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2020년부터 시작하는 10년간에 인생에서 반세기를 거치게 될 것이고, 아마도 지금의 회사를 퇴사하고 인생 2막이 시작될 시기가 될 것입니다.
2010년대에는 세월호 사고와 같은 사회적 참사와 촛불혁명을 통한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같은 정치적 이슈들이 생각나고, 그 마지막은 민의를 조금 더 반영하기 위한 선거법과 정의로운 사회에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한 공수처법이 동물국회의 싸움 속에 통과되면서 마무리를 하고 있네요.
결정론적 세계관 보다는 불확실성 속에서 변화와 기대를 가져볼 수 있는 세상,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개선과 진보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나이와 함께 더해지기를 바라며, 겨울이 가면 봄이오고 어둠이 물러가면 아침해가 떠오르듯 즐거운 일, 행복한 일 가득하고 건강한 새해를 기원합니다.
굶주림의 극복을 넘어 탐욕에 들어서지 않기를.... 탐욕으로 쌓아올린 부와 권력은 그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 인생을 소비하게 된다.
[본문 발췌]
흑이냐 백이냐. 서로 싸우는 사람들이 허용하는 이 양극단 사이에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는 그 어떤 절충안도 내놓기가 어렵다.
과학은 한때 불쌍하고 비참한 인간이 궁핍과 열정과 야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 정신적 고뇌와 번민을 해결해 주는 처방전으로 등장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무참하게 저버리고, 과학은 이제 새로운 형태의 야만주의에 봉사하는 가장 무시무시하고 비도덕적인 무기가 되어 버렸다. 각종 형태의 야만주의가 끔찍하면 할수록 역설적이게도 더 과학적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쌓여 가는 시체 더미들 속에서 과학의 도덕적 파산을 목도하고 있다. 문제는 과학과 도덕이 사이좋게 병진하지 못한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말 끔찍한 일은 과학이 발달하는 것에 반비레하여 도덕이 후퇴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마침내 원시적 야수의 상태에 이르게 되리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인류가 자랑하는 과학적 진보가 현대 세계의 가장 위협적인 신화로 전락한 것이다.
인류는 지금 급격한 전환점에 서 있다. 이런 급격한 전환기에는 항상 절충안이 제시된다.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적당히 미봉하고, 관련 법칙들을 대충 끼워 맞추어 효율성만 높이는 방식으로 구원을 가져오려 한다. 절대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개선, 평가, 유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제 현대인들은 급격한 반전, 전선의 변화, 가치의 새로운 위계질서, 미덕의 재평가 등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충동 두 가지를 들자면 <굶주림>과 <두려움>이다. 굶주림은 인간으로 하여금 최대한 자신의 힘을 확장시켜 공략하고 정복하고 착복하여 먹이를 획득하도록 한다. 반면에 두려움은 이미 획득한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감정으로서, 자신이 얻은 것을 최대한 안전하게 오래도록 지키도록 몰아간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물론이고 좀 더 나아가, 우리의 자식과 손자들이 살게 될 후대 역시 고난의 시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희망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고난은 생명이 시작된 이래 줄곧 커다란 자극을 주면서, 선하고 악한 모든 충동을 자극하여 각종 장애물들을 뛰어넘게 만들었다. 장애가 존재하기 때문에 극복의 노력이 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계속 잠들어 있거나 꾸물대거나 제멋대로였을 힘들을 모두 동원하게되고, 이때 우리가 동원하는 그 힘들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나 더 나아가 인류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도약하기 위해 용수철처럼 몸을 긴장시킬 때 인류의 몸속으로 우주 전체의 생명 에너지가 흘러든다. 우리가 결실 없는 안락한 순간에 망각해 버리는 저 분명한 진실이 이럴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류는 비록 불멸의 존재는 못 되지만, 이런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면서 영원불멸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스트레스가 과하면 문제가 되지만, 어느정도의 스트레스는 자극을 통해 진보와 개선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본문 발췌]
자연은 고통을 이용해 변화를 만든다. 인간은 늘 어느 정도의 불만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진화해왔는데, 그 까닥은 다소 불만과 불안을 느끼는 생명체가 혁신과 생존에 가장 열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진 것만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오로지 가지지 못한 것으로만 만족하게 되어 있다. 이런 끊임없는 불만족이 인간이라는 종을 싸우고 분투하며, 번성하고 승리하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아픔과 괴로움은 인간 진화의 '오류'가 아니라 '특징'이다. 아픔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몸이 스스로를 자극하고 행동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5가지 가치
강한 책임감. 당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때로 억울하고,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은 순간에도 당신의 삶에서 일어난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당신의 믿음을 맹신하지 않는 것. 당신이 100% 옳다는 확신을 내려놓고, 언제든 실수하고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기존에 갖고 있던 믿음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당신은 독선주의 허세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실패. 우리 모두가 겪기를 두려워하지만 겪을 수밖에 없는 것. 그 실패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결점과 실수를 기꺼이 발견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발전한다.
거절. 당신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의 거절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거절을 통해 내 삶에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명확히 정의할 수 있다.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숙고하는 것. 조금은 멀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을 깊이 숙고해본 뒤에야 비로소 다른 모든 가치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장은 끝없는 반복 과정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 '틀린' 것에서 '옳은' 것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다. 틀린 것에서 약간 덜 틀린 것으로 나아간다. 또 다른 것을 알게 되면 약간 덜 틀린 것에서 그보다 약간 덜 틀린 것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이 반복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와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실제로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불확실성은 모든 진보와 성장의 뿌리다. 옛말에 이르길,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고 했다. 먼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무지를 인정할수록 배울 기회가 더 많아진다.
수많은 작은 실패가 모여 발전을 이룬다. 성공의 크기는 얼마나 많이 실패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이 뭔가를 당신보다 잘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당신보다 그 일에서 더 많은 실패를 맛봤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현대 소비문화는 우리가 더 많은 걸 원하게 만드는 데 선수다. 모든 광고와 마케팅의 밑바탕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명제가 깔려 있다. 난 오랫동안 이 말을 믿었다. 더 많이 벌어라, 더 많이 여행하라, 더 많이 경험하라, 더 많이 연애하라. 하지만 더 많은 게 꼭 바람직한 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적으면 적을수록 더 행복을 느낀다. 기회와 선택지가 지나치게 많을 때, 우리는 심리학자들이 '선택의 역설'이라고 부르는 것에 시달리게 된다. 우리는 선택지가 많을수록 어떤 선택을 하든 덜 만족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다른 모든 선택지에 신경을 쓰이기 때문이다.
빛은 주변을 환하게 밝혀 어둠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어둠속에 아름답게 빛나는 별빛을 쫓아 버립니다.
세상의 다른 양면이 주는 편익을 누리고,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잘못된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고루 살피고 상황에 맞게 선택하고 집중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본문 발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게도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공부는 변화와 창조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강의는 가슴의 공존과 관용(tolerance)을 넘어 변화와 탈주(desertion)로 이어질 것입니다. 존재로부터 관계로 나아가는 탈근대 담론에 관하여 논의할 것입니다. 당연히 '관계'가 강의의 중심 개념이 될 것입니다. 이 '관계'를 우리가 진행하는 모든 담론의 중심에 두고 나와 세계, 아픔과 기쁨, 사실과 진실, 이상과 현실, 이론과 실천, 자기 개조와 연대, 그리고 변화와 창조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 공간이 못됩니다. 인류 문명의 중심은 항상 변방으로 이동했습니다.
보르헤스는 '20세기의 디자이너'로 불립니다. 유럽의 탈근대 철학자들, 이를테면 데리다, 움베르토 에코, 미셸 푸코, 알튀세르 이런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아르헨티나 출신 보르헤스입니다. 그럼에도 막상 우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보르헤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입니다. 유럽의 지성을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모더니즘은 한마디로 이성주의입니다. 이성주의는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인간 이성이 모든 무지를 밝힐 수 있다. 이성의 촛불로 어둠을 밀어낼 수 있다는 신념입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촛불을 끄라고 합니다. "촛불을 꺼라! 촛불은 어둠을 조금 밀어낼 수 있을 뿐 그 대신 별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리얼리즘을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합니다.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정치적 자주성, 경제적 자립성, 문화적 자부심)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고 희망의 언어입니다.
3. 인간의 욕구나 관심의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진, 선, 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유의어] 유용성, 의미, 진가, 의의, 뜻, 무게, 쓸모, 중요성
(네이버 영어사전) value, worth
가치 있는, valuable / worthy / worthwhile / useful / of value
매우 가치 있는, invaluable / priceless
가치 없는, valueless / worthless / of no value
가치가 오르다, increase[appreciate; go up] in value
가치가 하락하다, decrease[fall; go down] in value / drop in value / depreciate (in value)
정직에 높은 가치를 두다, place a high value on honesty
저 그림은 몇 백만 원의 가치가 있다, That picture is worth millions of won.
지난주 외환시장에서 달러 가치가 하락했다, The dollar dropped in value on the foreign exchange market last week.
실패한다 하더라도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 It's worth a try though we may fail. / It is (well) worth attempting[trying] though we may fail.
우리 회사 주식의 가치가 상당히 올랐다, The value of our company's stock has appreciated greatly. / Our company's stock increased in value considerably.
달러 대비 원화 가치가 상승했다, The Korean won gained against the US dollar.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가치'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E. F. 슈마허 외, 골디언 밴던브뤼크 엮음, <자발적 가난>
생존을 위해서 직선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과 대비되는 논리인 곡선 논리는 삶을 가치있게 만든다. '적음이 곧 많음'이라는 말은 오직 곡선 논리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 삶에서 곡선 논리의 발견보다 더 즐거운 발견은 없다. 적음이 많음이라는 논리는 당신을 해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더 적게 요구할수록 걱정할 필요도 적어진다. 그리고 더 적게 염려할수록 당신을 둘러싼 온갖 관계들도 더 나아질 가능성이 높다.
