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 연휴를 시골에서 지내다 일요일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고속도로 길막힘이 심해 국도로 우회하던 중 진천을 지나게 되었다. 점심 시간이라 진천 맛집이라는 막국수집을 검색해 들른 진천읍내!

'96년 인터넷 겨울캠프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2개월여를 지내고, 22년만에 들른 진천, 흘러간 시절만큼 곳곳에 아파트도 들어서고 동네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인터넷이 한창 보급되던 시절, 초중고부터 대학생, 일반인 기수까지 2박3일 합숙 캠프에 참여해 인터넷 사용과 활용법을 배우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5G 스마트폰을 통해 빠르고 쉽게 인터넷에 접속해 정보를 얻고 일처리를 바로 할 수 있고, 블록체인과 메타버스를 경험하는 시대를 살며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자료를 검색하고, 듣고 싶은 음악을 찾아 들어보는 등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합숙캠프까지 열었다는 오래된 이야기, 추억과 함께 진천을 스쳐간다.

강의면접까지 거쳐 선발된 대부분 대학생, 대학원생들로 이루어진 강사들은 캠프에서 2달여 동안 함께 숙식하며 지냈는데, 중간에 잠깐씩 휴식시간에 청주시내로 같이 놀러도 다니고 저녁에는 눈속에 파 묻어 놓은 맥주를 마시며 동고동락 했었는데, 지금은 이름 기억나지 않고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19961204/72126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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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시간과 생각의 여유를 가져다 주는 쉼표와 같은 것!



[본문발췌 - 1권]


'일 - 사람 관계 - 부와 재물 - 시간 관리 - 나 자신'
삶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고 또 가장 향상시키고픈 다섯 가지 영역.


'사람들이 일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일이 적성에 맞아야 하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는 안 되며, 일에서 성취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 존 러스킨


과거의 기억에 따른 아픔, 현재에 대한 불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나 한 번쯤 겪듯이,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화해하며 그렇게 매일을 살아갑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실이 된다. Everything you can imagine is real. - 파블로 피카소


어느 일이든 사람을 상대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다 보면 그들의 말과 표정에 상처받고, 원치 않아도 내 진짜 감정을 억눌러야 해서 지칠 때가 많습니다. 연륜이 붙은 직장이라이라고해도, 피곤하고 다친 마음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에 능숙해질 뿐, 상처가 익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원은 시작과 끝이 없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영원'을 상징하고, 공간을 둘러싸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원을 색칠하면서 사람들은 내면으로의 회귀와 만남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의미 없게 느껴질 때는, 잠시 손을 놓고 다른 무언가로 눈을 돌려보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의미가 없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분들에게 저는 오히려 굳이 뭘 하려고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합니다. 결과가 좋아야 하고 너무 잘 하려는 강박 관념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도 있습니다.


일상이 갑갑할 때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여행이죠. 잿빛 도시에서 벗어나 푸르른 바다와 탁 트인 하늘을 볼 때면 마음이 뻥 뚫리고 온갖 번민도 다 날아갈 듯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한 가지를 하기 위해선 하기 싫은 일 아홉 가지를 해야만 한다.


벽에 걸어놓을 그림은, 사람의 영혼을 맑게 씻어주는 환희의 선물이 되어야 하고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 - 르느와르


하버드대 긍정심리학 교수인 탈 벤 샤하르는 그의 저서 <완벽의 추구>에서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원인을 '완벽주의에 대한 강요'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완벽이란 불가능한 환상인데도, 그걸 달성하지 못하는 좌절감이 우리를 생의 끝으로 내몬다는 것이죠.


자꾸 사람들 사이에 내가 겉도는 것 같다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문제를 찾기 전에 먼저 나의 모습을 돌이켜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들이 손 내밀기 어려운 철벽 같은 갑옷을 입고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한테는 한 가지 모습이 아니고 다양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그토록 어려워하는 사람도, 나를 힘들게 해서 밉기만 한 사람도, 어딘가에 여리고 따스한 면모를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어떤 프레임으로 사진을 찍느냐에 따라 풍경의 느낌이 다르게 보이듯 사람은 자기만의 '프레임frame'을 기준으로 사물이나 상황을 인지한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경험, 관심사, 상황 등이 축적된 철학의 틀을 뜻하는 '스키마schema'의 변화 없이, 세상을 효율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경험과 관심사, 느낌들이 그림의 해석에 대한 프레임을 만든다.


미움과 분노는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문제지만, 결국 자기를 파괴시키는 일입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소망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심리적 행위가 꿈이라고 보았습니다. 꿈은 있었던 사실의 부활이 아니라, 사건을 재료로 해 자기 소망이 반영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당연하게 '돈이 있으면 좋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돈이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명품도 살수 있고, 여행도 갈 수 있고, 사회적으로 과시도 되는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시간을 살 수 있다'는 점이 크다고 이야기 합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벌기 위해서 자기 시간을 쓰지만 돈이 있으면 자기 시간을 활용하는 데 돈을 쓸 수 있거든요.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돈과 행복의 관계를 조사한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에 따르면 물건을 구매하기(소유)보다 무언가를 하는 편(경험)이 훨씬 더 큰 만족감을 주고, 수입과 상관없이 타인을 위해 돈을 쓸 때 더 큰 행복을 느낀다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어떤 원대한 목표라 해도 처음이 있고, 그 처음을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도 우리의 행복이 아닐까요.


비바람이 치거나 풍랑이 일 때는 멈춰야하는 것처럼, 또는 더 먼 항해를 앞두고 쉬면서 장비를 가다듬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한 번씩은 숨고를 시간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프레드릭 허즈버그의 '2요인 이론'에 따르면 보수는 동기부여를 좌우하는 두 가지 요인 중 '불만족 요인'에 해당합니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바로 만족으로 이어지진 않지만, 보수가 충족되지 않으면 매우 큰 불만족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불만족 요인'은 자아실현 이전에 생존이나 인정과 관련된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돈을 억만장자처럼 많이 벌겠다는 욕심이 없는 사람도, 보수에 따른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 빨간머리 앤
우리는 어른이 될수록, 실망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에 애초에 기대를 버리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매분 매초를 황홀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잊고 살았던 게 아닐까요? 앤의 말처럼 앞일을 생각하는 건 발견과 상상으로 가득한 즐거운 일인데 말이죠.


우리의 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은 하나의 '사건'일 뿐인데, 사람들은 이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비판하곤 합니다. 미음으 눈으로 재해석된 과거는 유독 환하거나, 유독 칙칙하다거나 해서 현재까지도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있지만, 사실은 그저 '있었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에 자꾸 집착이 들 때는, 원래의 것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나를 벗어나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어쩌면 슬플 정도의 처절한 자기부정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알려준다고 하겠습니다.


피터르 브뤼헐,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이 그림은 멀고 불확실한 바다와 가깝고 확실한 땅을 대비시키며, 내가 발 딛은 현실에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마음을 일깨워줍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고 부릅니다. <하버드 대학교 건강저널>은 과거를 생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기보다 현재에 몰두하면, 스트레스가 줄고 수면의 질이 높아지며 혈압이 내려간다고 밝혔습니다. 요는 당면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법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지금 비추는 해는 언젠가 지게 될 것이고, 우리에겐 원하든 원치 않든 편히 쉴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니 일할 수 있게 허락된 매 순간을 소중히 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변화나 희망도 생기지 않을까요.


죽음 역시 우리 인생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며 두려움을 다독여주는 것입니다.


