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다' = '어떤 기준에 비추어 보아 어긋남이 없다.'

우리는 옮음을 추구하지만 세상의 기준은 하나가 아니고 때와 상황에따라 변하기도 하기에, 세상 모든일이 옳고 그름으로 나뉘지는 않는다. 옮음을 추구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반대편이나 다른 시각에서의 관찰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시비(是非) 1.명사 옳음과 그름. 2. 명사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말다툼.

 

[유의어] 공과 시시비비 왈가왈부

 

(네이버 영어사전) 1.right and[or] wrong   2.dispute,quarrel,argument

 

 

[글과 책 속에 쓰인 '시비'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옳다는 강한 확신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을 굳이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아도 되고, 싸울 필요도 없다. 아니, 상대와 싸울 생각조차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에 스스로도 '자신감'이 없고 진심으로 납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상대를 납득시킴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한다. 즉 타인의 납득하는 표정을 보고, 찬성하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뇌에 주변 사람들이 찬성했다는 정보를 입력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논쟁 혹은 말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기 위해 자극적인 말이나 논리적으로 보일 법한 말을 사용하거나, 큰소리로 말하거나, 손동작을 크게 하는 등 상대를 납득시키려 노력하고, 이런 행동으로 인해 상대를 불쾌하게 만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단정 짓고 비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은 '옳다'라는 인상을 형성하려 한다. '당신은 틀렸다. 하지만 나는 옳다'는 독불장군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오만과 자만에 빠져 허덕이게 될 것이다. 머릿속으로 '나는 옳다. 그러므로 완벽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뇌 안에서는 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왕은커녕 비천한 난민일 뿐이다.

 

 

법륜 스님, <인생수업>

세상 사람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내 관점을, 상대는 상대의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가치관을 갖고 있지만 저 사람은 저런 가치관을 갖고 있고, 나는 이렇게 느끼지만 저 사람은 저렇게 느끼고, 나는 이런 스타일로 일 하지만 저 사람은 저런 스타일로 일합니다. 이건 다만 다를 뿐이에요. 직장에서 다양한 사람이 모여 일할 때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그냥 '저 사람은 저렇구나.'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겁니다.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발견>

논리적인 인간은 항상 자기를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적인 맛이 없다. 그러므로 잘못이다. 그러나 정리를 깨닫고 있는 인간은 어쩌면 자기가 잘못일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하는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옳은 것이다.

 

 

이희인, <여행자의 독서>

"단단하고 높은 벽이 있어 그곳에 하나의 달걀이 부딪쳐 깨질 때, 아무리 그 벽이 옳다고 해도 아무리 달걀이 잘못했다고 해도 나는 달걀 편에 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개개인은 하나의 달걀과 같으며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깨지기 쉬운 껍질에 쌓여 있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싸우는 것은 높은 벽이며 그 벽은 곧 제도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 중에서

 

 

임병희, <목수의 인문학>

발끝으로 서는 자는 오래 설 수 없고, 황새처럼 가랑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나타내는 자는 나타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칭찬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 도덕경 24장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내가 달하고자 하는 것, 내 기준을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직각자가 진리라고 여기는 데 있다. 마치 내가 내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규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직각은 어디에서나 통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직각이 자신만의 것인지 물어야 하겠다. 직각이란 인류의 보편적 기준에 맞는 올바름이어야 한다. 타인을 인정하는 것도 직각이다. 나를 반성하는 것도 직각이다. 그래서 직각이란 삶의 자세이지 순간의 담론이 아니다.

 

우린 지금 제각각의 직각자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들이대는 직각자, 타인에게 들이대는 직각자, 직장과 사회와 제도, 그리고 국가에 들이대는 직각자가 다르다. 내 이익에 부합할 때는 소리를 높이지만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자를 들이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부끄러움인 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직각만이 옳다 믿으며 자신의 잣대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재단하려 한다. 나는 직각을 맞추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아무리 직각으로 맞춘다 하지만 조금씩 각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선을 긋고 그 선을 맞추어 나무를 연결해도 조금씩 달라질 때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직각을 맞추려는 노력이다.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아내와 남편이 숲으로 산책을 가 "꽥, 꽥!" 우는 소리를 듣고 닭이다, 거위다 싸운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조화이며, 기분 좋은 여름날 저녁 함께 산책을 즐기는 일이다. 얼마나 많은 결혼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 때문에 금이 가는가? '닭이냐, 거위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혼이 발생하는가?

이 이야기를 이해한다면 무엇이 최우선인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결혼 생활은 닭이냐 거위냐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게다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고 장담하는가. 그러고는 나중에 가서야 자신이 완전히 틀렸음을 발견한다. 누가 아는가? 그것이 유전자를 조작해 거위 울음소리를 내도록 변형시킨 닭일지!

 

 

J. K.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인간은 자기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지키거나, 갖고 싶은 것을 정당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로 인해 그러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사상을 옳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사상이 기득권을 초월하지만, 그 반대로 사상이 기득권의 소산인 경우도 대단히 많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갈등의 10퍼센트는 의견 차이에서 오며, 나머지 90퍼센트는 적절치 못한 목소리와 억양에서 온다는 심리학의 통계가 있다. 목소리의 크기가 옳음의 척도는 아니다. 소리를 지르는 관계는 가슴이 멀어진 관계이다. 그래서 자기 말이 들리게 하려고 더 크게 소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슴은 더욱 멀어진다. 소리친 다음의 침묵은 가슴이 죽어버렸음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죽는 날까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삶이다. 따라서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확신을 가져아 한다. 그 길에 기쁨과 설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자신의 다름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길'의 어원이 '길들이다'임을 기억하고 스스로 길을 들여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야만 한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내가 옳다고 느끼는 길을 정답으로 만들어 가는 것 이 나의 인생이다. 다수가 선택하는 길을 벗어난다고 해서 낙오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이라는 기준이 오류를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정우, <개념: 뿌리들>

도덕과 윤리의 차이는 칸트와 스피노자 사이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서구 문화에서 도덕이란 '옳음'과 '그름'의 문제이며 어떤 초월적 가치에 따라 행해야 할 '의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적 가치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리스 문화에서 기독교 문화로 넘어감은 곧 윤리에서 도덕으로 넘어감을 함축합니다.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좋음과 나쁨이 아니라 옳음과 그름입니다. 현세적 행복보다 신에 대한 의무가 중요시됩니다. 좋아도 그릇된 것이 있고, 나빠도 옳은 것이 있는 것이죠. 좋음과 나쁨만을 기준으로 행위하는 것은 현실적인 생각이고, 옳음과 그름을 기준으로 행위하는 것은 초월적인 가치의 기준을 전제하는 생각입니다. 미셸 푸코가 말년에 몰두했던 문제들 중 하나가 이것이죠. 즉 그리스에서 로마, 기독교,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과정을 밟으면서 도덕과 윤리의 문제를 파헤치는 것입니다.

 

철학적 언어 사용에 있어, 옳음의 짝은 그름이고 좋음의 짝은 나쁨이다. 선과 악은 이렇게 양의적으로 이해됩니다만, 두 경우는 매우 다른 내용을 뜻합니다. 옳음/그름은 초월적 가치 기준과 의무 개념을 함축하지만, 좋음/나쁨은 내재적 가치 기준과 행복/기쁨의 개념을 함축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은 그리스 문화에서는 좋음과 나쁨의 문제였으나 그것이 기독교를 거치면서 옳음과 그름의 문제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문화에서 선과 악이 옳음과 그름의 문제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죠. 즉 윤리의 문제에서 도덕의 문제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전통은 서구 근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지속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의 아름다움 됨을 알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 아름답지 못한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음의 좋음 됨을 알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 좋지 못한 것이다. (도덕경 2장)... 그런데 핵심적인 것은 즐거움과 성남이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옳음과 그름이 한 곳에서 나온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전혁적인 '불이'不二의 사고입니다. 일반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양자가 심층적으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죠. ... 그런데 이런 '불이'의 사유는 몇 가지 의미를 함축합니다. 우선, 둘을 부정하는 이 사유 자체가 대립자들을 놓고서 이루어진 사고라는 점이죠. 그러나 대립자들 사이 또는 그 바깥은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현대 사상의 핵심들 중 하나가 바로 대립자들의 사유에서 대립자들 사이와 바깥의 사유로 이행한 점에 있습니다). 둘째, '불이'의 사유는 현실적으로 대립하는 선과 악을 초탈하는 사유라는 점입니다. 헤겔의 변증법도 마찬가지죠. 다만 '불이'의 사유는 대립자들의 아래로 내려가 그 공통의 뿌리를 보는 사유라면, 헤겔의 사유는 위로 올라가 그것들을 통합하는 사유입니다. 두 경우 모두 현실적인 대립을 넘어서려는 사유죠. 하나Einheit를 지향하는 사유입니다. 셋째, 현실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두 길을 소요의 길과 투쟁의 길이라 할 때, '불이'의 사유는 소요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요의 길은 현실적인 문제를 정신적 차원에서 초탈할 수는 있지만 객관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도가사상과 불가사상의 한계가 이 점에 있다 하겠습니다. 근원적 하나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적 다자성의 의미를 극소화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적 여럿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갈등을 승인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한 걸음 더 나아가 헤겔적 뉘앙스를 도입한다면, 현실적 여럿을 하나로 통합하는 국가철학적 또는 제국주의적 논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노자의 소요는 현실적인 선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 가는 것이 되고, 관점에 따라서는 제국적 논리를 통해 해소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필처럼 '불이'의 논리로서가 아니라 상보적 대립자들의 논리로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선과 악이 근본적으로 하나란느 뜻이 아니라 둘, 더구나 서로 대립적인 둘로 보이지만 사실상은 서로가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상보성을 갖춘 대립자들이라는 뜻이죠.

 

니체는 옳음/그름으로서의 선악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니체는 옳음/그름으로서으 선악을 좋음과 나쁨으로서의 선악으로 바꾸고자 했고,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를 잇고 있습니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플라톤-기독교적 가치와 근대 부즈주아 문화를 비판하고자 했죠. 니체는 선악의 개념이 왜 발생했는가를 '계보학'을 통해 밝히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은 역사의 과정에서 특정 시점에 생겨난 것들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를 추적해서 그런 가치들이 왜 생겨났는가를 밝혀야 하겠죠. 그런 작업이 계보학입니다. 

 

"영혼(마음, 정신, 의식)을 가진" 존재들이 가지게 되는 것이 'subjectivity', 즉 '주체성'이죠. 인식론적으로 말하면 '주관성'입니다. 일상어에서 개인적이다, 자기 멋대로 생각한다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뉘앙스죠. 그리고 주체성의 고도의 단계가 자기의식의 단계, 즉 '나'라는 것을 의식하는 단계입니다. 이에 비해서 'objectivity'는 주체성과 대립하는 의미에서의 객체성, 또는 인식론적으로는 객관성을 말합니다. 이때 객관성이라는 말은 반드시 옳다, 맞다는 뜻이 아니라 인식 주체가 아닌 "인식 대상의 측면에서"라는 뜻입니다.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타인의 행동을 시비선악을 떠나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아주 좋은 공부가 된다. 물론 그 모든 것은 거울처럼 반사되어 나에게로 온다. 나의 행동, 나의 인생을 보는 시선도 전혀 달라지게 된다.

음양오행론뿐 아니라 동양의 사유는 이렇듯 철저히 관계의 사유다. 정화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불교에서 '안다'는 건 이웃과 더불어 교류한다는 뜻이다. 세포 하나의 의미와 역할은 이웃한 세포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웃들과 분리되어 있을 땐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동일성을 증식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암세포다. 암세포란 쉽게 말하면 이웃과 단절된 세포의 표현형식인 셈이다.

 

 

유시민, <표현의 기술>

<맹자>의 '유자입정(孺子入井)'. 측은지심, 즉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본능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리고 약한 것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인간은 측은지심 말고도 여러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오지심,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른 것을 알면 부끄러워합니다. 사양지심, 좋은 일의 공을 남에게 돌리고 몸을 낮추려 합니다. 시비지심, 옳고 그름을 가려 옳은 일을 합니다. 맹자는 이런 마음을 4단이라고 하면서, 인의예지라는 문명의 규범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고 주장했습니다. 문명의 규범이 도덕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이 원래 지니고 있는 도덕적 본능이 문명의 규범으로 드러난다는 것이죠.

