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을 구경만 하는 것은 더 힘들어서 그래요. 더구나 노인이 일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말이에요.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소년은 조서에 서명을 했다. 거기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적혀 있었다. 국경을 같이 넘은 남자는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 소년은 열여덟 살이 아니고, 열다섯 살이다. 이름은 클라우스(Claus)가 아니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서두르지 않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삶, 자연에서 배우는 지혜!
[본문발췌]
농사짓는 일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지혜를 배우고 따르는 일이다. 우리가 농업을 기본으로 삼아 농사를 짓고 살고자 하는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자연을 거스르는 삶과 문명으로서는 심신의 건강도, 행복한 삶도, 지속적인 생존도 보장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이란 자연과 조화하면서 지속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해롭고 성가신 것으로만 여기고 있는 돼지풀, 명아주, 쇠비름, 쐐기풀 같은 잡초들이 토양 깊숙한 곳으로부터 미네랄을 끌어다 황폐해진 표토 쪽으로 옮겨다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그 토양의 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즉 그 잡초들은 인정 많은 이웃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영양소들을 농작물 뿌리 쪽으로 끌어다 준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의 이러한 움직임을 '만물의 공존 법칙'이라 부르고 있다. 식물들 간의 공존과 유대관계를 통해서 서로를 살리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디 이러한 법칙이 식물들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이겠는가. 공생의 원리, 상생의 법칙이 우주 대자연의 법도가 아니겠는가. - 조셉 코캐너, <잡초는 토양의 수호자다>
자연농법은 자연에 맡기고 인간은 거기에 최소한의 도움만을 주는 농법이다. 자연은 개조, 개량해야만 하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따르고 배워 마침내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완전무결한 존재라는 것을 깨우친 사람들이, 이제까지의 인위적인 방법들을 버리며 그리고 돌아가고자 하는 하나의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 땅 갈이를 하지 않고,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제초를 하지 않는 것.
건강하고 완전한 벼의 생명을 먹어야 사람의 생명은 건강할 수 있다. 그러나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농약이나 비료로 얻어진 벼라면 그것을 먹는 인간의 생명은 약해져 병에 걸리기 쉽다. 그에 따라 건강한 정신도 점차 사라져간다. 벼처럼 생명이 결핍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약을 먹어야 하는데 또 그 약이 사람의 생명을 약하게 만든다. 결국 악순화의 반복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런 건강한 생명의 순환 속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다른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서로 먹고 먹히는 조화가 그대로 자연의 대 조화이자 커다란 활동이다. 이 대조화가 잘못되면 큰일이다. 어느 한 부분이 오염되거나 훼손되거나 병이 들거나 파괴가 되어 죽더라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것은 마침내 다른 부분으로 영향을 미쳐 결국 전체로 퍼져나간다. 인간으로부터 생긴 독은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온다. 자기가 만든 독이 다른 존재에 이르기 전에 자기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독성은 더욱 심해진다.
인간만이 여분의 것을 탐내고 있다. 우리는 다른 생명을 먹고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생명이지만, 스스로 자신의 적량을 알고 대자연 속에서 최소한 것을 먹어야 한다. 인간을 빼고는 다른 생물들은 모두 알고 있다. 지나치면 언젠가는 결핍되고 파괴를 불러 마침내는 전체로 파급되어 간다는 사실을. 인공 속에서 나날을 계속해온 결과 생명이 약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힘이 약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되어버린 탓이다. 자연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깨달을 수 있는 직관력에 구름이 끼어 있고, 주어진 그대로 자기를 완수하는 능력이 훼손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인을 제거해 주면 저절로 건강하게 된다.
작물 중에서 마른 땅을 싫어하는 것으로는 가지, 피망, 고추, 율무, 토란 등이 있고 특히 젖은 땅을 싫어하는 것으로는 토마토, 옥수수, 조, 수수, 감자 등이 있다. 또한 수박, 멜론, 참외, 배추, 무, 시금치 등도 습지를 싫어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자연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자연의 생명을 보지 않는 것과 같다. 과학의 눈은 결코 생명을 볼 수 없는 눈이다. 과학이라는 눈으로, 곧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물질뿐이지 생명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과학성에 의해..., 과학적인 증거가..., 과학적인 증명이 없으면 믿을 수 없는 마음은 물질밖에 믿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물질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어리석고 어둡고 쓸쓸한 마음인 것이다. 과학을 절대시하고 의존하는 자기 자신의 연약함, 어리석음, 불분명함, 소심함을 깨닫고, 곧 그것이 참이 아님을 깨닫고 거기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해서 과학의 진짜 의미와 그 작용을 정확히 깨달아야만 한다. 과학에 의해서 생기는 일체의 일들의 의미를 바르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학교 교육도 과학을 절대시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생명 영위는 전혀 보려하지 않는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다. 학생 개개인의 생명을 보지 않고, 개개인의 마음을 보지 않고 있다. 학습 내용 또한 생명을 문제로 삼지 않고 지엽적인 것을 과학으로 분석하여 지식화 하고 있다. 현행의 교육 제도는 지식의 양에 의해 우열을 결정하고 있을 뿐이다. 결코 어린이 개개인의 인간성 확립과 함께 참다운 통찰력을 깨닫게 하고 개개인의 직관력에 따라 학문을 행하는 장소가 되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의 대부분은 지나쳐서 모자람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신 양면으로 무엇이든 너무 많이 집어넣어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나침으로써 신체와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피로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혼란하게 만들고 연약하게 만들고 있다. 고장을 자초하며 병을 초래하는 불행에 빠져들고 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고, 지나치면 반드시 조우한 생명이 파괴되어 간다. 겨울은 모으는 활동이지만,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된다. 자연의 영위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는 야산의 작은 새들, 벌레들, 짐승들, 풀과 나무들은 지나치는 법이 없이 자연의 영위 그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영위로부터 벗어나 자기 멋대로 굴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서 지나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치고 있는 것은 바르게 자연의 영위에 따라서 소화하고 방출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 이상 지나치면 큰일이다. 그러면 생명이 점점 결핍되어 간다. 원기가 사라지며 기력이 없어진다. 의욕이 솟아나지 않고 정기와 신기가 사라진다. 지력은 고갈되고 능력은 움직이지 않는다. 마침내는 참다운 앎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
젊은 생명은 하나밖에 몰라 지나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성장기의 생명에게 개화결실을 재촉하는 청년의 성급함, 장년기의 성숙함이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노년기의 성숙을 찾는 장년기의 초조함, 망설임, 자기 과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명도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문제를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숙함과 결점을 비극적인 생명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사람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불행한 생명도 길잡이로 삼고 진인들을 거울로 삼아가며 결코 참이 아닌 곳으로 길을 잃거나 영혼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미숙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장년기도 아직은 미숙기인 것이다. 청년기는 잎이 돋아나는 계절로 아직 꽃도 없고 열매도 없는 계절이다. 잎이 나야 하는 계절에 꽃이 피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다. 청년기는 청년기를 완수하고 장년기는 장년기를 완수하는 것이 본래의 생명이다.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자기 마음의 발밑을 보면서, 자신의 영혼 속을 꿰뚫어 보면서 장년기의 현재를 완수해 가야 한다. 자만 속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만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안에 깃들여 있는 신까지 속이는 일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성장할 때에도 결코 몇 계단씩 뛰어넘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술이나 사람이 성장하고 살아가는 인생에서나 모두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생명의 성장과 신체의 성장과 더불어서 이루어지는 정신의 성장이자 마음의 성장이며 예도의 완성인 것이다. 또한 그 어떤 길에 있어서나 참다운 예술에 이르는 길은 청년의 혼돈기를 반드시 거치기 때문에 영혼의 참다운 출발점은 장년기부터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장년기는 마음도 정신도 아직 미숙한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영혼은 젖먹이와 같아도 좋은 것이다. 서두를 일도 없으며 서둘러서도 안 된다. 교만해서도 안 되면 스스로 자신을 속여서도 안 된다.
땅을 갈면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의 순환을 단절하는 결과가 된다. 앞의 생명이 다음 생명을 기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들어버린 여름풀 아래는 수많은 작은 동물들이 활동이 있다. 그중에는 풀과 벌레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활동도 있다. 나고 주고 먹고 싸는 활동이 다음 생명과 주위의 생명을 기른다. 따라서 비료는 전혀 필요가 없다.
