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어머니와 같은 자연, 잘 이용할 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우리의 탐욕으로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부메랑이 될지도 모른다.
[본문발췌]
눈을 꼭 감고 귀를 쫑긋 세워 보라. 가장 부드러운 소리에서부터 가장 원시적인 소음에 이르기까지, 가장 단순한 음에서부터 천상의 하모니에 이르기까지, 가장 상냥하고 달콤한 음성에서부터 가장 난폭하고 격정적인 울부짖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소리는 자연의 언어다. 자연은 다양한 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being와 힘power과 삶life과 관계relatedeness를 드러낸다. '보이는 세계'에 눈을 감고 '들리는 세계'에 귀를 기울이면,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을 포착하게 될 것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식은 공유하고, 교환하고, 만인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 훔볼트
훔볼트는 자연의 측정, 관찰에 매혹됨과 동시에 경이감에 이끌렸다. 물론 자연은 측정되고 분석되어야 하지만, 자연계에 대한 반응 중 대부분은 감각과 정서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다른 과학자들이 보편법칙을 찾고 있을 때, 훔볼트는 '자연은 감정을 통해 경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연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싶어 했다.
"객관적 진실objective truth은 주관적 경험subjective experience을 관찰자의 추론 능력과 결합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 괴테
인간은 '선한 것'과 '위대한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나머지는 운명에 맡겨야 한다.
훔볼트는 "인류는 '자연력force of nature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와 '여러 가닥의 실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훔볼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제멋대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작해야) 자연의 법칙을 이해한 다음, 자연의 힘을 무단으로 도용하여 이익을 취할 뿐이다. 인류는 환경을 잠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자연은 훔볼트의 교사였다. 훔볼트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교훈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자유의 소중함'이었다. "자연은 자유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균형은 다양성에 의해 이루어지며, 다양성은 정치적 도덕적 진실의 청사진이기 때문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끼나 곤충에서부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참나무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자연 속에서 각각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며, 함께 모여 전체를 이룬다. 인간도 자연의 작은 구성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다. 훔볼트에게 자연은 그 자체가 자유로운 존재들로 이루어진 자유공화국republic of freedom이었다.
자연은 연결connection과 통합unity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균형과 안정성이 아니라, 동적 변화dynamic change.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꽃이 시든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을 숲 바닥에 두껍게 쌓여 썩어가는 낙엽도 마찬가집니다. 이듬해 봄이 되면 숲이 모두 되살아날 테니까요. 죽음은 자연순환nature's cycle의 일부이며, 자연의 건강과 활력을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자연의 한복판에 사는 사람에게, 암흑 같은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간소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자연은 그 자체가 시인이다. 나는 펜을 이용하여 자연의 언어를 독자들에게 전달할 뿐이다" - 존 뮤어
훔볼트, 마시, 뮤어는 모두 자연 파괴의 위험성을 제기한 선구자들이었지만, 세 사람의 역할은 조금씩 달랐다. 훔볼트는 자연이 직면한 위협을 이애하여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마시는 관련된 증거를 수집하여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기했다. 마지막으로, 환경에 관한 우려를 정치적 장으로 이끌어내어 대중의 관심을 모은 사람은 뮤어였다. 또한 마시와 뮤어는 모두 산림 파괴의 부당성을 지적했지만, 훔볼트의 아이디어를 각가 다르게 해석했다. 마시는 본질적으로 자연자원natural resource의 사용을 찬성하되, 나무나 물의 사용을 조절하여 지속가능한 균형sustainable balance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면에서 볼때, 그는 자연보호conservation를 옹호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뮤어는 자연 보존preservation를 옹호했는데, 그 의도는 자연을 인간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본질적으로 자연 자원의 사용을 반대하며, 숲과 강과 산을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숲을 보호하겠다는 계획도 시스템도 트릭도 필요 없다. 단지 최선을 다해 있는 그대로 보존할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투자는 꿈과 미래에 대한 것이고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다. 불확실성을 좀 더 줄이기 위해 분석과 기준, 판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탐욕을 억누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본문발췌]
기업의 주가는 내재가치에 수렴해 간다고 보고, 주가가 내재가치보다 쌀 때 매입해 두었다가 주가가 내재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팔아 수익을 낸다.
주식시장에서는 때때로 실적의 중요한 변화를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모두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과장된 경향은 호황기나 침체기에 확연히 나타나고, 그 밖의 시기에는 일부 회사에서 개별적으로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주식, 특히 보통주를 성공적으로 매수할 수 있는 능력은 미래를 정확하게 바라보는 능력이다. 과거는 아무리 주의 깊게 살펴보더라도 충분치 않으며, 오히려 득보다 해가 될 수도 있다. 좋은 주식을 선택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성공할 경우 엄청난 보상이 뒤따르는 것이다. 주식투자는 과거의 '사실'과 미래의 '가능성' 사이에서 절묘한 지적 균형이 요구된다.
현명한 투자는 손실을 보지 않는 것. 재무제표 분석을 통해 기업의 현재 위치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자산가치와 수익창출 능력, 동업종 내 기업과의 비교를 통한 재무건전성 파악, 수익의 추세, 항상 변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경영진의 능력 등 모든 요인들이 증권의 가치와 중요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기업의 통제 밖에 있는 외부 요인들이 증권의 가치에 미치는 영향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일반적인 경제 여건과 증시 상황,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 시기, 임의적인 시장 조작, 특정 증권에 대한 대중적 선호도 등의 요인들은 정확한 재무비율이나 안전마진의 측면에서는 측정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통제 불가능한 요인들은 금융 뉴스나 산업 뉴스를 지속적으로 접하면서 습득한 일반적인 지식을 통해서만 판단이 가능하다. 기업의 재무제표에 근거해 증권의 시장가격이 저렴해 보일 때 매수하고, 역시 재무제표에 근거해 비싸 보일 때 매도하는 투자자라도 '엄청난' 수익을 내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투자자는 마찬가지의 '엄청난' 손실이나 잦은 손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평균 이상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명한 투자의 주요한 목적이다.
빈곤과 결핍, 불완전함 속에서 진보가 있다. 혼자라는 외로움도 관계와 성장으로 가는 과정....
[본문발췌]
뭔가를 빨아들이려면, 작은 것을 커다랗게 느끼려면, 미지근하기만 한 대기를 청량한 것으로 바꿔서 받아들이겠다면 어느 정도 메마른 상태여야만 가능하다.
인생의 파도를 만드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보통의 사람은 남이 만든 파도에 몸을 싣지만, 특별한 사람은 내가 만든 파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운다.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할수록 희미하고, 또 차이가 없다고 할수록 선명하다.
혼자 있으면 무조건 심심할 거라며 회피하는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란 건 별로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진정 하고픈 걸 할 수 있는 상태는 정말로 혼자일 때 아닌가. 세상 눈치보는 일 없이 자유로운 상태일 테니 행동력이 따라오는 건 당연. 혼자는 초라하지 않다. 오히려 외로움은 사람을 입체적으로 다듬어준다. 우리의 혼자 있는 시간은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특별한 의미로 사람을 빛나게 하고 또 사람관을 선명하게 한다.
"우리에겐 필요한 순간에 길을 바꿀 능력이 있다" - 파울로 코엘료, <히피>
얼마 전 감명깊게 본 영화의 제목은 <사랑의 모양>이다. 원제는 <The Shape of Water>로 '물의 모양' '물의 형태'라는 의미쯤 된다. 물과 사랑의 모양은 시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그대로 닮았으니 이 멋진 제목을 붙인 이가 누구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사랑의 꼴도 다르다. 누구를 사랑하느냐에 따라 내가 얼마만큼의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누구를 어떻게 떠나보내는지가 남은 사람을 입체적으로 성장시킨다.
우리는 새장 한쪽 구석에서 새장의 이쪽 구석으로 매일 출근한다. 하늘을 올려다본 지 오래되었으며 빈 밥그릇만 쳐다본 지 오래되었으며 다른 새장으로 이동하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포기했다. 사람은 자기가 속한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서성이며 살고 있다. 행복을 말해야 할 때 인용할 거리는 적고, 가고 싶은 곳도 적고, 살아야 할 시간마저도 적다. 이렇게 적은 것으로 가득찬 세상에 우리는 태어난 채, 그저 버려져 있는 느낌이다. 그러기에,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반경을 조금이라도 넓혀줄 것 같으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을 의향이 있다. 하지만 그 무엇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잘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깊은 밤이 오면 이불을 끌어다 그저 심장을 상처 난 자리처럼 덮는다.
사람들은 아파트 평수에만 연연해하고 아파트 공간의 높이에 대해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난 참 그것이 신기하다. 어떤 아파트냐에 따라 높이도 제각가 다르다. '높이야 거기서 거기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과 '사랑이 그렇고 그런 거지 뭐. 살아보면 누구랑 살아도 다 똑같아'라는 생각은 참 많이도 닮았다. 한계에 눌려 사는 인간의 한계를 닮았다.
