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옮겨 담은 화폭을 방안에서 보는 즐거움, 여유로운 삶.


[본문발췌]

'읽고 생각하는 즐거움' 못지않게 '눈으로 보고 감상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산은 높고 높아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초목이 살고, 뭇 생명이 자리 잡고, 새와 짐승이 무리 지어 살고, 달리는 짐승이 쉬며, 보배로운 것들이 번성한다. 기이하게도 만물을 키워내면서도 지치지 않고 사방으로 뻗쳐 끝이 없도다. 
물이라는 것은 군자의 덕에 비유된다. 두루두루 흐르고 사사롭게 치우치지 않으니 덕을 닮았고, 이르면 생명을 살려내니 어짊을 닮았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순리대로 하니 의로움을 닮았다. 얕으면 흐르다 깊으면 헤아릴 수 없게 되니 지혜로움을 닮았고, 낭떠러지에서 주저 없이 흐르니 용기를 닮았고, 가는 물줄기로 구석진 곳까지 이르니 성찰함을 닮았고, 오물을 받아도 사양하지 않으니 포용을 닮았고, 더러운 곳에 들어가 맑게 하여 나오니 세상을 교화시키는 것을 닮았고.....' 
- 유향, <설원> "잡언" 편 중에서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며, 뭇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 노자, <노자>, 제 8장 중에서


'숲과 못으로 들어가 너른 들에 살며 고요한 곳에서 낚시하고 무슨 일도 일삼지 않을 뿐이다. 이는 강해의 사람이며 세속을 피한 사람이니 여유로운 자가 좋아하는 바이다.' - <장자> "각의" 편 중에서


중국 산수화의 흐름,
송대의 산수화는 화원 화가들에 의해 주로 그려지면서 경외의 존재에서 감상의 대상으로 전이되었고, 이와 함께 문인의 뜻을 그리는 문인화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원대에 들어서는 서예적 필법을 담은 문인산수화가 발전했고 명대에 들면 송대의 화원화풍을 계승하는 절파와 원대 문인화의 기법을 계승하는 오파의 두 개 화파가 전개되면서 이들은 각각 이상공간과 경험공간을 그리는 차이를 보여주었다. 청대에는 오파 계열의 문인산수화가 하나의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여말선초에 주로 그려지고 감상된 산수화 즉 청산백운, 사시팔경, 소상팔경, 몽유도원 등은 실제 산수 공간에서 초연히 벗어난 초월의 시간, 영원한 질서 속에 드러나는 순간을 관념화시킨 산수 이미지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여말선초의 문사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산수의 참된 모습으로 상정하였다. 산수의 참된 이미지는 청산백운, 소상팔경, 사시팔경의 대표경으로 그들 관념 속에 정형화되었다. 이는 새 왕조의 주역이 누린 산수관이었다. 이러한 산수관은 그들의 낙관적 현실관과 부합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산수를 현실로 끌어들여 혼연히 향유할 수 있었다.
  

해 비추는 향로봉에 붉은 안개 피어 오르고 / 멀리 보니 폭포수가 시내 앞에 걸려 있네 / 나는 듯 쏟아지는 삼천 척의 물줄기 / 하늘에서 떨어지는 은하수인가 - 이백의 시 <여산관폭>


조선 중기의 산수 인물도들이 기려, 어부, 수면, 관폭 등 철리적 이상으로 완전무장된 은자의 고차원적 달관의 세계를 지향하였다면, '시의도'에서는 시적이고 서정적인 감상 혹은 세속에 얽힌 개인 정감도 표현하려 한다. 
조선 중기의 산수인물도가 철리적 사유를 추구하였다면, 조선 후기의 시의도는 감상적 정감을 중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철리적 사유가 보편적 당위성의 원칙을 중시한다면, 감상적 정감의 표현은 개인적 경험을 기억시켜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큰 차이를 가진다. 이러한 차이는 산수 표현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조선 중기 산수인물도류에는 강호, 폭포, 등의 대상 산수가 암시적, 상징적으로 간솔하게 표현되어 산수화 속 인물은 산수경 자체보다 더욱 높은 사유 세계를 누리는 것으로 펴현된다. 그러나 시의도의 산수 속에는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이 매우 섬세하게 처리된다. 그 지점에는 꽃이 피거나 지고, 낙엽이 지거나, 새가 날거나, 구름이 피어오른다. 시인이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제시한 장면이다. 이는 산수 표현에서 간접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산수 속 인물이 이러한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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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으로 정보의 양과 유통 속도가 급격히 발전했지만  사회적으로 정보의 질과 편협(향)성도 증가했다.

