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중 잠깐의 걷기를 통해 여유를 느끼거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는데 탈것을 이용한 이동에서는 그 속도감 때문인지 걷기에 비해 풍경을 제대로 바라보고 느끼거나 사유의 시간을 가지기 어렵다.

 

섬의 어느 길 끝에 펼쳐지는 나무와 바다, 그 위에 떠 있는 다른 섬과 하늘의 풍경! 

 

봄이면 찾곤 했던 사량도 섬산행길 추억을 떠올리는 강제윤 작가의 <섬을 걷다> 

 

 

[본문발췌]

 

 

삶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누구도 삶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누구도 삶의 판관일 수 없다. 어제는 어제의 삶을 살았고 오늘은 오늘의 삶을 산다. 너는 너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전부다. 나는 늘 삶에 대해 서툴다. 그렇다고 내 삶이 실수투성이인 것을 책망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처음 살아보는 삶이 아닌가.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변치 않는 진리일 것이다. 눈에 보여지는 것만이 아닌 거기 담겨있는 진실일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 조화로움일 것이다. - 발문, 그리하여 아름다운 섦들의 풍경, 박남준(시인)

 

 

여행자들은 들떠 있으나 그들은 차분하다. 여행자들이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 그들은 지루함에 눈을 감거나 부족한 잠을 청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바다 풍경도 익숙해지면 일상이다. 풍경이 주는 감동의 대부분은 낯설음에 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 한자 길道 자는 辶(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은 "辶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나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나아가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했다. 하지만 도시의 길들은 자동차와 온갖 장애물의 위협으로 인해 더 이상 생각에 몰두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이 길들은 오로지 통로로만 기능할 뿐이다. 이런 오솔길, 흙길, 사람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들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아닐까. 나는 많은 길들이 '사유의 확장' 기능을 되찾을 때, 이 소란하고 얕은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더 깊고 고요해질 것을 믿는다.

 

 

실상 삶에는 방향 표지석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삶은 정해진 방향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그저 주어진 삶은 없다. 어디에서도 삶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삶일 뿐이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시작되고, 아침이 와도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달력이 바뀐다고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삶을 바꾸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그래서 한 해의 첫날 찬바람 속을 걷는 의미는 각별하다. 오늘은 섬의 동쪽으로 간다.

 

 

대개 섬에서 사람 사는 마을의 뒤편은 공동묘지다. 볕이 잘 드는 봉분 근처에 자리 잡고 앉는다. 사람은 죽음의 뒷마당에서도 삶의 앞뜰을 생각한다. 죽음 곁에서도 삶은 따뜻하다! 어떠한 삶도 양면이다. 슬픔의 뒷면은 기쁨이고, 상처의 뒷면은 치유다. 실연의 뒷면은 사랑이고, 절망의 뒷면은 희망이다. 어둠의 뒷면은 빛이다.

 

 

또 모자랄까 두려워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함, 그것이 이미 모자람일뿐. 그대들은 샘이 가득 찼을 때에도 목마름을 채울 길 없어 목마름을 두려워하진 않는가? - 칼릴 지브란

 

 

나누지 못하는 것의 근원은 소유욕이 아니다. 불안이다. 모자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다 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나누지 않고 자꾸 쌓아 두려 한다. 나 또한 그러하다. 배낭 하나 메고 떠도는 삶이지만 나날이 배낭은 무거워진다.

 

 

진정한 나눔이란 무엇일까. 자신이 쓰고 남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눔이 아닐까. 

 

 

돈을 더 많이 번다고 해서 삶에 대한 불안이 줄지는 않는다. 가득 채우고도 늘 모자랄까 두려워한다. 만족을 모르는 삶은 도시와 농어촌이 다르지 않다. 본디 일이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만드는 사회는 사악하다. 하지만 이 사회는, 국가는, 자본은 개인이 필요보다 더 많이 일하도록 끊임없이 선동한다. 개인에게는 온갖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강요하면서도 개인의 삶은 책임져 주지 않는다. 교육, 의료, 노후까지도 철저하게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사회. 그러니 소득이 늘어도 개인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는다. 개인의 불안은 사회의 불안을 잉태한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국가 안보와 체제 불안을 조장하는 가장 큰 반국가 세력은 자본과 국가 자신이다!

 

 

나는 인간은 '동물' 이라는 사실에 더 주목한다. 다시 말하자면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이다. - 이일훈, <모형 속을 걷다>

 

 

신들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신들의 힘이 아니다. 신을 믿는 자들의 믿음의 깊이다.

 

 

옛날 어선들은 눈으로 가늠해 가며 그물을 던졌으나 이제는 어군탐지기로 물고기들이 지나는 길목을 정확히 찾아내 그물질을 하니 치어까지 싹쓸이되고 만다. 어로 기술의 발달이 단기적으로는 이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바다의 파국을 앞당기는 독이 된 것이다. 수만 년, 누대에 걸쳐서 나눠 써야 할 자원을 단기간에 고갈시켜 버리는 과학 기술. 인간이 이룬 과학 기술의 발달을 인간이 통제할 수 없게 될 때 과학 기술은 더 이상 인류에게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사물은 객관적이지만 풍경은 주관적이다. 풍경은 속도에 종속된다. 걷는 속도, 탈것의 속도, 바람과 안개와 구름의 속도, 마음의 속도에 지배된다. 같은 풍경을 보고 와서도 그려 내는 풍경이 사람마다 제각각인 것은 사물을 관찰할 때의 속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속도가 놓치는 풍경을 걷기의 속도는 포획해 낸다.

 

 

사람의 마음이 늘 무겁거나 가볍기만 하겠는가. 무겁기가만 하다면 가라앉아 버릴 것이고 가볍기만 하다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추가 있기 때문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균형을 잡아 주는 균형추. 마냥 마음의 오고감에 휘둘리며 살 이유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이 너무 잔혹하지 않고 꿈이 너무 비현실적이 아닌 나라에서 살았으면. - 버나드 쇼, <존 불의 또 하나의 섬>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5346470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역사적으로 폭력 감소의 원인/요소 중 하나로 여성의 이해와 가치를 좀 더 존중하는 방향으로 문화가 변하는 "여성화"를 이야기하며 "여자와의 결혼이 젊은 남자를 문명화시킨다"는 생각은 진부하고 입에 발린 말로 느껴지지만, 현대 범죄학에서는 당연한 상식이란다.

