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렛대를 이용하면 투입된 힘과 자본의 효율성을 높이고 효과를 극대화한다. 제로섬 게임의 경쟁에서 벗어나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레버리지를 활용해 보자.

 

 

[본문발췌]

 

 

레버리지 할 것인가, 레버리지 당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시간과 일과 돈이 정비례한다고 생각하지만 백만장자, 억만장자, 기업가 들은 그것들이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는 우리에게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해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행복과 자유를 삶의 끝자락으로 미루고, 인생의 1/3을 일하는 데 사용하고, 주말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일주일 내내 자신을 희생하고, 오랜 시간 싫어하는 일을 하고 짧은 시간 동안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균형’이라 할 수 있을까. 『레버리지』는 사회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고, 무지한 상태로 침묵하지 않고, 혁신적으로 생각하고, 최선의 결과를 내는 기술을 소개하는 책이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처리하고, 비즈니스를 위해 타인을 활용하는 방법이며, 끊임없이 열심히 일하는 희생의 규칙을 깨뜨리고,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중복과 시간 낭비를 배제하여 높은 수준의 성취를 얻는 새로운 부의 공식을 담고 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간격은 점점 커지고 있다. 새로운 기술 시대를 수용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레버리지는 최소한의 노력과 시간으로 현대 과학 기술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고, 삶과 비즈니스를 위해 타인을 활용하는 방법이며,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처리하고, 모든 것을 아웃소싱하고, 이상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성공 전략의 본질은 목표를 어떻게 이룰 것인지가 아닌,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데 있다. - 워렌 버핏

 

 

레버리지는 과학에 기반을 둔 사고법이다.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성취하는 것, 더 적은 돈으로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더 짧은 시간을 투자해서 더 많은 시간을 얻는 것, 더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성과를 얻는 자본주의 속 숨겨진 공식이다. 한마디로 하면 '최소 노력의 법칙'이다.

 

 

복리의 법칙 The Law of Compounding. 어떤 일을 오래 할수록 끝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최대의 이익과 가속도를 얻을 수 있다. ... 비전의 규모와 범위는 시간을 조망하는 시선과 비레한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면 모든 일은 뿌리를 내릴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싹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는 과정을 반복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과정이 되풀이될수록 복리 효과를 통해 성공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의심하게 된다. 하룻밤 사이에 성공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최대의 복리 효과를 위해 뿌리가 깊이 자리 잡을 때까지 시간을 투자한 사람들이다.

 

 

빌 게이츠와 아놀드 슈왈제네거도 당신과 똑같이 한 시간에 60분, 하루에 24시간, 일주일에 7일, 1년에 52주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뛰어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선택하고, 사용하고, 투자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일과를 끝내고 자신에게 '내가 정말 의미 있는 일을 했는가?'라고 물었을 때 '아니다'라는 답이 나온다면, 당신은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자 가장 귀중한 자원인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시간은 천천히 소멸하면서 우리를 지나치는 가장 귀중한 자원이다. 시간은 투자되거나 낭비된다. 중간은 없다. 시간은 당신의 통화이고, 자산이고 가치다. 당신은 삶을 관리하고, 시간을 투자함으로써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동일하다. 우리는 시간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

 

 

사람은 죽을 때 다섯 가지 후회를 한다고 한다.

  •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지 말았어야 했는데....
  •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어야 했는데.....
  • 친구들과 계속 연락하며 지냈어야 했는데.....
  • 자신을 더 행복하게 했어야 했는데....

 

자유로운 사고방식은 생각, 감정, 행동을 기반으로 한다. 당신이 기업을 체계화하고 자동화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예기치 못한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시스템이 고장 나거나 사람이 시스템을 망치는 일이 발생한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도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다. 결코 시스템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증거다.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스스로 생각과 감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를 경험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 더불어 자유는 문제 해결 능력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정신적으로 좌절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당신에게 자유를 준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최대한 빨리 해결하면 그들이 당신에게 자유를 준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근절할 수는 없다. 그래서 레버리지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배움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며 자유 없는 배움은 언제 헛되다. - 존 F. 케네디

 

 

돈은 최고의 하인이면서 최악의 주인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당신이 돈을 위해 열심히 일할 수도 있고, 돈이 당신을 위해 열심히 일할 수도 있다. 당신이 돈의 노예가 될 수도 있고, 돈이 당신의 하인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을 돈과 바꿀 수도 있고, 당신의 시간을 보존하면서 소득을 창출할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선택지는 두 가지로 나뉜다. 레버리지 하거나, 레버리지 당하거나.

 

 

화폐가 없던 시대에는 시간을 사고팔았다. 시간은 실제적인 통화였다. 동전과 금속 화폐가 도입되기 전, 정부가 화폐 제도를 통제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시간을 교환했다. ... 시간을 상품이나 서비스와 교환했고, 그것은 다시 다른 상품이나 서비스와 교환되었다. 공정한 교환을 통제할 수 있는 보편적인 통화 시스템이 없었을 땐 시간이 유일한 화폐였던 것이다. 통화란 실제로 어떤 '흐름'과 같으며 시간 투자의 유동적인 가치 교환이다. 통화는 사람들 사이의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이다. 돈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듯이 시간도 흘러간다. 당신은 더 많은 통화를 창출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이 화폐 형태의 시간의 흐름이다. 

 

 

정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정보가 이동하는 속도와 그 정보에 접근하고, 소비하고, 공유하는 속도다. 인류는 정보의 속도를 더 레버리지 할 수 있게 되었다. 몇 세기 전에는 정보의 속도와 말이 달리는 속도가 동일했다. 그다음엔 배의 속도와 같았다. 다음에는 자동차, 다음에는 비행기의 속도만큼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나아가 오늘날의 정보는 소리와 전파의 속도를 넘어 광섬유를 통한 빛의 속도로 이동한다. 이것은 혁신이다. 정보는 화폐이자 상품이 되었다. ...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아이디어와 정보는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수십 년에 걸쳐 체득한 지식이다. 당신은 그 어떤 시대보다 빨리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레버리지 할 수 있다. 정보는 우리의 시간 보존을 극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는 레버리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정보 거래는 가장 혁신적인 성장 산업 중 하나가 되었다. ... 정보 마케팅은 레버리지를 판매하는 것이다. 당신은 상품을 한 번 만들어서 여러 번 돈을 벌 수 있다. 일단 상품이 만들어지면 앞으로 몇 년 또는 몇 십 년 동안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 바이럴 마케팅을 통해 SNS 중독자들이 그 상품을 공유하고 판매하게 할 수 있다. 정보와 아이디어 마케팅은 최소의 낭비로 최대의 보상을 가져다주는 최대의 레버리지다. 당신이 창조하는 정보와 각 매체를 효율적으로 레버리지 할 때 진정한 자산이 된다. 당신은 재능, 기술,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특정한 한 분야에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면, 앞서 말한 채널들을 통해 그 분야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거나 자신의 가치를 몰랐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내면에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대부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책에서 당신의 정보를 꺼내라. 당신의 고유한 재능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기여하고 당당하게 대가를 받아라.

 

 

레버리지 라이프는 열정과 직업을 균형 있게 통합하고, 어느 한 쪽이 지나친 희생을 하지 않도록 조절하면서 고양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행복과 슬픔의 균형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중복과 낭비를 줄이고, 시간 낭비를 최소화함으로써 은퇴를 뒤로 미루지 않고 지속적으로 짧은 은퇴를 즐기는 것이다. ... 레버리지는 다른 사람들의 시간, 경험,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지금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레버리지를 시작해야 한다.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투자하라. 자책감을 느끼거나 비용을 걱정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어라. 팀을 구축하라. 관리하라. 리드하라. 낮은 가치의 업무에 집중하지 마라. 그런 일은 기회비용이 매우 높다. 레버리지를 수용하면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절약된 시간에 더 만은 돈을 벌고,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 ... 당신에게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진 분야에서 성장하고, 다른 모든 것들은 놓아버려라. 레버리지는 연금이나 은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를 나중을 위해 행복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변화를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하루하루를 즐기고, 원하는 일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끼는 고양된 삶이다. 노년이 되어서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비전을 가지고 있는 한, 이 모든 것을 지금 이룰 수 있다. 당신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레버리지 할 것인지, 레버리지 당할 것인지.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007144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뿌연 안개 속 초록나무, 시원한 가랑비 바람 가운데 오랜만에 찾은 석정스파 노천욕! 그리고 오후는 옥상 가맥! 밤에는 온동네 개구리 개골개골~~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물리학은 물체 사이의 상호작용과 물체의 운동, 물질의 구성과 성질과 변화, 에너지의 변화 등을 연구하여 자연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화학, 생물학 등과 더불어 자연과학을 이루며, 자연과학 중에서 제일 기본적이고 가장 먼저 체계화된 학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물리학 [Physics] (물리학백과)

 

고전 물리학을 넘어 아원자적 세계의 양자역학과 자연, 우주의 상호연관성을 다루게 되면서 과학적 이해와 설명의 과정에 동양적 사고를 접목해 볼 수 있다.

 

 

[본문발췌]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 것이다. 동양의 신비론에 있어서는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개별적이고 분리된 것으로 구분하고 이 세계 내에서 고립된 자아로서 우리 스스로를 체험해 보려는 경향은 우리들의 측정하고 분류하려는 심성에서부터 연유되는 환각이라고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 철학에서는 아비댜(avidya), 즉 무지라고 불리며 극복해야 할 마음의 불안 상태로 간주되는 것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잡다한 사물이 생기지만, 마음이 고요하면 잡다한 사물이 사라진다.'

 

 

동양 철학의 이 같은 유기적, 생태학적 세계관이야말로 동양 철학이 최근 서방에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아직도 기계론적인 분열된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의 서양 문화권에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 사회의 저변에 만연되고 있는 불만의 잠재 이유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점증하고 있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동양적인 해방에의 길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추론적 지식과 추론적 행위는 확실히 과학적 탐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과학자에게 신선한 통찰력을 부여해서 그를 창조적이게 하는 직관에 의하여 탐구의 추론적 면이 보완되지 않는다면 기실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갑자기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책상 앞에 앉아서 등식을 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욕탕 속에서 심신을 녹이고 있을 때나 숲 속이나 해변을 거닐 때처럼 허심할 때에 홀연히 떠오르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지적 활동에 골몰하고 나서 잠시 쉬는 틈에 이 직관적 마음은 솟아나는 듯하며, 이것이 과학 연구에 희열을 가져다주는 명석한 통찰을 갑작스레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직관적인 통찰은 그것이 일관성 있는 수학적 체계로 형성되고 일상 언어로 해석되어 보완되지 않는다면 물리학자들에게는 무용한 것이다. 이 기본 작업에 있어서 추상화가 가장 요긴한 특성이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실재의 지도를 그려 내는 개념들과 상징들의 체계로 짜여진다. 이 지도는 다만 실재의 어떤 특성만을 나타낼 따름이다.

