뿐만 아니라 시간과 문명을 결합한다. 이 셋이 해체된 문명의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더 큰 전체에 속한다는 것을 고찰해야 인류 역사 전체를 시야에 넣을 수 있다. - <역사의 연구 II>

 

 

법정 스님, <무소유>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유행기)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하나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저에의 맹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신영복, <담론, 마지막 강의>

중요한 것은 삶의 체취가 짙게 배어 있는 정서입니다. 더구나 혹독한 비극적 정서가 바탕에 깔린 정서는 단 한 줌의 관념적 유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삶을 직시하고 삶과 언어가 일체화되어 있는 정서는 한마디로 정직한 것이었습니다. '진실'이란 말의 본뜻이 바로 그런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본축적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즉 기계화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로 이 기계화가 노동 해고로 이어집니다. '자본축적은 노동을 소외(alienation)시킨다.' 이것이 자본축적에 대한 1차적인 인문학적 선업니다. ... 노동의 소외는 해고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생산과정 내에서 일어나는 소외 역시 심각합니다. 자본축적 - 기계화 -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은 자율성을 상실합니다. 기계의 보조자로 전락합니다. 지엽말단에 매달려 있는 한 개의 칩이 됩니다. 자기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정체성이 소멸되는 예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를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만 소로우는 <월든>에서 노동자의 비극은 같은 것만을 반복적으로 지출하도록 강요받는 데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같은 동작, 같은 기능을 반복적으로 강요당할 경우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 노동의 소외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생산한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에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생산물을 자기가 소비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정재승, <과학 콘서트>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난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 - 아놀드 토인비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고령화와 에너지 위기, 양극화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변화를 이루려면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를 통해 국민의 공감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은 산업화나 민주화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과제다. 각자의 욕망과 신념과 이기심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연민, 교감, 공감을 바탕으로 상호이해와 협력을 이루어야만 이 과제를 해낼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시민들이 자신의 욕망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관리하면서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욕망 피라미드의 아래쪽에 있는 '생리적 욕망'과 '안전에 대한 욕망' 충족에 지나치게 집착해 살면서 '자기 존중'과 '자아실현의 욕망'을 후순위로 밀어두었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큰 권력을 얻는 일에 매달려 자기 자신과 타인의 존엄을 무시하고 팽개쳤다. 협력보다 경쟁에, 원식과 상식보다 반칙과 편법에, 인간적 공감과 연대의식보다 자기중심적 이해타산에 끌리며 살았다. 세월호의 비극은 그렇게 달려온 욕망의 대한민국현대사가 도달한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주었다. 그 아이들이 애석한 죽음 앞에서 기성세대가 느낀 '미안함'은 그 역사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 비롯한 감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강상중,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한편 과거는 사람의 발목을 잡습니다. 끝난 일을 아쉬워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데 언제까지고 과거에 붙들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보셨지요? 인간의 비극은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 한다'는 것과 '기억한다'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과거를 아쉬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기에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는 말이지요.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신앙이나 이념은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tolerance을 갖추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신념은 삶을 풍요롭고 기쁘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이념의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빛나야 할 것은 신앙이나 이념이 아니다. 정말 빛나야 할 것은 자연이 준 본성과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고 실현하면서 영위하는 기쁜 삶이다. 진보주의는 보수주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론, 철학, 세계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진보주의를 어떤 이론의 집합이라기보다는 타인과 세상을 대하는 감정 또는 정신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감정이나 정신적 태도는 상대적이다.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나와 다른 감정을 품고 다른 태도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너그럽게 대하는 게 합리적이다. 태도의 차이를 옳고 그름 또는 선악의 잣대로 판단하거나 단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선악의 잣대로 모든 일을 판단하게 되면 자칫 삶을 이념에 종속시키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좌익 소아병과 극우 맹동주의, 좌익 전체주의, 우익 국가주의는 모두 동일한 원인에서 파생한 이념의 병이다 이 병의 원인은 '불관용'이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인도주의 혁명은 역사적 폭력 감소 과정에서 하나의 이정표였고 인류의 자랑스런 업적이었다. 미신적 살해, 잔인한 처벌, 변덕스런 처형, 소유 노예제는 지구에서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을지언정 변두리로 밀려났다. 문명의 시초부터 인류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전제 정치와 주요국 간의 전쟁이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발전들을 묶어 냈던 계몽주의적 인도주의 철학은 일단 서구 세계에 발을 붙인 뒤, 좀 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들이 비극적으로 제 수명을 다할 때까지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비극은 두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해결책이 있고, 체홉의 해결책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결말에서는 무대에 시체들이 나뒹굴고, 아마도 저 높은 곳 어딘가에 정의가 어른거릴 것이다. 반면에 체홉의 비극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환멸을 느끼고, 씁쓸해지고, 상심하고, 실망하고, 철저히 망가진 상태로 끝나지만, 여전히 모두가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셰익스피어식이 아니라 체홉식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비극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 아모스 오즈

 

 