 

 

[본문발췌]

 

 

여섯 가지 경향성

  • 첫 번째 변화는 수천 년의 규모로 벌어졌다. 인류 진화 역사에서 대부분을 차지했던 무정부적 수렵, 채집, 원예 농업(horticulture) 사회들이 약 5000년 전부터 도시와 정부를 갖춘 최초의 농업 문명으로 전이한 사건이다. 이와 더불어 과거 자연 상태의 삶을 특정지었던 만성적 습격(raid)와 혈수(feud)가 줄었고, 폭력적 사망의 비율이 5분의 1로 줄었다. 나는 이런 평화의 부여를 평화화 과정(Pacification Process)이라고 부르겠다.

  • 두 번째 변화는 500여 년에 걸친 과정으로, 유럽에서 제일 잘 기록되었다. 중세 후기부터 20세기까지 유럽 국가들의 살인율은 과거의 10분의 1에서 50분의 1 사이로 낮아졌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고전 <문명화 과정>에서 이 놀라운 감소는 조각조각 나뉘었던 봉건 영토들이 중앙 권력과 상업 하부 구조를 갖춘 큰 왕국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엘리아스에게 동의하는 의미에서 이 경향성을 문명화 과정(Civilizing Process)이라고 부르겠다.

  • 세 번째 변화는 수백 년의 규모로 펼쳐졌고, 17세기와 18세기 이성의 시대 및 유럽 계몽 시대에 시작되었다(고대 그리스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그리고 세계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선례들이 있기는 했다.). 전제 정치, 노예제, 결투, 사법적 고문, 미신적 살해, 가학적 처벌, 동물에 대한 잔학 행위처럼 사회적으로 용인된 폭력을 철폐하려는 조직적 움직임이 이때 처음 등장했고, 체계적인 평화주의도 이때 처음 움텄다. 역사학자들은 이 변화를 인도주의 혁명(Humanitarian Revolution)이라고 부르곤 한다.

  • 네 번째 주요한 변화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벌어졌다. 이후 50~60년 동안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목격했다. 강대국들과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축북 받은 정세를 긴 평화(Long Peace)라고 부른다.

  • 다섯 번째 경향성도 전투에 관한 것이지만, 좀 더 작은 차원이다. 오늘날 뉴스 독자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냉전이 끝난 1989년 이래 모든 종류의 조직적 충돌이 - 내전, 집단 살해, 독재 정부의 억압, 테러 - 세계적으로 감소했다. 나는 이 다행스러운 변화의 임시성을 인식하는 의미에서 이것을 새로운 평화(New Peace)라고 부르겠다.

  • 마지막으로, 1948년 세계 인권 선언 발기로 상징되는 전후 시대에는 더 작은 규모의 공격성, 이를테면 소수 집단, 여성, 아이, 동성애자, 동물에 대한 폭력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195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사람들은 일련의 운동들을 통해서 인권 개념으로부터 파생된 이런 권리를 - 시민권, 여성권, 아동권, 동성애자 권리, 동물권 - 옹호해 왔다. 나는 이것을 권리 혁명(Rights Revolutions)이라고 부르겠다.

 

다섯 가지 내면의 악마, 이른바 폭력의 내적 압력 이론을 암묵적으로 믿는 사람이 많다. 인간의 내면에는 공격성을 지향하는 추동이 있고 (죽음의 본능 혹은 피에 대한 갈증), 그것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에 간간이 방출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밝혀낸 폭력의 심리는 이와는 딴판이다. 공격성은 단일한 동기가 아니고, 하물며 점증하는 욕구는 더 아니다. 공격성은 환경적 유발 기제, 내부적 논리, 신경 생물학적 바탕, 사회적 분포가 서로 다른 여러 심리 체계들의 결과물이다. 나는 8장에서 그중 다섯 종류를 설명하겠다. 포식적(predatory) 혹은 도구적(instrumental) 폭력은 단순히 목적에 대한 실용적 수단으로서 동원된 폭력이다. 우세(dominance) 경쟁은 권위, 위세, 명예, 힘의 욕구로서, 개인 간의 마초적 허세로 드러날 수도 있고 인종, 민족, 종교, 국가 집단 간의 패권 경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복수심(revenge)은 보복, 처벌, 정의를 지향하는 도덕주의적 욕구를 부채질한다. 가학성(sadism)은 타인의 괴로움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ideology)는 공유된 신념 체계를 말한다. 보통 유토피아적 전망을 품고 있고, 무제한의 행복(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무제한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네 가지 선한 천사,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지는 않지만(선천적으로 악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으로부터 멀어져 협동과 이타성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동기들을 갖고 태어난다. 감정 이입(empathy)은 (특히 공감적 염려라는 의미에서) 우리로 하여금 남들의 고통을 느끼게 하고, 그들의 이해와 우리의 이해를 연결 짓도록 만든다. 자기 통제(self-control)는 충동적 행동의 결과를 예상하게 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절제하도록 만든다. 도덕적 감각(moral sense)은 같은 문화 속 구성원들의 상호 작용을 다스리는 일군의 규범과 터부(금기)를 규정하는데, 그래서 폭력이 줄 때도 있지만 오히려 늘 때도 있다(부족적, 권위적, 청교도적 규범일 때). 이성(reason)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만의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반성하게 하며, 더 나아질 방법을 찾게 한다. 그리고 본성의 다른 선한 천사들을 활용할 때 길잡이가 되어 준다. 나는 9장의 한 절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최근 역사가 말 그대로 덜 폭력적인 방향으로 진화했을 가능성, 즉 게놈의 변화라는 생물학적 의미에서 실제로 진화했을 가능성을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환경 변화에 맞춰져 있음을 명심하자. 이 책은 과거의 환경 변화들이 인간의 고정된 본성을 어떤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용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섯 가지 역사적 힘, 어떤 외생적 힘들이 인간 내명의 온화한 동기들을 선호함으로써 폭력을 다각적으로 감소시켜 왔는지 살펴보겠다. 이것은 심리학과 역사를 합치는 작업이다. 리바이어던(Leviathan), 즉 힘의 적법한 사용을 독점하는 국가와 사법 제도는 착취적 공격의 유혹을 줄이고, 복수의 충동을 억제한다. 또한 리바이어던은 각자 자기야말로 천사의 편이라고 믿는 이해관계자들의 자기 위주 편향을 피할 수 있다. 상업(commerce)은 모두가 이길 수 있는 포지티브섬 게임이다. 우리가 기술 발전 덕분에 더 많은 교역 상대와 더 멀리까지 물건과 생각을 교환하게 되면, 상대가 죽었을 때보다 살았을 때 내게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타인을 악마화하거나 비인간화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여성화(feminization)는 여성의 이해와 가치를 좀 더 존중하는 방향으로 문화가 변한 것을 말한다. 폭력은 대체로 남성의 오락이다. 따라서 여성에게 힘을 실어 주는 문화는 폭력의 미화에서 쉽게 벗어나며,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젊은 남성들의 위험한 하위문화를 덜 양성한다. 세계주의(cosmopolitanism)의 세력들, 가령 문해 능력, 이동성, 매스미디어는 우리로 하여금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시점을 취해 보게끔 하고, 그런 사람들까지도 공감의 대상으로 아우르도록 공감의 범위를 넓혔다. 마지막으로 인간사에 지식과 합리성을 더 많이 적용하는 능력은 - 이성의 에스컬레이터(escalator of reason) - 폭력의 순환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하고, 자신의 이해를 타인의 이해에 앞세우는 행위를 줄이고, 폭력의 개념을 재구성함으로써 폭력을 경쟁에서 승리해야 할 행위라기보다는 해소해야 할 숙제로 보게 한다. 

