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재력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시민은 깨어 있어야 하고, 불합리하고 부당한 권력에는 불복종으로 맞서야 한다.

 

 

[본문발췌]

 

 

'진실은 진실한 행동에 의해서만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 톨스토이

 

 

실제로 수천 년 전부터 그랬지만,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민중을 소극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지식인, 지배계층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홍보와 광고, 그래픽 아트, 영화, 텔레비전 등을 운영하는 거대 기업의 주된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인위적 욕구'를 만들어내서, 대중이 그 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로 대중은 서로 소외도어 갈 뿐입니다. 이런 기업의 경영자들은 아주 실리적으로 접근합니다. "대중을 삶의 표피적인 것, 즉 소비에 몰두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의 벽을 세우고 대중을 그 벽 안에 가둬 격리시키려 합니다. 신문과 방송, 광고와 예술 등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간에 선전 자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선전수법이 나날이 교묘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울 뿐입니다. 예전부터 그 역할은 지식인의 몫이었습니다. 학식과 지식을 지닌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자유란, 어떠한 환경이나 속박 그리고 어떠한 기회에도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 세네카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정직하다면 반대편의 주장까지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는 권력은 때로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 코슈트

 

 

최강대국들,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 금융기관과 국제기관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들어 대부분의 경제 활동이 공급자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공급자 중심의 경제로 진행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강력하고 전제적인 힘을 지닌 소수 집단이 초강대국을 등에 업고, 때로는 국가의 정책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면서 일부 경제분야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시민의 권한을 개인 기업에 양도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입니다. 다국적 기업은 국민 위에 군림하지만, 국민 앞에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사회민주주의 사상과 다소 급진적인 민주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기업의 지배가 위협받자, 선전은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론과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언론기관과 홍보기관이 총동원되었습니다. 기업계 지도자의 표현대로 '개똥철학' 즉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천박한 것'에 집착하는 인생관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면서 장시간 노동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 타인과의 연대 등과 같은 위험한 생각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요컨대 인간의 가치를 완전히 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의 역할은 '참여자'가 아니라,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나 관심을 갖는 구경꾼'의 역할이어야 했습니다. 통찰력 있는 지식인이라면 이런 흐름을 꿰뚤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은 입을 다문 채 대중을 종속시키려는 이런 음모에 가담합니다. 그들의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테크놀로지에서 최첨단 영역은 공공 분야가 전적으로 재정을 떠맡고 있습니다. 반도체, 마이크로프로세서, 대부분의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공공 분야에서 지원한 연구의 산물입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공 분야의 창의적 발상으로 공공자금으로 개발된 이런 모든 것은 당연히 공공의 재산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민간 기업에 양도되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말입니다.

 

 

'큰 재물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따른다. 한 사람의 부자가 있으려면 오백 명의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 애덤 스미스

 

 

금융시장과 투기시장도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투자 방향을 짐작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수가 미친 듯이 널뛰기를 합니다.

 

 

투자에는 두 가지 법칙이 있다. 하나는 "패닉은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패닉에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 로빈 하넬(Robin Hahnel) '패닉 퍼스트 Panic First'

 

 

현재의 경제체제가 붕괴되다면 그 이유는 금융위기나 생태환경의 재앙일 가능성이 크다 - 촘스키

 

 

외국에 투자되는 자본은 대부분이 경영 지배권의 확보를 위한 돈입니다. 공공기업의 민영화는 공공기업을 민간 기업이나 다국적 기업에 넘기려는 속임수일 뿐입니다. 이런 민영화는 대체로 부패한 정부에서 주로 시행됩니다.

 

 

매일 거대 자본이 컴퓨터를 통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돈이 새로운 자산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주인이 바뀔 뿐입니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투자되는 자본은 소규모에 불과합니다.

 

 

버뮤다 군도, 버진 군도, 파나마에 투자라는 명목으로 국경을 넘어 이동한 액수의 거의 절반이 회계상의 이동이었다. 회계상의 이동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자나라들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기업이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국민의 몫을 훔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입니다. 국가의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입니다.

 

 

무엇보다 국민이 깨어나야 합니다. 내가 미디어, 학교, 지배 계급의 문화에 반대하며 민중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여론의 압력이 더해질 때는 어떤 일이라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는 온갖 범죄를 감싸주는 외투다 - 메난드로스

 

 

제3의 길을 주장하는 지배계급은 체제순응적인 지식인들을 동원해서 이 이념을 멋지게 색칠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습니다. 대중이 저항하고 싸워서 때때로 승리를 거둘 때야 진정한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세계화는 미국식 모델을 전 지구에 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화의 목표이고 결론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칸트

 

 

대중은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데 전념할 것이고,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피상적인 것에 열중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단계의 정책 결정에서 '참여자'가 아니라 '구경꾼'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노동 현장과 그 이상에 관련된 정책 결정에서도 말입니다.

 

 

사회가 자유로워질수록 지배계급은 공포심을 조장하고 선전에 열을 올립니다.

 

 

우리 사회는 줄곧 변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관련된 개념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회구조와 계급구조는 변했지만 특정집단의 이해 관계, 지배 관계, 사회의 계층구조, 의사 결정의 단계 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런 모순이 계급간의 갈등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지배구조와 계급구조는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의혹의 대상으로 삼아 그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루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다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수월하게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다각도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선전보다 이런 파괴공작 때문에 국민이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 가운데 유일하게 매수되지 않는 것이다. - 필딩

 

 

텔레비전 사회자는 프롬프터를 읽어대고 있을 뿐입니다! 텔레비전 사회자는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미용실로달려갑니다. 그리고 프롬프터가 있습니다. 대개 그를 대신해서 생각까지 해 주는 젊은 여자가 조작하는 프롬프터 앞에 앉습니다. 프롬프터에 질문이 나타납니다. 그럼 그는 마치 자기가 직접 생각해낸 질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출연자에게 묻습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당신 생각을 세 문장으로 집양시킬 기회가 생긴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것 같은 슬로건을 반복하는 데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당신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후자를 택하면 당신은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 주장을 뒷받침해 줄 최소한의 증거도 제시할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속도는 우리에게 사건의 중심에 살고 있다는 환상을 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선전 효과에 100퍼센트 노출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동시성과 즉각성은 사건의 흐름에 우리 몸을 그대로 내 맡기게 만듭니다. 현재의 인식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속도가 아닙니다. 깊이의 상실입니다. 피상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기억을 지워 없애려고 고안된 것입니다.

 

 

어려운 단어들을 골라 쓰며 복잡하게 말해야 지식인 대접을 받으면서 특권층처럼 군림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지식인들이 회의에 초대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강연에 알맹이가 있습니까? 바로 이런 현상이 문제입니다. 쉬운 말로도 더 깊은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쉬운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악인보다는 선량한 사람만을 학살한다. - 소포클레스

 

 

미국은 변덕스럽고 보복을 잊지 않는 국가로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세계 모든 국가가 미국을 두렵게 생각할 테니까요. 지나치게 합리성을 따지는 국가로 인식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입니다.

 

 

양식良識만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평등과 자유를 추구한다는 믿을 만한 몇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폭력을 일심는 친위대원이 될 수도 있고 성인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환경, 그리고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5796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열린 결말, 희망이다.

 

 

[본문발췌]

 

 

서재는 반드시 우리가 읽은 책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언젠가 읽게 될 책들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죠. 서재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들입니다.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책들이죠. 그것들을 영원히 못 읽는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 장 클로드 카리에르, <책의 우주>

 

 

어떤 것에 대해 미운 마음을 품거나 자기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꼬치꼬치 캐고 들거나 속상해 하면서 세월을 보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은 거란다. -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 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 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 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 존 윌리엄스, <스토너>

 

 

취미의 세계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것은 없지만 삶을 요동치게 만들 무언가를 맞닥뜨리거나 발견하게 해 주는 것도 없다. 가슴이 무너지는 실망도, 정신이 번쩍 나게하는 환희나 흥분도 없다는 말이다. - 무라카미 류, <무취미의 권유>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곧 겨울이 되기 때문에 작은 들쥐들은 옥수수, 호두, 밀, 짚을 모으기 시작했다. 쥐들은 모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프레데릭을 제외하고, 들쥐들이 물었다. "프레데릭, 왜 일을 안 하는 거니?" 프레데릭이 말했다. "나도 일하고 있어. 나는 춥고 어두운 겨울날을 위해 햇빛을 모으고 있는 거야." - 칼하인츠 A. 가이슬러의 <시간>이라는 책에서 레오 니오니의 동화 <프레데릭>을 인용한 부분

 

 

흘러가는 세월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한 줌의 모래처럼, 혹은 우리를 노쇠하게 만드는 어떤 것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불행한 것이다. 반대로 생각을 바꿔서 흘러가는 세월이 우리를 보다 더 완성시켜가고 있다고 여기면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 - 생텍쥐페리 잠언집>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해방감을 선사해준다. 의견이 없다고 지적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아니다. 의견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라. 의견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이자 권리다. 오늘날 진짜 문제는 정보의 부하가 아니라 의견의 과부하다. 세상은 당신의 코멘트 없이도 잘 돌아갈 것이다. - 롤프 도벨리, <불행 피하기 기술>의 52개 기술 중 '모든 것에 뚜렷할 필요는 없다'

 

 

살다 보니, 실망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과거의 교육은 여러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환경이 달라질 때는 새로운 목표와 새로운 전략을 설계하면서 적응해나갔다. 그러나 작금의 변화는 과거의 변화와 전혀 다르다. 교육자들은 인간 역사의 어떤 전환점에서도 이번만큼 어려운 고비와 도전에 직면한 적이 없다. 정말이지, 우리는 이런 상황을 처음 겪고 있다. 우리는 정보로 과포화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기술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하물며 그보다 더더욱 어렵고 역부족인 기술, 즉 앞으로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인간을 가르치는 기술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고, 싫어하는 것을 줄이면 된다. 제발 '좋은 것'과 '비싼 것'을 혼동하지 말자! 자신의 '좋은 것'이 명확하지 않으니 '비싼 것'만 찾는 거다. - 김정운,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같은 것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 -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 매일이 좋은 날'

 

 

