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포털 뉴스를 가득 메우고 있는 키워드는 "검수완박", "검찰개혁"이다.

내용의 긍, 부정과 찬성, 반대를 살펴보면 부정과 반대가 압도적 다수로 보인다.

 

도대체 왜 검찰개혁과 검찰의 역할에서 수사권을 제외하는 것에 반대할까?

 

아무리 검찰개혁 반대의 이유를 포장하더라도 진실은

  1. 없는 죄도 만들 수 있고, 있는 죄도 그들 편에 서면 묻지 않을 수 있으며, 같은 죄라도 자신들의 권력유지와 기득권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에 따라 선택적 수사와 기소를 달리하거나 죄를 부풀릴 수 있는 권력을 놓을 수 없다.
  2. 검사 퇴직 후 전관 예우로 벌어 들일 수 있는 돈의 문제
  3.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잃어 자신들의 죄는 처벌하지 않는 제 식구 감싸기의 한계 봉착에 대한 두려움 

 

스스로가 검찰 권력의 기득권층이면서 자신들의 부패를 도려내지 못하며 반대하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개혁이란 것은 모두가 완벽할 수 없기에 진통이 따르고 문제점이 드러날 수 있으나 개혁이 시작되어야 그러한 문제도 보완될 수 있다.

 

검찰은 지금 주장하는 위헌이니, 범죄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 않아 사회질서 혼란이니 국민이 고통받는다는 둥 명분과 사실관계도 정확하지 않은 반대이유만 내세우지 말고, 앞서 말한 세 가지 근본적 이유에 대해 스스로 떳떳한지 자문해보시길 바란다.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주말 하루종일 공원입구 좌우로 벚꽃구경 온 차들이 길게 늘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설봉공원, 저녁에도 음악분수쇼와 벚꽃 구경온 사람들로 바글바글.

호수 근처보다 도자전시관과 박물관 뒷길은 한적하니 제대로 밤벚꽃이놀이를 즐길 수 있다.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모든 여행이 설레이지만, 자연과 함께하는 여행은 정신과 몸을 더 건강하게 만든다.


[본문발췌]

여행의 정형화는 여행의 자살이다. - 다치바나 다카시


여행은 유랑이다.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낯선 장소로의 떠돎이다. 날뛰는 마음 망둥이를 가이드 삼은 방랑이자 배회다.
이는 매우 품위 있고 자유로운 행위라서 조급하게 서두르거나 망설일 게 없는 활동이다.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 체호프


술은 첫물에 취하고 사람은 끝물에 취한다.


사람이 자생력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역시 자연이 아닐까요. 자연 속에서 오감을 발달시키고 본성을 바라보는 기회를 자주 가짐으로써 본연의 생명력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이죠. 자연에 내 몸을 합일시키기, 이게 살아갈 길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달팽이가 아니지만 누구나 저마다 존재라는 무거운 집을 등에 지고 산다.
편리성과 기능성만을 중시하는 도시의 물적 속성이 삶의 품위를 훼손한다고 읽는다.


내가 사는 여기가 지옥일 수도, 천국일 수도 있다는 건 은유가 아니라 바로 삶의 실상이다. 문제는 욕망의 조절이다.
진부한 욕망들에 눈멀어 감히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지 마라.


자연은 농부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창작인에게도 중요합니다. 자연이 불러일으키는 영감으로 창작하는 화가나, 자연 안에서 결실을 거두는 농부나 서로 다를 게 없는 것이죠. - 최용건 화백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91933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새로운 기회와 탐험은 우주 그리고 가상현실에서 벌어질텐데 블록체인, 메타버스, NFT는 가상현실이 구체화되고 일상에서 활용되는 기반이 될 것이다.

 

 

[본문발췌]

 


메타버스,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활동이 일어나는 초월 공간(현실이나 세계)'.
공간을 초월한 만남과 연결, 상호작용을 통해 현실과는 다른 사회적 관계, 경제적 기회를 얻는 초월 공간.

 


메타버스가 여타의 흐름과 가장 크게 구분되는 지점이 경제활동에 있다는 것입니다.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개인들 간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메타버스의 중요한 구성요소. 이것이 메타버스에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이유이다.

 

 

메타버스를 결정 짓는 7대 메가트렌드

  • 멀티 아바타Multi-Avatar
  • 확장 경제Extended Economy
  • 쌍방향Two-way interaction
  • 익명성Anonymity
  • 플레이 미션Play mission
  • 유사현실In similar life
  • 동시성At the same time

메타버스 내 익명성은 개인의 설명을 통해서 강화되고 약화됩니다. 남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가운데 자기 캐릭터를 구축하는 거지요. 그래서 메타버스에서는 판단하는 문화보다 설명하는 문화가 앞서게 됩니다. 자신을 구성하는 주요 요인이 자기 판단과 그에 따른 설명이라면, 자신을 인식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타인의 눈은 별로 기여하는 것이 없습니다. 타인의 판단은 보통 부정적이기 십상인데요. 이보다 더 부정적인 건 타인의 눈을 의식한 자기 인식이에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인데, 현실에서는 타인의 판단을 거부하거나 객관적으로 수용하기가 쉽지 않죠.

메타버스에서는 스스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메타버스 내에서는 자신을 설명하며 자신을 알게 되고, 자기를 성찰하며 자기애가 생기기도 합니다. 타인의 판단에 의존하기보다 직접 설명하기를 실천해보면 자아존중감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메타버스의 익명성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는 익명성으로, 자기 자신이 온전하게 홀로 존재하는 경험을 하게 합니다. 언제든지 단절을 택할 수 있지요. 선택적으로 익명성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익명성에 숨고 싶거나, 익명성 뒤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이 은근히 많거든요. 익명성은 메타버스에 많은 사람을 유입시키는 가장 중요한 매력이 될 수 있습니다.

 


"놀이의 형식적인 특성을 정리하자면, 의식적으로 '일반적인' 삶을 벗어나 행해지는, '심각하지 않은' 지속적인 자유활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플레이어를 강렬하고 완전하게 흡수하는 활동이다." - 요한 하위징아
  
놀이의 네 가지 요소 : 경쟁(agon), 모방(mimicry), 운(확률, alea), 현기증(ilinx)

 

 

생각이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일이죠. 하지만 쉽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는 공감합니다. 그 공감은 두 가지 근거에 기인하는데,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게으름입니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느끼고, 실패를 각오하고, 일단 빠르게 실천해보는 것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듣기 능력입니다. 흔히 '경청'이라고 하지요. 무작정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한 말의 주제, 맥락, 감추어진 속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잘 듣는다고 해서 문해 능력이 저절로 갖추어지는 게 아닙니다.

  • 문해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에서 핵심을 찾아내는 훈련을 늘 의식적으로 해야 합니다. 보통 발화 행위는 '설명적 말하기'와 '설득적 말하기'로 이루어지는데, 설명적 말하기는 정보를 전달하고, 설득하는 말하기는 주장을 전달하지요. 설명적 말하기는 핵심 정보가 있고, 나머지는 핵심 정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설득하는 말하기는 주장이 있고, 나머지는 그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이렇게 주장과 설명의 핵심을 먼저 잡고, 다른 말의 구성을 파악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 협오, 증오 발언 배척하기
  • 권위를 버리고 존중의 자세. 현실의 나이와 직업을 굳이 묻거나 궁금해하지 않는 태도를 가져야 진정으로 평등한 소통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부하 직원급이라고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상대방 말에 귀를 기울이는 방해가 됩니다.