 

 

여행이 우리의 정신을 넓히는 것처럼, 우리의 문화적 유산을 있는 그대로 둘러보는 것은 옛 사람들이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살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싸움(quarrel)은 세 가지 주된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첫째는 경쟁(competition), 둘재는 불신(diffidence), 셋째는 영광(glory)이다. 첫째는 이득을 노려 침입하는 것이고, 둘째는 안전을, 셋째는 평판을 노린다. 첫째는 남에게 딸린 일꾼, 아내, 아이, 가축을 자신이 갖기 위해서 폭력을 쓰는 것이다. 둘째는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폭력을 쓰는 것이다. 셋째는 말, 웃음, 다른 의견, 기타 자신에게 직접 가해졌거나 친척, 친구, 나라, 직업, 이름에 간접적으로 가해진 멸시의 신호 따위 사소한 것 때문에 폭력을 쓰는 것이다.

 

 

홉스는 인간에게 특히 세 가지 분쟁(싸움)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득(포식적 습격), 안전(선제적 습격), 신뢰성 있는 억제(평판/보복적 습격)를 추구하기 위해서. 비국가 사회 사람들도 이 셋 모두를 놓고 싸웠다.

 

 

모든 폭력 연구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한 가지 현상은 대부분의 폭력을 15~30세 사이의 남자들이 저지른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포유류에서 수컷이 암컷보다 더 경쟁적이다. 게다가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에는 남자가 위계 서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평판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 평판은 성인기 초기부터 투자해야 얻을 수 있고 그 후에는 그 보상을 평생 누릴 수 있다. 남자들의 폭력성은 그 정도가 연속적 눈금으로 조절된다. 한쪽 극단은 남자들이 여자를 놓고 서로 겨루는 것이고, 반대쪽 극단은 남자들이 여자에게 직접 구애하고 아이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그 사이의 연속성 상에서 한 지점을 선택하여 자신의 에너지를 할당할 수 있다. 생물학자들은 가끔 이 연속선을 가리켜 '난봉꾼이냐 아버지냐(cads vs. dads)'라고 부른다. ... 여자와의 결혼이 젊은 남자를 문명화시킨다는 생각은 진부하고 입에 발린 말로 느껴지지만, 현대 범죄학에서는 당연한 상식이다.

 

 

수백 년 전 선조들은 자발성과 개인성의 징후를 모조리 찍어 눌러야만 스스로를 문명화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미 비폭력의 규범이 공고해졌기 때문에 이제는 구식이 되어버린 일부 금지들은 오히려 어겨도 괜찮다. 

 

 

문명화된 인간은 미개인보다 더 무례하다. 버릇없이 굴어도 머리통이 쪼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소설가 로버트 하워드

 

 

우세 경쟁에서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 쟁점은 정보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세는 포식과 구별된다. 우세 경쟁도 치명적 충돌로 격화할 수는 있다. 경쟁자들이 막상막하이고 서로 긍정적 착각에 물들었다면 더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세 경쟁은 과시 행동으로 마무리된다.(인간도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양측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무기를 휘두르고, 서로 벼량 끝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다가 한쪽이 꼬리를 내리면 끝이 난다. 대조적으로 포식에서는 끝내 욕망의 대상을 얻는 것만이 목표이다.

 

 

사법 체계는 비싸고, 비효율적이고, 피해자의 요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가해자를 강제로 투옥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폭력적이다. 요즘 많은 공동체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때로는 형사 재판을 보완하고, 때로는 아예 대체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조정자 앞에 나란히 앉는데, 가족과 친구가 동행할 때도 있다. 조정자는 피해자에게 괴로움과 분노를 표현할 기회를 주고, 가해자에게는 진심 어린 회한과 피해 보상을 전달할 기회를 준다. 흡사 대낮에 방송되는 진부한 텔레비전 방송처럼 들리지만, 이런 자리는 최소한 진심으로 뉘우치는 가해자에게는 바른 길로 들어설 기회를 주고 피해자를 만족시킴으로써, 너무나 느릿느릿한 사법 체계로 분쟁을 가져가지 않아도되도록 해준다.