독일의 철학자 바움가르텐은 '미학aesthetica'이란 말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처음으로 인간의 '감성'을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가령 인간의 '지식'은 인식론에서, '의지'는 윤리학에서 연구해왔다. 하지만 이제까지 인간의 감성을 연구하는 학문은 없었다. 그런 학문도 하나쯤 있을 법하지 않은가. 여기서 바움가르텐은 새로운 학문을 생각해내고, 거기에 감각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스테시스aesthesis'를 본떠 '에스테티카'란 이름을 붙였다.
예술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유희'며, 예술가는 고정된 법칙에 따르지 않고 '영감'에 따라 자유로이 창작을 한다.'형식 미학'
예술가는 더 이상 규칙을 습득하여 자연을 모방하는 '장인'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내는 '천재'다. '낭만주의 미학'
『2권 마그리트와 하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직관은 표현이며, 표현은 예술이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
문학에선 허구가 사실로, 즉 문학 텍스트 속의 상상적인 것이 살아 있는 존재로 경험된다. 이렇게 예술의 본질은 생생한 '경험'을 매개하는 데 있다. 어떤 완성된 진리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에셔와 마그리트 모두 인간 사유의 패러독스를 작품에 담으려 했다. 에셔의 패러독스는 인간 사유의 문법, 즉 논리를 깨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유의 '형식'에 들어 있는 패러독스인 셈이다. 반면 마그리트의 패러독스는 사유의 내용, 즉 의미를 깨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유의 '내용'이 가진 패러독스인 셈이다. 에셔는 수학과 논리학과 같은 형식 체계에 관심이 있었고, 마그리트는 철학, 특히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관심이 있었다. 두 사람의 작품세계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됬었을 거다. 어쨌던 사유의 형식에서든 내용에서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상한 패러독스에 빠져든다. 인간의 사유가 지닌 한계에 제일 먼저 부딪힌 사람은 아마 칸트일 거다. 그 뒤 철학자들은 이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어떻게? 헤겔은 주관과 객관을 넘어선 초월적인 관념에 의뢰했다. 하지만 고공 비행은 불가능하다. 그럼 메를로-퐁티처럼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기 전의 세계로 돌아가면? 너무 애매하다고? 그럼 하이데거처럼 아예 사유의 틀을 바꾸어 주관과 객관의 고리를 뚫고 열리는 존재의 진리에 호소하든지...
『3권 피라네시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모든 새로운 것은 단지 망각일 뿐.... - 솔로몬의 격언을, 프랜시스 베이컨이 인용한 것을, 보르헤스가 인용한 것을, 다시 인용하다.
모네는 수련을 그리지 않았다. 수련이 형상은 화가의 붓끝이 아니라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서 완성된다. 그가 그린 것은 꽃의 시각적 인상이다. 모네는 화면 위에 현실에 존재하는 꽃을 복제한 게 아니다. 우리의 눈에 복제된 꽃의 인상을 또다시 복제했을 뿐이다. 과거의 화가들은 사물을 '있는 대로' 그렸다. 반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보이는 대로' 그렸다. 과거의 화가들이 '객관'을 지향했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주관'을 지향했다. 과거의 화가들이 '대상'을 그렸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현대인의 '시각'을 그리려 했다. 모네는 수련을 그린 게 아니라, 도시인의 눈에 비친 인상을 그렸다. 모네가 그린 것은 수련이 아니다. 모네는 결코 수련을 그리지 않았다. 모던의 지각을 그렸다.
우리는 자연이란 '자원의 보고'라 배웠다. 한마디로 인간이 맘대로 갖다 쓸 수 있는 재료들의 창고라는 얘기다. 그런 문명의 폐해를 우리는 시커멓게 죽어가는 자연 속에서 보고 있다. 옛사람들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돌 한 조각, 벌레 한 마리도 대화의 상대로 여겼다. 생명이 없는 사물에까지도 그들은 영혼을 부여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거꾸로 영혼이 있는 생명까지도 사물화(事物化)하고 사물화(死物化)하여, 결국 사물화(私物化)하지 않는가. 이게 타락한 바벨의 언어로 만든 자본주의 문명이다.
기술합리성은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도 지배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엄청난 효율을 자랑한다. 하지만 거기서 아도르노는 어떤 전체주의적 위험을 본다. 가령 우리 앞에 연필과 공책이 있다고 하자. 둘은 사용가치가 다르다. 어느 게 더 귀중한지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교환가치를 위한 생산이다. 그래서 질적으로 다른 사물들을 약분 가능하게 만든다. 가령 사물의 가치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수가 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사물의 고유한 질을 지우고, 그것들의 가치를 화폐의 양으로 환원시킨다.
하나의 '코드'로 수많은 복제들을 찍어내는 게 자본주의 생산의 특징이다. 때문에 자본은 인간마저도 제 버릇대로 '코드'를 찍어내려 한다. 자본은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을 확대 재생산시켜줄 클론을 원할 뿐이다. 예컨대 우리의 대학을 보라. 자본의 요구에 맞추어 시장원리가 대학에 도입되자. 학과들의 다양성이 급속히 사라져버렸다. 이런 획일적인 틀 속에서 관리된 인간들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비합리성이다.
개별을 배제하는 보편의 감옥에 사는 것과, 그 밖에서 개별자로 자유롭게 사는 것.
벤야민은 영화의 몽타주 기법을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는 탁월한 방식으로 보았다. 하지만 안더스는 몽타주라는 편집기술에서 외려 탁월한 조작의 수단을 본다. 소위 편집의 예술이라는 게 있다. 동일한 영상의 요소라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그것들의 전체적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편집자를 세계의 건축가로 만드는 이 편집의 틀을 안더스는 '매트릭스'라 부른다. (내가 아는 한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귄터 안더스다.) '팬텀'이 세계를 이루는 재료라면, '매트릭스'는 그 재료로 세계를 짜는 활판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주관의 선험적 형식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실은 우리의 의식이 시공의 형식에 따라 구성한 것이라는 얘기다. 편집의 몽타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신문을 짜는 원리는 세계를 짜는 원리다. 과거의 조작은 사실을 날조하거나, 해석을 왜곡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조작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다. 더 중요한 조작은 편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작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술이 아직 재현이었을 때, 현실은 원상이고, 그림은 모상이었다. 모상의 진리는 원상과의 일치에 있다. 복제는 원본과 일치할 때에만 참된 존재다. 원본과 다른 사본은 사기다. 실재는 실재, 허구는 허구. 이때만 해도 모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래전에 예술은 재현을 포기했다. 예술 과제는 있는 현실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없는 현실을 비로소 있게 하는 현시(presentation)가 되었다. 작품의 진리는 있는 현실의 정직한 증언이 아니라, 없는 현실을 만드는 창조의 힘에 있다. 한 세기 동안 우리는 그 창조의 즐거움을 만끽해왔다. 하지만 없는 현실의 창조란 있는 현실의 조작일 수도 있다. 예술이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힘이라면, 우리의 현실은 허구다. 그럼 그것은 대체 누구의 허구인가? 게다가 오늘날 세계 체험은 주로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미디어도 예술을 닮아서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지 않고, 없는 현실을 만들어내려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의 건축가는 누구일까? 우리는 대체 누구의 작품 속에 사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창조의 미학은 존재의 윤리로 견제되어야 한다. 가상과 실재, 허구와 현실은 어쨌든 구별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문제는 이것이다. 실재와 가상을 가르는 기준 역시 가상이며, 현실과 허구를 나누는 기준마저 허구일 수 있다는 것. 도대체 무엇이 실재이며 무엇이 가상인가? 대체 어디까지 현실이며 어디부터 가상인가? 그런 의미에서 사라지는 것은 예술만이 아니다. 예술이 종언을 고할 때 사라지는 것은 외려 현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 대한 낡은 관념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허구와 실재가 복잡하게 뒤엉킨 새로운 현실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축복일까? 저주일까? 어쨌든 우리에게 익숙했던 현실은 사라지고 있다. 앨리스 앞의 체셔 고양이처럼 천.천.히.
(네이버 영어사전) [명사] anger, rage, fury, resentment, indignation, (formal) wrath, [동사] get angry, be outraged[infuriated, exasperated, indignant]
분노를 느끼다, feel anger[resentment]
[글과 책 속에 쓰인 '분노'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코에케 류노스케, <침묵입문>
불교의 삼독 : 탐욕(貪欲, 욕망), 진에(瞋恚, 분노), 우치(愚癡, 어리석음)
분노, 탐욕,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말들이 난무할 때, 그 속에서 조용히 침묵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권력의 결정적인 토대가 되는 것은 감정 통제 능력이다. 상황에 대한 감정적 대응은 권력의 가장 큰 장애인 동시에, 감정 표출로 얻는 순간적인 만족보다 훨씬 더 대가를 치르게 하는 크나큰 실수다. 감정은 이성을 흐리게 한다. 상황을 명확하게 보지 못하면 통제력을 가지고 상황에 대처할 수도, 대응할 수도 없게 된다. 분노는 감정적 대응 가운데서도 가장 파괴적이다. 시야를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분노는 또한 잔물결 효과를 일으켜 상황을 더욱 통제할 수 없게 만들고 적으로 하여금 결의를 다지게 만든다. 만일 당신에게 해를 입힌 적을 파괴하고자 한다면, 분노를 표하는 것보다는 친교를 가장함으로써 상대의 경계를 풀어놓는 것이 훨씬 낫다.