 


룰을 따르는 사람이 아닌 룰을 만드는 사람

  • 기존 산업사회에서는 대규모 공장을 돌려야 하므로 규격화되고, 계량화된 작업의 프로세스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매뉴얼이죠. 모든 직무는 매뉴얼화되어 있고, 사람을 뽑을 때는 매뉴얼을 잘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래서 인재의 기준은 성실, 끈기 같은 것이었죠. 기존의 매뉴얼을 학습한 뒤에 그것을 잘 수행하는 사람이 필요했으니까요. 교육 역시 그런 인재를 양성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같은 나이 또래의 학생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똑같은 것을 배우며, 누가 더 잘 암기기했는지를 시험하는 방식으로요.
  • 메타버스가 현실과 다른 점은 돈, 경험, 연륜, 인맥 없이 혼자서도 얼마든지 창업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메타버스에서는 가게를 만들고, 물건을 확보하고, 상품을 보관하고, 인테리어하는 등의 돈이 들지 않습니다. 오로지 시간만 들어갑니다. 그 시간은 경험과 바꿀 수 있는 자산이니까 시간이 들어가는 것도 아깝지만은 않습니다.
  • 메타버스에서는 제약 없이 룰을 만들어가는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메타버스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상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한계 없는 상상력을 구현해야 승부수를 던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드는 창의적 능력은 소수의 예술가에게 허락된 능력입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또 메타버스에서 필요한 창의력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르게 활용하거나 융합하는 능력입니다.
  • 창의성은 전제를 깨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전제라는 것은 상식인데, 그건 고정관념, 편견, 사고의 한계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2021년의 현대인은 기술과 상황이 워낙 급변하는 '뷰카VUCA'(변동성Volatile,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의 앞글자를 모은 단어로 현대사회의 단면을 상징) 시대를 살고 있지요. '뷰카'는 너무나 빠른 최근의 경영환경을 묘사합니다. 메타버스에서는 하루아침에 무언가 세워졌다 사라지는 일이 반복될 수 있어요. 이런 환경 변화는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를 수 있습니다. 해보고 안 되면 수정하고, 다시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 거의 유일한 성공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메타버스 내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시작하셔야 합니다. 시작한다고 해서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 중에 시작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854146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시골살이에 대한 환상, 삶은 현실이다.

 

 

 
[본문발췌]

 

 
홀로서기 정신의 부족.
  • 부모에게 의존하고, 학력에 의존하고, 직장에 의존하고, 사회에 의존하고, 국가에 의존하고, 가정에 의존하고, 술에 의존하고, 경제적 번영의 시대에 의존하면서 이럭저럭 수십년을 살아온 삶. 홀로 설 기회를 그때마다 잃고, 그저 공부나 일을 하면서 겪은 혹독함 정도를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당신은 자신에게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또 도피해 온 것은 아닐까요.
  • 한 사람의 성인이 몸으로 익혀 두지 않으면 안 될 조건을 그저 지식으로만 머릿속에 채워 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 '인생 2막'은 전반생에서 얻지 못한 홀로서기 정신을 되찾기 위한 시련의 장으로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그래야만 되는 것이 아닐까요.
  • 만약 당신이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면서 살아왔다면, 그리고 홀로서기를 한 어른으로 60세를 맞이했다면, 이후의 인생 목적이나 삶의 보람 등을 마음에 명확하게 품고 있을 것입니다.
  • 새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생애에 걸쳐 추구하고 전력할 일이나 취미가 있어서 곧바로 그것들로 옮겨 갈 수 없다면 지금껏 헛되고 무의미하게 살아왔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생활 환경으로는 가혹하다는 의미입니다. 여행자가 아닌 도시에서 이주한 당신은 더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농민들이 오랜 시간 물 흐르듯이 척척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어릴 적부터 육체 노동으로 단련해 온 강인한 다리와 허리로 힘을 잘 배분해 전혀 무리를 하지 않는, 실로 효율적인 일머리를 몸에 익혔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야채를 길러 먹으려고 재미 삼아 괭이를 드는 수준이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60세가 넘어 처음으로 농사일을 시작해 보겠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입니다.
 
물론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법 등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야채를 기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처음에 각오했던 만큼 어렵지는 않습니다. 처음 수확한 야채를 식탁에 올렸을 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거의 느껴 본 적 없는 감동에 젖습니다. 농경민족으로서 본능이 깨어나 피가 꿈틀거리고 환희에 찰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감동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농작물의 이모저모를 얼추 이해하게 된 단계에서 순식간에 빛이 바랩니다.
 
우선 너무 많이 거둔 야채가 고민거리가 됩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수확해야 하는 일에 진절머리가 나고 말 것입니다. 소금에 절이고 된장찌개에 넣고 다른 것에 곁들여도 다 먹어 치울 수가 없습니다. 도시라면 가까운 이웃에게 나눠 줄 수라도 있을 텐데 주변이 죄다 농가이다 보니 아까워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먼 곳에 사는 친구나 아는 사람에게 떠넘겨 버리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운송비가 장난이 아니어서 이것 또한 좌절됩니다.
이왕이면 여러 야채를 먹고 싶다는 생각에 다양한 품종을 소량으로 기르기로 마음먹습니다. 실제로 해 보면 너무 힘듭니다. 야채마다 성질이 달라 기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의 양이며 잘 맞는 흙이며 일조량 등이 모두 달라 한 밭에서 기를 수가 없습니다.
간신히 출하 단계에 이르더라도 수입으로 연결하려는 생각은 꿈에도 해서는 안 됩니다. 야채의 형태를 띠었을 뿐 맛, 크기, 양 등에서는 시장이 요구하는 수준에 한참 못 미칩니다.
 
농촌의 인구가 왜 그렇게 줄어드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멋지게 생각하는 삶을 왜 젊은이들이 저버리고, 당신이 기피하는 도시로 떠나선 정년퇴직해서도 돌아오지 않을까요. 그것은 농사일이 고되고, 채산에는 맞지 않으며, 고령자의 체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완전히 초보자인 당신의 안이한 생각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쳐 있을 때 결단하지 마라.
오랜 세월을 거쳐 축적해 온 그 귀한 지식과 경험과 기술과 인간관계를 몽땅 하수구에 버리고 마는 식의 삶은 순수함과는 분명 다릅니다.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실로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석합니다.
시골로 거처를 옮겨 지치고 지친 심신을 충분히 쉬게 하고픈 마음은 압니다만 그런 피로야 반년쯤 쉬면 바로 사라집니다. 다시금 일하고픈 의욕이 솟구칩니다. 그때 당신이 아직 도시에 있다면 재기할 기회는 시골에 비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가장 지쳐 있을 시기에 중대한 결단을 내리는 일은 피해야만 합니다.
설사 급하게 시골로 이주했다 치더라도, 의지와 지혜만 있다면 도시인다운 발상으로 새로운 일을 개척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시골로 왔다고 해서 당신이 그 전까지 가졌던 전부를 버리고 무리를 해서까지 모든 것을 시골 상황에 맞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을 깨닫고, 퇴직 전에 하던 일을 혼자 그대로 꾸려 가는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좀 더 간접적이고 유연한 아이디어로 시골에 적합한 작은 사업을 벌여 궤도에 올린 똑똑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생 2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품격이란 어떠한 달콤함에도 어떠한 회초리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자신이 비록 틀렸더라도 권위나 권력에 아양을 떨지않는 의연함 그 자체입니다. 내 생각으로 판단하고, 혼자일지라도 행동할 때에는 행동한다는 독립된 한 인간에게만 적합한 말입니다.
 