 

 

비극은 두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해결책이 있고, 체홉의 해결책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결말에서는 무대에 시체들이 나뒹굴고, 아마도 저 높은 곳 어딘가에 정의가 어른거릴 것이다. 반면에 체홉의 비극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환멸을 느끼고, 씁쓸해지고, 상심하고, 실망하고, 철저히 망가진 상태로 끝나지만, 여전히 모두가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셰익스피어식이 아니라 체홉식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비극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 아모스 오즈

 

 

인생에는 구속을 벗어나 제 멋대로 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점에서, 이성은 우리에게 그 순간이 언제인지를 알려 준다. 그것은 타인이 제 멋대로 할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에서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때라고 말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063629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과학의 발전은 세상에 대한 절대적 진리를 향해서 누적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단절적인 변화를 연속적으로 겪는다."

 

새로운 발견이나 다른 방식으로 보고 해석하는 깨우침을 통해 과거의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도 폐기될 수 있다.

 

 

[본문발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physica)>,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와 <광학(Opticks)>, 프랭클린의 <전기에 관한 실험과 관찰 기록(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Electricity)>, 라이엘의 <지질학(Geology)> 등의 책들과 다수의 여타 저작들은 한동안 연구 분야에서의 합당한 문제들과 방법들을 다음 세대의 연구자에게 묵시적으로 정의해주는 역학을 맡았다. 이 저술들은 두 가지 본질적인 특성을 공유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것들의 성취는 경쟁하는 과학 활동의 양식으로부터 끈질긴 옹호자 집단을 떼어내어 유인할 만큼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재편된 연구자 집단에게 온갖 종류의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남겨놓을 만큼 충분히 융통성이 있었다. 이 두 가지 특성을 띠는 성취를 이제부터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용어는 '정상과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법칙, 이론, 응용, 도구의 조작 등을 모두 포함한 실제 과학 활동의 몇몇 인정된 실례들이, 과학 연구의 특정한 정합적 전통을 형성하는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을 시사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과학사학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또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역학'(또는 '뉴턴의 동역학'), '입자광학'(또는 '파동광학') 등의 제목으로 기술하는 전통들이다. 패러다임은 지금 거론된 이런 이름들보다 훨씬 더 전문적인 전통들도 포함하는데, 이런 패러다임에 대한 공부는 과학도가 훗날 과학 활동을 수행할 특정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런 공부를 통해서 과학도는 바로 그 확고한 모델로부터 그들 분야의 기초를 익혔던 사람들과 만나게 되므로, 이후에 계속되는 그의 활동에서 기본 개념에 대한 노골적인 의견 충돌이 빚어지는 일은 드물 것이다. 공유된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연구하는 사람들은 과학 활동에 대한 동일한 규칙과 표준에 헌신하게 된다. 그러한 헌신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분명한 합의는 정상과학, 즉 특정한 연구 전통의 출현과 지속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진리는 혼동에서보다는 실수로부터 더 쉽게 나타난다. - Bacon, Novum Organum (The Works of Francis Bacon의 VIII권)

 

 

정상과학의 목적은 새로운 종류의 현상을 불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의 창안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으며,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 창안된 이론을 잘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오히려 정상과학 연구는 패러다임이 이미 제공한 현상과 이론을 명료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나는 이들 세 가지 유형의 문제들, 즉 의미 있는 사실의 결정, 사실의 이론과 일치, 그리고 이론의 명료화 등은 실험과학과 이론과학 양쪽에서 정상과학 문헌을 모두를 차지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과학의 문헌을 모두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일반적이 아닌 비정상적인 문제들도 들어 있으며, 이런 비정상적인 문제의 풀이는 과학적 활동 전부를 특별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문제들은 요구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문제들은 정상연구의 진보에 의해서 마련된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출현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문제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압도적 다수는 보통 앞에서 요약한 세 가지 범주 가운데 하나에 속하게 된다. 패러다임 아래에서의 연구는 여타의 방법으로는 수행될 수 없으며, 그 패러다임을 버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 정의하는 과학의 실행을 중단한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곧이어 실제로 그러한 패러다임이 폐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폐기가 바로 과학혁명이 돌아가는 축이 된다(혁명[revolution]의 중심과 회전[revolution]의 축을 비유적으로 빗대어 쓴 말). 그러나 그런 혁명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기 전에, 거기에 이르는 길을 마련하는 정상과학적 연구 활동의 총체적인 조망에 관해서 개관할 필요가 있다.

 

 

발견은 변칙현상(anomaly)의 지각, 즉 자연이 패러다임이 낳은 예상들을 어떤 식으로든 위배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이러한 예상들은 정상과학을 지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변칙현상의 영역에 대한 다소 확장된 탐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그 변칙현상이 예상한 것으로 귀결되는 방식으로 패러다임 이론을 조정하는 경우에 종결된다. 새로운 종류의 사실을 동기화시키는 것은 이론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조정 이상을 요구하며, 그 조정이 완료되기까지, 즉 과학자가 자연을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깨우치기까지 새로운 사실은 결코 과학적 사실이 되지 못한다.

 

 

관찰과 개념화, 사실과 이론에의 동화, 이 두 가지가 발견 과정에 밀접하게 얽혀 있다면, 발견은 하나의 과정이며 시간이 소요되어야만 한다. 다만 관련되는 개념적 범주가 모두 미리 갖추어진 경우에 한해서, 그것을 발견하는 일과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 함께 즉각적으로 한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발견된 현상이 새로운 종류가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제시된 견해들이 진리임을 확신하지만, .... 오랜 세월 동안 나의 견해와 정반대의 관점에서 보아왔던 다수의 사실들로 머릿속이 꽉 채워진 노련한 자연사학자들이 이것을 믿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는데, 편견 없이 이 문제의 양면을 모두 볼 수 있을 젊은 신진 자연사학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 다윈, <종의기원>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 Max Planck, <과학적 자서전(Scientific Autobiography)>

 

 

