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찾아오는 제비, 올해는 허물어진 집을 재시공해 다섯마리 새끼를 부화하더니, 어느덧 다 자라 강남 가기위한 비행 연습이 한창이다.









매년 찾아오는 제비, 올해는 허물어진 집을 재시공해 다섯마리 새끼를 부화하더니, 어느덧 다 자라 강남 가기위한 비행 연습이 한창이다.
자연에서 평등하고 소중한 존재이지만 인간의 욕망은 차별과 억압을 만든다.
[본문발췌]
라일라는 인간이 직면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일 중에서 기다리는 일만큼 힘든 게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것들은 책에서 배우지. 그러나 직접 보고 느껴야 하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으리... - 사이브에타브리지 <카불> 중에서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3311332
시간 (0) | 2022.07.20 |
---|---|
답답한 권력 다툼과 정치 보복 (0) | 2022.07.08 |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0) | 2022.05.30 |
남쪽으로 튀어 - 오쿠다 히데오 (0) | 2022.05.23 |
'96년 진천의 겨울 추억 (1) | 2022.05.10 |
봄 멸치회무침과 보리숭어 (0) | 2023.03.29 |
---|---|
여름 밴댕이, 병어회 (0) | 2022.07.16 |
제주의 늦봄, 자리돔이 한창이다 (0) | 2022.06.07 |
동죽조개 3종 세트 (0) | 2022.05.16 |
매생이 제철입니다. (0) | 2022.01.15 |
제주에 가면 오름을 찾아 가벼운 산책을 한다.
예전에 김영갑 갤러리에 들렀다 찾은 다랑쉬, 용눈이 오름...
석양이 아름답던 군산오름...
분화구 안 숲의 아름다움을 추천받고 찾았던 앞오름(아부오름)....
이번 5월말 제주 여행에서는 예약과 일정상 번번히 실패했던 거문오름의 자연을 만끽하고,
초등학교시절 동생들과 김밥싸서 소풍가던 사라봉, 고등학교 점심시간 노닐던 별도봉 추억 산책!
흐린 날씨로 일몰과 석양의 아름다움은 못봤지만 차귀도 배경의 아름다운 바다전망을 보며 수월봉 드라이브로 오름과 바닷가 전망 작은 봉우리를 올랐다.
[사라봉, 별도봉]
[거문오름]
[수월봉 가는길]
온천, 해송길, 죽림을 거닐면 생각나는 교토, 간사이 여행 (1) | 2022.08.06 |
---|---|
고창 고인돌유적지 & 운곡습지 (0) | 2022.07.24 |
한라산 선작지왓 분홍 꽃바다 (1) | 2022.06.07 |
가을, 설봉공원! (0) | 2021.11.05 |
이천 설봉호수 음악 분수쇼 (1) | 2021.10.15 |
여름 밴댕이, 병어회 (0) | 2022.07.16 |
---|---|
제주의 국물 요리 - 고사리육개장 (0) | 2022.06.20 |
동죽조개 3종 세트 (0) | 2022.05.16 |
매생이 제철입니다. (0) | 2022.01.15 |
여름 전어와 전복 (0) | 2021.08.14 |
고창 고인돌유적지 & 운곡습지 (0) | 2022.07.24 |
---|---|
거문오름, 사라봉/별도봉/수월봉 산책 (0) | 2022.06.12 |
가을, 설봉공원! (0) | 2021.11.05 |
이천 설봉호수 음악 분수쇼 (1) | 2021.10.15 |
이천 원적산 둘레길, 설봉산 산책 (0) | 2021.10.11 |
능력지상주의, 자유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성공과 빠른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특정 계층에 권력과 자본이 집중되어 양극화와 사회갈등을 조장할 수 밖에 없다. 부자이거나 빛나는 자리에 안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 회복이 필요하지 않을까?