 
 
시골 생활을 시작할 때 그 지역 주민들과 접촉하는 정도를 미리 정해 두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아주 중요한 문제에는 단호한 양자택일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긴밀히 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둘 중 하나만 있습니다. '적당히'와 같은 중간적이고 회색적인 답이 도시에서는 있을 수 있어도 시골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고 미움을 사는 편이 어울리고 나서 미움을 사는 편보다 원망이 훨씬 더 적다는 점입니다. 후자의 경우 일방적인 원한을 사고 말아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결국 그곳에서 생활할 수 없어 야반도주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로 내몰리기도 합니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지역 주민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인정받고 싶어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피하는 쪽이 좋습니다. 주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어떤 타협도 사양치 않겠다는 식의 비굴한 태도는, 양쪽이 대등해야 한다는 교제의 기본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구가 극히 적은 지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지 처음부터 확실한 목표를 세우는 일입니다. 확실한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가 시골 생활의 성패를 좌우할 것입니다.
유유자적하며 조용히 살고 싶다는 식의 추상적인 바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 하면 할수록 심오함이 느껴지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하루가 다 지나갔을 정도로 모든 것을 잊고 몰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도시에서 이주애 온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안심하고 어울릴 수 있을까요.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입니다.
시골로 온 무리에는 어딘가 수상쩍은, 사기꾼 비슷한 이가 섞여 있기 때문에 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골에서 살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생계가 막막한 사람, 빚 갚기가 힘들어 도망쳐 온 사람, 도시에서 신용을 잃어 대접을 못 받게 된 사람,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는 사람 등 아주 다양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연이 너무 좋아서. 자연 속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 지방의 토착 문화나 예술을 세계로 알리고 싶어서. ...
질문한 것도 아닌데 상대편에게 이런 이유를 늘어놓는다면 일단 그 사람은 상대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에서 뚜렷한 직업도 없이 말만으로 세상살이를 하려는, 그런 주제에 대의명분만은 찾고자 하는 교활한 철면피들입니다.
또한 마을을 일으키고 면을 부흥시키기 위해 지역 사회끼리 활발히 교류해야 한다고 거의 반강제적으로 부추기는 이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들은 이대로 두면 마을과 면이 소멸해 버린다고 위기감을 조장하며 광고 이미지 비슷한 꿈같은 제안을 합니다. 그러다 예산이 내려오거나 후원자가 생긴 시점에서 활동의 주도권을 잡아 쥐고는 너무나 그럴싸하게 행동하면서 반은 놀면서 먹고살아 가려고 합니다.
 
 
 
맑디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신선한 먹을거리에 둘러싸인 대자연 속에서 도시 생활에서 완전히 망가져 버린 건강을 되찾을 거야 하는 이기적은 바람을 간절히 품고 이주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분명 도시를 뒤덮고 있는 공기는 너무나 좋지 않고, 수돗물은 끓이더라도 마시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쉴 새 없이 들리는 소음과,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의 잦은 변화와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병에 걸리는 한 원인임은 전문가들도 모두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골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곧바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애써 환경을 바꾸더라도 생활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맑은 물도 공기도 고요함도 그저 잠시 위안을 주는 정도의 조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컨대 술과 담배, 폭음과 폭식, 밤샘 등을 완전히 그만두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담배와 비교하면 자도차 배기가스는 이렇다 할 독성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또한 매일 안 마시면 배기지 못하는 술을 끊지 않고서는 당신 몸은 나이보다 더 빨리 늙어 가고 말 것입니다. 원흉은 담배와 술에 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실컷 먹는다는, 동물적인 식사 태도도 큰 문제입니다.
 
 
 
자연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무엇보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홀로서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몸에 나쁜 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야생동물은 곧 죽음을 통해 사라질 운명에 있습니다. 다른 것들에 의지하려 하거나 주의를 게을리하자마자 소리도 없이 슬며시 몸이 파멸되기 시작합니다.
 
 
 
사회적 지위를 만족시켰는지 아닌지로 승리자와 패배자를 가르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진정한 패배자란 자신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거나 다스릴 방향을 잡지 못한 사람을 이를 때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지성과 이성에 부합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결코 그 반대는 아닙니다. 동물로 태어나 동물인 채로 일생을 보낸 인간이야말로 진짜 패배자입니다.
 
 
 
은퇴 전에 당신은 꿈꾸던 인생 2막에 대해 열심히 늘어놓았습니다. 우선 오붓하게 해외여행을 가자로 시작해서, 같은 취미 생활을 하고....
하지만 은퇴하자마자 당신은 마치 혼이 나가 버린 것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생각하는 일도 움직이는 일도 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자기만 하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중간 같은 성가신 존재로 변해 배우자를 하루 종일 압박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버린 것일까요.
일 자체나 대인관계에서 오는 긴장을 느낄 필요가 없어지고 시간에 구속당하지 않게 되어 마음이 완전히 풀어졌기 때문일까요. 분명히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원인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홀로서기를 한 성인 남성이 되지 못했고 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어린애의 혼을 가진 채 60년을 지내 왔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받아야만 움직이고 자신의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목각 인형, 타율적인 빈껍데기 인생밖에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당신은 다시금 어린애 시절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어른아이로.
 