사실을 판단하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는 정치인과 언론의 개소리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본문발췌]

“사실이 아닙니다.” “근거가 없습니다.”라고 점잖게 말하는 기성 언론의 팩트체크 기사보다 개소리들이 훨씬 더 재미있고 귀에 쏙쏙 박힙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이를테면 같은 게임에서 맞서 싸운다고 해보자. 각자는 어떤 사실에 대해 자신이 이해한 대로 반응한다. 물론 한쪽은 진실의 권위에 따라 반응하고, 다른 쪽은 그 권위를 거부하고 권위의 요구에 응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개소리꾼은 이런 요구 자체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는 거짓말쟁이와 달리 진실의 권위를 거부하지도, 이에 맞서지도 않는다. 전혀 신경쓰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진실의 더 큰 적은 거짓말보다 개소리다. 다시 말해 개소리꾼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데 유리한 발언을 할 뿐 그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개의치 않는다.
 

기자 한 명이 오랜 시간을 들여 주장을 검토한 후 사실을 토대로 신중히 기사를 작성하면 비용은 더 들고 클릭 수는 줄어든다. 이보다 더 쉽게 수익을 늘리는 방법이 있다. 원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서둘러 기사로 내보내서 그 주장에 대한 분노와 반박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내는 것이다. 폭로 기사는 다른 언론사가 쓴 기사를 그냥 베끼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관련 기사가 예닐곱 개 나오는데 그중에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도 있을뿐더러 직접 취재한 기사는 하나도 없다.
 

가짜뉴스는 신뢰의 부재를 낳은 원인이라기보다, 이를 보여주는 현상에 가깝다. 개소리는 말할 것도 없이 진실의 적이다. 진실을 인지하는 능력 없이는 절대로 정치적 성향을 넘어 토론할 수 없고 그저 상반된 담론을 향해 고함치는 데 그치고 만다.


정보 제공자가 맞춤형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용자에게 편향된 정보만 도달하는 필터 버블 현상도 큰 과제였다. 내 친구들은 나와 정치적 견해가 매우 비슷한 만큼 서로 동의할 기사만 공유할 확률이 높다. 우리가 뉴스 대부분을, 아니면 어느 정도라도 페이스북 피드에서 접한다면 결국 거의 모든 사람이 나와 생각이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개소리의 힘이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해서 전문가의 말이나 실제 벌어진 사건보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더 신뢰한다. 필터 버블은 사람들이 진실을 더 쉽게 무시하도록 자극해 탈진실 사회를 부추긴다.
 

트래픽이 높아진다는 것은 당연히 해당 사이트의 수익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제목은 나중에 바꾸더라도 일단 기사부터 올리면 트래픽이 올라가지만 시간을 들여 사실을 확인한 후 아무 기사도 올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자원이 줄어든 편집실에서는 보통 안전한 대책을 찾는다. 대학을 갓 졸업한 미숙한 기자가 정치 논쟁을 보도한다고 할 때,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한 후보가 한 말을 그냥 보도한 후 상대 후보의 반박을 싣는 것이다. 내용을 확인하는 일 따위는 생략한다. 현실 풍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이게 현실이다. 특히 기사가 다수 매체의 일반적 보도 지침인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만족할 때 이렇게 보도한다. 한 후보가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해도 마찬가지다. 자원이 풍부하고 숙련된 기자가 있는 편집실에는 정치 논쟁을 조목조목 따질 역량과 자신감이 있다. 그런 기자들이 부족한 편집실에서는 정치 논쟁을 제대로 문제 삼지 못한다.
 

