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단어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본문발췌]

 

 

풀꽃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풀꽃3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너도 그러냐

 

나는 너 때문에 산다

 

밥을 먹어도

얼른 밥 먹고 너를 만나러 가야지

그러고

잠을 자도

얼른 날이 새어 너를 만나러 가야지 

그런다

 

네가 곁에 있을 때는 왜

이리 시간이 빨리 가나 안타깝고

네가 없을 때는 왜

이리 시간이 더딘가 다시 안타깝다

 

멀리 길을 떠나도 너를 생각하며 떠나고

돌아올 때도 너를 생각하며 돌아온다

오늘도 나의 하루해는 너 때문에 떴다가

너 때문에 지는 해이다

 

너도 나처럼 그러냐?

 

 

 

초라한 고백

 

내가 가진 것을 주었을 때

사람들은 좋아한다

 

여러 개 가운데 하나를

주었을 때보다

하나 가운데 하나를 주었을 때

더욱 좋아한다

 

오늘 내가 너에게 주는 마음은

그 하나 가운데 오직 하나

부디 아무 데나 함부로

버리지는 말아다오.

 

 

 

행복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선물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당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 구절이면

한 아름 바다를 안은 듯한 기쁨이겠습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22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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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뛰어넘는 투자에 대한 통찰!

 

 

[본문발췌]

 

 

가치투자는 실제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증권을 사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1달러짜리를 50센트에 사는 식이다. 염가증권에 투자하면 "안전마진margin of safety"을 얻게 되며, 이는 실수, 부정확, 불운, 경제와 주식시장의 변동에 대비하는 완충재가 된다. 가치투자가 기계적으로 염가증권을 찾아내는 수단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심층적인 기본적 분석, 장기 투자, 위험 축소, 군중심리 억제를 강조하는 종합투자철학이다. 주식시장에는 단기 수익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사람들은 가치에 상관없이 가격이 오른다는 희망을 바탕으로 투자가 아니라 투기에 휩쓸리게 된다. 대개 투기자들은 주식을 종이쪼가리로 간주하여, 기업의 실체와 평가 기준을 무시한 채 수시로 사고판다.  ... 투기자들은 단기 수익에 몰두하지만, 가치 투자자들은 손실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위험을 회피하는 투자자들은 이익 가능성보다도 손실 위험을 더 중시한다. 자본을 어느 정도 모은 사람은 대개 이익이 증가할 때 얻는 기쁨보다 손실이 발생할 때 겪는 고통이 더 크다.

 

 

시장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저울로 보는 사람들은 감정에 따라 몰려다니는 군중에 속한다. 반면에 시장을 (인기 경연이 벌어지는) 투표소로 보는 사람들은 극단으로 치우치는 시장 심리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다.

 

 

가치투자의 핵심 특성: 인내, 절제력, 위험회피.

 

 

좋은 사업이란 진입 장벽이 높고, 자본이 많이 들어가지 않으며, 고객을 믿을 수 있고, 기술 진부화의 위험이 낮으며, 성장 잠재력이 높고, 잉여현금흐름이 규모도 크면서 증가하는 사업이다. 좋은 사업은 기술혁신과 경쟁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보통주 투자의 지침으로 삼을 명확한 기준

  • 미래의 기업 이익

  • 기업 사이의 질적 차이. 선도기업, 대기업/중소기업, 비인기업종...

  • 금리가 배당이나 이익에 미치는 영향

  • 시점 선택이 매매에서 차지하는 비중. 분석을 통해서 매력적인 가격에 사는 방법이 아니라면, 시점 선택은 늘 적절한 시점에 주식을 살 수는 없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주식을 팔 때에도 이른바 기술적 신호에서 단서를 잡을 것이 아니라, 주가가 객관적인 가치기준을 초과해서 상승했을 때 팔아야 한다. ... 전통적으로 투자자들은 곤경에 처한 투기자들이 낙담하여 주식을 팔 때 용기와 인내심을 발휘하여 주식을 샀다.

 

우량주를 사려면 경기가 침체하고 주식시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런 때가 아니면 높은 가격에 사서 나중에 후회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강세장이 과열되는 시기를 제외하면, 이른바 수많은 '비우량주'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진정한 투자 기회를 제공한다. 수많은 비우량주는 매우 인기 없는 대상이지만, 진정한 투자자와 재능 있는 증권 분석가에게 더 합리적인 도전기회가 될 수 있다.

 

 

심각한 손실을 피해야 높은 복리 수익률을 유지할 수 있다.

 

 

증권의 내재가치를 바탕으로 건전하게 투자하라. "내재가치"란 기업을 장기간 보유할 때 얻게 되는 가치. 즉, 기업에서 장기간 걸쳐 발생하는 현금흐름의 가치로서, 즉시 되팔아서 얻게 되는 투기적 가치와는 분명히 다르다.

 

 

손익계산서와 현금흐름표의 차이가 벌어진다면, 이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다.

 

 

분석가는 증권의 내재가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특히 내재가치와 시장가격의 괴리에 초점을 두게 된다. 그러나 내재가치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정의하자면 예컨대 자산, 이익, 배당금, 확실한 전망처럼 사실로 뒷받침되는 가치로서, 인위적 조작이나 극단적 심리로 왜곡되는 시장 호가와는 다른 개념이다.

  • 시장 요소 : 기술, 조작, 심리

  • 미래가치 요소 : 경영진과 평판, 경쟁 여건과 전망, 규모/가격/원가의 변화

  • 내재가치 요소 : 이익, 배당금, 자산, 자본구조, 발행 조건 등

 

시장은 각 종목의 가치를 그 구체적 특성에 따라 정확하고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므로, 저울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시장은 차라리 투표소라고 보아야 한다. 수많은 사람이 이성과 감정을 뒤섞어 선택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분석 요소들은 양적 요소와 질적 요소로 구분하면 편리하다. 양적 요소는 회사의 통계 자료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손익계산서와 대차대조표의 유용한 항목이 모두 포함되면, 생산, 단가, 원가, 생산능력, 수주잔고 등과 관련된 데이터도 보함된다. 이런 다양한 항목들은 자본, 이익과 배당금, 자산과 부채, 운영 통계로 분류할 수도 있다. 반면에 질적 요소가 다루는 내용은 사업의 특성, 산업에서 해당 기업이 차지하는 위치, 회사의 실물, 지리, 운영 특성, 경영진의 특성, 기업/산업/사업 전반에 대한 전망 등이다. 대개 이런 질문들은 기업의 보고서에서 다루는 내용이 아니다. 분석가는 신빙성이 천차만별인 잡다한 정보원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대체로 말해서, 철저한 분석에는 질적 요소보다는 양적 요소가 훨씬 낫다. 양적 요소는 숫자도 적고, 더 쉽게 얻을 수 있으며, 명확하고 신뢰도 높은 결론을 내리기에 훨씬 더 적합하다. 게다가 재무실적 자체가 질적 요소를 압축해서 보여주므로, 질적 요소를 상세히 연구하더라도 중요한 정보가 많이 추가되지는 않는다.

 

 

주식을 평가할 때 추세를 너무 강조하면 과대평가나 과소평가가 나오기 쉽다. 이는 추세를 미래 어느 시점까지 내다보아야 하는지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세는 평가 과정이 아주 정확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심리적이며 매우 자의적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추세가 형식상 숫자로 표현되더라도, 실제로는 질적 요소라고 간주한다.

 

 

증권분석은 예측이 아니라 주로 사실에 근거해서 가치를 다룰 때 가장 유용하다. 따라서 분석가가 쓰는 방식은 미래 예측 능력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투기자의 방식과 정반대가 된다. 물론 분석가도 미래 변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 주요 목적은 미래로부터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손실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분석가는 기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그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투자운용이란,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원금의 안전과 만족스러운 수익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런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운용은 투기다. 종목에 따라 투자인지 아닌지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가격이 투자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한 종목이 어떤 가격에서는 투자로 분류되지만, 다른 가격에서는 투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단독으로는 안전성이 부족한 종목이더라도, 여러 종목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면 투자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분산투자를 통해서 개별 종목의 위험을 낮추는 방법으로 투자의 요건을 충족할 수도 있다.

 

 

채권투자에서 신용위험 분석의 성패는 기업의 부채 상환능력 평가에 달렸다. 폭넓게 재무제표를 분석하는 것보다도 회사 전망을 노련하게 판단하는 편이 더 중요하다. '수익이 한정된 채권을 선정하는 작업은 비교적 단순해야 한다. 지금까지 회사의 이익이 이자비용보다 훨씬 많아서 회사의 현재가치가 부채를 크게 초과하는지 양적 기준을 분석하여 확인해야만 한다. 덧붙여서, 회사가 장래에도 계속 성공적으로 운영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회사가 파산할 가능성이 희박해야 한다.'