익숙한 것의 안도감과 지루함, 낯선 것의 경이로움과 두려움. 아마도 이것들이 잘 조화를 이룰 때 생은 안정되는 것이리라.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질병의 부재나 기능의 부존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잠재력이다. - 올리버 색스, <모든 것은 그 자리에>

 

 

마음이 담긴 길을 걷는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나란히 걷는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뒤를 좇는다는 거은 아직 마음이 담긴 길을 걷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 가고 싶은 길을 가라. 그것이 마음이 담긴 길이라면, 마음이 담긴 길을 갈 때 자아가 빛난다. -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마음에도 문이 있다. 힘으로는 열리지 않는다. 공감하는 마음이 열쇠다.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는 거란다. 네가 마음만 먹느다면 그 아름다움 속으로 언제든 들어갈 수 있단다. - 영화, <와일드>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 조지프 캠벨, <신화와 인생>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 - 위스망스, <거꾸로>

 

 

그것은(여행기는) 여행이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을 돌아오는 것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노승이 말했다. "진정한 지혜는 이 풍경 속에서 한 순간에 발견할 수도 있고, 아니면 언제까지나 깊이 감추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꾸뻬는 문득 깊이 감추어져 있는 그것을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침묵 속에 사원 앞에 서서 구름과 태양과 바람이 한 순간 산들과 어울려 노니는 것을 바라보았다. 꾸뻬는 이것이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새로운 배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생각을 멈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 프랑수아 를로르, <꾸뻬씨의 행복여행>

 

 

인생의 목표가 성공이 아니라 성숙이라면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습관은 안락하고, 포근하고, 안전하게 우리의 삶을 여기까지 끌고 왔지만, 새로고침이 주는 뜻밖의 재미, 유쾌한 즐거움은 여러분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줄 겁니다. 우리 뇌는 습관이라는 틀을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게 디자인돼 있지만 새로운 목표를 즐겁게 추구하도록 디자인돼 있기도 합니다. 어느 뇌 영역을 사용할 것인지는 이제 여러분이 선택하시면 됩니다. - 정재승, <열두 발자국>

 

 

우주는 떨림이다. 정지한 것들은 모두 떨고 있다.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나의 울림이 또 다른 떨림이 되어 새로운 울림으로 보답받기를 바란다. - 김상욱, <떨림과 울림>

 

 

우리는 흔히 혼자됨을 개인적인 실패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삶에 속한 것이며, 홀로 있음에 힘들어하는 것 역시 사회적인 통념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를 안다면 혼자인 사람은 자신이 커다란 전체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 프란치스카 무리, <혼자가 좋다>

 

 

혼자라는 것은 같이 있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분명 결핍이다. 같이 있다는 것은 혼자 있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충족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틀로 비추어보면, 행복은 혼자 있을 때와 같이 있을 때 어느 한쪽과 일방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행복이란 혼자이기에 발생할 수 있는 결핍에 벗어날 때, 그리고 같이 있을 때 발생하는 과잉 충족으로 인한 질식에서도 동시에 벗어날 때 가능하다. - 노명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별들은 멀고 먼 거리 /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 저 혼자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 김재진,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주위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을 보고 토끼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급하게 가고 있니?" 사람이 대답했다. "나의 일을 쫓아가고 있어." 토끼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네가 일을 쫒아가야 할 정도로 일이 너를 앞서서 달리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그 일이 네 등 뒤에 있을 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그냥 멈추기만 하면 만나게 될 텐데. 지금 너는 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건지도 몰라." - 동유럽에서 전해지는 우화 중에서 

 

 

한가로이 거니는 것. 그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게 쫓겨 몰리는 법 없이 오히려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따라서 더 이상 긴장감 속에서 경계심을 품은 채 이 세상을 조사, 관찰하지 않아도 된다. -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조급증에 빠진 사람들에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충고한다. 그렇다면 방향을 잡는 것도 서두를 일이 아니다. 헤매는 것이 인생이다.

 

 

향미가 희석되는 현상은 현대 농업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문제다. 종자 개량, 화학비료, 비닐하우스, 지력 쇠퇴, 토양미생물 감소 등 다양한 원인이 밍밍한 음식을 만들어 냈다. 닭고기는 향미를 잃었따. 토마토는 밍밍해졌고, 옥수수, 밀, 딸기, 상추도 각각의 고유한 맛이 약해졌다. 모든 음식이 묽게 변했다. - 유진규, <맛의 배신>

 

 

미래는 종종 예상하고, 계획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새로운 시간과의 만남에 설레고 싶다. 그것이 살아 있음의 증거이므로.

 

 

"미지를 향해 문을 열어두는 것, 어둠으로 난 문을 열어 두는 것. 그 문은 가장 중요한 것들이 들어오는 문이고, 내가 들어왔던 문이고, 언젠가 내가 나갈 문이다. ... 우리가 삶에서 원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무언가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의 건너편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모르거나, 모르는 데도 안다고 생각한다." -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909439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개미와 베짱이' 우화처럼 집, 학교, 사회에서 게으름은 나쁜 것,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 배우고 생각한다.

게으름이, 느림이, 멈춤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깨닫는다면 물질과 권력 중심의 목적지향적인 삶이 얼마나 공허하며 거꾸로 삶을 피폐하고 힘들게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선우정아의 '뒹굴뒹굴'을 BGM 깔고 읽어보시길...


[본문발췌]


<천천히, 느리게, 있는 그대로> - 피에르 쌍소

나는 시간을 멎게 하는 게으른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병리학의, 잣대로 들이댄다면 모를까,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되찾고, 느긋이 몸을 돌보고, 서로 아끼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거의 현자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만 시간을 늦출 수 있을 뿐이다. 아니면 차라리, 강요받고 별 뜻 없으며 앞다투어 능률을 올리는 시간을,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시간으로 갈음할 뿐이다. 게으름이라 함은 이따금 제 기분이나 기질에 따라서 행동하는 만큼, 그리하여 드디어 자기 자신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게으름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남이다. 그러나 정신까지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맞서는 것을 잠깐 멈추는 식의 물러남이다. 이 세상이 뭐가 되든지, 되어 가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이는 시간이 흐르면 어른이 되고, 늙은 사람은 죽게 되는 것.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신경 쇠약으로 죽음을 재우쳐서도 안 된다. 겨울이 우리를 삼키고 꽁꽁 얼어붙게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자. 참을성을 갖고 기다리자. 겨울이 가면 봄이 올 것이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될 테니.

말하자면, 게으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슬기로움이나 너그러움의 한 형태다. 물러났다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 들어주기, 꿈꾸기, 글쓰기 따위처럼 사람들이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버려진 순간에 깃들여 있다.
존재의 아름다운 순간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 순간은 놀라움의 순간이고, 당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한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이다. 웃음을 띤 채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러한 순간이다.
게으름은 어디 아픈 것처럼 꼼짝도 하기 싫어하는 증세가 아니다. 천천히, 느리게, 있는 그대로 삶을 누리려는 몸가짐이자 마음가짐이다. 아주 천천히 가고 있어서 삶의, 저물녘에, 막바지 노을 속에서, 영원의 저녁 빛을 숨쉬는 그러한 능력이 게으름이다.

이와 같은 인식 행위에는 시간을 멎게 하는 힘이 있다.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 볼 가치가 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 볼 가치가 있다. 마치 포도주잔에 빠져들어 한 방울 한 방울 그 맛을 느끼며 즐기듯이 말이다. 사람들이 아껴 마시는 포도주, 그 포도주 또한 입 안의 포도주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나.

움직이 않음, 마침내 그것은 움직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일 터.



<정원에서> - 질 클레망

자연은 아무도 정확하게 내달볼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커다란 자원이기도 하다. 자연은 언제나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낸다.

만일 사람들이, 자연이 스스로 알아서 저희를 표현하고 무슨 일이든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아마 한결 풍요로운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한 꽃이며 짐승들이 곳곳에서 나타날 테니까.

이러한 삶이, 이러한 다양성이 실재한다. 자기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차라리 거꾸로 움직이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더 잘하는 것이다.



<무를 위한 시간> - 티에리 파코

'휴식recreation'이라는 말 속에는 '창조creation'라는 말이 들어 있다. 창조의 그 순간에 아무 감정이 없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마치 그에 따르는 침묵에 방해는 받았다는 듯이.

더구나, 그러한 침묵은 우리 스스로의 소리를 듣게 하고, 우리를 가깝게 하고, 우리를 꽉 채워 주고, 우리가 삶의 길을 다시 갈 수 있게 한다. 휴식과 창조의 시간, 무를 위한 그 시간은 새로운 무엇을 예비하는 시간이다.



<시간, 멈추어 버린>

나날의 삶에는 나날의 삶이 필요로 하는 박자와 어긋나는 방향이 있다. 그러한 템포의 틈서리에서, 우리의 삶은 멋대로 휴식을 얻는다. 낮잠과 밤새우기와 일요일과 기다림과 권태가 우리로 하여금시간을, 우리의 시간을 되찾게 해 준다.



<밤과 잠> - 마르틴 쿠티에

누구나 알고 있다. 회한에 사무쳐 괴로워하는 사람은 제대로 쉬거나 잠을 잘 수도 없다는 것을... 유령 이야기, 서서 자는 사람의, 이야기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거꾸로, 뉘우칠 거라곤 없는 순수하고 천진하고 결백한 영혼은 평화롭고 깊은 잠을 자도록 보장받는다. 흔히 그렇다는 말이다.



<일요일, 그 등대에서> - 장 프랑소와 뒤발

늦잠을 자고 나면 그 나머지 시간이 있는 법. 일요일은 사회 생활의 규칙으로 말미암은 것만큼이나 계절의 리듬, 밤과 낮이 바뀜에 따라 결정되는 '시간의 추종자들'이 한 순간 폭발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 추종자들은 바깥쪽 요인의 강요를 받아서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시계의 연대기 생물학의 시간과 다른 결을 타기 일쑤다.

아침잠을 깨우는 자명종, 수첩에 적힌 갖가지 일, 노동 시간, 제때 식사, 여름 시간표, 겨울 시간표 따위가 한 주 동안에 우리와 일상을 이리저리 몰고 다닌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낮 열두 시에 아침을 먹기도 하고, 점심을 거르기도 하고, 간식 시간과 점심 또는 저녁 시간이 뒤섞이기도 한다. 낮잠을 자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몽롱하게 취하기도 하고, 사냥감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몇 킬로미터를 내달려 보기도 한다. 굳이 시간을 셈하거나 하지 않고.