가치 있는 것들은 모두 야생이며,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 소로
때때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 집착이 사람을 눈멀게 하여, 사물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집착이 없다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물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물건들로 가득찬 다락방을 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모든 것을 탐구할 수 있게끔 하는 내 의자, 신발로 가득 찬 벽장과 셰익스피어의 완벽한 가죽 제본 책들도 내게 줄 수 없는 의지를 원할 뿐이다. - 린다 코너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물론 오래 살아서 차비라도 벌어놓은 사람은 언젠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그때는 활동력과 여행 의욕을 잃고 난 다음일 것이다. 이처럼 삶의 가치가 가장 떨어지는 시기에 미심쩍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 시절을 돈 버는 일로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고국에 돌아와 시인 생활을 하기 위하여 먼저 인도로 건너가서 돈을 벌려고 했던 어떤 영국 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를 쓰기 시작했어야 했다.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좋은 가치는 1) 현실에 바탕을 두고, 2) 사회에 이로우며, 3) 직접 통제할 수 있다. 나쁜 가치는 1) 미신적이고, 2) 사회에 해로우며, 3) 직접 통제할 수 없다. 건전하고 좋은 가치의 예로는 정직, 혁신, 유연함, 자립, 후원, 자존감, 호기심, 너그러움, 겸손, 창조 등이 있다. 해롭고 나쁜 가치의 예로는 속임수나, 폭력에 의한 지배, 무분별한 섹스, 늘 즐기며 살기, 항상 주목받기, 혼자 있지 않기, 모두에게 사랑받기, 부자가 되기 위해 돈 벌기, 사이비 신을 위해 작은 동물을 제물로 바치기 등이다. 건전하고 좋은 가치는 내적으로 얻는 것이다.
강상중,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다차원의 축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리스크에 강합니다.
E. F. 슈마허, <굿워크>
"전문가란 점점 덜 중요한 것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쌓느라 결국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에 대해서만 잘 알게 되는 사람들"이라는 비판은 산업사회의 소위 전문화된 지식이 전문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공동체의 좋은 삶을 구현하는데도 지극히 무력하다는 슈마허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에너지에 대해서도 지금의 과학기술은 에너지를 오직 동력을 얻기 위한 물질로써만 취급할 뿐 에너지 그 자체가 바로 모든 생명의 시작이자 끝이며, 우리 삶의 생기이자 창조의 기쁨이라는 영적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하기만 하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인간의 감정이 깊은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세상과 깊은 접촉을 해야 한다. 이 의미와 가치에서 불행도 생기고 참된 행복도 생긴다. 이 세상에는 할 만한 일이 없다고 해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유능한 모든 젊은이들에게 나는 말하고자 한다. "글줄이나 끄적거려 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숫제 글을 쓰지 않으려고 힘쓰라. 모름지기 실사회로 뛰어 들어가라. 해적도 되고, 보르네오의 임금도 되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 보라. 뼈가 휘도록 일해야만 기본적인,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어려운 생활을 한번 해 보라."
강판권, <나무 철학>
자신을 드러내는 삶의 지향은 삶의 가치를 찾는 일이다.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면 그 사람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많은 사람이 가을에 잎이 물든 모습을 보면서 나무를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도 나무마다 각각 색깔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잎이 형형색색, 각양각색이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것처럼 사람도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야만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 내 정체성만큼 중요한 것이 다른 존재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 남의 입장을 고려해서 도와주더라도 상대가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진정한 배려라는 말이다. 이를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진정한 배려야말로 모든 생명체가 추구해야 할 숭고한 가치다.
목적지향적인 사람은 다양한 것에 가치를 두고, 하지 않은 일들을 시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치를 지니고 있고, 행복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자의 몫이다. 사람들 무척 부지런히 살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자신이 하는 일에 큰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가치 있는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내게 허락된 인생이, 내 삶의 잔고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삶이다.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확실히 인간의 가치는 자기 힘으로 변화시킨 것에 의해서만 측정되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가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남을 돕는 것...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는 동물이며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확보하고자 하는 동물이다.이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 조건이다.
인간은 인간을 발명해온 동물이다. 참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인간은 과학자를 발명했고 선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철학자를 발명했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다가 시인을 발명하고 예술가를 발명했다. 생명이라는 가치를 위해 인간은 의사를 발명했고 지금도 발명하고 있다. 인간은 사랑과 우정이라는 가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하는 인간을 자유, 정의, 평등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목숨도 내던지는 인간을 발명했다. 지금도 발명은 계속되고 있다.
인간이 추구해온 중요한 가치들 : 자유와 평등, 진리와 정의, 사랑과 우정, 공존과 상생, 배려와 보살핌, 생명 존중과 평화 애호 등등
파울로 코엘료, <아크라 문서>
군더더기를 모두 덜어내고 단순함과 집중에 초점을 맞추면 우아함을 얻을 수 있다.
단순함은 무엇일까? 단순함은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맞닿아 있다.
삶에서는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한 것들은 스스로 그 가치를 드러낸다.
장 도르메송,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우리는 인간이 허물이고, 망각이고, 약함이고, 실수인 관계로 인간을 사랑한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을 사랑해야 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쉬운 일일 것이다. 시간과 악이 존재하는 것은 용서가 있기 위함이다.
법정 스님, <텅빈충만>
"은퇴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죽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을하며 싫증을 내지 않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가치있는 것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일하는 것은 늙음을 밀어내는 가장 좋은 처방이다. 나는 날마다 거듭 태어나면 날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산마루가 아니고 산마루에 도달하는 그 일(과정)이다. 스마이드의 표현을 빌자면, 왕관이 아니라 왕국이라는 것. 등산의 기쁨은 내 발로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면서, 차분히 산봉우리들을 바라보고, 산의 향기를 맡고, 산의 맥박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 있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국가공동체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자유, 복지, 평등, 안전, 평화, 환경 등이다. 자유는 자유권적 기본권에 대한 침해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복지는 1인당 국민소득으로 표현되는 좁은 의미의 물질적 후생을 넘어 국민의 삶의 질을 가리킨다. 안전은 범죄뿐만 아니라 각종 재해와 실업, 질병, 노령 등 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는 군사적 위협에 대한 단순한 방어를 넘어 한반도에서 무력충돌과 전쟁의 위험이 항구적으로 제거된 상태를 가리킨다. 환경은 단순한 주거환경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자연생태와 생활환경의 정착을 의미한다.
마조리 켈리, <그들은 왜 회사의 주인이 되었나>
우리 경제의 기반이 되는 소유 모델을 새로이 설계하는 일은 기계적이고 법적인 작업이 아니다. 소유 구조는 하나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구현되다. 오늘날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구조는 개인주의, 성장 지향, 최대의 금전적 이익 추구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새롭게 떠오른 생태적 감수성은 새로운 핵심 가치들을 형성내고 있다. 지속 가능성, 공동체, 충족성 등이 그 가치다. 이러한 가치의 전환은 새로운 종류의 생성적 소유 구조, 근본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경제를 길러낼 온상을 창출해낸다. 휘발성을 띤 금융의 세계에 뿌리를 두는 대신, 이 새로운 경제는 살아 있는 지구, 인간의 공동체를 비옥한 토양으로 삼는다. 이러한 세계관을 구현해낸 가장 강력한 모델 몇몇을 공유지의 소유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이 부의 추구를 중심으로 삶을 조직하면, 실제로는 안녕감이 나빠진다고 말한다. 물질 중심 가치관이 강한 사람은 불안과 우울을 더 많이 느끼며, 알코올이나 약물을 더 많이 복용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 문제를 겪기 쉽다. 재산이 늘어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진짜 만족감을 주는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롤프 포츠, <VAGABONDING, 여행의 기술>
여행을 돈의 가치에 결부시킨다면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돈은 필요한 것이란 고정관념이 깊어갈 뿐이다. 또한 돈과 삶을 결부시킬 때 우리는 자유를 사기엔 턱없이 가난하다는 확신이 더해질 뿐이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낭만주의 결혼관은 '알맞은'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데키나 오사무 편저, <괴테 청춘에 답하다>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고, 방황도 하지 않는 자는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죽음>
제가 인정하는 비평가는 단 하나뿐이에요. 바로 시간이죠. 작품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건 시간이에요. 고만고만한 작가들을 사라지게 하고 혁신적인 작가들만 영원히 살아남게 만드는 건 시간이라는 비평가가 지닌 힘이죠.
정철, <한글자>
낭비란 비싼 칼을 사는 게 아니라 비싼 칼을 사서 칼집 속에 가둬 두는 것이다. 가격은 파는 사람 마음이지만 가치는 사는 사람에 의해 다시 매겨진다.