과학의 발전은 직선적인 것이라고 말하기가 힘들어진다.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것은 덜 좋은 것에서 더 좋은 것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의 변화이다. 과학의 발전은 세상에 대한 절대적 진리를 향해서 누적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단절적인 변화를 연속적으로 겪는다. 이는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진화론과 유비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치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진화가 미리 설정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가 아니듯이, 과학의 발전도 궁극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312547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셀 수 없는 부나 영원한 시간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 행복할까? 삶은 부족하거나 결핍 가운데 충만함을 느끼기도 하고, 여러 제약과 제한 속에서 열정과 의미, 가치를 느끼기도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각자에게 있으며, 가장 큰 원칙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본문발췌]

 

 

나는 열정이 있는 삶을 원한다.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유롭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 인생이라는 짧은 여행의 마지막 여정까지, 그렇게 철이 덜 난 그대로 걸어가고 싶다. 내 삶에 단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그렇게 사는 게 나다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내가 좋다. 자유로움과 열정, 설렘과 기쁨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가져다 쓰자.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사람마다 인생을 다르게 산다. 평생 공부하는 사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돈을 버는 데 골몰하는 사람, 일만하는 사람, 권력을 쫓는 사람, 신을 섬기는 사람 등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삶이 있다. 어느 것이 더 훌륭한지 가늠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것이라면 어떤 삶이든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자유의지로 만들어낸 삶이 아니면 훌륭할 수 없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상상해보았다. 과연 행복할까? 그런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영생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말살한다. 영원히 산다면 오늘 만난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와 교감, 함께한 일들이 의미가 없어질 것만 같다. 그 모든 것이 다 굳이 오늘 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일이 된다. 어디에도 굳이 열정을 쏟아야 할 필요가 없다. 오늘 다하지 못하는 일은 내일 하면 그만이다. 오늘 무엇인가 잘못해도 상관없다. 다음에 다르게 하면 된다. 영생은 삶을 시간의 제약에서 해방시킨다. 그런데 시간이 희소성을 잃으면 삶도 의미를 상실한다. 유한성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든 것들이 무한 반복의 쳇바퀴를 도는 지루한 일상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 죽을 수 없다면 삶은 형벌이 될 것이다. 너무나 간절하게 영생을 원한 나머지 그것을 구하는 일에 몰두하느라 유한한 인생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환희와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는 영생을 원하지 않는다. 단 한 번만, 즐겁고 행복하게 의미 있게 살고 싶을 뿐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철학자 밀의 주장이다. 그냥 이 구절을 읽으면 그저 옳은 말로 보인다. 하지만 인생은 너무 짧은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그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그렇다. 내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누가 시키는 대로 또는 무엇인가에 얽매어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의 모든 순간은 죽음이라는 운명과 대비할 때 제대로 의미를 드러낸다.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까? 잘 죽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혼자 이런저런 대답을 생각해본다. 답을 꼭 찾아야 할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남은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다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이가 많이 든 후에도 철학적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킨 예외적 인물들은 공통점이 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젊은 사람들과 수평적으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나이가 많이 들어도 변함없이 개방적으로 생각하며 유연하게 행동한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음을 황홀하게 느끼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진정하고 싶은 것인가? 내 삶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는가?'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삶의 존엄도 없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존엄한 것은 '가치value'를 따질 수 없다. 어떤 것의 '가치'는 사람들이 가치를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며 얼마만큼 높게 평가하는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도덕적 차원을 가진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선택을 나타내는 것만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인간다움humanity, 존엄성dignity이 그런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의지free will이다. 살든 죽든,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휠체어를 타든 목발을 짚든 지팡이를 짚든 간에 그 삶은 언제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사라지면,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깨닫게 되면 그때가 죽을 때인 거지요. 전 지금처럼 살아가는 시간이 과연 저에게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많이, 아주 많이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고통은 아무 가치가 없고 제 고통의 원인 역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제때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면 그 아픔은 인간적인 수준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죽는다는 건 단지 그런 거예요. 태양이 제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를 새겨두는 것처럼 각자 가지고 있는 좋은 추억을 이 세상과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에 남겨두는 것, 잠드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원망도 없이 그저 피곤에 지쳐 고요하고 평온하게 눕는 겁니다. 그러나 죽음을 그렇게 느끼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인간적이길 바란다고 할 만큼 굉장히 자유롭고 선해야 겠지요. 안락사, 또는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려면 진정으로 인간과 삶을 사랑할줄 알아야 하고 선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 라몬 삼페드로.

 

 

훌륭함, 존엄, 품격이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치이고 쓸모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타인의 상대적 가치 평가이다.

 

 

행복은 사람에서 기쁨을 느끼고 자기 삶에 만족하여 마음이 흐뭇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언제 이런 흐뭇함을 느끼게 되는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행복을 느낀다. 

 

 

홍사중 선생은 아름답게 나이를 먹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일흔여덟에 쓴 수필집에서 그는 밉게 늙는 사람들의 특징을 정리했다. -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

  • 평소 잘난 체, 있는 체, 아는 체를 하면서 거드름 부리기를 잘 한다.

  • 없는 체 한다.

  • 우는 소리, 넋두리를 잘 한다.

  • 마음이 옹졸하여 너그럽지 못하고 쉽게 화를 낸다.

  •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한다.

  • 남의 말을 안 듣고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홍사중 선생이 예시한 '밉상짓 목록'은 젊은이들에게도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 된다. 만약 다음과 같이 정반대로만 한다면 노인이든 청년이든 똑같이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

  • 잘난 체, 있는 체, 아는 체 하지 않고 겸손하게 처신한다.

  • 없어도 없는 티를 내지 않는다.

  • 힘든 일이 있어도 의연하게 대처한다.

  • 매사에 넓은 마음으로 너그럽게 임하며 웬만한 일에는 화를 내지 않는다.

  •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신중하게 행동한다.

  •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남의 말을 경청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150363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최소한의 경제적 자유, '금전적 문제에 의해 내 살밍 흔들리거나 좌지우지되지 않는 정도의 경제적 자유'... 그 선을 넘어갈 때, 자유가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될 것이다.

 

 

 

[본문발췌]

 

투자란 '스스로 투자의 철학이 있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투자할 줄 아는 사람'이고, 투기꾼은 "왜 투자를 하는지 이유를 모르면서 아무 때나 투자를 하는 사람'이다.