공기, 물 중력 등 평소엔 느끼지 못하지만 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가 됩니다.
어쩌면 시간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 같았던 시간이 희박해지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는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죽음이 임박한 시간을 리얼하게 포착한 조르주 쇠라의 <임종을 맞이하는 아나이스 페브르 오몽테>는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하라'는 얼얼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쉴 시간이 없을 때가 바로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다.
The time to relax is when you don't have time for it. - 시드니 J. 해리스 Sydney J. Harris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 세상을 동굴에 비유했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현상은 동굴 벽에 비쳐 어른거리는 그림자일 뿐이지만, 우리는 좁은 동굴에서 빠져나오려는 생각 자체를 못하고 내가 보는 것만 참되다고 믿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본질보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찰나의 으쓱함에 관심을 두고 피상적으로 살게 되는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을 잘 꼬집고 있습니다.
외부에 비춰지는 것에만 온 신경을 쓰느라 자신의 내면이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살필 겨를이 없는 공허한 삶 말입니다.


'가끔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 보세요.'
내가 똑같이 소풍을 가더라도 비바람이 치면 망치는 날이 되고, 햇빛이 따사로우면 기억에 남는 행복한 날이 되지 않나요? 인생이라는 것은 이렇듯 나와 환경과 상황이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지만 나에 대한 조금 더 폭넓은 시각을 갖는다면, 지금 한없이 버겁게만 느껴지는 문제들로부터 숨을 트일 수 있을 겁니다.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을 느끼고 싶다면 바람과 물이 주는 자유로움에 몸을 맡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떤 영향이든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요. 두려워 말고 인생을 그려봐요.' - 베르트 모리조




[본문발췌 - 2권]


나에게 물의 무게는 물 컵을 얼마나 오랫동안 들고 있느냐에따라 다릅니다. 만약 물 컵을 1분 동안 들고 있다면 거뜬할겁니다. 그러나 1시간 동안 든다면, 내 팔은 저려오고 아파올겁니다. 만약 하루 종일 든다면, 팔의 감각이 없어지고 마비될 것입니다. 하지만, 물의 실제 무게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스트레스와 걱정도 물 컵에 들어 있는 물과 같습니다. 내게 닥친 스트레스를 잠깐 동안 생각하는 일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문제가 되고 머리가 아파옵니다. 만약 하루 종일 생각한다면 당신은 마비됨을 느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리겠지요.


"미래에 관한 한 그대의 할 일은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 생텍쥐페리


시험을 잘 보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매듭'을 지어가면서 목표에 다가갑니다. 매일 해야 할 것을 마치고 작은 목표들을 달성하면 적어도 오늘 하루에 나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창조란 곧 용기다. Creativity takes courage' - 마티스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굳은 의지가 아니라 '긍정적인 상상'이다. - 에밀 쿠에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움직이다네. - 파울로 코엘료


색채는 건반이고 눈은 망치다. 영혼은 많은 줄을 가진 피아노다. - 칸딘스키


환경이란 내가 어디를 갈 수 있을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시작할지를 결정할 뿐입니다.


붉은색은 기본적으로 혈압과 체온, 신경조직을 모두 자극하는 색이기에 사람을 흥분시키면서 동시에 해소도 시키는 양가적 기능이 있습니다. 마냥 쉬고 싶을땐 푸른색 계열이 좋지만, 내가 하는 일에 몰두한 상태에서 스트레스가 극적일 땐 오히려 붉은색을 보아도 좋습니다.


스트레스 중에서도 잔소리가 주는 스트레스의 강도는 상당하죠. 잔소리는 당연히 잘되라는 의미로 하겠지만, 듣는 쪽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예민한 상태에서 듣는 잔소리는 관심보다는 간섭으로 느껴지게 마련이니까요. ...
잔소리를 녹음시켜 30초간 들려주고 뇌의 활성도를 측정했더니, 부정적 감정을 처리하는 뇌 부분이 활성화되고 전두엽과 두정엽, 측두엽 등 사회성과 관련된 부분은 비활성화되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즉, 뇌가 스트레스를 받아 소통을 멈춘다는 뜻힙니다. 혼자 있고 싶다는 신호를 내보내는 것이지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788046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912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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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검사 도베르만> 마지막회  대사 중 군인을 검사로 바꿔 패러디.


(노화영, 오연수 분) 전 한순간도 개인을 위해 산 적이 없습니다. 나라와 국민만을 위해서 복무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이 나라와 평화의 안녕, 그거 누가 준겁니까? 내일 당장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에서 군인으로 산다는게 어떤건지 당신들은 압니까? 전 군대의 기강을 지키기 위해 계급과 명령을 목숨같이 여겼고 강한 군인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이겁니까?

(도배만, 안보현 분)피고인은 지난 20년간 군인이라는 직분을 이용해 온갖 끔찍한 범행을 저질러 왔으며 계급 위에서 자기의 범행을 치밀하고 간교한 방법으로 은폐해 왔습니다. 평소 피고인은 군인을 신분이라 여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지만 맹목적인 권력에대한 탐욕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렸습니다. 결국 피고인같은 군인이 군대에 있기 때문에 군대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급은, 명령은 오직 이 나라를 위해서 그 존재 이유가 있으며 결코 개인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검찰개혁에 반대하는 검사들의 생각)
검찰에 소속된 검사들은 한순간도 개인을 위해 산 적이 없습니다. 나라와 국민만을 위한 공익의 대표자로서 법 집행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이 나라의 평화와 안녕, 그거 누가 준겁니까? 온갖 부정부패와 범죄 속에서 공정과 정의를 지키는 검사로 산다는게 어떤건지 당신들은 압니까?
우리는 검사동일체 원칙에 따라 검찰의 기강을 지키기 위해 상명하복을 목숨같이 여겼고 막강한 검찰 권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이겁니까?

(검찰개혁을 바라는 국민의 생각)
지난 70여년간 일부 검사들은 검사라는 직분을 이용해 정치권력, 재벌, 언론 등과 결탁하거나 스스로의 출세와 권력을 얻기 위해 검찰권력에 도움이 되는 사건에 대한 불기소, 무혐의 처분 또는 선택적 기소를 하고 기획수사와 위증교사까지 서슴지 않으며 같은 검찰 내부의 범죄에 대해서는 묵인과 99만원 불기소 세트와 같은 것을 만들어 면죄부를 주는 공정, 진실, 정의, 인권, 청렴에 어긋난 행위를 해왔고 검찰 권력 위에서 자기들의 이러한 행위를 치밀하고 간교한 방법으로 은폐해 왔습니다. 평소 그들은 검사를 신분이라 여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지만 맹목적인 권력에대한 탐욕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렸습니다. 결국 공익의 대표자로서의 검찰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검사들이 검찰에 있기 때문에 검찰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검찰에게 부여한 권한은 오직 이 나라를 위해서 그 존재 이유가 있으며 결코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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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나 벽에 부딪혔을 때,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사람,
무슨 일이든 남탓으로 돌리는 사람.

남탓이 이기심과 군중심리가 결합해 극에 달하면 타인에 대한 혐오로 번진다.
바이러스와 같이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옮아간다는 것이다.

혐오 바이러스! 몸에 질병을 옮기는 바이러스 뿐 아니라 정신에 병을 옮기는 바이러스도 조심하자.

"일어난 비극의 대부분이 자신은 옳고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는 틀렸다고 단정한 데서 야기되었다." -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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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었다."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 갖은 것을 지키기 위해 삶의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가르침!

 

 

[본문발췌]

 
 
인간이 아니라 시간이 주인공인 세계에서 속절없이 미끄러지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막막했다. 그리고 그리웠다. 울고 있는 내게 '왜 그리 슬피 우느냐?'고 진지하게 물어주는 이가, 그런 스승이. 스승이란 무엇인가. 시인 이성복은 스승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스승이라고. '죽음의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이쪽으로 바지만 걷고 오라'고. 멘토나 롤 모델, 레퍼런스가 아니라 정확하게 호명할 수 있는 스승이 곁에 있다면, 우리는 애틋하게 묻고 답하며 이 불가해한 생을 좀 덜 외롭게 건널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채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렇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고 있나? 컵이지.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그러니 화도 나고 환희도 느낀다네. 저 살마 왜 화났어? 뜨거운 물이 담겼거든. 저 사람 왜 저렇게 쌀쌀맞아? 차가운 물이야. 죽으면 어떻게 되나?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니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마음을 비워야 영혼이 들어간다.
 