원용찬 / 베블런, <유한계급론>

노동행위와 도구의 효율성을 칭찬하고 뭔가를 창조하고 만들어 내는 제작본능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존재론적 가치를 지닌다. 유한계급의 비극은 바로 존재론에서 시작한다. 노동의 면제를 특권으로 부여받은 유한계급은 어디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까. 노동의 부재는 곧 존재에 대한 결핍으로 이어진다. 유한계급은 사치와 쾌락, 과시적 낭비 속에서 결핍된 자아를 보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명품을 찾고 사치를 해 대는 소비행위를 '실체 없는 이미지 숭배와 주체성이 상실돼 가는 기호(code)의 난무'로 파악하여 허무주의를 보이기도 한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나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다룬 핵심 주제가 인간과 권력의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열전을 읽으면서 나는, 권력이 뿜어내는 찬란한 광휘의 이면에 인간의 참혹한 비극이 놓여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려면 되도록 권력을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권력은 마주 서 있을 때보다는 함께 서 있을 때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비극을 본 관객은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앞에서 슬픔을 느끼고, 그 일에서 실패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진다. 변태와 정신병자, 실패자와 패배자를 이야기하는 신문이 이해의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있다면, 비극은 반대편 끝에 있다. 비극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손미나,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행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아예 그것을 직업 삼아 살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직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인생의 부정적인 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것이 가장 다행스럽다. 나는 여행자로 살면서 '삶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 즉 아픔, 슬픔, 실패, 좌절, 불완전함 등을 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내 인생의 일부'로 끌어안고 공존해 살아가는 '체념의 미학'을 터득해가고 있다. 이것은 결코 삶을 비관적으로 보고나 자포자기 하는 자세, 혹은 무책임한 태도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은 유한하다'는 비극적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 여행은 가장 큰 힘과 지혜를 준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걱정을 해 보아도 별 수가 없을 경우에는, 어떤 사람은 장기를 두고, 어떤 사람은 소설을 읽고, 어떤 사람은 통속적인 천문학에 재미를 붙이고, 또 어떤 사람은 카르데아의 우르 발굴에 대한 이야기라도 읽으면서 자위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 네 사람의 경우는 참으로 총명하다. 그러나 다른 데 관심을 돌리지 않고 고민의 도가니 속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행동할 기회가 닥쳐왔을 때 자기 고민과 싸워나갈 힘이 없다. 진심으로 사랑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기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슬픔에 빠진다고 해서 무슨 수가 있을 리 만무하다. 우리는 그 슬픔을 피할 방도는 없지만 최소한도로 감소시키기 위해 애써야 한다. 불행 속에서 비극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고 하는 것은 감상주의에 불과하다.

 

인간은 불행으로 말미암아 파멸되는 수가 있으므로 있는 힘을 다하여 그 불행한 운명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별로 손해가 되지 않는 한, 조그마한 위안이라도 애써 찾아야 한다. 해롭고 나쁜 위안이 술을 마시고 마약을 맞는 따위이다. 술을 마시고 마약을 맞는 목적은 잠시 동안이나마 의식을 잊으려는 데 있다. 그러나 의식을 잊어 버리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의식을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요컨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불행에서 방향을 멀리 전환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생활이 한두 가지의 방면에만 관심을 갖고 왔다면, 실제로 비극에 처한 경우에 의식의 방향전환이 어렵게 된다. 불행이 닥쳐왔을 때 꿋꿋이 견디어 나가려면, 행복할 때 관심을 갖는 세계를 넓혀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견디기 어려운 현대의 감정이나 연상을 잊어버리게 하는 안식처를 찾아낼 수 있다. 생명력이 왕성하여 여러 방면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불행이 닥쳐오더라도 인생과 세계에 대한 넓고 건전한 흥미로써 이를 능히 극복해 나간다.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아프리카가 최근 들어 성장 실패를 경험한 주된 이유는 정책, 즉 구조 조정 프로그램이 강요한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에 있다. 특정 자연 조건이나 역사적 배경이 아니라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나라가 겪는 문제가 정책 때문이라면 문제는 더욱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진정한 비극은 만성적 성장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감히 말한다면.... 우리는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차례차례 이어지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흘러간다.', 흄의 생각대로라면 개인의 정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각 혹은 지각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인간은 그저 계속해서 변화하기만 하는 감각의 집합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해 통일을 유지하는 확고한 존재이다. 그러나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처럼 불안정한 존재의 경우에는 흄의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분명히 그들의 생활은 어느 정도 왔다 갔다 하는 발작적인 지각과 움직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알맹이를 이루는 이성도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영처럼 동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흄이 말한 거품과도 같은 존재이다. 철학적 신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자아가 충동에 의해 압도당하는 경우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다. 충동에 압도당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적인 운명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프로이트적인 운명의 경우에는 비극적이기는 해도 이성(의식)이 존재하는 반면에 흄적인 운명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진정한 인간, 어디까지나 '개체' 다운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충동과 싸워야 한다. 투렛 증후군 환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무시무시한 장벽에 직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야말로 '경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들은 싸움에서 승리한다. 살아가는 힘,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의지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충동이나 병보다도 강하다. 건강, 싸움을 겁내지 않는 용맹스런 건강이야말로 항상 승리를 거머쥐는 승리자인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개인적인 것에만 한정된 생활은 언젠가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보다 큰 우주를 향하여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야 인생의 비극적인 단면을 이겨 나갈 수 있다.

 

 

이희인, <여행의 문장들>

서양의 근대를 열고 창조했다고도 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거의) 최초의 철학자로 니체가 거론된다. 질서와 합리의 아폴론적인 세계가 아닌, 무질서와 쾌락의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옹호한 그의 첫 저작 <비극의 탄생>부터가 그랬다.

 

 

김화영, <행복의 충격>

"창 너머로는 피렌체가 내다보이고 책상 위에는 죽음이 놓여 있다. 절망 속에서 어느 만큼 계속하여 견디다보면 희열이 생겨날 수도 있다" - 카뮈, <사막>. 우리들 삶을 참으로 삶이게 하는 행복과 비극의 표리...피에솔레 언덕의 프란체스코 수도원...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어떤 시대에나 어떤 세상에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입니다. 수만명에 달하는 후쿠시마 사람들을 고향 땅에서 몰아낸 것도 애초의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그 '효율'입니다. '원자력발전은 효율성이 높은 에너지고 따라서 선이다'라는 발상이, 그런 발상에서부터 결과적으로 날조되어진 '안전 신화'라는 허구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회복하기 어려운 참사를, 이 나라에 몰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패배, 라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효율'이라는 성급하고 위험한 가치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발상의 축을 개개인 속에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축을 공동체=커뮤니티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다뉴브>

일반적인 세상 법칙과 경제의 객관적인 숫자, 그러니까 생산, 실업, 평가절하, 물가, 봉급 등의 숫자가 진짜 주인공들이 된다. 그것들은 환영에 불과하지만 고대 비극의 폭군들처럼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실질적으로 협박한다.