 

 

<증권분석>은 책에 담긴 구체적 지침보다도 상식이 훨씬 값지다. 상식이 주는 여러 교훈은 오늘날에도 분명히 타당하다. 특히 그레이엄과 도드의 통찰과 사고과정을 보면 피상적인 관습을 꿰뚫고 본질을 파악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증권의 가격과 수익률은 기대 위험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증권의 인기도에 따라 결정된다. (시장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우리는 이익 실적의 다른 측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는 이익추세, 최소 이익, 현재 이익이 포함된다. 각 이익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엄격한 평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요소들을 분석할 때, 매력적인 조건이 되려면 a)이익이 증가하는 추세이고, b)최근 이익이 특히 많아야 하며, c)조사가 기간 모든 해에 이자보상비율이 만족스러워야 한다. 위 세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가 부족하다고 해서 반드시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대신 이자보상비율이 최소 기준보다 훨씬 높아야 하고, 회사의 일반 요소나 질적 요소에 깊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투기 분야에서는 돈 내고 조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조언자가 진짜 실력자라면 번거롭게 조언하러 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도 비슷한 말을 했다. "롤스로이스를 타는 사람이 지하철을 타는 사람에게 조언을 듣는 곳은 월스트리트뿐이다."

 

 

부도증권투자를 포함한 가치투자에서 제기되는 근본적 질문 하나가 왜 헐값에 거래되는가? 이다. 학계에서 주장하듯이 시장이 효율적이라면, 오늘 가격이 왜 증권의 진정한 가치에 접근하는 최상의 추정치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 그레이엄과 도드는 교수였지만 이론보다는 현실을 직시하였으므로, 효율적 시장가설Efficient Makret Hypothesis(EMH)이 시카고대학에서 개발되기도 훨씬 전에 거부했다. 두 사람은 시장을 저울이 아니라 투표소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무게를 측정하는 곳이 아니라, 이성과 감정이 뒤섞여 결과가 산출되는 곳으로 보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다음 두 가지 가정을 세웠다. "첫째, 시장가격은 종종 진정한 가치에서 벗어난다. 둘째, 이렇게 벗어난 가격은 진정한 가치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투자자가 탐욕, 공포, 압박, 의심, 그리고 온갖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인 한, 감정을 극복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돈 벌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군중심리가 남아 있는 한, 홀로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역발상 투자자들에게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레이엄과 도드가 햄릿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렇게 선언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기질과 판단력의 조화를 이룬 덕에, 운명의 여신 손에 휘둘려 멋대로 소리 내는 피리가 되지 않는 사람은 복되도다." - 햄릿, 3막2장

 

 

아무리 정교하게 분석해도 주식의 매력도나 실제가치에 대해서 믿을만한 결론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개별종목에 대해서는 실적분석을 통해서 상당히 자신 있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례적인 주식의 경우에만 분석이 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일반 주식은 분석하더라도 투기에 도움이 될지 불확실하며, 무리해서 억지로 분석하면 사람들은 현옥하는 기법이 될 뿐이다.

 

 

주식분석에 걸림돌이 된 두 요소는 1) 유형자산의 안정성 상실과 2) 무형자산의 중요성 증대다.

 

 

투기주식은 1)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음, 2) 이익이 적고 불규칙함, 3) 주식이 희석됨(실제로 사업에 투자된 자본보다 주식발행량이 지나치게 많음)

 

우량주식은 1) 계속해서 배당금을 지급함. 2) 이익이 상당히 안정적이고 평균적으로 배당금보다 훨씬 많음. 3) 실제로 사업에 투자된 자본이 주식의 시장가치보다 많음.

 

과거의 주식투자의 세 가지 기본 개념 1) 적절하고 안정적인 배당수익률, 2) 적절하고 안정적인 이익 실적, 3) 충분한 유형자산.

 

 

새 시대의 투자이론, 이익추세....

새 시대 이론을 받아들인 투자신탁 원칙... 1) 불황기에 저가로 사서 호황기에 고가로 판다. 2) 여러 분야와 여러 국가에 걸쳐 분산투자한다. 3) 종합적이고 전문적인 통계조사를 바탕으로 저평가된 개별종목을 발굴하여 사들인다.

 

 

안전마진 원칙에 의한 종목선정

  • 전반적인 시장 등락을 이용하는 기법... 1900년 이후 주가가 너무 높거나 낮은 모습이 거듭 나타나므로,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사서 나중에 가치보다 높은 가격에 팔 기회가 되풀이되는 셈이다. 가장 간단한 투자방법은 과거 시장 등락의 대략 중간 지점을 잇는 직선을 그은 다음, 이 직선 아래에서 매입하여 직선 위 어느 지점에서 매도하는 것이다. 아마 이 "시스템"도 다른 기법만큼 현실적이지만, 더 과학적인 기법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시스템은 다음과 같이 다듬을 수 있다. 1) 선도업종 주식으로 잘 분산된 포트폴리오를 구성한다. 2) 현행 장기금리를 바탕으로 평균이익을 자본화하여 "정상" 가치를 산출한다. 3) 이 정상가치의 일정 비율 밑에 매수 지점을 설정하고, 일정 비율 위에 매도지점을 설정한다. (매수와 매도 규모를 점진적으로 축소하거나 확대할 수도 있다.) 이런 기법에는 타당한 논리가 들어 있다. 오랜 역사를 돌아보아도, 시장이 침체했을 때 사서 대중이 낙관할 때 팔아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법 어딘가에 문제가 있음을 곧 눈치 챘을 것이다. 결함이 무엇일까? 이 기법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시장 흐름의 일반 패턴은 예상할 수 있지만, 매수 지점과 매도 지점 설정은 트릴 수 있으며, 시장이 극단으로 치우칠 때 거래 기회를 놓칠 수 있다. 둘째, 시장 흐름은 언제든 크게 바뀔 수 있으므로, 과거에 효과를 발휘했던 기법이 가치를 상실할 수 있다. 셋째, 이 기법을 실행하려면 불굴의 용기가 필요하다. 대개 심리적으로 사고 싶을 때 팔아야 하고, 팔고 싶을 때 사야 하며, 산 다음 주가가 떨어지는 모습이나, 판 다음 주가가 더 오르는 모습을 장기간 지켜보아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단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불굴의 용기를 갖춘 사람에게는 추천할 만한 기법이다.

  • 저평가 증권 발굴 기법... 거래가격보다 가치가 훨씬 높은 것으로 분석되는 종목을 사는 방법도 있다. 질적인 요소가 모두 만족스러운 동시에 이익, 배당금, 자산 등 양적 요소에 비해서도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주식은 드물다. ...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질문은, 양적 기준으로 싸면서도 미래 전망이 평균 수준에 이르는 주식에 투자할 수 있느냐이다. 이런 주식은 비교적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성장전망이 이례적으로 좋은 기업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이 이렇게 성장요소를 강조하는 탓에, 역사도 유구하고, 재정도 건전하며, 산업이 선도기업이고, 미래에도 계속 존속하면서 끝없이 이익을 벌어들일 기업인데도, 투기적 매력이나 성장 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시장에서 차별받아, 사업가가 비상장기업을 살 때 치를 가격보다도 낮게 거래되는 주식이 매우 많다.

 

주식시장은 저울이 아니라 투표소다. 미래 주가는 건전한 예측의 영역이 아니다. 가격이 잘못되면 최고의 기업을 사도 투기가 될 수 있다. 수익력이 유지될지 평가하려면 사업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는 말하기는 쉬워도 실행하기는 어려운데, 인간은 본성상 남들과 함께 가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투자와 투기는 구분해야 한다. 경영자가 부도덕한 회사에는 절대 투자하지 마라. 이익에서 일회성 항목은 빼야 한다. 자본구조에서 부채비율을 높이면 수익률도 높아지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시장은 먼저 오른 다음에 이유를 찾는다.

 

 

투자 이론에서 수익력 개념은 명확하고도 중요하다. 이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장기간의 실제이익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리라는 기대를 나타낸다. 이런 실적은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야 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실적은 한 번 나타날 때보다는 거듭 나타날 때 더 인상적인 법이고, 둘째, 장기간에 걸친 평균 실적을 사용하면 경기순환이 미치는 왜곡 효과를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멋대로 흩어진 숫자들을 단순히 계산해서 나온 평균과, 연간 실적이 확실히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는 최빈치 성격의 평균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전환사채, 주식 매입 선택권, 기타 참여특권 등으로 희석될 수 있는 주식의 내재가치는, 이런 권리가 모두 행사되었을 때 산출되는 가치보다 높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이 <증권분석>을 읽고 존중한다면, 그 원칙을 실천하는 사람은 왜 이렇게 적을까? 나는 인간의 세 가지 본성 때문이라고 믿는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며, 탐욕을 부리는 세 가지 본성 말이다.

