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을 땅속에 견딘 마늘과 양파 수확, 마늘은 하우스에 건조시키고 양파는 피클과 김치도 담그고 저장도 합니다.

과실나무와 봄에 심은 작물들 초록이 한창, 열매도 맺히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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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사회에서 돈이 숭배받는 자본주의 가운데 발생하는 양극화, 승자독식! 빈곤이 무엇에서 발생하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해결방법을 찾기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평등속의 어울림'

 

 

[본문발췌]

 

 

현대의 진보가 이룩하는 모든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사치를 조장하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진보라 할 수 없고 또 이러한 진보는 오래 가지도 못한다.

 

 

철학을 추구하는 자는 마음이 자유로워야 한다. - 프톨레마이오스

 

 

빈곤의 진정한 원인은 과거나 현재나 인간의 탐욕이지 자연의 인색함이 아니다.

 

 

문명 수준이 일정할 때 많은 인구는 적은 인구보다 물자를 더 많이 마련할 수 있다. 빈곤과 비참함의 원인은 - 현재의 이론은 인구증가 때문이라고 한다 - 자연의 인색이 아니라 사회의 부정의에 있다. 인구 증가로 생겨나는 새로운 입은 과거의 입보다 더 많은 식품을 소비하지 않지만 새로운 손은, 자연스러운 질서 속에서, 더 많은 물자를 생산해 낸다.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 부의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진다면 인구가 많을수록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더 많아진다. 평등이 보장되는 상태에서 인구의 자연증가는 개인을 가난하게 하기는커녕 언제나 부유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기성 지역의 부가 우위에 있는 것은 생산력의 우위 때문이 아니라 부의 축적 때문이며, 신생 지역에서는 시간이 없어 부를 축적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축적된 부라는 개념에 대해 잠시 검토해 보는 것이 좋겠다. 사실 부가 축적될 수 있는 양은 아주 조금밖에 안 되며, 사회도 대부분의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산다. 몇 가지 사소한 형태를 제외하면 부의 축적이 많이 이루질 수가 없다. 우주의 물질은 노동에 의해 원하는 형태로 변했다가 끊임없이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어떤 형태의 부는 몇 시간, 어떤 것은 며칠, 어떤 것은 몇 달, 어떤 것은 몇 년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형태의 부는 드물다. 매우 유용하고 수명이 긴 형태, 예를 들어 선박, 가옥, 철도, 기계류 등의 부를 보더라도, 노동을 통해 계속 보수하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못 쓰게 된다. 어느 사회에 노동이 중단되면 마치 분수로 흘러가는 물을 잠그는 것처럼 부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노동이 다시 시작되면 부는 금방 되살아난다.

 

 

노동자는 미개인보다 더 장시간 더 힘들게 일을 하지만 미개인이 얻는 단순한 생활필수품 이상을 얻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미개인이 누리는 독립성을 잃고 산다. 자신의 힘으로 욕구를 직접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이 동시에 일해 주지 않으면 간접적으로 충족시키지도 못한다. 이 노동자는 생산자와 소비자로 구성된 거대한 체인의 한 연결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다. 사회속의 지위가  낮을수록 사회에 더 의존적이 되고, 무엇이든 혼자 힘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극히 줄어든다.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노동을 행하는 힘조차 자신의 통제 밖에 놓인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또는 자신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 마치 태양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듯이 - 어떤 일반적인 원인에 의해서 이 힘이 박탈되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원초적 저주를 은혜처럼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단순한 육체노동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 선인 듯이, 그리고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주장하고, 법제화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는 인간성의 본질적인 요소, 즉 신처럼 환경을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능력을 잃고 만다. 노동자는 노예나 기계나 상품이 되어 버리고, 어떤 점에서는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인류 문명 발달의 불평등을 설명해 주는 원리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관한 원리가 아니며, 인구가 생존물자에 압력을 가한다는 원리도 아니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에 있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 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커다른 기본 요인이다. 이점은 틀림이 없다. 토지는 인간의 삶터이고, 인간이 필요한 물자를 꺼내 쓰는 창고이며, 욕구를 충족시킬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노동을 투입하는 대상이 되는 원료이다. 토지 또는 토지 생산물이 없다면 해산물도 취할 수 없고, 태양열도 이용할 수 없고, 그 밖의 어떠한 자연력도 이용할 수 없다. 우리는 토지에서 태어나 토지로부터 물자를 얻어 살다가 토지로 돌아간다. 인간은 들의 풀이나 꽃과 마찬가지로 흙의 자녀이다. 사람에게서 토지에 속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사람은 육체 없는 영혼에 불과할 것이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에서 부를 생산하는 힘을 보태줄 뿐이다. 따라서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고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가치를 올리고 토지 소유의 힘을 강하게 해 줄 뿐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토지소유는 귀족층의 근거이자 거대한 재산의 기초이고 권력의 원천이다. 인도의 최상 계층은 브라만이 오래 전에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시대건 토지를 소유하는 자에게 토지의 열매가 귀속된다. 하얀 일산과 거드름 피우는 코끼리는 토지 소유의 꽃이다."

 

 

임금의 상승 및 지대를 걷어 공공목적에 씀으로써 생기는 새로운 고용 기회의 창출은, 낭비를 막고 엄청난 사회적 손실을 없애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힘이 노동에 더해질 것이다. 임금이 가장 높은 곳의 노동이 가장 생산적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은 비능률적인 노동이다. ... 노동의 능률은 언제나 일반적인 임금과 같이 상승한다. 임금이 오르면 자존심, 지적 능력, 희망, 활력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다. 기계나 동물은 정해진 능력이 있으면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생산의 큰 원동력은 근육이 아니라 마음이다. 인간의 신체가 낼 수 있는 힘은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능력에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물결이 흐르고 인간의 의지 앞에 물질은 찰흙처럼 유연하게 된다. 대중의 안락과 여가와 독립을 증대시키면 지적 능력도 증대된다. 그리하여 두뇌가 손을 도우며, 극미한 생물을 측정하고, 별의 궤도를 추적할 수 있는 자질이 평범한 일상에서도 발휘된다. 부의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도록 하는 사회제도는 부를 생산하는 노동의 능력을 무한정 끌어오릴 수 있을지 모른다. 현재와 같은 생산 과정에서도 그 이익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높아지면 그만큼 생산 과정의 개선이나 기계류의 발명과 활용도 빠르고 쉽게 진행된다.

 

 

문명에 고통을 주는 원인이자 문명이 사망하는 원인은 불평등한 분배이다!

 

 