 

무언가를 주장하고 싶다면 반드시 근거와 논리를 제시해야 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주장만 하면 논쟁을 중단하는 게 현명합니다. 논쟁의 주제와 관계없는 것을 끌어들이지도 마십시오. ... 상대방이 토론하다 말고 화를 내면 한발 물러서는 게 좋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흔들린다는 증거입니다. 그럴 때 굴복을 강요하면 안 돼요. 그 정도에서 멈추고, 나도 더 생각해 볼테니 다음에 다시 대화하자고 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 논리적으로 완전히 격파했다고 확신하는데도 상대가 인정하지 않고 계속 우길 때도 화를 내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확신한다고 해서 그게 옳다는 보장은 없고, 단 한 번의 논쟁으로 옳고 그름 또는 승패가 가려지는 문제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정찬주, <길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시비를 초월하기. '시비를 초월하라'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고승들의 법문에 많이 등장하는 법어이다. 나는 이 말을 '시비에 집착하지 말라'라고 이해하고 있다. 시비를 가리겠다고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옳고 그르건 간에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초월은 시와 비를 떠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와 비를 공시적 관점에서 통찰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통찰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찰이 단속적이지 않고 계속 지속되는 상황을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나 싶다.

 

 

이덕무, <문장의 온도>

이제 우열과 존귀와 시비의 이분법은 전복되고 해체된다.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주 만물의 가치는 모두 균등하다. 단지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할 뿐이다.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개개인에게는 모두 각자의 생각이 있습니다. / 각각의 사견을 내 생각과 똑같이 맞추기 위해 /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 시비는 사실, 남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똑같아야 한다고 했을 때 / 생기는 것입니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관찰은 판단에 앞서고 판단보다 위대합니다. 판단에는 기준이 미리 존재하고 그 기준으로 삶을 재단하죠. 타인을 지옥으로 간주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나약함은 과소평가합니다. 악은 인간의 나약함과 굴종, 묵인을 통해 제 길을 열어갑니다. 나약과 굴종, 묵인이 걷는 길은 악이 걷는 길과 거의 일치합니다. 우리가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악이 자행하는 횡포는 물론 악의 진행방향과 인간 삶이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보다 근본적으로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관찰하는 존재는 깊고 넓고 관대한 내면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속에서 길어 올리는 새로운 이해와 슬픔과 번민은 일체의 시비판단과 은원을 넘어섭니다. 희극을 쓰든 비극을 쓰든 작가는 객석에 앉아 관객을 바라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다르는 정화와 탈피의 효과는 역사의 역할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작가는 철저히 인간 내면의 증언자여야 합니다. 진실을 관조할 때는 무엇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관조를 통한 진실추구야말로 작가 고유의 일이며 지고무상의 윤리입니다. 삶의 진실은 분명 우리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진실을 바라볼 때 그 붓끝에서 빚어지는 문학은 구원을 받습니다. 비록 작가 자신은 구원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작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합니다 냉정한 관찰로 감정이 발설을 제어하고, 시비, 선악, 도덕의 판단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작가는 다만 냉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면 됩니다. 세상은 본래 이러하다는 것, 그 누구의 의도로도 개조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보아야만 합니다. 작가는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외부세계를 관찰하는 동시에 자기 내면을 관조해야 합니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사람은 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까닭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깜짝 놀라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이는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한 것도 아니요, 마을 사람과 친구들한테서 널리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며, 또한 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싫어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겸손히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옮고 그름을 가리려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이 인仁의 시작이며 수오지심이 의義의 시작이며 사양지심이 예禮의 시작이며 시비지심이 지智의 시작이다. 《공손추 상》

 

신문사와 대기업이 지상파와 종합편성 채널 편성권을 장악하고, 대기업이 광고주의 위력으로 다른 미디어까지 간접적으로 조종하면 종국적으로 인터넷 포털까지 남김없이 그들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정보를 자기네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가공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형식으로 국민에게 제공할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 진실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우리들은 남의 머리가 생각한 것을 내 머리로 생각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역사가의 작업이 그가 속한 사회를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는가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흘러가는 것이 사건만은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흐름 속에 있다. 역사책을 볼 때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언제 집필되었고 언제 출판되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때로는 이런 것이 더 많은 비밀을 드러낸다. 만일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고 한 철학자의 말이 옳다면, 한 역사가가 같은 책을 두 번 쓸 수 없다는 말 역시, 같은 이유로 진실일 것이다.  - <역사란 무엇인가>

 

 

윤태호, <미생>

들어주는 귀... 바둑을 수담이라고도 한다. 내가 놓는 한 수 한 수는 곧 내뜻이고 말이 된다. 한 판의 바둑엔 수많은 대화가 있고, 갈등이 있다. 시비가 생기고, 화해와 양보가 있다. 이기기 위해 목청을 높이는 수도 있고, 엄살을 부리는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 승리하기 위해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말만 해서는 바둑을 이길 수 없다.

 

 

로버트 해그스트롬,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실용주의는 진술의 진실과 행위의 옳음이 실질적인 결과에 따라 정의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어떤 관념이나 행동은 그것이 의미있는 차이를 만들어낼 때 참이고, 실제이고, 유용하다. 따라서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물어야만 한다. "진리는 믿었을 때 스스로를 유용하다고 입증한 모든 것들에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윌리엄 제임스는 요약한다. 만약 진리와 가치가 세상에서 그것들의 쓸모에 의해 결정된다면, 환경이 바뀌고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진다면, 진리도 바뀐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해석도 진화한다. 다윈의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이렇게 보면, 실용주의는 대부분의 앞선 철학사상들과 정확히 반대된다. 다른 철학 사상들은 진리를 이론화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자신들이 다루는 진리가 절대적이고 불변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절대적 증거를 얻을 수는 없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입증하는 것은, 질문 자체가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 낭비다. 우리는 신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물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태도가 제임스의 실용주의 철학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공자. 임자헌 옮김, <군자를 버린 논어>

공자는 시대를 거듭해서 내려온 제도와 질서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위치에 합당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을 살면서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는 나와 타인으로 구성된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전에 중요한 것은 내가 나에 대해 솔직한가이다. 내 속마음과 나의 행동이 어긋나면 타인과의 관계가 혼란스러워진다. 내가 '아'라고 말한 것이 '아'일 수도 있찌만 실은 '어'의 뜻이라든가 '오' 혹은 '유'일 수도 있으면 심지어 '가'일 수도 있다면, 게다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신뢰(信)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내 말(言)과 행동(行)을 일치시키는 것이 타인과 관계를 맺기 전 내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내 마음을 타인에게 확장시킬 수 있다. 내 마음을 미루어 타인을 대할 수 있고(恕), 더 나아가 내 진심을 다해 타인을 위할 수 있는(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에는 사적인 감정이나 이해를 뛰어넘어 인간이면 해야할 옳음(義)에 대한 판단(知)과 더 큰 틀에서 세상의 조화를 살피는 사회적 규범에 대한 이해(禮)가 필요하다. 사람으로 태어나 나와 타인, 그리고 사회에 대해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필요한 기능을 숙지하고 숙련해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인재로 공헌할 수 있는 덕목이 인(仁), 즉 온전한 사람다움이다. 

 

공자는 네 가지를 절대 하지 않았다. 근거 없이 미리 억측하지 않았고, 내가 절대 옳다고 하지 않았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자기부터 앞 세우는 일을 하지 않았다. 자절사, 무의, 무필, 무고, 무아.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정의에 대한 고민은 좋음의 문제가 아니라 옳음(the right)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좋지만 옳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옳음을 통해서만 보편적인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칸트에 따르면 옳음의 근거는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앎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며, 이성을 근거로 옳다고 승인될 수 있는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확인된다. 그리고 그 원리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 흔히 정언명법으로 알려진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입법에 타당하도록 행동하라"라는 것이 그 기준이 된다. 준칙이라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 하는 특정 행위를 일반화한 원리를 말한다.

 

샌델의 입장은 개인과 공동체의 특수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좋음을 강조하는 전통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와 인권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공동체적 가치가 개인의 동의와 무관하게 강요될 수 있으며 개인적 자유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옳음을 강조하는 전통에 닿아 있다. 달리 말하면 샌델은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동의하지만 자유주의자들, 특히 롤스가 말하는 가치 추구 방식에는 의문을 갖는다. 그들 방식으로 가치를 추구할 경우 과연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센델의 입장은 한마디로 '옳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말은 정의를 지향하는 옳음의 관점을 무시하고 좋음의 관점에서만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옳음의 이념을 완성하려면 좋음의 관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정의를 추구할 때 행복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품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말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한 자기본성, 덕의 실현에 따른 것이며 단순한 만족감 같은 의미에서의 행복은 아니다.

 

 

마시모 피글리우치,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만약 우리가 뭔가를 입증해 보여준다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오류를 떨쳐내게 된다고 해봅시다. 하지만 그 뭔가를 입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 때 과연 그 사람이 자신의 오류를 고집할 것인지는 궁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옳다는 인상을 갖고 있기에 그리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에픽테토스, <담화록>, II. 26

 

인지 부조화란 어떤 이가 자신이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두 판단들 사이에 갈등이 있음을 지각할 때 발생하는 매우 불편한 심리 상태다. 사람들은 인지 부조화를 경험하기 싫어한다. 이것은 에픽테토스가 사람들은 알면서 잘못을 저지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던 것과 꼭 같은 이치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 딴엔 건전한 판단들로 이어지는 훌륭한 이유들을 제시하는 설명이라 여겨지는 것을 무작정 승인함으로써 부조화를 줄인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이유와 판단들이 명백히 불합리한 합리화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기원전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솝은 여우와 포도에 관한 유명한 우화에서 이를 유쾌하게 서술한 바 있다. 다시 한 번 불편한 진실은 인지 부조화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무식한 자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데키나 오사무 편저, <괴테 청춘에 답하다>

다수가 옳다는 근거는 없다. 학문의 진위는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는다. "다수라는 것이 거슬린다. 다수를 구성하는 것은 일부 유력한 선도자 외에는 그것에 복종하는 약자, 그리고 무뢰하고 무지한 대중뿐이기 때문이다."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어떤 의견이 어떠한 반론에도 논박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옳다고 상정되는 경우와, 애초에 비판을 허용하지 않을 목적으로 미리 옳다고 상정되는 경우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고 자유를 완전히 인정해 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서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절대적인 조건이다.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이것 외의 방법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합리적인 보증을 얻을 수 없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어떤 사람의 판단을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경우, 그 사람이 신뢰를 받게 된 것은 자신의 의견과 행동에 대한 비판을 항상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반대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고 옳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가능한 한 받아들였으며, 잘못한 부분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스스로도 되짚어 보고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하기를 습관으로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제라도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다양한 의견을 두루 듣고 사물을 모든 관점에서 살펴보는 방법밖에 없다고 느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이외의 방법으로 진리를 얻은 현인은 없으며 지성의 특성을 보더라도 인간은 이 이외의 방법으로 현명해질 수 없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논쟁꾼의 말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윗사람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자신보다 권력이 더 센 사람의 지성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그는 상대의 특성에 대해 아무런 주의를 하지 않는다. 양 당사자가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에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논쟁꾼일수록 더욱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게 마련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우습게 만들고, 논리적 약점을 틀춰내면 상대바은 결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소크라테스라 하더라도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다. 이것은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과 논쟁을 회피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 생각이 옳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David Salsburg, <통계학의 피카소는 누구일까?>

단지 가설이 자료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설이 사실임을 증명했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 논리로 보나 통계적 논리로 보나 분명한 논리적 오류다. ... 유의성검증은 가설이 자료와 배치될 때 그 가설을 기각할수는 있지만, 가설이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런 사실을 이해한다면 유의성검증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자기 기준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지 않기. 본래 기준이라는 것은 본인이 살아왔던 익숙한 방식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므로 객관적으로 옳다 그르다 말하기 어렵다.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뭔가를 할 때는, 자신에게 익숙한 기준을 스스로 먼저 양보하고 조정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대화와 토론, 그리고 투쟁. 대화는 나와 너의 주장과 사고에서 차이점을 찾게 된다. 공통점은 서로 인정하면 된다. 차이점이 발견되었을 때는 더 높은 객관적 가치와 해답을 얻을 수 없겠는가 모색한다. 소망스러운 객관적 해답이 주어지면 그 해답을 위한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첫째는 마음의 문을 열고 듣는 일이 앞서야 한다. 그리고 내 주장이 옳다고 여길 때는 내 주장을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차이점은 무엇이며 더 좋은 결과는 무엇인가를 찾아 공감, 동조, 협력하는 길을 찾는 것이 대화이다. 이런 대화를 위해서는 몇 가지 선행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대화에서 감정을 이성보다 앞세워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대화의 자격이 없다. 이해관계를 개입시키거나 앞세우면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학 문제를 풀어갈 때는 방해조건이 없다.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대화는 장사 거래가 된다. 그런 때는 이해관계의 객관적 방향을 택해야 한다. 나를 위한 이해관계만을 따진다면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최인철, <굿 라이프>

물질과 권력과 이미지를 향한 욕망이 득실거리는 이 물질주의 시대에,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루저가 되고 말 것이라는 불안이 팽배한 이 자기표현의 시대에, 인생의 부사를 줄이고 삶의 어조를 낮추는 자세로 살았으면 좋겠다.

