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온통 더 많은 걸 기억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과 건망증에 시달려 불안한 중년들과 치매를 걱정하는 노년들로 가득 차 있다. - 추천의 글, 정재승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잊어버릴까? 기억은 효율을 꽤 따지는 편이다. 한마디로 뇌는 의미 있는 것들만 기억하도록 진화했다. 의미가 없으면 잊는다. 그런데 우리 삶 대부분은 습관적이고 반복적이고 사소하다.
뭔가를 기억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지(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와 주의집중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들은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즉 늘 하는 일이다. 기억에 남을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이 사건들은 습관적으로 매일매일 일어나는 단조로운 일들이다. 일화기억은 늘 똑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평범하고 전형적이고 뻔한 것들을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이런 경험들은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성인이 되어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일화기억이 형성되는 시기는 평균 3세다. 3세 이전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리고 있던 짙은 안개가 걷히는 때는 6세 혹은 7세 정도다. 이제부터의 기억은 나를 중심으로 한 서사에 곁들여진 일화들이다.
왜 우리는 아주 어릴 때의 일을 조금밖에 기억하지 못할까? 뇌에서 언어의 발달은 일화기억을 강화, 저장, 인출하는 능력과 상응하여 일어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세부적인 경험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연관된 해부학적 구조와 회로가 갖추어져야 한다. 따라서 성인이 되어 접근할 수 있는 기억은 경험을 말로 옮길 수 있는 언어능력을 갖춘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기억이다.
일화기억을 형성하는 사건들은 대개 15세에서 30세 사이에 모여 있다. 이때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들이 집중되는 회고절정의 시기다. 다양한 방면에서 첫 경험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인생은 목표와 의미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뇌는 의미 있는 것들만 기억한다. 그래서 일화기억을 형성하고 저장하기 위해서는 감정, 의외성, 의미 등이 필요하다.
저장된 일화기억을 인출할 때마다 내용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기억의 인출은 녹화된 동영상의 재생이 아니라 이야기의 재구성이다. 지나간 사건을 다시 떠올릴 때 저장되어 있는 세부정보의 일부만을 불러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세세한 부분을 빼먹고, 어떤 부분은 재해석하고, 어떤 부분은 왜곡한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고려할 여유가 없던 정보, 맥락, 관점들이 지금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종종 기억의 빈틈을 메워서 기억의 서사를 더 완벽하고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없던 정보를 꾸며내기도 한다. 당연히 이 정보는 대개 부정확하다.
일화기억은 매번 인출될 때마다 외부의 영향을 쉽게 받기 때문에 매번 우리가 뭔가를 떠올릴 때마다 잘못된 정보가 침투해 기억을 실제 경험과 다르게 왜곡할 수 있다. 일화기억에 거짓 정보가 침투하는 가장 흔하면서도 확실한 경로는 언어, 특히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다. 일화기억은 단어의 선택과 유도질문으로 매우 쉽게 조작된다.
피질에서 한 번씩 끄집어낼 때마다 보관되어 있던 일화기억은 쉽게 변질되고, 우리는 꺼내온 기억 위에 새로 편집된 기억, 온갖 새로운 정보로 업데이트된 기억을 덮어씌운 다음 다시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지나간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어쩌면 맞을 수도, 완전히 틀릴 수도 있고, 참과 거짓 중간 어디쯤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혹시 배우자가 말하는 기억이 우리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발끈하지 말자. 우리도 우리의 배우자도 아마 고의는 아니겠지만 잘못된 기억을 둘만의 추억이라고 여기며 간직해왔는지 모른다. 이 점을 깨닫고 진실이 무엇인지 누구도 완벽하게 알 수 없음을 그냥 받아들이자.
기억을 잠식하는 시간의 힘을 거스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즉 반복과 의미 부여다.
우리는 뛰어난 기억력을 원하지만 모든 부담과 공로를 온전히 기억에만 돌릴 수는 없다. 기억체계가 최적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보저장과 정보삭제가 균형을 이루도록 섬세한 조정이 필요하다. 기억이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능력은 모든 것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고 유용한 정보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다. 신호를 저장하고 소음은 제거한다. 잊는 능력은 기억하는 능력만큼이나 꼭 필요하다.
만성스트레스는 기억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현대의 삶은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의 뇌와 몸의 반응에 극적인 변화를 줄 수는 있다. 요가, 명상, 건강한 식습관, 운동, 마음챙김 수행, 감사와 공감을 통해 우리는 스트레스에 조금 둔감해지고, 도피 반응에 브레이크를 걸고, 불안이라는 독을 건강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모든 방법들이 고혈압, 염증, 불안, 스트레스를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활동은 코르티솔 수준도 정상화시킨다. 또한 해마의 신경생성을 강화함으로써 만성스트레스를 퇴치하고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우리가 깨어서 바쁘게 활동하는 동안 시냅스에 대사 잔해들이 쌓이는데, 깊은잠을 자는 동안 신경교세포가 이 잔해들을 청소한다. 숙면은 뇌의 대청소 시간인 셈이다. 특히 우리가 밤에 깊은 잠을 자는 동안 신경교세포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바로 아밀로이드의 처리다. 하룻밤만 잠을 못 자도 뇌척수액에 아밀로이드와 타우(또 다른 알츠하이머병 예측지표)가 증가할 수 있다. 아밀로이드가 쌓이면 숙면을 방해하고 그 결과 더 많은 아밀로이드가 쌓이게 되므로 퇴적물 형성을 가속화하는 악순환 고리에 갇히게 된다. 수면 부족은 알츠하이머병을 진행시키는 매우 중요한 위험 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래부터 수면 부족에 시달린 것은 아니다. 1942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은 하룻밤 평균 7.9시간을 잤다. 언제나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무엇이든 다 가지고 다 해봐야 한다는 압박, 치솟는 불안, 전자기기 사용 시간의 폭증, 깊은 밤까지 TV 시리즈 한 시즌을 정주행하는 습관 등으로 인해 우리의 수면 시간은 현저하게 줄었다. 오늘날 미국, 영국, 일본의 성인들은 하룻밤 평균 6.5시간을 잔다. 우리는 잠을 박탈당하고도 적게 자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곱 시간도 채 자지 않는 생활습관을 열정으로 포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허세다. 수면 전문가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수면 시간에 대해 모두 한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일곱 시간에서 아홉 시간을 자야 한다. 그보다 덜 자면 건강과 기억을 해친다.
기억이 한 인간을 이루는 전부는 아니다. 인간에게는 감정, 의지, 감수성, 도덕적 가치가 있다. 한 인간을 자극하고 그에 따른 깊은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지금, 여기다. - 알렉산드르 루리아
기억을 소중히 여기되 너무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기억을 정말 대단한 존재로 여긴다면, 기억의 진정한 위대함을 인정하고 기억을 잘 돌볼 것이다. 올바른 도구를 사용하면 기억은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기타 치는 법을 배우고, 시험에서 A를 받을 수 있다. 기억의 진정한 가치에 감사할 것이며, 이런 감사의 마음은 수많은 연구가 증명하듯 우리의 행복과 안녕에 보탬이 된다. 동시에 기억을 가볍게 받아들이면 기억의 수많은 허점에 대해 느긋하고 관대해질 것이다. 불완전한 기억을 탓하지 않고, 기억나지 않는 게 당연한 걸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스트레스도 줄어든다. 만성스트레스가 줄어야 기억력도 좋아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처럼 우리의 삶이 편안해진다.
우리의 뇌는 애초에 일상적이거나 뻔한 일들을 담아두도록 설계되지 않은 반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은 반복적이고 뻔한 일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기억하고 덜 잊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일이긴 할까? 아마도 의미 있는 것만 남기고 모두 잊어버리길 바라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기대일 것이다. 즉 인생에서 의미 있는 부분들을 자세히 기억하는 능력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기억은 내가 나임을 느끼게 해주고, 인생을 하나의 서사로 인식하게 해주며, 타인과의 연결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해줄 것이다. 우리의 뇌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쩌면 지금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진리'는 말할것도 없고 '사실'조차 이야기로 왜곡, 가공해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취하는 상황이 만연하고 있다.
[본문발췌]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현재란 확실하지도 않고 일정하지 않으며, 미래는 현재의 희망과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실체가 없고, 과거는 실체가 없는 현재의 기억과 같은 것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이 지닌 가능성이란 얼마나 무한한가!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문학이 줄 수 있는 많은 행복 중 최고의 것은 상상
<픽션들>이 20세기 후반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현실의 지시물을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기존에 진리라는 이름으로 수용되거나 이성적으로 포장된 모든 것이 결국의 인간이 만들어낸 또 다른 허구임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준 덕분이다.
우리가 궁극적인 진리라고 믿고 섬기고 있는 것도 우리가 만들어낸 '우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데리다가 '진리/허구'의 이분법적 대립을 해체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시작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진리의 절대성과 우위성에 대해 해체는 바로 곧 모든 것의 허구성-혹은 허구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학의 경우 그러한 인식은 곧 현실과 허구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의 설정이 가능하다는 종래의 관념을 수정시켜, 1960년대 이후의 서구 소설에서는 흔히 현실과 허구가 구별되지 않고 서로 뒤섞이게 되었다.
사실 보르헤스 문학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에, 냉전 시대에 미국학자들이 지니고 있던 정치적 무관심을 합리화시켜 주었고, 또 아직도 비정치성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위험한 작품이다. 보르헤스의 소설이 다원성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역사의 측면을 여러 상이한 관점 아래서 파헤칠 수 있으며, 이런 역사의 다원성을 통해 획일화를 추구하는 종래의 정치관과 공식 역사관의 허구성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에 익숙한 우리에게 던지는 원초적 질문,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어 극단으로 치닫는 지금에 되새겨볼 주제다.
[본문발췌]
사람들은 자신과 똑같은 도덕적 서사를 가진 사람들과 뭉쳐 정치적 집단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살아가며 어느 한 가지 서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뒤로는 다른 대안적인 도덕 세계는 더 이상 보지 못한다.
"망치를 손에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는 법이다." - 마크 트웨인
도덕성이 주로 도덕적 추론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면, 선천성과 사회적 학습이 어떻게든 조합되어 도덕성이 형성된다는 주장이 가장 가능성 높은 대답으로 남는다. 우리 인간은 날 때부터 바른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정확히 무엇을 바르다고 여기는지는 반드시 배움을 통해야만 알 수 있다.
정교한 추론에는 두 종류가 있고 둘은 매우 다른 성격을 지닌다. 우선 그중 하나인 탐구적 사고는 우리가 "대안이 될 수 있는 여러 관점을 공평하게 헤아려보는 것"을 일컫는다. 그에 비해 확증적 사고는 우리가 "특정 관점을 합리화하기 위해 기울이는 일방적인 노력"을 말한다. 책임감이 탐구적 사고를 증가시키려면 다음과 같은 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의사결정자는 어떤 견해를 갖기 전 그 견해를 나중에 자신이 청중에게 해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2) 의사결정자는 청중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야 한다. (3) 의사결정자가 보기에 청중은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 정확성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 세 조건이 모두 충족될 때에야 사람들은 그야말로 피 터지게 노력하여 진실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는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의 경우에(우리 삶은 거의 백이면 백 여기에 해당한다), 책임감 압력은 확증적 사고만 더 증가시킬 뿐이다. 사람들은 정말 올바른 사람이 되기보다는 올바른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더 애쓰는 것이다.
학교는 사람들에게 치밀하게 추론하는 법은 가르치지 않고 있었다. 학교는 IQ가 높은 지원자들을 선별해내는 역할을 했고, 이 IQ가 더 높은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이유를 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사람의 논쟁 능력을 예측해주는 지표로 IQ만 한 것은 없지만, IQ는 내 편의 논거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가, 오로지 그것만을 에측해줄 수 있었다. 즉, 똑똑한 사람들은 훌륭한 변호사나 훌륭한 공보관 역할을 더 없이 훌륭히 해내지만, 상대편의 논거를 찾아내는 데에서는 다른 이들보다 나을 게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전체 쟁점을 좀 더 온전하고 공평하게 탐구하는 데 IQ를 쏟아붓기보다는 자신의 논변을 더 든든히 떠받치는 데 IQ를 쏟아붓는다"
일상의 무미건조하고 손쉬운 일들에서도 우리의 사고는 탐구적이기보다는 확증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물며 사사로운 이해, 사회적 정체성, 강력한 감정에 따라 미리 정해진 결론을 원하는 상황이라면, 나아가 그것을 요구까지 하는 상황이라면 사람들이 열린 마음으로 탐구적 사고를 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일부가 추론 능력을 활용해 다른 사람의 주장을 꺾는다 해도 개개인 모두가 공동의 연대 혹은 공동의 운명을 느껴 서로가 적정선을 지키며 상호작용을 해나갈 수 있다면, 결국에 그 집단에서는 훌륭한 추론 능력이 사회 체계의 창발성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 찾기를 목표로 하거나(첩보 기관이나 과학계) 훌륭한 공공 정책을 입안해야 하는(입법부나 자문위원회) 집단 혹은 기관에서 지식과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의 목표가 단순히 훌륭한 사고가 아니라 훌륭한 행동이라면, 우리는 더더욱 합리주의를 손에서 놓고 직관주의를 끌어안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타인이 품은 신념이라도 우리에게 유용한 부분이 있다. 사물에관한 그들의 신념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의 합리성 안에 잠자고 있던 여러 가능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난생처음, 아니 다시 한 번, 그런 신념들이 가진 힘을 몸소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똑같이 한 가지 '배경막'만 쳐 있지는 않은 것이다. 애초 우리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단순히 사람들을 힘으로 을러 생긴 무식한 권력을 인간적 권위라고 할 수 없다. 질서와 정의 유지라는 책임까지 짊어져야 인간적 권위인 것이다. 물론 권위자들도 자기 행동이 전적으로 옳다고 믿고는 순전히 일신의 이득을 위해 아랫사람들을 착취하는 경우가 많다. 권위 기반은 정치에서는 좌파보다 우파에 의해 훨씬 손쉽게 이용될 수 있는 도덕성 기반이다. 좌파의 경우 위계질서, 불평등, 권력에 맞서는 것을 자신들 본연의 특성으로 삼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정치적 당파, 그리고 이해 집단은 자신들의 관심사를 통용적 동인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어떻게든 우리의 도덕 모듈을 자극하려고 애쓴다. 우리에게서 표나 돈이나 시간을 얻어내려면 도덕성 기반 중 적어도 하나는 반드시 활성화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은 (다른 이들과 달리) 평등을 무엇보다 신성시하며, 나아가 시민의 권리와 인권 쟁취를 통해 이를 실현하려고 한다. 좌파가 지지하는 정책들을 보면 보통 부자에게 더 높은 세금을 매기고, 가난한 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며, 때로 국민 모두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해주는 성격을 띠는데, 자유/압제 기반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지역주의에 더 가까운 특징을 가진다. 즉, 인류 전체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을 더 중요시한다. 이들의 경우에는 자유/압제 기반과 독재에 대한 증오를 이용해서 경제적 보수주의의 수많은 교조를 뒷받침해낸다. 그리하여 (진보적 복지국가와 그것이 부과하는 높은 세금으로) 나를 짓밟지 말고, (억압적인 규제로) 내 사업을 짓밟지 말 것이며, (유엔 및 주권에 해가 되는 국제조약을 만들어) 내 나라를 짓밟지 말라는 주장이 나온다. 따라서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신성한 가치가 평등이 아니라 자유이다. 보수주의자가 자유주의자와 정치적으로 한편이 되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세 가지 기반의 도덕성을 가진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여섯 가지 기반 모두를 활용하고 있다. 진보의 도덕 매트릭스는 배려/피해, 자유/압제, 공평성/부정 기반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단 진보주의자들은 공평성(비례의 원칙)이 동정심이나 압제에 대한 저항과 상충할 때에는 공평성은 버리고 그 대신 이 둘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보수주의자의 도덕성은 여섯 가지 기반 모두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에 비해서 배려 기반을 희생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다른 도덕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그 과정에서 해를 입는 사람이 생겨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 본성 대부분은 자연선택이 개인 차원에서 작동한 결과 형성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렇지, 전부 그렇지는 않다. 우리 인간은 집단과 관련된 적응의 특성도 몇 가지 지니고 있다. 우리 인간은 이중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기적인 영장류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보다 크고 고결한 무엇의 일부가 되려는 열망도 갖고 있다. 우리의 본성은 90퍼센트가 침팬지와 같고, 나머지 10퍼센트는 벌과 같다.
