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연결과 단절의 연속이다.

생명은 남자와 여자의 연결에서 시작되어 부모와 아이의 연결로 탄생하고
가족을 벗어난 타인, 사회와의 연결이 경험과 사회적 생활의 범위를 넒힌다.

연결의 시작은 호기심과 설레임, 수많은 감정을 일으키지만
감정의 양과 종류가 줄고 더 이상의 감정이 생기지 않으면 단절에 이른다.


인간의 뇌는 수많은 뉴런의 연결을 통해
기억과 생각을 하고
무언가를 모방하거나 창조하며
감각과 감정 그리고 신경을 통제하여 몸을 움직인다.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사람과 사회, 가상공간과의 연결을 유지하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잠시라도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참지 못한다.
사람사이 관계, 사회적 연결의 고립은 삶을 피폐하게 한다.


연결은 삶의 시작이고 단절의 종착지는 죽음이지만,
관계의 기억, 책과 SNS, 인터넷에 노출된 게시물 등을 통해 연결의 흔적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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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의 원을 이루며 시공간의 차원을 아우르는 '영원', 그 가운데 한 '부분'으로 직선적 시간과 3차원의 인식 공간의 만남을 우리는 '순간'이라 부른다.


[본문발췌]

솔로몬은 "땅 위에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플라톤이 상상했던 것처럼 "모든 지식은 단지 회상에 불과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솔로몬은 "모든 새로운 것은 망각일 뿐이다."라는 금언을 남긴다. - 프랜시스 베이컨 <에세이> 58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 수레바퀴에서 각각의 삶은 전생의 결과이고 내생을 야기하지만, 그 어떤 하나의 삶도 전체를 결정짓지 못한다.


끝이 가까워지면 기억의 모습들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단어만 남는다. 시간이 한때 나를 묘사했던 말과 오랜 세월 동안 나와 함께했던 운명의 상징인 단어들이 혼동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나는 호메로스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율리시스처럼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고, 나는 죽을 것이다.


연관성은 너무 방대하고 비밀스러워서 현재를 무효화하지 않고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단 하나의 머나먼 사건조차 폐기할 수 없다. 과거를 변경한다는 것은 단 하나의 사건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 결과들을 무효로 만드는 것인데, 그 결과들은 무한하게 확장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다면 앞으로 몇 시간 내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알기 위해 거울속에서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내 육체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만일 시의 목적이 놀라움을 주는 것이라면, 시의 시간은 백 년이라는 단위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날과 시간, 그리고 아마도 초로 측정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명한 시인은 발명가라기보다는 발견자라는 것입니다.


자히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히르는 20센타보짜리의 평범한 동전이다.
'눈에 보이는' 혹은 '분명한'이라는 뜻을 지닌 아랍어. 이것은 <코란> 57장 3절에 언급된 알라신의 속성 중의 하나이다. "그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시며, 눈에 보이시며(zahir), 숨겨진(batem) 분이시다."

돈은 추상적이다. 돈은 미래의 시간이다.


언젠가 테니슨(Alfred Tennyson)은 만일 우리가 한 송이의 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누구이고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는 아무리 하찮은 사실이라도 우주의 역사와 무한한 인과론적 연결 관계와 연관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또한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의지가 각각의 개인에게 고스란히 표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세계는 각각의 모습 속에 고스란히 보일 수 있다고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카발라주의자들은 인간이 소우주, 즉 우주의 상징적 거울이라고 이해했다. 만일 테니슨에 의하면, 모든 것이 그렇게 될 것이다. 모두, 심지어 참을 수 없는 자히르까지도 그렇게 될 것이다.


던레번은 그것이 원형이지만 너무나 커서 곡선으로 느낄 수 없다고 말했다. 언윈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를 떠올렸다. 그는 모든 직선이란 어느 무한한 원주의 일부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이란 '현재 시간'이 그대로 있는 것, 즉 여러 스콜라 철학자들이 부르는 것처럼 Nunc-stans(지금 있는 것)이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한한 장소의 위대함을 Hic-stans(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들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다. - <리바이던> 4권 46장


'알레프'를 보았지.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곳이야. 만일 '알레프' 속에 지구상의 모든 장소들이 들어 있다면, 거기에는 모든 별들과 모든 등불들, 모든 빛의 원천들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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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사로잡힌 삶,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행복한 인생의 장애물이 되기도 하지만 경제적 판단과 결과물을 만드는데 있어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 미래에 닥칠 시나리오 검토는 중요하다.



[본문발췌]


그 어떤 정부, 경제 체제, 통화, 제국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들이 무너질 때 경악하면서 같이 무너진다.


사람들이 인생에 찾아온 중요한 기회를 놓치는 이유는 아주 작은 조각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다 더 큰 구도에서 패턴과 사이클, 기회를 만들어내는 상호 연결된 요소들, 사이클 내 현재 우리의 위치, 향후 발생할 사건 등은 보지 못하고 개미처럼 짧은 인생에서 눈앞의 빵 부스러기를 옮기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다.


인공지능은 과거의 패턴을 연구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상식은 거의 없고 관계 뒤에 숨겨진 로직 같은 것은 이해하지 못하며 어떠한 감정도 없다. 그들은 똑똑하면서도 바보 같고, 도움을 주면서도 동시에 위험한 존재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지만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며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 된다.


지식의 습득과 생산성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화하기 때문에 부와 권력의 지형에 갑작스러운 변화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큰 변화는 오히려 사이클에 의해 움직이는 경기 호황과 불황, 혁명, 전쟁 등에서 발생하고 이 사이클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인과 관계에 의해 움직인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 생산성 증가, 기업가의 혁신, 자본주의 같은 요인들로 인해 빈부 격차는 커지고 과다한 부채가 발생하여 20세기 전반의 불황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반자본주의운동과 공산주의가 생겨났으며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내전 및 국가 간의 전쟁이 발생했다. 즉 빅 사이클 중심으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성공의 공식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사업을 영위하다가 어느 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라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서 생산 도구를 구입한 후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생산 제품을 만들어내면서 이익을 창출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자본주의는 부와 기회의 격차와 부채 과잉을 초래했고, 이는 불황, 혁명, 전쟁을 일으켜 국내 질서와 세계 질서의 변화를 초래한다.


"역사는 운율을 밟는다History rhymes"라는 격언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주요한 사건들이 반복되는 것을 운율을 밟는다고 표현했다. 사건이 발생한 인과 관계는 시간을 거스르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세상의 모든 사물은 진화하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때문에 시간과 장소가 다르지만 유사한 많은 사건을 연구하면 숨겨진 인과 관계가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계속 진화하는 역사상의 사건들은 영구 기관처럼 작동하며, 오랜 기관 동안 진화하고 반복되는 인과 관계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정의하는 체제 또는 질서가 있었다. 나는 한 국가 내의 체제는 '국내 질서'라고 부르고, 국가 간의 질서는 '국제 질서'라고 하며, 전 세계에 적용되는 질서는 '세계 질서'라고 이름 붙였다. 이들 질서는 서로 영향을 미치며 항상 변화한다. 질서는 누가 권력을 갖는지를 결정하고 부와 정치적 통제권의 분배, 의사결정 방법을 결정한다. 인간의 본성, 인류의 문화, 그리고 지구 환경에는 질서의 성격을 규정하고 운영하는 기능이 있다.


전 세계를 향한 개방성: 이것은 국력을 나타내는 효과적인 지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단절된 국가는 전 세계의 모범 사례를 배울 수 없고 따라서 경쟁에서 뒤쳐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계 최고 수준을 보고 배운 국가는 최고가 될 수 있다.


계급 투쟁: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모든 사회는 지배 계급 또는 엘리트 계급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인원이 거의 모든 부와 권력을 통제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부를 가진 사람들은 부를 생산하는 수단을 가진다. 부자들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규칙을 정하고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결탁한다.
물려받은 특권이 아닌 능력을 기준으로 다양한 계층의 인재를 뽑아 중책을 맡기는 사회가 가장 오랫동안 성공을 유지할 수 있다. 이는 1) 이런 체제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를 뽑을 수 있고, 2) 다양한 시각을 가진 인재를 영입할 수 있고, 3) 가장 공정해서 사회의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좌/우 성향: 모든 사회는 부와 권력이 어떻게 분배되느냐에 따라 정치적으로 좌우가 갈라진다. 정치 성향의 변화는 때로는 평화롭게, 때로는 폭력을 동반하여 발생하지만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대개는 자본시장, 부, 가치관, 계급 구분의 사이클에 변화가 생기면 정치적 성향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자본시장과 경제가 활성화되면 대개 빈부 격차가 더 커진다. 어떤 사회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건전하면서도 꾸준한 균형 상태를 잘 유지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양쪽을 왔다 갔다 한다.