 
"민주주의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라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 간곡히 당부하네만, 그대에게 오는 모든 지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말게나."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 "우리가 잊고 있던 것 속에 진실이 있어.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네.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 은폐가 곧 거짓이야."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질문하는 한, 모든 사람은 배우고 성장한다. 질문은 자기 모순적이고 연약한 인간이 이 미스터리한 세계와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내가 낯선 타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처음에 쉽게 결정했던 일반론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거지. 그걸 깨닫기 위해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거야. 일반론이 진리인 줄 알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하네.
 
 
타자성의 철학.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네.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왜곡해선 안 돼.
 
 
"인간이면 언어를 가졌고, 이름을 가졌고, 지문을 가졌어. 그게 바로 only one이야. 무리 중의 '그놈이 그놈'이 아니라 유일한 한 놈이라는 거지. 그렇게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거야.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나을 끌어안겠나? 내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있어? 그런데 '나 없는 우리?' 아니 될 말씀이야. 큰일 날 소리지. 그래서 내가 사이를 강조했잖아. 나와 너 사이. 그 사이에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 거지."
 
 
"앞으로 점점 더 interface 접속장치가 중요해.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겨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느느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컵에 달렸으니 컵의 것이게지만, 또 컵의 것만은 아니잖아. '나 잡아주세요'라는 신호거든.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그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그런데 또 한 편 컵에 손잡이가 아니라 자기 이름이 쓰여 있다고 생각해봐. 갑작스럽게 내 것이 되잖아. 같은 사물인데도 달라지는 거야. 유일해지는 거지. 이런 생활 속의 생각이 시가 되고 에세이가 되고 소설이 되고 철학이 되는 거라네."
 
 
빈자들은 늘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이웃의 부탁을 선선하게 들어주는 한편, 부자들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 없기에 이웃을 신뢰하지도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 데이비드 데스테노
 
 
참과 거짓을 다루는 진眞(생각을 다루는 인지론), 선악의 행위를 다루는 선善(실천을 다루는 행위론), 아름다움과 추함을 제 각자 느끼고 판단하는 미美(표현을 다루는 판단론). 인간으로 풍부하게 누리고 살아가려면 이 세가지 영역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최근에는 '자기다움의 윤리'로 진정성이라는 화두가 올라오면서, 가짜 아닌 진짜를 향한 욕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 사람이 착한가, 이타적인가'를 묻는 도덕성, '그 사람이 예쁜가, 실력이 있는가'를 묻는 표현의 힘에 앞서 '그 사람이 정직한가, 일관되는가'라는 진정성의, 잣대로 과거와 현재의 '위선'이 낱낱이 들춰지기 때문이다.
 
착하지 않아도 죄책감 느끼지 않고, 예쁘지 않아도 개성으로 긍정하며, 그 '다름의 값'을 치러야 한다면 기꺼이 타인의 미움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용기 있는 사람들, '진짜 나'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 참 자기를 거부하는 거짓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스마트한 개인들이 사는 세상. 점차 이 세계는 그렇게 '진'의 세계를 중심으로 수만가지 바코드의 선과 미를 재배열하며 나날이 팽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표준으로 하지 않는 것이 과학, 인간을 배제해야 성립되는 것이 과학. 과학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라는 표준은 가짜야. 인간을 기준으로 하면 제멋대로 되거든. 사람은 몹시 제멋대로야. 어디로 튈지 모르지. 개는 훌륭하고 벼룩은 나쁘고 까마귀는 흉악하고 꽃은 아름다워! 그런 저마다의 개별적인 주관이 과학의 시야에서는 이물질이야. 인간을 없애야 과학이 선명해져. 그게 수학이라네. 수학은 인간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거든.
 
문화예술은 그렇지 않아.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네. 과학과 예술이 대립하는 이유는 분명해. 과학은 모든 것을 '비인간'으로 가정하고, 예술은 모든 것을 '인간'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라네. 물론 예술 중에서도 추상예술이 있지. 그런데 그 또한 인간 경험을 바탕으로 한 거야. 인간의 시각 경험으로 미술이, 청각 경험으로 음악이, 언어 경험으로 문학이 탄생한다네. 인간의 경험, 그 자체는 추상이 될 수 없거든.
 
 
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 걷는 것은 산문이고 춤추는 것은 시지. 인생을 춤으로 보면 자족할 수 있어. 목적이 자기 안에 있거든.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고 사는 것이 바로 나에게는 춤이 된다네.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라네.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남들이 보기엔 철 지난 구식 스카프라도, 어머니가 물려준 것은 귀하잖아. 하나뿐이니까. 우리는 겉으로 번쩍거리는 걸 럭셔리하다고 착각하지만, 내면의 빛은 그렇게 번쩍거리지 않아. 거꾸로 빛을 감추고 있지. 스토리테링에는 광택이 없다네. 하지만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지.
 
 
글을 쓸 때 나는 관심, 관찰, 관계... 평생 이 세 가지 순서를 반복하며 스토리를 만들어왔다네. 관심을 가지면 관찰하게 되고 관찰을 하면 나와의 관계가 생겨.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한 커트의 프레임에서 관찰이 이뤄지고, 관계가 이뤄져. 찍지 못한 것, 버렸던 것들이 나중에 다시 연결돼서 돌아오기도 해.
 
 
남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면서 길 잃지 않은 사람과 혼자 길을 찾다 헤매본 사람 중 누가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나.
 
 
'나는 아버지가 잡아주는 기름진 양보다 가시밭길 헤매다 굶주린 속에 따먹은 아가베 열매가 더 달았어요' - 앙드레 지드, <탕자, 돌아오다>
 
 
신념처럼 위험한 게 어디 있나?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사인데 '예스'와 '노우'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거든, 메이비maybe를 허용해야 하네 메이비maybe가 가장 아름답다고 포크너가 그랬잖아. '메이비maybe'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 오늘도 내일도 똑같으면 뭐하러 살 텐가. 진리를 다 깨우치고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네. 이제 다 끝났잖아. 서울이 목표인 사람은 서울 오면 끝난 거야.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유지, 반환지가 있을지언정 목표는 없네. 평생을 모험하고 방황하는 거지. 길 위에서 계속 새 인생이 일어나는 거야. 원래 길의 본질이 그래. 끝이 없어. 이어지고 펼쳐질 뿐.
 
 
꿈은 이루는 게 아니라 지속하는 것. 꿈이라고 하는 것은 꿈 자체에 있는 거라네. 역설적이지만, 꿈이 이루어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그래서 돈키호테는 미쳐서 살았고 깨어나서 죽었다고 하잖나. 상식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안 되는 헛소리일 수도 있어.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 돼라.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서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
 
 
자기 무늬를 짜면서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삶, 그게 아이덴티티거든. 자기 무늬의 교본은 자기 머리에 있어. 그걸 모르고 일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다가 처자식 먹여 살리고, 죽을 때 되면 응급실에서 유언 한마디 못하고 사라지는 삶.... 그게 인생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나? 한순간을 살아도 자기 무늬를 살게.
 
 
돈을 받는 노동이라도 자기 생각이 들어가 있고 자기만의 성취의 기준이 있어. 그때 비로소 '그림자 노동'에서 벗어나는 거야. 예술가가 되는 거야. 노동을 하는 순간에도 예술을 하고 있는 거야.
 