 

 

동양적 신비주의는 실재의 본질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직접적인 직관 위에 기초하고 있고, 물리학은 과학적 실험을 통한 자연 현상의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양쪽 다 그 관찰은 해석되고 이 해석은 자주 언어에 의해 소통된다. 언어란 언제나 추상적이고 실재의 근사한 지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적 실험이나 신비적 직관을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애매하고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 물리학에 있어서는 실험의 해석을 모형이나 이론이라고 부르며, 모든 모형이나 이론들이 근사치란 사실을 깨닫는 것이 현대 과학 연구의 밑바탕을 이룬다. 그래서 아인슈타인도 이런 경구를 말했다. "수학의 법칙들이 실재에 관해 언급하는 한 그것은 확실하지 않고, 그것들이 확실하다면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모든 과학적 모형과 이론들은 근사치밖에 안 되고 그것의 언어적인 해석도 우리의 언어가 지닌 애매모호성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는 생각은 금세기 초 새롭고 전혀 예기치 않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과학자들에 의해 이미 널리 받아들여졌다. 원자의 세계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일상 언어가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원자와 아원자적인 실체를 기술하는 데 전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은 이 실체가 고전적 논리를 초월하며, 그것은 일상 언어를 통해서는 말해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원자적 단계에서 물질은 어떤 한정된 장소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며, 원자적 사건들은 확실성 있게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 보이는 편이다. 양자 이론의 형식론에서 이러한 경향성은 확률로써 표현되며 파동의 형태를 취하는 수학적인 양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입자가 동시에 파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음향이나 물결처럼 실재하는 3차원적 파동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특정 지점과 특정한 시간에 입자를 찾아내는 확률과 관계 있는 파동의 모든 특유한 속성을 가진 추상적이고 수학적 양인 '확률파'다. 원자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은 이러한 확률로 표현된다. 우리는 원자적 사건을 결코 확실성 있게 예언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것 같은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양자론은 이렇게 견고한 물체와 엄격한 결정론적인 자연 법칙이라는 고전적인 개념들을 말소시켰다. 아원자적 단계에서 고전 물리학의 견고한 물체는 파동과 같은 확률 모형들로 분해되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모형들은 사물의 확률이 아니라 상호연관의 확률을 나타낸다. 원자 물리학에 있어서 관찰의 과정을 주의 깊게 분석해 본다면 아원자적 입자는 독립된 실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험의 준비와 그 다음의 측정 사이에 있는 상호 연관으로서만 단지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양자론은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로 이 세계를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질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 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관계들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를 포함한다.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들의 연쇄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루며,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단지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의 객관적인 기술이라는 고전적 이상은 이미 빛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세계,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은 원자적 물질을 다룰 때에는 성립할 수가 없다. 원자 물리학에서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는 본질적으로 항상 관찰자를 포함하는 역동적이며 불가분의 전체로서 체험된다. 이러한 체험에서 공간과 시간, 독립된 대상, 원인과 결과라는 식의 전통적 개념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동양 신비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 유사성은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에서 분명해지며 이 두 이론이 통합된 아원자적 물리학의 '양자-상대론적' 모델이서는 한층 더 강하게 되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비주의(힌두교, 불교, 도교의 종교 철학...)에서 가장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동양적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 - 그 본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 - 은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통일성과 공동의 상호 관계에 대한 깨달음, 곧 세계의 모든 현상을 기본적인 전일성의 현시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이 우주 전체의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로서, 다시 말하면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현으로써 이해된다. 동양의 전통들은 그 자신을 만물에서 나타내며, 만물은 그의 부분들인 이 궁극적이고도 불가분의 실재에 관해 끝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힌두교에서는 '범', 불교에서는 '법신', 도교에서는 '도'라고 불린다. 그것은 모든 개념과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불교도들은 그것을 일러 또한 '진여'라고도 부른다.

 

 

대립자란 것은 사고 영역에 속하는 추상적인 개념들이요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어떤 하나의 개념에 주의를 집중하는 바로 그 우리의 행위 때문에 그 개념의 대립자가 생겨난다. 노자는 이르기를 "세상에서 미를 모두 아름다운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추가 존재하며, 선을 모두 선한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사악한 것이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신비가는 지성적인 개념의 영역을 초월하며, 그것을 초월하는 가운데 그는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상대성과 양극 관계를 알게 된다. 그는 선과 악, 쾌락과 고통, 생과 사가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절대적인 경험이 아니라 단지 동일한 실재의 양면이라는 것, 즉 단일한 전체의 양극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대립자는 양극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보는 것이 동양의 정신적인 전통에 있어서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목적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바가바드 기타> 경전 속에는 "현세의 대립성을 넘어서, 영원한 진리 속에 안주하라!"라는 크리슈나의 가르침이 있으며, 한편 불교에서도 그와 같은 가르침이 불제자들에게 베풀어졌다. 스즈키 다이세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불교의 근본 이상은 지적인 분별과 감정적인 오탁으로 만들어진 이 대립적 세계를 넘어서 정신적인 무분별의 세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여실지견(an asolute point of view)을 성취하는 것이다.'

 

 

모든 대립적인 것의 양극적인 것이라는 개념 - 즉 광명과 암흑, 득과 실, 선과 악 등이 동일한 현상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동양인의 생활 방식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다. 따라서 일체의 대립적인 것은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투쟁은 결코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날 수 없고 항상 양자 간의 상호 작용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란 선을 위해 분투하고 악을 소멸시키는 불가능한 과업을 떠맡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동양적인 견지에 있어서는 모든 현상들을 떠받치고 있는 실재는 어떠한 형태도 초월하고 있으며 어떠한 묘사와 상술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종종 무형(無形), 공(空) 또는 허(虛)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공은 단순한 무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형태들의 본질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브라만은 생명이요, 브라만은 환희요, 브라만은 허다. .... 환희는 진실로 허와 같은 것이요, 허는 진실로 환희와 같은 것이다.'

 

 

중국 철학에서 공허하며 형체가 없으나 모든 형상들을 산출할 수 있는 도의 개념 속에 장의 관념이 함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의 개념에도 그것은 명백히 표시되어 있다.... '기(氣)'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가스' 혹은 '에테르'를 뜻하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호흡이나 우주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에너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인체에서의 '기의 통로'가 전통적인 ㅎ나방의 기초가 되고 있다. 침술의 목적은 이 채널을 통하는 기의 소통을 자극하는 데 있다. 기의 소통은 또한 무사의 도교식 무용인 태극권의 흐르는 듯한 몸놀림의 기본이기도 하다.

 

 

양자장 개념과 함께 현대 물리학은 물질이 개별적인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인지 혹은 근본적인 연속체로 되어 있는 것인지 하는 오래 전부터 제기된 의문점에 예기치 않았던 해답을 찾아내었다. 장은 공간의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연속체지만 그것의 입자성은 비연속적인 '알갱이 모양'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외관상으로 모순되는 이 두 개념은 통일되어, 단지 동일 실재의 양면성으로 보게 된다. 상대성 이론에서 항상 그러하듯이 대립되는 두 개념의 통일은 역동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물질의 그 양면성은 끊임없이 서로 모습을 바꾼다. 동양의 신비주의도 공(空)과 그것이 창조해 내는 형상들 사이의 하나의 유사한 역동적인 통일성을 강조한다. 라마 고빈다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색(色)과 공(空)의 관계는 서로 배타적인 대립의 상태로서 생각될 수가 없으며, 다만 동일 실재의 양면성으로서 공존하면서 연속적인 협력 고나계 속에 존재한다.' 이와 같은 반대되는 개념들이 하나의 단일한 전체로 융합되는 것은 불경 속에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로 표현되어 있다. '색(色)은 공(空)이요, 공은 곧 색이다. 공이 색과 다르지 아니하며 색 또한 공과 다르지 아니하니, 색인 것이 공이요 공인 것이 곧 색인 것이다.'

 

 

현대 물리학은 창조와 붕괴의 율동이 계절의 순환과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의 탄생과 죽음에서 나타날 뿐만아니라, 생명이 없는 무기 물질의 바로 그 본질이라는 것을 밝혀 왔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물질의 구성 요소들 간의 모든 상호 작용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발생한다. 한층 더 나아가 창조와 붕괴의 무도는 물질을 존재케 하는 기본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적 입자들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자체 상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 물리학은 모든 아원자적 입자가 에너지 무도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창조와 붕괴의 고동치는 에너지 무도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이 무도의 모형들은 각 입자들이 지닌 본성의 근본적인 양상이며 그 성질의 많은 것을 결정짓는다. 예를 들면 가상의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에 포함되어 있는 에너지는 자체 상호 작용하는 입자의 질량에 공헌하는 일정한 양의 질량에 상당한다. 다른 입자들은 그 무도에서 다른 모형을 전개시켜 다른 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따라서 다른 질량을 갖게 된다. 끝으로 가상적 입자들은 모든 입자 상호 작용과 대부분의 입자 성질의 본질적인 양상일 뿐만 아니라 진공에 의해서도 생겨나고 붕괴된다. 따라서 물질뿐만 아니라 허공 역시 끝없이 에너지 모형을 생성시키고 소멸시키면서 우주적 무도에 참여하고 있다.

 

 

아원자의 세계는 리듬과 운동과 연속적인 변화의 세계다. 그러나 그것은 임의적으로 무질서하게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뚜렷하고 명확한 모형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입자 세계에 있어서의 대칭적 모형들의 발견은 많은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모형들이 자연의 기본 법칙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게 하였다. 지난 15년 동안에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입자들을 통합하고, 물질의 구조를 '설명할' 궁극적인 '기본적 대칭'을 타맥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경주되어 왔다. 이러한 목적은 고대 그리스 인으로부터 물려받아 수많은 세기를 거쳐 발전되어 온 철학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대칭은 기하학과 더불어 그리스의 과학, 철학, 예술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거기서는 대칭은 미와 조화, 그리고 완성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 학파는 대칭적인 수 모형들을 만물의 본질로 보았으며, 플라톤은 네 개의 원자 요소들이 일정한 고체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고 믿었다. 또 대부분의 그리스 천문학자들은 천체가 원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원이야말로 지고의 대칭성을 지닌 기하학적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대칭에 대한 동양 철학의 태도는 고대 그리스 인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극동의 신비적 전통들은 대칭적 모형들을 상징이나 명상의 방편으로 자주 활용하지만, 대칭의 개념이 그들의 철학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연의 속성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소산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동양의 예술 형식들은 비대칭을 현저하게 편애하였으며 완전히 규칙적이거나 기하학적 형상은 종종 기피되고 있다. 선(禪)의 영향을 받은 중국과 일본의 회화는 소위 '여백(餘白, onecorner)' 양식이라 불리는 방법으로 자주 그려졌다. 또한 일본 정원에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부석(敷石)은 극동 문화의 이런 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우리는 세계를 대상물들의 여러 가지 그룹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연결 관계의 그룹으로 세계를 나눈다. .... 식별될 수 있는 것은 어떤 현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결 관계의 모습이다. ... 따라서 세계는 사건들의 복잡한 조합으로서 나타나며 그 안에서 다른 종류의 연결 관계들이 서로 엇갈리거나 겹쳐지거나 결합하고, 이렇게 하여 천체의 구조를 결정짓는 것이다. - 하이젠베르크

 

 

원자와 아원자 물리학의 이론들은 기본적 입자들의 존재를 점점 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했다. 그 이론들은 운동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였고, 그 입자들이 대상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진행 작용들이라는 것을 제시하면서 물질의 근본적인 상호 연관성을 드러내 보였다. 이 모든 진전들은 기본적인 구성체라는 단순한 기계론적인 상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물리학자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복합적인 구조를 더 단순한 구성 요소로 분해하여 설명하려는 해묵은 전통은 서양의 사고에 아주 깊이 뿌리 박혀 있어 이러한 기본적인 구성체에 관한 탐구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소립자나 근본적인 장(場)과 같은 기본적인 실체로 환원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른 입자 물리학파가 있다, 그것은 그 구성 요소들이 상호간에도 그 자체로도 어느 쪽으로나 모순되지 않는 자체 조화를 통해서만 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S행렬 이론과의 관계에서 일어났으며 그것은 '부트스트랩(bootstrap : 구두끈)' 가설로 알려져 있다. 이 이론의 창시자며 주요 주창자는 제프리 추(Geffrey Chew)인데 그는 이 생각을 한편으로는 자연의 일반적인 상호 작용의 철학에로 발전시켜 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S행렬이라는 말로 형식화된 입자들의 특정한 모델을 작성하는 데 그것을 이용하였다. ... 부트스트랩 철학은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하여 최종적인 반론을 제기하였다. 뉴턴의 우주는 어떤 근본적인 특성을 지닌 기본적인 실체로부터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므로 그 이상의 분석을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튼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실체들의 집합으로서는 이 세계가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부트스트랩 가설이 명백히 표명했을 때까지는 이러한 개념은 자연 과학의 모든 이론에 절대적이었다. 새로운 세계관에 있어서 우주는 상호 연결된 사건들의 역동적인 망(網)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 망의 어느 부분의 특성도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모든 다른 부분들의 특성으로부터 이어져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 서로의 상호 관계의 전체적 조화가 그 망 전체의 구조를 결정짓는다. 이와 같이 부트스트랩 철학은 양자론에서 하나의 본질적이고 우주적인 상호 연관성을  깨달음으로써 발생하여 상대성 이론에서 그 역동적인 내용을 획득하고, S행렬 이론에서 반응 확률에 의하여 형식화된 자연관에 있어서의 최고 정점을 나타낸다. 동시에 이러한 자연관은 계속 동양적인 세계관에 더욱 가까이 접근했으며 지금은 그 일반적인 철학과 물질에 관한 특수한 상의 양면에서 동양의 사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부트스트랩 가설은 물질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의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법칙이나 등식, 원리 등의 근본적 실체들을 모두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수백 년 동안 자연 과학의 본질적 요소가 되어 왔던 또다른 개념을 파기한다. 