 

 

일반 직장인의 경제적 목표란 금전적으로 큰 문제는 물론, 걱정 없이 남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정도가 이상적이라 봅니다. 즉, 죽는 날까지 자식들에게 손 안벌리고, 끼니 걱정하지 않으며, 마음 편히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수준, 더 나아가 2~3년에 한 번 정도는 아내(혹은 남편) 손잡고 해외 나들이 갈 수 있다면 더욱 금상첨화겠죠? 또한, 자식들 기념일이나 손주들 축하할 일이 생겼을 때 어느 정도 보태줄 수 있는 형편이라면, 경제적으로는 꽤 괜찮은 수준이라 할 수 있겠죠? 저는 이 수준을 일반 직장인이 기준으로 삼아야 할 '최소한의 경제적 자유', 즉 '최경자'라 생각합니다. 즉 금전적 문제에 의해 내 삶이 흔들리거나 좌지우지되지 않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주인 혹은 돈을 능동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최소한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사거나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 본능이 요구하는 소비패턴을 모두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일정 기간 계획을 세워 해낼 수 있는 수준 정도라면 괜찮다고 보는 겁니다.

 

 

일은 책임과 부담감의 일이 아닌 놀이로서의 일이 되어야 진정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 죽는 순간까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진짜 일입니다.

 

 

행복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시도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때, 현재와 미래의 행복은 우리 인생의 여유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성공의 기준은 철저히 자신의 만족에 두어야 합니다. 나이 들어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았을 때 만족스러운 삶이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삶입니다. 비록 부자가 되진 못했을지언정, 후회 없는 삶,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든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행복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 어느 것 하나도 놓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대신 조건을 하나 드렸죠. 절대로 돈과 행복을 같은 선상에 놓으면 안 된다고요. 19세기말 영국의 사상가이자 비평가였던 존 러스킨은 저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부란 돈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일상을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대하고 그 안에서 기쁨이 되는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태도 혹은 욕구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행복은 일상의 발견에서 시작됩니다. 현재의 행복은 현재에 온전히 집중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내 일상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을 통해 발견이라는 쾌거를 이룰 수 있는 거죠.

 

 

일상을 소중히 여겨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도전하여 새로운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할 것이며, 소중한 시간을 아껴 알차고 의미 있게 활용하여 나란 존재 혹은 내가 만들어 놓은 무언가를 이 세상에 남길 수 있어야 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293239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매화, 복숭아꽃, 수선화, 개나리, 천리향, 동백, 민들레... 집 안팎으로 찾아온 봄! 똘이와 산책.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미나리쭈꾸미 초무침, 부추 부침개, 쑥떡, 풋마늘 김치와 장아찌, 하얀민들레 김치, 쪽파김치... 봄밭이 내주는 제철 식재료들!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남의 허물을 이야기 하기 전 나를 먼저 돌아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겸손과 배려의 부족, '나는 모두 옳다'는 생각, '확증편향' ... 나를 망가뜨리고 관계를 망가뜨리는 생각, 삶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

 

 

[본문 발췌]

 

 

"전신마취를 하면 인간은 그때 그냥 죽는 거야. 문서를 복사하면 열화가 일어나듯이 오랜 시간 마취됐다가 깨어난 사람은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야. 일종의 복사물인 거지. 도마뱀의 꼬리도 잘리면 다시 자라나긴 하지만 원래 크기로는 자라지 않는다잖아." 오빠다운 말이죠. 오빠가 거제도의 조선소에서 일했던 건 아시죠? 얼마 전 정리해고를 당했어요. 요새 그쪽이 다 어려워요. 회사에서 잘리던 날, 회사 담벼락에 노조가 붙여놓은 플래카드를 봤대요. '해고는 죽음이다.' 그걸 보고 오빠가 뭐라고 했는지 저는 알아요. "아니지, 죽음이 해고지. 해고된다고 죽는 것은 아니지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까" 명언이나 상투어를 뒤집어서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은 오빠의 오랜 버릇이거든요."해봐, 이상하게 다 말이 된다니까." 오빠가 사람들에게 장담하면 그때마다 사람들이 이것도 해보라, 저것도 해보라며 문장을 던져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오빠는 빙글빙글 웃으며 "즐길 수 없다면 피하라"고 답하고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어린왕자>의 유명한 구절을 제시하면,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다면 그게 바로 사막이다"라고 받아요. 가끔 어떤 격언은 뒤집어놓으면 더 의미심장해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금이 침묵이다' 같은 말이 그래요. 오빠가 해고를 당하던 날, 인사팀의 입사 동기가 그러더래요. "힘내라. 위기가 기회라잖아." 오빠가 뭐라고 했을지 언니도 이제 아시겠죠? " 웃기시네, 기회가 위기야." - '오직 두 사람'

 

 

언니, 제가 좋아하는 농담이 하나 있어요. 전에 어떤 일간신문 만화에서 본 건데요. 어떤 남자가 교통방송에서 뉴스를 들어요. 고속도로 어느어느 구간에 역주행을 하는 승용차가 있으니 일대를 운행하는 차량들은 모두 주의하라는 거예요. 그는 문득 그 방면으로 출장을 간 친구가 떠올라서 전화를 걸어요. 야, 그 부근에 역주행을 하는 미친놈이 하나 있대. 조심해.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한둘이 아니야. 얼른 전화 끊어. 다들 충고를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 중 하나였을 거예요. -'오직 두 사람'

 

 

"Other People's Money, 즉, 남의 돈 만세!라는 뜻이죠. 월스트리트의 뱅커들은 모든 것을 남의 돈으로 합니다. 남의 돈으로 투자하고 남의 돈으로 빌딩을 짓고 남의 돈으로 밥을 먹지요. 자기 돈을 쓰고 자기가 위험을 감수하는 놈들을 우리는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OPM이라.... - '옥수수와 나'

 

 

