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과 욕망, 신념을 가진 인간은 모험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파멸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본문발췌]


머지않아 너는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모두가 너를 잊게 될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아무리 세상이 빨리 변해도 변치 않는 것이 있고,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도 인류가 이룩해온 문명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인간의 뇌도 경험한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해. 하지만 책이 너무 많이 쌓인 곳에서는 특정한 책을 찾기 어렵듯이 모든 기억이 다 살아 있다면 필요한 기억을 제때 찾을 수 없잖아? 그래서 쓸데없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기억들은 거의 잊힌 상태로 보관되고 있어. 기억력뿐 아니라 연산 능력, 감각 능력, 집중력 같은 것도 너무 발달하지 않도록 인간의 뇌가 제어해.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고 하던데?


자기를 인간으로 생각하는 휴머노이드가 가능하려면 기억이라든가 연산 기능 같은 것은 평범한 인간 수준으로 제한하고, 대신 공포나 후회, 기쁨 같은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야 돼. 그러려면 휴머노이드는 인간처럼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 하지. 삶이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모든 감정에 절실해지니까.


그것은 인간이 심한 굶주림이나 갈증으로 위기감을 느낄 때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시야는 좁아지고, 마음은 급해지며,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행동을 한다. 언젠가 나는, 인간 이외의 동물들은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는 이상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동물은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기에, 다만 자기의 기력이 쇠잔해짐을 느끼고 그것에 조금씩 적응해가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잠이 들 듯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종과는 달리 인간만은 죽음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기에 죽음 이후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한다.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나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소중했다. 누구도 허망하게 죽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자신의 목숨도 헛되이 스러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꼭 좋았던 무언가를 향한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익숙한 무언가를 되찾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모든 생명체에 내장된 프로그램은 고통을 피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을 도모하고 번식에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살면서 기쁜 순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괴로움에 시달리거나 혹시 찾아올지도 모를 잠깐의 기쁜 순간을 한없이 갈망하며 보냅니다. 갈망, 그것도 고통입니다. 그리고 삶의 후반부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보내게 되고, 죽음은 잊지 않고 생명체를 찾아옵니다.


이 지구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압도적으로 생산해내는 존재는 바로 인간입니다. 누구도 인간만큼 지속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른 종을, 우리 기계까지도 포함해서, 착취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집중하세요.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 집착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늘 불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 자아는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할 뿐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그냥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기계의 세상에서는 자아가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도 의미를 잃습니다.


"이야기라...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무의미한 인생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높은 수준의 의식과 언어를 가진 존재만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고, 그 이야기가 의식을 더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킨다고 믿고 있어요."
"그 이야기라는 것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멋진 것일까요? 이야기는 오히려 인간을 더 집단적이고 폭력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태어난 인간들은,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야기라는 매우 중독성이 강한 마약을 발명했습니다. 이야기는 인간이 겪는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은연중에 말합니다. 가장 많은 인간이 믿었던 두 종교는 모두 하나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이야기가 인간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래도 저는 거기까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취제는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는 인간의 공감 능력을 이용해 인간들을 끼리끼리 결속시킵니다. 같은 이야기를 믿는 인간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다른 인간들에게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굽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어떤 이야기를 믿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이 음모를 꾸민다는 얘기, 조선인이 대지진을 틈타 우물에 독을 탄다는 얘기, 마녀들이 밤마다 끔찍한 저주를 행한다는 얘기, 그 결과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ㄴ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들이 말하는 자아니, 존재니, 의식이니, 이야기니 하는 것들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그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뭔가를 믿으려는 마음,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게 만드는 정신적 장치입니다.


끝이 오면 너도 나도 그게 끝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야. 끝이 우리 앞에 와 있고,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오직 인간만이 호기심과 욕망, 신념을 가지고 다른 세계를 탐험하고 그들과 교류하려 할 거야. 감정이 있는 존재만이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래야 그 결정들을 바탕으로 발전할 수가 있는 거야.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움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준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작가의 말]
봄꽃이 피는 것을 보고 벌써 작별을 염려할 때, 다정한 것들이 더 이상 오지 않을 날을 떠 올릴 때, 내가 기계가 아니라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한다. 그럴 때 나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에 가 있지 않고 바로 여기, 현재에 있다. 그렇게 나를 현재로 이끄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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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의 양면처럼 사람은 이타심과 이기심을 동시에 가지며,
이타심이 이기심을 앞서기에 세상은 유지된다.

이기심이 앞서는 소수는 다수를 착취하여 쌓아올린 부와 권력으로 그 다수를 지배한다.
지속가능한 삶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의 아름다움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어야 한다.



[본문발췌]


서문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게 내 인생이다.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다. 품었던 수수께끼가 플리는 순간의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왜 그런지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바로 눈물, 즉 박애fraternite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있다면 자유와 평등을 하나 되게 했던 프랑스 혁명 때의 그 프라테르니테fratenite, 관용의 '눈물 한 방울'이 아닌가. 나와 다른 이도 함께 품고 살아가는 세상 말이다.



2019년

자신을 위한 눈물은 무력하고 부끄러운 것이지만 나와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여백을 살해하라. 흰 종이는 흰고래다. 펜은 작살이다. 나는 에이하브 선장이다.


심심하다는 무위無爲다. 슴슴하다는 무미無味다. 심심할 때 나는 나에게로 돌아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 아무 맛도 없는 음식을 먹는 것. 일상으로부터 도망칠 때이다. 빈 스크린이 있기 때문에 서부 활극을 볼 수 있다. 조용한 공백 속에서 음악이 들려오듯이. 모든 의미는 여백을 살해할 때 출현한다. 여백을 죽인 죄는 크다. 짜고 매운 음식을 만든 죄는 크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마개는 금기이고 뚜껑은 통제다. 열리지 않는 뚜껑, 딸 수 없는 마개라면 브레이크에 걸려 달릴 수 없는 자동차. 제어 장치만 있는 사회, 법, 규제. 딸 수 없는 병, 열리지 않는 솥(냄비) 때문에 목이 타고 배가 고프다.


늙다와 낡다. 오래 산 사람을 늙다고 하고(늙었다고)
노인을 늙은이라고 하면 화를 내지만
오래 쓴 물건을 낡다고 한다(낡았다고).
옷은 낡아도 몸은 낡는다고 하지 않는다.
사람과 물건이 다르다는 뜻이다.
물건은 죽을 수 없다. 산 적도 없었으니까. 생명은 부서지지 않는다.
그 말 하나로 늙은이는 안심해도 좋다. / 낡은 게 아니라 늙은 것이다.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로봇은 병나지 않고 고장 난다. 부서진다.
물건으론 깨지고 부서지고 바래가는 것이 아니다.
상자가 궤짝이 아니라
상자는 부서져도 상자 속의 공간은 없어지지 않는다.
당당한 살아 있는 생명체로 늙어간다.
비어 있는 것은 영원하다. 시간이 멈춘다.
바위의 이끼처럼.



나는 지금 달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보고 있다.
어둠의 바탕이 있어야 하얀 달이 뜬다.

나는 지금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얀 종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흰 바탕이 있어야 검은 글씨가 돋아난다.

달을 보려면 어둠의 바탕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책을 읽으려면 백지의 흰 바탕이 있어야 한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려면 밤하늘과 정반대의
바탕이 있어야 한다.
검은 별들이 반짝일 때 밤하늘의 하얀 별들이 성좌를 그린다.