우파인 자본주의자는 전형적으로 독립심, 근면 성실, 높은 생산성 추구, 정부 간섭 최소화, 사유재산 제도를 옹호하며 각 개인의 선택이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또한 민간 부문이 공공 부문보다 더 효율적이며, 자본주의가 가장 우수한 체제이고, 자수성가한 부자들이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돈을 번다는 것은 이익을 내서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들의 공평한 기회나 번영에는 큰 관심이 없다. 대중의 이익이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예를 들어 높은 수준의 공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생산을 늘려 부를 창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에 전통적인 좌파 사회주의자는 상호의존, 정부의 지원, 부와 기회의 분배가 도덕적으로 옳으며 사회에도 유익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민간 부문을 운영하는 탐욕스런 자본가들보다는 교사, 소방관, 육체 노동자 같은 일반 근로자들이 사회에 더 큰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파이를 공평하게 나누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파이를 키우는 데는 별 소질이 없다. 돈을 벌기 위해 근로자들을 착취하는 자본가보다는 공무원들이 더 공정하다고 생각해서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어 저축하고 이를 자본시장에 투입하는 것(즉 자본주의)이야말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동기이며, 자원을 배분하는 수단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불공정한 빈부의 격차와 기회의 박탈을 유발하여 여러 가지 역효과를 낳고, 불경기와 호경기가 반복되어 안정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오늘날 각국의 정책입안자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평등과 안정을 해치지 않고 자본주의에 기반한 경제 체제를 구현해서 생산성과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과 신용은 부와 관련이 있지만 부와는 다르다. 돈과 신용으로 부(즉 재화와 서비스)를 살 수 있기 때문에 보유한 돈과 신용의 양이 부의 양과 같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지 돈과 신용을 더 많이 창출한다고 해서 더 많은 부를 쌓는 것은 아니다. 보다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생산성이 높아야 한다. 돈과 신용의 창출과 부의 창출간의 관계가 혼동될 때가 있지만 이는 경제의 사이클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많은 사람이 화폐는 영원하며 '현금'은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고 믿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모든 화폐는 가치가 하락하다 결국 소멸한다.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현금과 채권(나중에 현금을 받는다는 약속 증서)은 가치가 하락하고 결국 시장에서 사라진다. 많은 돈을 찍어내 부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부채로 인한 부담을 줄이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상환 부채가 별로 없는 장기 부채 사이클 초기에는 수익을 창출하는 채권자산을 보유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미상환 부채가 많아지고 통화 가치가 하락하는 사이클의 후반부에는 수익률이 높다고 해도 채권자산을 보유하는 것이 위험하다.


진실이 사라진 언론. 사람들이 점점 양극화되고 감정적으로 되면서 언론의 왜곡과 선전 선동이 점점 증가한다. 5단계가 되면 목적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감정을 조작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어 상대방을 없애기 위해 종종 언론계 종사자와 협력한다. 즉 좌파적 경향의 언론인은 좌파의 활동가들과 힘을 합치고, 우파적 경향의 언론인은 우파의 활동가들과 같이 행동한다. 전통적인 언론 매체나 소셜미디어를 막론하고 언론에 대한 신뢰는 우리 세대에서 가장 낮다. 심지어 매우 유능하고 막강한 사람들조차 중요한 문제에 대해 언론에서 대놓고 목소리를 높이기를 두려워하고 공직선거에 나서기를 꺼린다.
뉴스 언론 매체는 그 권한에 대한 품질 관리 내지 견제가 없는 유일한 권력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언론을 통제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동시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내려져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우리는 언론의 정확성과 정직함이 사라지고 언론계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최우선 목적이 선정주의와 상업주의 그리고 정치적인 목적의 여론 조작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는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암과 같은 존재라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모든 시장은 기본적으로 4개의 결정 요인에 의해 작동한다. 즉 성장률, 물가 상승률, 리스크 프리미엄, 그리고 할인율이다. 투자란 미래에 돌려받을 돈을 기대하고 현재에 지불하는 행위다. 미래에 받을 금액은 성장률과 물가 상승률에 의해 결정되며, 투자자가 현금을 보유하지 않고 투자함으로써 감수하는 위험은 리스크 프리미엄이다. 그리고 미래에 받을 돈의 '현재 가치'는 할인율에 의해 결정된다.


투자자들은 공포에 질려 대체로 상황이 안 좋아 주가가 바닥일 때 주식을 팔고, 주가가 고점일 때 자금이 넘쳐 기대감에 가득 차 주식을 산다. 이는 투자자들의 실질 수익률이 시장의 수익률에 못 미친다는 의미다.


투자자들이 스스로 자주 점검해야 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자 지급액이 평가절하 리스크를 상쇄하느냐이다. 물가 상승률보다 적은 이자를 받느니 차라리 아무것이라도 사서 인플레이션에 대비하는 것이 어떨까?


나는 자산 가치가 통화와 신용 가치의 역수이고(즉 통화와 신용이 저렴할수록 자산 가격은 더 비싸진다), 통화 가치는 기존 통화량의 역수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중앙은행이 통화와 신용을 많이 창출하고 통화를 더 저렴하게 만들 땐 더 공격적으로 자산을 소유하는 것이 현명한 대처 방법이다.


상황이 잘 돌아가면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쉽다. 그러나 험난한 싸움을 하게 되면 이전에 부도덕하다고 여겼던 일을 쉽게 정당화하기 시작한다(이제 비도덕적인 일을 도덕적인 일이라고 일컫는다)


미래에 대처하려면 1) 현재 일어나는 일을 예상할 수 없을지라도 제대로 인식하고 적응하며, 2)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확률에 따라 제시하고, 3) 그것을 완벽히 알진 못하더라도 용납할 수 없는 사태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를 넓힐 필요가 있다.


시장과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a)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 진화가 빚어내는 상승세에 배팅하되, b) 그 과정에서 맞닥뜨릴 사이클과 충돌에 무너질 정도로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배팅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장기적으로 가장 큰 위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돈의 통화 가치' 위험이다.


나는 온갖 분석 작업을 수행하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사는 꽤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지만, 미래는 정반대다. 내가 알기로는 미래에 대해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예언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투자자가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해서 미래를 좀 더 정확하게 맞출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투자가 아닌 인생을 건 결정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요점은 이렇다. 많이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가정에 근거해서 배팅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 집중해보자.


나는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미래에 배팅하는 것은 확률에 배팅하는 것이며, 확률을 포함해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바로 대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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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가능성을 파악하고,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해 생각한 다음 극복할 수 없는 시나리오를 제거할 방법을 찾아라. 극복할 수 없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식별하고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다. 인생에서나 시장에서나 게임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게임에서 참패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안전과 자유를 누리는 동시에 좋은 결과를 내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
  • 분산하라. 교토삼굴, '영리한 토끼는 굴 세 개를 파놓는다', 굴 세 개 중 하나가 위험해지면 다른 굴로 도망가야 한다.
  • 당장 눈앞의 만족보다 지연된 만족을 우선시하여 미래에 더 나은 상황을 마주하라.
  • 가능한 한 가장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사안을 다각도로 분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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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북미 선진국들의 번영과 깨끗하고 정돈된 환경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태평양 섬들의 정복과 수탈, 희생의 결과물!


[본문발췌]

인간 집단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닮지 않은 자는 늘 증오의 대상이 되는 법.


조개를 줍고 있던 방드르디가 맑고 깨끗한 모래밭에서 하얗고 둥근 얼룩 모양의 조그마한 자갈을 주워 로빈슨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더니 손으로 달을 가리키며 로빈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말 좀 들어봐. 달이 하늘의 조약돌이야? 아니면 이 작은 조약돌이 모래의 달이야?"
그러고는 로빈슨이 이 별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갑자기 방드르디가 뛰쳐나가더니 쏟아지는 비에 몸을 맡겼다. 그는 얼굴을 뒤로 젖히고 빗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로빈슨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 보라고. 모든 사물이 슬퍼서 울고 있어. 나무도 울고 바위도 울고 구름도 울고 있다고. 나도 그들과 함께 우는 거야. 우, 우, 우! 비는 섬과 세상의 모든 슬픔을 나타내지."
로빈슨도 방드르디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달과 조약돌, 눈물과 비처럼 별로 상관이 없는 사물들이 서로 헷갈릴만큼 닮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모호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 사물에서 저 사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디망슈'란다. 축제와 웃음과 놀이의 날이지. 그리고 나에게 너는 언제나 일요일의 아이일 거다."


이제 동굴이 폭발하고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완전한 원시 자연 속에 놓이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로빈슨은 방드르디보다 더 이상 우월하지 않다. 로빈슨이 섬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문명 세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으로 돌아갔으며, 계획된 노동과 일은 놀이와 유희로 바뀌었다. 일에는 의무가 뒤따르고 놀이를 하는 데는 자발성만 있으면 된다. 로빈슨은 방드르디가 더 이상 지배와 복종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로빈슨은 방드르디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사실은 그것이 불가능하고 자신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관계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동등한 관계일 때 진정한 소통과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로빈슨의 후손들이 오늘날의 유럽인들이라면, 그들은 산업혁명과 전쟁, 과학기술의 발전 등이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깨닫고 자연에 동화되어 사는 삶, 친환경적인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려 한다. 반면 방드르디의 후손들일 수 도 있는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 국가의 주민들은 과거에는 자연과 동화되어 사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과 환경 파괴에 내몰리고 있다.


태평양의 외딴섬에 표류한 문명인 로빈슨 크루소와 자연과 동화되어 사는 자유분방한 야만인 방드르디.
대니얼 디포 이후의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들 가운데 주제 면에서 가장 큰 혁신과 변화를 만들어낸 작품은 단연코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야생의 삶>이다. 그는 이 책에서 야만인 방드르디를 더 이상 노예가 아닌, 로빈슨과 평등한 관계로 끌어올리며 문명과 야만, 질서와 혼란, 이성과 본능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뒤흔드는 새로운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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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된 인간으로 삶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인생을 욕하지 않으려면, 자기 삶을 살아라.


[본문발췌]

우리 인생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어처구니없는 조건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실로 악랄한 것이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행위에는 반드시 본능적인 기쁨이 따른다. 그런데 아쉽게도 문명의 발달이 일의 가치를 심하게 변질시키고 말았다. 삶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고통을 강요하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과거 인간은 다른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비록 수명은 짧고 위험이 가득한 환경에 살았지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감을 얻을 수 있는 행복한 존재였다.
그런데 문명의 발달이 가져다준 편리함과 복잡함이 일의 대부분을 불쾌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변질시켰고, 이는 비관적인 인생관과 불행의 원천이 되었다. 인류의 모든 고뇌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원래 산다는 것은 훨씬 즐겁고 사는 의미를 굳이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즉 철학 따위가 생겨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만한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오늘날을 사는 인간은 좋고 말고 없이, 이 참을 수 없는 세상을 끝까지 살아가야만 한다. 사회적으로 의의가 있을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아무 재미없는 일에 구속되어 잿빛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좋은 위치, 즉 높은 연봉에 안정적이고 남에게도 좋아 보이는 직업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 배운 것에 불과하니, 충분히 학문을 익히지 않았다 한들 큰 문제는 없다. 고용주가, 단순히 사회적인 값어치를 매기는 데 목적이 있는 학력을 그렇게나 중시하는 까닭은 오로지 순종할 인물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세상의 가치관에 어디까지 순종적일 수 있는지, 그 어처구니없는 입시 전쟁에 얼마나 투신한 인간인지를 판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남에게 고용되는 처지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 9할을 스스로 방기하는 일이다. 인생 전부를 남의 손에 빼앗기는 것이다. 쥐꼬리만 한 월급과 상여금과 퇴직금을 빌미로 지시에 따르기만 해야 하는 인형 취급을 당하고, 퇴직 후 제2의 인생이라는 거짓으로 점처된 무지갯빛 꿈을 꾸는 동안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직장을 떠날 때에는 이미 기력도 체력도 다 바닥나 좌절감과 소외감에 시달리는 노년이라는 함정에 내던져진다.