 

 

새뮤얼 아브스만, <지식의 반감기>

기준선 이동 증후군은 우리가 탄생한 시점에서 진실로 받아들여지는것, 아니면 어떻게 거기에 익숙해지는가를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서 죽을때까지의 변화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여러세대에 걸쳐 변화가 일어날 경우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느린변화에는 잘 감지하지 못합니다. 꽃이 피는 과정, 해가 뜨고 지는 과정 등 느린변화에는 잘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주변환경의 변화의 즉각 적응할만큼 완벽하지 않으니깐요. 또한 인간은 왜 잘못되고 낡은 지식을 계속 믿을까요? 우리 주변을 보면 자기가 믿는 지식이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지식의 발전으로 인하여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지식의 관성이라고 하는데요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어떤 지식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진 다음에도 이 낡은 지식에 매달리는 경향을 말합니다.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당신의 믿음을 맹신하지 않는 것. 당신이 100% 옳다는 확신을 내려놓고, 언제든 실수하고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기존에 갖고 있던 믿음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당신은 독선주의 허세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사람은 그 어떤 위대한 이념이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 때 행복을 느낀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존엄한 인간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엄성을 확신하는 것과 똑같은 무게로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자유주의적 각성'이라고 부른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가져다 쓰자.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사람마다 인생을 다르게 산다. 평생 공부하는 사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돈을 버는 데 골몰하는 사람, 일만하는 사람, 권력을 쫓는 사람, 신을 섬기는 사람 등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삶이 있다. 어느 것이 더 훌륭한지 가늠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것이라면 어떤 삶이든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자유의지로 만들어낸 삶이 아니면 훌륭할 수 없다. 

 

내 나름의 '비법'이 있기는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거리감'이다. 세상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좋은 세상을 원하지만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을 저주하지는 않는다. 좋은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믿지는 않는다. 내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는 경우에도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내가 하는 일들은 의미가 있다고 믿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임을 인정한다. 삶이 사랑과 환희와 성취감으로 채워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좌절과 슬픔, 상실과 이별 역시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요소임을 받아들인다.

 

행복은 사람에서 기쁨을 느끼고 자기 삶에 만족하여 마음이 흐뭇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언제 이런 흐뭇함을 느끼게 되는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행복을 느낀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원인과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것. 이러이러한 원인이 있었기에 이 같은 결과가 되었다. 이처럼 생각되는 일들은 많다. 그러나 그 원인과 결과는 우리가 멋대로 명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도 원인과 결과로 간단히 분석할 수 있을만큼 단순하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요소가 수없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사실을 무시한 채 어느 하나의 것만 원인과 결과로 단정하여, 거기에 어떤 강한 연관성이 있는 듯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다. 원인과 결과로써 사물의 본질을 이해한다고 느끼는 것은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당연히 옳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완벽함이란 형태가 아니라 과정이다. 모든 것을 채운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채움이 들어갈 자리를 위해 비움이 자리 잡을 때 비로소 행복이 가능해진다.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태양도 가까이 가면 울퉁불퉁한 불기둥이 수없이 많고 달이나 별도 꽃처럼 죽고 사라진다. 세상에 한 그루의 나무도 사방이 완벽하게 대치인 경우가 없고, 인간 어느 누구도 좌우 얼굴이 같은 이는 없다. ... 때가 지날수록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으며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억지로 하지 않음이 가장 바르고 쉬운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는 것 억지로 잡지 말고 오는 것 억지로 막지 말고 내가 옳다면 화낼 필요가 없고 내가 틀렸으면 사과하면 된다. 무리함으로 이룬 것들 중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도덕성은 착시 현상이 아니다. 고객을 속이지 않는 상인,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쥐꼬리 월급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받지 않는 공무원 등 사람들이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보상과 제재 장치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가 하는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 장치의 존재 자체가 우리가 전적으로 이기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음에야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하랴. "사회 공동체라는 것은 없다. 오직 남자, 여자라는 개인, 그리고 가족 단위만 존재할 뿐이다."라는 대처 여사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은 사회라는 울타리 없이 고립된 이기적 존재로 살아 온 적이 없다. 우리 모두는 도덕적 규범이 형성되어 있는 사회 안에서 태어나 그 규범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한다.

 

 

김용택 엮음,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 울라브 하우게

 

거기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물론 네 말은

옳다, 너무 옳아서

말하는 것이

도리어 성가시다.

언덕으로 들어가,

거기 대장간을 지어라,

거기 풀무를 만들고,

거기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라!

우리가 들을 것이다,

듣고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것이다.

 

 

다카무라 토모야, <작은 집을 권하다>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냥 살아가기만 하는 건 싫다, 생활을 위한 생활로 끝내고 싶지는 않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나는 바로 이 점이 스몰하우스 운동이 퍼져 나가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본다. 평온한 생활을 하고 싶은 욕구,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바람, 이 모두가 일차적으론 자기 자신의 문제다. 자기 마음을 향해 묻고 옳다고 생각하는 답을 찾아 그대로 사는 것, 이것을 자기중심적이라 부른다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살면서 사랑하는 시간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꽃, 턱수염, 장발, 마약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히피'라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차별의식이 없는 새로운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사람.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비폭력주의자. 권위보다 자유를, 생산보다 창조를 경쟁보다 협력을 우선시하는,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 한마디로 말하면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는, 마음이 넓고 상냥한 사람.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다. 일반적인 원칙으로서 세상 사람이 뭐라고 하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언제 어디서나 하는 것이 히피다. 단지 절대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

 

 

오마에 겐이치, <난문쾌답>

아이디어가 빈약한 사람. 아이디어가 빈약한 사람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끝까지 거기에 매달려 결국 실패한다.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는 솔직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해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는 자유인의 당당함!

 

아무리 논리적인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수사학적 노력이 실패하면 그 주장은 채택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역린(거꾸로 배열된 비늘)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반성하고 체계화하는 일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타자를 설득하는 데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옳다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타당한 주장, 즉 논리적으로 옳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도록 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 수 있는 수사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법이다.

 

 

가와구치 요시카즈, <신비한 밭에 서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불행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영혼은 항상 엉뚱한 것을 좇아 쓸데없이 먼 곳까지 찾아가 방황하고 있다. 신비스럽고 완전한 자신의 생명을 헛되이 연소시키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완수하고자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는 것에 소홀히하며 본연 그대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살기를 피하려고만 하는 안타까운 습성이 아닐 수 없다. 상대 세계에 살며 대립에 떨어지고 소아에 집착하여 하나를 둘로 나누고는 그 중 한쪽에만 사로잡혀 그것만을 옳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곳은 한편이 밝으면 반드시 다른 한편은 어두운 어둠의 세계이다.

 

 

박웅현, <여덟단어>

내 답이 옳다. 다른 답은 내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의 인정, 현재에 집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결국 이것은 자존과 연결됩니다.

 

 

크리스토퍼 시, <결정적 순간에 써먹는 선택의 기술>

자기과신에 빠지는 이유. 경험부족, 자아긍정.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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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노무현 대통령은 불의에는 분노하고 저항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집착해 분노와 증오를 못 버리거나 자신의 불행이나 어려움이 모두 남탓이라 생각하고 타인에 대한, 사회에 대한 분노는 경계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치료해야 할 마음의 질병입니다.

 

 

[본문발췌]

 

분노 유형 : 돌발성 분노, 잠재적 분노, 생존성 분노, 체념성 분노, 수치심에서 비롯된 분노, 버림받음에서 비롯된 분노

 

 

분노의 보편적 원인 : 뇌의 결함, 심리적 트라우마, 알콜/약물 남용, 부모의 잘못된 본보기, 욱하고 화를 폭발시켰을 때 발생하는 대가와 쾌감, 극심한 부끄러움이나 버림받았던 기억 등

 

 

증오를 버릴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화해이다. 화해라 함은 가해자와 다시 관계를 맺는 일이다. 즉, 실제로 편지를 나누거나 대화를 하거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다. 화해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신에게 그 사람과의 관계가 왜 이번이 지난번과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화해를 하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 가해자는 말 그대로 자신이 예의바른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용서는 자기 내에서 혼자 하면 되지만, 화해란 두 사람 이상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화가 지나치면 분노가 된다. 분노는 변신이다. 끓어오르는 화가 폭발하는 동안에는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가 변한다.

  • 자신이 무슨 말이나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이성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 자신이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된 것처럼 일시적으로 성격이 변하여 다른 사람이 된 듯하다.

  •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평상시라면 조절했거나 조절할 수 있었을 법한 말이나 행동을 한다

 

 

분노는 완전히 폭발할 때보다 부분적으로만 폭발할 때가 많다. 끓어오르는 화라고 해서 모두 폭발적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부분적으로만 통제력을 잃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통제력을 극대화하려면 이러한 경우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알아야 한다.

 

 

분노는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돌발성 분노와 잠재적 분노이다. 돌발성 분노는 보통 경고 신호도 거의 없이 갑작스레 발발하지만 잠재적 분노는 수일, 수주, 수달 혹은 수년에 걸쳐 쌓인다. 돌발성 분노가 태풍이라면 잠재적 분노는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서서히 태워버리는 숯불과 같

다.

 

 

분노는 화의 원인에 따라서도 나눌 수 있다. 생존성 분노는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육체적 공격이 있었다는 믿음하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다. 체념성 분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들을 결정할 수 없다는 데에서 비롯된 깊은 무력감과 싸움이다. 수치심에서 비롯된 분노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신에게 수치심을 안겨준 사람을 끝장내겠다는 마음이다. 버림받음에서 비롯된 분노는 누구나 자신을 떠나겠다는 위협에 대한 통제 불능의 항의이다.

 

 

분노 때문에 고민이라면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라. 전체 인구의 약 20퍼센트 가량이 끓어오르는 화, 즉 욱하는 성질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통 부분적으로 분노가 폭발하는 경우이긴 하지만 어떠한 경우이든 욱하는 성질은 위험한 것이며 치명적일 수도 있다.

 

 

분노가 폭발하지 않게 막을 수 있다. 분노는 예방이 최선이며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열쇠이다. 대부분의 경우 잠시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을 갖거나, 다른 분노 관리 프로그램을 통해 화가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뇌가 이성을 잃고 통제불능 상태가 되지 않도록 약을 복용하는 것도 좋은 예방법이다.

 

 

각 분노는 유형에 따라 조금씩 다른 치료법을 요한다. 이 과정을 혼자 해나갈 자신이 없다면 가족, 친구, 전문 카운슬러, 의사 등 주위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좋다. 중요한 것은, 욱하는 성질을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습관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276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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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약속이 지켜지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

 

 

[본문발췌]

 

 

고대의 정의론은 미덕에서 출발하는 반면 근현대의 정의론은 자유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조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오늘날의 정치를 움직이는 정의에 관한 주장들, 특히 철학자들이 아닌 일반인들의 주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더욱 복잡한 그림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세우는 주장은 언뜻 보기에는 경제적 풍요를 지지하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주장에 찬성하거나 맞서면서, 어떤 미덕이 영광과 포상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좋은 사회가 장려해야 하는 생활방식은 무엇인지에 관해 은근슬쩍 다른 신념을 넘보기 일쑤다. 다시 말해 풍요로움과 자유를 굳건히 지지하면서도 정의에서 심판이라는 한 가닥 끈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한다. 정의에는 선택뿐 아니라 미덕도 포함된다는 생각은 뿌리가 깊다.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곧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재화 분배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찾아냈다. 행복, 자유, 미덕이 그것이다.