 

 

박경철, <문명의 배꼽, 그리스>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종교 신앙의 위험은 그것이 없었다면 정상적일 사람들을 광기로 내몰고 광기를 신성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이 종교적 주장들은 다른 모든 주장들이 거쳐야 하는 정당화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배우기 때문에, 문명은 여전히 얼토당토않은 무리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고대 문헌 때문에 자살하고 있다. 그토록 비극적으로 불합리한 일이 가능하리라고 누가 과연 생각했겠는가?' - 샘 해리스, <신앙의 끝>

 

 

제러미 리프킨, <3차 산업혁명>

시민사회를 발전시키고 사회적 자본을 창조하는 데 우리의 시간과 관심을 더 많이 쏟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당연히 매혹적이므로 전 세계 선진국 곳곳에서 급속히 호응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류의 40퍼센트가 하루에 2달러 이하를 벌고 있다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정도의 돈이다. 이 비극적인 현실은 두 가지 요인으로 더욱 악화되고 있다. 하나는 기본 식량과 건축자재에서 교통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가격이 무서울 정도로 변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더욱 섬뜩한 것으로, 2차 산업혁명이 긴 종반기에 들어서면서 기후변화가 세계 농경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모든 선전은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선전은 의미작용을 전달할 뿐이다. 선전의 의미작용(그리고 그것이 일으키는 행동)은 결코 개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 의미작용은 모두 시차적이며, 한계적이고 조합적이다. 즉, 선전의 의미작용은 차이의 산업적 생산에 속한다. ... 개인을 특정지었던 실제적인 차이는 그들을 서로 용납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개성화하는' 차이는 이제 개인들을 서로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무한한 척도 위에서 서열화되며 또 모델들 속으로 수렴한다. 차이는 이 모델들에 입각해서 교묘하게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타자와 구별하는 것은 바로 어느 한 모델과 일체가 되는 것, 어느 한 추상적 모델 및 어느 한 양식의 결합형태에 근거해서 자기를 특징짓는 것이며 따라서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실제적인 모든 차이와 특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특이성은 타자 및 세계와의 구체적인 대립관계에서만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차이화의 기적이며 비극이다. 따라서 소비과정 전체는 인위적으로 그 수가 감소된 모델의 생산에 의해 지배된다. 그곳에서는 다른 생산부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독점화 경향이 보인다. 차이생산의 독점적 집중이 존재하는 것이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이 가진 많은 재주들 중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한 것은 '무엇이건 먹어치울 수 있는 능력'이다. ...

동물들은 식단을 바꾸지 못한다. 생태계 변화가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그 변화가 그들을 절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외다. 환경이 바뀌어도 거기 얼른 적응해서 거의 자유자재로 식단을 바꾸고 먹거리 종류를 무한대로 넓혀 생존을 유지해온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문명사는 먹거리 확장의 역사다. 먹을 수 없어 보였던 것도 삶아먹고 구워먹고 튀겨먹는 인간의 화려한 조리 기술에 걸리면 모두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둔갑한다. ...

탐욕은 사회적으로 전염되는 질병이다. "남들은 다 먹는데 나는 왜 못 먹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시기, 질투, 선망의 포로가 되고 '못 먹는 자'는 불출, 무능, 도태의 존재로 강등된다. 욕망이라는 것이 빠지면 인간의 삶은 동력을 상실할지 모른다. 그러나 욕망과 탐욕은 그 차원이 다르다. 사회 전체가 탐욕과 선망의 질병에 걸리면 인간은 존재의 품위와 광채를 잃고 거대한 입과 밥통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딜레마는 우리가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지금의 세계 경제체제가 정확히 탐욕과 선망의 체제라는 점이다. 탐욕과 선망을 증폭시키지 않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경제의 비극적 결함이며 그 결함의 체제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현대적 생존의 딜레마다. 우리가 이 딜레마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이 시대를 어떻게 살까에 대한 지혜는 인간을 살아남게 한 위대한 어떤 능력이 동시에 현대적 난국의 기원이기도 하다는 아이러니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정우 외,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의 가장 소박한 모습인 욕구는 인간의 삶을 추동시키는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이다. 욕망하지 않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그런데 욕망의 실상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원초적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다. 욕망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충족할 때 쾌락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 충족보다 더 큰 쾌락을 만들어냄으로써 금방 결핍의 상태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흔희 좋은 차나 좋은 배우자를 갖기를 꿈꾼다. 하지만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달성하는 순간 성취감의 쾌락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욕망하게 하는 새로운 결핍이 나타난다.

 

 

김한민, <그림 여행을 권함>

모든 비극의 원인은 자만! - 그리스인의 전해오는 이야기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당신이 해변에서 친구와 함께 멋진 오후를 보냈다고 상상해 보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당신은 한 트럭 분량의 소똥이 당신 집 현관문 바로 앞에 쏟아 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한 트럭 분량의 소똥에 대해 알아야 할 세 가지 것이 있다.

첫째, 당신은 그 소똥을 주문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둘째,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누가 소똥을 그곳에 잔뜩 가져다 놓았는지 아무도 목격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신은 그 것을 치우라고 누구에게도 요구할 수도 없다.

셋째, 그 소똥은 불결하고 불쾌하며, 고약한 냄새가 당신의 집안 전체를 채운다. 그것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비유에서, 당신 집 앞의 한 트럭 분량의 소똥은 삶에서 우리에게 쏟아 부어지는 불쾌한 경험들을 상징한다. 한 트럭 분량의 소똥과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 알야야 할 세 가지 것이 있다.

