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필요한 것.
그 자체로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기는 것, 수용성, 자유로움, 설레임!


[본문발췌]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철학적 문제들, 즉 실용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사고를 요구하는 쟁점들이 제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귀중한 요소들은 현실보다는 예술과 기대속에서 더 쉽게 경험하게 된다.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들을 잘라내고, 우리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이렇게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미지 않고도 삶에 생동감과 일관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보푸라기로 가득한 현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한다는 점에서 기대와 흡사하다.
현재를 긴 영화에 비유한다면, 기억과 기대는 거기에서 핵심으로 꼽힐 만한 장면들을 선택한다.


나는 데제셍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했다. 그러나 나 역시 그냥 집에 눌러 앉아 얇은 종이로 만든 브리티시 항공 비행 시간표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여행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낀 적이 몇 번 있었다.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 장치 앞에서 아프고 싶어 하며, 또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보들레르는 부끄러움 없이 자기도 그런 환자들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했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않는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해야 할 일이 오직 생각뿐일 때에 정신은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생각도 쉬워진다.


우리가 여행 과정에 부여하는 가치, 목적지와 관계없는 방랑에 부여하는 가치는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주장하듯이, 약 200년 전에 이루어진 감수성의 폭넓은 변화와 관련이 있다. 이 변화를 통해 이방인은 내부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8세기 말부터는 공동체의 관행이 아니라 방랑자가 되는 것에서 동료 의식이 생긴다. 따라서 자연과 공동체의 매개는 일반적인 사회의 엄격함, 냉혹한 금욕, 이기적인 편안함이 아니라 본질적인 고립과 침묵과 외로움에 맡겨지게 된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 <시골과 도시>
우리가 휴게소와 모텔에서 시를 발견한다면, 공항이나 열차에 끌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건축학적인 불완전함과 불편에도 불구하고, 그 야한 색깔과 피로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립된 장소에서는 이미 터가 잡힌 일반적인 세상의 이기적인 편안함이나 습관이나 제약과는 다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국적이라는 말을 좀 더 일시적이고 사소한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외국에서 만나는 장소의 매력은 새로움과 변화라는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고향에는 말이 있을 만한 곳에 낙타가 있다거나, 고향에는 기둥을 세운 아파트 건물이 있을 만한 곳에 장식이 없는 아파트 건물이 있다거. 그러나 좀 더 심오한 기쁨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외국의 요소들이 새롭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나 신조에 좀 더 충실하게 들어맞기 때문에 귀중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고향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현대성이 미학적 단순성의 결여, 도시적 삶에 대한 저항, 그물 커튼을 걸어두는 심리에 대한 불만.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홈볼트의 호기심의 수준이 나의 수준보다 한참 높았던 것은 사실을 찾아 나선 여행자는 구경을 하려는 목적을 가진 여행자에 비해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쓸모가 있다. 쓸모에는 (그것을 인정하는) 청중이 따른다.


내가 알게 된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보다는 나에게 개인적인 유익을 준다는 점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했다. 나의 발견은 나에게 생기를 주어야 했다. 그 발견들이 어떤 면에서는 '삶을 고양한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했다.
'삶을 고양한다'는 표현은 원래 니체가 사용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73년 가을에 탐험가나 학자처럼 사실을 수집하는 일과 내적이고 심리적인 풍요를 목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이용하는 일을 구별했다. 대학 교수는 예외적인 일이었지만, 니체는 앞의 행동을 모욕하고 뒤의 행동을 찬양했다. 그는 진정한 과제는 '삶'을 고양하기 위해 사실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괴테의 문장을 인용했다.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훔볼트의 흥분은 세상을 향해 올바른 질문을 가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언해준다.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파리를 보았을 때 약이 올라 파리채를 휘두를 수도 있고 산을 달려 내려가 <식물 지리론>을 쓰기 시작할 수도 있다.
여행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물을 볼 때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며, 질문이 없으므로 흥분도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은 질문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뭔가가 떠오를 때는, 엉뚱한 것이 떠오르는 경향이 있다.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 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자연은 도시의 삶으로 인한 심리적 피해를 치료하는 불가결한 약' - 워즈워스


워즈워스는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바람직하고 선한 모든 것"을 얻게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은 "올바른 이성의 이미지"로서 도시 생활에서 나타나는 비꼬인 충동들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워즈워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그 이전에 우리의 정체성에는 다소간 순응성이 있다는 원칙, 즉 우리가 함께 있는 사람-때로는 사물-에 따라 변한다는 원칙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반면,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경쟁심이 생기고 질투가 일어난다.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조지프 에디슨은 <상상력의 기쁨에 관한 에세이>라는 글에서 "광활하게 트인 시골, 개발되지 않은 넓은 사막, 첩첩이 늘어선 거대한 산맥, 높은 바위와 절벽과 넓은 물" 앞에서 "기쁨을 주는 고요한 놀라움"을 느낀다고 썼다. 힐테브란트 제이컵은 <숭고에 의해 정신이 고양되는 방식>이라는 글에서 우리가 이 귀중한 감정을 느낄 가능성이 높은 장소와 물건들의 목록을 나열했다. 잔잔하거나 폭풍우가 치는 넓은 바다, 석양, 절벽, 동굴, 스위스의 산맥.


하느님은 착하게 살았는데도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느냐는 욥의 질문을 받자 욥의 눈길을 자연의 엄청난 현상으로 돌린다. 하느님은 말한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놀라지 마라. 우주는 너보다 더 크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놀라지 마라. 너는 우주의 논리를 헤아릴 수 없다. 산 옆에 있으면 네가 얼마나 작은지 보아라. 너보다 큰 것,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세상이 너한테는 비논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다. 숭고한 곳들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하찮음과 연약함을 생각하도록 하라.


인간의 삶도 똑같이 압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은 아마 자연의 광대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드는 사건들, 필연적으로 우리를 먼지로 돌려보낼 그 크로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을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관객으로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가 어떤 장소를 규정할 만한 특징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우리는 그 풍경을 여행할 때 그 위대한 화가가 그곳에서 본 것을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니체가 알고 있었듯이, 현실 자체는 무한하며 예술로는 결코 모두 나타낼 수가 없다.


사실 예술 단독으로 열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또 예술은 예술가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정서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단지 열광에 기여를 하고, 우리가 이전에는 모호하게만 또는 성급하게만 경험한 감정들을 좀 더 의식하도록 안내할 뿐이다.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존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이르렀다.

  1.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2.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3.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를 포함하여).
  4.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5.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하여 쓰거나 그림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데생이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연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것을 우리 손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슨하게 관찰하는 데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되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좀 더 확고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한군데 가만히 앉아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린다고 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튼튼해지거나, 행복해지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사람에게는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적극적이며 의식적으로 보기 위한 보조 장치로 사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풍경의 진정한 소유는 그 요소들을 살피고 그 구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에 달려 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이 기억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


무엇을 그릴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전에 내가 카메라를 잡는 동기가 되었던 욕구, 즉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의 안내를 받는 것이 합당할 것 같았다. 러스킨의 말을 빌리면, "당신의 예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 그것은 조개껍질이나 돌멩이에 대한 찬양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림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득은 어떤 풍경이나 건물에 이끌리는 이유를 의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우리의 취향에 대한 설명을 얻게 되며, '미학', 즉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는 능력도 생기게 된다. 감명 깊은 장면을 좀 더 빠르게 분석하여, 감동을 주는 힘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집어낼 수 있다.


존 러스킨,
두 사람이 산책을 나간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스케치를 잘하는 사람이고, 또 한사람은 그런 데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녹색 길을 따라 걸어간다. 이 두 사람이 지각하는 경치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은 길과 나무를 볼 것이다. 그는 나무가 녹색임을 지각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태양이 빛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반면 스케치를 하는 사람은 무엇을 볼까? 그의 눈은 아름다움의 원인을 찾고, 예쁜 것의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궤뚫어 보는 데 익숙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햇빛이 소나기처럼 잘게 나뉘어 머리 위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잎들 사이로 흩어지고, 마침내 공기가 에메랄드빛으로 가득 차는 모습을 관찰한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가지들이 잎들의 베일을 헤치고 나오는 모습을 볼 것이다. 보석처럼 빛나는 에메랄드색 이끼와 하얀색과 파란색, 자주색과 빨간색으로 얼룩덜룩한 환상적인 지의류가 부드럽게 하나로 섞여 아름다운 옷 한벌을 이루는 것을 볼 것이다. 이어 동굴처럼 속이 빈 줄기와 뱀처럼 똬리를 틀고 가파른 둑을 움켜쥐고 있는 뒤틀린 뿌리들이 나타난다. 잔디가 덮인 비탈에는 수많은 색깔의 꽃들이 상감 세공처럼 새겨져 있다.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스케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녹색 길을 통과하여 집에 돌아왔을 때 할 말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다. 그저 이러저러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왔을 뿐이다.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의 작품은 심오하고 의미심장한 통찰로부터 출발했다.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게 된다.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거의 매일 이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이 길을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나의 목표에 도움을 주는 정보만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보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민감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얼굴과 표정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건물의 모양이나 가게 안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동안 거리를 나의 관심의 틀에 맞추어놓고 살아왔다. 이 틀에는 금발의 아이들이나 소스 광고, 보도에 깔린 돌이나 가게 진열장의 색깔, 일 보러 다니는 사람들 또는 연금 생활자들의 표정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따. 일차적 목표가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공원을 구경하거나 단일한 블록 안에 뒤섞여 있는 조지 시대, 빅토리아 시대, 에드워드 시대의 건축물들에 대해 생각해볼 마음이 나지 않았다 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 연상적인 사고, 경이감이나 고마움, 시각적 요소에 의해 촉발되는 철학적 일탈은 잘려나갔다.


여러가지 불평들의 공통점들 - 늘 이기심이 문제고, 늘 맹목성이 문제다 - 을 생각해보았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우리에게 불평한다는 오래된 심리학적 진리.


혼자 연행을 하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함께 가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다듬기 때문이다.


니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 하찮고 일상적인 경험 - 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 - 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 - 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의에 코르크처럼 까닥 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85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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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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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 괴로워하고 번뇌하다.

결국 괴로운 생각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인간의 조건이라고?

 

부처도 고뇌속에 고뇌를 떨쳐버림으로 깨우침을 얻었다고 하지 않는가. 고뇌를 벗어나야 자유로운데 고뇌가 인간의 본질이고 조건이라면 인간의 삶은 불행한 것이 아닌가?

 
 

[본문발췌]

 
 
모든 인간은 자기가 겪는 그 고뇌를 닮는 것이죠.
 
고통이란 그것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법이야. 그런데 대개 고통은 죽음으로 끝나거든.
그렇군요. 하지만 그것은 아마 남자들의 생각이겠죠. 나로서는, 말하자면 한 여자로서는 고통이란 - 좀 이상하지만 - 죽음보다는 삶을 생각하게 하거든요. 아마 여자는 애를 낳기 때문이지.
 
남의 소리는 귀로 듣고, 자기 소리는 목구멍으로 듣는다. 그렇다. 자기 생명도 목구멍으로 듣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의 생명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는 고독이 있다. 고독은 무수한 인간들의 배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마치 희망과 증오로 충만된 활량한 도시를 뒤덮고 있는 이 깊은 밤의 배후에 커다란 원시의 밤이 존재하듯이...
 
인간의 극도로 긴장된 모습은 어딘가 비인간적인 인상을 준다. 그건 우리들이 우리들의 약점을 통해서만 서로 쉽게 접촉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본질은 고뇌이고, 자기 자신의 숙명에 대한 인식이며, 거기서 모든 공포가 생긴다는 거야. 죽음의 공포까지도.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 속에서 공포를 발견하는 거야. 그것은 자기 마음속을 좀 깊숙이 살펴보면 알 수 있어. 다행히 사람은 행동할 수 있거든.
 