토지가치에 모든 조세를 부과한다면 거대한 재산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부자를 무일푼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 이 조치는 재산이 줄어도 별 타격을 입지 않을 계층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지금보다 더 빈곤하게 만들지 않는다. 거대한 재산을 줄일 뿐 누구도 빈곤에 빠뜨리지 않는다. 부의 총량이 엄청나게 증가할 뿐만 아니라 평등하게 분배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양의 부를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각자의 힘과 욕구가 서로 다른 경우에 평등한 분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부가 각자 근면, 기술, 지식, 절제를 통해 공동의 부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분배된다는 뜻이다. 생산하는 사람에게서 생산하지 않는 소수의 수중으로 부를 집중시키는 큰 원인이 사라질 것이다. 불평등이 계속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불평등일 뿐, 자연법을 부정함으로써 생기는 불평등은 아니다. 비생산자가 사치 속에서 빈둥거리고 생산자가 동물적인 생존에 필요한 물자만을 겨우 얻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토지 독점이 사라지면 엄청난 부자가 생길 염려도 없다. 부자의 재산은 문자 그대로 노동 생산물인 부로 구성될 것이고, 부는 계속해서 소모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 토지사유제를 철폐하면 국가 부채의 원인이 사라지므로 국가 부채도 오래지 않아 소멸할 것이다. 각자 자기 노력으로 정당하게 번 것을 가지는 동시에 그 이상은 가질 수 없다면 거대한 재산이 형성될까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도대체 백만 달러를 자기 노력으로 정당하게 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며 인간에게 저주스러운 것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대가가 생기지 않는 노동과 결과가 나오지 않는 노력을 혐오할 뿐이다. 매일 매일 힘들여 일해서 겨우 연명한다면 이는 정말로 고된 노동이다. 이것은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펌프질을 계속하거나, 깔려 죽지 않기 위해 바퀴를 계속 밟는 지옥 같은 형벌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미한 일에서 해방된다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더 열심히, 더 훌륭히 일하게 되며, 그럴  때 자신을 위해 또는 타인을 위해 무언가 일다운 일을 하게 된다. ... 인류의 생활을 개선하는 일, 예를 들면 지식을 확대하고 힘을 증가시키고 문예를 풍부하게 하고 사상을 고양시키는 일은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은 채찍질이나 동물적 욕구에 의해 강제되는 노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할 뿐, 더 많이 먹고 마시고 입고 과시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사회에서 궁핍이 사라지면 이러한 종류의 일이 대폭 증가할 것이다.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면 개인의 모든 힘이 생존 유지에 다 소요된다. 정신력은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릴 때에만 자유롭게 되어 고차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 어울림으로 인해 분업이 가능해지고 다수인의 협력에 의해 생기는 경제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어울림은(association) 진보의 첫째 요소이다. 개선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어울릴 때 이루어지며, 어울림이 넓고 긴밀할수록 개선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리고 인간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도덕법칙이 무시되느냐 존중되느냐에 따라 정신력이 대립 속에 낭비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므로, 평등 또는 정의(equality of justice)는 진보의 둘째 요소이다. 이렇듯 평등 속의 어울림(association of equality)이 진보의 법칙이다. 어울림은 정신력을 자유롭게 하여 개선에 바칠 수 있도록 해주며 평등, 정의, 자유는 - 이 세 용어는 도덕법칙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 정신력이 쓸데없는 싸움에 소모되는 것을 막아 준다. 이제 모든 다양성, 모든 전진, 모든 정체, 모든 퇴보를 설명할 수 있는 진보의 법칙이 나왔다. 인간은 같이 모임으로써 진보하며, 서로 협조함으로써 개선에 바칠 수 있는 정신력을 증대시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갈등이 발생하거나 어울림이 조건과 힘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진보 경향은 약화되고 결국에는 반전된다.

 

 

진화에 대한 허버트 스펜서의 정의를 사용한다면, 사회의 발전은 그 구성원과 관련하여 볼 때 불확실하고 비체계적인 동질성에서부터 확실하고 체계적인 다양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발전 단계가 낮은 사회는 장기도 팔다리도 없는 하등동물과 비슷하여 신체의 일부를 잘라도 살 수 있다. 발전 단계가 높은 사회는 기능과 힘이 전문화된 고등생물과 같아서 각 부분은 다른 부분에 극히 의존적이다.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한 원인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 경향이었다. 이런 경향이 현재의 우리 문명에 강도를 더하여 나타나고 있다. 임금과 이자는 계속 하락하고 지대가 상승한다.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빈자는 힘도 희망도 잃고 있으며, 중산층은 사라지고 있다.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 덕, 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정치는 부패한 독재정치보다 그 자체로 더 나쁘지는 않지만 국민성에는 더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부랑자, 극빈자 등 노동의 기회가 극히 제한된 계층이나 구걸하지 않으면 훔치거나 굶어야 하는 계층이 선거권을 갖게되면 파괴적인 결과가 발생한다. 가난으로 고통받고 타락한 계층의 손에 정치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마치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 옥수수 밭에 풀어 놓는 것과 같으며, 삼손의 눈을 빼고 국민 생활이라는 기둥에 팔을 비끄러매는 것과 같다. 권력의 승계가 세습이나 추첨 - 고대 공화국에는 이런 제도가 있어다 - 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현명하고 정의로운 권력자가 더러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부패한 민주정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는 더 악한 자에 의해서만 쫓겨날 수 있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

 

 

사실상 돈을 많이 가진 어떤 자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경우, 인구와 사업이 번창한 큰 중심지에 가서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고 자수하면 백중 구십구는 일시적인 구금을 당하는 정도 이상의 큰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고, 다만 일부는 자기 재산에 비례하여 또 일부는 피살자의 재산과 지위에 비례하여 얼마간의 손실을 입을 뿐이다. 게다가 살인자의 돈은 보호자를 잃은 피살자의 가족이나, 시민을 잃은 국가에 돌아가지 않는다. 소송을 지연하고 증인을 세워 배심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방법을 아는 변호사에게 돌아간다. 그리하여 도둑질을 크게 하는 자는, 훔친 것의 일부를 잃는 정도의 처벌밖에 받지 않게 된다고 확신할 것이다. 또 도둑질을 크게 하여 처벌을 받더라도 한 밑천 남길 수 있는 자는, 마치 바이킹이 항해를 성공리에 마쳤을 때처럼 동료들의 환영을 받게 된다. 자기를 믿어준 사람의 재산을 털거나 과부와 고아의 재산을 털더라도 많이만 털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부를 안전하게 자랑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점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경향은 부의 분배가 가장 불평등한 곳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며, 불평등이 심할수록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야만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이와 같이 정의가 파괴되는 예는 모든 분야에서 사법제도가 무력해지고 있는 현상의 하나에 불과하다. 차라리 법을 폐기하고 제일원리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치안위원회 같은 기구를 조직하여 스스로 사법제도를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인간은 남에게 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받는다. 이 권리에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가 포함된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면 이들 권리도 부정된다. 토지는 사람이 생활하는 터전이자 유일한 터전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하사물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면서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는 사회에서 정치적 자유는, 인구가 증가하고 발명이 계속되면 굶주림을 겨우 면할 정도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자유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이 진리를 무시해 왔다. 그리하여 거지가 생겨 거리를 배회한다. 빈곤은 우리가 정치적 주권자라고 더 받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결핍에서 생기는 무지는 학교에서 고칠 수 없다. 국민은 상전이 시키는대로 투표를 한다. 정치가의 역할을 선동꾼이 차지한다. 정의의 저울에 달린 추의 무게는 돈으로 결정된다. 시민적 덕목을 중시하지 않는 자가, 심지어 위선으로라도 그 덕목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튼튼하다고 생각했던 공화국의 기둥은 무거운 하중을 견디지 못해 이미 굽어 있다. ... 자유! 이는 신비한 힘을 가진 단어이다. 공허하게 귀를 어지럽히는 단어가 아니다. 자유는 정의이고, 정의는 자연법이며, 건강과 조화와 힘과 동지애와 협동의 법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836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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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겠지만 옛날 조상들이 살던 세상과 비교해 우리 삶은 더 편리하고 풍요롭게 좋아졌다. 반면, 필요한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버리고 주변의 사소한 일들에 무디어져 가고 있지 않나요?

 

박노해 시인의 글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삶에 대한 맷집을 더 키울 수 있다.

 

 

[본문발췌]

 

 

어떤 일이든 시작 전에는 예상을 하고 짐작을 하고 기대를 하게 된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으니 그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긴 하다. 그러나 예상, 짐작, 기대가 현실과 100퍼센트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상, 짐작, 기대가 현실과 일치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이 맞는 정도?

그러니까 제주에서 살면 어떨까. 덥고 습해서 힘들까? 그곳 사람들은 어떨까? 돈벌이는 어떨까? 많은 예측과 상상과 추측이 나래를 펴고 때로는 그 생각들 때문에 두렵기도 기쁘기도 하겠지만 어느 것도 현실은 아니라는 점. 일단은 저지르고 부닥쳐 보면 알리라는 것, 답은 그뿐인 듯....

 

 

가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자기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다면 쉬어보라고. 내가 이 세상의 '리얼'을 경험한 때는 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쉴 때였다. 맨발로 해변을 걸을 때, 오토바이를 타고 라오스와 중국의 국경을 넘을 때, 아이의 손을 잡고 집 앞 공원을 산책할 때 어쨌든 나는, 나는, 쉬고 놀 때, 세계를 보고 만졌다. 그리고 내가 '쉬는 시간'에 세계는 실재하고 있었다. - <우리는 사랑아니면 여행이겠지>, 최갑수

 

 

환경의 변화는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다. 나는 그 기회가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형태이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변화 앞에선 모든 일이 좋을 수많은 없는 것이다.