 

 

"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본성은 이름지어질 수도 설명될 수도 없다. 그것들은 어떤 언어의 형식으로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 - 아슈바고샤, <The Awakening of Faith>. 그러므로 동양의 현인들은 대체로 사물을 설명하는 데 흥미를 가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물의 통일성에 관한 직접적이고 비지성적인 경험을 체득하는 데에 더욱 흥미를 두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인생의 의미, 세계의 기원, 열반(nirvana)의 세계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해 '고귀한 침묵'으로 대답을 해주었던 부처의 태도다. 무엇인가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선사들이 하는 불가해한 대답도 제자들에게는 동일한 목적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즉 모든 것이 다른 것의 결과라는 것, 또 자연을 '설명' 한다는 것은 단지 그것의 통일성을 보여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뜻한다는 것, 궁극적으로는 설명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과학과 동양의 신비주의(힌두교, 불교, 도교의 종교 철학...)를 각각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 두 능력을 지닌 인간 정신의 상보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 신비주의적 경험은 사물의 가장 깊은 본성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고 과학은 현대 생활에 긴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종합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다.

 

 

생태학적 세계관(ecological worldview), 생태학적 인식은 모든 현상들이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하고 있으며 개인과 사회가 자연의 순환 과정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 생태학적 패러다임은 현대 과학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의 틀을 넘어서 모든 생명의 일체성, 다양한 현상들의 상호 의존성, 그것의 변화와 변형의 순환성 등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재에 대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런 깊은 생태학적 자각은 정신적인 자각이다.

 

 

과학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 사고

  • 부분과 전체의 관련성.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보다 더 대칭적이다.
  • 구조를 통한 사고에서 과정을 통한 사고로의 변화. 세계는 운동 흐름, 변화를 통해서 지각된다.
  • 객관적 과학으로부터 '인식론적' 과학으로의 전환. 지식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자연 현상에 대한 기술 속에 분명히 포함되어야 한다.
  • 지식을 어떤 확고한 토대도 없는 그물로 비유. 부트스트랩 이론에 따르면, 자연은 물질로 된 기본적인 토막처럼 어떤 기본적인 실재로 환원될 수 없으며 자기모순이 없음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되어야 한다. 사물들은 상호 모순이 없는 관계들에 의해서 존재하며, 모든 물리학은 그 구성 성분들이 서로 모순이 없어야 하고 자기들끼리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요구를 따라야 한다.
  • 진리로부터 근사적인 기술로 전환. 모든 과학적 개념과 이론들이 한계를 가지며 근사적이라는 것. "과학은 잠정적인 대답을 통해서 자연 현상의 본질에 더욱 깊이 도달하려는 일련의 더욱 미묘한 물음들을 향해 나아간다." - 루이 파스퇴르
  •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로부터 협조와 비폭력의 태도로 전환. ... 17세기 이전의 과학의 목표는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 살면서 자연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 것이었다. 생태학적 태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태도는 17세기에 정반대로 바뀌었다.  베이컨 이래로 과학의 목표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지식을 얻는데 있었으며,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위험스럽고 유해하며 반생태학적인 목적에 주로 사용되고 있다. ... "자연의 질서를 따르려는 자는 도의 흐름을 따라 흘러간다."

 

현대 물리학이 두 가지 커다란 주제인 우주의 기본적인 통일과 상호 연관성 그리고 우주의 자연 현상의 본래적인 역동성은 미래의 연구에 의해 무효로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들은 재구성될 것이며 우리가 현재 주장하고 있는 많은 개념들은 내일에는 다른 개념들로 대체될 것이다. 그러나나는 이러한 대체는 순차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내가 신비주의적 전통과 비교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기본 주제들은 무효가 되기보다는 강화될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이미 물리학에서의 새로운 발전뿐만 아니라 생물학과 심리학에서 두드러진 새로운 발전으로 확증되고 있다.

 

 

한편 나는 서양의 정신적 전통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치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내가 약술한 실재에 대한 통찰에 대응하는 정신(spirituality)은 생태학적, 지구 중심적, 탈가부장주의 정신과 같은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614070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아무리 옳고 바른 '말'도 간혹 다른 사람의 마음과 삶을 헤치는 무기가 되고, 때론 부메랑이 되어 나를 다치게도 한다. 사람과의 공감에 무엇보다 중요한 건 더 묻고, 더 많이 듣는 것이다. 

 

 

[본문발췌]

 

 

거의 모든 심리적 어려움의 원인을 뇌에서 찾는 이 시대에 나는 공 모양의 물통처럼 소박하지만 강력한 위력을 지닌 심리적 힘을 말하고자 한다. 그 힘은 즉시 작동한다. 약물치료보다 더 빠르게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삶의 고통에 실질적으로 대처하는 실용적인 힘이다. 그 힘의 중심이 공감이다. 내가 말하는 공감은 '경계'를 인식하는 공감이다. '경계'를 품은 공감, 그 입체적인 공감은 집밥 같은 치유, 적정심리학의 핵이다. 잘 모르고 보면 "어, 저걸 가지고 뭘 할 수 있단 말이야"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공감의 위력은 어떤 힘보다 강하다.

 

 

스타가 아니더라도 부모나 배우자의 강력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 자체를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들, 주어진 역할에 헌신하는 것이 자기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스타들이 겪는 공황장애 삶의 원리와 매우 닮아 있다.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삶의 풍경이다. 자기성(自己性)이 소거된 채 부모의 기대나 사회적 역할, 가치 등에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던 사람은 절대적 의존 대상이던 그 부모나 배우자와 이별하거나 절대적인 내 역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이 없어지거나 그 가치가 빛을 잃을 때 공황발작을 경험할 수 있다. 

 

 

공황발작은 곧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지만 절대 멎지 않으며, 죽을 것 같은 느낌이 생생하지만 물리적으론 절대 죽지 않는 병이다. 공황발작 자체로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자기 소멸의 끝에서 탈진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을 거둬들이는 경우는 꽤 있다. 심장이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워가며 살던 삶의 끝자락에서 더없이 기진맥진해져서 생 전체에서 마침내 손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해진다.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예외 없이 변하게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자기'다. 사람은 자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 사람은 본래 그런 존재다. ... 젊든 늙든 우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이젠 알 것 같다.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은 이후부터가 제대로 된 내 삶의 시작이다. 거기서부터 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노인도 그렇고 청년이나 아이들도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저 사람은 지금 내가 산소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키는 인증 작업일 뿐이다. 호흡이 가빠 산소 호흡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양념치킨을 시켜준다면 고마운 일도 아니고 도움이 될 리도 없다.

 

 

'네가 옳다'는 확인을 받으면 "집을 나가겠다, 죽겠다, 죽이겠다"는 따위의 말들은 이내 아침 이슬이 된다. '당신이 옳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으면 아침 이슬과 멱살잡이하는 허무한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옳다." 온 체중을 실은 그 짧은 문장만큼 누군가를 강력하게 변화시키는 말은 세상에 또 없다.

 

 

한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스펙이 감정이다. 감정은 존재의 핵심이다.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향, 취향 등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구성 요소들이지만 그것들은 존재의 주변을 둘러싼 외곽 요소들에 불과하다. 핵심은 감정이다. 내 가치관이나 신념, 견해라는 것은 알고보면 내 부모의 가치관이나 책에서 본 신념, 내 스승의 견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오로지 '나'다. 그래서 감정이 소거된 존재는 나가 아니다. 희로애락이 차단된 삶이란 이미 나에게서 많이 멀어진 삶이다.

 

 

존재 자체를 몸에 비유한다면 외모, 권력, 재력, 재능, 학벌 등은 몸을 감싼 여러 겹의 옷들이다. 넘치는 관심과 주목을 받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 아니라 그가 걸치고 있는 옷에 대한 주목이나 찬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직장이나 학위, 직업이 '나'가 아니듯 내 돈, 권력, 외모나 재능도 당연히 '나'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 가진 사람도 자기 존재가 주목을 받지 못하면 심한 결핍이 생긴다. 오히려 더 배를 곯는다. 외형적으론 가진게 많으니 존재 자체의 결핍으로 인한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말도 안 되는 투정, 배부른 투정 같은 것으로 치부해서다. 나중에 심리적으로 더 큰 곤경에 빠지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만약 그의 대답이 없어도 그가 대답을 피하거나 못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존재에 주목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말이 아니라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 자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 사람은 지옥에서 빠져나올 힘을 얻는다.

 

 

심리적 CPR이란 결국 그의 '나'가 위치한 바로 그곳을 정확히 찾아서 그 위에 장대비처럼 '공감'을 퍼붓는 일이다. 사람을 구하는 힘의 근원은 '정확한 공감'이다.

 

 

자세히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은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 마음을 구석구석, 찬찬히, 환하게 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는 어떤 상태다. 사람의 내면을 한 조각, 한 조각 보다가 점차로 그 마음의 전체 모습이 보이면서 도달하는 깊은 이해의 단계가 공감이다. 상황을,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면 알수록 상대를 더 이해하게 되고 더 만히 이해할수록 공감은 깊어진다. 그래서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내 걸음으로 한발한발 내딛으며 얻게 되는 무엇이다.

 

잘 모르면 우선 찬찬히 물어야 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시작되는 과정이 공감이다.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이쓸 때까지 조심스럽게 물어야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가장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파악인 동시에 상대에 대한 이해이고 앎이다.

 

 

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직급,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인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인정받고 보상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살 수 있게 된다. 공감은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만큼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힘은 그가 고요하게 가만히 있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는 차돌 같은 안정감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공감의 힘은 그렇게 입체적이다.

 

 

문이 존재 자체라면 문고리는 존재의 '감정이나 느낌'이다. 공감 과녁의 마지막 동그라미는 존재가 느끼는 감정이나 느낌이다. 존재의 감정이나 느낌에 정확하게 눈을 포개고 공감할 때 사람의 속마음은 결정적으로 열린다. 공감은 그 문고리를 돌리는 힘이다.

 

 

사람 마음은 외부에서 이식된 답으로는 절대 정돈되지 않는다. 답은 밖에서 오지 않고 언제나 내 안에서 발견돼야 내게 스미고 적용된다. 자기가 처한 상황의 실체, 자기 마음의 실체를 하나하나 또렷이 보고 느끼면서 자기 상황에 대한 심리적 조망권을 확보해야만 마음이 정돈되기 시작한다. 온몸, 온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진짜 아는 일이며 그렇게 알아야만 혼돈에서 벗어날 길이 보인다.

 

 

어떤 이의 생각, 판단, 행동이 아무리 잘못됐어도 그의 마음에 대해 누군가 묻고 궁금해한다면 복잡하게 꼬인 상황이 놀랄 만큼 쉽게 풀린다. 자기 마음이 공감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이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기꺼이 진다. 자기 마음이 온전히 수용되었다는 느낌 때문이다. 억울함이 풀려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다'는 명제는 언제나 옳다.

 

 

사람 사이의 경계를 지킬 수 있으려면 경계를 인식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공감을 주고 받는 일에서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부터가 '너'인지 경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너를 공감해야 할 순간인지 내가 먼저 공감을 받아야 하는 건지 알아야 너와 나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공감을 할 수 있다. 경계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공감에 대한 정확성이 높아진다.

 

 

공감은 본래 상호적이고 동시적인 것이다. 지구가 자전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공전을 멈추거나 공전을 하느라 힘이 빠져서 자전을 쉬면 자연의 모든 이치가 깨지듯 공감도 마찬가지다. 상호성과 동시성을 잃으면 공감도 없다.

공감은 상대를 공감 '해주는' 일이 아니다. 내 상처가 공감받는 것에 예민하지 못하면 누군가를 공감하는 일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어렵다. 나와 너, 양방을 공감하지 못하면 어느 일방의 공감도 불가능한 것이 공감의 오묘한 팩트다. 그래서 공감은 너도 살리고 나도 구한다. 그래서 공감은 치유의 온전한 결정체다. 이 온전함의 토대는 오로지 자기 보호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되고 유지되면 자기 보호는 자기 경계에 대한 민감성에서 시작된다.