일체 만물은 서로 차이가 없고 나누어지지 않은 하나의 존재인 동시에 일체 사물이 또한 서로 다른 존재이다. 불일불이, 곧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하나이자 둘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더 옳으냐, 더 소중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둘 다 아니라고 하여 중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양방이 동시에 하나인 것이다. 한편이 빠진 곳에는 참이 없다. 가짜가 된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일체의 존재가 한 생명인 동시에 거기에는 개개의 차이, 곧 남녀의 차이, 주객의 차이, 주종의 차이, 선생님과 학생의 차이, 하늘과 사람의 차이, 신과 인간의 차이, 의사와 환자의 차이, 농부와 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일체임과 동시에 별개인 그것은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 활동하며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하나임과 동시에 개개의 차이가 있음을 온전히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불행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영혼은 항상 엉뚱한 것을 좇아 쓸데없이 먼 곳까지 찾아가 방황하고 있다. 신비스럽고 완전한 자신의 생명을 헛되이 연소시키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완수하고자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는 것에 소홀히하며 본연 그대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살기를 피하려고만 하는 안타까운 습성이 아닐 수 없다. 상대 세계에 살며 대립에 떨어지고 소아에 집착하여 하나를 둘로 나누고는 그 중 한쪽에만 사로잡혀 그것만을 옳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곳은 한편이 밝으면 반드시 다른 한편은 어두운 어둠의 세계이다.
논밭에 풀과 벌레가 번창하면 논밭의 생명도 번창한다. 잡초는 논밭의 양분을 빼앗지 않고 벌레와 함께 오히려 논밭을 기름지게 만든다. 논밭의 생명활동이나 채소의 영위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는다. 생명활동에 사람은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이다. 본연의 영위에 일체를 맡기면 된다. 본리를 영위하는 채소나 논밭의 완전한 작용에 맡기면 된다. 필요가 있어서 논밭의 영위를 훼손 또는 파괴할 경우는 되도록 파손을 줄이도록 한다.
목적하는 채소의 생명이 다른 풀의 생명에 지지 않도록 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채소와 풀이 모두 아직 어린 때는 풀을 뿌리 채 뽑아서 그 자리에 놓아준다. 어린 풀뿌리는 매우 가늘기 때문에 흙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뽑더라도 채소의 성장을 방해하는 곳에 있는 풀만을 그렇게 하면 그렇지 않은 풀은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둔다. 풀이 이미 자랐을 경우는 낫으로 베어 그 자리에 놓아준다. 자를 때는 뿌리와 줄기의 접점을 자른다. 그러면 뿌리는 흙속에 그대로 있지만 잘라진 곳에서 싹이나 줄기가 다시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덩굴성으로 인해 키가 큰 채소나 줄기가 딱딱하고 강한 잡곡류가 이미 자랐을 경우는 풀줄기를 낫으로 베어서 그 자리에 놓아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름의 왕성한 생명 잔치를 마치고 성장 후반기의 가을로 접어들어 있는 풀은 그대로 두어도 좋은 경우가 많다. 이를 알 수 있는 힘은 수년 동안 계속하여 농사를 짓는 사이에 절로 생기게 된다.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경우는 될 수 있는 한 풀의 생명도 그 장소에 일생을 완수하고 자연 속에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가게 맡겨둔다. 종류가 다양한 여러 가지 풀들의 생명이 논밭에서 순환하는 쪽이 흙의 생명을 건강하게 만들며, 거기 있는 채소 또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다.
적량을 알고 지나치지 않으면 지구는 언제나 낙원. 낙원의 모든 보물을 섬기고 아끼는 방법을 모르면 낙원은 더 이상 인간에게 낙원일 수가 없다. 지구상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뿐이다. 인류가 생명을 완수하고 즐겁게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올바른 방법으로 받아들이면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줄거나 없어지는 일이 없다. 항상 일정량을 계속해서 유지해 가며 지구 생명과 함께 순환해 갈 수 있다.지구와 우주는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항상 가득 채워주는 낙원이다. 동시에 일체의 생명들과 함께 사람들의 생명도 천수를 누리며 사람들의 생활은 안정에 이르러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것이다.
탐욕에 빠진다거나 제멋대로 군다거나 자기를 잃어버리고 미망 속을 방황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한 무지한 행위를 넘어서 진실을 깨우치고 다른 생명을 받아들이는데 적량을 알고, 일체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며 그들과 조화하는 생활을 통하여 주어진 낙원을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숲이나 산으로부터 나무를 베어내되 지나치는 일이 없으면 자연의 영위 안에서 절로 새로운 나무가 나서 자라므로 산과 숲은 언제나 풍요롭다. 지나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산이 풍요로우면 그곳에 새와 짐승들이 모여 번영한다.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산은 들과 논밭과 사람 사는 마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를 준다. 그러면 지구는 낙원이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물고기를, 산에서는 나무와 새와 짐승을, 산야초를, 초목의 열매를 마구잡이로 따고 캐고 베어내고 잡아서 먹고 저장하고 돈으로 바꾸며 탐욕을 부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인류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함께 죽여 가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망가뜨려 가는 공멸의 길을 걷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적량을 알고 지나치지 않으면 바다에는 항상 물고기가 가득 차서 번창하고, 야산에는 나무와 풀들이 풍요롭게 우거지고, 논밭에는 벼와 채소가 풍성하게 자라고, 인간의 생명은 평온하게 번영하며 천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잠재한 최선의 본성을 살리기 위한 열쇠는 최악의 본성을 발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대중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적자 생존' 개념은 최악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한 연구는 가장 덩치가 크고 가장 힘세고 가장 비열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스트레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적 스트레스는 우리 몸에 비축된 에너지를 고갈시켜 면역체계를 약화하고 결국 우리는 더 적은 수의 후손을 남기게 된다. 마찬가지로 공격성이 높을수록 비용이 많이 드는데, 싸워서 다치거나 잘못되면 죽을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적자'는 우두머리 지위를 차지할 수도 있지만, 그러다가 '더럽고 잔인하고 짧은' 인생으로 끝날 수도 있다.
타인의 의도나 욕망, 감정 등 인간에 대한 이해와 기억력, 전략능력이 아무리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과 결합하지 않으면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친화력은 타인이 마음과 연결될 수 있게 하며, 지식을 세대에 세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게 해준다. 또 복합적인 언어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문화와 학습의 기반이 되었으며, 친화력을 갖춘 사람들이 밀도 높게 결집했을 때 뛰어난 기술을 발명해왔다.
친화력은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를 통해서 진화했다. 가축화징후는 야생종이 사람에게 길드는 과정에서 외모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간에게는 사회화 과정에서 공격성 같은 동물적 본성이 억제되고 친화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자기가축화 과정이 나타난다. (리처드 랭엄, 데일 피터슨, <악마 같은 남성>)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우리 종은 갈수록 복잡한 방법으로 협력하고 소통했고 이로써 문화적 역량도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 종은 누구보다 빠르게 혁신할 수 있었고 또 그 혁신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친화력에도 어두운 면은 존재한다. 우리 종에게는 우리가 아끼는 무리가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위협이 되는 무리를 우리의 정신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연민하고 공감하던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하므로 위협적인 외부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다.
사회연결망은 많은 이유로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기술 발전에 필수 요소다. 더 큰 사회연결망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구 집단은 그저 기술의 진보가 멈추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집단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영장류 학자 토마셀로는 무인도에 혼자 남겨진 어린이는 침팬지와 아주 흡사한 문화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약 1만 2000년 전 본토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고립되었다. 화석 기록을 보면 이 시기 전까지 그들이 사용한 도구는 더 큰 규모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집단과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만 년 뒤, 본토 원주민들의 도구 세트는 눈에 띄게 늘어났지만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의 도구 세트는 겨우 몇십 종으로 줄어들었다.