남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의 고뇌를 희생하며 남의 입장을 인정하는 일이야.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 알았어.
 
노동자는 어디까지나 노동자입니다. 죽지 않는 한 말이지요 인간이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어떤 사상을 위해서 버린다는 것은 인류의 독특한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인간이, 글쎄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견디어낸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겠지요.
인간이 이해타산을 초월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는 모든 사상은 이 조건의 바탕을 막연하나마 인간의 존엄 위에 놓고, 그 올바름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이를테면 옛날의 노예에게는 그리스도교가, 시민에게는 국가가, 그리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코뮤니즘이 그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줄곧 중독되어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아편이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나라에는 마약이 있고, 서양에는 여자가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경우는 아마도 연애가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인지도 모르겠군요.
 
인간은 아마도 권력에 무관심한지도 모르지요. 권력이라는 생각이 인간을 매혹하는 것은, 말하자면 현실의 권력이 아니라 권력 덕분에 이것저것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입니다. 왕좌의 권력은 다스리는 데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보통 인간에게는 다스린다는 욕망은 없어요. 그야말로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강제하고 싶어합니다. 인간 세계에서 인간 이상의 것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죠.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 권력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해지려고 말입니다. 이 가공의 병은 - 권력에의 의지는 지적인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 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되기를 꿈꾸고 있으니까요.
신은 소유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정복하는 힘은 갖고 있지 않아요. 신의 이상은 자기 힘을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의 꿈은 자기의 인격을 잃지 않고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력에 의지라기보다도 조직에의 의지다.
 
그의 권력에의 의지는 결코 그 목적에 도달하는 일 없이 부단히 그 목적물을 새롭게 바꿔나가야만 살아 있었던 것이다.
 
문명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고뇌에 찬 요소 - 이를테면 노예에 있어서의 굴욕이나 현대 노동자에 있어서의 노동 따위 - 가 별안간 하나의 가치가 되었을 때, 즉 이 굴욕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에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또 이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생존 이유를 찾는 것이 문제가 될 때, 문명의 본질은 변한다. 여태껏 무덤으로 가득 찬 일종의 교회에 지나지 않았던 공장은 지난날의 대성당 같은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인간은 그곳에서 여러 신 대신 대지와 싸우고 있는 인간의 힘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확실히 인간의 가치는 자기 힘으로 변화시킨 것에 의해서만 측정되는 것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인생을 속일 수 있어. 하지만 결국에는 인생이 언제나 우리들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지. 모든 늙은이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셈이야. 그렇지 않니? 많은 노후가 공허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허하다는 것이지. 사람들은 그것을 숨기고 있을 뿐이야. 하기야 그런 일도 별로 대단할 건 없지만. 인간은 현실이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있는 것은 관조의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할 거야.
 
고뇌에 근거를 두지 않은 인간의 존엄이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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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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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탁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물의 본질과 주변 환경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보고 스스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본문 발췌]

 
"이 나라에 대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 언젠가는 정부가 괴물 같아져서 가장 힘이 약한 사람은 짓밟힐 거란 거야, 그러면 이 나라에서 살 가치가 없어질테지. 이 지겨운 세상에서 아직 미국을 독보적인 곳으로 만드는 유일한 것은 누구든 생각이 허락하는 한 어디에든 이를 수 있고 또 원한다면 지옥에라도 갈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인간의 탄생은 대단히 불쾌해. 번잡하고 극도로 고통스러워, 때로는 위험할 정도야. 언제나 피를 흘리지. 문명도 그와 마찬가지야"
 
"나는 단지 네가 사람의 행동 이면에 있는 동기를 봤으면 하는 것뿐이야. 표면적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무언가의 일부로 보일 수도 있어도 그 사람의 동기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판단하지 마. 속으로는 피가 끓을지언정 분노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온건한 대응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아는 거지. 적을 비난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을 잘 알고 있는 게 더 현명한 거야"
 
우리가 옳은 일을 하려다가 조직의 편제에 정말로 위험한 그 무엇에 길을 터주게 되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해. 그게 어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말이다.
 
제퍼슨은 정식 시민의 신분은 각자가 획득해야 하는 특권이지 가벼이 주어지거나 가벼이 취급되어서는 안 될 무엇이라고 믿었단다. 제퍼슨이 보는 바로는,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로 투표권이 허락될 수는 없었어. 제퍼슨에게 투표는 공존공영의 경제 체제에서 각자가 스스로 획득하는 소중한 특권이었단다.
 
각자의 섬은 말이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
너는 너만의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어딘가에서 그 양심을 따개비처럼 네 아버지에게 붙여놓았던 거야. 자라나면서, 또 어른이 되고도, 너 자신도 전혀 모르게 너는 네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혼동하고 있었던 거야. 인간의 심장을 가진, 인간의 결점을 가진 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지. 그것을 깨닫는 게 쉽지 않았으리란 것은 내가 인정한다. 형은 실수를 범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하지만 형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실수를 하기는 해 너는 정서적 불구자였어,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항상 네 답이 곧 아버지의 답일 거라 가정하고 답을 구해 왔지.

어제 또는 10년 전을 돌이켜 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는 언제나 쉬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는 광장히 어렵지.
 
친구에게 네가 필요할 때는 친구가 틀렸을 때란다. 친구가 옳을 때는 네가 필요 없지.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9220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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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
 
[본문발췌]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의 삶을 새삼 확인하면서도 이를 비관적으로 응시하거나 격앙된 슬픔의 감정을 토로하는 대신, 덧없는 인간의 존재를 무한한 애정으로 포용하려는 차분하고 절제된 시각을 획득하는 것이다. 웅대한 자연의 질서와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인간이란 극히 제한된 시간을 할애받은 초라한 존재에 불과하며, 그들이 영위하는 삶은 결국 고독하고 허무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 인식...
 
진사시험 당일 뜻하지 않은 실수로 의외의 인생행로를 걷게 되는 조행덕...
저돌적이고 용맹한 성격의 소유자인 주왕례와의 만남으로 인해 서하의 한족 부대에 참가하게 되며, 그와의 인간적 교류는 문인으로서의 삶에 익숙했던 행덕의 가치관을 근저에서 변화시키는 한편, 마지막까지 그의 삶의 버팀목으로 작용한다.
위구르 왕족 여인과의 만남과 죽음을 통해 행덕은 인간의 운명적 요소에 대한 응시를 거쳐, 불교와 같은 종교가 지향하는 어떤 영원한 것에 대한 구도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행덕에게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고, 또한 그들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인간의 무력함과 생명의 무의미함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종교가 흥미로웠다.'
 
'재물과 목숨, 권력은 한결같이 그것을 소유하는 자의 것이었으나, 경전은 달랐다. 경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불에 타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무도 경전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었다. 타지 않고 지금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역사의 유구한 흐름에 비하면 인간의 삶의 영위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영원한 것을 인간이 노력을 통해 후대에 남기고 전달하려 할 때, 아무리 비정한 역사라 해도 이를 외면하지 않는 법이다.
 
나라가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은 종교와 민족, 그리고 역사의 결연한 흐름 속에서 시대의 추이와 인간들의 삶을 묵묵히 응시해온 위대하고 유구한 자연이라는 엄연한 진리를 새삼 자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둔황>을 비롯한 그의 역사소설의 참된 가치는 항상 인간과 역사의 관계를 인식하고, 역사의 흐름에 좌우되는 인간의 운명을 묘사하면서도 단순히 역사 속의 인간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을 유유히 흐르고 지탱하는 고독한 '시간'의 의미를 공간적으로 도려내어 응시하는 가운데, 고독과 허무, 방랑으로 채색된 인간의 삶과 죽음의 근원적 의미를 제시하는 점에 찾아야 할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6355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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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과 소비, 정보의 양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고 소통과 이동의 속도가 빨라진 사회를 살며 여유, 만족, 느림을 우리 마음과 생활 속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간의 여유, 물질적 여유, 깊고 넓은 지식, 마음의 여유!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욕심이 그 기준을 한 없이 늘리기 때문에 양적으로만 많다고 여유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여유와 적당한 만족이 있다면 적은 양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정철의 <불법사전>을 보면 '여유있게 사는 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1. 시계를 자주 보지 않는 것. 조급한 사람은 시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2. 나이를 자주 묻지 않는 것. 조급한 사람은 세월을 붙잡으려고 헛힘을 쓴다.
  3. 남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 조급한 사람은 대화에서도 도로에서도 꼭 끼어든다.
  4. 위에서 내린 세 가지 정의를 외우려고 하지 않고 그냥 흘려듣는 것. 나중에 정의가 필요한 그 순간에 생각나는 여유로운 그림을 내놓는 것.
  5. 미리미리 대답을 생각해두지 않는 것. 정답은 이거라고 서둘러 결론짓지 않는 것.
  6. 이렇게 같은 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도 짜증내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주는 것.



여유와 더불어 생활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만족할 줄 아는 삶이 필요하다.
유교경에 "족함을 모르는 자는 부유해도 가난하고, 족함을 아는 자는 가난해도 부유하다."고 했다. 아무리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지더라도 만족하지 못하면 가난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빨리빨리"가 익숙한 세상에 잠시 느리게 움직여보고 지름길이 있더라도 가끔은 가보지 않은 길을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은 가보지 않은 길이다. 매일 같은 길로 앞만 보고 다닌다면 어떻게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과 경험을 할 수 있겠는가.

댄스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 댄스를 배우는 초보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춤 동작을 배우는 과정에 "슬로우~~슬로우~~퀵~퀵"을 외치며 춤을 가르치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리 바쁘고 삶이 버겁더라도 잠시 쉼표, 느림의 미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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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사회적 개혁 운동이 대의를 위해 일어섰으나 장애물과 다른 생각을 가진 무리의 공격에 좌절하고 실패하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무관심은 우리를 아둔한 존재의 늪에 빠뜨리는 반면,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잘 실패할 것이다." - 사뮈엘 베케트



[본문발췌]


독견doxa(우연적이고 경험적인 견해나 지혜)과 진리Truth, 혹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지식과 절대적 믿음Faith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선상에서 오늘날의 상식은 '생각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구분선을 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상식 차원에서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보수주의적 자유주의뿐이다. 확실히, 자본주의의 대안들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자신의 토대 자체를 무너뜨릴 위험은 남아 있다. 이런 위험은 경제적 동력(강력한 국가기구가 시장경쟁 자체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정치적 동력과도 관련된다. 다니엘 벨에서부터 프랜시스 후쿠야마까지 보수적 민주주의자들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조건들(오래전 벨이 '자본주의의 문화적 조건들'이라고 불렀던 것)을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음을 깨달았다. 자본주의는 자기 책임과 시스템의 '공정함'을 철저히 인식하는 개인들과 그런 개인들을 통해 이뤄지는 사회적 안정을 조건으로 해서만 번창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교육 제도와 문화적 기제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뒷받침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지평에서 제출되는 유일한 해법은 하이에크식의 급진적 자유주의도 아니고 낡은 복지국가 모델에 덜 집착하는 잔인한 보수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자유주의에다가 시스템의 과잉에 맞서는 최소한의 '권위주의적' 공동체 정신(사회적 안정과 '가치들'에 대한 강조)이 결합된, 블레어T. Blair 같은 제3의 길 사민주의자들이 개척한 해법이다.