긴 시간을 들여 세심하게 분석해도, 대규모로 투자할 만큼 명확한 결론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따분함을 무릅쓰고 수많은 회사를 조사해 보아도, 대부분 특별하지도 않고 크게 저평가 상태도 아니다. 투자를 신중하게 해놓아도, 주가는 늘 제자리걸음인 듯하고 심지어 하락하기도 한다. 이는 회사이 가치가 1년 52주, 매주 5일, 매일 6.5시간씩 주가로 나타나 잦은 매매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합리적 투자로 가는 두 번째 과제는, 주식시장이 극도로 우울해지거나 도취감에 휩싸이더라도 자신의 논리적 확신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비상장회사 소유주들은 단기적인 기업가치 등락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장회사 주식 투자자들은 전혀 달라서, 주가가 오르면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주가가 내리면 자신이 바보라고 생각한다. 투자한 회사가 고전하거나 주가가 연거푸 하락하면, 우리 회사에서는 일단 투자할 때 세웠던 논리적 근거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자신을 의심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면, 한때 기회로 보였던 모습이 재앙으로 돌변한다. 그레이엄과 도드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다. "대중의 유행에 거슬러서 생각하고 행동하려면 강인한 성품이 필요하고, 몇 년 걸릴지도 모르는 기회를 기다리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세 번째 과제는 항상 투자자들의 행동을 왜곡하는 탐욕을 극복하는 일이다. 헤지펀드가 급증하는 모습을 보면, 특히 요즘 시장에 탐욕이 넘친다. 헤지펀드투자자들은 최근 인기 펀드매니저를 붙잡으려고 이 펀드 저 펀드로 계속 갈아탄다. 펀드매니저들은 높은 보수를 얻으려고 "단기 대박" 트레이딩 전략을 추구한다. 투자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워도 높은 수익률을 약속하면 열광하므로, 펀드 실적이 좋아지면 더 많은 자금이 몰려든다.

투자자들은 이 펀드에서 저 펀드로 재빨리 갈아타고, 헤지펀드매니저들은 매달 홈런을 날리려고 안감힘을 쓴다. 나는 전미 오픈 골프 선수권대회에 가본 적이 있는데, 가까이에 내가 모르는 헤지펀드매니저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내내 사업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순전히 운용자산 규모와 보수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

요즘 대중은 단발적인 데이터, 수시로 바뀌는 최근 경기전망, 최근 조사보고서에 실린 의견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정보가 넘침으로 사람들은 주식을 신속하게 사고팔며, 스스로 열심히 분석하여 결론을 내리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수익률을 과감하게 부채를 끌어다 쓰는 수많은 사람을 "트레이더"나 "투기자"로 불러야 할 듯한다. 이런 방식에서는 잦은 매매에서 거래비용을 차감하고서도 이익을 내야 하며, 장기 투자자보다 훨씬 높은 자본이득세를 내야 한다. 이들은 감정이 상하고 찢어지는 값비싼 대가도 치러야 한다.

훌륭한 기업에 투자하면 마음 편하게 휴가를 보내거나 가족생활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확신도 없이 수많은 거래를 해야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부채를 쓰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기법은 언젠가 크게 실패하기 쉬운데, 고객의 돈에 자기 돈까지 태워서 투자하는 사람들은 이런 위험을 감당하기 어렵다.

 

 

대체로 유동자산가치가 장부가치(유동자산가치+고정자산가치)보다 더 중요하다. 

  • 유동자산가치는 청산가치를 개략적으로 알려주는 지표다.

  • 유동자산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주식이 많다. 이는 청산가치보다도 낮게 거래된다는 뜻이다.

  • 많은 주식이 계속해서 청산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현상은 본질적으로 불합리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심감한 잘못이 있다는 뜻이다. a) 시장의 평가 오류, b) 경영진의 정책 오류, c) 주주들의 잘못된 태도.

 

시장이 증권을 평가하는 과정은 비합리적이고 잘못된 경우가 많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는 기계적 과정이 아니라 증권을 사고파는 사람들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리과정이다. 따라서 시장에서 발생하는 실수는 집단이나 개인들이 저지르는 실수다. 대부분 실수를 일으키는 원인은 세 가지로서, 과장, 지나친 단순화, 무지다.

 

 

분석을 통해서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사례는 흔치 않으므로, 많은 종목을 분석해야 유망한 종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종목을 발견하려면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체계적으로 열심히 분석해야 한다. 분석가가 쓰는 기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앞 챕터에서 설명했듯이, 기업들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비교분석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각 집단의 표준 속성을 파악할 수 있으며,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는 기업들을 찾아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철강회사 보통주의 주가 대비 이익 비율이 업종 평균의 두 배로 드러난다면, 이 회사의 주요 질적/양적 요소들을 철저하게 조사할 수 있다. 이 기법은 채권과 우선주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법정관리 철도회사 채권을 고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위가 비슷한 법정관리 철도회사 채권 10여 종을 모아서 실적을 비교분석하는 것이다. 또는 공익회사 우선주 중에서 종목을 선정한다면, 1) 배당금+이자 보상비율, 2) 주가 대비 가치 비율, 3) 주가와 수익률을 비교분석할 수 있다. 이렇게 간단히 유형별로 분석하기만 해도 평균보다 안전하면서도 수익률이 높은 종목이나, 실적과 비교해서 가격이 지나치게 높은 종목을 가려낼 수 있다.

둘째, 기업보고서를 정밀하게 조사하여 그 회사 주식이나 채권의 시장가격과 비교분석하는 방법이다. 이런 기업보고서의 요약자료는 여러 일간신문에 실린다. 더 종합적인 자료는 금융서비스 회사에서 제공하는 일일 기업보고서 자료나, 주간지인 <커머셜 앤드 파이낸셜 크로니클>에서 찾을 수 있다. 기업보고서 100개 정도를 훑어보면 이익이나 유동자산 측면에서 흥미로운 기업이 5~10개 나타나므로, 이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면 된다.

 

 

시장분석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있다. 첫째는 과거 주가 자료만을 바탕으로 시장을 예측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경기현황, 이자율, 정치전망 등 온갖 경제 요소들을 모두 고려하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시장 움직임도 수많은 요소 가운데 하나로 간주한다.) 첫째 방법을 잘 요약하는 말이 "시장예측은 시장이 가장 잘한다."라는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시장 움직임은 개별종목이나 평균주가의 움직임을 차트에 표시하여 분석한다. 주로 주가 움직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을 "차티스트"라고 부르며, 이들이 하는 작업을 "차트 분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시장분석은 시장 움직임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아, 증권 분석까지 결합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일반경제지표가 보완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할 여지가 많아서, 시장 움직임을 나타내는 기술적 지표들을 해석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런 지표들을 외부 요소들과도 대조해야 한다. 그러나 시장분석기법으로 가장 유명한 "다우 이론"은 시장 움직임만 분석한다. 

 

 

차트 분석의 의미

  • 차트 분석은 과학이 될 수 없다. 차트 분석이 과학이라면, 규칙에 따라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그러면 누구나 내일의 주가를 예측할 수 있고, 따라서 누구나 정확한 시점에 주식을 사고팔아 계속 돈을 벌 것이다.

  • 차트 분석은 확실하게 이익을 내는 방법임을 지금까지 입증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성공할 수 없다.

  • 차트 분석의 이론적 근거는 논리가 잘못되었거나 단순한 주장에 불과하다.

    • 차트 분석의 이론적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시장 움직임은 이해 관계자들의 활동과 태도를 반영한다. 2) 따라서 시장의 과거 움직임을 분석하면 시장의 미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 ... 이 가정은 옳을지 몰라도, 이 결론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 차트 분석이 인기를 얻은 것은 단순한 투기보다 장점이 있기 때문이지만, 이런 장점도 차트 분석자들이 증가하면 감소하게 된다.