불합리에 대한 분노를 포기한 인간은, 저항의 정신을 내던진 인간은, 인간임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삶 자체도 스스로 포기한 어리석고 우매한 자에 불과하다.
이치가 그러한데, 아직 청춘의 한창 때를 보내고 있으면서도 이미 죽어 있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가.
허황된 이미지나 좇게 하는 인터넷 세계를 전부라 여기고, 아주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으로 뻥 뚫인 마음을 메우려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의 허망하고 기이한 나날들.


이성이야말로 자아의 원천이다.
나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에는 갖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지만, 본능이나 감정이 자신의 핵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의지를 조절하는 사고력을 우선하는 삶, 즉 이성에 따른 선택에 그 대답이 존재한다.
이성의 길을 걷는 순간 인생은 빛나기 시작한다. 자립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더불어 인간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다.
이성을 꺼리고 감정을 우선시하며 본능에 따르는 삶이 편할지도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느 옛말이 있듯이, 인간관계가 어긋나 남들이 멀리하는 탓에 점점 더 고립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로만 개성과 자립과 정체성을 부르짖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것을 추구하고 분명하게 확립해서 새로운 삶을 열어가려 한다면, 진정한 자아를 증명해 주는 이성과 함께 독립의 길을 걸어야 마땅하다.


이 넓은 세상에 다양한 직종이 있는데, 월급 받고 일하는 직장인이라는 위치를 왜 그렇게 간단히 손쉽게 선택하는 것인가.
그 주된 이유가 일이 편하고 수입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라면,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그럴 수 있지만, 경제성장이 한계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침체기에서 후퇴기로 뒷걸음질하고 있는 지금, 그것은 오래전에 신화가 된 이미 통용되지 않는 낙관이다.
어쩌다 그런 직장이 몇 군데 남아 있다고 해도, 정년퇴직을 하는 날까지 어떤 나날을 보낼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인생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가. 비록 캄캄하지만 미래는 온갖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인생을 헤쳐 나가는, 설레고 두근거리는 참맛도 숨기고 있다. 이런 미래를 안정이라는 따분한 이름에 매달려 허비하려는가.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조금도 개척하지 않고 끝내는 생애에 어떤 의의가 있다는 말인가.


원하는 일은 아니지만 돈은 그 일로 벌고, 취미에 몰두하는 삶을 선택하는 자도 많다. 하지만 취미는 어디까지나 취미일 뿐이다.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덜고 기분 전환을 위한 것,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런 중용적인 선택은 본인이 생각하는 만큼 현명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남의 밑에서 일한다는 점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손에 급소를 내준 인생은 인생이라 할 수 없다.
애당초 일이냐 취미냐 하는 양자택일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생활의 기반인 일 자체가 재미있고 거기에서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지, 안 그러면 살고 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타인이 주는 월급을 대신해 하는 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 거기에는 자신의 의지라는 것이 전혀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용주의 목적은 고용인을 만족시키는 것에 있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충족에 있다. 공무원의 세계에서도 그 점은 다르지 않다. 상사는 부하를 출세의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직장이란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얘기다.
수입이야 많든 적든, 소박하나마 성취감을 얻을 수 있고 평생을 매진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면 자영업밖에 없다. 요컨대 이 세상에 직장이이라는 직업은 없다 치고 일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직장은 사육장이다.
하루 8시간 노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직장에 구속되어 있는 시간이 고작 하루의 삼분의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 8시간을 위해 8시간의 수면이 필요하고 나머지 8시간에 출퇴근과 야근, 접대, 사교 등의 시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거이 없는 셈이다. 식사와 목욕, 때로는 독서까지도 직장을 위한 시간이 되고 만다. 쉬는 날 역시 육체와 정신의 피로를 푸는 데 다 쓰는 꼴이다 보니 이 또한 직장을 위한 시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퇴직하는 날까지 몇십 년을 고스란히 직장에 빼앗기는 것이다. 그래서야 타인을 위한 인생이지, 아무리 열심히 해 봐야 본인을 위한 인생이랄 수 없다.


설사 안정된 생활이 실제로 존재한다 쳐도, 그런 생활이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인생, 내일 또는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두근거림과 설렘의 연속 속에서 진정한 충만감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 아닌가. 그런데 출발선에 선 시점에 그 중요한 조건을 팽개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선명하게 비치는 것은, 젊음이라고는 한 톨도 지니지 않은, 회의에 절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허탈감에 칭칭 휘감겨 있는, 온갖 결점을 드려낸 채 신빙성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노예의 처지에 깊이 길든 '가축 인간'이다.
노동자라는 호칭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 실질적인 처지는 바로 노예이다.
폭력으로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노예의 처지를 선택하다니,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인가.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업신여김을 당할 뿐인 비참함 신분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가.
그럼에도 일개 독립한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학생 시절에 넘쳐흘렀던 자부심과 자존심은 다 어떻게 한 것인가.
또는 처음부터 그런 것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인가.
타자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얼치기인가.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루 세 끼를 먹고, 그럭저럭 남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왠지 하루하루가 밋밋하고, 살아 있음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일도 없고, 새 아침을 맞아 본들 마음에서 우울함이 떠나지 않는 원인을 찾아본 일이 있는가.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인생이란 그저 그런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가.
동물원의 동물이나 애완동물이 아닌, 즉 야생에 사는 동물들이 그렇게 가혹하고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생기 발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수많은 위험과 정면으로 맞서는 데서 오는 충만감으로 삶을 이어 간다. 긴장으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이 몸에 배어, 비록 수명은 인간보다 훨씬 짧아도 삶의 충만감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충만감이야말로 이 세상을 사는 자로서 누려야 마땅한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온몸과 오감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 안에서만 빛나도록 생겨 먹었다는 철칙을, 그 우선권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살든 본인 멋대로라는, 자유와 함께하는 삶만이 존재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도 동물의 한 족속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같은 유의 자유 속에서 충만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그것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자유를 거머쥔 인간은 놀라우리만큼 적다. 많은 사람이 그 보물을 상실했으면서도 보통 다들 그렇다고 여기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복잡한 탓에 거짓이 많은 사회라는 조직, 거기서 생겨난 문명과 지위와 재산의 격차로 인해 생물로서 누려야 마땅한 '멋대로사는' 지상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끝내는 편하게 사는 것이 최대의 꿈이 되었고, 그 꿈이야말로 혼을 치유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 허황된 희망조차 실현되지 않고, 실제로는 조촐한 휴식의 장을 확보하는 것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살수록 인생이란 재미없고,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고 실망하면서 행복이 멀어짐을 절감한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강한 자를 우러르며 우습기 짝이 없는 영웅을 은근히 기다리면서 출퇴근 전철 안에서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인생의 절정기는 학교 축제 때뿐이었음을 절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자유를 스스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예정하고 계획한 대로 인생을 순조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밝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직장인이라는 노예의 처지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목을 조여 온다. 마음을 갉아먹고, 정신을 썩게 하고, 생기를 빼앗아간다. 그러다 끝내는 혼에도 녹이 슬어 비인간적인 존재로, 자신에게도 반발하지 못하는 로봇 같은 무기물로 기울어 간다.
그러다 자신이 과연 어떤 인간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 시점에 정년의 날을 맞는다. 송별회의 애처로운 여운과 여생을 헤쳐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퇴직금과 허접한 꽃다발을 안고 직장 밖으로 쫓겨났을 때, 내일부터 할 일이 없는 공허함을 자유로 착각하고, 책임의 중압감에서 벗어난 편안함을 자유로 잘 못 알고,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어떤 감정이야말로 오랜 세월 바라 왔던 심경이 틀림없다고 믿고,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을 자축하며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다.
그러나 그 기쁨은 기껏해야 반 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이것저것 취미 생활을 해 보지만 어느 것이나 허망하고, 하는 일이 없다는 처지가 몹시 비참하게 느껴지고, 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라 낙인찍힌 듯한 소외감에 시달린다. 그렇게 반가웠던 자유가 오히려 한없는 고독감을 불러오고, 현역 시절의 무용담에 귀 기울여 주는 이도 없어지니 술에 절어 지내게 된다. 날로 깊어지는 주름과 노인병과 죽음의 예감에 떨며 비관론에 짓눌려, 좀 더 달랐을 수도 있는 생애를 속수무책으로 끝낸다.
이들은, 대체로 이런 것이 직장인의 평균적인 삶이라 수긍하고는, 똑같은 길을 걸으려 하는 아들을 한순 섞인 눈길로 바라본다. 그 긴 한숨이 끝났을 때, 직장인의 가면을 여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자신을 깨닫고는 자기도 모르게 모기 우는 소리처럼 자그많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처음부터 완벽한 인간을 만들었으면 고생을 덜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일부러 완성도가 떨어지는 생물을 만들어 죄 많은 존재라 일방적으로 단죄하고 자기 책임을 전가하고는, 몸부림치는 그 가엾은 모습을 바라보며 즐기는 극단적인 사디스트라는 말인가.
아니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나설 기회를 늘려 자신에게 의지하고 매달리게 하려는 냉혹한 나르시시트인가.
그렇게 천박한 존재가 신일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은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잘 모른다. 만약 알고 있다면, 지구는 행성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그 간단한 사실 정도는 경전이나 성서에 기록되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또 이 하잘것없는 별 하나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교가 있는 것만 봐도, 그것이 사기극이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인가. 요컨대 신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자기 신뢰의 습관을 터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은 전 생애에 걸친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흔들림 없는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립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살아가는 자기만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갖고 있고, 그 목적을 향해 하루하루 매진하면서 충만감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독립한 인간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사람은 돈과 명예에 약하다. 너무 약하다.
그리고 불안과 공갈에도 약하다. 너무 약하다.