이것이 상식의 한계선이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신념의 도약Leap of Faith, 즉 회의적인 지혜의 지평에서는 미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대의Lost Cause에 대한 믿음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신념의 도약에서부터 발언한다. 하지만 왜? 물론, 문제는 위기와 분열의 시대 속에서 지배적인 상식의 지평에 제약된 경험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지혜로는 결코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감히 신념의 도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보편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메시아적' 관점에 선다. 이 책에서 옹호된 잃어버린 대의의 목록들이 '포스트모던한' 독견의 주장자들에게는 가장 끔찍한 악몽의 호려쇼 내지 온 힘을 다해 쫓아내려 했던 유령들이 모여 있는 대기소처럼 보일 것은 당연하다. 전체주의적 정치에 매혹된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하이데거의 정치학, 로베스피에르에서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 오늘날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이것들의 대의를 무시해 버릴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좀더 '부드러운' 형태로 대체하려고 시도한다. 지식인의 전체주의적 참여는 안 돼! 그 대신 세계화의 문제점을 탐구하고 공론장 속에서 인권과 관용을 주장하며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맞서 싸우는 지식인은 좋아! 혁명적 국가 테러는 안 돼! 그 대신 탈-중심적인 다중의 자율-조직화는 좋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안 돼! 그 대신 다양한 행위자들 간의 협력(시민사회 발의 국가 융자, 국가 규제)은 좋아!
'잃어버린 대의 옹호'의 진정한 목적은 스탈린주의나 테러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너무나 손쉽게 제출된 자유-민주주의적 대안을 문제 삼는 것이다. 푸코의 정치 참여나 특히 하이데거의 정치 참여는 그 근본적 동기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분명히 '잘못된 방향의 올바른 발걸음'이었다. 혁명적 테러의 불행한 운명은 - 그 테러를 통째로 거부하는 게 아니라 - 그것을 재창안할 필요를 제기한다. 멀지 않은 생태학적 위기는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받아들일 유일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의 주장은, 이것들이 자기 나름의 역사적 실패이자 괴물이지만 (스탈린주의는 인간의 고통이란 측면에서 파시즘보다 더 잔혹했던 악몽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엄밀히 말해서 프롤레타리아가 침묵한 우스꽝스러운 체제를 양산했다...) 그것이 진실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들 안에는 자유-민주주의자의 거부 속에서 사라진 부활의 계기가 존재한다. 이 계기를 분리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더러운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거꾸로, 자유민주주의자들이야말로 더러운 물과 함게 아이까지 버리지 않기를 원하는 자들(순수한 사회민주주의라는 아이는 남겨두고 더러운 테러의 물은 버림으로써)이라고 주장하고픈 유혹을 받지만, 그 속에서 원래 물은 깨끗했다는 사실, 물속의 오물은 아이로부터 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이가 더러운 똥으로 깨끗한 물을 오염시키기 전에 아이를 버리는 것, 스테판 말라르메의 말을 이용하면, 역사의 욕조 속에 물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앞으로 자주 인용할 베케트의 유명한 문구를 인용하면, 무관심은 우리를 아둔한 존재의 늪에 빠뜨리는 반면,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잘 실패할 것이다.


교양은 자유로운 행위인-척하는-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의무인 척하는 자유 행위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진정으로 교양 있는 태도는 실제로는 자신의 호의인데도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의무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자유를 필연의 인식으로 정의하는 스피노자를 뒤집는 역설에 의해 지탱된다.


헤겔의 용어로 설명하면, 자유는 우리 존재의 윤리적 실체의 의해 지탱된다. 각 사회마다의 특질들, 태도들, 혹은 삶의 규범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표식된 것으로 인식되지 않고 비-이데올로기적이고 상식적이며 '중립적인' 생활 형식처럼 나타난다. 이데올로기는 (급진적인 종교적 열정이나 정치적 경향에 대한 헌신처럼) 이런 배경으로부터, 그 배경을 토대로 명시적으로 정립된(기호학적으로 '표시된'marked) 입장이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가장 두드러지게(가장 실제적인)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바로 어떤 특질들을 자연발생적인 배경으로 중립화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변증법적인 '대립물의 일치'란 이런 것이다. 어떤 관념(이 경우 이데올로기)이 그 대립물(비-이데올로기)과의 일치(보다 정확히, 비-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나타남) 속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폭력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사회-상징적 폭력은 자신의 대립물 속에서, 즉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나 숨 쉬는 공기와 같은 자연스러움의 형태로 현실화된다.


다문화주의의 내적 곤경에는 이와 같은 교양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몇 년 전 독일에서 지배문화Leitkultur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추상적인 다문화주의에 반대하면서 모든 국가는 자국 내의 다른 문화 구성원들 역시 존중해야 하는 지배적인 문화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 좌파들은 이런 생각이 명백한 인종주의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최소한 사실에 대한 묘사만큼은 정확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존중은 여성의 완전한 해방이나 종교(와 무신론)의 자유, 성적 지향의 자유 같은 집단의 권리들이 공개적으로 타인과 물건을 공격할 자유를 희생시킨 대가로 얻어진 서구의 자유주의적 지배문화의 핵심요소이다. 이것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무슬림 차별에 대해서는 항의하면서도 자기 본국, 이를테면 사우디아라비아의 타종교 차별에 대해서는 하나의 규범으로 인정하는 서구 내 무슬림학자들에 대한 응답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허용하는 서구의 지배문화, 바로 그것이 다른 모든 자유에 대한 존중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간명하게 말해서, 무슬림을 위한 자유는 살만 루시디가 원하는 것을 쓸 수 있게 하는 자유의 일부이다. 자기에게 맞는 서구식 자유만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서구식 다문화주의는 사실 중립적이지 않으며 단지 특수한 가치들만 특권화할 뿐이라는 통상적인 비판에 대한 응답은 이런 역설, 즉 서구 근대성 안에는 보편적 개방성이 뿌리 박혀 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학 분야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편에는 보다 사회학적인 접근이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문화권이나 직업, 종교, 사회 경제적 집단에서의 행복지수를 측정한 무수한 데이터에 기반한다. 우리는 이런 연구가 문화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행복을 구성하는 개념이 각각의 문화적 맥락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행복을 개인적 성취의 반영으로 보는 것은 단지 개인주의적인 서구 국가들에서만 통용된다.) 또한 그렇게 수집된 데이터가 때로는 매우 흥미롭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행복은 생활에 대한 만족과 같은 것이 아니다. (평균적이거나 평균 이하의 생활 만족도를 보이는 몇몇 국가들은 매우 높은 행복지수를 보인다.) 생활 만족도에서 가장 우수한 나라들 - 대부분 서구 사회나 개인주의적인 집단 - 은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데, 물론 그것은 질투심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보다 타인들이 갖고 있는 게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중산층이 빈곤층보다 만족감이 떨어지는 것은 도달하기 힘든 고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상류층을 준거집단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획득 가능한 중간 소득층을 준거집단으로 삼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지과학적 연구나 뉴에이지의 명상적 지혜와 결합되곤 하는 심리학적(오히려 뇌과학적) 접근법이 있다. 이것은 행복과 만족의 느낌을 수반하는 뇌의 활동과정을 측정하는 것이다.


도덕성은 개인적 양심의 문제가 아니다. 도덕성은 모든 개인들의 행위에 대해 어떤 것이 허용되고 어떤 것이 허용될 수 없는지를 말해 주는, 즉 행위의 근거를 구성하는 불문율의 집합으로, 헤겔이 '객관 정신'이라 부른 것에 의해 지탱될 때만 발전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집단적 정체성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도덕적 타락의 과정 속에 있다. 권력자들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도덕적 중추를 꺽으려 하고 있다. 그들은 명백히 시민사회의 가장 위대한 성취인 우리의 자생적 도덕 감각의 성장을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


자유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쟁취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이성의 주체는 무자비한 자기-규율을 통해서먼 출현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안전한 거리에서 딸기 케이크와 초코 케이크 중 하나를 고르는 것과 같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필연과 충첩된다.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거는 것일 때 - '달리 어쩔 수 없기' 때문에 행할 때 -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주체를 윤리적으로 행동하게 몰아대는 세 가지 작인을 제시했다. 이상적 자아, 자아 이상, 그리고 초자아가 그것이다. 보통 프로이트는 이 세 가지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고(그는 자주 '자아 이상 혹은 이상적 자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또한 <자아와 이드> 3장 제목은 '자아와 초자아(자아 이상)'이다. 하지만 라캉은 이 세 항을 엄격히 구별한다. '이상적 자아'는 주체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내가 되고 싶거나 타인이 나를 이렇게 봐 줬으면 하는 상)를 의미한다. 자아 이상은 그 응시로 나의 자아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작인, 나를 지켜보며 내가 최선을 다하도록 독려하는 대타자, 내가 따르고 실현하고 싶어 하는 이상적 '나'이다. 그리고 초자아는 그 작인의 집요하고 가학적이며 징벌하는 측면이다. 이 세 항의 구조화 원리는 명백히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로 이뤄진 삼항구조이다. 이상적 자아는 상상적인 것으로, 라캉이 '작은 타자'라고 불렀던 내 자아의 이상화된 분신 이미지다. 자아 이상은 상징적인 것으로, 내가 상징적으로 동일시하는 지점, 내가 대타자 속에서 나 자신을 관찰하는(판정하는) 지점이다. 초자아는 실제적인 것으로, 나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퍼붓고 그것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의 실패를 조롱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작인, 그 시선 속에서 나의 '나쁜' 갈망을 억누르고 그 명령에 따를수록 점점 유죄가 되는 작인이다.

 
 
<세계들의 논리>에서 알랭 바디우는 고대 중국의 '법가'부터 자코뱅을 거쳐 레닌과 마오까지 작동하는 혁명적 정의의 정치라는 영원한 이데아를 정교하게 검토한다. 그것은 네 가지 계기로 구성된다. 의지주의voluntarism('객관적인' 법과 장애물에 구애받지 않고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믿음), 테러terror(인민의 적을 타도하겠다는 무자비한 의지), 평등한 정의egalitarian justice(우리로 하여금 조금씩 점차적으로 나아가도록 강요하는 '복잡한 상황들'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지 않은 채 평등한 정의를 향한 즉각적이고 과격한 몰아붙임),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요소는 인민에 대한 신뢰trust in the people가 있다. 이 이민에 대한 신뢰에 해당하는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첫째, 로베스피에르 자신의 '위대한 진리'(대중 정부의 특징은 인민에 대한 신뢰와 자신에 대한 냉혹함에 있다). 둘째, 마오쩌둥의 스탈린 비판. 그는 스탈린의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들)을 비판하면서, 스탈린의 관점은 "거의 모든 점에서 틀렸다. 가장 기본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점은 농민을 불신하는 데 있다"라고 규정한다.
 
 
 
'창발성'과 다양한 주체성들의 카오스적 상호작용의 시대, 중심적 위계 대신 자유로운 상호작용의 시대, 하나의 진리 대신 다양한 의견들의 탈-근대적 공존의 시대에 자코뱅적 독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취향taste이 아니다". ('취향'이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이데일로기적인 특질을 획득한 단어로 그 역사적 무게를 온전히 평가받아야 한다.) 의견의 자유, 시장경쟁의, 자유, 유목적이고 다원적인 상호작용의 자유가 지배하는 오늘날 '자유의 운명을 진리의 손에 되돌리는' 것이 목적인 로베스피에르의 '진리Truth의 정치'(물론, 대문자 진리이다)보다 더 낯선 것은 없다.
 
 
 
모든 위기는 그 자체로 새로운 출발의 자극이다. 모든 단기 전략과 실용적 계산의 실패는 숨어 있던 축복이자 토대 자체를 다시 사유할 기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복을-통한-회복Weider-Houlung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미지의 것 속으로 걸어가는 위험을 감수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을 때의 유일한 대안은 천천히 쇠락하는 것,, 로마 제국의 성숙을 위해 그리스가 그랬듯이 아무런 실효성도 없이 그저 향수 어린 문화적 관광지로 변모해 가는 것뿐이다.
 