[본문발췌]
능력주의 신화는 대체로 세 가지 명제로 이루어진다.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
능력주의 논쟁은 구원을 논의할 때 다시 기독교에 등장한다. 신앙이 독실한 사람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신이 각자의 생활 태도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첫 번째가 정당해 보인다. 권선징악의 틀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며 따라서 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신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하게 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우리가 자유로운 능력의 소유자이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공도 실패도 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능력주의의 일면일 뿐이다. '성공한 사람은 그럴 만해서 성공했다'는 신념이 공통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다. 이러한 승리주의적 측면으로부터 승자들 사이의 오만, 패자들 사이의 굴욕이 나온다. 이는 세속 사회에 남아 있는 섭리론의 도덕적 어휘를 반영한다.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보았다. "이를 넘어서, 그는 자신이 그런 행운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납득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럴 만하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그는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문화역사학자인 잭슨 리어스는 미국의 공공 문화를 운의 윤리의식과, 보다 강력한 자수성가의 윤리의식이 벌이는 불공평한 각축장으로 보았다. 운의 윤리는 인간의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을 중시한다. 세상이 반드시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음과 같은 <전도서>의 내용은 이런 윤리의식을 잘 표현한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았다.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라고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라고 음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명철한 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기능을 갖춘 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이는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로다."
부와 건강을 상과 벌의 문제로 보는 관점은 능력주의적 생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운이나 은총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우리 운명을 책임진다고 여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가 취한 선택과 삶의 태도에 대한 상 또는 벌인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수성가와 자기 통제의 윤리를 확고히 찬양하며,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질 길을 열어준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허리케인이든 쓰나미든 나쁜 건강이든 희생자들이 겪는 재난을 자업자득이라 여기고 희생자들을 업신여기게 된다.
"도덕 세계의 궤적은 길다. 그러나 반드시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 - 마틴 루터 킹(시어도어 파커 목사의 셜교 참조)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의 실패도 순전히 그들 탓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는 능력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논리로 기능한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세계화 시대는 노동계급에게 큰 폭의 불평등 확대를, 또한 임금의 정체를 안겨주었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0퍼센트는 대부분의 이익을 챙겼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진보적, 자유주의적 정당들은 이 불평등을 직접 다루지 않았고,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외면했다. 대신 그들은 시장 주도적 세계화를 받아들였으며, '기회의 평등을 늘리기 위한' 정책을 통해 불평등한 혜택을 조장했다. 그것이 사회적 상승 담론의 포인트였다. 성공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성공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이는 소득 사다리의 단 사이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서로 먼저 사다리에 오르려 경쟁하는 과정에서만 공정함을 추구할 뿐이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생산물이나 기여는 항상 그 가격으로 가치가 측정된다. 윤리적 가치나 인간 생활에서의 중요성 등과는 별 관계가 없다. 어떤 생산물의 금전적 가치는 '수요'에 따르며, 이는 다시 소비자 대중의 취향과 구매력, 그리고 대체재의 유무 등에 따른다. 이 모든 요인들은 대체로 경제 시스템 자체가 작동되면서 창출, 조절된다. 따라서 그 결과는 자체적으로 그 시스템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만한 윤리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 프랭크 나이트
비록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모두 능력을 정의의 제일조건으로 배제하고 있지만, 둘 다 결국에는 능력주의로 기운다. 둘 다 성공에 대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를 거르지 않으며, 능력주의가 빠지기 쉬운 함정 즉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이라는 함정을 피하지 못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개인 책임을 분해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재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이 개인의 천부적 재능은 행운의 산물이며 따라서 도덕적 관점에서 자의적이라고 주장하기는 해도, 재능 특히 천부적이거나 내재적인 재능을 놀랍도록 중시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능력주의는 지성과 교육을 고등교육의 상아탑에 온통 몰아넣어 두고서, 누구에게나 그 상아탑에 들어올 공평한 경쟁이 보장되리라고만 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접근권 배분은 노동의 존엄을 떨어뜨리며 공동선을 오염시킨다. 시민교육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될 수 있다. 항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그는 우리가 선별과 분투의 도가니에서 한 발 물러나 그냥 지긋이 도마뱀을 바라보기를, 그 동물이 얼마나 신비한 존재인지를 충분히 보고 즐기기를 원했을 것이다.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그래서 세계화가 일으킨 불평등이 왜 그토록 강력한 분노로 이어졌는지 설명된다. 세계화에 뒤쳐진 사람들은 다른 이들은 번영하는 동안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달았다. 사회의 눈에, 그리고 아마 스스로의 눈으로도 그들의 일은 더 이상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라고 비쳐지지 않는다.