김영하, <읽다>
분명히 우리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뭔가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 뭔가를 남에게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한 미로와 타인이 경험한 미로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화폐경제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교환이 불가능한 것들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은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부모가 준 사랑을 계량화해서 자식이 되갚을 수는 없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도운 경험이 똑같은 형태로 내게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
착오를 정보로 인식해 합리적으로 처리한다면, 시행착오 속의 무작위적인 요소가 그렇게 무작위적이지는 않다. 모든 시행이 효과가 없는 정보만 제공한다면, 오히려 해법에만 집중할 수 있다. 결국 모든 시도는 가치가 있고 실패보다는 비용에 가깝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발견한다.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때때로 어떤 것의 가치는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에 달려 있다." - 니체
베르나르 베르베르, <웃음>
텅 비어 있는 것을 경험해 봐야 가득 찬 것의 가치를 알게 되죠. 수도사들은 말하는 것의 기쁨을 알기 위해 침묵 서원을 하고, 음식의 참맛을 알기 위해 금식을 합니다. 또한 정적을 알아야 음악을 제대로 즐기게 되고, 어둠을 경험해야 색깔의 참된 가치를 이해하게 되죠.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마음이 고요해지면 예전에는 잘 몰랐던 것들이 밝아지면서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내 안의 소망이라든지, 진정 꿈꾸는 삶의 방향이라든지, 추구하고 싶은 삶의 가치라든지, 혹은 오랫동안 눌러놓았던 감정이나 기억까지 되살아나 그것들로부터의 치유가 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면 수행자들이 깨닫고 싶어 하는 자기 본성도 밝아지게 됩니다.
자기 삶을 이끄는 가치가 무엇인지, 무엇을 했을 때 자유롭고 행복한지, 어떤 일을 하면 보람을 느끼는지 스스로 인지하고 삶을 선택해 나가야 하는데 인지를 못할뿐더러 그 선택을 자신이 하려 하지 않고 타인에게 묻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며 따라 하려고 한다. 더욱이 '남의 나'의 힘이 강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통해서 세우려고 한다. 아버지의 아들로,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으로, 아이들의 부모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는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타인에게 자신의 행복을 의탁하게 된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가 못하는가에 따라, 혹은 배우자가 승진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행복이 결정된다. 자기를 위한 사람을 제대로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희생적이면서도 의존적이 되기 쉽다. 게다가 아이나 배우자, 부모와의 경계선이 모호해져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함부로 넘으며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간섭하고 간섭당하며 다툼을 반복하게 된다.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죽음을 전제로 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 나무가 자라 꽃을 피우면서 즐기고, 열매를 익혀가면서 행복을 누린다. 완숙기인 가을이 되면 충분히 익은 열매는 떨어져간다. 그래서 또 다른 생명체들과 인간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인간의 일생도 그렇다. 연륜이 차면 옆에 남아 있는 다른 열매들에게 "내 때는 찼으니까 먼저 갑니다. 남은 시간을 즐기다 오세요."라면서 떨어져가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느끼며 절망에 빠져 불행과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자연의 섭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체적 기능이 끝나는 죽음에 대해 좀 더 이성적이고 운명적인 해석을 내려도 좋을 것 같다. 문제는 그 죽음을 전제로 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 다른 생명체들과의 차이인 것이다. 동물들은 동일한 절차를 밟아 죽음의 과정을 밟는다. 그리고 그 죽음은 의미를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예측할 수 있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의 삶에 대한 선택과 결단의 책임을 지게 된다.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회복된 사람이 인생의 차원 높은 새 출발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나 자신에게 물어보기로 하자. 조만간 죽음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앞으로 남은 시간의 빈 그릇에 어떤 삶의 내용을 채워가겠는가? 라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 일에 최선을 다하다가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값있는 인생을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택할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죽음을 예상하기 이전보다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게 될 것이다.
다니엘 슈라이버, <어느 애죽의 고백>
감사해야 할 수많은 이유가 있어도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은 삶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해 보면 삶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삶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그러니 우리는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 상투적이고 청교도적이며 투박한 표현이긴 해도 삶은 그 자체가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엔트로피가 에너지의 퇴화와 연계됐듯 부정가치는 가치의 퇴화와 연계될 수 있습니다. 엔트로피는 더 이상 물리적인 '일'로 전환될 수 없는 형태로 탈바꿈한 에너지를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부정가치'는 공용과 문화가 폐기된 결과 전통적 노동이 자급 능력을 상실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사이먼 사이넥,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어떻게'의 원칙. 어떤 기준에 따라 행동할 것인가. 정말 효과적인 가치나 지침을 원한다면 동사로 설정해야 한다. '성실'이 아니라 '항상 올바르게 행동하라.'라고 해야 한다. '혁신'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보라.'로 바꾸어야 한다. 추구하는 가치를 동사로 표현하면 개념이 분명해진다. 어떤 상황에서든 행동방침이 분명하게 선다. 책임감으로 서로를 결속시키고 평가도 할 수 있다. 의욕을 심어줄 수도 있다. 직원들에게 성실을 강조한다고 해서 고객에 대해 최선을 다해 이해하고 고객의 입장에서 의사결정을 하리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그러나 항상 올바르게 행동하라고 말하면 그렇게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신뢰는 시계태엽 같은 정확성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다. 성공을 반복할 때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바로 개인이나 조직이 그들의 직접적 이익과 무관한 일에 열정을 보인다는 느낌이 들 때, 신뢰는 시작된다. 신뢰는 가치와 동행한다. 돈을 많이 버는 가치가 아니라, 가치관 말이다. 가치value의 정의를 살펴보면, '신뢰가 전달된 것'이라 되어 있다. 자신만의 가치를 가진 사람을 억지로 설득할 수 없다. 무언가를 신뢰하는 누군가를 강제로 납득시킬 수 없느 것과 마찬가지다. 신뢰는 상대와 내가 동일한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다는 것을 서로 알리고 보여줌으로써 생겨난다. '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을'을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 앞서 살펴본 것을 다시 복기하면, '왜'는 신념이고 '어떻게'는 신념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이며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무엇을'이다. 이 셋이 모두 균형을 이룰 때 신뢰가 쌓이고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
최인철, <굿 라이프, 내 삶을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경험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만족과 기분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기억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삶 전체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정재승, <열두 발자국>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한 것처럼,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보다 자본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훨씬 빠르게 성장하면서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최윤식/최현식, <제4의 물결이 온다, 4차 산업혁명 부의 기회를 잡아라>
자유의지는 인간이 강제한 규범이라도 스스로 가치 판단을 해서 거역하거나 고칠 수 있는 의지와 행동이다. 왜 자유의지가 중요하고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울까? 자유의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행동의 자율성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치 판단에 대한 가설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가치를 판단한 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 가설을 세우고 기존 가설과 비교하여 더 좋은 가설을 선택하는 행위로 옮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즉 자유의지의 핵심은 선택의 자유도가 아닌 가치 판단의 자유도이다. 기존 가치 판단을 학습해서 새로운 상황에서 가치 판단 기준을 재설정하는 능력도 포함한다.
미치오 카쿠, <미래의 물리학>
감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값지며 무엇이 예쁜지, 그리고 무엇이 나에게 유익한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감정이 없으면 모든 것의 가치가 똑같아지면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된다. 감정은 사치품이 아니라 지능을 갖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리처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사고의 체계에서 정말로 다르다면, 태도, 신념, 가치, 선호와 같은 심리적 특성들에서 나타나는 문화간의 차이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생각의 도구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결과일 것이다.
새뮤얼 아브스만, <지식의 반감기>
측정과 오차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정밀성' 과 '정확성' 이라는 두 개의 단어가 떠오른다. 모든 측정 방식에는 이 두 가지 성질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으며, 어떤 측정값이 진정한 가치를 평가할 때는 이 두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태리 이글턴,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문학은 기적과 같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것은 신의 세계 창조 행위의 모방이자 반복이지요. 전능하신 신처럼, 예술가는 마술을 부리듯 무에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을 고무하는 것은 상상력이고, 상상력이란 현실성 보다는 가능성과 관련됩니다. 그것은 예전에 존재하지 않은 것을 불러내어 존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작은 신이라기보다는 벽돌공에 더 가깝지요. 새롭다고 해서 모두 다 가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신영복, <담론>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 공간이 못됩니다. 인류 문명의 중심은 항상 변방으로 이동했습니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동기이며, 그것은 특정한 종류라야 한다. 중요한 건 옳은 일을 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옳기 때문이라야지, 이면에 숨은 동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선한 의지가 선한 까닭은 그것이 어떤 효과나 결과를 낳아서가 아니다라고 칸트는 말한다. 그것은 널리 인정받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로 선하다. "비록 ... 이 의지가 원래 의도를 널리 퍼뜨릴 힘이 매우 부족하다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해도, ... 그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려면, "도덕법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덕법 그 자체에 기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동기는 의무인데, 칸트가 말하는 의무 동기란 올바른 이유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만약 의무가 아닌 다른 동기로, 이를테면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행동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가치가 부족한 행동이다. 비단 내 이익만이 아니라 내 바람, 욕구, 기호, 식욕을 채우려는 모든 시도도 마찬가지다. 칸트는 자신이 '끌림 동기'라 부른 것을 의무 동기와 대조해 비교한다. 그러면서 의무 동기에서 나온 행동만이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이덕무, <문장의 온도>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주 만물의 가치는 모두 균등하다. 단지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할 뿐이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기술합리성은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도 지배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엄청난 효율을 자랑한다. 하지만 거기서 아도르노는 어떤 전체주의적 위험을 본다. 가령 우리 앞에 연필과 공책이 있다고 하자. 둘은 사용가치가 다르다. 어느 게 더 귀중한지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교환가치를 위한 생산이다. 그래서 질적으로 다른 사물들을 약분 가능하게 만든다. 가령 사물의 가치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수가 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사물의 고유한 질을 지우고, 그것들의 가치를 화폐의 양으로 환원시킨다.
법륜 스님, <인생수업>
우리가 나이 들어가면서 후회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불행한 것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휘둘려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야 하고, 더 널리 이름을 알려야 하고... 숱한 욕망에 사로잡혀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허투루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세요. 죽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마음을 잃지 않아야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성공과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좋은 인생입니다. 늘 오늘의 삶이 만족스러우면 그게 곧 행복한 인생이지요.