거래적 리더십(transactional leadership)은 추종자들이 누구를 따를 때 얻게 될 개인적 이득에 호소하는 반면,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은 추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스스로를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 아닌, 자기보다 커다란 집단의 구성원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변혁적 리더들은 스스로가 집단 헌신의 본보기가 됨으로써(예를 들면, 자신을 희생한다거나 '나'보다 '우리'라는 말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구성원 사이의 동질감을 강화하는 한편, 집단의 목표와 공통된 가치, 그리고 공동의 이익을 한층 강화해나간다.
행복은 사이에서 찾아오는 것이었다. 나 자신과 타인, 나 자신과 나의 일, 나 자신과 나보다 더 거대한 무엇, 이 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맺어져야 행복은 비로소 찾아온다.
도덕적 체계란 가치, 미덕, 규범, 관습, 정체성, 제도, 첨단 기술 등이 진화한 심리 기제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둘은 도덕적 체계로서 함께 작용하여 개인의 이기심을 억제하거나 규제하며, 나아가 협동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게 한다.
자신을 넘어선 무엇에 관심을 갖는 것, 나아가 다른 이들과 무리지어 그 주위에 몰려드는 것, 이는 다른 것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간의 비범한 능력이다. 그리고 이렇듯 서로가 한 팀으로 뭉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대업을 추구할 수 있다. 종교의 핵심은 결국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몇 가지 세세한 차이를 제외하면, 정치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진보주의는 확실히 적정선을 넘어서는 경향이 있고,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고 하며, 고의는 아니더라도 사회에 쌓인 도덕적 자본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보수주의자들은 쌓여 있는 도덕적 자본은 잘 지켜내지만, 특정 계층의 희생자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향이 있으며, 모종의 강력한 이해관계에 따른 약탈을 제어하지 못하며,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제도를 바꾸거나 고칠 줄 모른다는 약점이 있다.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 도덕이 우리를 뭉치게 한다는 것은 결국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편을 갈라 싸우게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편이 나뉘면 우리는 매 싸움에 이 세상의 운명이라도 걸린 듯이 서로 이를 악물고 싸운다. 도덕이 우리를 눈멀게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각 편에는 저마다 좋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 이야기 중에는 뭔가 귀담아들을 것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춥다. 이것도 모두 우리의 탐욕과 편리함으로 빚어진 기후변화의 영향이라고들 하는데, 이상기후 뿐 아니라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흙, 물, 공기의 오염은 당장은 생활의 불편정도라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미래 세대에게는 생존의 문제이다.
[본문발췌]
그린벨트 운동의 네 가지 핵심 가치
환경에 대한 사랑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환경을 사랑하는 이는 지구에 이로운 행위를 한다. 나무를 심거나 잘 자라도록 보살피고, 자라나는 나무에 거름을 주고, 동물과 동물 서시식지를 보호하고, 흙을 지키고, 지구와 주위 환경과 그것이 주는 모든 것에 실질적으로 고마움을 표현한다.
환경에 대한 사랑
지구 자원에 대한 감사와 존중
지구가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긴다. 지구 자원을 조금이라도 낭비하려 하지 않으며, 쓰리게 줄이기, 재사용, 재활용(reduce, reuse, recycle)의 3R을 실천한다.
자강과 자기 발전
자립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생활환경을 개선해 나가려는 의지가 있으며, 다른 누군가가 나 대신 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약물중독과 같은 무기력하고 자기파괴적인 행위를 멀리한다. 필요한 내적 에너지를 스스로 이끌어 내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자기 안에 있음을 이해한다. 자각(스스로 깨닫기), 자강(스스로 강해지기)
헌신하려는 마음과 자발적 활동
그린벨트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다른 이들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쓰면서도 보상이나 인정을 바라지 않음을 뜻한다. 그린벨트 운동은 공동선을 위해 제 몫을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공동선이란 가깝고 친밀한 사람을 위한 일일 수도 있고, 머나먼 곳에 사는 사람을 위한 일일 수도 있따. 여기서 '다른 이들'은 꼭 사람만이 아니라, 삶과 지구를 우리와 공유하는 뭇 생명을 두루 아우른다.
나는 지구가 파괴되면 인류 또한 그렇게 된다는 것을 경험과 관찰로 깨달았다. 물이 오염되고 공기 중에 매연과 연기가 가득한, 상처 입은 환경에서 우리가 먹는 음식은 중금속과 플라스틱 잔류물로 오염된다. 또 흙은 사실상 쓰레기와 다를 바 없어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 더러워진 흙은 우리 건강을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끝내는 몸과 마음, 영혼에 상처를 남긴다. 그러므로 환경을 해치는 것은 우리 자신과 인류 전체를 해치는 일이다. 지구가 되살아나도록 돕는 것은 우리 자신을 돕는 일이다.
기후변화를 겪으면서 가난하든 부유하든 모두 이 지구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욕구와 바람은 지구가 베풀어 줄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충분히 가지려면 다른 사람들이 덜 가지고 살아야 한다. 괜찮다고 얘기하기 위해서는 덜 파괴적인 다른 방법을 찾는 일 말고도 안 된다고 말하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를 가이아, 즉 그 자체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유기체로 인식한다. 그의 학설처럼 지구는 자기 조정 수단을 작동해 기온의 균형을 되찾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과 많은 종들은 빨리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
우리는 지구의 자원이 무한하다고 생각하고 자원이 베푸는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자원에 값을 매긴다. 우리가 바로 이런 태도로 지구를 대하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생태 위기가 그렇게나 많이 발생한 것이다. 환경 파괴는 더 많은 것을 바라는 탐욕 때문에 일어난다.
이 욕망은 우리가 지난날을 잊고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엄청난 고통을 빚어 낼 수 있다. 그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이제 그만. 이것으로 충분해."라고 말하는 것은 확고한 원칙의 문제이다. 지구를 반드시 치료해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지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렇게 높은 의식을 지닌 이들은 올바른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들은 균형과 조화를 소중히 여기고 욕망에 확실하게 선을 그어 선 밑으로든 위로든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 사람들이 주로 도시에 사는 산업화된 세계에서는 과소비가 주요 욕망이기 때문에 생태 문제가 심각해진다. 하지만 매립지나 스모그에 덮인 도시, 또는 물고기들이 죽어 있는 오염된 강에 가 보지 않는 한 사람들은 그 상처를 눈으로 보지 못한다. 한편 더 가난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만성적인 불평등 때문에 빈곤에 시달린다. 그래서 지역 환경을 지나치게 파괴하는 쪽으로 행동하게 된다. 가파른 비탈이나 숲이 우거진 지역에서 나무와 풀을 베어 내고 농작물을 길러 대규모 토양침식이 일어나고, 아무렇게나 방목한 가축이 남김없이 풀을 뜯어먹는 바람에 목초지가 사막처럼 변한다.
누구도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거나 다른 사람의 관대함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이 절제 의식 또한 미덕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들에서 필요한 만큼만 거두고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쓰레기가 줄고, 생태 발자국은 가볍게 찍혔다. 그것은 오늘날 가난한 많은 나라들이 목표로 하는 식량 안보의 기반을 닦는 일이기도 했다. 자급자족은 식량 작물을 경작할 수 있는 모든 이에게 중요한 원칙이었지만, 공동체는 길손을 돕거나 도움이 필요한 이를 때맞춰 돕는 일을 소중히 여겼다.
생태 발자국ecological footpring. 인간이 지구에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의식주를 제공하는 자원의 생산과 폐기에 드는 비용을 토지로 환산한 지수.
더 많은 것을 바라는 탐욕은 세계적인 규모로 퍼져 나가면서 우리 환경에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한 예로 2006년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연구에 따르면, 고기와 유제품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세계 축산업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에 18퍼센트 정도 책임이 있다고 한다. 이 수치는 온갖 운송 수단이 내뿜는 온실가스의 총합보다 크고, 벌목과 숲의 감소로 일어나는 온실가스 효과와 맞먹는다. 집약적인 축산업은 가축을 먹이는 데 대규모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공기와 물과 땅을 더럽히고 숲과 초지를 파괴하고 있다. 많은 토착 부족의 경제와 문화에는 공적 공간의 공유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복지와 공동선에 함께 책임을 진다는 의식이 있었찌만 이는 나날이 자기 자신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윤리로 바뀌어 왔다. 과거 공동체는 땅이 베푸는 풍요를 공동체 구성원과 길손들과 공유하는 특성이 두드러졌던 반면, 오늘날의 공동체는 땅에서도, 신체적, 환경적, 도덕적으로 자신들을 지켜 주었던 관습에서 멀어졌다. 이런 자연관의 변화는 자기 존중의 상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환경에 대한 관심의 상실이 원인이자 결과였다.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던 많은 것들이 사라져 온 것이다.
세상을 아주 먼 곳에서 바라보면 시스템 전체가 뚜렷하게 다가온다. 그 시각은 우리와 지구의 관계를 더 깊이 질문하도록 이끌고, 우리가 지구에 어떤 태도를 지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묻도록한다. 우리는 우리가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한 채 바삐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그 질문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관점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다. 수직적 관점과 수평적 관점 사이에서, 큰 그림과 작은 그림 사이에서, 측정과 데이터에 기반을 둔 지식과 오랜 지혜와 경험에 기댄 지식 사이에서 말이다. 이 서로 다른 관점의 균형을 마음에 새기고, 이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영적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나무를 출발점 삼아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나무들을 목재용으로만 기른다면 나무가 한창 자랐을 때 베어 내는 것이 공공 정책이라는 더 넓은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천연자원 이용에 관한 기존의 경제학은 인류가 주위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다른 많은 가치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기존 경제학은 나무의 가치를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을 팔아 손에 쥘 수 있는 돈의 액수로 따진다. 사실 과학자들은 숲이 자연과 사회에 심리적으로, 생태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얼마나 널리 이바지하고 있는지를 근래에 와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숲은 물을 정화하고 모아 두며 기후 패턴을 조절한다. 나무는 약재로 쓰이고 식량을 공급한다. 흙을 기름지게 하고 탄소를 가두고 산소를 내뿜는다. 다양한 종의 식물과 동물을 보호한다. 사람들은 숲에 기대어 삶을 영위해 간다. 자연을 팔아 돈을 쌓는 것, 인간의 탐욕으로 환경과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길이다.
숲은 무엇을 낳는가? 흙과 물과 깨끗한 공기이다. 흙과 물과 깨끗한 공기는 삶의 토대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느끼고 자연을 경외하는 마음은 이용과 착취, 지배를 중시하는 또 다른 관점에 너무도 자주 굴복해 왔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자연 전체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식민지 이전에 존재했던 키쿠유 생활양식을 되돌아볼 때 나는 키쿠유 사회가 자연 세계에 감사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즐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탐욕스럽고 물질적인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임을 확신하게 된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키쿠유 사람들이 강에 가는 이유는 물을 어떻게 소유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다시 말해 물을 병에 담아 팔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강가에서 편안히 쉬고 강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러 간다. 강가에서는 칡이나 바나나, 사탕수수를 기르고 강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며 감탄한다. 환경을 사랑한다면 베어지는 나무를 자신처럼 느껴야 한다. 땅이 죽어 가기 때문에 함께 죽어 가는 사람과 사회가 바로 나 자신인 것처럼 느껴야 한다. 우리는 황폐해지는 자연을 안타까워해야 하고, 인간의 행위로 위기에 처한 종을 알게 되거나 오염된 강과 매립지를 볼 때 분노해야 한다. 메마른 도시 환경 속에서도 공원이나 나무나 꽃을 가꾸며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강물이 더 이상 바다로 흘러들지 않을 때, 또는 물에 쓸려 온 흙이 호수 바닥에 쌓여 굳어 있을 때 느끼게 될 절망을 알아야 한다.
감사는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고마워하고 그것을 지혜롭게 쓰겠다는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그린벨트 운동에 꼭 필요한 가치이다. 우리는 하나의 방침을 통해 이 가치를 증진해 왔다. 그 방침이란 오랫동안 선진국 환경 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쓰레기 줄이가, 재사용, 재활용의 3R을 가리킨다.