일요일이 지닌 두드러진 점 가운데 한 가지는 바로 느림과 감속이라는 특성이다(이따금 멈춤에 따른 불안한 감정까지 건네면서). 평일은 재즈처럼 늘 비슷비슷한 템포로 움직인다. 일요일은 훨씬 조화로운 날이며, 화려한 피날레가 따르곤 한다. 영화에서 화면이 바뀌며 나타나는 영상 하나하나가 우리 나날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것으로 갈음되듯이, 우리는 갑작스럽게, 아주 쉽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런 사물, 곧 위대한 시간을 맞이한다.

평일은 경제의 역학 구조와 온갖 구속에 의하여 완벽하게 조정되기 일쑤다. 그러나 일요일은 이 역학 구조를 차단시키며, 마침내 시간과 맞물리지 않는 흐름을 타곤 한다. 어느 시간대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식의 기제가 작동을 멈추는 것이다. 일요일에는 저마다 자신이 시간을 가진다. 삶은 셀 수 없이 숱한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갖가지 시간으로 짜여 있다. 일요일은 우리에게 시간의 다양성과 그 최초의 밀도를 조금이라도 되찾아 주는 날이 아닐 수 없다.

오늘, 함부로 흘리거나, 붙들고 있거나, 갈무리하거나, 써 버리거나, 아예 없애거나, 잃어버리거나, 보람차게 만들거나,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내가 힘없이 가라앉아 있거나, 힘이 넘쳐서 설레거나,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에 대한 나의 지배는 변함이 없다.

일요일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지위를 빼앗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 불연속성 앞에서, 평일에는 우리가 다른 배역을 맡지 않을 수가 없다. 평일은 우리를 나누고, 우리 자신을 갈라놓는다.

지속성과 연속성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일요일에는 그런 배역이 없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일요일은 이따금 그 단일성 속에서 자신을 되찾을 수 있게 해주며, 존재의 흐릿한 윤곽을 분명하게 하도록 촉구한다. 왜냐하면, 존재 방식을 통해서, 정체성이 찾고자 하는 내적이고 심리적인 태도를 통해서, 그 특별한 날은 온갖 퇴행 현상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곤 하는 까닭이다. 괄호 속에 놓인 사회적 자아, 나르시시즘을 곁들인 욕구는 틈만 나면 차츰 기력을 되찾는 경향이 있다. 그 때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을, 자기 가족을, 자기 주변 사람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만일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면, 그것은 식전의 맛보기 술이 주는 가벼운 행복감, 즐거운 식사 모임, 알코올로 말미암은 취기, 묵직한 소화 기관, 이런 상태에서 이미 쾌락주의자들이 겪은 바 있는, 무기력하고 조금은 게으르게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다. 그 때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억눌려 있는 자아다. 만족시켜야 할 욕구가 있는, 쾌락을 좇는 자아다.

만일 일요일이 우리의 나날 가운데 가장 걱정 없이 보내는 날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일요일이 온갖 일탈을 가능하게 하며 다른 어떤 시간보다도 광기와 우연과 창조의 시간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임을, 우리는 그 날의 시공간 속에서 본다. 그날은 또한 과거 속에 가장 뿌리내린 시간이다.

평일에는 탈을 써서 오히려 그 만남을 훼손시키지만, 일요일에는 아예 탈을 쓰지 않음으로써 남과의 만남 또한 자기와의 만남과 마찬가지로 이루어진다. 일요일에는 왕조차 가식을 벗어던진다. 일요일은 누구나 다 자기와 똑같은 사람임을 깨닫는 날이다. 그리하여 일요일은, 휴식의 시간인 일요일은, 사람과 사람이 새롭게 맺어지는, 관계가 다시 창조되는 시간인 것이다.



<시시한 이야기> - 크리스티앙 보뱅

영원이라 함은 시간으로 나아가는 것일 뿐,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남는 자취 같은 것이지요. 마치 이삭들을 헤치며 걷다 보면, 어느덧 밀밭에 생기는 어린 시절의 오솔길처럼... 영원이라는 것 또한 그 시간 하나하나에 깃들여 있는 소박한 삶일 뿐,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째서 그 영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옮기고 나서]
<게으름의 즐거움>은 게으르게 사는 것이 바쁘게 사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찬양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언사로 게으름이, 느림이, 멈춤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이리저리 풀어헤쳐 보인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4308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권력 의지는 도덕과 선에 어긋난 결단과 행동을 취하게도 한다.

제자백가의 대표 사상인 유가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인 · 의 · 예와 같은 덕치(德治)가 근본이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전제권력을 추구하며 보다 엄격한 법치(法治)와 술치(術治), 세치(勢治)가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법가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로'과 닮았다.

 

 

[본문발췌]

 

 

정치란 도덕과 분리되어야 한다.

 

 

풍경을 그리려는 자들은 낮은 평야에서 산과 고지대를 살펴야 하고, 평원을 살피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성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되어야 하고, 군주의 본질을 잘 이해하려면 백성이 되어야 한다.

 

 

비슷한 풍토를 가진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방법

  1. 옛 군주의 핏줄을 완전히 제거
  2. 주민의 법률도 세제도 바꾸지 말아야 한다. 예부터 내려오던 상태가 유지되고 풍습이 달라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평온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풍토가 다른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방법

  1. 지배지를 획득한 인물이 친히 그곳으로 가서 정주,  신민은 군주가 자신들의 호소에 즉각 응답해줄 때 만족을 느낀다.
  2. 새로운 지배지에 상주병(주둔지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군사 일도 겸하는 군대)을 배치. 백성은 다정하게 회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말살해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가벼운 상처를 입히면 복수를 해 오지만, 상처가 중하면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때는 복수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해야 한다.
  3. 약소 세력의 도움을 받되 그들의 기세를 경계
  4. 다른 세력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힘을 약화시키는 격

 

 

전쟁을 피하려고 혼란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피할 수 없을뿐더러 피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불리한 방향으로 늦춰지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법대로 생활하는 데 익숙한 지배지에 대한 세가지 통치 방법

  1. 이것들을 괴멸
  2. 친히 그곳으로 이주
  3. 고유의 법에 따라 살라고 인정해주면서도 내부에 당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과두정권을 세워 조세를 거둠

 

 

선두에 나서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일보다 어렵고 성공이 의심스럽고 위험한 일은 없다.

새 제도를 도입하는 자는 낡은 제도의 혜택을 입은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고, 새 제도의 혜택을 받을 사람들은 그저 뜨뜻미지근한 아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적지근한 까닭은 첫째로 기존의 법을 장악한 대립자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확실하게 경험해 보지 않는 한 새로운 사태를 진실이라고 믿지 못하는 인간의 시의심 때문이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 새로운 군주가 겪게 되는 어려움은 우선 사나운 적과 뜨뜻미지근한 아군에 둘러싸이는 것이다. 여기에 더욱 근본적인 어려움, '천성적으로 변덕스러운 탓에'라는 보편적인 인간 심리가 더해진다.

 

 

박해는 일거에 끝내되, 은혜는 조금씩 천천히 베불어야 한다.

 

 

윤리적 공상과 엄현한 현실,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 왔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행하지 않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가 십상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 선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그의 몰락은 불가피 합니다.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서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잔인함과 인자함,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나은가?

현명한 잔인함이 진정한 자비이다. 모든 군주들이 잔인하지 않고 인자하다고 생각되기를 더 원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신민들의 결속과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잔인 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너무 자비롭기 때문에 무질서를 방치해서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죽거나 약탈당하게 하는 군주보다 소수의 몇몇을 시범적으로 처벌함으로써 기강을 바로잡는 군주가 실제로는 훨씬 더 자비로운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군주는 호의는 자신이 베풀고 처벌은 신하가 내리도록 한다.

군주는 미움을 받는 일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인기를 얻는 일은 자신이 친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주는 귀족을 존중해야 하지만 인민의 미움을 사서는 안된다.

 

 

군주는 어디까지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

현명한 통치자라면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해지거나 약속하도록 만들었던 이유가 사라지게 되면 약속을 지킬 수도 없을 뿐더러 지켜서도 안됩니다. 만약 모든 인간이 선하다면 이 교훈은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사악하여 군주에게 했던 약속들을 지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군주 역시 그들에게 했던 약속들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군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이유들을 언제나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여우의 기질을 교묘하게 감추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하며 가장 위선적이어야 하며 거짓말을 능숙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매우 단순하여 눈앞의 필요에 따라 쉽게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속이고자 하는 자는 언제라도 속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군주는 자신의 역량에 의존해야 한다.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를 일으켜 세워줄 거이라고 기대하고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이러한 책략은 당신의 안전을 도모해 주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러한 방어책은 당신의 능력 밖에 있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취약하고 비겁한 것입니다. 당신의 주도하에 있고 당신의 역량에 기초한 방어책만이 효과적이고 확실하며 영구적입니다.

 

 

자신의 행동을 시대에 잘 적응 시키는 사람들은 행운을 누린다.

어떤 사람이 신중하고 참을성 있게 행동하고 시대와 상황이 그의 처신에 적합한 방향으로 변화하면, 그는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이 다시 변화하면, 그는 자신의 방식을 변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할 것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이런 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 만큼 지혜로운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의 타고난 기질이 그러한 변화를 용납하지 않거나, 아니면 일정한 방법으로 행동함으로써 항상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우리의 방법을 변화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중한 사람이 신속하게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지를 못할 것이고, 이로 인해서 실패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시대와 상황에 알맞게 자신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운명은 변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군주에게 가장 필요한 특질은 위장기술이다.

심각하게 상황을 빨리 깨들을수록 현명한 군주다.

특권층의 지지는 서민층의 지지보다 약하다

군대를 모르는 군주는 경멸당한다

오로지 선만으로는 권력을 지킬 수 없다

군주에게 가장 튼튼한 요새는 국민들의 지지와 사랑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897313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법정스님의 인생의 지혜, 행복의 조건, 삶의 가치에 대한 가르침을 류시화 시인이 엮다.


[본문발췌]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안에 있다.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우리는 순간순간 죽어 가면서 다시 태어난다.