 

 

인생에서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그 기회가 긍정적인 사건의 형태로 오기를 생각하고 기대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시나 모욕감 등과 같은 고통이 오히려 그 자신의 본질을 찾고 알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의 사건이든 그때 경험하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 프리츠 펄스

 

 

동화작가 정채봉님은 '오늘 내가 나 자신을 슬프게 한 일들이 뭐가 있을까?' 하면 이런 게 떠올랐다고 해요. 꽃밭을 그냥 지나쳐버린것, 새소리에 무심하게 응대하지 않은 것, 밤하늘의 별들을 새어보지 않은것, 좋은 데도 체면 때문에 환호하지 않은 것.... 어른이 되면서 사소한 일들에 점점 무디어져 갔죠. 좋은 일이 있어도 크게 기뻐하지 못하고, 슬픈 일이 있어도 목 놓아 엉엉 울지 못하고, 재미난 일에도 박장대소 웃지 못하면서요. 일부러 시크한 척 노력했던 걸 거예요. 그래야 마음이 덜 다치는 줄로만 믿었으니까요. 제주에 지내면서 알아차린 게 있네요. 내 삶에 언제부터 이렇게 감탄사가 사라져 있었지? 였어요. 더 이상 새롭지도, 신기하지도 않고, 고맙지도 않고, 의례 그러려니 하는 감동 없는 일상. 어른스럽게 굴자. 느끼지 마, 소리 내지마, 자신을 억누르면서 마음 속 작은 소리, 누군가의 외로운 몸짓 같은, 작지만 중요한 것들을 알아채는 감각도 함께 무뎌졌더군요. 생채기를 덮어둔 채 다 나았다 믿고 있었죠. 세상에서 수없이 반짝이고 있는데 미처 주의를 주지 못한 것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고 음미하는 일. 좋은 건 좋다 말하고, 신나는 일에는 환호성을 지르고, 슬픈 일에는 펑펑 우는 일. 이렇게 평범하지만 어려운 일을 조금씩 연습하는 중이에요. 원한 적도 없는 '나이'라는 선물은 매년 배달이 되네요. 삶이 주는 그 선물을 싫다고 하기보다 아이들처럼 잘 갖고 놀아 볼래요.

 

 

사람 사이에서는 준만큼 돌려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더 빼앗기는 경우도 왕왕 있는데 자연에서만큼은 늘 준 것 이상으로 돌려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위대한 갯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박스 속 작은 귤 하나에도 1년의 비와 바람과 햇살과 새의 그림자, 벌레의 흔적, 사람의 손길과 그 모든 이야기들이 담긴다. 반짝거리는 결과물 이면에는 사람들이 미처 주목하지 않는 고된 과정이 있을 것임을, 나는 이제야 알겠다.

 

 

통조림을 먹고 싶은 데 깡통 따개가 없고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졌는데 충전할 곳이 없고 버스와 지하철은 파업 중인데 자가용은 수리센터에 들어가 있고 폭설이 사흘이나 계속 내려 슈퍼에 몇몇 상품의 재고가 바닥나는 날이면... 이런 경험을 할 때면 우리는 필요한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나는 오늘도 걷는다>, 미쉘 퓌에슈

 

 

내가 생각하기에 재능이란(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 - <뭐라도 되겠지>, 김중혁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 의미 있게. 그 순간을 가장 어여쁘고 가장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만들면 돼. 평생을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는 없어. 그러나 10분은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 있다. 그래, 그 10분들이 바로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첫 번째 걸음이고 그것이 수억 개 모인 것이 인생이야. - <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광고인 박웅현의 <여덟 단어>라는 책에 "인생에 정석과 같은 교과서는 없습니다. 열심히 살다 보면 인생에 어떤 점들이 뿌려질 것이고, 의미 없어 보이던 그 점들이 어느 순간 연결돼서 별이 되는 거예요." 라는 글귀가 나오는데 나는 이 비유가 참 좋다. 우리의 인생을 잘 들여다보면 사방에 무작위로 찍힌 점 같지만 나중에 이 점들이 모여 특정한 선 모양을 그린다는 의미다. 지금 당장 찍는 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행착오라고 여겼던 것들이 하나의 일관된 방향으로 선을 그려가고 있었음을 알 거라고.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949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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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침 없이 세상을 보고 듣고, 받아들이고, 외부가 아니라 내 안에서 행복을 찾으며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는 삶....

 

 

[본문발췌]

 

 

사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말은 돈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돈이 얼마나 있으면 행복하느냐는 관점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관점으로 바꿔야 맞는 질문이다.

 

 

부는 우리에게 많은 재화를 소비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지만, 동시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감소시킨다. - 조르디 쿼드바흐

 

 

돈으로 무엇을 사고 싶다면 상품이나 물건보다 경험이나 지식을 사라.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면 행복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언제나 '공짜'다. 공기, 시간, 삶.....

 

 

행복은 현재 우리의 상황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돈은 이것을 보완할 뿐이다. 돈이 행복을 주진 않지만 돈이 행복을 도울 수는 있다. 내가 돈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돈이 나를 주인으로 모시게 만든다면 돈은 얼마든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내일부터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그 결심을 이루기 위해 도전한다면 결과는 두 가지뿐이다.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것이다. 성공하면 그 길로 계속 가면 된다. 만약 실패해도 좀 더 현명한 사람이 되어 다시 도전하면 된다.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공했거나 더 현명해졌을 분이다. 단지 행동하지 않을 때만 손해가 있을뿐이다. 지금 즉시 목표를 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바란다. 오늘 하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90퍼센트다. 즉시 해야 한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가 말했듯 걱정의 40퍼센트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고, 걱정의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22퍼센트는 안 해도 그만인 사소한 것이고, 걱정의 4퍼센트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 4퍼센트는우리 힘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거리다. 불과 4퍼센트 때문에 나머지 96퍼센트까지 걱정을 더 하며 사는 것이다.

 

 

나는 줄기차게 그 사람의 크기는 그 사람의 생각의 크기라고 말해왔다.그런데 이 크기를 실제로 현실에서 만들어내는 도구는 끈기와 기개다.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생각을 현실화할 수 없다. 평범한 사람도 끈기가 있으면 비범해지고 비범한 사람도 끈기가 없으면 평범한 사람이 된다. 끈기는 모든 것을 이겨낸다. 세상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보상한다. 기회는 항상 다시 돌아오는데 끈기가 없으면 돌아오는 것을 보기 전에 그만두게 된다. 이외수의 존버 정신은 존중받을 만한다. 어떤 분야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성공과 가장 큰 상관관계가 있는 개인적 품성이라면 나는 당연히 끈기를 첫 번째로 본다.

 

 

위험이란 칼과 같아서 날을 잡으면 다치지만 손잡이를 잡으면 멋진 도구가 된다. 하지만 위험하다고 피하기만 하면 상처가 날 수밖에 없다. 인생에 두려운 것도 없고 배신도 없었고 모욕을 당하거나 굴욕적인 날들도 없었다면 그는 한 번도 위험을 감수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위험을 감수하거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위험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단 한 개도 찾을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주위의 모든 것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생명이 있는 것이든 생명이 없는 것이든, 나와 상관이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사물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모두 한 하늘 아래 있고 한 공간 안에 있다. 가까운 것은 가까운 이유로 더 많은 영향을 주고받을 것이고 멀면 먼대로 다른 영향을 줄 것이다. 이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다른 상황에서 존중을 만든다. 이런 상호 공감의 확장이 나를 성장시키고 공동체 전체를 안전하게 하며 전체가 성장하는 틀을 만든다. 남을 지게 만든다고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상식이야말로 최고의 지성이다.