"난 언제나 현재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여기만 지나가자. 그럼 나아질 거야. 그런데 늘 더 나빠졌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나이가 어릴수록 더 행복했어요. 그럼 지금 이 순간도 최악이 아닐 수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그래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에서는 가장 젊고, 제일 괜찮은 순간일 수 있다는 건데.... 우리 모두 여기서 늙어가다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처음 들어왔던 때가 그래도 좋았어. 그땐 젊었고, 희망도 있었다." - '신의 장난'

 

 

"고등학교 때 담임이 만날, 우리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원했던 내일이다. 같은 헛소리르 칠판에 적어놓곤 했어요. 그 시절 노트에 보니까 내가 이렇게 적어놨더라구요. 그토록 원했던 내일도 막상 오면 헛되이 보낸 어제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너무 비관적인가요?" - '신의 장난'

 

 

문학에 어떤 역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언어의 그물로 엮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문학은 혼란으로 가득한 불가역적인 우리 인생에 어떤 반환의 좌표 같은 것을 제공해줍니다. 문학을 통해 과거의 사건은 현재의 독자 앞에 불려오고, 지금 쓰인 어떤 글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예감합니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다. 팩트 따윈 모르겠다. 그냥 그들을 느낀다.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071674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코로나19로 바깥 나들이를 자제하는 요즘, 봄볕에 날씨도 풀린 것 같아 주말 오후에 잠깐의 둘레길 산책길!

본격적인 초록이 오기 전 옅은 분홍빛 듬성듬성 진달래가 햇빛을 받아 반짝입니다.

 

예전 진달래꽃잎을 따다가 씻어 화전을 부쳐먹고, 꽃잎을 소주에 넣어 화주를 담궜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산책 후 들른 시장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그래도 제법 저녁 찬거리를 사러들 나왔네요. 딸기도 머음직하게 팔고, 쪽파, 햇마늘도 제철인지 저렴한 가격에 많이 보입니다. 그 중에 눈의 띄는 청도 미나리!

 

이맘때 간재미나 갑오징어에 미나리 넣은 초무침은 제철 막걸리 안주입니다. 일반 오징어를 쓰는 경우 둘다 약간 데쳐서 무치는 것도 괜찮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서로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만났을 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그 접점에 이르렀을 때 각 분야의 한계를 벗어나 변화와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본문발췌]

 

 

Consilience : The unity of knowledge

 

Consilience는 한마디로 '지식의 통일성'을 뜻한다. 이것은 옛날 어느 교수가 과학과 그 방법론에 관하여 가졌던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그는 그의 동료들이 과학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지극히 작은 단위들로 쪼개는 데 여념이 없어 전체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통합되어 있으며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들을 분리하면 그들만의 고유한 존재의 이유가 손상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이 같은 관점을 잃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래야 모든 과학이 개념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와인에는 더할 수 없이 어울리는 말이며 우리 네 사람의 뜻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단어다. 와인은 바로 우주와 인간의 통일을 의미하며 와인을 만드는 사람은 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직접적인 관찰로는 매우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현상들이 실제로는 통합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는 황홀함을 느낀다오. - 아인슈타인이 친구 마르셀 그로스만에게 쓴 편지 중

 

 

통섭(consilience)은 통일(unification)의 열쇠이다. 나는 이 용어를 정합(coherence)보다 더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통섭은 정합의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하나만을 뜻할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섭이라는 용어는 그 희귀성 때문에 그 의미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용어는 윌리엄 휴얼이 1830년에 <귀납적 과학의 철학>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설명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귀납의 통섭은 하나의 사실 집합으로부터 얻어진 하나의 귀납이 다른 사실 집합으로부터 얻어진 또 하나의 귀납과 부합할 때 일어난다. 이러한 통섭은 귀납이 사용된 그 이론이 과연 참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시험이다."라고 말했다. 통섭을 입증하거나 반박하는 일은 자연과학에서 개발된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자들의 노력이나 수학적 추상화에 고정되어 있기보다는 물질 우주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잘 작동해 온 사고의 습관을 충실히 따르려는 것이다.

 

 

통섭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지적인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조건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는 데 있다. 방금 내가 말한 주장을 예증하는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두 선을 교차하도록 그은 후 그때 생긴 네 영역에 이름을 적어 보라. 왼쪽 위에는 환경 정책을, 왼쪽 아래에는 사회과학을, 오른쪽 위에는 윤리학을,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는 생물학이라고 기입해 보자. 우리는 이미 직관적으로 이 네 영역이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서 어느 한 분야의 합리적인 탐구가 다른 세 영역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각 분야는 현재의 학계에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따로따로 확립되어 있다. 즉 그 분야만의 전문가, 언어, 분석 양식 그리고 타당성 기준들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는 혼란일 뿐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미 4세기 전에 이 혼란을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혼란이란 논증이나 추론이 하나의 경험 세계로부터 다른 경험 세계로 전달될 경우에 일어나는 실수들 중에 가장 치명적인 실수이다." 이제 이 그림에 교차점을 중심으로 동심원들을 몇 개 그려 보자. 네 영역의 교차점을 향해 점점 줄어드는 원의 내부에서 우리는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실제 세계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교차점에 가장 가까운 원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근본적인 분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도가 없다. 또 우리를 인도해 줄 개념과 단어도 거의 없다. 단지 상상에서만 다음과 같은 시계 방향의 여행이 가능할 뿐이다. 환경 문제의 인식, 견고한 기초를 가진 정책의 필요성, 도덕 추론에 근거한 해결책 선택, 그 추론의 생물학적 기초에 관한 탐구, 생물/환경/역사의 산물로서 사회 제도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다시 환경 정책으로 되돌아가기.