사회연결망이 확장되면 강력한 피드백 순환 고리가 시작 된다. 사회적으로 연결될수록 우리는 더 나은 기술을 갖게 된다. 개선된 기술로 더 많은 양식을 구할 수 있어 우리는 더 많은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더 밀도 높은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된다. 인구밀도가 높은 집단은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킬 것이며 이런 식으로 순환 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자연선택이 다정하게 행동하는 개체들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여 우리가 유연하게 협력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켰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친화력이 높을수록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강화되는 발달 패턴을 보이고 관련 호르몬 수치가 높은 개인들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욱 성공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가설은 첫째, 감정반응이 격하지 않고 관용이 높을수록 자연선택에 유리해졌고 이것이 협력적 의사소통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능력과 연관되며 둘째, 우리의 외형과 생리 작용, 인지능력의 변화가 다른 동물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축화징후와 유사하다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 이미 큰 뇌를 지니고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 종 조상이 이 자연선택에 성공했다. 자기가축화는 다른 동물 종들에게서도 일어났을 수 있지만, 자기가축화 과정이 시작될 때부터 극도의 자제력을 지녔던 것은 우리 종뿐이었다. 자기가축화 과정을 겪으며 감정반응을 더욱 억제함으로써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능력이 한층 더 강화된 것이다. 사람의 자기가축화 가설이 옳다면, 우리 종이 번성한 것은 우리가 똑똑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친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사람 사회에서 지배력을 선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 장악을 막기 위한 용도로 공격성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나눔, 관용, 협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만으로는 외부 집단을 향한 온갖 극악무도한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또한 우리가 진화과정에서 마음이론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신경망의 활동을 둔화시키는 능력도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우리 집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의 기본 인권에는 눈감는 것도 이 능력 때문이다. 이 맹목성은 편견보다 훨씬 더 어두운 힘이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할 때 그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와 하등 상관없는 일이 된다. 그런 자들은 공격해도 무방해진다. 규칙도, 규범도,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도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집단 정체성을 토대로 타인을 판단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향한 사랑이 정체성이 다른 타인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공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친화력을 지닌 동시에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닌 종임을 설명해준다. 외부인을 비인간화하는 능력은 자신과 같은 집단 구성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만 느끼는 친화력의 부산물이다. 하지만 펄럭이는 귀나 얼룩이 있는 털 같은 신체적 변화와는 달리 이 부산물은 실로 가공할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다른 누군가가 위협으로 여겨질 때, 그들을 우리 정신의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는 것이다. 연결감, 공감, 연민이 일어날 수 있던 곳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다정함, 협력,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종 고유의 신경 메커니즘이 닫힐 때, 우리는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소셜미디어가 우리를 연결해주는 이 현대 사회에서 비인간화 경향은 오히려 가파른 속도로 증폭되고 있다. 편견을 표출하던 덩치 큰 집단들이 보복성 비인간화 행태에 동참하며 순식간에 서로를 인간 이하 취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를 보복적으로 비인간화하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우리 종은 독재자가 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우리 종은 오로지 사회의 신용을 중시하며, 권력을 독점하려는 이는 누가 되었건 배척하거나 죽이는, 작은 무리의 수렵채집인으로 살도록 진화했다. 수천 세대에 결쳐서 이 평등주의자 무리들이 전 세계 곳곳으로 이주하는 동안 나머지 다른 사람 종은 모두 사라졌다. 독재의 씨앗은 우리가 최초로 농작물을 수확하면서 함께 뿌려졌다. 식량을 생산하고 많은 양을 저장하기 시작하면서 사회가 성장했다. 사람들은 물자를 독점하기 위해서 협력해야 했고 그 누구도 독재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견제하던 작은 규모의 수렵채집 집단이라는 장치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100명쯤 되는 무리 안에서는 쉽게 존재가 드러나 처벌받았을 독재자들이 익명이 가능해진 큰 무리 속에 숨어 한 사회 내의 하위집단을 선동해서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부족, 왕국, 제국, 민족국가 이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는 이 방식, 즉 싸워 이긴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세워졌다. 농경 사회는 한 울타리 안에서 빼앗고 빼앗기는 제로섬게임에 갇히게 되었다.
"너무 민주적일 때 민주주의는 실패한다."고 2016년 언론인 앤드루 설리번은 경고한 바 있다. 관용을 베풀다 못해 스스로가 잠식되기 시작하는 때가 민주주의가 과도해지는 지점이다. "지고한 자유로부터 ... 야만적인 속박이 널리 퍼져" 폭군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국가>에서 말했다. "폭군의 최우선 관심사는 갖가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지도자를 원하기 때문이다."
사회지배 성향과 우파 권위주의 성향을 가진 극단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이 결코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권력의 집중이 아닌 분산을 추진하고, 유사함이 아닌 다름을 찬양하며, 만인의 평등한 권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에 살면서 자기가 속한 집단이 더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다름이 전체의 하나됨을 위협한다고 여긴다면, 다름을 찬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과녁의 원 외곽에 속하는 모든 극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에 위협이 되거나 자신들의 신념에 도전하는 이들을 도덕적 관점에서 배제, 즉 비인간화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정치적 신념은 유동적이다. 사람은 중도에서 원 외곽으로 나갈 수도 있고, 다른 도시로 이사한다든가 나이가 든다거나 소득이 변하든가 하는 개인적 겨험이나 정치적 사건을 겪은 뒤 다시 중도로 돌아갈 수도 있다. 원 외곽에 속하는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이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느끼고 더욱더 극단으로 치달을 때 정치는 더 불안정해진다. 그 위협이 커지면 온건한 중도에 속했던 사람들까지도 극단주의로 밀려날 수 있다.
중국의 문화혁명,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스탈린주의, 무정부주의 테러, 프랑스혁명, 일본 제국주의까지 권력자는 어떤 형태의 정부로도 비인간화와 그에 수반하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들을 자신이 위협받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뿐이다. 나치 지도자 헤르만 괴링이 뉘른베르크 감옥에서 말했듯이, "지도자는 언제든 국민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아주 쉬운 일이다. 그저 우리가 공격받고 있으며 평화주의자들에게는 당신들이 나라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다고 말한 뒤,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비난하면 된다. 어떤 국가에서든 원리는 동일하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다정한 본성 속에 자리한 이 어두운 면을 견제하기 위해 설계된 제도다. 이 형태의 정부가 직면하는 난제에 관해서는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천문학적 국가 채무, 도를 넘는 군사적 개입, 노쇠한 기간 시설, 만연한 유언비어, 고령화 사회 같은 문제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에 국한해서 보자면 시민담론의 부재, 편의주의적 선거구 개편 문제, 초당적 협력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호한 의회 규칙(예를 들면 하스터트 규칙), 유권자 통제, 규제 없는 사적 정치자금 모금을 통한 선거 비리가 주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이 가운데 많은 것이 한 가지 근본적 문제의 증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같은 편에게는 친절하고 다정했던 사람이, 다른 편에게는 잔인해지는 인간 본성의 역설 말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왜 접촉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해준다. 우리는 내집단의 구성원들이 위협받을 때, 평소에는 타인이나 외집단에게도 무리 없이 잘 느끼던 공감능력을 차단시킨다. 이에 외부자들은 위협받는다고 느껴 상대 집단을 비인간화하고, 여기에서 보복성 비인간화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서로 접촉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위협받는 느낌을, 아주 잠깐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다른 종류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답성 인간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집단 사람들과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사회적 유대감이 더 많이 형성되며 타인이 지닌 생각에 대한 감수성도 전반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 문화, 인종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와 소통은 우리 모두가 같은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효과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에 따르면 더 평화로운 전략이 더 효과적인 결과를 얻어낼 것이다. 폭력 시위는 위협감을 가중시켜 보복성 비인간화의 순환 고리에 불을 붙이게 될 것이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다.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었건 극단에 가까운 신봉자일수록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집단을 비인간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집회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외부자가 그 집회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은 집회의 '평화로운' 부분임을 기억하자. 평화로운 노력만이 내구력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도시는 서로 다른 배경과 관점 및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섞여 생각을 교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조상들에게는 무역로를 따라 형성된 정착 부락이 있었다. 머나먼 곳에서 떠나온 여행자들이 이곳에 모여 생각과 기술, 상품을 나누었다. 현대의 우리에게 이 역할을 하는 곳은 공원, 카페, 극장, 식당 같은 공공장소다. 우리는 이런 장소에서 이웃을 만나 어울리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친해질 수 있다. 서식지는 바뀌었지만 우리 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큰 규모의 집단 안에서 협력하며 살아갈 때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종이다. 우리는 출신이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할 때 가장 혁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건축물이 관용을 베풀 때 그 안의 개인들도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고 무례하지 않게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으며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은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기업뿐 아니라 정부, 정당, 사회 단체를 비롯한 모든 조직이 건강하고 지속적 발전과 혁신을 이루려면 다양한 출신, 성향, 생각을 가진 구성원들이 모여 조화롭게 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
[본문발췌]
1990년대에 활동한 정보디자인 분야의 전문가 에드워드 터프티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글로 된 내러티브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바뀐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조용히 내러티브를 읽으며 회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모두가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발표 내용에 관한 토론을 이어간다. 발표할 내용을 내러티브, 즉 줄글로 표현하면 데이터 요소 간의 연결고리를 설명할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슬라이드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또한 참석자들은 '듣는' 속도보다 '읽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에 정보 전달에 드는 시간을 크게 아낄 수 있다. 이렇게 절약한 시간으로 참석자들은 보다 면밀한 질문을 더지며 우려 사항을 검토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아마존 조직문화의 '네 가지 원칙': '고객에 대한 집착', '장기적인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성공과 실패, 이 모두를 통해 항상 배울 것이다.', '운영의 탁월성'
목표는 구체적이면서Specific, 측정 가능하고Measurable, 달성할 수 있으며Attainable, 의미가 있고Relavant, 시기가 분명해야 한다Timely.