 
 
현실을 '영원성의 측면에서' 보는 이 관점에서 절대적 자유는 절대적 필연, 그것의 순수한 자동성과 일치한다. 자유로워지는 것은 실체적 필연성 속/안에서 자유롭게 부유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홀워드가 들뢰즈의 자유는 "인간적 해방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것, 스스로를 절대적 삶의 창조적 흐름 안에 완전히 함입시키는 것임을 강조할 때 그는 분명 옳다. 하지만 이로부터 도출되는 그의 정치적 결론은 너무 쉬원 보인다. "자유로운 양태나 모나드monad는 자신에 대한 저항을 통해 작동하는 주권적 의지에 대한 저항을 제거한 양태이다. 따라서 주권자의 권력이 절대화될수록 그것에 복속된 자들은 점점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단순히 '인식된/알려진 필연성'이 아니라, 인정된/승인된 필연성, 이런 인정을 통해 구성된/현실화된 필연성이다. 
 
 
우리는 운명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운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운명과 자유로운 행위는 그래서 함께 간다. 자유는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각자의 운명을 바꿀 자유이다.
 
 
우리는 "지식과 체험, 상징계와 실재 사이의 구성적 긴장"을 주장해야 한다. 그래서 라캉의 상징계/실재 쌍은 "이론은 회색인 반면 삶의 나무는 푸르다"라는 상식적인 경험주의적 모티프로 환원되어 버린다. 즉, 우리의 지식은 언제나 제한적이라서 그것은 결코 체험의 풍부함을 온전히 포괄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식 외부로 나가 직접 실재를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실재를 상징화하려는 과제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도 모든 규정적 상징화는 불안정하고 일시적이라서 어떤 실재와의 외상적 조우를 통해 조만간 동요될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독재는 민주주의가 이용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민주주의가 폐지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쓸 때 그녀의 요점은 민주주의가 각기 다른 정치 행위자들에게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게 아니라(히틀러 역시-많든 적든-자유민주주의적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 텅 빈(절차적) 프레임 안에는 '계급적 편향성'의 기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급진 좌파들이 선거를 통해 집권할 때 그것이 르네상스의 징후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규칙을 바꾸는' 활동을 할 때, 단지 선거나 여타 국가장치들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 공간의 전체 논리를 바꿀 때(직접적으로 운동을 일으키는 권력에 의하거나 각기 다른 형태의 지역 자치-조직을 창출할 때), 다시 말해서 그들의 계급적 기반이 헤게모니를 갖도록 보장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민주주의적 형식의 '계급적 편향성'에 입각하여 정확한 직관에 의해 지도받을 때이다.
 
 
오직 주체가 존재할 때만 어떤 사건은 사건적 장소 안에 일어날 수 있다.
 
 

역사적 진보라는 비-사건적 시간관 속에서는 결코 혁명적 사건의 '정확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황은 결코 혁명적 행동에 '충분할 만큼 성숙할' 수 없다. 행동은 언제나 정의상, '미성숙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과거의 패배들이 유토피아적 에너지를 축적하여 최후의 전쟁으로 폭발할 것이다. '성숙함'이란 성숙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객관적' 환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패배들을 축적하는 것이다.

 

 

오늘날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은 자기들은 '혁명'보다 근본적인 해방적 정치운동에 결합하고 싶다고 한탄하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간절히 그것을 염원하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은 '그것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의지와 힘을 다해 진정으로 그런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공간을 찾아보지 않는다.) 여기에는 진실의 계기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태도 자체가 문제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누군가 혁명적 운동을 '보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당연히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그는 결코 혁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헤겔이 진실한 현실로부터 외관을 분리시키는 커튼에 관해 언급한 것은(외관의 베일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 너머를 추구하는 주체가 갖다 놓은 것 말고는) 또한 혁명적 과정에도 적용된다. '보는 것'과 '원하는 것'은 여기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달리 말해서 혁명적 잠재력은 저기 바깥에서 발견될 수 있는 어떤 사회적 사실이 아니다. 오직 그것을 '원하는'(운동에 참여하는) 자만이 그것을 '보게 된다'.

 

 

행위란 본질적으로 기존의 배경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좌표를 무너뜨리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배경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필수적인 정치적 행위는 배경으로서의 경제가 갖는 위상을 파괴하고 그것의 정치적 속성을 가시화시키는 것이다(이것이 맑스가 정치적 경제학에 대해 쓴 이유이다). 웬디 브라운의 "만약 맑스주의가 정치이론을 위한 분석적 가치를 가진다면 그것은 자유주의 담론 안에서 암묵적으로 '비정치적'-자연적인-것으로 언명된 사회적 관계 안에 자유의 문제가 내재해 있다는 주장에 있지 않는가?"라는 냉철한 분석을 상기해 보자. 이것이 "오늘날 미국의 정체성 정치가 일정하게 자본주의의 재자연화를 통해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그래서 던져야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단지 '사회주의적 대안의 상실'이나 표면적인 '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최근의 대항정치 지형에 의해 일정 정도 배제되고 있는 게 아닐까? 사회 전체에 대한 맑스주의적 비판과 총체적 변혁에 대한 그의 전망과 대조적으로 정체성 정치는 자신들이 반대하는 기존 사회의 내재적 기준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단지 자본주의를 비판으로부터 보호하는 기준이 아니라, 계급을 보이지 않게 하고 말할 수 없게 하는 기준 말이다. 그것도 어쩌다가 그러는 게 아니라, 풍토평처럼 몸에 배어 있는 듯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배적 관념은 그것이 우연적인 역사적 과정의 결과를 '자연화' 하거나 그 과정을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독제는 사물을 역동적으로, 역사적 과정의 일부분으로 보는 것이 된다. 하지만 오늘날 보편적 역사성과 우연성이라는 관념이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일부분이 될 때 우리는 비판-이데올로기의 관점을 뒤집어서 현대 사회의 그 찬탄할 유목적 역학 속에서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물어야 한다. 물론 그 답은 자본주의, 자본주의적 관계이다. 여기서 동일한 것과 변화된 것 간의 관계는 고유하게 변증법적이다.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자본주의적 관계-은 끊임없는 변화를 촉발하는 배치 자체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성 자체가 영속적인 자기-혁명의 역할이기 떄문이다. 진실로 근본적인 변화-자본주의적 관계 자체의 변화-를 일으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적 삶의 영속적인 사회적 역학을 뿌리부터 잘라내야 할 것이다.

 

 

"저항은 스스로를 하나의 탈주exodus로, 세계 바깥으로의 이탈로 제시한다." - 안토니오 네그리,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형식의 정치, '빼기의 정치',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된-이탈된-' 정치적 절차들을 필요로 한다. "당에 의한 봉기 형태와 달리 이 빼기의 정치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파괴적이지도 않고 적대적이거나 군사적이지도 않다." 이런 정치는 국가로부터 거리를 유지한 채 더 이상 "국가에 의해 확정된 스케줄이나 아젠다에 따라 구조화되거나 분극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국가로부터의 외부성을 어떻게 사고해야 할까? 바디우는 여기서 자신의 핵심적인 개념 구분을 제시한다. 그것은 파괴와 빼기 사이의 구분이다. '(빼기subtraction)는 더 이상 정치적 상황의 현실을 지배하는 법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은 그런 지배적 법들의 파괴로 환원되지도 않습니다. 빼기는 여전히 장소 안에 머물러 있는 상황의 법들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빼기가 하는 일은 자율의 지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부정이지만 부정의 파괴적인 측면과 동일시될 수는 없습니다. ... 우리는 지배적인 상황의 법들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 '기원적인 빼기'를 필요로 합니다.'

 

빼기는 '부정의 부정'(혹은 '규정적 부정')이다. 달리 말해서, 지배권력을 직접 부정-파괴하는 대신 그 지배권력의 장 안에 남아 있음으로써 그것은 바로 그 장 자체를 전복하고 새로운 실정적 공간을 개방한다. 요점은 이런저런 빼기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디우가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을 순수한 빼기로 규정할 때 그 자신은 참으로 증상적인 개념적 후퇴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빼기는 결코 빼기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정체성의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스스로를 빼내는 사람은 '허무주의적인' 테러리스트들이다. 그들 속에서 근본적인 파괴는 근본적인 빼기와 겹쳐진다. 또 다른 '순수한' 빼기는 뉴에이지의 명상적 후퇴로, 그들은 사회적 현실을 내버려 둔 채 자기만의 공간을 창조한다.

 

빼기는 실제로 언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가? 유일하게 타당한 대답은 이렇다. 그것이 스스로를 빼내는 시스템의 좌표 자체를 무너뜨릴 때, 그 시스템의 '증상적 비틀림'이 지점을 가격할 때이다. 카드로 만든 집이나 나무토막 쌓기를 상상해 보자. 그것은 하나의 카드나 나무토막을 빼내면-배제하면-전체 체제가 붕괴되는 복잡한 방식으로 지어졌다. 이것이 진정한 빼기의 기술이다.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려 보자. 거기서 유권자들은 집단적으로 투표를 거부하고 무효투표를 해버림으로써 정치체제 전체(지배집단과 반대자들 모두)를 패닉 상태로 빠뜨린다. 이런 행동은 그들 자신을 주체에 대한 근본적 책임의 상황으로 던져 놓는다. 그런 행위야말로 가장 순수한 빼기이다. 합법적 의례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물러나는 단순한 제스처가 국가권력을 절벽 너머의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들의 행위는 더 이상 민주주의적 합법성에 의해 보호받지 않으며, 권력자들은 돌연 항의자들에게 대답할 선택권을 박탈당한다. "우리를 비난하는 너는 누구냐? 우리는 선출된 정부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선택권 말이다. 합법성을 결여한 그들은 고된 노력을 통해, 그들 자신의 활동에 의해 합법성을 획득해야 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비난은 명백하다. 이것은 증가하는 정치적 무관심과 투표 불참이 만연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권력자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도대체 여기 어디에 전복적인 날카로움이 있다는 말인가? 그에 대한 답은 대타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표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능동적 행위로 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 의존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는 투표하지 않아. 나는 나를 대신해서 투표하는 사람에게 묻어갈 거야." 투표-불참은 그것이 대타자에게 영향을 미칠 때만 하나의 행위가 된다.

 

 

'독재'는 민주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의 기저에 깔린 작동 양태이다.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테제는 그것이 다른 독재 형식(들)의 대립물임을 전제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권력의 전체 장이 독재의 장이기 때문이다. 레닌이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독재 형식이라고 지적했을 때 그는 단순히 민주주의는 단지 조작된 외관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비밀 도당이 권력을 장악한 채 상황을 통제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민주주의적 선거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상실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면 그들이 진면목과 독재적 권력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라는 소박한 관념을 제시한 게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부르주아-민주주의 국가의 형식 자체, 그 이데올로기-정치적 전제들 안에 있는 권력의 주권 자체가 '부르주아' 논리를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독재'라는 용어를 정확히 민주주의 역시 독재의 한가지 형식이라는 식으로 순전히 형식적인 개념으로 사용해야 한다.