 

 

자기 보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끝내 타인을 공감하는 일을 감당한다.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에게도 무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기적인 것도 아니고, 타인을 도울 자격이 없는 사람의 비겁한 행위도 아니다. 자기 보호를 잘하는 사람이야말로 누군가를 도울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관계에서의 상처는 경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얘는 딱 자기 아빠야, 얘는 딱 어릴 적 나야, 얘는 나랑 정반대야"와 같은 말들은 내 아이를 부모와의 연결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내가 아닌 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다. 자식을 바라보는 게으른 시선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이런 게으른 시각은 큰 둑의 작은 구멍이다. 결국 둑 전체를 무너뜨린다.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기쁨과 즐거움이거나 배움과 성숙, 성찰의 기회일 때다. 그것이 관계의 본질이다. 끊임없는 자기학대와 자기혐오로 채워진 관계에서 배움과 성숙은 불가능하다. 자기 학대와 자기혐오가 커질 수밖에 없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끊어야 한다.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면 끊어야만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관계들이 의외로 많다. 관계를 끊으면 그때서야 상대방도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그런 계기로 삼지 못해서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되어도 그건 그의 몫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누구나 한결같이 공감받고 공감하며 살길 원하면서도 막상 그렇게 살기 힘든 건 공감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라서 일 수도 있지만 공감까지 가는 길목에서 여러 허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 허들을 잘 넘어야 마침내 공감에 도달할 수 있다. 그토록 원하는 공감받고 공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허들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대표적인 허들이 가정에 대한 통념이다.  내 마음을 말하는 걸 유치하게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감정을 미성숙함의 표현이며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감정 통제를 잘해야 어른이고, 그래야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은 이성으로 얼마든지 통제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다. 마음에 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잘못이라고 위험한 통념이다. 그런 인식 때문에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른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비용을, 얼마나 치르고 사는 걸까.

 

불안할 때 안정제로 불안을 없애버리고 그 신호의 근원을 외면하면 계속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불안 신호를 따라 '나'를 점검해봐야 한다. 불안을 따라가다 보면 근원이 나오고 그러면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모든 감정은 옳다. 모든 감정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표피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감정을 긍정적, 부정적으로 가르는 시각은 한 존재의 핵심에 다가가는 일, 누군가에게 깊이 공감하는 일을 막는 큰 걸림돌이 된다. 감정은 판단과 평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내 존재의 상태에 대한 자연스러운 신호다. 좋은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내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은 자기가 안전하다고 느껴야 자신이 놓은 상황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공감에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사람은 믿어도 되는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일한 역할이 그것이다. 온 체중을 다 실어 아이를 믿어주면 그게 어떤 일이든 본인이 오히려 '내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는 건 아닌가' 열심히 고민한다. 안전하면 입체적이고 온전한 성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면 외로워져, 안돼." "당당하게 살아야 해" "자기가 선택한 것은 끝까지 책임을 져야해." ....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일방적인 계몽과 교훈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듣는 이에게 강박 관념으로 남거나 상처만 주고 튕겨 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겉보기에 좋은 말일 뿐이다. 사람이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

 

 

공감이란 제대로 된 관계와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공감이란 한 존재의 개별성에 깊이 눈을 포개는 일, 상대방의 마음, 느낌의 차원까지 들어가 그를 만나고 내 마음을 포개는 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도 내마음, 내 느낌을 꺼내서 그와 함께 나누고 소통하는 일이다. 그렇게 서로의 개별성까지 닿지 않으면서 함께 사는 부부는 서로의 역할에 충실한 기능적 관계이기 쉽다.

 

기능적 역할에 충실한 관계라면 부부보다는 조직원이나 동료에 가까운 관계다. 사랑해서 만났어도 서로의 개별성에 다다르는 과정을 생략하다 보면 기능적 역할에 충실한 관계에 머물게 된다. 역할에 충실한 관계란 '모름지기 주부란, 아내란, 엄마란, 며느리란 이러이러해야 한다. 모름지기 가장이란, 빠란, 아들이란, 사위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집단 사고에 충실한 삶이다. 역할 놀이 중인 삶이다. 이런 삶, 이런 관계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내 심리적 S라인이 드러나지 않는 삶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면서 한 번도 그의 속살을 본 적이 없는 삶이다. 평생을 살아도 그가 누구인지 모를 수밖에 없는 삶이다.

 

 

공감은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감정적 교류다. 공감은 둘 다 자유로워지고 홀가분해지는 황금분할 지점을 찾는 과정이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공감이다.

 

 

안전하다는 느낌만 있으면 상처받은 사람은 어떤 얘기보다도 그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자기 얘기를 잘 들어줄 것 같은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낯선 상황이나 낯선 사람이라도 어떤 식으로든 그 말을 꺼내는 경우가 많다.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어서다. 공감을 받고 털어내야만 머릿속에서 자기 상처가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아픈 기억의 습격' 속의 삶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껴서다.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듣고,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듣다 보면 사람도 상황도 스스로 전모를 드러낸다. 그랬구나. 그런데 그건 어떤 마음에서 그런 건데. 네 마음은 어땠는데? 핑퐁게임 하듯 주고받는 동안 둘의 마음이 서서히 주파수가 맞아간다. 소리가 정확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공감 혹은 공명이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027973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삶 속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지만, 그것을 피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 오로지 정면으로 맞서 이겨낼 수 밖에는....

 

 

[본문발췌]

 

 

경제학자나 정치철학자의 이념은 그것이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실제로 이 세계가 그러한 이념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떠한 지적 영향과도 무관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경험 많은 사람들도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인간은 자기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지키거나, 갖고 싶은 것을 정당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로 인해 그러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사상을 옳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사상이 기득권을 초월하지만, 그 반대로 사상이 기득권의 소산인 경우도 대단히 많다.

 

권력은 지배자로부터 지주로, 지주로부터 농업 노동자에게로 흘러내려 갔다. 권력이 위로부터 아래로 흘러내려 온 것과 반대로, 권력으로 얻어진 소득은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것은 명심해 둬야 할 원칙이다. 소득은 항상 권력과 같은 축을 따라서 흘러가지만 방향은 정반대인 것이다.

 

 

토스타인 배블런의 <유한계급의 이론>은 재산으로 부자가 누리게 되는 뿌리 깊은 우월감을 중심 문제로 다룬다. 우월감을 즐기기 위해서는 이 우월감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부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중히 숙고하여 재산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 현시적 여가와 현시적 소비 두 가지이다. 특히 현시적 소비는 배블런이 미국의 언어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한 것이다. 현시적 여가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 일 이외의 것에는 마음과 몸을 쓸 겨를이 없는 세계에 빠졌을 때 얻게 되는 것이다. 부자라고 몸소 일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내나 딸의 한가로움을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함으로써 커다란 우월감을 얻는다. 현시적 소비란 소비에 드는 비용의 크기를 사람들에게, 오로지 인상 깊게 하는 것만을 노린 소비이다. 그들의 취향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유한계급의 이론>이 출판되고 나서부터는 부자가 허세, 방종, 향락에 돈을 사용하면 누군가가 저것은 현시적 소비라고 비웃게 되었다.

 

 

구조 변화와 발전의 유기적인 과정은 이윽고 마르크스의 사상의 핵심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 변화의 원동력은 사회계급 간의 투쟁이다. 이것에 의해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일단 사회 구조가 외관상 안정된 상태로 발전하고 나면, 그 속에서 그 구조에 도전하고 파괴하려는 적대적인 힘이 자라난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사회구조가 출현하고, 투쟁과 파괴의 과정이 새로이 시작되는 것이다.

 

 

혁명에는 세 가지 조건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선 먼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얻게 되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인물은 드물다. 혁명은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다음으로, 지도자 밑에는 명령만 내리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움직여 주는 잘 훈련된 부하가 있어야 한다. 이것 또한 좀처럼 바랄 수 없는 일이다. 혁명가에게는 끝까지 혼자서 생각하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고 하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공론만 떠벌리는 무리들을 끌어들이거나 그들에게 말려들 우려도 없지 않다. 그러한 무리들은 끌여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무리들은 끝도 없이 논쟁만 하며 그 동안에 스스로 파멸되게 퇼테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혁명의 상대가 약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성공한 혁명은 모두 썩어서 무너질 듯한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혁명의 폭력이란, 말하자면 진공 상태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사람들의 폭려고가 마찬가지이다. 프랑스 혁명이 그러했고,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그러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중국 혁명도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1848년의 혁명은 그렇지 않았다.

 

 

화폐는 역사의 전 과정을 통해서 다음 두 가지 중의 어느 한 가지 방법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괴롭혀 왔다. 즉 풍부하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거나, 아니면 믿을 수는 있지만 극히 부족하거나 두 가지 중에 하나였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제3의 고통이 있었으니 그것은 화폐가 부족한 동시에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이 방면에서 가장 오래된 상투적인 문구 하나로 말하자면, 가능성의 예술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최고로 발전한 단계에서, 정치란 중요한 것과 말초적인 것을 구분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에 전력을 기울이는 예술이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문제도 미소 간의 무기 경쟁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또한 불확실성의 원천으로서 이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이 경쟁은 이제 두 나라가 서로를 보복적으로 파멸시키고, 세계의 나머지 부분까지도 몇 시간 내로 끌어들이는 수단까지 개발시키고 있다. 거대한 기술 자원이 파멸에 필요한 시간을 분 단위로 축소시키기 위한 노력에 쓰여지고 있다. ... 앞에서 지적한 경쟁은 두 갈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것과 연관되어 있는 두 가지 모두 아주 불길한 것인다. 첫 번째, 본래적으로 적대적인 경제, 정치, 사회 체제 간의 충돌 -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대립 - 이라는 개념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전제주의적 규제와 개인의 자유, 무신론과 종교적 신앙 등 어느 것 사이에도 화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두 번째, 군비 확대 경쟁이 우리들의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힘의 결과이며, 미국에서나 소련에서나 군부 체제 및 무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갖는 공적 권력의 표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중의 유착 관계가 엿보인다. 미국에서는 거대한 무기 회사가 군부에 그들이 요구하는 무기를 공급한다. 공군, 해군, 그리고 육군은 그 답례로 회사에 이익과 고용을 주도록 주문하고, 이것으로 회사는 기능하고 번영한다. 회사와 군부는 연구와 개발을 공동으로 하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무기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무기를 필요로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유착 관계다. 두 번째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과정이 이 두 나라 사이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들 양대국은 각각 혁신과 무기 축적을 추진해서 상대국이 동일한 또는 그 이상의 일을 할 필요성과 동기를 만들어 낸다. 이런 식으로 양국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자기 영속적인 것임을 확신하게 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자유와 권위, 진보와 반동, 마르크스와 그리스도 간의 차이가 인용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의례적인 인용이지 진정한 것은 아니다. 어떠한 신앙도 무기 경쟁을 지지하지 않는다. 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충돌이 생겨나면 어느 체제도 존속될 수 없다는 점에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양국은 모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있어서 법인 기업은 그 불확실성의 주요한 원천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어떠한 목적으로 지배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 채 그 대답을 주지 않는다. 이 불확실성에 대한 하나의 응답은 분명한 것이다. 그것은 신화를 꿰뚫어 보고 현대의 법인 기업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기업의 경영자는 쫓기는 사람이다. 다른 시대나 다른 세계에서 온 철학자는 그들의 인생관에 놀랄 것이다. 어째서 그들은 이와 같이 시간과 건강을 희생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 철학자는 그들의 호기심을 끄는 보수라는 개념 - 부하에게는 하찮은 복종을 요구하고, 자신은 막상 쓸 시간도 없는 돈에 집착하는 - 에 의아해할 것이며, 어째서 그들이 이처럼 열심히 일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철학자는 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어리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악한 회사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능한 회사이다. 잘못된 결정과 마찬가지로 나쁜 것은 시기를 놓치고 마는 결정이다.

 

 

빈곤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원칙적으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다 많은 토지를 공급하거나 물이나 비료의 형태로 토지의 공급을 대신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주어야 한다. ...그것에 착수하기에 충분한 최소한의 토지를 경작자가 소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두 번째의 가능성은 농민이 생산한 생산물로 그들의 노력이 보상될 수 있도록 토지 소유제를 변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또한 충분한 토지가 있어야만 한다. 세 번째의 답은 아이를 조금만 낳는 것이다. 네 번째로는 주인이 아예 그곳을 떠나는 것이다(이주). 만약 토지가 정말로 충분하지 못하다면 이 마지막의 두 가지 답만이 도움이 될 것이다.