양극화는 심화되고, 다수의 노동자들이 무시당하고 외면당한다고 여기고 있어 사회적 응집과 연대의 원천이 절망적으로 필요한 지금, 일의 존엄에 대한 보다 견실한 생각이 주류 정치 논의로 파고 들어야 하리라 본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조짐은 없다. 왜 그럴까? 왜 주된 정치 어젠다는 정의의 기여적 측면을 거부하며, 그 기반이 되는 생산자 중심적 윤리를 외면하는 것일까?해답은 단지 우리가 소비를 너무 사랑한다는 데 있을지 모른다. 또한 '경제성장이 최고'라는 믿음 역시 한몫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더 깊은 곳에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약속하는 물질적 혜택을 넘어 경제성장을 공공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까닭은 우리 사회처럼 갈등이 많은 다원적 사회에 매력적이라서다. 이는 골치 아픈 도덕 논쟁을 우회할 빌미가 된다.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에 대한 견해는 제각각이다. 잘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 일치가 안 된다. 소비자로서 각자의 기호와 욕망은 다르다. 이러한 차이 앞에서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한다는 것은 경제 정책의 가치중립적인 목표로 여겨진다. 소비자 복지가 목표라면 각자 다양한 선호에도 불구하고 많은 편이 적은 편보다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 과실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충돌은 당연히 일어난다. 따라서 분배 정의에 대한 논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경제 파이를 키우는 게 작아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 여겨진다.이와 달리 기여적 정의는 인간의 좋은 삶이나 최선의 인생 방식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미국 공화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헤겔에서 카톨릭 사회교육에 이르기까지 기여적 정의의 이론은 '우리는 공동선에 기여할 때만 완전한 사람이 되며, 우리가 한 기여로부터 우리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 전통에 따르면 근본적인 인간욕구는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일의 존엄성은 그런 필요에 부응하는 우리 역량의 발휘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면 소비를 '모든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대상'이라 보는 것은 잘못이다.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트리며, 시민 생활을 황량하게 만든다.
급여를 생각해 보면, 이런 저런 직업들이 각자의 일 성과에 대해 참된 사회적 가치를 어떤 때는 과대하게 어떤 때는 과소하게 평가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직 열렬한 자유지상주의자만이 부유한 카지노 왕의 사회적 기여가 소아과 의사의 기여보다 정말로 1000배나 가치 있다고 떳떳이 주장할 수 있으리라. 시장 사회에서는 우리가 버는 돈과 우리가 공동선에 기여한 내용의 가치를 혼동하기 쉽다. 시장 주도적 사회에서 물질적 성공을 도덕적 자격의 증표로 해석하는 일은 지속성 있는 유혹이다.
오렌 카스, <한때, 그리고 미래의 노동자> 카스는 미국에서 노동의 존엄을 일신하려면 공화당이 자유시장에 대한 전통적 선호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의 법인세를 줄이고 자유무역을 진흥하여 GDP를 끌어올릴 생각하지 말고, 노동자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기에 충분한 급여를 받는 일자리를 찾도록 돕는 데 공화당이 중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경제성장보다 좋은 사회를 중시하는 방식이라고 카스는 주장했다. 카스의 캐별 제안들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따지기에 앞서, 그의 프로젝트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우리의 주 관심을 'GDP 극대화'에서 '일의 존엄과 사회적 응집에 친화적인 노동 시장 조성'으로 옮기도록 한다는 점이다.