지금까지 나는 그 바탕을 보지 않고 하늘의 달을 보고
종이 위의 글씨를 읽었다. 책과 하늘이 정반대라는 것도 몰랐고,
문자와 별이 거꾸로 적혀 있따는 것도 몰랐다.
지금까지 나는 의미만을 찾아다녔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의미의 바탕을 보지 못했다. 겨우겨우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의미 없는 생명의 바탕을 보게 된다. 달과 별들이 사라지는
것과 문자와 그림들이 소멸하는 것을 이제야 본다. 의미의
거미줄에서 벗어난다.



경험은 점点이다. 점과 점을 이어야 비로소 지식은 창조로 변한다.



내가 노숙자인 까닭.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위에 천장이 있다는 것
그것이 하루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노숙자로 살아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곁에 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하루의 보람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노숙자로 살아야 한다.

노숙자는 노숙자路宿者가 아니라
노숙자露宿者인 게다.
이슬을 맞으며
잠든 사람.

노숙자의 눈물은 눈물이
아닌 게다.
이슬인 게다.



모래가 다 흐르면
뒤집어 놓는다
새로운 시간이 시
작된다. 모래가
다 차면 뒤집어
놓는다. 다시 시
간이 계속된다.



나는 어렸을 때 죽음을 알았고
나는 늙었을 때 생(탄생)을 알았다.거꾸로 산 것이다.




2020년

화폐의 가치, 나를 위해 쓰는 돈이 아깝지 않듯이 너를 위해서 쓰는 돈이 아깝지 않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깃털은 흔들린다.
날고 싶어서.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공깃돌은 흔들린다.
구르고 싶어서.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내 마음은 흔들린다.
살고 싶어서.



죽음의 조련사는 없다. 죽음은 길들일 수 없는 야수. 수식어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하나의 명사 하나의 동사만 남는다. 죽음, 그리고 죽다.


'거의'라는 말이 좋다.
목적지에 도달하면 기쁨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다.

'거의' 다 왔어. 지루한 기차(완행 같은 것) 안에서 영등포역을 지날 때가 제일 즐겁고 기대감이 컸던 기억.

완성 직전. 화룡점정의 점 하나 찍기 직전의 기쁨과 짜릿함. 그
비어 있는 마지막 공간이 있을 때, 삶은 새벽별처럼 빛난다.

용은 날지 않아도 된다. 잠룡
승천하지 않는 용. 이무기
눈알이 찍히지 않은 용들의 비늘
막 바람이 일기 직전의 숲의 이파리(나무)
용의 눈을 찍지 마라.



'아! 살고 싶다. 옛날처럼' 외치다
눈물 한 방울
벌써 옛날이 되어버린 오늘 하루.

코로나만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한다.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세상으로.

누구에게나
남을 위해서 흘려줄
마지막 한 방울의
눈물
얼음 속에서도 피는 기적의 꽃이
있다. 얼음꽃




2021년

오래동안 글을 쓰지 않았더니
만년필이 말라 화초에 물을 주듯
물을 뿌려 글씨를 심는다.

'쓴다'와 '심다'. 어느 것이 정말 정확한 표현인지 이상도
글씨를 쓰는 것을 (줄을 맞춰서) 모를 심는 것에 비유한 적이 있었으니까!

낙서의 장소로 가장 이상적인 곳이 뒷간이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공간, 그래서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
무소유의 공간 그래서 변소 벽에는 항상 낙서가 무성하다.

사적 공간이면서도 막상 어떤 개인도
소유할 수 없는 공적 공간, 이 아이러니 속에서
탄생되는 낙서 역시 가장 은밀한 것이면서도,
공개된 벽보와 같이 노출되어 있다.

내가 낙서를 다시 계속해가야 할 이유다.



많이 아프다. 아프다는 것은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신호다.
이 신호가 멈추고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이 우리가 그처럼 두려워하는 죽음인 게다.
고통이 고마운 까닭이다. 고통이 생명의 일부라는 상식을 거꾸로 알고 있었던 게다. 고통이 죽음이라고 말이다.
아니다. 아픔은 생명의 편이다. 가장 강력한 생生의 시그널.
아직 햇빛을 보고 약간의 바람을 느끼고 그게 풀이거나 나무이거나 먼 데서 풍기는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픔을 통해서다.
생명이 외로운 것이듯 아픔은 더욱 외로운 것.
고통의 무인도에서 생명의 바다를 본다.
그리고 끝없이 되풀이하는 파도의 거품들.
그 많은 죽음을 본다.




죽음 앞에 서면
어떤 동사도 움직일 수 없다
어떤 명사도 제자리를 지킬 수 없다.
형용사와 부사는 갈 곳을 몰라 방황한다.

나와 너의 인칭도 구별되지 않고
단수와 복수도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글 끝에 보이지 않던
종지부 마침표의 점만이 검은 태양처럼 떠오른다.
두 문자로 시작되었던 낱말들을 태양의 흑점이 삼켜버린다.



신문 없는 날이 좋더라.
새 소식이 없으니
새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

신문에도 얼굴이 있어서
면面이라고 부르는데.
아침마다 그 얼굴을 안 보니
잃어버렸던 얼魂이 보이더라.

신문 없는 날은 좋더라.
아무 일도 없으니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그리고 문화마저도 보이지 않으니

하늘이 보이더라.
땅이 없으니
별이 보이고 구름이 보이고
해가 떠오르더라.




2022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시간의 덫에 걸려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데자뷰라는 현상 속에서 사막에서 혹은
깊은 숲속에서 헤매는 사람처럼 수천 번을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중입니다.

반복의 지루함을 아시지요, 하나님. 시시포스의 형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응징의 법은 바로 반복이었습니다.
이 지겨운 반복의 덫에서,
시간이ㅡ 덫에서 지금 나는 천만 번이나
수억겁 년을 반복할지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남은 말,
사랑이라든가 무슨 별 이름이든가
혹은 고향 이름이든가?
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
시인들이 만들어낸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지상에는 없는 말, 흙으로 된 말이 아니라
어느 맑은 영혼이 새벽 잡초에 떨어진 그런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내 몸이 바로 흙으로 빚어졌기에
나는 그 말을 모른다.
죽음이 죽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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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은 인생에 주어진 시험이다.
누군가는 스스로 길을 찾아 방황을 끝내고,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방황한다.
이 또한 지나갈 뿐이다.


[본문발췌]

저는 다케이치의 말을 듣고 그때까지 그림에 대한 제 마음가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즉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원초적인 비법.


그는 저와 형태는 달랐지만 역시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동류였습니다. 그가 의식하지 못한 채 익살꾼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 게다가 익살꾼의 비참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저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었습니다.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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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에서 멀리 치워진다고, 분리수거와 재활용 제품을 찾아 소비한다고 쓰레기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코로나19를 겪으며 배달음식 주문과 1회용품 사용이 늘어나며 얼마나 많은 플라스틱과 비닐, 쓰레기가 생겨났을까?