분노와 감정 노출은 전략적으로 비생산적이다. 당신은 항상 침착함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만약 적을 만나게 하면서 당신 자신은 침착할 수 있다면, 당신은 결정적 이점을 확보하게 된다. 적의 평정을 흐트러뜨려라. 적의 자만 속에서 맹점을 찾아 휘저어놓아라. 그러면 당신이 적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
군주는 화 때문에 군대를 출정시키는 일이 없어야 하고, 지도자는 분노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 - 손자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화를 내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고통 역시 '분노를 먹고 사는 악마' 이다.
분노는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갈라놓는다. 외톨이가 되기 원한다면 자주 화를 내라.
마음속 그 분노에 찬 코끼리를 강제로 제압하려 하지 말고, 그 대신 자비의 마음을 사용하라.
당신이 미친 마음과 싸우는 대신, 그 마음을 평화롭게 대하라. 그자비의 힘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마음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온순하게 그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그러면 그때 당신은 부드럽게 그 마음을 토닥이며 말한다. "그래, 내 마음이여. 그래, 내가 다 안다."
김선현, <그림의 힘>
미움과 분노는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문제지만, 결국 자기를 파괴시키는 일입니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욕망의 크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를 키우는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기루 잡기다. 그러므로 욕망의 크기를 줄여라. 그것만이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욕망이 제로일 때는 제로의 소유만으로도 너는 행복하다. 재갈을 물릴 수 없는 무한 욕망이 탐욕이다.그 탐이 충족되지 않아 너를 화나게 하고 질투하게 하는 것이 '진, 분노'이며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것이 '치, 어리석음'다. 그러므로 욕망을 다스려라, 줄여라, 끊어라, 그리고 평화로워라, 친구여.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뇌의 눈확겉질은 여러 신호들을 받음으로써 - 내장의 감각, 욕망의 대상, 감정적 충동, 겉질의 다른 부분에서 온 감각과 기억도 입력 받는다. - 감정의 조절자로 기능한다. 분노, 온기, 공포, 혐오, 같은 본능적 감정들을 받아서 그 사람이 지닌 목표와 통합한 뒤, 적절한 계산으로 신호를 조절하여 원래의 감정 영역으로 돌려보낸다. 냉정한 숙고와 실행을 제어하는 겉질 영역으로도 신호를 올려 보낸다. 신경 해부학이 제시한 이 흐름도는 심리학자들이 환자와 실험실에서 관찰한 내용과 제법 잘 맞는다. 19세기 의학 기록의 미사여구와 21세기의 임상 용어에 차이가 있음을 감안한다면, 눈확겉질이 손상된 환자에 대한 요즘의 다음과 같은 묘사는 피니어스 게이지에게 적용해도 좋을 듯하다. "자제력이 없고, 사회적으로 부적절하게 행동하고, 타인의 기분을 쉽게 오해하고, 충동적이고, 자기 행동의 결과에 무관심하고, 일상생활에서 책임감이 없고,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통찰하지 못하고, 추진력이 약하다."
폭력의 세 번째 뿌리는 복수심이다. 피해를 똑같이 되갚으려는 동기이다. 그 직접적인 엔진은 분노 체계이지만, 탐색 체계에서도 이유를 끌어올 수 있다.
사법 체계는 비싸고, 비효율적이고, 피해자의 요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가해자를 강제로 투옥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폭력적이다. 요즘 많은 공동체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때로는 형사 재판을 보완하고, 때로는 아예 대체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조정자 앞에 나란히 앉는데, 가족과 친구가 동행할 때도 있다. 조정자는 피해자에게 괴로움과 분노를 표현할 기회를 주고, 가해자에게는 진심 어린 회한과 피해 보상을 전달할 기회를 준다. 흡사 대낮에 방송되는 진부한 텔레비전 방송처럼 들리지만, 이런 자리는 최소한 진심으로 뉘우치는 가해자에게는 바른 길로 들어설 기회를 주고 피해자를 만족시킴으로써, 너무나 느릿느릿한 사법 체계로 분쟁을 가져가지 않아도되도록 해준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에서 나 자신이 해방되는 일이다. - 칼루 린포체
마음이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분노를 느낄수록 현재를 사랑하기가 더 어렵다. 마음의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과거의 일을 계속 곱씹으면서, 그것에 의해 왜곡된 인식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한다는 것이다.
이희인, <여행의 문장들>
바다가 태양을 품으면 찬란함으로 가득하고, 낭만을 품으면 사랑으로 가득하고, 분노를 품으면 파괴로 가득하겠지만, 쓸쓸함을 품으면 얼마나 거대한 슬픔과 고독을 빚어내는지 알 것 같았다.
김홍신, <인생사용설명서>
용서는 내 기쁨이 분명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증오는 쏜 사람에게 반드시 되돌아와 꽂히는 독 묻은 화살 같아서 나를 해코지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용서는 내 영혼을 평온하게 하고 가슴을 주욱 펴게 하며 나를 향기나게 합니다.
미움, 분노, 질시, 화, 슬픔, 괴로움은 영혼에 박힌 가시와 같습니다. 손가락에 박힌 가시는 눈에 보여 쉽게 뽑을 수 있지만 영혼에 박힌 큰 가시는 보이지 않아 자신을 끝없이 괴롭힙니다. 일이 잘못되어 날카로운 송곳이 몸에 박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누구라도 뽑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에 박힌 가시를 굳이 뽑아내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화, 분노, 미움, 걱정 따위는 쌓아두지 마십시오. 쌓아둘수록 자신의 상처가 그만큼 깊어질 뿐입니다. 원망, 핑계, 가슴앓이 따위가 차곡차곡 쌓여 가슴에 맺히면 결국 그것들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구도의 열정과 혁명적 분노가 함께 할 갈 수 있는 길! 그렇다면, 운명을 사랑하는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흐름에 참여할 수 있을 때, 그것이 곧 혁명이 아닐까. 거꾸로 혁명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는 투지로 불타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긍지와 존중감이 없다면 그건 '비슷하지만 가짜'다.
오행과 오장육부의 관계 : 木(간, 담)은 분노, 火(심/소장)은 기쁨, 土(비위)는 생각, 金(폐/대장)은 슬픔, 水(신장/방광)은 두려움의 정서를 담당한다. 해당 장기에 문제가 있으면 감정의 균형이 깨어지게 마련이다.
감정의 흐름이 깨져도 장부에 병이 생기고, 거꾸로 장부에 문제가 있어도 감정의 자연스러운 리듬이 깨지게 된다.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를 오롯이 주시한다는 뜻이다. "더울 때는 더위가 되고, 추울 때는 추위가 되라!"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잔다" "평상심의 도다!" 등의 선사들의 경구가 그런 경지에 대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종종 체념과 수동성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즉, 분노와 열정을 다 포기하고 대충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아니다. 오인일뿐더러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로 읽은 것이기도 하다. 대충 살아서는 결코 저와 같은 일상을 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표상의 그물을 뛰어넘는 아주 역동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자아는 물론 가족, 혈연, 국가 등의 표상들이 형성하는 장벽을 벗어나 그야말로 우주적 인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정적으로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선형성을 탈피해야 한다. 즉, 과거-현재-미래는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조정래, <천년의 질문>
인생이란 결과적으로 무상이오. 허나 인생살이 그 과정은 길어요. 낙심하지도 말고, 너무 괴로워하지도마시오. 인생사의 얻고 잃음이란 모래 한 주먹 쥔 손을 오무렸다 펴는 것과 같은 것이오. 손을 오무려도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손을 펴도 모래는 흘러내리는 거요. 다만 시간 차이가 좀 있을 뿐이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을 그대로 이 세상에 두고 맨손으로 떠나게 되어 있소. 그러니 집착을 버리시오.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시오. 새 마음으로 다가올 날만 생각하시오. 그것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가 뜨고 지듯이, 달이 차고 기울듯이, 그런 걸음으로 다가올 날을 맞이하시오. 그렇게 마음을 다스려가는 지금부터가 자신을 위한 도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오. 과거에 집착해 분노와 증오를 못 버리는 것, 그것처럼 큰 어리석음은 없소.
우리는 광장에서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자들의 연합체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 제도의 문젝 아니라 삶의 태도의 문제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약자와 공감하고 연대하며, 불의에 분노하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태도 - 이러한 심성을 내면화한 민주주의자를 길러내지 못하는 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하시라도 권위주의와 독재의 야만으로 추락할 수 있다. 이것이 광장의 촛불이 내 마음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타올라야 하는 이유다.