지난 40년 동안, 시장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힘을 합쳐서 이런 도덕적 유대관계를 뜯어내 버렸다. 그들이 뿌려 놓은 글로벌 보급 체인, 자본의 흐름,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체성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 주장에 덜 호응하게 되도록 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한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안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성공할 기회는 거시적으로 본 실질적 평등을 대체할 수 없다. 소득과 사회적 조건의 극심한 불평등을 없는 것처럼 만들어버릴 수도 없다. 사회적 복지는 응집과 연대에 달려 있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일반 문화, 그리고 강력한 공동 이해관계 의식의 존재를 내포한다. 개인의 행복은 각자가 자유롭게 새로운 안락과 명성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존엄과 문화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함도 요구한다. 후자는 반드시 출세할 것을 요하지 않는다.' - R. H. Tawney, <평등Equality>
'아메리칸 드림. 미국이라는 땅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더 낫고, 더 부유하고, 더 온전한 삶을 살아갈 기회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역량이나 성취에 따라 주어진다. 그것은 단지 자동차나 높은 급여에 대한 꿈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그리고 태생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질서의 꿈이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민주주의가 그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상징이다. 일반 열람실을 보면, 물어볼 필요조차 없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1만권이나 비치되어 있다. 자리마다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노인도 젊은이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흑인도 백인도, 경영자도 노동자도, 장군도 사병도, 저명한 학자도 학생도 한 데 섞여 있다. 모두가 그들이 가진 민주주의가 마련한 그들 소유의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 이 장면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확실한 사례다. 사람들 스스로가 쌓은 자원으로 마련된 수단, 그리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대중 지성. 이 예가 우리 국민 생활의 모든 부문에 그대로 실현된다면 아메리칸 드림은 살아 있는 현실이 되리라.' - 제임스 애덤스, <미국의 서사시The Epic of America>
우리는 오늘날 조건의 평등을 별로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계층, 인종, 민족, 신앙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은 얼마 없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40년 동안 시장 주도적 세계화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가져오면서 우리는 제각각의 생활 방식을 갖게 되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하루 종일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 우리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살고 일하며 쇼핑하고 논다. 우리 아이들은 각기 다른 학교에 다닌다. 그리고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가 일을 마치면,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그 성공의 대가를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도 다 자업자득이라고 여긴다. 이는 정치에 매우 유해하며 당파주의가 하도 팽배하여 이제 사람들은 신앙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껄끄럽게 보게 되었다. 우리가 중요한 공적 문제에 대해 서로 합리적으로 토론하거나 심지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처음에 매우 고무적인 주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믿으면 신의 은총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 말이다. 이런 생각의 세속판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유쾌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하면 된다'라는 약속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의 비전은 공동의 민주적 프로젝트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서 눈을 돌리도록 했다. 우리가 7장에서 본 공동선의 두 가지 개념을 되새겨 보자. 하나는 소비주의적인 공동선, 다른 하나는 시민적 공동선이다. 공동선이 단지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면, 조건의 평등은 고려할 게 못된다. 민주주의가 단지 다른 수단에 의한 경제일 뿐이라면, 각 개인의 이해관계와 선호의 총합 차원의 문제라면, 그 운명은 시민의 도덕적 연대와는 무관할 것이다. 소비자주의적 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가 활기찬 공동의 삶을 영위하든, 우리와 같은 사람끼리만 모여 각자의 소굴에서 사적인 삶을 살든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역자후기]
능력주의는 '사람 위에 사람'을 두는 체제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들 순위가 정해진 게임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좋다는 대학교의 가장 좋다는 학과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평생을 두고 크든 작든 패배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 국민의 절대 다수를 패배자로 만드는 체제가 효율적일 리도, 정의로울 리도 없다. 누군가는 의사를 하고 누군가는 펀드매니저를 하고 누군가는 초등학교 교사를, 누군가는 환경미화원을 해야 하는 사회가 정상일진대, 샌델이 몇번이고 강조하듯 모든 사람의 직업이 각각의 물적, 심리적 가치를 인정받고 긍지를 얻을 수 있어야만 행복하고 조화로운 사회일 것이다. "물론 내 연봉은 당신보다 적지만, 나는 당신과 비교해서 하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지 않아요"라고 누구나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사회 말이다.