 
 
겉만 보고 시골살이의 결단을 내린다. 그때 당신들의 눈길은 바로, 낯선 땅에서 좋은 부분에만 마음을 빼앗기며 지나가는 여행자의 시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행하는 사람과 정착해서 사는 사람의 입장은 크게 다릅니다. 요컨대 당신들은 인생에서 최대이자 최악의 충동구매를 하고 만 것입니다. 실패했을 때의 후회가 흔한 후회의 범위를 넘어서는 너무나 어리석은 짓을 한 것입니다.
당신의 시골 생활의 정점은 땅을 사고, 집을 짓고, 그 지역으로 이주했을 때입니다. 신축 기념, 이사 기념, 새 출발 기념을 하려고 도시에서 사귄 친구들을 초대해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연 날이 행복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들이 친구나 지인들의 시선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빠르면 수개월, 늦어도 몇 년 후에는 권태감과 고독감과 좌절감에 휩싸이는 처지가 될 것입니다. 낮에는 그다지도 눈부시던 광경이 해가 지기 무섭게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에 휩싸이고 맙니다. 어둠의 깊이에는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짐승에게 잡아먹히는 약한 동물로서의 방어 본능이 밤마다 살아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어느 사이에 도시 친구들도 들르지 않게 되고, 지역 주민들과 삶의 방식이 달라 지칠 대로 지쳐 갑니다. 자연에서 받는 감동은 점점 줄어들고, 자연이 주는 위협에 겁을 먹게 됩니다. 자연은 결코 이미지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절실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는 현실 그 자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시골에서는 내 일은 내 힘으로 한다는 강한 마음가짐과 체력이 필요합니다. 이주하고 나서 도시의 편리함과 비교하며 불평을 해 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스스로 해내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면 굳이 불편한 곳에서 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불편함이, 너무 편리한 도시 생활로 흐늘흐늘해진 당신 심신을 단련시켜 줍니다.
불편함이, 당신 뇌를 계속 지배해 온 싸구려 이미지를 말끔히 제거하고 가혹한 현실과 대치하는 묘미를 알게 해 줍니다.
불편함이, 당신 정신을 본래로 돌려줍니다.
불편함이, 당신 모습을 본래로 돌려줍니다.
이렇게 발상을 전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시골 생활을 단념하는 편이 좋습니다. 아무리 오기로 버텨 보려 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한 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만 빛납니다.
진정한 감동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살고자 하든 한결같이 진지하게 살고, 바깥 세계와(현실과) 대치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귀촌에 앞서 알아 두어야 할 것들
  • 어딜 가든 삶은 따라온다
  • 풍경이 아름답다는 건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다
  • 농부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 구급차 기다리다 숨 끊어진다
  • 고독은 시골에도 따라온다
  • 고요해서 더 시끄럽다
  • 돌잔치에 빠지면 찍힌다
  • 친해지지 말고 그냥 욕먹어라
  • 엎질러진 시골 생활은 되돌릴 수 없다
  • 시골에 간다고 곤강해지는 건 아니다
  • 불편함이 치유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458654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삶이 철학이다.


[본문발췌]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그순간부터 모든 사람은 탄생과 죽음, 사랑과 미움, 괴로움과 즐거움, 행복과 불행 등과 끊임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선과 악, 고귀함과 비천함, 성공과 실패, 고통과 즐거움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함께 따라다닙니다. 우리 삶 속에는 유쾌한 일도 고민스러운 일도 함께 있지요. 생활 속의 고민은 누구나 피할 수 없지만 가끔식 생기는 유쾌한 일들이 그런 고민을 잊게 해줍니다. 누군가 성공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줄곧 어른에게 의존하며 무슨 일만 있으면 어른들의 도움을 청했지요. 주변의 낯선 세계가 두려웠고 눈앞의 험난한 현실을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용기는 우리 인생의 필수품이랍니다. 평생 부모의 품에 누워 응석만 부릴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겠지요.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생물학적 생명의 탄생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불과해요. 사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사회학적 의미의 탄생과정을 거쳐야만 하지요.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 사람은 비로소 진정한 인생살이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풍부하고 복잡하며, 인생의 문제는 영원히 그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재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거나 불의한 재물을 위해 남을 다치게 하는 것은 행복에서 멀어지는 길이에요. 가장 큰 행복은 사회에서 칭송을 받을만한 일을 하거나 어떤 신념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고결한 행동에서 비롯된답니다.


행복이란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므로 사람이 백 명이라면 행복에 대한 백 가지 해답이 나오게 됩니다.


어떤 과학자의 행복의 조건.... (세 가지 조건 중 한 가지만 갖추고 있어도 사람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함)

  •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또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 진심으로 나에게 관심을 갖는 친구가 있는가?
  •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행복이란 개념은 너무나 모호해서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작 아무도 알지 못한다. - 칸트


포기를 배우고 행복을 얻었구먼.... - 소크라테스


자연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인생의 확실한 이상이었어요. 절제와 인내, 관용만 있다면 우리는 사람의 모든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들의 삶을 통해 자연주의적 행복관을 구현해냈어요. 자신의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용서는 모든 미움을 몰아내고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니까요...
아우렐리우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남겼어요.
아침에 일어나 자신에게 말하라. 오늘 내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을 만나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든 또한 오만한 사람이나 남을 속이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이나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만난다 해도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그들이 그런 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힘을 합쳐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적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재물과 명예, 향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장 큰 행복의 상징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 세 가지 조건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통 감각기관의 쾌락을 얻었을 때 스스로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점점 그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쾌락을 얻은 뒤에는 종종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또한 명예나 재물은 많이 얻을수록 욕망도 강렬해져 더 많은 명예와 재물을 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희망이 물거품이 되면 느끼게되는 절망은 말로 할 수 없으며 큰 근심도 잇따라 따라오게 되지요. 이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끝도 없는 고통에 빠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감각기관의 쾌락이 아니라 마음의 평온을 추구한답니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일 것입니다. 일단 재물과 명예, 권력같은 것을 포기하면 인간의 욕망도 단순해지고 인간의 생활 역시 평온해지게 마련이랍니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치 않은 요구를 줄이고 스스로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행복의 정의지요.




자유는 구속받지 않는 것일까?

밀은 '개인의 자유와 개성발전'의 의의를 인생의 목적이나 행복이며, 동시에 사회진보와 인류발전의 척도라고 주장했었요. 한 사회가 어느 정도 진보했는가는 얼마나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촉진하는가를 보고 판단하면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어디에서든 속박 가운데 존재한다." - 루소


자유는 인류가 가진 독특한 정신활동이자 인류와 다른 생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생물도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아요. 그들은 본능에 따라 생활하며 완벽하게 자연의 규율에 복종합니다. 오직 사람만이 자유롭게 생각하며 자유의 왕국을 이상으로 삼는답니다.


모든 자유에는 조건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유는 종종 상대적인 개념이랍니다. 하늘을 나는 매에게 공기가 없다면 과연 날 수 있을까요? 물속에서 자유로운 물고기지만 만약 물이 없다거나 물에 심각한 오염이 생긴다 해도 여전히 즐겁게 유유자적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조건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사회적 질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전제의 자유입니다.


자유는 완벽하게 자신의 일이며, 자아의 선택에는 어떤 기준도 없답니다. 자유는 행동을 의미하고, 이런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절망과 고통을 통해 자유를 경험하고, 진정한 고통은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지요. 사람은 자유가 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는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모든 일은 알 수 없는 동시에 또한 가능한 것이기에 과거나 현재, 미래와 대면했을 때 인간은 일종의 막연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유를 회피하기도 합니다. ... 흔히 말하는 절대자유란 이런 사실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선택에는 대가가 뒤따르기 마련이에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지요.




인간은 왜 고통을 받을까?

쇼펜하우어는 늘 인생은 고통과 불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런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인간의 생존의지에 있었지요. 이런 생존의지는 사람에게 있는 맹목적인 충동과 끝없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런 충동과 욕망이 생명의 본질인 고통을 결정해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며, 그도 안 된다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대개 이루어지기 어렵고, 사람은 더욱 강하게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지요. 인간의 충동과 욕망은 끝이 없어요. 하나의 욕망이 만족되면, 바로 다른 욕망이 생겨나지요. 만족은 잠시뿐 욕망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랫동안 행복할 수 없어요. 모든 만족은 또 다른 욕망의 출발점일뿐이지요.