 

 

도덕적 사고란 혼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력해 얻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거기에는 친구, 이웃, 전우, 시민 등의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 더러는 그 대화 상대가 실존 인물이 아닌 상상의 존재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과 논쟁을 벌일 때가 그러하다. 그러나 자기성찰만으로는 정의의 의미나 최선의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나더러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행복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저마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예상되는 몇 가지 주제를 살펴보자.

  • 시민 의식, 희생, 봉사. 정의로운 시회에는 강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면, 사회는 시민들이 사회 전체를 걱정하고 공동선에 헌신하는 태도를 키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자면 공적인 삶에서 시민이 드러내는 자세와 기질인 "마음의 습관"에 무관심할 수 없다. 사회는 좋은 삶에 관한 지극히 사적인 견해를 배격하고, 시민의 미덕을 키울 길을 찾아야 한다.

  • 시장의 도덕적 한계. 군 복무, 출산, 가르침과 배움, 범죄자 처벌, 새 시민을 받아들이는 일 같은 중요한 사회적 행위를 시장에 맡기면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질 수 있기에, 시장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싶은 비시장 규범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선의 가치를 측정하는 올바른 방법을 놓고 공개 토론을 벌어야 한다. 시장은 생산활동을 조직하는 데 유용한 도구다. 그러나 사회제도를 지배하는 규범을 시장이 고쳐 쓰기를 원치 않는다면,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공론에 부칠 필요가 있다.

  • 불평등, 연대, 시민의 미덕. 빈부 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시킨다. ... 공적 영역이 비어버리면 민주 시민 의식의 토대가 되는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키우기가 어려워진다. 결국 불평등은 공리나 합의에 미치는 영향과는 별개로 시민의 미덕을 좀먹는다. 시장에 매료된 보수주의자들과 재분배에 주목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손실을 간과한다. ... 불평등이 시민에게 미치는 결과와 그것을 바로잡을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면, 비슷한 소득 재분배 주장으로는 불가능한 바람직한 정책을 찾아내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분배정의와 공동선의 연관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

  •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 도덕적 이견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상호 존중의 토대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동료 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어려운 도덕 질문을 공개적으로 고민한다고 해서 어느 상황에서든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거나, 심지어 타인의 도덕적 종교적 견해를 평가할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도덕적, 종교적 교리를 더 많이 알수록 그것이 더 싫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374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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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한 '성별격차지수'(Global Gender Gap Index)의 최근 자료에 대한민국은 양성평등 수준이 108위라고 합니다.

 

아시아 국가 중 최고 순위는 필리핀으로 2018년보다 8단계 하락해서 16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성별격차지수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전세계 153개국의 성별에 따른 경제활동 참여·기회, 교육적 성취, 건강·수명, 정치적 권한 등 4개 부문 통계를 이용해 성별격차를 지수하고 분석해 결과를 발표하는 데 수치가 1에 가까울수록 남녀가 평등하다는 걸 뜻합니다.

 

보고서에서는 전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성별에 따른 격차가 해소되기까지는 100년 가량(정확히 99.5년)이 더 걸릴 것이란 전망이 나와 있는데, 지난해 전망치(108년)보다 조금 당겨졌지만, 양성평등에 다다르기까지 100년의 세월이 걸릴 것이라는 건 국가나 사회적으로 양성평등을 위해 노력할 부분이 아주 많다는 것이겠지요.

 

국회의원이나 고위공무원, 기업의 경영층에도 성비 불균형이 심하고, 계층간 불균형의 문제가 어느 한 집단의 노력으로만 해결되지 않겠지만 사회 지도층에 진출해 있는 여성들마저도 각 영역에서 여성의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좀 더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source, Global Gender Gap Report 2020 - World Economic Forum

 

 

source, Global Gender Gap Report 2020 - World Economic Forum

 

source, Global Gender Gap Report 2020 - World Economic Forum

 

source, Global Gender Gap Report 2020 - World Economic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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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큰 변화의 흐름 앞에 서 있고, 이미 그 흐름을 타고 있다.

 

AI라는 두뇌와 소프트웨어, IoT와 혁신기술 기반의 Device, 5G를 통한 연결, 블록체인으로 신뢰성과 투명성을 보장하고, 그러한 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Big Data를 다시 AI가 분석하고 활용하는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실제 삶에서는 자율주행, 인공지능 에이전트 등을 통해 편의성이 높아지고 시간과 비용의 효율성을 가져오고 배양육과 바이오 혁신을 통한 신체적 삶의 질이 높아지고 수명도 연장 될 것이다. 더불어 친환경 에너지, 지속가능한 개발, 생태계의 보존과 유지가 우리 삶의 변화와 함께 한다.

 

 

[본문 주요 내용]

 

  • 2020년을 비롯한 앞으로의 사회 변화 양상

    • 5G, IoT를 기반으로 증가하는 연결성

    • 인공지능, 증강현실, 5G, 클라우드를 통해 확장되는 인간능력

    • 태양광생산 비용이 급락하고 배터리 저장용량이 점점 향상되면서 에너지 생산 비용의 감소로 풍요의 시대, 생활 비용의 감소

    • 유전자 편집가위, DNA 염기서열분석, 줄기세포 치료 등의 도움으로 증가하는 인간 수명.

    • 배양육, 정밀발효 등을 통해 농축산업의 소멸을 불러올 신 식품 기술의 도래

 

  • 블록체인이 바꾸는 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

    • 금융: 보험 처리의 자동화와 간소화, 빨라지고 간편해지는 국제 송금, 공급망 및 무역금융의 투명성 확보, 블록체인은 실시간 분석과 추적을 가능하게 만들고 부정행위를 탐지함으로써 금융 업계가 당면한 고질적인 문제를 끝낼 해결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계약이 더 쉬워지고, 송금은 더 빨라지고, 거래는 더 투명해지고, 더 안전하게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세상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 공급망: 유통과 무역에 신뢰를 더하다. 제품의 출처 확인 및 추적 기능, paperless trade

    • 통화: 정부 권력에 도전하는 기업화폐(ex. 페이스북 리브라)

    • 의료: 환자 주도의 데이터 관리 시스템을 만들다

    • 부동산: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는 스마트 거래. 부동산 검색의 정확성과 비용 감소, 법적 문제가 빨리 해결, 중개인이 필요없다, 투명한 거래 보장

    • 콘텐츠: 창작자가 주인이 되는 투명한 생태계, 블록체인은 예술가와 제작자 간의 지불 프로세스를 재구성하고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는 등 음악 산업의 상업적 측면에도 그 기능을 확장할 수 있다.

 

  • 인공지능과 협업하며 증강되는 인간

    • 인공지능 분야 5가지 트렌드

      • 일상생활을 증강시킬 범용 인공지능의 탄생.

      • 의료적 진단과 치료를 위한 머신러닝

      • 신약 설계와 개발을 가속화하는 양자 컴퓨터

      • 보안 분야에 생길 거대한 기회

      • 원자 단위 제조업의 실현

    • 인공지능과 블록체인, 두 가지 메가트렌드의 융합

      • 블록체인은 본질적으로 데이터를 암호화된 분산 원장 형식으로 저장하는 디지털 정보의 새로운 파일 시스템이다.

      •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이 결합하게 되면 얻는 이점

        • 더욱더 강화되는 암호화 기능. 암호화된 상태에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인공지능 알고리즘....

        • 인공지능 결정의 투명성 확보. 

        • 더 효율적인 블록체인 관리.

    • 인공지능으로 강화된 초인간의 시대가 온다. 영화 HER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에이전트가 현실로...

    • 인간 예술가를 돕는 창작하는 인공지능의 탄생. 시와 소설을 쓰고 작곡하는 인공지능

    • 인공지능으로 완벽해지는 의사의 능력

    • 콘텐츠 산업이 인공지능을 만나면, 큐레이션을 넘어 콘텐츠를 만들다.

 

  • 차세대 기술 융합이 만드는 일상의 진화

    • 미래를 앞당기는 아마존의 자율주행 프로젝트와 규제의 벽을 넘은 드론, 물류 혁명에 한발 가까워지다

    • 진화 알고리즘을 장착한 로봇의 탄생, 마이크로봇과 나노봇 생태계의 발전

    • 스마트 더스트로 대기오염의 해결책을 찾다

    •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질병을 예측하는 VR 기술

    • 증강현실로 누구나 '인스턴트 전문가'가 된다

    • 초연결 시대, 진화하는 스마트 시티. 센서, 스스로 치유되는 인프라(bio concrete), 자급자족하는 미래 그린 시티

 

  • 바이오 혁명, 수명 연장과 건강관리의 혁명

    • 유전자 변형 불임 모기의 탄생. Gene Drive,  https://en.wikipedia.org/wiki/Gene_drive

    • 만능 독감 백신

    • 인체 내 유전자 편집 기술in-body gene editing

    • 뉴럴링크와 뇌-기계 인터페이스

    • 제약 AI가 이끄는 신약 개발 혁명

    • 신체 역전과 노화 역전을 이끄는 재생의학의 현재

      • 신체를 보완하는 기술: 줄기세포 치료

      • 신체를 대체하는 기술: 이종 이식 및 바이오 프린팅

      • 노화 역전 기술: 젊은 피 수혈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618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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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불완전성이 삶에 대한 의욕과 재미를 더해주기도 한다.

 

 

[본문 발췌]

 

 

이 책은 괴델, 에셔, 바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상한 고리”, 즉 처음으로 돌아오는 끝, 거짓을 담고 있는 참과 같은 독특한 개념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 즉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탐구한다. 이상한 고리를 우리의 뇌와 마음에도 적용하여 어떻게 뇌에서 마음이 나타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러한 탐구는 인공지능으로까지 나아가 인공지능이 음악을 작곡하거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질문한다.

 

 

이상한 고리의 개념에는 무한성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유한한 수단으로 무한한 과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고리 말고 어떤 것이 있는가? 무한성은 에셔의 많은 그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일 주제를 복제한 것들이 종종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마치 바흐의 카논을 시각적으로 유추한 것 같다.

 

 

머리가 아주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관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관찰 결과 그는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통찰을 얻는데, 우리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컴퓨터 프로그램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러한 통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이런 이유로 관찰력이 없다는 속성이 곧 기계의 특성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누가 어떤 작업이 "기계적"이라고 말하면, 사람이 그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만이 불평 없이, 지루해하지도 않고 반복해서 그 작업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모순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명확성과 진보의 주요 원천이며, 수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과거에 수학에서 모순이 발견되었을 때, 수학자들은 즉시 모순을 야기한 체계를 정확히 찾아내고, 그 체계에서 벗어나, 그 체계에 대해서 추론하고, 체계를 고치려고 노력했다. 모순의 발견과 수리는 수학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화시킬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고 일련의 오류 출발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결실을 맺을 것이다.

 

 

아마도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선의 정확한 목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혼란한 상태에 있으면 어느정도까지는 우리 마음이 비논리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이론에 따르자면 논리로부터 벗어날 경우에만 깨달음으로 도약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것은 ... 언제나 불완전하게 될, 어떤 지도에도 그려질 수 없는, 결코 멈추지 않을, 묘사될 수도 없는 그런 여행에 나서는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235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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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만물에 원리와 이치가 있다. 어떤것은 불변의 것도 있겠지만, 물처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는 것들도 있다. 나의 운명도 그렇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결말은 달라진다.

 

 

[본문발췌]

 

 

운명이란 인생의 우주적 변곡선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운명을 사유한다는 건 인생과 자연 사이의 상응과 교감을 전제한다. 운명을 안단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임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가되 매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타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고로, 앎이 곧 길이자 명이다!

물론 그 운명의 능동적 배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사유의 적극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기존의 통념과 표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전제를 바꾸는 데서부터 공부는 시작한다."(정화스님)

 

 

1990년대 중반이후, 더 확실하게는 IMF 이후 이분법의 둑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담론과 가치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 담롬들이 백가쟁명을 이룬 것이다. 그 담론들의 핵심을을 아주 소박하게 간추리면 다양성과 자율성, 이 두가지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형식의 차원을 넘어 내용적 측면으로 들어가면 빈곤하기 짝이 없다. 보다시피, 지금 우리의 삶은 다양하지도, 자율적이지 않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의 무한증식 속에서 삶의 가치는 더더욱 균질화되었고, 디지털 문명의 범람 속에서 주체의 자율성이라는 범주는 더한층 협소해진 실정이다.