 

 

투쟁이 투쟁 자체의 장에 관한 투쟁으로 전환할 때 그것의 독재적 성격이 드러난다. 혹은, 자유로운 토론 속의 '독재'는 어떤 '최종 진술'의 환기가 결정의 순간으로 간주되는 방식 속에서 일어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에서 그것은 유목적인 것 대 고정된 정체성, 변화 대 정체, 다양성 대 일자 등의 대립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독재의 계기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보편성을 대변하는 '몫 없는 자들'인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몫 없는 자들'이 조성한 보편성의 권력이다. 그들은 왜 평등주의-보편주의적인가? 또다시 순전히 형식적인 이유 때문이다. 몫 없는 자들로서의 그들은 사회적 체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정당화할 특수한 특질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 부분집합에 속함이 없이 사회라는 집합에 속해 있다. 그들의 소속은 그 자체로 보편적이다. 여기서 다양한 특수한 이해와 타협을 통한 이해관계의 중재라는 논리는 한계에 직면한다. 모든 독재는 이와 같은 대의의 논리를 파괴한다.

 

 

헤겔의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와 '인민'의 대립은 '진정한' 보편성과 '거짓' 보편성 간의 대립니다. 인민은 포함적이고 프롤레타리아는 배제적이다. 인민은 완벽한 자기-확증을 방해하는 침입자나 기생 존재와 맞서 싸운다. 프롤레타리아는 바로 그 핵심에서 인민을 분해하는 투쟁을 강행한다. 인민은 자기 확인을 원하고, 프롤레타리아는 자기 해체를 원한다.

 

 

고대 그리스부터 우리는 보편성의 침입에 대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처음 나타났을 때 데모스demos(위계적인 사회적 체계 안에서 확고한 자기 자리가 없는 자들)는 단지 권력자들에 맞서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원한 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받고 있는 부당함을 항의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목소리가 공적 영역에서 독재자나 귀족과 동등한 위치에서 인정되거나 포함되기를 원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 그 배제된 자들은 스스로를 사회 전체의 구현체로서, 진정한 보편성을 체현한 존재로 선언했다. "우리-질서 속에서 셈해지지 않은 '아무것도 아닌'nothing-는 인민이다. 자신의 특수한 특권적 이해만을 대변하는 다른 자들과 달리 우리는 전부이다." 정치적 갈등은 고유하게 각각의 부분이 자기 자리를 갖는 체계화된 사회체제와 보편성의 텅 빈 원칙에 의해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몫 없는 자들' 사이의 긴장을 지칭한다. 그 텅 빈 보편 원칙을 에티엔 발리바르는 평등-자유, 즉 말하는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이 지닌 원칙적 평등이라고 불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민주주의의 폭발적 분출 자체의 다른 이름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래서 합법적인 국가권력과 불법적 국가권력 간의 차이가 중지되는, 국가권력 자체가 불법이 되는 제로-차원이다. 1792년 생-쥐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왕은 반역자이며 참주이다." 이 구절은 행방적인 정치의 초석과 같은 언명이다. 참주와 대립된 '합법적인' 왕이란 건 없다. 왜냐하면 프루동이 사유재산 자체가 절도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왕이 된다는 것 자체가 권력 찬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 단순하고 직접적인 부정("이 왕은 합법적이지 않다. 그는 참주이다")에서 본질적인 자기-부정('진정한 황'이란 말은 모순 형용이다. 왕이 된다는 것은 가 자체로 권력찬탈이다)으로의 이행을 발견한다.

 

 

민주주의와 독재의 이 기괴한 조합은 독재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한 긴장에 근거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두 가지 기본적이고 해소 불가능한 측면이 있다. '정원 외 원소'인 자들에 의한 폭력적인 평등주의적 강제가 한 측면이고, 누가 권력을 행사할 것인가에 대한 (다소간) 일반적인 선택 절차에 관한 법적 규정이 다른 한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은 서로 어떻게 관계 맺는가? 두번째 의미에서의 민주주의가 ('인민의 목소리'를 확증할 법적 절차)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방어라면, 즉 위계적인 사회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평등주의적 논리의 강제적 부과라는 의미에서, 혹은 이런 과잉을 재가동시켜 그것을 정상적 운동의 일부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방어라면? 그래서 문제는 어떻게 폭력적인 평등-민주주의적 충동을 규제/제도화할 것인가, 어떻게 그것이 두번째 의미의 민주주의(법적 절차)로 타락하는 것을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방법도 없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정상화될 일시적인 유토피아적 폭발로 남게 된다.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우려하는 사람들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하곤 한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해방된 대가가 새로운 지배자의 보이는 손에 의한 통제라면, 우리는 그런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 가시적인 손이 '몫 없는 자들'에게 보이고 그들에 의해 통제된다면.

 

 

제럴드 코언은 고전적인 맑스주의적 노동계급 개념의 네 가지 특질을 나열한 바 있다. 1)노동계급은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2)노동계급은 사회의 부를 생산한다. 3)노동계급은 착취받는 사회 구성원들로 이뤄진다. 4)그 구성원들은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맑스주의적 프롤레타리아의 네 가지 특질은 단일한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근거해 있다. 그것들은 동일한 구조적 원인의 네 가지 효과인 것이다. 전 지구적 자본의 끝없는 자기-재생산을 위협하는 네 가지 적대들 역시 동일한 원인으로부터 '연역' 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이 과제는 현대 물리학에서 하나의 동일한 특질이나 법칙으로부터 네 가지 근본적 힘(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을 연역해 내는 '통합이론'의 발전만큼이나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아마 우리는 코언의 네 가지 특질을 또 다른 네 항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성' 원칙은 우리 모두와 관련된 논제인 생태학으로 나타난다. '빈곤함'의 특질은 슬럼에 사는 배제된 사람들의 특질이다. '부의 생산' 기능은 점점 더 유전공학 같은 과학기술적 발전에 의존한다. 마지막으로 '착취'는 지적 재산처럼 집합적 노동의 착취로 다시 나타난다. 네 가지 특질은 일종의 기호학적 사각형을 형성하여 두 가지 대립이 사회/자연과 새로운 분리 장벽의 내부/외부 선을 따라 교차한다. 생태계는 자연의 외부를 가리키고, 슬럼은 사회적 외부를, 유전공학은 자연적 내부를, 지적 재산은 사회적 내부를 가리킨다.

 

왜 이 네 가지 적대의 중첩은 헤게모니 투쟁과정에서 채워지는 라클라우식 텅 빈 기표('인민')가 아닐까? 왜 그것은 억압된 성 소수자, 인종집단, 종교집단 사이의 일련의 '무지개 연합'rainbow coalition에 속하는 또다른 시도가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적 위치, 즉 '몫 없는 자들'의 위치를 필요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오래된 모델을 원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신실한 공산주의자의 동맹, 즉 '노동자, 가난한 농민, 애국적 프티 부르주아, 그리고 정직한 지식인'의 동맹이다. 

 

그래서 포함된 것으로부터 배제된 것을 분리하는 간극과 다른 세 가지 적대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 세 가지 적대들은 하트와 네그리가 '공통성'commons이라고 부른 우리 사회적 존재의 공유된 실체의 세 가지 차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의 사유화는 필요하다면 폭력을 동해서라도 저항해야 하는 폭력적인 행위이다.

  • 첫째는 문화의 공통성,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지적' 자본의 형식으로, 커뮤니케이션과 교육의 수단인 언어(만약 빌 게이츠에게 독점이 허용된다면 우리는 특정 개인이 우리의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망의 소프트웨어 토대를 문자 그대로 소유하게 되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해질 것이다)뿐만 아니라 공공 운송이나 전자통신, 우편 등과 같은 공공 인프라도 포함된다.
  • 둘째는 외부 자연의 공통성으로, 오늘날 오염과 착취로 위협받고 있다(석유에서부터 숲이나 자연 서식지 자체).
  • 세번째는 내적 자연의 공통성(인간의 유전자)이다. 이들 공통성의 투쟁은 자본주의의 '인클로저' 논리가 자유롭게 진행된다면 인류 자체의 소멸로까지 전개될 수 있는 파괴적인 잠재성에 대한 각성을 공유한다. 이 '공통성'에 의거하여-사적이지도 않고 공적이지도 않은 이 생산의 실체-공산주의의 부활이 정당화된다. 그래서 공통성은 헤겔이 자신의 <정신현상학>에서 '사태'die Sache, 즉 공유된 사회적 사물-원인으로 제시한 것,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의 일', 끊임없는 주체적 생산에 의해 지속되는 실체와 연결될 수 있다.

 

 

우리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안전에 대한 절망적인 추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우리가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의 공허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본주의적 혁신의 이면에는 항구적인 쓰레기 생산이 있다. '근대와 탈근대 산업 자본주의의 주된 생산물은 정확히 쓰레기이다. 우리는 탈근대적 존재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각적으로 이끌린 소비품 모두가 실제로는 쓰고 버린 것으로 귀결될 것이고, 그런 소비품들이 결국은 지구를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모시키고 말 거라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비극의 감각을 상실했다. 당신들은 진보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지각한다.'

 

 

표준적으로 강요된 선택 상황에서 나는 올바른 선택을 하는 조건에서만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래서 나에게 남겨진 것은 어떤 경우든 나에게 강요된 것을 마치 자유의지로 행한 것처럼 가장하는 공허한 몸짓이다. 여기서는 정반대다. 선택은 실제로 자유롭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훨씬 더 정말적인 것으로 경험된다. 우리는 우리 삶에 근본적인 영향을 줄 문제에 대해 결정해야 하지만 안정적인 지식 안에 근거해 있지 않은 위치에 던져진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이 잠정적인 시간 속에 던져졌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과거의 전통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어떤 미래가 도래할지 거의 모른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자유로운 것처럼 살도록 강요받고 있다.'

 

 

과학적 정신은 실제로 불가능한데도 객관적인 위험 평가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공통감각은 재앙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뒤피가 의거하는 복합 시스템 이론에 따르면 시스템은 두 가지 대립적인 특질을 지닌다. 견고하고 안정적인 특성과 극단적인 불안정한 성격을 동시에 지닌 시스템들은 특이한 문턱('임계점')까지는 어떤 교란도 흡수하여 새로운 균형과 안정을 찾을 수 있지만, 그 문턱을 넘어가면 아주 작은 교란조차 총체적인 재난을 일으킬 수 있고 그로 인해 전혀 다른 질서가 수립될 수 있다. 수세기 동안 인류는 자신의 생산 활동이 환경에 가하는 충격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자연이 인간의 삼림 벌채나 석유, 석탄 사용 등을 자기 시스템 안에 통합하여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았다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너무 늦은 시점이 아닌지 우리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뒤피가 지적한 것처럼, 다양한 생태학적 재앙의 위험에 대해 뭔가 해야 한다는 긴박성 속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위험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행동에 돌입할 것인지(만약 재앙이 안 일어난다면 그 행동은 우스꽝스러운 게 될 것이다).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인지(재앙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의 선택 상황. 가장 나쁜 선택은 중간자의 입장에서 제한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되든 실패하게 된다. (즉 생태학적 재앙이 도래할 때는 어떤 중간적 입장의 여지도 없다. 재앙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예측이나 조심, 혹은 위험 관리란 것은 무의미하게 되기 쉽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럼즈펠드식으로 "모르는 무지"unknown unknowns라고 불러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언제가 임계점이 될지 모를 분 아니라 정확히 우리가 무엇을 알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태학적 위기의 불확정적 측면은 미친 듯이 날뛸 수 있는 소위 '실재 속의 지식'과 관련되어 있다. 겨울인데도 너무 더울 때 식물과 동물들은 2월의 더운 날씨를 벌써 봄이 온 것으로 오해하여 그에 따라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뒤늦은 추위의 공격에 쓰러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 재생산의 전체 리듬을 교란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르는 앎', 즉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부인된 믿음과 가정이야말로 가장 큰 위험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생태주의의 경우 이런 부인된 믿음과 가정은 우리가 재앙의 가능성을 실제로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그것을 '모르는 무지'와 결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시계상의 맹점blind spot처럼 기능한다. 우리는 그 간극을 보지 못하고, 그로 인해 전개된 상황은 연속적인 것처럼 보인다. 