이기주, <글의 품격>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분노에 굶주린 늑대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올 때가 있다. 정치인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상대 진영을 향해 증오의 언어를 쏟아내고, 언론은 종종 자극적인 기사로 이념과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긴다. 인터넷 '댓글 문화' 역시 밝은 빛만큼이나 진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주역>에 이르기를 "서부진언書不盡言"이라 했다. "글로는 말하고 싶은 것을 다 적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글은 종종 무력하다. 문장이 닿을 수 없는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글쓰기가 지닌 한계와 무게를 알고 글을 적어야 한다. 오늘날 분노를 머금고 우리 손끝에서 태어나 인터넷 공간을 정처 없이 표류하는 문장들이 악취를 풍기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 망설임 없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글을 토해내기 때문인지 모른다. 세상사에 너무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글을 휘갈기다 보니 문장에 묻어 있는 더러움과 사나움을 미처 털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마시모 피글리우치,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에픽테토스는 메데이아를 대하는 우리의 적합한 태도로 분노나 노여움이 아닌 동정을 권고한다. 왜냐하면 메데이아는 어떤 의미로 보나 "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절름발이처럼(에픽테토스가 자신의 몸 상태를 기술하기 위해 똑같이 사용한 단어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결여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메데이아는 지혜를 결여하고 아마티아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일종의 지식 거부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특정 상황에서 불랍리한 판단을 내리게 되고 그 바람에 외부인들이 마땅히 끔찍한 행위로 인식하게 될 일들을 벌이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런 스토아의 태도나 이에 상응하는 불교나 기독교의 똑같은 태도를 내면화하만다면,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분개할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욕을 하거나, 비난하거나, 증오하거나, 우리에게 불쾌감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 소견으로는 그렇게 해서 귀결된 세계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보다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굴욕, 분노, 위협의 수준을 높여 개인의 발전을 앞당긴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꺾이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자아가 신랄한 모욕을 감당한 결과로 더 이성적이되거나 자신의 성격을 더 깊이 통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 성격의 고질적인 측면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따뜻하게 접근한다기보다 우리의 천성을 야멸치고 분별없이 공격하는 것만 같은 제언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방어적이되고 과민해질 수밖에 없다.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수리와 언어라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뇌 기능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는데도 사회적인 의사 결정 능력이 심하게 결여된 환자를 수없이 관찰하고, 적시에 적정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는 이성과 정동(분노, 두려움, 기쁨, 슬픔 등 비교적 급속히 일어나는 일시적이고 급격한 감정의 움직임을 가리는 심리학 용어),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E. F. 슈마허 외 지음, 골디언 밴던브뤼크 엮음, <자발적 가난>
이제 자신의 손발에 의존하는 법을 배우고, 복장과 삶의 양식을 새로운 유행이 아니라 조상들이 허락했던 관습에 따라 지키기로 하자. 욕망을 조절하는 법과 사치를 절제하는 법, 야망을 낮추고 분노를 누그러뜨리며, 가난을 편견 없이 바라보며, 가난을 편견 없이 바라보며, 검소하게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재산보다는 내면에서 부를 추구할 것을 다짐하기로 하자. 전차 경주나 대회뿐만 아니라 삶의 투기장에서도 우리는 원의 내부에 머물러야 한다. - 세네카
Seven Deadly Sins : 오만, 질투, 분노, 탐욕, 탐식, 음탕함, 게으름... Four Cardinal Virtues : 지혜, 용기, 절제, 정의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정치뉴스는 우리 앞에 내던져진 그 모든 불화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복잡한 역할에 대한 흥미를 끌어내고, 그럼으로써 사회의 개혁을 지적으로 환기시키는 동시에 그 개혁에는 어떤 완고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분노하지 않고 수용하도록 도와야 한다.
경제뉴스는 현재의 경제적 발전상을 조명할 뿐 아니라 시장 자본주의가 보다 합리적이고 만족스러운 형태로 변화하는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적이면서도 적용 가능한 많은 이론들을 탐사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불필요한 냉소와 미성숙한 분노 양쪽 모두를 잠재우게 될 것이다.
김형경, <좋은 이별>
1969년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제안한 애도의 5단계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의 애도 과정에는 슬픔이나 통곡하기가 들어 있지 않다. 널리 알려진 애도 이론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5단계 이론이지만 그보다 앞선 1962년, 그랜저 E. 웨스트라는 심리학자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사로잡히게 되는 감정의 10단계에 대해 먼저 발표했다. 그의 10단계는 충격, 감정의 표현, 절망과 외로움, 육체적 불쾌감, 공포, 죄책감, 분노와 적개심, 저항, 희망, 현실 긍정이다.
열정을 쏟았던 대상은 사라졌지만 열정은 여전히 떠난 사람을 향하고 있다. 돌던 팽이가 단숨에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리비도 투자도 관성의 법칙을 따른다. 마음속에 여전히 잃은 대상을 간직한 채 그의 집 앞을 서성이거나, 그가 언제 돌아올 거라 믿거나, 뒤늦게 혼자 분노한다. 리비도 회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이다.
사랑의 대상을 잃은 박탈감과, 사랑의 대상은 존재하는데 그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거나 학대당하는 결핍감 중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울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박탈은 대상을 포기할 수 있지만 영원한 절망이 따르고, 결핍은 포기할 수 없는 기대감으로 인해 거듭 분노가 증폭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 쪽도 나쁘기는 마찬가지만.
고통은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다. 아까운 삶을 분노하고 복수하는 데 허비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기회, 창의성을 발휘할 역량을 놓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분노도, 고통도 내가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용서를 정하면 잘 받아 준다. 건성으로 약삭빠르게 사과하는 태도만 취한다고 느껴질 때라도 용서를 받아 준다. 더러운 오물도 흙으로 덮어 주면 좋은 거름으로 바뀔 수 있다.
이기주, <한때 소중했던 것들>
문제는 그들 중 일부가 꽤 공격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밖으로 쏟아낸다는 겁니다. 타인의 성과를 깎아내리거나 비난하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하죠. 왜냐고요? 그래야 덜 불안하거든요. 사람의 공격성이라는 게 노여움이나 분노뿐만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장막을 찢고 나온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버리기 연습>
불교에서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키워야 할 4가지 감정으로, '자비희사(慈悲喜捨)'를 강조한다. 자(慈)는 사람을 포함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하는 마음이고, 비(悲)는 가엽게 여겨서 괴로움과 고통을 없애주려는 마음이며, 희(喜)는 다른 사람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주는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사(捨)는 분노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마음을 말한다.
우리는 생각을 멈추고 차분하게 그 목소리를 관찰하는 것으로, 상대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상대가 나쁜 말을 입에 담을 때에도 현실의 정보를 명석하게 분석하면, 그 사람이 자신의 번뇌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의 고통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오히려 이쪽에서는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차분히 관찰하고 분석하는 습관을 들이면, 생각이 머릿속으로 숨어들어 분노를 증폭시키는 일 없이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인정받고 싶다,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라는 만의 번뇌와 '내 이야기를 듣지 않다니, 용서할 수 없다'라는 분노의 번뇌 등에 일일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병이 아주 깊은 사람은 늘 새로운 자극을 찾아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이때 가장 강한 자극으로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걱정, 불안, 분노와 같은 번뇌이다. 이번 번뇌에서 비롯된 생각의 잡음이 마음 속에서 들끓기 시작하면, 뇌는 흥분 상태가 되어 잠들기 어려워진다.
화를 내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자기 마음의 분노를 이겨내라. 긍정의 마음으로 부정의 마음을 이겨내라. 기분 좋게 다른 사람에게 양보함으로써 인색해지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라. 진실을 말함으로써 거짓을 말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라. - <법구경> 223
한 번 분노의 불꽃이 마음에 점화되면, 마음의 습성은 분노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면서 보다 강력한 분노를 만들어낼는 충동이 강해진다. 때문에 나쁜 결과로 스스로를 몰아가게 된다.
로널드 T. 포터, <욱하는 성질 죽이기>
분노 유형 : 돌발성 분노, 잠재적 분노, 생존성 분노, 체념성 분노, 수치심에서 비롯된 분노, 버림받음에서 비롯된 분노
분노의 보편적 원인 : 뇌의 결함, 심리적 트라우마, 알콜/약물 남용, 부모의 잘못된 본보기, 욱하고 화를 폭발시켰을 때 발생하는 대가와 쾌감, 극심한 부끄러움이나 버림받았던 기억 등
분노 때문에 고민이라면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라. 전체 인구의 약 20퍼센트 가량이 끓어오르는 화, 즉 욱하는 성질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통 부분적으로 분노가 폭발하는 경우이긴 하지만 어떠한 경우이든 욱하는 성질은 위험한 것이며 치명적일 수도 있다.
분노가 폭발하지 않게 막을 수 있다. 분노는 예방이 최선이며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열쇠이다. 대부분의 경우 잠시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을 갖거나, 다른 분노 관리 프로그램을 통해 화가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뇌가 이성을 잃고 통제불능 상태가 되지 않도록 약을 복용하는 것도 좋은 예방법이다.