 

 

타인의 행동을 시비선악을 떠나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아주 좋은 공부가 된다. 물론 그 모든 것은 거울처럼 반사되어 나에게로 온다. 나의 행동, 나의 인생을 보는 시선도 전혀 달라지게 된다.

음양오행론뿐 아니라 동양의 사유는 이렇듯 철저히 관계의 사유다. 정화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불교에서 '안다'는 건 이웃과 더불어 교류한다는 뜻이다. 세포 하나의 의미와 역할은 이웃한 세포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웃들과 분리되어 있을 땐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동일성을 증식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암세포다. 암세포란 쉽게 말하면 이웃과 단절된 세포의 표현형식인 셈이다.

 

 

목(간담)은 분노, 화(심/소장)은 기쁨, 토(비위)는 생각, 금(폐/대장)은 슬픔, 수(신장/방광)은 두려움의 정서를 담당한다.

해당 장기에 문제가 있으면 감정의 균형이 깨어지게 마련이다.

감정의 흐름이 깨져도 장부에 병이 생기고, 거꾸로 장부에 문제가 있어도 감정의 자연스러운 리듬이 깨지게 된다.

 

 

스티븐 호킹이 말했듯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 우주의 끝을 향해 가다 보면 결국 자신이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뿐이다. 역사적 실천의 원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보다 더 혁명적인 실천은 없다!

 

 

운명의 지도 역시 카드 자체의 '자성'이 아니라, 그것들의 결합, 배열되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르게 작용한다. 문제는 이런 원리가 사회적 조건과 통념에 의해 가려진다는 데 있다. 부귀를 향한 집착, 정상성이라는 척도, 다다익선의 논리 등등에 의해. 이런 통념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팔자를 원망하거나 저주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이 '팔자타령'의 고리를 끊고 자기 운명의 본래면목을 볼 것인가? - 이것은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자 소명이다. 고로, 모든 팔자는 평등하다.

 

 

"나의 정체성은 수많은 너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역동적인 과정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 - <마음은 몸으로 말한다>

 

 

음양오행은 내 존재의 리듬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시공간적 축이 바로 운명이다. 그런데 시공간은 어떤 사회체와 마주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 시대의 표상구조와 욕망의 배치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주명리는 철저히 관계와 배치의 철학이다.

 

 

지식과 정보는 소유와 축적의 대상이지만 지혜는 깨달음의 영역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다'와 '도달하다'의 합성어다. 낡은 사유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경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몸 사이의 '간극'이 없어야 한다. 간극이 없으면 깨닫게 되고 깨달음이 있으면 간극이 줄어든다. 고로, 삶의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곧 지혜다. 그러므로 지혜가 없이, 지혜에 대한 열정이 없이 잘 살 수 있는 방법,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길은 단연코 없다! 팔자를 고치고 싶은가? 그럼 가장 먼저 지혜를 사랑하는 훈련을 하라! 그러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용신이 무엇인지 절로 드러나게 될 터이니.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를 오롯이 주시한다는 뜻이다. "더울 때는 더위가 되고, 추울 때는 추위가 되라!"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잔다" "평상심의 도다!" 등의 선사들의 경구가 그런 경지에 대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종종 체념과 수동성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즉, 분노와 열정을 다 포기하고 대충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아니다. 오인일뿐더러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로 읽은 것이기도 하다. 대충 살아서는 결코 저와 같은 일상을 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표상의 그물을 뛰어넘는 아주 역동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자아는 물론 가족, 혈연, 국가 등의 표상들이 형성하는 장벽을 벗어나 그야말로 우주적 인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정적으로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선형성을 탈피해야 한다. 즉, 과거-현재-미래는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9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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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두 식구 가지고 있는 옷과 책을 정리해 보니, 이삿짐 수준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옷을 정리하는 데 다시 한짐이 나온 것을 보고 집을 둘러보니, 집에 소유한 것들을 세어 볼 엄두가 안났다.

 

문요한님의 <여행의 인간> 중 소유한 물품과 자유의 관계를 적은 글이 있다.

"여행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존재감은 커지고 우리는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히 소유욕과 저장강박이 약해진다. 일본의 한 사진작가에 의하면 몽골인은 평생 가지고 있는 물품이 300여 개인데 비해 일본인은 한평생 6200여개를 갖는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여행하듯 사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불필요한 욕망을 걷어내고 소유에 덜 연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 지평을 한 차원 넓혀준다. 불필요한 내부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외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자유다. 그 자유는 때로는 여행이 끝난 후의 삶으로도 확장된다. 그 자유를 경험함으로써 덜 쓰고 덜 일하되 더 여유로운 삶을 모색할 수 있다. 마음의 에너지가 물질을 소유하는 대신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그렇게 보면, 법정  스님의 말처럼 우리는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 맞다. 소유물에 구속됨 삶!

 

 

 

소유(所有) 1.명사 가지고 있음. 또는 그 물건.

2.명사 법률 물건을 전면적ㆍ일반적으로 지배하는 일.

 

[유의어] 보유 소지 소유물

 

(네이버 영어사전) ownership, (formal) possession, own, have, (formal) possess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소유'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법정 스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수행자에게 가난이란 맑음 그 자체다. 모자라고 텅 빈 그 속에서 넉넉한 충만감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무릇 수행자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자이다.

 

소유와 소비 지향적인 삶의 방식에서 존재 지향적인 생활 태도로 바뀌어야 한다. 소욕지족,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내일을 걱적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오늘을 마음껏 살고 있다면 내일의 걱정 근심을 가불해 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집  /  심보선

 

그들은 저주받았다

관념론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유물론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엔 영원히 잠들지 않는 아이가

잠들기 직전

납으로 된 의문부호 하나를 자정의 발등 위에 못박는다

그들의 꿈에선 언제나 썩은 피가 샌다

 

또한 그들에게 희망이란

주머니 속의 빵 부스러기를 세는 식이다

그러나 한 번도 맞게 센 적이 없다

세면 셀수록 부스러지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셈을 멈추지 않는다!

 

불평등이란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

 

그들은 언제까지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집 안으로 그들을 부르기 위해서는

집 밖으로 난 창문들을 모두 깨야 한다

 

그들의 집은 문이 없다

그들의 집은 불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이다

그 집을 지켜야 한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물질의 세계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하는 순간, 우리 욕망의 그릇은 그만큼 더욱 커져 소유는 늘 불완전할 따름이다. 완전한 소유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신적 세계에서는 다르다. 의식이 경험으로 꽉 채워진 순간, 우리는 그 무엇도 더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소유감을 느낄 수 있다. 완전한 소유의 좋은 점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과 소유한 것을 나눈다고 해서 나의 소유감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함께 나눌 때 더욱 완전한 소유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돈을 주고 살 수 없고 누군가에게 빌려줄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살아 있음을 느끼면서 살아가느냐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시간부자였고 마음부자였다. 여행하는 동안 경험하고 느낀 모든 것은 다 내 것이 됐다.

 

과잉 소유와 과잉 저장은 현대인들의 불안과 공허감 때문이다.

 

'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가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나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접한 칼 마르크스의 말에서 현대인들이 어떻게 해야 저장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 바로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표적 행위가 여행이라고 본다. 여행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존재감은 커지고 우리는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히 소유욕과 저장강박이 약해진다. 일본의 하 사진작가에 의하면 몽골인은 평생 가지고 있느 물품이 300여 개인데 비해 인본인은 한평생 6200여개를 갖는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여행하듯 사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불필요한 욕망을 걷어내고 소유에 덜 연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 지평을 한 차원 넓혀준다. 불필요한 내부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외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자유다. 그 자유는 때로는 여행이 끝난 후의 삶으로도 확장된다. 그 자유를 경험함으로써 덜 쓰고 덜 일하되 더 여유로운 삶을 모색할 수 있다. 마음의 에너지가 물질을 소유하는 대신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불교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나고, 잃어버리기 위해 소유하며, 떠나보내기 위해 만난다." 어쩌면 여행은 그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여행이까 말이다.

 

당신이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을 만큼만 소유해라. 언어를 배우고, 국가를 이해하고, 사람들을 받아들여라. 당신의 기억력이 곧 당신의 여행 가방이 될 수 있도록...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무소유는 /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 /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아니다 싶을 때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 진짜 자유인입니다. / 반대로, 없어서 갈증을 느끼는데도 무소유라는 이름으로 / 참고 사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테미 스트로벨, <행복의 가격>

작게 살며 크게 생각, 더 적게 소유하고 살아가기는 삶의 철학이다. 가지고 있는 물건의 개수가 중요한 건 아니다.

 

'소유보다는 공유 속에 더 큰 행복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생계를 꾸리지만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가짐이 아닌 나눔이다.' - 노먼 매키완(Norman MacEwan)

 

당신이 소유한 물건이 당신을 소유한다. '우리는 학생들이 바글대는 대학 기숙사에서 아파트로, 다시 단독주택으로 옮겨간다. 아주 돈이 많으면 아예 넓은 땅을 사서 저택을 짓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출세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벽을 쌓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 - 에릭 와이너Eric Weiner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할 때만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 탈물질주의적 생활방식의 매력도 두드러지게 되죠. 우리는 지금 물건에 부여된 가치와 그 물건을 사용하는 데 드는 비용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고 있어요. 이 균형은 자연히 전보다 덜 물질주의적인 생활방식을 창출할 테고 그러면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소유중심의 생활방식에서 벗어나는 일도 더 수월해질 거에요.'

 

인생은 소유물을 늘리는 데만 매달리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소중하다.

 

데니스 웨이틀리, "행복은 이리저리 옮길 수도, 소유할 수도, 돈으로 살 수도 없으며 닳아 해지거나 써서 없어지지도 않는다. 행복은 삶의 매 순간을 사랑, 자비,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영적인 체험이다."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그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피천득, <인연>

미美는 그 진가를 감상하는 사람이 소유한다. - 비원

 

 

마조리 켈리, <그들은 왜 회사의 주인이 되었나>

소유는 우리의 경제를 공전 궤도 안에 붙잡아 두는 중력장이다. 우리는 그 중력장에 붙들려 금융 과잉과 생태적 과다를 불러오는 행동을 일삼는다.

 

추출적 소유는 금전적 목적을 갖는다. 이익을 최대화하는 게 목표다. 생성적 소유는 삶을 위한 목적을 갖는다. 삶을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게 목표다.

 

 

이기주, <글의 품격>

욕심의 속성도 매한가지가 아닐는지. 우린 욕심의 내부로 파고들 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욕심의 번식력은 참으로 왕성해서 소유욕이나 질투심과 함께 버무려지면 마음속에서 다른 감정보다 훨씬 빠르게 퍼져나간다. 더욱이 욕심의 안쪽에는 순찰차처럼 손잡이가 없다. 웬만해선 빠져나올 수가 없다.

 

소중한 사람의 빈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 아니다. 쓰라린 사연이 블랙홀처럼 모든 걸 송두리째 삼켜버린 상태다. 이는 공백이 아닌 여백이다. 공백과 여백은 엄연히 다르다. 공백은 애당초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므로 공란과 비슷한 반면, 여백은 곁에 머물던 무언가가 빠져나간 후 채 가시지 않은 여운에 가깝다. 여백은 존재가 아닌 부재不在의 결과다. 만나고 헤어져야, 다가왔다가 멀어져야, 소유하던 것을 잃어버려야 여백에 닿을 수 있다. 때론 눈물이라는 열쇠로만 우린 '여백이 문'을 열 수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데키나 오사무 편저, <괴테 청춘에 답하다>

소유의 의미를 깨닫는다. "젊은 시절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소유의 편안함과 고마움을 모른다. 그래서 민주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재산이 쌓이면 지키고 싶어지고, 자손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진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아무리 다양한 사상에 빠지더라도 나이를 먹으면 예외 없이 귀족주의자가 된다."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스코트는 생활의 질을 높이기보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스코트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소유에 의존하는 삶은 일을 하거나 존재를 바탕으로 한 삶보다 자유롭지 못하다.' - 윌리엄 제임스

 

어떤 경우에도 되새겨 생각해볼 일은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의 소유물은 그 일에 방해가 됩니다.

 

현대 생활의 신조인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얻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덜 갖되, 더 충실하기'

 

 

정철, <불법사전>

'쓰레기통' : 무소유, 차면 비운다.