 

뒤피의 요점은 만약 우리가 (우주적, 혹은 환경적) 재난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적' 시간성을 파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도입해야 한다. 뒤피는 이런 시간을 '기획의 시간', 과거와 미래 사이에 닫힌 회로의 시간이라고 불렀다. 미래는 과거의 우리 행위에 의해 인과적으로 산출되며, 우리의 행위 방식은 우리의 미래 예견과 그 예견에 따른 반응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앞으로 도래할 재앙에 대면하는 방법으로 뒤피가 제시한 것이다. 우리는 우선 그 재앙을 우리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 운명 안으로 던져 놓고 그 견지에서 지금 우리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추정 가능성들을 소급적으로 그 과거(미래의 과거) 속에 삽입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했었따면 지금 우리 속에 있는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뒤피의 역설적 공식이 있다. 우리는 가능성들의 차원에서 미래는 운명 지어져 있어서 재앙은 꼭 발생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이런 수용을 배경으로 우리는 운명 자체를 바꿀 행동을 조직해야 하며, 그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과거 안에 삽입해야 한다. 바디우에게 사건에 대한 충실의 시간은 전미래 시제futur anterieur이다. 자기 자신을 미래로 추월함으로써 현재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미래가 이미 여기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전미래 시제의 순환 전략은 대재앙(이를테면, 생태학적 재난)에 마주하여 가장 실제적인 전략이다. "미래는 아직 열려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최악의, 사태를 막을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대신 재앙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소급적으로, "별자 속에 새겨진" 우리의 숙명이 일어나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는 생태학적 재앙의 위험에 대응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바디우가 혁명적-평등주의적 정의의 '영원한 이상'이라고 불렀던 것의 네 가지 계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
  • 엄격한 평등주의적 정의. 모든 사람은 사건적 포기에 대해 똑같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우리는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 에너지 소비량 등의 세계적인 기준을 똑같이 부과해야 한다. 선진국들이 브라질에서 중국까지의 제3세계 국가들이 급속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공유된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현재 비율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을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테러. 강제적인 환경보호 조치를 위반한 모든 사람에 대한 무자비한 처벌. 자유주의적 '자유'에 대한 가혹한 제한이나 예상되는 법-위반자들에 대한 기술적인 통제까지 포함하여.
  • 의지주의. 생태학적 재앙의 위험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규모 집단적인 결정을 통해 자본주의적 발전의 '자생적인' 내부 논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이것들은 인민에 대한 신뢰로 결합되어야 한다. 대다수 인민은 이와 같은 엄정한 조치들을 지지할 것이며, 그 조치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여 스스로 그 강제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쪽에 설 것이다. 우리는 평등주의-혁명적 테러의 형상들 중 하나로, 당국자들의 범죄를 고발하는 '내부고발자'의 활동을 혁명적 테러와 인민에 대한 신뢰의 결합으로 단어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엔론 비리 사태 때 <타임>은 참으로 정당하게도, 금융 당국자들의 비밀을 폭로한 내부고발자를 공공의 영웅으로 찬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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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내 뜻대로만 되지 않음을 알 때,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본문발췌]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 한세상 멋있게 살기를 바란다. 아름다움은 그 멋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본시 이 우주, 자연, 세상, 인간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러니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우리의 삶 자체도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란 진(眞)과 성(聖)에 맞닿아 있음을 나는 믿는다. 아름다움의 체험은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여 신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회한만 남고, 앞으로 다가올 날을 바라보면 두려움만 가득한 것이 우리의 삶이다. 번뇌의 깊은 바다 속에 진정한 깨달음이 있듯이, 고통과 부조리의 일상 속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본다면 우리의 삶 또한 빛으로 가득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일찍이 노자는 절학무우(絶學無憂)를 설파했다. 학문은 무한하고 인간은 유한한대,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대적하려 할 때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일찍부터 동양에서는 지식만을 추구하는 서양의 전통적 학문 연구 경향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니, 또한 되새겨 볼 일이다. 학문이란 인간을 위한 것이고, 결국 인간 문제에 귀결된다. 그런데 인간 자체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비합리적 존재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가장 극명하게 분출하는 전쟁의 역사를 보면 잘 드러난다.


"훌륭한 것들을 많이 보아라! 이류나 삼류가 아닌 최고의 것들을 보게 되면, 당신은 점차 훌륭한 것에 눈이 뜨일 것이다." - 미호박물관 설립자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의 순간에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더 이상 가져갈 수 없으니 비로소 무소유 앞에 직면한다. 모든 관계를 떠나니 무한한 고독과 대면한다. 천 길 낭떠러지에 서서 한 걸음 앞으로 내 딛는 순간에 열리는 새로운 세계이다. 아마 우리 인간의 죽음도 흰 눈에 덮인 겨울의 호수 풍경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뜰을 바라보다'
아침에 일어나 방을 깨끗이 청소하니
마음 또한 정갈하다.
마당의 고요함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뜰에는 목수국이 하얀 꽃을 탐스럽게 피우고
무성한 잎 사이로 분홍빛 해당화가 수줍어한다.
앞산의 녹음은 짙음을 향해 달려가고
뜰의 나뭇잎은 투명한 햇빛 아래 반짝인다.
뜰 안에는 새소리만 가득한데
멀리서 찌르레기 소리 가물가물하고
먼 산의 뻐꾸기 소리 아련히 들린다.
무더위 물러가고 백로가 지났으니
이제 소슬한 가을바람 소리도 곧 듣겠지.
지금까지 무수한 가을을 지내 왔건만
앞으로 나에게 맡겨진 가을은 얼마나 될까?
우주는 본시 시작도 끝도 없어
인간의 목숨을 정해 놓아으니
스스로 헤아려 볼 뿐 그에 따르리라.
다만 세상에 나 없어도
무심한 우주의 운행은 계절을 바꿔 가며
꽃을 피워 낼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몰래 슬픈 마음이 든다.


공자는 나이 오십에 천명(天命)을 안다고 했다. 천명이란 참으로 현학적인 개념이다.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천명(天命)을 안다는 말이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절실히 깨달음으로써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풍류는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멋이자 경지이며, 동양 예술정신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바람이 흐르는 곳에서 만물은 기를 얻어 소생해 움직인다. 바람은 생명이다. 동양 회화 제일의 품평 기준 또한 기운생동(氣韻生動)이었다. 태초에 하느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들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사람을 만든 것도 바람이요, 우리가 숨을 쉬는 것도 바람이다. 이렇게 우주의 생명은 바람이니, 우리의 삶도 바람이요, 우리의 생명도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간다.


이 세상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마시는 공기, 내가 먹는 음식이 '나'라는 일시적인 존재를 이루듯이, 수백 년 전의 퇴계가 나에게 들어와 나의 일부가 되었듯이, 그렇게 지난 독서의 순간순간들이 나의 영혼을 이루었고, 언젠가는 또 다시 흩어져 광대하고 영원한 우주를 유영할 것이다.


스님은 가시는 길에 그렇게 힘들여 추구하던 불법의 아름다움도 아무런 집착 없이 순순히 내려놓았다.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바람을 찍고 싶다던 스님,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에 당신의 소회를 무든 제자들에게 답하셨다.
'삼라만산이 천진불(天眞佛)이니,
한 줄기 빛으로 담아 보려고 했다.
내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마라,
동서남북에 언제 바람이라도 일었더냐!'
스님은 그렇게 가셨다. 그러나 마당에 떨어진 꽃잎, 바위 위에 낀 이끼, 대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 산허리를 덮은 운무를 보면 그 속에 스님이 계실 것이고, 우리 모두 스님을 그리워할 것이다.


우주의 시간은 참으로 광대하고, 인간의 생명은 찰나이면서 영원하다. 지금 이 순간 애달아하는 우리의 운명도 모두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 그러하니 하늘이 이승에서 나에게 남겨 준 시골집에서의 마지막 삶의 안식도, 앞으로 떠돌아야 할 길고 먼 나그네 길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여인숙이 아니겠는가?


한칸집.
집주인은 한칸집이 작고 검박한 집이기를 바랐지만, 이 집이 한편으로는 무척 화려한 형식이기도 하다는 필자의 의견에 건축가는 동의했다. 한칸집에 대해 건축가는 자연의 화려함을 빋대어 그것은 생명과도 같이 화려하다고 했다. 건축은 자연처럼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을 지닐 때 화려함으로 승화되는데, 그것이 인문적이고 예술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 그런 집이야말로 '삶의 무대이자 피안으로, 삶을 살되 삶을 잊게 하는 집'으로서 우리 삶을 확장시킨다.


일본 중세의 승려 요시다 겐코는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고, 비바람 맞지 않고 한가롭게 사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여기에 병의 고통을 참기 어려우므로 약을 포함하여 이 네 가지가 부족함을 가난이라 하고, 네 가지가 부족하지 않음을 부유하다고 하며, 네 가지 이외의 것을 얻으려 함을 사치라고 했다.


우리가 외부의 자극과 충격으로부터 마음을 고요하고 잠잠하게 유지할 때 본연의 맑은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천국이나 열반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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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불확실성은 위기이면서 기회다.

 

 

[본문발췌]

 

끝은 새로운 종류의 시작을 의미하며, 그 새로운 시작에는 수많은 기회가 함께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파고들어 새로운 트렌드를 예측하고, 단절보다는 소통을 택하며, 자신과 자녀들, 배우자, 미래의 가족, 직장 등을 위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줄 안다면 말이다. 변화의 충격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민자들이 더 창의적이며 이민자들이 더 혁신적인 이유는 특별히 더 뛰어난 능력을 물려받아서가 아니라 과학과 공학 분야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민이라는 행위 자체가 순수한 기업가의 도전 정신과 비슷하다. 온라인 취업 소개 사이트로 유명한 링크드인의 공동 창업자 리드 호프먼은 2013년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익숙해진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 성공하려면 새로운 사회에 녹아들 필요가 있으며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때로는 즉흥적으로 선택해야 할 때도 있는데, 이민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대담한 계획과 결단이 필요하다."

 

2030년에는 이민자들의 적극적인 기여를 잘 이용하는 동시에 경제 상황이 변화하여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잘 다독이는 국가가 가장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년층의 삶의 질은 점점 더 독립성과 자율성, 이동성, 그리고 연결성과 밀접해진다. 삶의 질은 육체적, 인지적 쇠퇴의 결과들 외에 외로움을 견디고 계속해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랜데버의 공동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카일 랜드는 사람은 고립감을 느끼면 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혈압이 상승하는데 이 가상현실 장비를 사용해 일종의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노년층의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는 또 다른 첨단 기술은 기계 외골격이다. 이 외골격은 계단 오르기, 짐 들어 올리기, 집안 일하기, 혹은 재활 치료 등의 필요에 따라 맞춤형으로 만들 수 있다. 노년층이 삶의 질과 자율성, 독립성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자.

 

"연령대가 다양한 부서는 주어진 문제를 더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다. 생각이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수록 과제를 해결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 - 헬렌 데니스

 

외로움이 심해질수록 인지력은 더 빨리 떨어지고 건강도 나빠지며 사망률도 높아진다.