모타이나이는 그대로 번역하면 "낭비하지 말라"라는 뜻이지만 이는 물건뿐 아니라 자원과 시간에도 적용된다. 모타이나이는 지구가 우리에게 베푸는 것에 느껴야 하는 감사를 아우른다. 또한 우리가 운 좋게 받아온 것들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경의를 표하는 태도와, 그것을 낭비하지 말고 조심히 써야 한다는 당위성을 포괄한다. 모타이나이는 소유물이 마치 자신의 정체성이라도 되는 듯이 집착하지 말고 가진 것에 고마워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에는 무언가를 올바르게 쓰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자신이 과분하게 받았을지 모른다는 죄의식이 스며 있다. 모타이나이는 여러 수준에서 우리에게 호소한다. 3R과 마찬가지로 쓰레기를 줄이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은 과소비와 낭비가 만연한 선진꾸뿐 아니라, 환경 악화 탓에 더 가난해지고 삶의 바탕인 생태계가 되살아날 수 없는 지경까지 파괴된 보다 가난한 나라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모타이나이라는 개념은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버리고,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또는 함부로 소비하는 데에서 벗어나 감사의 가치를 깊이 고민하도록 이끈다. 모타이나이는 우리가 쓰는 자원에 고마워하고, 우리가 만들어 낸 쓰레기와 속수무책으로 낭비한 시간을 반성하며,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물건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원천에, 그것들이 집에 오기까지 지구가 치른 대가에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물질적 소유가 더 커진다고 해서 자신의 삶에 더 만족하거나 감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 사회가 마주한 거대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날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부와 기반 시설, 소비적 생활양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수십억 명도 같은 것을 원한다. 그리고 현재의 생산수단을 이용해 이 수준의 부와 안락을 누리려면 부와 문명과 다른 종들이 기대어 살고 있는 생태계를 위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든 지표가 가리키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수많은 아이러니가 있다. 16세기부터 21세기까지 문명 세계를 정복하고 파괴하는 데 앞장섰고, 자신감 있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고 억압했으며, 다른 나라의 천연자원을 약탈해 이익을 보았던 바로 그 나라들이 환경 의제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곳의 시민들이 현재 지구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가장 잘 안다. 선진국의 많은 시민들이 3R과 모타이나이를 실천하고 있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해 자원을 쏟아붓고, 일터와 가정, 지역사회에 찍힌 크나큰 생태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미 자국의 천연자원을 초토화시킨 많은 산업사회가 오늘날 개발도상국에서 자원을 시굴하고 있다. 이는 약탈하고 낭비하는 산업 성장 모델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것임을 사실상 시인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에서 천연자원이 가장 풍부한 지역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불안하고 가난한 나라들이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의 많은 나라들은 아직도 목재, 광물, 원유, 커피, 밀, 콩 같은 일차산업 생산물의 수출을 경제 기초로 삼고 있다. 이들 나라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기대고 있는 천연자원인 환경을 위험한 수준까지 악화시키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말을 너무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자신들을 감싸고 있는 풍요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나라와 지역의 부패와 정치인들과 손잡은 비양심적인 기업에 설득당해 자신들이 소유한 것을 실제 가치에 못 미치는 헐값에 팔아 버린다. 심지어 그들은 지구를 중심에 놓은 새로운 의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원이나 그 자원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보고서 강가에 우뚝 선 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스스로 헤엄쳐서 강가로 나와야 빠져 죽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물살이 더 거세질수록 물에 빠진 이는 공포를 느끼고 허우적대다가 결국 빠져 죽을 가능성만 더 커질 것이다.
물질적 부는 오염과 쓰레기, 천연자원 고갈 등 눈앞의 환경을 대가로 증가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일정 수준의 안락에 도달했다고 느끼기 전에는 자신들의 생활양식에 따르는 비용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떤 사회든 자신들이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현재의 환경 위기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길을 상상하지 못하거나, 지난날 한 나라나 지역의 문제였던 것이 지구적 범위로 확산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사는 곳에서 자신과 환경에 편안함을 느끼고 조화롭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물질적인 것들로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깨닫는 이들이 늘고 있다. 우리는 공감하고 아집을 버리며 타인에게 이바지하고 서로 나눔으로써 행복과 만족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물질적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영혼으로 충만하다.
구조적 불평등 탓에 부유한 나라에서든 가난한 나라에서든 분명 가난한 이들은 가난에서 탈출하기 어렵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기 쉽다. 그 불평등을 인식한 그린벨트 운동은 나무를 심고 황폐해진 자연과 숲을 되살리고 식량 안보를 증진하며 물을 모아 두고 쓰레기를 줄이고 지속 가능한 기업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일에,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변화에 꼭 필요한 민주적 협치(good governance)를 정착시키기 위한 활동을 오래전부터 결합해 왔다. 민주적 협치란 지도자들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며,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결정을 내리고, 경제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공평하고 책임감 있게 자원을 이용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얼마나 약자이든, 또는 처한 환경이 얼마나 불공평하든, 모든 사람은 스스로 발전시킬 수 있고 몸을 일으켜 걸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린벨트 운동이 전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메시지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나무 심기 네트워크를 통해 이를 사실로 증명했다. 지구의 상처와 우리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싸움이 성공하려면 스스로 강해지는 힘이 꼭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일부 성직자들은 교회 목사나 임원 장로들이 왜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지 않느냐는, 신도들에게 기대어 먹고살지 말고 정식 직업을 갖든지 적어도 가축을 키우거나 농사를 지어서라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설교하는 것이 우리 직업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말하는 것이 어떻게 한주 내내 매일의 직업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건강하고 몸뚱이가 멀쩡한 사람들이, 극빈층에 가까운 사람들이 포함된 신도들에게 기대어 사는 데 만족한다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을, 그리고 교회를 잘못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공정해지려면,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맞설 용기와 힘을 얻기 위해 필요한 영적 자원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불합리한 일이 저질러졌을 때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할 정도로 높은 의식 수준을 갖는 게 아닐까. 그 의식은 우리에게 어디에도 압도당하지 않을 의지를 줄 수 있다. 우리는 강인하게 행동에 나설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점점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깨어나는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았는데, 그 일에 몰두한 나머지 다른 일을 할 틈이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소명 의식은 어려운 고비를 지나 전진하게 하고, 자신에게 있는 줄 몰랐던 힘을 줌으로써 장애물을 뛰어넘게 한다. 하지만 소명 의식은 찾아다닌다고 해서 언제나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론 외부의 사건과 상황, 지식이나 긴박한 필요에서 생겨날 수도 있지만, 자신의 내면 깊은 곳, 자신만의 근원으로부터 우러나야 한다. 그리고 그 소명의식은 또 다른 중요한 가치의 샘, 다시 말해 헌신하고 되돌려 주고자 하는 바람에서 솟아나기도 한다.
토머스 베리 신부,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어울림이다.", 또 지구는 공유지로 "모든 존재는 지구 공동체의 다른 모든 존재 덕분에 살아간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지구 공동체의 다른 모든 존재의 행복에 이바지한다."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두 보프, "사회적 불공평은 생태적 불공평을 낳고, 생태적 불공평은 사회적 불공평을 낳는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인간의 존엄성은 지구 자원을 지속 가능하게 사용하는 기초를 이룬다.
슈바이처는 자연을 도구적인 가치로만 여기는 개념을 거부하고, 생태계 생명의 다양성과, 나무든 냇물이든 흙속의 지렁이든 모든 피조물이 존중받고 더 나아가 경외받아야 함을 인식했다.
우리는 앞에 놓인 과제를 보고 우리에게 충분한 힘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가난, 불의, 벌목, 사막화, 토양 유실, 기후 변화가 미칠 재앙에 가까울 영향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될 거대한 문제들을 생각할 때 특히 그렇다. 또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신의 행복에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힘없는 이들을 격려할 때, 또는 지도자들에게 정의와 공명정대함을 요구할 때 특히 그렇다. 우리가 너무 작고 너무 하찮으며 너무 유약하다고 느낀다. 변화를 일구어 내려고 하지만 어떤 노력을 해도 비웃음거리가 될까 봐 두렵다. 하지만 우리는 벌새처럼 고집스럽게 행동하기를 배우고 변함없이 헌신하며 인내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벌새처럼 작게 느껴진다 해도, 작은 부리로 그 구슬만 한 물방울을, 다시 말해 작은 변화의 씨앗을 물어다 필요한 곳에 떨어뜨려야 하며, 아무리 성공할 가능성이 적더라도 그 일을 되풀이해야 한다. 우리보다 권력을 많이 가진 이들로부터 경멸이나 조롱을 받을 수도 있다. 아무 관심조차 못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한 걸음 전진해 우리와 함께 걷도록 힘을 줄 수 있다. 현재 상태를 벗어나 스스로 힘을 내 행동에 나서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가 없다. 결국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 사회를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린 시절이 어른이 된 지금보다 더 소박하고 참되고 순수했다고 늘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역사를 거꾸로 돌려서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소유를 줄이고 쓰레기를 덜 만들어 내도록 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날이 통합되고 세계화되는 경제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 자체가 더 많이 갖고 금세 버리며 흥미를 잃은 것은 곧 잊어버리는 데 익숙해져 왔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E. F.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새로운 생각을 퍼뜨렸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개인 수준에서든 거시 경제 수준에서든 여전히 더 많이 축적했느냐의 잣대로 성공을 판단한다.
변동성이 높고, 불확실하며,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문제 해결에는 똑똑한 천재보다는 다양성에 바탕을 둔 집단지성이 더 낫다.
[본문발췌]
인지 다양성은 몇백 년 전만 하더라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직면했던 문제들이 선형적이거나 단순하거나 분리 가능하거나 이 세 가지 특성 모두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에서는 이 논리가 뒤집힌다. 다양한 관점을 지닌 그룹에 엄청나고 결정적인 이점이 생긴다.
불완전한 관점을 지닌 두 사람을 한데 묶어놓으며 통찰력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크게 발휘될 수 있다. "관점이 다양할수록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찾아낼 수 있는 잠재적 실행 가능성을 갖춘 해결 방안의 범위가 넓어진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각자의 사각지대를 공유할 뿐만 아니라 사각지대를 더욱 강화한다. 이런 현상을 '미러링mirroring'(거울 효과)이라 부르기도 한다. 거울에 비치듯 나의 실제 모습이 상대방에게 비치고 상대방의 모습은 나에게 비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불완전하거나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더욱더 확신하기 쉽다. 그 결과 확신이 정확성과 반비례하는 지경에 이른다.
인지적 동질성은 현대사회에서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일반적인 표준이다. 대부분의 조직은 다양성이 심각하게 부족한 탓에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영리한 전략을 수립하며 위협을 감지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손상시킨다.
정치 엘리트의 사회적 다양성 부족은 정책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경험이 너무나 중요한 정치에서 재앙이 된다. 동일한 배경을 지닌 똑똑한 사람들이 의사 결정 그룹에 배치되면 집단적 맹목 현상을 보이기가 쉽다.
현명한 그룹은 이와 다르게 기능한다. 그들은 복제인간 같지 않으며 동일한 관점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지도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반항적인 그룹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하지 않지만 문제 공간의 다른 영역에서 나온 통찰을 제시한다. 이런 그룹에는 도전하고 확대하며 일반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타화수분(다른 꽃의 수술에서 꽃가루를 받아 수정시키는 것)하는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속해 있다. 이는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더 나은 집단지성의 전형적인 특징에 해당한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보완하는 힘coverage이 있다. 그들은 복잡한 문제에 직면할 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어려운 문제를 다루려는 그룹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문제 자체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여러 측면을 더 깊이 파고드는 일도 아니다. 그 대신 한 발 물러서서 우리의 집단적 이해의 어느 부분에 틈이 있는지, 우리가 개념상 사각지대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동종 선호 경향이 우리를 문제 공간의 아주 작은 구석으로 몰아넣지는 않았는지 질문해야 한다. 이처럼 보다 깊이 있는 질문을 마주하지 않으면 조직은 그룹 토의 과정 곳곳에 결함이 스며드는 위험에 빠진다. 즉 문제를 검토하고 더욱 깊이 파고드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들의 사각지대를 더욱 강화하는 지경에 이른다. 우리는 가장 어려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인지 다양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룹 토의가 거울에 비추듯 서로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계모하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동질성의 가장 큰 문제는 복제인간 같은 팀이 이해하지 못한 데이터와 잘못된 해답,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기회가 아니다. 바로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질문과 미처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데이터, 인식하지도 못한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다. 도전적인 분야일수록 개인이나 개별 관점이 모든 것을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 집단 지성은 개인의 지식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차이에서 나온다.
다양성은 집단지성에 분명 기여하지만 관련성이 있을 때만 그렇다. 핵심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관점을 지닌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경제예측 전문가의 집단지성은 서로 다른 모델을 활용해 정확하게 예측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정보기관의 경우, 다양한 경험을 많이 보유하고 자신들이 직면한 위협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더 많이 이해하는 뛰어난 분석가들에게서 나온다. 정책 입안자의 집단지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이 섬기는 유권자들의 인구통계적 스펙트럼과 관련 있는 배경을 지닌 특출한 정치인들에 의해 형성된다.
지배 역학 관계. 한 명 또는 두 명이 지배적이면 팀 내 다른 사람들, 특히 내성적인 사람의 통찰이 억제된다. 지배적인 사람이 리더라면 사람들이 앵무새처럼 그의 의견을 따라 하며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그룹 내에 존재하는 반항적인 아이디어들이 표출되지 못한다.
집단은 일반적으로 리더가 필요하며, 리더가 없으면 갈등과 망설임이 생길 위험에 처한다. 그런데도 리더는 집단의 다양한 관점에 접근할 때에만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일단 결정이 내려졌고 되돌릴 수 없을 때 지배는 말이 된다. 리더는 목표한 일을 끝내기 위해 자신의 팀을 독려해야 한다. 하지만 결정을 실행하는 것과 달리 평가를 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오릴 때 지배는 그 자체에 내재된 모순의 무게 때문에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는 명성의 역학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반항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기 위해, 그런 기여를 위협으로 간주하는 리더의 응징을 받을 염려 없이 안전한 환경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은 사람들이 무엇이 맞는지 알아내기 위해 사려 깊은 반대를 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 레이 달리오
환경이 복잡하고 불확실한 이때가 바로 아무리 지배적인 두뇌라 하더라도 하나의 두뇌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시기다. 또한 집단지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한 바로 그 시기다. 그런데 지배적인 리더가 제공하는 미심쩍은 편안함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묵인하는 바로 그 시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배는 리더들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종종 팀이나 조직 또는 국가 구성원들의 무언의 소망과도 연계돼 있다. 실제로, 팀이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 시작하는 순간 명망 있는 리더십을 선천적으로 선호하던 사람들이 지배적인 리더십으로 옮겨 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데 이는 처참한 결과로 이어진다.