 

 

지도자는 타협을 할 수 있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곤란을 회피한다고 여겨져서는 안 된다. ... 지도자는 그 시대의 불안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문제가 변화함에 따라 자기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교육에는 두 가지 필요한 조건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 교육은 반드시 필요한 공동체 의식의 배양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그정한 이익은 비록 그것이 개인의 이익이라 하더라도, 일반의 이익에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 그리고 전체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당사자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의식이 그것이다. 동시에 일반의 이익에 저항하는 인물은 그 인물 자체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법인 기업이나 동업조합, 군인이나 관료, 노동조합이나 변호사, 의사나 교수들이 공공의 이익보다 자기들의 금전적 또는 관료주의적 이익을 우선시키려고 하는 경우에 국민은 이것을 깨닫고 반응하며,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 교육이란 이런 인식과 이런 책임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로, 교육은 사람들에게 당면한 과제에 의심 없이 명확한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그렇게 하는 사람과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게 하여 개인적 안정감을 심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현대의 방관자 같은 정치의 나쁜 점은, 시대의 불안에 대한 대책을 공약하면서도, 이에 필요한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신을 선출해도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고 교묘히 설득하는 정치가를 추어올린다는 점에 있다. 이를테면 "나는 평화에는 찬성하지만 군사력의 약화는 원치 않는다."라든가, "빈곤은 없어져야 하지만 납세자에게 새로운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라든가 "소득의 보다 적절한 분배에는 찬성하지만 개인기업의 보수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정치가가 그것이다. ... 우리는 이들 학생들이 민주주의에서 그들이 주권자라는 것, 즉 스스로 결정을 내릴 권리와 책임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들은 또한 지도자를 양성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타인을 위해 결정을 내리고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만한 지식과 자존심을 구비한 남녀의 양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도력이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지도력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전해야 하는 추종자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모순은 원칙적으로는 양립하지 않는 것이지만 실제 문제로서는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결단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논의해 왔던 문제를 총체적으로 전망한다는 것을 뜻한다. 해결이 곤란한 문제는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물다. 곤란이 있다면 그것은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알고 있지만, 무기력과 금전상의 이해와 감정 또는 무지 때문에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문제는 현재의 부 또는 적어도 잠재적인 부의 재분배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 해결책을 공약으로 내거는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을 뿐이다. 또한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사람들이 이동해야 한다는 가장 오래된 해결책에 이르면 이것을 제안하는 사람은 더욱 적어진다. 가난한 나라에서의 잔인한 인구 증가는 산아제한이라는 방법 이외로는 억제할 수 없다. 중국인과 점점 늘어만 가는 인도인은 산아제한이 강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두 나라 이외에 이 냉혹한 진리와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나라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행정면에서의 인적자원도 부족하다. 다만 예부터 조직 능력이 풍부한 중국인의 경우는 예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고도로 조직화된 노력에 의존하는 것이 가난한 나라의 경우 한층 곤란한데, 사회주의가 그 극단적인 예이다. 빈곤의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가난한 나라는 일반적으로 애덤 스미스나 카를 마르크스가 경제 발전의 초기에서는 불가결한 것이라고 믿었던 개인 에너지의 해방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한 나라 중에서 이처럼 외관상으로도 대단히 보수적인 진리에 정면으로 대결하려 하는 나라는 결코 많지 않은 것이다. 

 

 

부유한 나라에서도 빈곤의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는 마찬가지 어려움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주는 이상으로 효과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이다. 식량, 주택, 의료 서비스, 교육 또는 현금,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간에 소득은 빈곤에 대한 최선의 구제책이다. 그러나 이처럼 명백한 진리이면서도 이만큼 교묘한 핑계를 낳게 한 예는 없다. 우리는 우리 주위를 둘러싼 대기나 물, 풍경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리들의 환경을 보호한다. 이것도 어려움을 수반하는 진리이다. 왜냐하면 에너지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든지, 고용 확보를 위해서라든지, '나의 자동차를 위해서'라는 이유에서 예외 취급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자원을 장기간 지속시키기 위해 그 이용을 절약해야 한다는 것도 역시 곤란을 수반하는 진리이다. 정치가로서 실업이나 인플레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소득과 가격에 대한 어떤 통제 없이 높은 고용 수준과 가격 안정을 동시에 달성하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한 통제 없이는 더욱더 소비를 늘리려는 투쟁, 그리고 그 소비를 지탱하기 위해 소득을 향상시키려는 투쟁 - 그것은 현대의 법인 기업, 현대의 노동조합 및 현대의 민주주의가 한결같이 촉진하고 장려하는 경쟁이다 - 은 물가를 상승시키게 될 것이다. 그때는 심각한 실업을 발생시키는 것 이외에는 이 가격 상승의 압력을 완화시킬 방도가 없다. 현대의 경제는 오로지 인플레이션이냐 실업이냐 아니면 통제냐 하는 선택밖에 주어지지 않는데, 이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욕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거대 도시 지역의 문제는 결코 복잡하지 않다. 그것은 대부분 돈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웃해서 또는 아래 위로 겹쳐서 살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비용이 든다.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생활을 하려면 우리들은 그 비용을 부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도시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비용 부담을 면할 수가 있다면, 약간의 또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빠져나갈 것이다. 그럴 경우 도시의 경제적 기반은 침식될 것이고 돈 문제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즉 보다 효율적인 시정, 낭비적 지출의 억제, 교직원이나 경관이나 청소 관계 조합에 대한 강경한 태도 등을 약속하는 연설을 하는 편이 나은 것이다. 핑계가 가장 잘 통할 때는 문제가 복잡할 경우이다. 문제의 해결이 곤란해 보이면, 우리는 해결을 뒤로 미루고 타협하며, 정치적 편의주의에 굴복해 버리고 만다. 우리들이 복잡함을 어떻게 핑계 삼고 있는가를 알려면 때때로 문제의 회피가 불가능할 만큼 사태가 명백한 도시나 시골에 찾아가 보는 것이 좋다.

 

 

최초의 (핵)미사일을 서로 발사한 뒤에는 흐루쇼프가 세계에 대해 경고했던 것과 같이 공산주의의 재와 자본주의의 재를 구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광적인 이데올로기론자라 하더라도, 그도 또한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차이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불확실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진리에 우리들이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625811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국가와 계급 집단간의 갈등..... 드라마틱하고 리얼한 역사 이야기!

 

 

[본문발췌]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지금가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계급투쟁이야말로 사회이며, 역사다"라고 말합니다. 사회의 본질을 이만큼 꿰뚫은 테제(These, 명제)는 없을 겁니다. 인간이 모여 이루는 사회가 존재하는 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르크스의 테제는 딱 들어맞습니다. 인간은 세 명 이상 모이면 반드시 파벌(동맹)을 만듭니다. 그 경우, 힘의 관계를 가늠하면서 약한 두 명이 동맹해서 강한 한 명에게 대항하거나, 강한 두 명이 약한 한 명을 공동으로 제압하는 등, 힘의 관계에 따른 합종연횡이 전개됩니다. 힘에는 무력, 지력, 매력을 포함해 국력, 개인력, 씨족력 등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그러한 힘 속에서 인간이 파벌이나 세력을 형성할 때 가장 중요하면서 보편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경제력입니다. 경제적인 빈부 차이가 계급을 형성하면서 그 계급은 흔들림이 없는 파벌이자 세력의 결속을 나타내는 지표가 됩니다. 풍요롭게 사는 사람과 가난하게 사는 사람. 이 구분이 다른 구분보다 우선시되어 인간이 이루는 사회의 숙명적인 테제로서 존재합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부를 바랍니다. 부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어떤 시대든 세상에 존재하는 부의 용량은 한계가 있기에 필연적으로 부를 둘러싼 다툼과 경쟁이 일어납니다. '돈이야말로 전부'라는 인간사회의 실태를 누구도 부정할수는 없겠지요. 문화, 예술 분야 혹은 윤리, 종교 분야에서는 부가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지만, 정치, 경제 분야에서는 부야말로 모든 것이며, 그에 따른 제반 문제나 현상은 원인도 해결책도 결국 부, 돈에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사회문제를 파고들 때, 돈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 실체가 보이게 되고, 그 실체를 둘러싼 인간의 행동양식이야말로 역사라는 현상 그 자체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 마르크스의 이 말에서 하부구조는 경제적인 것이고, 상부구조는 정치적, 문화적인 것을 지칭합니다. 경제적인 요인이 근본 요인이고, 그에 따라 상부구조인 정치가 움직인다는 의미입니다. ... 하부구조라는 것은 경제적 이해득실 관계이며, 부에 대한 인간의 욕망 그 자체입니다. 역사적 현상의 배후에는 인간의 욕망에 따른 거대한 구조가 필연적으로 존재하기에, 그것만 따로 떼어두고 단독으로 존재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 거대한 구조를 알아두어야 비로소 역사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 역사상에 누적된 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명확히 밝히고, 주로 경제적 측면의 문제를 살핌으로써 역사와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파벌, 세력은 행동양식(패턴)이 거의 동일할뿐더러 되풀이 됩니다. 이미 부를 획득한 풍요로운 세력은 그 부를 지키려고, 현재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보수파가 됩니다. 반면 가난한 세력은 부의 확득에 실패했기에 현재의 사회 시스템을 부정하고, 새롭게 부를 분배받을 기회를 노리는 혁신파가 됩니다. 보수파는 우파, 혁신파는 좌파라고 말하지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시대에 의회가 열릴 때, 의장석에서 바라보면 오른편에 보수파 부유층이 앉았고, 왼쪽에 혁신파 빈곤층이 앉았기에 이런 명칭이 붙었습니다. ... 근현대사에서 우파는 자본주의/자유주의, 좌파는 공산주의/사회주의라는 속성도 띱니다. 우파의 엘리트 부유층은 자유경쟁을 원하면서 더욱 사회적 강자가 되려 합니다. 즉, 자본주의를 지향합니다. 이에 비해 좌파인 빈곤층 약자가 사회적 격차를 인정하지 않고, 높은 곳에 군림하는 강자를 끌어내려 평등한 세상을 이루려는 것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겠지요. 따라서 좌파는 공산주의를 지향합니다. 하지만 우파와 좌파의 대립은 실로 복잡한 정치적인 측면이 얽혀 있기에 혼재된 양상을 띱니다. 우파적인 경제성향을 가진 사람 중에서도 그 정치적인 사상은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 지역, 마을 같은 공동체(커뮤니티)를 중시하고 전통, 관습을 따라 사회적 운영을 지향하는 그룹은 진정 보수라고 부릅니다. 좌파 중에서도 개인 인권을 중시하고 자유경쟁과 개방사회를 지향하는 그룹은 리버테리어니즘(libertarianism, 자유시장주의)이라고 불리지만 진정보수와는 거리를 둡니다. 좌파와 마찬가지로 커뮤니티, 규칙을 중시하는 그룹은 통제형 사회주의라고 불리는데, 개인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리버럴(liberal, 자유주의) 타이브이 사회민주주의와는 색깔이 다릅니다.

 

 

드디어 인류가 농경 기술을 갖추고 농촌을 형성했습니다. 사회가 생기면 그것을 다스리는 권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 권력은 곧 국가가 되고, 머지 않아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리스헬레니즘 세력은 어디까지나 군사 집단이었기에 법률, 제도를 통해 상업 활동을 활성화시킨 로마의 현명한 비전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사회라는 것을 형성할 때도 언어가 출발점이 되었고, 구심점이 되었으며, 언어로 인해 발전했습니다. 인간사회와 언어와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선으로 보는 덕치주의, 악으로 간주하는 법치주의... 정치는 사람의 선의에만 의존할 수 없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람의 욕망뿐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고, 속이고, 죽이는 등의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러한 욕망을 억제시키기 위한 강제력 있는 장치가 사회에는 필수불가결한데, 그것이 바로 '법'입니다. 자비와 덕만으로는 욕망을 억제시키기 어렵기에 사람들은 보기 흉할 만큼 싸웁니다. 법은 욕망의 폭주를 벌합니다. 반면 일정한 수준에서 욕망 추구를 인정하고, 그것이 타인의 욕망과 부딪치지 않도록 욕망의 타협점, 즉 권리의 범위를 정해줍니다.  또한 규칙 속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보장해주고, 능력 있는 사람이 법을 통해 정당히 평가 받습니다. 유교의 덕치주의는 윗사람에 대항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부당한 기득권이 고정화되고, 경쟁이 무의미해지면서 사회발전을 꾀할 수 없습니다. 선의, 덕이라는 말은 아름답게 들릴지 몰라도 정치에 본격적으로 도입하면 사회는 혼란스러워질뿐더러 부패한다는 정치상의 역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백년 전쟁 이전에는 유럽의 주요 간선 루트에 끼지 못해 이익을 바라보지 못했던 영국이었지만, 백년 전쟁 중에 습득한 '자본과 기술의 집적', 여기에 따른 중앙집권화라는 근대적 이노베이션으로 세계경제의 패권을 쥐게 됩니다. 이노베이션은 때때로 역경과 갈등 상황에서 비롯되는데, 그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겠다는 영국의 의지가 근대로 향하는 이노베이션을 탄생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항해 시대의 도래는 유럽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는 상업혁명입니다. 이는 종래의 지중해가 무대인 제한된 시장권이 대서양을 거쳐 아시아, 신대륙을 향해 글로벌한 시장권이 갖추어지는 변화를 가리킵니다. 또 하나는 가격혁명입니다. 신대륙에서 대량의 은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은에 의한 화폐경제가 눈에 띄게 발전합니다. 이에 따라 유럽의 경제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되고 물품의 가격도 상승(인플레)하면서 이른바 고도 성장을 이룹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계층이 신흥 부르주아라는 비즈니스맨들입니다. 반면에 기사, 귀족 등 제후 세력은 격동하는 시장 경제의 흐름에서 도태되어 중세 봉건 시대의 유물이 됩니다. 가격혁명은 중세의 사회구조를 끝내게 만들었고 화폐경제,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시대를 등장시켰습니다.