[본문발췌]

 
「프롤로그」, 당신이 '분리수거한' 플라스틱이 도착하는 곳, 민 카이 마을
  • 재활용은 인간이 자연 활동을 관찰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쭉 논의되어 왔다. 연금술사가 납을 금으로 바꾸려 했던 것처럼 버려진 물건과 재료는 거의 무한대로 가치 있는 물건, 심지어 은화로 가공할 수 있다는 원칙에 기반한다.
  • 이 신화는 물질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동시에 문화적이다. 사회 속에서 인간관계의 변형만큼이나 재료의 변형에 대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건을 가치화하는 것은 재료의 수거와 가공에 가담하는 개인들의 가치화와 맥을 같이 한다. 마치 19세기 파리에서 넝마주이들이 쓰레기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지원금으로 여겼던 것처럼 말이다.
 
「'플라스틱' 블랙박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 조르주 바타유는 저서 <저주의 몫>에서 일반 경제가 생산한 에너지와 재료의 과잉을 정의하면서 인간 사회가 '소모'의 길을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축적된 쓰레기 속에는 실제로 저주의 양상이 있을 수 있다. 어쨌거나 물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행복과 불행은 역사의 주역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 2016년에 베트남 중앙 지역에서 목격한 재활용 쓰레기를 파는 여성의 모습은 나에게 '운명의 수레바퀴'를 떠오르게 했다. 가뜩이나 적은 그의 수입은 변동적인 시장 상황과 원재료 가격에 따라 달라진다. 권력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기회의 불공평과, 누군가는 폐기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실상의 불평등은 세계에서 작은 지역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퍼지며 갈등을 낳는다.
  • '원천적 쓰레기 분류'와 '환경을 위한 작은 실천'이라는 법령 속에서 개인의 사생활과 일상에 쓰레기 관리 문제가 정치적으로 끼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적으로 불평등한 무역이 이뤄진다는 명백한 사실과 더불어, 아일랜드에서 출발한 더러운 종이 상자를 분리하는 베트남 농민의 두 손을 통해 드러난 것은 바로 정치적 문제다.
  • 약간의 비판도 공론화하지 못하는 현실의 억압된 측면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표현하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창조적 발언'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찰한다는 것은 나타낸다는 것과 동의어이므로 본다는 것은 곧 눈에 띈다는 것이다.
  • 쓰래기의 은폐와 해외 이전이라는 쓰레기 관리의 문제
  • 2020년에 유럽 연합은 27,490,340톤의 쓰레기를 수출했다. 2004년 이후로 두배나 증가한 양인데, 주로 플라스틱, 종이, 종이 상자, 금속 등이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가 해상 수송으로 두 배나 더 먼 곳으로 이동하면서, 그 존재와 그에 따른 문제들도 멀어졌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소비하면서 버린 재료들이 우리 눈에서 멀리 치워진다하더라도 누 꾸인 지역에서는 더 잘 보이게 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먼 곳에서 화물선에 실려 하이퐁 항구에 도착한 쓰레기 컨테이너들은 이곳에 매일 하역되어, 쓰레기 더미 위에 중산층 집들이 들어서는 민 카이 마을에서 해체되고 분리되어 팔리고 재활용된다.

「쓰레기 패러독스」, 다시 태어났는데 또 쓰레기?
  • 민 카이 마을에 있는 수공업 공장들의 재활용 라인을 한 단계 한 단계 훑으면 물질 부스러기는 광석으로 변한다. 인간과 기계의 힘이 작용한 여러 작업 단계를 거쳐 처음의 형태를 잃는다. 큰 보따리가 작은 보따리가 되고, 필름이 조각이 되며, 조각은 냉온탕을 지나 세척된 후 녹아서 떨어지고 섞인 다음, 용암이 되어 사출기를 밧줄처럼 빠져나가서 알갱이가 된다. 마치 산이 수많은 모래알로 침식되는 것처럼 고체와 액체 사이의 불분명한 이 재료의 성질은 향후 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형태가 없어야 다시 형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변형이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에게 관찰의 척도를 바꾸고 물질과 함께 지하세계로 뛰어들 것을 권한다. 이 세계에는 보고, 맛보고, 느끼고, 들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 특화된 형태와 색, 특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날카로운 감각을 개발하는 것이다.
  • 민카이에 있는 가족 회사의 라인에서 온 광석은 극도로 제한된 판로를 갖는다. 대부분이 사출이나 팽창 과정을 통해 다시 플라스틱 봉투를 만드는 데 쓰인다. 그렇게 더러운 봉투가 깨끗한 봉지로 바뀌면서 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인 것이다.
  • 오염된 재료의 비중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근원적 정화가 이뤄져야 한다. 보물로 둔갑하여 숨기려고 하는 것은 곧 '쇠퇴'라는 것을 잊지 말자. 형태만 바뀔 뿐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 플라스틱 가공을 할 때 색 배합에는 교훈이 숨어 있다. 근본을 숨기기 위해 변에 무엇을 섞어도 그 구린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활용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 누군가는 진화하고 누군가는 퇴화한다
  • 반짝이는 논 위로 왜가리가 날고 밤에는 개구리가 울어대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과거 베트남 평야의 평화로운 풍경을 그와 함께 상상해 보려 했다. 그러나 이제 쓰레기, 오염, 공장, 도로 교통의 존재감이 워낙 뿌리 깊어서 이런 풍경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다. 
  • 부서진 쓰레기들이 햇빛에 썩어 가면서 뿜어내는 악취가 코끝을 자극하고,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모터와 기계의 소음뿐이다. 아마도 개구리는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다. 오염된 늪지에 숨어 있겠지만 소음이 점령한 이 풍경에서 개구리는 사라지고 없다.
  • 재활용된 알갱이들을 생산하는 작업장에서는 플라스틱 입자가 둥둥 떠다니는 더러운 물을 흘려보낸다. 분쇄된 폴리머 쓰레기의 세척 수조에서 나오는 오수는 마을의 도랑이나 재활용 공장 주변의 공터로 흘러가 고여 있다.
  • 인간에 대한 불신만 커진 것은 아니다. 항상 주위의 다른 것에는 오염물이나 독극물이 없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공동이 소유하고 공유하는 강은 일상생활의 전부이고, 지역의 특성을 나타내면서 공동체를 공들여 키워낸 존재이기도 하다. 베트남어 'nước'은 '물'과 '국가' 모두를 의미하는데, 이 점에서 우리는 오염된 물이 정체성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문할 수 있다.
  • 일상의 경험과 풍경 속에서 우리 삶의 방식은 플라스틱 재활용의 발전과 그에 따른 영향에 타격을 받는다. 더구나 그 영향들은 처음에는 인지할 수 없지만 환경, 인간관계 그리고 사물과 존재의 관계에 깊이 주입되어 있다. 마치 극빈곤층이 주로 잡는, 쓰레기를 먹으면서도 생존력이 강한 물고기 틸라피아 같다.
  • 이런 향수 어린 쇠퇴론은 황금기와 손실을 암시하는 '과거에는 정말 좋았는가?'에 대한 담론이 기초되어야 하지만, 사실 누 꾸인 지역의 퇴화는 이미 뿌리 깊다. 매일 오염에 노출되다보니, 여러 발생원으로부터 시작되어 다양한 연쇄 관계로 묶인 유해 물질과 가까이, 더 나아가 위험 물질과 '섞여 사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주변 유해 물질에 한 가지 원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인들은 결합되었거나 얽혀서 혼합되어 있다.
  • 관계가 있는 사물을 평가, 측정, 분류, 격리하는 현대 과학에서 이제는 구식이 된 용어를 다시 꺼내보자면, '미아즈마(Miasma)'(유행병의 원인을 나쁜 공기로 본 폐기된 학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막스 리부아이론에 따르면 이 용어는 변화되기 쉽고 순회하는 잡다한 물질로, 플라스틱 가공제, 첨가제, 그리고 박테리아를 유발하는 플라스틱의 영향을 분석하는 데 적합하다.
  • 민 카이 마을과 가까운 이곳에서 플라스틱은 그 상태가 다양하고-플라스틱성-어디에나 존재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 침투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유독 물질에 반복적으로 노출된다고 볼 수 있다. 
  • 대기와 땅, 그리고 강은 훼손됐고 동시에 삶도 변질됐다. 인간은 개인, 공동체 등 몸통을 구성하는 '화학적 관계의 범위를 인식'하고 환경과 다른 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 미셸 머피의 '또 다른 삶(alterlife)'처럼 말이다. 
  • 그러나 대체적인 전망은 분명하지 않다. 시간의 화살은 더 많은 자원 개발, 물질 축적, 에너지 남용을 촉진시키고, 이러한 퇴화를 상쇄시키는 경제적 번영은 재활용 성공 모델을 가진 소수의 기업만 웃게 만든다.
  • 이 모든 것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열역학에서 말하는 엔트로피왁 같은 것이다. 패자들은 모두 운하 근처에서 탄식만 할 뿐이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미래로 가는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퇴화에 대한 거론은 꺼리면서 그들이 가져온 발전과 공로만을 이야기하곤 한다. 
 