세상 사람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내 관점을, 상대는 상대의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가치관을 갖고 있지만 저 사람은 저런 가치관을 갖고 있고, 나는 이렇게 느끼지만 저 사람은 저렇게 느끼고, 나는 이런 스타일로 일하지만 저 사람은 저런 스타일로 일합니다. 이건 다만 다를 뿐이에요. 직장에서 다양한 사람이 모여 일할 때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그냥 '저 사람은 저렇구나.'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겁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우리는 자신의 길에 집중해야 합니다. 돈이나 물질적인 부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본질적인 것들로 우리를 데려가는 길에.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대신 "이만하면 충분해." 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이걸로 충분할까?" 하는 생각을 중단해야 합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그것으로 충분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충분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날들이 '충분할' 때, 그 기분은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은 이대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런 기분이 드는 걸 막습니다.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에 충분하다는 느낌이 낯설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게 바로 삶이고, 난 더 이상 필요 없어." 하고 말할 수 있다면 큰 힘과 행운을 손에 넣은 것입니다.
우리는 회의, 식사, 영화 관람 또는 다른 활동을 할 때 시간을 정확히 지키기 위해 손목시계를 착용하고 시간을 맞춥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초, 분, 시간, 일, 주, 월, 년이라는 인위적인 구분이 시간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면, 각자 자신의 시간을 다르게 경험한다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시간의 가치가 개인적인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들... / 자신의 가치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고 / 검증받고 싶어 하는 욕망.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사람은 그 어떤 위대한 이념이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 때 행복을 느낀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존엄한 인간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엄성을 확신하는 것과 똑같은 무게로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림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특정한 견해에 물들어 있던, 그리고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사실을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이미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지,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은 상당한 정도로까지 해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역사적 해석은 항상 도덕적 판단 - 또는, 더 중립적인 어감의 용어가 좋겠다면, 가치판단 - 을 포함하는 것이다.
가치는 사실에 개입하여 그것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우리의 가치는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구비하고 있는 장치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주변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 주변 환경을 우리에게 적응시킬 수 있는 능력, 즉 역사를 진보의 기록으로 만들어온 저 주변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우리의 가치들을 통해서 마련된다. 그러나 인간과 환경의 투쟁을 과장하여 사실과 가치를 부당하게 대립시키거나 부당하게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 역사에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성취된다. 객관적인 역사가란 이러한 상호과정을 가장 깊이 통찰하는 역사가인 것이다.
사실과 가치에 관한 문제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진리(truth)'라는 단어 -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 양쪽에 걸쳐 있는, 그리고 그 양쪽의 요소들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단어 - 의 용법이다. 방금 말한 이중성은 영어만의 특이성은 아니다. 라틴계 언어들에서 진리에 해당하는 단어들, 즉 독일어의 '바르하이트(Wahrheit)'나 러시아어의 '프라우다(prauda)'는 모두 그와 같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떤 언어든지 단순히 사실의 진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히 가치판단도 아닌, 그 두 가지 요소를 함께 포괄하는 진리라는 이 단어가 필요한 모양이다. 내가 지난주에 런던에 간 것은 하나의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보통 그것을 진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에는 가치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다. 다른 한편,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독립선언문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명한 진리를 언급했을 때, 여러분은 그 말에는 사실에 관한 내용보다 가치에 관한 내용이 지배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 때문에 하나의 진리로 간주될 수 있을 그 말의 권리를 거부할지도 모른다. 이 양 극단 - 몰가치적인 사실들이라는 북극과 사실들로 전환하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가치판단들이라는 남극 - 사이의 어딘가에 역사적 진리의 영역이 놓여 있다. 내가 첫 번째 강연에서 말했듯이, 역사가는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이다. 그느느 그것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여러분은 정적인 세계에서라면 어쩔 수 없이 사실과 가치의 구별을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정적인 세계에서는 무의미하다. 역사는 그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며, 혹은 - 만일 여러분이 낡은 투의 단어에 트집을 잡지 않는다면 - 진보이다.
나루케 마코토, <교양고전>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라.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사실'이다. 용기를 갖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보여주면 주위 사람들도 그가 지닌 그 이상의 매력과 진실을 인정해준다.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사회가 한 가지 미학적 양식에서 다른 양식으로 충성심을 옮기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보링거는 그것을 결정하는 요인이 그 사회에 결여된 가치에 있다고 믿었다. 사회는 무엇이든 자기 내부에 충분하지 않은 것을 예술에서 찾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서은국, <행복의 기원>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보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더 가치를 두는 삶.... 인생의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사는 것이다.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이냐, 행복한 삶을 살 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첫째, 이 둘은 같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삶의 선택과 관심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잣대가 필요하고, 많은 경우 그 잣대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지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내 선택을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다. 내가 지금 좋고 즐거운 것보다 남들 눈에 사려 깊고 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앞에서 설명했듯 여기서 행복은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좋은 건축물은 소주가 아니라 포도주와 같다. 소주는 공장에서 화학 공식에 따라서 대량 생산되는 술이다. 소주는 생산하는 사람이나 지역의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반영되지 않고, 인간과 격리된 가치를 가지는 술이다. 건축물에 비유한다면 찍어 내듯이 양산되는 아파트나 지역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국제주의 양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포도주는 좋은 건축물 같다. 같은 종자의 포도라도 생산되는 땅의 토양에 의해서 다른 포도가 생산되고, 같은 종자의 포도와같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그해의 기후에 의해서 다른 포도가 만들어지며, 똑같은 재료라고 하더라도 포도를 담그는 사람에 의해서 다른 맛이 만들어지는 것이 포도주다. 따라서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서 세상에 단 한 종류밖에 없는 포도주가 완성되는 것이다. 건축도 이같이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땅 위에 특별하게 주어진 프로그램에 특정한 건축가가 개입되어서 단 하나의 디자인이 나와야 한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문화는 하나의 산물이다. 그리고 역사적이며 아이디어, 패턴, 가치 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선택적이고 학습되며 기호들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행동으로부터의 추상이며 행동의 산물이다. - 앨프리드 크로버, 클라이드 클럭혼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다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존엄한 것은 '가치value'를 따질 수 없다. 어떤 것의 '가치'는 사람들이 가치를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며 얼마만큼 높게 평가하는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도덕적 차원을 가진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선택을 나타내는 것만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인간다움humanity, 존엄성dignity이 그런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의지free will이다. 살든 죽든,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훌륭함, 존엄, 품격이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치이고 쓸모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타인의 상대적 가치 평가이다.
권오상, <돈은 어떻게 자라는가>
돈의 가치는 시간과 연동된다.
로버트 해그스트롬,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가치는 지속되기 힘들고 소문은 진실에 기반하는 일이 드물기에, 이 게임에서 이기길 바라는 사람은 누구든 인내와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 불운을 두려워하지 않고 충격을 견디는 법을 아는 사람은 천둥에 혼비백산하여 숨을 곳을 찾는 암사슴이 아니라 천둥에 포효로 응답하는 사자를 닮았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나를 아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세상을 균형 잡힌 눈으로 볼 수 있고 내 상처를 알아야 남의 상처도 보듬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이란 것도 나를, 내 감정을 섬세하게 느끼는 데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곤 한다. 글쓰기가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일도 그렇다. 때로는 조금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발 뒤로 물러나, 조금은 다른 각도로. 소중한 것일수록.
이정우, <개념: 뿌리들>
인간은 의미와 가치의 문턱을 넘어섰을 때 비로소 인간만의 독특한 세계를 형성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항상 의미의 지평에서, 가치의 지평에서 살아가는 존재죠.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를 계속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죠. 그래서 '선'과 '악'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만일 인간의 세상에 가치라는 것이 없다면 선이나 악도 없는 것이죠. 어떤 방식으로든 가치를 추구하기에 선과 악이 성립합니다. 가치가 없어도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성립하지만 인생은 성립하지 않죠. 인생이란 기본적으로 순수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가치와 행위의 문제이니까요.
철학적 언어 사용에 있어, 옳음의 짝은 그름이고 좋음의 짝은 나쁨이다. 선과 악은 이렇게 양의적으로 이해됩니다만, 두 경우는 매우 다른 내용을 뜻합니다. 옳음/그름은 초월적 가치 기준과 의무 개념을 함축하지만, 좋음/나쁨은 내재적 가치 기준과 행복/기쁨의 개념을 함축합니다.
우리는 니체적인 맥락에 서서 귀족의 가치와 노예의 가치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귀족과 노예는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구별이지 신분적 구별이 아닙니다. 귀족 집에서 태어나 저절로 귀족이 되고 노예 집에서 태어나 저절로 노예가 되는 그런 신분제도와는 상관없이, 한 인간의 삶의 방식에서의 귀족과 노예입니다. 귀족은 고귀한 가치 창조들을 위해 삽니다. 노예들은 세속적 가치들에 대한 집착을 위해, 나아가 세상에 대한 앙심怏心='르상티망' 때문에 삽니다. 공부하고 책을 쓰는 것을 예로 들어 봅시다.귀족의 가치를 가진 사람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행복해서 공부합니다.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 인간의 본성, 역사의 의미 등을 읽고 사유하는 데 행복을 느낍니다.그리고 자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또는 좋은 책을 남기기 위해서, 역사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 책을 씁니다. 그러나노예의 가치를 가진 사람은 출세하기 위해 공부합니다. 교수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합니다.책을 쓸 때에도 책이 얼마나 팔릴 것인가, 내 책이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인정받을 것인가, 자기보다 더 인정받고 있는 자를 누를 수 있을 것인가 등에 집착합니다.귀족의 가치를 가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순수한 기쁨, 창조에의 욕망, 인류에 대한 사랑이죠. 노예의 가치를 가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열등의식, 세속적 욕망, 남과의 비교입니다.물론 귀족의 가치와 노예의 가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라 해야겠죠.