어떤 생각을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히 간직해 두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싹이 트고 잎이 펼쳐지다가 마침내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내가 기가 죽을 때는, 내 자신이 가난함을 느낄 때는, 나보다 훨씬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여전히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야말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린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꺽이고 말 것이다. 세상 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다.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라. 아름다움이란 꾸며서 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모습 그대로가 그만이 지닌 특성의 아름다움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함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등 살아 있는 생물과도 교감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늙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죽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물이 한 곳에 고이면 그 생기를 잃고 부패하기 마련이다.


수행자에게 가난이란 맑음 그 자체다. 모자라고 텅 빈 그 속에서 넉넉한 충만감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무릇 수행자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자이다.


소유와 소비 지향적인 삶의 방식에서 존재 지향적인 생활 태도로 바뀌어야 한다.
소욕지족,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진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미운 생각을 지니고 살아가면, 그 피해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면 내 삶 자체가 얼룩지고 만다.


저마다 이 세상에 자기 짐을 지고 나온다. 그 짐마다 무게가 다르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나온 사람은 남들이 넘겨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있다고 달아나서는 안된다. 그 어려움을 통해 그걸 딛고 일어서라는 새로운 창의력, 의지력을 키우라는 우주의 소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득 찬 것은 덜 찬 것만 못하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차다.
'별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남한테 전하려면 그것에 필요한 말이 우리 안에서 먼저 자라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듣는다는 것은 자기 것을 비우기 위해 침묵을 익히는 기간이다.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를 거치면서 살아 움직인다.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움직이면서 변화한다. 이런 변화와 움직임을 통해 새롭고 신선한 삶을 이룰 수 있다.


묵은 버릇을 떨쳐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때 새 움이 튼다.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내일을 걱적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오늘을 마음껏 살고 있다면 내일의 걱정 근심을 가불해 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다. 남을 용서함으로써 나 자신이 용서 받는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다. 묵은 수렁에 갇혀 새날을 등지면 안된다. 맺힌 것을 풀고 자유로워지면 세상 문도 활짝 열린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안으로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 이것을 일과 삼아 해야 한다.


인간은 흔히 무엇이든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텅 비우려고는 하지 않는다. 텅 비어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텅 비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생명이 지닌 밝고 아름답고 선한 가능성을 일깨우지 않고 자기 한 몸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풀을 뜯다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다르지 않다.


사람의 손이 빚어낸 문명은 직선이다. 그러나 본래 자연은 곡선이다. 인생의 길도 곡선이다. 끝이 빤히 내다보인다면 무슨 살맛이 나겠는가. 모르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곡선의 묘미이다.
직선은 조급, 냉혹, 비정함이 특징이지만, 곡선은 여유, 인정, 운치가 속성이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것 역시 곡선의 묘미이다.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어정거리고 길 잃고 헤매면서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충실히 깨닫고 사는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차지하는 것과 보고 즐기는 것은 그 틀이 다르다. (그냥 바라보는 기쁨)


자기 체험이 없는 말에 울림이 없듯이 그 어떤 가르침도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여행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낀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살아왔는지, 자신의 속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여행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자기 정리의 엄숙한 도정이요, 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이기도 하다.


가치 있는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내게 허락된 인생이, 내 삶의 잔고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삶이다.


자기 자신답게 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다.


인간은 늘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켜쥐기보다는 쓰다듬기를, 곧장 달려가기보다는 구불구불 돌아가기를 좋아한다.
문명은 직선이고 자연은 곡선이다. 곡선에는 조화와 균형, 삶의 비밀이 담겨 있다. 이것을 익히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98057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대학시절 이후 업무 관련 책 이외에 제대로 독서를 한 기억이 없이 눈가면을 쓴 경주마처럼 밥벌이와 하루하루 삶에 매몰되어 살다가 10여년 전 이 책을 만나 다시 독서를 시작하며 세상을 넓고 깊게 보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좋은 책은 다시 좋은 책을 연결해주는 힘이 있다.


[본문발췌]


"땅콩을 거두었다. 덜 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떨어진 놈!" - 이철수
"깊은데 마음을 열고 들으면 개가 짖어도 법문이다" - 이철수


"삶은 실수할 적마다 패를 하나씩 빼앗기는 놀이다." - 최인훈


"지금 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결과" - 나폴레옹


태어나서, 초/중/고/대학교를 다니고 어른이 되면서 지식을 얻는 대신 가능성을 내어준다.


사람은 물이다. 조용한데 이르면 조용히 흐르고, 돌을 만나면 피해가고, 폭포를 만나면 떨어지고, 규정된 성격이 없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으나 보지 못했네 / 짚신이 닳도록 먼 산 구름 덮인 곳까지 헤맸네 / 지쳐 돌아오니 창 앞 매화향기 미소가 가득 / 봄은 이미 그 가지에 매달려 있었네" - 중국 옛시, 작자 미상 (봄->행복)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다. 지식이 많은 친구들보다, 감동을 잘 받는 친구들이 일을 더 잘한다. 감동을 잘 받는다는 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두려웠던 것은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이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박의 위치 판단이다" - 김훈, <자전거 여행2>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걸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때문에 나에 대한 파악을 하기 전에 내가 갈 곳만 보려고 하죠. 혹시 그래서 실수하지 않을까 나를 먼저 분석하려고 합니다.


세월에 저항하면 주름이 생기고 세월을 받아들이면 연륜이 생긴다.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하지 못한다" - 김훈, <칼의노래>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더 이상 '나는 누군이가'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나는 상대에게 누군인가'가 중요해진다.
우리 모두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해서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예술이 생활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예술을 모방한다." - 오스카 와일드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 알랭 드 보통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 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린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 있는 사람이 된다.


"상대적 궁핍과 궁핍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 알랭 드 보통
"거지가 질투하는 대상은 백만장자가 아니라 좀더 형편이 나은 다른 거지다." - 버트런드 러셀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 알랭 드 보통


남자와 개의 공통점
1) 털이 많다
2) 버릇을 잘못 들여놓으면 평생 고생한다
3) 시간을 내서 놀아줘야 한다
4) 버릇을 잘못 들여놓으면 평생 고생한다
5) 복잡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행불행은 조건이 아니다, 선택이다.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삶을 낭비하지 말고 삶에 대해 감사해하며 현재의 순간순간을 모두 사랑하라. - 마르셀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자신을 위한 독서법", 이렇게 미세하지만 중요한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는 책을 읽으면 이런 효과가 있다. 우리는 그 책을 내려놓고 자신의 삶을 계속하면서, 작가가 우리가 다니는 회사에 있었다면 정확히 반응했을 바로 그것들에 주목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방에 라디오를 들고 들어온 후에, 조용함이란 오직 특정한 주파수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사실은 처음부터 이 방에 우크라이나의 방송국이나 소형 콜택시 회사의 야간통신에서 나오는 소리의 물결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 책은 그 자신만의 발달된 감수성으로 우리를 예민하게 하고 우리의 숨겨진 촉각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책은 그 자신만이 발달한 감수성으로 우리를 예민하게 하고 우리의 숨겨진 촉각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 카프카


"인생이라는 포도를 단물만 빨아먹고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씨까지 다 씹어먹는 사람이고 싶다." -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노를 젓다가 / 노를 놓쳐버렸다 /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고은
목적을 향해서 뭔가를 할 때는 다른 것은 안 보인다. 여유가 생기고 주변을 돌아볼줄 아는 시선....


자연은 한 번도 예술을 동경한 적이 없다. 예술을 동경하지 않지만 그 무엇보다 예술적인 게 자연이니까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무욕만 한 탐욕이 없습니다.


지중해성 철학 : 현재에 집중하자. 순간을 살아라
'그대의 온 행복을 순간 소에서 찾아라' - 앙드레 지드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사람이란 나무와 같소. 당신도, 버찌가 열리지 않는대서 무화과나무와 싸우지는 않겠지?" - 그리스인 조르바
무화과나무한테 버찌가 안 열린다고 화내는 건 어리석다. 원래 무화과가 열리는 나무니까요. 사름은 다 다르고, 각자 그 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우리의 욕망으로 채워넣고, 제멋대로 실망하곤 다툴 필요가 없어요. 무화과나무 아래서 버찌가 열리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요.
'육신이 만족하자 영혼은 기쁨으로 전율했다.'


니코스 카찬차키스가 생각하는 행복
나는 또 한 번 행복이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임을 깨달았다.
필요한 건 그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꽃 피어 올라오니 기쁨이고, 곧 꽃 지리니 슬픔이다. 봄은 우리 인생을 닮았다.


"그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했던 단어의 논리적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했으나 이 단어 사이를 흘러가는 의미론적 강물의 속삭임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 -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소통이라는 것은 단어의 논리적 의미를 이해하는 걸로 끝나지 않죠. 어떤 두 사람의 대화는 단어 밑에 깔리는 의미론적인 것이 해석되지 않으면 소통이 불가능하다.


다른 곳에 답이 있는 걸 알지만 이제 여기에도 답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내가 사는 이 삶을 잘 살면 답이 나온다는 걸 이제 알아요. 다른 어떤 생에 대한 동경도 없어요. 큰 부자, 사회적 명예와 성공보다 집 앞 공원을 지나면서 풀을 보고 초록을 느끼는 내 삶, 내 인생이 좋아요.


'성취가 아닌 성취를 향한 갈망이 진짜 행복이다" -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


법정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 행복은 지극히 사소하고 아주 작은 데서 찾아온다.
-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소유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삶의 의미가 있다.
-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 무엇인가 늘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 산은 내 개인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고 내 뜰처럼 즐길 수 있다.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데에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리라는 기필을 거둡십시오.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오만과 아만을 버려야 합니다. -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인 농담'
기필을 버려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지만 정작 봄은 우리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네.
행복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행복은 내 눈앞에 있었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37822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영화 매트릭스를 철학으로 이해하기.
매트릭스는 프로그램화 된 세계다. 어디선가 본 사회생활은 학자금 대출로 시작해 자동차 할부, 주택 모기지로 이어지는 '할부'라는 프로그램에 종속된 삶이란 표현이 갑자기 떠오른다.