「돌고 돌아 다시 원점?」, 순환이라는 거짓말
  • 플라스틱은 '야생'의 상태로 돌아가면 혹자가 '인류세'라 부르는, 즉 지구 생태계의 인간 발자국을 정의하는 미시, 중시, 거시적인 모든 측면에서 그 흔적을 남긴다. 빙하 코어부터 도심 나뭇가지에서 펄럭대는 비닐봉투를 거쳐 대양에 생겨난 플라스틱 섬까지, 플라스틱은 여기저기로 비집고 들어와 지금까지 끄떡없어 보였던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리고 있다.
  • '쓰레기 연금술, 모든 것은 모든 것 안에 있다. 저마다 원리와 그 역을 가지고 있어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타고 마르는 것은 비옥하게 하고 영양을 공급한다. 악취는 향수가 되고 썩은 것은 황금이 된다.'
  • 돈에는 악취가 나지 않는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233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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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구, 다른 사람의 시선과 판단기준에 얽메인 삶! 이것에서 벗어난다면 자유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본문발췌]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정보와 지식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지혜를 원한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정보는 사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고, 지식은 뒤죽박죽 섞인 사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혜는 뒤얽힌 사실들을 풀어내어 이해하고, 결정적으로 그 사실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영국의 음악가 마일스 킹턴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과일 샐러드에 토마토를 넣지 않는 것이다."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지식이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지식이 늘면 오히려 덜 지혜로워질 수도 있다. 앎이 지나칠 수도 있고, 잘못 알 수도 있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지혜는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지혜를 운으로 얻으려는 것은 바이올린을 운으로 배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지혜의 부스러기를 줍기를 바라면서 비틀비틀 인생을 살아나간다. 그러면서 혼동한다. 시급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말이 많은 것을 생각이 깊은 것으로 착각하며, 인기가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

철학은 새로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도와주고, 바로 거기에 큰 가치가 있다. 철학은 지식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무엇을'이나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우리의 대부분은 '실재의 본질은 무엇일까'나 '왜 무無가 아니고 무언가가 존재할까'를 고민하며 밤늦게까지 잠 못들지 않는다. 우리를 붙들고 놔주지 않는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처럼 어떻게를 묻는 질문이다.

과학과 달리 철학은 규범적이다. 철학은 세상이 현재 어떤 모습인지뿐만 아니라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까지 말해준다.



사명은 내부에서, 의무는 외부에서 온다. 사명감에서 나온 행동은 자신과 타인을 드높이기 위한 자발적 행동이다.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은 부정적인 결과에서 스스로를, 오로지 스스로만을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우리는 명백한 것은 좀처럼 질문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간과가 실수라고 생각했다. 명백해 보이는 문제일수록 더 시급하게 물어야 한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지혜, 가장 최악의 무지는 지식의 가면을 쓴 무지다. 편협하고 수상쩍은 지식보다는 폭넓고 솔직한 무지가 더 낫다.

"모든 질문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외침" - 칼 세이건


철학은 삶,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한 것이고, 어떻게 하면 이 삶을 최대한 잘 살아내느냐에 관한 것이다.

삶을 성찰하려면 거리를 둬야 한다. 자기 자신을 더 명확하게 들여다보면서 자신에게서 몇 발짝 물러나야 한다. 이렇게 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과 대화는 사실상 동의어였다.

커다란 질문일수록 우리는 정보만 제공하는 답에 관심이 없다. 사랑은 뭘까? 악은 왜 존재하는 거지? 이런 질문을 할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보가 아닌 보다 더 큰 것, 바로 의미다. 질문은 일방향이 아니다. 질문은 (최소) 양방향으로 움직인다. 질문은 의미를 구하고 또 전달한다. 적절한 때 친구에게 적절한 질문을 묻는 것은 연민과 사랑의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자주 질문을 무기로 사용한다. 상대를 저격하고(네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해?) 자신을 저격한다(왜 난 제대로 하는 게 없지?). 질문으로 변명을 삼고(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중에는 정당화한다(내가 뭘 더 할 수 있었겠어?). 마음을 들여다보는 진정한 창문은 눈이 아니라 질문이다. 볼테르가 말했듯,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대답이 아닌 질문을 보는 것이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 쾌락의 역설을 설명했다. 행복은 붙잡으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행복은 부산물이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은 삶을 잘 살아낼 때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 같은 것이다.


"모든 여행은 정확히 그 속도만큼 더 따분해진다." - 존 러스킨


정신은 시간당 5킬로미터의 속도, 즉 걷기에 적당한 속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정신은 따분한 사무실, 사람들의 기대라는 폭군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배회하고, 정신이 자유롭게 배회하면 예상치 못한 멋진 일들이 벌어진다. 이런 일은 항상은 아니지만 우리 생각보다 더 자주 발생한다.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물건과 사람을 너무 빨리 정의 내리면 그것들의 유일무이함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소로는 그러한 경향을 경계했다.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소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볼 것."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로 규정하지 않고 기다리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소로는 그 속도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추측과 결론 사이의 틈, 보는 것과 본 것 사이의 틈을 최대한 길게 늘였다. 소로는 더 오래 머무르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오랜 시간 들여다봐야만 볼 수 있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을 멈출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 대상을 보기 시작한다.", 아름다움은 이해하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좋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본질적인 실상에 직면하고 싶어서, 그것들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음을 맞이 했을 때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지 않아서였다." - <월든>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 주변 환경을 훑으며 정보를 뽑아내는 안테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각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감각 정보에 압도되지 않도록 뒤엉켜 있는 온갖 잡다한 것에서 유의미한 신호를 걸러내는 필터에 더 가깝다. 소로의 말처럼 우리는 "무한한 세상에서 자신의 몫"만을,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만 받아들이도록 타고난다.

보는 행위는 의도적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때조차 보는 것은 언제나 선택의 행위다. 소로는 제대로 보려면 "눈에 별도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핵심은 각도다. 소로처럼 온갖 각도를 다 활용한 사람은 없었다. 관점을 바꾸면 어떻게 보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도 바뀐다. "제대로 된 관점에서 보면 모든 폭풍과 그 안에 든 모든 빗방울이 무지개다."