 

 

증권분석은 시장분석보다 장점이 많아서, 지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성공하기 더 쉬운 분야다. 증권분석에서는 예기치 않은 사건에 대비하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안전마진을 확보하여 위험에 대비한다. 그러면 우리가 투자한 증권이 생각했던 것보다 매력이 떨어지더라도, 여전히 이익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시장분석에는 안전마진이 없다. 맞든지 틀리든지 둘 중 하나인데, 틀리면 손실이 발생한다. 손실은 짧게 끊고 이익은 길게 가져가라는 시장분석의 원칙을 따르다 보면, 거래가 빈번해진다. 이는 거래비용이 실적에 큰 부담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증권분석의 원칙을 따르면 빈번하게 거래할 필요가 없다. 세 번째로, 시장분석은 본질적으로 두뇌싸움이기 때문에 불리하다. 트레이딩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대부분 다른 트레이더를 희생시켜서 얻는 돈이다. 트레이더들은 활발한 종목을 선호하는데, 이런 종목의 가격변동은 수많은 트레이더가 빈번하게 매매한 결과다. 시장 분석가는 다른 시장 분석가보다 더 똑똑하거나 운이 좋은 경우에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반면에 증권 분석가는 다른 증권 분석가와 경쟁 관계가 아니다. 자신이 분석해서 사는 종목을 다른 증권 분석가가 애써 분석한 다음 파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증권 분석가는 시장 분석가보다 다루는 종목이 훨씬 많다. 이렇게 많은 종목 가운데서 시장의 무관심이나 과민반응 때문에 내재가치보다 훨씬 떨어진 종목을 고른다. 시장분석이 증권분석보다 더 쉽고, 단기간에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장기적으로 더 실망하기 쉽다. 월스트리트든 다른 어떤 곳이든, 쉽고 빠르게 돈 버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증권가에 나오는 분석과 조언 대부분은 기업의 단기전망에 근거한 내용이다. 사람들은 이익이 증가할 전망이면, 실제로 이익이 증가할 때 주가도 상승할 것이므로 주식을 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추론방식은 증권 분석가나 시장 분석가나 똑같다. 이들은 시장 전망이 사업 전망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로 단기전망이 좋다는 이유로 주식을 산다면, 투기 종목을 고르기 십상이다. 문제는 현재 주가에 미래 전망이 이미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전망은 실제 이상으로 낙관적인 경우가 많다. 내년 이익이 증가하리라는 기대로 주식을 산다면, 두 가지 위험을 떠안게 된다. 첫째, 내년 실적전망이 틀릴 수 있다. 둘째, 전망이 맞더라도, 이 전망이 현재 주가에 그 이상으로 반영되었을 수 있다.

 

 

소액 투자자의 투자 정책에 대한 견해 

  • 고정수익투자. 현재 상황에서 개인이 안전하게 소득을 확보하는 유일하게 합리적인 투자는 미국저축채권을 사는 방법이다. 다른 투자상품은 수익률이 더 높지도 않을뿐더러, 이 상품만큼 손실을 방어해주지도 못한다. 일반 채권과 우선주가 겉으로는 수익률이 높아 보이지만, 확실히 그만큼 위험도 많다. 다양한 저축제도와 판매직원들이 권유하는 증권에는 함정이 많다. 수익률이 높다는 이들의 설득에 넘어가서 미국저축채권 대신 그런 상품을 선택한다면, 나중에 후회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 매매차익 획득

    • 장기 기준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시장이 분명히 침체했을 때 대표적인 우량주를 산다. 이 방법에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심각한 착오를 저지를 위험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좋은 실적을 올리는 방법이다.

    • 성장 가능성이 큰 개별종목을 실적과 비교해서 합리적인 가격에 산다. 성장전망이 밝은 종목은 가격이 합리적일 때가 드물다. 소외된 종목 중에서 성장전망이 밝은 종목을 발굴하면,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이 전망이 틀리면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 안전성 높은 선순위증권을 산다. 매우 안전하면서 전환가치도 높은 종목은, 드물긴 하지만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인내력과 끈기를 갖춘 투자자라면 이런 종목을 발굴하여 좋은 실적을 올릴 수 있다.

    • 내재가치보다 훨씬 싼 증권을 산다. 내재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에는 과거 이익과 유동자산가치뿐 아니라, 보수적으로 추정한 미래 수익력도 포함된다. 오늘날 보통주 대부분이 인기를 상실하여 미래 수익력 기준으로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하므로, 분별력 있는 투자자에게는 정말로 좋은 기회다. 채권, 우선주, 보통주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다.

  • 투자자는 자신이 원하면 투기자가 될 권리도 있다. 또한 나중에 후회할 권리도 있다. 투기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성공확률도 재각가이다.

    • 신생 벤처기업 주식을 산다.

    • 트레이딩.

    • 높은 가격에 "성장주"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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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느리고 단순한 삶! 그 속에 여유가 있고, 여유 가운데 주변을 둘러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친밀감을 형성하고 현재를 즐길 수 있다.

 

 

[본문발췌]

 

 

감정은 "설명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 - 곰돌이 푸

 

 

'휘게'는 사물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정취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느낌과 관련이 있다. 집에 머무는 느낌, 안전한 느낌,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 그래서 긴장을 풀어도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이때 우리는 삶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끝없이 대화를 이어가거나, 서로 아무 말 없이 안온한 기분에 휩싸이거나, 아니면 혼자서 조용히 차 한 잔을 음미하게 된다.

 

 

국내총생산(GDP)은 어린이들의 건강과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감안하지 않는다. 국내총생산은 시의 아름다움이나 결혼의 영향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공개토론에서 다뤄지지 않는 주제들이나 공무원들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요컨대 국내총생산이 측정하는 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 로버트 케네디

 

 

의외로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회적 지지'다. 사회적 지지는 간단히 말하자면 어려운 시기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 좋은 대인관계는 행복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거꾸로 행복한 마음 덕분에 좋은 대인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휘게는 간소한 것, 그리고 느린 것과 관련이 있다. 휘게는 새 것보다는 오래된 것,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 자극적인 것보다는 은은한 분위기와 더 가깝다. 여러 면에서 휘게는 '느리고 단순한 삶'의 덴마크인 사촌이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잠옷을 입고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는 것, 좋아하는 차를 마시면서 창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것, 여름휴가 기간에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모닥불을 피우는 것 모두 휘게다. 단순함과 겸손함은 휘게의 중요한 미덕일 뿐만 아니라 덴마크의 디지안과 문화 전반의 미덕이기도 하다. 덴마크의 디자인은 단순함과 기능성이 매우 뛰어나다.

 

 

휘게는 삶의 단순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

 

 

좋은 분위기나 유대감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바쁠 때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휘게할 수 없다. 친밀감을 형성한다는 것은 시간을 들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과 뭔가를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휘게는 돈을 더 많이 소비함으로써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된다고 할 수 있다. 휘게는 시장 자본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개인의 행복에는 매우 좋은 영향을 끼친다. 휘게는 삶의 가장 단순한 것에서 느끼는 기쁨이며 거의 아무런 비용 없이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휘게는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데서 오는 소박한 즐거움의 순간을 누리는 것이다.

 

 

휘게는 현재를 만끽하는 것이며 현재로부터 최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무언가를 만끽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감사함이란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음을 유념하고, 그 순간에 집중하며, 현재 누리는 삶을 감사히 여기고, 가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돌보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 뿐만 아니라 남을 기꺼이 돕고자 하는 마음도 더 크며 또한 덜 물질적이라고 한다.

연구 결과 감사하는 마음은 심리적, 신체적, 사회적으로 유익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 일기를 적은 사람들은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향상되었고, 어떤 일을 할 때 열의를 갖고 임했으며, 숙면을 취했고, 면역력의 강해졌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도 더욱 빨리 알아차렸다.

 

 

인간의 감정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물이나 현상, 특히 긍정적인 사물이나 현상에 빠르게 적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똑같은 사고방식에 갇히는 일을 경계하고 감사해야 할 새로운 일들을 계속해서 떠올려야 한다. 

 

 

휘게는 단순한 즐거움을 만끽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휘게를 실천한다면 우리가 매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휘게는 현재를 최대한 만끽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의 행복을 계획하고 과거의 행복을 추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휘게 10계명>

    • 분위기. 조명을 조금 어둡게 한다.

    •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충실한다. 휴대전화를 끈다.

    • 달콤한 음식. 커피, 초콜릿, 쿠키, 케이크, 사탕. 더 주세요!

    • 평등. '나'보다는 '우리'. 뭔가를 함께하거나 TV를 함께 시청한다.

    • 감사. 만끽하라, 오늘이 인생 최고의 날일지도 모른다.

    • 조화. 우리는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당신을 좋아한다. 당신이 무엇을 성취했든 뽐낼 필요가 없다.

    • 편안함. 편암한을 느낀다. 휴식을 취한다. 긴장을 풀고 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휴전. 감정 소모는 그만. 정치에 관해서라면 나중에 얘기한다.

    • 화목. 추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관계를 다져보자. "기억나? 우리 저번에..."

    • 보금자리. 이곳은 당신의 세계다. 평화롭고 안전한 장소다.

 

행복했던 순간에는 늘 누군가 함께 있었다.

 

 

덴마크 사람들이 휘겔리한 저녁을 준비할 때 구성원 모두가 일을 평등하게 분담한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인 혼자 부엌에서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보다는 모두가 각자 자기 몫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더욱 휘겔리하다.

 

 

유엔자문 기구가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기본적인 생활 요건을 갖추는 것이 우선적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생활 요건이 충족된 후에는 행복은 소득보다는 인간관계의 질에 더욱 크게 좌우된다."고 한다.

 

 

놀이. 우리는 어렸을 때는 놀이를 사랑하지만 어째서인지 어른이 되면 놀이를 그만둔다. 어른이 되면 삶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바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린스턴대학교의 경제와 사회 문제학과 앨런 크루거 교수가 이끄는 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는 여가활동을 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어른들이 문제점은 어떤 활동을 할 때 그 결과와 목적에 너무 연연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일을 하고, 몸무게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헬스클럽에 가며, 인간관계는 확장하고 출세하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을 만난다. 그저 재미있기 때문에 뭔가를 하던 시절은 어디로 갔을까?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 자체가 너무 오래 되었다면 '공부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속담을 떠올려보자.