첫째, 우리는 그것을 주문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한다. "왜 하필 나인가?"

둘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아무도,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그것을 가져갈 수 없다. 설령 그들이 그렇게 하려고 시도할지 몰라도.

셋째, 그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며, 우리의 행복을 파괴한다. 그리고 그것의 고통이 우리의 삶 전체를 채운다. 그것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한 트럭 분량의 소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반응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 방식은 소똥을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소똥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부정적인 마음, 다시 말해 분노와 좌절 등에 빠지는 것의 은유다. 그것은 불행한 환경에 처했을 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반응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로 많은 친구들을 잃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심한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친구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똥 더미는 줄어들지 않으며, 오히려 발효가 될수록 더 나쁜 냄새가 난다.

다행히도 두 번째 방식이 있다. 우리 앞에 한 트럭 분량의 소똥이 쏟아 부어질 때, 우리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작업을 시작한다. 외바퀴손수레, 쇠스랑, 갈퀴 등이 동원된다. 소똥을 손수레에 퍼 담고, 그것을 집 뒤로 끌고 가 정원에 파묻는다. 이것은 지치고 힘든 일이지만, 우리는 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때로는 아무리 힘들여 일해도 하루에 반 수레밖에 소똥을 옮기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평하면서 절망속으로 걸어들어가기보다는 문제에 대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조금씩 우리는 소똥을 퍼 나른다. 소똥 더미는 날마다 줄어든다. 때로는 여러 해가 걸린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아침이 오고야 만다. 우리 집 앞의 소똥이 모두 사라진 거을 우리 자신이 보게 되는 아침이. 나아가 우리 집의 다른 장소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아름다운 꽃들이 풍성한 색채로 정원을 온통 뒤덮으면서 만발한다. 꽃들의 향기가 길 아래쪽까지 날아간다. 따라서 이웃들과 지나가는 행인들조차도 기쁨 속에 미소 짓는다. 그런가 하면 정원 구석에 있는 과실수들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지가 거의 땅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그 열매들은 달디달다. 그런 맛을 가진 열매들은 어디서도 살 수 없다. 수확한 열매가 너무 많기 때무에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기적의 맛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소똥을 퍼 나르는 것'은 그 비극들을 삶을 위한 거름으로 환영해 맞아들이는 것의 비유다. 그것은 우리가 혼자 해야만 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아무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 가슴의 정원으로 날마다 퍼 나름으로써 고통의 더미는 점점 줄어든다. 그것은 여러 해가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침은 오고야 만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을 발견할 수 없는 아침이. 그리고 우리 가슴속에서 하나의 기적이 일어난다. 친절의 꽃들이 만발한다. 그리고 그 향기가 우리의 길 아래쪽으로, 이웃에게로, 친구와 심지어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에게로 날아간다. 그런가 하면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의 열매가 가득 매달린, 구석에 서 있는 지혜의 나무가 우리를 향해 구부러진다. 우리는 그 맛 좋은 열매들을 전혀 아무런 계획 없이도, 지나가는 행인과도 무료로 나눈다.

우리가 비극적인 고통을 겪고 그것이 가져다준 교훈을 배웠을 때,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의 정원을 가꾸었을 때, 그때 우리는 깊은 비극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을 우리의 팔로 껴안을 수 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다.

"그래요, 나도 압니다."

그들은 우리가 진심으로 이해한다는것을 깨닫는다. 자비가 시작된다. 우리는 그들에게 외바퀴손수레와 쇠스랑과 갈퀴를, 그리고 끝없는 격려를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아직 우리 자신의 정원을 가꾸지 않았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비교적 평단한 삶을 살아왔으며, 퍼 나를 소똥이 많지 않았던 그 수행승들은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없었다. 위대한 스승이 된 사람들은 실로 크나큰 시련을 겪으면서 묵묵히 그것들을 퍼 날랐으며, 풍요로운 내면의 정원을 가꾼 이들이었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수행승들은 지혜와 내적인 고요와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소똥을 가졌던 이들은 세상과 나눌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것이다. 만일 당신이 세상에 봉사하기를 원한다면, 만일 자비의 길을 따르고자 원한다면, 다음번에 당신 삶에 비극이 일어날 때,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우와! 내 정원에 뿌릴 거름이 더 많이 생겼군!"

 

 

류콴홍, <철학우화>

쇼펜하우어는 늘 인생은 고통과 불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런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인간의 생존의지에 있었지요. 이런 생존의지는 사람에게 있는 맹목적인 충동과 끝없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런 충동과 욕망이 생명의 본질인 고통을 결정해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며, 그도 안 된다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대개 이루어지기 어렵고, 사람은 더욱 강하게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지요. 인간의 충동과 욕망은 끝이 없어요. 하나의 욕망이 만족되면, 바로 다른 욕망이 생겨나지요. 만족은 잠시뿐 욕망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랫동안 행복할 수 없어요. 모든 만족은 또 다른 욕망의 출발점일뿐이지요.... "인생은 한 편의 비극이다."

인생이 어쩔 수 없는 고통과 불행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고난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전환'이라는 개념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했어요. 바로 자신의 생존의지를 내버려둔 채 실제로 어떤 사물과도 접촉하지 않으며, 마음속 모든 사물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지요.

쇼펜하우어는 다음 세 가지가 그 좋은 실천방법이라고 주장했어요.

    1. 철학연구에 몰두하라. 철학은 가장 이지적인 활동이며, 이성과 지혜는 의지를 완화시키고, 지식은 욕망을 가라앉힐 수 있답니다.

    2. 예술창작에 열중하라. 예술은 스스로 물질적인 이익을 잊게 하고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예술을 통해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몇몇 천재들에 불과합니다.