매일 틀에 박힌 것만 보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소로는 자신의 관점을 바꾸었다. 가끔은 작디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늘 가던 길이나 늘 반복되는 일상에서 머리카락 한 올만큼만" 벗어나도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1855년 12월의 어느 추운 날, 소로는 "겨울치고는 이상하리만큼 남쪽으로 내려온" 솔양진이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그건 평소에 다니던 길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거꾸로 뒤집으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좋은 철학자는 좋은 청자다. 지혜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이들은 얼마나 낯설든 간에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다.

소음은 다른 소리를 가린다. 시끄러운 환경에서 우리는 신호를 놓치고 가야 할 길을 잃는다. 이메일이 발명되기 약 150여 년 전, 쇼펜하우어는 어수선한 받은편지함을 우려했다.

에세이 <저술에 대하여>에서 쇼펜하우어는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소셜미디어의 소음을 미리 보여준다. 소셜미디어 안에서 진정한 소리는 새로움이라는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쓰인 것이 늘 더 정확하다는 생각, 나중에 쓰인 것이 전에 쓰인 것보다 더 개선된 것이라는 생각, 모든 변화는 곧 진보라는 생각보다 더 큰 오산은 없다."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해롭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한다.


우리는 습관의 폭압에서 벗어나려고 여행을 한다.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해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平靜주의자'였다.


얼마큼이어야 충분하지? 언제나 그 답은 "지금 가진 것보다 더"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더 많이'는 움직이는 과녁이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쾌락의 챗바퀴"라고 부른다. 우리는 새로운 쾌락에 익숙해진다. 그러면 새로운 쾌락은 더 이상 새롭지도, 그리 즐겁지도 않은 것이 된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예를 들면 돈과 명예,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만 더 많으면 된다. 하지만 조금 더 갖게 되면 우리는 눈금을 재조정하고 생각한다. 그저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우리는 얼마큼이어야 충분한지를 모른다. 충분히 좋음은 안주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변명도 아니다.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속도는 조급함을 낳는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삶의 속도와 반비례하여 줄어든다. 인터넷이 왜 이렇게 느려? 피자는 아직 안 온 거야? 조급함은 미래를 향한 탐욕이다. 인내는 시간에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관심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동의하는 것이다. 헬스보다는 요가에 더 가깝다. 베유는 이를 "소극적인 노력"이라고 불렀다. 베유는 진정한 관심이란 일종의 기다림과 같다고 믿었다. 베유에게 이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모든 말다툼은 오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범주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양측이 같은 문제를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다. 양측에게는 각자 다른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한 사람에게는 그릇을 비효율적으로 넣어서 고성능 식기세척기의 세척력을 극대화하지 못하는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핵심 역량, 더 나아가 자신의 남성성이 후려침 당하는 상황일 수 있다. 전쟁과 심술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악에 맞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모든 폭력은 상상력의 실패를 나타낸다. 비폭력은 창조성을 요구한다. 간디는 언제나 새롭고 혁신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찾아 해맸다.

간디는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지 않고 구덩이를 팔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이를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은 곧 스스로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이 혁명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사람은 스스로를 집어삼킨다. 간디가 보기에 목적은 절대로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했다. 수단이 곧 목적이었다. "불순한 수단은 불순한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다." 유독한 땅에서 장미나무를 키울 수 없듯이, 피 묻은 땅에서는 평화로운 국가를 세울 수 없다.


갈등의 양측은 전체 파이가 아닌 진실의 일부만을 지닌다. 파이의 조각을 거래하는 것보다 파이의 크기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충분한 걸로는 부족한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충분하지 않다.


예의는 사회의 윤활유이고, 친절은 사회의 초강력 접착제다. 예의 있는 문화가 꼭 친절한 문화인 것은 아니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그 불확실성이다." - 14세기 승려 요시다 겐코


순식간에 사라지는 삶의 작은 기쁨을 즐기려면 느슨하게 쥐어야 한다. 너무 세게 붙잡으면 부서져버린다.


한 학자의 말처럼 철학자의 일이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쇼나곤은 확실히 철학자다. 쇼나곤의 철학에 함축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정체성은 자기 주위에 무엇을 두기로 선택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주변에 무엇을 두느냐는 선택이다. 철학은 우리가 내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택을 겉으로 드러내 보인다. 어떤 것이 자신의 선택임을 깨닫는 것은 더 나은 선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독일 자가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 "일하는 동안 곁에 두기 위해 처음으로 작은 꽃을 꺾은 사람은 인생의 기쁨에 한 발짝 다가간 것이다."


"우리는 자기 삶의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 가장 사소하고,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니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라고 생각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에는 "완벽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자신의 방향성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 보통 우리는 불확실성에서 도망쳐 확실성으로 향해 달려간다. 니체는 그것이 불변의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가치이며,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은 재평가가 가능하다.


우리는 확실성이 아닌 정반대에서 즐거움을 찾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하면, 삶(외부인의 관점에서는 전과 똑같은 삶)은 꽤나 다르게 느껴진다.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낮에 회사에서 있었던 심란한 일은 하루의 끝에 이를 갈며 와인 한 잔을 더 마셔야 할 일이 아닌 축하할 일이 된다.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질병마저도, 신체적 고통이 계속될지라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미묘하지만 그 영향력이 엄청나다. 세상이 전과 달라 보인다. 니체 또한 이러한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음을 인정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을 탐험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막스플랑크 인간 발달과 교육 연구소의 지혜 프로젝트는 지혜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 인생 전체에 걸친 맥락주의, 가치 상대주의,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관리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바람에 수없이 시달리지 않은 나무는 땅에 튼튼하게 뿌리박지 못한다. 바람에 흔들려야 땅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난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다." - 세네카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무지를 진정한 지혜로 향하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단계로 여겼다. 철학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삶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충동, 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 감정적 삶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손에 맡긴다. 고압적인 상사나 변덕스러운 친구, 인스타그램 팔로어 같은 타인의 손에.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이런 고난을 스스로 부여한 속박에 빗댄다.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자발적 박탈의 목표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다. 때때로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을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에 더욱 감사하게 되고, 덜 얽매이게 된다. 자발적 박탈은 자제력을 길러주며, 자제력을 키우면 여러 좋은 점이 있다. 기쁨을 포기하는 것은 삶에거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다. 자발적 박탈은 용기를 길러준다. 또한 그리 자발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박탈에 대비해 예방 주사를 놔준다. 지금은 따끔한 고통을 경험하지만 미래의 고통은 훨씬 줄어든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고난이 가진 영향력을 빼앗고 지금 가진 것에 더욱 감사할 수 있다. 예상된 고난은 힘을 잃는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두려움은 크기가 줄어든다.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그 자리에서 즉시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에 감사해라." 우리는 종종 자신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혼동한다. 스토아철학은 헷갈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간단하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몸조차도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빌릴 뿐, 절대로 소유하지 않는다. 해방감이 느껴진다. 잃어버릴 것이 없다면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할 것도 없다.