 

 

인간은 가치와 명분에 따라 움직인다. 그 일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조직 내에서 한 부품 같은 구성원으로 추락하며 동기도 의욕도 욕구도 사멸된다. 이럴 때 이런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급여와 더 많은 급여뿐이다. 하지만 <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들어가는 순간 이 조직은 위대한 조직이 된다. ... <무엇은> 단순한 정보다. 듣고 기억하면 그만이다. <어떻게>는 기능이다. 손과 몸의 훈련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왜>는 우리가 감정을 다스릴 열쇠다. 충성, 믿음, 정직 등 인간 본연의 가치를 갖게 하며 인간의 행동과 의사결정을 유도하고 이끈다. 우리는 안다고 행동하지 않는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일 뿐이다.

 

 

인간이 바뀌는 두 가지 계기는 새로운 곳에 살게 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이 두 가지가 한 번에 바뀌는 경우가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이직할 때다. 이런 경우라면 누구든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환경이 바뀌거나 최근에 만난 사람이 나를 바꾸고 성장시키며 삶을 윤택하게 혹은 거칠게 만든다.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는 이렇게 한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상대가 말을 하고 내가 듣는 것이 대화다. 상대가 말을 하고 내가 그것을 이해하려 하면 그것이 교류다. 상대가 말을 하고 내가 공감하는 순간, 한 인간이 내게 들어오는 것이다. 귀를 열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지속적인 행복은 기대와 더불어 이기적인 집착을 기꺼이 포기했을 때 찾아온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이 없고 상실의 고통을 느낄 이유도 없다. 모든 것은 언젠가 당신을 떠나게 된다.

 

 

"그릇은 진흙으로 만들지만, 쓰이는 것은 그릇 속에 담긴 비움이다." - <도덕경>

 

 

세상이 힘든 이유는 욕심과 부러움 때문이다. 만족은 내가 가진 것이 많아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력이 있어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있다. ... 만족하지 못하면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높아도 행복할 수 없다. 나보다 부자는 여전히 많고, 나보다 현명한 사람 또한 많으며, 나보다 건강하거나 젊은 사람은 계속 늘기 때문이다. 부러워만 하면 자존감도 없어진다. 자신을 자책하기 바쁠 뿐이다. 비교를 중단하고 욕심을 버리는 순간, 만족과 행복이 손을 잡고 들어온다.

 

 

가진 것과 갖고 싶은 것의 차이를 크게 느끼면 불행을 느끼기 마련이다. 꿈은 그를 행복하게 하지만 꿈에 이끌려 가면 꿈도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지나친 바람이나 걱정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을 사라지게 만든다. 행복은 스스로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니 결코 외부의 조건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지 않기 바란다. 내가 지금 충분히 행복을 만끽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내가 가진 것이 행복의 근원이 아니라는 지각을 얻고 난 후에 생긴 자유 덕분이다.

 

 

결국 행복과 건강, 기쁨은 외적인 소유가 아니라 내적인 자각의 결과다. 내가 생각을 옳게 쓰면 나는 생각을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이고, 내가 생각을 옳지 못하게 쓰면 생각이 나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선인이 되거나 악인이 되는 것도 모두 이 생각의 쓰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성공하면 추억이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경험이 될 뿐이다. 사람은 능력이 없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 실패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다스릴 줄 알면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 자신감이 가득하고 걸음이 꼿꼿하며 생각과 말에 힘이 생긴다. 두려움이 다시 몰려오더라도 사랑의 힘을 믿고 당당하면 언제든 두려움과 공포를 발아래 둘 수 있다. 매일매일 성실함과 열정적인 노력을 통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사랑과 용기는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열쇠다.

 

 

마음을 자극하는 가장 유혹적인 감정은 진심에서 나오는 친절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언제나 그것에 굴복한다. 당신이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방법은 친절, 배려, 관용으로 선한 사람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갖는 것이다. 나는 분명 이것으로 여러분의 평생 행복을 보장한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길 원한다면 노을을 보기 위해 이미 해가 진 서쪽으로 달려나가서라도 바라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내 안의 거인은 나만 깨울 수 있다. 그 아무리 위대한 선생도 내 안에 거인이 있음을 알려줄 뿐, 그를 깨어낼 수 없다. 돈키호테는 말했다.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저 하늘의 별을 잡자.' 그렇다. 돈키호테를 따르라. 그것이 거인을 불러내는 최고의 방법이다.

 

 

행복의 비결은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을 언제 포기해야 하는지 아는 데서 출발한다. 욕심과 욕망을 줄이는 순간, 행복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행복을 잡으러 다니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그 행복이 눈 앞에 보이게 된다. 우리가 태어나서 벌어놓은 모든 것은 소멸된다. 소멸되는 것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다. 행복은 영속적인 것을 찾아 인간과 우주에 대한 사랑을 실현함으로써 가능하다.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부를 가져도 행복할 수 없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것은 이미 명백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내가 더 열심히 살 이유를 찾게 된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결핍을 느끼게 되지만, 냉소적이거나 부정적인 사람이 아닌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 된다. 남들보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이나, 외모가 부족하거나 재능이 없어도 이 문제로 부모를 탓하거나 남을 탓하기를 그치게 된다. 이 불평등에 순응하는 순간 불평등은 '도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공도 없다'는 진리를 확인해줄 뿐이다. 그러나 불평등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면 누구든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된다. 지금 주어진 환경이나 태어난 여건은 내가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만, 앞으로의 환경과 여건은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갈 수 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시절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축복이라고 생각되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오히려 사소한 역경이나 시련 앞에서 무너질 때가 많다. 인생이란 험한 세상에서 단 한 번의 예방주사조차 맞지 않아서 인생의 고난에 저항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흔히 우리가 말하는 축복받은 환경이나 재능이 오히려 단점일 수 있다는 뜻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떤 행위를 오래 지속하면 서서히 힘이 쌓여 어느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의 초기는 지루할만큼 천천히 움직이지만 어느 순간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는 변곡점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노력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변곡점에 서기 전에 포기한다. 때로 변곡점은 나를 이겨내는 시점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남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는 순간을 폭발하듯 맛보게 된다. ... 인생의 변곡점 역시 마찬가지다. 변곡점은 자신이 어디 있다고 알려주지 못한다. 다만 그렇게 쌓이고 모인 힘은 한낱 눈송이 하나, 물방울 하나에 부서지는 눈사태와 댐처럼 우리를 가로막았던 모든 상황을 한순간에 해결해버리는 것이다. 결국 믿는 만큼 성취하는 것이며 나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사업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선수다. 사업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고수다. 하지만 선수나 고수도 사업하는 때를 아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 의미로 사업가는 중용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용이란 가운데, 양극단의 중간이 아니다. 중용은 위치상 가운데가 아니라 시간이 포함된 개념이다. ... 중용은 때를 알고 알맞게 행동함을 뜻한다.

 

 

정치적으로 보수든, 진보든 인간 존중과 공생의 의미를 실천하는 쪽에 서겠다는 기준이 중용이다. 그렇게 시대에 따라 사안에 따라 보수도 진보도 될 수 있는 게 중용이다. 모든 일마다 언제나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이라면 옳지 않은 일도 지지하게 된다. ... 중용을 제대로 이해하면 이렇게 양극단을 자유롭게 오가도 마음에 걸릴게 없다. 위대한 지도자는 이러한 중용적 태도를 깊게 이해해야 한다. 중용을 지킨다는 건 들어갈 때와 나올 때를 이해하며 안다는 말과 동일하다. 중용을 이해하면 칭찬이나 비난이 같은 곳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그러니 기뻐하고 들뜨거나 해치려 하거나 분노를 표현할 때가 아님을 안다. ... 결국 중용이란 평범한 일상에 대한 평범한 선택이다. 즉 상식으로 돌아간다는 뜻과 같다. 이때야 비로소 모든 일에 무리수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거나 주는 일 없이 순리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순리를 따라 움직이게 되는 일이야말로 경영자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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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사는 사람들은 현재를 즐길 줄 안다. 그냥 사는 것, 인생을 흘러가는 삶.

 

 

[본문발췌]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자기 운명에 대한 예언이 된다.