 
추방하고 격리하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야. 반대로 상처와 활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사회, 그게 창조적인 사회고 희망이 있는 사회. 악, 퇴페, 질병... 이런 것까지 포용할 수 있는 사회가 진짜 건강한 사회.
 
 
지우개 달린 연필, 지우는 기능과 쓰는 기능을 한 몸뚱이에 달아놓은 그게 우리 인생이잖아. 비참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고 망각과 추억이 함께 있으니 말일세.
 
 
자기는 남에게 배울 것도 없고 남을 가르칠 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 그게 자족이지. 자족에 이르는 길이 자기다움이야.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게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분명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어. 내가 돌아갈 곳이니까.
 
촛불도 마찬가지야. 촛불이 수직으로 타는 걸 본 적이 있나? 없어. 항상 좌우로 흔들려. 파도가 늘 움직이듯 촛불도 흔들린다네. 왜 흔들리겠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야.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도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네.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직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 파동을 만들지. 그게 살아 있는 것들의 힘이야.
 
촛불은 끝없이 위로 불타오르고, 파도는 솟았다가도 끝없이 하락하지. 하나는 올라가려고 하고 하나는 침잠하려고 한다네. 인간은 우주선을 만들어서 높이 오르려고도 하고, 심해의 바닥으로 내려가려고도 하지. 그러나 살아서는 그곳에 닿을 수 없네. 촛불과 파도 앞에 서면 항상 삶과 죽음을 기억하게나. 수직의 중심점이 생이고 수평의 중심점이 죽음이라는 것을.
 
 
 
동양의 탄생학과 서양의 유전학은 동시에 말하고 있어요. 뱃속에서의 10개월이 성격, 기질, 신체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고. 스승이 10년 가르친 게 뱃속에서 가르친 10개월만 못하다잖아. 그래서 지혜로운 한국인은 태중의 아이를 이미 한 살로 보는 거예요.
 
 
신은 생명을 평등하게 만들었어요. 능력과 환경이 같아서 평등한 게 아니야. 다 다르고 유일하다는 게 평등이지요. 햇빛만 받아 울창한 나무든 그늘 속에서 야윈 나무든 다 제 몫의 임무가 있는 유일한 생명이에요. 그 유니크함이 놀라운 평등이지요. 또 하나, 살아 있는 것은 공평하게 다 죽잖아.
 
 
지금은 밀물의 시대에서 썰물의 시대로 가고 있어요. 이 시대가 좋든 싫든, 한국인은 지금 대단히 자유롭고 풍오하게 살고 있지요. 만조라 할까요. 그런데 역사는 썰물과 밀물을 반복해요. 세계는 지금 전부 썰물 때지만, 썰물이라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갯벌이 생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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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포털 뉴스를 가득 메우고 있는 키워드는 "검수완박", "검찰개혁"이다.

내용의 긍, 부정과 찬성, 반대를 살펴보면 부정과 반대가 압도적 다수로 보인다.

 

도대체 왜 검찰개혁과 검찰의 역할에서 수사권을 제외하는 것에 반대할까?

 

아무리 검찰개혁 반대의 이유를 포장하더라도 진실은

  1. 없는 죄도 만들 수 있고, 있는 죄도 그들 편에 서면 묻지 않을 수 있으며, 같은 죄라도 자신들의 권력유지와 기득권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에 따라 선택적 수사와 기소를 달리하거나 죄를 부풀릴 수 있는 권력을 놓을 수 없다.
  2. 검사 퇴직 후 전관 예우로 벌어 들일 수 있는 돈의 문제
  3.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잃어 자신들의 죄는 처벌하지 않는 제 식구 감싸기의 한계 봉착에 대한 두려움 

 

스스로가 검찰 권력의 기득권층이면서 자신들의 부패를 도려내지 못하며 반대하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개혁이란 것은 모두가 완벽할 수 없기에 진통이 따르고 문제점이 드러날 수 있으나 개혁이 시작되어야 그러한 문제도 보완될 수 있다.

 

검찰은 지금 주장하는 위헌이니, 범죄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 않아 사회질서 혼란이니 국민이 고통받는다는 둥 명분과 사실관계도 정확하지 않은 반대이유만 내세우지 말고, 앞서 말한 세 가지 근본적 이유에 대해 스스로 떳떳한지 자문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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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행이 설레이지만, 자연과 함께하는 여행은 정신과 몸을 더 건강하게 만든다.


[본문발췌]

여행의 정형화는 여행의 자살이다. - 다치바나 다카시


여행은 유랑이다.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낯선 장소로의 떠돎이다. 날뛰는 마음 망둥이를 가이드 삼은 방랑이자 배회다.
이는 매우 품위 있고 자유로운 행위라서 조급하게 서두르거나 망설일 게 없는 활동이다.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 체호프


술은 첫물에 취하고 사람은 끝물에 취한다.


사람이 자생력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역시 자연이 아닐까요. 자연 속에서 오감을 발달시키고 본성을 바라보는 기회를 자주 가짐으로써 본연의 생명력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이죠. 자연에 내 몸을 합일시키기, 이게 살아갈 길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달팽이가 아니지만 누구나 저마다 존재라는 무거운 집을 등에 지고 산다.
편리성과 기능성만을 중시하는 도시의 물적 속성이 삶의 품위를 훼손한다고 읽는다.


내가 사는 여기가 지옥일 수도, 천국일 수도 있다는 건 은유가 아니라 바로 삶의 실상이다. 문제는 욕망의 조절이다.
진부한 욕망들에 눈멀어 감히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지 마라.


자연은 농부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창작인에게도 중요합니다. 자연이 불러일으키는 영감으로 창작하는 화가나, 자연 안에서 결실을 거두는 농부나 서로 다를 게 없는 것이죠. - 최용건 화백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9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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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회와 탐험은 우주 그리고 가상현실에서 벌어질텐데 블록체인, 메타버스, NFT는 가상현실이 구체화되고 일상에서 활용되는 기반이 될 것이다.

 

 

[본문발췌]

 


메타버스,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활동이 일어나는 초월 공간(현실이나 세계)'.
공간을 초월한 만남과 연결, 상호작용을 통해 현실과는 다른 사회적 관계, 경제적 기회를 얻는 초월 공간.

 


메타버스가 여타의 흐름과 가장 크게 구분되는 지점이 경제활동에 있다는 것입니다.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개인들 간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메타버스의 중요한 구성요소. 이것이 메타버스에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이유이다.

 

 

메타버스를 결정 짓는 7대 메가트렌드

  • 멀티 아바타Multi-Avatar
  • 확장 경제Extended Economy
  • 쌍방향Two-way interaction
  • 익명성Anonymity
  • 플레이 미션Play mission
  • 유사현실In similar life
  • 동시성At the same time

메타버스 내 익명성은 개인의 설명을 통해서 강화되고 약화됩니다. 남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가운데 자기 캐릭터를 구축하는 거지요. 그래서 메타버스에서는 판단하는 문화보다 설명하는 문화가 앞서게 됩니다. 자신을 구성하는 주요 요인이 자기 판단과 그에 따른 설명이라면, 자신을 인식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타인의 눈은 별로 기여하는 것이 없습니다. 타인의 판단은 보통 부정적이기 십상인데요. 이보다 더 부정적인 건 타인의 눈을 의식한 자기 인식이에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인데, 현실에서는 타인의 판단을 거부하거나 객관적으로 수용하기가 쉽지 않죠.

메타버스에서는 스스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메타버스 내에서는 자신을 설명하며 자신을 알게 되고, 자기를 성찰하며 자기애가 생기기도 합니다. 타인의 판단에 의존하기보다 직접 설명하기를 실천해보면 자아존중감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메타버스의 익명성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는 익명성으로, 자기 자신이 온전하게 홀로 존재하는 경험을 하게 합니다. 언제든지 단절을 택할 수 있지요. 선택적으로 익명성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익명성에 숨고 싶거나, 익명성 뒤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이 은근히 많거든요. 익명성은 메타버스에 많은 사람을 유입시키는 가장 중요한 매력이 될 수 있습니다.