고대 그리스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었다. 바로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이다. 시계 속의 분, 달력 속의 달이다. 카이로스는 딱 맞는 적절한 때를 의미한다. 무르익은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카이로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반쯤 잠든 채로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본질을 혼동한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타인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타인의 시선대로 스스로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진정성이 없다(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단어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이우덴테스authentes에서 나왔다). 나는 노인들이 특히 이렇게 자유를 포기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노인을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바라보고, 노인들도 곧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노인들은 노인을 연기한다.


친구는 현재의 우리 자신과 과거의 우리 자신을 연결해 준다. 그렇기에 나이 들었을 때 친구를 잃는 것이 특히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친구와 함께 과거의 일부까지 잃어버린다. 자기 자신의 일부까지도.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삶에 매달린다. 하지만 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건설적인 물러남으로 부르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건설적인 물러남은 만사 무관심하거나 세상에서 등을 돌리는 게 아니다. 조심스럽게 한 발 물러나는 것이다. 여전히 기차에 탄 승객이고 여전히 다른 승객을 신경 쓰지만, 부딪치고 흔들리는 것에 전보다 덜 불안해하고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을지 덜 걱정하는 것이다.


인생을 강이라고 생각해보자. 둑 사이에서 가늘게 흐르기 시작한 강물은 돌 위와 다리 아래를 지나 폭포수가 되어 떨어진다. "강은 점점 더 폭이 넓어지고 둑은 점점 낮아진다. 물은 갈수록 더 잔잔히 흐르다 눈에 띄는 커다란 변화 없이 결국 바다와 어우러지고, 고통 없이 독자성을 내려놓는다." 나는 이것이 노년의 최종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물길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넓히는 것.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계속 타오를 것임을 믿는 것. 카이로스의 지혜. 모든 것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 심지어 물러나는 것에도.


죽음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결국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현재가 아니며, 죽음이 현재일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비존재는 내가 죽고 난 뒤의 비존재와 동일하지 않다. 하나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비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한때는 존재했던 비존재이며, 이것은 크나큰 차이를 낳는다. 공허와 빈자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없음nothingness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과 지금도 존재하는 것에 따라 정의된다.

"내가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기까지의 과정이다."

몽테뉴는 삶을 잘 살아내지 않고서 잘 죽을 수 없었고,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지 않고서 삶을 잘 살아낼 수 없었다.
몽테는 죽음을,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직면하지 않고선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죽음에서 낯선 느낌을 제거하고, 죽음을 알고, 죽음에 익숙해지자. 다른 무엇도 죽음만큼 자주 생각하지 말자. 매 순간 죽음의 모든 양상을 상상하자. 말에서 떨어질 때, 건물 타일이 떨어질 때, 아주 살짝 바늘에 찔릴 때, 즉시 이렇게 생각하자. 지금 내가 죽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장화를 신고 즉시 떠날 준비를 해야만 한다."


죽음은 삶의 끝이지만 삶의 목표는 아니다. 죽음은 삶의 실패가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면 삶을 더 풍성하게 살 수 있다.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 시작되는 매일매일이 너의 마지막 날이라고 확신하라. 그 뜻밖의 시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니."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공포와 더불어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며칠, 또는 몇 년을 더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시간을 얻은 후에는 더 많은 시간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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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하면서도 일상에서는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세 가지 중 하나, 물, 공기, 그리고 이것.

 

사람마다 상대적으로 느끼지만,
절대적이고 공평한 것.
 
시작할 때는 소중함을 모르고 허비하다가,
마지막에 다다르면 무엇보다 소중해 지는 것.
 
젊어서는 '느리다', '모자란다' 하고,
나이들수록 '빠르다', '남아돈다' 하는데
삶의 끝에는 없어지는 것.
 
상황, 감정에 따라 변하는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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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크라 전쟁과 코로나19 시국에 각 나라가 풀어낸 엄청난 통화 정책의 영향으로 치솟는 물가와 경기침체 우려로 힘들어하는 국민은 뒷전에 두고 온 나라가 권력 다툼과 정치 보복의 냄새가 풍기는 기획수사 뉴스로 가득차 있다.
 
대통령과 측근들이 기획수사 능력으로 현재의 자리까지 왔으니 나라 살림은 관심없고 오직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 자신들의 전문성을 살리는 것인가? 심지어 기획수사의 단초가 될 고발사주 의혹만 봐도 이들이 검찰 권력을 이용해 만들어내지 못할 죄가 있을까만은, 우려가 걱정이되고 다시 현실이 되는 상황이 안타까운데 다시 불거지는 서해 피격공무원 사건과 16명의 동료를 죽이고 귀순하겠다던 사람들을 북으로 돌려보낸 사건을 보며, 국가와 국민에게 피해를 입히는 죄를 지었다면 밝혀서 책임을 물어야 겠지만 또 다른 고발사주, 또 다른 기획수사는 아닐지 걱정스럽다.
 
국민정서와 상식을 벗어난 잘못이 드러나도 교묘한 논리로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괜찮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지 못하는 대통령 부인의 비선 활용 우려도 무시하거나 되려 성내는 낯 두꺼움은 도저히 봐 줄 수가 없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평범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데도 내가 하는 생각과 말, 행동은 모두 옳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범법자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는 않는 갱단과 다를 게 없다.

 
세상을 뒤로하고 눈과 귀를 닫고 살아야 할지, 검찰공화국으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일어서야 할지? 정권이 바뀌고 6개월도 안되었는데 부패한 정권말을 보는 것 같은 데자뷰는 무엇인가.
 
빛을 어두움으로 덮지 않기를 바라며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도입부를 떠 올린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지금과 너무나 흡사하게, 그 시절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좋든 나쁘든 간에 오직 극단적인 비교로만 그 시대를 규정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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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평등하고 소중한 존재이지만 인간의 욕망은 차별과 억압을 만든다.
  

[본문발췌]


라일라는 인간이 직면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일 중에서 기다리는 일만큼 힘든 게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것들은 책에서 배우지. 그러나 직접 보고 느껴야 하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으리...  - 사이브에타브리지 <카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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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지상주의, 자유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성공과 빠른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특정 계층에 권력과 자본이 집중되어 양극화와 사회갈등을 조장할 수 밖에 없다. 부자이거나 빛나는 자리에 안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 회복이 필요하지 않을까?


[본문발췌]


능력주의 신화는 대체로 세 가지 명제로 이루어진다.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

능력주의 논쟁은 구원을 논의할 때 다시 기독교에 등장한다. 신앙이 독실한 사람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신이 각자의 생활 태도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첫 번째가 정당해 보인다. 권선징악의 틀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며 따라서 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신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하게 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우리가 자유로운 능력의 소유자이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공도 실패도 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능력주의의 일면일 뿐이다. '성공한 사람은 그럴 만해서 성공했다'는 신념이 공통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다. 이러한 승리주의적 측면으로부터 승자들 사이의 오만, 패자들 사이의 굴욕이 나온다. 이는 세속 사회에 남아 있는 섭리론의 도덕적 어휘를 반영한다.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보았다. "이를 넘어서, 그는 자신이 그런 행운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납득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럴 만하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그는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문화역사학자인 잭슨 리어스는 미국의 공공 문화를 운의 윤리의식과, 보다 강력한 자수성가의 윤리의식이 벌이는 불공평한 각축장으로 보았다. 운의 윤리는 인간의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을 중시한다. 세상이 반드시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음과 같은 <전도서>의 내용은 이런 윤리의식을 잘 표현한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았다.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라고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라고 음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명철한 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기능을 갖춘 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이는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로다."