 

 

창조적 변화를 주도하는 이 전문가(과학자, 공학 기술자, 건축가, 예술가, 디자이너 등) 계층은 미국 노동력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2030년이 되면 절반 가까이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 계층은 "특별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복잡한 지식 체계를 이용한다."  토론토대학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는 도시가 역동적인 전문가 계층을 한자리에 모으거나 길러내는 데 필요한 것들을 '3T' 개념으로 요약했다. 바로 인재talent, 관용tolerance, 기술technology이다. 그중에서도 관용이란 개념은 많은 관심을 끌었다. 플로리다 교수는 자신이 제시한 성 소수자 지수Gay Index와 방랑자 지수Bohemian Index가 높은 도시가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관용을 특히 남녀 성소수자들, 그리고 화가나 음악가처럼 자유분방한 방랑자 기질이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한곳에 모을 수 있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폭넓게 보면 모든 전문가 계층은 편견 없는 열린 마음을 키울 수 있는 특별한 생활 방식과 밀접하다. "다양성에 대한 관용과 열린 마음은 물질만능주의적 가치 이후의 시대로 향하는 광범위한 문화적 변동의 일부다." 플로리다 교수의 지적이다. "관용과 열린 마음은 기술, 그리고 인재와 함께 경제 발전을 돕는 또 다른 요소다" 인재와 관용, 그리고 기술은 힘을 합해 지식 경제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한곳으로 이끈다. 플로리다 교수의 주장은 특히 도시의 부활과 밀접하다. 그가 말하는 "거리의 문화"는 "찻집과 길거리 음악가, 그리고 작은 음식점이나 전시관들이 뒤섞여 있어서 참여자와 관찰자, 혹은 창의성과 그 창조자 사이의 경계가 흐릿한 환경"을 의미한다.

 

 

조지프 슘페터는 새로운 기술을 바로 받아들이는 시장경제의 특성과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낡고 비효율적인 것들을 몰아내는 지속적인 영향력 모두 시장경제의 빛인 동시에 그늘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42년에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엔진을 설치하고 계속 움직이도록 만드는 근본적인 동력원은 새로운 소비재와 새로운 생산 혹은 운송 방법, 새로운 시장, 그리고 자본주의 기업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산업 조직들로부터 나온다." 또한 슘페터는 이러한 동력원을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경제 구조를 혁신하고 낡은 것들을 파괴하며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산업적 돌연변이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적 파괴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사실"이라고 결론지었다.

 

 

노령화 사회와 환경 악화, 그리고 기후변화가 낳는 어려움들을 감안할 때 2030년 전에 개발해야 할 기술은 무엇일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술은 생활에 필요한 편의시설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한 물이 필요없는 화장실과 전자책이다. 가상현실 기술에 바탕한 치료법도 심리적, 인지적 만성 장애를 앓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니 중요하다. 나노 기술은 환경에 치명적인 일부 소재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며, 3D 인쇄술은 자원을 적게 낭비하게 해준다. 그렇지만 이 기술들이 일자리를 없애거나 우리의 사생활을 노출시키거나 혹은 가짜 뉴스 확산 등을 부추기면 미래는 오히려 위축될 수도 있다.

 

 

모든 일은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화폐를 암호화한 디지털 증표로 바꾸면서 시작되었다. 2030년이 되면 디지털 화폐만큼이나 블록체인 기술을 여러 분야에 적용하는 가능성도 중요해질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은 예컨대 각종 공무, 지적 재산, 무역 거래, 위조 방지, 총기 규제, 빈곤 퇴치, 환경보호 같은 다양한 분야에 도움이 된다. 이들은 모두 수평적 사고의 산물이다. 나는 암호 화폐가 규제 담당자들을 포함해 수많은 사용자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러려면 우리가 돈에 관해 생각하고 사용하는 방식 자체를 암호 화폐가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며, 사업체 경영이나 개인 재무 상황 관리를 넘어서 우리 삶 자체를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지평을 열어젖혀야 한다. 만약 디지털 화폐가 기존의 현금을 대신할 뿐이라면 사람들이 꽤 실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금을 주고받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뿐더러 자원을 절약하거나 탄소 발자국을 지우는 데 도움이 된다면 사람들은 금융업의 지각 변동을 목굑하는 동시에 지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암호 화폐 기술 활용을 사람들의 행동 변화와 연결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탄소 가스 배출 감소처럼 장기적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이득이 되는 일뿐만 아니라 쉬운 사용법이나 비용 절약처럼 즉각적인 이득이 생기기를 원한다. 예컨대 디지털 공유 방식으로 먹을거리나 의류 낭비를 줄이면 자신이 보유한 암호 화폐에 지급되는 이자가 늘어나기를 원한다.

 


"육지에서 멀어질 용기가 없다면 새로운 수평선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미국의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말이다. 잘 모르는 것들을 두려워하면 기회를 붙잡는 데 방해가 된다. 바로 2030년과 그 이후에 다가올 거대한 변화에 숨은 기회들이다.

 

 

사람들은 불확실성과 맞닥뜨리면 두려워서 다양한 길을 찾으려 한다. 다가오는 위협에 정면으로 노출되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 쉽게 말하면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투자자와 경영자, 그리고 운 좋게도 운용할 만한 연금이 있는 사람이라면 불확실한 시장이라는 험난한 바다를 헤쳐 가기 위해 매일 이 교훈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2030년을 맞이하려면 수많은 새로운 발상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기존의 믿음이나 행동 방식을 고수하면서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기대 수명과 인구 노령화, 그리고 인공지능의 영향력을 살피는 데 도움을 얻겠다는 생각은 안이하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요소가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미 입증된 생각'은 사실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새로운 기술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시대에 직업과 퇴직, 혹은 장래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언제든지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대규모로 일어나는 변화에 대처할 때 발생하는 또 다른 어리석은 믿음은 뭔가 거창하게 행동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에 시달릴 때 과도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거대한 변화에는 완고한 고집이 아니라 점진적인 수정과 적응이 필요하다.

 

 

막다른 곳에 몰려 두려움이 엄습하면 점진적인 방향 수정이나 수평적 이동을 하기 어렵다. 어떤 선택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야 상황 변화에 확실하게 적응할 수 있다. 

 

선택의 여지를 항상 열어두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겠는가? 탈출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달리는 것 같은 결정은 하지 말라. 수평적 이동을 가로막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 되돌릴 수 없거나 되돌리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하리라고 예상되는 결정은 하지 말라. 선택의 여지를 열어두는 일은 경제 상황이 불확실할 때 '리얼 옵션'을 확보하는 일과 비슷하다. 경제가 불확실할수록 리얼 옵션의 가치는 올라간다.
"리얼 옵션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의사 결정권자가 지속적으로 비용을 낭비하는 일 없이 다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매킨지의 전략 투자 부문 부책임자 휴 커트니의 주장이다. 이 전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위험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 같은 극단적 선택 사이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음을 깨닫고 '양자택일'이라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자는 의미다. "선택의 여지를 열어두면 불확실성이 커질 가능성이 있지만 행동의 제약도 줄어든다." 선택의 여지를 열어두는 것은 처음부터 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 방식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가 부정적인 면보다 기회에 초점을 맞출수록 2030년이라는 새로운 시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확률이 올라간다.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예컨대 기후변화는 다루기 어려운 문제 같지만 모든 문제에는 그만큼 기회가 있는 법이다.

 

 

2030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한정된 자원을 보존하고 혁신을 쉬지 않으면서 선택의 폭을 계속 넓혀야 한다. 우리가 좀 더 친환경적으로 행동하면 일상적인 적응과 수평적 사고를 통해 기후변화를 비롯한 환경적 위협들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세상은 계속 바뀐다. 변화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도 함께 변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저 손실을 최소화하려 애쓰거나 한번에 하나씩 소극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크든 작든 새로운 변화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인구통계학적, 경제적, 문화적, 기술적인 변화가 다가올 때 그 흐름에 올라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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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시간, 진화의 시간, 역사의 시간, 사람의 시간.....
현재를 사는 사람의 시간 선상에서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고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본다.


[본문발췌]

드레퓌스 사건은 '지식인과 언론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 직후 <로로르>는 '1894년 재판의 법률 위반과 에스테라지 의혹에 항의하며 재심을 요구한다'는 취지의 항의문과 수백 명의 지지서명을 실었다.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 앙드레 지드를 비롯해 작가, 예술가, 건축가, 변호사 등 전문직업인도 있었지만 서명자 가운데 대다수는 이름에 학위를 병기한 교수와 대학생들이었다. 클레망소는 그들을 가리켜 '한 가지 이념을 위해 사방에서 몰려든 지식인들'이라 했다.

 

어떤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해야 할지 명확하게 선을 긋기는 어렵지만, 보통은 고등교육을 받고 학위를 취득해 연구, 교육, 창작, 정보유통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며 말과 글로 대중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한다. 드레퓌스 사건 때 재심 요구파에만 지식인이 있었던 게 아니다. 한때 수십만 회원을 이끌고 재심 반대운동을 펼친 '프랑스조국연맹'의 지도자는 작가 모리스 바레스였으며 시인, 문예비평가, 규소, 대학생, 교사, 예술가들이 그 연맹의 중심을 이뤘다.

 

지식인 집단은 민주주의와 과학혁명의 산물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대학은 귀족가문 청년들의 놀이터에서 학문 연구와 고등교육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유럽 전역의 대학에서 자연과학과 전통적 인문학이 다양한 갈래를 이루며 발전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 국가와 민중 사이에 시민사회를 형성했다. 정치인과 정당이 선거에 이기려면 시민사회의 다수 의견이나 여론을 존중해야 했다. 지식인이 말과 글로 여론을 움직여 권력의 향배를 좌우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프랑스만 그랬던 게 아니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국가는 물론이요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중국 같은 전제국가에서도 지식인들이 정당을 결성하고 대중을 움직여 혁명을 일으켰다.

 

 

언론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못지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제4부'가 됐다. 언론사는 개인기업 또는 주식회사 형태의 사기업이지만 정보를 유통하는 공적 기능을 담당했다. 정보 유통에 큰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지식인은 언론을 통하지 않고서는 대중과 접촉하기가 어려웠다. 정보유통망을 장악한 신문, 잡지, 방송 종사자도 지식인 집단의 일원이 됐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봤듯이,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언론이 크게 꾸준히 보도하면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이됐다. 지식인과 신문, 잡지, 방송의 시대는 컴퓨터를 활용한 네트워크혁명이 일어난 20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그것은 20세기 특유의 현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돈과 권력을 향한 탐욕이 과학혁명의 날개를 달고 벌인 참극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인류는 무력행사를 절제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고 겨우 20여 년 뒤에 더 끔찍한 전쟁을 또 벌였다. '위대한 조국'을 들먹이며 민중을 현혹해 싸움터로 내모는 권력자와 정치인은 지금도 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랑케의 말은 진리가 아니어도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대공황은 시장경제의 특성과 결함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시장은 인간의 '필요(need)'가 아니라 지불능력이 있는 소비자의 '수요(demand)'에 응답한다. 아무리 절박해도 가난한 사람의 요구는 경청하지 않으며, 돈을 가진 고객의 요구는 무엇이든 들어준다. 무일푼의 실업자는 아이를 먹일 감자를 구할 수 없었지만 부자가 반려견에게 스테이크를 먹이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극단적인 전체주의와 전통적인 제국주의를 내포한 나치즘은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파국을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 대공황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정치체제 사이에 깊은 골을 팠다.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평등한 정치 시스템이고 자본주의는 '1원 1표'의 불평등한 경제 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개인이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게 하지만 자본주의는 돈에 발언권을 준다. 둘은 화합하기도 하고 서로 배척하기도 한다. 강력한 민주주의 전통이 자리를 잡고 있던 미국과 영국 등은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지키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수정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파시즘' 또는 전체주의로 치달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제국의 무덤'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의 무덤'이었다. 나치 독일, 파시스트당의 이탈리아, 천황제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기본질서로 삼는 공화정이 문명의 대세가 됐다. 추축국이 승리했다면 나치즘과 같은 '모든 악의 연대'가 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가 인류 문명의 진로를 결정했다고 할 수 있다.
 