채용 프로세스에서 영향을 주는 인지 편향(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비논리적인 추론에 따라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패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특히 해로운 것은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로 당신 주변을 채우려는 '개인 편향Personal Bias'이다. 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교육 환경과 직업 경력, 직무 관련 전문성과 삶의 경험 등에서 자신과 비슷한 특징을 지닌 사람을 채용하려는 욕구가 있다. 이런 편향의 문제는 자명하다. 첫째, 그런 피상적인 동질성은 보통 업무 성과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 그런 지원자를 채용하게 되면 고만고만한 비전을 지닌, 생각이 다양하지 않은 인력들로 조직을 채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속력Speed', 아니 엄밀히 말해 속력과 방향Direction을 모두 측정하는 지표인 '속도Velocity'는 비즈니스에서 중요하다.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신속하게 움직이는 조직이 더 많은 혁신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그 이유는 단위 시간당 더 많은 실험을 수행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이 승인과 권한, 책임이 옥상옥 형태로 쌓인 '관료주의'라는 병폐와 싸우느라 신속하고 결단력 있게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조율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게 되면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에는 시간을 덜 쓸 수밖에 없었다.
조직이 크고 복잡해지면 업무의 중복이 생기고, 업무의 중복은 '의존성Dependency'을 낳는다. 다시 말해, 팀 안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자기네 힘만으로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존 관계에는 '조율'이 필요하다.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해결책을 논의하고 끝을 봐야 한다. 그리고 조율하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들 수밖에 없다. 아마존은 성장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율하는 데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한 반면, 새로운 무언가를 구축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못했다. 직원 규모는 선형적으로 증가했지만, 그에 따라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경로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든 모든 의존성은 '지연'을 불러온다.
일반적으로 CEO나 기업들에 아웃풋 지표를 직접 통제할 힘은 없다. 진짜 중요한 것은 주가와 같은 아웃풋 지표에 결과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통제 가능한 인풋 지표'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활동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어떤 시스템이든 개선하기 전에 인풋이 그 시스템의 아웃풋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인풋을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지속적인 노력과 변함없는 목적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개선을 운영철학으로 삼는 환경이 필요하다." - 도널드 휠러, <변동 이해하기Understanding Variation>
인풋 지표는 제품 구색, 가격, 편의성 같은 것들을 추적한다. 그런 지표들은 카탈로그에 아이템을 추가하거나, 비용을 낮춰 가격을 인하하거나, 빠른 배송을 촉진하기 위해 재고를 조정하는 것과 같은 활동으로 통제할 수 있다. 반면 주문, 매출, 이익과 같은 아웃풋 지표는 매우 중요하긴 해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는 직접 조정할 수 없다. 인풋 지표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낸 항목을 ''측정할 수 있는' 데 반해서 말이다. 올바르고 통제 가능한 인풋 지표를 규명하라. 인풋 지표가 어설프거나 잘못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아웃풋 지표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즉, 올바른 인풋 지표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조직 전체를 가장 중요한 일에 몰두하게 만든다.
아웃풋 지표는 결과를 나타내고, 인풋 지표는 가이드를 제공한다. 통제 가능한 인풋 지표는 조직이 고객의 이익을 얼마나 잘 충족시키는지, 그래서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아웃풋 지표를 창출할 수 있을지 측정하는 정량적이고(데이터로 '깊이 파고들기') 정성적인 방법(일화와 고객의 이야기)이다. 비즈니스를 적절하게 평가하고 매주 개선에 매진하려면 기꺼이 실패를 논하고, 실패로부터 배우며, 고객을 더 기쁘게 할 '발명품'을 찾아 나서야 한다.
기업에 '실패'란 변화와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들을 상당히 많이 학습할 수 있는 '실험'으로 간주된다. 실패는 일시적이지만 결국은 성공을 낳는 경우가 많다.
인생과 알고리즘은 무언가를 설계한다는 면에서 닮았다. 설계가 성공하려면 논리적 사고, 경험과 인식 등이 필요하며 특히 창의성은 결코 빠질 수 없다.
나는 인생이 '최적해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끊임없이 노력해 자신을 발전시켜 자신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담금질 기법 알고리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젊은 시절 충분히 탐색하고 잠깐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여야 특정 영역에서 최대인 국소 최적에 빠지지 않고 더 높은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일정 단계에 이르러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곳에서 깊이 탐색하려 할 뿐 쉽게 코스를 바꾸지 않는다. 따라서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다양한 경험을 쌓고 여러 직업을 시도해야 하며, 눈앞의 안정성만을 좇아 전망이 좋지 않은 직장에 안주해 평생을 바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린 시절 '노력하면 성공한다'라는 세계관을 교육받는다. 하지만 이런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평소에는 낙관적이고 적극적이더라도 좌절이 순간에는 쉽게 무력감에 빠진다. 반면 또 다른 세계관인 '숙명론'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바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정확한 세계관은 두 세계관 사이에 있는 '확률적 세계관'이다. 확률적 세계관의 핵심 사고는 아주 간단하다. 일의 최종 결과는 우리가 정할 수 없지만, 해당 결과가 발생할 확률은 노력을 통해 바꿀 수 있다.
확률적 세계관은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성사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라는 고사성어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다.’라는 것은 ‘노력으로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사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은 ‘열심히 노력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고 해도 확률상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다.
확률에서 반복은 성공 확률을 더 높일 수 있다. 반대로 노력해도 확률을 바꿀 수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끼리 모여 함께 토론해 얻은 공통된 의견이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이것 또한 바로 다양성의 이점이다. 하나의 방정식은 하나의 각도에서 관찰해 얻은 결과이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을 진행한다면 연립 방정식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연립 방정식을 풀어가는 과정은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한 결과를 종합해 내부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서로의 시각이 너무 비슷하면 의견을 취합해 얻은 공통된 의견이 잡음에 상당히 민감해진다. 그래서 아주 작은 잡음에도 결과는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약간의 실수가 1마일이나 벗어난 것과 같다'라는 결과를 얻게 된다.
시스템에 하나의 입력이 주어지면 그에 따른 응답이 있다. 만약 입력이 어떤 펄스와 유사한 일회성 자극일 경우 시스템의 응답은 일반적으로 0에서부터 시작해 최고점이 이른 뒤 다시 서서히 내려가 0에 이르는 상태를 보인다. 연속적으로 신호가 입력될 경우 우리는 해당 입력 신호들을 개별적인 펄스로 나눈 뒤 하나의 펄스가 순차적으로 시스템에 입력되어 작용하게 할 수 있다. 합성곱은 펄스 연쇄에 대한 시스템의 반응이 각각의 펄스에 대한 반응의 합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합성곱은 우리가 일상에서 선택해야 할 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빈번하게 찾아오는 소확행이 아주 가끔 찾아오는 대확행보다 훨씬 큰 행복감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나, 대도시의 직장인은 작은 평수라도 시내 중심에 있는 집을 구매하는 게 교외에 있는 넓은 집을 구입하는 것보다 낫다는 점이나, 단어를 중복해 외우는 시간 간격이 너무 길면 기억할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징을 장점으로 바꿀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사물이 가진 가치를 충분히 쓸 수 있고, 사람이 가진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장단점'의 세 가지 관점. 첫 번째, 모든 일에는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다. 두 번째, 장단점은 절대적이지 않다. 단점만 있거나 장점만 있는 상황은 거의 없고, 대부분 특징만 있다. 어떤 특징이 장점이 될지 단점이 될지는 상황 판단에 달려 있다. 그러니 특징이 장점으로 변할 수 있는 요소를 찾아 장점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세 번째, 통제 가능한 단점을 활용해 더 큰 장점으로 바꾸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이다.
고대 그리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은 사물 자체에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에 의해 좌우된다"라고 말했다. 쇼펜하우어도 "사물에 대한 말의 의미가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결정할 뿐 사물 본래의 모습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사실 주변에는 두 가지 관련되어 보이는 사건이 실제로는 또 다른 사건에 관한 조건부 독립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우리가 배후에 있는 '또 다른 사건'을 파헤치지 않는다면 '관련성'을 '인과성'으로 쉽게 오해하게 된다.