알아서 기니 그 따위로 살다 죽는 것이다.
사대주의는 자기가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는 자기를 갖지 않으려 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야 편히 살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추종의 길을 택한 자는 인간이기보다 곤충에 가깝다. 설령 국가 체제를 바꿔 본들, 불특정 다수의 인식과 의식이 근본부터 바뀌지 않는 한 유사한 비극이 끝없이 반복될 뿐이다.


사회주의 국가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념 때문에 붕괴했다.
자본주의 국가는 현실에 너무 맞추다 보니, 즉 욕망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붕괴하고 있다.


국가를 필요 이상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국가를 안일하게 믿어서도 안 된다.
국가를 손아귀에 쥐고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주 평범하지만 욕망으로 가득한 그냥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내미는 당근을 거부하고 그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굴하지 않는 한, 그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근을 원하고 채찍 소리에 몸을 움츠리는 인간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현실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요컨대 국민 대부분은 상대가 강자이면 그게 누가 되었든 추종하는 지조 없는 인종이며, 그 때문에 언제나 동료를 배반하고 태도를 뒤집는다는 것을 늘 가슴에 새기는 것이 좋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에 동조하여 같은 부류가 될 것 같다는 조짐이 올 때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그런 인생 따위는 엿이나 먹어라!"


생각하는 것을 꺼리고 싫어하는 것은 사람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고, 자기를 타자에게 맡기는 꼴이며, 인간으로 태어난 가치가 없다고 외치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단정하면 단정할수록 정답에서 멀어질 뿐, 무슨 일이든 직접 부딪쳐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다 도전해 보라고 젊음이 있는 것이다. 이제 싫고 좋음이나 자기류의 해석은 모두 무시하고, 온갖 일에 도전해 보면서 자기 안에 소리 없이 숨겨져 있는, 곤히 잠들어 있는 재능을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을 발견할 기회는 늘 변화하고 새로운 나날 속에, 온갖 곳에 무진장하게 널려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심히 안타깝게도 이 나라에는 삶의 공식이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할 시간도 거의 주지 않는다.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취직한다. 게다가 그 직장에 오래 헌신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그렇게 하는 것을 불변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 때문에 많은 젊은이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것에 강박관념 비슷한 불안을 느끼고, 무의식중에 안정을 최고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인생의 초기 단계에 이미 다른 길은 봉쇄되고 만 것이다.


국가는 골 빈 국민을 좋아한다. 다루기 쉽고 제어하기 쉬운 존재!


사람은 생각하기 위해 태어나고, 생각함으로써 생명을 불태우고, 생각하기에 존재 의의가 있다.


전심전력으로 노력할 가치가 있는 목적을 향해 길 아닌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온갖 장소는 보고일 수 있다.


삶의 노예가 되는 한이 있어도, 죽음을 좇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 이어 온 삶을 무시하고 찰나에 불과한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너무도 바보스러운 짓이다.
생명의 친구는 어디까지나 삶이지 결코 삶에 부수적인 죽음이 아니다.
그러니 삶을 통해 죽음을 응시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칠십 가까이 살면서 절체절명, 고립무원, 사면초가 등의 궁지에야말로 명실상부한 삶의 핵심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그안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과정에야말로 진정한 삶의 감동이 있다고 확신했다.
한 번 그 맛을 알고 나면 이성으로 자신을 계몽하면서 나아간다. 갖은 고난과 역경을 굳이 배척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상황에 단호하게 대항하는 것에 삶의 참된 가치가 있음을 깨닫고 '자기 의존'이야말로 궁극의 목적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마음의 나태를 가벼이 여기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을 열심히 쌓아 올리는 것은 지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맨 마지막에는 정신을 스스로 고취할 수 있는 인간으로 떠나야 비로소 고상한 인생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몸인데, 왜 그렇게까지 겁을 내고 위축되고 주저해야 하는가.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 누구를 거리낄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무기로, 애당초 도리에 맞지 않고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을 마음껏 사는 참맛을 충분히 만끽해라.
약동감이 넘치는 그 삶을 향해 저돌적으로 나아갈 대 드높이 외칠 말은, 바로 이것이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너를 키우는 자가 너를 파멸시키리니."


남의 손에 급소를 내준 인생들에게

  • 부모의 사랑에 거짓이 없다고 믿는 것은 부모 자신뿐이다.
  • 그 어떤 국가도, 국가란 이름이 붙어 있는 나라는 하나같이, 실은 국민의 것이 아니다.
  • 모든 종교는 선이라는 옷을 두른 악이며, 원래 자유로워야 할 개인을 속박하는 컬트이다.
  • 노동자라는 호칭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 실질적인 처지는 바로 노예이다.
  • 어떻게 살든 본인 멋대로라는, 자유와 함께하는 삶만이 존재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 삶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로 쟁취하는 것이고, 죽음은 가능한 한 물리치는 것이다.
  • 자신의 껍데기를 깨부술 힘은 자신에게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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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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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속도와 생각의 속도가 같아야 제대로 즐기고 감상할 수 있다.


[본문발췌]

살아가면서 어떤 속도로 이동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풍경이 달라진다.


"걸으면 자연스럽게 사고가 시작된다." - 안도 다다오 <걸으면서 생각한다>


"여행은 사고를 촉진한다. 이동 중인 비행기, 배, 기차는 우리 내면의 대화를 가장 잘 이끌어내는 수단이다." - 알랭 드 보통


어쩌면 우리의 여행도 더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동경일지 모른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곳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나에 대해 부단히 성찰하고 반성한다. 여행은 우리를 바꾸며, 우리를 만든다. 안도 다다오가 말했던 것처럼 "여행은 사람을 만든다."


사고, 생명, 관찰, 이동에서 출발하는 여행 개념
사고에서 출발하다 : 탐색의 여행, 사고의 여행, 창조의 여행, 문학의 여행
생명에서 출발하다 : 기억의 여행, 근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 성장의 여행, 선택의 여행, 인생 여행
관찰에서 출발하다 : 탐색의 여행, 건축의 여행
이동에서 출발하다 : 속도의 여행, 비행기여행, 기차여행, 도로여행, 항해여행, 미로여행


어릴 때 태엽이 달린 철제 장난감을 가지고 논 기억이 있다. 태엽을 당겼다가 풀면 장난감이 움직이거나 소리를 냈는데, 우리의 몸도 이 장난감 같다. 두 다리의 신경은 대뇌와 이어져 있어 다리가 움직이면 뇌의 기능도 활성화된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 이동하는 과정을 통해 사고의 실타래가 하나둘 풀리게 된다.


스무 살이 되기 전 세계로 나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삶을 체험해 보아야만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다. 여행을 해본 청년은 더 넓은 큰 포부를 가질 수 있다. 여행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나를 변화시키는 시작점이 된다.


여행 도중 마주치는 갈림길은 인생의 선택과 닮았다. 여러 갈래의 길 중 하나를 택하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을이 나오고, 만약 그곳이 마음에 든다면 계획보다 오래 머무를 수도 있다. 심지어 그곳에 정착해 일을 찾고,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릴 수도 있다. 만약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차에 올라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면 된다. 또 다른 갈림길이 나오면 다시 선택을 하고 새로운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운전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원하던 곳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도로 위의 여정은 인생의 축소판 같다. 길 위에서 사람은 누구나 혼자이고, 고독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생각해 본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 싶으면 과감하게 돌아 나와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곳으로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 지역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도구는 자신의 두 다리뿐이다. 발자국을 남겨야 비로소 그곳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여행의 시작이기도 하다. '길을 잃는' 즐거움을 알아야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고속열차는 청춘의 뜨거운 피다. 짧은 시간 안에 꿈에 닿기 위해 전력으로 내달리는 질주본능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청춘을 붙잡고 싶은 중년의 집착일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중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얼마나 많은 꿈들이 실현되지 못하고 사라져 갔는지 깨닫는다. 돌이켜 보면 가보고 싶었던 곳들 중 반도 가보지 못하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하늘이 내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더 허락할지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중년의 여행은 청춘의 그것처럼 느긋할 수 없다. 일반열차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참아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유한한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일생의 꿈을 실현해야 한다.


도로 위의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과 같다. 고독한 길 위에서 앞으로 어디를 가야 할까 고민한다. 갈림길에서 몇 번의 잘못된 선택을 한 후, 다시 돌아와 도로 위를 전진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원하던 도시를 만나게 된다.