 

 

휘게는 여러 가지 책임을 짊어지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 어른들을 너그럽게 안아준다. 좀 여유를 갖자. 잠시만이라도 말이다. 휘게는 단순한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하고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이라고 안심시켜준다.

 

 

부정적인 감정이 없는 상태보다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 삶의 만족도 측면에서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행복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커다른 행운이 아니라 매일 발생하는 작은 친절이나 기쁨 속에 있다." - 벤자민 플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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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정체성,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누군가는 고통이다.

 

 

[본문발췌]

 

 

도대체 '병의 본질'이라든가 '새로운 병'이란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의사는 자연학자와는 달리 다양한 생명체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을 이론화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 아이비 맥킨지

 

 

P선생이 장갑을 장갑으로 보고 판단할 수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비록 인지적인 가정은 잘했지만 인지적인 판단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판단이란 것은 직관적이고 개인적인 동시에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접할 때 그것을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 P선생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보는' 능력 즉 관계를 짓는 능력이었다. 

 

 

물론 뇌는 하나의 기계이자 컴퓨터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고전 신경학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할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 판단이나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을 등한시하고 완전히 추상적이고 계량적으로만 변해가는 과학이 장차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경고 말이다.

 

 

우리는 다리나 눈을 잃으면 다리가 없고 눈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 사실 자체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을 깨달을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물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너무도 단순하고 친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늘 눈앞에 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법이다. - 비트겐슈타인

 

 

'상실' 즉 기능적 결함에만 주목하는 한 그것이 지극히 편협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능의 과잉도 있을 수 있다면, 결손에만 주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기억상실증뿐 아니라 기억과다증도 있는 것이다. 인식불능증과 반대하는 인식과다증도 있다. 이밖에도 '과다현상'은 얼마든지 많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갖가지 건강 상태 사이를 왔다 갔다 했고 지금도 그것을 계속하고 있다. 병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 없다고조차 말할 수 있다. 지독한 고통을 극복했을 때야말로 정신은 궁극적으로 해방된다." - 니체

 

 

우리는 각자 오늘날까지의 역사, 다시 말해서 과거라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연속하는 '역사'와 '과거'가 각 개인의 인생을 다룬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생 이야기, 내면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이야기에는 연속성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전기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 자신을 통해, 우리들 안에서 즉 지각, 감각, 사고,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무의식중에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물론 입으로 말하는 이야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로서 우리 모두는 각각 고유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지금까지의 이야기인 내면의 드라마를 재수집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 편의 이야기 즉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감히 말한다면.... 우리는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차례차례 이어지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흘러간다.', 흄의 생각대로라면 개인의 정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각 혹은 지각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인간은 그저 계속해서 변화하기만 하는 감각의 집합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해 통일을 유지하는 확고한 존재이다. 그러나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처럼 불안정한 존재의 경우에는 흄의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분명히 그들의 생활은 어느 정도 왔다 갔다 하는 발작적인 지각과 움직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알맹이를 이루는 이성도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영처럼 동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흄이 말한 거품과도 같은 존재이다. 철학적 신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자아가 충동에 의해 압도당하는 경우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다. 충동에 압도당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적인 운명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프로이트적인 운명의 경우에는 비극적이기는 해도 이성(의식)이 존재하는 반면에 흄적인 운명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진정한 인간, 어디까지나 '개체' 다운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충동과 싸워야 한다. 투렛 증후군 환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무시무시한 장벽에 직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야말로 '경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들은 싸움에서 승리한다. 살아가는 힘,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의지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충동이나 병보다도 강하다. 건강, 싸움을 겁내지 않는 용맹스런 건강이야말로 항상 승리를 거머쥐는 승리자인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환영이 하찮고 꺼림칙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지고한 황홀감에서 나오는 영감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예를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간질 증세가 있던 그는 황홀감에서 나오는 아우라를 자주 경험하곤 했다. 그에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경험이었다. '불과 5, 6초밖에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영원한 조화와 존재를 느낀다. 놀랍도록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를 황홀경에 휩싸이게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다. 만약 이러한 상태가 5초 이상 지속된다면 우리의 영혼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고 소멸될 것이다. 이 5초 동안 나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전체를 산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내 모든 생명을 걸수도 있을 것이고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것이다.'

 

 

자연 만물의 본래 모습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오히려 반대이겠지만, 신경학자들은 '구체성, 구체적인 사상'을 열등하고, 고려할 가치가 없고, 통일성이 결여되었고, 퇴보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체계화, 조직화에 관한 한 당대 제일인자로 불렸던 쿠르트 골드스타인 등은 인간의 정신에 추상화와 분류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단 뇌에 손상을 입으면 인간은 고상한 영역으로부터 인간적이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차원 낮은 '구체성'의 수렁으로 내동댕이쳐진다고 생각했다. 만일 인간이 '추상적, 범주적 태도' (골드스타인) 혹은 '명제적인 사고력' (휴링스 잭슨)을 잃으면 도리없이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며, 중요성도 없고 관심의 대상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구체성이야말로 기본이다. 현실을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것으로, 개인적이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구체성'이다. 만일 '구체성'을 상실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철학자는 우주에 내재한 교향곡의 메아리를 자기 내부에서 들은 뒤, 이를 관념의 모습으로 뒤바꾸어 다시금 외부세계로 투사하려는 사람이다." - 니체

 

 

인간의 영혼은 그 사람의 지능이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물리학자나 수학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여기서 말하는 조화의 감각이 주로 지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지적이라고 해서 감각적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감각이 전혀 뒤섞이지 않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각(sense)이란 단어는 항상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감각적'(sensible)이란 단어는 '개인적'(personal)이란 뜻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과 어떤 점에서든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폐증 환자는 원래 좀처럼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립적으로 살아갈 '운명'에 놓인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에게는 독창성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들의 내면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들의 독창성은 내부에서 생긴 것,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완전히 내부로 향하는 존재, 독창성이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라를 생각이 강하게 든다.

 

 

성공의 비밀은 좀더 특별한 곳에 있다. 모츠기는 이 지능 낮은 예술가를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기로 했다. 상대를 위해서 몸을 내던지는 헌신,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모츠기는 이렇게 말했다. "야나무라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서 내가 한 일은, 그의 영혼을 내 영혼으로 여기는 일이었다. 교사는 아름답고 정직한 저능아 학생을 사랑하고, 그들의 밝은 세계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 C. C. 파크, <나디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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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사람은 모르는 것the unknown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the known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본문발췌]

 

 

죽음은 놀라운 어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삶이 그런 것처럼.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슬픔, 괴로움, 고민, 기쁨, 터무니없는 생각들, 재산, 시기심, 사랑, 외로움이라는 마음 아픈 불행 - 이 모두가 삶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을 전체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는 것처럼, 그중 파편 하나만 취해서 그 파편으로 살지 말고요. 바로 그렇게 삶을 이해하는 가운데에 죽음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그 둘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삶의 움직임을 전체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를 매우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간, 슬픔, 그리고 죽음입니다. 시간을 이해하는 일, 슬픔이 지닌 진짜 중요한 의미를 충분히 납득하는 일, 그리고 죽음과 함께하는 일 - 이것들 모두가 명료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어떤 이론도, 이상도 아닙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랑은 가르쳐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법이라는 과목을 수강할 수도 없고, 사랑이 뭔지 알게 될 때까지 날마다 연습해서 배울 방법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진 의미를, 슬픔이 가진 놀라운 깊이를, 그리고 죽음과 함께 오는 순수함을 정말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고 쉽게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본성, 슬픔의 특성이나 구조, 그리고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놀라운 것을, 이론적으로나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닙니다. 시간을 이해하면 죽음이 뭔지 이해하게 되고, 슬픔이 뭔지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을 슬픔이나 죽음과는 분리된 것으로 여기고 따로 떼어서 본다면, 우리가 접근하는 방법은 단편적인 것이 될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사랑이 가진 놀라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맙니다.

 

 

삶을 조각조각 나뉜 것으로 다루면 끊임없는 혼란과 모순, 불행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삶의 전체성을 보아야 하는데, 애정이 있을 때에만, 사랑이 있을 때에만 삶의 전체성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질서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혁명입니다. 수학, 의학, 역사, 경제학에 대해서 더욱 더 많은 지식을 얻고, 그런 다음 그 지식 조각들을 한데 모으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하지요. 사랑이 없으면, 혁명은 국가에 대한 섬김으로, 이미지에 대한 섬김으로, 또는 무수히 많은 전제적인 부패와 인간에 대한 파괴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두려움을 느껴서 죽음을 일상 삶과 멀리 떼어놓으면, 그 분리는 더 많은 두려움과 불안을, 그리고 몇 배나 더 많은 죽음에 대한 이론들을 키워갈 뿐입니다. 죽음을 이해하려면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삶은 생각이 연속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든 불행을 키우는 것이 바로 이 계속성continuity이지요.