각 분노는 유형에 따라 조금씩 다른 치료법을 요한다. 이 과정을 혼자 해나갈 자신이 없다면 가족, 친구, 전문 카운슬러, 의사 등 주위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좋다. 중요한 것은, 욱하는 성질을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습관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두려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분노로 변합니다. 또한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때 그것은 화로 변합니다. 그 화를 처리하지 않으면 심한 분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표현하기보다는 화를 내는 데 더 익숙합니다.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보다는 화를 내는 것이 더 쉽지만, 그것이 마음속 깊은 곳의 문제르르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사실, 그것은 종종 표면의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들 뿐입니다. 사람들은 화에 대해서는 좋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이 비록 타당한 것일지라도 지나치게 화를 내면 곧 타당성을 잃게 됩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오래된 상처와 분노에 매달립니다. 과거의 불행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분노를 되새김질합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나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용서는 다시 한 번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를 줍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 기회는 용서만이 부릴 수 있는 마술입니다. 타인과 자신을 용서할 때, 우리는 다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되찾게 됩니다 부러진 뼈를 치료하면 부러지기 전보다 더 튼튼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와 삶도 용서를 통해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루치르 샤르마, <애프터 크라이시스>
높은 수준의 불평등은 강력한 성장 기간이 끝나는 단계에서 생기는 금융 위기의 영향을 부풀릴 수 있다. 호황기가 정점에 도달하면 상류층으로 부의 쏠림 현상이 생기면서 부자들은 늘어난 재산 중 일부를 사회적 분노를 유발하는 과시적 소비 형태로 금융 투기에 탕진한다. 그런 뒤 실제로 위기가 닥쳤을 때는 국가 부의 상당 부분을 해외로 빼돌리기도 한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당신은 자기 감정의 근원지를 알고 잇는가? 슬픔, 기쁨, 환희, 분노, 좌절의 감정들을 유발하는 ‘감정의 근원’ 말이다. 이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 자신뿐이다. 이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 자기 자신과 시간을 가지면 자신이 무엇 때문에 슬퍼지고, 무엇 때문에 기뻐지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에는 수많은 전환점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어느 한 집단이나 세계의 어느 한 지역이 차지하고 있던 지도적 역할과 주도권은 다른 집단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근대 국가가 발흥하고 힘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서유럽으로 이동한 시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시기 등은 근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뚜렷한 사례들이었다. 그런 시기에는 언제나 격렬한 동요와 권력투쟁의 시간이 존재한다. 예전의 권위는 약화되고 예전의 지표는 사라진다. 야망과 분노의 격렬한 충돌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등장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이와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구성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 또는 그 이해에 근거하여 사회를 구성하려는 우리의 선의가 퇴보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나는 그것들이 크게 증대해왔다고 감히 말하겠다. 우리의 능력이 감소되었거나 우리의 도덕적 자질이 쇠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 즉 대륙, 민족, 계급 간의 세력균형의 변화가 낳은 충돌과 격변의 이 시대는 그러한 능력과 자질을 점점 더 크게 위축시켜왔고, 그것들이 발휘해야 할 적극적인 성취효과를 제한하고 차단해왔다.
서은국, <행복의 기원>
쾌의 느낌에 우리가 붙이는 명칭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기쁘다, 재미있다, 통쾌하다, 즐겁다, 신난다, 좋다.... 그러나 모두 쾌가 원료인 경험이고, 이들은 행복감의 가장 기초적인 재료가 된다. 이런 쾌의 전구가 켜지며 발생하는 여러 세세한 감정을 묶어 심리학에서는 '긍정적 정서'라고 한다. 반대로 불쾌에 바탕을 둔 여러 감장(분노, 슬픔, 두려움, 외로움 등)을 묶어 '부정적 정서'라고 부른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글쓰기는 지성과 영혼을 건드리는 작업이지만 정치는 국가권력을 다루는 작업이다. 국가권력의 본질은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이다.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폭력이라 할지라도, 폭력으로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거나 마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폭력을 선용함으로써 사람들이 저마다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권력이 걸려 있기 때문에 정치는 글쓰기와 달리 거의 언제나 살벌한 대결과 가시 돋힌 공격, 분노, 경쟁심, 질투, 굴욕과 같은 감정의 격동을 동반한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자유를 추구하고, 사물을 보는 시점을 보다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려고 하는 노력은 많은 이점을 낳는다. 우선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결점을 확대시키거나 악행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사물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데 있어서 그것들은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자유롭게 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분노나 혐오의 감정도 자연히 필요치 않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활기차고 말쑥한 인상으로 비춰지는 것은 실제로 그의 정신과 마음이 이처럼 현명하기 때문이다. - 선악을 넘어서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수행의 목적은 현상계라는 들판으로부터 본질의 차원, 즉 진여의 세계로 내면 깊숙이 내려가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가 관습적인 명칭들 - 부모, 아이, 나, 너, 꽃, 구름, 오다, 가다 - 에 의해 사로잡힌 것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관습적인 명칭들을 초월하는 중도의 차원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분노와 미움은 관습적인 명칭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만약 우리가 주의 깊게 그러면서 유심히 들여다본다면, 우리의 부모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자신 안에서 우리의 부모를 보게 된다. 우리가 그처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주 깊은 차원, 진여의 세계에 닿을 수 있으며, 우리의 괴로움과 슬픔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과거의 습관의 힘에 계속 갇혀 있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만화가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면 당황하거나 창피할 수 있는 상황이나 감정에서 웃음을 끌어낸다. 그들은 환한 대낮에는 차마 살펴볼 수 없는 약한 부분을 짚어낸다. 또 우리가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주 어색한 측면들을 드러낸다. 걱정이 은밀하고 강렬할수록 웃음의 가능성도 커지며, 이때 웃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꼬챙이에 꿰어내는 솜씨에 바치는 찬사가 된다. 따라서 많은 유머가 지위에 대한 불안에 이름을 붙이고, 그럼으로써 억제하려는 시도라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유머를 보고 들으면서 세상에는 나만큼이나 질투심 많고 사회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처럼 돈문제 때문에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처럼 멀쩡한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약간 맛이 간 상태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또 나처럼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마음이 상냥한 만화가들은 지위로 인한 우리의 근심을 보고 우리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놀린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를 비판한다. 그들의 교묘한 솜씨 덕분에 우리는 마음을 열고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 자신에 대한 씁쓸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만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를 비난했다면, 우리는 분노하거나 상처를 입고 움츠러들었을지도 모른다.
손미나,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집 안 대청소를 해서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고 먼지를 떨어내듯 머릿속도 켜켜이 쌓인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해야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쁨으로 채울 수 있다. 우리 몸에 가끔 디톡스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정신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긴장과 스트레스에 시달린 영혼에서 독소를 빼내야 한다. 걱정, 불안, 경쟁심, 분노, 조바심 등을 내보내고 빈 공간을 마련하는 일. 그것이 바로 휴가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물질은 생각이 눈에 보이게 된 상태일 뿐이다. 사람의 모든 성공도 결국 생각에서 시작돼 현상이 되고 물질화된 결과다. 생각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파괴적이거나 건설적이 된다. 공포, 불안과 의심, 걱정과 절망, 슬픔, 분노 같은 생각에서 파괴적인 결과가 나온다. 반대로 세상의 법과 조화를 이루면, 지극히 사랑스럽고 행복한 일, 협조와 평안, 위로, 안심 등의 결과로 나타난다. 파괴적인 생각은 소멸되며 사라지지만 건설적인 생각은 확장하며 보존된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인생의 대부분은 사소한 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 사소한 일도 좀처럼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예컨대 기차를 놓쳐도 화를 내며, 음식을 잘못지어도 골을 내고, 굴뚝에서 연기가 새어 나온다고 해서 성을 내며, 옷을 세탁소에서 빨리 가져오지 않는다고 모든 산업계를 탓한다. 이와 같은 사소한 일로 하여 낭비하는 정력을 올바로 행사한다면, 큰 나라를 세울 수도 멸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고뇌와 분노와 초조감은 해로울지언정 조금도 이롭지 못한 감정이다. ... 나는 앞에서 말한 철저한 체념이 없이 능히 이러한 감정을 극복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이러한 고뇌의 바다에서 해방된 사람에게는, 인생이 전보다 매우 즐겁게 생각될 것이다. 전에는 괜히 화가 잘 치밀던 사람들의 특이한 개성도 이제는 재미있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가오싱 젠, <창작에 대하여>
문학은 분노의 고함소리가 아니며, 개인적인 성토의 수단도 아닙니다. 작가는 다만 한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작품에 녹여내 문학으로 완성시킬 뿐입니다.그런 작품만이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내고 길이 남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사회에 도전합니다. 세월의 흐름을 견디고 살아남은 작품은 그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유력한 답이 됩니다. 이로써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모든 소란은 사라지고, 작품 자체의 목소리만이 남아 독자의 가슴을 울립니다.