 

 

20세기의 역사가인 페르낭 브로델의 저서, 특히 제 2권인 <교환의 역할>이 압권으로 산업혁명 이전의 유럽 자본주의 태동에서 시작해 18세기의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페르낭 브로델은 자본주의와 시장을 구별해 "시장은 도시민, 농민, 소상인으로 구성되는 물질의 교환 장소이다"라고 정의합니다. 시장의 거래는 소박한 등가교환이고, 큰 이익을 얻지는 못합니다. 한편 자본주의는 베네치아처럼 대도시 상인에 의해 구성되는데 페르낭 브로델은 "도시는 시장과 시장을 잇는 교역의 접점이고 대상인들은 대도시에서 파생되는 교역의 이권을 독점, 자본을 축적했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중세의 도시경제 형성과 먼 거리 무역 안에서 그는 근대자본주의로 이어지는 원형을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정치경제학자인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로빈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권력, 번영, 빈곤의 기원>에서 일부 사람들이 부를 독점하는 정치적 제도를 저자들은 '수탈적 제도'라고 부르고, 이 제도는 부의 분배를 요구하는 다수에 의해 필연적으로 붕괴된다.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의 혁명,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사례로 들어 '수탈적 제도'의 붕괴가 제도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리카도 vs 멜서스, 곡물법을 둘러싼 논쟁. 19세기의 곡물법을 둘러싸고 당시의 경제학자들도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리카도는 자유주의 관점에서 보호주의인 곡물법을 폐지하라고 주장했고 한편 멜서스는 저서 <인구론>에서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대비해 국내농업을 보호해야 한다며 곡물법을 지지했습니다.

 

 

정부가 재량을 갖고 재정 정책을 펼쳐 경기를 자극시킨다는 케인스 학파에 통화주의자들은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정부에 의한 인위적인 재정확대지출은 매크로 경제의 실상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취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앙은행이 재량을 갖고 화폐를 공급하는 것도 적절한 대응이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실물경제에 부작용과 악영향을 끼친다고 했습니다. 통화주의자들은 물가의 장기적 안정을 중요시했기에, 화폐량의 증가율을 적절한 비율로 고정함으로써 재정, 금융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고도 주장했습니다. 통화주의자의 대표 격인 인물은 밀턴 프리드먼입니다.

 

 

문명 혹은 국가는 탄생하고 붕괴됩니다. 대부분의 역사책은 그 흥망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흥망이 '왜' 발생했는지를 추구한 책은 아주 드뭅니다. 그 드문 책이 바로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저작입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166032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자신이 속한 공간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기본 요소다. 

 

 

[본문발췌]

 

 

<행복의 건축>에서 알랭 드 보통이 말한 것처럼, "장소가 달라지면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사람도 달라진다." 건축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을 축조하는 과정'이기에, 행복한 삶을 설계하는 건축가들에게 '우리는 어디에서 가장 행복한가'에 대한 신경과학적 이해는 필수다. ... 내 공간을 둘러보고 내 삶의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나의 공간이 얼마나 적절한가?

 

 

심리지리학은 건축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나는 어떤 공간에서 행복하고 창의적이며 안식을 얻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역세권이나 학군, 투자가치만으로 집과 건물을 바라보지 말고, 공간 속에 놓인 내 안을 들여다보라고 말이다.

 

 

인간은 건축물을 지어서 지각을 바꾸고 사고와 감정에 영향을 끼치며, 이런 식으로 인간 행동을 조직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또 많은 경우에 돈을 벌어들인다.

 

 

설계에 의해서든 우연에 의해서든 건축물은 아이의 행복한 미소를 보고 따라 웃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과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를 행동하고 느끼게 만들어준다. 이런 연결은 원래 우리가 경험을 서로 나누고 자연의 위험과 기회에 적절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된 신경회로의 작용으로, 우리의 신경계에 깊이 새겨져 있다.

 

 

수천 년 동안 전통적인 벽은 건축 설계로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벽은 사람들의 이동을 막고 시야를 가린다. 벽은 사생활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한다. ... 벽은 사회적 관습과 문화적 규준을 강화하거나 새로 만든다.

 

 

제이 애플턴Jay Appleton은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의 진화적 연속선을 주장하면서 '조망prospect'과 '피신refuge'이라는 두 가지 기본 원리로 인간이 심미적으로 특정 자연경관을 선호하는 성향을 설명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애플턴은 동물이 서식지를 선택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보는 것이지 보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독일의 생태학자 니코틴버겐의 주장에 주목했다. ... 애플턴의 조망과 피신 이론은 미학부터 조경과 실내 설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특정 장면을 선호하는 생물학적, 진화적 기초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애플턴의 연구를 시작으로 수백 편의 연구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싶어하고 어디에 머물고 싶어하는지를 결정하는 데 이런 공간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프랜시스 쿠오와 윌리엄 설리번이 풀과 나무의 양이 각기 다른 도심의 거주구역 연구를 시작으로 쏟아져나온 여러 연구에서는 풀과 나무가 많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통제가 잘된 몇몇 현장 연구에서도 초목이 많은 동네에서는 반문화행위와 범죄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초목이 많은 환경에 사는 주민들은 서로를 알고 지내고 대화를 많이 나누며 사회적 결속력도 높아서, 특정 정신병리에 시달리지 않을뿐더러 경범죄 피해도 덜 입는다. 이상의 모든 연구에서는 자연에 대한 원초적인 반응이 현대의 거주지 선택에 필요하지 않은 진화적 요인과 관계되지만, 여전히 도시환경의 범죄율과 거주적합성, 행복을 비롯해 심리적으로는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프랙털 차원과 비슷한 범위 내에 있는 이미지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이미지의 프랙털 속성과 우리의 선호도가 일치하는 현상과, 나아가 이런 이미지에 대한 생리적 반응(자연풍경에 반응해서 나타나는 회복탄력성과 같은 반응)을 기반으로 우리의 뇌가 자연을 인지하는 방식은 수학적 속성의 도움을 받는다는 개념이 나왔다. 우리가 자연에 끌리는 성향을 프랙털 수학 개념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특히 매력적이다. 

 

 

자연의 심리적 혜택을 얻는 데 굳이 자연이 필요하지 않다면, 자연을 아예 없앤 뒤 건물 전면에 폭포 소리와 새소리를 삽입한 대형 컬러화면을 부착해 도시를 건설하면 되지 않을까? ... 다른 대안이 없는 환경에서는 자연을 시뮬레이션한 장치만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실제 창문으로 자연을 내다볼 수 있는 환경에서는 화면 속의 자연이 주는 효과가 미미하다.

 

 

자연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증거가 쏟아져나온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업무에 중점을 두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활동에 고도로 집중하는 능력을 최고로 여긴다. 중간에 자연공간에서 보내는 상쾌한 시간은 생산과 소비 중심의 '실제 생활'에서 잠시 벗어난 휴식 정도로 여긴다. 정신이 유연하게 변화하는 초등학교를 비롯한 교육제도에서는 정규교육의 목표를 교실에 가만히 앉아 한가지 활동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으로 삼는다. 이런 활동을 힘들어하는 아이들은 따로 분류하거나, 환자로 취급당하거나, 약물로 뇌 기능을 변형해서 고도의 선택적 집중을 강화하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 유치원부터 대학교 강의실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실이야말로 부자연스럽고 유도된 집중력을 강화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집중력은 금방 떨어진다.

 

 

인간이 벽돌, 모르타르, 회반죽, 창문을 배치하기 시작한 시대부터 세상을 보는 효과적인 인공 창문의 역할을 하는 전자화면의 발명에 이르기까지, 환경 설계의 역사는 우리가 세계를 보고 세계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에 대한 체계적인 도전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우리의 타고난 집중 습관과 힘든 일상에서 잠시 숨 돌릴 틈을 찾는 습관 대신에 고도로 집중하고 선택적으로 주목하는 지각 상태가 자리잡았다. 두 가지 모두 우리의 욕구를 끌어내고 충족시키는데 도움이 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를 정신적으로 고갈시킨다. 집중력을 끌어내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자연의 질서에 융합된 칼라하리 부시맨의 삶처럼 기술 이전의 사회에서 누리던 생활양식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적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되도록 단련된 신경장치가 되었다. 사실 우리가 인류를 존재하게 해준 원시적인 야생 환경을 (나날이 복잡해지는 물질적 욕구를 만들어내고 만족시키는) 소비지상주의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 탈출 밸브로 여기는 것은 역설적이다. 현대인으로 산다는 의미가 이렇게 급격히 달라진 점을 감안할 때 초기 인류의 흔적이 현재의 감정, 현재의 기호, 현재의 행동에 여전히 영향을 끼친다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나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건축 환경이 주는 안락을 거친 야생의 생활과 바꾸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우리가 여전히 수천 년전에 떠나온,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던 환경과 자연의 기하학을 갈망하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자연을 선호하는 성향은 우리가 어디에서 걷고 어디에 앉을지 선택하는 것부터 무엇을 보고 싶어하고 어떻게 생활하고 싶어하는지에 이르기까지 행동이 거의 모든 측면에서 집중력을 끌어내는 기술로 나타나기도 하고 (실제 자연이든 시뮬레이션 자연이든) 자연 장면의 회복탄력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연을 향한 우리의 갈망은 가장 중요한 심리지리학적 구조의 토대가 된다.

 

 

지루한 경험에 잠깐만 노출되어도 뇌와 신체의 화학반응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식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건축 환경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권태를 유발하는 요인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 개성 없고 단조로운 환경이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뇌에도 눈에 띄게 영향을 끼친다.

 

 

장소는 우리를 감정에 휩싸이게 하고 우리의 움직임을 지시하고 우리의 의견과 결정을 바꾸며, 때로는 우리를 숭고하고 종교적인 체험으로 이끌어주기도 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125514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어떻게 살 것인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고 자신만의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 질문이 적절한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본문발췌]

 

 

인간이 스스로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할경우, 자유는 성가신 부담이 된다. ... 우리는 개인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젊은 나치의 말 그대로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대중운동에 가담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극악한 행위에 대해 나치의 말단 병사들이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명령에 따른 책임을 져야 했을 그들은 자신들은 속았고 무죄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나치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할 근거가 약할수록 자신의 국가나 종교, 인종의 우월성을 내세우게 된다.

 

 

교육의 주요 역할은 배우려는 의욕과 능력을 몸에 심어 주는 데 있다. '배운 인간'이 아닌 계속 배워 나가는 인간을 배출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란 조부모도, 부모도, 아이도 모두 배우는 사회이다.

 

 

도서관 출입과 저녁 식사를 위해 거리를 걸을 때 나의 감각은 시야에 있는 것은 무엇이건 건드려 보고 냄새를 맡아 보는 즐거운 강아지와 같았다. 나의 귀는 거대한 도시가 뿜어내는 생명의 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내 몸의 모든 체모에는 번잡한 보도의 긴장감이 감지되었다.