    3. 종교 특히 불교를 믿어라. 이는 가장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직감에 따라 사물을 융화하고 고통에서 철저히 벗어날 수 있어요.

 

 

마루야마 겐지, <인생따위 엿이나 먹어라>

알아서 기니 그 따위로 살다 죽는 것이다. 사대주의는 자기가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는 자기를 갖지 않으려 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야 편히 살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추종의 길을 택한 자는 인간이기보다 곤충에 가깝다. 설령 국가 체제를 바꿔 본들, 불특정 다수의 인식과 의식이 근본부터 바뀌지 않는 한 유사한 비극이 끝없이 반복될 뿐이다.

 

 

존 로빈스, <인생혁명>

"만일 나 자신만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행복을 잃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착취한다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내 행복에 관심을 갖는 친구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나에게 비극이 닥치면 사람들은 나를 염려하는 대신 내 불행을 즐거워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인정 넘치고 이타적으로 행동한다면,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는지와 상관없이 그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곳곳에서 많은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비극을 겪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러 올 것이다." - 달라이 라마

 

 

가와구치 요시카즈, <신비한 밭에 서서>

진실이 된 자신을 찾지 못하고 끝내는 스스로 생명을 해치고 쓰러져 갔던 젊은이들이 이 시기에는 참으로 많이 존재했따. 젊은 생명은 하나밖에 몰라 지나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성장기의 생명에게 개화결실을 재촉하는 청년의 성급함, 장년기의 성숙함이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노년기의 성숙을 찾는 장년기의 초조함, 망설임, 자기 과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명도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문제를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숙함과 결점을 비극적인 생명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사람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불행한 생명도 길잡이로 삼고 진인들을 거울로 삼아가며 결코 참이 아닌 곳으로 길을 잃거나 영혼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강신주, <감정수업>

감정을 순간적이로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음(good)과 나쁨(bad)'이다. 돌이켜 보면 경제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한 여성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아니라 '선과 악;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여러 가지로 무능력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부모나 친구들에게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 여자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간단히 말해 '선과 악'이 대다수 공동체 성원들이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면, '좋음과 나쁨'은 다른 누구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 니체가 선과 악에 'Good'과 'Evil'이란 대문자를 사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과 악은 사회의 안전이나 통념을 위해 어떤 개인이라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규범을 상징하니까. 반면 니체는 좋음과 나쁨에 'good'과 'bad'라는 소문자를 붙인다. 사람마다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고 동시에 좋음과 나쁨의 내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우선 선과 악이라는 규범을 버리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을 준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감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진실을. 비극이 발생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다양한 감정들에 너무나 서툴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이유로 발생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지금 자신을 휘감고 있는 감정이 슬픈 것인지 아니면 기쁜 것인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누구나 살면서 피해갈 수 없는 비극과 맞닥뜨리는 때가 있다. 살고 있는 도시가 파괴되거나, 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근거 없는 비난을 받으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리기도 한다. 삶은 위기의 연속이며, 이 사실을 망각한 사람은 운명이 준비한 도전에 무방비상태로 맞서게 된다. 고통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묻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고통과 위기가 닥치면, 우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감정을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대해서도 안되고, 매사 자책하던 것처럼 벌을 받는 거라고 여겨서도 안된다..

 

 

 

영화 <조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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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탐욕을 버리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현재에 그대로 머물고 싶어하는 생각과 행동에 있다.

 

 

[바보예찬 발췌]

  • 시시한 것을 진지한 일에 도움이되도록 하는 것보다 더 슬기로운 일은 없을 것..

  • 인류를 낳고 만들어 준 '자연'의 여신은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모든 것들 속에다가 약간의 바보스러움을 넣어 두었지요. 스토아 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지혜'는 이성에 인도되는 데에 있고, '바보스러움'은 변덕스런 정열에 끌려가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생활이 완전히 서글퍼지고 우울해지는 일을 막기 위해, 주피터는 그들에게 이성보다도 훨씬 더 많은 정열을 주었어요. 어떤 비율로 주었냐고요? 1/2온스 대 1아스의 비율(24:51)이죠. 그뿐 아니라 주피터는 이 이성을 머릿속 한쪽 구석에 처넣어 놓고, 몸 전체는 정열에 내맡겨 버렸어요. 그리하여 고립된 이성은 두 폭군의 폭력 앞에 노출되고 만 거랍니다. 즉, 심장이라는 생명의 샘과 더불어 가슴의 성채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노여움'과, 지배력을 아랫배에까지 널리 뻗치고 있는 '정욕'이라는 두 폭군의 폭력에 말이지요. 이렇게 연합한 두 폭군에게서 이성이 어떻게 스스로 지킬 수 있겠어요? 인간의 일반적 관습은 위 사실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어요. 이성은 의무의 명령을 지키라고 목이 쉬도록 외칩니다. 하지만 이성의 외침은 욕지거리만 잔뜩 얻어 들을 뿐, 결국엔 교수형 받으러 가는 임금님 꼴이 되어 버리지요. 이를 견디다 못한 이성은 마침내 입을 다물고 항복해 버리는 거예요.

  •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과연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디 말 좀 해 보세요. 자기 자신과 의견 차이를 보이는 사람이 과연 남과 화합할 수 있을까요? 너무 엄격해서 자기 자신조차 짜증나게 만드는 사람이 과연 남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을까요? 이 바보신보다도 더 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 질문들에 '그렇다'라고 대답하지는 못할 거예요.

  • 자존심은 이처럼 중요하답니다. 남들에게 환영받고 갈채를 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자기 자신에게 갈채를 보내야 하죠. 스스로에게 환영받는 것은 그토록 필요한 일이랍니다. 결국 행복이란, 현재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나의 착한 '자존심'의 여신은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에게 만족하도록 충분히 도와주고 있어요. '자존심'은 사람들이 자기 얼굴이나 재능, 민족, 지위, 교육, 조국에 불만을 느끼지 않도록 해 주지요.