현대 사회는 라디오, 영화, TV, 신문, 광고 등의 선진화된 전파수단을 이용해 사람들의 사유방식을 통제하며, 인간의 판단력을 잃게 만들었지요. 덕분에 사람들은 이런 매체의 조종과 제어를 받는 신세가 되었어요. 인간은 가짜가 되었고 기계가 되었으며, 영원히 순종하며 사는 자아를 가지게 되었지요.


문명이 인류의 존재와 발전을 오히려 위협한 것이에요. 물질이 풍부해질수록 오히려 정신은 빈곤하게 됐지요.


현대인은 깊은 고독과 억압, 근심에 시달리게 됐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려고 애완동물을 키우기 시작했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는 그 유효기간이 갈수록 짧아졌어요. 사람들은 쉽게 사람을 만났다가 쉽게 헤어지게 됐답니다. 그들은 남들과 쉽게 친해졌다가 또 쉽게 잊어버리게 됐어요. 인간관계의 변화 속도 역시 갈수록 빨라지고 있는 셈이지요. ...
현대인들은 풍부한 물질생활뿐만 아니라 충실하고 건전한 정신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해요. 정치와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방면에서 인도주의적인 개혁이 실현될 때 진정으로 건전한 사회도 수립될 수 있어요. 현대인이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더욱 풍부한 창조성을 가지려면 인도주의적인 사회시스템과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해요. 이런 사회 속에서라야 사람들은 서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 줄 수 있답니다.




사람에게는 왜 신앙이 필요할까?

현대문명은 인류에게 풍부한 물질적 성과를 안겨주지만, 동시에 수많은 정신적 불안도 가져다주었어요. 바로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이 신앙이며, 정신적으로 의지할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신앙은 우리 인생길의 항구가 되어줍니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사람은 정신을 추구한다는 사실이에요. 현실의 생활 속에서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날 때, 삶과 죽음의 모순이 발생할 때, 영원한 것과 찰나의 것 사이에 모순이 넘쳐날 때, 우리가 스스로 이런 모순과 충돌들을 깊이 생각해볼 때,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를 궁금해 할 때 그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신앙에 있다고 해요.




인간은 원래 사회적 동물일까?

자연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인간보다 사회화의 생명개체로서의 인간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어요. 사람의 모든 활동은 사회적 범위 안에서 전개되는 것이기에 사회성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듯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물이라면, 무엇보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되겠지요.


사람은 사회 속에서 자라고, 사회생활은 언제나 이런 성장 과정을 동반하지요. 그러나 사회는 절대로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며, 하나하나 살아있는 사람으로 구성된 조직이에요. 무수한 개체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 전체도 존재할 수 없어요. 개체의 주관적인 노력을 떠나서는 사회 역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답니다. 즉, 사회의 힘은 모든 사람 하나하나의 피와 땀이 어린 활동의 결과인 셈이지요.


개인이 사회를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 역시 개인을 떠날 수 없답니다. 개인은 사회 조직의 가장 기본적인 입자니까요. 이런 입자를 떠난다면 사회도 사라지고 말테지요. 결국 사람과 사회는 서로 의존하고, 영향을 주며, 작용하는 관계에요. 다시 말해 사회를 떠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며, 개인을 떠난 사회는 사회가 아닌 것이지요.


자아 의식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자아 의식의 성숙과 생명의 사회화는 동일한 과정임을 알 수 있어요. 자아 의식은 사회의 영향에 크게 좌우되며, 사람은 사회의 기준에 맞춰 자신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생존의 이상에 따라 자신을 발전시키려 해요. 반면 사회화는 우리가 개성을 얻을 수 있는 전제가 되기에 사회가 없으면 자아도 있을 수 없어요. 사회는 자아의 형성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자아가 없으면 사회도 있을 수 없답니다. 한 사회의 발전은 본래 많은 사람들의 힘이 발휘된 결과니까요. 그러므로 사람의 자아의식과 사회의 존재는 함께 가는 것이에요. 인생이란 여행길에서 자아를 의식하고, 사회를 인식할 때 우리는 더 나은 발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요.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은 모두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고귀한 잠재력을 한껏 드러낸 사람들에요. 그들은 자아 의식의 기초 위에서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장애를 극복하고, 이미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끝까지 노력해요.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의 본질적인 특징은 사람의 잠재력과 창조력을 극한으로 발휘한다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자아 실현의 기술과 기교를 습득했다면 우리는 스스로 운명의 설계자이자 생활의 강자가 될 수 있을 것이에요.




죽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자기 자신의 일일 뿐이며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도 없어요. 사람이 죽음을 이해하게 되면 스스로 사람들과 구별되어 자기 존재의 의미, 즉 고독의 존재를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일은 죽음뿐이다. 청춘의 소년, 소녀에게나 병약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나, 부자에게나 거리의 거지에게나, 대통령에게나 일반 백성에게나 죽음은 맑은 하늘에 날아든 검은 구름처럼 불현듯 찾아옵니다.


'살찐 국왕이나 비쩍 마른 거지나 구더기의 식탁 위 두 가지 식사에 불과하거늘. 국왕은 죽었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구더기에 먹혀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겠지. 거지는 다시 그 구더기를 잡아다 낚시를 할 테고, 잡은 물고기는 다시 거지의 뱃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결국 국왕은 거지의 뱃속으로 마지막 행차를 하는 것이 아닌가. 죽음 앞에서 누군들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 대체 생명의 의미란 무엇인가?',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 햄릿


삶은 아름답지만 우리는 반드시 죽음과 대면해야 해요. 이는 매우 잔인한 일이에요. 죽음은 우리 삶에 대해 걱정하게 해요. 물론 이런 걱정은 우리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게 하지요. 이런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인류는 항상 생명의 의의에 대해 연구해야 해요. 인생은 마치 쏘아놓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요. 어쩌면 이런 인생의 유한성과 급박함 때문에 인류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갈구하며, 현실의 생활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됐는지도 몰라요.
모든 사람에게 삶은 한 번 뿐이며 뒤늦게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어떻게 자신의 삶에 충실할 것인가? 이는 모두가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예요. 그렇지 못할 경우 이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고 말테니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철학을 연구하는 것을 죽음의 연습이라고 보았어요. 독일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는 죽음을 향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실존철학을 체계적으로 전개한 또 다른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음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인간은 넓은 우주 속에서 기(氣)의 운동이 변화하는 것으로 스스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해요. 더욱이 어느 한 곳에서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런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에요. 삶은 그 삶에 순응하고, 죽음은 그 죽음에 순응하는 것이지요.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해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으며,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에요. 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극단인 것이에요.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람과 시간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요. 사람은 시간 속에 살고, 시간은 인간 존재의 조건이 됩니다. 인생을 일컬어 '세상에 산다.'라고 하는 것은 '인생이 시간 속에 있다.'는 뜻이지만 죽음은 엄밀히 말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명이 '끝'나는 것에 불과해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육체는 다른 형식으로 변화하기 때문이지요.