 


"놀이의 형식적인 특성을 정리하자면, 의식적으로 '일반적인' 삶을 벗어나 행해지는, '심각하지 않은' 지속적인 자유활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플레이어를 강렬하고 완전하게 흡수하는 활동이다." - 요한 하위징아
  
놀이의 네 가지 요소 : 경쟁(agon), 모방(mimicry), 운(확률, alea), 현기증(ilinx)

 

 

생각이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일이죠. 하지만 쉽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는 공감합니다. 그 공감은 두 가지 근거에 기인하는데,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게으름입니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느끼고, 실패를 각오하고, 일단 빠르게 실천해보는 것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듣기 능력입니다. 흔히 '경청'이라고 하지요. 무작정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한 말의 주제, 맥락, 감추어진 속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잘 듣는다고 해서 문해 능력이 저절로 갖추어지는 게 아닙니다.

  • 문해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에서 핵심을 찾아내는 훈련을 늘 의식적으로 해야 합니다. 보통 발화 행위는 '설명적 말하기'와 '설득적 말하기'로 이루어지는데, 설명적 말하기는 정보를 전달하고, 설득하는 말하기는 주장을 전달하지요. 설명적 말하기는 핵심 정보가 있고, 나머지는 핵심 정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설득하는 말하기는 주장이 있고, 나머지는 그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이렇게 주장과 설명의 핵심을 먼저 잡고, 다른 말의 구성을 파악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 협오, 증오 발언 배척하기
  • 권위를 버리고 존중의 자세. 현실의 나이와 직업을 굳이 묻거나 궁금해하지 않는 태도를 가져야 진정으로 평등한 소통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부하 직원급이라고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상대방 말에 귀를 기울이는 방해가 됩니다.

 


룰을 따르는 사람이 아닌 룰을 만드는 사람

  • 기존 산업사회에서는 대규모 공장을 돌려야 하므로 규격화되고, 계량화된 작업의 프로세스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매뉴얼이죠. 모든 직무는 매뉴얼화되어 있고, 사람을 뽑을 때는 매뉴얼을 잘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래서 인재의 기준은 성실, 끈기 같은 것이었죠. 기존의 매뉴얼을 학습한 뒤에 그것을 잘 수행하는 사람이 필요했으니까요. 교육 역시 그런 인재를 양성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같은 나이 또래의 학생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똑같은 것을 배우며, 누가 더 잘 암기기했는지를 시험하는 방식으로요.
  • 메타버스가 현실과 다른 점은 돈, 경험, 연륜, 인맥 없이 혼자서도 얼마든지 창업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메타버스에서는 가게를 만들고, 물건을 확보하고, 상품을 보관하고, 인테리어하는 등의 돈이 들지 않습니다. 오로지 시간만 들어갑니다. 그 시간은 경험과 바꿀 수 있는 자산이니까 시간이 들어가는 것도 아깝지만은 않습니다.
  • 메타버스에서는 제약 없이 룰을 만들어가는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메타버스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상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한계 없는 상상력을 구현해야 승부수를 던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드는 창의적 능력은 소수의 예술가에게 허락된 능력입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또 메타버스에서 필요한 창의력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르게 활용하거나 융합하는 능력입니다.
  • 창의성은 전제를 깨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전제라는 것은 상식인데, 그건 고정관념, 편견, 사고의 한계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2021년의 현대인은 기술과 상황이 워낙 급변하는 '뷰카VUCA'(변동성Volatile,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의 앞글자를 모은 단어로 현대사회의 단면을 상징) 시대를 살고 있지요. '뷰카'는 너무나 빠른 최근의 경영환경을 묘사합니다. 메타버스에서는 하루아침에 무언가 세워졌다 사라지는 일이 반복될 수 있어요. 이런 환경 변화는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를 수 있습니다. 해보고 안 되면 수정하고, 다시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 거의 유일한 성공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메타버스 내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시작하셔야 합니다. 시작한다고 해서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 중에 시작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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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에 대한 환상, 삶은 현실이다.

 

 

 
[본문발췌]

 

 
홀로서기 정신의 부족.
  • 부모에게 의존하고, 학력에 의존하고, 직장에 의존하고, 사회에 의존하고, 국가에 의존하고, 가정에 의존하고, 술에 의존하고, 경제적 번영의 시대에 의존하면서 이럭저럭 수십년을 살아온 삶. 홀로 설 기회를 그때마다 잃고, 그저 공부나 일을 하면서 겪은 혹독함 정도를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당신은 자신에게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또 도피해 온 것은 아닐까요.
  • 한 사람의 성인이 몸으로 익혀 두지 않으면 안 될 조건을 그저 지식으로만 머릿속에 채워 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 '인생 2막'은 전반생에서 얻지 못한 홀로서기 정신을 되찾기 위한 시련의 장으로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그래야만 되는 것이 아닐까요.
  • 만약 당신이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면서 살아왔다면, 그리고 홀로서기를 한 어른으로 60세를 맞이했다면, 이후의 인생 목적이나 삶의 보람 등을 마음에 명확하게 품고 있을 것입니다.
  • 새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생애에 걸쳐 추구하고 전력할 일이나 취미가 있어서 곧바로 그것들로 옮겨 갈 수 없다면 지금껏 헛되고 무의미하게 살아왔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생활 환경으로는 가혹하다는 의미입니다. 여행자가 아닌 도시에서 이주한 당신은 더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농민들이 오랜 시간 물 흐르듯이 척척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어릴 적부터 육체 노동으로 단련해 온 강인한 다리와 허리로 힘을 잘 배분해 전혀 무리를 하지 않는, 실로 효율적인 일머리를 몸에 익혔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야채를 길러 먹으려고 재미 삼아 괭이를 드는 수준이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60세가 넘어 처음으로 농사일을 시작해 보겠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입니다.
 
물론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법 등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야채를 기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처음에 각오했던 만큼 어렵지는 않습니다. 처음 수확한 야채를 식탁에 올렸을 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거의 느껴 본 적 없는 감동에 젖습니다. 농경민족으로서 본능이 깨어나 피가 꿈틀거리고 환희에 찰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감동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농작물의 이모저모를 얼추 이해하게 된 단계에서 순식간에 빛이 바랩니다.
 
우선 너무 많이 거둔 야채가 고민거리가 됩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수확해야 하는 일에 진절머리가 나고 말 것입니다. 소금에 절이고 된장찌개에 넣고 다른 것에 곁들여도 다 먹어 치울 수가 없습니다. 도시라면 가까운 이웃에게 나눠 줄 수라도 있을 텐데 주변이 죄다 농가이다 보니 아까워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먼 곳에 사는 친구나 아는 사람에게 떠넘겨 버리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운송비가 장난이 아니어서 이것 또한 좌절됩니다.
이왕이면 여러 야채를 먹고 싶다는 생각에 다양한 품종을 소량으로 기르기로 마음먹습니다. 실제로 해 보면 너무 힘듭니다. 야채마다 성질이 달라 기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의 양이며 잘 맞는 흙이며 일조량 등이 모두 달라 한 밭에서 기를 수가 없습니다.
간신히 출하 단계에 이르더라도 수입으로 연결하려는 생각은 꿈에도 해서는 안 됩니다. 야채의 형태를 띠었을 뿐 맛, 크기, 양 등에서는 시장이 요구하는 수준에 한참 못 미칩니다.
 