수 세기 동안 미디어는 정부와 정치인에게 책임을 묻는 역할을 했다. 19세기 들어 미디어를 일컫는 ‘제4계급’이라는 별칭이 생겼는데, 이는 미디어의 권력 견제 기능을 공식화한 용어였다. 미디어가 영향력과 신뢰를 잃으면 권력에 책임을 묻는 능력도 약해진다.
 

정치는 과거에도 그랬듯 미래에도 공공정책을 논하는 순수하고 열띤 토론의 장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무관심과 냉소주의에도 안전한 범주와 해로운 수위가 있으며, 정치 전략에도 다른 것보다 더 유해한 방식이 있다. 정치 행위자가 미디어와 피드백 회로를 형성해 얄팍한 근거나 사실만으로도 공론화가 가능해지면, 정치권에 대한 신뢰는 더욱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을 살폈다. 하나는 자신의 신념과 다른 증거를 찾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증거가 내 주의를 끌더라도 이를 믿거나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확증 편향이 적극적인 정보 탐색을 가로막듯이, 역화 효과도 내게 들어오는 정보를, 나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정보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신념을 의심하기보다 고수하는 쪽을 택한다.”
 

우리는 필터 버블 때문에 서로 다른 의견에 가까워지지 못할 뿐 아니라, 중도적 관점에서 더욱 멀어진다. 우리는 내가 속한 집단에 순응하고, 그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신호를 보내며, 집단을 통해 성향이 양극화한다. 소속 집단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정확하고 검증 가능한 정보보다, 정체성을 한층 더 견고하게 하는 개소리 정보를 더 반기는 이유다. 정체성이 한층 단단해지는 또 다른 상황은 바로 다른 집단과 대립을 할 때다. 이를 일컬어 내집단, 외집단 행동, 또는 현실 갈등 이론이라고 한다. 우리는 집단에 대한 진짜 소속감을 다른 집단에 대한 경쟁의식, 심지어 적대감을 통해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정치적 신념과 맞는 구절을 보면 쉽게 믿고, 거의 반사적으로 공유하려고 한다. 반면 잠깐이나마 출처를 살피고 사실인지 확인하려면 어느 정도 노력이 든다. 전자는 시스템1 행동에 해당한다. 후자는 시스템2를 발동한 것으로 공유하기 전에 정보를 더 신중히 검토해보자는 결단이 필요하며, 노력 없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보를 대강 훑을 때 나오는 순간적인 사고를 누르고 의식적으로 다른 방식의 사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스템2 사고를 작동시키는 것은 자기통제 행위로, 때로 ‘자아 고갈’이라고 부를 만큼 피곤한 일이다. 그렇지만 의식적이고 신중한 사고와 자기통제가 없으면 우리는 개소리에 노출될 것이다.
 

주류 언론이 개소리에 대응하는 주요 무기는 사실 검증팀을 띄운 것이었다.
 
정치인,언론, 대중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철저하게 확인하지 않는 풍토가 우려될 때, 우리는 손쉬운 해결책으로 사실 검증을 활성화할 수 있다. 허위 정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정치인이나 미디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아내 주장의 진위를 가려주는 균형 있고 공정한 정보만 한 게 어디 있겠는가?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지만, “진실이 신발을 신을 때, 거짓말은 이미 지구 반 바퀴를 돌았다”라는 오랜 격언은 어느정도 현실을 반영한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을 보면, 우리는 사실 검증팀이 정보를 꼼꼼히 모으고 제대로 된 글을 써서 신속히 공개해도 개소리를 쉽게 억제하기 어려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테다. 개소리는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의 신념을 강화하며, 남들과 공유하고 싶은 충동을 자극한다.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확증해주는 정보를 믿는 편이고, 사실에 근거한 기사보다 자극적인 기사에 더 솔깃한다. 우리는 사실 검증을 하더라도, 전부터 의심한 사실 정도만 확인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의심하고 습관처럼 사실을 확인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개소리는 만들긴 쉬워도 그에 맞서긴 어렵다. <가디언>의 미디어 편집자 재스퍼 잭슨Jasper Jackson은 “이 싸움은 비대칭 전쟁이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말했다. 언론 조직은 정보 유통에 절대적 지배력이 있는 만큼, 전쟁 포로의 인권을 규정한 국제협정인 제네바협약에 상응하는 보도 원칙에 제약을 받는다. 그렇지만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자들은 그런 제약이 없으므로 보도 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부담이 전혀 없이 언론사들의 약점을 파고든다.
 