항해는 낭만적이지만 고독한 여행 방법이다. 현대인들은 때로 고독을 원한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한다. 항해는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한 번쯤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여행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나는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최대한 두 발로 걸어 도시 구석구석을 누볐다. 왜냐하면 두 다리야말로 그 도시를 이해하는 최고의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내 발자국을 찍어야만 진정으로 그 도시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럽이나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는 이른바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보편화되어 있다. 그들에게 이 여행은 일종의 성인식과 같은 의미인데,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그곳 사람들의 생활을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여행의 목적은 젊은이들이 여행과 사고를 통해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세상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잠시 이 땅에 의탁해 기거하다 떠나는 여행자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여행이 모두 끝났을 때 내가 세상에서 사용했던 육신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홀가분하게 저세상으로 떠나고 싶다. 어쩌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여행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죽음은 인간 최후의 존엄
인류는 영원히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설령 저승사자를 용케 피한다고 해도 영원히 육신에 머무르는 것이 과연 행복한 것일까? 예전에 읽었던 우화 한 편이 생각난다. 옛날 어느 국왕이 저승사자에게 연회를 베푼다고 속인 후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저승사자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나라에는 더 이상 죽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노쇠한 노인들은 병마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연명해야 했고, 마차에 치이는 등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이나 동물들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신음하면서 숨이 끊어지기만을 간절히 애원했다.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죽음은 인간 최후의 존엄이라는 사실을, 국왕은 어쩔 수 없이 저승사자를 풀어 주었고, 고통받던 사람들은 그제야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인생이라는 여행의 종착점
묘지에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생명의 종착점이다. 그들의 여행은 이미 끝났으며, 그렇기에 그들의 여행 속도는 '0'이다. 묘지를 찾은 추모객들에게도 이곳은 내면의 불타오르던 욕망을 잠시 식힐 수 있는 곳이다. 여행의 속도는 점점 낮아질 것이고, 결국은 조용히 멈추어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적극적 사고의 힘>을 집필한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분쟁이 있게 마련이다. 이 세상에서 분쟁이 없는 곳은 오직 묘지뿐이다. 그곳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이미 죽어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서 묘지는 오히려 찾기 힘들고, 소중한 안식의 공간이 되어 준다.


야나카 영원의 벚꽃은 매우 유명하다. 이곳의 벚꽃나무들은 대부분이 심은 지 오래되어 매년 봄이면 화사한 벚꽃이 만개해 상공을 뒤덮는다. 묘와 벚꽃은 보통 잘 어울리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묘한 조화를 이룬다. 마치 제아무리 화려했던 벚꽃도 봄이 가면 처량하게 땅에 떨어져 버리는 것처럼, 화려한 삶과 죽음도 종이 한 장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야나카 영원의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짧은 우리의 삶과 부귀영화의 부질없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더 가치 있는 일에 힘을 쏟아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건축학자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도시 안에 작은 묘지를 디자인하는 일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다. 시민들이 바쁜 일상 중에도 묘지를 찾아 명상의 시간을 보낸다면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본인이 왜 그토록 바쁜지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도시의 공동묘지는 종교와 철학적 의미가 함축된 영혼의 공간이다.


나는 도시의 공동묘지를 산책하면서 선인들을 떠올릴 수 있었고, 역사여행도 할 수 있었다. 벚꽃이 만개한 계절이면 도쿄의 묘지는 시민들에게 가장 좋은 꽃놀이 장소가 된다. 함박눈처럼 하얗게 흩날리는 벚꽃을 보면서 시민들은 생명의 짧음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본다. 그리고 더 적극적인 마음가짐으로 보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겠노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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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며 적절한 질문, 연관된 조각들을 엮어 내는 것!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지혜를 얻어가는 과정이다.


[본문발췌]


"현재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소비자들을 이해하려면 데이터에 의존해야 한다는 통념이 있지만, 거의 모든 혁신적인 제품이나 서비스는 소비자와의 가까운 스킨십을 통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서비스와 제품은 빅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실험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보의 대칭화 시대에서는 많은 사람은 같은 데이터에 접속되고, 같은 분석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 그 결과 전문가들조차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결론을 내놓는다. 남들과 다른 결론을 통해 나만의 비즈니스 기회를 찾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이 사는 동네를 방문해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경영 문화는 변화해야 한다. 글로벌 기업에서 임원들이 고용된 이유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지닌 직감(Instinct)의 가치 때문이다." - 마틴 린드스트롬


직감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생기는 결과물이다.


우리는 모두 소비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우리 생각과 소비자의 생각의 갭이 존재한다. 더구나 이 '불편한 진실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갈 공산도 크다. 이는 바로 우리 모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실패의 길로 인도하는 인간의 본능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고자 한다. 이른바 인간은 태생적으로 인지적 구두쇠(Congnitive Miser)인 것이다. 구두쇠는 자기만 알고, 무엇이든지 아끼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정보를 처리할 때 자기 중심성(Egocentrism)의 원칙을 자신도 모르게 사용하고 만다. 외부의 정보를 접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정보는 중요하게 처리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무시하는 것이다. 그냥 내 마음대로!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를 해석하고 편한 것만 쏙쏙 골라서 기억하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냥 이게 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것이다. 이에 빠지면 자신이 세운 가설이나 사전 지식과 다른 결과에 대해 다소 편파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이 흔하게 범하는 어리석음, 편하고 빠르지만 가끔은 위험한 생각 습관으로 불리는 휴리스틱(Heuristic). 유리스틱은 우리가 일상적인 의사 결정과 판단을 내릴 때 사용하는 인지적 경험 법칙이자, 우리 마음속에 내재한 정신적 지름길이라고 불린다. 물론 이 지름길이 틀렸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가령 여러 가지 업무를 한 번에 다뤄야 할 때,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우리의 뇌는 그냥 편한 대로 습관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통찰에 대한 갈구보다는. 그래서 신속한 의사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효율적일 수 있다. 다소간의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어도, 빠른 의사 결정이 더욱 중요한 상황은 분명히 존재하니까.

가끔은 우리가 하는 소비자에 대한 고민이 진정으로 소비자를 배려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지닌 숙명적인 본능 때문에 우리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최상의 고등동물인 인간은 잘못된 사고를 알아차리면 더 나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설득하는 기재를 지니고 있다. 바로 '메타인지'이다. 메타인지를 지닌 사람은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공자의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라는 선현의 명언을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


"복잡하든 단순하든 신선하든 진부하든 어떤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느냐를 잘 알고 알아채야 한다." - 나영석PD


"오류가 가장 자주 생겨나는 대목은 바로 이미 잘 안다고 생각해서 면밀히 검토하지 않거나 의문을 던지지 않는 영역이다." - Stephen Jay Gould


"어제로부터 배우고, 오늘에 충실하고, 내일에 희망을 가져라.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 Albert Eisntein


본질을 꿰차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Why를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만 통찰력 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과거의 리더는 말하는 리더였지만, 미래의 리더는 질문하는 리더이다" - 피터 드러커


"진리를 보기 원하는 자, 조각조각 떨어뜨려 보지 말고 전체를 보라." - Jiddu Krishnamurti


"우리 아이디어의 출발은 일반적인 인간의 관찰에서 시작한다. 다른 말로는 공감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일이건 상관없다. 제품의 디자인이건, 운영에 있어서 다른 컨설팅이건, 경영 전략을 위한 혁신이건 상관없이 인간을 관찰하면서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 IDEO의 Tome Kelly 공동대표, '매일경제 Luxmen 제20호(2012년 5월)' 인터뷰 중에서


"소비자의 95%의 인지 과정은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저 밑에 깔린 심층 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작 5%의 인지 과정만을 붙들고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더 깊은 고차원적인 의식을 이해해야 한다." - Zaltman


"전략을 사전에 모두 계획해 놓을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앞을 내다보면서 상황에 따라서 적절히 대처해 나가야 한다. 명확하게 의도하기보다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이고 이때마다 학습하는 과정을 통해서 전략의 일관성이나 패턴이 형성되는 것이다." - Henry Mintzberg


"나쁜 피드백에 신경을 쓰고, 그와 같은 피드백을 친구들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라.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lon Musk

나와 다른 관점을 지닌 악마의 변호인은 내가 보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해줄 수 있다. 유사한 배경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집단 사고로 매몰될 수 있음을 방지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의견이 주는 시너지를 도모할 수 있다.

더 튼튼한 생각의 완성을 위해서 결국 남의 관점(혹은 나의 관점)에 나의 관점(혹은 남의 관점)이라는 벽돌을 블록처럼 쌓아가는 것이다.


그간 우리에게 가장 큰 손해를 끼친 말은 바로 '지금껏 항상 그렇게 해 왔어'라는 말이다. - Grace Hopper


"발견은 모든 사람이 보는 것을 '보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 Albert Szent-Gyorgyi


"나는 관찰한다. 나는 느낀다. 나는 상상한다.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인상과 경험, 개념을 결합한다. 이 가공의 재료를 가지고 내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세계의 안과 밖 사이에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닮은 것들로 가득 찬 바다가 있지 않은가.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꽃의 신선함과 내각 맛 본 갓 딴 사과의 신선함은 달랐다. 나는 이러한 유사성을 이용해서 색에 대한 개념을 확장한다. 내가 표면의 떨림과 맛과 냄새의 특질에서 끌어낸 유사성은 일반인들이 보고 듣고 만져서 찾아낸 유사성과 같은 것이다. 이 사실이 나를 견디게 했고, 눈과 손 사이에 놓인 간극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 헬렌 켈러

혁신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서로 관련되지 않은 광범위한 산업 분야 혹은 기능들 간의 유사성을 끌어내는 유추 능력이 필요하다. 혁신은 새로운 것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떤 것 하나가 어떤 목적으로 발명되었든 간에, 이를 내가 처한 상황에 이를 유용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백지에서 훌륭한 아이디어를 찾기는 힘들다. 당신의 상상력을 다른 어딘가에서 전달받는 것이 필요하다.


"창조라는 것은 여러 가지 요소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다. 창조적인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창의적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실제로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무언가를 본 것이기 때문이다." - Steve Jobs


'젊은이는 규칙을 알지만 노인은 예외를 안다' - Oliver Wendell Holmes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불리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 비행기는 바람에 편승하는 게 아니라 바람을 거슬러 이륙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 헨리 포드


"배운 것을 복습하는 것은 외우기 위함이 아니다. 몇 번이고 복습하면 새로운 발견이 있기 때문이다." - 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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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삶의 연료이자 위험 요소다. 
 
[본문발췌]
 
"몬테로씨, 사람들은 자신이 외롭길 원하지요. 신성함에 다다르기 위해 고독이 필요하다면서 말이지요. 고독 속에 있을 때 유혹이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모르면서 하는 말이에요." 
 
 
[나 자신을 읽고 쓰기에 관하여] - 나는 <아우라>를 어떻게 썼는가
'독창성'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탄생을 새로운, 언제나 새로운, 그 무엇으로 보고자 하는 근대의 병이다. 또한 근대성이란 오직 죽음에게만 말을 건네는, 유행하는 허상이다.
 