심리학자들은 종종 '개념적 거리conceptual distance'에 관해 이야기한다. 한 주제에 너무 몰입하면 우리는 지나치게 장식이 많은 바로크 양식 같은 복잡함에 포위된다. 그냥 그곳에 머물러 있거나 단순히 그 내부에 피상적인 변화를 주는 것만 생각하기가 매우 쉽다. 결국 자신의 패러다임의 포로가 된다. 하지만 벽 바깥으로 나오면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 우리에게 새로운 정보는 없지만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 이는 종종 예술 형태의 주요 기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새로운 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익숙한 뭔가를 보는 것이다. W. B. 예이츠의 시나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과 조각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위대한 작품들은 작품을 보는 사람과 그 대상이 되는 작품 사이, 즉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에서 개념적 거리를 만들어낸다. 재결합이 성장의 주요 동력이 되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미래의 성장은 우리가 세상에 부여한 범주들을 초월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영역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정신적 유연성을 갖추고 있으며, 규칙과 사고 저장소 사이에 세운 벽을 불변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고 심지어 파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촉진될 것이다.
핵심적인 통찰은 물체와 달리 아이디어는 수확체감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갖고 있던 차를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면 그와 동시에 차를 쓰지 못한다.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 아이디어의 잠재력은 커진다 이를 두고 정보 넘침information spillover이라 한다. 아이디어를 공유하면, 아이디어는 사람들의 생각에 전달될 뿐만 아니라 이제 더 많은 아이디어와 결합될 수 있다.
혁신은 창의성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연결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밀폐된 공간 속으로 후퇴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회가 아니라 위협으로 인지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난다.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며 의미 있는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했던 시대가 혁신을 이끌어왔다.
정보 버블의 경우, 정보의 경계는 밀폐돼 있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버블 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듣는다. 이는 왜곡된 관점을 만들어내지만 그 관점은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내집단 멤버가 외부 의견을 마주치는 순간 자신의 믿음에 의문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정보 버블을 터뜨리는 방법은 노출이다. 이것이 바로 광신적 종교 집단이 그토록 오랫동안 내부자들을 다른 목소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다.
추가적인 필터를 갖춘 에코체임버의 속성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정보 버블처럼 내집단에서 더 많은 의견을 듣지만 이런 관점들은 반대되는 의견에 노출될 때 더욱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반대자가 새로운 통찰이 아니라 가짜 뉴스를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외부 목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무시한다. 에코체임버는 인식 취약성을 활용한다. 대체 가능한 관점에 대한 신뢰를 체계적으로 약화하고 다른 통찰과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모함하며 신뢰 형성 과정 자체를 왜곡하는 필터를 실행한다. 대체 가능한 관점은 깊이 생각한 후가 아니라 접하자마자 묵살된다. 사실은 제시되는 순간 바로 거부당한다. 관점과 증거는 쇳가루가 자기장에서 밀려나듯 퇴짜 맞는다. "에코체임버는 우리의 취약성에 붙어사는 사회적 기생충 형태로 운영된다. 정보 버블은 외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때 형성된다. 에코체임버는 다른 편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할 때 생겨난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다. 신체 치수가 다를 뿐만 아니라 인지적 특성과 강점, 약점, 경험, 관심사도 다 다르다. 실제로 이런 다양성은 인류의 가장 멋진 특징들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가 중요한 방식에서 서로 다르다면, 현명한 시스템은 가능한 한 이 편차를 감안해야 한다. 사실상 우리는 이런 편차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표준화된 조종석 같은 융통성 없는 시스템의 창살에 갇혀 있으면 어떻게 인간 다양성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평균치에 현혹된다면 어떻게 다양성을 활용할 수 있을까?
다양한 예측의 평균을 내는 것은 다양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의 업무나 학습 등의 방식을 표준화하는 것은 다양성을 짓누를 위험이 있다. "평균을 잘 이용하면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통찰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잘못 하용하면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단 하나의 해법을 강요하게 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현재 상황을 고수한다. 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면 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디폴트에 의문을 제기하는 능력이야말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혁신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 작용과 자신이 속한 네트워크에 관한 것이다. 지식은 축적되면서 집단 두뇌를 형성하며 사실상 자연도태 작용 자체에 따라 발전한다.
인간의 발전은 집단을 구성하는 두뇌들 자체보다 다양한 두뇌들이 상호 작용하는 방식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다. 인류는 개인적으로 막강해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지구 행성에서 가장 막강하다. 다양한 통찰들을 한데 모으고 세대 내와 세대들에 걸쳐 연결하며 반항적인 아이디어들을 재결합함으로써 인류는 상당히 놀랄 만한 혁신들을 창조했다. 인간의 영특함이 사회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성이 인간의 영특함을 만들어냈다. 다양성은 인간 그룹의 집단지성을 끌어낸 요소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독특한 진화 경로를 구축한 숨겨진 요소다.
다양성을 실제 일과 삶에 적용하려면
무의식적 편견unconscious bias. 이는 사람들이 재능이나 잠재력의 부족이 아니라 인종이나 젠더 같은 자의적 요인 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하는 상황과 관련된다. 무의식적 편견을 없애는 것은 보다 공정한 시스템을 만드는 강력한 첫 단계일 뿐만 아니라 집단지성을 더 많이 갖춘 사회를 만드는 첫 단계이기도 하다. 이는 모든 배경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추구할 기회를 제공해 우리의 가장 긴급한 문제에 기여하는 지식을 지닌 집단을 확장한다. 구조적 차별에 맞서 싸워 이를 해결하는 일은 모든 정치적 의제의 거의 취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 무의식적 편견 제거는 인종이나 젠더와 상관없이 최고 인재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인지 다양성을 최적화하지는 못한다. 무의식적 편견 제거와 인지 다양성 최적화, 이 두 가지 도전은 개념상 뚜렷이 구분된다. 훌륭한 조직은 둘 다 해야 한다.
그림자 위원회shadow boards. 이 위원회는 주요 의사 결정과 전략에 대해 경영진에게 조언을 하며 나이로 인한 좁은 시야를 없앨 수 있는 젊은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경영진이 '젊은 그룹의 통찰을 활용하며' 경영진의 관점을 다양화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또 반항적인 아이디어의 흐름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젊은 사람들의 빠른 신기술 습득 속도에 놀랐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림자 위원회의 중요성을 이해할 것이다. 또한 오래전부터 묵혀온 문제들을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보며 충격을 받았던 사람들은 누구라도 이 논리를 이해할 것이다.
주는 자세giving attribute. 협업에 성공하려면 특별한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의 통찰을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제공하고 관점을 공유하며 지혜를 전해야 한다. 이렇게 줘야만 다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실제로 점점 더 커지는 다양성의 중요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아마도 주는 자세를 갖춘 사람들이 더욱 성공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지식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제공하려는 의지는 복잡한 세상에서 엄청난 이익을 준다.
우리는 동종 선호가 보이지 않는 중력처럼 작동하며 팀과 조직을 동질성으로 끌어당긴다는 것을 봤다.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관점을 공유하며 자신들의 편견을 확증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즐긴다. 편안하고 인정받은 느낌이 든다. 심지어 우리가 집단적으로 더욱 멍청해지는데도 개인적으로는 똑똑하다고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다양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 협업의 본질적인 의미가 바뀐다. 솔직한 반대는 파괴적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서로 다른 의견은 사회적 결합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사회적 활력에 대한 기여로 간주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해 아웃사이더에데 손을 내미는 것은 배신 행동이 아니라 가장 계몽적인 결속 형태다. 재결합으로 만들어진 혁신이 없으면 어느 집단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갈 수 있을까?
혁신은 각 개인의 영특함이 아니라 지식의 최첨단에 있는 다수의 개인들이 자유롭게 교류하고 관점을 교환하며 반대 의견을 내고 서로 배우며 협업 관계를 구축하고 낯선 이를 신뢰하며 자신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지와 능력에 달려 있다. 혁신은 천재나 집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혁신을 하려면 생각이 자유롭게 상호 작용하는 거대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같은 배경과 동일한 분야, 같은 학교 출신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으면 정말 문제가 생긴다. 이런 동일성은 사각지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더 나은 의사 결정을 하려면 다양성이 분명히 중요하다. ... 어떤 분야도 모든 해답을 내놓을 수는 없으며 '집단사고'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배경과 전문성을 대표하는 자들이 주요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해, 공감, 더 많이 듣기를 실천하고 의도를 단정짓지 않기, 닫힌 생각을 멀리하기... 대화에 필요한 것은 부족하고 대화중 하지 말아야 할 다수의 잘못된 내 행동을 반성한다.
[본문발췌]
사람의 믿음에 깊이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의 언제나 솔직한 대화다. 대화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행위로서(영어 단어 'conversation'에서 'con'은 라틴어로 '함께'라는 뜻이다), 부드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타인의 믿음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대화란 본래 협업인지라, 상대방이 믿음을 제고하고 행동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남 뿐만이 아니다. 대화는 나의 믿음을 되살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대화에서 가장 먼저 목표를 삼아야 할 일은 상대방의 추론을 이해하는 것이다. 적대적 사고, 즉 맞서고, 다투고, 따지고, 비웃고, 이긴다는 생각을 버리자. 그보다는 손잡고, 힘을 합치고, 듣고, 배운다고 생각하며 협력적 사고를 하자. '이 사람은 내 적이며, 내 말을 알아듣게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접고, 대신 이렇게 생각하자. '이 사람은 내 대화 파트너이며, 그에게서 무언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 가령 그가 왜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대화란 두 사람이 모르는 것을 서로 자연스럽게 배우는 기회다. 누군가를 파트너로 삼아 예의 있는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상대의 결론에 수긍하는 것도 아니요, 그의 추론에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교양의 척도는 수긍하지 않고도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옛말도 있다.
상대방의 말 듣기, 말은 줄이고 더 많이 듣는다. 듣지 않으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남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거부하는 경향이 있고, 스스로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견해는 잘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메시지 전달과 진정한 대화를 구분한다. 메시지 전달은 선생이 되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과 같다. 반면 대화는 주고받으며 서로 배우는 것이다. '상대방이 이것만 좀 알아들면 생각을 바꿀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대화가 아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메신저 노릇을 할 때 메신저를 공격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메시지 전달 모드에 돌입하면, 나는 질문 중심의 '듣고 배우기' 모드로 들어가자. 질문은 엇나간 대화를 본 궤도로 슬쩍 되돌리는 효과가 있다.
상대방이 왜, 어떻게 지금처럼 생각하고 믿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러면 상대방에게는 물론 스스로도 그동안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는 게 아니었음을 겸허히 자각하게 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남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어주려면 우선 나부터 열린 태도를 지녀야 한다.
'남들이 아는 건 나도 안다'는 흔한 오류. '읽지 않은 장서 효과(Unread Library Effect)', 인류의 지식을 모아놓은 큰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는 읽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책이 수중에 있으니 책에 든 정보를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연구해보기는커녕 읽어보지도 않았으니 지식이 없는 상태다.
사람들에게 빌린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면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믿음을 누그러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험 참여자들에게 어떤 정책에 관해 구체적으로 실시할 방법, 예상되는 효과 등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게 했더니, 강한 정치적 견해를 가졌던 사람도 더 온건한 견해로 선회했다. 타인의 사고에 개입할 때 이런 현상을 잘 이용한다면 적어도 두 가지 큰 장점이 있다. 첫째, 상대방이 주로 말하도록 유도하고 나는 주로 들음으로써 상대방은 내가 자기 생각을 바꾸려고 시도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게 된다. 둘째, 상대방이 그 누구의 압력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지식을 의심하게 된다.
읽지 않은 장서 효과를 자각시키는 데 효과적인 방법 하나가 바로 '무지의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다. 읽지 않은 장서 효과는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우리의 바람은 상대방이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나 자신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세 가지 큰 장점이 있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도 있는 읽지 않은 장서 효고를 극복하는 기회가 된다. 즉, 주어진 문제에 관해 실제보다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잘 모르겠네요"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데, 그럼으로써 상대방에게도 모른다고 시인해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 신호를 보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는 상대방의 체감 지식과 실제 지식 사이의 괴리를 드러내는, 미묘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예" 또는 "아니요"로 답하는 단답형 질문보다는 상대방이 자기 생각을 자기 언어로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열린' 질문을 하자. 그러면 상대방을 대화에 자연스럽게 끌어들일 수 있다. 인질 협상 전문가 크리스 보스는 열린 질문 중에서도 이른바 '교정 질문'을 추천한다. 교정 질문은 '어떻게'나 '무엇'이 들어가는 질문이다. "예" 나 "아니요"로 답할 수가 없다.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대화의 '주제'도 아니고, 대화를 나누는 '상대'도 아니다(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보기에 옳은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공동의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나와 도덕적 견해 다른 상대의 신뢰를 얻으려면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특히 상대가 관심을 둔 가치에 나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설령 상대방의 눈에 내가 도덕적 관점에서 아군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적군에 속한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그래야 상대방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감정을 분출하지 않는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전투적 대화를 피하자. 글로 쓴 주장은 상당히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크다. 화가 났을 때는 절대 아무것도 올리지 않는다. 이메일 답장이나 온라인 대화 참여도 하지 않는다. 누가 올린 답글에 화가 벌컥 난다면,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는 답글을 달지 않는다.
트위터에서는 절대 논쟁하지 않는다. 트위터는 글자 수 제한 탓에 섬세한 뉘앙스를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수많은 사용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용자를 집단으로 공격하는 이른바 '조리돌림' 같은 문제에 특히 취약하다는 점을 명심하자.
페이스북에서는 종교와 정치 그리고 대부분의 철학 과련 주제를 피한다.
탓하는 행동은 일방적이고 단정적이다. "네가 어떤 식으로 잘못했다!"라고 못 박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제 자체가 과거형이다. 반면, 기여 요인을 밝히는 행동은 상호 간에 공동으로 진행되는 노력이다. 사태가 일어난 경위를 더 폭넓게 파악하는 게 목표다. 상황을 이해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사고하자는 얘기다. 현 상황의 수많은 기여 요인을 이해하고 나면, 문제를 진취적으로 풀어나갈 출발점에 제대로 설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 견해 차이가 벌어지는 요인 하나는 당파성이다. 우리는 우리 편 내부에서조차 당파적 태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보수가 진보를 탓하거나 진보가 보수를 탓하는 행위는 외부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내부 구성원들에게 우리 편의 가치관, 그리고 상대편에 대한 불신을 정당화하는 행위다. 이로 인해 당파성은 더 커지고 진영 간의 예의는 점점 무너진다. 기여 관점으로 전환해 이 같은 폐단을 막자. 어떤 상황을 들여다봐도, 문제를 초래한 기여 체계는 알고 보면 복잡할 것이다.