인터넷의 허위 정보와 싸우는 일은, 하나같이 빠르게 움직이는 여러 개의 과녁에 총을 겨누는 것과 같다. 


전부 거짓은 아니기에 더 위험한 나쁜 뉴스
<스놉스>를 만든 두 설립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미컬슨David Mikkelson은 2016 미국 대선 결과가 나온 후 일주일 정도 지나 “우리에게는 가짜뉴스가 아니라 나쁜뉴스가 문제다”라는 논평을 올려 이 문제를 언급했다. “온라인 세상에는 나쁜 뉴스가 참 많지만 그 모두가 가짜는 아니다”라면서, <스놉스>가 대적하는 당황스러운 허위 정보를 열거했다. 진짜 뉴스를 가져다가 왜곡이 심한 낚시 기사로 둔갑시키는 당파적인 정치 사이트가 있다. 예전에 나온 뉴스를 마치 지금 떠도는 정보처럼 포장하는 사이트도 있다. 출처가 모호하고 의심스러운 기사들을 모아 놓은 사이트도 있다. 주로 건강과 과학 분야에서 말이다. 자기 딴에는 타당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나, 정보를 모으고 보도하는 과정에서 정확성이 매우 떨어지는 사이트도 있다. 이런 형태의 뉴스는 어떻게 보든 하나같이 나쁜 뉴스지만, 모든 정보를 가짜뉴스라고 한데 묶어버리면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이슈를 더 애매하게 만들어버린다. 
 

우리 모두는 이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검토 없이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검증하지도 않고 글이나 사진, 영상을 공유할 때마다 이 생태계에 잡음을 키우고 혼란을 부추긴다. 이 생태계가 너무 혼탁해진 만큼 우리는 온라인에서 접하는 정보를 독자적으로 확인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본능적 반응과 거리를 두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콘텐츠를 보고 불같이 화를 내거나 내 관점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우쭐거린다면, 다른 관점을 취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탈진실을 문제 삼을 때, 진실을 말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대중과 권력자가 부쩍 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우리 모두와 관련한 문제다.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직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대중에게 물은 적이 있다. 응답자들이 하원의원에게 기대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진실을 등한시하는 태도는 문제다. 나라를 통치하고자 한다면 진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탈진실 방식으로 캠페인 활동은 가능했더라도 언제까지나 탈진실 방식으로 통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디어 그리고 탈진실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담론이 맞선다. 우리는 사람들의 기존 신념을 자극하는 감정적 담론이 소셜 미디어에서 인기가 높고, 가장 많은 대중에게 전달되며, 대중의 믿음을 얻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앞서 짚었다. 이는 사실 검증 문화와 거의 대조적이다. 사실 검증은 공명정대하고 신중한 자세를 보이려 하고, 논쟁에서도 당파적 입장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주목받은 사실 검증 기사조차, 이들이 대적하려는 가짜뉴스나 개소리보다 도달률이 훨씬 떨어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단 몇 초라도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 개소리를 공유할 확률이 훨씬 낮아진다. 
내가 믿는 담론을 믿지 않는 담론만큼 의심해보자. 우리는 이런 편향에서 빠져나와 의심해야 한다. 우리가 지지하는 운동 조직이나 후보가 받는 비판도 믿어보려고 해야 한다. 다른 정치인이나 세력의 입장에서 기사를 읽어보고, 내 입장에 변화가 있는지 살피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시도는 쉽지 않다. 내 정치적 입장을 제쳐놓고 어떤 스캔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이를 어떻게든 해내면 사실과 증거를 제대로 판단하는 능력이 향상된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왜 우리가 흘려듣는 스캔들에 흥분하는지, 반대로 상대방이 무시하는 스캔들에 왜 우리는 열띤 반응을 보이는지 알게 된다.
 