 

 

유발 하라리 외, <초예측>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누군가가 자기 앞에 서면 뭐가 되었든 그 사람보다 앞서고 싶어하지요. 그런 식으로 전진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살다가, 어느 날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사이에도 저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늘 군림하며 내가 처한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는 현실을 깨닫고 좌절하게 됩니다. - 다니엘 코엔, <기술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가>

 

 

김용규, <생각의 시대>

우리는 이제 개별적이고, 미시적이며 합목적적인 지식은 컴퓨터에 내장된 검색엔진을 이용해 어느 때보다 손쉽게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에 도달할 수는 없게 되었다. 마치 너무 밝은 빛이 우리의 눈을 실명케 하듯이, 폭증하는 정보와 지식이 우리의 전망과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의 대상이 되었고, 교육과 전수의 내용이 아니라 검색과 전송의 내용이 되었다.

 

 

E. F. 슈마허 외, <자발적 가난>

욕망은 그것의 충족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그것은 점점 더 자라난다. 따라서 아무도 욕망의 끝을 볼 수 없다. 만약 당신이 한 나라의 왕이 된다면 또 다른 나라를 욕심낼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과도 같다. 욕망을 깊이 이해함으로써 욕망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 스리 바바 하리 다스

 

소유하지도, 소유되지도 않은 사람 - 알칼라바디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사람들이 당신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당신은 그들에 대한 모든 지배력을 잃게 될 것이다. 당신이 사랑을 맹세하지 않는 한 상대방은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라. 그러면 상대방의 관심과 욕망의 좌절에서 파생되는 권력을 얻게 될 것이다. 처녀왕의 역할을 수행하라. 즉 상대방에게 계속 희망을 품게 하면서 결코 만족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우리는 그저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아니다.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변화하길 바라는 것이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행복을 소유의 개념이 아닌 감상의 개념으로 본다면 소유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 친구와의 우정, 내 아이의 웃음소리, 음악이 선물하는 평온함, 내가 응원하는 스포츠팀 우승이 다 행복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행복 역시 우리가 말하는 소확행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삶을 감상할 줄 아는 태도를 갖추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세상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집이나 차, 옷 같은 것도 아주 잠깐 빌려 쓰는 것이지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그저 사랑하고 감사해하며 잠시지만 누리세요.

 

프랑스에선 중산층의 기준으로 소유한 재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를 하나 할 수 있는지, 악기를 즐기면서 연주할 수 있는지, 운동이나 봉사 활동을 꾸준히 하는지, 자신만의 요리를 해서 지인들을 초대할 수 있는지 등을 본다고 합니다. 돈만 많다고 저절로 중산층이 되는 것이 아니라네요.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점점 양심과 도덕적 가치와 질서는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그래도 되는 것인가, 우리 젊은이들과 아들딸들이 그런 사회에 살기를 원하는지 묻고 싶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점은 돈과 경제는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는 관념이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후진사회에서는 경제 문제 해결이 무엇보다도 선결 조건이다. 그 빈곤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주의 문제는 시급한 과제이다. 그렇다고 해도 돈과 경제는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이며 과정일 뿐이다. 돈과 경제가 인생의 목적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소유욕은 한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그 사회도 병들게 된다.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우리가 소유한 바가 우리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지산이 아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들지 못했고,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숭고해질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다. 문제를 그렇게 보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조금이라도 행복이나 위안을 주는가? 젊고 앞날이 창창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상상하듯이 무엇이나 그들 마음대로 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타인의 의지를 끊임없이 고려하거나 계속해서 기도하고, 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거북함을 벗어난다는 것이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이란 인간을 위해서 마련된 개념이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일시적으로는 괜찮겠지만 끝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이끌어주지는 못할 터이고...'"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만 사람이 품위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 또 산업화로 나아갈수록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이 오두막은 사회와 조화를 이룰 때 얻는 즐거움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자급자족이 으뜸입니다. 불필요한 물품과 재화를 소유할수록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간디는 생산성은 부족함을 매우는 한도 내에서만 유지해야 한다고 거듭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생산 방식은 한계를 모르고 끝없이 증가하는 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이제까지 용인해 왔지만, 이제는 사람이 기계에 의존할수록 파멸을 향해 더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사회관계로 규정되는 가난은 계층과 계층,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로 정의된다. 당신은 돈이 있고 나는 돈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소비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신에게서 돈을 얻어야 한다. 나는 누군가의 밑에서 일을 해야 하고, 그 사람은 나에게 명령하고 나를 이용하고 모욕을 준다. 이 가난은 소유물의 절대적 양이 아니라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복종하는 가난이다. '부유함'을 뜻하는 영어의 'rich'는 소유물의 절대량이 아니라 사회관계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의 금을 갖고 있으면 아무도 부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김상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자본의 소유권과 기업 경영권의 분리.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식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과 주식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것을 별개의 일로 분리하여 주주에겐 배당금과 기업 자산에 대한 잔여청구권만을 주고 경영권은 노동자에게 주자는 것이다. 이 제안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제도화된다면, 자본가가 아무리 많은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노동자를 노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기업을 두고도 신자유주의자들이 자본가의 사적 소유를 말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에 의한 공동 소유 또는 사회적 소유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양쪽이 모두 소유에 집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소유를 통해서만 자유를 확보하려 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유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오해란 자유를 선택의 능력이나 권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들 대다수는 식당에 가서 스스로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어떤 음식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 음식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선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는 선택에서 시작하지만 소유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이리하여 자유와 소유가 뗄 수 없이 짝을 짓게 된다. 그리고 나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나의 자유의 폭도 넓어지고, 나의 소유가 확장되는 만큼 나의 자유도 확대된다. 만약 내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나의 자유도 완전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자유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소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이 욕구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듦으로써 달성된다. 상품이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의 자유는 내가 소유한 돈으로 환산되고 측정될 수 있다. 돈밖에 모르는 신자유주의자 속물들이 자유를 입에 올리는 것은 적잖이 역겨운 일이기는 하지만 전혀 논리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유를 선택의 능력이라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돈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자유가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는 활동에 존립하는 한에서, 자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 노동자의 경우라면 그 활동은 생산활동이다.

 

 

최인철, <굿 라이프, 내 삶을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행복한 사람은 소유보다는 경험을 사는 사람이다. 소유를 사더라도 그 소유가 제공하는 경험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경험보다는 소유를 사는 사람이다. 심지어 경험을 하면서도 그 경험을 소유화, 혹은 물화(thingify) 해버리는 사람이다.

 

소유물은 비교를 불러일으키지만 경험은 비교를 유발하지 않는다. 경험은 우리를 비교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경험의 삶이 곧 무소유의 삶인 이유는 무소유의 본질이 소유가 유발하는 비교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소유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소유의 삶이 부담스러운 우리에게 경험의 삶은 아주 좋은 대안이다.

 

경험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소유가 대화의 주제가 되면 그 대화는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소유는 비교를 유발하기 때문에 소유에 대한 대화는 관계를 위협한다. 사람들 사이에 '내것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그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반면에, 경험에 관한 대화는 즐거움을 창출한다. 행복에 관한 연구들은 경험을 나누는 '수다', 특히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경험을 나누는 수다가 최고의 행복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돈으로 경험을 산다는 것은 결국 돈으로 이야깃거리를 산다는 것이다. 이야깃거리는 관계는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경험이 제공하는 이야깃거리는 관계를 강화시킨다. 우리는 함께 경험하기를 원한다. 설사 혼자서 한 경험이라도 수다를 통해 그 경험을 나누기를 원한다. 경험은 소유보다 훨씬 더 관계지향적이다.

 

 

법정 스님, <무소유>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유행기)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하나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저에의 맹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야마시타 히데토 / 오노코로 신페이, <소중한 것은 모두 일상 속에 있다>

모든 것을 소유할 필요도 없고,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소유욕은 가지면 가질수록 자유를 잃는 정체 모를 욕구입니다. 호흡, 휴식, 수면, 음식, 배설처럼 본능에서 오는 욕구와 달리 이차적 욕구인 소유욕은 생명 유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꾸만 물건을 갖고 싶어할까요? 타인과 비교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대산하기 위해서? 집에 있는 물건을 차분히 살펴보는 일부터 시작해봅시다. 그 안에 숨은 당신의 진심을 알게 될 테니까요.

 

 

전주희 외,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냥 생존만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와 의미를 같이 누리는 생활이다. 그렇다. 재미와 의미, 이 두 가지는 인간다운 삶의 양대 바퀴다. 자본에 의해 규정된 삶이 소유와 소비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인간다운 삶은 경향적으로 재미와 의미를 추구한다.

 

 

소노 이야코, <약간의 거리를 두다>

염려와 공포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유함으로써 생겨난다.

 

 

정찬주, <길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소유하지 말라. 거듭난다는 건 없던 존재가 새로 태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기 내면을 정화한다는 의미이리라. 우리가 진정 사랑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 가끔 한번씩 목말랐을 때 온몸으로 사랑해야 한다. 집착과 소유는 사랑이 아니다. 

 

 

신영복, <담론>

사람의 정체성은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노동'이란 표현이 어색하다면 '삶'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가 영위하는 삶에 의해서 자기가 형성되고 표현됩니다. ... 장자의 반기계론은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입니다. 속도와 효율, 더 많은 소유와 소비라는 우리 시대의 집단적 허위의식에 대한 고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정치적 자주성, 경제적 자립성, 문화적 자부심)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고 희망의 언어입니다.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물질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커지면, 사람을 대할 때에도 자신의 욕망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만의 욕망으로 변해서 나타난다. 가족, 친구, 동료, 연인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에게까지도 나를 이렇게 대해 달라, 나를 대할 땐 이러이러한 태도를 갖추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많아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무분별하게 소유하는 물질을 늘려 가면, 반드시 인격도 나빠진다. 결국 자신의 가치를 늘려 안정시키기 위해서 소유하는 물질을 늘리려 했는데, 아이러니학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인격이 점점 불안정 상태가 된다. 일반적으로 호화로운 대저택에 살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해 사생활이 순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마음에 항상 괴로움이 있고 시야를 가리를 안개가 걷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유물을 줄이면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속을 들여다보기가 더 쉬워진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누군가의 노동의 결과를 강탈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시간을 강탈하고 그에게 다양한 활동을 명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군가 당신에게 일정한 시간 동안 특정한 일 또는 보수가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한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며, 그 일로 어떤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가를 직접 정하는 꼴이다. 이런 행위는 .... 부분적으로나마 그들을 당신의 소유주로 만든다. 당신에 대한 소유권을 그들에게 넘기는 행위다. - 로버트 노직,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엘리자베스 퀴블러 /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수업>

소유하던 것을 잃은 슬픔이 가시고 나면 자신이 좀더 자유로워지고, 세상을 가볍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더 많은 돈을 소유하거나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외부 환경을 더 잘 통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일시적인 영향력일 뿐입니다. 육체, 직장, 돈, 아름다움 등 우리가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들은 외면적인 힘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식이 항상 최선은 아닙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방식으로 행동해야 할까요? 왜 그들 나름의 독창성을 발휘해 행동하면 안 될까요? 다른 사람들이나 물건들, 또는 사건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을 버릴 때, 인간관계와 삶에서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통제하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혼란스러워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런 질서 속에 흐르게 됩니다.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지도 않으며 전투를 벌이지도 않는다.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오히려 인간, 즉 현실의 살아 있는 인간이다." - Marx-Engels : Gesamtausgabe, I, iii, p.625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부자들이 비교적 부담 없는 삶을 영위할 가능성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듯하다. 사도 바울은 이런 특효약을 2천여 년 전에 간단하게 요약했다. "너희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소유하라!" 분수에 맞는 검소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이점을 즐 길 수 있다. 첫째로 고상한 취향을 유지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실용적인 면에서도 유익하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소유하는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재산을 잃어버려도 생활양식을 바꿀 필요가 없다.

 

출생과 소유의 모든 특권이 폐지되고 누구나 모든 직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면, .... 사람들은 마음 놓고 무한히 야심을 펼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자신들이 위대한 것을 이루라는 소명을 타고났다고 즐겨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날마다 경험을 통해 수정되는 잘못된 생각이다. ... 불평등이 일반적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인 경우에 극심한 불평등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모든 것이 평등한 경우에는 아주 미미한 차이도 마음을 상하게 한다. ... 이것은 민주주의의 주민들이 풍요 한가운데서 기이하게도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 나는 부자들이 누리는 것을 희망과 부러움의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는 가난한 시민을 미국에서 단 한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 이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 덕분에 특히 처음에 젊은 사람들은 피상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과 행운아 들은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절망한다. 그들의 영혼은 비통함에 숨이 막힌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보면,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상과 장소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내적으로 닮는 것이다.