우리 편의 나쁜 행동을 지적받았을 때 "그건 양쪽 다 마찬가지"라고 응수하지 않는다. 양쪽 다 마찬가지라는 말은 기여 분석에서 남 탓하기로 되돌아가는, 방어적 행동이다. 비판을 인정하기만 하고 되받아치지 말자. "맞다, 그럴 때가 있다"라고만 하자.
우리가 대화할 때 굉장히 흔히 하는 실수가 있는데, 알게 된 과정보다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무엇을' 안다고 주장하는지(믿음이나 결론)에 주목하기 쉬운데, 그보다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추론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상대방의 결론보다 인식 원리에 주목하면 큰 이점이 있다. 사람마다 남에게 이의를 제기받으면 습관적으로 나오는 반응이 있다. 자주 듣는 반론에 대해 늘 반복하는 주장이나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인식 원리에 주목하면, 자기가 결론에 '어떻게' 이르렀는지를 설명하게 된다. 입이 아프게 반복했던 메시지를 거두고 대화의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상대방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면 믿음에 도달한 추론에 질문을 제기할 때보다 상대방이 방어적 자세로 나올 가능성이 훨씬 크다. 방어벽을 쌓고 입장을 더 강하게 고수할 위험이 있다. 인식 원리에 주목하면 그런 문제가 많이 사라진다. 믿음 자체보다는 인식 원리를 캐물을 때 상대방이 위협을 덜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대화에서든 배울 수 있다'는 점은 우리가 가진 비장의 카드다. 그 카드를 활용하면 거의 실패 없이, 주제가 무엇이건 훈훈하고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상대방과 함께 진실을 모색하는 작업이 여의치 않고 상대방의 사고에 개입할 방법이 없으며 예의를 지키기 쉽지 않다면, 배우는 마음가짐으로 전환하면 된다.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한, 그럼으로써 상대방의 사고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배우는 모드를 활용하면 거의 모든 대화를 '연착륙' 시킬 수 있다. 무언가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화를 좋게 끝낼 수 있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 대화 중에 저지르기 쉬운 기초적 실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화내기
상대의 말 끊기
고의로 무례하게 굴기
조롱하거나 탓하기
비웃기
상대방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기
상대방의 주장을 듣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
상대방의 발언을 최대한 인색하게 해석하기
상대방이 질문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때 머리가 나쁘다고 공격하기
실수하거나 도움, 정보, 의견을 청하는 사람을 나무라기
상대방의 억측에 대한 비난
믿음에 대한 비판이 아닌 인신공격(예; "그런 걸 믿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타인을 '무지하다, 무능하다, 부정적이다, 말썽꾼이다'라고 간주하기
자신의 진짜 생각을 속이기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기
모르는데 '모른다'고 말하지 않기
믿음의 이유보다 믿음 자체에 주목하기(즉, 인식 원리보다 결론에 주목하기. 예를 들면 "사형제도가 정당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는 뭐가 있을까?"라고 묻는 대신 "사형은 정당한 처벌이니 살인과 달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피부색이나 기타 타고난 특성을 이유로 그 사람의 생각을 깍아내리는 발언
설득력 있는 근거를 새로 접해도 생각을 바꾸지 않기
대답을 얼버무리기(특히 상대방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메시지 전달하기
자신의 취약점을 인정하지 않기
우리 편 극단주의자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행동
상대방의 문법 실수 지적하기(짜증을 유발하는 행동이다.)
상대방의 도덕적 잘못을 질책해 상대방의 논점을 이탈하거나 흐리는 행동
말 끊기
상대의 말을 가로채어 마무리 짓기
대화를 강압적으로 요구하기
강압에 못 이겨 대화하기
대화 중에 휴대전화 보기
유명인 이름 팔기
투덜대고 불평하기
자랑하기
대화 중단을 거부함으로써 관계 악화를 초래하는 행동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가장 한심하면서도 위험한 징후의 하나는, 그 누구도 자신의 생각에 반대할 수는 없다고 믿는 개인과 집단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다. - 토머스 소웰(2018.7.30)
좋은 인간관계야말로 건강과 행복에 가장 중요한 요소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논쟁에서 이긴다고 그만큼 건강하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강한 인간관계의 기틀은 자기가 옳음을 인정받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혼자 옳으려면 혼자 살라", 자기가 옳다는 걸 인정받으려고, 상대방의 행동을 고쳐주려고, 혹은 논쟁에서 이기려고 고집을 피우다가 좋은 관계가 파탄에 이르는 예가 많다. 그냥 친구가 잘못 알고 있게 놔두자.
'프레임(틀)을 바꾼다'는 말은 표현 방식을 바꾸어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주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사안에 뭔가 다른 방식으로(이를테면 거부감이 덜 드는 방식으로) 접근해볼 수 있다. 프레임 바꾸기는 '한쪽으로 생각을 몰아가기'가 아니다. 질문이나 쟁점을 새로운 시각에서 제시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또 사안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부정적 태도를 줄이고 더 솔직하게 대화를 풀어나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래퍼포트 규칙 지키기. 상대방의 말을 재정리하고, 동의하는 점을 밝히고, 배운 점을 언급한 다음 반박한다. 상대방의 견해를 명확하게 재정리하면 내가 상대방의 견해를 이해하려고 진심으로 노력했음을 알릴 수 있다. 또 '내가 동의하는 점을 조목조목 밝힌다'는 규칙을 지키면 상대방과의 공통점을 부각할 수 있다. 이는 특히 정치, 종교, 도덕 문제에서 상대방과 의견이 갈릴 때 중요한 점이기도 하다. 그래야 공동의 기반을 다지고 협력의 틀을 유지할 수 있다. 또 합의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대화가 막히거나 분위기가 과열될 때 합의점을 되돌아보고 라포르를 형성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에게 배운 점을 언급하는 세 번째 규칙은 상호 학습과 존중의 자세를 권하는 효과가 있다. 내가 상대에게서 뭔가를 얻었음을 밝힘으로써 상대방의 모방을 유도할 수 있다. 교육 분야와 교정 분야에서는 이를 '친사회적 모델링'이라고 부른다. 친사회적 행동의 본보기를 먼저 보이는 것이다. 래퍼포트 규칙은 상호 존중과 열린 자세의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설령 상대방이 화답하지 않더라도, 이 규칙은 협력의 외양을 유지하고 내가 상대방의 의견을 중시함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래퍼포트 규칙에는 본보기 보이기, 듣기, 메신저 잠재우기, 배우기 등 앞서 소개했던 각종 기술과 전략이 총망라되어 있다. 남의 견해를 비판하거나 반박하기 전에 확실히 이해할 것을 요구하므로, 경솔과 부주의를 막는 안전장치 역할도 한다. 이 규칙은 무례한 대화를 확실히 예방해주는 수칙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사람이 무언가를 믿는 이유는 다른 근거를 접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바로 '근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일 때가 많다. 합리적 논거를 꼼꼼히 살펴서 믿음을 형성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설상가상으로, 그럼에도 자기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근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는 데 대개 서투르다. 믿음이 틀렸음을 확인하기보다는 옳음을 확인하는 데 주력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근거를 제대로 접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미 가졌거나 갖고 싶은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쏙쏙 뽑아 그것을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는 성향이 있다. 또 대부분은 믿음을 먼저 형성한 다음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논거를 찾아 나서곤 한다.
도덕적, 사회적 믿음이나 정체성 차원의 믿음을 바꾸려고 할 때, 근거나 사실을 제시하는 행동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믿음에 반하는 근거를 제시받으면 믿음을 오히려 더 확신하게 되는, 역화 효과가 있음을 잊지 말자. 역화 효과가 일어나면 상대방이 기존 믿음을 한층 더 고수하면서 대화가 교착되고, 결국 노력은 헛수고가 되기 쉽다. 역화 효과를 유발하는 주범은 다름 아닌 '사실'이다. 근거가 사람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데는 여러가지 심리적, 사회적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선한' 사람이 되련느 마음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 사실보다는 주변 사람에게서 받는 영향에 믿음의 내용이 훨씬 크게 좌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가 쓰인 문장은 상대방의 견해를 반발 없이 인정하고 있다. 그 점이 바로 '그래, 그리고' 기법의 핵심이자 강점이다. "그래, 하지만..."이라고 하면 다음에 나오는 말이 이의 제기처럼 들린다. 마치 '네 논리를 한번 방어해보라'는 주문이 되어버린다. 반면 "그래, 그리고..."라고 하면 생각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권유가 된다. 그렇게 하면 생산적 대화의 길이 활짝 열린다.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 - 심리학자 폴 에크머
분노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순환하며 증폭되기 쉽다. 그래서 대화 참여자 중 한 명이라도 화를 내면 상황은 대부분 악화한다.
화는 답답함 아니면 불쾌함에서 기인할 대가 많다. 답답함은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데 자꾸 가로막혀서 화가 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거나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게(혹은 조금이라도 신경쓰게) 하고 싶은데 잘 안 될 때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신경을 건드리면서 나도 모르게 분노가 폭발한다. 답답함이나 불쾌함이 고의로 초래되었다 싶으면 더 화가 나기 쉽다. 그러니 더욱, 상대방의 의도가 선하다고 간주하는 원칙을 잊지 않도록 하자. 대화 분위기가 격앙될 때는 기억하기 어려운 사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분노는 뭔가를 바꿔야 하는 신호다. 제대로 바꾸려면 분노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분노가 일었을 때, 우리는 대화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 쟁점을 밀어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바뀌는 사람은 '나 자신'이어야 한다. 설령 화난 사람이 상대방이라 해도 그렇다. 완전히 틀린 사람이 내가 아닌 상대방이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기분이 상한 이유는 예컨대 내가 너무 세게 밀어붙였거나 혹은 예민한 표현을 써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애초에 나와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대화에 화가 스며들었다면 이미 뭔가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화는 판단력을 흐리고 대화를 엇나가게 한다. 화는 우리를 신경계의 노예로 만든다. 모든 감정, 특히 화는 지식과 믿음과 정보를 접수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화가 나면 예의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화는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성향이 있다. 화는 화가 정당함을 확인하려는 인지 편향을 강하게 일으킨다. 그래서 꼭 화를 내야 할 이유가 없는 온갖 정보를 잘못 해석하게 된다. 특히 상대방이 나쁜 의도를 품었거나 부도덕하다고 간주하게 된다는 점에서 해악이 크다. 이를테면 "저 사람은 내 기분을 나쁘게 하려고 일부러 저런 말을 하고 있다!"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
화를 비롯한 모든 감정에는 이른바 '불응기'가 뒤따른다. 불응기에는 신경계의 작용과 일시적 감정 편향으로 인해 정보처리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불응기는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불응기는 감정이 강할수록 오래가며, 짧게는 몇 초에서 길게는 몇 분이나 몇 시간까지 갈 수 있다.
상황을 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를 꼭 익힐 필요가 있다. 타인의 생각을 움직이려면, 그 사람의 관점이 가진 힘을 공감적으로 이해하고 그 사람이 그렇게 믿는 감정의 세기를 느껴야 한다.
듣고 또 듣는다. 대화 분위기가 팽팽해지면 일단 듣는다. 다 들었으면 또 듣는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질문한다. 그리고 또 듣는다. 그런 다음 내 말을 한다.
팽팽한 긴장감을 부인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는 긴장감과 압박감, 불안감 등 부정적 감정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답답함은 부인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화'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심기가 불편한 상대방에게 화를 낸다고 표현하면 상대방은 비난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대신 '답답함'이라는 말을 쓰고 대화가 답답하다는 점을 인정하자.
속도를 늦춘다. 대화의 진행 속도를 늦추면 긴장도 가라앉는 효과가 있다.
화를 화로 받지 않는다. 상대방이 화를 내면 똑같이 맞대응하며 화를 터트리지 않는다. 특히 인신공격을 받았을 때 절대 되받아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나를 모욕하면 모욕으로 응수하지 않는다. 그러면 상황은 악화할 뿐임을 기억한다.
탓하지 않는다. 특히 격론 중에 상대방을 뭐라고 판단하거나, 악화된 상황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난 잘 얘기해보자는 건데 왜 그렇게 화를 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대화가 딴 길로 빠진 것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는 행동이며, 퇴로를 만들어주는 자세와 거리가 멀다.
상대방의 의도나 동기 또는 화난 원인을 나쁜 쪽으로 짐작하지 않는다.
안전에 위험을 느끼면 대화를 굳이 이어가지 않는다. 필요하면 구실을 내세워 먼 곳으로 자리를 피한다.
화를 극복하는 방법은 긴장을 누그러뜨리거나 대화를 중단하는 방법밖에 없다. 때에 따라서는 단 몇 분만 지나도 불응기가 지나가고 감정이 가라앉아 더 생산적이고 예의 있게 대화에 임할 수 있다. 감정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화제를 바꾸거나, 대화의 프레임을 바꾸거나, 상대방의 선의를 간주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다('뭔가 도움을 주려고 저러는 거야'라는 독백을 마음속으로 되뇌면 진정이 될 수도 있다). 인식 원리에 주목하여, 상대방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봐도 좋다. 아니면 위의 모든 방법을 결합해 내가 왜 화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긴장을 완화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사과한다. 내가 상대방의 분노에 기여한 부분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한다. "미안하다"고 말하자. 사과는 상대방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
도덕적 주제를 놓고 대화할 때는 항상 정체성 문제가 논의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도덕과 정체성의 문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차원에서 소리없이 판단이 이루어진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사람의 뇌는 자신의 도덕이나 정체성에 관한 믿음에 이의를 제기 받으면 신체적 위험에 처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타인의 도덕과 정체성에 관여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도덕적 견해가 엇갈리는 사람들 간의 차이점을 확실히 이해해본다. 상대방이 쓰는 도덕적 언어를 씀으로써 가능하면 같은 정체성을 어느 정도 공유하도록 한다.