농촌의 인구가 왜 그렇게 줄어드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멋지게 생각하는 삶을 왜 젊은이들이 저버리고, 당신이 기피하는 도시로 떠나선 정년퇴직해서도 돌아오지 않을까요. 그것은 농사일이 고되고, 채산에는 맞지 않으며, 고령자의 체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완전히 초보자인 당신의 안이한 생각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쳐 있을 때 결단하지 마라.
오랜 세월을 거쳐 축적해 온 그 귀한 지식과 경험과 기술과 인간관계를 몽땅 하수구에 버리고 마는 식의 삶은 순수함과는 분명 다릅니다.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실로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석합니다.
시골로 거처를 옮겨 지치고 지친 심신을 충분히 쉬게 하고픈 마음은 압니다만 그런 피로야 반년쯤 쉬면 바로 사라집니다. 다시금 일하고픈 의욕이 솟구칩니다. 그때 당신이 아직 도시에 있다면 재기할 기회는 시골에 비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가장 지쳐 있을 시기에 중대한 결단을 내리는 일은 피해야만 합니다.
설사 급하게 시골로 이주했다 치더라도, 의지와 지혜만 있다면 도시인다운 발상으로 새로운 일을 개척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시골로 왔다고 해서 당신이 그 전까지 가졌던 전부를 버리고 무리를 해서까지 모든 것을 시골 상황에 맞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을 깨닫고, 퇴직 전에 하던 일을 혼자 그대로 꾸려 가는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좀 더 간접적이고 유연한 아이디어로 시골에 적합한 작은 사업을 벌여 궤도에 올린 똑똑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생 2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품격이란 어떠한 달콤함에도 어떠한 회초리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자신이 비록 틀렸더라도 권위나 권력에 아양을 떨지않는 의연함 그 자체입니다. 내 생각으로 판단하고, 혼자일지라도 행동할 때에는 행동한다는 독립된 한 인간에게만 적합한 말입니다.
 
 
 
시골 생활을 시작할 때 그 지역 주민들과 접촉하는 정도를 미리 정해 두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아주 중요한 문제에는 단호한 양자택일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긴밀히 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둘 중 하나만 있습니다. '적당히'와 같은 중간적이고 회색적인 답이 도시에서는 있을 수 있어도 시골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고 미움을 사는 편이 어울리고 나서 미움을 사는 편보다 원망이 훨씬 더 적다는 점입니다. 후자의 경우 일방적인 원한을 사고 말아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결국 그곳에서 생활할 수 없어 야반도주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로 내몰리기도 합니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지역 주민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인정받고 싶어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피하는 쪽이 좋습니다. 주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어떤 타협도 사양치 않겠다는 식의 비굴한 태도는, 양쪽이 대등해야 한다는 교제의 기본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구가 극히 적은 지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지 처음부터 확실한 목표를 세우는 일입니다. 확실한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가 시골 생활의 성패를 좌우할 것입니다.
유유자적하며 조용히 살고 싶다는 식의 추상적인 바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 하면 할수록 심오함이 느껴지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하루가 다 지나갔을 정도로 모든 것을 잊고 몰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도시에서 이주애 온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안심하고 어울릴 수 있을까요.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입니다.
시골로 온 무리에는 어딘가 수상쩍은, 사기꾼 비슷한 이가 섞여 있기 때문에 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골에서 살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생계가 막막한 사람, 빚 갚기가 힘들어 도망쳐 온 사람, 도시에서 신용을 잃어 대접을 못 받게 된 사람,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는 사람 등 아주 다양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연이 너무 좋아서. 자연 속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 지방의 토착 문화나 예술을 세계로 알리고 싶어서. ...
질문한 것도 아닌데 상대편에게 이런 이유를 늘어놓는다면 일단 그 사람은 상대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에서 뚜렷한 직업도 없이 말만으로 세상살이를 하려는, 그런 주제에 대의명분만은 찾고자 하는 교활한 철면피들입니다.
또한 마을을 일으키고 면을 부흥시키기 위해 지역 사회끼리 활발히 교류해야 한다고 거의 반강제적으로 부추기는 이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들은 이대로 두면 마을과 면이 소멸해 버린다고 위기감을 조장하며 광고 이미지 비슷한 꿈같은 제안을 합니다. 그러다 예산이 내려오거나 후원자가 생긴 시점에서 활동의 주도권을 잡아 쥐고는 너무나 그럴싸하게 행동하면서 반은 놀면서 먹고살아 가려고 합니다.
 
 
 
맑디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신선한 먹을거리에 둘러싸인 대자연 속에서 도시 생활에서 완전히 망가져 버린 건강을 되찾을 거야 하는 이기적은 바람을 간절히 품고 이주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분명 도시를 뒤덮고 있는 공기는 너무나 좋지 않고, 수돗물은 끓이더라도 마시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쉴 새 없이 들리는 소음과,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의 잦은 변화와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병에 걸리는 한 원인임은 전문가들도 모두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골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곧바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애써 환경을 바꾸더라도 생활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맑은 물도 공기도 고요함도 그저 잠시 위안을 주는 정도의 조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컨대 술과 담배, 폭음과 폭식, 밤샘 등을 완전히 그만두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담배와 비교하면 자도차 배기가스는 이렇다 할 독성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또한 매일 안 마시면 배기지 못하는 술을 끊지 않고서는 당신 몸은 나이보다 더 빨리 늙어 가고 말 것입니다. 원흉은 담배와 술에 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실컷 먹는다는, 동물적인 식사 태도도 큰 문제입니다.
 
 
 
자연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무엇보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홀로서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몸에 나쁜 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야생동물은 곧 죽음을 통해 사라질 운명에 있습니다. 다른 것들에 의지하려 하거나 주의를 게을리하자마자 소리도 없이 슬며시 몸이 파멸되기 시작합니다.
 
 
 
사회적 지위를 만족시켰는지 아닌지로 승리자와 패배자를 가르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진정한 패배자란 자신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거나 다스릴 방향을 잡지 못한 사람을 이를 때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지성과 이성에 부합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결코 그 반대는 아닙니다. 동물로 태어나 동물인 채로 일생을 보낸 인간이야말로 진짜 패배자입니다.
 
 
 
은퇴 전에 당신은 꿈꾸던 인생 2막에 대해 열심히 늘어놓았습니다. 우선 오붓하게 해외여행을 가자로 시작해서, 같은 취미 생활을 하고....
하지만 은퇴하자마자 당신은 마치 혼이 나가 버린 것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생각하는 일도 움직이는 일도 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자기만 하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중간 같은 성가신 존재로 변해 배우자를 하루 종일 압박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버린 것일까요.
일 자체나 대인관계에서 오는 긴장을 느낄 필요가 없어지고 시간에 구속당하지 않게 되어 마음이 완전히 풀어졌기 때문일까요. 분명히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원인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홀로서기를 한 성인 남성이 되지 못했고 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어린애의 혼을 가진 채 60년을 지내 왔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받아야만 움직이고 자신의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목각 인형, 타율적인 빈껍데기 인생밖에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당신은 다시금 어린애 시절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어른아이로.
 