피드백은 시스템이 결함 허용Fault Tolerance과 강인성Robustness을 갖게 한다. 피드백을 운용하면 사전 설계를 정확하게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시시각각 실제 상황을 관찰하며 실제 상황과 목표의 편차를 조정한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기존 어떤 사물을 모방해서 혁신을 진행하고 싶다면 먼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역할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사물의 핵심 요소와 불필요한 제약이 무엇인지 파악한 뒤 핵심 요소만 추출하고 불필요한 제약을 제거한다면 더 좋게 개선할 수 있다. 즉 혁신을 효과적으로 이루는 과정 중 하나는 바로 본질을 파악하고 제약을 제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먼저 아래에서 위로 향했다가 다시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과정을 거친다.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은 사물의 겉모습에서 본질을 파악하고 핵심 원리를 발견해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제약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것은 본질과 원리를 바탕으로 불필요한 제약을 제거한 뒤 자신의 상황에 맞는 개선을 진행하는 것으로 핵심 원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상황을 더욱 좋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다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로 반대되는 의견 속에서 새로운 방법이 제시되고, 서로의 의견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최종 방안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최소제곱법은 연립 방정식의 모든 방정식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해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방정식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해를 찾는 것이다. 최소제곱법에 담긴 사고는 중용의 지혜와 일맥상통한다. 바로 세계는 불완전하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방면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 양 끝을 잡고 중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러니 우리는 부분적으로 완벽한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여러 방면의 이익을 두루 고려해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기계의 경우 반직관적이지만 명확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복잡한 기계는 반드시 점진적이며, 대부분 간접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모든 기능을 가진 시스템을 단 한 번의 화려한 조립으로 완성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먼저 실행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 최종적으로 만들고 싶은 시스템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복잡한 기계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수확 체증Increasing Return은 여러 차례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성장' 과정이다." -<와이어드>의 창간자이자 수석 편집장인 작가 케빈 켈리가 <통제 불능Out of Control>에서 한 말
싱글 태스크 학습은 어떤 임무에 대한 훈련을 진행하는 것으로 훈련을 끝내면 해당 임무를 아주 잘 완성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임무는 기본적으로 서로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만약 우리가 한 사람에게 여러 임무를 동시에 훈련하게 한다면 그 사람은 단일 임무만 훈련한 사람보다 훨씬 유능할 것이다. 반면 전이 학습은 어떤 영역에서 학습한 지식을 다른 영역에서 응용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이에 우리는 다른 영역으로 전이가 가능한 기초 능력을 기르는 데 집중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싱글 태스크 학습, 멀티 태스크 학습, 전이 학습은 현재의 기능에 치중해 있지만 메타 학습은 미래에 치중해 있다. 메타 학습 능력을 갖춘 사람은 당장 새로운 임무를 완성할 수는 없지만 짧은 훈련만으로 빠르게 파악해 임무를 완성할 수 있다.
명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은 먼저 중요한 정보를 말하고 사소한 부분을 서서히 덧붙여 설명한다. 이런 방식은 '중요한 부분에서부터 부가적인 부분으로의 증량식 표현'이라고 부른다.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은 삶의 철학적 질문을 그림으로 담아내듯이, 니체를 읽으며 다음과 같은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아 간다.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가?
나는 내 삶을 제대로 누려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나는 과연 내 인생의 주인인가 아니면 노예인가?
나는 어떻게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
[본문발췌]
행복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다. 행복이나 불행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현재 가진 것에 얼마나 만족하며 감사하는가에 달려 있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낯선 세계로 나아갈 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 왔던 것들이 흔들릴 때 진정한 나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현실적인 조건과 상황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게 사람들 대부분은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어려워한다. 또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때면 한편으로 현실에 안주하고 싶다는 저항감이 들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직면하고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이다. 삶을 힘들게 하는 것들을 쉽게 외면하지 마라. 그럴 때일수록 새로운 일을 시도하라. 판에 박힌 낡은 삶을 새로운 것으로 채워보라. 진정으로 변화하고 싶다면 지금까지 나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때로는 목숨보다 더 사랑했고 나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맹세했던 것까지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권태기는 위기가 아니라 전환기이다. 자기 삶의 진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동력을 얻는 때이다.
자신을 극복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나답게 사는 것이다. 나답게 살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스스로를 사랑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타인을 부러워하지도 말자. 내 몸도 나의 것이고, 내 영혼도 나의 것이다. 자신을 소중한 사람이라고 여길 때 비로소 인생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자기 자신을 하나의 프레임에 가두지 말고 다양한 모습의 나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나다워지는 길이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인생의 중반기를 의미 있게 보내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해 보라. 힘에의 의지는 현재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에 맞추어 스스로 자기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 그렇게 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 <즐거운 학문>
삶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감사의 힘이다.
세상에 이미 결정된 일은 없듯이 이미 정해진 나의 모습도 없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의 모습이 변해 갈 뿐이다. 운명의 여신은 항상 자신의 바람직한 모습을 적극적으로 꿈꾸는 사람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선사한다.
우리 삶에서 지금 이 순간은 단 한 번밖에 없다. 삶은 순간순간의 조각들이 모인 결과물이다. 니체는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순간을 산단.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순간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커다란 상처를 받은 사람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과거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다. 또한 커다란 야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이 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 과거와 미래를 위해 현재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는 사람이 많다.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면 삶을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바꿀 수는 있다. 다시 말해 나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 진정으로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하고 충실해야 한다. 당신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때 운명은 진정으로 살아 움직이게 된다.
창조력은 익숙한 과거를 잊고 낯선 곳으로 자기 자신을 던질 때 비로소 발견된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영혼을 강력하게 끌어당길 만큼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조차 모를 수밖에 없다.
니체는 사태를 바라보는 하나의 눈, 즉 어떤 방향으로든 전혀 치우쳐서는 안 되는 하나의 눈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경우는 경계하라고 한다. 하나의 눈으로만 본다면 사태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힘이 억압되고 결여되기 때문이다. 편견, 선입견,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사태를 좀 더 다양한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대상을 한 가지 각도로만 바라보지 말고 약간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한쪽으로만 치우쳐 생각하는 편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보는 대로 보이는 법이다.
우리는 명사형의 세계에 갇혀 산다. 명사형의 세계는 고정되어 있고, 안정적이며, 예측과 통제가 가능하다. 명사형의 삶은 성공, 명예, 돈, 사랑, 권력 등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삶이다. 반면에 동사형의 삶이란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행동을 하는 삶을 말한다. 모든 존재가 생성, 변화, 소멸하므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니체는 우리 가운데 누가 자신의 삶 자체, 자신의 경험에 관해서 진지하게 관심을 둔 적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즉 니체 철학은 인간이 지금까지 명사형의 삶을 살아왔을 뿐 동사형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돈이나 명예 같은 것들을 한순간에 실수로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안정하고 불안하며 예측하기 힘든 동사형의 삶은 회피하려 한다. 명사형의 세계에 익숙한 나머지 동사형의 세계로 이행을 두려워하며 저항한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동사형의 세계에서 경험을 통해 쌓은 지혜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명사형이 아닌 동사형의 삶을 추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마음을 다해서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늦은 때란 없다.
우리는 일단 시도해야 하고 그 길 위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물음, 그리고 물음에 대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삶에서 최악의 상황은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이다. 시도하는 사람은 언젠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변화를 원한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질문하라. 꿈꾸는 자만이 삶을 변화할 수 있다.
서두른다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려고 '빨리빨리' 하다가는 빠르게 나동그라질 수가 있다.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중년에게 필요한 것은 '느림과 기다림의 미학'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삶에는 영원한 상승도 영원한 하강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맞는 인생의 속도로 나아가면 된다.
작은 변화가 모여 운명이 된다. 작은 행복에 감사해하는 사람에게 더 큰 행복이 찾아오는 법이다. 일상생활에서 아주 사소하다고 넘겨 버리는 것들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든다.
긍정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강력한 에너지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에 빈자리를 마련한다. 니체는 망각이 없다면 어떠한 행복도, 어떠한 명랑함도, 어떠한 희망도, 어떠한 긍지도 가질 수 없고, 현재라는 이 순간도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약간의 빈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잘 잊어버릴수록 우리의 행복 지수는 높아진다. 부정적 과거의 기억에 얽매인 사람은 현재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서 살지 못한다. 과거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버릴 때 비로소 현재의 삶이 들어올 공간이 생긴다. 우리는 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으로 시달리지 않고 현재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니체는 망각은 '강한 건강의 한 형식'이라고 말한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망각과 기억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제때 기억할 줄 알아야 한다. 제때 잊을 줄 알아야 한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우리를 단련한다. 고통에도 곤혹과 불안에 빠져들지 않는 자만이 위대함에 도달할 수 있다.
혼자라는 것은 남들과 다르다는 뜻이고,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혼자라는 뜻이다.
고귀한 인간은 '좋음'이라는 근본 개념을 먼저 자발적으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해 내고, 거기에서 비로소 '나쁨'이라는 관념을 만들게 된다! 이 고귀한 기원을 지닌 '나쁨'과 끝없는 증오의 도가니에서 나온 저 '악함'을 비교해 보자. 전자가 후에 만들어진 것이며 병렬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자 일종의 보색이라면, 후자는 이에 반해 원형이며 시원이나 노예 도덕이라는 구상에서 나온 본래의 행위이다. 겉으로 보기에 '좋음'이라는 개념에 대치된 '나쁨'과 '악함'이라는 두 개의 단어는 얼마나 다른가? - <도덕의 계보>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모른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귀한 인간은 자신을 가치를 창조하는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다. 또한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존중한다. 고귀한 인간은 자기만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꿈꾸고 주어진 삶을 긍정하는 존재이다. 고귀한 인간은 자신을 존중하며 능동적인 삶을 산다. 비천한 인간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수동적인 삶을 산다. 당신은 삶의 주인으로 살 텐가, 노예로 살 텐가.