[본문발췌]


운명이란 현재의 눈길이 과거의 순간들에 던지는 소환장이다. 운명을 부정한 것은 운명이란 현재가 과거에 던지는 '회고적=추후적 눈길'(베르그송)일 뿐이기 때문이다. 운명을 받아들일 때 삶의 매 순간은 나의 시간들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미래를 바꾼다. 맞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말을 한 것이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길을 찾도록 도울 뿐이다. 그것이 바로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의 차이'이다


인식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선택, 그것이 우리 삶의 대부분의 상황이다. 우리는 삶의 표면에서 살아간다. 삶의 심층은 우리 인식의 빛 저편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 심층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결단을 내려야 하며 현재 자신의 감정, 기분, 느낌에 근거해 행위해야 한다. 아직 인식하지 못했음에도 우리의 마음은 이미 움직이고 있으며 이미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 = 규칙성의 오류 = 자유의 투쟁
오류=자유=저항의 존재는 '프로그램'을 위협한다. 그래서 오라클은 미래가 열린 미래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내 관심사는 하나야. 미래. 미래는 모두가 함께 열어가야 해." 완벽한 결정론으로부터의 일탈, 그것은 존재론적 분기를 통해 나타난다. 베르그송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듯이, 결정론의 세계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그곳에는 선택도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존재하는 세계는 지도리가 존재하는 세계, 분기점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논리적으로 여럿인 갈래들 중에서 현실적으로 하나의 갈래만이 선택되어야 한다. 그 선택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필연인가, 주체들이 의지인가? 주체들은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물을 열어야 한다.


"변함없는 보편적인 것은 딱 하나. 그것만이 진리지. 바로 인과법칙 말이오.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
목적론 vs 인과론, 인과는 보이지 않는 심층에서 과거에 일어난 일이 현재에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고, 목적은 주체의 상황에 따라 미래에서부터 현재에로 작용하는 힘이다. 서로 대조적이지만, 목적도 인과도 우리를 지배하는 외적인 힘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점심을 걸러 배가 고프기 때문에 밥을 먹어야 하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고시를 준비한다. '때문에'는 과거로부터, '위해서'는 미래로부터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시간과 우연, 새로움의 창조. 베르그송적 주제
"모든 것은 선택이야. 그러나 선택은 예정되어 있지." 표면에서의 선택은 사실상 심층에서의 결정의 결과일 뿐이다. 희망은 소용없다.
"인간은 늘 희망에 기만당하지. 희망은 인간의 강점이자 약점이야." 기계는 법칙성에 따라 움직이고 인간은 희망에 따라 움직인다.


전통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는 벤야민에 따르면, 그것은 에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 존재 근거와 존재 한계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서 원본성과 유일성 그리고 다시는 복제될 수 없는 일회성에서 아우라가 생긴다는 것이다.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 더 나아가 사물의 권위를 형성한다.


매트릭스에 갇혀 있던 삶의 세계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받영하고 있다. 토마스 앤더슨이 매트릭스 안에서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미래가 보장된 직원으로 살지만 실제의 현실에서는 단지 건전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캡슐에 갇힌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삶을 보다 풍요로운 삶으로 이끌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시계 바늘에 쫓기며 몸을 움직이고, 수많은 기계 사이에서 이리저리 통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욱이 매트릭스 안에서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요원일 수 있는 것처럼, 이 현실 세계는 온갖 감시와 통제로 가득하다. "매트릭스는 바로 진실을 볼 수 없도록 눈을 가려온 세계라네."


삶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가 중요하다.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며,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역으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우리가 죽어가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실이나 진실을 말할 때, 단편적으로 이것은 사실이고, 저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시각으로 인하여 전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있다. 즉 우리의 눈으로는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계를 보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진실을 마주할 수 없는 것은 두 눈에 비치는 단편적인 세계를 전체 세계처럼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바로 사랑이다. 세계 안에 있는 자가 세계를 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없는 한계상황이다. 그러한 세계를 보는 것은 따라서 이 세계에서 벗어나야 가능하다. 결국 우리가 그러한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모든 것들을 안에 품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품는다는 것은 갈등과 반목, 그리고 질시를 관용과 화해로 용납한다는 것이며, 결국 이것은 전 세계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란 모든 것들을 품고 용납하며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야 보인다는 것이다. 진실을 마주하기 어려운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로부터의 탈출은 타인을 용납하는 용기를 필요로 하며, 결국 사랑을 품을 때에야 가능하다. 나는 오늘도 진실 앞에서 머뭇거린다.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의 가장 소박한 모습인 욕구는 인간의 삶을 추동시키는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이다. 욕망하지 않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그런데 욕망의 실상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원초적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다. 욕망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충족할 때 쾌락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 충족보다 더 큰 쾌락을 만들어냄으로써 금방 결핍의 상태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흔희 좋은 차나 좋은 배우자를 갖기를 꿈꾼다. 하지만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달성하는 순간 성취감의 쾌락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욕망하게 하는 새로운 결핍이 나타난다.


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76915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인도, 파키스탄의 독립과 함께 태어난 한밤의 아이!

가족, 인생의 희로애락과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고 선이 있으면 악도 있다는 삶의 양면성.

 

분량도 분량이지만 내용이 쉽게 읽히지 않는 소설이다. 

 

 

[본문발췌]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대부분 우리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내게는 내가 알 리가 없는 일들을 알아내는 재간이 어디선가 생긴 모양이고, 그래서 아주 세부적인 내용까지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데, 이를테면 이른 아침의 대기 속에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듯한 그 안개도 그렇고... 아무튼 나는 거미줄에 뒤덮인 채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좋았을 낡은 양철 트렁크를 열었을 때 발견하게 되는 몇몇 실마리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한 인간이 엄청난 다수 속에서도 한 개인으로 남고 싶다면 스스로 괴상해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모두의 꿈이었던 신생국 인도 전역에서 나처럼 부분적으로만 자기 부모의 자식인 아이들이 속속 태어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밤의 아이들은 시대의 아이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가 그들의 아버지였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특히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모든 놀이에는 교훈이 따르는 법인데, 뱀과 사다리에는 다른 어떤 놀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교훈이 있다. 이 놀이는 사다리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로 그 너머에는 뱀이 기다리고 있으며 뱀 한 마리를 만날 때마다 바로 그 너머에는 뱀이 기다리고 있으며 뱀 한 마리를 만날 때마다 곧 사다리가 보상해준다는 영원한 진리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이것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이 놀이는 모든 일에 수반되는 불변의 양면성, 즉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고 선이 있으면 악도 있는 이원성을 암시한다. 사디리의 든든한 합리성은 뱀의 신비로운 유연성과 균형을 이르고, 계단과 코브라의 대립 속에서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대립관계의 은유를 발견한다.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기억 속의 진실이죠. 기억 속에는 기억만의 특별한 현실이 있으니까요. 기억은 선택하고 생략하고 변경하고 과장하고 축소하고 미화하고 헐뜯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현실을 창조하는데, 각각의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복합적이면서도 대체로 일관성이 있는 해석을 내리는 거죠. 하지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 의견보다 남의 의견을 더 신뢰하는 경우는 없어요.

 

 

나는 한평생 나를 괴롭히던 존재의미의 문제 대한 해답을 울부짖는 여자들이 모인 집에서 비로소 얻게 되었다고 믿는데, 이 믿음이 옳을 경우 만약 내가 그 파멸의 궁전을 피해 무사히 도망쳤다면 그렇게 소중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좀 더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다.

 

 

나는 모든 자서전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유혹, 즉 과거는 본인의 기억과 부질없이 그것을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문장 속에만 존재하므로 과거에 이런 저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기만 해도 그 일을 창조할 수 있다는 착각에 처음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그래. 그들은 나를 짓밟을 테고, 숫자들이 하나 둘 셋, 사억 오억 육, 그렇게 행진하며 나를 말 못하는 먼지로 만들어버릴 테고, 때가 되면 내 아들이 아닌 내 아들도, 그의 아들이 아닌 아들도, 또 그의 아들이 아닌 아들도 그렇게 짓밟힐 테고, 그렇게 천 세대하고도 한 세대가 지나고 천 번하고도 한 번의 자정이 끔찍한 재능을 나눠주고 천 명 하고도 한 명의 아디들이 죽게 될 텐데, 왜냐하면 자기 시대의 주인인 동시에 재물이 되어 사생활을 포기하고 대중의 무자비한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평화롭게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는 것이 한밤의 아이들이 지는 특권인 동시에 저주이기 때문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770101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소유의 종말》은("The age of access : the new culture of hypercapitalism, where all of life is a paid-for experience", 2000) 제러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 ("Beyond Beef", 1992), 《노동의 종말》 ("The End of Work", 1995)에 이은 종말 시리즈 중 마지막으로 출간한 책이다. 

 

리프킨이 쓴 책 중 처음 접한 것은 대학시절 읽었던 《엔트로피》 ("Entropy",1980) 였고, 2013년 경 처음 《소유의 종말》을 읽고 받은 공유 경제, 접속의 시대, 플랫폼 비즈니스가 만들어내는 제러미 리프킨의 통찰력은 충격적이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 물질의 공유를 통해 자원이 대폭 절약되고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공해와 쓰레기가 줄어들어 환경 보호에 기여한다.
  • 소유에 집착하는 삶!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은 재물의 노예가 된다. 이제는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 경험 세계에 접속할 수 있는 시간과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프리드리히 실러는 '사람은 가장 인간다울 때 놀고, 사람은 놀 때 가장 인간답다'고 했다. 순순한 놀이는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가장 높은 수준의 표현 형식이고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순수한 놀이에 완전히 참여해 보아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 기업은 고객을 감동시키는 서비스, 고객을 감동시키는 체험을 제공하면서 고객의 시간을 어떻게 해서든 많이 확보하려고 한다.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는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지상 과제였지만 이제 기업은 고객의 시간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시간 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플랫폼 서비스를 만들어간다.

 

 

[본문발췌]

 

 

새로운 경제에서는 물건이 아니라 개념, 아이디어, 이미지가 실리를 가져온다. 부는 이제 물적 자본에서 나오지 않는다. 부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에서 나온다.

 

 

예전에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시장의 주역이었지만 이제는 공급자와 사용자가 주역이다.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시장을 통한 거래는 줄어들고 전략적 제휴, 외부 자원의 공유, 이익 공유가 활성화 된다. 기업들은 이제 서로에게 물건을 파는 것보다는 집합 자원을 공유하여 광범위한 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를 통한 공동 경영을 선호한다.