죽음이란 어찌 보면 하나의 가능성일 뿐 현실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죽음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일이니까요. 일단 죽음이 현실이 된다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을 것인지는 모두 불명확합니다. 일상적인 경험으로 판단하자면 우리는 모두 죽지만, 언제 죽을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요.


사람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진정한 존재의 고독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의 생명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으며 스스로 대신해야 하는 것이랍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있을 때 가장 두려워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죽음의 신과 마주하게 되면, 명예와 지위, 재물과 같은 세상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이란 말로 이 깨달음의 상태를 설명했어요.


사람이 본질적인 모습은 바로 인생의 유한성과 독특성이에요. 우리 생명의 시작과 끝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만 짧은 생명이란 과정 속에서 여전히 우리가 힘을 발휘할 공간은 남아 있어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랍니다.


죽음을 수양하는 것은 곧 생명을 수양하기 위함이에요. 또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생명을 이해하기 위함이에요. 죽음에 맞서는 것은 우리 생활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기 위함이지요. 사람에게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생명을 더 귀중하게 여길 수 있어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815932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여행에 필요한 것.
그 자체로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기는 것, 수용성, 자유로움, 설레임!


[본문발췌]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철학적 문제들, 즉 실용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사고를 요구하는 쟁점들이 제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귀중한 요소들은 현실보다는 예술과 기대속에서 더 쉽게 경험하게 된다.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들을 잘라내고, 우리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이렇게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미지 않고도 삶에 생동감과 일관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보푸라기로 가득한 현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한다는 점에서 기대와 흡사하다.
현재를 긴 영화에 비유한다면, 기억과 기대는 거기에서 핵심으로 꼽힐 만한 장면들을 선택한다.


나는 데제셍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했다. 그러나 나 역시 그냥 집에 눌러 앉아 얇은 종이로 만든 브리티시 항공 비행 시간표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여행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낀 적이 몇 번 있었다.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 장치 앞에서 아프고 싶어 하며, 또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보들레르는 부끄러움 없이 자기도 그런 환자들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했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않는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해야 할 일이 오직 생각뿐일 때에 정신은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생각도 쉬워진다.


우리가 여행 과정에 부여하는 가치, 목적지와 관계없는 방랑에 부여하는 가치는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주장하듯이, 약 200년 전에 이루어진 감수성의 폭넓은 변화와 관련이 있다. 이 변화를 통해 이방인은 내부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8세기 말부터는 공동체의 관행이 아니라 방랑자가 되는 것에서 동료 의식이 생긴다. 따라서 자연과 공동체의 매개는 일반적인 사회의 엄격함, 냉혹한 금욕, 이기적인 편안함이 아니라 본질적인 고립과 침묵과 외로움에 맡겨지게 된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 <시골과 도시>
우리가 휴게소와 모텔에서 시를 발견한다면, 공항이나 열차에 끌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건축학적인 불완전함과 불편에도 불구하고, 그 야한 색깔과 피로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립된 장소에서는 이미 터가 잡힌 일반적인 세상의 이기적인 편안함이나 습관이나 제약과는 다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국적이라는 말을 좀 더 일시적이고 사소한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외국에서 만나는 장소의 매력은 새로움과 변화라는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고향에는 말이 있을 만한 곳에 낙타가 있다거나, 고향에는 기둥을 세운 아파트 건물이 있을 만한 곳에 장식이 없는 아파트 건물이 있다거. 그러나 좀 더 심오한 기쁨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외국의 요소들이 새롭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나 신조에 좀 더 충실하게 들어맞기 때문에 귀중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고향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현대성이 미학적 단순성의 결여, 도시적 삶에 대한 저항, 그물 커튼을 걸어두는 심리에 대한 불만.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홈볼트의 호기심의 수준이 나의 수준보다 한참 높았던 것은 사실을 찾아 나선 여행자는 구경을 하려는 목적을 가진 여행자에 비해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쓸모가 있다. 쓸모에는 (그것을 인정하는) 청중이 따른다.


내가 알게 된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보다는 나에게 개인적인 유익을 준다는 점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했다. 나의 발견은 나에게 생기를 주어야 했다. 그 발견들이 어떤 면에서는 '삶을 고양한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했다.
'삶을 고양한다'는 표현은 원래 니체가 사용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73년 가을에 탐험가나 학자처럼 사실을 수집하는 일과 내적이고 심리적인 풍요를 목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이용하는 일을 구별했다. 대학 교수는 예외적인 일이었지만, 니체는 앞의 행동을 모욕하고 뒤의 행동을 찬양했다. 그는 진정한 과제는 '삶'을 고양하기 위해 사실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괴테의 문장을 인용했다.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훔볼트의 흥분은 세상을 향해 올바른 질문을 가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언해준다.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파리를 보았을 때 약이 올라 파리채를 휘두를 수도 있고 산을 달려 내려가 <식물 지리론>을 쓰기 시작할 수도 있다.
여행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물을 볼 때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며, 질문이 없으므로 흥분도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은 질문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뭔가가 떠오를 때는, 엉뚱한 것이 떠오르는 경향이 있다.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 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자연은 도시의 삶으로 인한 심리적 피해를 치료하는 불가결한 약' - 워즈워스


워즈워스는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바람직하고 선한 모든 것"을 얻게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은 "올바른 이성의 이미지"로서 도시 생활에서 나타나는 비꼬인 충동들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워즈워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그 이전에 우리의 정체성에는 다소간 순응성이 있다는 원칙, 즉 우리가 함께 있는 사람-때로는 사물-에 따라 변한다는 원칙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반면,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경쟁심이 생기고 질투가 일어난다.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조지프 에디슨은 <상상력의 기쁨에 관한 에세이>라는 글에서 "광활하게 트인 시골, 개발되지 않은 넓은 사막, 첩첩이 늘어선 거대한 산맥, 높은 바위와 절벽과 넓은 물" 앞에서 "기쁨을 주는 고요한 놀라움"을 느낀다고 썼다. 힐테브란트 제이컵은 <숭고에 의해 정신이 고양되는 방식>이라는 글에서 우리가 이 귀중한 감정을 느낄 가능성이 높은 장소와 물건들의 목록을 나열했다. 잔잔하거나 폭풍우가 치는 넓은 바다, 석양, 절벽, 동굴, 스위스의 산맥.


하느님은 착하게 살았는데도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느냐는 욥의 질문을 받자 욥의 눈길을 자연의 엄청난 현상으로 돌린다. 하느님은 말한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놀라지 마라. 우주는 너보다 더 크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놀라지 마라. 너는 우주의 논리를 헤아릴 수 없다. 산 옆에 있으면 네가 얼마나 작은지 보아라. 너보다 큰 것,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세상이 너한테는 비논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다. 숭고한 곳들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하찮음과 연약함을 생각하도록 하라.