명확성은 민주주의의 토대다. 혼란은 독재자의 도구다. 저질 정보, 망상, 허위 정보는 민주주의를 손상시키고 정보 스모그를 만들어서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 합의하려는 시도를 소모적으로 만든다. 사회 전반에 이런 불확실성이 커지면 독재자와 전제군주, 선동꾼이 힘을 얻는다. 구소련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정보 전략 목적이 정치 선전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불확실성을 낳아 푸틴이나 그 어젠다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담론이 나오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탈진실 사회의 접근법은 독재자의 접근법이다. 소모적인 캠페인 때문에 정부와 사법기관, 미디어 등 각종 기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대중 사이에는 서로 충돌하는 담론이 떠돌 뿐이다. 이 싸움에서 승자는 감정을 자극하고 이목을 끄는 과감한 주장을 내세우는 쪽이다. 보통 그런 주장은 역사가 보여주듯 소수집단들을 악마로 몰아간다. 이런 접근법을 러시아만 쓴 것은 아니다. 조직적이고 악랄한 체제의 결정판인 나치독일의 핵심 전략도 혼돈과 혼란이었다.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에게 말을 건네기보다 나와 생각이 맞는 사람과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며(혹은 호들갑을 떨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관한 최악의 사실만 믿고, 그들을 악의적으로 표현한 정보를 주저 없이 받아들이고 공유한다.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음모론보다 더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확실한 증거가 나오려면 훨씬 오래 기다려야 한다. 탈진실 시대를 만화책에 나오는 악당이나 우리가 쉽게 무찌를 수 있는 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이를 무수한 원인이 얽힌 복잡한 문제, 모두가 개입된 문제로 보는 쪽보다 훨씬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냉소적으로 대하거나 안 좋게 바라보려는 충동, 사실이었으면 하는 정보만 믿으려는 충동을 억눌러야 한다. 그리고 개소리보다 진짜 정보를 다뤘을 때 정치인과 미디어가 더 유익한 결실을 얻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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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부귀 권세를 쥔 자들이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과 말로 웃음을 주는 광대보다 나은게 무엇인가?
 
그들은 사익만 추구하며 쾌락의 노예가 되어 있고, 자유와 진리를 미워하고, 모든 것을 자기 욕망과 이익에 비추어 판단하는 자들이 많다.



[본문발췌]

우신의 시종들. 여기 눈썹을 치켜뜬 자는 분명 '필라우티아'(자아도취)입니다. 저기 눈웃음을 지으며 박수 치고 있는 자는 '콜라키아'(아부)입니다. 반쯤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는 '레테'(망각)입니다. 팔로 머리를 괴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자는 '미소포니아'(태만)입니다. 장미꽃을 엮어 두르고 온몸에 향수를 짙게 바른 자는 '헤도네'(쾌락)입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자는 '아노이아'(경솔)이고,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혈색이 좋으며 살이 통통하게 오른 자는 '트리페'(방탕)입니다. 시종들 사이에는 남신 두 명이 서 있는데, 한 명은 '코모스'(광란)이고, 다른 한 명은 '네그레토스 휘프노스'(깊은 잠)라고 합니다. 이들은 나의 충직한 가솔들이고, 나는 들의 도움을 받아 온 세상을 지배하며 위대한 통치자들조차 내 명령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사실 노인은 주름이 많고 생일이 더 많이 지냈다는 것 말고는 어린아이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머리색이 옅고, 치아가 다 있지 않고, 체구가 작고, 젖 먹는 것을 좋아하고, 말을 더듬고, 자꾸 이야기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곧잘 잊어버리며, 생각이 부족합니다. 거의 모든 점에서 비슷하지요. 사람은 늙을수록 점점 더 어린아이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삶의 고단함을 느끼지 않고 죽음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합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내 생각에는 우신인 나보다 더 어리석지 않다면, 그러니까 진정으로 어리석지 않다면 아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를 배제해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악취를 풍기는 자로 느껴지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협오스럽고 가증하게 보여 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여러 면에서 생모라기보다 계모라고 할 수 있는 자연이 사람들의 본성, 특히 좀 더 현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본성 속에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에게 주어진 것을 시기하는 악덕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인생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해주는 자연의 선물마저 결국에는 모두 훼손되고 맙니다.