 

 

접속과 네트워크라는 관념은 일찍이 근대의 여명기에 소유와 시장이라는 관념이 중요한 기능을 맡았던 것처럼 앞으로 갈수록 중요해지고 사회의 역학 구조를 새롭게 재편할 것이다.

 

 

규모의 경제가 속도의 경제로 바뀌고 있다 - 엘빈 & 하이디 토플러

시장에 먼저 제품을 내놓는 기업만이 가격을 높게 책정하여 이익을 챙길 수 있다.

 

 

점점 무게를 잃어가는 글로벌 경제에서 시장 거래와 금융 계약을 성사시키는 데 쓰였던 돈은, 순수한 정보의 형태로 광속으로 전달될 수 있는 전자 비트로 변해 가면서 빠르게 물질성을 벗어던지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공급되는 돈 가운데 현찰이 차지하는 비중은 10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무게 없는 경제, 돈의 탈물질화)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 사고 파는 것은 아이디어와 이미지이다. 이런 아이디어와 이미지의 물리적 구현물은 경제 과정에서 점점 부차적 존재로 밀려난다. 산업 시대의 시장에서는 물건을 교환했다면 네트워크 결제에서는 물리적 형태 안에 담겨 있는 개념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거래한다.

나이키 사례 : 운동화 제조업체라기 보다는 정교한 마케팅 원리와 유통망을 갖춘 연구 디자인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유일한 공장 자산은 직원들의 상상력이다. - 프레드 무디 / 뉴욕타임스

21세기의 새로운 비즈니스는 딱딱한 물리적 자산이 아니라 아이디어로 가치를 평가하는 가벼운 기업을 선호한다.

21세기의 경제는 정보과학과 생명과학, 즉 컴퓨터와 유전자가 함께 이끌어나갈 것이다. 둘 다 물리적 재산보다는 소프트웨어가 되었든 두뇌가 되었든 가치 있는 정보에 대한 접속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정보에 바탕을 둔 산업 - 금융, 오락, 통신, 비즈니스 서비스, 교육 (무형자산이 기업가치의 상당액)

생명과학 산업 (지적 재산권이나 과학적 노하우 같은 무형 자산에 대한 의존도 높음) - 농업 생물 공학, 섬유 제작, 건축 자재, 에너지, 약학

 

 

지적 자본 회계 모델 (레이프 에드빈손, 마이클 말론)

기업을 성공으로 이끄는 특성 : 직원들의 사기,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지도력, 혁신과 창조성을 뒷받침하는 풍토

 

 

새로운 시대는 비물질적이고 사색적이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 원형의 세계다. 개념의 세계, 픽션 세계다. 산업 시대의 인간이 물질을 축적하고 가공하는 데 빠져들어 있었다면 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정신을 관리하는 데 훨씬 관심이 많다. 사업의 성패를 아이디어가 좌우하는 접속과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의 가장 드높은 꿈이다. 자신의 정신을 최대한 확장하여 보편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영향을 미치겠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산업 활동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다.

산업 시대가 우리의 물질적 생활을 키워주었다면 접속의 시대는 우리의 마음과 감정, 영혼에 양식을 준다. 상품의 교환을 관리하는 것이 흘러간 산업 시대의 특징이었다면 다가올 접속의 시대의 특징은 개념의 교환을 관리하는 것이다. 21세기에는 개념을 거래하는 기관이 늘어나고 사람들도 이런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의 물리적 구현물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점점 많이 사게 된다. 새로운 경제에서는 생각을 관리하고 파는 능력이 궁극적으로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모름지기 사물의 진가는 지닐 때보다 쓸 때 발휘되는 법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물품이 점점 정보 집약화, 쌍방향화하고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물품의 성격도 바뀌고 있다. 물품은 제품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진화를 거듭하는 서비스로 탈바꿈한다. 물품의 가치는 물품을 구성하는 재료나 물품을 담는 통이 아니라 물품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얼마나 접속할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물질적 상품은 지식-가치를 담은 통이나 운반체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 사카이야 다이치(일본경제기획청)

 

 

서비스에 역점을 두는 추세는 제품을 혁명적으로 설계하려는 움직임에도 반영되고 있다. 이제 기업은 제품을 고정된 특징과 일회적 사용 가치를 지닌 고정된 품목이 아니라 온갖 유형의 업그레이드와 부가 가치 서비스를 실어 보낼 수 있는 <플랫폼>으로 여긴다. 새로운 제조업의 풍토에서 중시되는 것은 서비스와 업그레이드이다. 플랫폼은 이런 서비스를 실어 나르는 통에 불과하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제품은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업하는데 필요한 비용으로 그 성격이 달라졌다. 제품은 고객의 사업장이나 집에 마련해 둔 일종의 교두보이다. 이런 교두보를 발판으로 기업은 고객과 장기적 서비스 관계에 들어간다. 제품이 수명을 다하는 동안 고객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여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계산을 하고 기업은 플랫폼을 싸게 공급한다.

 

 

소비자는 물건 그 자체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갖는 기능을 사는 것이다. - 몬산토의 로버트 샤피로

 

 

물품을 팔지 않고 서비스 접속을 제공하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자원이 대폭 절약되고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공해와 쓰레기가 줄어들어 환경 보호에도 상당히 유리한 여건이 조성된다. Revenue Sharing, 절감분 공유

 

 

독창성, 기민성, 순발력만으로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 기술의 원가가 제로로 곤두박질치는 경제에서 가치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어야만 살아남는다. 머지않아 이런 급락은 거의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가치를 똥값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라는 것은 처음 개발한 제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만 창출될 수 있다. - 비즈니스 위크 <기술의 역설>

 

 

세상만사가 서비스화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상품을 교환하는 데 바탕을 둔 체제에서 경험 영역에 접속하는 데 바탕을 둔 체제로 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에어컨 자체를 사지 않고 에어컨 서비스를 받기로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에어컨을 통해 얻는 경험에 대해서 돈을 지불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자본주의에서는 물질의 차원보다는 시간의 차원이 훨씬 더 중요하다. 장소와 물건을 상품화하고 그것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서로의 시간과 식견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고 필요한 것을 빌린다. 그것은 우리가 한시적으로 구입하는 활동이나 사건이 된다. 자본주의는 물질에서 출발했지만 물질성을 벗어던지고 점점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개별적 사건으로 나아가고 있다.

 

 

<관계relation 기술 / R-기술>

소비자 관리 : 마케팅 분야에서 R-기술을 써서 장기적 상업 관계를 상품화 하는 것

기업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종의 에이전트가 되었다. 에이전트는 일종의 거간꾼 노릇을 한다. 글로벌 경제와 최종 사용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흘러가는 정보를 관리한다. 에이전트의 기능은 마케팅이다. 고객과의 관계를 확립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찾는 것이 에이전트의 역할이다.

 

 

가장 큰 자산은 고객에 접속할 수 있는 힘, 최종 사용자와 장기적으로 상업적 관계를 맺을 우 있는 능력이다. 마케팅 관점이 제조 방식보다 우위에 올라서는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취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고객의 관심을 끌어 평생토록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 1단계 각성기 : 고객에게 장래의 판매를 염두에 두고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알리는 단계
  • 2단계 일체감 형성기 : 고객은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친근감을 느끼고 그것을 자아의 일부로 받아들임. 특정한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는 이제 그가 세상에서 자기를 차별화 시키는 다양한 방법의 하나가 된다
  • 3단계 관계 형성기 : 쌍방향 관계로 이동
  • 4단계 공동체 형성기 : 회사는 서비스나 제품에 대한 관심이 비슷한 고객들끼리 만날 수 있는 장을 제공.
    이런 결속은 대단히 지속성이 강하다. 그것을 깨뜨리려면 경쟁사들은 친구, 동료, 가족 사이의 사회적 유대를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간과 물자의 상품화가 인간의 경험과 시간의 상품화로 바뀌었고, 이미 시간의 상품화는 포화의 조짐을 보인다.

우리는 상업적 영역 안에서 서로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온갖 활동, 시간과 노동을 절약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만들었지만 이제까지의 역사에서 인간이 지금처럼 시간에 쫓기며 산 적도 없었다. 이것은 시간과 노동을 절약하는 서비스가 급증하면서 우리 주위에서 상품화되는 활동의 다양성과 속도만 늘어났기 때문이다.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경제는 연결의 속도를 높이고, 지속 시간을 줄이고,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서비스화함으로써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계가 상업적 관계로 변하고 개인의 삶이 24시간 내내 상품의 틀에 갇혀 있을 때, 비상업적 관계, 다시 말해서 혈연, 이웃, 문화적 취향의 공유, 종교적 결사, 민족 의식, 형제애, 시민의식에 바탕을 둔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시간 그 자체를 사고 팔고, 삶이라는 것이 한낱 계약과 금전적 도구에 의해서 결합된 상업적 거래의 연속에 불과한 것으로 변질될 때, 애정, 사랑, 헌신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전통적 상호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마케팅 전문가와 기업이 이른바 <고객 친밀감>을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짜내고 깊은 <공동체적 결속>을 확립할 수 있는 수단과 장을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있다는 것은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사실이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내부에 상업적 덫을 갈지고 있는 이런 대리적 사회 영역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앞으로 사회 전체에 엄청난 파급 효과를 미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것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비판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존재의 거의 모든 측면이 유료 활동으로 바뀌면 궁극적으로는 인간 그 자체도 상품이 되어버리고 상업적 영역은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권을 쥐게 된다.