 

 

모든 학부생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무엇이고 그 관계가 인간 복지에 어떻게 중요한가?" 모든 대중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도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의회에 계류 중인 법률의 절반 정도는 중요한 과학 기술적 요소들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매일매일 우리를 괴롭히는 이 쟁점들 중 대부분, 예컨대 인종 갈등, 무기 경쟁, 인구 과잉, 낙태, 환경, 가난 등은 자연과학적 지식과 인문 사회과학적 지식이 통합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만이 실제 세계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이 실제 세계를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독단 그리고 임시방편적 렌즈를 통해서 볼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한결 같이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서 훈련 받은 사람들이며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거나 전혀 없다는 현실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열악한 상황은 대중 지식인, 언론인, 평론가, 각종 두뇌 집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들의 분석이 때로는 정확하고 믿을 만한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분석의 실질적인 기초는 파편화되어 있으며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균형 잡힌 관점은 분과들을 쪼개서 하나하나 공부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분과들 간의 통섭을 추구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 통합은 쉽게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통합은 진리의 울림이다. 통합은 인간 본유의 충동을 만족시켜 준다. 학문의 커다란 가지들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는 만큼 지식의 다양성과 깊이는 심화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학문들의 기저에 존재하는 응집력 때문이다. 이런 기획은 다른 이유 때문에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성에 궁극적인 목표를 주기 때문이다. 저 수평선 너머에 넘실거리는 것은 혼돈이 아니라 질서이다. 그곳에서 모험을 떠나는 일을 어찌 망설일 수 있겠는가.

 

 

인간의 마음은 밀랍으로 만든 서판과 같지는 않다. 서판의 경우 옛 것을 문질러 지우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쓸 수가 없지만, 마음의 경우 새로운 것에 쓰지 않고는 옛 것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과학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모아서 그 지식을 시험 가능한 법칙과 원리로 응축하는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탐구이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첫째 기준은 반복 가능성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수행해도 같은 현상이 나와야 하고 그런 현상에 대한 해석이 새로운 분석과 실험을 통해 입증되거나 반증되어야 한다. 둘째 기준은 경제성이다. 과학자들은 가장 많은 정보를 가장 적은 노력으로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정보를 추상화하고자 한다. 이것을 우아함의 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기준은 측정이다. 만일 어떤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척도에 따라 적절히 측정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일반화는 명확해진다. 넷째 기준은 발견 기법이다. 최고의 과학은 종종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후속 발견들을 자극한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은 원래 원칙의 진위를 다시 시험해 보게끔 한다. 마지막으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가르는 다섯째 기준은 통섭이다. 즉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여러 설명들을 서로 연결하고 일치시킬 수 있을 때 가장 경쟁력 있는 설명이 되나. 천문학, 생의학 그리고 생리심리학은 이 모든 기준들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불행히도 점성술, UFO학, 창조 과학,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어떤 기준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진정한 자연과학은 이론과 증거로 꽉 맞물려 있으며 근대 문명의 기술적 진보에 근간이 되어 왔다는 점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이비 과학은 개인의 심리적 필요는 충족시킬 수 있으나 기술 발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문화는 하나의 산물이다. 그리고 역사적이며 아이디어, 패턴, 가치 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선택적이고 학습되며 기호들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행동으로부터의 추상이며 행동의 산물이다. - 앨프리드 크로버, 클라이드 클럭혼

 

 

뇌는 생물학적 질서의 최고 단계들의 산물로서 개체의 해부학적 구조와 생리적 작용에 함축되어 있는 후성 규칙들의 제약을 받고 있다. 뇌는 환경 자극의 범람 속에서 작동하면서 보고 듣고 배우며 자기 자신의 미래를 계획한다. 진화 과정에서 수많은 뇌의 집합적 선택은 인간의 모든 것 - 유전자, 후성 규칙, 의사소통적 마음 그리고 문화 - 의 진화적 운명(Darwinian fate)을 결정한다. 지혜로운 선택을 한 뇌는 더 높은 진화적 적응도(Darwinian fitness)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그 뇌가 잘못 선택한 뇌들보다 통계적으로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자손을 남기게 됨을 뜻한다.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로 흔히 요약되는 이 일반화는 마치 동어 반복 - 적합한 놈이 살아남고 살아남은 놈이 적합하다는 식으로 - 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생산과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수십만 년의 구석기 역사 속에서 인간의 특정한 후성 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은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점점 증가해 종 내에 널리 퍼치게 되었다. 이런 수고 덕분에 인간 본성이 탄생한 것이다.

 

 

인간의 행동을 평가할 때 행동 유전자를 고려하는 일은 현명한 선택처럼 보인다. 사회생물학(이 이름이 아니라면 다윈인류학이나 진화심리학이라 해도 좋다. 아니면 정치적인 입장에서 수용하기 더 좋을 만한 이름들을 선택해도 무방하다.)은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한 하나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사회생물학은 진화론에 입각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인류학과 심리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인간사회생물학의 주요 연구 전략은 가장 높은 진화적 적응도를 안겨주는 사회 행동이 무엇인지를 예측하기 위해 집단유전학과 생식생물학의 기본 원리에서 연구를 시작하는 일이다. 이 예측들은 세심하게 설계된 현장 연구의 결과뿐만 아니라 민속 기록과 역사 기록에서 얻은 자료들과도 비교평가된다.

 

 

자연과학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자신의 연구 주제를 발빠르게 확장하여 사회과학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그 결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간격을 잇는 4개의 교량이 생겼다. 첫 번째는 인지심리학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인지뇌과학 또는 뇌과학으로서 이 분야의 종사자들은 정신 활동의 물리적 기초를 분석하고 의식적 사고의 신비를 해결하고자 한다. 두 번째는 인간행동유전학인데 이 분야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기는 하지만 인간 행동의 유전적 기초 - 예컨대, 유전자가 정신 발달에 어떤 편향적인 영향을 주는지? - 를 밝히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세 번째 교량은 진화생물학이다. 사회생물학은 진화생물학의 잡종 자손으로서 사회 행동의 유전적 기원을 설명하는 일을 목표로 하고 있다. 네 번째는 환경과학이다. 이 분야와 사회 이론과의 관계는 일견 희박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연환경은 인간이라는 종이 진화해 온 극장이다. 또한 인간의 생리와 행동은 그 환경에 정교하게 적응되어 있다. 인간 생물학이나 사회과학도 이러한 틀을 고려하지 않는 한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통섭의 세계관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현상들 - 예컨대, 별의 탄생에서 사회 조직의 작동에 이르기까지 - 이 비록 길게 비비 꼬인 연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지혜의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다. 따라서 세계는 적절한 정보를 적재적소에서 취합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중요한 선택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돌아갈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44117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