  • 양식은 경험에서 오는 것이지요. 그럼 그 양식을 지니고 있다는 명예는 어떤 자에게 돌아가야 할까요? 겸손한 탓인지 소심한 탓인지 아무것에도 도전하지 않는 현인일까요, 아니면 위험이라는 걸 모르므로 겸손하지도 않고 소심하지도 않은 미치광이일까요? 현인은 고대 사람들이 쓴 책 속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아요. 그들은 그 안에서 순수하고 섬세하게 말을 꾸미는 방법만 열심히 배우고 앉아 있죠. 반면 미치광이는 현실에서 살아가며 이것저것 손을 대 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미치광이야말로 진짜 양식을 터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미치광이는 스스로 희생을 치름으로써 배움을 얻는다. - 호머, <일리아드>

  • 사람들은 두 가지 주요한 장애 때문에 일에 실패하곤 해요...즉 명석한 정신을 흐리멍덩하게 만드는 망설임과, 위험을 보여 주어 행동력을 떨어뜨리는 두려움 때문에 실패하는 거죠...그런데 바보신은 그 두 가지를 전부 쫓아 버립니다...망설임을 버리고 뭐든 감행하면 커다란 이득을 볼 수 있는데, 아쉽게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 그대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지식에 열을 올리지 말고, 군중에 섞여서 남의 허물을 덮어 주거나 친절한 마음에서 잘못을 기꺼이 저지르는 사람이 돼 보세요.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양식 있는 사람이 취할 행동이니까요.

  • '자연'의 조화는 '인공'의 변화보다도 훨씬 훌륭하답니다! 그러므로 나는 피타고라스로 변신했던 저 수탉을 아낌없이 찬양하고 싶어요. 이 수탉은 무엇이고 다 되어 보았답니다. 철학자도, 남자도, 여자도, 임금도, 평민도, 물고기도, 말도, 개구리도, 심지어 해면도 되어 보았지요. 이처럼 모든 것이 되어 본 후, 수탉은 인간이야말로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비참한 동물이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왜냐하면 모든 동물이 자기 본성의 한계 내에서 살아가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오직 인간만이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 애쓰고 있기 때문이었죠.

  • 자존심에는 '아첨'이라는 동생이 있어요...그녀는 언니를 무척 닮았죠. 다른 점이라면, 자존심은 자기 자신을 어루만지고 아첨은 남을 어루만진다는 것뿐이에요.

  • 너희들 중 누구든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줄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자가 되어라. 그래야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

  • 하느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다.

 

[잠언과 성찰 발췌]

  • 우리들의 자존심은 의견이 부정되었을 때보다는 식견이 부정되었을 때 더 큰 상처를 입는다.

  • 행복한 사람들의 여유있는 온건함 내지 절제는 행운이 가져다 준 온화한 기분에서 나오는 것이다.

  • 성인 군자들의 냉정이란, 마음의 불안과 동요를 가슴속 깊이 숨기는 기술이 뛰어남을 말한다.

  • 철학은 과거의 불행과 미래의 불행을 쉽사리 이긴다. 그러나 현재의 불행은 철학을 이긴다.

  • 우리 인간들에게 부족한 것은 힘보다는 의지이다. 우리들이 불가능을 생각하는 것도 실은 자기 자신에게 의지의 박약함을 변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야단을 칠 때 우리들에게는 선의 보다는 교만심이라는 것이 더 크게 작용한다. 길게 설교를 늘어놓는 것이야말로 상대의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것보다 나 자신은 별개의 인간이라는 것을 들려 주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들은 희망을 걸어 약속을 하고, 근심 때문에 약속을 지킨다.

  • 사소한 일에 너무나 집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큰일을 치르지 못한다.

  • 인간은 무엇인가에 질질 끌려가고 있는데도, 자기 딴에는 자기 몸을 이끌고 스스로 처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는 어느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마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간다.

  • 우리 인간의 기분이 변하는 모양은 운명의 변덕스러운 변화보다도 더 엉뚱한 데가 있다.

  • 우리들의 기질은 자기에게 정말 우연히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가치를 부여하려고 애를 쓴다.

  • 진정한 즐거움은 맛 속에 있는 것이지 사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소유할 때 비로소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타인이 좋아하는 물건을 소유해 본들 아무런 재미도 없다.

  • 인간의 운명은 겉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실은 불행이나 행운은 서로 밀착하여 보충적인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결국 운명은 만인에게 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부여받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영웅이 될 수 없다. 사람의 꽁무니에 달라붙어다니는 운수라는 것도 있다.

  •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운명에도 달려 있지만, 그 사람의 기질에도 달려 있다.

  • 진실을 가장한 것들이 이 세상을 욕되게 하는 만큼, 진실이 이 세상에 좋은 것만을 주지는 못한다.

  • 유능한 사람이라면, 이해의 경중에 따라서 일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처리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의 탐욕은 한 번에 너무 큰 것을 좇는 나머지, 때로 중요성의 순서를 뒤바뀌게 하는 수가 있다. 하찮은 물건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진짜 중요한 물건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 사랑의 끝은 우정이라기보다 오히려 증오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우리들이 적과 화해를 하는 것은, 이쪽 태세를 재정비해야겠다든가, 싸움에 아주 지쳤다든가, 아무리 계산해 봐도 이쪽 형세가 불리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하는 것보다도, 벗을 의심하는 쪽이 더 수치스러운 것이다.

  • 사기를 당했다고 해도 밑질 것은 없다. 이쪽에서도 상대방을 의심하고 덤벼들었던 것이었으니까.

  • 사람들은 곧잘 기억력이 나쁘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판단력이 둔하다는 것은 아무도 개탄하지 않는다.