 

 

서은국, <행복의 기원>

사람들은 인생의 좋은 것들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여러 연구 논문들이 내놓는 결론은 다르다. 결국 둘 중 하나다. '행복은 소유'라는 생각이 틀렸거나 연구들이 엉터리거나.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눈만 뜨면 이 세상의 TV, 라디오, 신문 같은 모든 매체에서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해져야 더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물건을 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또 그 많은 물건을 넣기 위해서 더 큰 집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더 큰 집을 사기 위해서 더 많이 일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삶과 자연을 수탈하는 악순환이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인생에는 돈도, 쾌적한 주거도, 건강하고 풍성한 식사도 필요하다. 그것들을 손에 넣음으로써 사람은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소유가 도를 넘으면 사람은 180도 돌변하여 소유욕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소유하기 위해서 인생을 소비하고 휴식 시간까지 구속당하며, 조직에 조종당하고 끝내는 국가의 구속까지 받게 된다. 인생이란 것이 끝없이 많이 소유하는 경쟁을 위해서 주어진 시간일 리 없다.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무소유'가 자신이 소유한 것을 하나씩 버리는 것이라면, '중도'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견해를 하나씩 버리는 것이다. / 비우면 채워진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충만하며, 나비는 춤으로 비우고 충만하네"라고 하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관념이나 견해들을 다 비우면, 하나의 견해도 남지 않게 된다.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때 우리는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중도의 길을 걸을 수 있다. / 견해를 버리는 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탐욕과 괴로움은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를 고집하고,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고, 생존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중도는 바로 이런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다.

 

 

알랭 드 보통, <불안>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러스킨은 말한다.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진보는 항상 번영과 함께 빈곤을 낳았다. 대다수가 가난하지 않던 시대가 언제였는가? 일부 사람들이 전보다 덜 가난해졌다고 해도 가난을 종식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돈이 발명된 이래로 모두가 만족할 만큼 풍족한 적은 없었다. 돈이 충분한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인구의 10분의 1이 부의 85퍼센트를 소유하는 현실을 막지는 못했다. 식민주의가 끝났다고 해도 해마다 수천억 달러가 빈곤국에서 부유한 나라로 흘러들어가는 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인구의 5분의 4가 여전히 부의 15퍼센트만 소유한 반면에 1퍼센트의 부자가 부의 3분의 1을 소유한다.

 

 

손미나,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인생은 모든 순간이 그 고유의 가치가 있는 거란다. 겉으로 보이거나 소유하고 있는 것들과 상관없이 의지를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며 그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단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결국 행복과 건강, 기쁨은 외적인 소유가 아니라 내적인 자각의 결과다. 내가 생각을 옳게 쓰면 나는 생각을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이고, 내가 생각을 옳지 못하게 쓰면 생각이 나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선인이 되거나 악인이 되는 것도 모두 이 생각의 쓰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인류 문명 발달의 불평등을 설명해 주는 원리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관한 원리가 아니며, 인구가 생존물자에 압력을 가한다는 원리도 아니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에 있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 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커다른 기본 요인이다. 이점은 틀림이 없다. 토지는 인간의 삶터이고, 인간이 필요한 물자를 꺼내 쓰는 창고이며, 욕구를 충족시킬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노동을 투입하는 대상이 되는 원료이다. 토지 또는 토지 생산물이 없다면 해산물도 취할 수 없고, 태양열도 이용할 수 없고, 그 밖의 어떠한 자연력도 이용할 수 없다. 우리는 토지에서 태어나 토지로부터 물자를 얻어 살다가 토지로 돌아간다. 인간은 들의 풀이나 꽃과 마찬가지로 흙의 자녀이다. 사람에게서 토지에 속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사람은 육체 없는 영혼에 불과할 것이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에서 부를 생산하는 힘을 보태줄 뿐이다. 따라서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고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가치를 올리고 토지 소유의 힘을 강하게 해 줄 뿐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토지소유는 귀족층의 근거이자 거대한 재산의 기초이고 권력의 원천이다. 인도의 최상 계층은 브라만이 오래 전에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시대건 토지를 소유하는 자에게 토지의 열매가 귀속된다. 하얀 일산과 거드름 피우는 코끼리는 토지 소유의 꽃이다."

 

현대 문명을 저주하고 위협하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의 원인이 토지사유제에 있다는 점을 보았다. 이 제도가 존재하는 한 생산력이 향상되더라도 대중에게 지속적인 혜택을 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대중의 생활을 악화시킨다는 점을 보았다. 또 빈곤을 구제하고 부의 분배를 개선하기 위해 현재 추진되고 있거나 제시되는 해결책을, 토지사유제 철폐만 제외하고, 모두 검토하였지만 효과가 없거나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보았다.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뿐이다. 부가 증가하는데도 빈곤이 심화되고, 생산력이 커지는데도 임금이 억제되는 이유는 모두 부의 근원이자 모든 노동의 터전인 토지가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빈곤을 타파하고 임금이 정의가 요구하는 수준, 즉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전부가 되도록 하려면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동소유로 바꾸어야 한다. ... 그렇다면 현대 문명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부의 분배,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온갖 악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이것이다. "토지를 공동소유로 해야 한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수 세기에 걸쳐 인간은 다른 사람의 삶을 추종하고 모방해 왔다. 종교와 수행도 그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혹시 누군가가 도중에 '기쁨'을 '심각함'으로 잘못 베끼고, '웃음'을 '근엄함'으로 틀리게 적고, '즐거움'을 '죄'로 혼동하지는 않았을까? '예찬'을 '무덤덤함'으로, '행복'을 '소유'로 옮겨 적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 역시 잘못된 필사본을 후대에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야마구치 세이코, <버리고 비웠더니 행복이 찾아왔다>

자신의 가치를 소유한 물건이나 타인의 인정 등 외부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 삶,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삶이 바로 최소한주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인 것이다.

 

여유롭고 단순한 삶을 살려면 가장 먼저 소유한 물건부터 버리고 마음도 비워야 한다. 우리는 뭔가를 추구하다 보면 비우기보다 채워 넣는 쪽으로 몰입하기 쉽다. ... 하나를 손에 넣으려면 그 전에 먼저 하나를 버려야 한다. 하나가 내 안에 들어오면 다른 하나를 내려놓고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소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에 쓰지 않는 것은 버리고,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생각 외에는 버리는 것이다.

 

조금만 소유하고 의미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삶, 외면의 욕망이 아닌 내면의 욕망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본질에 충실한 삶. 이것이 바로 미니멀리스트에게 주어지는 가장 좋은 선물이 아닐까.

 

 

사사키 후미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우리는 갖고 싶은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갖게 된 물건을 보관하고 유지하기 위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버리곤 한다. 그리하여 도구여야 할 물건은 어느새 주인이 되어 버린다. 영화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 역)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결국 네가 가진 물건에 소유당하고 말 거야."

 

내 사진이나 일기 같은 기록은 나 자신의 과거 자체와는 관계가 없다. 추억이 담겨 있는 사진과 기록을 버렸다고 해도 내 마음속에 있는 기억으로서의 과거는 남아 있다. 물건을 버렸다고 해서 과거를 버렸다는 식으로 과장할 일은 아니다. 만일 잊어버린 추억이라면 잊어도 좋은, 필요 없는 기억일 것이다. 필요한 인생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 나카자키 다쓰야, <소유하지 않는 남자>

 

자신이 소유한 물건에 만족하느냐 아니냐는 물건의 개수와는 관계가 없다.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물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 수많은 물건에 대한 조잡한 의식이 아니라 극히 적은 물건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소중하게 의식하라. 그렇게 물건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물건을 소유하는 만족감을 두 배, 세 배로 높여준다.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김화영, <행복의 충격>

엑상프로방스는 능률을 찾는 자, 시간이 바쁜 사람, 견문을 넓히려는 교양인, 소유의 노예들,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일체의 환상을 거부한다. ... 누구나 영원한 봄, 영원한 여름을 프로방스의 자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햇빛이 참으로 우리들의 눈이 아니라 프로방스의 속담처럼 '나의 살을 노래하게 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 모든 부질없는 허영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 지중해안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못 견디게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아니 적어도 많은 절망의 한구석에 아직 저 필사의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우리들의 건강한 육체가, 죄 없는 육체가 아는 행복감의 씨앗을 아직 죽이지 않은 자들만이 올 일이다.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모든 체계화된 종교는 미신적인 망상이다. 이 망상의 근원은 깊게 뿌리박힌 인간의 염원과 공포, 그리고 무지에 있다. 인간은 소유하고 싶은 권력과 아름다움, 완벽한 안전에 대한 이미지를 투영하여 그에 따라 신들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의 꿈에 노예가 되고 만다.

 

쾌락에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 아니라 망상이다.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주요한 적은 유한한 세계에서 가능한 그 이상을 얻으려는 환상인 과도한 욕망과 삶을 좀먹는 공포이다. ... 실제로는 꿈에 불과한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 마음을 파고들며 끝내 전소시키고 마는 그 망상적인 소유욕이 문제인 것이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삶의 방식을 바꾸면 몸과 마음이 바뀐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봐왔던 세상이 새롭게 다가온다. 어떤 하나를 단호하게 바꾸면 내 삶 전체가 변하는 것이다. 오늘 이들이 선택한 불편한 삶은 적은 소유로 넉넉하게 살아가는 소욕지족의 불교 정신과 맞닿아 있다. ... 과다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 관계의 그물망에서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작은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 부분 그대로가 곧 전체다.

 

수행은 대안 운동이다. 대안은 '그름'을 물리고 '바름'을 앉히는 일이다. 오염된 마음을 걷어 내고 청정한 마음을 모시는 일이다. 무한 소유와 소비에서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기 보다는 절제와 나눔에서 정신을 성숙시키고 성장하면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일이 수행이다. 서로를 착취하는 경쟁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생으로 사는 일이 수행이다.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부나 화려함같이 없어도 될 것을 찾지 말고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라. 육체의 욕구를 들어주면 줄수록 영혼의 힘은 약해진다. 현자와 성인들이 일생을 금욕적으로 살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돈 속에, 돈 자체 속에, 그리고 돈을 취득하고 소유한다는 그 속에 무엇인가 비도덕적인 점이 있다.

 

 

다카무라 토모야, <작은 집을 권하다>

소유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필요치 않은 물건을 배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그 어떤 물건보다도 우위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소유한 물건만큼 그에 상응하는 자금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 물건들이 우리 곁에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물건이 인간의 행동양식을 지배하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소유하는 공간 자체를 줄이고 쓸데없는 물건을 상대할 시간은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없으면 생활에 지장을 줄 만한 최소한의 물건과 진심으로 나와 함께하고 싶은 물건만이 마지막까지 남게 될 자신의 친구다. 이것이 바로 심플 라이프의 법칙이다.

 

 

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지음,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웬델 베리, <생활의 조건>

소유하는 것(집이나 직업, 배우자나 자동차)은 오로지 자기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교환될 수 있을 때에만 가치를 지닌다. 이는 끝없는 불만족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경제 과정이다.

 

 

제레미 리프킨, <3차 산업혁명>

과거의 세계관은 자연을 그저 대상으로 보았지만 새로운 세계관은 자연을 관계의 집합으로 본다. 과거의 관점을 특징짓는 것이 분리, 몰수, 해체, 감축이라면 새로운 관점을 특징짓는 것은 결합, 보충, 통합, 전체론이다. 예전의 과학은 자연에서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든는 방법에 몰두했지만 새로운 과학은 자연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과거의 과학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힘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새로운 과학은 자여과의 협력을 추구한다. 과거의 과학은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독립을 중시했지만 새로운 과학은 자연에 참여하는 것을 중시한다. 과거에 우리는 자연을 식민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약탈하고 노예로 만들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은 자연을 우리가 함께 돌보고 가꾸어야 할 공동체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을 소유하여 개간하고 이용하고 소유할 권리를 지양하고, 자연을 돌보고 존중해야 할 의무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자연이 지닌 효용적 가치보다는 자연이 지닌 본질적이고 고유한 가치가 점차 주목받고 있다.