원용찬/베블런, <유한계급론>
진짜 최상위 유한계층은 한 단계 더 뛰어서 호화요트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거나, 한 단계 내려가서 오히려 별장이 딸린 개인농장에서 땀 흘려 일한다. 손에 흙을 묻히고 일한다고 해서 노동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삶을 되돌아보고 노동의 참된 의미와 땀방울의 가치를 되새기는 일(wrork)이다. 노동(labor)은 임금과 대가를 요구하지만 일(work)은 한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고 개별적이며 창의적 작업에 속한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세상은 죽을 때까지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며, 삶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축복이다. 인간은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러 온 존재이며, 인생에는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러 길이 있다. 그리고 어느 길에서라도 스스로 인간다움을 잘 가꾸기만 하면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이런저런 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오염된 자아에 있다는 인식을 억누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이 된다.
롭 무어, <레버리지>
행복은 가치 있는 목표를 향한 전진이다. - 데이비드 리버만
알랭 드 보통, <불안>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생각은 혼자 두면 외롭고 무력하다. 생각은 소통을 통해 수정되어야만 남들에게도 의미 있는 생각이 된다. ... 모든 개인은 각자의 감성과 기억을 토대로 새로 흡수한 정보를 생각으로 형성한다. 그리고 생각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접하기 전에는 그 나름의 가치를 모른다.
손미나,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인생은 모든 순간이 그 고유의 가치가 있는 거란다. 겉으로 보이거나 소유하고 있는 것들과 상관없이 의지를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며 그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단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꿈, 생각, 그리고 현실. ... 지금 이 순간 이것보다 내게 가치 있는 일은 없다.
인간은 가치와 명분에 따라 움직인다. 그 일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조직 내에서 한 부품 같은 구성원으로 추락하며 동기도 의욕도 욕구도 사멸된다. 이럴 때 이런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급여와 더 많은 급여뿐이다. 하지만 <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들어가는 순간 이 조직은 위대한 조직이 된다. ... <무엇은> 단순한 저보다. 듣고 기억하면 그만이다. <어떻게>는 기능이다. 손과 몸의 훈련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왜>는 우리가 감정을 다스릴 열쇠다. 충성, 믿음, 정직 등 인간 본연의 가치를 갖게 하며 인간의 행동과 의사결정을 유도하고 이끈다. 우리는 안다고 행동하지 않는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일 뿐이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가치는 생산물이 완성되어야만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가치 창조는 생산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노동 투입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발생하며, 따라서 생산 과정이 아무리 길더라도 노동은 자본으로부터 임금을 받기 전에 자본을 증가시킨다.
사이토 다카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자본주의의 본질은 '차이를 만들어내어 차별화하는 것으로 가치를 창조'하는 데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는 물건을 소비하는 '욕망 긍정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자본주의의 진짜 적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대립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신의 뼛속까지 스며든 욕망'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다. 공간의 이동만이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로의 이동,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도 길이다.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라고 하는데 '떠도는 사람', '길 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방황하며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찾는 존재를 가리킨다. 호모 비아토르는 길 위에 있을 때 아름답다. 꿈을 포기하고 한곳에 안주하는 사람은 비루하다. 집을 떠나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진 사람만이 성장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작가는 인간 삶의 진실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어떤 상상이든 발휘할 수 있습니다. 진실만이 문학의 가치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니까요. 작가는 사회에 속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곤경과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때, 그러면서도 그 자신만의 고유한 독립성을 유지할 때 참된 창작의 자유를 누립니다. 20세기에 불어닥친 과도한 정치적 광풍에서 빠져나왔다면, 이제 다시는 문학을 이용해서 정치에 복무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학은 다만 인간 자신의 존재 확인을 위해 존재하며, 문학의 가치는 현실적, 도구적 이익 추구의 세계 너머에 있습니다. 이제까지 문학은 늘 그래왔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ㆍ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 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마이크 비킹, <휘게 라이프,>
국내총생산(GDP)은 어린이들의 건강과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감안하지 않는다. 국내총생산은 시의 아름다움이나 결혼의 영향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공개토론에서 다뤄지지 않는 주제들이나 공무원들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요컨대 국내총생산이 측정하는 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 로버트 케네디
벤저민 그레이엄, 데이비드 도드, <증권분석>
가치투자는 실제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증권을 사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1달러짜리를 50센트에 사는 식이다. 염가증권에 투자하면 "안전마진margin of safety"을 얻게 되며, 이는 실수, 부정확, 불운, 경제와 주식시장의 변동에 대비하는 완충재가 된다. 가치투자가 기계적으로 염가증권을 찾아내는 수단이라고 착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심층적인 기본적 분석, 장기 투자, 위험 축소, 군중심리 억제를 강조하는 종합투자철학이다. 주식시장에는 단기 수익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사람들은 가치에 상관없이 가격이 오른다는 희망을 바탕으로 투자가 아니라 투기에 휩쓸리게 된다. 대개 투기자들은 주식을 종이쪼가리로 간주하여, 기업의 실체와 평가 기준을 무시한 채 수시로 사고판다. ... 투기자들은 단기 수익에 몰두하지만, 가치 투자자들은 손실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위험을 회피하는 투자자들은 이익 가능성보다도 손실 위험을 더 중시한다. 자본을 어느 정도 모은 사람은 대개 이익이 증가할 때 얻는 기쁨보다 손실이 발생할 때 겪는 고통이 더 크다.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발견>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되고 보면 누구나 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 판단을 끄집어 낼 수가 있다. 이 문제를 갖고 우리들이 늘 논쟁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며, 가치 판단이 사람에 따라서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야마구치 세이코, <버리고 비웠더니 행복이 찾아왔다>
내가 생각하는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란 삶에서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더욱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미니멀리스트에게 물건의 많고 적음은 그저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를 소유한 물건이나 타인의 인정 등 외부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 삶,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삶이 바로 최소한주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인 것이다.
주변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여도 자신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에 가치를 두고 온 열정을 쏟는 삶.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미니멀리즘이자 꿈꾸던 삶의 자세.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가치 있는 삶은 대가를 필요로 한다. 불편을 거쳐야 만족은 깊어지고, 두려움 앞에 마주 서야 즐거움은 빛나게 마련이다. 두려움이 없는 게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용기다. 두려움과 맞설 때 당신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여행자가 갖춰야 할 이일곱 가지 항목 중 첫 번째는 "자신의 기준과 맞지 않는 기준을 인정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 - 프레야 스타크
임웅, <새롭지 않은 새로움에게 새로움의 길을 묻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치를 넘어 또 다른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폴더를 열어야만 한다. 새로운 폴더를 여는 열쇠, 인문학적 교양.
사사키 후미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애초에 물건은 도구였다. 석기나 토기처럼 본래의 기능을 위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필요한 물건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인간 사회가 전반적으로 풍족해지면서 어느새 물건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즉,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내면의 깊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심하면 우울증이나 자살로까지 내몰리게 된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만 가까스로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가치에는 딱 봐서 알 수 있는 외모의 가치도 있지만 내면의 가치도 있다. 하지만 내면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가 어렵고 알리는 데 시간도 걸린다.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물건을 통해 내면의 가치를 전달하는 편이 쉽고 빠르다. 하지만 물건으로 가치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넘쳐나는 물건에 얽매이게 된다. 자신의 가치를 알리는 물건이 어느새 자기 자신이 되어버리고, 물건은 계속 늘어난다. 이런 식으로 늘어난 물건은 거꾸로 자신을 공격해온다. 시간도 에너지도 물건에 빼앗기고, 예전에는 도구였던 물건이 자신의 주인이 된다. 이쯤 되면 이미 물건은 자신의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존재다.
물건은 기억해주는 주인을 잃을 때 가치도 함께 잃는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오는 것이다.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큰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 만일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은 한창 고난을 겪는 와중이더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의미 없는 삶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끔찍한 시련이다.
프란스 요한슨, <메디치 효과>
'새롭고'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독창적이다. 또한 그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실제로 '실현되었기' 때문에 혁신적이라고 말한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생명은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주체이다. 주체적인 생명은 남의 삶을 엿보거나 자기 삶을 헛되게 소비하지 않는다.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을 찾아 자기만의 느낌과 감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생명이다.
사실 판단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치의 판단이다. 모든 존재는 여러 원인과 조건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연기의 세계에 있으며, 만들지 않으면 본래 없는 것이라는 공의 세계라는 '사실의 판단' 위에 '가치의 판단'을 세워야 할 때이다. '자, 세상의 법칙이 이러이러하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가치의 판단이다. 사실의 판단은 이렇다. "차별과 평등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과 구조의 문제 등 여러 원인의 결과로 차별은 존재하고 있다." 그럼 가치의 판단은 어떤 것인가. "차별받는 사람은 고통스럽다. 사람은 저마다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차별은 본래 존재하지 않으나 인간의 탐욕과 사회구조가 그것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차별을 만들어 내는 원인을 소멸시키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로 한다." 깨달음은 사실의 판단'이며, 자비는 '가치의 판단'이다.
테미 스트로벨, <행복의 가격>
기존의 작은 즐거움들을 목록으로 만들어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소한 일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얼마나 자주 그 일을 하는가? 그것을 생활 속에 더 깊이 스며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은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은 즐거움을 찾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날마다 예기치 못했던 뜻밖의 즐거움들을 목록에 정리하는 건 더 좋다.