이 세상에 아비 없는 책, 고아인 책이 있는가? 어떤 책의 후손이 아닌 책이? 인류의 문학적 상상력이 이룬 거대한 가계도에서 벗어난 단 한 페이지라도 있는가? 전통이 없는 창조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거꾸로 말해 재생, 새로운 창조, 즉 끝없는 이야기 속에서도 새로 돋는 푸른 잎사귀 없이 전통이 생존할 수 있겠는가?
 
위안과 욕망을 다룰줄 아는 이들 다섯 명은, 오늘날 내가 보기에 헨리 제임스의 <애스펀의 서류>에 나오는 탐욕스러운 미스 볼드로인 셈인데, 미스 볼드론느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서 잔인하게 미친 미스 하비샴의 환생이고, 미스 하비샴은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에서 질투의 힘으로 카드에서 이기는 비법을 간직하는 옛 백작 부인의 영국인 딸이다.
  • 세 이야기를 관통하는 유사한 구조는 그들이 모두 하나의 신화적 가족이라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이 구조들에는 일률적으로 노파, 젊은 여성, 그리고 젊은 남자라는 세 인물이 등장한다. 푸시킨 작품에서 노파는 안나 페도로브나 백작 부인이고 젊은 여성은 그녀의 피보호자인 리사베타 이바노브나, 젊은 남자는 설비 회사 사원인 헤르만이다. 디킨스 작품에서 노파는 미스 하비샴, 소녀는 스텔라, 남자 주인공은 핍이다. 헨리 제임스 작품에서 노파는 미스 줄리아나 볼드로, 젊은 여성은 조카인 미스 티나, 끼어드는 젊은 남자는 이름 없는 해설자 H. J., 즉 "헨리 제임스"로 마이클 레드그레이브가 이 이야기를 무대에 올릴 때 등장했다.
  • 각각의 작품에서 끼어든 젊은이는 노파의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데, 푸시킨에서는 행운의 비밀, 디킨스에서는 사랑의 비밀, 제임스에서는 시의 비밀이 바로 그것이다. 어린 소녀는 순수하든 그렇지 않든 노파가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가기 전에 그것을 알아내야 하는 속이는 자이다.
  • 콘수엘로 부인, 아우라, 펠리페 몬테로는 이 저명한 모임에 가담했지만 '비틀어짐'이 있다. 아우라와 콘수엘로가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펠리페의 가슴에서 욕망의 비밀을 찢어 내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남자는 이제 속아 넘어간다. 이것 자체가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비틀기이다.
  • 비록 그 대가로 화형에 쳐해진다 할지라도, 세 여성들 모두 근대 이성이 금지한 지식의 비밀, 저주받은 문서들,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양초 기름으로 얼룩진 편지들, 탐욕과 공포의 손길에 버림받은 카드뿐만이 아니라, 미래보다 더 위대한 힘으로, 역사학자 미슐레가 말하듯 자신을 투사하는 유물의 비밀을 지켰던 중세 마녀의 후예가 아닐까?
 
우리는 원래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바꾸려는 욕구가 있고, 그 어떤 욕망도 순수하지 않다.
 
 
 
[작품해설]
푸엔테스는 현실 세계를 낱낱이 분석하고 세밀하게 관찰하는 발자크의 태도와, 문학이 우리를 상상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는 세르반테스의 테제를 아우른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과거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과 해석을 요구하는 것이다. 
 
푸엔테스는 역사를 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유토피아적 역사관을 견지하는데, 역사란 일어난 일을 재구성한 사실의 역사뿐만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으면 좋았을 상상의 역사도 조합해야 한다고 보았다.
 
결합의 매개자인 아우라는 누구인가?
  • 아우라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가벼운 바람', 즉 콘수엘로가 만든 환영이자 제식을 행하는 대리인이다. ... 아우라는 콘수엘로의 젊음과 재생의 욕망이 빚어낸 인물이다. 아우라와 콘수엘로는 부분과 전체라는 환유적 관계이다. 아우라(aura)라는 이름은 성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원환이자, 비교적 전통에서 마녀들이 요술을 부리는 유혹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소설 속 아우라는 콘수엘로가 만든 강력한 흑마술의 결과이자 욕망의 투영체이다.
  • 또한 아우라는 독일의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에세이에서 예술 작품이 지니는 범접할 수 없고 일회적인 신비한 분위기라는 의미로 정의한 용어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예술 작품은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진 것의 일회성을 드러낸다. 예술의 대상이 되는 자연은 예술가에게 생명이 깃든 신비로운 본질을 전한다. 자연은 스스로 생동하는 범신론적인 신비로움이다. 그런데, '아주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먼 곳'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종교적 기능이다. 숭배의 대상인 신에 가까이 접근해서는 안 되듯 예술 작품도 역시 그렇다. 마치 종교적 숭배의 대상처럼 예술 작품은 '아우라'를 갖는다. 즉 아우라는 "멀리 떨어진 것이 일회적으로 드러남."이라는 의미이다. 발터 벤야민은 산업사회가 되어 예술이 기계를 통해 복제되기 시작하면서 아우라를 상실했다고 본다. 푸엔테스는 이러한 아우라의 의미를 육화시킨다. 파도가 출렁이는 에메랄드 빛 바다로 묘사되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펠리페는 일회적이면서도 영원한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단 한 번 눈을 마주친 것으로 펠리페에게 치명적인 매혹을 선사한다. 그녀는 그 이후 팜 파탈처럼 펠리페의 방문을 열고 나신으로 살며시 그를 유혹한다. 그리고 펠리페는 그녀는 영원히 염원하게 된다.
  • 불가능한 젊음의 재현과 사랑의 재현, 이것은 예술가에게 창작이 그렇듯 콘수엘로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것이 피어오르는 비눗방울과도 같은 단 한 번의 에피파니에 그친다 하더라도 그 여운, 그 아우라는 영원히 남기에 그녀는 자신을 기꺼이 소진하고 만다. '위안'이라는 뜻의 '콘수엘로'에게 있어 가장 큰 위로와 즐거움은, 바로 일회적이지만 너무도 눈부신 아우라의 재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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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고 주입하는 사회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지배당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공감하며 자기 안의 자신을 만나자.


[본문발췌]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승인자유력(勝人者有力) 자승자강(自勝者强)"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만 센 것이고, 나를 이기는 사람이 진정한 강자다.


모험하는 마음은 질문하는 마음이고, 건너가는 마음이고,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순수한 사람만이 호기심을 갖고 질문할 수 있지요. 그리고 질문하는 사람만이 모험할 수 있습니다. 호기심이 없는 사람은 대답만 하고 판단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안전을 추구해 모험을 할 수 없지요.


놀이하는 마음을 가지고 순진하게 태어난 어린이는 규칙과 숫자를 배우면서 어른이 되도록 강요받는다.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던 마음이 봐야 하는 대로 보도록 상자에 갇힌다. 이런 세상에서 어린이는 항상 '아직 덜 어른'으로 치부된다. 사실 대부분의 교육은 어린이에게서 어린이의 마음을 빼내고 어른의 마음을 강제로 주입하는 일이다. 이는 창조적 유희를 막는 엄청난 폭력이다. 어린이는 '아직 덜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 자신일 뿐이다. 어린이에게 어린이의 시간을 돌려줘 어린이가 어린이로 자랄 수 있게 해야 한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누르지 않아야 한다. 어린이는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이기 때문에 외부의 간섭이 없을 때 더 성스럽다. 낙타처럼 정해진 궤도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도는 어린에게는 새로운 출발과 최초의 움직임을 감행하는 순수한 충동이 저장되어 있다. 이 충동은 온전히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해보려는 새로운 동작이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심장은 모험의 박동으로 쿵쿵 뛴다.


카뮈는 신을 '관념의 총아'로 보았지요.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뚜렷이 보려고 애쓴다는 뜻이다." 관념에 휩싸이면 세계가 명료해집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우파, 좌파 이런 것들요. 반면, 관념을 버리면 우리는 어둠 속을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려고 애써야만 하지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정치적 투쟁을 봅니다. 그런데 그 정치적 투쟁들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이념이나 관념에 대한 집착만 있을 뿐 인간에 대한 애정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통 판사가 다시 수용소로 돌아가는 것도, 리유가 부인과 멀리 떨어진 채 오랑 시에서 헌신하는 것도 모두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인간을 사랑한 것이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관념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항상 다음을 도모하고, 어떤 목표나 목적을 향해서 계속 나아갑니다. 다음을 갈망하는 의식의 집중적 활동, 이것을 생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생각의 발단은 불편함을 인식하는 겁니다. 불편함을 인식해서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덤비는 일, 이것이 생각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다 불편함을 해결한 결과입니다.


바람직한 것은 사회가 이미 정해놓은 기준을 습관처럼 내면화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정해진 기준에 갇혀 숙고의 과정 없이 행동하다 보면 이기적이고 폐쇄적이게 됩니다. 바라는 것을 하면 오히려 궁금증과 호기심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개방적인 사람이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 폐쇄적인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이미 정해놓은 기준을 좇는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회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고, 사회가 시키는 말만 반복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자기를 향해 걷는 사람은 그런 폐쇄적인 사회 전체에 대해 숙고합니다. 숙고함으로써 그 굳어진 사회가 나아갈 다음 단계,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것이지요. 자기를 향해서 부단히 걷는 일, 자기에게 도달하려는 지적 욕구,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고독은 외로움과 달라요. 외로움은 다른 무엇이 없어서 생기는 약한 마음이지만, 고독은 자기 안에 머무는 것, 자기만 존재하는 것, 굉장히 당당하고 심지어는 오만하기까지 한, 매우 강한 마음입니다. 자기에게 향한다는 말은 고독하다는 뜻이지요. 고독한 사람은 질문을 합니다. 반면 대답하는 자는 휘둘리는 자입니다. 또한 바라는 것을 하는 자는 고독한 자이고, 바람직한 것을 하는 자는 휘둘리는 자입니다.