부와 건강을 상과 벌의 문제로 보는 관점은 능력주의적 생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운이나 은총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우리 운명을 책임진다고 여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가 취한 선택과 삶의 태도에 대한 상 또는 벌인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수성가와 자기 통제의 윤리를 확고히 찬양하며,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질 길을 열어준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허리케인이든 쓰나미든 나쁜 건강이든 희생자들이 겪는 재난을 자업자득이라 여기고 희생자들을 업신여기게 된다.


"도덕 세계의 궤적은 길다. 그러나 반드시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 - 마틴 루터 킹(시어도어 파커 목사의 셜교 참조)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의 실패도 순전히 그들 탓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는 능력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논리로 기능한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세계화 시대는 노동계급에게 큰 폭의 불평등 확대를, 또한 임금의 정체를 안겨주었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0퍼센트는 대부분의 이익을 챙겼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진보적, 자유주의적 정당들은 이 불평등을 직접 다루지 않았고,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외면했다. 대신 그들은 시장 주도적 세계화를 받아들였으며, '기회의 평등을 늘리기 위한' 정책을 통해 불평등한 혜택을 조장했다. 그것이 사회적 상승 담론의 포인트였다. 성공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성공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이는 소득 사다리의 단 사이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서로 먼저 사다리에 오르려 경쟁하는 과정에서만 공정함을 추구할 뿐이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생산물이나 기여는 항상 그 가격으로 가치가 측정된다. 윤리적 가치나 인간 생활에서의 중요성 등과는 별 관계가 없다. 어떤 생산물의 금전적 가치는 '수요'에 따르며, 이는 다시 소비자 대중의 취향과 구매력, 그리고 대체재의 유무 등에 따른다. 이 모든 요인들은 대체로 경제 시스템 자체가 작동되면서 창출, 조절된다. 따라서 그 결과는 자체적으로 그 시스템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만한 윤리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 프랭크 나이트


비록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모두 능력을 정의의 제일조건으로 배제하고 있지만, 둘 다 결국에는 능력주의로 기운다. 둘 다 성공에 대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를 거르지 않으며, 능력주의가 빠지기 쉬운 함정 즉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이라는 함정을 피하지 못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개인 책임을 분해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재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이 개인의 천부적 재능은 행운의 산물이며 따라서 도덕적 관점에서 자의적이라고 주장하기는 해도, 재능 특히 천부적이거나 내재적인 재능을 놀랍도록 중시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능력주의는 지성과 교육을 고등교육의 상아탑에 온통 몰아넣어 두고서, 누구에게나 그 상아탑에 들어올 공평한 경쟁이 보장되리라고만 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접근권 배분은 노동의 존엄을 떨어뜨리며 공동선을 오염시킨다. 시민교육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될 수 있다. 항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그는 우리가 선별과 분투의 도가니에서 한 발 물러나 그냥 지긋이 도마뱀을 바라보기를, 그 동물이 얼마나 신비한 존재인지를 충분히 보고 즐기기를 원했을 것이다.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그래서 세계화가 일으킨 불평등이 왜 그토록 강력한 분노로 이어졌는지 설명된다. 세계화에 뒤쳐진 사람들은 다른 이들은 번영하는 동안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달았다. 사회의 눈에, 그리고 아마 스스로의 눈으로도 그들의 일은 더 이상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라고 비쳐지지 않는다.

양극화는 심화되고, 다수의 노동자들이 무시당하고 외면당한다고 여기고 있어 사회적 응집과 연대의 원천이 절망적으로 필요한 지금, 일의 존엄에 대한 보다 견실한 생각이 주류 정치 논의로 파고 들어야 하리라 본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조짐은 없다. 왜 그럴까? 왜 주된 정치 어젠다는 정의의 기여적 측면을 거부하며, 그 기반이 되는 생산자 중심적 윤리를 외면하는 것일까?해답은 단지 우리가 소비를 너무 사랑한다는 데 있을지 모른다. 또한 '경제성장이 최고'라는 믿음 역시 한몫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더 깊은 곳에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약속하는 물질적 혜택을 넘어 경제성장을 공공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까닭은 우리 사회처럼 갈등이 많은 다원적 사회에 매력적이라서다. 이는 골치 아픈 도덕 논쟁을 우회할 빌미가 된다.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에 대한 견해는 제각각이다. 잘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 일치가 안 된다. 소비자로서 각자의 기호와 욕망은 다르다. 이러한 차이 앞에서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한다는 것은 경제 정책의 가치중립적인 목표로 여겨진다. 소비자 복지가 목표라면 각자 다양한 선호에도 불구하고 많은 편이 적은 편보다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 과실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충돌은 당연히 일어난다. 따라서 분배 정의에 대한 논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경제 파이를 키우는 게 작아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 여겨진다.이와 달리 기여적 정의는 인간의 좋은 삶이나 최선의 인생 방식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미국 공화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헤겔에서 카톨릭 사회교육에 이르기까지 기여적 정의의 이론은 '우리는 공동선에 기여할 때만 완전한 사람이 되며, 우리가 한 기여로부터 우리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 전통에 따르면 근본적인 인간욕구는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일의 존엄성은 그런 필요에 부응하는 우리 역량의 발휘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면 소비를 '모든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대상'이라 보는 것은 잘못이다.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트리며, 시민 생활을 황량하게 만든다.

급여를 생각해 보면, 이런 저런 직업들이 각자의 일 성과에 대해 참된 사회적 가치를 어떤 때는 과대하게 어떤 때는 과소하게 평가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직 열렬한 자유지상주의자만이 부유한 카지노 왕의 사회적 기여가 소아과 의사의 기여보다 정말로 1000배나 가치 있다고 떳떳이 주장할 수 있으리라. 시장 사회에서는 우리가 버는 돈과 우리가 공동선에 기여한 내용의 가치를 혼동하기 쉽다. 시장 주도적 사회에서 물질적 성공을 도덕적 자격의 증표로 해석하는 일은 지속성 있는 유혹이다.

오렌 카스, <한때, 그리고 미래의 노동자> 카스는 미국에서 노동의 존엄을 일신하려면 공화당이 자유시장에 대한 전통적 선호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의 법인세를 줄이고 자유무역을 진흥하여 GDP를 끌어올릴 생각하지 말고, 노동자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기에 충분한 급여를 받는 일자리를 찾도록 돕는 데 공화당이 중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경제성장보다 좋은 사회를 중시하는 방식이라고 카스는 주장했다. 카스의 캐별 제안들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따지기에 앞서, 그의 프로젝트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우리의 주 관심을 'GDP 극대화'에서 '일의 존엄과 사회적 응집에 친화적인 노동 시장 조성'으로 옮기도록 한다는 점이다.