도덕적 대화를 풀어나가기 대단히 어려운 이유는, 도덕적 믿음이란 개인적 정체성 그리고 공동체의 문제와 밀접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좋은 평판을 얻고 싶은 집단에 얼마나 긴밀히 소속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들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더군다나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소속된 공동체에서 자신의 믿음을 강화해주고 있다면, 도덕적 영역에서 대화 상대의 생각을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편리함을 주기위해 설계된 복잡하고 많은 기능은 사용상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 삶도 디자인도 자연스럽고 단순해야 한다.
[본문발췌]
좋은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두 가지는 발견 가능성과 이해다. 발견 가능성(discoverability), 즉 어떤 행동이 가능한지, 그 일을 어디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한가? 이해(understanding), 즉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제품이 어떻게 쓰라고 만들어진 것인가? 이 모든 여러 조절기와 설정이 무슨 뜻인가?
많은 제품이 잘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너무 많은 기능과 조절기가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디자이너는 즐거운 경험을 만들어 낸다. 경험이 핵심적이다. 그것이 사람들이 자신의 상호작용을 얼마나 좋게 기억할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매우 저평가되어 있다. 사실 감정 시스템은 인지와 나란히 작동하는 강력한 정보처리 시스템이다.인지는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감정은 가치를 부여한다. 상황이 안전한지 혹은 위협적인지를,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이 좋은지 나쁜지를,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감정 시스템이다. 인지는 이해를 제공한다. 감정은 가치를 판단한다. 제대로 작동하는 감정 시스템이 없는 인간은 선택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인지 시스템이 없는 인간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하나의 중요한 감정 상태는 한 활동에 완전히 몰입될 때 동반되는데, 이를 사회과학자인 미하이 칙센미하이가 '몰입(flow)'이라고 이름 붙였다. 몰입 상태는 활동의 도전 수준이 우리의 기술 수준을 아주 살짝 초과해서 충분한 주의가 지속적으로 요구될 때 일어난다. 몰입은 활동이 우리이 기술 수준과 비교해서 너무 쉽지도 않고 너무 어렵지도 않을 것을 요구한다. 지속적인 전개와 성공과 결합되는 계속되는 긴장이 때때로 몇 시간 지속되는 몰입적이고, 푹 빠진 듯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어휘에서 실패라는 단어를 제거하고, 대신에 그것을 학습 경험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실패하기는 배우기다. 우리는 성공보다 실패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분명히 성공을 하면 기분이 좋지만, 종종 왜 성공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실패를 하면 종종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고, 그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안다. 과학자들은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알기 위해 실험을 한다. 가끔 그들의 실험은 기대한 대로 되지만 종종 그렇지 않기도 한다. 이것들은 실패인가? 아니, 그것들은 학습 경험이다.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 중 많은 것이 이와 같은 실패에서 나왔다.
실패는 탐색과 창의성의 필수 부분이고 만일 디자이너나 연구자들이 가끔실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충분히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는, 즉 일의 돌파구를 제공할 훌륭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다는 신호다. 실패를 피하고 항상 안전한 길을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단조롭고 흥미 없는 인생으로 가는 첩경이기도 하다.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을 때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는 생각은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을 탓하는 이유다. 불행히도 사람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법 체계에도 내포되어 있다. 주요한 사고가 발생할 때, 책임을 평가하기 위해 심문을 위한 공식 법정이 열린다. 점점 더 자주 그 책임은 '인간 오류'에 돌려진다. 관련된 사람은 벌금을 물거나 처벌받거나 또는 해고될 수도 있다. 아마 훈련 절차가 개정될 것이지만, 법은 안락하게 쉬고 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볼 때, 인간 오류는 보통 나쁜 디자인의 결과다. 그것은 시스템 오류로 불려야 할 것이다. 인간은 계속 잘못을 저지른다. 그것은 우리 본성의 내재적 부분이다. 시스템 디자인은 이것을 고려해야 한다. 사람에게 비난을 고정시키는 것은 편안한 진행 방식일지 모르지만, 단 한 사람의 단 하나의 행동이 참사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 시스템은 왜 디자인되었는가? 더 안 좋게도, 근본적인 기저 원인을 고치지 않으면서 사람을 탓하는 것은 문제를 고칠 수 없다. 같은 오류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반복되기 쉽다.
제약은 기억을 간단하게 한다. 운율이라는 제약을 생각해 보자. 어떤 한 단어를 다른 단어와 운을 맞추려면 많은 대안이 있다. 그러나 특별한 뜻을 가지면서 운도 맞는 단어를 찾는다면, 의미와 운율이라는 제약을 결합할 수 있는 후보들의 수를 극적으로 줄일 수 있고, 가끔은 커다란 집합에서 단 하나의 선택으로 줄인다. 가끔 후보자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이 시를 만드는 것보다 시를 외우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이유다. 시는 여러 다른 형태이지만, 그 모두는 구성에 형식적 제약을 가지고 있다. 유랑하는 이야기꾼이 읊는 발라드와 이야기는, 각운, 운율, 박자, 유사음 구사, 두운, 의성어 사용 등 여러 개의 시적 제약을 쓰는데, 그러면서도 또한 들려주는 이야기와 의미가 일관되어야 한다.
생각을 단순화시키는 한 방법은 단순화된 모형, 즉 배후에 있는 진실한 사태에 대한 근사 모형을 쓰는 것이다. 과학은 진실을 다루고, 연습은 근사치들을 다룬다. 실천가들은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정확하더라도 그들이 적용하려는 목적에 '충분히 좋은' 결과를 비교적 빨리 필요로 한다.
대부분의 산업재해는 인간 오류에 기인한다. 그 추정치는 75퍼센트에서 95퍼센트 범위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무능할까? 답을 말하자면, 그들은 무능하지 않다. 그것은 디자인 문제다. 인간 오류로 비난받는 재해의 수가 1퍼센트 내지 5퍼센트라면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퍼센트가 너무 높다면 분명히 다른 요인이 관련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무엇인가가 이렇게 자주 일어날 때, 거기에는 다른 근본적인 요인이 분명히 있다.
인간 오류가 발견되자마자 이유 찾기를 중단하는 경향은 널리 퍼져 있다. 사람들이 오류를 범할 때, 시스템을 바꾸어서 그런 오류가 감소되거나 제거되도록 해야 한다. 완전한 제거가 가능하지 않을 때, 재디자인해서 그 충격을 줄여야 한다. 오류가 개인의 실패로 생각되고 절차나 장비의 나쁜 디자인의 징조로 생각되지 않는다면 인간 오류를 제거할 수 없다.
한 가지 큰 문제는 오류를 어떤 사람 탓으로 돌리는 자연적인 경향성이 오류를 범하는 사람에게 공유되어 그들은 종종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동의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후 변명에 여지가 없어 보이는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을 탓하는경향이 있다. 그것은 문제의 재발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수 모두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다른 원인은 발견되어서는 안 되는가? 만일 그 시스템이 당신이 오류를 범하도록 했을 때, 그것은 잘못 디자인된 것이다. 만일 그 시스템이 당신이 오류를 범하도록 유도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잘못 디자인된 것이다.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문제를 고칠 수 없다. 문제를 사람들 탓으로 돌릴 때, 이런 문제를 없애기 위해 디자인을 재구조화해야 한다고 조직을 확신시키는 것은 어렵다. 최종적으로 잘못이 사람에게 있으면 사람을 대체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 시스템이나 절차, 사회적 압력이 문제를 일으키고, 그 문제들은 이런 모든 요인을 다루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오류의 한 주요 원인은 시간 스트레스다. 시간은 종종 결정적인데, 제조나 화학 처리 단지나 병원 같은 곳에서 특히 그렇다. 일상 과제조차 시간 압력이 있다. 좋지 않은 날씨나 교통 체증 같은 환경 요인에 더해지면, 시간 스트레스는 증가한다. 상업 기관에서는 처리를 늦추지 않게 하는 강한 압력이 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이 불편해지고, 이것은 상당한 금전 손실로 이어지며, 병원에서는 환자 간호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 관찰자가 그렇게 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할 때조차 일을 밀고 나아가려는 압력이 상당하다. 많은 산업에서 조작원들이 실제로 모든 절차를 준수한다면, 일은 결코 완수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경계를 밖으로 민다. 자연스러운 정도보다 더 오랫동안 일한다. 우리는 동시에 너무 많은 과제를 하려한다. 우리는 안전한 정도보다 더 빨리 달린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문제없이 한다. 우리의 영웅적 노력에 대해 보상받거나 칭찬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 잘못되고 실패할 때, 이런 동일한 행동이 비난받고 처벌받는다.
오류의 발생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들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그 발생을 줄이기 위해 적절한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자료가 없을 때, 개선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오류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낙인찍는 것보다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하고 보고를 격려해야 한다. 오류 보고를 더 쉽게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목표는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오류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판정하고 그것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일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보자들은 실수보다 착오를 저지르기 더 쉬운 반면, 전문가들은 실수를 저지르기 더 쉽다. 착오는 종종 시스템의 현재 상태에 대한 애매하거나 불명확한 정보, 좋은 개념 모형의 부재 그리고 부적절한 절차에서 생긴다. 대부분의 착오는 목표나 계획에 대한 잘못된 선택이나 평가, 해석에 기인한다는 것을 상기하라. 이 모든 것은 목표의 선택과 계획을 달성하는 수단에 대해서 시스템이 제공하는 불량한 정보 그리고 실제 발생한 것에 대한 불량한 피드백 때문에 생긴다.
공학도와 경영인은 문제를 풀도록 훈련된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실제 문제를 발견하도록 훈련된다. 틀린 문제에 대한 뛰어난 해결책은 해결책이 전혀 없는 것보다 더 나쁘다. 그러므로 맞는 문제를 풀어라. 맞는 문제를 푸는 것과 그 일을 인간 필요와 능력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서구 문화에서 디자인은 시장의 자본주의적인 중요성을 반영한다. 따라서 구입자에게 매력적이라 생각되는 외적 특징을 강조한다. 소비 경제에서 맛은 비싼 음식이나 음료 마케팅의 기준이 아니며, 사용성은 가정이나 사무실 기기이 마케팅에서 일차 기준이 아니다. 우리는 사용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디자인은 과잉하고, 과부하되고, 불필요한 일의 디자인이 되는 큰 위험에 빠져 있다.
디자인은 최종 제품이 성공적일 때만, 사람들이 그것을 사고, 쓰고, 즐길 때, 그래서 그 단어를 퍼뜨릴 때 성공적이다. 사람들이 구입하지 않는 디자인은 디자인 팀이 그것을 아무리 훌륭하게 생각하더라도 실패한 디자인이다.
디자이너는 기능이란 면에서 이해될 수 있고 사용이 편리하다는 면에서, 그리고 정서적인 만족, 자부심과 기쁨을 전달하는 능력이란 면에서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을 만들 필요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디자인은 하나의 전체적 체험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공적인 제품은 훌륭한 디자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들은 신뢰성 있게, 효율적으로, 일정에 맞추어 생산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디자인이 공학적 요구 조건을 매우 복잡하게 해서 그 조건들이 정해진 비용과 일정의 제약 안에 실현될 수 없다면, 그 디자인은 결함이 있다. 마찬가지로 제조 과정이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때에도 디자인에 결함이 있다.
마케팅 고려는 중요하다. 디자이너는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길 원한다. 마케팅은 사람들이 그 제품을 실제로 사고, 사용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를 원한다. 이것들은 두 가지 다른 집합의 요구 조건이다. 디자인은 둘 다 만족시켜야 한다. 사람들이 사지 않는다면 디자인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 그것을 싫어하기 시작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디자이너는 판매와 마케팅 그리고 비즈니스 재정 부문에 관해 점점 더 많이 배우면서 더 효과적이 될 것이다.
제품들은 복잡한 생명 주기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은 기기를 쓰는 데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디자인이나 사용 설며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들이 제품 개발에서 고려하지 않았던 어떤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혹은 여러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일 이 사람들에게 제공된 서비스가 부적합하다면, 그 제품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기기가 유지되고, 수리되고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관리되는지는 그 제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영향을 준다.
오늘날 환경적으로 민감한 세상에서 제품의 완전한 생명 주기가 고려되어야 한다. 재료, 제조 과정, 배급, 서비스, 수리의 환경 비용은 무엇인가? 부품을 교체해야 할 때가 될 때, 낡은 것을 재생하거나 다른 식으로 재사용하는 것의 환경적 영향은 무엇인가?
세계적인 상호 연결, 세계적인 의사소통, 강력한 디자인 그리고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제조 방법의 등장과 더불어 세계는 급속히 변하고 있다. 디자인은 평등을 이루는 데 강력한 도구다. 필요한 모든 것은 관찰과 창의성 그리고 열심이며, 누구나 할 수 있다.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싼 오픈 소스 3D 프린터 그리고 또 오픈 소스 교육과 더불어 우리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
대규모 변화에도 많은 근본 원칙은 그대로 나마 있다. 인간은 항상 사회적인 존재였다. 사회적 상호작용 그리고 세계 도처에 다른 시간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하는 능력은 우리와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디자인 원치근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발견 가능성, 피드백, 행위 지원성과 기표의 힘, 대응 및 개념 모형은 항상 들어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동적인 기계조차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위해 이 원칙을 따를 것이다. 우리 기술은 변할 수 있지만 상호작용의 근본 원칙은 영구적이다.
데미스 허사비스는 2007년 발표한 논문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는 새로운 경험이나 상황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상상력 혹은 창의성은 기존에 없던 생각이나 개념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인간 고유의 능력이라고 한결같이 여겨져 왔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 어딘가에 이것만을 관장하는 영역이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그 영역은 기억이 저장되는 곳과 동일했다.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라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새로운 것도 결국 기존의 저장된 기억들로부터 나온 것일 뿐이었다. 창의성은 기억에서 온다. 이 논문은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의 세계 10대 과학 성과로 선정되었고, 훗날 수십만 장의 기보를 집어넣은 알파고는 저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매우 창의적인 수를 두게 되었다.
이세돌의 가장 큰 승리는 알파고로부터 따낸 1승이 아니라, 네 번의 패배마다 홀로 복기를 시도했다는 인간성에 있다. 알파고를 뛰어넘는 또 다른 인공지능과 대국을 해도 이세돌 9단은 복기할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인류가 갖는 가장 위대한 차별점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것이 정말 있다면, 바로 시간일 것이다.