 
독일 국민은 비정상 상태를 끝내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을 믿고 적극 지지하거나 소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원한 것은 정상적인 사회, 정규적인 노동, 삶의 안전, 사회적 지위와 역할의 확실성 같은 것이었다. 친위대와 적극 동조자들은 전쟁과 학살 행위에 앞장섰지만, 평범한 독일인은 게슈타포가 모든 것을 감시하고 시민들이 서로를 밀고하는 공동체에 최소한으로 참여하면서 사적 공간으로 도피했다. 사회적 관계가 해체된 상황에서 시민들은 사회적 행위 능력을 잃고 모든 것이 어떻게든 끝나기만 기다리는 무감각한 인간이 됐다. 이것이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진 설명이었다. 이렇게 보면 적극적인 나치 동자자가 아니었던 사람에게는 큰 책임을 묻기 어렵다.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서 어떠한 소통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봤다. 특별한 동기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이 전적으로 결여된 탓에 악을 행했으며, 자기가 저지르는 악을 악이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그런 상태를 '악의 비속함(banality of evil)이라고 했다.
 
 
"자유는 자신의 종교를 따를 수 있다는 뜻일 뿐 아니라 옳고 그름을 선택할 책임을 진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베트남에서 헛되이 죽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미국답기를 바란다." - 무하마드 알리
 
 
"백인이 우리더러 흑인지상주의를 가르친다고 비난한다 해서 자신들이 저질러온 백인지상주의 범죄를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흑인의 정신과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향상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죄 많은 백인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결정짓지 못하고 있다. 노예였던 우리 선조들이 이른바 '흑백통합'을 주장했다면 목이 잘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흑백분리'를 주장하자 증오를 가르치는 파시스트라고 비난한다. 백인이 흑인에게 나를 증오하느냐고 묻는 것은 강간범이 강간당하는 사람에게, 또는 늑대가 양에게 나를 증오하느냐고 묻는 것과 가다. 백인은 다른 사람의 증오를 비난할 도덕적 자격이 없다. 우리의 선조들이 못된 뱀한테 물렸고 나 자신도 물려서 내 아이들에게 뱀을 피하라고 주의를 주는데, 바로 그 뱀이 나더러 증오를 가르친다고 비난하면 되겠는가?" - 맬컴 엑스
 
 
미합중국은 이주민의 나라였다. 원주민의 도움을 받으며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17세기 이후 유럽인들은 대륙의 모든 곳에서 원주민을 내쫓고 그들이 살던 땅을 빼앗았다. 19세기 중반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사금이 나오는 캘리포니아로 몰려갔을 때는 원주민을 '보호구역'이라는 황무지에 가뒀고, 19세기 말에는 운디드니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저항하는 원주민을 학살했다. 이른바 '서부개척시대'는 자본주의 탐욕과 인종주의 폭력이 난무한 야만의 시간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백인은 아프리카의 주민을 납치해서 노예로 부렸다. 1억 명 가까운 아프리카 사람이 노예 사냥꾼과 싸우다 죽거나 현지 수용소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동하는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노예 해상무역을 법으로 금지한 19세기 초까지 살아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1천만 명 이상의 흑인 가운데 65만 명 정도가 미국에 들어갔다. 그들은 주로 목화와 담배 따위를 재배하는 남부의 농장에서 일하거나 노예소유주의 시중을 들었다.
 
 
맬컴은 통합이 아니라 분리를 미국 인종문제의 해결책으로 여겼다. 유대인이 유럽 기독교 사회에 통합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헤르츨처럼 맬컴은 미국 사회의 흑백통합은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분리를 주장했다. "우리는 왜 통합이 미국 인종문제의 해결책임을 부인하는가? 제정신이 있는 흑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통합을 원하지 않는다. 제정신이 있는 백인도 마찬가지다. 제정신이 있는 흑인이라면 백인이 자기네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통합 이상의 것을 주리라고 믿지 않는다. 미국 흑인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백인에게서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다."
 
 
민권운동 지도자들은 맬컴이 백인 인종주의자와 똑같은 주장을 하면서 폭력을 선동한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맬컴은 '분리(seperation)'는 '격리(segregation)'와 다르다고 받아쳤다. '격리'는 강자가 약자에게 강제하는 것이지만 '분리'는 평등한 둘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흑인이 백인에게 종속되어 있으면 언제나 일자리와 의식주를 구걸해야 하며 백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흑인의 생활을 규제하고 '격리'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래서 '흑인의 능력 향상'과 미국 내부의 '흑인공동체 형성'을 과제로 제시했다. "미국 흑인은 자기 사업과 품위 있는 가정을 세우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른 민족이 그런 것처럼 흑인도 가능한 모든 곳에서 모든 방법으로 동족끼리 사고팔고 동족끼리 고용해서 자급자족할 능력을 갖추도록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미국 흑인이 존경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백인이 흑인에게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이 자존심이다. 다른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것을 흑인도 스스로를 위해서 하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흑인도 갖기 전까지는 결코 자주적이고 평등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빈민가의 흑인은 자신의 물질적, 도덕적, 정신적 결함과 죄악을 스스로 바로잡아나가야 한다.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높여야 한다."
 
 
20세기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볼셰비키혁명이었고 가장 중대한 '기술적 사건'은 핵무기 개발이었다. 사회주의혁명은 지나갔다. 그러나 문명과 지구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할지도 모를 핵무기의 위험은 21세기에도 인류와 공존한다.
 
 
'우주의 시간'에서는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특별한 의미가 없는 '원자 배열상태의 일시적 변화'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의 시간'은 다르다. 적어도 태양은 영원하다. 태양도 언젠가는 '별의 죽음'을 맞겠지만 '역사의 시간'은 그러기 전에 끝날 테니 그렇게 말해도 된다. 기껏해야 100년을 사는 인간에게는 '역사의 시간'도 너무나 길다. 그래서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고 집착한다.
 
 
지구는 작아지고 세계는 한마을이 됐다. 비행기, 열차, 자동차, 선박이 공간을 압축했다. 정보와 자본은 빛의 속도로 국격을 건너뛴다. 모든 것이 서로 얽혔다. 어떤 중대한 사건도 독립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시장경제 또는 자본주의가 경제체제의 표준이 됐다. 개인의 자유와 만인의 평등을 토대로 삼아 권력자를 선출하고 권력을 제한, 분산하는 민주주의가 보편적 정치체제로 자리를 굳혔다. 세계는 문화적으로 예전보다 훨씬 균질해졌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모든 것이 '헛되고 또 헛된' 일이지만 '역사의 시간'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고 믿으면서 불합리한 제도와 관념에 도전했다. 때로 성공했고 때로는 실패했지만, 그렇게 부딪치고 싸우면서 짧고 부질없는 인생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했다. 20세기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사는 거야. 불가능은 없어.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이심한다. 영원한 건 없어도 지극히 바꾸기 어려운 것은 있지 않나? 나는 '역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 사이에 '진화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은 '진화의 시간' 속에서만 달라질 수 있다. '역사의 시간'에서는 바꾸기 어렵다.
 
 
인류가 지적 재능을 발휘해 더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성취할수록 부족본능의 파괴력은 더 커졌다.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이 세계전쟁은 그 양상을 극단까지 드러냈다. 부족본능은 '피아'를 구분해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갈라놓는다. 피아 구분의 기준은 그때그때 다르다. 피부색, 언어, 종교, 이념, 정치체제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 '우리'와 '그들'을 나눌 수만 있으면 된다. 인류는 과학혁명으로 생산력을 크게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구 생태계를 수십 번 절멸할 만한 양의 핵폭탄을 비축했고, 지구 대기의 화학적 구성에 영향을 주어 기후변화를 일으켰으며, 자연에 없는 화학물질을 생산하고 배출해 토양의 해양 생태계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부족본능은 그대로다. 표현형식만 달라졌다.
 
 
4차 산업혁명이 불러올 세상의 변화를 살피다가 마르크스를 떠올렸다. 21세기에 19세기 공산주의자라니! 생뚱맞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과학기술, 물질적 생산력, 법과 정치, 관념과 사상, 그 모든 것의 관계를 마르크스만큼 명료하게 설명한 사람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람들은 생산활동에 참여할 때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에 편입된다. 이 생산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이루고 그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조성되며, 또 거기에 여러 형태의 사회적 의식이 만들어진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전반을 제약한다.' 자본주의체제가 내부 모순으로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오리라고 한 마르크스이 주장은 오류로 드러났다. 그러나 생산력 발전이 사회조직과 사상과 문화의 변화를 가져오는 동력이라는 견해는 하나의 이론으로 존재할 자격이 충분하다. 우리가 지금 그런 현상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는 사회주의혁명이 아니라 과학혁명이 일으키는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다른 체제로 이행할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115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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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를 다니며 십수년을 살 때는 느끼지 못했던 제주의 아름다움이 막상, 제주를 떠나 여행객으로 오가며 새롭게 다가왔었다. 태고적 원시림의 느낌을 간직한 중산간 둘레길, 한적한 곶자왈과 오름 산책! 지금은 또 얼마나 사람의 손과 발길을 타면서 변했으려나....
내년 봄에는 선작지왓 진달래꽃 분홍 바다에 묻혀 보고 싶다.
 

 

[본문발췌]

 

 
제주도는 바람, 돌, 여자가 많아 삼다도(三多島)라 하고 도둑, 거지, 대문이 없다고 해서 삼무(三無)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제주에는 삼보(三寶)가 따로 있다. 그것은 자연, 민속, 언어이다. 이 세 가지를 모르면 제주도를 안다고 할 수 없고, 이 세 가지를 쓰지 않으면 그것은 제주도 답사기일 수 없다.

 

노산 이은상, <한라산 등반기> 중 영실의 진달래를 노래한 것

높으나 높은 산에
흙도 아닌 조약돌을
실오라기 틈을 지어
외로이 피는 꽃이
정답고 애처로워라
불같은 사랑이 쏟아지네
한송이 꺽고 잘라
품음 직도 하건마는
내게 와 저게 도로
불행할 줄 아옵기로
이대로 서로 나뉘어
그리면서 사오리다
 
누운오름의 남쪽 자락이 선작지왓이다. 크고 작은 작지(자갈)들이 많아 생작지왓이라고도 한다. 선작지왓은 한라산 최고의 절경으로 꼽을 만한 곳이다. <오름나그네>는 말한다. '늦봄, 진달래꽃 진분홍 바다의 넘실거림에 묻혀 앉으면 그만 미쳐 버리고 싶어진다.'
 
제주의 오리지널 돌하르방은 저마다의 표정과 특징이 있다. 예술적 안목을 기르는 방법은 좋은 작품을 많이 보는 것이 첫째고, 둘째는 비슷한 작품을 면밀히 비교하면서 상대적인 가치를 따져보는 것이다. 그런 시각적 경험이 축적되면 절대평가에서도 어느정도 소견을 갖게 된다. 제주의 오리지널 돌하르방은 그런 점에서 더없이 좋은 미술사적 안목 배양의 교육장이기도 하다.
 
전설이 유물을 만나면 현실적 실체감을 얻게 되고, 유물은 전설을 만나면서 스토리텔링을 갖추게 된다.
 
철 따라 변하는 제주의 나무.
1월(수선화, 백량금, 동백나무),
2월(복수초, 매실나무, 생강나무),
3월(털진달래),
4월(왕벚나무),
5월(산철쭉, 구상나무),
6월(은목서, 멀구슬나무, 구실잣밤나무),
7월(담팔수),
8월(협죽도),
9월(아왜나무, 배롱나무),
10월(먼나무)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794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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