분노가 시인을 낳을 수는 있다. 그러나 분노가 예술가를 낳을 수는 없다. 분노의 격정을 언어로 표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분노는 조형예술가가 다루기에 만만한 감정이 아니다. 피카소가 그린 20세기 회화의 걸작 <게르니카>에는 정치적 경향성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담긴, 미의 파괴에 대한 거대한 슬픔은 고대 그리스의 소조작품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전율시킨다. 폭력에 대한 예술가의 항거가 '이에는 이' 식어서는 곤란하다. 분노를 예술로 표출하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감정적 충동을 뛰어넘어, 진심과 전력을 작품에 쏟아부어야 한다. 예술은 항거의 도구가 아니다. 예술을 항거의 도구로 삼느니 직접 거리로 뛰어나가 시위를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 예술을 선전도구로 활용하고 싶은 것은 정치의 욕망이다. 예술의 본질은 심미에 있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우리는 빠른 속도로 일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느린 속도로 일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거나, 느린 속도의 삶은 여유롭고 빠른 속도의 삶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는 이분법에 갇히기 쉽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속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속도로 인해 과도한 긴장감과 적대감 그리고 분노가 유발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한다. 실제로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 오히려 시간 압박이 없으면 삶의 활력이 사라져 심신의 건강에도 좋지 않다. 결국 적절한 시간 압박이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나는 여행을 통해서 '나와 시간의 관계'와 '일과 휴식의 관계'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바라보고, 필요에 따라 시간의 속도를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진정한 휴식의 시간은 삶에 연쇄적인 변화를 가져옴을 느겼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듯이 시간과 관계가 만나 삶을 이룬다. 삶을 이루는 두 개의 중요한 원자 중에 하나가 바로 시간이다. 삶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그러므로 내가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지금 이 시간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시간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시간을 쫓아다니거나 쫓겨 다니는 게 아니다. 시간과 가팅 흘러가는 것이다. 나는 안나푸르나에서처럼 지금 이 사간을 사랑하고 싶다. 그때처럼 시간을 음미하며 다양한 속도를 즐기고 싶다.
동물원의 동물들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동물원의 비생태적 환경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비생태성에 대해서는 별로 분노하지 않는다. 그 해로움이 얼마나 큰지 자각하지 못해서다. 각종 난치병 치료법이 속속 개발되고, 평균 수명은 놀랄 정도로 늘어나고 있는데 왜 우리 사회의 정신 건강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을까? 자살률은 떨어질 줄 모르고, 매일 전쟁이 벌어지는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분노와 불안이 일상적 감정이 되고, 사람들은 갖가지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사는 도시 자체는 거대한 동물원이다. 그것도 아주 열악한 동물원이다. 창살과 사육사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도망가지 않기에 창살이 필요 없을 뿐이며, 사육사가 없어도 될 만큼 모든 것이 시스템화돼 있을 뿐이다.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처럼 처음부터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자유의 본능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도시 동물원'에서 잘 적응하도록 집요한 교육을 받는다. 밖에서 마음껏 뛰놀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실내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뛰지 마!' '떠들지 마!' 등 하루 종일 '~하지 마!'의 강요 속에 살아간다.
'만일 우리가 부름에 대해 떠나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를 생각해 낸다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사회 속에 남아 있는 경우, 그 결과는 부름을 따랐을 때에 생기는 결과와 판이하게 달라진다.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을 요구되는 모험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인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성자들도 우리와 같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들도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살았고, 억압하는 사람과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보았으며, 비난과 모함을 들으면서 살았다. 그래서 괴로워했고 더없이 슬픈 마음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실은 요즘 우리들과 비교해 한 치도 다름이 없다. 성자들은 이기적 욕망과 집착에서 자유로웠다. 분노와 절망보다는 자에와 희망의 등불을 밝혔다. 나와 너, 민족과 계급, 피부와 남녀의 금 긋기를 부정하고 평등과 상생의 세계를 꿈꾸고 가꾸었다. 우리와는 다른 아주 특별한 삶이다.
수행은 곧 내 삶의 참된 변화와 완전한 내적 혁명이다. 수행은 언젠가의 지향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현해야 할 삶 그 자체이다. 거짓에서 진실로, 탐욕에서 비움으로, 분노에서 자애로, 차별에서 평등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사견에서 정견으로, 늘 지금 이 자리에서 개선되고 탈바꿈하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다. ... 그러므로 이런 삶을 이루어 내는 모든 실천, 곧 생각과 움직임이 수행이다. ... 세상을 벗어난 한적한 깊은 산중에서 번거로운 일 싫어하고 그저 고요히 내면을 관조하는 그 자체가 수행의 목적이 될수는 없다. '탐욕과 성냄과 자만과 위선이 떨어져 나간 사람, 거칠거나 속되지 않고 분명하게 진실을 말하고, 말로써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람, 바라는 것 없고 기대도 없고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 아무런 집착도 없고 의혹이 없어 집착과 근심을 초월해 더러움이 없이 맑은 사람, 자비로운 생활을 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라고 <법구경>은 말하고 있다.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분노와 미움, 짜증과 적대감이 없는 순수한 마음이다. 누군가에게 적대감을 느낀다면 상대방의 내면에 대해 생각하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혹은 자신의 정당함은 생각하지 말라. 고요한 내면의 생각을 통해 상대방의 선함을 찾아보라.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가능한 한 공통점을 많이 발견하라. 누군가에게 화내는 일을 그치고 평화와 용서, 사랑을 되찾으려면 자신과 그 사람의 공통된 죄를 기억하라.
인생은 죄, 유혹, 편견에 빠지지 않기 위한 투쟁이다. 사람을 괴롭히는 다섯 가지 큰 죄악이 있다. 과식, 나태, 정욕, 분노 혹은 증오, 그리고 마지막이 오만이다. 우리의 육체가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 안의 성스러운 영혼도 합쳐져 있을 것이다. 육체가 없다면 삶도 없다. 하지만 또 다른 삶은 육체와 분리되어 존재한다. 분노를 이겨내고 자신에게 상처 입힌 사람을 용서하며 친절히 대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이다.
분노는 화내는 사람에게 가장 해롭다. 분노하게 된 일보다는 분노 자체가 더욱 해롭기 때문이다. 누군가로 인해 화가 날 대 우리는 상대의 나쁜 점을 통해 화난 감정을 정당화하려 한다. 반대로 상대의 좋은 점을 찾아보라. 그러면 기쁨과 만족이 커질 것이다. 때로는 상대에 대한 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말이나 행동에서 그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나쁘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너 자신도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다. 깊은 강의 물은 돌을 던져도 흔들리지 않는다. 타인이 무례한 말에 상심하는 사람은 깊은 강이 아닌 진흙탕 웅덩이인 셈이다. 영혼을 깨끗이 하는 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분노나 짜증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영혼이 자유롭지 못한 자는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분노는 한때의 광기이다. 그러므로 이 감정을 억제하지 않으면 다인은 분노에 사로잡힐 것이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여길 수 있는 감정일지라도 연민을 자아내기에는 너무 단순할 수도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살마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ㅜ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이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헬라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개발, 세계화라는 이름하에 강요된 서구의 표준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문화와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에 따른 소외 현상은 적개심과 분노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폭력 사태와 근본주의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하퍼 리, <파수꾼>
"나는 단지 네가 사람의 행동 이면에 있는 동기를 봤으면 하는 것뿐이야. 표면적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무언가의 일부로 보일 수도 있어도 그 사람의 동기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판단하지 마. 속으로는 피가 끓을지언정 분노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온건한 대응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아는 거지. 적을 비난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을 잘 알고 있는 게 더 현명한 거야...."
강신주의 <감정수업>
"분노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분노로 행한 일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더라도, 벗은 여전히 벗이다.' - 징키스칸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분노가 나를 지치게 할 때 (에밀리 디킨스)
먹잇감이 죽으면 분노, 그것을 살찌우는 것은 허기
Anger as soon as fed is dead, it's starving makes it fat.
분노 다스리기 (헬렌 알프레드손)
나는 분노를 저장해두곤 했는데, 이것이 내 경기에 방해가 되었다. 나는 이제 이것을 쏟아낸다. 이제는 함께 경기하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는다. 경기에만 온통 집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게임이 끝난다.
다릴 앙카,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두려움은 신뢰의 부족이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우리는 항상 많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타인의 분노라든가 폭력에 의해 자신이 피해자기 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한 두려움이 없으면 더 많은 사랑을 체험할 수 있고 더 나은 인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는 것이다.
세상이 보여 주는 최상의 것을 배우는 일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불행이 아니다. 불행한 것은 이를 수 없는 별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삶이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왜 오늘보다 내일 더 행복하고 강해질 거라고 생각합니까?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게임을 아무리 훌륭히 치러 냈더라도 자신을 잊어버린다면 결국 힘을 잃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게임은 우리를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 상태에 머물게 합니다.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더라도 기분은 나빠집니다. 여전히 불행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더 갖는다면!' 하고, 이 단순한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내일이 없으므로 더 이상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게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늘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여유로움은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터 나옵니다. 진정한 힘과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이 그리는 미술 작품 속에 있습니다. 자신이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하는 일,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감사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갖고 나온 것에 감사하는 일. 자신의 독특함에 감사하는 일....
우리는 자신의 길에 집중해야 합니다. 돈이나 물질적인 부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본질적인 것들로 우리를 데려가는 길에.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대신 "이만하면 충분해." 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이걸로 충분할까?" 하는 생각을 중단해야 합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그것으로 충분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충분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날들이 '충분할' 때, 그 기분은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은 이대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런 기분이 드는 걸 막습니다.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에 충분하다는 느낌이 낯설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게 바로 삶이고, 난 더 이상 필요 없어." 하고 말할 수 있다면 큰 힘과 행운을 손에 넣은 것입니다.