능력주의 폐단은 능력주의가 '생각하지 않는 백성'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완벽한 사회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누군가를 부당하게 괴롭히지 않는 사회, 각자의 개성과 꿈이 세상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는 말이 불편한 지혜가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 방법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894345
답답한 권력 다툼과 정치 보복 (0) | 2022.07.08 |
---|---|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0) | 2022.06.27 |
남쪽으로 튀어 - 오쿠다 히데오 (0) | 2022.05.23 |
'96년 진천의 겨울 추억 (1) | 2022.05.10 |
그림의 힘 - 김선현 (0) | 2022.05.04 |
반권력, 반자본주의 통제에서 벗어나 단독으로 행동하며, 자급자족의 슬로라이프를 추구하는 삶!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원작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가 있는데, 일본에서 만든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고 한국에서 만든 영화는 드라마적 재미와 연기가 더 낫다는 개인적 평가.
[본문발췌]
이 나라에 태어나면 무조건 선택의 여지도 없이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가 생기다니,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뭔가를 억지로 해야 한다는 건 지배를 받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야. 사람은 지배당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오?
내 이상향은 자급자족의 생활이야. 어느 누구에게도 착취당하지 않고 우리 가족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거야.
학교에서 너희 머릿속에 주입하는건 체제에 적당히 써먹을 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최면술 같은 것이야. 어떤 시대에나 학교는 일종의 교정 시설이었어. 예전에는 나라를 위해 죽어서 돌아오라고 가르쳤지. 요즘은 일을 많이 해서 세금을 많이 내라고 가르쳐.
인류의 불행은, 충분히 가졌음에도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어.
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인간이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자신이 안전할 때뿐이다.
상식에서 벗어난다는 건 어딘가 유쾌한 일이었다.
이별은 쓸쓸한 것이 아니다. 서로 만나 함께 어울리다가 와 닿게 된 결승점이다.
인간이란 모두 전설을 원하지. 그런 전설을 믿으며 꿈을 꿔보는 거야.
학교는 국가가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정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방해도 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표 나지 않게 처리해나가는 건 인간관계의 지혜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게 인간의 본질인가 봐.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하지만 너는 아버지 따라할 거 없어. 그냥 네 생각대로 살아가면 돼. 아버지 뱃속에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벌레가 있어서 그게 날뛰기 시작하면 비위짱이 틀어져서 내가 나가 아니게 돼. 한마디로 바보야, 바보.
어느 누구에게도 지배받으려 하지 않고 혼자 국가에서 튀어나와 살아가겠다니, 그건 너무 자기 멋대로인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국가가 정의라고도 할 수 없었다. 튀어나갈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배자의 생각이었다.
경찰과 기업에 창끝을 들이댄 사람을 통쾌하다며 재미있어 하면서도, 그것을 막상 내 일처럼 생각해줄 사람은 없다. 텔레비전을 지켜본 어른들은 단 한 번도 싸운 일이 없고 앞으로도 싸울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항하고 투쟁하는 사람을 안전한 장소에서 구경하고 그럴싸한 얼굴로 논평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냉소를 던지리라.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제외한 대다수의 어른들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작고 작아. 이 사회는 새로운 역사도 만들지 않고 사람을 구원해주지도 않아. 정의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야. 사회란 건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위안해줄 뿐이야.