 

 

자기기만이 없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이 분출할 때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만, 그것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전쟁을 이기고, 대륙을 제압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망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Hope, 절망과 고통은 정태적인 요소이다. 상승의 동력은 희망과 긍지에서 나온다. 인간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구이다.

 

 

Language, 언어는 질문을 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대답은 투덜대거나 제스처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반드시 말로 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던 때부터였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

 

 

Happiness. 이런저런 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오염된 자아에 있다는 인식을 억누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이 된다.

 

 

지상은 인간들로 넘쳐 난다. 마을에서도, 들판에서도, 길에서도 사람들을 보게 되지만 당신은 그들을 주목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다 당신의 눈이 한 얼굴과 마주치고 경탄하게 된다. 갑자기 당신은 지상의 어떤 거소가도 다른 인간의 숭고한 유일무이성을 의식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이미지로 자신을 만든다. 그런 만남에는 쓸쓸함이 있고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은 어떤 것이 있다.

 

 

Religion. 종교는 신이나 교회, 성스러운 동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적 몰입의 근원은 자아에,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자아의 거부에 있다. 헌신은 자아 거부의 앞면이다. 종교적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왜냐하면 몽테뉴도 지적했듯이 '자기를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에서는 볼 수 없는 인간에 국한된 병'이기 때문이다.

 

 

양들은 주변에 익숙하지 못하다. 양에게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기괴하고 전에 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리석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양에게는 인간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다. 양들의 그러한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자아낸다. 양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생에 대한 두려움과 이 세상에서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느낌 때문에 종족이나 민족으로 무리를 짓는 것이리라. 

 

 

Hatred. 증오가 정당한 불평보다는 자기 경멸에서 솟아난다는 것은 증오와 죄의식의 밀접한 관계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40대의 인간은 새로운 시작이 불가능한 완성품이라는 터무니없는 가정을 배척해야 한다. 40대가 청소년보다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거나 쉽게 잊는다는 증거는 없다. 중년은 보다 감각이 예민하고, 인생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며, 관찰과 행동에 있어 끈기가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안정적 수입원을 확보하는 데 인생의 절반을 필수적으로 소비하도록 하고 있다.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이제 남은 나머지 절반은 상부 구조의 건설에 바쳐져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손대는 사람은 100만 명 가운데 한 명도 없다. 우리에게 은퇴란 희화이고 잔인한 농담이다. 우리의 쇠락하는 여생이 권태와 실망으로 찌들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적 생활 양식은 단죄되어야 한다. 노년은 감미롭고 향기로운 인생의 열매여야 한다.

 

 

유사성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차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차이를 만들어 낸 사람의 이름을 알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런 사람들은 묘비도 없고 찾는 이도 없는 무덤 속에 묻혀 있다. 역사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보기에 의해 만들어진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들이 역사에 해결의 빛을 비춰 준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나는 몹시 기뻤다. 아마 우리의 기록된 역사와 관련한 문제는 역사가들이 과거에 대한 통찰을 현재에 대한 연구에서가 아니라 고대 유물과 기록에 대한 연구에서 끌어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역사가도 다른 우회로가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해명해 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Money.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상투어를 만들어 낸 사람은 악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며, 인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다.

 

 

친숙한 것을 새로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창조적인 예술가의 힘이다. ... 친숙성은 생의 날카로은 날을 무디게 한다. 아마 예술가의 본모습은 이 세상에서의 영원한 이방인이거나 다른 별에서 온 방문객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방도가 될 수 있다. 내가 불만 품는 걸 내키지 않아 하는 것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437504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시스템 속 톱니바퀴의 삶을 살고 있지만 안정을 위해 애써 모른체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가 말하는 성공한 린치핀의 삶을 동경하는 것 아니지만 어렵지만 현 상태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통찰, 창조성, 대담함을 지닌 예술가로서 변화와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삶은 공감한다.

 

 

[본문발췌]

 

 

안타깝게도 학교, 직장, 정부, 가족을 비롯한 우리 사회가 우리의 천재다운 특성을 계속 깔아뭉개고 쫓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문화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은 것처럼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안정을 주는 대신 우리의 천재성과 예술적 기교를 앗아간다.

 

 

시스템의 효율보다 개인의 차이가 중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변화해야 하는 시기를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조직에 끝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다. 많은 보수를 챙겨가는 고지식한 관료, 지시받은 일만 하는 사람,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 규율을 꼼꼼히 따지는 사람, 주말만 기대하는 사람, 안전한 선택만 추구하는 사람, 회사에서 잘리지 않을까 늘 걱정하는 사람들이 조직을 지키고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무리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자신만의 생각을 가진 사람, 세상을 뒤집을 만한 사람,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조직을 이끌 수 있는 기획자,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 판매자, 꼭 필요한 일이라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기끼어 감수해내는 열정적인 혁신가가 필요하다. 어떤 조직이든 이러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사람, 남다른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바로 린치핀이다. 물론 아직까지 린치핀이라는 존재의 의미와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 조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성공으로 한걸음 다가가기 위해서는 일을 하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천재성을 갖춘 '예술가'가 필요하다.

 

 

진정한 창조성이란 게임의 틀을 바꾸는 것, 상호작용 방식을 바꾸는 것, 더 나아가 질문을 바꾸는 것이다.

 

 

시장이 보상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 통찰, 가치를 창조하는 용기다.

 

 

마음과 영혼이 담겨 있지 않더라도 맞춤법만 틀리지 않도록 답안을 작성해 제출하면, 고리타분한 선생은 분명히 A를 줄 것이다. 기본적으로 교육대학에서는 억지로라도 자신을 끼워 맞출 수 있는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선생들은 학생들이 받침을 맞게 썼는지 띄어쓰기를 제대로 했는지 체크할 것이다. 짧은 글이 감동을 주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방식으로 학교는 통찰과 창조성을 획일적으로 찍어낸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 시스템은 '시키는 만큼만 하면 돈을 버는' 자본주의적 아이디어와 더불어 감동을 전하고 베푸는 '선물 경제(gift economy)'가 작동하는 하이브리드 경제다. 

 

 

예술가는 현 상태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통찰, 창조성, 대담함을 지닌 사람들이다. 예술가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인다.

 

"예술이란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위한 선물이다." 예술가란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더 많은 사람을 바꿀수록, 사람들을 더 많이 바꿀수록, 더욱 훌륭한 예술가다. 예술은 기술과 무관하다. 물론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는 한도 안에서만 기술은 의미가 있다. 기술과 기교는 예술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술은 꾸밀 필요가 없다. 그것을 활용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유용하다. 그림, 조각, 작곡이라고 해서 무조건 예술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예술이 아니다.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다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예술은 인간을 대변한다. 기계는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될 확률이 훨씬 높다. 

 

 

디지털 시대가 될수록 모든 일을 수량화하고 기계화하고 인터넷으로 즉각 공유한다. 모든 일을 스프레드시트 네모 칸에 집어넣을 수 있다. 문제는 경쟁자도 모두 똑같은 스프레드시트를 쓴다는 것이다. 결국 비슷비슷한 사업 모델을 만들어 경쟁자들과 함께 시장을 나눠먹을 수밖에 없고,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꿈도 꾸지 못한다. "수량화하기 쉬울수록 그 가치는 작다."

 

 

대량생산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순간 예술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예술가는 모든 것을 흔들어놓는다. 손길이 닿는 대로 모든 것을 새롭게 발명한다. 쏟아지는 정보를 받아들여 놀랍고도 새로운 결과물을 창조해낸다. 예술가들은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고 어디로 튈지 모르고 측정하기도 어렵다. ... 소비자들은 예술가를 좋아한다. 투자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곧 현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현 상태를 싸구려 만들지 않는다. 예술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공동체는 모두를 위한 가치를 만들어낸다. 아일랜드의 록밴드 U2가 순회공연을 할 때 이들에게 순회공연은 매일 밤 새로운 예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돈을 벌기위해 진부한 틀에 맞춰 순회공연을 하는 순간,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한낱 기념품을 만드는 공장이 될 것이다. 자신의 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리면 즉석에서 앤디 워홀 스타일의 실크스크린 그림처럼 바꿔주는 서비스도 있다. 이것은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예술은 아니다. 'OOO 스타일'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기를 포기하고 대량생산의 일부가 된다는 뜻이다. 

 

 

호혜주의에서 벗어나라. ... 선물 시스템이 마술인 이유는 선물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주는 것일 뿐 계약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물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며 둘을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준다. 계약은 개개인을 고립시킨다. 돈이라는 매개로 잠시 연결시켜줄 뿐이다. 하지만 선물은 사람을 하나로 묶어준다.

 

 

거래가 만드는 가치는 한계가 있다. 돈거래를 할 때 우리는 '조건'에 집중한다. "그것을 주면 이것을 주겠다"라고 계산한다. 최초에 교환이 발생하려면 받는 사람이 그에 대한 값을 치르겠다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약속 없이는 어떤 교환도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선물을 줄 때는 그러한 조건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것을 주면 상대방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을 줄 것이라 생각할 뿐이다. 선물을 줄 때 기대하는 것은 상대방의 기분을 바꾸는 것이다. 거래와 선물의 양이 늘어날수록 그 힘은 상당히 달라진다. 거래는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고 해도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특별한 가치를 덧붙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물은 퍼져나갈수록 더 많은 가치를 계속 만들어낸다.

 

 

메트칼프의 법칙, 네트워크의 가치는 네트워크에 연결된 노드의 수를 제곱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팩스기계를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팩스기계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는 뜻이다(혼자 팩스를 가지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인터넷은 더 훌륭한 도구가 된다. 트위터를 사용하는 친구가 많을수록 트위터는 내게 훨씬 유용한 도구가 된다. 연결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낮추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는 곧 선물이다.

 

 

보고, 인식하고, 깨달아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지도를 만들 수 있다. 가고자 하는 곳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하기 전에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세상을 투명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개인적인 관점을 통해 세상을 본다. 자신의 편견과 경험과 기대를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물들인다. ... 관리자와 투자자는 통찰력 있는 직원,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을 가진 지원을 찾는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지혜를 쁘라냐라고 한다. 집착과 억압이 없는 삶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자유, 보는 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한다. 이러한 자질을 갖는다면 어느 조직에서든 스스로 훌륭한 자산이 될 것이다.

 

 

자기의 세계관을 폐기하고 다른 사람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려는 노력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첫 걸음이다.

 

 

화를 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우연하게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별다른 흔들림 없이 대응할 수 있다. 일은 이미 일어났다. 새가 울어대거나 천둥이 친다고 해서 화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휴대전화가 울린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화가 난다. 그렇게 화를 내면 그런 감정이 자신에게 전화를 건 사람에게 전해진다고, 또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린치핀은 소리나지 않는 마이크에 화를 낸다고 해서 마이크가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관리직원에게 잔소리를 한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도 않고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안다.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사람은 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저마다 내놓는 사람들의 독창성을 저주하기보다 포용함으로써 더 큰 축복과 생산적인 결과를 누리며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 또한 훨씬 멋진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반응이 반발로 바뀔 때, 또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 때 우리는 진다. 가르친다고 바뀔 사람은 없다. 또 가르치는 행동이 내 기분을 더 낫게 만들지도 못하고 내 일을 더 훌륭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남을 가르치려는 순간 우리는 진다.

 

 

결과에 집착하는 것은 변화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미래를 억지로 만들어내고자 하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미래를 억지로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열정과 집착의 축에 따른 네 종류의 사람

 

 

 

 

예술가는 자신이 다루는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세계관에 집착하는 순간, 현재 일어나는 상황과 예술가가 맺는 관계는 달라진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 상호작용하는 것을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다룰 수 있고 변형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지 못한다. 똑똑한 협상가는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정직하게 이해함으로써 예술을 만들어낸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만 모든 사람에게 작동하는 협상전략을 빚어낼 수 있다. 자신이 일하는 조직, 투자한 회사,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 기억, 기대에 집착을 갖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한 집착과 그 집착에 대한 반응은 우리가 진심으로 기대하는 하는 것과 다른 결과를 바라도록 만든다.

 

 

과학은 지도를 만드는 일이다. 실험 조수는 지시받은 일을 한다. 과학자들은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궁리한다. 과학자가 놀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해도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탐험하고, 직감을 따르고, 풍경을 조망하고, 새로운 계획을 짜는 일이 과학자가 하는 일이다. 스스로 놀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의식적인 선택이다. 과학자들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확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논증이 나타나고 미스터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안다. 결국 지도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 게놈을 처음으로 해석한 크레이그 벤터는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느 것이야말로 바로 린치핀이 필요한 이유다.