미국의 신경학자 피터 망간Peter Mangan 박사는 청년, 중년, 노년으로 세 가지 그룹을 만들어 각자 마음속으로 3분을 세게 한 뒤 실제 흘러간 시간과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청년 참가자 대부분은 정확한 시간 길이를 맞혔지만, 60대 이상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더 긴 시간을 3분으로 느꼈다. 체감 시간이 더 빠르게 흘렀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입학식 때는 등굣길이 정말 멀게 느껴졌지만, 반복적으로 학교에 가보면 걸리는 시간이 점점 더 짧게 느껴진다. 젊을 때는 새로운 학습이나 보상 과정에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된다. 쉽게 말해서 외부 자극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것인데, 많은 생각들이 정신 없이 생겨나니 상대적으로 외부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도파민의 분비가 줄어들고 반복된 일상 속에서 특별한 자극도 점점 줄어들어, 예전처럼 뇌는 세상을 새롭게 느끼지 못하고 별다른 보상도 받지 못한 채로 하루하루 비슷하게 살아간다. 인지하는 세월은 그렇게 빨라진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시간은 보통 일정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그뿐이다. 스위스 장인의 명품 시계처럼 시간이 얼마나 정교하게 흘러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흘러가는 이 시간 위에서, 주어진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곳곳에 숨겨진 경이로움을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을가가 관건이다. 늘 신선한 자극을 주는 과학도 좋고, 철학이나 예술이어도 문제없다. 아니면 당장 내일 아침 출근길부터 처음 가보는 경로로 이동해 보면 어떨까? 손바닥만한 화면에 얼굴을 묻는 대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관찰해 보면, 아마 첫 출근길만큼 느껴지는 여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늘 새로운 생각을 해보자. 낯선 기억이 시냅스에 저장되는 과정에서 도파민이 대량 분비되기에, 시간은 점점 느려질 것이며 하루를 이틀처럼 보내게 될 것이다.
뇌에는 기억이 저장되는 시냅스라는 부분이 있는데, 뇌세포들의 의사소통을 위해 연결된 길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시냅스가 복잡하게 연결될수록 기억이 단단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수녀들의 시냅스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복잡한 연결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생각하며 뇌를 관리해 왔다. 기억을 하나의 시냅스에만 저장하지 않고 새로운 시냅스를 계속 연결해 가며, 알츠하이머병으로 일부 연결이 끊어져도 나머지 시냅스로 마치 벤치의 후보 선수들처럼 뛰쳐나가 그 자리를 채워준 것이다.
우리 뇌는 수면 중에 불필요한 기억이 담긴 시냅스의 연결은 아예 끊어버리고, 특정 기억에 대한 시냅스는 유연하게 만들어서 기억 회로를 강화한다. 일종의 기억의 가지치기를 통해 중요한 건 살리고 버릴 건 버리는 것이다.
수명을 늘리는데 집중하느라 늘어난 수명만큼의 시간을 쉽게 지나쳐 버릴지도 모른다. 결국 죽지 않고 오래 사는 최대의 삶보다 더 중요한 건, 살아 있는 동안 후회 없는 최선의 삶이 아닐까.
우리 몸의 수많은 복잡한 동작 역시, 신경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뇌의 미세한 전기신호가 온몸에 퍼져 있는 근육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 몸은 전기로 가동되는, 생명공학 기반의 생체 로봇인 셈이다. 따라서 뇌가 일할 때마다 뇌파가 발생하며, 뇌파를 측정한다는 것은 뇌 활동을 측정한다는 의미다. 뇌파를 통해 잠을 자고 있는지 아니면 깨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뇌의 기능에 이상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우주에서는 거리를 시간으로 표현한다. 우리 역시 예정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묻는 전화에, 몇 분이 남았는지 시간으로 답한다. 거리와 시간이 교차하는 상황은 우주처럼 드넓은 공간에서 사용하기 더욱 편리하다. 우리는 더 멀리 볼수록 과거를 보며, 파장이 긴 적외선으로는 훨씬 더 멀리까지 볼 수 있다. 그래서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은 허블 우주망원경보다 더 먼 과거를 볼 수 있고, 최초의 별이나 은하를 연구할 수도 있으며 이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죽어가는지, 그리고 외계 생명체 탐사나 생명의 기원도 연구할 수 있다.
주어진 공간 안에서 가능한 경우의 수가 작다면 엔트로피가 낮다고 표현하며, 반대일 경우 엔트로피가 크다고 한다. 자연에서 존재하는 모든 변화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특히 우주 역시 물질과 에너지의 출입이 없이 고립된 거대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기에,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는 늘 증가한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항상 움직이며 한쪽으로 향하는 기준이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우주적 흐름'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바로 시간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 역시 언젠가 우주 전체에 고르게 퍼질 것이며, 가장 높은 확률을 갖는 형태에 도달하고 나면 더는 변하지 않는 채로 멈출 것이다. 우주 종말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이 개념이 있다면 아마도 엔트로피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정보는 보거나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어제 서울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주식이 떨어지고 있는지, 친구가 머리카락을 어떤 색으로 염색했는지, 이런 모든 게 다 정보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정보는 좀 다르다. 그들에게 정보란 모든 입자의 양자적 특성인 '양자 정보'가 보다 익숙하다. 책의 정보는 제목이나 내용이 아닌, 책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어디에 어떤 구조로 모여 있는지, 얼마나 빠른지, 어떻게 도는지와 같은 양자 정보를 의미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이러한 양자 정보를 갖는 입자들로부터 만들어진다. 크루아상과 수제비는 둘 다 밀가루로 만들지만, 어떤 조리법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이 된다. 여기서 조리법을 정보라고 볼 수 있다. 탄소라는 입자도 나열하는 방법에 따라 연필심이 되거나 다이아몬드가 된다. 심지어 다른 입자와 섞어서 아주 복잡하게 구성하면 사람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정해진 수십가지 입자들만으로 이루어지지만, 어떻게 나열하는지에 따라 전혀 새로운 것이 된다. 이걸 해내는 녀석이 바로 정보다. 만약 입자들 사이의 특수한 관계인 정보가 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면,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그저 똑같이 떠도는 입자일 뿐이다. 우리 인류도 마찬가지다. 정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현대물리학의 기반이 되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법칙을 만들었다. 정보는 어떠한 경우에도 파괴되지 않으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의 총량은 반드시 보존된다는 것이다. 책이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더라도, 원래 정보는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 책에 가해진 에너지를 꼼꼼히 계산하고 입자를 하나하나 모아 재구성하는 게 가능하다면, 책을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정보는 절대 파괴되지 않고,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책의 정보가 굉장히 해석하기 어려운 정보로 형태가 바뀐 것뿐이다.
"과학자가 자연을 연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을 좋아하기 때문이며,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자연이 아름답지 않다면 연구할 가치가 없을 것이며, 자연이 연구할 가치가 없다면 삶 또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 앙리 푸엥카레
과학에서 '실패'라는 것은 때로는 패러다임의 전환 이후에 과거를 질책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인류는 짧은 과학의 역사 동안 크고 작은 변화를 경험해 왔다. 낡은 이론과 학설들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며,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지난 잘못들을 실패라고만 보기에는 어폐가 있다. 과학은 쏟아져 나오는 실패들 속에서 합리적인 이론을 구축해 나가야 하며, 수정이 필요한 기존 논리들 역시 패러다임 변화의 1등 공신이다.
과학은 진리가 아니다. 과학에서의 실패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실패가 아닐 수도 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무한히 접근해 가는 과정을 실패라고 한다면, 모든 실패는 또한 목적지로 오르기 위한 비상계단일 것이다. 결국 누구도 해보지 못한 시도를 하고, 그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찾는 것이 바로 과학에서의 숭고한 실패의 정의다. 과학은 실패를 위한 학문이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도 끝없이 시도된 실패로부터 태어났다.
새롭게 정의된 관점에서 보면, 실패한 과학자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한 과학자는 없었다. 심지어 그들 누구도 자신의 접근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에서 유일한 '실패'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상태이며, 혹시라도 '실패하나 과학자들'이라고 불릴 만한 역사의 영웅들조차 새로운 통로를 열기 위해 힘차게 벽을 두드렸던 개척자들로 기억해야 한다.
양심과, 공감능력, 균형감을 통한 설득, 소통, 통합으로 갈등을 조정하는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를 세우지 못한다면 사회는 혼란과 분열속에 후퇴하게 된다.
[본문발췌]
"인간에게는 기본 의식주를 충족하고자 하는 절대적 욕구와 남들보다 우월해 보이고 싶어 하는 상대적 욕구가 있다. 인간이 상대적 욕구를 지나치게 탐닉할 때 자본주의 체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공간이다. 인간에게는 남보다 우월해지고 싶고 남들과 비교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사회 체제가 공정하지 않으면 사회는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로 가득 찬다. 그런 사회로 가면 우리는 더욱 불안정해진다."
우리는 스스로의 뿌리의 힘, 디지털 공간에서 연결된 힘,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공감의 힘, 창의적인 인간이 되고자 하는 상상의 힘으로 작은 혁신을 매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폴 새뮤얼슨은 '행복은 욕망 분의 소유(행복=소유/욕망)'라고 단순하게 정의했다. 소유한 것이 많더라도 욕망이 더 크면 행복하지 못하고, 소유한 것이 적더라도 욕망이 더 적다면 행복해진다. 아무리 개인의 소유가 늘어도 욕망이 도를 지나쳐 탐욕이 되면 불행하다.
모든 불행은 비교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서로 비교하는 상대적 욕구에 지나치게 탐닉할 때 개인도 사회도 불행해진다.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누리는 부를 손가락질하는 것은 보상의 원리가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옳지 못하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시원하게 인정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이롭다. 다만 IMF나 OECD에서 주장하듯 부의 양극화와 분배의 불평등이 경제성장을 저해한다고 말하는 일각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원리가 공정하지 못하고, 소수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소유하는 것은 정당성을 떠나 그 옛날 애덤 스미스가 동경하고 추구했던 건전한 세상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폴 새뮤얼슨이 말하는 행복 방정식을 조금 변행해 보자. '행복은 기대 분의 실현(행복=실현/기대)'이라고 하면 어떨까? 기대가 일정하다면 실현이 커질수록, 실현이 일정하다면 기대가 적을수록 행복해지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인 충족과 균형되게 좋은 감정으로 충만해야 이루어진다. 우리는 재미, 가치, 보람, 평온, 안정, 의욕, 존중, 희망이란 단어를 얼마나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풍요로운 삶은 물질 못지않게 행복이 아주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것에서도 올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온다. 영어로 현재와 선물 모두를 나타내는 단어가 프레전트(Present)인 이유를 새뮤얼슨의 행복 방정식이 말해주고 있다.
책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는 패스트푸드의 효율성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효율성, 예측 가능성, 계산 가능성, 통제 가능성이라는 네 가지 합리성 원칙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현대사회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만든 지도 오래다. 책의 저자인 조지 리처(George Ritzer)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막대한 이익을 제공하는 맥도날드화의 이면에는 합리성이 초래하는 불합리성이 존재하고, 인간 자체를 비인간화시키는 폐해가 발생한다고 비판했다. OECD 사회 신뢰도에 따르면 한국은 저신뢰국에 속한다. '믿을 사람이 없다'(OECD 35개국 조사국 중 23위), '사법 시스템도 못 믿겠다'(34개국 중 33위), '정부도 못 믿겠다'(35개국 중 29위)라는 답을 보면 우울하다. 경제성장, 구조개혁, 선순환 체제로의 전환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신뢰가 중요하다. 여기에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왜 정부당국에 신뢰이 기본인 예측 가능성, 지속 가능성, 공정성 등 모든 점에서 바닥에 가까운 점수를 매길까. 협력과 동업 대신 무한경쟁 속에서 각자 제 살길을 찾는 식의 '각자도생'이 팽배해서가 아닐까.
아마르티아 센에게 진정한 발전이란 자유의 증진을 말한다. 발전을 논할 때 소득이나 부의 증대가 아닌 자유의 증대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자유야말로 곧 역량이다. 그는 국가가 각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제도를 제대로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한 사람이 어떤 사업을 하고 싶을 때 그 사회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다면 좀 더 자유로운 국가로 본다. 그 사람이 사업에 성공해서 그 이윤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시장의 자율성과 민주주의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소득이나 부를 키울 수 있는 데까지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짚었듯이 이런 것은 '단지 쓸모 있는 연장'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경제성장을 경제학의 지고지순한 목적으로 다룰 수 없다고 봅니다. 경제발전이란 우리 삶과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키우는 것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자유란 우리 삶을 더욱 넉넉하고 너그럽게 만들어 장애를 줄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품은 뜻을 이루게 하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해주는 힘입니다."
경제 발전의 목적은 자유로워지는 데 있으며, 다양한 삶을 살아갈 힘을 갖출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왜 어떤 이의 삶은 희극이고, 어떤 이의 삶은 비극일까? 희로애락의 연속인 인생에서 어떤 이는 고난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삶을 낙관하며, 크든 작든 '목표'를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가족애 같은 소소한 가치를 추구하든, 사회 정의나 인류의 평화를 위해 살아가든, 그들에게는 삶의 나침반과도 같은 목표가 있다. 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삶의 목표를 세우지만 그것을 이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살아가는 동안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러니 평생의 과업을 하나라도 이루고 이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투자의 세계에서 리스크의 가장 큰 원천은 시간이다. 시간은 항상 그것이 지닌 가치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도록 만든다. 미미하게 평가된 리스크도 레버리지가 커지면 엄청난 손실로 다가올 수 있다. 위험이 낮은 실물은 계속 보유하면 그만이지만 시간이 정해져 있고 과도한 차입을 한 상품은 어쩔 수 없이 팔도록 강제되기도 한다. 우리는 경제에서나 인생에서나 '시간과 차입'이라는 리스크를 발생시키는 요인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무엇보다 중시해야 한다.
"은퇴 후 목표 수입을 정해 놓고 개개인에 맞춤화된 은퇴 계획을 짠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안전자산과 위험자산이 나누어진다. 인생에서 중대한 변화가 생기면 그에 맞게 목표를 조절하고 투자 계획도 변경하면 된다. 자신이 원하는 은퇴 소득을 얻기 위한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다. 더 오래 일하거나, 더 저축하거나, 더 많은 리스크를 감당하는 것이다."