시간의 가치가 개인적인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곧 자유입니다.
지혜와 명상은 우리에게 젊음이 중요하긴 하지만 언제나 매력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런 지혜에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청춘은 순수의 시기인 동시에 무지의 시기입니다. 아름다운 시기이면서 동시에 고통스러운 자의식의 시기입니다. 모험의 시기이면서, 또 그만큼 어리석음의 시기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젊은 시절의 꿈은 늙은 시절의 후회가 됩니다. 삶이 끝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 꿈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멋지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하루를, 그리고 하나의 계절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산다면, 우리는 그날들을 다시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후회를 가져다주는 것은 살지 않은 삶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보내버리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삶에 얼마나 멋진 경험들을 안겨주는지 모릅니다. 애인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내일 아침 수업 따위는 잊고 대화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수업 준비를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애인과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강의도 더 잘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느샌가 미래에 의존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미래만 바라보며 살고, 또 어떤 이는 미래를 꿈꾸며, 또 다른 이는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이 모든 접근은 현재를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이 순간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도전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지금 이 순간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것... 미래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때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이 신성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별의 순례자이며, 단 한 번의 즐거운 놀이를 위해 이곳에 왔다. 우리의 눈이 찬란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세계를 반영할 수 있는가?
그 어떤 것이라도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무화과 하나를 원한다고 나에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고. 먼저 꽃을 피우도록 기다리라고. 열매는 맺고, 그것이 마침내 익을 때까지 시간을 주라고.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싸움에서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귀 기울여 들으면서 다른 이들의 관점을 잠시나마 긍정적으로 수긍한 후에 그것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결정해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상실은 무엇이 소중한지 보여 주며, 사랑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가르쳐 준다. 관계는 자신을 일깨워 주고 성장의 기회를 가져다준다. 두려움, 분노, 죄의식, 인내심, 시간조차도 훌륭한 교사이다. 삶의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우리는 성장하고 있다. 이 생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영혼이 성장할수록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조차도 점점 작아집니다. 미켈란젤로가 말했습니다. '삶이 즐겁다면 죽음도 그래야 한다. 그것은 같은 주인의 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삶, 행복, 사랑, 그 이상의 것들을 가져다주는 손은 죽음을 끔찍한 경험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끝은 단지 거꾸로 된 시작일 뿐입니다. 삶은 그 특별한 매력을 나타내기 위해 굴곡이 있는 것이다.
이번 생과 같은 생을 또 얻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처럼, 이런 방식으로 이런 환경에서, 이런 부모, 아이들, 가족과 또다시 세상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결코 다시 이런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는 이번 생처럼 경이로움을 지닌 대지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들을 보러 가십시오.
사람들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현상과 결과, 성공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삶에서 어떤 것은 관계, 과정, 부분, 실패에서 소중함과 지혜를 얻기도 합니다.
[본문발췌]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추운 겨울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수水]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습니다(上善若水).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善利萬物). 둘째,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자신을 두기 때문입니다(處衆人之所惡). 셋째,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돌아갑니다. 분지를 만나면 그 빈 곳을 가득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마음을 비우고(心善淵) 때가 무르익어야 움직입니다(動善時). 결코 무리하게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없습니다.
[당무유용(當無有用 )]진흙을 반죽해서 그룻을 만들지만 그릇은 그 속이 비어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깁니다.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입니다. 찻잔 한 개를 고를 때에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모양, 색깔, 무늬에 한정되어 있을 뿐 그 비어있음에 생각이 미치는 경우는 드뭅니다.
[저마다 진실] 섬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사람과 산골사람이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지구의 자전을 아는 사람은 이를 어리석다고 하지만 바다와 산에서 뜨지 않는해는 없습니다. 있다면 그곳은 머릿속일 뿐입니다. 바다와 산이라는 현장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현장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이 곧 저마다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이며 순수한 의미의 관찰, 즉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가치중립적 관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기는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창백한 관념성을 체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백천학해 百川學海] 모든 시내가 바다를 배운다는 것은 모든 시내가 바다를 향하여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지남철]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끝을 떨고있다. 여윈 바늘끝이 떨고 있는한 우리는 그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한 전율을 멈추고 어느한 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릇] 성공은 그릇이 가득 차는 것이고, 실패는 그릇을 쏟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성공은 가득히 넘치는 물을 즐기는 도취임에 반하여 실패는 빈 그릇 그 자체에 대한 냉정한 성찰입니다. 저는 비록 그릇을 깨트린 축에 속합니다만, 성공에 의해서는 대개 그 지위가 커지고, 실패에 의해서는 자주 그 사람이 커진다는 역설을 믿고 싶습니다.
[창과 문] 창문보다는 문이 더 좋습니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현장으로 열리는 실천의 시작입니다. 창문이 먼곳을 바라보는 명상의 양지라면 문은 결연히 문 열고 온몸이 나아가는 진보 그 자체입니다.
[함께 여는 새날] 네 손은 내가 잡고 내 손은 네가 잡고 함께 가자 우리 새날을 향하여. 사랑은 먼길을 함께하는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양말 향수] ... 기쁨과 아픔의 근원은 관계입니다. 가장 뜨거운 기쁨도 가장 통절한 아픔도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한솥밥] 대문을 열어 놓고 두레상에 둘러앉아 한솥밥을 나누는 정경은 지금은 사라진 옛 그림입니다. 솥도 없고, 아궁이도 없습니다. 더구나 두레상이 없습니다. '한솥밥'은 되찾아야 할 삶의 근본입니다. 평화(平和)는 밥을 고르게 나누어 먹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쌀(禾)을 고루 나누어(平) 먹는(口) 것이 '平和'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충무공] ... 진정한 천재와 위인(偉人)은 사람들의 한복판에 서 있어야 합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의 역량을 이끌어 내는 사람이며, 가장 현명한 사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문사철 작은 그릇] .... 컵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이 바닷물이긴 하지만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망치] 공부는 망치로 합니다. 갇혀 있는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만남]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열정이란 말에는 한 철 태양이 머물다 지나간 들판의 냄새가 있고, 이른 새벽 푸석푸석한 이마를 쓸어올리며 무언가를 끼적이는 청년의 눈빛이 스며 있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타고 떠날 수 있는 보너스 항공권 한 장에 들어 있는 울렁거림이 있다. 열정은 그런 것이다. 그걸 모르면 숨이 막힐 것 같은 어둠에 놓여 있는 상태가 되고, 그걸 갖지 아니하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낯선 도시에 떨어진 그 암담함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 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청춘을 가만 두라. 흘러가는 대로. 혹은 그냥 닥치는 그대로. 청춘에 있어서만큼 사용법이란 없다. 파도처럼 닥치면 온 몸으로 받을 것이며 비갠 뒤의 푸른 하늘처럼 눈이 시리면 그냥 거기다 온 몸을 푹 담그면 그만이다. 주저하면 청춘이 아니다. 생각의 벽 안쪽에 갇혀 지내는 것도 청춘이 아니다. 괜히 자기 자신을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남을 탓하는 것도 청춘의 임무가 아니다. 청춘은 운동장이다. 눈길 줄 데가 많은 번화가이며 마음 들떠 어쩔 줄 모르는 소풍날이다. 가끔, 나의 청춘을 돌아볼 때마다 여전히 가슴 두근거리는 이유는 아무거나 낙서를 해도 괜찮은 도화지, 그것도 끝도 없이 펼쳐진 거대한 도화지가 떠올려져서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질러야 할지를 모르는 하얀 도화지 앞에서의 두근거림이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감정이며 동시에 인생에 있어 몇 번 안 되는 기회일 테니 말이다.
"잘못하면 스텝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추면 되요.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지요." - 영화, <여인의 향기>
역사가 길지 않은 믿음은 가볍다. 그 관계엔 부딪침만 있고 따분함만 있을 뿐이며 혼자인 채로 열등할 뿐이며 가벼울뿐더러 균형마저 잃는다. 심연은 깊은 못이나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그 한가운데 존재한다. 사람을 믿지 않으면 끝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끝이고 더 이상 아름다워질 것도 이 땅위에는 없다.
상상력은 한 뼘의 사고를 한 품의 사고로 확장시키며 사람을 단단하게 한다. 상상력만으로 아픈 사람 앞에 바다를 데려다 보여 줄 수도 있으며, 힘겨운 하루하루의 창 밖에 소나무 한 그루씩을 심을 수 있다.
사방이 십오 킬로미터가 되는 널따란 돌이 있어. 그 돌을 백 년마다 한 번씩 빗자루로 쓸지. 그렇게 해서 그 돌이 다 닳아 없어지면 그게 '겁'인 거야. 근데 이 생에서 옷깃이 한 번 스치는 것도 전생에 오백 '겁'의 인연이었던 사람들이나 스칠 수 있는 거거든...