홍병선, 최현철, <과학 기술과 철학의 만남>
자연에 대한 관념의 낭만주의적인 변화에 근거하여 이상적 자연으로 복귀하려는 열망에서 고전시대가 재평가되고, 그리스 신화의 농업공동체인 아르카디아(Arcadia)가 이상향으로 설정되었으며, 물질지향적인 개발을 거부하는 '전원도시운동', '도시탈출운동', '야생자연 보존운동' 들이 시작된 것도 낭만주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또한 낭만주의 영향에 따른 '노동의 상품화 거부'를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노동은 것을 통하여 인간이 자연과 만나는 사건이며, 그러한 만남을 통하여 인간이 자연과 교통하고,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존재론적 사건으로 인식되어 왔다. 노동을 통하여 인간은 정신 계획을 자연물에 실현하며,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주체적, 능동적 존재로서 확인하는 자아의 실현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에 따른 대량생산과 시장경쟁체제 하에서의 '분업적 노동'을 통해 노동이 갖는 본질적 의미를 훼손시키는 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즉, 노동의 정신적인 의미는 폐기되고, 물질적 생산성에 의해 노동의 값어치가 매겨지고, 그 노동의 주체인 인간 역시 가격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과적으로 인간이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되는 상황을 낳게 된다. 하지만 낭만주의에서는 대량생산 체제와 시장경제체제에 의해서 야기된 노동의 상품화에 대항하여, 경제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의 노동을 거부하고, 노동의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마음의 평화는 올바른 가치를 낳고, 올바른 가치는 올바른 생각을 낳는다. 올바른 생각은 올바른 행동을 낳고, 올바른 행동은 고요함이 물질적으로 현현(顯現)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그런 작업-즉, 누가 보더라도 확연히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의 중심부에 고요함이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작업-을 낳는다. ... 만일 우리가 세계를 개혁하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이를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우선 정치적 성격을 띤 인간관계를 논의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인간 관계는 주체와 객체 및 양자 사이의 관계로 가득 찬 것, 필연적으로 이원론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오로지 개개인의 가치가 올바를 때만 사회적 가치는 올바른 것이 된다. 세계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일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우선 우리 자신의 마음과 머리와 손이고, 여기에서 시작하여 외부를 향해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나는 죽어서 썩으면 내 자아 중에 살아남는 것은 없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젊지 않으며 삶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사멸한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짓을 경멸한다. 행복은 언젠가 끝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진짜 행복이며, 사유와 사랑도 한없이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두대에 설 때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바로 그 자긍심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인간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올바로 고찰해야 한다. 설령 활짝 열린 과학의 창문들이, 처음에는 대대로 내려온 인간화한 신화들이라는 안락한 실내 온기에 적응되어 있던 우리를 덜덜 떨게 할지라도, 결국에는 신선한 공기가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드넓은 세상이 우리 앞에 장엄함을 드러낼 것이다. 버트런트 러셀, <내가 믿는 것>
윈델 베리, <생활의 조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전통적인 지식이 허용하는 수준에서 완전하게 인간으로서의 우리 스스로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에 입각한 지식, 계산, 계략 등의 방법을 통해서 상당한 범위의 작은 인간경제에 참여한다. 위대한 경제에 참여할 때 역시 그것들이 필요하지만 겸손, 연민, 인내, 관용, 이해력이 추가로 구비되어야 한다. 앞에서 암시되기는 했지만 두 경제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는, 인간 경제가 가치를 평가하고 분배하고 이용하고 또 가치 있는 것들을 보존할 수 있어도 가치를 직접 창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가치는 오로지 위대한 경제 안에서만 만들어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연의 것들에 가치를 덧붙이는 것이다. 우리는 나무를 합판으로, 합판을 의자로 변형시키면서 만들어낸 각각의 물건에 가치를 첨가할 수 있다. 선한 인간경제에서 이 같은 변형은 적절한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작업은 적절한 평가를 거쳐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선한 인간경제는 자신이 직접 만들지 않은 재료들과 힘을 비롯한 여러 가지 것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인간경제는 나무를 만들지 않았으며, 노동자의 지식과 재능도 만들지 않았다. 모든 단계에서 인간이 가미한 것은 인공적인 것이며, 기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교의 가치는 인간생활에는 중요할지 몰라도 어쨌거나 2차적인 가치일 뿐이다. 인간은 가치를 창출할 마음을 먹으면 맨 먼저 추상적인 가치를 만든다. 그 다음에는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 그릇되고, 압제적이고, 파괴적인 가치를 만든다. 예를 들어 돈의 가치는 의식주와 같은 생필품의 가치를 정당하고 분명하게 표현할 때만 진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 생필품들은 궁극적으로 보면 위대한 경제 안에서 창출된 것이다. 인간들 역시 금전적인 가치를 추상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만 인플레이션과 폭리를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생필품의 가치를 왜곡하고 자연과 인간 자원에 손실을 입힌다. 인플레이션과 폭리 그리고 이에 따른 손실은 어쩌면 인간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억지 부리는 데 대한 징벌쯤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제러미 리프킨, <3차 산업혁명>
과거의 세계관은 자연을 그저 대상으로 보았지만 새로운 세계관은 자연을 관계의 집합으로 본다. 과거의 관점을 특징짓는 것이 분리, 몰수, 해체, 감축이라면 새로운 관점을 특징짓는 것은 결합, 보충, 통합, 전체론이다. 예전의 과학은 자연에서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든는 방법에 몰두했지만 새로운 과학은 자연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과거의 과학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힘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새로운 과학은 자여과의 협력을 추구한다. 과거의 과학은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독립을 중시했지만 새로운 과학은 자연에 참여하는 것을 중시한다. 과거에 우리는 자연을 식민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약탈하고 노예로 만들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은 자연을 우리가 함께 돌보고 가꾸어야 할 공동체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을 소유하여 개간하고 이용하고 소유할 권리를 지양하고, 자연을 돌보고 존중해야 할 의무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자연이 지닌 효용적 가치보다는 자연이 지닌 본질적이고 고유한 가치가 점차 주목받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모든 사물은 그 각각이 통계적으로 보아 어느정도 입수하기 쉬운가, 절대수가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 가치의 순위가 결정된다. 이러한 사회구조를 고려하면, 어떤 사회계층이 어떤 종류의 사물 및 기호를 통해서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고 그 지위를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기능성을 특정한 사회상태에서 끊임없이 규정하는 것이 이 기능이다. 상층계급보다 사람수가 많은 계층이 어떤 범주의 기호를 손에 넣으면 상층계급측에서도는 그 수가 적은 다른 기호를 통해 차이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가치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이 인간의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하는 문화적 선택이며, 정의로운 사회의 길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점점 더 깊게 인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느끼는 고통은 물질적 빈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위기, 의미의 위기, 가치의 위기에서 더 많이 초래된다.
가치와 의미? 그래요. 지금은 돈이 가치의 전부를 표현하고 의미의 전부를 만드는 시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지금도 중요한 본질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소중한 의미는 돈으로 생산되지 않습니다. 한 예로, 사회봉사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돈을 받지 않고, 돈을 주면 버럭 화를 냅니다. 봉사활동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라는 직관을 그들은 갖고 있어요.
이런 가치 추구가 사실은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행복은 "내가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하고 쫓아다니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가치를 추구하자. 그러면 행복이란 녀석이 웃으며 따라오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 자기 삶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때는 자살을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입니다. 무가치와 무의미 상태에서는 그가 전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는 것들>
"이제 더 이상 '시간의 양'은 중요하지 않게 돼버렸어요. '시간의 질'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사회의 가치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구성원들의 행복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하고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유지가능성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한다.
리처드 왓슨, <퓨처 마인드>
우리는 행동은 줄이되 생각은 늘려야 한다.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생각보다는 직관적이고 창조적 생각에 더 많은 가치를 두어야 한다. 무엇보다 커뮤니케이션과 의사결정이 지금 당장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디지털 시대의 편리함에 맞서 싸워라.
제러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독창성, 기민성, 순발력만으로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 기술의 원가가 제로로 곤두박질치는 경제에서 가치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어야만 살아남는다. 머지않아 이런 급락은 거의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가치를 똥값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라는 것은 처음 개발한 제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만 창출될 수 있다.
접속의 시대는 <우리는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싶어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우리를 내몰 것이다. 접속이라는 것은 참여의 수준만이 아니라 참여의 유형을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누가 접속권을 얻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체험과 세계가 과연 접속할 만한 가치가 있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는 물음이다. 21세기에 우리가 만들어나갈 사회의 성격이 답변에 좌우될 것이다.
노암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2차 대전이 끝난 후 사회민주주의 사상과 다소 급진적인 민주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기업의 지배가 위협받자, 선전은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론과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언론기관과 홍보기관이 총동원되었습니다. 기업계 지도자의 표현대로 '개똥철학' 즉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천박한 것'에 집착하는 인생관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면서 장시간 노동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 타인과의 연대 등과 같은 위험한 생각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요컨대 인간의 가치를 완전히 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매일 거대 자본이 컴퓨터를 통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돈이 새로운 자산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주인이 바뀔 뿐입니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투자되는 자본은 소규모에 불과합니다.
이외수, <글쓰기의 공중부양>
우리는 대개 육안과 뇌안의 범주에서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심안과 영안의 범주에서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대가 만약 심안과 영안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천하만물들이 모두 보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중해 기행>
인간의 가치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향한 몸부림에 있다.
박노해, <다른길>
집이란 이렇게 사고 파는 부동산 가치가 아니라
내 삶의 무늬를 새기며 오래될수록 아름다워지는
지상의 단 하나뿐인 기억과 소생의 장소이니.