투자에 성공하려면 결국 욕망을 절제하고 자신만의 투자 원칙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로버트 실러는 탐욕이 두려움을 압도할 때 비이성적인 거품이 생긴다고 말한다. 나아가 심리적 공포가 지나치면 세계경제를 침체 국면으로 내몰 수 있다고 본다. 그는 경제 현상의 발로를 인간의 심리로 보고, 그에 따라 진단하고 예측하는 경향이 강한 편이다.
기업의 목표가 여러 개 있다고 하더라도 돈을 잘 버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가의 목표는 다양하기에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정책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국가경영은 기업경영과 달리 어느 한 목표를 포기하는 게 어렵고 다양한 이해 당사자가 존재하기에 딜레마에 봉착한다. 정책 목표가 상충관계에 있을수록 그 딜레마는 커진다. 정책의 수혜자가 있는 반면 손해를 입는 계층도 생기기 때문에 조정이 필요하다.
정책의 효과에 대해 비용 편익 분석을 제대로 해 비용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의 설득, 소통, 통합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국가의 경우 기업처럼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CEO의 지휘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대신 목표가 다양하고 정책에 대한 상반된 의견이 있을 수 있으므로 여러 가지를 아우르는 능력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사회 각 부분에서 발생하는 이해관계, 상충관계를 제대로 조정하고, 기득권층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압박하는 것에 굴하지 않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능력이 그래서 절실하다.
현대사회에서 국가 지도자에게 특히 요구되는 덕목이 다양한 목소리를 아우르고 갈등 관리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그게 국가경영이 기업경영보다 어려운 이유다. 국가의 수반은 적절한 균형의 합의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최적의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을 아우르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유연하고 뚝심 있는 인내의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갈등을 유발하지 않고 적절히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임스 헤크먼에게 삶이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향상시키는 과정이었다. 수학 문제를 풀고 음악을 즐기고 사람들과 제대로 교제하기 위해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그런 지적, 사회 정서적 능력을 종합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삶의 의미를 둔 것이다. 그는 IQ도 중요하지만, 양심과 동기부여 역시 인생을 멋지게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지능력에 치우친 교육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사회정서적 관계 능력을 균형 있게 배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느끼는 사실이다. 실제로 직장에 들어가면 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성공은 성실성, 창의성, 자제력 같은 인성에 더 크게 좌우될 수 있다.
아이들에게는 꿈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남을 밟고 일어서는 그런 왜곡된 경쟁의 자유가 아니라, 자신감과 여유를 갖게 하는 자유의 정신을 불어넣어야 한다. 부모와 사회가 아이를 어릴 때부터 마음의 여유를 잃고 살아가게 만든다면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글러스 노스는 제도가 소수의 엘리트나 정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회 내 믿음과 신념 체제가 제도를 형성한다고 보고, 사람들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는가를 중시했다. 노스가 1990년 출간한 <제도, 제도 변화, 경제적 성취>라는 책을 보자. 그는 여기서 정치, 제도, 경제적 성취를 분석하면서 국민이 정치를 완벽히 감시하지 못하면 그 결과 나쁜 제도가 계속된다고 보았다.
"역사를 보면 새로운 혁신은 새로운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공공재는 특정인에게 소유권이 없어 구성원 누군가가 이용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기에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한다. 지하자원, 공기, 물 같은 공공재를 시장경제에 맡겨놓으면 사람의 이기심 때문에 공공재 생산과 소비는 비효율을 초래하고 좋지 못한 결과가 발생한단는 것이 공유지의 비극의 결론이다. 오스트롬은 시장이나 정부가 아닌 지역 주민이나 공동체가 공유재산을 맡아야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하고 자원 고갈도 막을 수 있으며, 시장 만능의 위험을 피하고 정부의 비효율적 통제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달라진 세상에서 역동성은 자유와 창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집단주의로 인한 역동성 고갈을 극복하는 것이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의 숙제라고 에드먼드 펠프스는 외치고 있다. 혁신은 풍요로움의 원천이고 안정성만 추구하는 삶은 전진이 없다.
물리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바다 길목을 통제하는 힘이 하늘을 넘어 우주로 확장된다.
[본문발췌]
<1권> 지구상의 서로 다른 지역의 서로 다른 지리적 특성들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는 지배적인 요소들에 포함된다. 넓게 말하면, 지정학geopolitics은 지리적 요인들을 통해 국제적 현안을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여기에는 산맥 같은 천연의 장애물이나 하천망의 연결 같은 물리적 지형뿐 아니라 기후, 인구 통계, 문화지역, 그리고 천연자원에 대한 접근성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요인들은 정치, 군사 전략부터 시작해서 언어, 교역, 종교 등을 포괄하는 인류의 사회적 발전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명의 여러 국면에 중대한 충격을 가할 수도 있다.
중국은 일종의 <지정학적 공포>가 있다. 만약 중국이 티베트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 언제고 인도가 나설 것이다. 인도가 티베트 고원의 통제권을 얻으면 중국의 심장부로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전초 기지를 확보하는 셈이 되는데 이는 곧 중국의 주요 강인 황허, 양쯔, 그리고 메콩 강의 수원이 있는 티베트의 통제권을 얻는 거나 다름없다. 티베트를 <중국의 급수탑>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에 버금가는 물을 사용하지만 인구는 다섯 배나 많은 중국으로서는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중국에게 신장 지구는 전략적으로 몹시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8개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그래서 중국 심장부의 완충지 역할을 하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다량의 원유가 매장돼 있을 뿐 아니라 중국 핵무기 실험장도 이곳에 있다. 중국인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서구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서구인들의 사고에는 무엇보다 개인의 권리라는 개념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반면 중국인들의 사고에서는 <집단>이 개인에 우선한다. 서구가 인간의 권리로 여기는 것들을 중국 지도층은 다수를 위험에 빠뜨리는 위험한 이론으로 여긴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개인 이전에 대가족이 우선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중국인들이 많다. 중국 선박들은 태평양을 향하든 인도양을 향하든, 남중국해를 나서는 순간부터 여전히 난관에 직면한다. 하지만 중국에게 가스와 원유를 수송하는 이 물길이 없다면 중국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중국으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항로를 지켜야 한다. 자국의 상품들을 시장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그 상품들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원자재, 즉 언유, 가스, 귀금속 등을 들여오기 위해서도 말이다. 따라서 봉쇄당하는 경우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이 경우 외교가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겠지만 몸집을 불려가는 자국의 해군력 또한 다른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선의 보장책은 뭐니 뭐니 해도 파이프라인, 도로, 그리고 항구들이다.
금세기에 치명적인 게임은 향후 중국과 미국, 그리고 그 지역 다른 국가들이 체면을 잃지 않고 서로 분노와 원망의 우물을 깊이 파는 법 없이 위기를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특히 전쟁 시절을 겪어보지 않고 현재의 위기를 맞는 이들은 유럽의 통합이 무슨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유럽은 지난 65년 이상 유례없는 평화의 시기를 누려왔다. 비록 우리 앞에는 여전히 극복해야 할 문제와 난관이 있지만 해답은 그것밖에 없다. 평화 말이다." - 헬무트 콜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두 거대 공룡들은 경쟁 관계이긴 하나 다양한 차원에서 협력도 이어가고 있다. 장기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을 벗어나려는 유럽 국가들의 야심을 모를 바 없는 모스크바는 그 대안으로 중국을 기대하고 있다. 일단 구매자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중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두 나라의 소통은 대체로 화기애애한 가운데 이뤄지고 있다. 모스크바 대공국을 시작으로 표트르 1세, 스탈린, 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문제들에 직면했다. 통치 이념이 전제주의든, 공산주의든, 정실 자본주의든 간에, 항구들은 반드시 얼어붙었고 북유럽평원은 여전히 평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금세기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번 싸움은 두 개의 장에서 펼쳐진다. 먼저 자원 쟁탈전의 경우 익히 알려진 대로 바깥 세계의 관심과 참견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내부 패권 쟁탈전이 있다.
미국은 자국의 에너지 수입 요구가 감소함에 따라 중동 지역에서 정치적, 군사적 투자의 규모 또한 줄여가려 한다. 미국이 손을 뗀다면 중국이, 보다 적게는 인도가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할지 모른다. 중국은 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란 등지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전 세계 차원에서의 시나리오는 강대국들 수도에 있는 통치자들의 관저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사람들의 상상력과 요구, 희망, 필요, 그리고 그들의 삶 가운데서 그 게임이 펼쳐질 것이다.
모든 주권 문제는 동일한 욕망과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들은 군대와 상업적 운항을 안전하게 확보하고픈 욕망과 자기가 잃어버린 곳을 남들이 차지할지 모르는 데에 따른 두려움일 것이다. 최근까지도 풍부한 자원의 보고는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북극 지방의 얼음이 녹자 그 이론은 실현 가능한 것이 되었고 일부에선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이 지역의 얼음이 녹자 지리는 물론 지역의 말뚝마저 바뀌어 가고 있다. 이제 북극권 국가들과 거대 에너지 기업들은 이 변화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지, 또 북극 지방의 환경과 주민들에게 얼마만큼 관심을 쏟아야 할지를 놓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에너지에 대한 갈망은 일부 전문가들이 뉴 그레이트 게임이라 불렀던 경주가 불가피하게 이곳에서도 이뤄질 수 있음을 예상케 한다. 어쩌면 이곳은 국가들 간이 또 다른 전쟁터로 바뀔지 모른다. 다른 나라에 대한 공포 때문이든 싸움은 시작됐다. 하지만 북극은 또한 다르다. 즉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제로섬 방식의 게임이 얼마나 게걸스러운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부분적으로 지리적 결정주의에 기반을 둔 신념이 인간 본성과 결합해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주장은 나름의 근거가 있다. 하지만 현대 기술이 우리를 <지리라는 감옥>에서 탈출시켜준 사례들도 있다. 그리고 이 기술을 만든 것은 우리 자신이기에 이 새로운 세계화 시대에 그 기술을 북극에서 기회를 얻는데 사용할 수 있다. 인간 본성의 탐욕스러운 부분을 극복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되는 <그레이트 게임>을 할 수 있다.
우리가 별에 도착했을 때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온 도전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서로 힘을 모아야 한다. 러시아나 미국, 중국인의 자격으로가 아니라 인류의 대표로서 우주를 방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중력이라는 족쇄만을 겨우 풀었다. 게다가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갇혀 있다. 타인에 대한 의심과 자원을 탐하는 원초적 경쟁이 형성한 틀 속에 말이다. 우리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2권> 지리는 인간이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것을 제한하는 주요한 요소다. 물론 정치인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지리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한다. 현재와 미래에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은 그들의 물리적 배경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어느 나라든 그들의 이야기는 이웃 나라들, 바닷길, 천연자원 등과 관련된 그 <위치>에서 시작된다.
"그 사람들이 여기 살고 있다. 나는 그들이 거의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주 작은 것에도, 아니 아무것도 없는데도 만족하는 사람들...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하지도 않고, 심지어 유럽인들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없어도... 그들을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적은 것을 바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유럽인들은 이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우리만치 너무도 많은 것을 점점 더 바라고 있는데 말이다." - 조지프 뱅크스
그리스는 더 이상 영국, 러시아 또는 미국의 것일 필요가 없다. 그리스는 그리스다. 그런데도 또 다시 이 나라는 중요한 부동산이 되었다. 위기 상황에 처한 러시아 해군이 흑해에서 탈출해야 할 때 그리스는 2차 방어진지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는 유럽의 난민 위기 최전선에 있는 데다 동부 지중해에서 나오는 가스 파이프라인의 핵심 경로가 될 운명으로 보인다. 이 세 가지 이슈 모두 가까운 장래에 전략적 사고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가 나토와 화해하려는 징후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리스는 수많은 이주민들과 난민들을 앞으로도 몇 년씩이나 수용해야 할 것이며, 터키와의 해묵은 적대 관계가 개선될 여지는 보이지 않으니 잠재적인 군사 행동 가능성도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사헬. 기후변화, 사막화, 폭력의 악순환. 일단 가뭄으로 땅이 말라서 소나 양을 치기 어려워지면 유목민들은 새로운 도시나 시골을 찾아 들어온다. 여기서 그들은 <외부인>으로 취급받고 그 지역 농민들과 이해가 충돌하면서 여기저기서 폭력사태가 발생한다. 이러한 사태를 유발하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가 기후변화다. 테러와 마찬가지로 기후변화 또한 국경을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는 무한하다. 더불어 그 가능성 또한 무한하다. 공상과학 소설이 그토록 재미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현재의 지식에 구속돼 있으면서도 그 지식으로 인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비록 현재까지의 역사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지만, 그리고 구속돼 있다는 것은 우리의 지식으로는 광대한 우주 전체를 아우를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연법칙의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땅과 바다의 위대한 발견들은 대부분 비슷한 결말을 맞았다. 경쟁, 힘겨루기, 승자가 규칙을 정하고 선을 긋는 것 말이다. 이 장면을 우주로 옮긴다면, 이제껏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는 현재는 쫓겨날 소유주가 없고 위험을 부담하면서 모험을 감행하고 투자하는 측은 이익을 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펼칠 수는 있겠지만 이제는 지구에서의 모든 분쟁과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 대한 책임을 폭넓게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바로 기후변화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비록 우주에서 무한정으로 풍부한 에너지와 자원을 찾아낸 강대국들이 그것을 지구로 가져올 수 있다 해도 그것을 나누는 것은 우리의 공통된 관심사다. 전 세계인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이곳에 남아 있는 자원은 유한하고 그것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분쟁을 촉발하고 있지만 우리 위, 저 높은 곳에는 3554 아문이라는 소행성이 있다. 그곳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니켈, 코발트, 철광석과 여러 광물의 가격만 해도 20조 달러, 즉 미국의 GDP(2018년 기준)에 맞먹는 양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나눌 수 있을 엄청나게 많은 것 가운데 하나다.
"모든 혁신적인 생각들은 그 비판자들의 관점에서 규정되는 세 가지 국면을 통과해야 한다. 첫째, 결코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그냥 허구다. 둘째, 실현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봐야 별반 소득이 없다. 셋째, 내가 그건 좋은 생각이라고 내내 말해 오지 않았던가." - 아서 C. 클라크
우주는 그 무한대 속으로 우리 인간의 정신이 뻗어나갈 기회를 주고 있다. 인간은 늘 위를 바라보았고 깜깜한 밤하늘의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면서 꿈을 꾸어왔다. 실제로 우리는 높은 곳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높이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서로 힘을 합친다면 훨씬 빨리 도달할 수 있다. 우주에는 한계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