 

 

그날 나는 학생들에게 '자기 안의 어린 예술가를 구하라'는 주제로 예정에도 없던 강연을 했다. 여러분의 내면에는 상처받기 쉬운 어린 예술가가 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실수는 그 어린 예술가를 데리고 예술학교에 들어온 것이다. 물론 이곳은 좋은 학교이고 훌륭한 선배 예술가들이 있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는 질투라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성운이다.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친구나 선생들은 본래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모르게 여러분의 재능을 시기하고 있다. 그건 이 세계에선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선생은 평가를 해야 하고 동료들도 당신 작품에 판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며 새로운 예술을 알아볼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게다가 마음속 깊숙한 곳에 이곳을 박차고 나가고 마음껏 자기 재능을 발휘하고픈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중이다. 여기, 이 게토에 갇혀 있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내면에 숨어 있던 어린 예술가가 신나게 붓을 휘두르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따라서 주변 모든 예술가의 어떤 새롭고 참신한 시도에도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아니 냉혹하다. 우리, 두꺼운 껍데기로 방어막을 둘러친 얼치기 애늙은이 평론가들은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를 노리고 있다. 사자가 어린 치타 새끼를 물어죽이듯, 그것은 그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어쩌면 여러분 자신도 동료들에게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일단 여기 들어온 이상, 여러분의 임무는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상처받지 않도록, 그가 겹겹의 방어막으로 단단히 자신을 감싸 끝내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정신적 불구가 되지 않도록 잘 아끼고 보호하여, 학교 밖으로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배움은 다음 문제다. 학교에서는 평생을 함께할, 평가와 비난이 아니라 격려와 사랑을 함께 나눌 예술적 동지를 구하라. 타인의 재능을 샘내지 말고 그것을 배우고 익혀 훗날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활동을 시작할 때, 양분으로 삼고 그 어린 예술가의 벗으로 키우라.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 학교에서는 좋은 연설에 다음 세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든가 웃기든가, 아니면 유용한 정보를 줘라. 내 서가의 책들도 그런 기준을 적용했다. 나를 감동시켰거나 즐겁게 해주었거나 아니면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는 책들은 살아남았다. 그 세 가지 중에 단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책들은 다른 운명을 찾아 내지을 떠났다. 

 

 

평균적인 가정에는 수만 개가 넘는 물품들이 있다고 한다. 정주민의 삶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려면 그 모든 물품에 일일이 가치를 매겨야 한다. 그리고 그 물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당당히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일종의 비자를 받고 나의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나라는 인간의 과거에 깊숙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추억과 사연을 가진 물건들이었고 그 돈으로 살 수 있었던 무언가를 희생하고 들인 것들이었다.

 

 

내 삶에 들러붙어 있던 이 모든 것들, 그러니까 물건, 약정, 계약, 자동이체, 그리고 이런저런 의무사항들을 털어내면서 나는 이제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쓸데없는 것들을 정말이지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읽지 않는 책들, 보지 않는 DVD들, 듣지 않는 CD들이 너무 많았다. 인터넷서점에서 습관적으로 사들인 책들이 왜 자기를 읽어주지 않느냐고 일제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런 비난이 두려워 우리는 후회의 순간을 미래로 이월해버린다. 나중에는 보겠지, 언젠가 들을 날이 있을 거야. 그러나 그런 날은 여간해서 오지 않는다. 새로운 물건들이 계속 도착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순간의 만족을 위해 사들인, '너무 오래 존재하는 것들'과 결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서 축적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게 왔다가 그대로 가도록 하는 삶, 시냇물이 그러하듯 잠시 머물다 다시 제 길을 찾아가는 삶, 음악이, 영화가, 소설이, 내게로 와서 잠시 머물다 다시 떠나가는 삶. 어차피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물질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순수한 힘으로 보았다. 힘이 커지면 어른이 되고 힘이 완전히 사라지면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 죽는 것이다. 힘은 좋은 공기와 물, 자연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강해지고 반대의 경우 약해진다. 권력자는 사람들로부터 힘을 많이 받는 사람이고 또 그 힘을 잘 나누어주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훌륭한 인간이란 많은 것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많은 것이 잘 지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두는 사람이다. 하나의 사상이 나라는 필터를 거쳐 한 권의 책이 되고 한 곡의 음악이 나라는 필터를 거쳐 아름다운 문장이 된다. 이럴 때 나의 힘은 더욱 순수하고 강해진다. 모든 것이 막힌 것 없이 흘러가며 그 과정에서 본래의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을 생성하게 될 때, 인간은 성숙하고 더욱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 - 이탈리아 속담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돌아보면 지난 시칠리아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 긴 여행에서 그 어떤 것도 흘리거나 도둑맞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다시 짐을 점검해 보았다. 있을 것들은 모두 있었다. 오히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전광판을 보며 나는 지난 세월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장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시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날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날, 건달의 세월을 견딜 줄 알았고 그 어떤 것도 함부로 계획하지 않았고 낯선 곳에서 문득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새삼 깨닫고 놀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변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비슷한 옷을 입고 듣던 음악을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느새 그토록 한심해하던 중년의 사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애써 외면해왔을지도 모른다. 정말 젊은 사람들은 젊은이의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젊게 생각한다는 것은 늙은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늙은이들은 걱정이 많고 신중하여 어디로든 잘 움직이지 않느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 젊은이들은 자신의 취향도 내세우지 않으며 낯선 곳에서 받는 새로운 감흥을 거리낌없이, 아무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 Memory L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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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 파타고니아, 그리고 카리브.... 마음의 빈 공간에 남미의 바람을 채우고싶다.

 

 

[본문발췌]

 

 

여행은 영혼을 위한 비타민이자 가장 솔직한 자아를 마주하는 길이며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부활의 과정이기도 하다. 일종의 명상이나 수련처럼 자신을 비우고 단련하는 가장 신 나는 방법이고 시들해진 일상에 호기심과 열정을 다시 채워 넣어준다. 어디 그뿐인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나 뜻밖의 인연을 선물해 한 사람의 운명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버킷 리스트' 상위권에 '여행'이라는 단어를 올린다. 여행은 그 자체가 꿈이며, 우리를 끝없이 꿈꾸게 하고 때로는 꿈이 현실로 바뀌는 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행은 인간이 가슴에 품고 사는 우주를 확장시키고 내면의 성장을 도와주는 '길 위의 학교'다. 단언컨대, 한 번 여행을 할 때마다 당신의 영혼은 깊어지고 넓어지고 모난 부분이 깎여 부드러워질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행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아예 그것을 직업 삼아 살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직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인생의 부정적인 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것이 가장 다행스럽다. 나는 여행자로 살면서 '삶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 즉 아픔, 슬픔, 실패, 좌절, 불완전함 등을 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내 인생의 일부'로 끌어안고 공존해 살아가는 '체념의 미학'을 터득해가고 있다. 이것은 결코 삶을 비관적으로 보고나 자포자기 하는 자세, 혹은 무책임한 태도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은 유한하다'는 비극적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 여행은 가장 큰 힘과 지혜를 준다.

 

 

'이상적인 여행사가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어디를 가고 싶으냐고 묻기보다는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냐고 물어볼 텐데.' - 알랭 드 보통, <공항에서의 일주일을>

 

 

집 안 대청소를 해서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고 먼지를 떨어내듯 머릿속도 켜켜이 쌓인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해야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쁨으로 채울 수 있다. 우리 몸에 가끔 디톡스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정신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긴장과 스트레스에 시달린 영혼에서 독소를 빼내야 한다. 걱정, 불안, 경쟁심, 분노, 조바심 등을 내보내고 빈 공간을 마련하는 일. 그것이 바로 휴가다.

 

 

"젊은 아가씨, 우리의 땀이 곧 우리의 삶이에요. 인생은 그런 거지요. 어디에서 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똑같아요. 중요한 건 가슴에,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있죠. 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요. 당신도 부디 행복하세요." - '아베니다 데 라 호야(Avenida de la Hoya)' 식당 주인 아주머니...