  • 자기 힘에 도취되어 기분 좋게 살고 있는 남자에게, 사실을 그대로 알려 준다는 것은 잔인하다. 그것은 항구에 들어오고 있는 배를 모두 자기 것으로 생각하였던 아테네의 미친 사람이 받은 것과 똑같은 잔인한 행위다.

  • 지성과 판단력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 왔으나, 그것은 그릇된 사고이다. 판단력은 지성이 지닌 빛의 위대함을 보여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빛은 사물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인식하고, 눈에 띄지 않는 작고 미묘한 것까지도 지각한다. 즉, 판단력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생각되었던 것도, 실은 모두 지성의 빛이 끼쳐준 덕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 인간이 조금도 아낌없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충고뿐이다.

  • 몇 마디 안 되는 말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큰 재능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반대로 소인배들은 많은 것을 떠들어 대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 우리들이 타인의 장점을 크게 과장해서 떠들어 대는 것은,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치에 경의를 표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들 자신의 식견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타인을 칭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 자신이 그 칭찬을 받고 싶은 것이다.

  •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칭찬보다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비난 쪽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 우리들은 자신의 진실한 가치에 의해 뜻있는 사람의 인정을 받고, 운에 의해 세상의 인정을 받는다.

  • 후회한다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쳐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그것이 내게 입힐 화가 두렵기 때문이다.

  • 자신에 한해서만,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러나 자기 없이는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 엉터리 신사는 자기의 결점을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숨기려 한다. 진짜 신사는 자기의 결점을 완전하게 알고 그것을 고백한다.

  • 완벽한 용기란, 모든 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을,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데서 해치우는 것을 말한다.

  • 대담하다는 것은 영혼이 갖는 이상한 힘이다. 크나큰 위험에 직면했을 때 영혼이 불안에 빠지거나 동요하는 것을 막아 주는 힘이다. 영웅들이 지극히 놀랍고 끔직스러운 사태에 부딪쳐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을 힘껏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힘인 것이다.

  • 악한이 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선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다. 즉 사람이 좋다는 것은 보통의 경우 의지의 나태 또는 무력함, 둘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 사람의 기쁨은 사랑한다는 것에 있다. 이 말은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보다 지금 자기가 간직하고 있는 정열에 의해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 정신의 편협이 옹고집을 낳는다. 우리는 자기가 아는 범위 이상의 것은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는다.

  • 과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값어치에도 계절이 있는 법이다.

  •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질에도 여러 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앞면은 마음에 들어도 뒷면은 안 들지도 모른다.

  •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머릿속에 넣어 두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상대방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 우리는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는 것을 퍽 좋아한다. 그러나 듣는 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조금도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대편의 입장도 신경쓰라.

  • 우리가 친구에게 마음을 숨기는 것은, 상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 시기하는 마음은 증오심보다 더 오래 간다.

  • 인간은 사랑하고 있는 한 용서하는 법이다.

  •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 비례하여 행복과 불행을 느낀다.

  • 도량이 작은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에 무척 신경을 쓴다. 도량이 큰 사람은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마음 상하지 않는다.

  • 하늘의 뜻과 사람의 변덕이 세상을 지배한다.

  • 한 사람의 인간을 아는 것보다 인간 전체를 아는 것이 훨씬 쉽다.

  • 소질이 뛰어난 것만 가지고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경솔하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 우정은 연애와 마찬가지로,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고 있는 편이 마음 편하다.

  • 크나큰 곤란에 부딪혔을 때는 기회를 만들어 내려 하지 말고, 눈앞에 있는 기회를 살리는 쪽에 온갖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재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보가 되어 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나 판단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바보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 남들에게 자기 이상의 것을 내보이려 하는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 편이 자기에게 훨씬 도움이 된다.

  • 우리의 적은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우리를 판단한다.

  • 우리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것은 좋든 나쁘든 확실치 않아 믿을 수가 없다. 거의 다 그때 그때 경우에 따라 움직이므로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알 수 없다.

  • 정신은 게으름과 타성에 의해 편하고 즐거운 것에만 집착한다. 이 경향이 언제나 우리의 지식에 한계를 긋고 있다. 아직껏 자기 정신을 가능한 한 멀리까지 펼치고 뻗어나갈 노력을 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 탐욕은 때때로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시하고 당치도 않은 기대를 걸고 자기 재산의 전부를 날려 버린다. 또 어떤 자는 눈 앞의 작은 이해 관계에 눈이 어두워져 장래의 막대한 이익을 팽개치고 만다.

  • 머리는 좋지만 마음이 비뚤어져 있는 사람보다 머리는 나빠도 마음가짐이 바른 사람을 사귀는 편이 덜 권태롭다.

  • 우리는 모든 것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자기 자신만은 마치 불사신인 양 생각하고 무엇이든 소유하려고 한다.

  • 철학하는 사람이 부를 비난하는 것은 사람들이 부를 악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죄를 짓지 않고서도 부를 획득할 수 있고 사용할 수도 있다. 장작의 불을 깨뜨리지 않고 계속 피우듯이, 부로 인해 죄에 빠지는 일 없이 부를 모든 미덕에 바침으로써 더 기분좋게 빛나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위대한 인물이나 야심가는 이런 점에서 매우 비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면 무한정의 재물이 필요하니까.

  • 육체의 노고는 정신의 고통을 해방시켜 준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

  • 현명한 사람은 작은 것에도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둔한 자는 무엇이 있어도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사는 원인이다.

  •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주위 사람에게 알리고 그렇게 믿어 달라고 하는 일에 더 신경을 쓴다.

  • 욕망이란 끝이 없으며, 하나를 만족시키면 다른 하나가 차례차례로 끊임없이 일어난다. 욕심을 끊지 못한다면, 차라리 최초의 욕망을 지워 버리는 쪽이 훨씬 마음편하다.