 
 
겉만 보고 시골살이의 결단을 내린다. 그때 당신들의 눈길은 바로, 낯선 땅에서 좋은 부분에만 마음을 빼앗기며 지나가는 여행자의 시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행하는 사람과 정착해서 사는 사람의 입장은 크게 다릅니다. 요컨대 당신들은 인생에서 최대이자 최악의 충동구매를 하고 만 것입니다. 실패했을 때의 후회가 흔한 후회의 범위를 넘어서는 너무나 어리석은 짓을 한 것입니다.
당신의 시골 생활의 정점은 땅을 사고, 집을 짓고, 그 지역으로 이주했을 때입니다. 신축 기념, 이사 기념, 새 출발 기념을 하려고 도시에서 사귄 친구들을 초대해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연 날이 행복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들이 친구나 지인들의 시선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빠르면 수개월, 늦어도 몇 년 후에는 권태감과 고독감과 좌절감에 휩싸이는 처지가 될 것입니다. 낮에는 그다지도 눈부시던 광경이 해가 지기 무섭게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에 휩싸이고 맙니다. 어둠의 깊이에는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짐승에게 잡아먹히는 약한 동물로서의 방어 본능이 밤마다 살아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어느 사이에 도시 친구들도 들르지 않게 되고, 지역 주민들과 삶의 방식이 달라 지칠 대로 지쳐 갑니다. 자연에서 받는 감동은 점점 줄어들고, 자연이 주는 위협에 겁을 먹게 됩니다. 자연은 결코 이미지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절실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는 현실 그 자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시골에서는 내 일은 내 힘으로 한다는 강한 마음가짐과 체력이 필요합니다. 이주하고 나서 도시의 편리함과 비교하며 불평을 해 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스스로 해내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면 굳이 불편한 곳에서 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불편함이, 너무 편리한 도시 생활로 흐늘흐늘해진 당신 심신을 단련시켜 줍니다.
불편함이, 당신 뇌를 계속 지배해 온 싸구려 이미지를 말끔히 제거하고 가혹한 현실과 대치하는 묘미를 알게 해 줍니다.
불편함이, 당신 정신을 본래로 돌려줍니다.
불편함이, 당신 모습을 본래로 돌려줍니다.
이렇게 발상을 전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시골 생활을 단념하는 편이 좋습니다. 아무리 오기로 버텨 보려 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한 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만 빛납니다.
진정한 감동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살고자 하든 한결같이 진지하게 살고, 바깥 세계와(현실과) 대치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귀촌에 앞서 알아 두어야 할 것들
  • 어딜 가든 삶은 따라온다
  • 풍경이 아름답다는 건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다
  • 농부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 구급차 기다리다 숨 끊어진다
  • 고독은 시골에도 따라온다
  • 고요해서 더 시끄럽다
  • 돌잔치에 빠지면 찍힌다
  • 친해지지 말고 그냥 욕먹어라
  • 엎질러진 시골 생활은 되돌릴 수 없다
  • 시골에 간다고 곤강해지는 건 아니다
  • 불편함이 치유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458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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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철학이다.


[본문발췌]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그순간부터 모든 사람은 탄생과 죽음, 사랑과 미움, 괴로움과 즐거움, 행복과 불행 등과 끊임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선과 악, 고귀함과 비천함, 성공과 실패, 고통과 즐거움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함께 따라다닙니다. 우리 삶 속에는 유쾌한 일도 고민스러운 일도 함께 있지요. 생활 속의 고민은 누구나 피할 수 없지만 가끔식 생기는 유쾌한 일들이 그런 고민을 잊게 해줍니다. 누군가 성공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줄곧 어른에게 의존하며 무슨 일만 있으면 어른들의 도움을 청했지요. 주변의 낯선 세계가 두려웠고 눈앞의 험난한 현실을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용기는 우리 인생의 필수품이랍니다. 평생 부모의 품에 누워 응석만 부릴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겠지요.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생물학적 생명의 탄생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불과해요. 사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사회학적 의미의 탄생과정을 거쳐야만 하지요.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 사람은 비로소 진정한 인생살이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풍부하고 복잡하며, 인생의 문제는 영원히 그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재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거나 불의한 재물을 위해 남을 다치게 하는 것은 행복에서 멀어지는 길이에요. 가장 큰 행복은 사회에서 칭송을 받을만한 일을 하거나 어떤 신념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고결한 행동에서 비롯된답니다.


행복이란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므로 사람이 백 명이라면 행복에 대한 백 가지 해답이 나오게 됩니다.


어떤 과학자의 행복의 조건.... (세 가지 조건 중 한 가지만 갖추고 있어도 사람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함)

  •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또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 진심으로 나에게 관심을 갖는 친구가 있는가?
  •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행복이란 개념은 너무나 모호해서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작 아무도 알지 못한다. - 칸트


포기를 배우고 행복을 얻었구먼.... - 소크라테스


자연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인생의 확실한 이상이었어요. 절제와 인내, 관용만 있다면 우리는 사람의 모든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들의 삶을 통해 자연주의적 행복관을 구현해냈어요. 자신의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용서는 모든 미움을 몰아내고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니까요...
아우렐리우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남겼어요.
아침에 일어나 자신에게 말하라. 오늘 내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을 만나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든 또한 오만한 사람이나 남을 속이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이나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만난다 해도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그들이 그런 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힘을 합쳐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적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재물과 명예, 향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장 큰 행복의 상징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 세 가지 조건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통 감각기관의 쾌락을 얻었을 때 스스로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점점 그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쾌락을 얻은 뒤에는 종종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또한 명예나 재물은 많이 얻을수록 욕망도 강렬해져 더 많은 명예와 재물을 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희망이 물거품이 되면 느끼게되는 절망은 말로 할 수 없으며 큰 근심도 잇따라 따라오게 되지요. 이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끝도 없는 고통에 빠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감각기관의 쾌락이 아니라 마음의 평온을 추구한답니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일 것입니다. 일단 재물과 명예, 권력같은 것을 포기하면 인간의 욕망도 단순해지고 인간의 생활 역시 평온해지게 마련이랍니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치 않은 요구를 줄이고 스스로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행복의 정의지요.




자유는 구속받지 않는 것일까?

밀은 '개인의 자유와 개성발전'의 의의를 인생의 목적이나 행복이며, 동시에 사회진보와 인류발전의 척도라고 주장했었요. 한 사회가 어느 정도 진보했는가는 얼마나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촉진하는가를 보고 판단하면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어디에서든 속박 가운데 존재한다." - 루소


자유는 인류가 가진 독특한 정신활동이자 인류와 다른 생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생물도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아요. 그들은 본능에 따라 생활하며 완벽하게 자연의 규율에 복종합니다. 오직 사람만이 자유롭게 생각하며 자유의 왕국을 이상으로 삼는답니다.


모든 자유에는 조건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유는 종종 상대적인 개념이랍니다. 하늘을 나는 매에게 공기가 없다면 과연 날 수 있을까요? 물속에서 자유로운 물고기지만 만약 물이 없다거나 물에 심각한 오염이 생긴다 해도 여전히 즐겁게 유유자적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조건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사회적 질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전제의 자유입니다.


자유는 완벽하게 자신의 일이며, 자아의 선택에는 어떤 기준도 없답니다. 자유는 행동을 의미하고, 이런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절망과 고통을 통해 자유를 경험하고, 진정한 고통은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지요. 사람은 자유가 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는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모든 일은 알 수 없는 동시에 또한 가능한 것이기에 과거나 현재, 미래와 대면했을 때 인간은 일종의 막연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유를 회피하기도 합니다. ... 흔히 말하는 절대자유란 이런 사실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선택에는 대가가 뒤따르기 마련이에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지요.




인간은 왜 고통을 받을까?

쇼펜하우어는 늘 인생은 고통과 불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런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인간의 생존의지에 있었지요. 이런 생존의지는 사람에게 있는 맹목적인 충동과 끝없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런 충동과 욕망이 생명의 본질인 고통을 결정해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며, 그도 안 된다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대개 이루어지기 어렵고, 사람은 더욱 강하게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지요. 인간의 충동과 욕망은 끝이 없어요. 하나의 욕망이 만족되면, 바로 다른 욕망이 생겨나지요. 만족은 잠시뿐 욕망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랫동안 행복할 수 없어요. 모든 만족은 또 다른 욕망의 출발점일뿐이지요.


현대 사회는 라디오, 영화, TV, 신문, 광고 등의 선진화된 전파수단을 이용해 사람들의 사유방식을 통제하며, 인간의 판단력을 잃게 만들었지요. 덕분에 사람들은 이런 매체의 조종과 제어를 받는 신세가 되었어요. 인간은 가짜가 되었고 기계가 되었으며, 영원히 순종하며 사는 자아를 가지게 되었지요.