 

 

페루 여행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어 더욱 감사한 시간이었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한없이 낮아지던 경험. 때로는 그저 겸허하게 받아들이거나 포기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깨달음. 인간 능력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교만함을 버릴수록 영혼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소중한 진리. 이것이 바로 페루 여행에서 얻은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역사는 쉬지 않고 흐른다. 우리는 그 역사의 강을 따라 흘러가버리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인간들. 창틀에 소복하게 쌓였다가 바람 한번 불면 포로로 날아가는 먼지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짧은 여행길 같은 인생에서 욕심 따위는 버리고 걸어도 좋다. 죽음도 너무 두려워하거나 애석해하지 말지어다. 그것 또한 삶의 일부인 것이니.'

 

 

"인생은 모든 순간이 그 고유의 가치가 있는 거란다. 겉으로 보이거나 소유하고 있는 것들과 상관없이 의지를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며 그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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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이고, 자유를 결정하는 것은 용기" - 페리클레스

 

자유를 위한 용기를 내려면 우선,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한다.

 

 

[본문발췌]

 

 

인류의 위대한 모험은 나머지 인류와 다른 길을 간 소수의 단호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역사는 호기심으로 세상에 저항한 이들의 기록이다.

 

 

생각은 혼자 두면 외롭고 무력하다. 생각은 소통을 통해 수정되어야만 남들에게도 의미 있는 생각이 된다. ... 모든 개인은 각자의 감성과 기억을 토대로 새로 흡수한 정보를 생각으로 형성한다. 그리고 생각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접하기 전에는 그 나름의 가치를 모른다.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생각과 접목하여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것은 창조성이 아니라 감성이다.

 

 

진보는 항상 번영과 함께 빈곤을 낳았다. 대다수가 가난하지 않던 시대가 언제였는가? 일부 사람들이 전보다 덜 가난해졌다고 해도 가난을 종식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돈이 발명된 이래로 모두가 만족할 만큼 풍족한 적은 없었다. 돈이 충분한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인구의 10분의 1이 부의 85퍼센트를 소유하는 현실을 막지는 못했다. 식민주의가 끝났다고 해도 해마다 수천억 달러가 빈곤국에서 부유한 나라로 흘러들어가는 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인구의 5분의 4가 여전히 부의 15퍼센트만 소유한 반면에 1퍼센트의 부자가 부의 3분의 1을 소유한다.

 

 

자선 사업의 목표는 물질적인 결핍을 메우는 것 이상으로 더욱 폭넓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소외감에 대응하고 단순히 무엇을 주고받는 것을 넘어서 호혜적인 '관계'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권력자는 더 이상 스스로를 믿지 않고 아무도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느끼며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자살한다. 권위자는 자신의 예측이 실현되지 않을 때 자살한다. 전문가는 다른 전문가들이 하는 말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때 자살한다. 친절한 사람은 친절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직업에 종사할 때 자살한다. 가장 흔한 형태의 자살은 희망을 잃는 것이다. 가장 우울한 자살은 고마워하는 마음의 자살이다. 시기와 탐욕과 오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만성질환이지만 그나마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억제되었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한때 사회를 융화시키거나 적어도 혐오감을 줄옂는 끈이었다. 이를테면 신, 조상, 부모, 스승, 이웃, 자연에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평등을 염원할수록 권리가 기반을 이루고, 상업화될수록 고마워하는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줄어든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독립에 대한 모독이자 자존심을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면 인간은 위협받은 때보다는 이해받을 때 외부 세계에 호기심을 가져왔다. 관심이야말로 우리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찬사다. 우리를 풍요롭게 만드는 최선의 방법은 남의 생각을 배우는 것이다. 인간이 항상 아주 작은 위험 신호에도 껍데기 속으로 숨어버리는 달팽이처럼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이해받으려면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를 알아보고 그들의 생각과 공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해한다고 해서 불일치가 다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일치를 풍부한 경험으로 만들어준다. 

 

 

시간의 엄수와 효율성은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되어 사람들에게 하루에 더 많은 활동과 성취를 이루도록 채찍질해서 개인의 리듬을 개성 없는 정해진 시간표에 맞추도록 강요한다. 인류는 점차 특권에 의해서만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삶을 인정하고 사회가 정해준 생활에 기꺼이 적응해서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자기가 하는 일과 그 일을 언제 할지를 통제해서 모든 활동을 자기 나름의 속도로 수행하고 예상 밖의 사건과 다양성, 놀라움과 즉흥성에서 큰 즐거움을 얻는 사람들로 나뉜다. 이로써 사람들이 원하는 미래상도 크게 달라진다.

 

 

자유는 단지 권리가 아니라 획득해야 할 기술이다. 나만의 렌즈가 아니라 다양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기술이자 아무도 상상한 적 없는 무언가를 상상해서 아름다움이나 의미나 영감을 찾는 기술이다. 각자의 삶은 이런 자유에 관한 우화다.

 

 

사람은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존재다. 인간은 타인과 개인적으로 결합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못한다. 관계가 호혜적인 관계이고 동시대인이나 선조들과의 공동체 의식으로 풍성해질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최근에 농촌에서 도시로,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 나라로 대규모로 이주하는 현상은 자연의 다채로운 변화에 대응하는 인류의 변함없는 특징이다. 국가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국경 안에 붙잡아두기 위해 다양한 장벽을 세워왔지만 최근에는 기술과 통신과 교육이 모든 사람을 연결해서 새로운 세대를 다시 유목민으로 만들고 있다.

 

 

사람의 나이를 살아온 햇수로만 세지 않고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강도와 그 사람이 흡수한 경험의 다양성으로 헤아린 다음 다시 멍하니 절반만 존재하면서 흘려보낸 시간을 모두 빼서 계산하듯이, 각 개인의 조국도 고마워하는 마음, 신의, 영감의 다양한 파편과 등급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페리클레스는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이고, 자유를 결정하는 것은 용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회는 사람들을 용기 있게 만들도록 조직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정신과 에너지를 쥐어짜는 일이 너무나 많다. 사람들을 생기 넘치고 흥미를 느끼게 하고 온전히 깨어 있게 하는 일은 너무 적다. 더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다면 일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는 노력을 인정받고 재능과 예술적 기교로 돈 많은 사람들의 변덕에 복종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요구에 대한 자각은 조직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한 진정제로만 조직에 투입되었다. 고대 아테네에서 고용은 노예를 위한 것으로 자유인은 남에게 굽실거리며 일을 해서 임금을 받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꾸로다. 고용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고 자기를 팔아서 시간제 임금을 받는 것을 성공으로 여긴다.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지내야 하는데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여긴다. 그럼에도 국가가 번창할수록 국민은 자유로운 인간으로 일하기를 꿈꾸면서 굽실거리고 아첨하지 않고도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나선다. 스스로 일을 통제하고 창조력을 발휘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고 인정받는 방법을 찾기 위한 넓은 탐색의 영역이 열려 있다. 그러나 이런 기회를 허락하는 일은 많지 않다. 굳이 이런 기회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일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체념하고 일을 하고 얻는 알량한 보상에 만족하거나 일 밖에서 만족을 찾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삶은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것이 삶의 의미이고 목적이다. - 도스토엡스키

 

 

일본에 강하게 남아 있는 다비 전통은 남을 발견하기보다 자기를 발견할 것을 장려한다. 다비란 속세의 경쟁과 질시를 멀리하고 자연과 교감하며 황야로 나가서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도보 여행을 뜻한다. 현대의 여행객들은 료칸에 머물며 과거로 걸어 들어가 성공에 대한 욕망을 떨치고, 조상들의 고행과 불확실성을 인정하던 마음, 덧없음의 미학, 사람이나 장소와 헤어지는 슬픔을 되찾으려는 막연한 욕망을 실현한다. '획일화된 단체여행을 피하라'는 조언은 혼자 여행하는 사람과 다츠사라(탈샐러리맨이라는 뜻으로 월급에 얽매인 생활에서 벗어나 독립한 사람)가 좋아하는 여행서 <걸어서 세계를 여행하는 법The way to walk the world>에서 전하는 메시지이지만 사실 자기 자신과 고된 현실에서 벗어나봤자 아무 데로도 가지 못한다.