지로, 전에도 말했지만 아버지를 따라하지 마라. 아버지는 약간 극단적이거든. 하지만 비겁한 어른은 되지 마. 제 이익으로만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라고.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
아마도 자기만 이익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들 친절한 것 같아.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법률도 무기도 필요 없다고 생각해. 이것은 유치한 이상론인지도 모르지만, 여기 섬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감이 들어. 만일 지구상에 이런 섬만 있다면 전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아버지는 다시 밭을 갈고 있을까.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까. 건장한 몸집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런 생활이 더 어울린다. 인류는 돈을 지닌 시대보다 지니지 못했던 시대가 훨씬 더 길었다. 그러한 인류 끄트머리의 기억이 아버지에게만 진하게 남은 것이다.
아버지 좋을 대로 해도 괜찮아. 지로는 바다를 향해 중얼거렸다. 함께 사는 것만이 가족이 아니니까.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496916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0) | 2022.06.27 |
---|---|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0) | 2022.05.30 |
'96년 진천의 겨울 추억 (1) | 2022.05.10 |
그림의 힘 - 김선현 (0) | 2022.05.04 |
검찰 개혁의 필요성 (군검사 도베르만의 대사 패러디) (0) | 2022.04.28 |
봄의 중반을 넘어 여름으로 넘어가기 전, 서해안 갯벌에는 동죽 조개가 한창으로 동죽 뿐 아니라 백합, 바지락 등 조개류가 제대로 살이 올라 실한 계절이다.
고창 심원면 갯벌에서 캔 동죽을 사다 깨끗이 씻고 같이 길어온 바닷물로 하루에 걸쳐 2~3번 해감을 해야 깨끗한 식재료가 완성된다.
동죽을 삶아, 밭에서 캔 돌미나리를 넣고 동죽돌미나리무침은 그대로 먹어도 좋고, 밥에 비벼 동죽무침비빔밥으로도 그만이다.
동죽과 부추를 넣고 부쳐낸 동죽 부침개는 막걸리 안주로, 부추를 송송 썰어넣은 동죽탕은 시원하게 해장에 좋다.
제주의 국물 요리 - 고사리육개장 (0) | 2022.06.20 |
---|---|
제주의 늦봄, 자리돔이 한창이다 (0) | 2022.06.07 |
매생이 제철입니다. (0) | 2022.01.15 |
여름 전어와 전복 (0) | 2021.08.14 |
보리숭어, 간재미무침! (1) | 2021.05.05 |
징검다리 연휴를 시골에서 지내다 일요일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고속도로 길막힘이 심해 국도로 우회하던 중 진천을 지나게 되었다. 점심 시간이라 진천 맛집이라는 막국수집을 검색해 들른 진천읍내!
'96년 인터넷 겨울캠프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2개월여를 지내고, 22년만에 들른 진천, 흘러간 시절만큼 곳곳에 아파트도 들어서고 동네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인터넷이 한창 보급되던 시절, 초중고부터 대학생, 일반인 기수까지 2박3일 합숙 캠프에 참여해 인터넷 사용과 활용법을 배우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5G 스마트폰을 통해 빠르고 쉽게 인터넷에 접속해 정보를 얻고 일처리를 바로 할 수 있고, 블록체인과 메타버스를 경험하는 시대를 살며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자료를 검색하고, 듣고 싶은 음악을 찾아 들어보는 등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합숙캠프까지 열었다는 오래된 이야기, 추억과 함께 진천을 스쳐간다.
강의면접까지 거쳐 선발된 대부분 대학생, 대학원생들로 이루어진 강사들은 캠프에서 2달여 동안 함께 숙식하며 지냈는데, 중간에 잠깐씩 휴식시간에 청주시내로 같이 놀러도 다니고 저녁에는 눈속에 파 묻어 놓은 맥주를 마시며 동고동락 했었는데, 지금은 이름 기억나지 않고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19961204/7212693/1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0) | 2022.05.30 |
---|---|
남쪽으로 튀어 - 오쿠다 히데오 (0) | 2022.05.23 |
그림의 힘 - 김선현 (0) | 2022.05.04 |
검찰 개혁의 필요성 (군검사 도베르만의 대사 패러디) (0) | 2022.04.28 |
남탓, 혐오 바이러스 (0) | 2022.04.25 |