 

 

사랑이 그런 것처럼, 죽음은 삶의 순간순간 여기 있습니다. 일단 이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여러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모르는 것the unknown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the known을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가족을 잃을까봐, 친구들도 없이 혼자 남겨질까봐 두려워합니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자신이 축적해놓은 경험들과 재산이 없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놓아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건 바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은 기억이며, 마음은 그 기억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기억은 단지 기계적인 것일 뿐입니다. 컴퓨터가 그걸 아주 잘 증명하고 있지요. 죽음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그때 죽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마음이 신선해지고 새로워져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면 죽음이라 불리는 그 상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생각을, 그리고 슬픔을 이해하며, 그런 사람만이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코 축적하지 않고, 결코 경험을 모으지 않으면서 순간순간 죽는 마음은 무구하며, 그래서 늘 사랑의 상태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이란 몸, 특성, 저항, 장애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고,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지만, 생각하고 감정을 느낌에 있어 자유로운 사람, 저항이나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불멸을 알게 될 겁니다. 갈망하는 것들, 움켜쥐고 있는 것들, 바라는 것들이 여러 층위를 이루며 쌓여 있는 것에 불과한 자기 자신 한계, 자기 자신 인격이나 개성을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멸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만일 여러분이 생각에서 자유롭다면, 만일 여러분이 그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을 통해 주의 깊음을 통해 그 강렬한 불꽃을 통해 꿰뚫어보았다면, 불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완벽한 조화이며, 그것은 '사랑 길'이나 '슬픔 길'이 아닌, 그 안에서는 모든 구분이 사라진 길입니다.

 

 

우리는 오직 시간이라는 관점에서만,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끝남이 있을 것이고, 죽음이 있을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사물을 선명하게,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구체적으로 보게 될 겁니다. 우리는 끝난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는데, 그건 우리 마음이 계속성을 추구하고, 가족 안에서, 재산에서, 우리 직업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오직 안전에 대한 탐욕스런 추구에서 벗어난, 계속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계속성이라는 과정에서 벗어난 마음만이 불멸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일신의 불멸을 얻으려 애쓰고 있는 마음, 지속하고 싶어 하는 '나'는 불멸이 무엇인지 절대 알지 못합니다. 그런 마음은 두려움과 죽음에 들어 있는 중요한 의미를 모를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절대 하루 안에 마무리 짓지 않고, 단 하루만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 ... 우리는 언제나 내일 아니면 어제에 살고 있지. 누군가가 오늘이 끝나면 너도 죽게 될 거라고 말한다면, 넌 어떻게 하겠니? 그날 하루를 풍요롭게 살지 않겠니? 우리는 하루를 풍요롭고 완전하게 살지 않는다. 우리는 그날을 찬미하지 않아. 언제나 내일은 뭐가 될까, 내일 끝낼 크리켓 경기, 6개월 안에 끝낼 시험, 어떻게 하면 음식을 즐길까, 어떤 옷을 살까 등등, 언제나 내일 아니면 어제를 생각하지. 그러니 결코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린 잘못된 의식으로 언제나 정말로 죽어가고 있는 거야. 만일 우리가 단 하루를 살고 그날과 함께 죽으며 또 다른 날을 마치 신선하고 새로운 날인 것처럼 다시 시작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우리가 획득한 모든 것들, 모든 지식, 모든 기억, 모든 다툼을 날마다 멈추는 것, 그것들을 다음날로 가져가지 않는 것 -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 설사 끝남이 있더라도, 새로 태어남이 있다는 말이다.

 

 

두려움은 실상에 대한 무지이며, 우리 삶은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상태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명상은 삶을 이해하는 것인데, 그것이 질서를 가져옵니다. 질서는 덕이고, 덕은 곧 빛입니다. 이 빛은 다른 사람에 의해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유식해도, 아무리 영적이라 해도 말입니다. 지상에서든 천국에서든 자신만이 이해와 명상에 빛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비어 있고, 그 비어있음emptiness, 空에서 여러분은 관찰하고 이해하며, 그러면 사는 일이 곧 죽는 일입니다. 계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창조적일 수 없습니다. 오직 끝나는 것만이 창조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삶이 또한 죽음이기도 할 때 사랑이 있고, 진리가 있고, 창조가 있습니다. 죽음은 모르는 것이고, 진리와 사랑과 창조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달리는데,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죽음이며,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넓은 틈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 영역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알고 있는 것에 매달리곤 합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알고 있는 것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며, 거기에 안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전이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확실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영속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살펴보면 그것은 영속하지 않고, 그것은 완전히 불확실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에 매달립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과거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이 진실을, 즉 죽음은 여러분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그것이 미래든, 여러분 얼굴이든, 이상이나 그 밖의 것들이든 간에) 끝나는 일이라는 걸 알 때, 죽음이라 불리는 이 아득히 먼 것을 삶이라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가져온 것이며, 그것은 곧 여러분 집착을 끝낸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일, 과거에 사로잡힌 마음이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놀랍도록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됩니다. 그 마음은 과거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날마다 완전히 끝내기 위해 마음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건 엄청난 행동이죠) 날마다 순간순간 여러분은 삶과 함께 그리고 죽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죽음처럼 몹시 복잡한 인간 문제에 대해 조사하려면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든 만일 선입견이나 믿음, 희망, 두려움이 있으면 관찰하거나 조사할 수 없습니다. 매우 진지하게 조사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왜곡하는 선입견이 없어야 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위안을 바라는 욕망 희망이 없어야 하며, 그런 것들이 모두 없어야 합니다.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완전히 비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 알아내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야생의 인간에게는 단순한 두려움 몇 가지만 있지만, 우리는 더 '문명화'되어 가면서 점점 더 복잡해지는 두려움을 셀 수도 없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초연해지려고 한다면, 반대로 더 집착하게 될 뿐이며 그래서 모순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이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집착을 통해 계속된다는 느낌에서도 자유로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왜 집착하시나요? 집착이 없으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 집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아내이며, 여러분은 여러분 은행예금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일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모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집착을 통해 계속된다는 이 느낌이 끝나면, 완전히 끝나면, 여러분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삶 끝에 있는 것, 우리 모두가 그 상태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순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 사랑, 미움, 기쁨, 즐거움... 그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 죽는 일이라고, 이런 죽음이 있어야만 새로 태어남이 있다고.... 죽음은 날마다, 순간순간,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내려놓는 거예요. 그게 죽음이예요. 죽음이 이런 거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지요? 어제를 오늘로 가져오지 말고, 오늘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는 게 죽음이예요. 날마다 죽는 게 죽음이에요. 다음날 아침 완전히 신선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게 죽음이고 삶이예요. 모든 것을,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태양을 날마다 신선한 눈으로 보는 것, 그 모든 것을 신선하고 무구한 눈으로 보는 게 삶이라고요. 그러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디 있겠어요? 그 둘은 항상 붙어 다니고, 늘 함께 있어요.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에요. 날마다 죽지 않으면 새로 태어남이 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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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삶 속에서 자신을 찾아야 하고, 그것은 편안하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중과 투쟁, 노력의 과정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본문발췌]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쪽에서 내가 원하는 생각을 할 수도 없거니와 내 쪽에서 원하는 것을 그가 생각하게 만들 수도 없어. 그러나 누군가를 잘 관찰할 수는 있는 것 같아. 그가 다음 순간에 무얼하게 될지 말이야. 그건 아주 간단해, 사람들이 그걸 모를뿐이야. 물론 연습이 필요하지. ...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주의력과 모든 의지를 어떤 특정한 일로 향하게 하면, 그는 그것에 도달하기도 하지. 그게 전부야. 네가 알고 싶었던 일도 정확하게 그래.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자세히 바라봐. 그에 대해서 그 자신보다 네가 더 잘 알게 돼.

 

 

생각이란, 우리가 그걸 따라 그대로 사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어. 너의 <허용된 세계>는 세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넌 알았어. 그리고 두번째 절반을 감추려고 했어.

 

 

우리들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 - 자기에게 금지되어 있는지. 금지된 것은 결코 할 수 없어. 금지된 것을 하면 대단한 악당이 될 수 있지. 거꾸로, 악당이라야 금지된 일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 - 사실 그것은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 속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 늘 그러게 마련이듯이 그런 사람은 살기가 쉬워. 다른 사람들은 운명을 자기 속에서 스스로 느끼지. 그들에게는 어느 명예 있는 남자건 날마다 하는 일들이 금지되어 있어.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폄하되는 다른 일들은 허용되어 있어. 그러니 누구나 자기 자신 편에 서야 해.