평생 행복하게 사는 법
운명은 기대하지 말고 우연은 환영하라. 운명처럼 생각한 일, 꼭 이루고 말겠다던 목표, 기대했던 경험들보다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우연한 일들이 오히려 우리를 기쁘게 한다.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즐거워하고 웃음을 터질 때, 소소한 행복감이 찾아온다.
행복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란 없다.
행복하고자 한다면 행복한 삶에 대한 의욕을 가져야 한다. "모든 행복의 공통점은 두 가지, 즉 충만한 감정과 그것에 수반되는 자부심이다."
행복한 시대는 없지만 언제든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다.
죽음은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늘 생각하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대 지금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무모한 삶에 대한 욕망을 떨쳐 낼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고 기억한다는 것은 비관적인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자신의 삶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많은 사람이 바쁘게 돌아가는 현실에만 집중할 뿐 자신의 죽음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낙관적으로 볼 수 있고, 숨이 붙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제때에 살고 제때에 죽어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좋든 나쁜든, 아름답든 추하든 모두 긍정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말한 삶의 모든 의문스럽고 낯선 것들 자체에 대한 아무런 유보 없는 긍정의 형식인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다.
덜 갖고, 덜 쓰고, 덜 버리는 삶! 더 베풀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며, 더불어 잘사는 삶!
[본문발췌]
새롭고 멋진 인생에서는 무언가를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귀하고 비싼 식료품을 사들인 다음 과식으로 생긴 문제를 해결하느라 의료비를 엄청나게 낸다. 어떤 사람은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사들여 쌓아 놓으려고 더 큰 집과 더 넓은 수납 공간을 구하느라 돈을 쓴다. 덜 쓰면서도 충만한 삶, 흥미진진한 삶, 즐거운 삶을 누리는 것. 덜 쓰고 더 잘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돈과 물건에 사로잡힌 노예'를 바라보며 소로우는 "사람은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물건의 숫자와 반비례해서 부유해진다"라고 말했다. "욕망을 줄임으로써 나는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 간디
덜 소비하고 더 현명하게 소비하는 것이 삶을 새롭고 멋지게 사는 방법이다. 막연히 갖고 싶은 것과 꼭 필요한 것을 냉정하게 구분하는 것이 인생을 멋지게 사는 방법이다. 욕망 때문에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 판단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만일 나 자신만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행복을 잃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착취한다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내 행복에 관심을 갖는 친구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나에게 비극이 닥치면 사람들은 나를 염려하는 대신 내 불행을 즐거워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인정 넘치고 이타적으로 행동한다면,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는지와 상관없이 그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곳곳에서 많은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비극을 겪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러 올 것이다." - 달라이 라마
어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500달러가 있는데 살아가면서 400달러를 남에게 주었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얼마나 남게 될까?" 학생들의 대부분 이렇게 대답했다. "100달러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진실은 좀 다르단다. 내가 지상에서 500달러를 갖고 있다가 400달러를 남에게 주었다면, 마지막 순간에는 400달러를 갖게 되는 거란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남에게 준 만큼 내게 남아 있게 되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나눠주어서 가난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돈을 더 많이 갖는 것이 신이 축복을 내린 증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보려고 한다. 돈은 자원이다. 신념, 웃음, 우정, 건강, 창의력 그리고 기쁨을 위한 자원이다. 결국 재정적인 자유는 돈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삶의 진정한 목적을 얼마나 기억하고 이를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헨리 소로가 말했던 것처럼 "결국 한 사물의 가치는 그와 교환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양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재미있는 것은 인생에 관해 스스로 비전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롭고 멋진 인생이란 삶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고 아름다운 것을 포기하는 인생이 결코 아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소비와 빚의 악순환에 사로잡히는 대신, 개인적으로는 물론 전지구적으로 문제가 되는 과로와 수면 부족을 이어가는 대신, 정말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을 기반으로 부유함을 새로 정의할 수 있다. 모든 지출을 꼼꼼히 살피고 그 지출을 하기 위해 바꿔야 하는 시간과 삶의 에너지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보자. 비용을 잘 살피다 보면 이런 견지에서 각각의 지출에 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물건을 사는 대가로 바꾼 시간과 에너지의 양이 과연 그만큼 가치가 있는지 반문하게 된다. 어떤 항목에서는 지출을 그저 무의식적으로 하지 않았는지, 습관에 따라 또는 자동으로 지출하지 않았는지, 심하게는 중독성이 있지 않았는지, 지불해야 하는 삶의 에너지에 비례하는 만큼은 아니어도 그 구매로 삶의 질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돈을 쓰는 항목을 살펴볼 때, 시간당 임금을 활용해 '인생 에너지 시간'으로 환산해보면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하면 그 지출이 정말 충분한 만족을 주는지, 이를 위해 투입한 인생 에너지를 보증해줄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기가 쉽다.
돈 모으기가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생각을 떨쳐버리면 더 위대한 삶, 그저 무언가 소유하고 얻으려 노력하는 삶을 넘어선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할 필요가 있는 일을 하고, 돈과 인간의 정신에 관해 같은 숨결로 말하고, 돈에 관해 결정할 때는 두려움이 아닌 올바른 선택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계좌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건 있는 그대로 자기 모습에서 웃음과 기쁨, 아름다움을 찾아보자.
"내가 아는 것은 단 하나다. 우리 중 정말 행복한 사람은 어떻게 봉사할지 알아낸 이들이다." -슈바이처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진정한 소명을 발견하려면 오랜 연습과 훈련, 경청과 포기가 필요하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선물을 찾아내려면 끈질김과 헌신이 필요하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삶을 살려면 장점과 모든 약점이 필요하다.
오래된 좋은 인생에서는 셀 수 없이 복잡한 욕망과 물질적 소유가 부의 기준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진정한 부는 우리가 이 세상에 베풀어야 하는 선물을 나누고 축하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기쁘게 받는 것이다. 그러니 나가서 번성하라. 나가서 창의력을 발휘하고 열정적으로 충만하게 살아라. 나아가 모든 선택과 경험에, 모든 호흡과 모든 순간에 영혼이 지닌 모든 지혜를 발휘하라. 인생에 감사하는 한, 물질이라는 가리개를 넘어 자리한 의미와 목적을 잊지 않는 한, 마음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한 우리는 새롭고 멋진 인생을 즐길 수 있다. 삶을 새롭게 인식하고 믿음을 되돌리며 일상적인 것 속에서 성스러운 것을 찾고 영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인생을 새롭고 멋지게 살 수 있다.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길, 사랑을 따뜻한 담요로 삼고 평화를 편안한 배게로 삼고 기쁨을 영원한 삶의 동반자로 삼기를 기원한다.
멋진 인생을 위한 한 걸음 (옮긴이 글)
"잘 살고 싶어!" 세상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집은 클수록 좋을 것 같고, 큼지막한 중대형 차에, 유명 브랜드의 멋진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쉽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삶. 통장에 돈도 잔뜩 들어 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타이틀이 명함에 적혀 있다면 멋진 인생 아니겠냐고. 세상이 바뀌면 멋지게 사는 것의 정의도 변한다. 많이 벌어 많이 쓰기 위해 더 바쁘게 정신없이 사는 것이 옳은지. 별 필요하지도 않은데 그저 더 큰 것들을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정말 멋진 인생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육식의 폐해와 건강, 환경 문제에 관해서 이미 많은 책을 쓴 존 로빈스의 새 책은 이런 의문에서 출발했다. ... 의미 없는 소비와 낭비가 자신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 전체, 지구 모든 생명체에까지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확인하면 다시 한번 놀랄 것이다. 자신이 사는 환경을 파괴하는 유일한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라고 한다. 오존층이 사라지고 빙하가 녹아 대륙이 물에 잠기고 유독 물질과 강과 바다, 토양이 오염되고 멸종하는 동물과 식물이 점점 더 늘어나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 중 정말 심각한 재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자연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펠릭스 가타리는 "인류 스스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인류 역사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는데 지금과 같은 무관심, 무신경함이 계속 된다면 우리 후손에게 미래란 것이 과연 존재나 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지금처럼 살 수는 없잖아? 무슨 수를 내야지.' 책을 읽은 후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그 책은 충분히 존재 의미를 다했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존 로빈스가 쓴 <존 로빈스의 인생혁명>을 읽고 나면 무언가 작은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덜 쓰고 덜 버리며 더 많은 사랑을 베풀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멋진 인생에 한 발 내딛는 기쁨과 더불어!
두려움을 극복하고 욕심을 통제하는 것, 돈이 나를 위해 일하도록 만드는 과정에 중요한 요소다.