신영복 선생의 글중에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백성의 삶과 동 떨어진 정치, 지식, 사상은 죽은 것이다. 실천의 사상을 펼치는 실학자로서 이덕무 선생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본문발췌]
보고 느낀 그대로 진경을 표현하고 묘사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글을 짓는 문장가나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을 읽을 때 그림이 그려지면, 그 글은 진실로 좋은 글이다. 글이란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아침노을은 진사(辰砂)처럼 붉고, 저녁노을은 석류꽃처럼 붉다. - <이목구심서2>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주 만물의 가치는 모두 균등하다. 단지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할 뿐이다.
일반화의 오류란 부분을 갖고 전체인 양 착각하는 잘못을 말한다. 사물의 일부나 단면을 두고서 모든 것이 그렇다고 지레 짐작하기 때문이다.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의 눈과 마음을 갖추고 세상 만물과 우주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을 조롱하거나 세상에 분개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만약 진정 세상을 바꾸려고 고심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반도가 되어야 한다.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 바로 <이목구심서>의 철학이다.
서민들이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것은 관대하지 못한 일이다. 무릇 '안(安)'의 참된 뜻은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다. - <이목구심서 3>, 안빈낙도(安貧樂道)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고 도리를 추구하는 삶을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것도 힘겨운 사람에게 안빈낙도하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것은 어질지 못한 짓이다. 자신의 기준에 모든 사람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아집이자 독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관용의 정신이다. 그것은 나와 다른 남의 사정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진정한 '안'이란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스스로 편안하지 않다면 '안'이 아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남이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안'이다. 스스로 편안하면 그뿐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안'의 참된 의미다.
지식만 많은 사람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이 낫다. 지혜는 지식을 통해 얻을 수도 있지만, 지식을 통하지 않고서도 얻을 수 있다. 지식의 덕목은 재능, 능력, 학식, 성공, 출세 같은 것들이다. 지혜의 덕목은 인내, 신중, 절제, 자기만족, 신의와 연대 등이다. 참된 지식은 지혜 없이 얻기 힘들지만, 참된 지혜는 지식 없이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지식으로 가득 찬 삶보다 지혜로 가득 찬 삶이 더 풍요롭다고 하겠다.
호기심과 상상력의 힘을 긍정해야 한다. 그 능력에 따라 인간의 미덕과 악덕, 행복과 불행, 환희와 고통, 현재와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의 자유 의지에는 반드시 호기심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호기심과 상상력이 없다면 어떻게 새로운 세계, 자유로운 세상을 그려 볼 수 있겠는가? 새로운 발견과 발명, 그리고 창조의 진정한 에너지가 바로 어린아이의 호기심과 상상력 속에 존재한다.
명상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들여다보라. 그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변하는지 살펴보라. 그러다 보면 마음을 괴롭히는 번뇌와 근심이 대개 특별한 이유가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번뇌와 근심의 원인과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조차도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마음을 관찰하는 지점 곧 관점의 변화와 전환에 따라 번뇌와 근심의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강자에게는 강하게, 약자에게는 약하게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구걸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하나는 돈과 권력을 구걸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알아 달라고 구걸하는 마음이다. 돈과 권력을 구걸하면 권세와 이익을 건네주는 자에게 잘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비굴해진다. 나를 알아 달라고 구걸하면 명예와 출세를 건네주는 자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마치 독버섯처럼 자라난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과시욕이다. 과시욕은 약자에게 강자로 군림하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즐기지 말라. 그저 스스로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하면 그뿐 아니겠는가. 그러면 원망하고 비방하는 마음은 애쓰지 않더라도 저절로 사라진다.
옛사람이 남긴 말 중 윤휴의 "천하의 진리란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 거기에만 머무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진리로부터 멀어진다. 진리란 결코 절대적이지도 고정불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어떤 경우에는 옳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르고, 어떤 때에는 맞지만 어떤 때에는 틀리게 되는 것이 진리라는 놈이다. 따라서 어떤 것도 단정짓지 않고,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식견을 가져야 비로소 진리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견해만이 천하의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공정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편견을 가진 사람과는 다툴 필요도 없다는 이덕무의 말은 공자가 말한 중용의 철학, 붓다가 말한 중도의 길, 박지원이 말한 중간의 이치와 맥락이 같다.
최근 날마다 일과로 책을 읽으면서 네 가지 유익함을 깨달았다. 학문과 식견이 넓고 정밀하고 자세해 옛일에 통달하거나 뜻과 재주에 도움이 되는 점은 상관하지 않는다. 첫째, 굶주릴 때 소리 높여 독서하면 그 소리가 곱절이나 낭랑하고 부드러워 이치와 취지의 맛을 느끼게 되어 배고픔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둘째, 약간 추울 때 독서하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서 두루퍼져 나가 몸 안이 훈훈해져 추위를 잊어버리게 된다. 셋째,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눈은 글자에 두고 마음은 이치에 몰입해 독서하면 천 가지 생각과 만 가지 잡념이 일시에 사라지게 된다. 넷째, 기침병을 앓고 있을 때 독서하면 기운이 통하고 부딪치지 않게 되어 기침 소리가 갑자기 그치게 된다. - <이목구심서 3>, 독서의 네 가지 이로움을 알았다. 그러나 어떻게 독서해야 할지는 잘 모를 때 참고할 만한 글이 있다. 류성룡은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篤行)의 다섯 가지 독서 방법을 말하면서, 모두 '생각하는 것'을 중심으로 독서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정약용은 이 다섯 가지 독서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다. 첫째 박학은 "두루 넓게 배운다"는 말이다. 둘째 심문은 "자세히 묻는다"는 말이다. 셋째 신사는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넷째 명변은 "명백하게 분별한다"는 말이다. 다섯째 독행은 "진실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실천한다"는 말이다. 출처는 <다산시문집>의 <오학론>이다.
신선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 사람들이 붐비는 저잣거리 한복판에 있더라도 잠시라도 그 마음에 걸리거나 얽매이는 것이 없다면, 바로 그 순간 신선이 된다. 산속 깊숙이 몸을 숨기고 세상을 멀리 등진 채 사는 사람이 신선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비록 그윽한 산속에 거처하면서 세상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에 걸리거나 얽매이는 것이 있다면 범인(凡人)에 불과하다. 세상에 나도는 온갖 종류의 종교 서적 가운데 볼 만한 글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유독 불교의 원시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이런 말만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좋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만약 이러한 순간이 짧든 길든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다면, 그때만큼은 신선이 아니라 부처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때는 하루에 이백 자 원고지 백 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 글을 쓸 수 있다가도, 어떤 때는 하루가 아니라 일 년이 다 지나가도록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마음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을 때는 애써 쓰려고 하지 않아도 술술 글이 나오지만, 마음속 한 귀퉁이일망정 걸리거나 얽어매는 것이 있으면 단 한 글자도 쓰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을 만나 어떻게 글을 쓰는지에 대해 말할 때면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는 한다. "숙제하듯이 쓰는 글이 가장 나쁘다. 숙제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까 무서워 마지못해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대개 참고서 모범답안 따위를 그대로 옮겨 적는 경우가 다반사다. 내가 한 것이지만 사실상 내가 한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숙제다. 또한 목적이 따로 있거나 남을 위해 쓰는 글이 가장 좋지 않다. 십중팔구 자신이 정말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형태의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글은 진실로 '내가 쓴 글'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쓰고 싶다는 마음 외에 아무런 다른 목적도 이유도 없이 써야 비로소 좋은 글을 얻을 수 있다."
시간을 럭셔리하게 쓰는 자,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나에게도 여행은 시간을 버리거나 투자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여행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게 있어 여행은 시간을 벌어오는 일이었다. 낯선 곳으로의 도착은 우리를 100년 전으로, 100년 후로 안내한다. 그러니까 나의 사치는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감히 시간을 사겠다는 모험인 것이다. 일상에서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게 시간이지만 여행을 떠나서의 시간은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준다. 사실 여행을 떠나 있을 때 우리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 쪽이질 않은가.
내가 하지 않았던 일들의 길고 긴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뭔가를 저지르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향해 돌아설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을 걸어올 것이다.
열정을 다해서 끝까지 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연습을 하면서, 전속력을 다해 하고 싶은 것 가까이 갔다가 아무 결과를 껴안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연습을 하면서 우리도 살고 있지 않은가. 오늘 하루도 내일 하루도 아니 어쩌면 우린 영원히 그 연습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모른다.
사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기에 사랑은 얼마나 보이지 않으며 얼마나 만질 수 없으며 또 얼마나 지나치는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지나치는 한 사랑은 없다. 당장 오지 않은 것은 영원히 오지 않는 이치다. 당장 없는 것은 영원히 없을 수도 있으므로.
그렇더라도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믿으려는 것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걸 못 견뎌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했다, 고 믿는 건 익숙함조차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는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이며 결국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그렇다고 사랑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사랑은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 사랑할 때의 행복을 밖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사람을 키운다. 애써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넘치는 상태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사랑은 삶도 전부도 아니다. 사랑은 여행이다. 사랑은 여행일 때만 삶에서 유효하다.
나이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로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 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나의 퇴락은 어쩔 수 없겠으나 세상에 대한 갈증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보는 것에 대한 허기와, 느끼는 것에 대한 가난으로 늘 내 자신을 볶아칠 것만 같습니다. 이 오만을 허락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