인간의 삶도 똑같이 압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은 아마 자연의 광대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드는 사건들, 필연적으로 우리를 먼지로 돌려보낼 그 크로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을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관객으로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가 어떤 장소를 규정할 만한 특징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우리는 그 풍경을 여행할 때 그 위대한 화가가 그곳에서 본 것을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니체가 알고 있었듯이, 현실 자체는 무한하며 예술로는 결코 모두 나타낼 수가 없다.


사실 예술 단독으로 열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또 예술은 예술가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정서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단지 열광에 기여를 하고, 우리가 이전에는 모호하게만 또는 성급하게만 경험한 감정들을 좀 더 의식하도록 안내할 뿐이다.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존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이르렀다.

  1.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2.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3.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를 포함하여).
  4.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5.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하여 쓰거나 그림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데생이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연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것을 우리 손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슨하게 관찰하는 데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되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좀 더 확고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한군데 가만히 앉아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린다고 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튼튼해지거나, 행복해지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사람에게는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적극적이며 의식적으로 보기 위한 보조 장치로 사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풍경의 진정한 소유는 그 요소들을 살피고 그 구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에 달려 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이 기억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


무엇을 그릴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전에 내가 카메라를 잡는 동기가 되었던 욕구, 즉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의 안내를 받는 것이 합당할 것 같았다. 러스킨의 말을 빌리면, "당신의 예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 그것은 조개껍질이나 돌멩이에 대한 찬양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림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득은 어떤 풍경이나 건물에 이끌리는 이유를 의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우리의 취향에 대한 설명을 얻게 되며, '미학', 즉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는 능력도 생기게 된다. 감명 깊은 장면을 좀 더 빠르게 분석하여, 감동을 주는 힘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집어낼 수 있다.


존 러스킨,
두 사람이 산책을 나간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스케치를 잘하는 사람이고, 또 한사람은 그런 데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녹색 길을 따라 걸어간다. 이 두 사람이 지각하는 경치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은 길과 나무를 볼 것이다. 그는 나무가 녹색임을 지각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태양이 빛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반면 스케치를 하는 사람은 무엇을 볼까? 그의 눈은 아름다움의 원인을 찾고, 예쁜 것의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궤뚫어 보는 데 익숙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햇빛이 소나기처럼 잘게 나뉘어 머리 위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잎들 사이로 흩어지고, 마침내 공기가 에메랄드빛으로 가득 차는 모습을 관찰한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가지들이 잎들의 베일을 헤치고 나오는 모습을 볼 것이다. 보석처럼 빛나는 에메랄드색 이끼와 하얀색과 파란색, 자주색과 빨간색으로 얼룩덜룩한 환상적인 지의류가 부드럽게 하나로 섞여 아름다운 옷 한벌을 이루는 것을 볼 것이다. 이어 동굴처럼 속이 빈 줄기와 뱀처럼 똬리를 틀고 가파른 둑을 움켜쥐고 있는 뒤틀린 뿌리들이 나타난다. 잔디가 덮인 비탈에는 수많은 색깔의 꽃들이 상감 세공처럼 새겨져 있다.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스케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녹색 길을 통과하여 집에 돌아왔을 때 할 말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다. 그저 이러저러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왔을 뿐이다.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의 작품은 심오하고 의미심장한 통찰로부터 출발했다.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게 된다.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거의 매일 이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이 길을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나의 목표에 도움을 주는 정보만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보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민감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얼굴과 표정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건물의 모양이나 가게 안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동안 거리를 나의 관심의 틀에 맞추어놓고 살아왔다. 이 틀에는 금발의 아이들이나 소스 광고, 보도에 깔린 돌이나 가게 진열장의 색깔, 일 보러 다니는 사람들 또는 연금 생활자들의 표정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따. 일차적 목표가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공원을 구경하거나 단일한 블록 안에 뒤섞여 있는 조지 시대, 빅토리아 시대, 에드워드 시대의 건축물들에 대해 생각해볼 마음이 나지 않았다 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 연상적인 사고, 경이감이나 고마움, 시각적 요소에 의해 촉발되는 철학적 일탈은 잘려나갔다.


여러가지 불평들의 공통점들 - 늘 이기심이 문제고, 늘 맹목성이 문제다 - 을 생각해보았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우리에게 불평한다는 오래된 심리학적 진리.


혼자 연행을 하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함께 가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다듬기 때문이다.


니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 하찮고 일상적인 경험 - 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 - 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 - 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의에 코르크처럼 까닥 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85027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고뇌, 괴로워하고 번뇌하다.

결국 괴로운 생각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인간의 조건이라고?

 

부처도 고뇌속에 고뇌를 떨쳐버림으로 깨우침을 얻었다고 하지 않는가. 고뇌를 벗어나야 자유로운데 고뇌가 인간의 본질이고 조건이라면 인간의 삶은 불행한 것이 아닌가?

 
 

[본문발췌]

 
 
모든 인간은 자기가 겪는 그 고뇌를 닮는 것이죠.
 
고통이란 그것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법이야. 그런데 대개 고통은 죽음으로 끝나거든.
그렇군요. 하지만 그것은 아마 남자들의 생각이겠죠. 나로서는, 말하자면 한 여자로서는 고통이란 - 좀 이상하지만 - 죽음보다는 삶을 생각하게 하거든요. 아마 여자는 애를 낳기 때문이지.
 
남의 소리는 귀로 듣고, 자기 소리는 목구멍으로 듣는다. 그렇다. 자기 생명도 목구멍으로 듣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의 생명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는 고독이 있다. 고독은 무수한 인간들의 배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마치 희망과 증오로 충만된 활량한 도시를 뒤덮고 있는 이 깊은 밤의 배후에 커다란 원시의 밤이 존재하듯이...
 
인간의 극도로 긴장된 모습은 어딘가 비인간적인 인상을 준다. 그건 우리들이 우리들의 약점을 통해서만 서로 쉽게 접촉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본질은 고뇌이고, 자기 자신의 숙명에 대한 인식이며, 거기서 모든 공포가 생긴다는 거야. 죽음의 공포까지도.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 속에서 공포를 발견하는 거야. 그것은 자기 마음속을 좀 깊숙이 살펴보면 알 수 있어. 다행히 사람은 행동할 수 있거든.
 
남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의 고뇌를 희생하며 남의 입장을 인정하는 일이야.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 알았어.
 
노동자는 어디까지나 노동자입니다. 죽지 않는 한 말이지요 인간이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어떤 사상을 위해서 버린다는 것은 인류의 독특한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인간이, 글쎄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견디어낸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겠지요.
인간이 이해타산을 초월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는 모든 사상은 이 조건의 바탕을 막연하나마 인간의 존엄 위에 놓고, 그 올바름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이를테면 옛날의 노예에게는 그리스도교가, 시민에게는 국가가, 그리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코뮤니즘이 그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줄곧 중독되어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아편이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나라에는 마약이 있고, 서양에는 여자가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경우는 아마도 연애가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인지도 모르겠군요.
 