분별력이란 많은 경험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현자들은 염치나 소심한 성격 때문에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반면에, 어리석은 자들은 애초에 염치가 없는 데다가 위험에 구애받지 않기에 무슨 일이든지 거침없이 달려들어 해냅니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쪽이 분별력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에 더 어울리겠습니까? 
현자들은 케케묵은 옛날 책 속으로 도피해 거기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옛날 사람들이 말로만 그럴 듯하게 늘어놓은 궤변을 배웁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들은 모든 일에 직접 뛰어들어 무엇이 맞고 틀린지 체험함으로써, 내 말이 틀리지 안았다면, 진정한 분별력을 얻습니다. 
호메로스는 비록 눈이 멀기는 했지만, "어리석은 자는 일이 터지고 겪은 후에야 깨닫는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런 사실을 볼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두 가지 주된 장애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에 뿌연 연무를 드리워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염치이고, 다른 하나는 위험해 보이는 일은 시도하지 말라고 말리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음은 사람들을 이런 것들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해방시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거침없이 하는 것이 삶에 얼마나 많은 유익을 가져다주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음과 좀 더 가깝고 친한 학문에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기 때문에, 모든 학문과 일체의 접촉을 끊고 오직 자연이 이끄는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자기 분수를 뛰어넘는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자연은 인간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꾸미는 것을 싫어하고, 어떤 것이든 인위적인 학문으로 훼손되지 않았을 때 훨씬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다른 모든 동물은 자연이 정해준 한계 안에서 만족하고 살아가는 반면에 인간만이 운명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애쓰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 불행한 동물은 없다.


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일수록 더 진실이라 믿고, 귀를 살살 간지럽히는 쾌감을 더 크게 느낍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데 기막히게 좋을 뿐만 아니라, 특히 사제와 설교자에게는 돈벌이도 됩니다.


사람들은 속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속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불행한 일입니다. 인간의 행복이 진실을 아는 데 있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착각입니다. 행복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사는 아주 모호하고 천차만별인지라 철학자들 중에 가장 덜 오만한 우리 아카데미아 학파 사람들이 올바르게 말했듯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알 수 있다 해도 그로 인해 인생의 즐거움을 방해받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인간은 진실보다 거짓에 훨씬 더 쉽게 사로잡히지요. 거짓을 통해 행복을 얻는 데는 비용이 그리 들지 않습니다. 진실을 알기란 대단히 힘든 일이므로 문법처럼 별것 아닌 문제조차 진실을 알아내려면 몇 배는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반면에 거짓을 바탕으로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란 아주 쉽고, 그런 생각은 곧바로 행복으로 이어지며, 생각이 거짓될수록 행복은 더욱 커집니다. 행복하다면 그것이 거짓으로 말미암은 것이든 진실로 말미암은 것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 해도 어리석은 자들이 누리는 행복이 더 낫습니다. 그들의 행복은 그저 그렇다고 믿기만 하면 되는 까닭에 돈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얻은 행복은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수학 공식처럼 정해진 규율에 따라 정확히 행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신발 끈의 매듭은 몇 개여야 하고, 허리띠는 무슨 색이어야 하며, 서로 형태가 다른 몇 벌의 수도복을 갖추어야 하고, 허리띠는 어떤 재질로 만들고 그 너비는 어떠해야 하며, 고깔은 어떤 모양과 크기여야 하며, 삭발은 손가락 몇 마디 길이까지 해야 하고, 잠은 몇 시간을 자야 하는지 다 규율로 정해놓습니다. 신체와 성격이 천차만별인 사람들에게 규율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겉보기에는 평등해도 실제로는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쓸모없는 자들은 하찮고 자질구레한 규율에 집착하며 자신들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 할 뿐 아니라 우월감에 젖어 남들을 멸시합니다. 사도들의 사랑을 실천한다고 큰소리 치는 자들이 규율에서 정한 것과 다르거나 조금이라도 진한 색깔의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를 보면 놀라 자빠질 만한 비극을 연출합니다. 돈을 치명적인 독으로 여기며 손도 안 대려 하면서 술이나 여자에 대해서는 별로 절제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놀라운 열정으로 서로 다른 생활 규칙을 따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욕망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남다르다는 것을 과시하는 데 있습니다.