독서나 산책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고도의 지적 작업입니다. 독서를 통하면 내가 다른 데로 건너가고, 산책을 해도 내가 다른 데로 건너가지요.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은 이미 정해져 가정이나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바람직한 것이다.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것은 그것을 해석하는 명확한 독법까지도 이미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 반면에 나에게서만 솟아는 것은 나에게도 비밀스럽다. 내가 바라는 것을 알려면 숙고하는 수고를 심하게 들여야 한다. 힘든 일은 피하고 힘들지 않은 쪽으로 기우는 이 게으른 인간이란 존재들은 힘들여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고 정해진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려고만 한다. 데미안의 말은 분명하다.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복종해버린다." 인간은 정치와 도덕과 종교가 제공하는 믿음의 집단 최면에 빠져 "그냥 복종해버리면서" 자기를 스스로 내팽개치곤 한다. 내팽개쳐진 자기를 되찾아야 정치와 종교와 도덕도 제자리를 잡는다. 정치와 도덕과 종교는 닫혀 있고 나는 호기심으로 열려 있다. 그 호기심으로 균열을 내고 틈새를 비집는 일을 우리는 사유라고도 하고 생각이라고도 한다. 한번이라도 진짜로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은 숙고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며 정해진 것에 틈을 내어 그 사이를 헤치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한 세계를 깨뜨리면서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 태어나기 위해서 한 세계를 깨뜨린 자는 양쪽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깨뜨린 세계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태어난 세계로도 완전히 진입하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에 끼어서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매일매일은 새로운 날이지.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우선은 지금 하려는 일에 집중하겠어. 그러면 운이 찾아 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을테니." 운은 자기에게 진실한 사람에게만 오는 선물이다.


집단이 공유하는 이념이나 믿음으로 당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당당한 자라니! 다른 사람의 인정에 좌우되지 않고 자기에게 떳떳한 자다. 소유의 길이 아니라 존재의 길을 가는 자들은 언제나 자기에게 당당하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자신만의 향기를 내뿜으며 말한다. "인간은 파멸 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청새치가 다 뜯겨 나가고 뼈만 남는 한이 있더라도, 더 나아가 청새치를 지키다가 상어에 물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부로서의 자부심만은 잃지 않겠다는 자세다. 이는 작은 이익들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자부심과 존엄을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인간 선언이다.


철학은 개념으로 하는 것이지만 정치의 핵심은 말입니다. 말을 얼마나 신뢰 있게 하는지, 자기가 한 말을 얼마나 지키는지가 정치의 바름을 판단하는 아주 기본적인 잣대이지요. 말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정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정치가 신뢰를 잃게 됩니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치를 혐오하게 되고 정치를 멀리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정치를 외면하기만 하면 자기보다 못한 정치인들에게 지배를 받게 됩니다.


스스로 무너져놓고 남 핑계, 세상 핑계를 대는 습성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정권이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어제까지 괜찮았다가 오늘 갑자기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계에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시그널이 있습니다. 조짐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조짐을 시그널로 읽지 않고 소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남이 하는 비판을 비판으로 듣지 않고 비난으로 듣는 것이지요. 시그널을 읽어야 잘못을 고치든지 어떤 조치를 취해 상황을 수습할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지요. 역시 무지로 인한 것입니다. 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감각적으로만 반응하기 때문이에요.
대부분의 사람이 시그널을 노이즈와 혼동하거나, 그것을 읽어내지 못해요. 시그널을 읽겠다는 의욕조차 없는 사람이 많아요. 문제는 진영에 갇힐 때에도 발생합니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되고는 하거든요. 자기 생각이 아니라 진영이 시키는 대로 반응하기 때문이지요. 생각할 필요가 없고 무엇이든 진영의 논리대로만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점점 감퇴하고 눈에 핏발만 서게 되면 시그널을 읽을 수 없어요.

국민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독재 사회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그렇게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농장>을 통해 반란과 혁명의 깃발이 어떻게 완장으로 전락하는가를 보았습니다. 무지하면, 즉 생각하지 않으면 남의 생각에 지배당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고 스스로 건너가려는 의지를 가져야 할 때입니다.

독재자들은 대개 앞선 영웅들로부터 그 정신이 아니라 이미지만 끌어와서 임의로 소비하다가 결국 특권 의식과 권력 놀이에 빠져 완장으로 전락한다. 염치와 수치심을 기반으로 한 성숙을 추구하지 않으면 특권을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일 이상은 할 줄 모른다. 깃발을 찢어 완장을 만드는 일, 그것이 전부이다.

말言을 무너뜨리는 자들에게서는 염치와 수치심도 없어진다. 염치가 없어야 특권도 만들 수 있다.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일에는 책 읽기, 글쓰기, 운동하기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제일 짜릿하게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일은 여행입니다. 여행은 무엇을 보러 가는 게 아니에요. 자기와 상관없는 곳에 자기를 데려다놓고 스스로를 생경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기를 생경한 곳에 옮겨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비로소 자기에게 드러난 적이 없는 자기를 만나게 되는 거지요. 이렇듯 여행은 자기를 만나는 매우 구체적이고 창의적이며 고급스러운 일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가장 큰 차이는 호기심입니다. 어른들은 궁금한 게 없고 당연한 것이 많아요. 아이들은 당연한 게 적고 궁금한 것이 많지요. 당연한 것이 궁금한 것을 압도하면 꼰대인 것입니다. 궁금한 것이 당연한 것을 짓누르면 청춘이고요.


"공직에 사람을 뽑을 때는 후보의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더 중시하는"데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도덕적 성품을 가진 사람이 무지에 의해 저지른 오류는 공공 이익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패한 경향이 있는 데다 그 자신의 부패한 심성을 숨기고, 돋보이게 하고, 옹호하는 능력을 가진 자의 고의적인 술수는 공공 이익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


논변과 이야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빈틈, 즉 공간입니다. 논증과 논변은 빈틈을 허용하지 않고 이야기는 공간을 허용하지요. 이야기는 여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듣는 사람이 빈 공간으로 들어올수 있어요. 바로 이때 공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셰계의 어떤 교육, 어떤 대화도 감동과 감화가 없으면 설득력이 생기지 않아요.


논변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겁니다. 이 옳고 그름의 특징은 어제는 옳았던 것이 오늘은 그를 수 있다는 거예요. 저 나라에서는 옳은 것이 이 나라에서는 그르고, 상대방한테는 그른 것이 나에게는 옳을 수 있지요. 이렇듯 옳고 그름은 굉장히 상대적인 것입니다. 물론, 물리적인 옳고 그름도 있지만 사회나 삶에서의 옳고 그름은 다 상대적이에요. 지금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논증과 논변으로 구성하면 삶이 딱딱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적대적이게 되지요. 그렇지만 자기 삶이 자기의 신화를 구성하거나 스토리를 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삶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향해 걷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 헤르만 헤세,
사람이 망가지는 첩경이 바로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 거예요. 비교는 오직 자기 자신과 하는 것만이 정당화됩니다. 나머지는 전부 자기를 망가뜨리는 거예요. 비교하면서 남을 부러워하는 것도, 남을 업신여기는 것도 자기를 망가뜨리지요.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양하고, 그 크기에 맞는 자리에 있으면 그것이 행복이다.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다. 건너가려는 자는 멈추지 않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러니 당연히 여행에 인간의 속성이 제일 많이 담겨 있다. 여행은 빈틈없이 치밀하고 꽉 찬 자기에게 일부러 빈틈을 만들고, 공간을 허용하고, 정해진 의미들을 덜어내고, 시간을 낭비하는 척하면서 스스로 흔들리게 한다. 질문은 여행이고 대답은 멈추기다. 문명의 주도권은 질문하는 자가 쥔다. 대답은 논증과 논변의 형태고, 질문은 자기에게 하는 이야기의 형태다.


고요는 정지된 상태가 아니예요. 찰나의 순간이지요. 운동 방향을 달리하는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의 충격입니다. 관성적으로 사는 삶의 방향에 대한 성찰, 이것이 고요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인간이 직면한 가장 큰일 중의 하나가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존재론적으로 가장 큰 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큰 판을 인식하지 않아요. 인생은 짧고 우리는 곧 죽어요. 이것을 철저히 인식하면 더 중요한 일부터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옆집에서 우리집 대문 앞에 쓰레기봉투를 버린 일, 운전하던 중에 차가 끼여든 일이 우주적으로 큰일처럼 보이지요. 스스로 진실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발견한 소명이 있다면, 작은 일을 작은 일로 보고 큰일을 큰일로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소명이 없다면 큰일을 보지 못하고 작은 일을 보지요.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놓치고 살아요. 우리의 실존에 가장 분명한 기반은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자기가 지금 사형장으로 끌려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동그라미를 잘못 그린 것이 오점이 될까 봐 걱정하게 되는 거예요.


생각이라는 것은 개방적이며 항상 외부로 향해 있어요. 그래서 생각하는 자는 적극적이고, 안전을 추구하기보다 모험을 더 좋아합니다. 반대로 생각하지 않는 자는 항상 안전을 추구하지요.


지도자들이 진영에 갇혀 있으면 우선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된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진영에서 정한 이념을 확대 재생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국가보다는 진영의 이익을 더 중시해버리는 데가지 빠질 수 있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하는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떄문에, 현실을 진영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지 보이는 대로 바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정책이나 태도가 실제적이지 않고 이념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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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경험과 생각을 하며 현재에 집중하는 것, 삶이 단순하지만 더 풍성하게 한다.


[본문발췌]


하루는 모든 날의 다른 이름이다.
아무리 후회해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미래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진 힘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삶을 낭비한다. 무의미한 슬픔, 어리석은 즐거움, 탐욕스러온 욕망, 형식적인 관계에 자신의 유한한 자원을 투자한다. 이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남아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세네카, 삶의 덧없음에 대해, 3.3b


진정한 경제적 자유란 무엇인가. 더 많이 갖고자 열망하고 더 많은 수입과 더 많은 성취를 갈망할수록 실제 삶을 즐길 가능성과 자유는 줄어든다.