 

 

아무려나 어떤 목적으로 네가 지금 네 잔을 마시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 둘 다 알 수 없어. 하지만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피스토리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사물들이지. 우리가 우리들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지. 그들은 바깥에 있는 물상들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가 전혀 발언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행복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한 번 다른 것을 알면, 그때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겠다는 선택이란 없어져 버리지.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쉬워. 우리들의 길은 어렵고. 우리 함께 가보세"

 

 

우린 인간이야. 우린 신을 만들고 신들과 싸우지. 그러면 신들이 우리를 축복해.

 

 

그리고 여기서 갑자기 예리한 불꽃 같은 인식이 나를 불태웠다. 누구에게나 하나의 <직분>이 있지만, 그것은 그 누구도 자의로 택하고 고쳐 쓰고 그리고 마음대로 주재해도 되는 직분은 아니라는 것. 새로운 신들을 원한다는 것은 틀렸다. 세계에다 그 무엇인가를 주겠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기를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그 생각이 내 마음을 깊이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이 체험에서 얻은 열매였다. 나는 자주 미래의 영상들을 가지고 유희했었다. 어쩌면 시인으로 혹은 예언자로, 혹은 화가로 혹은 어떻게든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을 역할들을 꿈꾸곤 했었다.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짖기 위하여, 설교하기 위하여, 그림 그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시인으로 혹은 광인으로, 예언가로 혹은 범죄자로 끝장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건 궁극적으로 중요한게 아니었다.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반쪽의 얼치기였다. 시도를 벗어남이고, 패거리의 이상으로의 재도피이고, 무비판적 적응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새로운 영상이 무섭고도 성스럽게 눈앞에 솟았다. 수백번 예감했고 어쩌면 자주 입 밖에 내었지만 이제 비로소 체험한 것이었다.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에로, 어쩌면 무(無)에로 더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이미 많은 고독을 나는 맛보았다. 이제 예감했다. 더 깊은 고독이 있으며 그 고독은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스스로 갖겠다고 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운명뿐이었다.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다. 바깥에는 거리와 집들, 사람과 시설들, 도서관과 강의실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 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다. 여기에는 동화가, 꿈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생각과 대화 가운데서 자주 그 세계 한가운데에서 살았다. 다만 우리는 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선에 의하여 갈라져 다른 벌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다르게 바라봄에 의하여 갈려져 있었다. 우리의 과제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섬을 제시하는 것, 어쩌면 하나의 모범을, 아무튼 살아가는 다른 가능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내가, 오래 고립되어 있던 사람인 내가, 완전한 혼자임을 맛보고 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동체를 알게 되었다. 다시는 행복한 사람들의 연회를, 즐거운 사람들의 축제를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다시는, 다른 사람들의 연대를 보고 시샘이나 향수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나는 <그 표적>을 지닌 사람들의 비밀을 전수받았다.

 

 

표적을 가진 우리들은, 세상의 눈에는 이상한 사람들, 위험한 광인들로 비칠지도 몰랐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깨어난 사람들, 혹은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은 점점 더 완벽한 깨어 있음을 지향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 추구는, 그들의 의견, 그들의 이상과 의무들, 그들의 삶과 행복을 점점 더 긴밀하게 패거리에 묶는 것이었다. 그곳에도 노력은 있었다. 그곳에도 힘과 위대함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견해로는 우리 표적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것, 개별화된 것 그리고 미래의 것을 향한 자연의 뜻을 제시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고수(固守)의 의지 속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인류가,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하는 인류가 무언가 완성된 것, 보존되고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반면 우리들에게는 인류가 하나의 먼 미래,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고, 그 모습은 아무도 모르는, 그 법칙은 그 어디에도 씌어 있지 않은 미래였다.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돼요.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 에바 부인

 

 

오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 필요 있는 것은 겪게 되겠지요.

 

 

새로운 것이란 낡은 것에 매달린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겠지.

 

 

예전에 나는 한 인간이 하나의 이상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일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드문지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었다.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것은 개인적 이상, 자유로운 이상, 선택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떠맡겨진 공동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내가 인간을 과소평가했음을 알았다. 그렇게 봉사와 공동의 위험이 그들을 제아무리 제복을 입혀 획일화해 놓았어도 나는 많은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들이 운명의 의지에 눈부시도록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많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공격 때뿐만 아니라 어느 때나 확고하고 먼, 약간 신들린 듯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시선은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며 엄청난 것에 몰두해 있음을 뜻한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무얼 원하든 믿고 생각한다 - 자기들이 준비되어 있고, 쓸모 있다고, 그들에게서 미래가 형성되리라고, 그리고 세계가 점점 더 경직되어 세계와 영웅주의에, 명예와 다른 낡은 이상에 맞추어져 있는 듯 보일수록 그만큼 더 요원하게 그리고 그만큼 더 거짓말처럼 외면적인 인간성의 목소리 하나하나는 울렸다. 이 모든 것은 다만 표면이었다. 전쟁의 외적이고 정치적인 목적들에 대한 물음이 표면에 그치듯이. 깊은 곳에서는 무엇인가가 생성중에 있었다. 새로운 인간성 같은 무엇이.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으며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바로 내 곁에서 죽었다. 그들에게는 미움과 분노, 살육과 말살이 대상에 매어 있지 않다는 통찰이 느껴졌다. 아니다. 대상들은 목표들과 꼭 마찬가지로, 완전히 우연이었다. 원(原) 느낌, 가장 거친 느낌들도, 적에게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유혈의 위헙은 오로지 내면의, 그 자체 안에서 산산이 파열된 영혼의 발산이었다. 새로 태어날 수 있기 위하여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고, 죽으려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짓부수어져야 했다.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려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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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소중함을 알고 오늘, 지금, 여기의 나를 진하게 누리는 삶! 지혜로운 생활!

 

 

[본문발췌]

 

 

사는 건 경주를 벌이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내 인생을 사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한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는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봐야 알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할 일은 섣부른 판단이나 짐작은 미뤄두고 그때 자신과 충분히 마주하여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일인 것 같다. 선택했으면 열심히 해보는 일, 이 길이 아닌 것 같으면 다시 신중히 다른 것을 잡는 일, 그렇게 선택을 하며 사는 게 우리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 다녔고, 그만두었고, 이렇게 사는 지금, 나는 그냥 내 삶을 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사는 일에 성공이나 실패란 없다. 안 되는 일도 없다.

 

 

'나 때는 더했어'라는 말처럼 폭력적인 말이 없다. '다 그렇게 살아'라는 말처럼 바보 같은 말이 또 없다. - 말2

 

 

나는 곧잘 함정에 빠졌다. 아침에 한 시간 더 일찍 나와서 일해야지. 점심 간단하게 먹고 들어와 일해야지. 저녁 안 먹고 빨리 일해야지. 주말에 나와서 마저 일해야지. 일은 아침에 더 일찍 나와서 해도, 점심을 빵으로 때우고 해도, 저녁을 안 먹고 해도, 주말에 나와서 해도, 끝나지 않았다. 나를 약 올리듯 한 만큼 생겨났다. - 미스터리1

 

 

스스로 선택하여 부딪쳐보는 과정에서 무엇이라도 느끼고, 얻게 되어 있다. 높이 올라가거나 멀리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 깊어지거나 단단해진다고 믿는다. 넓어지거나 유연해질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한 뼘쯤은 성장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해보기도 전에 잘못될 걸 걱정하면 평생 무엇도 하지 못할걸. 지르면 어떻게든 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믿어봐도 좋고.

 

 

미래는 평생 오지 않는다. 언제나 오늘일 뿐이다. 돈 벌면, 나중에, 그때로 미뤄둔 일은 그러니까 평생 못 하는 것이다.

 

 

못하는 것을 평균까지 끌어올리기보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는 걸 택하겠다. 보기에 좋은 것 말고, 내 것을 하겠다.

 

 

대책을 세우는 것이면 모를까, 아직 오지 않은 상황에 대해 걱정만 해서는 달라질 게 없다. 말장난 같지만, 미래의 일을 지금 걱정해봤자인 것이다. 걱정이란 건 참 요망해서 하기 시작하면 꼬리를 물고 잔뜩 부풀어 오른다. 그런데 막상 들여다보면 속이 텅 빈 공갈빵처럼 실체가 없다. 걱정이 걱정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걱정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는 것이다. 겪어보면, 걱정했던 것보다 괜찮다.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다. 원하는 것을 위해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만 딱 그렇게 온다.

 

 

지속해오던 것을 그만둔다는 것은 쉼 없이 밀려들고 사라지는 날들 속에서 나를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 모른 척 어물쩍 넘어가거나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낸 사람이 그만둘 수 있다. 그만두는 것의 무게를 감당해보고 나면 선택 앞에서 한층 신중해지게 된다. 내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되어, 허투루 쓰고 싶지 않게 된다. 그렇게 그만둬본 사람이 비로소 진정으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날알 부여받는다.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는 나의 몫.