 

 

예술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 방법을 정확하게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도가 있다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지도 없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평가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무의식적인 최소한의 기억조차, 결코 실현되지 않는 꿈에 대한 부조리한 연상이라고... 부질없는 행동이라고... 떨쳐버린다. 나는 간신히 떠올린 처음 생각을 속삭인다(속삭이기 때문에 정령은 듣지 못한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 그래도 나는 할 거야." 바로 그 순간, 그 높은 공간은 '내 공간'이 된다. 거리에 서서 올려다 보는 순간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불가능해,, 그래. 그래서 도전하는 거지.' - 영화 <맨 온 와이어> 중에서

 

 

'오늘은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다. 자신의 관점을 바꿀 것인가,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마음의 불을 켤 것인가, 불안과 의심에 주눅 들어 지낼 것인가. 자신의 일을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일에 끌려다닐 것인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볼 것인가, 나쁜 점을 끄집어낼 것인가. 의욕에 불타는 레이저광선이 될 것인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분산광선이 될 것인가.' - 이시타 굽타(Ishta Gupta)

 

 

창조는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에, 모든 창조가 똑같을 수 없으며,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이 바로 진정한 삶의 전환점이다. 일생에 단 한번 올까 말까 하는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정해진 길을 따라 내려가는 선택을 하고 싶어 한다. 그들이 늘 선택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길은 노동자로서, 시민으로서 우리 잠재성을 실현시켜준다. 바로 이것이 시장이 원하는 선택이다. 장기적으로 시스템에 순응하는 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안정적인 길을 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미래에 대한 강력한 비전을 만들어내고 실제로 그것을 일궈내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 새로운 성공의 길은 순응이 아니라 비전과 참여에 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971213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주식 등 금융상품 시장은 종목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통한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만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사이의 거래 관계이기에 심리적 요인이 많이 작용하고, 여유와 기다림 없이 서두르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본문발췌]

 

 

성공적인 투자는 위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리하는 것이다. - 제이슨 츠바이크

 

 

단기적으로 우매한 대중 행동의 장기적 합은 합리적이다. 대중은 우매하다. 그런데 이런 행동의 장기적 합은 매우 현명하다. 우리나라 전체 상장 기업이 장기적인 흐름을 분석해 보면 놀랍게도 주가는 순자산의 증가 속도와 비슷하게 간다. 시점과 종점을 언제로 잡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 전체적인 경향은 일치한다. 이는 미국의 연구 결과와도 비슷하다. ... 주식 시장의 장기적 합리성은 대중의 이런 단기적 비합리적 행동들이 중첩된 결과로 나온다. 이런 면에서 주식 시장은 '창발적'이다. 창발성이란, 하위의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지는 상위의 산출물에 하위 요소들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특성이 생기는 현상을 총칭한다. 또한 창발성은 '복잡계'를 대표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 투자자들을 '개미'라고 처음 부른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그야말로 멋진 은유적 표현이다. 개미들은 자신들이 모인 집단의 합리성을 알지 못한다. 주식 시장에서 나타나는 장기적 합리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지능이나 안정성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는 개미들의 집합이 놀라운 지능적 특성을 보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주식 시장의 단기적 움직임은 예측하기가 힘든 반면, 장기적 움직임은 예측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장기적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도 데이터가 너무 방대하고 노이즈가 산재해 있어 이를 극복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데이터 처리 능력이 제한된 개인이 이런 일을 하려면 인자의 수를 대폭 줄이고 모델을 최대한 간명하게 하면 장기적으로 유의미한 모델을 만들 수 있다. 간단한 예는 PBR이 1 미만이고, PER 7 미만인 주식을 20개 사서 1년을 기다린다는 식의 모델이다.

 

 

수치적 실험을 해 보면 주식 시장이 얼마나 불합리한 상태에 놓였던 적이 많았는지, 얼마나 수익의 기회가 많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수치적 조사 결과 하나하나가 반드시 투자에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이런 작은 빌딩 블록이 모여 하나의 추상화된 산출물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추상화된 산출물들은 다시 모여 더 높은 추상적 산출물을 만든다. 마치 우리의 사고 과정이 겹겹의 추상화 레벨을 누적시켜 가듯이 투자 알고리즘도 그렇게 진화한다. 앞으로의 시장은 알고리즘들의 전쟁터가 될 것이다. 일반 투자자들이 이러한 알고리즘을 만들 수는 없지만 이런 조그만 빌딩 블록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투자 운명을 좌우할 '장기적' 미래가 확률에 따라 움직인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고 시장에서 느긋하게 행동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데카르트-뉴튼 방식의 사고에 젖은 현대인들은 사물을 쪼개고 쪼개서 들어가면 결국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있을 거라 상상하곤 한다. 모든 현상에 대해 '결정론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뉴런의 화학적 교신을 분석해서 사람의 생각을 알아낼 수 있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는 인지물리학자들도 있다. 그 위에 열 겹도 더 되는 추상화의 단계를 거쳐야 실체가 드러날 사고 작용의 비밀을 말단의 분자 레벨에서 기대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유명한 수학 프로그램 매스매티카를 만든 천재 스티븐 울프람은 '문지기의 꿈Janitor's Dream'이라는 표현을 썼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무식한 낭만' 정도가 된다. 주식 시장은 이런 낭만을 기대하는 문지기의 꿈들로 가득하다. 모든 것을 다 아는 투자의 신이 있다고 기대한다. 그래서 시중에는 백발백중 모드의 사이비 투자 교주들이 먹고살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시장에 대해서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하고, 어떤 성공적인 투자든 그 과정에는 상당한 실패가 혼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투자는 확률 게임이고, 수리적 게임이다. 내가 생각하는 투자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키워드는 수리적 능력, 데이터 처리, 최적화 기법이다. 일반 투자자들이 본격적인 최적화 기법을 구사할 수는 없겠지만, 공부를 통해 수리적 마인드를 가질 수는 있다. 경우에 따라 조그만 규모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작업 정도는 할 수 있다. 

 

 

주식 시장에서 평균적인 행동이 가장 비합리적인 집단은 개인 투자자들이다. 그들은 지식과 경험이라는 면에서 가장 덜 갖추어진 집단이다. 그래서 대부분 그들의 수익률은 시장 수익률보다 많이 밑돈다. 그렇지만 이들은 시장에 아주 생산적인 기여를 한다. 이들의 비합리적인 행동은 시장에 노이즈를 제공한다. 잦은 거래로 국가에는 세금을, 증권사에는 수수료를 선물한다. 시장에 유동성을 제공하는 중요한 참가자들이다. 이들은 시장이 역동성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순수하게 공익적인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투자자, 즉 공익 투자자가 되는 것이다. 시중의 용어로는 봉이 되는 것이고. 물론, 공익을 목적으로 투자를 시작하는 개인은 없다. 그렇지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98%쯤의 개인 투자자는 공익 투자자로 자신의 투자 경력을 마무리한다.

 

 

주가는 장기적으로 합리적이다. 주가와 장부 가치(순자산, 자본총계)의 동행한다. 주식 시장이라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노이즈와 군중 심리, 돌발 사건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어떻게 움직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장부 가치의 증가를 따를 수밖에 없다. 

 

 

찰리와 나는 기복 없이 매끄럽게 연간 12%의 수익을 올리는 것보다 들쑥날쑥하더라도 연 15% 수익 쪽을 택하겠다. 수익률은 하루나 1주일 단위로는 크게 진동한다. 지구의 공전 궤도와 같은 수준의 매끄러움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 워런 버핏

 

 

머튼과 숄즈가 주도한 LTCM에 대해 에드워드 소프는 "두 사람은 극단적 위험과 굵은 꼬리 분포에 노출되는 상황을 켈리 시스템이 어떻게 통제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수익률 분포의 양쪽 끝 영역에서는 전혀 정규분포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운용 전략에서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이런 위험을 줄이는 장치가 여러 겹 포함되어 있어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한 종목을 사는 것보다 여러 종목을 사는 것이 변동성이 작아 산술 평균은 동일하지만 기하 수익이 더 커진다고 했다. 이것이 분산 투자를 해야 하는 이유다. 이를 '횡적' 분산 투자라 하자. 반면에 '종적' 분산 투자도 있는데, 시간에 따라 나누어 사는 것을 말한다. 한 종목을 사더라도 하루에 다 사는 것보다 여러 날에 걸쳐서 사는 것이 변동성이 작다. 이동 평균선을 상상해 보라. 매일 매일의 주가보다 이동 평균선이 훨씬 부드럽다. 이것은 한 번에 주식을 사는 것보다 여러 날에 나누어서 사는 것이 변동성이 작다는 것을 시사한다. ... 이것은 주식을 사는 또 한 가지의 핵심적인 요령을 말해 준다. 여러 주식에 분산 투자하고 아울러 여러날에 분산 투자하면 두 단계로 변동성을 줄여 두 단계로 수익률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이런 전략으로 몇 달 만에 결실을 보려하면 별로 기쁜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여러 해를 시행해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이런 관리 기술이 수익률을 조금씩 더 높여 주는 것이다.

 

 

시장은 예측의 영역이 아니라 대응의 영역이다. 주식을 사고파는 최적의 타이밍을 맞출 수는 없고, 그런 시도를 하다 보면 결정적인 수익의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높다. 2-3년의 윈도우로 시장을 보면 6개월이나 1년 정도의 하락은 충분히 견딜 만합니다. 다만 수익을 최대화하고 손실을 최소화하는 데 유리한 특징을 가진 종목의 집합으로 바꾸어 가면서 현명한 운용 전략과 함께 견디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시장에 있습니다.

 

 

단기 실적만을 판단 기준으로 삼으려 할 때마다 이 점을 생각하라. 눈에 보이는 그 실적의 대부분이 능력이 아니라 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 커티스 페이스

 

 

느긋한 호흡과 문화가 필요하다. 대다수 주식 투자자의 호흡은 너무 가쁘다. 내가 생각한는 건강한 투자자의 제 1 덕목은 주식을 사놓고 편한 잠을 청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신문에서 지난 일주일간, 1개월간 어떤 펀드가 선방했느니 하는 기사는 투자 문화를 조급하게 만든다. 적어도 몇 년간의 결과를 놓고 실력을 말해야 한다. 수익에 대해서 긴 호흡으로 보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그래야 투자 시장의 정서가 점잖아지고 호흡이 편안해진다.

 

 

토마스 쿤이 그의 역작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제기한 핵심 주제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관한 것이다. 패러다임은 어떤 과학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이론 체계를 말한다. 패러다임이 변한다는 것은 기득권자들에게는 매우 불편하고 위험한 일이다. 오랜 시간 그들이 전문가로서 행동해 온 기반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좀처럼 자신이 기반을 두고 구축해온 패러다임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과정에는 흔히 억지로 절충을 시도하는 단계를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델들은 지저분하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 대부분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해결하는 상태에 이르러 자명해질 때까지 버틴다. 금융 투자에도 패러다임 변화가 지속되고 있다.... 앞선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구식 패러다임에 속한 사람들이 그랬듯 기계가 완전히 시장을 장악하고 사람에 의한 투자는 화석 같은 존재로 변해갈 무렵에야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이다.

 

 

시장은 원래 그렇게 오르고 내리고 한다. "오늘은 왜 이렇게 내리지?", "오늘은 왜 이렇게 오르지?"라는 질문은 1년을 놓고 보면 별 의미가 없다. 1년의 결과를 놓고 보면 항상 체감도가 높은 등락일이 많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체감도가 높은 등락일이 있으면 그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주식이 제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삐뚤삐뚤 가고 있는 것이라고. ... 추세선에서 멀어지는 움직임들은 시작과 끝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노이즈다. 매일 매일의 등락에 신경을 쓰지 않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다. 좀 긴 단위의 움직임을 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뉴스는 잡음이다. 투자 정보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시장에 잡음을 주는 뉴스, 잡음을 주는 투자자의 비이성적 탐욕, 공포, 이런 것들이 없다면 평균을 넘는 수익을 올리는 투자는 정말로 힘들어진다. 다행히 전 세계 모든 시장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잡음투성이의 잔치판이다. 판세를 1년 이상의 관점에서 확률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투자 결산을 3년 단위로 할 수 있는 정신적 힘만 있다면 이 시장은 거의 질 수 없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456795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