지난 40년 동안, 시장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힘을 합쳐서 이런 도덕적 유대관계를 뜯어내 버렸다. 그들이 뿌려 놓은 글로벌 보급 체인, 자본의 흐름,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체성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 주장에 덜 호응하게 되도록 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한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안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성공할 기회는 거시적으로 본 실질적 평등을 대체할 수 없다. 소득과 사회적 조건의 극심한 불평등을 없는 것처럼 만들어버릴 수도 없다. 사회적 복지는 응집과 연대에 달려 있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일반 문화, 그리고 강력한 공동 이해관계 의식의 존재를 내포한다. 개인의 행복은 각자가 자유롭게 새로운 안락과 명성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존엄과 문화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함도 요구한다. 후자는 반드시 출세할 것을 요하지 않는다.' - R. H. Tawney, <평등Equality>


'아메리칸 드림. 미국이라는 땅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더 낫고, 더 부유하고, 더 온전한 삶을 살아갈 기회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역량이나 성취에 따라 주어진다. 그것은 단지 자동차나 높은 급여에 대한 꿈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그리고 태생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질서의 꿈이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민주주의가 그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상징이다. 일반 열람실을 보면, 물어볼 필요조차 없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1만권이나 비치되어 있다. 자리마다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노인도 젊은이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흑인도 백인도, 경영자도 노동자도, 장군도 사병도, 저명한 학자도 학생도 한 데 섞여 있다. 모두가 그들이 가진 민주주의가 마련한 그들 소유의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 이 장면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확실한 사례다. 사람들 스스로가 쌓은 자원으로 마련된 수단, 그리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대중 지성. 이 예가 우리 국민 생활의 모든 부문에 그대로 실현된다면 아메리칸 드림은 살아 있는 현실이 되리라.' - 제임스 애덤스, <미국의 서사시The Epic of America>


우리는 오늘날 조건의 평등을 별로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계층, 인종, 민족, 신앙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은 얼마 없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40년 동안 시장 주도적 세계화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가져오면서 우리는 제각각의 생활 방식을 갖게 되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하루 종일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 우리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살고 일하며 쇼핑하고 논다. 우리 아이들은 각기 다른 학교에 다닌다. 그리고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가 일을 마치면,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그 성공의 대가를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도 다 자업자득이라고 여긴다. 이는 정치에 매우 유해하며 당파주의가 하도 팽배하여 이제 사람들은 신앙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껄끄럽게 보게 되었다. 우리가 중요한 공적 문제에 대해 서로 합리적으로 토론하거나 심지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처음에 매우 고무적인 주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믿으면 신의 은총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 말이다. 이런 생각의 세속판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유쾌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하면 된다'라는 약속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의 비전은 공동의 민주적 프로젝트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서 눈을 돌리도록 했다. 우리가 7장에서 본 공동선의 두 가지 개념을 되새겨 보자. 하나는 소비주의적인 공동선, 다른 하나는 시민적 공동선이다. 공동선이 단지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면, 조건의 평등은 고려할 게 못된다. 민주주의가 단지 다른 수단에 의한 경제일 뿐이라면, 각 개인의 이해관계와 선호의 총합 차원의 문제라면, 그 운명은 시민의 도덕적 연대와는 무관할 것이다. 소비자주의적 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가 활기찬 공동의 삶을 영위하든, 우리와 같은 사람끼리만 모여 각자의 소굴에서 사적인 삶을 살든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역자후기]

능력주의는 '사람 위에 사람'을 두는 체제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들 순위가 정해진 게임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좋다는 대학교의 가장 좋다는 학과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평생을 두고 크든 작든 패배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 국민의 절대 다수를 패배자로 만드는 체제가 효율적일 리도, 정의로울 리도 없다. 누군가는 의사를 하고 누군가는 펀드매니저를 하고 누군가는 초등학교 교사를, 누군가는 환경미화원을 해야 하는 사회가 정상일진대, 샌델이 몇번이고 강조하듯 모든 사람의 직업이 각각의 물적, 심리적 가치를 인정받고 긍지를 얻을 수 있어야만 행복하고 조화로운 사회일 것이다. "물론 내 연봉은 당신보다 적지만, 나는 당신과 비교해서 하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지 않아요"라고 누구나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사회 말이다.


능력주의 폐단은 능력주의가 '생각하지 않는 백성'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완벽한 사회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누군가를 부당하게 괴롭히지 않는 사회, 각자의 개성과 꿈이 세상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는 말이 불편한 지혜가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 방법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89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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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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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권력, 반자본주의 통제에서 벗어나 단독으로 행동하며, 자급자족의 슬로라이프를 추구하는 삶!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원작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가 있는데, 일본에서 만든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고 한국에서 만든 영화는 드라마적 재미와 연기가 더 낫다는 개인적 평가.

 

 


[본문발췌]


이 나라에 태어나면 무조건 선택의 여지도 없이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가 생기다니,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뭔가를 억지로 해야 한다는 건 지배를 받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야. 사람은 지배당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오?


내 이상향은 자급자족의 생활이야. 어느 누구에게도 착취당하지 않고 우리 가족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거야.


학교에서 너희 머릿속에 주입하는건 체제에 적당히 써먹을 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최면술 같은 것이야. 어떤 시대에나 학교는 일종의 교정 시설이었어. 예전에는 나라를 위해 죽어서 돌아오라고 가르쳤지. 요즘은 일을 많이 해서 세금을 많이 내라고 가르쳐.


인류의 불행은, 충분히 가졌음에도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어.


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인간이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자신이 안전할 때뿐이다.


상식에서 벗어난다는 건 어딘가 유쾌한 일이었다.


이별은 쓸쓸한 것이 아니다. 서로 만나 함께 어울리다가 와 닿게 된 결승점이다.


인간이란 모두 전설을 원하지. 그런 전설을 믿으며 꿈을 꿔보는 거야.


학교는 국가가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정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방해도 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표 나지 않게 처리해나가는 건 인간관계의 지혜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게 인간의 본질인가 봐.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하지만 너는 아버지 따라할 거 없어. 그냥 네 생각대로 살아가면 돼. 아버지 뱃속에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벌레가 있어서 그게 날뛰기 시작하면 비위짱이 틀어져서 내가 나가 아니게 돼. 한마디로 바보야, 바보.


어느 누구에게도 지배받으려 하지 않고 혼자 국가에서 튀어나와 살아가겠다니, 그건 너무 자기 멋대로인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국가가 정의라고도 할 수 없었다. 튀어나갈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배자의 생각이었다.


경찰과 기업에 창끝을 들이댄 사람을 통쾌하다며 재미있어 하면서도, 그것을 막상 내 일처럼 생각해줄 사람은 없다. 텔레비전을 지켜본 어른들은 단 한 번도 싸운 일이 없고 앞으로도 싸울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항하고 투쟁하는 사람을 안전한 장소에서 구경하고 그럴싸한 얼굴로 논평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냉소를 던지리라.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제외한 대다수의 어른들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작고 작아. 이 사회는 새로운 역사도 만들지 않고 사람을 구원해주지도 않아. 정의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야. 사회란 건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위안해줄 뿐이야.


지로, 전에도 말했지만 아버지를 따라하지 마라. 아버지는 약간 극단적이거든. 하지만 비겁한 어른은 되지 마. 제 이익으로만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라고.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


아마도 자기만 이익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들 친절한 것 같아.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법률도 무기도 필요 없다고 생각해. 이것은 유치한 이상론인지도 모르지만, 여기 섬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감이 들어. 만일 지구상에 이런 섬만 있다면 전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아버지는 다시 밭을 갈고 있을까.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까. 건장한 몸집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런 생활이 더 어울린다. 인류는 돈을 지닌 시대보다 지니지 못했던 시대가 훨씬 더 길었다. 그러한 인류 끄트머리의 기억이 아버지에게만 진하게 남은 것이다.
아버지 좋을 대로 해도 괜찮아. 지로는 바다를 향해 중얼거렸다. 함께 사는 것만이 가족이 아니니까.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496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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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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