분노보다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없으며 분노만큼 우리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도 없다. 분노로써 성공하면 이보다 오만한 것이 없으며, 분노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이보다 광기에 휩싸이게 하는 것 또한 없다. 분노는 실패했을 때조차 물러서지 않는다. 분노하던 대상이 사라지면 분노의 이빨은 곧 스스로에게로 향한다. - 세네카, 분노에 대해, 3.1.5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열망하면서 행복하기란 불가능하다네. 행복은 이미 모든 것을 갖고 있는 뚱보들이지. 그들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이라는 것은 없어. - 에픽테토스, 대화록, 3.24.17
미래의 사건을 열망하고 욕망하고 열정적으로 상상하면서 그 속에 행복의 시나리오가 있다고 고대하는 것은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파괴할 뿐이다.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지금보다 나은 것을 갈망하는 것은 만족의 적이다. 행복과 갈망은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신의 특권이다. 신에 가까운 인간은 아주 조금 바란다" - 디오게네스
연기와 재처럼 사라질 것들. 증오하고 분노하며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완벽함을 쫓아 달려가는 우리들도 다를 바 없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사라지고 천천히 잊히게 될 운명이다. 그러니 우리는 인간을 불행으로 이끌고 가는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을 즐겨야 한다.


행동할 때는 망설이지 말라. 대화할 때는 부조리하지 말라. 사고할 때는 방황하지 말라. 영혼을 위해 수동적이어서도, 공격적이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삶에 있어 너무 많이 가지려 하지 말고 바쁘게 살려고 하지도 말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51

"단순함이란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것" - 샤를 와그너


자기 의지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하네. 그는 강제도, 훼방도, 제한도 모르지. 어떤 선택도 방해받지 않으며 욕망하는 것을 달성하네. 이들은 계략에 빠져들지도 않지. 기만 속에서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실패와 실수가 가득하고, 규칙도 없으며, 불평만 있는 쳇바퀴 같은 삶을 바라는 사람은 없네. 하지만 부도덕한 사람들은 자신의 바람대로 살지 못하네. 오직 도덕적인 사람만이 자유인이지. - 에픽테토스, 대화록, 4.1.1-3a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의 쳇바퀴 속에서 하루를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자. 일이나 가족 같은 필수적인 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허영심과 무지에서 비롯된 불필요한 일을 수행하며 많은 사람들이 또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생각해 본 적 없는 충동을 달래기 위해 움직인다. 세네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권력자들이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을 너무 자주 보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노예를 자초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은 없다." 현대 사회도 노예들로 가득하다. 돈, 명예, 권력을 위해 우리는 기끼어 노예가 된다. 당신이 행하는 일들의 목록을 작성해 보라. 그것 중 어떤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는 자유로운가?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 무모하게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네. 거기에 어떤 유용함이 있는지, 어떤 쓸모가 있는지를 말일세. 그것 중 어떤 것은 너무 많은 것일 뿐더러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도 않지.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그것들을 공짜라고 여긴다네. - 세네카, 도덕에 관한 서한, 42.6


3천 년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할지라도 명심하라.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현재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순간의 삶이며 소유할 수 있는 것 또한 지금 이 순간의 삶뿐이다. 긴 삶이든 짧은 삶이든 동일하다. 우리 모두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스쳐 지나고 있는 현재밖에 없다. 과거를 잃어버리거나 미래를 잃어버릴 수는 없다. 어떻게 지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2.14


자유는 우리 마음속에 욕망을 가득 채움으로써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네. 욕망을 제거할 때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 에픽테토스, 대화록, 4.1.175
풍족함에 이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거나 이미 당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자유의 길이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애를 태우고, 분투하고, 싸운다면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하지만 이미 갖고 있는 것에 집중하고 그것에서 만족을 얻는다면 우리는 지금 바로 여기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은 더 많은 '문제' 또한 갖고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재산이 많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권력이 커지면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떠나가지 않도록 더 많이 신경 써야 한다. 집안의 살림살이를 생각해 보라. 살림살이가 많을수록 청소할 시간은 늘어나고 나에게 쓸 시간은 줄어든다.


화가 나 있거나 상처받은 상태에 있을수록 판단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 감정이 판단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행동과 외부 사건을 정확하게 추론할 수 있어야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다.


이유 없는 행동은 무의미하다. '하고 있는 일'로 자신을 평가하지 말고, '왜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성취하려 하는가?'로 평가하라. 여기에 좋은 답을 할 수 없다면 그 일을 그만두어도 좋다.


플라톤의 이 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무릇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한번에 조망해야 한다. ... 뒤섞여 있는 모든 것 속에 숨어 있는 이면의 질서를 바라보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7.48


인생에 교과서는 없다. 스토아 철학자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문에 답했던 것은 아니다. 직면할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조건이 어떻게 바뀔지라도 그에 적응할 든든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삶의 지침서를 찾는 대신 그들은 창조성, 독립성, 자존감, 창의력과 같은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의 삶을 평화로운 방향으로 안내하는 인생 지침서 같은 것은 없다. 운명 앞에서 원칙을 가지고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인생 전반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생각하지 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일에 대해 걱정하지도 말라. 단지 현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스스로 물어 보라. 지금 여기에서 참고 견딜 수 없는 이유,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어 보라. 그러고 나면 그럴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질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36


스스로 박탈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먼 길을 돌아 당신이 얻으려는 희망하는 모든 것들을 지금 이 순간에 거머쥘 수 있다. 과거는 버려두고, 미래는 섭리에 맡기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 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2.1


정치적인 논쟁, 개인적인 의견 불일치와 마주하면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져 보자. "이것이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가 되는가?" "이 말싸움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가?" 현명한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하지 싸우기 위해 대화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우리의 행동을 지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고 유연하게 반응하는 힘이 있는 한, 우리의 의도와 태도까지 지연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가진 유연성은 어떤 장애물도 성취를 향한 수단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를 지연시키는 행동이 결국에는 향상을 위한 행동으로 바뀐다. 길 위에 있는 장애물은 또 다른 길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5.20
우리는 어떤 일이 완벽하게 흘러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좋은 조건에서 시작하기를 희망하고 영향력을 유지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해야 할 일 앞에는 언제나 사소한 골칫거리와 크고 작은 장애물이 존재한다. 그것들 또한 일의 일부다. 아무런 문제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면 이미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행동의 총합이다. 정신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이 우리의 행동에 반영된다. 그러니 매 순간 현명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것이다.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영혼은 비참하다네. 고통이 오기 전에 먼저 고통스러워하지. 그들이 그렇게 불안에 휩싸이는 이유는 가진 것을 끝까지 소유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야. 하지만 그와 같은 영혼에게는 결코 안식이 있을 수 없다네. 오히려 갈망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현재를 잃어버리고 말 뿐이지. - 세네카, 도덕에 관한 서한, 98.5b-6a
걱정이 현실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두어라. 관심사에 시간을 쏟아 붓기에도 우리의 생은 짧다.


종교적 신념, 명성, 권위 등을 고려하지 말고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혜가 무엇인지 찾아라. 인간적 가치를 우선시할 때 우리는 진리를 볼 수 있다. 진리는 반대편에도 있다.


무거움을 가볍게 만들 수 있는 건 유머뿐이다.


한 번도 불행 속에 살아 본 적이 없다면, 나는 당신이 불행하다고 말하겠다. 적대자와 마주하지 않고 살아왔따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행운 속에서만 살아왔다면 누구도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조차도! - 세네카, 섭리에 대해, 4.3


철학의 세 가지 영역인 윤리학(도덕론), 자연학(존재론), 논리학(인식론)은 하나의 목표가 있다. 이것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동일한 목표를 추구한다. 바로 이성의 인도를 통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미래 혹은 사후에 두지 않고 바로 지금, 현재에 둔다는 사실이다.


삶의 우선순위. 우리는 하루 중 여덟에서 열 시간 정도를 사무실 혹은 일터에서 보낸다. 그리고 여덟 시간 정도를 수면하고, 세 끼 식사를 위해 약 세 시간 정도를 쓴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 무엇을 하는가? 친구를 만나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운동을 한다. 결국 스스로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


헤카토가 말했네. "희망하지 않으면 두려움 또한 종식된다." ... 희망과 두려움이라는 질병의 가장 큰 원인은 현재 주어진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은 채, 생각만 너무 앞질러 갔기 때문이라네. - 세네카, 도덕에 관한 서한, 5.7b-8


진정한 철학은 절대적 진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진리는 인간의 주관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드러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적 성찰이야말로 철학이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우리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에 집중하고 다른 사람의 것은 그들의 과제로 남겨 두는 것이다. 철학이란 선체가 부식되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배 밑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벗겨 내듯 자신의 실수를 걷어 내는 행위다.


삶의 마지막이 다가온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세. 아무것도 미루지 않도록 하세. 그리고 하루하루 인생의 대차대조표에 균형을 맞추도록 하세. ... 매일을 마지막처럼 사는 자에게는 결코 시간이 부족하지 않으니. - 세네카, 도덕에 관한 서한, 101.7b-8a


"품격은 도박판에서 드러난다. 어떻게 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잃느냐에서 신사의 자질을 볼 수 있다." - 007 시리즈 중,
인생이라는 도박장에서 돈을 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잠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뿐, 결국은 무일푼으로 돌아가야 하는 삶에서 어떻게 잃을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죽음을 잊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문제나 잡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관조는 두려움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다.


살아가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삶을 낭비한다. 인생은 충분히 길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만큼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좋은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사치와 태만의 하수구로 흘러보내면 그것을 의식하기도 전에 시간은 지나가 버린다. 그렇다. 우리에게 짧은 삶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 세네카, 삶이 덧없음에 대해, 1.3-4a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이 인생의 본질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기억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기억에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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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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