인간은 아마도 권력에 무관심한지도 모르지요. 권력이라는 생각이 인간을 매혹하는 것은, 말하자면 현실의 권력이 아니라 권력 덕분에 이것저것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입니다. 왕좌의 권력은 다스리는 데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보통 인간에게는 다스린다는 욕망은 없어요. 그야말로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강제하고 싶어합니다. 인간 세계에서 인간 이상의 것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죠.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 권력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해지려고 말입니다. 이 가공의 병은 - 권력에의 의지는 지적인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 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되기를 꿈꾸고 있으니까요.
신은 소유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정복하는 힘은 갖고 있지 않아요. 신의 이상은 자기 힘을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의 꿈은 자기의 인격을 잃지 않고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력에 의지라기보다도 조직에의 의지다.
 
그의 권력에의 의지는 결코 그 목적에 도달하는 일 없이 부단히 그 목적물을 새롭게 바꿔나가야만 살아 있었던 것이다.
 
문명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고뇌에 찬 요소 - 이를테면 노예에 있어서의 굴욕이나 현대 노동자에 있어서의 노동 따위 - 가 별안간 하나의 가치가 되었을 때, 즉 이 굴욕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에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또 이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생존 이유를 찾는 것이 문제가 될 때, 문명의 본질은 변한다. 여태껏 무덤으로 가득 찬 일종의 교회에 지나지 않았던 공장은 지난날의 대성당 같은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인간은 그곳에서 여러 신 대신 대지와 싸우고 있는 인간의 힘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확실히 인간의 가치는 자기 힘으로 변화시킨 것에 의해서만 측정되는 것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인생을 속일 수 있어. 하지만 결국에는 인생이 언제나 우리들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지. 모든 늙은이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셈이야. 그렇지 않니? 많은 노후가 공허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허하다는 것이지. 사람들은 그것을 숨기고 있을 뿐이야. 하기야 그런 일도 별로 대단할 건 없지만. 인간은 현실이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있는 것은 관조의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할 거야.
 
고뇌에 근거를 두지 않은 인간의 존엄이란 없으니까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6885576

반응형

'4.읽고쓰기(reading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우화 - 류콴홍  (0) 2022.03.19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0) 2022.03.12
파수꾼 - 하퍼 리  (0) 2022.02.26
둔황 - 이노우에 야스시  (0) 2022.02.20
여유, 만족 그리고 느림의 미학  (0) 2022.02.15
Posted by 소요유+
,
혼탁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물의 본질과 주변 환경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보고 스스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본문 발췌]

 
"이 나라에 대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 언젠가는 정부가 괴물 같아져서 가장 힘이 약한 사람은 짓밟힐 거란 거야, 그러면 이 나라에서 살 가치가 없어질테지. 이 지겨운 세상에서 아직 미국을 독보적인 곳으로 만드는 유일한 것은 누구든 생각이 허락하는 한 어디에든 이를 수 있고 또 원한다면 지옥에라도 갈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인간의 탄생은 대단히 불쾌해. 번잡하고 극도로 고통스러워, 때로는 위험할 정도야. 언제나 피를 흘리지. 문명도 그와 마찬가지야"
 
"나는 단지 네가 사람의 행동 이면에 있는 동기를 봤으면 하는 것뿐이야. 표면적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무언가의 일부로 보일 수도 있어도 그 사람의 동기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판단하지 마. 속으로는 피가 끓을지언정 분노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온건한 대응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아는 거지. 적을 비난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을 잘 알고 있는 게 더 현명한 거야"
 
우리가 옳은 일을 하려다가 조직의 편제에 정말로 위험한 그 무엇에 길을 터주게 되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해. 그게 어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말이다.
 
제퍼슨은 정식 시민의 신분은 각자가 획득해야 하는 특권이지 가벼이 주어지거나 가벼이 취급되어서는 안 될 무엇이라고 믿었단다. 제퍼슨이 보는 바로는,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로 투표권이 허락될 수는 없었어. 제퍼슨에게 투표는 공존공영의 경제 체제에서 각자가 스스로 획득하는 소중한 특권이었단다.
 
각자의 섬은 말이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
너는 너만의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어딘가에서 그 양심을 따개비처럼 네 아버지에게 붙여놓았던 거야. 자라나면서, 또 어른이 되고도, 너 자신도 전혀 모르게 너는 네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혼동하고 있었던 거야. 인간의 심장을 가진, 인간의 결점을 가진 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지. 그것을 깨닫는 게 쉽지 않았으리란 것은 내가 인정한다. 형은 실수를 범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하지만 형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실수를 하기는 해 너는 정서적 불구자였어,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항상 네 답이 곧 아버지의 답일 거라 가정하고 답을 구해 왔지.

어제 또는 10년 전을 돌이켜 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는 언제나 쉬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는 광장히 어렵지.
 
친구에게 네가 필요할 때는 친구가 틀렸을 때란다. 친구가 옳을 때는 네가 필요 없지.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9220377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
 
[본문발췌]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의 삶을 새삼 확인하면서도 이를 비관적으로 응시하거나 격앙된 슬픔의 감정을 토로하는 대신, 덧없는 인간의 존재를 무한한 애정으로 포용하려는 차분하고 절제된 시각을 획득하는 것이다. 웅대한 자연의 질서와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인간이란 극히 제한된 시간을 할애받은 초라한 존재에 불과하며, 그들이 영위하는 삶은 결국 고독하고 허무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 인식...
 
진사시험 당일 뜻하지 않은 실수로 의외의 인생행로를 걷게 되는 조행덕...
저돌적이고 용맹한 성격의 소유자인 주왕례와의 만남으로 인해 서하의 한족 부대에 참가하게 되며, 그와의 인간적 교류는 문인으로서의 삶에 익숙했던 행덕의 가치관을 근저에서 변화시키는 한편, 마지막까지 그의 삶의 버팀목으로 작용한다.
위구르 왕족 여인과의 만남과 죽음을 통해 행덕은 인간의 운명적 요소에 대한 응시를 거쳐, 불교와 같은 종교가 지향하는 어떤 영원한 것에 대한 구도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행덕에게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고, 또한 그들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인간의 무력함과 생명의 무의미함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종교가 흥미로웠다.'
 
'재물과 목숨, 권력은 한결같이 그것을 소유하는 자의 것이었으나, 경전은 달랐다. 경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불에 타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무도 경전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었다. 타지 않고 지금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역사의 유구한 흐름에 비하면 인간의 삶의 영위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영원한 것을 인간이 노력을 통해 후대에 남기고 전달하려 할 때, 아무리 비정한 역사라 해도 이를 외면하지 않는 법이다.
 
나라가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은 종교와 민족, 그리고 역사의 결연한 흐름 속에서 시대의 추이와 인간들의 삶을 묵묵히 응시해온 위대하고 유구한 자연이라는 엄연한 진리를 새삼 자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둔황>을 비롯한 그의 역사소설의 참된 가치는 항상 인간과 역사의 관계를 인식하고, 역사의 흐름에 좌우되는 인간의 운명을 묘사하면서도 단순히 역사 속의 인간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을 유유히 흐르고 지탱하는 고독한 '시간'의 의미를 공간적으로 도려내어 응시하는 가운데, 고독과 허무, 방랑으로 채색된 인간의 삶과 죽음의 근원적 의미를 제시하는 점에 찾아야 할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6355896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