 

 

의사소통은 메시지를 전송하고 상대가 발신자의 의도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사람마다 지식의 배경이 제한적이고 메시지의 함의를 파악하려는 의지나 에너지의 양이 다르기 때문에 수신자가 메시지에서 얼마나 많은 관련성을 발견하는가에 따라 메시지를 이해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메시지의 함의가 많고 함의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노력이 적을수록 관련성이 커진다. 남들이 우리에게 알아내도록 의도한 함의를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추측이 개입한다. 의사소통은 불확실성과의 싸움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다루는 지식의 상당 부분이 가변적이거나 희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발견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고, 사전에 정해진 목표로부터의 자유와, 사물이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불가피성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태도로부터의 자유에 의존한다.

 

 

살아 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연결되어야 한다. ... 살아 있다는 것은 그저 심장이 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심장은 어떻게 뛰고 다른 정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채는 일이다. 삶을 공격하는 치명적인 질병은 '생전 경직rigor vitae', 곧 호기심을 다 태워버리고 반복적이고 무감각한 일상에 안주하는 정신의 경직 상태다. 이런 상태는 살아 있다는 착각을 주기 때문에 '사후 경직rigor mortis'보다 더 위험하다. 전에는 생각해본 적 없는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서 영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저 명목상으로만 살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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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시장을 잘 알고 이해한다고 해도 시장을 따라가기만 해서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

원칙과 기준에 따른 선택, 그리고 인내심이 필요하다.

 

 

[본문발췌]

 

 

"좋은 기업을 저렴한 가격으로 사서 더 비싼 가격으로 파는 것"

  • 좋은 기업 : 자본수익률(ROC) = 영업이익(EBIT, 세전영업이익) / 투입유형자본 (순운전자본+순고정자산)

  • 저렴한 가격 : 이익수익률 = 영업이익( EBIT) / 기업가치(시가총액+순이자부담부채)

 

인내심은 모든 투자에서 성공으로 가는 관문이다. 주식시장에서 '투자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는 격언이 나온 이유다. 마법공식이 아무리 훌륭하고 빼어난 투자방법이고 당신의 돈을 불려줄 기가 막힌 전략이라 하더라도, 당신이 기다리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돌아올 것은 손실뿐이다.

 

 

벤자민 그레이엄은 우리에게 큰 폭의 안전마진magin of safety을 마련해두는 것이 투자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가르쳤다. 다시 말해 당신이 사들이는 것의 가치를 파악한 후 그보다 훨씬 밑도는 수준의 가격으로 지급하라는 얘기다. 어떤 회사의 가치와 우리가 지급하는 가격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어야 큰 폭의 안전마진이 형성되고, 그래야 장기적인 성공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는 법이다.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아니라, 그럴 리 없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다." - 아티머스 워드

 

 

대부분의 고객 및 투자자는 해당 전략이 시장이나 경쟁자들에 비해 몇 년 동안 저조한 실적을 내면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린다! 바로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전략을 고수하기란 힘든 것이다. 자산운용 전문가는 다른 사람들이 잘하고 있을 때 잘하지 못하면, 모든 고객과 심지어 자신의 일자리까지 잃을지 모르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많은 자산운용가들은 이 리스크를 회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대다수의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투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이것은 가장 인기 있는 회사, 대개 다음 몇 분기 또는 앞으로 1, 2년 동안 가장 유망해 보이는 기업의 주식을 매입한다는 의미이다.

 

 

평균 이상의 기업을 평균 이하로 사다. ... 마법공식은 등수를 매기는 체계를 통해 회사를 고른다. 마법공식은 높은 자본수익률과 높은 이익수익률을 동시에 가진 회사들에 최고 등수를 매긴다. 간단히 말해서 공식은 우리가 체계적으로 평균 이상의 기업을 평균 이하의 가격으로 살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는 높은 자본수익률을 낼 수 있는 기업에 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첫째, 높은 자본수익률을 낼 수 있는 기업은 또한 그 수익을 매우 높은 수익률로 투자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기업들은 돈을 겨우 평균적인 수익률로만 투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기회는 매우 특별하다. 둘째, 우리가 방금 배웠듯이 높은 자본수익률을 낼 수 있는 능력은 또한 높은 수익 성장률을 내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높은 자본수익률을 내는 기업들은 어떤 종류의 특별한 우위를 확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특별한 우위, 즉 경쟁 우위가 있기 때문에 경쟁사들이 생겨도 평균 이상의 수익을 내는 능력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특별한 점(신제품, 향상된 제품, 유명 브랜드, 경쟁있는 위치)이 없는 기업들은 평균적인 또는 평균 이하의 자본수익률을 올릴 가능성이 높다. 어떤 회사의 사업에 특별한 점이 없다면, 아무나 뛰어들어 그 사업을 시작하기가 쉽다. 약 어떤 사업이 높은 자본수익률을 올리고 있고 경쟁하기도 쉽다면, 결국 누군가는 경쟁사를 차릴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본수익률이 평균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지 계속 경쟁할 것이다.

 

 

리스크에 대해서 고려해 봐야 할 때에는 일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투자 전략에 대한 다음의 두 가지 요점만 알아 두길 바란다.

  • 해당 전략을 장기간 따랐을 때 돈을 잃을 위험, 즉 리스크는 얼마인가?

  • 당신이 선택한 전략이 장기적으로 다른 전략들보다 더 저조한 실적을 낼 리스크는 얼마인가?

 

탁월한 투자 전략들은 대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만약 어떤 투자 전략이 정말 이치에 맞는다면, 장기간 투자하면 투자할수록 궁극적인 성공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투자 기간에 대한 시야는 5년 또는 10년, 20년으로 잡는 것이 이상적이다.

 

 

미스터 마켓은 단기적으로는 감정에 기초하여 주가를 매길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회사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 단기적으로 미스터 마켓은 주식을 적정가 이하 또는 이상으로 팔거나 사는 매우 감정적인 사람처럼 행동한다.

  • 장기적으로 보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진다. 그는 전혀 딴판이 되어 적정 가격을 매긴다.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도 알지 못한 채 개별 기업의 주식을 고르는 것은 불붙은 성냥을 가지고 다이너마이트 공장 안을 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무모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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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나 공간의 변화를 통해 마음의 복잡함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다른 삶을 간접 경험도 한다.

 

누군가는 내면의 성찰과 명상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하고, 여행에서 돌아와 집 담장안에 핀 꽃, 반겨주는 강아지, 고양이, 새장의 새들에게 더 위안을 받기도 한다.

 

 

尋春(심춘) -작자 미상-

 

盡日尋春不見春(진일심춘불견춘)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맸건만 봄은 보지 못하고

芒鞋遍踏壟頭雲(망혜편답롱두운) 짚신이 다 헤지도록 언덕 위 구름만 따라 다녔네

歸來笑撚梅花臭(귀래소연매화취) 지쳐서 돌아와 뜰 안에서 웃고 있는 매화향기 맡으니

春在枝頭已十分(춘재지두이십분) 봄은 여기 매화가지 위에 이미 무르익어 있는 것을

 

 

[본문발췌]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찾아 또다시 떠나고 싶어지면 나는 다른 어디도 아닌 뒷마당을 돌아볼 거에요. 그곳에 없다면 애초에 잃어버린 적도 없을 테니까요. - <오즈의 마법사>의 도러시

 

 

'아무데도 가지 않기'의 개념은 두말할 필요 없이 단순하다. 내면이 들여다보일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니 말이다. 가령 당신이 차에 흠집이 났을 때, 굳이 그 부분을 새로 칠할 방법을 찾아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의 문제는 (게다가 그 해결책, 즉 마음의 평화는) 내면에 있다. 자신의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이슬람의 우화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인물과 똑 닮았다. 우화 속 남자는 자신의 집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는데 거리가 더 환하다며 거리로 나가 열쇠를 찾으러 다닌다. 2000년도 더 전에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다시피, 우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다. 허리케인이 들이닥쳐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을 때, 어떤 사람은 비로소 과거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기회로 보는 것이다. 반면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 사이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어나 한 사람에게만 일생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항상 좋거나 항상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네. 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햄릿의 2막2장에서, 햄릿이 로젠크란츠에게 하는 말)