 

 

네트워크 경제의 탄생, 물품의 점진적인 탈물질화, 물질적 자본의 비중 감소, 무형 자산의 부상, 물품의 순수한 서비스로의 변신, 생산 관점을 밀어내고 사업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은 마케팅 관점, 모든 관계와 경험의 상품화 등은, 사람들이 서서히 시장과 재산 교환을 뒤로하고 접속의 시대로 나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상황에서 첨단 글로벌 경제에서 급격하게 벌어지는 구조 변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시간 공유 공동체 (호텔/리조트 등)

일부 회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특정한 부동산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점수를 팔기 시작했다. 점수는 일종의 시간 공유 화폐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단위가 대체 가능한 화폐로 바뀌는 추세는 자원의 희소성보다는 시간에, 소유보다는 접속에 중점을 두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음을 의미한다. 고객은 점수를 산다. 점수는 시간 단위를 나타낸다. 이 점수를 가지고 투숙, 항공 여행, 유람선, 골프장, 자동차 렌트, 그 밖의 여행, 레저, 오락 시설 일체를 이용할 수 있다. 렌트, 시간 공유 콘도 구입, 점수 구입은 모두 <시간화> 사업의 다양한 방식이다. 이제는 부동산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의 접속권을 사는 시대다. 아파트, 콘도미니엄, 빌라 같은 시설을 지정된 기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이다. 빠르게 부상하는 네트워크 경제의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판매자-구매자 관계는 서서히 공급자-사용자 관계나 서버-클라이언트 관계로 바뀐다. 재산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접속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은 재물의 노예가 된다.

 

 

사람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재산으로 확인하고 또 표현한다고 헤겔은 믿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 묶어둠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투사하고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헤겔의 세계관에서 일은 노동 행위가 아니라 창조적 표현이다. 그리고 일이 만들어낸 생산물은 세계로부터 징발한 것이며 일을 한 사람의 인격 안으로 세계를 통합한 것이다.

"인격은 스스로에게 현실을 부여하려는, 다시 말해서 외부 세계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려는 몸부림이다 - 헤겔"

사람의 인격은 소유되는 대상 안에 늘 나타나기 때문에 재산은 인격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소유한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격을 알고 확인하게 된다. 재산은 그저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헤겔은 보지 않았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재산은 개인적 자유를 표현한다. 재산으로 자기를 감쌈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인격성을 시공간 속에서 부풀리고 자기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디지털 통신 기술과 문화 상업주의의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통신은 인간이 공동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이 이룩한 세계를 공유하는 중요한 수단이므로 디지털 통신의 모든 형태를 상품화한다는 것은 결국 개인과 공동체의 살아 있는 경험-문화 생활-을 구성하는 수많은 관계를 상품화 하는 결과로 귀착된다. 공산품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소유권을 가지는 것이 중요했지만 상업화된 전자 통신 기기와 온갖 종류의 문화 생산과 상품에 의해 점점 지배당하는 글로벌 경제에서는 경험 세계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인간 문화 안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는 뜻이며, 어떤 인간 문화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문화를 매일매일 재창조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보며 알고 세계와 소통한다는 뜻이다. - 리 데이어

 

 

커뮤니케이션이 문화의 핵심, 아니 생명 그자체의 핵심 - 에드워드 홀

 

 

문화는 소통 - 에드먼드 리치

 

 

다니엘 벨은 현대 문명을 분명히 구분되지만 서로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경제, 정치, 문화의 세 가지 권역으로 나눈다. 

  • 경제 영역의 핵심적 원리는 자원 이용의 효율화
  • 정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
  • 문화 영역에서 제일로 치는 것은 자기 실현과 자기 고양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생산하는 물건, 우리가 남을 위해 수행하는 서비스, 우리가 공유하는 문화적 체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존재 전체가 상품화 되고 있다.

 

"체험 산업의 성장은 산업 혁명이 생산한 물건의 효용성이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소비자는 '내가 아직 안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지고 싶은 것이 뭔가?' 라고 묻지 않고 '내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것 중에서 체험하고 싶은 것이 뭔가?' 라고 묻는다." - <제임스 오길비>

 

"새롭게 떠오르는 체험 경제에서는 상품이 아니라 '기억'을 맏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령 제조업체는 상품을 '체험화' 해야 한다. 자동차 회사는 '모는 체험'을, 가구업체는 '앉는 체험'을, 가전 업체는 '닦는 체험과 요리하는 체험'을, 의류 업체는 '입는 체험'을 격상시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 - <조셉 파인, 제임스 길모어>

 

 

접속을 통한 체험이 재산의 소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새로운 문화의 중개자는 개인과 문화 체험 사이에서 문지기 노릇을 한다.

 

유행 사냥꾼 : 트렌돌로지, 브레인 리저브, 쿨 워크스, 램버시스, 유스 인텔리전스, 뷰로 드 스타일, 이코노 컬처, 스푸트니크, 에이전트 엑스

 

 

탈근대에서 사람을 가르는 선은 소유가 아니라 접속이다. 탈근대와 근대가 다른 원인은 시간, 문화, 실체험의 상품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탈근대와 맞물려 있는 반면, 근대의 자본주의는 토지와 자원의 상품화, 노동력의 고용, 제품 생산, 기본적 서비스 제공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고정되고 인식 가능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가 경험하고 그 세계에 참여하는 방식을 통해 개별적 현실들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현실을 모두 포괄하는 관점, 저 높이 우뚝 솟은 곳에서 현실을 내려다보는 관점은 존재할 수가 없다. 탈근대론자에 따르면 세계는 인간의 구성물이다. 기호학자들은 우리가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지어내는 이야기, 우리가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하는 방식에 의해 이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이 새로운 세계는 객관적이지 않으며 우발적이다.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과 시나리오로 엮여 있다. 그것은 언어에 의해 창조된 세계, 합의되고 공유되는 의미와 은유로 결속된 세계다. 언어, 의미, 은유는 시간 속에서 달라질 수 있고 또 실제로 달라진다. 현실은 우리가 증여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 소통을 통해 지어내는 것이다.

 

 

통신 서비스에 대한 지배가 권력의 원천이 되고 통신에 대한 접속이 자유의 조건이 된다. - 다니엘 벨 (1980)

 

 

누가 접속권을 소유하느냐가 핵심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문화는 인간 문명이 원활하게 가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또다른 가치의 산실이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통해서 동질성을 확인한다.' - 리프턴

 

사회적 신뢰는 공감이라는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 공감은 '타자의 인간성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을 요구한다. 친밀함과 예의 바름을 하나로 이어주는 힘도 공감에서 나온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서 타인 안에서 감정의 둥지를 틀고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남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희로애락을 함께 체험한다는 뜻이다. 그런 감정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배우고 서로를 배려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접할 때 길러진다.

 

 

<의식은 세계적으로, 행동은 국지적으로>

시민 사회 조직은 지역 문화의 회복을 주장하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다른 문화가 존재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자기만의 문화 정체성을 앞세우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것, 시민 사회 조직운동의 성격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나는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창문을 굳게 닫아놓은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 온 세계에서 불어오는 문화를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밖에서 불어온 문화에 덩달아 휩쓸려 가지는 않겠다' - 마하트마 간디

다른 문화에 접속할 수 있는 길을 터주면서도 자기 문화의 색깔과 개성을 고수하는 것.

 

 

요한 호이징가 -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 모든 문화는 놀이에서 비롯된다. "사회는 삶과 세계에 대한 해석을 놀이를 통해 표현한다"

 

놀이를 지배하는 전제와 규칙이 전통적으로 일을 지배해 온 전제와 규칙과 다른점

  • 놀이는 신나고 즐겁다. vs  대부분의 일은 따분하고 지루하다.
  • 놀이는 자발적이다. vs 대부분의 일은 생존의 문제다. (선택의 제한)
    진정한 놀이는 살과 살이 맞닿는 친숙한 분위기에서 일어나며 이때 사람들의 참여도도 높아진다.
    놀이의 시간적, 공간적 차원은 일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놀이는 시간을 초월한 영역에 머물러 있다.
    놀이 공간은 사람이 보유하거나 소유하는 영토가 아니라 일시적으로만 공유하는 무대이다. 따라서 놀이는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시공간 차원에서 벌어진다. 놀이를 하는 사람은 놀이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놀이에 빠진다.
  •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이다. vs 일의 목적은 징발하고 죽이고 가공하고 생산하는 것이다. 생산은 언제나 사물을 고갈시킨다.

'사람은 가장 인간다울 때 놀고, 사람은 놀 때 가장 인간답다' - 프리드리히 실러 <인간의 미적 교육에 대하여>

순순한 놀이는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가장 높은 수준의 표현 형식이다.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남과 어울리고 싶어서 놀이를 한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깊이 어울릴 수 있는 것은 집단적 신뢰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남들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희열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놀이는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놀이도 희열도 결국은 경험의 공유이다. 숲을 혼자 거닐 때 느끼는 잔잔한 희열도 나를 둘러싼 생명과 혼연 일체가 된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다.

 

 

'사람은 자신의 자유로움을 두려워하여 자유를 쓰고 싶어하는데.... 그래서 하는 것이 놀이다' - 샤르트르

인간은 순수한 놀이에 완전히 참여해 보아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자유에서 자율성을, 자율성에서 나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서 팔 수 있는 능력을 연상하면서 우리가 근대를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노동의 결실로 얻은 재산은 우리가 가진 자유의 징표로 여겨졌다.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부터 남을 배제하는 권리는 우리의 자율성과 개인적 자유를 지키는 최선의 길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에서 나온다. 공유하고 공감하고 포용할 수 없으면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성숙한 놀이는 수동적 오락과는 달리 언제나 문화 영역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이 친목, 시민 활동, 교회, 예술, 운동, 사회 정의, 환경 조직 같은 다양한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 그들은 성숙한 놀이의 진수를 맛본다. 그들의 사회적 교류는 사회적 신뢰의 섬을 곳곳에 만들고 풍성한 사회 자본을 끌어낸다. 성숙한 놀이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끌어 모은다. 그것은 가장 친밀하면서도 가장 섬세한 인간 교류의 형식이다. 성숙한 놀이는 정치적 성격을 띠었건 상업적 성격을 띠었건 제도화된 권력의 무분별한 횡포에 저항하는 힘이다.

 

 

새로운 글로벌 네트워크 경제에 대한 접속을 보장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건강하고 다양한 지역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안정된 길을 보장하는 것이다. 수천년을 이어온 살아 있는 인간 체험의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생물 다양성을 잃는 것 못지않게 앞으로 우리가 생존하고 번영하는 데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접속의 시대는 <우리는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싶어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우리를 내몰 것이다. 접속이라는 것은 참여의 수준만이 아니라 참여의 유형을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누가 접속권을 얻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체험과 세계가 과연 접속할 만한 가치가 있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는 물음이다. 21세기에 우리가 만들어나갈 사회의 성격이 답변에 좌우될 것이다.