군주들은 끊임없이 사냥하고, 명마를 기르고, 행정과 군대의 요직을 팔아 이익을 얻고, 신민들의 재산을 털어 자신의 금고를 채울 새로운 방법을 날마다 생각해냅니다. 아무리 부당한 일도 그럴 듯한 명분을 붙여 공정한 처사로 보이게 만듭니다. 그래야 군주의 모든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자기편에 붙들어두기 위해 어느 정도 잘 보이려고도 합니다. 오늘날 군주가 어떤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법률에 무지하고, 사익만 추구하느라 공익은 거의 적대시하고, 쾌락의 노예가 되어 있고, 학문과 자유와 진리를 미워하고, 국가의 안녕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자기 욕망과 이익에 비추어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지도자들은 지나치게 똑똑한 사람들을 의심하고 질투하는 반면에 다소 우둔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이 대목에서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가 떠오르는군요. 동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사물의 그림자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동굴 밖으로 나왔다가 돌아간 한 사람이 사물의 실체를 보았다며, 저 하찮은 그림자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려주었을 때 일어난 일이 일반 사람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거짓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만, 정작 그들은 그를 미쳤다고 조롱하며 쫓아냅니다.


마찬가지로 일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을 가장 숭배하고 물질적인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물질적인 것에 가까운 것일수록 무시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일에 몰두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재물을 가장 중요히 여기고, 육체의 안락을 두 번째로 생각하며, 영혼을 마지막에 둡니다. 이들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만물 중에 가장 순전한 존재인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다음으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영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육체에는 관심이 없고, 돈은 조개껍데기 보듯이 하찮게 여기고 배척합니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다루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몹시 불쾌해하며 마지못해 다루지요. 돈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도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이런 것들을 하나의 예로 제시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 전체에서 육체와 관련된 것들을 멀리하고, 영원한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과 일반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미쳤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서로가 아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일반 사람들보다는 기독교인들이 더 미쳤다고 보는 편이 더 맞습니다.


앞서 약속한 대로 기독교인들이 받을 최고의 상이 광기임을 간단히 증명해 보인다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먼저, 플라톤이 무슨 생각으로 사랑의 광기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분명 나와 같은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열렬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 사랑하는 대상 속으로 들어갈수록 행복과 기쁨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려 하고 자신의 신체 기관을 적절히 사용하려 하지 않는 상태란 의심할 여지없이 미친 것이고 광기이며, 또한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다", "정신 차려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등 흔히 쓰이는 이런 표현들이 그런 의미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이 절대적일수록 광기는 커지고 행복도 함께 커집니다.


<우신예찬>은 어리석음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여 인간의 모든 행복이 어리석음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 에라스무스가 마르턴 판 도르프에게 보낸 편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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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cao 섬에서 다이빙과 휴식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숙소가 Ticao Island Resort다.
 