 

3차 산업혁명은 대산업 시대 전설의 마지막 편이면서 동시에 다가오는 협업 시대의 첫 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3차 산업혁명은 경제사의 두 시대, 근면한 행동 방식이 특징이던 시대와 협력적 행동 방식이 특징인 시대를 잇는 과도기를 의미한다. 산업 시대가 규율과 근면한 노동, 권위의 하향식 흐름, 금융자본의 중요성, 시장의 작용, 소유권 관계를 중시했다면 협업 시대는 창의적인 놀이와 피어투피어 상호작용, 사회적 자본, 개방형 공유체 참여, 글로벌 네트워크 접속 등을 보다 중시한다.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나는 산업경제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소유를 향해 - 내 집, 내 시간, 내 장래, 내 아이들 - 밀고가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살았다. 그리하여, 나는 좌절감 속에서 지냈다. 왜냐하면 확실한 소유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촌공동체 속에서의 관계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갖는다. 첫째, 모든 것은 순환적으로 움직인다. 계절과 식물과 동물과 사람들도 순환한다. 모든 것은 죽음에 이르지만, 다시 태어남은 되풀이된다.

 

자연세계의 경이와 신비로움에 일상적으로 접촉하면서, 우리는 '소유'의 세계가 요구하는 것과 같은 '통제'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땅과 동물과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존을 영위하는 데에는 자연의 리듬과 조화를 이룬 노동과 보살핌의 섬세한 균형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나는 다만 하나의 피조물일 뿐, 결코 내가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종류의 활동 속에서 우리는 큰 친밀감을 누릴 수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런 종류의 삶을 통해서 내가 깨닫는 것은 우주의 움직임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고,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사실이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의 행복을 욕망의 규모와 소유의 크기로 계산해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행복 모형이라면 붓다가 제시한 것은 욕망의 축소, 단절, 무소유의 모형이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소유의 위력이 한층 커진 것은 소유가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유까지도 확대해준다는 산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술로 따지면 자유는 지갑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러나 붓다적 자유의 모형은 돈지갑과 관계없고 두둑한 지갑과는 더더구나 관계없다. 지갑의 노예는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니다. 소유의 즐거움을 내세우는 자본주의 행복론 앞에서 소중하게도 정확히 그 반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이 붓다의 행복론이자 자유론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욕망과 소유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

 

 

제레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일부 회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특정한 부동산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점수를 팔기 시작했다. 점수는 일종의 시간 공유 화폐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단위가 대체 가능한 화폐로 바뀌는 추세는 자원의 희소성보다는 시간에, 소유보다는 접속에 중점을 두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음을 의미한다. 고객은 점수를 산다. 점수는 시간 단위를 나타낸다. 이 점수를 가지고 투숙, 항공 여행, 유람선, 골프장, 자동차 렌트, 그 밖의 여행, 레저, 오락 시설 일체를 이용할 수 있다. 렌트, 시간 공유 콘도 구입, 점수 구입은 모두 <시간화> 사업의 다양한 방식이다. 이제는 부동산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의 접속권을 사는 시대다. 아파트, 콘도미니엄, 빌라 같은 시설을 지정된 기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이다. 빠르게 부상하는 네트워크 경제의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판매자-구매자 관계는 서서히 공급자-사용자 관계나 서버-클라이언트 관계로 바뀐다. 재산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접속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공산품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소유권을 가지는 것이 중요했지만 상업화된 전자 통신 기기와 온갖 종류의 문화 생산과 상품에 의해 점점 지배당하는 글로벌 경제에서는 경험 세계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접속을 통한 체험이 재산의 소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새로운 문화의 중개자는 개인과 문화 체험 사이에서 문지기 노릇을 한다.

 

탈근대에서 사람을 가르는 선은 소유가 아니라 접속이다.

 

자유에서 자율성을, 자율성에서 나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서 팔 수 있는 능력을 연상하면서 우리가 근대를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노동의 결실로 얻은 재산은 우리가 가진 자유의 징표로 여겨졌다.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부터 남을 배제하는 권리는 우리의 자율성과 개인적 자유를 지키는 최선의 길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에서 나온다. 공유하고 공감하고 포용할 수 없으면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류시화,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욕망의 자유가 아니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첫 번째 진리가 '행복의 부재'였다면, 그의 두 번째 진리는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행복을 원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므로.

원한다는 것은 곧 고통이다. 당신이 갈망하는 코끼리를 소유하려고 하는 시도, 조종하는 것,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모두가 고통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만일 당신이 전혀 원하는 것이 없고 계획도 필요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내려놓는다면 거기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당신은 이미 코끼리 등 위에 올라앉아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헬렌 & 스코트 니어링, <조화로운 삶>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적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류콴홍, <철학우화>

쇼펜하우어는 늘 인생은 고통과 불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런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인간의 생존의지에 있었지요. 이런 생존의지는 사람에게 있는 맹목적인 충동과 끝없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런 충동과 욕망이 생명의 본질인 고통을 결정해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며, 그도 안 된다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대개 이루어지기 어렵고, 사람은 더욱 강하게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지요. 인간의 충동과 욕망은 끝이 없어요. 하나의 욕망이 만족되면, 바로 다른 욕망이 생겨나지요. 만족은 잠시뿐 욕망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랫동안 행복할 수 없어요. 모든 만족은 또 다른 욕망의 출발점일뿐이지요.

 

 

존 로빈스, <인생혁명>

돈 모으기가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생각을 떨쳐버리면 더 위대한 삶, 그저 무언가 소유하고 얻으려 노력하는 삶을 넘어선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

 

 

김홍신, <인생사용설명서>

소유하려는 욕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보다 많이 갖지 않아도 비교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이 더없이 존귀하기에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박하게 살면서도 만족하고 행복해합니다.

 

 

강신주, <감정수업>

"박애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사랑의 원리는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 겨울 찬바람에 사랑하는 사람이 떨고 있다면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고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자발적인 가난', 이것이 바로 박애가 드러나는 행동 양식이다.

 

 

와타나베 이타루,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노동자가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면 스스로 상품을 만들어 팔 수 있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고, 그래서 사용당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력을 떼어 팔기 싫다면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면 된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여행자는 흔희 두가지 만남을 경험한다. 그는 여행길에서 많은 것을 보되 그가 본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 탐나는 것들이 제아무리 많아도 그는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유의 왕국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소유할 수 없다. 여행이란 그러므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낯선 자유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는 남의 나라, 그 타자의 고장에 와서 어렵쇼, 어찌된 건가, 거기서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만나듯 제 나라 자기고장,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욕망의 크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를 키우는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기루 잡기다. 그러므로 욕망의 크기를 줄여라. 그것만이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욕망이 제로일 때는 제로의 소유만으로도 너는 행복하다.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진실로 가치 있고 유용한 것이란 바로 그 기능을 다해 인간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란 뜻이다. 생명을 향해 끌지 않는 힘의 크기에 비례해서, 혹은 생명으로 끄는 힘이 손실된 정도에 비례해서 가치는 감소된다. 생명의 정반대 방향으로 읶느는 힘이 강할수록 물건은 무가치한 것, 곧 유해한 것이 된다.

따라서 물건의 가치는 그것에 대한 사람의 평판이나 소유된 수량과는 관계가 없다. 사람들이 그 물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에 따라, 혹은 그 물건이 사람들의 수중에 얼마나 들어 있는지에 따라 물건의 고유 가치가 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물의 조물주에게 부여받은 그 물건 고유의 힘은 인간이 중시한다고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경시한다고 감소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유익하거나 아니면 무익하도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정되었다.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지식과 정보는 소유와 축적의 대상이지만 지혜는 깨달음의 영역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다'와 '도달하다'의 합성어다. 낡은 사유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경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몸 사이의 '간극'이 없어야 한다. 간극이 없으면 깨닫게 되고 깨달음이 있으면 간극이 줄어든다. 고로, 삶의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곧 지혜다. 그러므로 지혜가 없이, 지혜에 대한 열정이 없이 잘 살 수 있는 방법,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길은 단연코 없다! 팔자를 고치고 싶은가? 그럼 가장 먼저 지혜를 사랑하는 훈련을 하라! 그러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용신이 무엇인지 절로 드러나게 될 터이니.

 

 

로버트 쉴러, <새로운 금융의 시대>

소유가 늘어날수록 그 만족감은 점점 줄어들 뿐이다.

 

 

 <데일 카네기와의 티타임- '창송'중에서>

사람들이 인생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물론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할 것이고,  온갖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간단히 말 할 수 있는 한 가지 공

통점은 바로 '원하는 것을 얻는 것' 이다.

사람들은 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지

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족을 찾지 못한채 일생을 마

친다.

설령 원하던 바를 얻은 사람이라고 해도 목표를 달성

한 후에는 종종 방향을 잃고 실의에 빠진다.

이것이 대부분 사람들이 처해있는 인생의 어려움이다.

그것은 우리가 목표를 찾아나서는 첫 마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기때문이다.

소유는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가 될 수없다. 우리가 원

하는 것은 그 추구한 바를 즐기며 맛보는 것이다.그것

이 인생에서 추구하는 진정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자식을 낳아 소유하려고 하면 행복해질 수 없듯이 다

른 대부분의 가치들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는 동안 생의 진정

한 목표를 잊어버린다.

목표가 누리는 것이라면  과정 자체도 당연히 누리고

즐겨야 한다.

자, 그렇다면 늘 기억하자. 목표가 설령 달성되지 않

아도, 또 달성되어도, 매일매일 추구하는 과정을  즐

겨야 한다.

목표를 끝내 획득하는 것도 즐겁지만, 무엇보다 날마

다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과정 자체에서  기쁨을 찾고

즐겨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활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얻고

싶은 것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얻는 것을 충분

히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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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자락에서 사람은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은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는 전부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본문발췌]

 

 

이성은 모순을 허락하지 않지만 감성은 모순의 마그마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누가 죽든 세계는 곤란해지지 않아요. 그러니 죽는다는 것에 대해 그렇게 요란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죽으면 내 세계도 죽겠지만, 우주가 소멸하는 건 아니니까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272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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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삶 가운데, 휴식과 회복을 위해 간혹 생각을 버리고 멍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본문발췌]

 

 

마음속에서 제멋대로 굴며 우리를 지배하는 생각을 멈출 수만 있다면, 스스로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마음이 오로지 '보다 강한 자극을 위해 내달리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을 멈추기 어려운 이유도 담담하고 은은한 행복감보다 부정적인 사고가 더 강한 전기 자극을 뇌에 주기 때문이다.

 

 

생각 버리기 훈련법은 오감을 갈고 닦아 실제적인 감각을 강화시키는 연습이다. 평상시에는 눈, 귀, 코, 혀, 몸의 오감에 집중하며 생활하는 훈련을 하다보면, 생각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 보통은 생각이 제멋대로 달리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결국 생각 자체가 혼란스러워져 둔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지나치게 많이 생각한 나머지 사고 장치에 녹이 스는 일을 막으려면, 생각 버리기 연습을 통해 충전 시간을 가져야 한다. 충전을 끝낸 뒤에는 예리함과 명철함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소유물을 줄이면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속을 들여다보기가 더 쉬워진다.

 

 

원래 논리 자체는 간단명료한 것이며 자의식이나 감정이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개운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마음의 의지가 명확하고 논리적인 사람은 말을 간결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논리로 설득하려는 불필요한 생각을 하지 않으며,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한다. 이런 간결함은 사물의 인과관계, 즉 원인과 결과를 넓은 관점에서 조망한 다음 깔끔하게 정리하는 힘에 의해 뒷받침된다.

 

 

세상일은 흘러가는 방향대로 흘러간다. 정해진 대로 돌아간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다. 이런 사실을 수용하고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과정이며, 마음이 평온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옳다는 강한 확신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을 굳이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아도 되고, 싸울 필요도 없다. 아니, 상대와 싸울 생각조차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에 스스로도 '자신감'이 없고 진심으로 납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상대를 납득시킴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한다. 즉 타인의 납득하는 표정을 보고, 찬성하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뇌에 주변 사람들이 찬성했다는 정보를 입력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논쟁 혹은 말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기 위해 자극적인 말이나 논리적으로 보일 법한 말을 사용하거나, 큰소리로 말하거나, 손동작을 크게 하는 등 상대를 납득시키려 노력하고, 이런 행동으로 인해 상대를 불쾌하게 만든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366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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