 

 

삶의 상당 부분은 우리 머릿속에서 벌어진다. 기억이나 상상, 추측이나 해석 같은 것들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바꾸기만 해도 내 삶을 훌륭하게 바꿀 수 있을 것만 같다.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최고의 무기는 마음을 바꿔 다른 관점을 볼 줄 아는 능력이다. - 윌리엄 제임스

 

 

실리콘밸리에는 매주 '온라인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안식일을 맞아 균형감각과 방향감각을 되찾으려고 금요일 밤에 거의 모든 전자기기를 껏다가 월요일에 다시 온라인 상태로 돌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여력이 있다면 시골에 집을 얻거나 세컨드 하우스를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늘 세컨드 하우스에서와 같은 시간을 주중에 만드는 편이 더 간단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는 특히 고가의 부동산을 구입할 형편이 안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이동과 연결과 공간의 시대가 되었지만, 정작 우리의 일상은 시간에 잡아먹혀버렸다. 물론 마르크스가 이 말을 한 맥락은 지금과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느 곳에나 연결될 수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지리적인 제한이 사라지자마자 시간이 점점 더 우리에게 횡포를 부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이 어울릴수록 나 자신과 소통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일본의 뒷골목에서 살기 위해 뉴욕을 떠날 때만 해도 나는 가진 돈은 물론 즐거움과 친목생활, 여러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 거라 각오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더욱 풍요로워졌다. 바로 시간이다.

 

 

속도의 시대에, 느리게 가는 것보다 더 활기찬 일은 없으리라. 산만함의 시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보다 더 호화로운 기분이 드는 일도 없을리라.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시대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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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감정의 혼돈과 균형을 무너뜨려 마음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한다. 세상의 지위, 권력, 부에 대한 기준이 달라진다면 불안에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 존 러스킨

 

 

[본문발췌]

 

 

지위(status)

  •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
  • 좁은 의미에서 이 말은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을 가리킨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가리키며, 이 책에서는 이 의미가 더 중요하다.
  • 높은 지위는 즐거운 결과를 낳는다. 이 결과에는 자원, 자유, 공간, 안락, 시간이 포함되며, 남들에게 먼저 배려받고 귀중학 여겨진다는 느낌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런 느낌은 다른 사람들의 초대, 아첨, 웃음, 경의, 관심을 통해 당사자에게 전달된다.

 

지위로 인한 불안

  •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걱정. 이런 걱정은 매우 독성이 강해 생활의 광범위한 영역의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
  •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사람들(소크라테스나 예수)은 다르겠지만, 세상이 자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면 스스로도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 실패에서 굴욕감이 생긴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우리의 가치를 납득시키지 못했고, 따라서 성공한 사람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할 처지에 놓였다는 괴로운 인식에서 나온다.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다.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자극하며, 남들보다 나아지도록 고무하며, 남에게 해를 주는 괴팍한 행동을 못하게 억제하며, 공동의 가치 체계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결합한다. 그러나 모든 욕구가 그렇듯이, 이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이런 상황을 대처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동기 때문에 높은 지위를 구하려고 달려드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일반적인 가정이 있는데, 이 가운데 돈, 명성, 영향력에 대한 갈망이 주로 손에 꼽힌다. 아니, 정치적 이론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요약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랑. 먹을 것과 잘 곳이 확보된 뒤에도 사회적 위계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은 그곳에서 물질이나 권력보다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돈,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징으로서 - 그리고 사랑을 얻는 수단으로서 - 더 중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을 하고 부산을 떠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활필수품을 얻으려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노동자의 최저 임금으로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의 개선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하는 것은 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한다. 가난 때문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가장 열렬한 욕구의 충족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은 들락거려도 아무도 주의하지 않는다. 군중 속에 있어도 자신의 오두막 안에 처박혀 있을 때나 다름없이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 지위와 이름이 있는 사람은 온 세상이 주목한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관심을 가진다.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제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자존심 = 이룬것 / 내세운것", 윌리엄 제임스의 방정식은 우리의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무엇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 이 방정식은 우리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도 암시한다. 하나는 더 많은 성취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는 거이고, 또 하나는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비꼬는 듯한 어조로 근대 사회가 이루어낸,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생산성과 원시적인 사냥과 채집 사회의 형편없는 자원을 비교했다. ... "(근대 사회에서는) 아무리 지위가 낮고 가난한 노동자라 해도 근면하게 일하고 절약을 하기만 하면, 과거의 어떤 야만인이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많은 생활필수품을 손에 넣고 편리한 생활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스미스보다 22년 전에 장-자크 루소는 날카롭고 기묘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놀랍게도 야만인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 가운데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고용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

 

 

프로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농담을 통해 장애 때문에 공개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적의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활용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계속해서 농담을 통하여 위험한 메시지가 "농담의 형태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않을 사람의 귀에도 들어가게 할 수 있다. ...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농담을 특별히 애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우리는 정당화할 수 없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조롱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왕, 능력이 권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왕은 조롱한다. 인간적 본성을 잊고 특권을 남용하는 높은 지위의 권력자들은 조롱한다. 우리는 조롱을 하고, 웃음을 통하여 불의와 과잉을 비판한다. 따라서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어지면 도덕적 목적을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의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고,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이 풍자는 "악이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만화가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면 당황하거나 창피할 수 있는 상황이나 감정에서 웃음을 끌어낸다. 그들은 환한 대낮에는 차마 살펴볼 수 없는 약한 부분을 짚어낸다. 또 우리가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주 어색한 측면들을 드러낸다. 걱정이 은밀하고 강렬할수록 웃음의 가능성도 커지며, 이때 웃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꼬챙이에 꿰어내는 솜씨에 바치는 찬사가 된다. 따라서 많은 유머가 지위에 대한 불안에 이름을 붙이고, 그럼으로써 억제하려는 시도라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유머를 보고 들으면서 세상에는 나만큼이나 질투심 많고 사회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처럼 돈문제 때문에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처럼 멀쩡한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약간 맛이 간 상태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또 나처럼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마음이 상냥한 만화가들은 지위로 인한 우리의 근심을 보고 우리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놀린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를 비판한다. 그드릐 교묘한 솜씨 덕분에 우리는 마음을 열고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 자신에 대한 씁쓸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만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를 비난했다면, 우리는 분노하거나 상처를 입고 움츠러들었을지도 모른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에 대한 공격의 핵심은 이것이 우선순위를 엄청나게 왜곡하여, 물질적 축적 과정을 가장 높은 수준의 성취로 치켜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상을 진실되고 폭넓게 규정한다면, 물질적 축적은 우리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사전에 따르면 부는 단지 많은 액수의 돈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이 일차적인 의미도 아니었다. 부란 나비에서부터 책이나 미소에 이르기까지 뭐든지 풍부한 상태를 의미한다. 러스킨은 부에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부에 강박감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염두에 두었던 부는 특별한 종류였다. 그는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 - 그는 이런 일군의 특징을 단순하게 "삶"이라고 불렀다 - 에서 부유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이 최후의 사람에게>에서 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적 관심을 버리고 "삶"에 기초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이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러스킨은 말한다.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 보통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 그들의 금고 자물쇠만큼이나 부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부유할 수가 없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에세이 <자립Self-Reliance>에서도 비슷한 외침이 울려 퍼진다.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 에머슨의 말에 따르면, 어떻게 살고, 옷을 입고, 먹고, 쓰느냐 하는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념에 맞추다 보면 얼굴에 서서히 "우둔한 표정"이 나타나게 된다. 모든 고귀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금언을 따라야 한다. "나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하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에머슨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제 순응이니 조화니 하는 이야기는 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그런 말들을 관보에 실어 조롱하도록 하자. ... 이제 결코 고객을 숙이고 사과하지 말자. ... 이 시대의 매끈한 평범함과 비열한 만족을 모욕하고 질책하자."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 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야심을 품고, 어떤 결과들을 선호하고,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 밖에 없는 대가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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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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