강신주의 <감정수업>
사랑의 감정은 바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 하고, 안전한 삶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미래에 살도록 만든다. 안전한 삶을 위해 현재의 열정적인 감정을 교살하는 삶,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고? 지금은 미래로 보이는 때도 언젠가 우리에게 현재로 다가올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미 현재가 된 미래에서도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느라 현재를 부정하는 삶이 이르게 되는 종착역은 바로 죽음이다. 이것은 유한한 삶의 진실이다. 그러니 현재 누려야 할 행복과 기쁨을 미래로 미루지 말라!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진실로 가치 있고 유용한 것이란 바로 그 기능을 다해 인간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란 뜻이다. 생명을 향해 끌지 않는 힘의 크기에 비례해서, 혹은 생명으로 끄는 힘이 손실된 정도에 비례해서 가치는 감소된다. 생명의 정반대 방향으로 읶느는 힘이 강할수록 물건은 무가치한 것, 곧 유해한 것이 된다.
따라서 물건의 가치는 그것에 대한 사람의 평판이나 소유된 수량과는 관계가 없다. 사람들이 그 물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에 따라, 혹은 그 물건이 사람들의 수중에 얼마나 들어 있는지에 따라 물건의 고유 가치가 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물의 조물주에게 부여받은 그 물건 고유의 힘은 인간이 중시한다고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경시한다고 감소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유익하거나 아니면 무익하도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정되었다.
우울한 청춘의 회상이라 할 수도 있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에 동의하기도 싫지만 밝음과 어두움,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등의 양면이 있기에 삶은 살만한 것이다.
[본문 발췌]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게 된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를 사로잡는 그날까지 우리는 죽음에 붙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을 뿐이지. 그런 짓을 해봐야 실망할 뿐이거든.
우리가 정상이라는 점은,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지.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그것뿐이었다.
시공간을 측정하고 공유하며 활용하는 능력은 다양한 편익과 발전을 제공하고 권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본문 발췌]
시간은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 규약이다. - 푸앵카레
우리는 오랫동안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똑같은 빠르기로 똑딱똑딱 흘러간다고 믿어왔다. 온 우주에서 시간이 똑같이 흘러가기 때문에 이곳의 시간과 저곳의 시간이 다르지 않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이 보편적인 믿음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이곳의 시간과 저곳의 시간이 같은지 아니면 다른지 알기 위해서는 직접 그 시간들을 비교해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시계를 가지고 시간을 관측해야 한다. 또 그렇게 시계를 바라보는 관측자가 움직이고 있을 때의 시간과 멈춰 있을 때의 시간이 같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의 기준을 빛을 이용하여 정하고 나면, 이곳의 시간과 저곳의 시간이 다를 뿐 아니라 움직이는 관측자이 동시와 멈춰 있는 관측자의 동시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더 놀랍게도 그렇게 상식과 직관에서 벗어나는 주장이 정교한 실험을 통해 확인되었다.
갤리슨은 중세의 연금술과 점성술 사이의 관계(점성술은 하늘을 올려다본 연금술이며, 연금술은 땅을 내려다본 점성술)를 빗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자기적으로 조절되는 시계 네트워크 속에서 우리는 제국과 형이상학과 시민사회의 이미지를 올려다본다. 시간과 공간과 동시성에 관한 아인슈타인과 푸앵카레의 절차적 개념의 철학 속에서 우리는 베른 특허국과 파리 경도국을 통해 지나는 전선과 기어와 펄스를 내려다본다. 우리는 기계속에서 형이상학을 찾아내며 형이상학 속에서 기계를 찾아낸다."
갤리슨은 시계와 지도로 은유되는 아인슈타인과 푸앵카레의 전기로 맞춘 시간을 통해 열차와 배와 전신이라는 광범위한 근대 기술의 하부구조와 실용주의와 규약에 의해 정의된 시간이 만나는 모습을 멋지게 그려낸다. 기술적인 시간과 형이상학적인 시간과 철학적인 시간이 아인슈타인과 푸앵카레의 전기적으로 맞추어진 시계에서 만난 것이다. 시간 맞추기는 지식과 힘이 만나는 근대의 교차점에 우뚝 서게 되었다.
사람 마음은 그 크기를 헤아릴 수도, 작동 원리나 법칙을 예상할 수도 없다. 마음 먹기에 따라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이 될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듯이.... 그래서, 인생에 마음 다스림 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본문 발췌]
묵언과 침묵은 다르다. 묵언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침묵은 상황에 따라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침묵은 견디는 것이기도 하다.
내 잣대로 상대를 재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내 선입견의 잣대가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할 것 같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면 상대가 더 잘 보인다. 이게 바로 정견의 지헤로움이 아닐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에게 기쁨과 사랑을 주는 일이다. - 톨스토이, <인생독본> '세 가지 질문'
나를 죽여야 내가 산다. 마음이란 허공과 같이 한없이 크다가도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을 만큼 좁아진다고 했다. 달마대사의 말이다. 왜 그럴까? 아인슈타인은 시간도 마음과 같이 고정불변하지 않고 빠르게 가기도 하고 느리게 가기도 한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빠르게 가지만 부담스러운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느리게 간다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바다와 같다고 느낀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거울처럼 고요하지만 바람이 불 때는 감정의 파도가 친다. 삶에 있어서 바람이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분별하고 집착하는 의지나 행위가 바람의 진원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뛰어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를 비우고 대상 혹은 상대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되지 않을까? 나를 죽여야 내가 사는 것이 아닐까?
말이든 글이든 표현은 나의 내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하는데서 나온다. 그러나 그 표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받아들이고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본문발췌]
표현의 기술은 자유롭고 자신 있게 내면을 표현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
가방끈이 얼마나 길든, 하는 일이 뭐든, 사람은 다 비슷한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잘 속이고, 쉽게 속아 넘어가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빠지고,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고, 믿고 싶은 것만 하는 동물. 우리는 모두 그런 불완전한 존재로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래서 누가 쓴 어떤 책이든 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작가는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진리와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쓴 글이라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답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 무엇이 내 것이고 뭐가 남의 것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틀에 박힌, 진부한, 상투적인 글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이렇게 생각하면서 글을 씁니다. "내 생각과 감정을 나다운 시각과 색깔로 써야 한다. 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진부하고 상투적인 생각과 표현에서 멀어져야 한다."
정치적 글쓰기에도 예술성이 중요합니다. 예술성은 문장의 아름다움과 아울러 독창적인 논리의 미학을 요구합니다. 그런 글을 쓰려면 생각과 감정에 자유의 날개를 달아 놓아야 해요. 고정관념과 도그마에 갇히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글을 쓸 수 없거든요.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다수 학설로 통하는 이론과 인식 방법을 답습하면 상투적이고 진부한 글을 쓰게 됩니다. 현실은 빨주노초파남보인데 흑백필름으로만 사진을 찍어서 현실이 그와 같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예술적으로 쓰고 싶다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정해진 도그마보다 자기 자신의 눈과 생각, 마음과 감정을 믿는 게 현명합니다. ... 예술은 자유를 먹고 피어납니다. 돈과 권력만 사람의 생각과 감각을 얽어매는 게 아닙니다. 고정관념과 이념의 교조에 생각과 감정이 묶이면 글이 진부해집니다. 뻔한 글, 지루한 글, 첫 문장만 보아도 마지막 문장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을 쓰게 됩니다. 독창적인, 기발한, 창의적인, 흥미로운, 반전이 있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진보냐? 보수냐? 내 이념을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할까?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이런 헛된 질문을 털어 버리고 오로지 아름다운 것과 옳은 것만 생각하면서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무언가를 주장하고 싶다면 반드시 근거와 논리를 제시해야 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주장만 하면 논쟁을 중단하는 게 현명합니다. 논쟁의 주제와 관계없는 것을 끌어들이지도 마십시오. ... 상대방이 토론하다 말고 화를 내면 한발 물러서는 게 좋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흔들린다는 증거입니다. 그럴 때 굴복을 강요하면 안 돼요. 그 정도에서 멈추고, 나도 더 생각해 볼테니 다음에 다시 대화하자고 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 논리적으로 완전히 격파했다고 확신하는데도 상대가 인정하지 않고 계속 우길 때도 화를 내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확신한다고 해서 그게 옳다는 보장은 없고, 단 한 번의 논쟁으로 옳고 그름 또는 승패가 가려지는 문제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성과 욕망을 다 가진 존재입니다. 욕망은 아름답고 또한 추악합니다. 이성은 고결하지만 때로 나약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빛나는 선과 끔찍한 악을 다 저지릅니다. 저는 인간의 사악함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악함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여서 악한 사람 자신도 스스로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회악이 생기면 그 원인을 나쁜 사람한테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악이 악한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소수의 사악함보다 다수의 어리석음이 사회악을 부르는 때가 더 많습니다. 정치적 글쓰기는 사악함과 투쟁하는 일이 아니라 어리석음을 극복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사악함과 어리석음은 모두 인간의 본성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승산이 높은 것은 어리석음과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서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덜 어리석어질 수는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말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지해야 해요.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 사회를 보는 관점,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 내게 중요한 욕망과 그것을 실현하려고 선택한 방법,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이 어떠하며 그게 남들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합니다. 이걸 모르면 남을 흉내 내는 글밖에 쓰지 못해요.
행복하게 살려면 나하고 잘 맞는 사람, 통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교감해야 합니다. 맞지 않는 사람과 다투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으니까요. 같은 이치로 내게 재미있는 책,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책, 내가 감동받는 책을 읽으면서 사는 게 최선입니다.