[본문발췌]
가난한 자들과 중산층은 돈을 위해 일한다. 부자들은 돈이 그들을 위해 일하게 만든다.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이기는 것이지만,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승리에 대한 흥분보다 더 크기 때문에 나서질 못하지. 너는 알아. 마음속 깊은 너만은 알지. 네가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나선 적이 없다는 것을. 이게 바로 안전하게만 살려는 사람들이 걷는 길이란다."
"대부분이 인생의 황금기를 돈을 위해 일하면서 허비하게 되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말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그대로 놔두고 늘 남들을 바꾸려고만 하지. 다른 사람들보다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단다." 삶의 많은 부분은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 즉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웠다. 만약 상황을 바꿔야 한다면 먼저 나 자신부터 바꿔야 한다.
현금흐름을 창출하는 자산을 구입하거나 구축하면 돈이 당신을 위해 일하게 된다.
인간이 삶은 두 가지 감정에 의해 지배된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과 '욕심'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적당한 가격을 부르면 살 수 있지. 그게 가능한 건 인간이 두려움과 욕심이라는 두 개의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먼저 돈이 떨어진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열심히 일하게 채찍질한다. 월급을 받은 뒤에는 탐욕이나 욕심 때문에 돈으로 살 수 있는 온갖 멋진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지. 그렇게 해서 하나의 패턴이 생기는 거다.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에 출근하고 청구서를 내고, 또 일어나서 직장에 가고 청구서를 내는 패턴이지. 인간의 삶은 죽을 때까지 두 가지 감정에 의해 지배된단다. 바로 두려움과 욕심이야. 그들에게 더 많은 돈을 주면 지출을 늘려서 다시 그 패턴을 반복하지."
역사적으로 위대한 문명들이 무너진 것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졌을 때였다.
자산과 부채의 차이를 알고 자산을 사라. 부자들은 자산을 취득한다. 가난한 이들과 중산층은 부채를 얻으면서 그것을 자산이라고 여긴다. 자산은 내 지갑에 돈을 넣어 준다. 부채는 내 지갑에서 돈을 빼 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새로운 해결책을 찾으려 들지 않는다.
정해진 절차 따르고 규칙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학교가 얼마나 창의성을 억누르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학교란 좋은 고용주가 아니라 좋은 직원들을 육성하는 곳이다.
주택을 보유한 고용인은 일반적으로 회사, 정부(세금), 은행(주택 융자금과 신용카드 빚)을 위해 일한다.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자산, 자산에서 비롯되는 현금흐름을 통해 지출 비용을 해결할 수 있는 것.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것은 대개 사람들이 평생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도 결국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 그들은 남들의 사업을 돕고 남들이 부자가 되는 데 평생을 바친다.
투자는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는 것이다. 당신의 가장 큰 자산은 당신이 아는 것들이고, 당신의 가장 큰 리스크는 당신이 모르는 것들이다.
금융 지능이란 회계와 투자, 마케팅, 그리고 법률 지식이 결합된 시너지 효과다. 이 네 가지 기술을 결합하면, 돈으로 돈을 버는 일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쉬워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에 관해 아는 유일한 기술이라고는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다.
의사소통과 협상 능력을 키우고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잘 다룰수록 삶은 더욱 쉬워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정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안전하게만 행동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잃는 걸 너무 두려워해서 잃게 되는 거다.'
학교는 실수를 피하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실수한 학생들에게 벌을 준다. 그러나 나는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식하고 평가한 후 보다 나은 결정을 내리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자산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약간의 두려움은 건강한 것이 될 수 있지만 실수를 할까 봐 두려워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교훈을 배울 수 있다면 실수는 좋은 것이다.
똑똑한 투자가들은 시장의 타이밍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들은 파도 하나를 놓치면 다음 파도를 찾아다니며 포지션을 확보한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기 없는 것을 사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소심한 투자가들은 대중을 따라가는 양 떼와 같다. 혹은 그들이 드디어 욕심을 내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현명한 투자가들은 이미 이익을 챙기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있다. 그러나 현명한 투자가들은 인기 없는 투자 상품을 산다. 그들은 팔 때가 아니라 살 때 이익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그들은 시장의 타이밍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저 서퍼들처럼 다음에 밀려올 커다란 파도를 기다리면서 포지션을 잡을 뿐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합법적인 '내부자 거래'다. 돈을 벌 수 있는 정보를 가진 부자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라. 돈을 버는 것은 바로 정보다.
모든 시장에서 저렴한 상품을 찾으라. 소비자들은 언제나 가난하다. 슈퍼마켓이 세일을 할 때, 예를 들어 화장실 휴지를 싸게 팔면 소비자들은 우르르 몰려와 사재기를 해 댄다. 그러나 부동산이나 주식 시장이 세일을 하게 되면(이런 걸 가격 폭락 또는 시장 붕괴라고 한다.) 소비자들은 이상하게 거기서 도망쳐 버린다. 슈퍼마켓이 가격을 올리면 소비자들은 쇼핑을 하러 다른 곳에 간다. 그러나 부동산이나 주식 시장의 가격이 올라가면, 소비자들은 갑자기 달려와 사들이기 시작한다. 당신이 이득을 올리는 것은 팔 때가 아니라 살 때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는 사람이 논리적인 동물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편견으로 가득 차고, 자부심과 허영으로 움직이는 감정적인 동물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판은 위험한 불꽃을 튀게 만든다. 이 불꽃은 자부심이라는 화약을 폭발하게 만들고, 그 폭발은 때로 죽음을 앞당기기도 한다.
사람들을 비난하는 대신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자. 왜 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애써 보자. 비판보다는 훨씬 더 도움이 되고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공감, 관용, 친절도 몸에 배게 된다.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된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존 듀이는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충동은 '중요한 사람이 되고픈 욕망'이라고 말했다.
에머슨은 말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다. 내가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원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따라서 세상에서 유일하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방법뿐이다.
"성공의 비결이란 게 있다면, 다른 사람의 관점을 가지고 당신의 관점뿐 아니라 그 사람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이다." - 헨리 포드
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하는 수고를 감수하라. 시간, 에너지, 이타심, 배려를 요하는 일들을 말이다.
"본질적으로 좋고 나쁜 건 없다. 우리의 생각이 어떤 것을 좋거나 나쁜 것으로 만든다." - 셰익스피어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열심히 듣지 않아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다음에 해야 할 말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귀를 열어 놓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면 개인적 논쟁에 허비할 시간은 없다. 하물며 감정이 상하고 자제력을 잃는 것과 같은 결과를 받아들일 여유는 더더욱 없다. 당신과 상대가 거의 비슷하게 옳다면 아무리 큰 건이라도 양보하라. 당신이 분명히 옳더라도 사소한 건이면 그냥 양보하라. 길에 대한 권리를 놓고 개와 다투다가 물리느니 그냥 개에게 길을 내주는 편이 더 낫다. 개를 죽여 봐야 물린 상처가 저절로 낫지도 않는다." - 링컨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 스스로 인정할 수도 있다. 또는 다른 사람이 요령 있게 잘 구슬린다면 기꺼이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솔직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우리의 목에 소화시키기 힘든 사실을 억지로 밀어 넣으려고만 한다면 반발심만 생기기 마련이다.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하지만 양보하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는다."
친절과 우호적인 접근 그리고 인정은 세찬 위협이나 폭풍같은 비난보다 훨씬 더 쉽게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일단 어떤 것을 말하고 나면, 그 말을 고수할 수밖에 다. 따라서 처음부터 긍정적인 방향으로 상대방을 이끌고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게 만들려고 할 때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 특히 세일즈맨들이 이러한 값비싼 실수를 잘 저지른다. 상대방이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도록 내버려 두어라. 상대방은 자신의 일과 문제에 대해서 당신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져라. 상대방이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게 만들어라.
사람을 다루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며 그들의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행동할까?"
"다른 사람과의 교제에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에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방식이 폭력적으로 우리의 방식에 개입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 헨리 제임스
"나는 이 길을 단 한 번 걸어갈 것이다. 그러니 내가 사람들에게 친절을 보이거나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순간 베풀어야 한다. 미뤄서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 길을 다시는 지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례함은 사랑을 먹어치우는 암세포이다. 이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까운 가족보다 낯선 사람들에게 더욱 예의를 차린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
"행복한 결혼이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지적으로, 의도적으로 설계된다는 의미에서 건축물과 같다."
많은 것을 가지려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들면 고달프다. 내려놓고 더불어 사는 재미를 즐겨야 몸과 정신이 건강해진다.
행복감을 높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시간 사용을 통제하는 것이다. 즐기는 일을 할 시간을 더 많이 갖는것! 재미와 즐거움이 없는 일을 하고, 행복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
[본문발췌]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번에는 용감히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느긋하고 유연하게 살리라. 그리고 더 바보처럼 살리라.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더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 더 많은 산을 오르고, 더 많은 강을 헤엄치리라. 아이스크림은 더 많이 그리고 콩은 더 조금 먹으리라. 어쩌면 실제로 더 많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거리를 상상하지는 않으리라.