 

 

사는 것은 시합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제로섬 게임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서로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의 것을 하며, 저마다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자신이 하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낮추어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해나가나는 과정이니까 부족함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고유한 나의 것이 있고, 그것은 생각보다 꽤 괜찮으니, 조금은 더 자신감을 가지기를. 나부터 나를 믿고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기로 한다. 알고 보면 착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들여다보면 대단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나도, 당신도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대단해 보이기만 하는 사람도 겪어보면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 인생이나 작품의 하이라이트만 보는 것이니까. 몰라도 될 것을 너무 많이 접하고 산다. 이렇게라도 알 수 있어 고마운 정보도 있지만, 굳이 알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면서 괜히 속만 시끄러워지는 경우가 더 많다. 선별하여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을 가려내기 어렵다면 적게 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 많은 정보 속에서 허우적대느니 내게로 파고드는 것도 방법이다.

 

 

살아가면서, 나는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생각이 깊어지는 시기가 오기도 하고, 뭘 했다고 벌써 슬럼프인가 싶게 며칠이고 몇 주고 작업에 진척이 없어 답답해지는 날도 온다. 이럴 때 극복하려고 애를 쓰면 오히려 더 그 상황 속으로 빠져든다. 얼른 기운 차리라고 나를 채근할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차라리 탁, 놓아버리는 편이 낫다. 미루어둔 집안일을 하고, 보고 싶던 책이나 영화를 보고, 날씨가 좋으면 공원을 거닐고, 아니면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 못한 친구를 불러내어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나를 위해 근사한 한 끼를 차려 먹는 것도. 그러다 보면,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순간에 흘러와 있다. 한쪽으로 쏠렸던 마음이 균형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지럽던 감정과 생각이 정리되어 있기도 한다. 한 박자 지난 후에야 비로소 객관적인 상황이 보이고, 결국 별것 아니었다고 웃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아무튼, 거짓말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다.

 

 

하지 않은 것과 부족하더라도 한 것은 무와 유의 차이. 하고 나면 오해라도 할 게 생긴다. 온전히 담을 수는 없어도 무엇은 반드시 담기게 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가 100%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사랑을 나누는 이유일 것이다.

 

 

무엇을 하든 서두르지 않으려고 한다. 저마다의 효용을, 그것에 드는 시간과 품을 인정하려고 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하여, 하루라도 빨리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달리는 대신 몇 걸음 가지 않더라도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 집중하려고 한다. 내 호흡, 이 바람, 스쳐 지나가기 쉽지만 조금만 눈을 크게 뜨면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 멀리가는 것 대신 지금, 여기의 나를 진하게 누리려고 한다.

 

 

지금이 장차 무엇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이 완성이고, 전부이며, 내 인생인 것을.

 

 

나는 다시 배우고 있다. / 가는 시간 신경 쓰지 않고 지금에 녹아들어 사는 법을. /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쉬는 법을. / 좀 더디더라도 나를 기다리는 법을. / 나는 다시 깨닫고 있다. / 잘 자는 것과 잘 먹는 것처럼, / 좋아하는 사람과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 서툴고 부족할지라도 /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해나가는 오늘이 / 얼마나 행복한지를. / 그리고 이제야 안다. / 나는 굳이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 내 부족한 부분은 따뜻이 안아주고 / 사랑스러운 점은 힘껏 사랑하면서, / 그렇게 사는 것임을.

 

 

형편이 좋지 않아 진정 소망하던 건 잠시 유보하고, 취업준비를 할 수도 있다. 원하던 일은 아니지만,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긍지로 오늘을 견뎌낼 수도 있다. 몇 년 뒤 달라질 모습을 생각하며 지금의 힘듦을 버틸 수도 있고, 막상 일을 해보니 생각하던 것과 다른 데다 다른 무엇도 충족되지 않아 회사를 박차고 나올 수도 있다. 그렇게 해놓고서 홀로 서는 게 쉽지 않아 다시 채용 공고를 살필 수도 있다. 아니면 나처럼 당장 돈도 되지 않는 걸 하고 있거나 다른 이가 보기에는 '느슨하기만 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스스로 선택해서 꾸려나가는 삶이라면 이상할 것도, 안 될 것도, 잘못된 것도 없다. 자신의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잘 살고 있다. 오늘을 바꾸는 건 취업이나 퇴사, 이직이나 창업 같은 거창한 시도나 변화가 아니라 나와 내 삶에 대한 애정, 더 좋아지려는 마음가짐이다. 당장 처한 상황 전부를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반드시 있다. 어떤 식으로든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 계기는 스스로 만든다. 젊고 아름답고 건강한 날은 금방 가니까,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로 한다. 인생은 생각보다 기니까, 여유와 배짱을 좀 가지기로 한다. 사는 건 한번이니까, 내게 솔직해지기로 한다. 그렇게 살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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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속도와 양으로 텍스트를 쏟아내는 미디어 세상!

짧은 몇 단어, 몇 줄의 시[詩]에 호흡과 운율, 그리고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의미가 있다.

 

그 시가 노래가 되어 감동을 주기도 한다. 정호승 시인의 시를 안치환이 부르는 노래처럼.....

 

 

[본문발췌]

 

 

세월이 가면 ㆍ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혜화역 4번 출구 ㆍ 이상국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를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질투는 나의 힘 ㆍ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수선화에게 ㆍ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용기 ㆍ 요한 괴테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

맑은 물,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

이것만 있다면 낙심하지 마라.

 

 

 

도보순례 ㆍ 이문재

 

나 돌아갈 것이다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질 것이다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짐짓 무시할 것이다

 

나 돌아갈 것이다

무심했던 몸의 외곽으로 가

두 선 두 발에게

머리 조아릴 것이다

한없이 작아질 것이다

 

어둠을 어둡게 할 것이다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즉각 반응할 것이다

하나하나 맛을 구별하고

피부를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눈을 쉬게 할 것이다

 

이제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할 것이다

생활하기 위해 생존할 것이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 것이다

 

 

 

걸어보지 못한 길 ㆍ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 두 갈래길

나그네 한 몸으로

두 길 다 가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덤불 속 굽어든 길을

저 멀리 오래도록 바라보았네

 

그러다 다른 길을 택했네

두 길 모두 아름다웠지만

사람이 밟지 않은 길이 더 끌렸던 것일까

두 길 모두 사람의 흔적은

비슷해 보였지만

 

그래도 그날 아침에는 두 길 모두

아무도 밟지 않은 낙엽에 묻혀 있었네

나는 언젠가를 위해 하나의 길을 남겨 두기로 했어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법

되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

 

먼 훗날 나는 어디선가

한숨지으며 말하겠지

언젠가 숲에서 두 갈래 길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갔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게 달라졌다고

 

 

 

갈대 ㆍ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해답 ㆍ 거트루드 스타인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해답이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비망록 ㆍ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구부러진 길 ㆍ 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어쩌면 ㆍ 댄 조지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데려갈 거야

어쩌면 꽃들이 아름다움으로

너의 가슴을 채울지 몰라

어쩌면 희망이 너의 눈물을

영원히 닦아 없애 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묵이 너를 강하게 만들 거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ㆍ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 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먼 행성 ㆍ 오민석

 

벚꽃그늘 아래 누우니

꽃과 초저녁달과 먼 행성들이

참 다정히도 날 대려다본다

아무것도 없이 이 정거장에 내렸으나

그새 푸르도록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느냐

아픈 봄마저 거저 준 꽃들

연민을 가르쳐준 궁핍의 가시들

오지않음으로 기다림을 알게 해준 당신

봄이면 꽃이 피는 이유가 다 있을 것이다

잘린 체게바라의 손에서 지문을 채취하던

CIA 요원 홀리오 가르시아도

지금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그 거리에서 내가 던진 돌멩이는

지금쯤 어디로 날아가고 있을까

혁명의 연기가 벚꽃 자욱하게 지는 저녁에

나는 평안하다 미안하다

늦은 밤의 술 약속과

돌아와 써야할 편지들과

잊힌 무덤들 사이

아직 떠다니는 이쁜 물고기들

벚꽃 아래 누우니

꽃잎마다 그늘이고

그늘마다 상처다

다정한 세월이여

꽃 진 자리에 가서 벌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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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에서 주문한 1킬로 짜리 돌문어, 신선한데다 양파 넣고 삶으니 야들야들, 쫄깃한 식감이 최고!

장맛비 내리는 오후 냉동해 놨던 동죽과 밭에서 캔 감자, 호박 넣고 수제비 띄워 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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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블루베리, 복분자를 한 움쿰씩 따서 우물우물 입안가득 퍼지는 달콤새콤!

오이, 비트도 맛이 들어 상큼한 맛 가득? 수박, 오이, 토마토도 햇빛 먹고 자라고...

창고에는 수확한 마늘, 양파를 말려 저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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