문명이 인류의 존재와 발전을 오히려 위협한 것이에요. 물질이 풍부해질수록 오히려 정신은 빈곤하게 됐지요.


현대인은 깊은 고독과 억압, 근심에 시달리게 됐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려고 애완동물을 키우기 시작했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는 그 유효기간이 갈수록 짧아졌어요. 사람들은 쉽게 사람을 만났다가 쉽게 헤어지게 됐답니다. 그들은 남들과 쉽게 친해졌다가 또 쉽게 잊어버리게 됐어요. 인간관계의 변화 속도 역시 갈수록 빨라지고 있는 셈이지요. ...
현대인들은 풍부한 물질생활뿐만 아니라 충실하고 건전한 정신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해요. 정치와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방면에서 인도주의적인 개혁이 실현될 때 진정으로 건전한 사회도 수립될 수 있어요. 현대인이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더욱 풍부한 창조성을 가지려면 인도주의적인 사회시스템과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해요. 이런 사회 속에서라야 사람들은 서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 줄 수 있답니다.




사람에게는 왜 신앙이 필요할까?

현대문명은 인류에게 풍부한 물질적 성과를 안겨주지만, 동시에 수많은 정신적 불안도 가져다주었어요. 바로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이 신앙이며, 정신적으로 의지할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신앙은 우리 인생길의 항구가 되어줍니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사람은 정신을 추구한다는 사실이에요. 현실의 생활 속에서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날 때, 삶과 죽음의 모순이 발생할 때, 영원한 것과 찰나의 것 사이에 모순이 넘쳐날 때, 우리가 스스로 이런 모순과 충돌들을 깊이 생각해볼 때,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를 궁금해 할 때 그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신앙에 있다고 해요.




인간은 원래 사회적 동물일까?

자연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인간보다 사회화의 생명개체로서의 인간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어요. 사람의 모든 활동은 사회적 범위 안에서 전개되는 것이기에 사회성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듯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물이라면, 무엇보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되겠지요.


사람은 사회 속에서 자라고, 사회생활은 언제나 이런 성장 과정을 동반하지요. 그러나 사회는 절대로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며, 하나하나 살아있는 사람으로 구성된 조직이에요. 무수한 개체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 전체도 존재할 수 없어요. 개체의 주관적인 노력을 떠나서는 사회 역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답니다. 즉, 사회의 힘은 모든 사람 하나하나의 피와 땀이 어린 활동의 결과인 셈이지요.


개인이 사회를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 역시 개인을 떠날 수 없답니다. 개인은 사회 조직의 가장 기본적인 입자니까요. 이런 입자를 떠난다면 사회도 사라지고 말테지요. 결국 사람과 사회는 서로 의존하고, 영향을 주며, 작용하는 관계에요. 다시 말해 사회를 떠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며, 개인을 떠난 사회는 사회가 아닌 것이지요.


자아 의식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자아 의식의 성숙과 생명의 사회화는 동일한 과정임을 알 수 있어요. 자아 의식은 사회의 영향에 크게 좌우되며, 사람은 사회의 기준에 맞춰 자신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생존의 이상에 따라 자신을 발전시키려 해요. 반면 사회화는 우리가 개성을 얻을 수 있는 전제가 되기에 사회가 없으면 자아도 있을 수 없어요. 사회는 자아의 형성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자아가 없으면 사회도 있을 수 없답니다. 한 사회의 발전은 본래 많은 사람들의 힘이 발휘된 결과니까요. 그러므로 사람의 자아의식과 사회의 존재는 함께 가는 것이에요. 인생이란 여행길에서 자아를 의식하고, 사회를 인식할 때 우리는 더 나은 발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요.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은 모두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고귀한 잠재력을 한껏 드러낸 사람들에요. 그들은 자아 의식의 기초 위에서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장애를 극복하고, 이미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끝까지 노력해요.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의 본질적인 특징은 사람의 잠재력과 창조력을 극한으로 발휘한다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자아 실현의 기술과 기교를 습득했다면 우리는 스스로 운명의 설계자이자 생활의 강자가 될 수 있을 것이에요.




죽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자기 자신의 일일 뿐이며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도 없어요. 사람이 죽음을 이해하게 되면 스스로 사람들과 구별되어 자기 존재의 의미, 즉 고독의 존재를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일은 죽음뿐이다. 청춘의 소년, 소녀에게나 병약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나, 부자에게나 거리의 거지에게나, 대통령에게나 일반 백성에게나 죽음은 맑은 하늘에 날아든 검은 구름처럼 불현듯 찾아옵니다.


'살찐 국왕이나 비쩍 마른 거지나 구더기의 식탁 위 두 가지 식사에 불과하거늘. 국왕은 죽었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구더기에 먹혀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겠지. 거지는 다시 그 구더기를 잡아다 낚시를 할 테고, 잡은 물고기는 다시 거지의 뱃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결국 국왕은 거지의 뱃속으로 마지막 행차를 하는 것이 아닌가. 죽음 앞에서 누군들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 대체 생명의 의미란 무엇인가?',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 햄릿


삶은 아름답지만 우리는 반드시 죽음과 대면해야 해요. 이는 매우 잔인한 일이에요. 죽음은 우리 삶에 대해 걱정하게 해요. 물론 이런 걱정은 우리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게 하지요. 이런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인류는 항상 생명의 의의에 대해 연구해야 해요. 인생은 마치 쏘아놓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요. 어쩌면 이런 인생의 유한성과 급박함 때문에 인류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갈구하며, 현실의 생활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됐는지도 몰라요.
모든 사람에게 삶은 한 번 뿐이며 뒤늦게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어떻게 자신의 삶에 충실할 것인가? 이는 모두가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예요. 그렇지 못할 경우 이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고 말테니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철학을 연구하는 것을 죽음의 연습이라고 보았어요. 독일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는 죽음을 향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실존철학을 체계적으로 전개한 또 다른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음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인간은 넓은 우주 속에서 기(氣)의 운동이 변화하는 것으로 스스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해요. 더욱이 어느 한 곳에서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런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에요. 삶은 그 삶에 순응하고, 죽음은 그 죽음에 순응하는 것이지요.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해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으며,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에요. 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극단인 것이에요.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람과 시간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요. 사람은 시간 속에 살고, 시간은 인간 존재의 조건이 됩니다. 인생을 일컬어 '세상에 산다.'라고 하는 것은 '인생이 시간 속에 있다.'는 뜻이지만 죽음은 엄밀히 말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명이 '끝'나는 것에 불과해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육체는 다른 형식으로 변화하기 때문이지요.


죽음이란 어찌 보면 하나의 가능성일 뿐 현실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죽음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일이니까요. 일단 죽음이 현실이 된다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을 것인지는 모두 불명확합니다. 일상적인 경험으로 판단하자면 우리는 모두 죽지만, 언제 죽을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요.


사람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진정한 존재의 고독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의 생명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으며 스스로 대신해야 하는 것이랍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있을 때 가장 두려워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죽음의 신과 마주하게 되면, 명예와 지위, 재물과 같은 세상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이란 말로 이 깨달음의 상태를 설명했어요.


사람이 본질적인 모습은 바로 인생의 유한성과 독특성이에요. 우리 생명의 시작과 끝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만 짧은 생명이란 과정 속에서 여전히 우리가 힘을 발휘할 공간은 남아 있어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랍니다.


죽음을 수양하는 것은 곧 생명을 수양하기 위함이에요. 또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생명을 이해하기 위함이에요. 죽음에 맞서는 것은 우리 생활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기 위함이지요. 사람에게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생명을 더 귀중하게 여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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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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