가고 오는 길이 복잡하고 험난하지만, 일단 리조트에 들어가면 다이빙, 카누, 패들보트, 말타기, 근처 어부와 함께하는 낚시 체험 등 휴식과 다양한 즐길거리가 있다.
 
그리고 주변에 식당이 없기에, 삼시세끼는 리조트 식당에서 해결할 수 밖에 없는데 숙박 예약시 Full board meals로 신청할 수 있다.
 
이곳의 장점이며 단점, 모바일통신 서비스불가. 오로지 리조트 레스토랑 한 곳에서만 wifi 연결 가능하다.
 
숙소 내에는 댕댕이들이 리조트를 지키고, 가끔 잔디 정원에 말들이 침범하기도 하는데, 개들의 영역을 침범한 용감한 말의 최후는..... 줄행랑이다.

바람소리, 별, 초록 정원과 하얀 구름, 파란 하늘이 선명하게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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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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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카오섬에서의 다이빙은 섬 북쪽과 남쪽, 또는 리조트 근처 reef, 작은 바다 생물들을 찾는 macro diving과 티카오 해협 중간의 manta bowl에서 manta와 whale shark을 찾는 다이빙 등이 있다.


리조트 다이빙샵은 기본 하루 3회 다이빙을 기본으로 진행한다.

나는 solo diver라 다른 diver를 포함한 리조트 일정에 맞춰 총 9회 다이빙을 하기로 했는데, 체력의 한계도 있고 manta bowl 중심으로 다이빙 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 중간에 하루 휴식도 취하며 체크 다이빙 1회를 제외하고 총 8회 manta bowl에서 다이빙을 했다.


첫날과 둘째 날은 영국에서 온 wild life documentary camera man robin, 중국&말레이시아 커플인  andy와 carol과 빈의 가이드로 함께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프랑스에서 온 elliot과 단 둘이 제론의 가이드로 manta bowl 3회 입수.


결과적으로 manta bowl 8회의 다이빙 중 만타는 만나지 못했고 잠깐 지나가는 고래상어와 한 번의 만남, 그리고 만타볼 근처 white tip shark와 잭피쉬 떼를 본 게 다였다.


만타볼 근처는  해협 중간이라 바다 위고 아래고 조류가 심하다.

그동안 대부분의 다이빙이 목적과 성공률이 50%이상의 예측 가능했다면, 만타볼 다이빙은 전혀 예측 불가능한 야생의 사냥 느낌이다.

입수하자마자 조류타고 drift, 만타 클리닝 포인트에 도착해서 바닥에 조류 걸이 걸어놓고 사냥감을 찾듯 만타가 나타니기만 기다리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 반복적인 찾기와 기다림이다.

만타를 만나지 못했지만 과정은 재미있었다. 조류를 온몸으로 맞으며 기다림과 허탈함만 남았지만  때와 상황이 도와야 원하는 것을 얻듯이 바람, 소나기, 강한 조류, 8번의 시도에 티카오 해협 만타는 다음 기회를 기약한다.

첫날 만타볼에서 그 동안 허접한 영상이지만 많은 기록을 남겨준 나의 액션캠이 사망해, 남은 다이빙은 오롯이 눈과 기억으로만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첫 이틀 다이빙을 함께한 robin, andy&amp;amp;carol, 그리고 dive master bin


만타볼은 공기와 무감압잔여 시간에 따른 기다림의 게임


만타는 못보고 리조트 돌아가는 길 만난 돌고래떼
직업의식이 발동한 robin은 스노클로 돌고래 찍겠다고 쫓아간다.
이미 멀리간 돌고래떼, 헤매는 robin을 놀리는 bin


사망한 나의 액션캠, 그러나 carol의 영상을 받았다. 넓디 넓은 티카오 해협에서 입수 전 내 장비가 이상해 잠깐 정비하고, 입수 후 andy의 마스크를 다시 받느라 지체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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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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