 

 

기업에게 중요한 것은 고객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는 기업들이 어떻게 해서든 고객의 관심과 시간을 많이 확보하려고 한다. 그것이 생존의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기업은 고객을 감동시키는 서비스, 고객을 감동시키는 체험을 제공하면서 고객의 시간을 어떻게 해서든 많이 확보하려고 한다.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는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지상 과제였지만 이제 기업은 고객의 시간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29484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이상을 잃지 않고 버티는 삶, 주체적인 삶을 사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

생각이 필요한 시간.

 

 

[본문발췌]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온갖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해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감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고, 지금 주인의 당당함과 자유를 쟁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다.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 라캉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다.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고,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모든 일이다. -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 이지, <속분서 성교소인>

 

 

우리의 정신은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 번째는 '낙타'로 비유되는 정신이다. 아무런 반성 없이 일체의 사회적 관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정신이다. 마치 낙타 주인이 등에 짐을 올리면 아무런 저항 없이 실어 나르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는 '사자'로 비유되는 정신이다. 낙타와 달리 사자의 등에는 그의 의지를 무시하고 어떤 짐도 올릴 수가 없다. 짐을 올리려면 사자를 죽여야 할 것이다. 사자의 정신은 일체의 억압을 부정하는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세 번째는 정신의 마지막 단계, 즉 인간이라면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아이'의 정신이다. 니체의 아이는 솔직함과 당당함을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과거를 맹목적으로 답습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는 솔직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해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는 자유인의 당당함!

 

 

과거나 미래는 단지 우리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억하는 능력이 없다면 과거란 존재할 수 없고, 기대하는 능력이 없다면 미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삶들의 총제라고 할 수 있다.

 

 

얼음이 네모남이란 고착된 자의식을 버려야만, 그래서 그릇의 둥긂을 수용할 수 있을 때에만 소통은 가능할 것이다. 네모남을 버리려면 혹은 버렸다면, 얼음은 반드시 물로 변형되어야 하거나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얼음과 물은 상이한 두가지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갖는 양태(mode)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얼음과 물 사이의 변화는 실체의 변화가 아니라 양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얼음과 같은 마음이나 물과 같은 마음은 모두 우리 마음의 두 가지 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치열한 자기 수양에 의해 우리는 성인도 될 수 있고, 아니면 평범한 사람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없는데 어찌 나의 것이 있을 것인가. 나와 나의 소유가 없으므로 그는 나라는 의식도 없고 소유하려는 의식도 없는 자가 된다. ... 안으로나 밖으로나 나라는 생각이 없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집착은 없어질 것이다. - <중론>

'내가 없다'는 주장은 부정적으로 '내가 공하다'고 표현된다. 이 주장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나는 수많은 인연들의 마주침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나에게 나의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모두 인연이 있어서 내게 잠시 머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나의 아이도, 그리고 돈마저도 모두 그러하다.

 

 

불교 고통의 메커니즘과 치료의 방법, 사성제

인간은 고통의 존재라고 선언하는 고의 진리,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집의 진리, 고통은 소멸될 수 있다는 멸의 진리, 집착을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도의 진리

 

집착을 소멸시키는 팔정도 : 바른 견해, 바른 사유, 올바른 말/행동/생활/노력/집중/참선

 

 

우리의 동일성을 규정하는 제일의 원리가 습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미 습관이 된 것, 지금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 그리고 나중에 습관으로 획득하게 될 것, 이것이 바로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살아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새롭게 펼쳐진 삶의 환경과 우리 내면의 습관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불일치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기존의 습관대로 환경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에 맞게 자신의 습관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삶의 환경이 타락했다면 습관을 지키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아니면 삶의 환경이 더 좋아진 것이라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이 더 탁월한 선택일 수 있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미리 결정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자공이 물었다.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바로 서恕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 <논어> '위령공'

 

 

아무리 논리적인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수사학적 노력이 실패하면 그 주장은 채택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역린(거꾸로 배열된 비늘)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반성하고 체계화하는 일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타자를 설득하는 데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옳다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타당한 주장, 즉 논리적으로 옳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도록 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 수 있는 수사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법이다.

- 한비자, <설득의 기술>

 

 

논리적 사유란 독특한 주장을 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대는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논리적 사유의 핵심이 이유나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는 독특한 주장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중요한 것은 사태를 새롭게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진정으로 논리적인 사람이 되려면, 시인처럼 예리한 감수성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논리적 사유란 타자를 폭력이 아닌 평화스러운 방법으로 설득하려는 의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논리적 사유는 타자를 대화 상대자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그리고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복제에서 빠져 있는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우리는 아우라라는 개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어떤 사업도 협동조합주의, 상업주의, 그리고 중농주의를 반박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어느 시대에 등장하든 간에, 모더니티는 기존의 믿음을 산산이 부수지 않고서는 그리고 '실재의 결여'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모더니티는 다른 실재들을 발명하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행을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스타일을 선호하고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본 것이다. 유행은 소비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오타르가 보았던 것도 바로 이런 산업자본의 생리였다. "새로운' 상품을 내놓아 기존 상품을 낡은 것으로 만들면서, 소비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하는 메커니즘을 산업자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업자본이 기존의 가치나 통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우리 인간은 드디어 '새로운' 혹은 '낡음'과 관련된 시간의식을 얻게 된 셈이다.

"어떤 작품도 일단 포스트모던해야만 모던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포스트모더니즘은 곤경에 빠진 모더니즘이 아니라 발생 중에 있는 모더니즘이고, 이런 상태는 불변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가 단순한 이미지들로 바뀌는 곳에서는, 이 단순한 이미지들이 현실적 존재가 되고 또한 무자각적인 행동의 효과적인 동인이 된다. 스펙터클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전문 매체들에 의존해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경향으로서(세계는 더 이상 직접 파악될 수 없다), 특권적인 인간 감각을 당연히 시각에서 찾는데, 다른 시대에 그 특권적 인간 감각은 촉각이었다." -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에 길들여짐에 따라 스펙터클 사회의 거주민들은 점점 현실에 대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변하게 된다.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생명 연장의 꿈이 오직 소비의 영역에서, 다시 말해 소비자로 하여금 주머니를 열도록 유혹하는 데 있다. -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스펙터클 사회는 인간으로부터 상품에 대한 시각적 감각을 제외한 일체의 현실 감각을 박탈해버린 거대한 매트릭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역설적으로 스펙터클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볼 수 있다. 촉각으로 접할 수 있는, 즉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현실 감각을 키워야 한다. 단지 이것만이 권력과 자본이 내건 집어등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낚시줄을 호수에 드리우지 않으면,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 물론 낚시줄을 드리웠다고 해서, 항상 자신이 원하던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터덜터덜 빈손으로 집으로 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는 말자. 낚싯줄을 던지지 않는다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불확실한 결과가 충분히 예견될지라도 과감하게 낚싯줄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잡으려고 했던 물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지나치게 오만할 일도 아니고, 잡지 못했다고 해서 지나치게 비관적일 필요도 없는 일다. 지금 왕충은 해묵은 동양의 인생관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인사대천명!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려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일희일비하지 말라!

 

 

대립과 갈등이 심화될 때,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려고 드는 것이 바로 자본과 권력의 생리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시대 자본과 권력이야말로 우리가 사랑과 공존의 지혜를 포기하도록 만든 주범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치'의 길이 아닌 '사랑'의 길도 있다는 소중한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만큼 우리는 비속해졌고, 갈수록 약육강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분명 사랑의 길은 엄청난 고행을 예약하는 길이다.

 

 

사랑은 몸으로, 즉 실천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의 고난과 고통을 기꺼이 대신하려는 마음에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사랑이란 말은 하나의 미사여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언제나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니까 가난한 것이다.

 

 

 "이상과 현실은 타협할 수 있는 것인가요? 이상과 현실의 타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현실이란 급류, 그러니까 모든 것을 휩쓸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압도적인 강물과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이런 급류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럼 이상이란 무엇일까요? 그건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나무토막 같은 겁니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그 나무토막을 강바닥에 박고 버텨야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급류의 힘이 너무 강해 질질 끌려가기 쉬울 겁니다. 그렇지만 강바닥에 박은 나무토막이 없다면, 우리는 급류의 힘에 저항할 수도 없을 겁니다"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실재적 과정을 '진리'라고 부른다. 그 충실성이 상황 속에서 생산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충실성의 지지자, 즉 진리 과정의 지지자를 '주체'라고 부른다. 따라서 주체는 결코 과정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상을 지킨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것을 뒤흔들 만한 사건, 자신의 삶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사건을 만났을 때,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에 충실해야 한다. 주체는 바로 이런 충실성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타자의 자유를 긍정한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항상 푸르게 유지될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며 나를 만나리라."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자신을 버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너'가 자유로운 결정으로 나를 사랑할 때까지 말이다. - 이성복 시인,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노동'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것이고, '놀이'는 수단과 목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해위라는 점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 놀이는 자연의 진행과정과 구분된다. ....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들에게 놀이는 도외시해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즐거움이 놀이하기를 원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물리적 필요가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노동보다는 놀이를 통해 인간은 놀라운 집중력과 새로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 놀이 개념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가진 창조성의 비밀을 짐작하게 한다.

 

자신의 일에서 놀이가 가진 즐거움과 창조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아이 때 경험했던 놀이의 즐거움을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관조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 이해하지 않는 유물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은 시민 사회 속의 개개인의 관조이다. 낡은 유물론의 입장은 '시민 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적 사회' 또는 '사회적 인간' 이다." -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우리는 마르크스의 '새로운 유물론'이 지닌 '새로움'이 무엇 때문에 가능했는지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환경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환경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통찰했다.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아마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갔다 온 모양일세." - 몽테뉴, <수상록>

 

참다운 여행은배움의 과정이어야 한다. 첫 번째 배움은 여행지와 그곳 사람들의 삶을 배우는 것. 두 번째 배움은 여행지에서 삶이 충분히 편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이 떠나온 일상이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다. 진정한 여행을 떠난 사람은 자신이 도착한 낯선 곳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여행은 차이의 경험이다. 낯선 여행지와 익숙한 일상 사이의 차이, 혹은 이제는 익숙해진 여행지와 낯설게 느껴지는 일상 사이의 차이. 이 두가지 차이를 동시에 겪어내야만, 여행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459716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