- 나딘 스테어의 시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중에서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늘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그것을 고치고 싶어 하는 당신은 지극히 건강하다. 잘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하며 내일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당신은 어떻게든 성장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이상 스스로를 닦달하지 말고, 매사에 너무 심각하지 말고,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내일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그 모든 위험성을 예측하고 예방해 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생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헤맸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삶을 즐기는 것은 '~해야 한다'는 말을 줄이고, '~하고 싶다'는 말을 늘려 나가는 것이 그 시작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못 당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의무감과 책임감만으로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당신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인생은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당신이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고, 당신이 스스로를 실패자로 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갈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시각 말고, 당신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그것부터 결정하세요."
"어쩌면 세상에서 진실로 두려운 것은 눈이 있어도 아름다운 것을 볼 줄 모르고, 귀가 있어도 음악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참된 것을 이해하고 감동하지 못하며 가슴의 열정을 불사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 구로야나기 테츠코, <창가의 토토>
숙제하듯 헉헉 대며 살아온 날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 따라 숨가쁘게 달려온 날들, 그 세월 속에서 내가 놓쳐 버린 것들이 아쉬움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그저 눈을 뜨고 바라봐야만 한다. 아, 인생의 덧없음이여!
무언가를 더 원하고, 그것을 손에 넣는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 순간 바로 우리는 더 큰 것을 원하게 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데 그에 비해 내가 가진 것이 늘 부족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행복은 오히려 덜어냄으로써 찾아온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욕심을 덜어 내는 것, 나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를 포기하는 것, 세상은 이래야 하고 나는 이래야 된다는 규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나와 세상을 똑바로 보고,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지나친 이상화에서 벗어나야 나와 타인에 대해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그래야 서로 감싸 주며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어쩌면 이 너그러움을 배우는 과정이 바로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과정이며,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삶을 깊게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누군가에게 충고를 하고 싶다면 그를 내 생각대로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 어차피 그는 당신의 충고를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난 후 조심스레 당신의 의견을 말해 주어라. 그리고 결정은 그에게 맡겨라. 그가 설령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나중에 후회할지언정 그것은 그의 몫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 나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주면 내가 중요한 사람이며 이런 일을 겪는 내가 결코 이상한 사람이 아님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 주지 못하더라도 그저 관심을 가지고 들어 주면 내 이야기를 쭉 풀어놓으면서 스스로 문제를 정리하고 해법을 찾아간다. 비록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더라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만큼 보여 준다. 그러니까 재미있게 살고자 마음먹은 사람에게 이 세상은 재미투성이다. 우리가 재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감탄하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세상엔 즐거운 일투성이며 인생은 더욱 신나고 재미있어진다.
나이 든다는 것은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했던 것들, 내 곁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떠나보낼 때가 되었음을 알아 가는 과정이다.
몸도 뇌도 때론 쉬어야 한다. 쉬지 않으면 시야가 좁아져 평소에 할 수 있는 적절히 확장된 수준의 사고를 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잠시 멈추어 선 시간에 우리는 그동안 경험한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더 자신 있게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힘차게 나갈 수 있다. 그러니 몸은 피곤한데도 계속 쉬지 못하고 있다면 의도적으로 '잠시 멈춤'을 스스로에게 허락해 보라. 잠시 멈추는 시간을 가지면 가질수록 불안함은 줄어들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거리를 두는 것은 아예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닫아 버리고 그가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는 것이 아니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슬프지만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가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고치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즉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지 않고 그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베이징 사범대학 교수 위단이 쓴 <논어심득>에는 이런 말이 있다. "꽃은 활짝 피고 나면 시들 일만 남게 되고, 달은 꽉 차게 되면 기울 일밖에 남지 않는다. 활짝 피기 전이나 꽉 차기 전에는 그래도 마음속에 기대와 동경이 있는 법이다. 친구나 가족의 관계도 모두 이와 같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만 확 트인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두 사람이 친밀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대가 나와 다른 사람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자신을 열고 상대를 이해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친밀함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관계를 만들어 갈 때는 먼저 나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마음이 상하더라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감정적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파악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한계선을 기준으로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내 삶까지 망가질 것 같을 때는 '미안하지만 더는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자신보다 남을 더 신경 쓰느라 정작 자기 마음이 곪아 터진 것을 보지 못하고, 좋은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솔직한 감정을 억누르며 혼자 상처받아 온 사람일수록 한계 설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끝까지 사람을 믿고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 해야 할 최소한의 장치가 바로 한계 설정인 것이다.
어찌 보면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양한 경험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철학자 파스칼의 잠언대로 우리가 인생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삶을 우리가 우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라고 가정하고, 그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길을 걸을 때 매일 똑같은 길로만 걷지 말고, 한 번쯤은 새로운 길로 가 보길 권한다. 음식을 먹을 때도 한 번쯤은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 보라. 친구를 만날 때도 늘 가던 장소가 아닌 아주 낯선 곳에서 만나 보라. 그리고 뭐든 재미있어 보이는 게 있으면 결과와 상관없이 한번 시도해 보라. 그렇게 새로운 경험을 수없이 해 본 사람과 매일 똑같은 행동만 반복하는 사람의 내일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며 살고 싶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더 많은 도전을 하고 웬만한 일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쌓인 경험들이 얼마나 값진지를 알기 때문이다.
유머는 위기 상황을 웃음으로 넘기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공격성을 완화해 주며, 일상을 부드럽고 편안하게 해준다. 또한 우리 인생에는 우스꽝스럽거나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데 유머는 인생의 그런 요소들을 이해하고 웃음을 통해 부드럽게 껴안아 주도록 만든다. 다시 말하면 유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합리한 부분들을 이해하는 태도다. 그렇기 때문에 유머는 우리가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견뎌 낼 수 있는 힘을 준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 유머러스한 태도를 가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심리적인 안정과 유연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또한 좌절과 모순, 상실을 견딜 수 있는 힘도 필요하다. 니체는 말했다. 환하게 웃는 자만이 현실을 가볍게 넘어 설 수 있다고, 그러니 맞서 이기는 게 아니라 유머러스하게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상처를 입고 그것이 회복되어 흉터로 남고, 다시 상처를 입고 그것이 아물어 또 다른 흉터가 되는 동안 나는 더욱 성장하면서 인생을 배웠다. 결핍과 상실로 인해 상처를 입고 때론 그것들을 메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때론 견디는 법을 배우며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러면서 더욱 풍요로워지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 인간이지 싶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른 말로 '회복탄력성'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힘든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 스트레스를 이겨 낼 수 있도록 돕는 힘을 말한다. 상처가 난 자리에 새 살이 돋듯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회복탄력성, 그 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도 살아남아 다시 삶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회복탄력성 덕분이었다. 회복탄력성이 뛰어나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회복탄력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스트레스에 압도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누구나 살다 보면 고난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역경을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인다. 또 다른 사람들을 탓하기보다 오히려 그들에게 힘들다고 말하고 위안을 얻으며 고통을 이겨 내는 법을 배우려 노력한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삶이라는 긴 여행의 끝이며, 그동안 누려 온 모든 기쁨과 행복의 끝임과 동시에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모든 고통과 슬픔의 끝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에게 상처 준 사람들 그리고 나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들과도 이별이다. 그래서 죽음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잠시 지녔던 모든 것들-나의 육신과, 내가 집착했던 명성과 성공, 집과 물건들 그리고 나에게 잠시 허락되었던 시간조차도-을 다시 이 세상에 돌려주고 떠남을 의미한다. 죽음은 두려움이다. 내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혼자서 고통과 외로움을 견뎌 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죽음은 눈을 감은 후 나를 기다리고 있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은 가르침이다. 그것은 남은 시간도 별로 없는데 비로소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잔인한 스승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하나하나를 그리고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향유할 수 있도록 우리의 감각을 일깨워 주는 스승이다.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데 나에게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뒤늦게 가르쳐 주는 무심한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바라보게 하고, 자연의 일부로서의 나의 삶을 완성시켜 주는 자비로운 스승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용서 못할 것이 없고, 해결 못할 것이 없음을 보여 주며,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죽음은 이어짐이다. 그것은 내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 줌으로써 세상이란 이 공간을 영속시키는 자연의 확고한 의지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나의 시간을 끝냄으로써 세상의 시간이 계속 흐르게 만드는 대자연의 손길이다. 나의 시간이 다음 세대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주는 관대한 손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에 대해 멋진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거 아나? 영혼이 하늘에 가면 말이야. 신이 두 가지 질문을 했다네. 대답에 따라서 천국에 갈지 말지가 정해졌다고 하지. 인생의 기쁨을 찾았는가, 자네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했는가. 대답해 보게." - 영화, <버킷리스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