  • 영혼에 지혜가 깃들어 있다는 것은 몸이 건강한 것과 같다.

  • 지상의 권력자들은 우리에게 육체의 건강이나 정신의 안정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만들어 내는 유용한 것이란 무엇이든 돈을 주고 사면 손해보기 일쑤이다.

  • 어떤 물건을 소유하길 간절히 원하기 전에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 현명한 사람은 상대와 싸워 이기는 것보다 아예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을 좋은 생활 태도로 삼는다. 

  • 책을 배우는 것보다 사람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우리는 자기 자신의 비밀조차 지키지 못하면서 어찌 타인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일까?

  • 실컷 게으름을 피운 자일수록 타인을 서둘러 족치는 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는 부지런한 듯이 보이려고 한다.

  • 벗의 우정이 식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쪽에도 우정이 없다는 증거이다.

  • 음식을 절제한다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많이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인간 개개인의 재능에는 하나 하나의 나무와 마찬가지로 저마다 고유한 특성과 작용이 있는 법이다.

  • 사람들이 건망증에 잘 걸리는 것은 그 일에 대해 말하기 싫어졌을 때이다.

  • 겸손이란 칭찬받는 것을 사양하는 것 같으나, 실은 더 멋진 찬사를 받고자 하는 태도이다.

  • 장례식의 화려함은 죽은 이의 명예보다 산 사람의 허영심과 관계가 깊다.

  • 진실은 결코 어떤 대상 속에서도 다른 진실과의 비교에 의해 지워져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두 개의 대상 사이에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든 한 쪽의 진실이 다른 편의 진실을 지워 없애지 않는다. 둘 사이에 폭의 넓이와 빛남의 차이는 있어도 진실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양쪽 모두 평등하다. 작은 대상 속에 있는 것보다 커다란 대상 속에 있는 쪽이 훨씬 더 진실하다는 법은 없다.

  • 친구들의 결점이 타고난 것이고 장점에 비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때는 그들을 솔직하게 용서해 줘야 한다. 더욱이 그들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든가,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듯한 태도는 절대로 피하는 것이 좋다. 친구들이 자기 자신의 결점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고칠수 있게 인도해 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 아무리 품위가 있고 멋진 회화라도,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각 개인에게 적합한 회화를 선택해야만 하며, 말할 시기도 가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말을 잘하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침묵을 지키는 것도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 침묵은 뛰어난 웅변일 수 있다. 때로는 침묵이 찬성도 비난도 된다 조소하는 침묵이 있는가 하면 존경하는 침묵도 있다. 요컨대 우리들의 모습과 말투와 태도가 회화를 즐겁게도 만들고, 시시하게도 만들고, 부드럽게도 하고, 각박하게도 만든다. 그리고 이것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비결은 극히 적은 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져 있다. 그러한 것에 대해 규칙을 만들어 낸 사람들까지도 때로는 실수를 한다. 나의 의견으로는 가장 안전한 대화법이라는 바꿀 수 없는 규칙 따위는 갖지 않을 것, 멋진 말을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마음놓고 여유를 가질 것, 듣는 편이 되어 너무 자주 입을 열지 말것, 그리고 절대로 무리하게 애쓰며 말하지 말 것 등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59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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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과 성장 위주의 경영과 재배, 사육방식이 결국 환경 파괴와 질병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작은 것, 소박한 삶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본문발췌]

 

 

"우리의 눈을 현실에 고정시키는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로는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 존 F. 케네디

 

 

우리가 '대안 기업가'라고 이름 붙인 이들은 변화를 요구하기 위해 시위를 주동하는 식의 일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변화를 구체화하거나 유도해 낸다. 잘못된 점을 찾아내는 데 머물지 않고 치유책을 고안해 낸다. 실용주의자인 이들은 구체적이고 효과적이며 지속적인 해결방법들을 생각해 내서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재난에 대한 예언을 즐기는 대신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해서 긍정적인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의 접근방식은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질적이다. 그들은 동기가 훌륭하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자신을 희생하기보다는 그들의 행동이 경제적, 생태적, 사회적인 차원에서 갖는 결과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들이 하는 시도들이 이익을 남기는 일이라 해도 단순히 이익을 위해 그 일을 하지는 않는다. 어떤 시도가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류에게 맑은 공기를 공급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숨쉬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숨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슬로우푸드의 투쟁은 분명 더 지속가능한 농업을 이끌어 내게 될 것이다. "덜 먹자, 그 대신 더 잘먹자"라는 이 운동의 슬로건이 결국 "덜 재배하자, 그 대신 더 잘 재배하자"로 귀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성 위주의 재배방식이 결국 광우병이나 조류독감의 위기를 불러온 지금, 환경친화적 요리법의 보급을 위한 노력은 그 어느 때보다 현실성을 띠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가난이 게으름이나 지적결함 같은 개인적인 문제에서 연유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들이 가난한 것은 제도적으로 아주 적은 금액의 자본금도 손에 넣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약간의 자본금만 있다면 그들도 경제활동의 고리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의도가 수백 톤의 유독성 쓰레기를 배출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생산물을 적은 수의 노동자에게만 배분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번영이 자연자원을 파괴함으로써만 보장되는 것이라면, 혹은 생물종과 문화의 다양성을 해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지금의 방법이 좋겠지요.

 

 

이 '대안 기업가'들은 강한 윤리의식을 갖고 있으며, 인간 저마다의 능력이 긍정적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는 데 근본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의 가치체계에 맞추어 일상의 활동을 영위할 수 있다는 데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그들은 부의 창출과 인본주의를, 그리고 생산 활동과 생태적 책임감을 결합시킬 수 있는 대안적 해결방법을 모색하는데 큰 의미를 둔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세계를 건설하는 데 참여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117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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