글을 잘 쓰려면 문장 쓰는 기술, 글로 표현할 정보, 지식, 논리, 생각, 감정 등의 내용, 그리고 독자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느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독자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능력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글쓰는 기술은 외모입니다. 내용은 사람이 가진 것이에요. 체력, 돈, 재능, 지식입니다. 감정 이입 능력은 성격, 마음씨,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람들은 흔히 외모를 부러워하고 돈과 지식을 선망하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격과 마음씨와 인생관입니다.
생활 글쓰기의 열쇠는 문장 기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우리는 보통 문장 쓰는 기술을 고민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마음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유한속에 잠재한 무한, 규칙을 벗어난 우연, 혼돈 가운데 보이는 규칙 등 세상은 모순 속에서 균형을 유지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시작, 그리고 추억과 계획을 통해 삶의 시간속을 달려간다.
[본문발췌]
"신은 무(無)를 가지고 이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무는 만물 속에서 배어나온다." - 폴 발레리
삶이란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무한한 시작들의 연속에 불과하다. 그리고, 두번째의, 세번째의, 백번째의 새로운 시작과 억번째의 새로운 시작은 최초의 유일한 시작을, 만물이 무에서 빠져나왔던 바로 그 태초의 시작을 가리킨다.
죽는다는 것은 우선 시간과의 단절이다. 시간은 공간 속에서 그리고 움직임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시간은 균일하지 않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부분은 어마어마해서, 이를테면 무한하거나, 혹은 적어도 한정할 수 없다. 과거와 미래가 바로 그것이다. 세번째는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하다. 현재가 그것이다. 게다가 이 세 부분 중 어느 것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주장할 수도 있다. 과거는, 그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가하면, 현재는, 그것이 찰나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의 영구성에도 불구하고, 사라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렇다. 시간의 모든 것이 이상하다.
물은 너무도 유연하고, 너무도 유동적이고, 너무도 소멸과 비존재에 가깝기 때문에 관념이나 감정과 흡사하다. 물은 또한 시간과도 흡사해서, 그림자와 모래같이 오랫동아 시간을 측정하는 데 쓰였다. 해시계, 모래시계, 물시계는 시간과, 만져저서는 알 수 없는 물질인 그림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준다. 그림자보다 견고하고 모래보다 유연한 물은 냄새도, 맛도, 색도, 형체도 없다. 물은 크기도 없다. 물에는 풍미도 없다. 물은 언제나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 물은 이미 무를 향한 장도에 오른 물질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물을 무와 가장 가까운 물질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림자가 그렇고, 그뿐만 아니라, 감히 말한다면, 공기도 물보다 더 부재하기 때문이다.
법은 만물 위에 군림한다. 시간은 법의 신비롭고도 적극적인 비밀요원이다. 필연성은 법의 행동 강령이다. 우연은 법의 광대이다. 원인과 결과의 게임은 법의 도구이고 법의 열쇠이다. 결정론은 약간 사팔뜨기에, 늘 정신을 못차리고,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바둑판 무늬 손수건을 들고 선풍기 아래로 이마를 들이미는 중개인이다. 그가 필요할 때면, 그에게 위급 전화를 걸거나 그에게 휘파람을 분다. 그의 봉사가 필요치 않을 때면, 무능하거나 권력의 남용을 들어 그를 집으로 돌려 보낸다. 시간과 만물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법에 순종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림자밖에는 볼 수 없는 숨은 법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살아온 단계마다, 인간은 적어도 그들로서는 열쇠를 지니지 못한 만물의 열쇠를 발견했다고 확신하곤 했다. 아인슈타인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간 지 3천 년이 지나면, 아인슈타인 시대의 프톨레마이우스만큼이나 황당하고도 한계가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숙명이다. 정의처럼, 그리고 선처럼, 진리는 시간에 속해 있지 않다. 시간에 속한 것은, 결국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
시간은 사유가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만물 속에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위격과 함께, 또 모순되게도 공간과 운동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리고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외양과 함께, 시간은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사유와 연관된 부분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이를 부인한단 말인가? 오로지 인간이 추억이고, 행동이고, 계획이기 때문에,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는 시간 속에서 펼쳐지고, 시간은 오직 인간의 사유 속에서만 군림한다. 사유와 시간은 일종의 존재의 비밀 요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만물 속에서 그들끼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유와 시간은 둘다 존재에게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자, 동시에 존재를 가리는 불투명한 베일이다. 사유와 시간은 드러내는 것이자, 감추는 것이다.
모든 지식과 철학의 근저에 있는 놀람과도 같이, 회의는 후퇴이자 불안이다. 무언가 '잘 나가지' 않는 것이 있다. 어딘가에 틈새 같은 것이 있다. 불쑥 치솟는 의문이 있다. 특히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면,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면, 놀람이란없을 것이며, 회의란 없을 것이다. 사유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모든 구멍 속에서, 틈색 사이에서, 결핍 속에서 생각한다. 인간은 늘 가장자리에서 생각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그것은 결코 끝이 없는 경계의 싸움이다. 인간은 욕구와 불확실성 속으로 뛰어든다. 인간은 고뇌 속에 죽는다. 인간은 놀라고 그리고 인간은 회의한다.
일어났을 수도 있었을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필연은 오직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우연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만물은 꿈의 오솔길이 무수히 있으니, 그 중 극소수만이 현실로 화(化)하는 정원이다.
우리는 현재에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추억을 통해 과거에, 계획을 통해 미래에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곳에서도 살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 결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결코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들을 상상할 수 있다. 상상은 사유나 혹은 자유와도 같이 우리를 신과 비견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 우리는 만물에 속하지 않는 것은 결코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다는, 그다지 놀랄 것도 없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 외엔 다른 권리가 없다. 우리는 결코 무엇을 창조해내지 않는다. 우리는 우주 만물의 편린들을 다른 방식으로 조작할 따름이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안다는 것보다 분명 열등하다. 사업에서, 정치에서, 기계 분야에서, 일상적인 사회 생활에서, 믿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다. 당신이 타야 할 기차가 8시 15분 전 기차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놓칠까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시험이나 콩쿠르를 치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믿는 것에 대한 질문은 주어지지 않는다. 아는 것에 대한 질문이 주어진다. 아드리아노플(터키 지명) 전투의 날짜, 시칠리아의 산물, 직삼각형의 성질이나, 질소의 성질은 믿음이나 견해의 영역이 아니라, 지식의 영역에 속한다. 모든 견해와 모든 믿음에는 모호한 면이 있다. 지식은 긍정적이다. 믿는 것은 불확실하다. 우리가 아는 것만이 진리라는 명칭에 걸맞다. 믿음은 부분적이고, 갈팡질팡하는, 간접적인, 근거 없는 지식이다. 지식은 의견의 불일치를 겪지 않는, 겨우 토론이나 겪는 믿음이다.
위대한 일에는 본성적으로 치욕스런 면들이 뒤섞여 있다. 위대한 일에는 피와, 폭력과, 거짓말과, 죽음이 그득하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름을 외우도록 강요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법정에 세워야 할 자들이다. 두 사람을 죽여 보라. 당신은 곧장 감옥행이다. 그러나 20만명을 죽여 보라. 당신은 권좌에 오르고 책에 기록될 것이다. 도덕이란 터질 듯한 야망을 지닌 자들에게는 한낱 딸꾹질이고, 사상과 군중을 조작하는 데 있어서 충분한 단계에까지 오르지 못한 자들에게는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바보 마늘기인 것 같다. 좋게든, 나쁘게든, 원하는 대로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체념과 동시에 경탄을 불러일으키고, 너무도 분명한 이 법칙들은 동시에 경악으로 빠져든다. 만물은 인간의 삶 속에서, 역사라는 이름을 지닌 체계의 이상한 면면을 취한다.
인간은 사유와 행동을 통해 놀랄 만큼 만물의 진행을 가속화시켜왔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그들의 행동과 사유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지 못한다. 닫힌 우주계에서는 모든 것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물에 대한 아주 자그마한 간섭이라 할지라도 누구도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는 아마존 열대림에서 날개를 퍼덕이면서 차츰차츰 일본에 태풍을 일으키는 나비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인간의 사유는 나비의 날개와는 또 다르게 강력하고, 그리고 또 다르게 예측불능이다. 인간의 사유는 만물의 질서를 뒤엎고 그것을 정복하나, 인간의 사유는 자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폴 발레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행한 것이 무엇을 행하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시간과 악이 존재하는 것은 용서가 있기 위함이다.
나는 하루 온종일 달린다. 움직이지 않고 있더라도 나는 달린다. 나는 추억과 계획을 통해 시간 속을 두루 달린다. 나의 유일한 미래는, 나 자신이다. 인간은 인간의 미래이다. 나의 유일한 한계는 시간이다. 나의 유일한 주인은 시간이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멈추게 할 수도, 늦출 수도, 피할 수도 없다. 나는 죽음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변화를 길들일 것이다. 나는 죽음을 우회함으로써 죽음에 맞서 싸울 것이다.
모든 것은 나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나는 매순간 시간과 공간과 만물과 인간을 지탱한다. 존재가 있기 때문에 만물이 있다. 존재가 있기 때문에 시간이 있다. 존재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있다. 나는 나의 가련한 아이들, 너희들을 사랑하고, 나는 너희들에 대해 감탄해 마지 않으며, 너희들의 무력한 위대함과 너희들의 절망에 처한 모습 그대로의 너희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무로부터 끄집어내어져 만물 속에 던져진 너희들이 측은하다. 존재로부터 나왔으나, 너희들은 모르는 것이 만물이다. 그토록 터질 듯한 교만과 그토록 많은 헛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결국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만물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에 대해, 가련하고 가련한 아이들아, 가련한 멍청이 천재들아, 너희들은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에대해서처럼 만물에 대해, 너희들은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